통근 5방면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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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통근 5방면 작전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과 도시 집중으로 심화된 도쿄 근교 노선의 '통근 지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국유철도(국철)가 추진한 대규모 수송력 증강 계획이다. 1965년부터 1971년까지 진행된 이 작전은 도카이도 본선, 요코스카 선, 주오 본선, 다카사키 선, 도호쿠 선, 조반 선, 소부 선 등 5개 주요 노선을 복복선화하여 수송 능력을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총 6,787억 엔(1980년 기준 1조 3,472억 엔)의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었으며, SM분리, 화물선 여객선 전환, 지하철 연계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작전을 통해 수도권 주요 노선의 혼잡률을 감소시키고 통근 환경을 개선하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고금리 차관 사용으로 국철의 재정 악화를 심화시키고, 수도권 외 지역의 통근 환경 개선에는 소홀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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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근 5방면 작전 | |
---|---|
개요 | |
명칭 | 통근 5방면 작전 |
일본어 명칭 | 쓰킨 고호멘 사쿠센 (通勤五方面作戦) |
로마자 표기 | Tsūkin Gohōmen Sakusen |
시작 시기 | 1964년 |
종료 시기 | 1980년대 초 |
목적 | 수도권 통근 혼잡 완화 |
주요 내용 | |
핵심 전략 | 도심 방향으로 향하는 5개 주요 노선의 수송력 증강 |
대상 노선 | 도카이도 본선 주오 본선 소부 본선 도호쿠 본선 조반 선 |
주요 사업 | 복선화 전철화 열차 증편 직결 운행 |
배경 | |
사회적 배경 | 전후 일본의 급격한 경제 성장 수도권으로의 인구 집중 통근 혼잡 심화 |
기술적 배경 | 전철 기술 발전 수송력 증강 가능성 증대 |
효과 및 영향 | |
긍정적 효과 | 통근 혼잡 완화 수도권 철도망 확장 연선 지역 개발 촉진 |
부정적 효과 | 건설 비용 증가 일부 지역의 소외 |
참고 문헌 |
2. 배경 및 계획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은 고도 경제 성장과 도시 집중으로 인해, 도쿄 근교 노선의 통근 시간대 혼잡은 '통근 지옥'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1960년 주요 노선의 혼잡률은 다음과 같았다.[29]
이에 일본국철은 구형 국전과 객차 열차를 신성능 전차(101계, 113계 등)로 교체하고 열차 편수를 늘렸지만, 혼잡 해소에는 선로 추가를 동반한 근본적인 수송력 강화가 필수적이었다. 1960년대 감사보고서에서도 이 문제가 지속적으로 지적되었다.
일본국철 노선도를 보면 도쿄 도심으로의 수송은 도카이도 본선, 요코스카 선, 주오 본선, 다카사키 선, 도호쿠 본선, 조반선, 소부 본선이 담당하고 있었다. 이 5개 노선을 복복선화하는 등 수송력을 획기적으로 증강하는 계획이 바로 '통근 5방면 작전'이다.
운전 업무 담당자들 역시 계속 증가하는 수송 인원으로 인해 5방면 작전의 조기 완수를 강력히 요청했다. 미카와시마 사고와 쓰루미 사고는 과밀한 운행 스케줄이 피해를 키운 대표적인 사례로, 쓰루미 사고 직후인 1963년 11월에는 총재가 직접 선로 증설 촉진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3][4]
5방면 작전은 1965년부터 1971년까지 추진된 일본국철 제3차 장기 계획의 핵심 사업이었다. 그러나 1965년 당시 예상으로는 5개 노선 모두 선로를 증설해도 인구 집중으로 인해 혼잡률을 크게 낮추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았다.
1972년 3월을 목표로 한 혼잡률 예상치는 다음과 같았다.[5]
노선 | 현재 (1965년) | 공사 시행 시 | 공사 미시행 시 |
---|---|---|---|
주오 쾌속선 | 284% | 270% | 370% |
주오 완행선[6] | 208% | 180% | 270% |
소부 본선 | 312% | 239% | 445% |
게이힌 도호쿠 선 (남행) | 282% | 192% | 357% |
야마노테 선 (외선 순환) | 272% | 171% | 326% |
난부 선[7] | 284% | 257% | 461% |
요코스카 선 | 264% | 200% | 486% |
도카이도 본선 | 171% | 207% | 367% |
이처럼 소극적인 목표치는 소고 신지 총재 이전까지 일본국철이 통근 투자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소고 신지의 뒤를 이은 이시다 레이스케 총재는 5방면 작전 계획을 지시했지만, 이전에는 통근 투자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이었다. 그는 통근 투자를 "떨어지는 불똥은 털어버려야 한다"라고 표현했지만, 이는 수요를 따라가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2. 1. 사회경제적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은 고도 경제 성장을 겪으며 농촌에서 도시로 인구가 대거 유입되었다. 특히 도쿄권의 인구 밀도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일본국철의 수도권 통근 노선은 '통근 지옥'이라 불릴 정도로 극심한 혼잡을 겪게 되었다.1960년 기준 주요 노선의 혼잡률은 다음과 같았다.
노선명 | 혼잡률 |
---|---|
소부 본선 | 312% |
도호쿠 본선 | 307% |
주오 쾌속선 | 279% |
조반선 | 247% |
이러한 극심한 혼잡은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 미카와시마 사고, 쓰루미 사고와 같은 철도 사고의 원인이 되어 안전 문제와 사회적 불만을 야기했다.[3][4]
이에 일본국철은 72계와 같은 구형 국전과 객차를 101계, 113계 등의 신성능 전차로 교체하고 열차 운행 횟수를 늘려 혼잡 완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구 증가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선로 추가를 포함한 근본적인 수송력 강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1965년, 일본국철은 제3차 장기 계획의 일환으로 통근 5방면 작전을 추진했다. 이 계획의 목표는 주요 통근 노선의 수송력을 증강하여 혼잡률을 완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예상으로는 5개 노선의 선로를 추가해도 인구 집중으로 인해 혼잡률을 크게 낮추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았다.
1972년 3월을 목표로 한 혼잡률 예상치는 다음과 같았다.[5]
노선 | 현재 (1965년) | 공사 시행 시 | 공사 미시행 시 |
---|---|---|---|
주오 쾌속선 | 284% | 270% | 370% |
주오 완행선[6] | 208% | 180% | 270% |
소부선 | 312% | 239% | 445% |
게이힌 도호쿠선 (남행) | 282% | 192% | 357% |
야마노테 선 (외선 순환) | 272% | 171% | 326% |
난부 선[7] | 284% | 257% | 461% |
요코스카 선 | 264% | 200% | 486% |
도카이도선 | 171% | 207% | 367% |
이처럼 소극적인 대처는 소고 신지 일본국철 총재 이전까지 통근 투자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뒤를 이은 이시다 레이스케 총재는 통근 5방면 작전 계획을 지시했지만, 이전에는 통근 투자에 소극적인 입장이었다. 그는 "떨어지는 불똥은 털어버려야 한다"는 비유를 사용하며, 통근 문제는 국철뿐 아니라 정부와 도쿄도 등 대도시 당국이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총재 취임 후 신주쿠역, 이케부쿠로역 등의 혼잡 상황을 직접 보고 자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인정하고, 통근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2. 2. 기존 대책의 한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과 도시 과밀화로 인해 도쿄 근교 노선의 통근 시간대 혼잡은 '통근 지옥'이라 불릴 정도로 심각했다. 1960년 혼잡률은 다음과 같았다.이에 일본국유철도(일본국철)는 72계 등 구형 국전과 객차 열차를 101계, 113계 등 신성능 전차로 교체하고 열차 운행 횟수를 늘려 혼잡 완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는 수송량 증가에 미치지 못하는 임시방편에 불과했으며, 선로 증설을 동반한 근본적인 수송력 증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1960년대부터 매년 감사보고서에서 제기되었다.[29]
운전 업무 측면에서도 계속되는 증편에도 불구하고 수송 인원이 그 이상으로 증가하여, 운전 담당자들은 조기 완공을 통한 혼잡 완화 및 열차 증편을 일본국철 당국에 강력히 요청했다. 미카와시마 사고와 쓰루미 사고는 과밀한 운행 스케줄이 피해를 키운 것이 문제시되었고, 이는 5방면 작전 추진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쓰루미 사고 직후인 1963년 11월에는 총재가 안전 대책으로 선로 증설을 촉진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3][4]
1965년 당시 혼잡률 예상에 따르면, 5개 노선에 선로 증설을 실시해도 인구 집중으로 인해 혼잡률을 다소 억제하는 정도의 효과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현재 | 공사 실시하는 경우 | 공사 실시하지 않는 경우 | |
---|---|---|---|
주오 쾌속선 | 284% | 270% | 370% |
주오 완행선 | 208% | 180% | 270% |
소부 선 | 312% | 239% | 445% |
게이힌 도호쿠 선(남행) | 282% | 192% | 357% |
야마노테 선(외선 순환) | 272% | 171% | 326% |
난부 선 | 284% | 257% | 461% |
요코스카 선 | 264% | 200% | 486% |
도카이도선 | 171% | 207% | 367% |
이처럼 수요 추종형 대책이 된 이유는 소고 신지 일본국철 총재 시대 이전에 통근 투자에 대한 소극적인 의견이 있어 일본국철의 수도권 인구 집중에 대한 대응이 늦었기 때문이다. 소고 신지의 뒤를 이은 이시다 레이스케는 5방면 작전 계획을 지시했지만, 소고 시대에는 국철 감사 위원을 맡으며 통근 투자에 소극적이었다. 그는 "대도시 통근 수송은 국철뿐만 아니라 정부나 도쿄도, 오사카시 등이 주도해야 할 문제"라며, "국철은 간선 수송 강화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총재 취임 후 신주쿠, 이케부쿠로의 혼잡을 직접 보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고 밝혔다.
2. 3. 계획 수립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과 도시 인구 집중으로 인해 도쿄 근교 노선의 통근 시간대 혼잡은 '통근 지옥'이라 불릴 정도로 심각했다. 1960년 당시 주요 노선의 혼잡률은 다음과 같았다.[29]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일본국철은 구형 국전과 객차 열차를 신성능 전차(101계, 113계 등)로 교체하고 열차 운행 횟수를 늘렸지만, 혼잡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선로 증설을 포함한 대대적인 수송력 강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계속되었다.
일본국철 노선도를 보면 도쿄 도심으로의 수송은 도카이도 본선, 요코스카 선, 주오 본선, 다카사키 선, 도호쿠 본선, 조반선, 소부 본선이 담당하고 있었다. 이 5개 노선을 복복선화하는 등 수송력을 획기적으로 증강하는 계획이 바로 '통근 5방면 작전'이다.
운전 업무 담당자들 역시 잦은 증편에도 불구하고 계속 증가하는 수송 인원으로 인해 5방면 작전의 조기 완수를 강력히 요청했다. 미카와시마 사고와 쓰루미 사고는 과밀한 운행 스케줄이 피해를 키운 대표적인 사례로, 쓰루미 사고 직후인 1963년 11월에는 총재가 직접 선로 증설 촉진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3][4]
5방면 작전은 1965년부터 1971년까지 추진된 일본국철 제3차 장기 계획의 핵심 사업이었다. 그러나 1965년 당시 예상으로는 5개 노선 모두 선로를 증설해도 인구 집중으로 인해 혼잡률을 크게 낮추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1972년 3월을 목표로 한 혼잡률 예상치는 다음과 같았다.[5]
노선 | 현재 (1965년) | 공사 시행 시 | 공사 미시행 시 |
---|---|---|---|
주오 쾌속선 | 284% | 270% | 370% |
주오 완행선 | 208% | 180% | 270% |
소부 본선 | 312% | 239% | 445% |
게이힌 도호쿠 선 (남행) | 282% | 192% | 357% |
야마노테 선 (외선 순환) | 272% | 171% | 326% |
난부 선 | 284% | 257% | 461% |
요코스카 선 | 264% | 200% | 486% |
도카이도 본선 | 171% | 207% | 367% |
이처럼 소극적인 목표치는 소고 신지 총재 이전까지 일본국철이 통근 투자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소고 신지의 뒤를 이은 이시다 레이스케 총재는 5방면 작전 계획을 지시했지만, 이전에는 통근 투자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이었다. 이시다 레이스케는 통근 투자를 "떨어지는 불똥은 털어버려야 한다"라고 표현했지만, 이는 수요를 따라가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당초 계획은 1971년까지 5개 노선 모두 선로 증설을 완료하는 것이었으나, 여러 문제로 인해 지연되거나 미완료된 구간도 있었다.
2. 4. 투자 규모
5방면 작전에는 선로 증설비, 지상 설비비, 차량비 등을 포함하여 총 6.787조엔이 투자되었다[31] (1980년 기준 환산 시 13.472조엔)[31] .- 선로 증설비: 복복선화를 위해 투입된 비용
- 지상 설비비: 차량기지, 변전 설비 등에 투입된 비용
- 차량비: 증발, 편성 연장, 신성능화를 위해 투입된 비용
선로 증설 공사비의 경우, 계획 초기와 1981년도 말의 실적은 아래 표와 같이 나타났다.
항목 노선\ | 초기 계획 | 1981년도 말 총 공사비 | 증감 | |
---|---|---|---|---|
공사 기간 | 총 공사비 | |||
도카이도 본선(도쿄역 - 오다와라역 간) | 1966.4 - 1972.3 | 1.255조엔 | 2.228조엔 | 9730억엔 |
주오 본선(나카노역 - 미타카역 간) | 1961.4 - 1968.3 | 1920억엔 | 2560억엔 | 640억엔 |
도호쿠 본선(아카바네역 - 오미야역 간) | 1963.7 - 1969.3 | 1220억엔 | 1810억엔 | 590억엔 |
조반선(아야세역 - 도리데역 간) | 1965.1 - 1972.3 | 2900억엔 | 3930억엔 | 1030억엔 |
소부 본선(도쿄역 - 지바역 간) | 1965.4 - 1973.3 | 6510억엔 | 1.018조엔 | 3670억엔 |
계 | 2.51조엔 | 4.076조엔 | 1.566조엔 |
지상 설비비와 차량비를 합산한 결과는 아래 표와 같다.
선구별 | 선로 증설 | 지상 설비 | 차량 | 계 | 1980년도 기준 환산 투자액 |
---|---|---|---|---|---|
도카이도 본선(도쿄역 - 오다와라역 간) | 1.99조엔 | 1.066조엔 | 2560억엔 | 3.312조엔 | 5.922조엔 |
주오 본선(나카노역 - 미타카역 간) | 2560억엔 | 620억엔 | 1220억엔 | 4400억엔 | 1.118조엔 |
도호쿠 본선(아카바네역 - 오미야역 간) | 1810억엔 | 4400억엔 | 1700억엔 | 7910억엔 | 1.827조엔 |
조반선(아야세역 - 도리데역 간) | 3320억엔 | 2090억엔 | 1220억엔 | 6630억엔 | 1.39조엔 |
소부 본선(도쿄역 - 지바역 간) | 9800억엔 | 3990억엔 | 2020억엔 | 1.581조엔 | 3.215조엔 |
계 | 3.739조엔 | 2.176조엔 | 8720억엔 | 6.787조엔 | 13.472조엔 |
- 도카이도 본선, 조반선, 소부 본선의 선로 증설비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표 작성 시점에 이 노선들의 공사가 완료되지 않아 '통근 수송 개선 투자 실적'에서 계속 공사로 취급하여 연도별 투자 실적액을 누계했기 때문이다.
- 1980년도 기준 환산 투자액은 같은 연도를 기준년도로 하여 인플레이션을 고려한 누계액이다.
3. 수송력 증강 내용
5방면 작전은 각 노선의 특성에 맞춰 다양한 방식으로 수송력 증강을 추진했다[32][10].
- 선로 분리: 간선 수송과 경합하는 통근 수송은 최대한 선로를 분리하여 열차 운행 시각표의 과밀화를 해소하고 안전 수송을 확보했다.
- 지하철 직통 운행: 필요한 구간에는 도심으로 직통하는 지하철과의 상호 운행을 실시하여 도심 접근성을 향상시켰다.
- 설비 개선: 기존 시설의 능력 한계를 넘는 수송 수요에 대해서는 신규 투자를 통해 근본적인 설비 개선을 실시하여 대처했다.
3. 1. 기본 원칙
운수와 경제에 게재된 일본국철 담당자의 총괄 기사에 따르면, 5방면 작전의 전개에 있어서 다음의 3가지 점에 주안점을 두었다고 한다[32][10].# 현존 시설의 능력 한계를 넘는 수송 수요에 대해서는, 신규 투자를 통해 근본적인 설비 개선을 실시하여 대처한다.
# 열차 운행 시각표의 과밀화를 해소하고 안전 수송을 확보하기 위해, 간선 수송과 경쟁하는 통근 수송은 가능한 한 선로를 분리한다.
# 필요한 선구(線区)에 대해서는, 도심으로 직통하는 지하철에 국철 전동차의 상호 운행을 실시한다.
3. 2. 도카이도 본선·요코스카 선
도카이도 본선(쇼난 전차)과 요코스카 선은 도쿄역-오후나역 사이에서 선로를 공유하여 운행하고 있었는데, 이는 두 노선 모두 열차를 증편하는데 큰 걸림돌이 되었다.[33]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SM분리'''"(두 노선 열차의 열차 번호 끝의 알파벳을 조합한 것)라고 불리는 대책이 실시되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33]
# 도쿄역 - 시나가와역 간에 지하 선로를 증설하여, 도쿄역 지하 승강장에서 소부 쾌속선과 상호 직통 운전이 이루어지도록 한다.
# 화물 전용선인 힌카쿠 선을 여객선으로 전환하고, 화물 열차는 무사시노 선 경유로 운행하도록 한다.
# 신쓰루미 신호장 - 쓰루미역 간에 여객 전용선을 신설하여 복복선으로 만든다.
# 쓰루미역-도쓰카역 간에 하자와 정을 경유하는 화물 전용 별선을 건설하고, 도쓰카역 - 오후나역 간의 복복선(여객선과 화물선)에 새로운 복선을 추가하여 3복선으로 만들어 화물선을 여객용으로 전용한다.
위의 3번 항목인 화물선 신설은 건설지 주민들의 반대 운동으로 계획이 지연되어 1979년에야 완공되었다.[33] 이어서 1980년 10월에는 쓰루미역 - 오후나역 간의 화물선을 요코스카 선용으로 개량하는 공사가 완료되어 도카이도 본선과 요코스카 선의 분리 운행이 시작되었다.
한편, 도카이도 본선에서는 오후나역 - 오다와라역 구간의 개량도 계획되었다.[33]
# 이미 여객선과 화물선으로 복복선이 되어 있던 오후나역 - 히라쓰카역 구간을 3복선화하여 여객선을 복복선, 화물선을 복선으로 만든다.
# 복선이었던 히라쓰카역 - 오다와라역 구간에 화물선을 신설하여 복복선으로 만든다.
이 중 2번 항목은 1979년 10월에 완성되었지만, 1번 항목은 완료되지 않았다.


3. 3. 주오 본선
고도 경제 성장 초기, 무사시노 지역은 개발이 용이하고 시가화 가능성이 높아 연선 인구 증가율이 가장 높았다. 이에 따라 주오 본선 계통에서는 이미 복복선화가 완료된 오차노미즈역-나카노 역 구간을 미타카역, 다치카와역까지 연장하고, 건설 중이던 제도고속도교통영단(현 도쿄 지하철) 도자이 선과 나카노 역에서 직통 운전하는 계획이 수립되었다.[34]1966년 나카노 역-오기쿠보역 구간 복복선화가 완료되어 도자이 선과의 직통 운전이 개시되었고, 1969년에는 미타카역까지 복복선화가 완료되었다.[34] 그러나 미타카역-다치카와역 구간은 현재까지 복복선화가 미완료 상태로 남아있어, 급행선을 운행하는 중거리 전차의 열차 수가 과밀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34]

3. 4. 도호쿠 본선·다카사키 선
이 구간에서는 도호쿠 본선·다카사키선 열차와 게이힌 도호쿠선 열차가 아카바네역 - 오미야역 구간에서 선로를 공유하던 것을 분리하여 3복선화하였다. 또한, 이 분리로 선로 수가 늘어나 열차 운행 횟수도 증가함에 따라, 동시에 가와구치역 - 오미야역 구간을 완전 입체화하였다. 이 공사는 1968년 10월에 완료되었다.[13]앞쪽 2선: 전철선(게이힌 도호쿠선)
중앙 2선: 열차선(우쓰노미야선)
안쪽 2선: 화물선(쇼난 신주쿠 라인)
당초 아카바네역 - 오미야역 구간은 열차선과 화물선에 의한 복복선으로, 도호쿠선·다카사키선 열차와 게이힌 도호쿠선 전철이 같은 구간에서 열차선을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이 구간에 새로운 화물선을 건설하고, 기존의 화물선을 열차선으로 전용하여 3복선화하여 도호쿠선 열차와 게이힌 도호쿠선 전철을 분리하였다. 또한, 선로 수 증가와 열차 운행 횟수 증가에 따라, 가와구치역 - 오미야역 사이의 사이타마현 내 모든 건널목을 철거하여 완전 입체화하였다.[13]
오미야역 북쪽에서 도호쿠 본선과 다카사키선의 평면 교차를 입체 교차로 해소하는 공사는 1965년 9월[14]에, 요노역 - 오미야역 간의 3복선화·입체화는 1967년 10월에 완료되었다. 아카바네역 - 요노역 간의 3복선화·가와구치역 - 요노역 간의 입체화는 1968년 10월에 완료되었다.
3. 5. 조반선
조반선에서는 기타센주역 - 도리데역 간을 복복선화하고, 쾌속 전동차·중거리 전동차·특급 열차와 완행을 각각 조반 쾌속선과 조반 완행선으로 나누어, 조반 완행선 전차는 모두 신규로 건설되는 영단 지하철(현 도쿄 메트로 지요다선)과 상호 직통 운행하기로 하였다.1971년 4월 아비코 역까지의 복복선화와 가스미가세키 역까지 개통한 영단 지하철 지요다선과 직통 운전이 실시되었으며, 1982년 11월에는 완행선의 아비코 역 - 도리데 역 구간이 개통되었다. 그러나 완행열차가 우에노역에 직통하지 않는 점과 영단 구간의 운임이 비교적 비쌌기 때문에 '민폐 직통운전(迷惑乗り入れ)'이라는 사회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운행면의 문제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거의 개선되지 않았다.[1] 2022년, 운임을 둘러싸고 지역 주민과 JR 동일본·도쿄 메트로(구 영단 지하철) 간에 재판으로 발전했으나, 2023년에 판결이 내려져 지역 주민 측이 패소했다.[1]

왼쪽 뒤가 완행선 승강장
쾌속선에는 승강장이 없음
3. 6. 소부 본선
긴시초역 - 지바역 간 쾌속·특급 열차와 완행을 각각 소부 쾌속선과 소부 완행선으로 분리하는 복복선화가 실시되었다. 또한 도쿄역 - 긴시초역 간 지하 신선이 건설되어 도쿄역으로 직결 운행하고, 요코스카선 열차와 상호 직통 운전을 하게 되었다. 지하철 도자이선에도 일부 완행선 전철이 니시후나바시역 - 쓰다누마역 구간에서 상호 운행을 실시하였다.[1]도자이선과의 상호 운행은 1969년에 시작되었으며, 도쿄역 - 긴시초역 - 쓰다누마역 간 신선·복복선은 1972년 7월, 쓰다누마역 - 지바역 간 복복선은 1981년 10월에 완공되었다.[1] 조반선과 달리, 아키하바라역에서 환승할 필요 없이 쾌속선이 도쿄역으로 직접 운행하게 되어 연선 주민들의 편의성이 크게 향상되었다.[1]
4. 5방면 작전과 일본국철 재정
통근 5방면 작전에는 주로 국철의 차관에 의한 자금이 이용되었다. 이 차관은 고금리여서, 지방 로컬선의 쇠퇴나 신칸센 건설 등으로 악화된 국철 재정에 큰 부담이 되었다. 이는 국철 분할 민영화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16]. 한편, 급증하는 수도권의 수요를 흡수하여 '돈벌이' 역할을 했기 때문에, 도카이도 신칸센[17]과 함께 국철 재건의 요체였다고 보는 곤도 타로와 같은 평가도 있다. 카사이 요시유키는 이 입장을 지지한다[18]. 곤도는 『운수와 경제』 1983년 3월호에서 5방면 작전이 사회 전체에 미친 경제적 이익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4. 1. 재정 부담
통근 5방면 작전에는 주로 일본국철의 차관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고금리로 인해 재정 부담을 가중시켰다. 지방 로컬선과 신칸센 건설 등으로 인해 악화된 일본국철의 재정 상황은 5방면 작전의 부담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이는 결국 국철 분할 민영화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이 있다.[16]특히, 당시부터 지적되었던 문제로 공공 정책 할인에 의한 감수(減收)의 누적이 있었다. 공공 정책 할인이란, 국가의 다른 정책을 위해 마련된 할인 제도를 통칭하는 것이다. 1970년 당시의 숫자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19]
할인 종류 | 할인율 |
---|---|
정기 여객 할인 운임 | 1개월 정기권 50% - 64.1%, 3개월 정기권 52.4% - 65.9%, 6개월 정기권 60% - 67.7% |
학생 정기 할인 운임 | 1개월 정기권 68.3% - 88.4%, 3개월 정기권 69.9% - 89.1%, 6개월 정기권 71.5% - 89.6% |
특별 취급 신문·잡지 할인 수송 | (별도 명시 없음) |
화물 잠정 할인 | 1950년, 목재·선어 등 15개 품목에 대해 시작하여 순차적으로 확대 |
이상을 합산하면 국철의 공공 부담액은 1970년도 예상으로 523억엔[20]이며, 1960년도부터 1970년도까지의 누계는 7476억엔, 공공 기업체로 출발한 1949년도부터 1970년도까지는 1.099조엔이 된다.
고바야시 노부오는 이러한 정책 할인이 제3차 장기 계획의 전반 3년간 투입된 1조엔의 투자액과 거의 동일하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고 지적했다.
4. 2. 정책 할인 문제
당시 일본국철은 여러 공공 정책 할인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러한 할인 제도는 수입 감소로 이어져 재정 악화를 심화시켰다.[19] 1970년 기준 일본국철의 공공 부담액은 523억엔으로 추산되었으며,[20] 이는 5방면 작전에 투입된 투자액과 맞먹는 수준이었다.1970년 당시 일본국철의 주요 공공 정책 할인은 다음과 같았다.[19]
할인 종류 | 할인율 (1개월 정기권) | 할인율 (3개월 정기권) | 할인율 (6개월 정기권) |
---|---|---|---|
정기 여객 할인 운임 | 50% - 64.1% | 52.4% - 65.9% | 60% - 67.7% |
학생 정기 할인 운임 | 68.3% - 88.4% | 69.9% - 89.1% | 71.5% - 89.6% |
- 특별 취급 신문·잡지 할인 수송
- 화물 잠정 할인: 1950년, 목재·선어 등 15개 품목에 대해 시작하여 순차적으로 확대되었다.
고바야시 노부오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러한 정책 할인이 제3차 장기 계획 전반 3년간 투입된 1조엔의 투자액과 거의 동일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아이러니하다고 언급했다.
4. 3. 긍정적 평가
5방면 작전이 급증하는 수도권의 수요를 흡수하여 '돈벌이' 역할을 수행했고, 도카이도 신칸센[17]과 함께 국철 재건의 핵심이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곤도 타로는 이러한 평가를 내렸으며, 카사이 요시유키는 이 입장을 지지한다[18]. 곤도는 『운수와 경제』 1983년 3월호에서 5방면 작전이 사회 전체에 미친 경제적 이익에 대해서도 언급했다.5. 수도권 고속철도망 구상과 신5방면 작전
1960년대 후반부터 일본국철은 수도권 고속철도망(통근 신칸센) 구상을 논의했으며,[25] 이는 1966년 "국철 본사 경영 과제"로 교토 대학 공학부 교수 아마노 코조를 좌장으로 하여 연구가 진행되었다.[26] 이 구상은 이후 신5방면 작전으로 이어졌다.
전간법 입법 당시 국회에서 통근 신칸센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국철 측 답변에서 통근 신칸센은 동법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어 논의는 종식되었다.
제3차 장기 계획은 1968년도에 중단되었고, 이듬해부터 제1차 재건 계획으로 인계되었다. 이후 수년마다 재건 계획이 수립되었지만, 5방면 작전 자체는 주오선을 제외하고 지속적으로 실시되었다.
5. 1. 수도권 고속철도망 구상
1966년 일본국철은 수도권 고속철도망(통근 신칸센) 구상을 발표했다.[25] 이 구상은 "국철 본사 경영 과제"로 1966년부터 2년간 교토 대학 공학부 교수 아마노 코조를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 연구에서는 도쿄역을 중심으로 한 동심원상에 통근 신선 6개 노선을 부설했을 때의 효용을 시뮬레이션했다.[26]그러나 국철 시설국장을 역임한 바바 토미 등 건축 분야 관계자들은 원격지에 택지나 학원 도시를 개발하여 고속 철도로 도심과 연결하는 이 구상에 비판적이었다. 바바 토미나 이마오카 쓰루키치 등은 1959년부터 연구가 시작된 도심부 재개발·고층화를 통해 증가하는 인구를 흡수하고, 직주 근접을 도모하는 방식을 지지했다.[27]
5. 2. 신5방면 작전
1972년 일본국철은 신5방면 작전을 제시했다.[28] 이는 통근 신칸센 구상을 계승하면서도, 재래 철도를 고속화한 통근 신선을 추가 증설하는 방안이었다. 신5방면 작전은 도심에서 50~60km 지역을 대상으로 고속 통근 수송을 실시하는 것을 전제로 했으며, 수도권 각 노선의 혼잡률을 1985년까지 150%로 낮추는 것을 목표로 했다.[28]신5방면 작전에서 제시된 노선은 다음과 같다.
- 도카이도·도호쿠 방면 개발선: 도호쿠 방면에서 남하하여 이케부쿠로, 신주쿠, 시부야, 메구로를 통과하여 도큐선 연선에서 지가사키로 빠져나가는 노선.
- 주오·소부 개발선: 미타카 부근을 통과한 후 주오선 남쪽을 평행하게 동진하여 신주쿠를 통과하고, 신바시 부근에서 임해부로 나와 게이요 화물선과 평행하는 노선.
- 다카사키·조반 방면 개발선: 다카사키선 서쪽 지역을 평행하게 남하하여 신주쿠, 이치가야, 기타센주를 통과하고, 쓰쿠바 연구 학원 도시로 향하는 노선.
게이요선이나 쓰쿠바 익스프레스 등, 일부 노선은 신5방면 작전에서 제시된 성격을 계승하여 개업했다. 도카이도·도호쿠 방면 개발선은 수년 만에 무산되었으나, 대신 도호쿠·조에쓰 신칸센 반대 운동에 대한 대책으로 사이쿄선 구상이 동시에 부상하여 개업했다. 그 후, 쇼난 신주쿠 라인 운행 개시로 유사한 경로가 실현되었다. 주오·소부 개발선에 대해서는 구상에서 4반세기 이상 지나, 운수정책심의회 답신 제18호에서 유사한 경로를 가진 노선이 제시되었다.
6. 결과 및 영향
5방면 작전은 일본 수도권의 통근 환경을 크게 개선하는 데 기여했지만, 여러 문제점도 노출했다.
우선 통근객은 주로 할인된 정기권을 이용하기 때문에, 투자액에 비해 수익 증대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었다. 도시 생활을 지원하는 인프라 정비에 가까운 면을 고려해도, 그 비용은 주로 이용자에게 부담을 요구하거나, 국가 또는 지방 자치 단체가 자금을 보조해야 하는 사업이었다.[21]
또한 수도권 이외의 통근권 속달화 대책은 소홀했다. 혼잡률은 수도권이 두드러졌고, 다른 지방은 저조했다. 간사이권에서는 1970년 오사카 엑스포 전후 도카이도 본선·산요 본선 등 일부에서 개량이 진행되거나, 1973년 간사이 본선의 미나토마치역 - 나라역 간 전철화가 이루어진 정도였다. 해당 지역에서는 병행하는 사철과의 경쟁이 많았지만, 국철은 소요 시간 면에서는 우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열차 운행 횟수가 적어 전혀 경쟁이 되지 않았다. 더욱이 1976년 국철 운임 대폭 인상으로 인해 가격 면에서도 경쟁 사철에 불리하게 되어 (소위 국철 이탈) 오사카 순환선을 제외하고는 수요를 사철에 빼앗기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 대해 국철 안팎에서 불만이 고조되었고, "간사이 3국"(후쿠치야마·오사카·텐노지의 각 철도 관리국) 중 오사카·텐노지 양 철도 관리국은 종종 국철 본사 및 "간토 6국"에 대한 반항으로 여겨질 수 있는 행동을 취했다고 여겨지는 시책도 있었다.[22] 기타큐슈 지역에서는 구 탄광 노선이었던 캇타선에서, 연선이 후쿠오카시의 베드타운이 된 후에도 하루 수 회 왕복 운행으로 수송 개선을 하지 않고, 도시 근교 노선으로 활용하는 것도 검토하지 않은 채 거의 이용자가 없는 상태로 결국 특정 지방 교통선으로 지정되어 폐지되었다는 사례도 있었다.[23]
6. 1. 통근 환경 개선
5방면 작전을 통해 수도권 주요 노선의 수송력이 크게 증강되었고, 통근 시간이 단축되는 등 통근 환경이 개선되었다. 2003년 기준 각 노선의 혼잡률은 아래와 같다.[1]
이는 5방면 작전 이전보다 크게 감소한 수치이다.
6. 2. 문제점 및 한계
한편, 이전부터 시행되던 특급 열차 증편과는 달리, 통근 혼잡 완화 대책은 투자액에 비해 수입·수익 증대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 이유는 통근객은 주로 보통 승차권보다 할인된 정기권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도시 생활을 지원하는 인프라스트럭처 정비에 가까운 면을 유지하는 것을 고려해도 그 비용은 주로 이용자에게 부담을 요구하거나, 국가 또는 지방 자치 단체가 자금을 보조해야 하는 사업이었다고 지적되었다[21].또한 수도권 이외의 통근권의 속달화 대책은 소홀했다. 혼잡률은 수도권이 두드러졌고, 다른 지방은 저조하게 추이했다. 간사이권에서는 1970년 오사카 엑스포 전후 도카이도 본선·산요 본선 등 일부에서 개량이 진행되거나, 1973년 간사이 본선의 미나토마치역 - 나라역 간 전철화가 이루어진 정도였다. 또한 해당 지역에서는 병행하는 사철과의 경쟁이 많았지만, 국철은 소요 시간 면에서는 우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열차 운행 횟수가 적어 전혀 경쟁이 되지 않았으며, 더욱이 1976년 국철 운임 대폭 인상으로 인해 가격 면에서도 경쟁 사철에 불리하게 되어 (소위 국철 이탈) 오사카 순환선을 제외하고는 수요를 사철에 빼앗기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점에 대해 국철 안팎에서 불만이 고조되었고, "간사이 3국"(후쿠치야마·오사카·텐노지의 각 철도 관리국) 중 오사카·텐노지 양 철도 관리국은 종종 국철 본사 및 "간토 4국→간토 6국"(4국 시대에는 다카사키·미토·도쿄·치바, 6국 시대에는 다카사키·미토·도쿄 북·도쿄 남·도쿄 서·치바의 각 철도 관리국)에 대한 반항으로 여겨질 수 있는 행동을 취했다고 여겨지는 시책도 있었다[22]. 또한, 기타큐슈 지역에서는 구 탄광 노선이었던 캇타선에서, 연선이 후쿠오카시의 베드타운이 된 후에도 하루 수 회 왕복 운행으로 수송 개선을 하지 않고 (1981년 당시 평일 6회 왕복, 토요일과 공휴일 7회 왕복), 도시 근교 노선으로 활용하는 것도 검토하지 않은 채 거의 이용자가 없는 상태로 결국 특정 지방 교통선으로 지정되어 폐지되었다는 사례도 있었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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