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公爵, Duke)은 동양과 서양의 여러 국가에서 사용된 작위로, 일반적으로 왕 다음으로 높은 지위를 나타낸다. 동양에서는 주나라의 오등작 중 최고위 작위였으며, 중국, 한국, 일본 등에서 시대와 국가에 따라 다르게 활용되었다. 서양에서는 중세 봉건제 사회에서 후작 다음가는 작위로, 잉글랜드,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에서 다양한 역사적, 법적 의미를 지닌다. 현재 영국에서는 왕족, 비왕족을 포함하여 35개의 공작위가 존재하며, 세습되거나 특정 조건에 따라 여성에게 상속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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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 아치듀크 아치듀크는 본래 신성 로마 제국 내 오스트리아 공작을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진 칭호로, 합스부르크 가문이 사용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도 유지되었으나 현재 오스트리아에서는 폐지되었다.
공작 - 에리스타비 에리스타비는 조지아 역사에서 왕권과 협력하거나 대립하며 각 지역을 통치했던 봉건 영주 가문들을 지칭하며, 겔로바니, 고비아리, 구리아의 에리스타비, 구아람조, 네르시아니조, 다디아니, 라차의 에리스타비 등이 주요 가문으로 조지아의 정치, 경제, 문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양의 공작은 주나라 때부터 시작된 오등작(공, 후, 백, 자, 남) 중 가장 높은 작위였다. 고려에서는 5등작 중 최고 지위로, 왕족이나 공신에게 수여되었다. 조선에서는 태종이 봉군제로 개편하면서 공작 작위는 사용되지 않다가, 대한제국 시기에 심순택이 고종에게서 청녕공(靑寧公)에 봉작되었다.[36]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이후 화족 제도에서 5등작 중 가장 높은 작위였다. 고셋케(후지와라씨 혈통의 다섯 가문), 도쿠가와 종가, 시마즈 종가, 모리 종가 등 일부 공가 출신과 이토 히로부미 등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자들이 공작위를 받았다. 한일 병합 이후 조선귀족 중에서는 공작으로 봉해진 사람이 없었다. 일본에서는 "공"이라는 칭호가 prince(왕자)와 duke(공작) 두 칭호를 모두 나타내 혼란이 있었으며, 후작과 발음이 같아 "오야케-코샤쿠"라고 불렀다.
2. 1. 중국
주나라 때 성립된 오등작(공, 후, 백, 자, 남) 중 가장 높은 작위였다.[10]주공, 소공 등 주나라 중앙 관료나, 송나라와 같이 일부 제후국의 군주에게 수여되었다.[8] 춘추시대에는 제후국 군주의 시호로 '공'이 널리 사용되었고, 전국시대에는 왕을 칭하는 국가들이 늘면서 귀족이나 고위 관료를 높여 부르는 칭호로도 사용되었다.
진나라 이후 이십등작제가 시행되면서 오등작은 유명무실해졌으나, 국공(國公), 군공(郡公) 등의 형태로 왕작과 동일한 용법에서 왕을 공으로 낮춰 사용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조조가 위공(魏公)으로 봉해진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11]
맹자[9] 등 전국 시대 문헌에서는 '공'을 오등작 중 최고 작위로 해석했다.[10] 이 작위는 서한 말 왕망 등에게 수여되었고,[9]한나라 시대에는 황족에게 주어지는 왕자(諸侯王)보다 낮았다. 진나라 시대에 오등작이 시행되었으며,[9]남조 시대에는 찬탈자들이 군주를 퇴위시키기 전에 공작, 왕자의 작위를 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공자의 후손에게는 연성공 작위가 수여되었으며, 1935년 국민 정부는 이를 공자 봉사관(大成至聖先師奉祀官)으로 변경하여 중화민국의 세습 관직으로 이어지고 있다.
뛰어난 문무 관료에게 시호로 공작위가 수여되기도 했는데, 송나라 영종이 주희에게 휘국공(徽國公)이라는 시호를 내린 것이 그 예이다.[12]
2. 2. 한국
고려 시대에 공작은 5등작(공, 후, 백, 자, 남) 중 가장 높은 지위였다. 고려에서 제후는 왕의 친족인 경우 공(公), 후(侯), 백(伯)에, 친족이 아닌 경우 정2품 국공(國公), 종2품 군공(郡公), 정5품 현후(縣侯), 정5품 현백(縣伯), 정5품 개국자(開國子), 종5품 현남(縣男)에 봉해졌다.[34] 대부분 왕자들은 공(公)이나 후(侯)에 봉해졌으며, 후(侯)에 처음 봉해졌다가 공(公)으로 승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국공(國公)에 봉해진 인물로는 조선국공(朝鮮國公) 이자겸, 개성국공(開城國公) 왕기 등이 있다.
충렬왕 때 원나라의 내정 간섭으로 봉작제가 일시 폐지되었다가 공민왕 때 다시 부활하였다. 그러나 조선 건국 후 1398년(태조 7년) 왕자를 공(公)으로, 종친과 부마를 후(侯)로, 정1품을 백(伯)으로 봉하기도 하였으나,[34]1401년태종은 중국을 모방할 수 없다 하여 공(公)을 부원대군(府院大君)으로, 후(侯)를 군(君)으로, 백(伯)을 부원군(府院君)으로 고쳐 3단계 작위인 봉군제만 사용했다.[35]
이후 1897년대한제국으로 격상되면서, 대한제국 건국에 큰 공로가 있는 심순택이 1906년고종 황제로부터 청녕공(靑寧公)에 봉작되었다.[36]
삼국시대 말, 고구려 유민 지도자 대중상이 중국당나라로부터 진국공(震國公) 작위를 받은 사례도 있다.
한일 병합 이후 일본 귀족으로 편입된 대한제국의 고위급 인사들인 조선귀족 중에서는 공작으로 봉해진 사람이 없었다.
일본에서는 "공"이라는 칭호로 (영어의 경우) prince와 duke 두 칭호를 모두 나타내려고 했기 때문에 혼란이 발생했다. prince는 기본적으로 소국의 군주나 제후, 왕족의 칭호이며, duke는 제후의 칭호이다. 일본어에서는 예를 들어 모나코나 리히텐슈타인의 군주, 몰타 기사단장 등의 prince를 "공"이 아닌 "대공"으로 번역하여 "공작"(duke)과 구별을 두려고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편의상 사용된 "대공"은 룩셈부르크의 군주가 가진 칭호 grand duke나 러시아 등의 grand prince, 오스트리아의 archduke와 구별할 필요가 다시 생기게 된다. 반대로, 일본의 화족 제도에서 "공작"의 공식 영어 번역에는 duke가 아닌 prince가 사용되었다.
일본어에서는 후작과 발음이 같기 때문에 구별할 필요가 있을 때는 "오야케-코샤쿠"라고 불렀다.
서작 내규에서는 공작의 기준에 대해 "친왕제왕으로부터 신위에 내려온 자, 구섭가 도쿠가와 종가, 국가에 큰 공훈이 있는 자"로 규정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 '''친왕 제왕으로부터 신위에 내려온 자''' - 1889년(메이지 22년) 제정된 황실 전범에서 "황자로부터 황현손에 이르기까지는 남자를 친왕", "5세 이하는 남자를 왕"으로 규정했지만, 화족령 제정 당시(메이지 17년 당시)에는 명확한 정의가 없었다.
# '''국가에 큰 공훈이 있는 자''' - 훈공 화족의 규정. 다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 "큰 공훈"이 없더라도 화족이 될 자격을 갖춘 가문 중, 공적이 더해져 본래보다 높은 작위를 받은 그룹. 구세이카가의 산조가(산조 사네토미의 공적), 구우린가의 이와쿠라가(이와쿠라 도모미의 공적), 구사쓰마 가고시마 번주의 시마즈가(시마즈 다다요시의 공적), 구나가토 하기 번주의 모리가(모리 다카치카・모토토쿠의 공적)의 4가가 이에 해당한다. 또한, 후년 후작에서 승작한 구 세이카가 사이온지가(사이온지 긴모치의 공적), 구 세이카가 도쿠다이지가(도쿠다이지 사네노리의 공적), 구미토 번주미토 도쿠가와가(『대일본사』 편찬 공적)의 3가도 여기에 포함된다.
## 본가가 이미 공작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인물의 특별한 공적이 인정되어 별도로 가문을 세우는 것을 허락받아 공작위를 수여받은 그룹. 막말의 사쓰마번에 큰 영향을 준 시마즈 히사미쓰와 그 자손(다마사토 시마즈가), 대정봉환 후 양자인 도쿠가와 이에사토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한 에도 막부 제15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그 자손(도쿠가와 요시노부가)의 2가이다.
공작(Duke)은 서양 중세봉건제에서 5등작 중 가장 높은 작위로, 후작보다 위에 위치한다. 공작의 기원은 로마 시대 고위 군 지휘관이었던 독스(라틴어: ''Dux'')였다.[1]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넓은 영토를 가진 통치자들에게 공작 작위가 사용되기도 했다. 중앙 정부의 힘이 약해지면서, 공작들은 자신의 작위를 세습 작위로 바꾸고 왕실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보였다.
'''프랑스'''
초기 봉건 시대에 노르망디 공국, 아키텐 공국, 부르고뉴 공국 공작들은 프랑스 왕으로부터 사실상 독립해 있었다. 브르타뉴 공국 공작도 처음에는 백작 칭호만 받았으나, 나중에는 독립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규모 봉토들은 점차 프랑스 왕국으로 재통합되었고, 이후 '귀족 공작령'(duchés-pairies)이라는 이름으로 왕족의 영지가 되었다.프랑스 혁명 이전부터 내려온 공작 칭호 가운데 1980년대까지 비공식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 30개가 넘으며, 그 가운데 최초의 공작령은 위제(1565, 등록 1572)이다. 5월 의회는 공작들이 매년 5월에 왕과 만나 다가오는 해의 정책에 대해 논의하던 회의였다.부르고뉴 공국와 프로방스 공국에서는 공작 대신에 귀족과 지방 장관의 칭호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아마도 해당 속주가 더 로마화되었던 역사적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칭호는 기본적으로 동등했다.
'''독일'''
카롤링거 왕조에서 군 지휘관으로 임명받은 공작들이 점차 독립하면서, 프랑켄, 슈바벤, 바이에른, 작센 지방에 거대한 공작령들이 나타났다. 12세기에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황제들은 오스트리아(1156년)와 슈타이어마르크(1180년)에 새로운 공작령을 만들고, 공작을 충성스러운 봉신의 지위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한편 지위가 낮은 귀족 가문들이 영지와 권력을 강화하면서 공작의 권위는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1356년 금인칙서가 발표되어 선제후들이 많은 특권을 갖게 되면서, 공작은 명목상으로도 가장 높은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17] 초기 10세기 경에는 군주에 상당하는 최고위 귀족인 부족 대공 (Stammesherzog)을 의미했다. 이 시기의 헤르초크는 "대공"으로 번역되는 것이 일반적이다.[18]
'''이탈리아'''
카롤링거 제국이 분열된 후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는 작은 도시 국가들로 나뉘었다. 이후 르네상스 시대까지 시뇨리아(Signoria, 도시 국가의 지배 형태)가 지배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에 편입되면서 공작령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근대까지 남아 있던 주요 공작령으로는 밀라노 공국, 피렌체(토스카나 대공국), 루카, 만토바 공국, 모데나 공국 및 레조 공국, 파르마 공국 등이 있었다.[7]
서고트족 공작들은 이슬람교도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없어졌다. 레콩키스타(재정복 운동) 때에는 두케(duque)라는 칭호가 존경을 나타내는 뜻으로 쓰였다. 1370년에 만들어진 소리아이몰리나에 있는 카스티야 공작령을 빼고는 원래 공작칭호는 왕자들만 받을 수 있는 것이었으나, 15세기 중반부터 점점 다른 귀족들도 받게 되었다.[3][4]
스페인 공작 문장 위의 왕관
왕실 칭호인 프린시페(Príncipe)를 제외하면, 스페인 귀족의 계급에는 위에서부터 공작(duque), 후작(marqués), 백작(conde), 자작(vizconde), 남작(barón), 영주(señor)의 6계급이 있으며, 공작은 최고위이다.[29]
'''영국'''
1337년 에드워드 3세가 에드워드 흑태자를 콘월 공작으로 임명하면서 잉글랜드 최초의 공작 칭호가 생겼다.[1] 이후 왕실 혈통의 후손들에게 랭커스터 공작, 클래런스 공작, 요크 공작, 글로스터 공작, 베드퍼드 공작, 서머싯 공작 공작령이 수여되었다.[1] 1483년 노퍽 공작령이 생긴 이후에는 왕실 사람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공작 칭호가 수여되기 시작했다.[1]
3. 1. 개요
Duke영어에서 유래한 공작(公爵)은 서양 중세 봉건제도에서 5등작 중 가장 높은 작위로, 후작보다 위에 위치했다. 공작의 기원은 로마 시대 고위 군 지휘관이었던 독스(라틴어: ''Dux'')였다.[1]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넓은 영토를 가진 통치자들에게 공작 작위가 사용되기도 했다. 중앙 정부의 힘이 약해지면서, 공작들은 자신의 작위를 세습 작위로 바꾸고 왕실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보였다.
3. 2. 프랑스
초기 봉건 시대에 노르망디, 아키텐, 부르고뉴 공작들은 프랑스 왕으로부터 사실상 독립해 있었다. 브르타뉴 공작도 처음에는 백작 칭호만 받았으나, 나중에는 독립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규모 봉토들은 점차 프랑스 왕국으로 재통합되었고, 이후 '귀족 공작령'(duchés-pairies)이라는 이름으로 왕족의 영지가 되었다. 처음에는 왕의 적자인 왕자들만 봉토를 받을 수 있었으나, 16세기부터는 서자들과 외국 왕자들, 프랑스 왕을 섬기는 다른 봉신들에게도 주어졌다. 귀족 공작령은 영구 공작령처럼 세습되는 것이었고, 귀족이 아닌 사람들이 세습 공작령을 갖고 있기도 했다.프랑스 혁명 이전부터 내려온 공작 칭호 가운데 1980년대까지 비공식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 30개가 넘으며, 그 가운데 최초의 공작령은 위제(1565, 등록 1572)이다.
5월 의회는 공작들이 매년 5월에 왕과 만나 다가오는 해의 정책에 대해 논의하던 회의였다.
부르고뉴와 프로방스에서는 공작 대신에 귀족과 지방 장관의 칭호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아마도 해당 속주가 더 로마화되었던 역사적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칭호는 기본적으로 동등했다.
후기 메로빙거 시대의 갈리아에서, 아르눌핑 가문의 궁재들은 ''프랑크족의 공작과 군주''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칭호에서 ''공작''은 프랑크족 전체(''Francorum'', 프랑크족)에 대한 최고의 군사적 통제를 의미했으며, 이는 987년 프랑스에서 카롤링거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봉건 영토에 부속된 왕국 내 최고 선임은 12개의 오리지널 페어(귀족)(en: ''peers'')에게 주어졌으며, 이들은 또한 독일 제국 대관직에 필적하는 왕실 대관식에서 전통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 중 절반은 공작령이었다. 3명의 성직자(6명의 고위 성직자는 모두 6명의 세속 귀족보다 상위였다)와 3명의 세속 귀족으로, 각각 같은 사회 계급의 3명의 백작보다 상위였다.
공작령을 가진 프린스-주교는 다음과 같다.
랭스 대주교는 ''archevêque-duc pair de France''(샹파뉴; 전통적으로 자신의 대성당에서 왕을 대관하고 성유를 바른다.)로 불린다.
아키텐 공작 또는 ''duc d'Aquitaine'' 또는 ''de Guyenne''(두 번째 사각 깃발을 든다.)
귀족들이 대관식에 참여한다는 이론은 13세기 말에 정립되었으며, 그 당시에는 노르망디 공작령과 툴루즈 백작령과 같은 일부 귀족령이 이미 왕관에 합병되었다. 같은 세기 말에 왕은 일부 백작령을 공작령으로 승격시켰으며, 이 관행은 혁명까지 증가했다. 이러한 공작령 중 다수는 또한 (소위 '새로운 귀족령')이었다.
3. 3. 독일
카롤링거 왕조에서 군 지휘관으로 임명받은 공작들이 점차 독립하면서, 프랑켄, 슈바벤, 바이에른, 작센 지방에 거대한 공작령들이 나타났다. 12세기에 호엔슈타우펜조의 황제들은 오스트리아(1156년)와 슈타이어마르크(1180년)에 새로운 공작령을 만들고, 공작을 충성스러운 봉신의 지위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한편 지위가 낮은 귀족 가문들이 영지와 권력을 강화하면서 공작의 권위는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1250년 이후 호엔슈타우펜조가 단절되자 공작들은 각 공작령에서 독립을 확보했으나, 공작위는 왕 밑에서 더 이상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단지 백작보다 높은 지위임을 나타내는 데 그쳤다. 1356년 금인칙서가 발표되어 선제후들이 많은 특권을 갖게 되면서, 공작은 명목상으로도 가장 높은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17] 초기 10세기 경에는 군주에 상당하는 최고위 귀족인 부족 대공 (Stammesherzog)을 의미했다. 이 시기의 헤르초크는 "대공"으로 번역되는 것이 일반적이다.[18]
나사우 공국과 홀슈타인 공국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후 프로이센에 병합되어 소멸했고,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 공은 에르네스틴 제후국 재편 과정에서 소멸했으며, 안할트 제국은 안할트 공국으로 통합되었으므로 독일 제국 가맹국으로 남은 공국의 공작위는 브라운슈바이크 공, 작센-알텐부르크 공, 작센-코부르크-고타 공, 작센-마이닝겐 공, 안할트 공의 5개였다.[22] 이 외에 통치 영역이 없어진 공작으로 로이히텐베르크 공,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공, 라치부르 공, 우라흐 공 등이 있다.
독일 혁명 후, 바이마르 공화국이 되자 귀족은 법적 근거를 잃었지만, 작위를 성명의 일부로 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허용되었다.[23]
3. 4. 이탈리아
카를링거 제국이 분열된 후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는 작은 도시 국가들로 나뉘었다. 이후 르네상스 시대까지 시뇨리아(Signoria, 도시 국가의 지배 형태)가 지배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에 편입되면서 공작령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근대까지 남아 있던 주요 공작령으로는 밀라노, 피렌체(토스카나 대공국), 루카, 만토바, 모데나, 파르마피아첸차 등이 있었다.[7]
교황, 신성 로마 황제, 나폴리 왕들은 자유롭게 공작 칭호를 수여했기 때문에 공작 작위는 매우 흔했다. 사보이 왕가 출신 왕들은 자손들에게 종종 두카(duca)라는 칭호를 내리기도 했다.[7]
서고트족 공작들은 이슬람교도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없어졌다. 레콩키스타(재정복 운동) 때에는 두케(duque)라는 칭호가 존경을 나타내는 뜻으로 쓰였다. 1370년에 만들어진 소리아이몰리나에 있는 카스티야 공작령을 빼고는 원래 공작칭호는 왕자들만 받을 수 있는 것이었으나, 15세기 중반부터 점점 다른 귀족들도 받게 되었다.[3][4] 그 뒤에 생긴 공작위들 가운데 아직도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메디나시도니아(1445)이다. 또한 스페인 왕들은 그들의 나폴리와 시칠리아 영토에 마음대로 공작령을 만들었다. 그러나 스페인이 중앙집권화 되면서 다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공작들도 많은 권한을 잃게 되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은 코르테스(의회)에서 받은 권리로 1948년에 칼보소텔로·몰라·프리모데리베라 공작령들을 만들었다.
왕실 칭호인 프린시페(Príncipe)를 제외하면, 스페인 귀족의 계급에는 위에서부터 공작(duque), 후작(marqués), 백작(conde), 자작(vizconde), 남작(barón), 영주(señor)의 6계급이 있으며, 공작은 최고위이다.[29] 모든 공작위에는 그란데의 형식이 따르며, 그란데 위원회에 속한다.[29] 그란데의 형식을 따르는 작위 보유자는 "각하(Excelentísimo Señor (남성) Excelentísima Señora (여성))"라는 경칭으로 불린다.[29]
스페인의 공작위는 현재 155개 존재하며, 유명한 것으로는 16세기 종교 전쟁 시대에 당주가 군인으로 활약한 알바 공작, 아르마다 해전 때 당주가 무적함대의 사령관을 맡았던 메디나-시도니아 공작, 신대륙 발견자로 여겨지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자손이 보유한 베라구아 공작과 라 베가 공작(스페인어판), 아스테카 황제 모크테수마 2세의 자손이 보유한 모크테수마 데 투르텐고 공작(스페인어판), 펠리페 3세의 총신을 초대 공작으로 하는 레르마 공작(스페인어판), 펠리페 4세의 총신 가스파르 데 구스만을 초대 공작으로 하는 산루카르 라 마요르 공작(스페인어판)(올리바레스 백작의 작위를 매몰시키기를 원치 않아 "올리바레스 백작 공작"을 칭했다), 나폴레옹 전쟁 시대 영국군 사령관 웰링턴 공에게 수여된 시우다드 로드리고 공작, 스페인 내전을 일으킨 에밀리오 몰라의 자손이 보유한 몰라 공작(스페인어판),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의 자손이 보유한 프랑코 공작 등이 있다. 또한 오수나 공작(스페인어판)은 19세기 말 당주가 주러시아 대사를 지낼 때 손님을 위해 준비한 금 식기를 강에 버리는 행사를 벌인 것으로 인해, 낭비를 가리키는 "오수나 가문도 아닌데"라는 표현이 생겨 유명해졌다.
정식 칭호로는 인정되지 않지만, 카를리스타 왕위 요구자가 창설한 171개의 칭호 중에도 4개의 공작위가 있었다.[29]
왕실 칭호 프린시페도 공작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있는데("대공"이나 "왕자"로 번역되기도 한다), 여기에는 황태자에게 수여되는 아스투리아스 공 등이 있다.[29]
공작을 포함한 백작 이상의 귀족의 장남은 다른 칭호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 부모의 칭호에서 유래한 지명의 자작위를 작위 계승까지 칭할 수 있다.[29] 귀족 칭호의 포기도 가능하지만, 다른 계승 자격자의 권리를 해칠 수는 없으며, 또한 직접 상속인 이외의 사람에게 계승자를 지명할 수는 없다.[29] 귀족 칭호 보유자가 사망한 경우, 그 상속인은 1년 이내에 법무성에 계승을 청원해야 하며, 만약 2년 이내에 청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작위 수여자 사망 장소의 주 정부가 정부 공보로 발표한 후 다른 승계인에게 계승의 길이 열린다.[29] 작위의 계승에는 소정의 요금이 든다.[29] 스페인에는 귀족원이 없고, 작위를 가지고 있어도 법적인 특권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과거 그란데의 형식을 가진 자는 외교관 여권을 가질 수 있었지만, 이 또한 1984년에 폐지되었다. 하지만 작위를 갖는 것이 사회적 신뢰가 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높은 돈을 지불해서라도 취득하기를 희망한다.
역사적으로 스페인의 전신인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연합 왕국, 나바라 왕국에 각각 작위 귀족 제도가 있었으며, 17세기 카스티야의 귀족 작위는 공작, 후작, 백작으로 한정되었으며, 이 세 작위의 차기 후보자가 드물게 자작위를 사용했다. 1520년까지 카스티야의 작위 귀족은 35명밖에 없었지만, 펠리페 3세 시대 이후 작위 귀족이 급증했다.
1931년의 혁명으로 왕위가 폐지되어 제2 공화국이 되었을 때 귀족 제도가 폐지된 적이 있었지만, 1948년에 총통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귀족 제도를 부활시켰으며, 국왕에 의한 수작과 동일한 규칙 하에 프랑코가 수작을 행하게 되었다. 왕정 복고 후 다시 국왕이 수작을 하고 있다.
-- '''아리아가 공작'''(스페인어판)(1487년) 마르티네스 데 이루호 가문(스페인어판)
'''프리아스 공작'''(스페인어판)(1492년) 소토 가문
'''아르코스 공작'''(스페인어판)(1493년) 우요아 가문(스페인어판)
-- '''레세라 공작'''(스페인어판)(1493년) 실바 가문(스페인어판)
-- '''루나 공작'''(스페인어판)(1495년) 아라곤 가문
'''산탄젤로 공작'''(스페인어판)(1497년) 카사노바-카르데나스 가문
'''소마 공작'''(스페인어판)(1502년) 루이스 데 부세스타 가문
-- '''테라노바 공작'''(스페인어판)(1502년) 데 라 시엘바 가문
-- '''몬탈토 공작'''(스페인어판)(1507년) 부스토스 가문
-- '''세사 공작'''(스페인어판)(1507년) 바론 가문
'''몬텔레온 공작'''(스페인어판)(1527년) 아라곤 가문
'''마케다 공작'''(스페인어판)(1529년) 카사노바-카르데나스 가문
-- '''베라과 공작'''(1537년) 콜론 가문 (스페인어판)
'''메디나 데 리오세코 공작'''(스페인어판)(1538년) 라토레 가문
-- '''프란카빌 공작'''(스페인어판)(1555년) 아르테아가 가문
'''라 베가 공작'''(스페인어판)(1557년) 콜론 가문(스페인어판)
'''알칼라 데 로스 가술레스 공작'''(스페인어판)(1558년) 호엔로에-랑겐부르크 가문(독일어판)
'''오수나 공작'''(스페인어판)(1562년) 솔리스-베아우몬트 가문(스페인어판)
'''우에스카르 공작'''(스페인어판)(1563년) 피츠-하메스 스튜어트 가문
'''바에나 공작'''(스페인어판)(1566년) 루이스 데 아라나 가문
'''페리아 공작'''(스페인어판)(1567년) 메디나 가문
'''에스트레메라 공작'''(스페인어판)(1568년) 부스토스 가문
'''페르난디나 공작''' (스페인어판)(1568년) 곤살레스 데 그레고리오 가문
-- '''파스트라나 공작'''(스페인어판)(1572년) 피나토 가문
'''레르마 공작'''(스페인어판)(1599년) 라리오스 가문
'''페냐란다 데 두에로 공작'''(스페인어판)(1608년) 피츠-하메스 스튜어트 가문
'''우세다 공작'''(스페인어판)(1610년) 라토레 가문
'''시우다 레알 공작'''(스페인어판)(1613년) 호엔로에-랑겐부르크 가문(독일어판)
'''만다스 이 비야누에바 공작'''(스페인어판)(1614년) 우엘타 가문
'''카미냐 공작'''(스페인어판)(1619년) 호엔로에-랑겐부르크 가문(독일어판)
'''산 페드로 데 갈라티노 공작'''(스페인어판)(1621년) 메디니라 가문
'''메디나 데 라스 토레스 공작'''(스페인어판)(1625년) 루이스 데 부세스타 가문
'''올리바레스 공작'''(1625년) 피츠-하메스 스튜어트 가문
'''산 미겔 공작'''(스페인어판)(1625년) 카스티제호 가문
-- '''산루칼 라 마요르 공작'''(스페인어판)(1625년) 아라나 가문
'''모크테수마 데 투르텐고 공작'''(스페인어판)(1627년) 마르실리아 가문
'''몬테알레그레 공작'''(스페인어판)(1633년) 카스티제호 가문
'''리바스 공작'''(스페인어판)(1641년) 사인스 가문
'''아브란테스 공작'''(스페인어판)(1642년) 수레타 가문
'''아말피 공작'''(스페인어판)(1642년) 세오아네 가문
'''팔라타 공작'''(스페인어판)(1646년) 울사이즈 가문
'''노체라 공작'''(스페인어판)(1656년) 발보-베르토네 가문
'''몬토로 공작'''(스페인어판)(1660년) 마르티네스 데 이루호 가문(스페인어판)
'''미란다 공작'''(스페인어판)(1664년) 실바 가문(스페인어판)
'''리나레스 공작'''(스페인어판)(1667년) 즈레타 가문
'''아베이로 공작'''(스페인어판)(1681년)
'''알마산 공작'''(스페인어판)(1698년) 렌카스트레 가문
'''소토마요르 공작'''(스페인어판)(1703년) 마르티네스 데 이루호 가문(스페인어판)
'''몬테야노 공작'''(스페인어판)(1705년) 팔코 가문
'''리리아 이 헤리카 공작'''(스페인어판)(1707년) 피츠-하메스 스튜어트 가문
'''아트리스코 공작'''(스페인어판)(1708년) 바론 가문
'''아르코 공작'''(스페인어판)(1715년) 팔코 가문
'''부르농빌 공작'''(스페인어판)(1717년) 실바 가문(스페인어판)
'''솔페리노 공작'''(스페인어판)(1717년) 란자 가문
'''아리온 공작'''(스페인어판)(1725년) 코르도바 가문(스페인어판)
'''알헤테 공작'''(스페인어판)(1728년) 오소리오 가문(스페인어판)
'''그라나다 데 에가 공작'''(스페인어판)(1729년) 마르토스 가문
'''몬테마르 공작'''(스페인어판)(1735년) 오소리오 가문(스페인어판)
'''산티스테반 델 푸에르토 공작'''(스페인어판)(1738년) 메디나 가문
'''그리말디 공작'''(스페인어판)(1777년) 마르케스 가문
'''알모도바르 델 리오 공작'''(스페인어판)(1780년) 오요스 가문
'''파르키 공작'''(스페인어판)(1780년) 오소리오 가문(스페인어판)
'''산 카를로스 공작'''(스페인어판)(1780년) 페르난데스-비야베르데 가문
'''라 알쿠디아 공작'''(스페인어판)(1792년) 루스폴리 가문
'''라 로카 공작'''(스페인어판)(1793년) 피츠-하메스 스튜어트 가문
'''산 로렌소 데 발에르모소 공작'''(스페인어판)(1794년) 오소리오 가문(스페인어판)
'''고르 공작'''(스페인어판)(1803년) 알바레스 도 보오르케스 가문(스페인어판)
-- '''수에카 공작'''(스페인어판)(1804년) 루스폴리 가문
'''타마메스 공작'''(스페인어판)(1805년) 메시아 가문
'''시우다 로드리고 공작'''(1812년) 웰즐리 가문
'''페르난도 데 키로가 공작'''(스페인어판)(1815년) 메르가레호 가문
'''산 페르난도 루이스 공작'''(스페인어판)(1816년) 레비-밀포와 가문
'''페르난-누녜스 공작'''(스페인어판)(1817년) 팔코 가문
'''카스트로-테레노 공작'''(스페인어)(1825년) 산체스 나바로 가문
'''세비야 공작'''(스페인어판)(1823년) 볼본 가문
'''네미 공작'''(스페인어판)(1828년) 세오드리-브라스키 가문(스페인어판)
'''노블레하스 공작'''(스페인어판)(1829년) 에가냐 가문
'''
3. 6. 영국
1337년 에드워드 3세가 에드워드 흑태자를 공작으로 임명하면서 잉글랜드 최초의 공작 칭호가 생겼다.[1] 이후 왕실 혈통의 후손들에게 랭커스터(1351), 클래런스(1362), 요크(1385), 글로스터(1385), 베드퍼드(1413), 서머싯(1443) 공작령이 수여되었다.[1] 1483년 노퍽 공작령이 생긴 이후에는 왕실 사람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공작 칭호가 수여되기 시작했다.[1]
문장
작위명 (작위의 창설년도와 분류) 가문
현 공작의 초상
현 공작의 이름
Quarterly 1st Gules on a Bend between six Cross-crosslets fitchy Argent an Escutcheon Or charged with a Demi-lion rampant pierced through the mouth by an arrow within a Double Tressure flory counterflory of the first (Howard); 2nd Gules three Lions passant guardant in pale Or, Armed and Langued Azure, in chief a Label of three points Argent (Thomas of Brotherton); 3rd Checky Or and Azure (Warenne); 4th Gules a Lion rampant Or, Armed and Langued Azure (Fitzalan).
Quarterly: 1st and 4th Or on a pile Gules between six fleurs de lys Azure three lions of England Or; 2nd and 3rd, Gules, two wings conjoined in lure Or
Quarterly: 1st and 4th grand quarters, the Royal Arms of Charles II (viz. quarterly: 1st and 4th, France and England quarterly; 2nd, Scotland; 3rd, Ireland); the whole within a bordure company argent charged with roses gules barbed and seeded proper and the last; overall an escutcheon gules charged with three buckles or (the Dukedom of Aubigny); 2nd grand quarter, argent a saltire engrailed gules between four roses of the second barbed and seeded proper (Lennox); 3rd grand quarter, quarterly, 1st, azure three boars heads couped or (Gordon); 2nd, or three lions heads erased gules (Badenoch); 3rd, or three crescents within a double tressure flory counter-flory gules (Seton); 4th, azure three cinquefoils argent (Fraser).
Quarterly: 1st and 4th, France and England quarterly; 2nd, Scotland; 3rd, Ireland; the whole debruised by a Baton sinister compony of six pieces Argent and Azure.
Quarterly, 1st and 4th, azure three fleurs-de-lys or (for France); 2nd and 3rd, gules three lions passant guardant in pale or (for England), all within a bordure compony argent and azure
quarterly: 1st and 4th, France and England quarterly; 2nd, Scotland; 3rd, Ireland; the whole debruised by a baton sinister gules charged with three roses argent barbed and seeded proper (Lennox[1]); 2nd and 3rd grand quarters: quarterly gules and or, in the first quarter a mullet argent (De Vere). (Arms of the 2nd Duke onwards)
Quarterly: 1st and 4th grandquarters: quarterly: 1st and 4th Gules three cinquefoils Ermine (for Hamilton); 2nd and 3rd Argent a lymphad with the sails furled proper flagged Gules (for Arran); 2nd and 3rd Argent a heart Gules imperially crowned Or on a chief Azure three mullets of the first (for Douglas).
Quarterly, 1st & 4th: Gyronny of eight or and sable (Campbell); 2nd & 3rd: Argent, a lymphad or ancient galley sails furled flags and pennants flying gules and oars in action sable (Lorne).
Quarterly: 1st, Paly of six Or and Sable (for Atholl); 2nd, Or a Fess chequy Azure and Argent (for Stewart); 3rd, Argent on a Bend Azure three Stags Heads cabossed Or (for Stanley); 4th, Gules three Legs in armour Proper garnished and spurred Or flexed and conjoined in triangle at the upper part of the thigh (ensigns of the Isle of Man); over all, an Inescutcheon en surtout Azure three Mullets Argent within a Double tressure flory Or ensigned of a Marquesss coronet
Quarterly, 1st and 4th grandquarters: quarterly, 1st and 4th, Vert on a Chevron between three Unicorns' Heads erased Argent armed and maned Or as many Mullets Sable (Ker); 2nd and 3rd, Gules three Mascles Or (Weepont); 2nd and 3rd grandquarters: Argent three Stars of five points Azure (Innes).
Quarterly, 1st & 4th: Argent, 3 fusils conjoined in fess gules, a bordure sable (Montagu); 2nd & 3rd: Or an eagle displayed vert beaked and membered gules (Monthermer).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현재 유일하게 독립된 공작 국가이며, 룩셈부르크 대공은 주권 군주로서 룩셈부르크 국민을 다스린다.[1]
영국에서는 공작 작위가 여전히 존재하며, 왕실 공작과 비왕실 공작으로 나뉜다. 영국 왕실의 구성원에게 수여되는 왕실 공작 작위에는 콘월 공작, 랭커스터 공작, 요크 공작, 글로스터 공작, 에든버러 공작 등이 있다. 이들은 "전하"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다. 1936년 퇴위한 에드워드 8세는 윈저 공작 작위를 받았다.
콘월 공작은 공작령(작위)과 공작령(영지)을 모두 소유하며,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은 공작의 개인 소득이 된다. 그러나 공작 영지에 사는 사람들은 영국 왕에게 충성할 뿐, 콘월 공작에게 충성할 의무는 없다. 랭커스터 공작 역시 랭커스터 공작령을 다스리고 소유하지만, 그 수입은 국왕의 사금고로 들어간다.
로스시 공작은 스코틀랜드에서 영국 왕위 계승자가 항상 갖는 작위이지만, 이는 공작령(작위)일 뿐 공작령은 아니다.
영국 군주는 전통적으로 채널 제도에서 남성이든 여성이든 노르망디 공작으로 알려져 있다.[1]
일부 다른 왕가에서도 왕자나 공주에게 공작 작위를 수여하는 전통이 남아 있다. 이러한 국가는 벨기에, 스페인, 스웨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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