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정치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조선의 정치는 1392년 건국부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으로 멸망할 때까지 이어진 정치 체제를 의미한다. 건국 초에는 고려의 제도가 일부 유지되었으나, 태종의 왕권 강화 시도를 거쳐 세조 때 《경국대전》이 편찬되면서 통치 체제가 정비되었다. 조선의 정치는 왕과 신료 간의 권력 균형 속에서 전개되었으며, 특히 중기 이후 붕당 정치가 발달하여 정치 세력 간의 갈등과 타협이 반복되었다.
조선은 중앙집권적 통치 기구를 갖추고 있었으며, 왕을 정점으로 의정부, 육조, 삼사 등의 기관이 국정을 운영했다. 지방 행정은 팔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군사 제도는 국방을 담당했다. 정치 세력으로는 왕, 양반 사대부, 붕당 등이 있었으며, 붕당 정치는 훈구와 사림의 대립, 동인과 서인의 분열, 그리고 노론과 소론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대외 관계는 명나라와 청나라에 대한 사대 외교를 기본으로 했으며, 일본, 류큐 등 주변 국가와도 관계를 맺었다. 19세기 후반에는 개항과 함께 여러 국가와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고,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외교권을 상실하고 결국 식민지로 전락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조선의 정치 - 대한제국 중추원
대한제국 중추원은 갑오개혁으로 설립되어 의회적 성격을 갖추었으나, 공화정 수립 루머로 황제의 견제를 받았으며, 독립협회 폐지 이후 자문기관으로 역할이 축소되다가 1907년 기능이 종식되었다. - 조선의 정치 - 아관파천
아관파천은 1895년 을미사변 이후 고종이 1896년부터 약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한 사건으로, 생존을 위한 선택이라는 긍정적 평가와 러시아의 이권 침탈이라는 부정적 평가가 있으며, 조선 정치의 급격한 변화와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를 가져왔다. - 나라별 정부 기관 - 국무회의
국무회의는 대한민국 대통령을 의장으로, 예산, 법률안, 외교, 군사 등 국정 현안을 심의하는 중요한 기관이며, 대통령, 국무총리, 국무위원으로 구성되고, 정례회의는 매주 1회, 임시회의는 필요에 따라 소집된다. - 나라별 정부 기관 - 대한민국 고용노동부
대한민국 고용노동부는 고용, 노동 관련 사무를 총괄하는 중앙행정기관으로, 사회부 노동국에서 출발하여 노동청, 노동부를 거쳐 2010년 현재 명칭으로 변경되었으며, 고용정책, 근로조건, 노사관계, 산업안전보건 등의 업무를 관장한다. - 한국사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 한국사 - 토기
토기는 점토를 구워 만든 그릇으로, 일본에서는 구움 정도에 따라 도자기, 자기와 구분되며 인류 최초의 화학적 변화 응용 사례로 식생활과 문화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다원설이 유력한 발상지와 일본 열도 1만 6500년 전 토기 발견이 특징이며, 일본어 관점에서 정의, 역사, 제작 과정, 용도, 세계 각지 토기 문화를 설명한다.
조선의 정치 | |
---|---|
조선의 정치 | |
![]() | |
정치 체제 | |
정치 형태 | 전제군주제 |
통치 이념 | 성리학 |
최고 통치 기구 | 의정부 |
관직 체계 | |
품계 | 정1품 ~ 종9품 |
문반 | 문관 |
무반 | 무관 |
주요 관직 |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도승지 대사헌 대사성 |
법률 | |
기본 법전 | 경국대전 |
주요 정치 세력 | |
훈구파 | 공신 세력 척신 세력 |
사림파 | 성리학 이념 향촌 자치 강화 |
붕당 | 동인 서인 남인 북인 |
세도 가문 |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
정치 활동 | |
과거 제도 | 문과 무과 생원진사시 |
언론 활동 |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
왕권 강화 | 탕평책 대동법 |
중앙 정치 기구 | |
국왕 직속 | 승정원 의금부 춘추관 예문관 |
행정 담당 | 의정부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
사법 담당 | 한성부 형조 사헌부 의금부 |
언론 담당 |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
군사 담당 | 오위도총부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
왕실 관련 | 종부시 돈녕부 예빈시 상의원 사옹원 |
지방 행정 구역 | |
행정 단위 | 부 목 군 현 |
관찰사 | 감영 |
수령 | 부윤 목사 군수 현령 현감 |
2. 역사적 배경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아 건국되었으며, 초기에는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 세력이 재상 중심의 정치를 강조하였다.[48] 국왕은 종신 통치하며 신하와 백성으로부터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받았지만, 신하는 국왕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천재지변은 국왕의 과실로 여겨져 국왕은 이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태종의 왕자의 난과 세조의 왕위 찬탈은 왕권 강화를 위한 시도였으나,[48][49]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에서 보듯 국왕은 정국 안정을 위해 반정 공신들의 협력을 얻어야 했고, 이는 왕권 약화로 이어졌다.[50] 이러한 왕권 약화는 붕당 출현의 배경 중 하나였다.
사림파가 정치의 중심에 들어서면서 붕당이 형성되고 붕당 정치가 발달하였다.[52] 붕당은 동인과 서인의 분화를 시작으로, 남인, 북인, 노론, 소론 등으로 분화되었으며,[7][8] 영조 시기 사도세자의 죽음을 두고 벽파와 시파가 생기기도 하였다.[9] 조선 중기 이후 국왕의 주요 역할은 붕당 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정책을 조율하는 것이었다. 숙종의 환국정치나[54] 영조와 정조 시기의 탕평책은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19세기에는 홍경래의 난, 임오군란, 동학 혁명 등 여러 반란이 일어났다. 1510년에는 일본 상인과 정착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모든 일본인이 추방되고 항구가 폐쇄되기도 했다. 조선은 명나라와 청나라를 '대국 섬김'(사대, ''sadae'')의 대상으로 삼았고, 여진족, 일본, 류큐 등 주변 국가와도 관계를 유지했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1차 및 2차 만주 침략을 겪었으며, 강화도 조약 이후 외교적 접근 방식을 바꾸어 서구 열강과도 외교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2. 1. 건국과 초기 제도
국왕은 종신토록 통치했으며, 임명직과는 달랐다. 조선의 국왕은 모두 전주 이씨였으며 태조의 후손이었다. 조선 국왕 목록은 조선 국왕 목록을 참고하라. 유교 철학에 따라 국왕은 신하와 백성으로부터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받았지만, 신하는 국왕이 잘못된 길을 갈 경우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의무도 있었다. 천재지변은 국왕의 과실로 인해 발생한다고 여겨졌으며, 따라서 조선 국왕은 천재지변의 발생에 매우 민감했다.2. 2. 붕당 정치의 전개
사림파가 정치의 중심에 들어서며 붕당이 형성되고 붕당 정치가 발달하였다. 초기 훈구파와 경쟁하였던 사림파는 몇 차례의 사화를 겪으며 위기를 맞기도 하였으나 결국 훈구파를 퇴출시키고 조선 정치의 핵심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붕당은 동인과 서인의 분화로 촉발되어 이후 남인, 북인, 노론, 소론 등으로 분화되었고 영조 시기 사도세자의 죽음을 두고 벽파와 시파가 생기기도 하였다.[52]동인과 서인이 갈라선 붕당의 발생은 조정의 요직을 둘러싼 인사권 장악이 표면적 이유였으나, 양반 계층의 인구 증가에 비해 관직의 수가 고정되어 있는 현실과 각종 정책 시행에서의 대립 등이 배경에 있었다.[53] 한편 이러한 붕당 정치의 발생에는 지속적인 왕권의 약화가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반정을 통해 추대된 왕의 경우 반정공신의 영향력을 무시하기 어려웠고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는 민심의 이반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신료와 타협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48]
조선 중기 이후 국왕의 주요 정치적 역할은 이들 붕당과 적절한 긴장과 타협을 통해 정책을 조율하는 것이었다. 숙종의 환국정치나[54] 영조, 정조 시기의 탕평책[55] 등은 모두 이를 위한 전략이었다. 조선 시기 붕당에 대한 견해는 초기에 오로지 군주와 신하만 있을 뿐이라며 부정적인 반응이 주류였으나 후기에는 군자당과 소인당의 구분을 두며 붕당의 형성을 합리화하였다.[53]
조선 말 세도정치가 등장하며 붕당은 정치적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48] 붕당 정치를 당쟁으로 표현하는 후대의 박한 평가와 달리 붕당 정치의 기반이 상실되고 세도정치가 들어서자 조선은 원래 지니고 있던 각종 모순적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16세기에는 동인과 서인 사이에서 전국적인 분열이 발생했고, 수십 년 안에 동인은 결국 북인과 더 온건한 남인으로 갈라졌다.[7] 17세기에는 서인 역시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다.[8]
영조와 정조의 치세 하에서, 왕들은 일반적으로 어떤 파벌도 다른 파벌보다 선호하지 않는 균형 정책인 ''탕평책''을 추구했다.[9] 정조의 치세에는 이전의 파벌들을 가로질러 특정 왕실 정책에 대한 태도가 달랐던 두 그룹, 벽파와 시파 사이의 갈등이 나타났다.
2. 3. 왕권 강화 노력과 한계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 세력이 주도하여 왕권 견제와 재상 중심 정치를 강조하였다.[48] 조선 국왕들은 여러 차례 왕권 강화를 시도했으나, 신하들과의 타협이 불가피했다. 왕자의 난은 재상 중심 정치를 추구한 정도전과 왕권 강화를 원했던 태종의 충돌이었으며,[48] 세조의 왕위 찬탈 역시 비슷한 성격을 지닌다.[49] 조선 전기, 중기, 후기에 걸쳐 정치적 쟁점과 지형은 변화했지만, 왕권과 신권 사이의 긴장과 타협은 조선 정치의 주요 동력 중 하나였다.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은 신하들의 도움으로 국왕을 몰아내고 새 국왕을 옹립한 사건으로, 국왕은 정국 안정을 위해 반정 공신들의 협력을 얻어야 했고, 이는 왕권 약화로 이어졌다. 왕권 약화는 붕당의 출현과 붕당 정치 전개의 배경 중 하나였다. 조선 중기 이후 왕권은 초기에 비해 약화되어, 군주의 권력이 약하고 신하의 발언권이 강하다는 군약신강이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50] 그러나 왕권 약화가 곧 국가 위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잦은 사화, 옥사, 반정, 전쟁 속에서도 조선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운영되었다. 붕당 정치는 오히려 정치 세력 간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큰 파국을 막는 효과를 낳기도 했다. 붕당 간 갈등은 기본적으로 신하들 사이의 문제였고, 국왕은 붕당 사이의 조정자 역할을 할 수 있었다.[51]
2. 4. 개항과 외세의 침략
19세기 조선의 사회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여러 반란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반란으로는 1811년 북부 지방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 1882년의 임오군란, 1894-1895년의 동학 혁명이 있다.소수 민족 사이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1583년 북동부의 퉁구스 부족은 니탕개의 지휘 아래 봉기하여 여러 마을을 점령했으나, 신립 장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후 부족민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기 위해 해당 지역에 시장이 설립되었다.[12] 1510년에는 일본 상인과 정착민들이 지방 사령관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 사건 이후 모든 일본인이 추방되었고 2년 동안 항구가 폐쇄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접근이 크게 제한되었고, 이러한 사건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다.
조선의 국제 관계는 중국 명나라와 이후 만주의 청나라에 대한 "대국 섬김"(사대, ''sadae'')이라는 한국의 신유교적 이상을 구현했다. 조선은 북쪽의 여진족, 바다 건너의 일본 및 류큐 국가를 포함한 다양한 인접 국가들과 관계를 유지했다. 이를 위해 수도와 제주, 부산과 같은 국경 도시에 통역 학교가 세워졌다.
조선 왕조는 19세기 말 주권이 점진적으로 상실되기 전 두 차례의 주요 침략을 겪었다. 1590년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끈 2단계의 일본 침략인 임진왜란과 17세기 초 1차 및 2차 만주 침략이었다. 일본군은 결국 격퇴되었지만, 조선은 만주족에게 항복해야만 했고, 만주족은 이후 청나라가 되었다.
강화도 조약과 1876년 개항 이후, 외교적 접근 방식이 바뀌었고, 조선 정부는 인접 국가와 유럽 국가 모두와 외교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3. 통치 기구
조선의 국왕은 종신토록 통치했으며, 전주 이씨 태조의 후손이었다. 유교 철학에 따라 국왕은 신하와 백성으로부터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받았지만, 신하는 국왕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의무도 있었다. 천재지변은 국왕의 과실로 인해 발생한다고 여겨졌으며, 조선 국왕은 천재지변 발생에 매우 민감했다.
다음은 기타 중앙 통치 기구이다.
- '''승정원(承政院)''' - 국왕과 육조 사이의 연락 기관 역할을 했다. 각 조에 한 명씩, 정3품의 6명의 승지가 있었다. 왕명을 육조에 전달하고 국왕에게 상소를 올리는 것이 주요 역할이었지만, 국왕에게 자문하고 국왕 측근의 다른 중요한 직책을 수행하기도 했다.
- '''한성부(漢城府)''' - 수도인 한양(현재의 서울)을 관할했다. 정2품의 판윤을 수장으로 하는 9명의 관원으로 구성되었으며, 오늘날 서울시장에 해당한다.
- '''의금부(義禁府)''' - 국왕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 수사 및 사법 기관이었다. 주로 반역죄 및 국왕과 관련된 중대한 사건을 처리했으며, 피의자(대부분 정부 관리)를 체포, 수사, 투옥하고 형을 집행하는 역할을 했다.
- '''춘추관(春秋館)''' - 관원들은 정부 및 역사 기록을 작성, 편찬 및 관리했다.
- '''성균관''' - 미래의 정부 관리를 양성하는 국립 대학이었다. 과거 시험의 첫 두 단계를 통과한 사람들이 성균관에 입학했다. 수업 규모는 보통 200명이었으며,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엄격한 일과와 학교 규칙을 따랐다. 또한 중국 및 한국 유학자들을 위한 국가 사당 역할도 했다. 책임자는 정3품의 대사성이었으며, 다른 관청의 관원들을 포함한 36명의 다른 관원들이 학원을 운영하는 데 참여했다.
3. 1. 중앙 통치 기구
태조 이성계는 명나라와 국호를 정하고,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을 저술하여 성리학을 이념으로 하는 국가 운영 제도를 설명하였다.[72] 그러나 개국 초의 제도는 고려의 영향을 받아 의정부 중심이었으나, 태종의 육조 직계제 시행으로 변화를 맞았다. 세조 시기까지 제도 정비 논의가 이어졌고, 성종 때 《경국대전》이 시행되었다. 이후 조선은 《속대전》, 《대전회통》 등으로 《경국대전》을 보강했으나, 갑오경장까지 기본 체제로 유지되었다.[73][74]조선 시대에는 군사 분야를 제외하고 천민과 첩의 자녀를 제외한 모든 남자는 과거 시험을 통해 문관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양반 계급만이 과거 시험을 위한 시간, 자금, 연줄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함경도와 평안도 출신은 관직 진출에 제한을 받았다. 관료들은 1년에서 5년 임기의 관직에서 근무했으며, 성공적인 관료는 여러 관직을 역임할 수 있었다.
중앙 통치 기구는 다음과 같다.
- '''의정부''': 조선 왕조 최고 심의 기구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중요성이 퇴색되었다.
- '''육조''': 조선의 최고 행정 기관이었다.
- '''삼사''': 국왕과 관료를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는 세 개의 관청이다.
3. 1. 1. 의정부
태조에서 태종 초기까지 정치적 의사결정은 의정부를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이는 고려 상서성 제도의 연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의정부는 조선 왕조의 최고 심의 기구였으나, 통치 초 몇 세기 이후 그 중요성이 퇴색되었다. 12명의 관료로 구성되었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은 정부 내 최고위직 관료(정1품)였다. 그들은 정1품의 좌찬성, 우찬성과 7명의 하위 관료의 보좌를 받았다. 국무회의의 권력은 국왕의 권력과 반비례했다. 때로는 조선 정부의 최고 행정 기구인 육조를 직접 통제하기도 했지만, 주로 강력한 국왕 아래에서 자문 역할을 수행했다. 국무회의 의원들은 세자의 스승을 포함한 여러 다른 직책을 역임했다.[71] 문반의 최고 품계는 정1품의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의정부를 이루는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에 이르렀다.3. 1. 2. 육조
육조는 조선의 최고 행정 기관이었다. 각 조의 판서(判書)는 정2품, 참판(參判)은 종2품, 참의(參議)는 정3품 당상관이었다. 이들 외에도 각 부에는 정5품 정랑(正郎) 3명과 정6품 좌랑(佐郎) 3명이 있어, 6품 이상 관료가 총 9명이었다.부서 | 역할 |
---|---|
이조(吏曹) | 관료 임명 |
호조(戶曹) | 세금, 재정, 인구 조사, 농업 및 토지 정책 |
예조(禮曹) | 의례, 문화, 외교, 과거 |
병조(兵曹) | 군사 업무 |
형조(刑曹) | 법률 시행, 노예 제도, 형벌 |
공조(工曹) | 산업, 토목 공사, 제조업, 광업 |
3. 1. 3. 삼사
삼사(三司)는 국왕과 관료에 대한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세 개의 관청을 통칭하는 말이다. 삼사에서 근무하는 관료들은 다른 관청에 비해 젊고 품계가 낮았지만, 특별한 특권과 위세를 누렸다. 이들은 도덕성과 가문에 대한 더욱 철저한 검토를 거쳤다.[1]- 사헌부 (司憲府): 중앙 및 지방 정부의 행정과 관료들의 부패나 무능을 감시했다. 대사헌을 포함한 30명의 관료가 운영했다.
- 사간원 (司諫院): 국왕의 잘못된 행위나 부적절한 정책에 대해 간언하는 것이 주요 기능이었다. 또한 부패한 관료를 탄핵하고 전반적인 국정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 대사간을 수장으로 하는 5명의 관료로 구성되었다. 언론 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종종 사헌부와 중복되었으며, 때로는 국왕에게 공동 상소를 제출하기도 했다.
- 홍문관 (弘文館): 왕실 도서관을 관리하고 유교 철학을 연구하며 국왕의 질문에 답변하는 연구소 역할을 했다. 21명의 관료로 구성되었지만, 3명의 최고위 관료는 의정부에서 봉직하는 대신이었고, 실제 관청의 수장은 부제학이었다. 이 관료들은 국왕과 유교 철학을 논하는 경연에 참여했다. 이러한 토론은 종종 현안에 대한 언급으로 이어졌고, 이 관료들은 조언자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집현전이 계유정난 이후 세조에 의해 폐지된 후 대체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삼사는 정부의 다른 부서에 대한 핵심적인 견제 역할을 수행했다. 사헌부와 사간원은 모든 직위에 대한 잠재적 임명자를 검토하고 그들의 가문을 조사할 수 있는 고유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1] 따라서 이들은 양반 귀족의 청렴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3. 2. 지방 통치 기구
조선 시대 지방 통치 기구는 8개의 도(道)로 구성되었으며, 각 도는 종2품 관찰사가 다스렸다.[2] 도 아래에는 부(府), 목(牧), 군(郡), 현(縣)이 있었다. 부는 도 내 주요 5개 도시를 관할하는 행정 기구로, 부윤이 다스렸으며 관찰사와 동급이었다.[3] 20개의 목은 주(州)라고 불리는 큰 군(郡)들을 관할했으며, 정3품 목사가 다스렸다.[4] 조선에는 80개의 군이 있었고, 각 군은 종4품 군수가 다스렸다.[5] 현은 큰 현과 작은 현으로 나뉘어 각각 종5품 현령과 종6품 현감이 다스렸다.[6]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관리들은 품계에 따라 임명되었으며, 1년에서 5년 임기로 근무했다. 때때로 암행어사가 파견되어 지방 관리들을 감시했는데, 암행어사는 품계는 낮지만 부패한 관리를 해임할 수 있는 왕의 권한을 위임받았다.
각 군과 현에는 중앙 정부에서 임명한 지방 수령이 있었고, 각 군(郡)의 양반들은 향청을 구성했다. 이들은 세습직으로 평생 봉사한 하위 계층인 향리와 교류했다. 각 군의 향리들은 중앙 정부와 소통하는 임무를 맡은 서울의 사자를 두었다.
3. 3. 군사 제도
조선 건국 초기에는 고려의 군사 제도가 유지되었으며, 이는 조선 태조가 고려의 국왕으로 즉위한 후 명나라와의 조율을 통해 국호를 정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71][72]4. 정치 세력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에 의해 주도되어 왕권에 대한 견제와 재상권의 주도가 두드러졌다.[48] 조선의 국왕은 여러 차례 왕권 강화를 도모하였으나 신료들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여야만 하였다. 왕자의 난은 정종을 앞세운 정도전의 재상권 우선 사상과 왕의 직접 통치를 이루고자 한 태종의 충돌이었으며,[48] 이후 세조의 찬위 역시 비슷한 충돌의 성격이 있다.[49] 조선은 전기와 중기, 후기에 따라 각각의 정치 쟁점과 지형이 변화를 겪었으나 왕권과 신권의 긴장과 타협은 지속적인 정치의 주요 원동력 가운데 하나였다.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은 신료의 도움을 받아 국왕을 축출하고 새로운 국왕을 추대한 사건으로, 국왕은 정국 안정을 위해 반정공신의 협력을 구해야 했고 이는 왕권 약화로 이어졌다. 왕권 약화는 붕당의 출현과 붕당 정치가 이루어지는 배경의 하나가 되었다. 조선 중기 이후 왕권은 초기에 비해 상당히 약화되어 조선은 군주의 권력이 약하고 신하의 발언권이 강하다는 군약신강이 언급된다.[50] 왕권 약화가 곧 국가의 위기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각종 사화와 옥사, 반정과 전쟁 속에서도 조선은 비교적 안정적인 국가 운영을 이어나갔다. 오히려 붕당 정치는 정치 참여 세력의 이해를 조정하여 보다 큰 파국을 미연에 막는 효과가 있었다. 붕당의 갈등은 기본적으로 신료들 사이의 것이었고, 국왕은 붕당 사이의 조정자를 자처할 수 있었다.[51]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은 “군주는 백성에 의존한다”고 하며 국가의 근간이 백성임을 밝혔고,[56] 성리학의 기본 이념 역시 백성의 교화를 통한 덕치에 있었으나,[57] 실제 정치에서 백성은 의사결정의 주체가 될 수 없었다. 조선은 관료 집단이 정치를 독점한 전제적 사회로 평가될 수 있으나, 현실은 그보다 복잡하여 다양한 공론(公論)이 관료제에 영향을 주었다. 공론의 주체는 주로 산림으로 불린 재야 유학자들이었으나,[58] 조선 후기 신분제에 균열이 일어나 상민이 양반으로 변화하면서 이들의 자치 조직인 계나 향약 등을 통한 의견도 정치적 힘을 지녔다. 조선은 근대 서구와 같은 시민사회가 형성될 수 없는 사회 구조였으나, 지배층의 일방적 전제 정치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59]
조선 초 신문고 등의 제도는 백성의 억울함을 듣는다는 취지였으나 실제로는 신료들의 비리를 탄핵하여 왕권 강화를 도모하는 수단으로 쓰였다.[43] 조선 후기에는 왕의 행차에서 직접 호소하는 격쟁이 의사 표현의 도구로 사용되었는데, 영조가 격쟁을 적법한 절차로 인정한 이래[44] 드물지 않게 사용되었다. 정조 시기와 순조 시기의 격쟁 내용을 보면 승려가 세금 감면을 요구하거나 양반이니 군역에서 빼 달라는 요구, 혼인 약속을 지키게 해 달라는 요구 등이 있었다.[60]
백성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제도가 있어도 의사결정은 관료제 내의 신료들 사이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제도 안에서 모든 요구를 해소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백성들은 익명의 벽서를 써서 길거리에 붙이거나,[61] 극단적인 경우 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62] 민란의 목적은 억울함의 해소였기 때문에 중앙정부가 안찰사 등을 파견하면 민란의 대표인 장두는 요구 사항을 전달하고 난을 일으킨 책임을 지는 경우가 많았다. 임술농민봉기의 전개 과정을 보면 백성들이 기존의 자치 조직인 향회를 봉기 이후 의사결정 조직으로 활용하였음을 보여준다.[63]
조선 왕조 전체에 걸쳐 다양한 지역적, 이념적 파벌들이 정치 체제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경쟁했다. 조선 초에는 수도 세력과 영남 기반의 사림 세력 간의 긴장이 국가 정치를 지배했다. 교육 기관과 유교 사당의 기능을 결합한 전국 각지의 서원들은 종종 지역 엘리트의 파벌적 정렬을 반영했다. 16세기에는 동인과 서인 사이에서 전국적인 분열이 발생했고, 수십 년 안에 동인은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졌다.[7] 17세기에는 서인 역시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다.[8]
4. 1. 사림과 훈구
조선은 이론적으로 국왕이 절대적 주권을 지녔다는 점에서 전제군주제의 면모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료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는 관료제 사회였다.[41] 양반을 기반으로 한 사대부 관료제는 국왕과 신료들의 통치 기구를 통하여 정치적 발언권을 가질 수 있었고, 그 체제는 《경국대전》에 의해 규정되었다.[42] 국왕이 절대적인 전제 군주로 존중되었으나 실제로는 신료를 장악하지 못하면 반정이 일어나거나 각종 역모와 반란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국왕은 스스로를 절제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신료와 타협하여야 하였다.양반 관료인 사대부들만이 정치적 의사 결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조선의 정치는 신분제의 틀 안에서 작동하였다. 그러나 이 제도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도 일정한 발언권을 행사하였는데, 신문고를 통해 억울한 사정을 알리거나,[43] 왕의 행차에 나타나 징과 꽹과리를 두드리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격쟁 등의[44] 방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다. 때로는 길거리에 자신들의 주장을 써 붙이는 벽서 등의 방법도 동원되었고,[45] 극단적인 경우에는 민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46]
몇 가지 방법이 있다 하더라도 사대부 층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의견 표출은 정상적인 제도를 통하기 어려웠다. 특히 노비가 자신의 주인을 대상으로 소송하는 것은 윗사람을 능멸하는 강상죄로 보아 금지하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지방의 향리나 백성이 파견된 수령을 대상으로 고발하는 것도 금지되었다.[47]
조선 시대에 군사 분야를 제외한 책임 있는 관직에 임명되기 위해서는 일련의 과거 문과 시험을 치르고 각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보통 4~5회). 이론적으로는 천민 (최하층)과 첩의 자녀를 제외한 모든 남자는 과거 시험을 치러 문관이 될 수 있었고, 그리하여 양반 (귀족)이 될 수 있었다. 실제로는 양반 계급만이 과거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시간과 자금, 그리고 필요한 연줄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함경도와 평안도의 북부 지방 출신들은 왕조의 상당 기간 동안 관직에 오르는 것이 금지되었다.
관료들은 1년에서 5년까지 임기가 정해진 관직에서 근무했다. 성공적인 관료는 경력 동안 수십 개의 관직을 역임할 수 있었다.
4. 2. 붕당의 분화
조선 중기 이후 사림파가 정치의 중심에 들어서면서 붕당이 형성되고 붕당 정치가 발달하였다. 초기에는 이른바 훈구파와 경쟁하였던 사림파는 몇 차례의 사화를 겪으며 위기를 맞기도 하였으나 결국 훈구파를 퇴출시키고 조선 정치의 핵심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붕당은 동인과 서인의 분화로 촉발되어 이후 남인, 북인, 노론, 소론 등으로 분화되었고 영조 시기 사도세자의 죽음을 두고 벽파와 시파가 생기기도 하였다.[52]동인과 서인이 갈라선 붕당의 발생은 조정의 요직을 둘러싼 인사권 장악이 표면적 이유였으나, 양반 계층의 인구 증가에 비해 관직의 수가 고정되어 있는 현실과 각종 정책 시행에서의 대립 등이 배경에 있었다.[53] 한편 이러한 붕당 정치의 발생에는 지속적인 왕권 약화가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을 통해 추대된 왕의 경우 반정공신의 영향력을 무시하기 어려웠고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는 민심의 이반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신료와 타협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48]
조선 중기 이후 국왕의 주요 정치적 역할은 이들 붕당과 적절한 긴장과 타협을 통해 정책을 조율하는 것이었다. 숙종의 환국정치나[54] 영조, 정조 시기의 탕평책[55] 등은 모두 이를 위한 전략이었다. 조선 시기 붕당에 대한 견해는 초기에 오로지 군주와 신하만 있을 뿐이라며 부정적인 반응이 주류였으나, 후기에는 군자당과 소인당의 구분을 두며 붕당의 형성을 합리화하였다.[53]
조선 말 세도정치가 등장하며 붕당은 정치적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48] 붕당 정치를 당쟁으로 표현하는 후대의 박한 평가와 달리, 붕당 정치의 기반이 상실되고 세도정치가 들어서자 조선은 원래 지니고 있던 각종 모순적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4. 3. 세도 정치
18세기 영조와 정조의 치세 하에서, 왕들은 일반적으로 어떤 파벌도 다른 파벌보다 선호하지 않는 균형 정책인 ''탕평책''을 추구했다.[9] 정조의 치세에는 이전의 파벌들을 가로질러 특정 왕실 정책에 대한 태도가 달랐던 벽파와 시파 사이의 갈등이 나타났다. 벽파는 왕에게 더 반대했고 주로 노론으로 구성되었다.[10][11] 19세기에는 조선의 정치가 변하여 학문적 파벌 대신 외척 가문(''척가''라고 불림)이 왕위를 지배하게 되었다. 19세기 대부분 동안 안동 김씨(장동 김씨) 가문이 정부를 장악했다. 그러나 권력이 풍양 조씨로 넘어간 짧은 기간이 있었다.4. 4. 개화파와 척사파
고종의 치세 동안, 1870년대부터 명성황후가 실질적인 권력을 잡고 신중한 근대화와 개방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녀의 정책은 반동주의자와 진보주의자 모두에게 반대받았다. 개화당 (진보주의자라고도 함)은 서구 및 일본식으로 국가를 근대화하려 했다.[11] 근대화론자들 사이에서도 파벌이 생겨, 한 파벌은 러시아 제국을 선호했고, 다른 파벌은 일본 제국을 선호했다. 처음에는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했지만,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러시아의 영향력은 약화되었다. 이러한 파벌 싸움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이어졌으며, 한국 문제에 대한 외세의 간섭을 증가시켰다.[11]5. 외교 관계
조선은 명나라와 청나라에 대한 "대국 섬김"(''sadae'')이라는 유교적 이상을 구현했다. 북쪽의 여진족, 바다 건너 일본 및 류큐 등 주변 국가와도 관계를 맺었다. 이를 위해 수도와 제주, 부산 등 국경 도시에 통역 학교를 세웠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17세기 초 1차 및 2차 만주 침략을 겪었다. 일본군은 격퇴되었지만, 조선은 만주족에게 항복해야 했고, 만주족은 이후 청나라가 되었다.
강화도 조약과 1876년 개항 이후, 외교 방식이 바뀌어 조선 정부는 인접 국가 및 유럽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5. 1. 대중국 관계
조선은 중국의 명나라와 이후 만주의 청나라에 대해 "대국 섬김"(사대, ''sadae'')이라는 한국의 신유교적 이상을 구현하며 국제 관계를 맺었다.하위 수준에서, 조선은 북쪽의 여진족, 바다 건너의 일본 및 류큐 국가를 포함한 다양한 인접 국가들과 관계를 유지했다. 이를 위해 수도와 제주, 부산과 같은 국경 도시에 통역 학교가 세워졌다.
조선 왕조는 19세기 말 주권이 점진적으로 상실되기 전 두 차례의 주요 침략을 겪었다. 1590년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끈 2단계의 일본 침략인 임진왜란과 17세기 초 1차 및 2차 만주 침략이었다. 일본군은 결국 격퇴되었지만, 조선은 만주족에게 항복해야만 했고, 만주족은 이후 청나라가 되었다.
5. 2. 대일본 관계
조선은 바다 건너의 일본 및 류큐 국가를 포함한 다양한 인접 국가들과 관계를 유지했다. 이를 위해 수도와 제주 및 부산과 같은 국경 도시에 통역 학교가 세워졌다.조선 왕조는 19세기 말 주권이 점진적으로 상실되기 전 두 차례의 주요 침략을 겪었다. 1590년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끈 2단계의 일본 침략인 임진왜란이 있었다.[13] 비록 일본군은 결국 격퇴되었지만, 이후 조선은 강화도 조약과 1876년 개항 이후, 외교적 접근 방식이 바뀌었고, 조선 정부는 인접 국가와 유럽 국가 모두와 외교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조약 | 연도 | 조인국 | |
---|---|---|---|
영어 이름 | 한국어 이름 | ||
계해조약 | 계해조약|癸亥條約한국어 | 1443 | 쓰시마 (일본) |
임신조약 | 임신조약|壬申條約한국어 | 1512 | 쓰시마 (일본) |
정미약조 | 정미약조|丁未約條한국어 | 1547 | 쓰시마 (일본) |
기유약조 | 기유약조|己酉約條한국어 | 1609 | 도쿠가와 막부 (일본) |
일본-조선 강화도 조약 (Treaty of Ganghwa) |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한국어 | 1876[13] | 일본 |
제물포 조약 (Treaty of Chemulpo) | 제물포 조약|濟物浦條約한국어 | 1882 | 일본 |
한성 조약 (Treaty of Hanseong) | 한성조약|漢城條約한국어 | 1885[20] | 일본 |
한일 의정서 |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한국어 | 1904[25] | 일본[26] |
제1차 한일 협약 | 제1차 한일협약|第一次韓日協約한국어 | 1904[27] | 일본[28] |
일본-한국 협약 | 1905[29] | 일본[30] | |
일본-한국 협약 | 1905[31] | 일본[32] | |
제2차 한일 협약 (Eulsa Treaty) | 제2차 한일협약|第二次韓日協約한국어(을사조약|乙巳條約한국어) | 1905[33] | 일본[34] |
정미 7조약 | 정미7조약|丁未七條約한국어 | 1907[35] | 일본 |
한일 병합 조약 |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한국어 | 1910[36] | 일본 |
5. 3. 대외 개방과 불평등 조약
조선은 명나라와 청나라를 "섬기는"(사대, ''sadae'') 신유교적 이상을 따랐다. 낮은 수준에서는 북쪽의 여진족, 바다 건너 일본 및 류큐 국가와 관계를 맺었고, 수도와 제주, 부산 등 국경 도시에 통역 학교를 세웠다.조선은 1590년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침략과 17세기 초 만주족의 침략을 겪었다. 일본군은 격퇴되었지만, 만주족에게 항복해야 했고, 만주족은 이후 청나라가 되었다.
강화도 조약과 1876년 개항 이후, 조선 정부는 인접 국가와 유럽 국가 모두와 외교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조약 | 연도 | 조인국 | |
---|---|---|---|
영어 명칭 | 한국어 명칭 | ||
일본-조선 강화도 조약* (Treaty of Ganghwa) |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 | 1876[13] | 일본 |
조미 수호 통상 조약* |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 1882[14] | 미국 |
제물포 조약* (Treaty of Chemulpo) | 제물포 조약(濟物浦條約) | 1882 | 일본 |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Joseon–Qing Communication and Commerce Rules) |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 1882[15] | 청(중국) |
조독 수호 통상 조약* | 조독수호통상조약(朝獨修好通商條約) | 1883[16] | 독일 |
조영 수호 통상 조약* | 조영수호통상조약(朝英修好通商條約) | 1883[17] | 영국 |
조로 수호 통상 조약* | 조로수호통상조약(朝露修好通商條約) | 1884[18] | 러시아 |
조이 수호 통상 조약* | 조이수호통상조약(朝伊修好通商條約) | 1884[19] | 이탈리아 |
한성 조약* (Treaty of Hanseong) | 한성조약(漢城條約) | 1885[20] | 일본 |
조불 수호 통상 조약* | 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 | 1886[21] | 프랑스 |
조오 수호 통상 조약* | 조오수호통상조약(朝奧修好通商條約) | 1892[22] | 오스트리아 |
대한-청국 통상 조약 | 대한국·대청국통상조약 (大韓國大淸國通商條約) | 1899 | 청(중국) |
조벨 수호 통상 조약* | 조벨수호통상조약(朝白修好通商條約) | 1901[23] | 벨기에 |
조덴 수호 통상 조약* | 조덴수호통상조약(朝丁修好通商條約) | 1902[24] | 덴마크 |
한일 의정서* |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 1904[25] | 일본[26] |
제1차 한일 협약* | 제1차 한일협약 (第一次韓日協約) | 1904[27] | 일본[28] |
일본-한국 협약* | 1905[29] | 일본[30] | |
일본-한국 협약* | 1905[31] | 일본[32] | |
제2차 한일 협약* (Eulsa Treaty) | 제2차 한일협약 (第二次韓日協約) (을사조약(乙巳條約)) | 1905[33] | 일본[34] |
정미 7조약* | 정미7조약(丁未七條約) | 1907[35] | 일본 |
한일 병합 조약* |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 | 1910[36] | 일본 |
5. 4. 외세의 침략과 저항
19세기 조선의 사회 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여러 반란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반란으로는 1811년 북부 지방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 1882년의 임오군란, 1894-1895년의 동학 혁명이 있다.소수 민족 사이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1583년 북동부의 퉁구스족은 니탕개의 지휘 아래 봉기하여 여러 마을을 점령했으나, 신립 장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후 부족민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기 위해 해당 지역에 시장이 설립되었다.[12] 1510년에는 일본 상인과 정착민들이 지방 사령관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 사건 이후 모든 일본인이 추방되었고 2년 동안 항구가 폐쇄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접근이 크게 제한되어 이러한 사건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다.
참조
[1]
문서
Lee (1984), p. 176
[2]
웹사이트
관찰사
http://100.daum.net/[...]
Britannica Korea
2014-03-16
[3]
웹사이트
부윤
http://100.daum.net/[...]
Britannica Korea
2014-03-16
[4]
웹사이트
목사
http://www.doopedia.[...]
Doopedia
2014-03-16
[5]
웹사이트
군수
http://100.daum.net/[...]
Britannica Korea
2014-03-16
[6]
웹사이트
현령
http://100.daum.net/[...]
Britannica Korea
2014-03-16
[7]
서적
조선당쟁사 1 사림정치와 당쟁: 선조부조 ~ 현종조
아름다운날
2007-11-12
[8]
서적
East Asia: A Cultural, Social, and Political History, Volume II: From 1600
https://books.google[...]
Cengage Learning
2013
[9]
문서
Lee (1984), p. 223
[10]
간행물
벽파
[11]
서적
조선당쟁사 2 탕평과 세도정치: 숙종조~고종조
아름다운날
2007-11-12
[12]
문서
Lee (1984), p. 193
[13]
Google books
Korea's Appeal to the Conference on Limitation of Armament
https://books.google[...]
Korean Mission to the Conference on the Limitation of Armament, Washington, D.C., 1921-1922. (1922).
[14]
Google books
Treaty and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Korea. Treaty of Friendship, Commerce, and Navigation dated May 22, 1882.
https://books.google[...]
Korean Mission
[15]
웹사이트
Korea-China Treaty System in the 1880s and the Opening of Seoul: Review of the Joseon-Qing Communication and Commerce Rules
http://english.histo[...]
2008-12
[16]
Google books
Treaty and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Germany and Korea. Treaty of Amity and Commerce dated November 23, 1883.
https://books.google[...]
Korean Mission
[17]
Google books
Treaty and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Great Britain and Korea ... dated November 26, 1883.
https://books.google[...]
Korean Mission
[18]
Google books
Treaty and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Korea and Russia. Treaty of Amity and Commerce dated June 25, 1884.
https://books.google[...]
Korean Mission
[19]
Google books
Treaty and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Korea and Italy. Treaty of Friendship and Commerce dated June 26, 1884.
https://books.google[...]
Korean Mission
[20]
Google books
Korean Traditional Culture
https://books.google[...]
2003
[21]
Google books
Treaty and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Korea and France. Treaty of Friendship, Commerce, and Navigation dated June 4, 1886.
https://books.google[...]
Korean Mission
[22]
Google books
Treaty and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Korea and Austria. Treaty of Amity and Commerce dated July 23, 1892.
https://books.google[...]
Korean Mission
[23]
Google books
Treaty and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Korea and Belgium. Treaty of Amity and Commerce dated March 23, 1901.
https://books.google[...]
Korean Mission
[24]
Google books
Treaty and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Korea and Denmark. Treaty of Friendship, Commerce, and Navigation dated July 15, 1902.
https://books.google[...]
Korean Mission
[25]
Google books
Treaty of Alliance Between Japan and Korea, dated February 23, 1904.
https://books.google[...]
Korean Mission
[26]
문서
Note that the Korean Mission to the Conference on the Limitation of Armament in Washington, D.C., 1921-1922 identified this as "Treaty of Alliance Between Japan and Korea, dated February 23, 1904"
[27]
Google books
Alleged Treaty, dated August 22, 1904.
https://books.google[...]
Korean Mission
[28]
문서
Note that the Korean diplomats in 1921-1922 identified this as "Alleged Treaty, dated August 22, 1904"
[29]
Google books
Alleged Treaty, dated April 1, 1905.
https://books.google[...]
Korean Mission
[30]
문서
Note that the Korean diplomats in 1921-1922 identified this as "Alleged Treaty, dated April 1, 1905"
[31]
Google books
Alleged Treaty, dated August 13, 1905.
https://books.google[...]
Korean Mission
[32]
문서
Note that the Korean diplomats in 1921-1922 identified this as "Alleged Treaty, dated August 13, 1905"
[33]
Google books
Alleged Treaty, dated November 17, 1905.
https://books.google[...]
Korean Mission
[34]
문서
Note that the Korean diplomats in 1921-1922 identified this as "Alleged Treaty, dated November 17, 1905"
[35]
Google books
Alleged Treaty, dated July 24, 1907.
https://books.google[...]
Korean Mission
[36]
서적
Korean Mission
https://books.google[...]
[37]
웹사이트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http://contents.hist[...]
[38]
웹사이트
조선 왕의 다양한 특성
http://contents.hist[...]
[39]
백과사전
경국대전
https://encykorea.ak[...]
[40]
뉴스
‘타자’(他者)를 어떻게 인정할 것인가… 조선 호락(湖洛)논쟁의 핵심
http://www.m-economy[...]
이코노미뉴스
2019-07-05
[41]
논문
조선왕조의 정치체제: 절대군주제
https://www.kci.go.k[...]
이헌창, 《경제사학》, 2017, vol.41, no.3, 통권 65호
[42]
웹사이트
중앙 정치 체제와 지방 행정 조직
http://contents.hist[...]
[43]
위키
신문고
http://dh.aks.ac.kr/[...]
[44]
위키
격쟁
http://dh.aks.ac.kr/[...]
[45]
백과사전
궤서
https://encykorea.ak[...]
[46]
백과사전
민란
https://encykorea.ak[...]
[47]
기록
형조에서 주인을 고발하는 노비, 수령을 고발하는 부사·서도·이민들에 대한 처벌 규정을 정하다
https://sillok.histo[...]
〈세종실록〉 15권, 세종 4년 2월 3일, 《조선왕조실록》
[48]
서적
조선시대사 1 - 국가와 세계
푸른역사
2015
[49]
웹사이트
세조의 왕권강화
http://contents.hist[...]
[50]
기록
심의의 일과 도적을 잡을 방책에 대해 의논하다
https://sillok.histo[...]
〈중종실록〉 9권, 중종 4년 10월 5일, 《조선왕조실록》
[51]
웹사이트
붕당정치의 의의
http://contents.hist[...]
[52]
웹사이트
붕당
http://contents.hist[...]
[53]
백과사전
붕당정치
https://encykorea.ak[...]
[54]
웹사이트
환국의 정치사적 의의
http://contents.hist[...]
[55]
위키
탕평
http://dh.aks.ac.kr/[...]
[56]
웹사이트
왕실의 권위와 견제 장치
http://contents.hist[...]
[57]
백과사전
덕치주의
https://encykorea.ak[...]
[58]
백과사전
산림
https://encykorea.ak[...]
[59]
논문
조선시대 시민사회론의 재검토
https://s-space.snu.[...]
김영민, 《한국정치연구》 제21집 제3호
2012
[60]
잡지
조선 백성은 원한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https://jmagazine.jo[...]
월간중앙
2023-06
[61]
백과사전
궤서
https://encykorea.ak[...]
[62]
백과사전
민란
https://encykorea.ak[...]
[63]
웹사이트
향회의 활용
http://contents.hist[...]
[64]
위키
성리학
http://dh.aks.ac.kr/[...]
[65]
기록
문하부에서 올린 시무(時務) 10개 조에 관한 상소문
https://sillok.histo[...]
〈정종실록〉 1권, 정종 1년 5월 1일, 《조선왕조실록》
[66]
논문
조선 성리학자들의 양명학에 대한 비판적 인식 검토
https://www.kci.go.k[...]
전수연 외, 《양명학》, 2021, vol., no.60
[67]
웹사이트
사문난적
http://contents.hist[...]
[68]
백과사전
주리파
https://encykorea.ak[...]
[69]
백과사전
주기파
https://encykorea.ak[...]
[70]
웹사이트
호락 논쟁의 역사적 의의
http://contents.hist[...]
[71]
실록
태조가 백관의 추대를 받아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르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1392-07-17
[72]
실록
국호를 화령과 조선으로 정하여 황제의 재가를 청하는 주문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1392-11-29
[73]
백과사전
경국대전
https://encykorea.ak[...]
[74]
백과사전
갑오개혁
https://encykorea.ak[...]
[75]
백과사전
과거
https://encykorea.ak[...]
[76]
웹사이트
음서제의 시행
http://contents.hist[...]
[77]
백과사전
천거제
https://encykorea.ak[...]
[78]
웹사이트
무과
http://contents.hist[...]
[79]
웹사이트
양반의 개념
http://contents.hist[...]
[80]
뉴스
생원과 진사의 자세로
https://www.kihoilbo[...]
기호일보
2021-12-20
[81]
웹사이트
진사과
http://contents.hist[...]
[82]
서적
노비와 쇠고기
푸른역사
[83]
간행물
전국에서 몰린 수험생 넘쳤던 19세기 말 한양
https://jmagazine.jo[...]
월간중앙
2021-04
[84]
백과사전
문과
https://encykorea.ak[...]
[85]
논문
조선의 인사임용제도와 영향요인에 관한 연구 - 유교적 실적주의를 중심으로 -
https://s-space.snu.[...]
서울대학교
2018
[86]
웹사이트
서북지방의 사회·경제적 특성
http://contents.hist[...]
[87]
백과사전
무과
https://encykorea.ak[...]
[88]
논문
조선 후기의 무과제도와 한국의 근대성
https://s-space.snu.[...]
한국문화
[89]
백과사전
잡과
https://encykorea.ak[...]
[90]
웹사이트
중인의 특성과 성장 배경
http://contents.hist[...]
[91]
백과사전
당상관
https://encykorea.ak[...]
[92]
논문
조선 전기 관료의 임기제
http://www.klog.or.k[...]
지방정부연구
2015
[93]
백과사전
무록관
https://encykorea.ak[...]
[94]
웹사이트
경관직
http://contents.hist[...]
[95]
웹사이트
외관직
http://contents.hist[...]
[96]
백과사전
강화부
https://encykorea.ak[...]
[97]
문서
정3품
[98]
문서
정4품
[99]
문서
정2품
[100]
문서
후의 의빈부
[101]
문서
내아문(內衙門)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