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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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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티무르 제국은 14세기 후반 중앙아시아에서 티무르에 의해 건국된 이슬람 왕조이다. 국호는 투란이었으며, 수도는 사마르칸트였다. 티무르는 칭기즈 칸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몽골 제국의 영토를 계승하려 했으며, 호라산, 페르시아, 인도 등을 정복하여 광대한 영토를 건설했다. 티무르 사후 내분과 주변 세력의 침입으로 쇠퇴하여 여러 왕조로 분열되었으며, 16세기 초 우즈베크족에 의해 멸망했다. 이후 티무르의 후예들은 인도에서 무굴 제국을 건설하여 티무르 제국의 명맥을 이었다. 티무르 제국은 이슬람 문화와 튀르크-몽골 문화를 융합한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건축, 회화,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르네상스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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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 제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티무르 제국 지도
티무르 제국의 최대 영토 (제후국은 표시되지 않음)
기본 정보
공식 명칭이란과 투란
로마자 표기Iran u Turan
다른 이름티무르 제국
국가 표어Rāstī rustī (정직함에 구원이 있노라)
시대중세 후기
정치 체제전제군주제
존속 기간 시작1370년
존속 기간 끝1507년
건국티무르의 정복 시작 (1363년)
서쪽으로 팽창 시작1380년
앙카라 전투1402년 7월 20일
사마르칸트 함락1505년
헤라트 함락1507년
무굴 제국 건국1526년 4월 21일
수도사마르칸트 (1370–1405)
헤라트 (1405–1507)
공용어페르시아어 (공식어, 궁정어, 고급 문학어, 링구아 프랑카, 행정어)
차카타이어 (왕조어, 문학어)
아랍어 (신학)
종교국교: 수니파 이슬람
기타 종교: 시아파 이슬람, 조로아스터교, 힌두교, 기독교
통화탱카
면적4,400,000 km² (1405년 추정)
역대 군주
초대 군주티무르 (1370–1405)
마지막 군주바디 알자만 (1506–1507)
주요 인물
재상나바위 (1469–1489)
역사적 맥락
이전 국가킵차크 칸국
오스만 제국
델리 술탄국
맘루크 술탄국
차카타이 칸국
수피 왕조
잘라이르 왕조
카르트 왕조
무자파르 왕조
사르바다르
마라시
아프라시야브 왕조
미흐라반 왕조
조지아 왕국
다음 국가부하라 칸국
사파비 제국
히바 칸국
카라 코윤루
아크 코윤루
무굴 제국
암브 토후국

2. 국호

역사가 샤라프 알딘 알리 야즈디는 자신의 저서 『자파르나마』(승리의 서)에서 티무르 제국의 공식적인 국호가 '''투란'''(توران|투란fa)이었다고 기록했다.[72][7] 기록에 따르면 티무르는 울루 타그 산비탈의 바위에 '투란'이라는 국명을 새기도록 명령했다고 전해지는데, 이것이 오늘날 카자흐스탄에 있는 카르삭페이 비문이다.[73][8] 비문 원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74][9]

'''투란의 술탄 티무르'''는 불가르토크타미쉬에 맞서 이슬람을 위해 3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올라갔다...


티무르 시대의 문헌에서는 일반적으로 '''이란과 투란'''(ایران و توران|이란 우 투란fa)[75][76][10][11]이라는 명칭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전통적으로 이란(페르시아 문화권)과 투란(중앙아시아 스텝 유목 제국, 즉 튀르크 및 몽골)을 모두 아우른다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었다. 두 지역은 옥수스 강을 사이에 두고 구분되었다. 트란스옥시아나의 아랍어 지명인 '''마와라안나흐르'''(ما وراء النهر|마와라안나흐르ar)[77][12] 역시 자주 사용되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티무르 제국을 수도 사마르칸트를 음차한 '''살마아한'''(撒馬兒罕)이라고 불렀다.

살마아한은 곧 한나라 때의 계빈 지역으로서...(중략) 원나라 말에 그곳의 왕이 된 자가 부마 첩목아였다.
그 나라는 동서로 3,000여 리이고, 지세(地勢)는 넓고 평탄하며, 토양은 비옥하였다.
— 「명사」 332권 열전 220제 서역 4


시아파 역사학자들은 티무르 제국의 통치 왕조를 '''구르카니'''(گورکانیان|구르카니얀fa)[78][79][13][14]라고 기록했다. 이것은 몽골어로 사위를 뜻하는 쿠르겐(Güregen)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티무르 자신은 칭기즈 칸 가문(황금씨족)의 혈통을 물려받지 못했으므로 을 칭할 수 없었기에, 그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 칭호를 사용했다. 티무르는 칭기즈 칸 혈통을 물려받은 모굴리스탄 공주 사라이 물크 카눔과 결혼했기 때문에 '구르칸'(사위)이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다.[80][81][15][16]

3. 역사

근대에 가까운 시대의 ''자파르나마''(1424-1428), 1467년 판에 묘사된 즉위식에서 신하들에게 알현하는 티무르의 모습


티무르 제국의 역사가 샤라프 알딘 알리 야즈디는 그의 저서 『자파르나마』(승리의 서)에서 티무르가 세운 나라의 이름이 '''투란'''(توران|투란fa)이었다고 기록했다.[7] 티무르 자신도 '투란의 술탄 티무르 베이'라는 명칭을 카자흐스탄 울루타그 산의 바위에 새기도록 했는데, 이것이 카르삭파이 비문이다.[8][9] 당시 문헌에서는 제국을 공식적으로 '''이란-오-투란'''(ایران و توران|이란-오-투란fa[10][11])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는 페르시아 문화권(이란)과 튀르크-몽골 문화권(투란)을 아우르는 제국임을 나타내는 표현이었다. 두 지역의 경계는 옥수스 강으로 여겨졌다. 시아파 저술가들은 티무르 왕조를 '''구르카니'''(گورکانیان|구르카니얀fa), 즉 '사위 왕조'라고 불렀는데,[13][14] 이는 티무르가 칭기즈 칸의 직계 후손이 아니었기 때문에, 칭기즈 칸 가문의 공주 사라이 뮬크 카눔과 결혼하여 얻은 '사위(구르칸)' 자격으로 통치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기 때문이다.[15][16] 마웨라안나흐르(트란스옥시아나) 역시 제국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12]

티무르 왕조몽골 제국의 귀족 가문이자 보르지긴 씨족과 같은 뿌리를 둔 바를라스 부족 출신이다.[17] 티무르 왕조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가계가 성경야벳의 아들이자 '튀르크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전설적인 인물 '튀르크'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19] 울루그 베크의 역사서 『타리흐-이 아르바 울루스』(네 민족의 역사, 약칭 『샤자라트 알-아트락』 즉 '튀르크의 계보')는 이러한 계보를 기록하며 몽골인 역시 튀르크의 후손으로 분류하고 칭기즈 칸과 티무르 모두를 튀르크 계보 안에 포함시켰다.[18][19][21]

14세기 중반, 차가타이 칸국이 동서로 분열된 혼란 속에서 바를라스 부족 출신의 몰락 귀족이었던 티무르가 등장했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여러 부족을 규합하고 경쟁자들을 제거하며 세력을 키워, 1370년 마웨라안나흐르(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고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삼아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칭기즈 칸의 후예를 명목상의 칸으로 내세우고 자신은 '아미르'(사령관)이자 '구르칸'(칸의 사위)으로서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했다.

이후 티무르는 약 35년간 끊임없는 정복 전쟁을 벌여 동쪽의 중국 국경에서 서쪽의 아나톨리아 반도, 북쪽의 킵차크 초원에서 남쪽의 인도 북부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특히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강력한 오스만 제국을 격파하고 술탄 바예지드 1세를 사로잡아 서아시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티무르의 정복 전쟁은 수많은 파괴와 학살을 동반하여 최대 1,700만 명의 사망자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25]

1405년, 명나라 원정길에 올랐던 티무르가 사망하자 제국은 그의 아들과 손자들 사이에 벌어진 격렬한 후계자 다툼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이 혼란은 티무르의 넷째 아들 샤 루흐가 경쟁자들을 제압하고 1409년(실질적 통일은 1420년경)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로 인정받으면서 수습되었다. 샤 루흐는 수도를 헤라트로 옮기고 약 40년간 제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며 티무르 르네상스라 불리는 문화적 황금기를 이끌었다.[24] 그러나 서쪽에서는 카라 코윤루와 같은 튀르크멘 세력의 성장을 완전히 억제하지는 못했다.

1447년 샤 루흐가 사망하자 제국은 다시 분열과 내전에 휩싸였다. 그의 아들이자 뛰어난 학자였던 울루그 베크가 잠시 제위를 이었으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아들 압둘 라티프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후 아부 사이드 미르자가 잠시 제국을 재통합하려 시도했으나, 1469년 서쪽의 아크 코윤루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사망하면서 제국은 호라산트란스옥시아나로 다시 나뉘었다.

15세기 후반, 티무르 제국은 계속되는 내분과 몽골식 분할 상속 전통으로 인해 급격히 쇠퇴했다. 서쪽에서는 아크 코윤루가 이란 지역 대부분을 장악했고, 이후 사파비 제국이 일어나 이 지역을 차지했다. 북쪽에서는 무함마드 샤이바니가 이끄는 우즈베크인들이 중앙아시아로 대거 남하하여 1507년까지 사마르칸트헤라트 등 제국의 주요 도시들을 모두 점령하고 부하라 칸국을 세웠다.

중앙아시아에서 밀려난 티무르의 후손 바부르카불을 거점으로 삼아 남쪽으로 눈을 돌려, 1526년 인도 북부를 정복하고 무굴 제국을 세웠다. 이로써 티무르 왕조의 명맥은 인도에서 이어지게 되었으며, 무굴 제국은 19세기 중반까지 존속하다가 1857년 세포이 항쟁 이후 영국 제국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면서 티무르 왕조의 역사도 최종적으로 막을 내렸다.

3. 1. 배경

14세기 초 차가타이 칸국 내부에서는 전통적인 유목 생활을 중시하며 알말리크를 중심으로 한 초원 지대에 머물고자 하는 세력과, 정주 지대에 궁성을 짓고 거주하며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토착 귀족들과 협력하려는 세력 간의 갈등이 깊어졌다.[82] 칸국의 동부 지역(동튀르키스탄)에서는 유목민 세력이 강했고, 서부 지역(트란스옥시아나)에서는 정주 세력이 우세했다. 전자는 스스로를 '모굴인', 후자는 '차가타이인'이라고 불렀다.

1347년, 카잔 칸이 카라우나스 부의 아미르 카자간에게 패배하고 사망하자, 카자간은 다니슈멘디를 명목상의 칸으로 내세우고 실권을 장악했다. 이에 반발한 동부 지역의 유력 부족 두글라트 부를 중심으로 한 '모굴인'들은 1348년 투글루크 티무르(Tughlugh Timur)를 칸으로 추대하며 독립하여 모굴리스탄 칸국(동차가타이 칸국)을 세웠다. 이로써 차가타이 칸국은 동서로 분열되었다.

서차가타이 칸국에서 카라우나스 부의 지배는 카자간과 그의 아들 압둘라 2대에 걸쳐 12년간 이어졌으나, 1358년 압둘라가 암살되면서 막을 내렸다. 이후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은 혼란에 빠졌다. 반면, 모굴리스탄 칸국투글루크 티무르의 지도 아래 이슬람을 수용하며 안정을 찾았다. 투글루크 티무르는 이 기회를 이용해 1360년과 1361년 두 차례에 걸쳐 혼란스러운 트란스옥시아나에 진군하여 여러 부족의 아미르들을 격파하고 일시적으로 차가타이 칸국을 재통일했다. 티무르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시기이다.

티무르는 1363년부터 여러 세력과 동맹을 맺으며 트란스옥사니아와 호라산 등 중앙아시아의 옛 페르시아 영토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는 1366년 사마르칸트를, 1369년 발흐를 점령했으며, 1370년에는 발흐의 통치자로 인정받았다. 공식적으로는 차가타이 칸인 수르가트미쉬의 이름으로 활동했지만, 실제로는 티무르가 칸을 임명하는 꼭두각시 통치자 체제를 구축했다. 이미 1360년대에 서차가타이 칸국을 장악한 티무르는 이후 몇 년 동안 트란스옥사니아와 호라즘을 복속시켰다. 서차가타이 칸들은 15세기와 16세기까지 티무르 왕자들의 지배 아래 명목상의 존재로 남게 되었다.

3. 2. 티무르 (1370~1405)

사마르칸트의 구리 아미르 묘


티무르는 1336년 사마르칸트 인근의 케쉬(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샤흐리삽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몽골 제국 귀족 가문이자 보르지긴 씨족의 방계인 바를라스 부족 출신이었으나, 아버지 대에 이르러 가세가 기울었다. 젊은 시절 티무르는 가축을 약탈하는 도적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점차 뛰어난 군사 지휘관으로서 재능을 드러내며 명성을 쌓아 서차가타이 칸국의 유력자로 성장했다.

1360년, 동차가타이 칸국(모굴리스탄 칸국)의 투글루크 티무르가 서차가타이 칸국을 침공하여 일시적으로 동서 차가타이 칸국을 통합하자, 티무르는 그에게 복속하여 바를라스 부족의 옛 영지를 되찾았다. 그러나 투글루크 티무르가 본거지로 돌아가자 티무르는 동차가타이 칸국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인 세력 확장에 나섰다. 그는 서차가타이 칸국의 여러 부족과 동맹과 분열을 거듭하며 힘을 키웠고, 1366년 사마르칸트, 1369년 발흐를 점령했다. 마침내 1370년, 티무르는 마웨라안나흐르(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고 그곳의 통치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칭기즈 칸의 후예인 소유르가트미쉬를 명목상의 차가타이 칸으로 내세우고, 자신은 칭기즈 칸 가문의 여성과 혼인하여 '칸의 사위'를 의미하는 '아미르 쿠르겐(Amir Kurgen)'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했다. 이 시점을 일반적으로 티무르 제국의 시작으로 본다.



권력을 장악한 티무르는 곧바로 정복 전쟁에 나섰다. 먼저 동쪽의 모굴리스탄 칸국을 복속시키고 서쪽의 호라즘 지역을 정복했다. 또한 킵차크 칸국에서 망명해 온 토크타미쉬를 지원하여 칸위에 오르게 함으로써 북서쪽의 킵차크 초원을 안정시키고 중앙아시아 지배를 공고히 했다.

1380년부터는 서쪽으로 눈을 돌려, 일 칸국 붕괴 이후 여러 세력으로 나뉘어 있던 이란 지역으로 진출했다. 1380년 아무다리아강을 건너 호라산을 정복했고, 1388년까지 이란 전역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헤라트의 카르티드 왕조를 멸망시키고(1389년 이전), 이스파한을 점령했으며(1387년), 시라즈의 무자파르 왕조를 제거하고(1393년), 바그다드에서 잘라이르 왕조를 축출했다(1393년). 그의 세력은 아르메니아, 조지아, 아나톨리아 동부까지 확장되었다.

한편, 과거 자신이 지원했던 킵차크 칸국의 토크타미쉬가 호라즘 영유권을 놓고 대립하자, 티무르는 그를 응징하기로 결정했다. 1394년에서 1395년 사이, 조지아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북진하여 토크타미쉬의 군대를 격파하고(토크타미쉬-티무르 전쟁) 킵차크 칸국의 수도 사라이를 파괴하며 캅카스 지역의 패권을 확립했다.

1398년, 티무르는 쇠퇴하고 있던 인도의 델리 술탄국으로 관심을 돌렸다. 먼저 손자 피르 무하마드가 이끄는 선발대가 인더스강을 건너 물탄을 점령했고, 같은 해 티무르 본인이 주력군을 이끌고 인더스강을 건너 여러 도시를 점령한 뒤 피르 무하마드와 합류했다. 1398년 12월, 델리 술탄 나시르 웃딘 마흐무드 샤 투글루크의 군대를 격파하고 수도 델리에 입성했으나, 도시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 다만 장인들은 살려 사마르칸트로 보냈다. 그는 1399년 초 인도를 떠났다.[23]

1400년부터 티무르는 다시 서쪽으로 원정하여 맘루크 술탄국이 지배하던 시리아알레포다마스쿠스를 점령하고, 아나톨리아 동부를 장악했다. 1401년에는 바그다드를 다시 점령하고 파괴했다.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당시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던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예지드 1세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그를 사로잡았다. 이 패배로 오스만 제국은 술탄 자리를 놓고 왕자들 간의 내전(오스만 제국의 공위 시대)에 휩싸이게 되었고, 티무르는 당대 가장 강력한 이슬람 군주로 인정받게 되었다. 티무르의 종주권은 시리아와 아나톨리아의 여러 소국들에까지 미쳤다.

티무르의 제국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페르시아 서부, 킵착 초원, 모굴리스탄 등 조공을 받는 부족 연맹체들의 영역이었고, 다른 하나는 호라산, 페르가나, 호라즘 등 티무르 가문이 직접 통치하는 직할령이었다. 티무르는 과거 트란스옥시아나에서 부족 연합을 중앙 집권 국가로 만드는 어려움을 경험했기에, 전자의 영역에 대해서는 완전한 정복보다는 상위 군주로서의 지배력을 인정받는 선에서 만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직할령에서는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를 복구하고, 관개 시설과 요새를 건설하며, 정복지와 트란스옥시아나 간에 군대를 교차 이주시키는 등 항구적인 지배 체제를 구축하려 노력했다.[83] 그는 수도 사마르칸트를 제국의 중심으로 삼아 웅장하게 건설했다.

30여 년간의 정복 전쟁을 통해 티무르는 과거 몽골 제국 서부의 세 칸국(주치 울루스, 훌레구 울루스, 차가타이 울루스) 영역 대부분을 다시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1404년, 카스티야 왕국의 사절 루이 곤살레스 데 클라비호가 사마르칸트를 방문하여 티무르의 궁정을 기록으로 남겼다(티무르 기행). 티무르는 서방 원정을 마무리한 후, 과거 몽골 제국의 동쪽 영토 회복을 목표로 삼고 원나라를 계승한 명나라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준비했다. 그러나 1405년 초, 원정길에 오른 직후 오트라르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3. 3. 1차 내전기 (1405~1420)

티무르는 생전에 제국의 여러 지역 총독직에 자신의 아들과 손자들을 임명했고, 일부 지역에는 외부 인물을 임명하기도 했다.[24] 그러나 1405년 티무르가 사망하자, 그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아들과 손자들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면서 제국은 1차 내전기에 접어들었다.

초반에는 티무르의 셋째 아들 미란 샤의 아들인 할릴 술탄이 사마르칸트를 포함한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을 장악하며 세력을 떨쳤다. 하지만 그는 부인의 조언에 따라 하급 아미르들을 고위직에 등용하는 정책을 펴 기존 지배층의 큰 반발을 샀으며, 때마침 발생한 기근으로 인해 민심마저 잃게 되었다.

1402년에서 1403년 사이 티무르 제국의 세부 지도. 조공국-중앙아시아 지역의 영향권을 보여준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티무르의 넷째 아들인 샤 루흐가 점차 세력을 키워나갔다. 결국 1420년 할릴 술탄은 샤 루흐에게 항복했고, 이로써 15년에 걸친 내전은 샤 루흐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한편, 내전으로 제국이 혼란한 사이 외부 세력의 도전도 거세졌다. 특히 카라 코윤루(흑양조)는 이 시기에 티무르 제국을 위협할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카라 코윤루의 지도자 Kara Yusuf|카라 유수프trk1408년 사르드루드 전투에서 티무르의 셋째 아들 미란 샤를 전사시키고 타브리즈를 점령했으며, 아제르바이잔이라크 지역까지 장악하여 제국의 서부 영토를 상당 부분 잠식했다.

또한, 과거 티무르에게 복속되었던 아크 코윤루(백양조)와 오스만 제국, 조지아 왕국, 맘루크 왕조 등도 이 시기를 틈타 독립하거나 다른 세력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가는 등, 티무르 제국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전쟁으로 페르시아의 여러 도시가 황폐해지면서, 페르시아 문화의 중심지는 사마르칸트헤라트로 옮겨갔고, 이 도시들은 이후 티무르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되었다.[24]

3. 4. 샤 루흐 (1420~1447)

샤 루흐의 두상


티무르 사후 제국은 후계자 분쟁과 내전에 휩싸였으나, 티무르의 넷째 아들 샤 루흐가 혼란을 수습하고 1409년 사마르칸트를 정복하며 제3대 군주로 즉위했다. 그는 수도 사마르칸트의 통치를 장남 울루그 베크에게 맡기고, 자신은 호라산의 주요 도시 헤라트를 새로운 근거지로 삼아 제국의 재건과 재통일을 추진했다. 다른 대부분의 티무르 일족들도 그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샤 루흐는 아버지 티무르와 달리 튀르크-몽골 혈통의 정복자가 아닌 이슬람의 술탄으로서 통치하고자 했다. 그는 티무르 시대의 파괴와 혼란을 수습하고 피해를 복구하려 노력했으며, 연대기 기록에서는 경건하고 겸손한 통치자로 묘사된다. 역사가 토마스 W. 렌츠와 글렌 D. 로리는 샤 루흐에 대해 "그의 아버지와 달리, 샤 루흐는 튀르크-몽골 혈통의 정복자가 아니라 이슬람의 술탄으로서 티무르 제국을 통치했다. 왕조 시대의 연대기에서 그는 경건하고 겸손한 위대한 인물로 칭송받고 있는데, 실제로 그는 티무르에 의해 발생한 피해를 상당 부분 복구한 모범적인 이슬람 통치자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내전을 거치며 제국의 힘은 티무르 시대보다 약화되었다. 동쪽에서는 모굴 칸국이 세력을 회복하여 카슈가르 일대를 위협했고, 북쪽에서는 아불 하이르 칸 휘하의 우즈베크인들이 트란스옥시아나를 침입하기 시작했다. 서쪽에서는 카라 코윤루를 비롯한 튀르크멘 세력이 페르시아 서부를 계속 공격했다. 샤 루흐는 여러 차례 원정을 통해 카라 코윤루를 격파했지만, 이들을 완전히 복속시키지는 못하고 몇몇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명목상의 종주권을 인정받는 선에서 만족해야 했다. 1447년 샤 루흐가 사망한 후, 자한 샤가 이끄는 카라 코윤루는 티무르 제국을 이란 동부로 몰아내고 헤라트를 일시 점령하기도 했다.

샤 루흐 시대는 문화적으로 크게 융성하여 티무르 르네상스가 꽃피웠다. 그는 예술과 학문의 위대한 후원자였으며, 그의 궁정에는 수많은 학자, 예술가, 과학자들이 모여들었다. 페르시아 문화와 튀르크-몽골 문화가 융합된 건축 양식이 발달하여 헤라트마슈하드 등지에 아름다운 모스크마드라사(신학교)가 세워졌다. 문학 분야에서는 『샤나메』를 비롯한 여러 작품들이 차가타이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등으로 번역, 출판되었고, 정교하고 화려한 페르시아 사본과 세밀화가 많이 제작되었다. 이러한 문화 활동은 특히 예술과 학문에 조예가 깊었던 샤 루흐의 아들 바이순구르가 주도했다.

또한 샤 루흐는 명나라와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여 사절단을 교환하고 실크로드를 통한 상업 활동을 장려했다. 이를 통해 제국은 경제적으로 번영했으며, 1415년, 1422년, 1431년에는 명나라 영락제의 명을 받은 정화의 함대가 호르무즈를 방문하기도 했다.

40년 가까이 이어진 샤 루흐의 안정적인 통치는 1447년 그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그의 사후 제국은 다시 후계자 분쟁에 휩싸였고, 아들 울루그 베크가 잠시 제위를 이었으나 1449년 아들 압둘 라티프에게 살해당하는 등 혼란이 거듭되며 티무르 제국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3. 5. 울루그 베그 (1447~1449)

샤 루흐가 1447년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울루그 베그가 왕위를 계승했다. 울루그 베그는 뛰어난 문화인이자 수학자·천문학자·역사학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1409년 트란스옥시아나 총독으로 부임한 이후부터 과학자와 예술가를 우대하고 학문과 예술을 장려하며 막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지원에 힘입어 티무르 제국의 주요 도시였던 사마르칸트헤라트는 동부 이슬람 세계의 문화 중심지로 크게 번영했다. 이 시기에는 페르시아 고전 문학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고, 건축 양식도 발전하여 제국 곳곳에 화려한 모스크와 영묘가 건설되었다. 울루그 베그 자신도 구면 기하학이나 삼각함수 등 천문역산학에 대한 저술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치세는 티무르 제국의 문화적 전성기, 즉 티무르 르네상스로 평가받는다. 당시 티무르 제국은 이슬람 세계에서 문화적으로 가장 발전한 곳 중 하나였으며, 많은 이들이 제국 내의 호라산과 트란스옥시아나를 여행하고 그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울루그 베그는 군주로서의 능력은 부족하여 그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내란이 끊이지 않았고, 자신의 권위와 지배력을 확립하는 데 실패했다. 결국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인 1449년, 발흐에서 반란을 일으킨 아들 압둘 라티프에게 붙잡혀 처형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그의 유골은 후에 소련의 조사 과정에서 머리와 몸통이 분리된 채 발견되어 이러한 사실이 확인되었다.[84] 울루그 베그가 사망한 후 티무르 제국은 다시 내전기에 접어들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3. 6. 2차 내전기 (1447~1459)

샤 루흐1447년 사망하자 제국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샤 루흐의 아들 울루그 베그사마르칸트에서 제위를 계승했지만, 알라 앗 다울라를 비롯한 여러 티무르 가문의 왕자들이 반기를 들면서 2차 내전이 시작되었다. 1449년에는 울루그 베그의 아들 압둘 라티프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왕위에 오르는 비극이 벌어졌으나, 그 역시 이듬해(1450년) 암살당하면서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은 극심한 혼란과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한편, 제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페르시아 중부를 술탄 무함마드가, 호라산 지역을 아불 카심 바부르가 각각 장악하고 있었다.

트란스옥시아나의 혼란을 틈타, 티무르의 셋째 아들 미란 샤의 손자인 아부 사이드 미르자가 북방 우즈베크인 세력의 지원을 받아 1451년 사마르칸트를 점령했다. 아부 사이드는 세력을 확장하여 1454년 발흐를 합병하고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제국은 호라산을 지배하는 아불 카심 바부르와 트란스옥시아나를 장악한 아부 사이드 미르자로 양분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술탄 무함마드는 이 과정에서 아불 카심 바부르에게 패배하여 사망했다. 오랜 내전은 1458년 아부 사이드가 헤라트를 점령하면서 마침내 종식되었다.

1차 내전기와 마찬가지로 티무르 제국의 내부 혼란은 주변 세력에게 성장의 기회를 제공했다. 특히 자한 샤가 이끄는 카라 코윤루1447년 이후 세력을 크게 확장하여 호라산을 제외한 페르시아 영토 대부분을 티무르 제국으로부터 빼앗았으며, 1458년에는 잠시나마 제국의 수도였던 헤라트를 점령하기도 했다. 또한 북쪽에서는 킵차크 칸국의 붕괴 이후 우즈베크인들이 시르다리야 강을 넘어 남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며 제국의 새로운 위협으로 부상했다.

3. 7. 아부 사이드 (1459~1469)

아부 사이드 미르자의 무굴식 초상화


아부 사이드 미르자헤라트사마르칸트라는 제국의 주요 도시들을 동시에 지배하고, 이라크아제르바이잔까지 진군했던 마지막 티무르 군주였다.

아부 사이드는 우즈베크인들의 도움을 받아 사마르칸트를 점령했다. 이후 타슈켄트의 수피즘 낙쉬반디 교단 지도자인 셰이흐 아흐라르를 초청하여 그의 종교적 권위를 이용해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의 지배력을 강화했다. 또한, 헤라트를 중심으로 한 호라산이란 동부 지역을 장악하며 분열되었던 제국을 다시 통일했다.

그러나 이 시기 티무르 제국의 대외적인 영향력은 이전보다 눈에 띄게 약화되었다. 이는 주변의 우즈베크인, 모굴리스탄 칸국, 아크 코윤루 등의 세력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아부 사이드는 모굴리스탄 칸국 문제에 대해, 티무르 제국에 망명해 있던 유누스를 칸으로 임명하여 파견함으로써 안정을 꾀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우즈베크인들이 시르다리야 강을 넘어 트란스옥시아나를 침략하고 약탈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결정적으로 1469년, 아부 사이드는 아크 코윤루와의 전쟁에서 큰 패배를 당했다. 이 패배는 아부 사이드 자신의 죽음으로 이어졌으며, 티무르 제국이 다시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85]

3. 8. 남북조시대/티무르 토후국 시대 (1469~1495)

후세인 바이카라의 초상화


아부 사이드 사후, 비교적 짧은 기간(1469~1470년) 동안 내전이 발생했다. 이 내전의 결과로 헤라트를 중심으로 한 아무다리야 강 이남의 영토, 즉 호라산 일대는 티무르의 현손인 후세인 바이카라가 차지하게 되었다. 반면, 아무다리야 강 이북 지역은 아부 사이드의 아들들이 나누어 가졌다. 이로써 티무르 제국은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으나, 이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구도를 유지하게 된다. 또한 서쪽의 백양 왕조와도 어느 정도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으며, 북쪽의 우즈베크인들 역시 지도자 아불 하이르의 사망으로 세력이 일시적으로 약화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는 내부 분열과 전쟁으로 점철된 티무르 제국사 전체를 통틀어 드물게 평화로운 시기였다.

이 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티무르 르네상스'로 불리는 문화 발전이 절정에 달했다는 점이다. 특히 후세인 바이카라가 다스리던 헤라트에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졌다. 후세인 바이카라와 그의 재상 알리셰르 나보이는 문예 활동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장려했으며, 그 결과 헤라트의 궁정을 중심으로 티무르 왕조 시대를 통틀어 가장 화려한 문화가 꽃피웠다. 반면, 사마르칸트의 궁정은 낙쉬반디 교단의 영향력이 강해 헤라트만큼 예술이 부흥하지는 못했다.[86]

3. 9. 몰락

티무르 제국은 15세기 후반부터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제국을 분할하여 상속하는 몽골-티무르 왕조의 전통과 그로 인한 여러 차례의 내전 때문이었다. 티무르는 생전에 정복한 지역을 아들과 손자들에게 총독으로 임명하여 통치하게 했고, 일부 지역에는 외부 인물을 임명하기도 했다. 1405년 티무르가 사망하자 왕족들은 곧바로 분쟁과 내전에 휘말리며 스스로 약화되었고, 많은 총독들은 사실상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했다. 전쟁으로 페르시아의 도시들이 황폐해지면서, 문화의 중심지는 사마르칸트헤라트로 옮겨져 티무르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되었다.[24]

티무르 사후,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피르 무함마드 자한기르는 힘이 약해 권력을 잡지 못했고, 할릴 술탄이 잠시 수도 사마르칸트를 장악했으나 곧 티무르의 넷째 아들 샤 루흐에게 폐위되었다. 샤 루흐는 1409년 제국의 군주가 되어 40년 가까이 통치하며 제국의 재통일을 추진하고 안정을 가져왔으나, 서쪽에서는 카라 코윤루와의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1447년 샤 루흐가 사망하자 제국은 다시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그의 아들 울루그 베크가 잠시 제위를 이었으나 1449년 아들 압둘 라티프에게 살해당했고, 이듬해 압둘 라티프마저 암살되면서 샤 루흐 가문의 영향력은 약화되었다. 이 혼란을 틈타 자한 샤가 이끄는 카라 코윤루는 이란 동부로 세력을 확장하여 1458년에는 헤라트를 잠시 점령하기도 했다. 이후 아우준 하산이 이끄는 아크 코윤루가 부상하여 1469년부터 1471년 사이에 이란 지역에서 카라 코윤루 세력을 몰아내고 패권을 장악했다.

1490년대 중반, 아부 사이드 미르자의 아들들이 대부분 사망하면서 제국의 심장부였던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은 큰 혼란에 빠졌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우즈베크 유목민들이 대거 침공해왔고, 결국 1500년 우즈베크 칸국의 무함마드 샤이바니사마르칸트부하라를 점령했다. 1501년 페르가나 출신의 티무르 왕족 바부르가 잠시 사마르칸트를 탈환했지만, 무함마드 샤이바니에게 패배하고 남쪽의 카불로 후퇴해야 했다.

한편, 헤라트를 통치하던 후세인 바이카라는 트란스옥시아나의 혼란을 이용해 제국을 재통일할 기회를 엿보았으나, 아들들의 반란으로 인해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는 반란을 진압하고 카불의 바부르와 연합하여 우즈베크인들을 몰아내려 했지만, 1506년 사망하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의 아들들(바디 알자만, 무자파르)이 후계자 자리를 두고 내분을 일으키자, 바부르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여 철수했고, 1507년 헤라트마저 무함마드 샤이바니에게 점령당했다. 이로써 티무르 제국은 중앙아시아와 이란 지역의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다. 페르시아, 코카서스, 메소포타미아 등 서부 영토는 이후 이스마일 1세가 세운 사파비 제국에게 넘어갔다.

1707년 무렵 무굴 제국의 최대 판도


중앙아시아에서 밀려난 바부르는 카불을 거점으로 삼아 1520년대부터 북인도로 눈을 돌렸다. 1526년 파니파트 전투에서 델리 술탄조를 격파하고 무굴 제국을 건국함으로써, 티무르 왕조의 명맥은 인도에서 이어지게 되었다. 무굴 제국은 17세기까지 인도의 대부분을 지배하며 번성했지만, 이후 점차 쇠퇴의 길을 걸었다. 티무르 왕조의 마지막 흔적은 1857년 세포이 항쟁 이후 영국이 무굴 제국을 공식적으로 폐지하고 인도 제국을 설립하면서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4. 문화

티무르의 궁정


티무르 왕조는 튀르크화몽골계 기원의 바를라스 부족 출신이었지만,[26]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투르키스탄과 호라산에 거주하면서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28] 이로 인해 티무르 시대의 문화는 튀르크-몽골 전통과 페르시아의 문학, 예술, 궁정 고급 문화가 공존하는 이중적인 성격을 지녔다.[24][36][30]

수도인 사마르칸트는 국제적인 상업 도시로서 크게 번영하여 과거 바그다드를 능가할 정도였다. 티무르 제국은 정복 활동을 통해 얻은 부를 바탕으로 사마르칸트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 활발한 건축 사업을 추진하고 학문과 예술을 장려했다. 이러한 문화적 부흥기를 티무르 르네상스라고도 부른다.

언어 사용에 있어서는 페르시아어가 행정, 문학, 역사 서술 등 공적인 영역에서 주요 언어로 사용되었고, 제국의 공식 국어였다.[30][31][32] 차가타이어는 티무르 왕족의 모국어이자 구어로서 사용되었으며,[33] 아랍어는 주로 종교 및 과학 분야의 언어로 기능했다.[34]

예술과 문화면에서는 전반적으로 이란 문화의 영향이 강했으며, 역대 군주들의 후원 아래 티무르 양식의 독자적인 이슬람 문화가 발달했다. 건축 분야에서는 이란 건축과 중앙아시아 건축 전통을 계승하여 웅장하고 화려한 양식의 모스크, 마드라사, 영묘 등이 건설되었다. 회화 분야에서는 이란풍의 미니아튀르(세밀화)가 크게 발전하여 페르시아 서적 예술의 황금기를 열었다. 문학에서는 페르시아 문학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미르 알리 시르 나와이 등의 노력으로 차가타이어 문학 또한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다. 학문 분야에서도 아라비아의 수학, 천문학, 의학, 지리학, 역사학 등이 발달하여 울루그 베크 시대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천문표가 제작되기도 했다.

티무르 제국의 군주들은 도시 문화에 친숙하면서도 유목민의 전통을 이어받아 도시 외곽에 조성된 정원에서 휴식을 즐겼다. 바부르의 자서전 『바부르나마』에는 당시 사마르칸트 정원의 아름다움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티무르 제국의 궁정 문화는 15세기 후반 헤라트를 중심으로 활동한 후세인 바이카라의 치세에 절정을 맞이했다. 그의 궁정에서는 세밀화가 예술적으로 더욱 높은 수준에 도달했으며, 미르 알리 시르 나와이와 같은 인물들의 후원으로 문예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또한, 샤 루크 시대부터 왕조 차원의 역사 편찬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어, 몽골 제국의 계승자로서 티무르 왕조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역사서들이 편찬되었다.

티무르 제국 시대에 형성되고 발전한 이러한 높은 수준의 문화는 '튀르크-이슬람 문화'로 특징지어지며, 이후 중앙아시아를 계승한 샤이바니 왕조뿐만 아니라 서쪽의 사파비 왕조, 남쪽의 무굴 제국, 그리고 오스만 제국 등 주변 이슬람 세계의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4. 1. 건축

티무르 왕조 건축은 이전 일칸국 시대까지 발전해 온 기존의 이란과 중앙아시아 건축 전통을 바탕으로 발전했다.[43] 티무르 양식은 대규모 건축물, 강력한 축 대칭을 가진 배치, 두껍게 겹쳐진 구근 모양의 돔, 풍부한 외부 타일 장식(타일 모자이크 및 ''반나이'' 기법 모두), 그리고 정교한 내부 볼트가 특징이다.[44][43][45] 티무르는 수도 사마르칸트의 도시 계획을 포함한 다양한 수단을 통해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했다.[46]

도시에는 뛰어난 종교·교육 시설이 건설되었다. 가장 오래된 티무르 왕조 건축물 중 하나는 현재 카자흐스탄 남부 투르키스탄에 있는 호자 아흐메드 야사위 묘(1389~1399년)이다.[45] 이 시대의 주요 제국 기념물 중 상당수는 사마르칸트에 있으며, 여기에는 구르-이 아미르(1404년경 완공),[43] 비비하눔 모스크(1399~1404년), 샤히 진다 묘지(14세기 후반~15세기 초),[45] 그리고 울루그베크 마드라사(1417~1420년)가 포함된다.[43]

15세기 건축의 가장 중요한 후원자는 가우하르 샤드였으며, 그녀의 건축물은 고품질의 장식과 점점 더 정교해지는 구조적 요소를 보여준다. 중요한 예로는 헤라트에 있는 그녀의 종교 및 장례 단지와 마슈하드에 있는 가우하르 샤드 모스크가 있다.[44]

티무르 제국의 권력과 위신, 그리고 후원의 규모는 그 건축 양식이 이후 많은 지역에 주요한 영향을 미치도록 했다. 이란에서는 사파비 왕조가, 동쪽에서는 인도 아대륙의 티무르계인 무굴 제국이 계승했으며, 그곳에서는 인도 이슬람 양식과 융합되어 무굴 양식을 만들어냈다.[43] 서쪽으로 더 가면 초기 오스만 건축에도 영향을 미쳤다.[47]

비비하눔 모스크 정면(사마르칸트)

4. 2. 회화

15세기 중반의 십각별 타일. 브루클린 박물관, 뉴욕


티무르 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는 국제적인 상업 도시로서 크게 번영하여 과거 바그다드를 능가할 정도였다. 예술과 문화 면에서는 이란 문화의 영향이 강했으며, 역대 군주들의 보호와 장려 아래 티무르풍의 독자적인 이슬람 문화가 발달했다. 건축에서는 중국식 탑과 유목 민족의 천막을 조합한 독특한 사원이 만들어졌고, 회화 분야에서는 이란풍의 미니아튀르(세밀화) 예술이 크게 발전했다.

페르시아 회화의 황금기는 티무르 왕조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평가받는다.[40] 이 시기에는 사파비 왕조 시대와 유사하게 중국 미술과 중국 예술가들이 페르시아 미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24] 티무르 시대 예술가들은 종이, 서예, 채색, 삽화, 제본 기술을 화려하고 다채롭게 결합하여 페르시아 서적 예술을 발전시켰다.[41]

차가타이 칸국과 티무르 왕가의 몽골 민족성은 중세 페르시아 미술의 양식적 묘사에 영향을 주었다. 이들 몽골 지배층은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인튀르크족과 통혼하며 그들의 종교와 언어를 받아들였지만,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이어진 몽골의 세계 지배는 미술에서 페르시아인을 몽골인처럼 이상화하여 묘사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시간이 지나며 민족 구성은 이란계 민족 및 메소포타미아 지역 주민들과 융합되었으나, 몽골 양식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며 소아시아와 북아프리카까지 확산되었다.

4. 3. 문학

''술탄 후세인 미르자의 디완에서 발췌한 시편'', 약 1490년. 브루클린 미술관.


잠이(Jāmī)의 ''경건한 자들의 장미 정원''(Rose Garden of the Pious), 1553년 작품의 삽화. 이 그림은 티무르 시대의 많은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페르시아 시와 페르시아 미니어처를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


샤 루크의 아들 바이숭구르를 위해 헌정된 『바이숭구르 샤흐나메』의 한 장면


티무르 왕조는 튀르크화된 몽골계 바를라스 부족 출신이었으나,[26]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투르키스탄과 호라산에 정착하면서 페르시아 문화에 깊이 동화되었다.[28] 이러한 배경 속에서 티무르 시대의 문화는 투르크-몽골 전통과 페르시아 문학, 예술, 궁정 문화가 공존하는 이중적인 성격을 띠었다.[24][36][30]

당시 사회의 주요 언어이자 학문의 언어는 페르시아어였으며,[27] 티무르 제국의 공식 국어로서 행정, 역사, 문학, 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었다.[30][31][32] 페르시아 문학, 특히 페르시아 시는 티무르 제국 엘리트들이 페르시아-이슬람 궁정 문화에 동화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35] 역대 군주들은 이란 문화의 영향을 받아 예술과 문화를 보호하고 장려했으며, 특히 샤 루크와 그의 아들 울루그 베그는 페르시아 문화 후원에 힘썼다.[36]

티무르 시대의 중요한 페르시아 문학 작품으로는 샤라프 알딘 알리 야즈디가 니잠 알딘 샤미의 초기 저작을 바탕으로 쓴 티무르의 전기 ''ظفرنامه|자파르나메fa''가 있다. 가장 유명한 시인은 페르시아의 마지막 위대한 중세 수피 시인이자 페르시아 시의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인 잠이였다. 또한 티무르 왕자 바이숭구르는 페르시아의 국가 서사시인 샤나메의 새로운 판본인 ''바이숭구르의 샤나메'' 제작을 의뢰하고 직접 서문을 쓰기도 했다. 페르시아 시인 이스마트 알라 부카리는 티무르의 손자인 칼릴 술탄에게 시를 가르쳤다. T. 렌츠에 따르면, 바이숭구르 샤나메는 티무르 사후 변화된 문화적 요구 속에서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으며, 이슬람 이란 군주 전통 속에서 티무르 왕조의 위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38]

한편, 티무르 제국은 튀르크 문학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확립된 페르시아 문학 전통을 기반으로 차가타이어로 국가 튀르크 문학이 발전했다.[24] 차가타이어는 티무르 가문의 모국어이자 "가정어"였으나,[33] 문학 언어로서의 지위는 페르시아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았다. 그럼에도 미르 알리 시르 나와이, 후세인 바이카라, 그리고 바부르와 같은 차가타이 시인들은 다른 튀르크어 사용 시인들이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외에 자신들의 토착어로 글을 쓰도록 장려했다.[24] 나와이의 작품은 주로 페르시아 양식을 기반으로 하였으며, 튀르크어 사용 독자를 위한 특정 문화를 창조하려는 시도였다. 그의 노력 덕분에 차가타이어는 아랍어나 페르시아어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수준으로 문학적 지위를 향상시켰다. 바부르의 자서전인 바부르나마는 비록 문장 구조, 형태론, 어휘에서 매우 페르시아화되었지만,[39] 미르 알리 시르 나와이의 차가타이어 시와 함께 가장 잘 알려진 튀르크 문학 작품 중 하나이며 많은 다른 작품들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차가타이어가 페르시아어를 대체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장려되지는 않았고,[30]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의 궁정에서 차가타이어 텍스트가 발견되었음에도 티무르 제국의 관청과 궁정은 페르시아어를 계속 사용했다. 15세기 티무르 시대에 중앙아시아에서 생산된 튀르크 문학의 양은 증가했지만(부분적으로 미르 알리 시르 나와이의 티무르 시대 말의 독자적인 노력의 결과)—그것은 여전히 티무르 엘리트가 지원한 페르시아 문학 산출량에 비해 미미했다. 페르시아어로 쓰인 티무르 역사서가 번성하기 전 티무르 시대에 두 편의 튀르크어 역사서가 쓰인 것으로 보이지만, 티무르 제국 시대의 튀르크어 역사서는 전해지지 않는다.

왕조 차원의 편찬 사업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샤미와 야즈디에 의해 티무르의 전기를 다룬 두 종류의 ''ظفرنامه|자파르나메fa''가 저술된 것을 시작으로 샤 루크 시대에는 티무르 제국이 차가타이 칸국의 계승 국가라는 의식이 더욱 두드러졌다. 샤 루크는 역사가 등에게 집사를 비롯한 일칸국 시대부터의 역사 정보 자료의 총괄을 명하고, 아울러 집사 자체도 몽골 제국에서의 바를라스 부족과 칭기즈칸 가문의 관계를 강조한 형태로 재편집한 버전을 작성하게 했다. 이러한 샤 루크 치세하 헤라트에서의 편찬 사업의 전통은 후세인 바이카라의 치세에 나와이의 보호하에 세계적인 통사인 ''청정원''을 저술한 나 그의 외손자로 바부르를 섬긴 『전기의 동반자』의 저자 훈다미르 등을 배출했다.

이처럼 티무르 제국 시대에 발전한 문학은 후대의 샤이바니 왕조, 사파비 왕조, 무굴 제국, 오스만 제국 등 주변 이슬람 세계의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4. 4. 학문

울루그 베크 천문대 유적


티무르 제국은 유목 정권이었음에도 도시의 뛰어난 문화를 이해하고 중요하게 여겼다. 수도 사마르칸트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는 활발한 상업 활동에 힘입어 학문과 예술이 크게 발전했다. 예술과 문화면에서는 이란 문화의 영향이 강했으며, 역대 군주들의 보호와 장려 아래 티무르 양식의 이슬람 문화가 발달했다. 아라비아의 수학, 천문학, 의학, 지리학, 역사학 등도 발달하여 이슬람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티무르의 손자이자 스스로 수학, 의학, 천문학 등에 능통했던 학자 군주 울루그 베크는 사마르칸트 총독 시절 문화 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는 사마르칸트 교외에 울루그 베크 천문대를 건설했으며, 이곳에서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천문표가 작성되었다.

또한, 도시 곳곳에는 뛰어난 종교 및 교육 시설이 세워졌다. 사마르칸트의 구리 아미르 묘, 비비하눔 모스크, 울루그 베크 마드라사(이슬람 신학교)와 현재 카자흐스탄 남부 투르키스탄에 있는 호자 아흐마드 야사위 묘 등이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이러한 건축 양식에서는 중국식 탑과 유목 민족의 천막을 조합한 독특한 사원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회화 분야에서는 이란풍의 미니아튀르(세밀화) 예술이 발달했다. 이러한 문화는 15세기 후반 헤라트 정권의 후세인 바이카라 궁정에서 정점에 달했다. 헤라트 궁정에서는 몽골 시대 이란에서 중국 회화의 영향을 받아 발달한 세밀화 기법이 더욱 발전하여 예술적으로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문학에서는 이란 문학의 시인 자미가 유명하다. 후세인 바이카라와 그의 총신이었던 미르 알리 시르 나바위는 모두 뛰어난 문화인이었으며, 그들의 후원으로 문예가 크게 번성했다. 당시 중앙아시아의 문화어는 페르시아어였으나, 나바위 등은 튀르크어족 언어에 페르시아어 어휘와 수사법을 더해 세련된 차가타이어를 사용하여 문학 활동을 했다. 이를 통해 차가타이어는 아랍어나 페르시아어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문학적 지위를 향상시켰다. 차가타이어 산문 문학의 정점으로는 티무르 제국 황자 바부르가 쓴 자서전 『바부르나마』가 꼽힌다.

티무르 제국에서는 왕조 차원의 편찬 사업도 활발했다. 샤미와 야즈디가 티무르의 전기를 다룬 두 종류의 『정복기』를 저술한 것을 시작으로, 샤 룩 시대에는 티무르 제국이 차가타이 울루스의 계승 국가임을 강조하는 역사 서술을 중시했다. 샤 룩은 역사가 하피즈 아브루 등에게 일칸국 시대의 역사 자료를 종합하도록 명하고, 『집사』를 몽골 제국 내 바를라스 부족과 칭기즈 칸 가문의 관계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재편집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몽골의 조상 전승과 예언자 무함마드와의 혈연적·종교적 관계를 연결하려는 시도도 나타났다. 이러한 편찬 사업의 전통은 후세인 바이카라 시대에도 이어져, 나바위의 후원 아래 미르 흐완드가 세계 통사 『청정원』을 저술했고, 그의 외손자이자 바부르를 섬긴 훈다미르는 『전기의 동반자』를 썼다.[68]

티무르 제국 시대에 형성되고 발전한 높은 수준의 문화는 이후 중앙아시아 지역을 계승한 샤이바니 왕조뿐만 아니라, 서쪽의 사파비 왕조, 남쪽의 무굴 제국 등 주변 이슬람 세계로 퍼져나갔다. 또한, 발전된 문학과 과학이 같은 언어권인 아나톨리아의 튀르크인들에게 전해져 당시 성장 단계에 있던 오스만 제국의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티무르 제국에서 꽃피운 독특한 이슬람 문화를 '튀르크-이슬람 문화'라고 부른다.

5. 티무르 왕조의 통치자

티무르 제국을 다스린 주요 통치자 및 왕족들은 다음과 같다. 통치 시기나 지역에 따라 여러 인물들이 존재했으며, 일부는 특정 지역에서만 권력을 행사했다. 상세한 내용은 하위 문서를 참고할 수 있다.

이름재위 또는 활동 기간비고
티무르1370년 ~ 1405년제국 창건자
피르 무함마드 이븐 자한기르1405년 ~ 1407년티무르가 지명한 후계자
칼릴 술탄1405년 ~ 1409년사마르칸트 통치자
샤 루흐1409년 ~ 1447년헤라트 중심 통치
울루크 베그1447년 ~ 1449년샤 루흐의 아들, 사마르칸트 통치자
압달-라티프 미르자1449년 ~ 1450년울루크 베그의 아들
압둘라 미르자1450년 ~ 1451년사마르칸트 통치자
술탄 무함마드1447년 ~ 1451년파르스 지역 통치자
아불-카심 바부르 미르자1449년 ~ 1457년헤라트 중심 통치
미르자 샤 마흐무드1457년아불 카심 바부르의 아들, 헤라트 통치자
이브라힘 미르자1457년 ~ 1459년헤라트 통치자
아부 사이드 미르자1451년 ~ 1469년제국 재통합 시도
술탄 아흐메드 미르자1469년 ~ 1494년사마르칸트 통치자, 아부 사이드의 아들
술탄 마흐무드 미르자1494년 ~ 1495년사마르칸트 통치자, 아부 사이드의 아들
바이순구르1495년 ~ 1497년 (1차, 2차)사마르칸트 통치자, 술탄 마흐무드의 아들
술탄 알리1496년, 1498년 ~ 1500년사마르칸트 통치자, 술탄 마흐무드의 아들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1469년, 1470년 ~ 1506년헤라트 중심 통치
야드가르 무함마드 미르자1469년 ~ 1470년헤라트 통치자
우마르 샤이크 미르자 2세1469년 ~ 1494년페르가나 통치자, 바부르의 아버지
바부르1497년 ~ 1498년 (사마르칸트), 이후 무굴 제국 창건
바디 알-자만 미르자1506년 ~ 1507년헤라트 공동 통치
무자파르 후세인 미르자1506년 ~ 1507년헤라트 공동 통치
카이두 빈 피르 무하마드 빈 자항기르1405년 ~ 1408년경
아부 바크르 빈 미란 샤1405년 ~ 1407년
피르 무함마드 이븐 우마르 샤이크1405년 ~ 1409년경파르스 지역 통치자
루스탐 미르자1409년 ~ 1414년경파르스 지역 통치자
시칸다르 이븐 우마르 샤이크1409년 ~ 1414년경파르스 지역 통치자
알라 알-다울라 미르자1447년 ~ 1448년경헤라트 통치자
아부 바크르 빈 무하마드1448년경
무하마드 빈 후세인1500년 ~ 1503년경
아불 알라 페레이둔 후세인1507년 ~ 1508년경
무하마드 모신 칸1507년 ~ 1508년경
무하마드 자만 칸1514년 ~ 1517년경
샤흐룩 2세 빈 아부 사이드1492년 ~ 1493년경
울루그 베그 2세1469년 ~ 1502년카불 통치자
술탄 우와이스1508년 ~ 1522년


  • '''주:''' 위 목록은 모든 티무르 왕조 구성원을 포함하지 않을 수 있으며, 재위 기간 및 통치 지역은 자료에 따라 다를 수 있다.[68] 일부 인물은 특정 지역에서 제한적인 통치권을 행사했다.

5. 1. 통일 티무르 제국의 통치자

티무르가 세운 제국을 통일된 상태로 다스렸던 주요 군주들은 다음과 같다.

군주재위 기간
티무르1370년 ~ 1405년
할릴 술탄1405년 ~ 1409년
샤 루흐1409년 ~ 1447년
울루그 베그1447년 ~ 1449년
압둘 라티프1449년 ~ 1450년
압둘라1450년 ~ 1451년
아부 사이드 미르자1451년 ~ 1469년



티무르 사후, 그의 후계자 자리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다. 할릴 술탄이 잠시 권력을 잡았으나, 곧 티무르의 넷째 아들 샤 루흐가 제위를 계승하여 1409년부터 약 40년간 제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했다. 샤 루흐의 치세 동안 제국은 문화적, 상업적으로 번영했다. 그러나 1447년 샤 루흐가 사망한 후 제국은 다시 극심한 혼란에 빠졌으며, 짧은 기간 동안 울루그 베그, 압둘 라티프, 압둘라 등이 차례로 즉위했으나 혼란은 계속되었다. 1451년 아부 사이드 미르자가 집권하여 제국의 상당 부분을 다시 통일했지만, 그의 사후 티무르 제국은 여러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5. 1. 1. 사마르칸트 정권

티무르는 생전에 새로 정복한 지역을 자신의 왕자들에게 총독으로 삼아 통치를 맡겼다. 이 때문에 티무르 사후, 각지에 분봉되어 세력을 키운 왕자들 사이에서 후계자를 둘러싼 다툼이 일어났다. 티무르는 자신보다 먼저 죽은 왕자 자한기르의 아들 피르 무함마드 자한기르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피르 무함마드는 다른 왕자들에 비해 힘이 약하여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다. 대신 티무르의 셋째 아들 미란 샤의 아들이자 타슈켄트 총독이었던 할릴 술탄이 수도 사마르칸트를 점령하고 티무르의 후계자로 즉위했다. 그러나 심복 세력이 부족했던 할릴 술탄은 총애하던 후궁 샤디 뮬크 Shad Mulk|샤디 뮬크eng의 정치 개입을 허용하면서 수도에서 지지를 잃었고, 결국 호라산 지방 총독으로서 군단을 장악한 티무르의 넷째 아들 샤 루흐에 의해 폐위되었다.

1409년 사마르칸트를 정복하고 티무르 제국의 3대 군주가 된 샤 루흐는 사마르칸트의 통치를 자신의 장남 울루그 베크에게 맡기고, 자신은 호라산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헤라트(현 아프가니스탄 서부)를 근거지로 삼아 제국의 재통일을 추진했다. 샤 루흐는 자신의 심복들을 등용하여 권력 기반을 다지고,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지방에서 할거하던 다른 왕족들의 세력을 점차 약화시켰다. 약 40년간 이어진 샤 루흐의 치세 동안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가 수립되어 상업 활동이 번창했으며, 국제 무역과 오아시스 농업 생산에 힘입어 중앙아시아에서는 이슬람 문화가 크게 발전했다. 1415년, 1422년, 1431년경 세 차례에 걸쳐 명나라 영락제의 명을 받은 정화호르무즈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국 서쪽 변방인 동아나톨리아와 이란 서부에서는 티무르에게 밀려났던 투르크멘 유목민의 활동이 다시 활발해졌다. 특히 흑양 왕조의 지도자 카라 유수프가 이끄는 세력은 아제르바이잔 지방을 티무르 제국으로부터 빼앗았다. 1447년 샤 루흐가 사망하자, 여러 왕자들이 다시 각지에서 독립하여 왕위를 다투면서 티무르 제국의 지배는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샤 루흐의 뒤를 이어 사마르칸트를 다스리던 장남 울루그 베크가 4대 군주로 즉위했지만, 1449년 자신의 아들 압둘 라티프에게 살해당했다. 이듬해 압둘 라티프마저 암살되면서 샤 루흐 가문에는 실력자가 사라지고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 시기 흑양 왕조는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하여 이란 서부에서 동부까지 진출했고, 호라산의 주요 도시 헤라트까지 점령했다.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한 정권의 군주들은 다음과 같다.

군주재위 기간비고
술탄 아흐마드1469년 ~ 1494년아부 사이드 미르자의 장남
술탄 마흐무드1494년 ~ 1495년아부 사이드의 차남
바이순구르1495년 ~ 1496년술탄 마흐무드의 장남
술탄 알리1496년술탄 마흐무드의 차남
바이순구르1497년두 번째 재위
바부르1497년 ~ 1498년후일 무굴 제국 초대 황제
술탄 알리1498년 ~ 1500년두 번째 재위


5. 1. 2. 헤라트 정권

티무르는 생전에 정복한 지역을 왕자들에게 맡겨 통치하게 했으나, 그의 사후 후계자 자리를 둘러싸고 왕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티무르는 손자 피르 무함마드 자한기르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그는 다른 왕자들에 비해 힘이 약해 권력을 잡지 못했다. 대신 티무르의 셋째 아들 미란 샤의 아들이자 타슈켄트 총독이었던 할릴 술탄이 수도 사마르칸트를 점령하고 후계자로 즉위했다. 그러나 할릴 술탄은 총애하던 후궁 샤디 뮬크(Shad Mulk)의 정치 개입을 막지 못해 지지 기반을 잃었고, 결국 호라산 지방 총독으로서 군대를 장악한 티무르의 넷째 아들 샤 루흐에게 폐위되었다.

1409년 사마르칸트를 정복한 샤 루흐는 장남 울루그 베크에게 사마르칸트 통치를 맡기고, 자신은 호라산의 주요 도시인 헤라트(현 아프가니스탄 서부)를 근거지로 삼아 제국의 재통일을 추진했다. 샤 루흐는 자신의 심복들을 등용하여 권력을 공고히 하고,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지방에서 세력을 키우던 다른 왕족들의 힘을 점차 약화시켰다. 40년 가까이 이어진 그의 치세 동안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가 수립되어 상업이 번창했고, 국제 무역과 오아시스 농업의 풍요를 바탕으로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문화가 크게 발전했다. 이 시기 명나라 영락제의 명을 받은 정화가 세 차례(1415년, 1422년, 1431년경) 호르무즈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국 서쪽 변방인 동아나톨리아와 이란 서부에서는 티무르에게 밀려났던 투르크멘 유목민들이 다시 세력을 키웠다. 특히 흑양 왕조의 카라 유수프가 이끄는 세력은 아제르바이잔 지방을 티무르 제국으로부터 빼앗았다.

1447년 샤 루흐가 사망하자 제국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여러 왕자들이 각지에서 독립하여 왕위를 다투기 시작했다. 샤 루흐의 뒤를 이어 사마르칸트를 다스리던 울루그 베크가 정통 후계자로서 4대 군주로 즉위했지만, 1449년 자신의 아들 압둘 라티프에게 살해당했다. 압둘 라티프 역시 이듬해 암살되면서 샤 루흐 가문은 실력자를 잃고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 혼란기에 흑양 왕조는 이란 서부에서 동부로 세력을 확장하여 호라산의 헤라트까지 점령하기도 했다.

이후 헤라트를 중심으로 한 호라산 지역에서는 다음과 같은 군주들이 통치했다.

'''헤라트 정권의 군주 목록'''

군주재위 기간
샤 루흐1409년 ~ 1447년
아불 카심 바부르1449년 ~ 1457년
샤 마흐무드1457년
이브라힘1457년 ~ 1459년
술탄 아부 사이드 미르자1459년 ~ 1469년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1469년 (1차)
야드가르 무함마드1469년 ~ 1470년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1470년 ~ 1506년 (2차)
바디 알자만, 무자파르 후세인 (공동 통치)1506년 ~ 1507년


5. 2. 그 밖의 통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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