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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럴드 맥밀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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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해럴드 맥밀런은 1894년 런던에서 태어나 1986년에 사망한 영국의 정치인이다. 그는 이튼 스쿨과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었다. 1924년 하원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여러 차례 의원직을 수행했으며, 1951년 주택부 장관, 1954년 국방부 장관, 1955년 외무 장관을 거쳐 1955년부터 1957년까지 재무 장관을 역임했다. 1957년부터 1963년까지 영국 총리를 지내면서 탈식민지화 정책을 추진하고, 핵 억제력 정책을 강화했으며,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입을 시도했다. 1963년 프러퓨모 사건으로 사임한 후, 귀족 작위를 받았으며, 1980년대에는 마거릿 대처의 정책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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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럴드 맥밀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해럴드 맥밀런, 1959년
맥밀런, 1959년
이름모리스 해럴드 맥밀런
작위스톡턴 백작
출생일1894년 2월 10일
출생지런던, 잉글랜드
사망일1986년 12월 29일
사망지호스테드 케인즈, 웨스트서식스, 잉글랜드
안장 위치세인트 자일스 교회, 호스테드 케인즈, 웨스트서식스, 잉글랜드
정당보수당
모교옥스퍼드 대학교 베일리얼 칼리지
직업출판업자
정치인
배우자도로시 캐번디시 (1920년 4월 21일 결혼, 1966년 5월 21일 사망)
자녀4명 (모리스, 캐럴라인 포함)
서명
훈장메리트 훈장 (1976년)
귀족 작위 (1984년)
소속영국
군 복무영국 육군
소속 부대그레나디어 근위대
복무 기간1914년–1920년
계급대위
참전 전투제1차 세계 대전
루스 전투
솜 전투
훈장승리 메달
영국 전쟁 메달
정치 경력
직책영국 총리
임기 시작1957년 1월 10일
임기 종료1963년 10월 18일
군주엘리자베스 2세
초대 국무장관랩 버틀러 (1962–63)
이전 총리앤서니 이든
다음 총리알렉 더글러스홈
직책영국 보수당 대표
임기 시작1957년 1월 10일
임기 종료1963년 10월 18일
이전 대표앤서니 이든
다음 대표알렉 더글러스홈
주요 장관직
직책영국 재무장관
임기 시작1955년 12월 20일
임기 종료1957년 1월 13일
총리앤서니 이든
이전 장관랩 버틀러
다음 장관피터 소니크로프트
직책외무부 장관
임기 시작1955년 4월 7일
임기 종료1955년 12월 20일
총리앤서니 이든
이전 장관앤서니 이든
다음 장관셀윈 로이드
직책국방부 장관
임기 시작1954년 10월 19일
임기 종료1955년 4월 7일
총리윈스턴 처칠
이전 장관알렉산더 튀니스 백작
다음 장관셀윈 로이드
직책주택 및 지방 정부부 장관
임기 시작1951년 10월 30일
임기 종료1954년 10월 19일
총리윈스턴 처칠
이전 장관휴 돌턴
다음 장관던컨 샌디스
직책공군부 장관
임기 시작1945년 5월 25일
임기 종료1945년 7월 26일
총리윈스턴 처칠
이전 장관아치볼드 싱클레어
다음 장관스탠스게이트 자작
직책북서아프리카 주재 장관
임기 시작1942년 12월 30일
임기 종료1945년 5월 25일
총리윈스턴 처칠
이전 장관직책 신설
다음 장관해럴드 밸푸어
직책식민지 차관
임기 시작1942년 2월 4일
임기 종료1942년 12월 30일
총리윈스턴 처칠
이전 장관조지 홀
다음 장관데본셔 공작
직책군수부 차관
임기 시작1940년 5월 15일
임기 종료1942년 2월 4일
총리윈스턴 처칠
이전 장관존 르웰린
다음 장관포털 자작
의회 경력
직책상원 의원
신분세습 귀족
작위세습 귀족
임기 시작1984년 2월 24일
임기 종료1986년 12월 29일
후임제2대 스톡턴 백작
직책하원 의원 (브롬리 선거구)
임기 시작1945년 11월 14일
임기 종료1964년 9월 25일
이전 의원에드워드 캠벨 경
다음 의원존 헌트
직책하원 의원 (스톡턴온티스 선거구)
임기 시작1931년 10월 27일
임기 종료1945년 6월 15일
이전 의원프레데릭 폭스 라일리
다음 의원조지 체트윈드
임기 시작1924년 10월 29일
임기 종료1929년 5월 10일
이전 의원로버트 스트로더 스튜어트
다음 의원프레데릭 폭스 라일리
학문 경력
직책옥스퍼드 대학교 총장
임기 시작1960년 3월 3일
임기 종료1986년 12월 18일
이전 총장에드워드 우드
다음 총장로이 젠킨스

2. 어린 시절

해럴드 맥밀런은 1894년 2월 10일 런던 첼시에서 출판업자 모리스 크로퍼드 맥밀런과 헬렌 아티 탈턴 벨스의 아들로 태어났다.[130] 맥밀런 가문은 1843년 창업한 맥밀런 출판사를 경영해 온 집안이었다.

어린 시절, 미국인 어머니의 지도 아래 프랑스어를 배웠고, 맥퍼슨 체육 및 무용 아카데미에서 운동을 했다. 6, 7세부터는 슬로언 스퀘어의 글래드스톤 씨의 데이 스쿨에서 고전 라틴어와 그리스어 입문 수업을 받았다.[5]

섬머 필즈 스쿨(옥스퍼드)과 이튼 칼리지를 거쳐 옥스퍼드 대학교의 발리올 칼리지에서 수학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육군에 자원 입대하여 1914년 11월 19일 임시 보병 소위로 킹스 로열 라이플 코프스에 입대하였다.[131] 1915년 1월 30일 중위로 진급한 후,[132][133] 같은 해 그레나디어 가즈로 전속되었다.[134]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대위로서 3번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솜 전투에서 골반에 총상을 입는 중상을 입었고, 이로 인해 평생 몸을 약간 비스듬히 하고 걷는 버릇이 생겼다.[135]

전쟁이 끝난 후, 맥밀런은 많은 동료들을 잃은 슬픔에 옥스퍼드 대학교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였다.[19]

2. 1. 가계

해럴드 맥밀런은 런던 첼시에서 모리스 크로퍼드 맥밀런(1853 ~ 1936)과 헬렌 아티 탈턴 벨스(1856 ~ 1937) 사이에서 태어났다.[130] 그의 친조부 대니얼 맥밀런(1813 ~ 1857)은 맥밀런 출판사를 창립한 스코틀랜드소작인이었다.[4]

2. 2. 교육

해럴드 맥밀런은 런던 첼시에서 모리스 크로퍼드 맥밀런과 헬렌 아티 탈턴 벨스에게서 태어났다. 서미필즈 스쿨에서 처음 교육을 받았고, 이턴 스쿨로 전학을 갔으나 질병으로 인해 떠났다고 한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베일리얼 칼리지에서 수학하였는데,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기 전 고전 학위 과정의 2년을 완료했다.

미국인 어머니의 밀착 지도 아래 집중적인 조기 교육을 받았다. 매일 아침 여러 유모들로부터 집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가족 집 근처에 있는 맥퍼슨 체육 및 무용 아카데미에서 매일 운동을 했다. 6세 또는 7세부터는 근처 슬로언 스퀘어의 글래드스톤 씨의 데이 스쿨에서 고전 라틴어와 그리스어 입문 수업을 받았다.[5]

섬머 필즈 스쿨(옥스퍼드)에 다녔으며, 이튼 칼리지에서 3등 장학생이었다. 그러나 이튼 칼리지에서 보낸 시간은 첫 학기에 거의 치명적인 폐렴 발작을 시작으로 반복되는 질병으로 힘들었다. 병으로 마지막 해를 결석했고, 1910~1911년에는 고교파 앵글리컨교 신앙을 심어준 로널드 녹스를 비롯한 개인 교사들에게서 가정 교육을 받았다.[6] 발리올 칼리지(옥스퍼드)에 장학금을 받았다.

젊은 시절 자유당 총리들의 정책과 지도력을 존경했는데, 맥밀런이 11세 때 집권한 헨리 캠벨-배너먼, "지적인 성실성과 도덕적 고귀함"을 지녔다고 묘사한 H. H. 애스퀴스, 그의 목표를 달성할 가능성이 높은 "행동하는 사람"으로 여긴 애스퀴스의 후계자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를 존경했다.

1912년 발리올 칼리지에 입학하여 많은 정치 동아리에 가입했다. 이 시기 그의 정치적 견해는 온건 보수주의, 온건 자유주의, 패비안 사회주의의 절충적인 혼합이었다. 디즈레일리에 대해 열심히 읽었지만, 1913년 그가 회원이 된 옥스퍼드 유니온 소사이어티에서 로이드 조지의 연설에 특히 감명을 받았다. 나중에 내각 동료가 된 유니온 소사이어티 회장 월터 몽크턴의 후원을 받았다. 그는 유니온의 서기, 차석 재무가 되었고, 전기 작가들에 따르면 전쟁이 개입되지 않았다면 "거의 확실하게" 회장이 되었을 것이다.[7] 1914년 비공식적으로 'Mods'라고 알려진 명예 학위 시험에서 1등을 했다. 2년 후 최종 시험을 치러야 했기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옥스퍼드에서 목가적인 트리니티 학기를 즐겼다.[8]

2. 3.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해럴드 맥밀런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옥스퍼드 대학교에서의 학업을 중단하고 영국 육군에 자원 입대했다. 1914년 11월 19일 임시 보병 소위로 킹스 로열 라이플 코프스에 입대하였고,[131] 1915년 1월 30일 중위로 진급한 후,[132][133] 같은 해 그레나디어 가즈(Grenadier Guards)로 전속되었다.[134] 그는 전쟁 기간 동안 수류탄 가드단에서 대위로 복무하며 3번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솜 전투에서 그는 골반에 총탄을 맞는 중상을 입었다. 그는 부상당한 채 하루 종일 간이호에 누워 그리스어 원서로 된 아이스킬로스의 책을 읽기도 했다.[135] 이 부상으로 인해 그는 평생 몸을 약간 비스듬히 하고 걷는 버릇이 생겼고, 때때로 고통에 시달렸다.[135]

많은 동료 학생들을 잃은 맥밀런은 옥스퍼드 대학교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며, 대학이 예전 같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19] 그는 1920년 4월 1일 중위 계급을 유지한 채 군 복무에서 은퇴했다.[136]

3. 결혼 생활

부인 도로시 여사


맥밀런은 1920년 4월 21일 제9대 데번셔 공작 빅터 캐번디시의 딸 도로시 캐번디시와 결혼하였다.[130] 1929년1935년 사이에 도로시 여사는 웨스트민스터에서 보수당 정치인 로버트 부스비와 장기간 관계를 가졌는데, 이로 인해 사교계가 떠들썩했다. 부스비는 맥밀런의 막내 딸 세라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 일로 인한 스트레스는 1931년 맥밀런의 신경 쇠약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도로시 여사는 1966년 5월 21일 6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맥밀런 부부는 4명의 자식을 두었다.[130]

  • 모리스 맥밀런 (오벤던의 맥밀런 자작) (1921 ~ 84)
  • 레이디 캐럴라인 페이버 (1923 ~ 2016)
  • 레이디 캐서린 애머리 (1926 ~ 91)
  • 세라 맥밀런 (1930 ~ 70)

4. 정치 경력 (1924 ~ 1957)

1924년 스톡턴온티스구를 지역구로 하여 하원에 선출되었으나, 1929년 의석을 잃었다가 1931년에 복귀하였다. 맥밀런은 스탠리 볼드윈네빌 체임벌린의 유화 정책을 반대하여 1930년대를 뒷좌석에서 고립되어 보냈다. 1938년에는 국내적 및 국제적으로 중도주의 정치 철학을 주창한 저서 《중도》의 첫 판을 발간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그는 1942년 지중해에서 연합국의 영국 정부 대표로 임명되기 전에 군수성과 식민성에서 전시 연정에 복무하는 직위를 얻었다. 이 지위에서 맥밀런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와 긴밀히 협력하였으며, 이는 그의 이후 경력에 중요한 우정으로 발전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귀국하여 1945년 2달 동안 공군 장관을 지냈다. 그는 1945년 총선에서 노동당에게 압도적으로 자신의 의석을 잃었으나, 곧 브롬리구에서 열린 보궐선거를 통해 11월 국회로 돌아왔다.

1951년 보수당의 승리로 윈스턴 처칠 아래 주택부 장관이 되어 한 해에 300,000 채의 주택을 건설하는 자신의 회의 약속을 실행하였다. 1954년 10월부터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이때까지 그는 자신의 와이어 림 안경, 이빨을 드러낸 미소와 전시 사진들의 브릴크림으로 손질한 헤어스타일을 버리고, 대신 자신의 머리털을 두껍고 모양 좋게 길렀으며 전 경비원의 반듯한 태도를 갖추면서 이후 경력의 저명한 외관을 획득하였다.

앤서니 이든 내각 아래에서 1955년 4월부터 12월까지 외무장관을 지내고, 그 후부터 1957년까지 재무장관 직을 맡았다. 재무장관 시절, 맥밀런은 이든의 사실상 대리인이었던 랩 버틀러가 자신을 연장자로서 대우하지 않도록 하였고, 우유보조금을 삭감하는 데 허용될 때까지 사임을 위협하였다. 야당 노동당그림자 내각 재무장관 해럴드 윌슨은 수에즈 위기 동안 맥밀런을 "먼저 들어간 것이 먼저 나오는 것"이라고 묘사하였다. 이는 맥밀런이 처음에 침입을 지지하고, 그러고 나서 금융 위기에서 영국군의 철수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는 의미였다.

1957년 1월, 앤서니 이든 수상이 수에즈 위기에서 영국군 파병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다. 후임자 문제에서는 맥밀런과 셀던 로브-배틀러 외무장관 두 사람이 유력했다. 그러나 배틀러는 원로 의원으로서 평판이 좋지 않았고, 에든과 마찬가지로 수에즈 위기의 책임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솔즈베리 경 등의 여왕에 대한 추천으로 맥밀런이 수상에 취임했다.

맥밀런이 동성애 때문에 이튼 칼리지에서 퇴학당했다는 소문이 오랫동안 있어 왔다. 맥밀런의 전기 작가 D. R. 소프는 그가 나이 많은 소년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머니가 알게 되자 어머니에 의해 학교를 떠났다고 생각한다.[22] 딕 레너드는 앨리스터 혼이 "불가피한 소문"을 언급하고 "그는 사립학교 소년들이 퇴학당하는 '일반적인 이유'로 학교를 떠났다"고 말한다고 전한다.[23]

4. 1. 하원의원 시절 (1924~1929, 1931~1939)

1924년 하원 의원으로 스톡턴온티스구에서 당선되었으나, 1929년 총선에서 낙선하였다. 1931년 다시 하원 의원으로 복귀하였다. 맥밀런은 스탠리 볼드윈네빌 체임벌린의 유화 정책에 반대하여 1930년대에 뒷좌석에서 고립된 시간을 보냈다.

1938년에는 국내외적으로 중도주의 정치 철학을 주창한 저서 《중도(The Middle Way)》 초판을 발간하였다.

4. 2. 제2차 세계 대전 (1939~1945)

스톡턴온티스구를 위하여 하원에 선출된 맥밀런은 1929년 자신의 의석을 잃다가 1931년에 복귀하였다. 맥밀런은 스탠리 볼드윈네빌 체임벌린의 유화 정책에 반대하며, 이들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뒷좌석에서 1930년대를 보냈다.[1]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맥밀런은 1942년 지중해에서 연합국의 영국 정부 대표로 임명되어 북아프리카로 파견되었다. 그 전에는 군수성과 식민성에서 전시 연정에 참여하는 직위를 맡았다. 북아프리카에서 맥밀런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와 긴밀히 협력하였으며, 이는 그의 이후 경력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우정으로 발전하였다.[1]

1943년 시칠리아 캠페인에서 연합군 사령관들과 함께 찍은 사진에서 맥밀런은 윗줄 좌측에, 그의 옆에는 베델 스미스 중장이, 아랫줄에는 왼쪽부터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 아서 테더 공군 대장, 해럴드 알렉산더 장군, 앤드루 커닝엄 제독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1]

4. 3. 전시 내각 각료 (1945)

해럴드 맥밀런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전시 연정에 복무하는 직위를 얻었으며, 1942년 지중해에서 연합군에 영국 정부 대표로 파견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귀국하여 1945년 2달 동안 공군 장관을 지냈다.

4. 4. 야당 시절 (1945~1951)

1945년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이 압승하면서 맥밀런은 의석을 잃었지만, 곧 브롬리구에서 열린 보궐선거에서 승리하여 1945년 11월 다시 국회로 돌아왔다.[31]

4. 5. 주택부 장관 (1951~1954)

1951년 보수당이 승리하면서 윈스턴 처칠 아래에서 주택부 장관이 되었고, 한 해에 300,000 채의 주택을 건설하겠다는 회의 약속을 실행하였다. 1954년 10월부터는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이때까지 맥밀런은 와이어 림 안경, 이빨을 드러낸 미소, 브릴크림으로 손질한 전시 사진 속 헤어스타일 대신, 머리털을 두껍고 모양 좋게 길렀으며 전 경비원의 반듯한 태도를 갖추면서 이후 경력의 저명한 외관을 획득하였다.

4. 6. 국방부 장관 (1954~1955)

Harold Macmillan영어1951년 보수당의 승리와 함께 윈스턴 처칠 아래 주택부 장관이 되어 한 해에 300,000 채의 주택을 건설하는 자신의 회의 약속을 실행하였다. 그는 그러고 나서 1954년 10월부터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4] 이때까지 그는 자신의 와이어 림 안경, 이빨의 미소와 전시 사진들의 브릴크림으로 손질한 헤어스타일을 잃고 대신 자신의 머리털을 두껍고 모양 좋게 길렀으며 전 경비원의 반듯한 태도와 함께 걸어 다니면서 자신 이후의 경력의 저명한 외관을 획득하였다.[4]

4. 7. 외무부 장관 (1955)

앤서니 이든 내각 아래에서 1955년 4월부터 12월까지 외무장관을 지냈고, 그 후 1957년까지 재무장관을 역임했다.

4. 8. 재무장관 (1955~1957)

앤서니 이든 아래에서 1955년 4월부터 12월까지 외무장관을 지냈고, 그 후 1957년까지 재무장관 직을 맡았다. 재무장관으로서 맥밀런은 이든의 사실상 대리인이었던 랩 버틀러가 자신을 연장자로서 대우하지 않도록 하였고, 우유보조금을 삭감하는 것이 허용될 때까지 사임을 위협하였다. 야당 노동당그림자 내각 재무장관 해럴드 윌슨은 수에즈 위기 동안 맥밀런을 "먼저 들어간 것이 먼저 나오는 것"이라고 묘사하였다. 이는 맥밀런이 처음에 침입을 지지하고, 그러고 나서 금융 위기에서 영국군의 철수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는 의미였다.[34]

5. 총리 재임 (1957 ~ 1963)

1957년 1월, 앤서니 이든 수상이 수에즈 운하 사태에서 영국군 파병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다. 후임으로는 맥밀런과 래브 버틀러 외무장관 두 사람이 유력하게 거론되었다. 그러나 버틀러는 원로 의원으로서 평판이 좋지 않았고, 이든과 마찬가지로 수에즈 위기의 책임도 부정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솔즈베리 경 등의 여왕에 대한 추천으로 맥밀런이 수상에 취임했다.[39]

맥밀런은 총리로 선출된 후, 가족 구성원들을 포함하여 정부 직위를 채웠다.[39]

5. 1. 정부 구성

맥밀런은 총리로 선출된 후, 7명의 내각 구성원을 포함하여 35명의 가족 구성원들로 정부 직위를 채웠다.[39] 1945년 7월 총선에서 노동당의 압승으로 스톡턴 선거구를 잃었지만, 같은 해 11월 브롬리 보궐선거를 통해 의회로 복귀했다. 해럴드 니콜슨은 그의 일기에서 보수당 후방 의원들의 심정을 "그들은 윈스턴이 너무 늙었고, 앤서니(이든)는 너무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해롤드 맥밀런이 그들을 이끌어주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록했다.[39]

맥밀런은 1949년부터 1951년까지 유럽평의회 협의회의 영국 대표단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윈스턴 처칠의 핵심 보좌관이자 동맹으로서 소련 전체주의에 대한 보루이자 나치 통치의 공포 재발을 막기 위한 유럽 통합을 강력히 촉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맥밀런은 "산업헌장" 초안 작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안전한 지역구의 국회의원이 된 후에는 다소 우익적인 공개적 인물을 채택하여 사기업을 옹호하고 하원에서 노동당 정부에 강력히 반대했다.

1957년 1월, 앤서니 이든 수상이 수에즈 운하 사태에서 영국군 파병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다. 후임자 문제에서는 맥밀런과 래브 버틀러 외무장관 두 사람이 유력했다. 그러나 버틀러는 원로 의원으로서 평판이 좋지 않았고, 이든과 마찬가지로 수에즈 위기의 책임도 부정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솔즈베리 경 등의 여왕에 대한 추천으로 맥밀런이 수상에 취임했다.

맥밀런 내각의 각료들은 다음과 같다.

직책이름
총리해럴드 맥밀런
대법관킬무어 경
국무원 의장솔즈베리 경
왕실 인장 보관관 및 내무부 장관래브 버틀러
재무장관피터 소니크로프트
영국 외무장관셀윈 로이드
식민지 장관앨런 레녹스-보이드
연방 관계 장관홈 경
무역위원회 의장데이비드 에클스 경
랭커스터 공작령 재무관찰스 힐
교육부 장관헤일셤 경
스코틀랜드 장관존 스콧 맥레이
농업·어업·식품 장관데릭 히스코트 아모리
고용부 장관아이언 맥리오드
교통 및 민간항공 장관해럴드 아서 왓킨슨
국방장관던컨 에드윈 샌디스
에너지 장관밀스 경
주택 및 지방정부 및 웨일스 담당 장관헨리 브룩



'''맥밀런 내각의 변경 사항'''
시기내용
1957년 3월홈 경이 솔즈베리 경의 뒤를 이어 국무원 의장이 되고, 연방 관계 장관직을 유지함.
1957년 9월헤일셤 경이 홈 경의 뒤를 이어 국무원 의장이 되고, 홈 경은 연방 관계 장관직을 유지함. 제프리 로이드가 헤일셤 경의 뒤를 이어 교육부 장관이 됨. 재무부 장관 보좌관인 레지널드 모들링이 내각에 합류함.
1958년 1월데릭 히스코트 아모리가 피터 소니크로프트의 뒤를 이어 재무장관이 됨. 존 헤어가 아모리의 뒤를 이어 농업 장관이 됨.



이후 내각은 1962년 “긴 칼의 밤”이라 불린 대대적인 개각을 통해 크게 변화하였다.

5. 2. 핵 억지력 정책

블루 스트릭블루 스틸 계획의 기술적 실패와 미국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부 장관의 스카이볼트 미사일 시스템 일방적 취소 이후, 맥밀런은 1962년 12월 나소 협정을 통해 미국폴라리스 미사일을 영국으로 도입하는 협상을 진행했다. 이전에는 영국 내 60기의 토르 미사일 공동 규제에 동의했으며, 1957년 후반 미국의 맥마흔 법령 완화로 영국은 핵기술에 더 많이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키리티마티섬에서 실행된 영국의 첫 성공적 수소폭탄 실험 - 그래플 X 라운드 C1 작전


맥밀런은 1962년 영국, 미국, 소련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 체결을 이끈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60년 5월 파리 4대국 정상 회담에서 협정을 맺으려던 시도는 게리 파워스 사건으로 인해 실패했다.

1957년 4월, 맥밀런은 영국의 핵무기 프로그램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재확인했다. 그는 수소폭탄 개발을 가속화하여 1957년 11월 8일 성공적인 실험을 이끌었다.

맥밀런의 결정은 군사용 플루토늄 생산을 위해 윈드스케일과 칼더 홀 원자력 발전소의 수요를 증가시켰다.[67] 이는 1957년 10월 10일 윈드스케일 화재의 원인 중 하나였으며, 방사능 오염 물질이 영국 남동부와 유럽 본토까지 퍼졌다.[68][69]

맥밀런은 원자력청을 위해 윌리엄 페니 경이 작성한 화재 보고서 요약본 외에는 공개하지 않았다.[70] 이후 공개된 파일에 따르면, 맥밀런은 기술적 세부 사항 일부만 은폐했으며, 전체 보고서에서도 대중 보건 위험은 발견되지 않았다.[71] 그러나 이후 공식 추산에서 폴로늄-210 방출로 인한 사망자가 최대 50명까지 발생했을 수 있으며, 반핵 단체는 이를 1,000건의 치명적인 암 사례와 연결 짓고 있다.[72][73]

1957년 3월 25일, 맥밀런은 전략공군사령부의 노후화된 핵폭격기를 대체하기 위해 60기의 토르 IRBMs을 영국에 배치하는 데 동의했다. 1957년 10월 말, 미국 맥마흔법이 완화되어 양국 간 핵 협력이 용이해졌고, 상호방위협정이 체결되어 영국의 탄도 미사일 개발이 가속화되었다.[75]

맥밀런은 소련의 스푸트니크 발사를 통해 미국의 영향력을 증대시킬 기회를 포착했다. 스푸트니크 위기를 이용하여 아이젠하워에게 압력을 가해 1946년 맥마흔 법을 폐지하도록 의회에 압력을 가하게 함으로써, 보다 평등한 영국-미국 파트너십을 추구했다.

또한 맥밀런은 아이젠하워가 외교 정책 문제 조사, "상호 의존 선언"(미국 측 표현 "공동 목표 선언")에 동의하도록 설득하여 영국-미국 파트너십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맥밀런은 미국 대통령과 영국 총리가 동등한 권한을 가진다는 가정에 아이젠하워나 케네디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맥밀런은 소련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경직되었다고 판단, 냉전 긴장 완화를 위한 데탕트 정책을 지지했다.

맥밀런과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가 1961년 회담하는 모습


맥밀런은 1960년 4월 블루 스트릭(Blue Streak) 대륙간탄도미사일 계획을 취소했지만, 공중 발사식 블루 스틸(Blue Steel) 대함 미사일 개발은 지속했다. 그는 미국의 스카이볼트(Skybolt) 미사일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결정했으며, 스코틀랜드 홀리 로크에 폴라리스(Polaris) 잠수함 배치를 허용했다. 미국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의 스카이볼트 미사일 계획 취소 이후, 맥밀런은 1962년 12월 케네디 대통령과 나소 협정(Nassau agreement)을 통해 폴라리스 미사일을 구매했다.

1960년 5월 파리 정상회담 실패 이후, 영국, 미국, 소련은 1963년 핵실험금지조약(Partial Test Ban Treaty)에 서명했다. 맥밀런은 핵실험금지조약 협상을 위해 헤일샴 경을 파견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6월 맥밀런의 저택 버치 그로브(Birch Grove)를 방문하여 다자간 군사력(Multilateral Force)에 대해 논의했다. 이는 케네디의 마지막 영국 방문이었으며, 그는 맥밀런 총리 임기 직후 암살당했다.

5. 3. 유럽 경제 공동체 (EEC) 가입 시도

샤를 드 골은 "종말이 미국에 거대한 대서양 공동체의 의지일 것"이라고 공포에 더불어, 영국-미국간 핵 거래의 영향으로 영국의 유럽 경제 공동체 가입 신청은 1963년 1월 29일 거부하였다.[89]

맥밀런은 1960년 유럽 공동체(EC) 가입을 결정했지만, 보수당 의원들과 농민들의 반발, 그리고 영국 제국의 배신으로 여긴 비버브룩 경 소유의 대중 신문들의 비판을 우려하여 1961년 7월까지 공식적인 신청을 미루었다.

맥밀런의 영국은 대영제국의 꿈을 버리고 "소영국"으로서 유럽의 일원으로서 걸맞은 노선을 모색했다.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입을 추진했지만,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에게 거부당해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1960년 5월 3일, 맥밀런은 유럽 공동체(EC) 외부 국가들과 협력하여 유럽 자유 무역 연합(EFTA)을 구성하여 자유무역지대를 설립했다.[88] 그러나 EC가 경제적으로 성공함에 따라, EC 가입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1960년 4월, 재무부의 프랭크 리 경의 보고서는 향후 수십 년 동안 미국, 소련, EC가 이끄는 세 개의 주요 강대국 블록이 형성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고립을 피하기 위해 영국은 이들 강대국 블록 중 하나와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맥밀런은 EC 가입 신청 결정에 대해 "우리는 적대적인 (혹은 적어도 점점 덜 우호적인) 미국과 자랑스럽고 강력한 '샤를마뉴 제국'—현재 프랑스 지배하에 있지만 나중에는 독일의 지배하에 들어갈 운명에 있는—사이에 끼일 것인가?...끔찍한 선택이다."라고 일기에 적었다.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와 같은 영연방 국가들로부터의 전통적인 식량 수입 정책을 유지하려는 맥밀런의 희망으로 인해 EC 가입 협상은 복잡해졌고, 이는 프랑스를 비롯한 EC 국가들로 하여금 영국이 불성실하게 협상하고 있다고 비난하게 만들었다.

맥밀런은 EC와의 관계 개선의 가치를 인식했지만, 영국의 가입 신청은 1963년 1월 29일 샤를 드 골 프랑스 대통령에 의해 거부되었다. 드골은 영국이 미국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고, 유럽 공동체를 프랑스와 독일 간의 대륙적 합의로 보았기 때문에 영국의 가입은 프랑스의 역할을 축소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89]

5. 4. 경제 정책

맥밀런은 재무부의 금전적 우려를 경제 정책에 반영하였고, 경제는 그의 주요 관심사였다. 그러나 영국의 국제수지 문제는 1961년 임금 동결을 초래했으며, 이는 정부의 인기를 하락시켜 선거 패배로 이어졌다. 1962년 7월에는 대규모 내각 개편을 단행했는데, 이는 "피의 숙청"으로 불리며 보수당 내부의 지지 상실을 야기했다. 이러한 내각 변화는 "공황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자유당 의원 제러미 소프는 "그의 인생을 위하여 친구를 세우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고 비판했다.

맥밀런의 경제 접근 방식은 높은 고용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는 스털링을 지원하고 실업을 억제하기 위해 의 엄격한 통제를 주장한 재무장관 피터 서니크로프트 등과 대조를 이루었다. 맥밀런은 그들의 조언을 거절했고, 1958년 1월 피터 서니크로프트, 경제부 장관 나이젤 버치, 재무부 정무차관 에노크 파월이 사임했다. 맥밀런은 이 사건을 "작은 지방적 어려움"이라고 일축했다.

맥밀런은 "인플레이션 없는 성장" 정책의 일환으로 수입 통제를 위한 "국가 수입 위원회" 창설을 지지했다. 또한, 그의 총리 재임 기간 동안 더욱 세밀한 경제 지표와 통제 정책들이 도입되었다.

5. 5. 외교 정책

맥밀런과 존 F. 케네디 (1961년)


맥밀런은 외교 정책을 직접 챙겼다. 그는 수에즈 운하 사태로 인해 악화되었던 미국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개인적인 친분은 이러한 관계 개선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38] 존 F. 케네디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양국 간의 긴밀한 관계는 유지되었다.[139] 맥밀런은 유럽과의 관계 개선에도 힘을 기울여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입을 추진했지만, 프랑스의 샤를 드 골 대통령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대신 유럽 자유 무역 연합(EFTA)을 창설했다.

맥밀런의 재임 기간 동안 아프리카에서는 독립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거세졌다. 1957년 가나를 시작으로, 말라야(1957년), 나이지리아(1960년), 케냐(1963년) 등이 차례로 독립했다. 맥밀런은 1960년 2월, "변화의 바람" 연설을 통해 이러한 흐름을 지지했다. 하지만 중동 지역에서는 영국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1958년과 1960년 이라크에 군사적으로 개입했고, 오만 내전에도 관여했다.

1960년 10월 유엔 총회에서 맥밀런이 연설하던 중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책상을 치며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맥밀런은 1955년 4월부터 12월까지 외무장관을 역임하면서 제네바 정상회담에 참석하여 "전쟁은 없을 것이다(There ain't gonna be no war.)"라는 유명한 발언을 남겼다. 그는 외무장관의 역할에 대해 "그가 아무리 말해도 큰 도움이 되지 않고, 거의 모든 말이 큰 해를 끼칠 수 있다. 명백하지 않은 그의 말은 위험하며, 진부하지 않은 말은 위험하다. 그는 언제나 진부한 말과 무분별한 말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라고 언급했다.

1961년 8월 1일 핀란드 발케아코스키에서 찍은 맥밀런(왼쪽) 사진. 가운데는 핀란드의 아티 카르얄라이넨 장관, 오른쪽에는 앤서니 램버트 경이 서 있다.


맥밀런은 제트기 시대에 맞춰 그 어떤 영국 총리보다 해외 순방을 많이 했다. 1960년 5월 파리 4강 정상회담을 통해 베를린 위기를 논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계획했지만, U-2 사건으로 인해 흐루시초프가 불참했다. 맥밀런은 아이젠하워에게 흐루시초프에게 사과할 것을 압박했지만, 대통령은 거부했다. 맥밀런은 아이젠하워가 흐루시초프에게 "사과"하게 하지 못함으로 인해 "더 이상 미국과 유용하게 대화할 수 없다"고 비공개적으로 인정하면서 외교 정책을 재고해야 했다. 파리 정상회담의 실패는 맥밀런의 유럽 경제 공동체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켰고, 그는 그것을 미국의 힘에 대한 균형추로 보기 시작했다.

미국과의 특별 관계는 존 F. 케네디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맥밀런은 케네디에게 제3세계에 대한 원조에 더 많은 돈을 써야 한다고 제안했다. 제3세계에 대한 원조 강조는 맥밀런의 "일국 보수주의(one nation conservatism)"와도 잘 맞아떨어졌다. 그는 케네디에게 보낸 편지에서 완전 고용을 보장하기 위해 자본주의 개혁을 옹호하며 "만약 우리가 이것에 실패한다면, 공산주의는 전쟁이나 심지어 파괴 행위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물질적 안락을 가져다주는 더 나은 방식처럼 보임으로써 승리할 것입니다."라고 적었다.

맥밀런은 1961년 4월에 미국을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파텟 라오가 라오스 내전에서 일련의 승리를 거둠에 따라 1961년 3월 26일 케네디와의 긴급 정상회담을 위해 키웨스트로 향했다. 맥밀런은 라오스에 영국군을 파병하는 것에 강력히 반대했지만, 미국과의 관계가 손상될까 봐 두려워했다. 맥밀런은 1961년 1월 4일 참모총장으로부터 마오쩌둥이 중국 국경과 접한 어떤 국가에도 서방 군대가 진입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서방 군대가 라오스에 진입하면 중국이 라오스에 개입할 가능성이 높다는 경고를 받았다. 케네디는 정치적 이유로 미국이 라오스에 병력을 투입한다면 영국도 동참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맥밀런은 미국이 라오스에 개입한다면 영국도 그렇게 할 것이라는 데 마지못해 동의했다.

1961년 4월 피그스 만 침공의 실패 이후 케네디는 라오스 개입에 반대했는데, 이는 맥밀런에게는 개인적으로 안도할 일이었다. 1961년 4월 케네디와의 두 번째 회담은 더욱 우호적이었고, 빈 회담에서 흐루시초프에게 패배한 후 1961년 6월 런던에서의 세 번째 회담은 더욱 그러했다. 런던에서의 세 번째 회담에서 맥밀런은 케네디에게 격려와 자신의 경험을 제공하는 원로 정치가의 역할을 맡기 시작했고, 이는 지속적인 우정으로 발전했다. 맥밀런은 데이비드 옴즈비고어를 워싱턴 주재 대사로 임명했다.

그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내내 케네디를 지지했으며, 케네디는 매일 전화로 그와 상의했다. 데이비드 옴즈비고어 대사는 대통령의 가까운 가족 친구였으며 위기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한 백악관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83] 콩고 위기와 관련하여 맥밀런은 케네디와 충돌했다. 케네디는 맥밀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엔군이 카탕가에서 백인 용병들을 축출하고 카탕가를 콩고에 재통합하도록 결정했다. 케네디는 맥밀런에게 쿠바에 대한 미국의 경제 제재에 영국이 동참하도록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맥밀런은 그의 외무장관인 홈 경에게 "우리가 쿠바 문제에서 미국을 도울 이유는 없다"라고 말했다.

맥밀런은 1963년 핵실험 금지 조약을 지지했고, 1963년 상반기에 그는 옴즈비고어로 하여금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 1963년 봄에 협상을 재개하도록 케네디에게 조용히 압력을 가하게 했다. 맥밀런은 딘 러스크 국무장관이 방해 행위를 하고 있다고 느껴 1963년 4월 11일 케네디에게 전화를 걸어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흐루시초프에게 공동 서한을 보낼 것을 제안했다. 흐루시초프의 맥밀런-케네디 서한에 대한 답변은 대부분 부정적이었지만, 맥밀런은 케네디에게 그의 답변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가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두 명의 특사는 미국을 대표하는 W. 애버럴 해리먼과 영국을 대표하는 헤일샴 경이었다. 헤일샴 경의 역할은 주로 관찰자였지만, 해리먼과 안드레이 그로미코 소련 외무장관 간의 회담은 1963년 8월 지상 핵실험을 금지하는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으로 이어지는 돌파구를 만들었다. 맥밀런은 핵실험 금지 조약에 대한 절박한 국내적 이유가 있었다. 1950년대 내내 소련과 미국의 핵실험은 영국 대중의 일부를 공포에 떨게 했고, 이는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초 영국의 핵무장 해제를 촉구하는 집회에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던 핵무장 해제 운동(CND)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맥밀런은 핵무기의 가치를 소련에 대한 억제 수단이자 영국이 강대국임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믿었지만, CND의 인기에 대해서도 우려했다. 맥밀런에게 지상 핵실험을 금지하는 것은 CND의 매력을 꺾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고, 이 점에서 1963년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은 성공적이었다.

5. 6. 탈식민지화 정책

맥밀런의 첫 번째 임기에는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독립 운동의 첫 단계가 나타났으며, 두 번째 임기 동안에는 그 운동이 더욱 가속화되었다.[84] 가장 문제가 되었던 식민지는 1953년 북로디지아, 남로디지아, 니아살랜드를 통합하여 만들어진 중앙아프리카 연방이었다. 이는 남로디지아(현재 짐바브웨)의 백인 인구가 1948년 이후 아프리카너 민족주의자들의 통치 하에 영국에 대해 명백히 비우호적이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합류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85] 중앙아프리카 연방은 다민족 지역 개발 시도로 제시되었지만, 흑인 인구가 백인들이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받았다고 비난하면서 초기부터 불안정했다.

맥밀런은 특정 지역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이 이익보다 크다면 그 지역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케냐 비상사태 동안 영국 당국은 키쿠유족을 마우마우 게릴라(스스로를 "토지와 자유군"이라고 불렀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키쿠유족을 수용소에 수감하려 했다. 1959년 3월 3일 홀라 수용소의 경비원들이 수감자 11명을 공개적으로 때려 죽인 사건이 발생하면서 케냐에서 영국으로 소식이 전해지면서 많은 부정적인 여론이 생겨났다. 영국 언론의 많은 부분에서 케냐 수용소의 생활 조건을 나치 독일강제 수용소와 비교하며 수용소 사람들은 쇠약하고 병들었다고 보도했다. 1959년 7월 니아살랜드(현재 말라위)에서 시위대 진압에 관한 데블린 위원회 보고서는 니아살랜드를 "경찰 국가"라고 불렀다. 케냐와 니아살랜드의 식민 정책에 대한 비판 여파로 맥밀런은 1959년부터 아프리카 식민지를 부채로 여기기 시작하여 각료 회의에서 식민지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무력 수준은 국내 비판, 국제적 비난, 값비싼 전쟁을 초래하고 소련이 자칭 "해방" 운동을 지원하여 제3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하여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1959년 보수당의 3선을 확보한 후 그는 이언 맥클로드를 식민지 장관으로 임명했다. 맥클로드는 식민지 해체를 크게 가속화했고, 1961년 보수당 의장 겸 하원 원내대표로 이동할 때까지 나이지리아, 탄자니아, 케냐, 니아살랜드( 말라위로), 북로디지아( 잠비아로)에 독립을 부여하기로 결정했다.[86] 맥밀런은 1960년 1월 6일 가나에서 시작하여 아프리카를 순방하는 "변화의 바람" 여정을 시작했다. 그는 1960년 2월 3일 케이프타운에서 유명한 "변화의 바람" 연설을 했다.[87] 이 연설은 식민지 해체 과정의 이정표로 여겨진다.

맥밀런이 1960년 유엔총회에서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을 만나는 모습


나이지리아, 남카메룬, 영국령 소말릴란드는 1960년에, 시에라리온과 탄자니아는 1961년에, 트리니다드 토바고우간다는 1962년에, 케냐는 1963년에 독립을 얻었다. 잔지바르는 1963년 탄자니아와 합병하여 탄자니아를 형성했다. 영국령 소말릴란드는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와 합병하여 소말리아를 형성한 것을 제외하고 모두 영국 연방에 남았다.

맥밀런의 정책은 백인 소수 민족과 보수당 먼데이 클럽의 적대감을 무시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1961년 다인종 영연방을 탈퇴했고 맥밀런은 1963년 말까지 중앙아프리카 연방의 해체에 동의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말레이, 사바(북보르네오) , 사라왁, 싱가포르가 1963년 말레이시아로 독립했다. 맥밀런은 중국계가 대다수인 싱가포르가 이 지역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였기 때문에 말레이와 싱가포르의 연방이 중국계 다수 국가가 될 것을 우려하여 새로운 국가가 말레이 다수 국가가 되도록 사라왁과 영국령 북보르네오를 말레이시아 연방에 포함시키는 데 고집했다. 말레이 비상사태 기간 동안 대부분의 공산당 게릴라는 중국계였고, 영국 정책은 술탄과 이맘을 따르는 의지가 강해 반공산주의 성향이 더 강했던 무슬림 말레이인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동남아시아는 인종-민족-종교 정치가 우세한 지역이었고, 이 지역의 상당한 중국계 소수 민족은 경제적 성공이 더 크다는 이유로 널리 싫어했다. 맥밀런은 영국이 아시아에서 군사 강국이 되도록 새로운 말레이시아 국가에 군사 기지를 유지하기를 원했고, 따라서 새로운 말레이시아 국가가 친서방 정부를 갖기를 원했다. 이 목표는 영국 식민 당국과 협력했던 말레이 엘리트가 말레이시아의 새로운 엘리트로 활동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맥밀런은 말레이 정치인에게 투표할 말레이 다수를 원했다. 맥밀런은 특히 다른 총리들과 마찬가지로 아시아에서 영국의 힘의 중추로 보았던 싱가포르의 영국 기지를 유지하기를 원했다.

인도네시아 대통령 수카르노는 새로운 연방에 강력히 반대했다. 1962년 12월 8일 인도네시아는 영국 보호령인 브루나이에서 반란을 지원했고, 이로 인해 맥밀런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구르카 군대를 파병했다. 1963년 1월 수카르노는 영국과의 "콘프론타시"(대결) 정책을 시작했다. 맥밀런은 수카르노를 혐오했는데, 부분적으로는 그가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의 협력자였기 때문이고, 부분적으로는 그가 전쟁에서 직접 싸운 적이 없으면서도 정교한 군복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였던 맥밀런에게는 전투 경험이 없는 남자를 경멸하게 만들었다. 맥밀런은 수카르노의 요구에 굴복하는 것은 "유화 정책"이라고 생각했고, 이 문제에 대해 존 F. 케네디와 충돌했다. 수카르노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국가의 지도자였고, 공식적으로는 냉전에서 중립적이었지만 친서방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향이 있었고, 케네디는 그를 서방에 더 가깝게 하기 위해 그를 수용하는 것을 선호했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나토 동맹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의 서뉴기니에 대한 주장을 지지했다. 맥밀런은 인도네시아와의 전면전 비용을 우려했지만, 수카르노에게 굴복하면 영국의 명성이 손상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1963년 8월 5일 아시아에서 영국의 입지가 수카르노가 네덜란드에서처럼 영국을 이긴다면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썼다. 전쟁 비용을 줄이기 위해 맥밀런은 말레이시아 방어를 위해 군대를 파병해 줄 것을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로버트 멘지스에게 요청했다. 1963년 9월 25일 수카르노는 연설에서 인도네시아가 "말레이시아를 잡아먹을 것"이라고 발표했고, 같은 날 자카르타에서 영국 대사관이 폭도들에게 불타 버렸다. 그 결과 1963년부터 1966년까지 계속된 영국 대 인도네시아 비공식 전쟁인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대립이 발생했다.

권력의 신속한 이양은 새로운 국가들의 호의를 유지했지만, 비평가들은 그것이 성급했다고 주장했다. 맥밀런은 정당화하기 위해 1851년 토머스 배빙턴 매콜리의 말을 인용했다.

5. 7. 선거 승리 (1959)

1959년 10월 총선에서 맥밀런은 보수당을 승리로 이끌어 당의 의석 수를 67석에서 107석으로 늘렸다. 성공적인 선거 운동은 경제적 성장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며, "보수당 집권 하에 삶이 더 나아졌다"라는 슬로건은 맥밀런이 1957년에 한 "사실을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국민 대부분은 이렇게 잘 살아본 적이 없다"는 발언과 일맥상통했다.[77] 이는 보통 "당신들은 이렇게 잘 살아본 적이 없을 것이다"로 요약된다. 이러한 표현은 노동 계급의 새로운 풍요로운 현실을 반영했으며, "보수당 승리의 핵심 요인은 처칠의 1951년 승리 이후 산업 노동자의 평균 실질 임금이 20% 이상 상승했기 때문이다"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77] 보수당은 3번 연속 총선에서 승리했을 뿐만 아니라, 매번 과반 의석을 늘렸다. 이는 휴 게이츠켈이 이끄는 노동당이 다시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삶의 질이 향상됨에 따라 노동자들은 소비 경제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노동 계급의 우려는 전통적인 노동당의 견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78]

그러나 경제 성장률이 낮았고 늘어난 국방 지출로 인해 경제가 왜곡되었다는 비판도 있었다.

6. 퇴임과 사망 (1963 ~ 1986)

1963년 여름에 발생한 프러퓨모 사건은 맥밀런 정부의 신뢰성을 영구적으로 손상시켰다. 맥밀런은 의회 투표에서 살아남았지만, 이후 자신의 아들과 사위 외에는 아무도 그와 함께 하지 않았다.[99] 그러나 버틀러와 레지널드 모들링은 맥밀런의 사임을 압박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맥밀런의 건강은 악화되었다. 그는 보수당 회의 직전 병에 걸려 전립선암으로 잘못 진단받았고, 1963년 10월 18일 사임하였다. 그의 후임으로는 앨릭 더글러스흄이 임명되었는데, 일각에서는 맥밀런이 "마술의 동그라미"를 이용해 버틀러가 아닌 흄이 후임자가 되도록 했다고 주장했다.[99] 10월 20일 총리가 된 앨릭 더글러스흄은 상원에서 자신의 의석을 사임해야 했고, 1964년 10월 19일 해럴드 윌슨에게 총리직을 넘겼다.

맥밀런은 처음에는 귀족제를 거부하고 1964년 9월 정계에서 은퇴했다. 하지만 여왕으로부터 오더 오브 메리트 훈장을 받았다. 은퇴 후 그는 가족 출판사인 '''맥밀런 출판사'''의 의장직을 맡았다.[99] 이후 6권의 책을 출판했지만, 그의 정적 에노크 파월은 이를 "골판지를 씹는 것과 같은 느낌"이라고 묘사했다. 사후 출판된 그의 전시 일기는 더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후 20년 동안 그는 가끔 정치에 개입했으며, 특히 마거릿 대처 집권 후에는 그녀의 민영화 정책을 비판했다. 그는 민영화를 "가족은을 파는 것"에 비유하며, 브리티시 텔레콤, 철강업, 철도 등의 민영화를 비판했다.[99]

1984년 맥밀런은 결국 귀족 작위를 받아들여 '''스톡턴 백작'''과 '''오벤던의 맥밀런 자작'''이 되었다. 그는 말년에 스톡턴온티스 구의 높은 실업률을 언급하며 "삶의 다소 슬픈 끝"이라고 말했다.[99]

1980년대 상원에서 그는 파업 중인 광부들을 칭찬하며 그들이 카이저의 군대와 히틀러의 군대를 물리쳤다고 말했다.[99]

맥밀런은 1986년 12월 29일 서식스 주 버치그로브에서 92세 322일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2005년 3월 26일 제임스 캘러헌에 의해 경신될 때까지 영국 총리 중 최장수 기록을 보유했다.[99]

웨스트서식스주 호스티드 케인스의 세인트가일스 교회에 있는 맥밀런 가족의 묘지. 오른쪽이 해럴드 맥밀런의 무덤


맥밀런과 엘리자베스 2세 여왕 (1985년)

6. 1. 정계 은퇴

1963년 여름프러퓨모 사건은 맥밀런 정부의 신뢰성을 영구적으로 손상시켰다. 그는 의회 투표에서 생존했지만, 이후 자신의 아들과 처자 외에는 아무도 그와 함께 하지 않았다.[99]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틀러와 레지널드 모들링은 맥밀런의 사임을 밀어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맥밀런의 건강을 악화시켰다. 그는 보수당 회의 직전 병에 걸려 전립선암으로 잘못 진단받았고, 1963년 10월 18일 사임하였다. 그는 앨릭 더글러스흄으로 교체되었는데, 일각에서는 맥밀런이 "마술의 동그라미"를 이용해 버틀러가 아닌 흄이 후임자가 되도록 했다고 주장했다.[99] 10월 20일 총리가 된 앨릭 더글러스흄은 상원에서 자신의 의석을 사임해야 했고, 1964년 10월 19일 해럴드 윌슨에게 총리직을 넘겼다.

맥밀런은 처음에는 귀족제를 거부하고 1964년 9월 정계에서 은퇴했다. 하지만 그는 여왕으로부터 오더 오브 메리트 훈장을 받았다. 은퇴 후 그는 가족 출판사인 '''맥밀런 출판사'''의 의장직을 맡았다.[99] 이후 그는 6권의 책을 출판했지만, 그의 정적 에노크 파월은 이를 "골판지에 씹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묘사했다. 사후 출판된 그의 전시 일기는 더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후 20년 동안 그는 가끔 정치에 개입했으며, 특히 마거릿 대처 집권 후에는 그녀의 민영화 정책을 비판했다. 그는 민영화를 "가족은을 파는 것"에 비유하며, 브리티시 텔레콤, 철강업, 철도 등의 민영화를 비판했다.[99]

1984년 그는 결국 귀족 작위를 받아들여 '''스톡턴 백작'''과 '''오벤던의 맥밀런 자작'''이 되었다. 그는 말년에 스톡턴온티스 구의 높은 실업률을 언급하며 "삶의 다소 슬픈 끝"이라고 말했다.[99]

1980년대 상원에서 그는 파업 중인 광부들을 칭찬하며 그들이 카이저히틀러의 군대를 물리쳤다고 말했다.[99]

맥밀런은 1986년 12월 29일 서식스 주 버치그로브에서 92세 322일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2005년 3월 26일 제임스 캘러헌에 의해 경신될 때까지 영국 총리 중 최장수 기록을 보유했다.[99]

6. 2. 은퇴 이후 활동

맥밀런은 1964년 9월 정계에서 은퇴하였고, 여왕으로부터 오더 오브 메리트 훈장을 받았다.[103] 퇴임 후에는 가족 출판사인 '''맥밀런 출판사'''의 의장직을 맡았다.

맥밀런은 6권의 자서전을 출판했는데, 그의 정적 에노크 파월은 이를 두고 "골판지를 씹는 것과 같은 느낌"이라고 묘사했다.[101] 반면, 그의 전시 일기들은 훨씬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후 20년 동안 맥밀런은 가끔 정치에 개입하기도 했다. 특히 마거릿 대처토리당 당수가 된 후, 맥밀런의 총리직은 화폐주의자들로부터 공격받았다. 맥밀런은 대처의 민영화 정책을 가족의 은을 파는 것에 비유하며 비판했다. 그는 1985년 11월 8일 왕립 해외 연맹에서 토리 개혁 단체의 만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먼저 조지 왕조 시대의 은이 간다. 그리고 그러고나서 예전의 미술전람회에 있던 전부의 좋은 가구들이다. 그러고나서 카날레토의 것이 간다."

브리티시 텔레콤과 더불어 철강업과 철도의 이득적인 부분들이 민영화되어 오면서 그는 "그것들은 아직도 남아있는 2개의 렘브란트의 작품들 같았다."고 덧붙였다. 며칠 후, 맥밀런은 상원에서 자신의 발언을 해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른 날 내가 내 자신이었던 제도를 비판하는 데 위험을 무릅쓰고 나설 때 난 두렵고, 오해하였다. 보수당원으로서 난 자연적으로 이제 국가의 자본주의에 의하여 통제되는 생산과 분배를 전부 의미하는 사적 소유와 개인 관리로 돌아가는 호의에 있다. 난 그것들이 더욱 효과적일 것이 확실하다. 의문으로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나선 것은 만약 그들이 수입이었다면으로서 이 엄청난 금액의 사용이었다."

1984년 맥밀런은 귀족 작위를 받아 '''스톡턴 백작'''과 '''오벤던의 맥밀런 자작'''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일생 마지막 한 달에 "64년 전에 ... 스톡턴온티스 구에서 실업률이 당시 29 퍼센트였다. 지난 11월 ... 거기에 실업률은 28 퍼센트이다. 삶의 다소 슬픈 끝이다."라고 말했다.

1980년대 상원에서 그는 파업 중인 광부들을 칭찬하며 그들이 카이저의 군대와 히틀러의 군대를 물리쳤다고 주장했다.

맥밀런은 1986년 12월 29일 서식스 주 버치그로브에서 92세 322일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이는 2005년 3월 26일 제임스 캘러헌에 의해 경신될 때까지 영국 총리 중 최장수 기록이었다.

맥밀런은 옥스퍼드대학교 총장으로 선출되어 생애의 나머지 기간 동안 이 직책을 맡으며 대학 행사를 자주 주재하고 연설을 하고 끊임없이 기금을 모았다.[100]

6. 3. 마거릿 대처 비판

1975년 2월 마거릿 대처보수당 대표가 된 후, 맥밀런은 정치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104] 1979년 총선에서 노동당의 5년 집권을 끝내고 총리가 된 후,[105] 그는 자신의 전기 작가이자 보수당 의원이었던 나이젤 피셔에게 "테드는 아주 좋은 2인자였지… 리더는 아니었어… 자, 이제 진짜 리더가 나타났어… 그런데 그녀가 당신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지는…"라고 말했다.

맥밀런 자신의 총리 재임 기간 동안의 기록은 대처가 지지했던 통화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았다.[106] 그는 유명한 연설에서 그러한 이론의 기원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맥밀런은 포클랜드 전쟁을 관리하기 위해 소규모 전시내각을 구성하라고 대처에게 조언한 여러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조언에 따라 그녀는 재무부를 이 기구에서 제외했다.[106] 아르헨티나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지 여부를 먼저 확인한 후, 맥밀런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퍼그 이즈메이가 했던 것처럼 고위 군사 고문을 임명하라고 조언했다 (결과적으로 국방참모총장인 어드미럴 르윈이 이 역할을 수행했다). 그녀는 이미 국방부 차관인 프랭크 쿠퍼로부터 재무부를 제외하라는 조언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적어도 수에즈 위기에서 맥밀런이 재무장관으로서 작전 중단을 요구했던 행동 때문이었다. 그녀는 나중에 "나는 해롤드 맥밀런의 조언을 따른 것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재정적인 이유로 군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할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한 모든 일은 군사적 필요성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라고 회상했다.[108]

상원에서의 첫 연설에서 그는 대처의 석탄 광부 파업 처리 방식과 파업 광부들을 "내부의 적"으로 묘사한 것에 대해 비판했다.[108]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포함한 연설에 대해 전례 없는 기립 박수를 받았다.

옥스퍼드 대학교 총장으로서 맥밀런은 1985년 2월 대처에게 명예 학위를 수여하지 않기로 한 대학교의 결정을 비난했다. 그는 이 결정이 전통을 깨는 것이며, 그러한 무례는 대학교에 되돌아올 것이라고 예측했다.[110]

맥밀런은 대처의 민영화 정책을 "가보를 파는 것"에 비유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85년 11월 8일 로열 오버시즈 리그에서 열린 토리 개혁 그룹 만찬에서 그의 정확한 인용구는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한 개인이나 국가들 사이에서 흔히 있는 자산 매각에 대한 것이었다. "먼저 조지 왕조 시대의 은식기가 팔립니다. 그리고 예전에 거실에 있던 좋은 가구들이 팔립니다. 그리고 카날레토의 그림들이 팔립니다." 브리티시 텔레콤과 더불어 철강업과 철도의 수익성 있는 부분이 민영화되었다. "그것들은 마치 남아 있는 두 점의 렘브란트 그림과 같았습니다."[111]

맥밀런의 연설은 많은 논평을 받았고, 며칠 후 그는 상원에서 이에 대해 언급하는 연설을 했다.

6. 4. 사망

1986년 12월 29일 저녁, 맥밀런은 서식스 주(West Sussex) 호스티드 키네스(Horsted Keynes)에 있는 애시다운 숲(Ashdown Forest) 가장자리에 있는 맥밀런 가문의 저택인 버치 그로브(Birch Grove)에서 사망하였다.[113][114] 그의 손자이자 상속자인 알렉산더는 "지난 48시간 동안 그는 매우 약했지만, 완전히 이성적이고 지적이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제 잠깐 잘 것 같아요'였습니다."라고 말했다.[115][116] 그의 수명은 92세 322일이었는데, 2005년 3월 26일 제임스 캘러헌(James Callaghan)이 넘어설 때까지 영국 총리 중 가장 긴 수명이었다.[117]

전 세계에서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은 "미국 국민들은 오랜 공직 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문제에 유창함과 온화한 재치로 접근했던 지혜와 인간성의 목소리를 잃은 것에 대해 함께 슬퍼합니다."라고 말했다.[100] 불법화된 아프리카 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 의장 올리버 탐보(Oliver Tambo)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민으로서 우리는 그가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계속 불어오는 변화의 바람에 굴복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노력한 것을 항상 기억할 것입니다."라고 애도를 표했다.[100] 영연방 사무총장(Commonwealth Secretary-General) 경 슈리다스 람팔(Shridath Ramphal)은 "그가 영국에서 아프리카 민족 의식에 대한 가치 있는 대응을 제공함으로써 보여준 리더십은 전후 시대를 형성했고 현대 영연방을 가능하게 했습니다."라고 확인했다.[100]

1987년 1월 5일, 서식스 주 호스티드 키네스(Horsted Keynes)의 세인트 자일스 교회(St Giles' Church)에서 비공개 장례식이 거행되었는데, 그는 이곳에서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읽었다.[118] 200명의 조문객이 참석했는데,[116] 여기에는 64명의 맥밀런 가족 구성원, 대처와 전 총리인 홈 경과 에드워드 히스(Edward Heath), 그리고 헤일샴 경[115], 그리고 "수많은 시골 이웃들"이 포함되었다.[118] 웨일스 공은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화환을 보냈다.[115] 그는 그의 아내 옆에, 그리고 그의 부모와 1984년에 사망한 그의 아들 모리스 맥밀런(Maurice Macmillan) 옆에 묻혔다.[118]

1987년 1월 12일, 하원은 그의 책 ''중도''를 많이 언급하며 그를 추모했다.[119] 대처는 "은퇴 후 해럴드 맥밀런은 국민의 애정 속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말한 반면, 노동당 당수 닐 키녹(Neil Kinnock)은 다음과 같이 비판적인 어조를 취했다.

죽음과 거리는 1950년대 그가 주재했던 시대에 대한 견해를 바꿀 만큼 충분한 매력을 빌려줄 수 없습니다. 그 시대는 분명하고 감사하게도 부유함과 자신감이 증가하던 시기였지만, 동시에 기회를 놓치고 변화를 피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해럴드 맥밀런이 이에 대한 전적인 책임이나 심지어 가장 중요한 책임을 지닌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1930년대 현상 유지를 적극적이고 통찰력 있게 공격했던 사람이 1950년대 후반 한때 현상 유지의 상징이 된 후 1980년대에 다시 비판자가 된 사실에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119]


1987년 2월 10일, 여왕과 수천 명의 조문객이 참석한 가운데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에서 공개 추모식이 거행되었다.[120] 맥밀런의 재산은 1987년 6월 1일에 상속세 평가를 받았는데, 그 가치는 51114GBP였다.[121]

7. 서훈


  • 1976년 오더 오브 메리트(OM)
  • 1984년 스톡턴 백작위 서임(1st Earl of Stockton)
  • 1976년 벤자민 프랭클린 메달 수상
  • 1984년 네 가지 자유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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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웹사이트 Honoree: Search Awards: University Honors & Awards: Indiana University https://honorsandawa[...]
[126] 웹사이트 Britain's Harold Macmillan to Meet with President Eisenhower the Day After Visiting DePauw – DePauw University http://www.depauw.ed[...]
[127] 웹사이트 Macmillan & Eisenhower – British Pathé https://web.archive.[...]
[128] 웹사이트 Getty Images http://www.itnsource[...]
[129] 서적 Macmillan, Harold in Twentieth-century Britain: an encyclopedia Garland 1995
[130] 서적 The Complete Peerage, or a history of the House of Lords and all its members from the earliest times (Addenda & Corrigenda) https://www.familyse[...] Sutton Publishing 1998
[131] 간행물 London Gazette 1914-11-17
[132] 간행물 London Gazette 1916-03-07
[133] 간행물 London Gazette 1916-02-01
[134] 간행물 London Gazette 1915-11-19
[135] 서적 イギリス現代政治の軌跡 丸善ライブラリー 1998
[136] 간행물 London Gazette 1920-06-29
[137] 간행물 London Gazette 1931-11-06
[138] 서적 イギリス現代政治の軌跡 丸善ライブラリー 1998
[139] 기타 맥밀란의 아내 도로시는 제9대 데번셔 공작 빅터 캐번디시의 셋째 딸이며, 장남인 제10대 데번셔 공작 에드워드의 장남이자 하티턴 후작인 윌리엄(맥밀란으로부터 보면 의붓 조카)은 케네디 대통령의 누나인 캐슬린과 결혼하여 인연이 있었다.
[140] 기타 Macmillan; Maurice Harold (1894 - 1986)
[141] 간행물 London Gazette 1976-09-09
[142] 간행물 London Gazette 1984-02-29
[143] 서적 영국 현대 정치의 궤적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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