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의 공안사건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일본 제국의 공안사건은 에도 시대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일본 제국 내에서 발생한 정치적 탄압과 숙청 사건들을 의미한다. 삼권분립 부재, 기독교 탄압 등 전근대적 법 집행 방식이 일본 제국 경찰의 공안사건으로 이어졌으며, 메이지 시대에는 자유민권운동 탄압, 치안경찰법 제정 등을 통해 결사의 자유를 억압했다. 다이쇼 시대에는 치안유지법 제정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했고, 쇼와 시대에는 공산주의, 자유주의, 사회민주주의 등 다양한 사상을 가진 이들을 대상으로 탄압과 숙청이 강화되었다. 특히 전시 체제에서는 전시 정책에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인사들에 대한 탄압이 심화되었으며, 전쟁 종전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지령에 따라 치안유지법 등이 폐지되었다. 이 사건들은 고토쿠 슈스이, 가네코 후미코 등 국내외 다양한 인물과 단체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 제국의 공안사건 - 고토쿠 사건
고토쿠 사건은 1910년 일본에서 천황 암살 음모 혐의로 아나키스트 고토쿠 슈스이 등을 포함한 26명이 기소되어 24명이 사형 선고를 받은 사건으로, 정부의 반체제 인사 탄압 조작 의혹이 있으며 메이지 시대 후기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일본 제국의 공안사건 - 나카이 마사카즈
나카이 마사카즈는 교토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좌익 사회 운동과 반파시즘 활동에 참여한 일본의 철학자, 미학자이자 도서관학자로, 국립국회도서관 부관장과 일본도서관협회 이사장을 역임하며 도서관 발전에 기여하고 《미학 입문》 등의 저서를 통해 독자적인 미학 이론을 전개했다. - 일본의 사상사 - 일본의 신좌파
일본의 신좌파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일본에서 활동한 급진좌파 운동으로, 기성 좌파와 구별되는 다양한 조직과 이념적 경향을 가지며 미일 안보 조약 반대 투쟁, 전국학생자주연맹 활동, 극좌 테러 집단 등장 등의 특징을 보이다 쇠퇴 후 일부 잔존 세력이 현재까지 활동 중이다. - 일본의 사상사 - 신토
신토는 일본 고유의 종교적 관념으로, 창시자나 경전 없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가미'에 대한 믿음을 중심으로 다양한 의례와 신앙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격변을 거쳐 현재는 신사신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 일본사 - 도쿄부
도쿄부는 1868년 에도에서 개칭된 도쿄에 설치된 일본의 행정 구역으로, 에도 시가지에서 현재의 도쿄도와 거의 같은 영역으로 확장되었으며, 1943년 도쿄도제가 시행되면서 도쿄도로 개편되었다. - 일본사 -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간 지속된 시기로, 강제 병합, 경제적 착취, 정치적 억압, 문화적 동화 정책 등이 특징이며, 3·1 운동과 같은 독립 운동이 전개되었고, 위안부 문제 등 심각한 인권 유린이 있었으며, 현재까지도 다양한 논의와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 일본 제국의 공안사건 | |
|---|---|
| 개요 | |
| 유형 | 정치적 반대 사상적 반대 사회적 반대 |
| 목표 | 체제 전복 정책 변경 사회 개혁 |
| 특징 | 탄압의 역사 다양한 형태의 저항 사상 통제의 시도 |
| 역사적 배경 | |
| 시대적 배경 | 메이지 유신 이후의 국가주의 강화 대정익찬회 체제 하의 사상 통제 치안유지법 등의 악법 |
| 주요 사건 | 대역 사건 오무토 사건 요코하마 사건 |
| 탄압의 양상 | |
| 대상 |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자유주의자 종교인 재일 조선인 |
| 방법 | 검열 투옥 고문 사형 사상 전향 강요 |
| 주요 인물 | |
| 탄압 주도자 | 고토 겐지 미즈노 렌타로 도코나미 다케지로 |
| 저항 인물 | 고토쿠 슈스이 오스기 사카에 박열 가네코 후미코 |
| 관련 법령 | |
| 주요 법령 | 치안유지법 출판법 신문지법 집회 및 결사 단속법 |
| 영향 | |
| 사회적 영향 | 언론 및 사상의 자유 위축 사회 운동의 억압 전쟁 협력 분위기 조성 |
| 역사적 평가 | 민주주의의 후퇴 인권 탄압의 역사 과거사 청산의 과제 |
| 연표 (전쟁 이전 및 전쟁 시기 일본의 언론 탄압) | |
| 1868년 | 오사카 재판소가 고찰을 철폐하고, 자의로 인민을 모아 소동을 일으키거나 다수를 선동하는 자에 대한 처벌을 규정함. |
| 1869년 | 정부가 신정부 비판 세력을 모반 혐의로 체포함 (고토 히로유키, 우에키 에모리 등). |
| 1875년 | 신문지 조례, 참방 조례를 공포하여 언론, 출판, 집회를 규제함. |
| 1880년 | 집회 조례를 공포하여 정치 집회를 규제함. |
| 1882년 | 군인에게 정치 활동 관여를 금지하는 군인훈령을 발표함. |
| 1887년 | 보안 조례를 공포하여 정부 비판 세력을 도쿄에서 추방함. |
| 1889년 | 대일본제국 헌법을 발포하여 천황 주권 체제를 확립하고,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법률의 범위 내에서 인정함. |
| 1898년 | 출판법을 제정하여 출판물을 규제함. |
| 1900년 | 치안경찰법을 제정하여 노동 운동과 사회 운동을 규제함. |
| 1908년 | 적기 사건 발생. 사회주의자들을 대거 검거함. |
| 1910년 | 대역 사건 발생. 고토쿠 슈스이 등 사회주의자들을 천황 암살 음모 혐의로 처형함. |
| 1919년 | 3.1 운동에 영향을 받아 일본에서도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요구하는 운동이 일어남 (다이쇼 데모크라시). |
| 1925년 |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여 국체 변혁 또는 사유재산 제도 부인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하는 자를 처벌함. |
| 1928년 | 삼일오 사건, 사일육 사건 발생. 공산주의자들을 대거 검거함. |
| 1931년 | 만주사변을 계기로 군부의 발언권이 강화되고, 언론 통제가 강화됨. |
| 1933년 | 사상범 보호관찰법을 제정하여 사상범을 감시하고 전향을 강요함. |
| 1936년 | 2.26 사건 발생. 군부 내 황도파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함. 이를 계기로 군부의 권력이 더욱 강화됨. |
| 1937년 | 중일전쟁 발발.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여 전시 체제를 강화하고, 언론, 출판, 집회, 결사를 더욱 엄격하게 통제함. |
| 1938년 | 국가총동원법에 의거하여 언론, 출판, 집회, 결사를 통제하는 법령을 시행함. |
| 1940년 | 대정익찬회를 결성하여 모든 정치 세력을 통합하고, 전체주의 체제를 강화함. |
| 1941년 | 태평양 전쟁 발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고, 전시 체제에 대한 협력을 강요함. |
| 1945년 | 일본 패망. 연합군 점령하에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회복됨. |
| 일본 제국의 공안 사건 | |
| 주요 공안 사건 | 대역 사건 (1910년): 사회주의자 고토쿠 슈스이 등이 천황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처형된 사건. 오무토 사건 (1921년, 1935년): 신흥 종교 오무토가 불경죄로 탄압받은 사건. 삼일오 사건 (1928년): 일본 공산당원들이 대거 검거된 사건. 사일육 사건 (1929년): 삼일오 사건에 이어 공산당원을 검거한 사건. 요코하마 사건 (1942년-1945년): 게이오기주쿠 대학의 다키야마 효조 교수 등이 검거된 사건. 사상 통제: 치안유지법에 따른 사상 검거와 전향 공작. |
| 관련 인물 | |
| 관련 인물 | 고토쿠 슈스이: 사회주의 사상가. 대역 사건으로 처형됨. 다키야마 효조: 게이오기주쿠 대학 교수. 요코하마 사건으로 검거됨. 오이즈미 사쿠로: 게이오기주쿠 대학 교수. 요코하마 사건으로 검거됨. |
| 관련 법률 | |
| 관련 법률 | 치안유지법: 일본 제국의 사상 통제를 위한 대표적인 악법. |
2. 제정 성립 이전
에도 시대 이전 일본 통치 기구는 법 집행에 있어 잔혹한 경향을 보였으며, 기독교로 대표되는 반정부·반국체 사상에 대해 엄격하게 대응했다. 이러한 경향은 일본 제국 경찰의 공안사건으로 이어졌다.[1] 반사의 옥, 안세이 대옥 등 체제 비판에 대한 탄압이 있었고, 막부 말기에는 신선조나 교토 견회조를 통해 도막파를 습격했다. 우키요에 등 세속 문화에도 여러 번 출판 규제가 가해졌다.[7]
2. 1. 에도 시대의 법 집행
에도 시대까지 일본의 통치 기구(중앙의 막부와 지방의 다이묘)에는 삼권분립 개념이 없었다. 행정, 입법, 사법의 삼권이 일체였으며 경찰과 행형의 권리도 동행했다. 그런 조건에서 재판은 권력자나 관료의 의향에 좌우되었으며, 고문을 통해 이끌어낸 자백이 효력을 가지고 재판이 서민에게는 비공개인 것은 당연했다.전근대 일본에서 경찰, 재판, 행형을 합한 법집행 행위를 검단(検断)이라고 했다. 검단에서의 형벌은 사형이나 추방형, 육체형이 중심이었으며, 몰수형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검단 집행자는 죄인뿐 아니라 죄인의 친족에게서도 재산을 몰수할 수 있었다. 따라서 검단의 집행자(장원 영주, 수호나 지두, 총촌 지도자 등)는 재산 강탈을 위해 검단을 악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일본의 치안 유지는 고래로부터 일종의 잔학성을 내포하게 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무사를 정점으로 한 질서하에 백성이나 정인은 무권리 상태에 놓였고, 무사는 무례를 범한 백성과 정인을 일종의 즉결심판으로 살해하는 기리스테고멘이라는 특권을 가졌다. 특히 에도 시대에 기독교는 일본에 유해한 사교로 규정되어 금교령으로 규제되었다. 에도 막부와 여러 다이묘는 기독교도에게 가혹한 고문과 후미에를 강요하여 육체와 양심에 타격을 주고 배교를 강요했다. 그 결과 많은 초기 일본인 기독교도들이 순교했다.
2. 2. 메이지 유신 이전의 상황
에도 시대까지 일본의 통치 기구(중앙의 막부와 지방의 다이묘)에는 삼권분립 개념이 없었다. 행정, 입법, 사법의 삼권이 일체였으며 경찰과 행형의 권리도 이에 따랐다. 그런 조건에서 재판은 권력자나 관료의 의향에 좌우되었으며, 고문을 통해 이끌어낸 자백이 효력을 가졌고 재판이 서민에게 비공개인 것은 당연했다.[1]전근대 일본에서 경찰, 재판, 행형을 합한 법집행 행위를 검단(検断)이라고 했다. 검단에서의 형벌은 사형, 추방형, 육체형이 중심이었으며, 몰수형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검단 집행자는 죄인뿐 아니라 죄인의 친족에게서도 재산을 몰수할 수 있었다. 따라서 검단의 집행자(장원 영주, 수호, 지두, 총촌 지도자 등)는 재산 강탈을 위해 검단을 악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일본의 치안 유지는 예로부터 일종의 잔학성을 내포하게 되었다.[1]
에도 시대에는 무사를 정점으로 한 질서 아래에서 백성이나 정인은 무권리 상태에 놓였고, 무사는 무례를 범한 백성과 정인을 일종의 즉결심판으로 살해하는 기리스테고멘이라는 특권을 가졌다. 특히 에도 시대에 기독교는 일본에 유해한 사교로 규정되어 금교령으로 규제되었다. 에도 막부와 여러 다이묘는 기독교도에게 가혹한 고문과 후미에를 가해 육체와 양심에 타격을 주고 배교를 강요했다. 그 결과 많은 초기 일본인 기독교도들이 순교했다.[1]
기리시탄이 괴멸된 후에는 반사의 옥, 안세이 대옥 등 체제 비판에 대한 탄압으로 옮겨갔으며, 막부 말기에는 신선조나 교토 견회조를 배치하여 도막파를 습격했다. 우키요에 등 세속 문화에도 여러 번 출판 규제를 가했다.[7]
에도 시대 이전 일본 통치 기구의 법 집행의 잔학한 체질, 기독교도로 표상되는 반정부·반국체 사상에 대한 엄격한 대응은 일본 제국 경찰의 공안사건으로 계승되었다.[1]
3. 메이지 시대
메이지 시대에는 1875년 반포된 참방률(태정관 포고 제110호, 명예훼손 처벌 율법)을 이용해 1880년대 자유민권운동을 메이지 정부가 탄압했는데, 이는 독일 제국에서 비스마르크 내각이 사회주의를 탄압했던 시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1900년 치안경찰법이 제정되면서 결사의 자유가 노골적으로 탄압받기 시작했고, 1910년대에는 고토쿠 사건(대역사건)으로 무정부주의자가 탄압, 숙청되었다. 동시에 도쿄제국대학의 헌법학자 우에스기 신키치가 천황주권설을 주장하면서 천황기관설을 주장한 미노베 타츠키치를 공격했다. 히라누마 기이치로 검사는 대역사건 주범 코토쿠 슈스이 등의 사형을 구형했고, 정부는 코토쿠를 사형시키면서 그의 유작 『기독말살론』을 간행하여 반기독교 정책에 이용했다.
3. 1. 1868년-1899년
- 1869년: 출판조례 제정.
- 1875년: 참방률 반포. 신문지조례 제정. 출판조례 개정. → 자유민권운동 탄압.
- 1880년: 집회조례 제정. → 국회개설운동 탄압.
- 1883년: 신문지조례 개정.
- 1887년: 보안조례 제정. → 삼대사건 건백운동 탄압. 오자키 유키오, 호시 도루, 가타오카 겐키치, 나카에 조민 등 451명을 황거 3리 밖으로 추방.
- 1890년: 집회급정사법 제정.
- 1891년: 우치무라 간조 불경사건
- 1892년: 1월 예계령 시행(1914년 폐지). 2월 제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내무대신 시나가와 야지로의 치열한 선거방해. 4월 구메 구니타케 필화사건.
- 1893년: 출판법 제정.
- 1896년: 26세기 사건.
3. 2. 1900년-1919년
1900년 3월, 치안경찰법이 제정되면서 결사의 자유가 노골적으로 탄압받기 시작했다. 1904년에는 사회주의협회가 해산되었다. 1908년에는 적기사건이 발생했다. 1909년에는 신문지법이 제정되어 1897년 신문지조례 개정으로 폐지되었던 제한규정이 부활했다.1910년에는 고토쿠 사건(대역사건)이 일어났고, 1911년 내무성에 특별고등경찰(특고경찰)이 설치되었다. 같은 해 남북조 정통문제가 발생하여 키타 키다키치가 정직 처분을 받았다. 고토쿠 슈스이 외 26명이 처형되었고, 고토쿠 슈스이의 유작 『기독말살론』이 간행되어 반기독교 정책에 이용되었다.
고토쿠 슈스이는 제국주의를 비판한 일본의 아나키스트였다. 그는 1901년에 『제국주의: 20세기의 유령』을 저술했다.[1] 1911년, 메이지 천황 암살 미수 사건인 대역 사건에 연루되어 고토쿠 슈스이를 포함한 12명이 처형되었다.[2] 이 음모와 관련된 혐의로 고토쿠 슈스이의 전 사실혼 관계의 아내였던 아나키즘 페미니스트 칸노 스가도 처형되었다.[2]
Heimin Shimbun|평민신문일본어은 러일 전쟁 기간 동안 주요 반전 운동 매체 역할을 한 사회주의 신문이었다. 이 신문은 사회주의 단체인 Heimin-sha|평민사일본어의 주간 대변지였다. 주요 필진으로는 고토쿠 슈스이와 사카이 토시히코가 있었다. 평민사가 전쟁으로 인한 높은 세금을 비판하자 사카이는 2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 신문이 ''공산당 선언''을 게재했을 때, 고토쿠는 5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신문은 폐간되었다.
일본 불교는 이 시기 전반적으로 일본 권위주의 체제에 복종하는 모습이었지만,[6] 저항한 예외적인 인물들도 있었다. 우치야마 구도는 소토 선 불교 승려이자 아나키스트-사회주의자였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낸 몇 안 되는 불교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우치야마는 토지 재분배 개혁, 메이지 천황 체제 전복, 징집병 대량 탈영 장려, 모든 사람의 민주적 권리 증진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그는 낮은 사회적 지위가 업보에 의해 정당화된다고 주장하고, 최고 입찰자에게 주지직을 판매하는 선종 지도자들을 비판했다.[7]
정부의 박해로 일본 내 사회주의 및 반전 운동이 지하로 숨어들자, 우치야마는 1908년 도쿄에서 고토쿠 슈스이를 방문했다. 그는 자신의 사찰에 비밀 인쇄소를 설치하는 데 사용할 장비를 구입했다. 우치야마는 이 인쇄 장비를 사용하여 대중적인 사회주의 팜플렛과 소책자를 제작했는데, 그중 일부는 그의 저술이었다.[8] 우치야마는 고토쿠와 함께 메이지 천황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9] 우치야마는 유죄 판결을 받으면서 승려 자격을 박탈당했지만, 1993년 소토 선종에 의해 회복되었다.[10]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에 대한 또 다른 소토 선종 비판자는 이노우에 슈텐이었다. 그는 불교적 평화주의를 옹호하고 D.T. 스즈키의 불교와 전쟁에 대한 입장을 비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1]
다른 주목할 만한 인물로는 전쟁과 그 무익함에 대한 비판적인 감정을 표현한 선종의 거장 사와키 코도와, 반카 섬 주민들의 일본 식민주의자 저항 노력을 지원하다 투옥된 사와키의 제자 데시마루 타이센 등이 있다.[13]
4. 다이쇼 시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노동조합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해지자, 일본 제국은 이들을 탄압하고 숙청하기 시작했다. 특히 천황제에 반대하는 운동을 막기 위해 치안유지법을 제정했는데, 이는 공안사건 역사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다. 히라누마 기이치로와 스즈키 키사부로 같은 사법 관료들이 이 법 제정에 참여했다.[15] 고토쿠 사건으로 사형당한 고토쿠를 사법살인한 히라누마는 일본대학 총장을 역임하면서 1930년대에 공안탄압의 역할을 물려받게 될 인재를 육성했고, 1910년대에 천황주권설을 주장한 우에스기는 제대칠생사 등 우익단체 설립에 참여했다.
- 1927년 12월 27일: 도라노몬 사건
4. 1. 1920년-1925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노동조합 단체가 증가하고, 고토쿠 사건 이후 "겨울의 시대"를 이겨내고 부활하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탄압과 숙청이 이루어졌다. 반천황제 운동을 단속 대상으로 하는 치안유지법이 제정된 것은 공안사건사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치안유지법 제정에는 히라누마 기이치로와 스즈키 키사부로 등 사법관료들이 참여했다.[15]- 1918년 8월 26일: 핫코 사건의 시작이 된 오사카 아사히 신문의 1918년 쌀 소동 옹호 기사가 실렸다. 신문 폐간 논란이 이어지다 이후 10월 15일 신문사 사장이 해임되었다.
- 1920년 1월 10일: 모리토 사건
- 1920년 10월 2일: 경시청 특별고등과 노동계 신설
- 1920년 11월 30일: 교토 적기사건
- 1921년 5월 9일: 일본사회주의동맹 결사의 금지.
- 1921년 12월: 효민공산당 사건. 곤도 에이조 등 검거.
- 1921년: 제1차 오모토 사건. 데구치 오니사부로 등 불경죄로 기소.
- 1923년 6월 5일: 제1차 일본공산당 사건.
- 1923년 6월 9일: 사회주의자 타카오 헤이베 사살.
- 1923년 9월 1일: 간토 대지진
- 1923년 9월 2일: '''계엄령 발동'''
- 1923년 9월 4일: 가메이도 사건.
- 1923년 9월 16일: 아마카스 사건.
- 1923년 10월: 박열 사건.
- 1924년 3월: 제1차 일본공산당 해산.
- 1925년 4월 22일: '''치안유지법 공포'''. 동년 5월 19일 시행.
- 1925년 12월 1일: 농민노동당, 창당 당일 활동금지.
5. 전전 쇼와 시대

전전 시기, 즉 대일본제국 헌법 하의 일본에서는 언론 탄압 및 숙청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탄압은 다음과 같은 유형으로 나타났다.
- 비합법적 좌익 세력(즉 일본 공산당·공산주의자) 및 그 관련 단체 등에 대한 탄압 및 숙청
- 합법적 좌익 세력(즉 일부 급진주의 사회민주주의자) 및 자유주의적 지식인 등에 대한 탄압 및 숙청
- 체제 내 비주류·비판적 그룹(좌익으로부터의 전향자가 많았다) 등에 대한 탄압 및 숙청
- 일부 종교 단체에 대한 탄압
이러한 탄압에는 치안유지법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치안유지법은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쳐 본래의 입법 의도를 벗어나, 넓은 의미에서 체제 비판자를 단속하는 법으로 확대 해석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GHQ의 정책에 의해 치안유지법 체제는 해체되었다.
치안유지법은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일본공산당과 같은 좌익 단체들을 탄압하고 숙청하는데 적용되었다. 4·16 사건 이후 일본공산당은 세력을 회복하는 듯했으나, 아타미 사건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1933년부터 1936년까지는 타키가와 사건과 천황기관설 사건을 통해 탄압 대상이 공산주의자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들의 언론 활동까지 확대되었다. 스파이 사문사건으로 인해 제2차 일본공산당은 붕괴되었다.
1937년부터 1940년까지는 대학교수들의 언론 및 저작 활동을 탄압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검거했으며, 연구회나 문화 서클 활동까지 억압했다. 인민전선 사건, 카와이 에이지로 사건, 유물론연구회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5. 1. 1926년-1932년
치안유지법을 적용하여 일본공산당 및 그와 유사한 합법적 대중단체에 대한 탄압과 숙청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치안유지법이 더욱 엄격하게 개정되었다. 4·16 사건 이후 일본공산당은 점차 세력을 회복했으나, 아타미 사건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1926년 1월 15일: 교토학련 사건 본격화.
- 1926년 11월 12일: 마츠모토 지이치로 등 전국수평사 간부 검거.
- 1928년 3월 15일: '''3·15 사건'''. 치안유지법 최초 적용 사례. 전국에서 1568명 검거, 483명 기소.
- 1928년 4월 3일: 신흥종교 혼미치 지도자들, 불경죄로 기소.
- 1928년 4월 10일: 노동농민당, 일본노동조합평의회, 전일본무산청년동맹 해산 명령.
- 1928년 4월 18일: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 교수 카와카미 하지메 추방.
- 1928년 4월 23일: 도쿄제국대학 경제학부 교수 오모리 요시타로 추방.
- 1928년 4월 24일: 규슈제국대학 경제학부 교수 사키사카 이츠로 추방.
- 1928년 6월 29일: '''치안유지법 중개정 긴급칙령 공포'''. 치안유지법 최고형을 사형으로 강화.
- 1928년 7월 3일: 전국 경찰서에 고등계 설치.
- 1928년 7월 24일: 각 지방재판소에 사상계 설치.
- 1928년 10월 6일: 제2차 일본공산당 서기장 와타나베 마사노스케, 대만에서 경찰에 체포되기전 자살.
- 1929년 3월 5일: 중의원에서 치안유지법 개정 사후승낙안 가결. 이에 반대한 야마모토 센지는 그날 밤 피살.
- 1929년 4월 26일: '''4·26 사건'''. 전국에서 공산당 관계자 339명 기소.
- 1929년: 전년의 3·15 사건을 명분으로 경보국 도서과 예산을 두 배로 늘려 언론탄압 확대.
- 1930년: 관동대지진 이후 매년 1000여 건이었던 출판물 금지처분 건수가 1897건으로 급증(전년 1095건).
- 1930년 5월 1일: 무장 메이데이 사건.
- 1930년 5월 20일: 공산당 동조자 사건. 나카노 시게하루, 미키 키요시 등 검거.
- 1931년 5월 25일: 3·15 사건과 4·26 사건 통합공판 개시.
- 1932년 5월: 프롤레타리아 문화단체 탄압. 4일 쿠라하라 코레히토, 7일 미야모토 유리코 검거.
- 1932년 6월 29일: 경시청 특별고등과, 특별고등부로 승격.
- 1932년 10월 6일: 적색깡패 사건
- 1932년 10월 29일: 3·15-4·26 사건 1심 판결.
- 1932년 10월 30일: 사법관 적화사건.
- 1932년 11월 3일: 공산당 중앙위원 이와타 요시미치 고문치사.
- 1932년 11월 12일: '''아타미 사건'''. 제2차 일본공산당 전국대표자회의 개최 직전 일망타진.
5. 2. 1933년-1936년
타키가와 사건과 천황기관설 사건은 탄압 대상이 공산주의자의 지하활동 뿐 아니라 자유주의자의 합법적 언론활동으로까지 확대된 획기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제2차 일본공산당은 옥중 피고들의 전향 성명 및 스파이 사문사건으로 인해 붕괴되었다. 귀족원 의원이자 육군 중장 출신인 키쿠치 다케오가 암약했다.[28]| 연도 | 사건 |
|---|---|
| 1933년 | |
| 1934년 | |
| 1935년 | |
| 1936년 |
5. 3. 1937년-1940년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일본 제국은 대학교수들의 언론 및 저작 활동을 탄압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검거했으며, 연구회나 문화 서클 활동까지 억압했다.| 연도 | 사건 |
|---|---|
| 1937년 | |
| 1938년 | |
| 1939년 | |
| 1940년 |
6. 전중 쇼와 시대
대일본제국 헌법 하의 전전 시기 일본에서는 언론 탄압 및 숙청이 이루어졌다. 주요 탄압 대상은 다음과 같다.
# 일본 공산당 및 관련 단체 등 비합법적 좌익 세력
# 일부 급진주의 사회민주주의자 등 합법적 좌익 세력 및 자유주의적 지식인
# 좌익에서 전향한 사람이 많았던 체제 내 비주류·비판적 그룹
# 일부 종교 단체
치안유지법은 이러한 탄압에 큰 역할을 했으며,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쳐 본래의 입법 의도를 벗어나 넓은 의미에서 체제 비판자를 단속하는 법으로 확대 해석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 후, GHQ의 정책에 의해 치안유지법 체제는 해체되었다.
6. 1. 1941년-1945년
기획원 사건이나 만철조사부 사건으로 전시체제 내부에서 정책적 합리화를 시도한 사람들이 숙청되었다. 대미개전 직전 예방구금제도가 신설되고, 헌병과 특고가 암약하며 일반 민중의 삶이 구석구석 감시되었다. 이 시기 나치 비밀경찰의 수괴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부하 요제프 메징거가 독일에서 파견되어 헌병과 특고의 고문을 맡았다.[58]| 연도 | 사건 |
|---|---|
| 1941년 1월 | 기획원 사건 개시. |
| 1941년 3월 10일 | 치안유지법 전면개정 공포. 예방구금제도 신설. |
| 1941년 5월 15일 | 예방구금소 설치. |
| 1941년 10월 15일 | 오자키 호츠미 검거. 조르게-오자키 사건의 시작. |
| 1941년 10월 18일 | 리하르트 조르게 검거. |
| 1941년 12월 9일 | 전국에서 치안유지법 피의자, 요시찰인, 예방구금예정자 총 396명을 검거, 구치, 가수용. |
| 1941년 12월 19일 | 언론출판집회결사임시단속법 공포. |
| 1942년 4월 24일 | 오자키 유키오, 선거 연설에서 불경죄로 기소. |
| 1942년 6월 29일 | 나카니시 츠토무 등의 상해반전그룹 검거. |
| 1942년 9월 12일 | 요코하마 사건 개시. |
| 1942년 9월 21일 | 만철조사부 사건. |
| 1943년 1월 1일 | 『아사히 신문』, 나카노 세이고의 「전시재상론」을 게재했다고 발행금지. 나카노는 같은 해 10월 석연치 않은 정황에서 할복자살했다. |
| 1943년 3월 13일 | 전시형사특별법 공포. |
| 1943년 3월 15일 | 오사카상대 사건. 나와 토이치 교수 외 20명 검거. |
| 1943년 3월 15일 | 『중앙공론』에 연재된 타니자키 준이치로의 「세설」 연재금지. |
| 1943년 6월 3일 | 키리시마 사건. |
| 1943년 6월 20일 | 창가교육학회의 마키구치 츠네사부로, 토다 죠세이 등 검거. |
| 1944년 2월 23일 | 죽창사건. |
| 1945년 1월-2월 | 전쟁패배의 풍문이 떠돌아 도쿄에서 한달 간 40여명 입건. |
| 1945년 8월 15일 | 쇼와 천황, 항복문서 조인 예고(옥음방송). |
| 1945년 9월 2일 | 일본 정부, 항복문서 조인. 연합군 군정 시작. |
| 1945년 9월 10일 | GHQ, 검열 개시. |
| 1945년 9월 19일 | GHQ, 프레스코드 지령. |
| 1945년 9월 26일 | 미키 키요시 옥사. |
| 1945년 9월 27일 | GHQ, 일본 정부의 검열을 중지하고 언론을 자기 직할로 둠. |
| 1945년 10월 4일 | GHQ/SCAP, 정치신앙민권자유제한철폐각서 발표. 치안유지법 폐지지령. |
| 1945년 10월 10일 | 정치범 3,000 명 석방. |
| 1945년 10월 15일 | 치안유지법・치안경찰법・사상범보호관찰법 폐지. 특고경찰관 파면. |
7. 일본 제국에 저항한 인물 및 단체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한 인물이나 단체는 일본 국내외에 걸쳐 다양하게 존재했다.
1937년 11월 8일, 나카이 쇼이치, 신무라 타케시 등 『세계 문화』 동인들이 일제에 검거되기 시작했다.[69] 같은 해 11월 24일에는 야나이하라 사건이 발생했다. 도쿄 제국 대학 히지카타 나루미가 야나이하라 교수를 비난하여 야나이하라가 사직했다. 12월 15일에는 제1차 인민 전선 사건으로 야마카와 히토시, 이노마타 츠난오 등 노농파 및 가토 칸쥬, 스즈키 모사부로 등 좌파 사회 민주주의자 417명이 검거되었다.[69] 12월 22일, 일본 무산당과 일본 노동 조합 전국 평의회 결사가 금지되었다.[69]
1938년 2월 1일, 제2차 인민 전선 사건으로 오오우치 효에, 미노베 료키치 등 노농파 교수 11명 외 24명이 검거되었다.[69] 2월 12일, 유물론 연구를 하던 유물론 연구회가 자율 해산했다.[69] 2월 17일, 방공 호국단원이 국가 총동원법에 신중한 자세를 보인 정우당, 민정당 본부를 점거(정당 본부 추참 사건)했다.[69] 2월 18일, 『중앙 공론』 3월호 게재 이시카와 타츠조의 「살아있는 병대」가 발매 금지되었다.[69] 3월 3일, 「입 다물어」 사건과 아베 이소오 습격 사건이 발생했다.[69] 3월 11일, 사회 대중당 대의원 니시오 스에히로의 정부 격려 연설 문제로 3월 24일 의원 제명되었다.[69] 9월 13일, 「일본 공산주의자단」 카스가 쇼지로 등이 검거되었다.[69] 10월 5일, 도쿄 제국 대학 교수 카와이 에이지로 주저 발매 금지(카와이 에이지로 사건)되었다.[69] 10월, 게이힌 공업 지대 노동자 연구회 탄압(「게이힌 노동자 그룹」사건), 기획원 시바 히로시가 체포되었다.[69] 11월 21일, 혼미치 교단 탄압.[69] 11월 29일, 유물론 연구회 후계 조직 적발, 회지 『학예』 발매 금지,[70] 오카 쿠니오, 토사카 준, 나가타 히로시, 니이지마 시게루 등 간부 35명 검거, 1940년 1월 24일 2차 검거(12명), 1945년 8월 9일 토사카 옥사.[70]
1939년 1월 28일, 히라가 숙학 사건 발생, 히라가 유즈루 총장, 카와이 에이지로 및 히지카타 나루미 양 교수 휴직 상신, 양 진영 찬동자 항의, 다수 사직, 경제학부 대혼란.[69] 3월 25일, 군사 자원 비밀 보호법 공포.[69] 4월 8일, 종교 단체법 공포.[69] 6월 21일, 등대사 탄압, 아카시 준조 등 130명 검거, 8월 27일 결사 금지, 1942년 5월 30일 징역 12년 판결.[69]
1940년 1월 11일, 츠다 소키치 우익 공격, 와세다 대학 교수 사임, 2월 12일 주저 『신대사 연구』 등 발매 금지, 3월 8일 기소.[69] 2월 2일, 사이토 타카오 대의원 「반군 연설」사건, 전쟁 정책 비판, 3월 7일 의원 제명.[69] 2월 6일, 생활 츠즈리방 운동 탄압 시작, 무라야마 슌타로 등 검거, 운동 관계자, 『생활 학교』 관계 교원 약 300명 검거.[69] 2월 14일~1943년, 『교토대 하이쿠』, 『산맥』 등 하이쿠지, 하이쿠 시인 탄압(「신흥 하이쿠 탄압 사건」).[69] 8월, 개신교 (감리교) 계 기독교회, 구세군 탄압, 야마무로 군페이 저서 『평민의 복음』 발매 금지, 영국인 선교사, 우에무라 마스조 등 일본인 전도자 스파이 혐의 체포, 정부, 「군」 명칭, 군대 조직 사용 금지, 영국 만국 본부와 단절 강요, 만국 본부와 관계 일시 단절, 「일본 구세단」 명칭 변경.[69] 8월 25일, 가가와 토요히코 반전 평화론, 헌병대 구인.[69]
7. 1. 일본 국내
고토쿠 슈스이는 일본의 아나키스트로 제국주의를 비판했다. 그는 1901년에 『제국주의: 20세기의 유령』을 저술했다.[1] 1911년, 고토쿠를 포함한 12명이 메이지 천황 암살 미수 사건인 대역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2] 이 음모와 관련된 혐의로 고토쿠의 전 사실혼 관계의 아내이자 아나키즘 페미니스트인 칸노 스가도 처형되었다.가네코 후미코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살았던 일본인 아나키스트였다. 그녀는 한국인 아나키스트인 박열과 함께 상하이에서 한국 독립 단체로부터 폭탄을 입수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3] 두 사람은 일본 천황가 구성원을 암살하려는 음모 혐의로 기소되었다.[4]
平民新聞|평민신문일본어은 러일 전쟁 기간 동안 주요 반전 운동 매체 역할을 한 사회주의 신문이었다. 이 신문은 사회주의 단체인 평민사(平民社|헤이민샤일본어)의 주간 대변지였다. 주요 필진으로는 고토쿠 슈스이와 사카이 토시히코가 있었다. 평민사가 전쟁으로 인한 높은 세금을 비판하자 사카이는 2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 신문이 ''공산당 선언''을 게재했을 때, 고토쿠는 5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신문은 폐간되었다.
일본 불교는 이 시기 전반적으로 일본 권위주의 체제에 복종하는 모습이었지만,[6] 저항한 예외적인 인물들도 있었다. 우치야마 구도는 소토 선 불교 승려이자 아나키스트-사회주의자였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낸 몇 안 되는 불교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우치야마는 토지 재분배 개혁, 메이지 천황 체제 전복, 징집병 대량 탈영 장려, 모든 사람의 민주적 권리 증진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그는 낮은 사회적 지위가 업보에 의해 정당화된다고 주장하고, 최고 입찰자에게 주지직을 판매하는 선종 지도자들을 비판했다.[7]
정부의 박해로 일본 내 사회주의 및 반전 운동이 지하로 숨어들자, 우치야마는 1908년 도쿄에서 고토쿠 슈스이를 방문했다. 그는 자신의 사찰에 비밀 인쇄소를 설치하는 데 사용할 장비를 구입했다. 우치야마는 이 인쇄 장비를 사용하여 대중적인 사회주의 팜플렛과 소책자를 제작했는데, 그중 일부는 그의 저술이었다.[8] 우치야마는 고토쿠와 함께 메이지 천황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9] 우치야마는 유죄 판결을 받으면서 승려 자격을 박탈당했지만, 1993년 소토 선종에 의해 회복되었다.[10]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에 대한 또 다른 소토 선종 비판자는 이노우에 슈텐이었다. 그는 불교적 평화주의를 옹호하고 D.T. 스즈키의 불교와 전쟁에 대한 입장을 비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1] 다른 주목할 만한 인물로는 전쟁과 그 무익함에 대한 비판적인 감정을 표현한 선종의 거장 사와키 코도와, 반카 섬 주민들의 일본 식민주의자 저항 노력을 지원하다 투옥된 사와키의 제자 데시마루 타이센 등이 있다.[13]
난바 다이스케는 일본인 학생이자 공산주의자였는데, 1923년 섭정 히로히토를 암살하려 시도했다. 난바 다이스케는 1923년 간토 대지진의 여파로 발생한 한국인과 아나키스트 학살 사건인 간토 대학살에 분노했다.[14] 사망자에는 그의 동료인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 여성 해방론자 이토 노에, 그리고 오스기의 6살 된 조카가 포함되었는데, 이들은 일본의 괴뢰 국가인 만주국에 기반을 둔 영화 제작 회사인 만주 영화 협회의 미래 대표가 될 아마카스 마사히코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 사건은 아마카스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15] 난바는 일본 최고 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1924년 11월에 처형되었다.[16]
후쿠다 히데코는 1880년대 일본의 자유민권운동의 "잔 다르크"로 여겨졌다.[17] 그녀는 또한 고토쿠 슈스이가 기고한 사회주의 여성지 世界婦人|세카이 후진일본어(세계의 여성)의 편집자였다. 1885년, 후쿠다는 조선 독립 운동에 폭탄을 공급하려던 실패한 계획인 오사카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오사카 사건은 일본 각지에서 동시 봉기를 일으켜 메이지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20] 이 계획의 일부는 또한 조선 군주제의 보수파에 대항하는 쿠데타에서 조선 독립 운동가들을 돕는 것을 포함했다.[20] 이 계획이 실행되기 전에, 경찰은 공모자들을 체포하고, 그들이 한국으로 가기 전에 무기를 압수했다.[18] 이 계획의 다른 참가자로는 자유민권운동의 또 다른 주요 인물인 오이 겐타로가 있었다.[19] 불법 단체인 ''겐요샤''도 주요 참가자였다.[20]
오야마 이쿠오는 보편적 선거권, 최저 임금, 여성 권리를 옹호하는 좌익 성향의 노동농민당의 구성원이었다. 그의 동료였던 야마모토 센지는 2월 29일, 그가 의회에서 수감자 고문에 대한 증언을 한 날에 암살당했다. 노동농민당은 공산주의와의 연관 혐의로 인해 1928년에 금지되었다. 오야마는 그 결과 1933년 미국으로 일본을 탈출했다. 그는 노스웨스턴 대학교 도서관 및 정치학과에서 직장을 얻었다. 망명 기간 동안 그는 일본 제국에 대항하여 미국 정부와 긴밀히 협력했다. 오야마는 중일 전쟁에서 일본과 싸운 저우언라이와 기꺼이 악수를 나눴다. 오야마는 1951년 12월 20일에 스탈린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동료들은 그가 소련의 꼭두각시가 될 것을 두려워하여 수상을 거부하라고 간청했다. 그가 상을 받자 그의 오랜 친구들 중 일부가 그를 버렸다.
モダンガール|모단 가루일본어는 1920년대 서구화된 패션과 생활 방식을 따르던 일본 여성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미국의 플래퍼와 같은 존재였다.[23] 이 시기는 소비재에 접근할 수 있고 이를 구매할 돈이 있는 젊은 노동자 계층 여성의 등장으로 특징지어진다. 모던 걸은 도시에 살며 재정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독립적이고, 스스로 배우자를 선택하며, 정치에 무관심한 존재로 묘사되었다.[24] 따라서 모던 걸은 서구화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1931년 군사 쿠데타 이후, 극심한 일본 민족주의와 대공황은 19세기의 현모양처의 이상으로의 회귀를 촉구했다.

살롱 드 떼 프랑소와는 노동 운동과 반전 운동에 참여했던 다테노 쇼이치에 의해 1934년 교토에 설립된 서양식 카페였다.[25] 이 카페는 당시 금지된 일본 공산당의 비밀 자금원이었다.[26] 반파시스트 신문 土曜日|Doyōbi일본어는 이 카페에서 편집, 배포되었다.[27]
1933년 3월, 일본 의회는 다양한 교육 단체와 서클을 통제하려 했다. 내무성은 교토 제국대학의 타키가와 유키토키가 저술한 형법 교과서 2권을 금지했다. 다음 달, 교토 대학 총장 코니시 시게나오는 타키가와 교수의 해임을 요청받았다. 코니시는 이 요청을 거부했지만, 군부와 민족주의 단체의 압력으로 타키가와는 대학에서 해고되었다. 이로 인해 교토 제국대학 법학부의 교수 39명 전원이 사임했다. 더욱이 학생들은 수업을 보이콧했고, 공산주의 동조자들은 시위를 조직했다. 문부성은 코니시를 해고함으로써 이 운동을 진압할 수 있었다. 일본 정부가 교육 기관을 통제하려는 시도 외에도, 하토야마 이치로 문부대신 재임 기간 동안 많은 초등학교 교사들이 "위험한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28]
1931년 만주 사변 발발 이후 일본 공산당은 도쿄와 오사카를 포함한 군대에 침투하여 전쟁에 반대하는 팸플릿과 신문을 배포했다.[29] 일본 공산당 소속 선원 사카구치 키이치로는 다른 반전 선원들과 함께 반전 단체 "소링 마스트(The Soaring Mast)"를 창설했다. 6개의 호가 제작되어 배포되었다.[30] 사카구치 키이치로는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 제국 해군에 입대했다. 복무 중 그는 일본 공산당에 가입했다.[31] 사카구치 키이치로는 도쿄에서 경찰의 급습으로 체포되었다. 그는 히로시마 감옥에서 특별고등경찰에 의해 고문을 당했다. 그는 1933년 감옥에서 사망했다.[32]
평화주의는 특고가 표적으로 삼은 수많은 이념 중 하나였다. 평화주의자이자 매크로바이오틱 식단의 창시자인 오사와 조지는 1945년 1월 반전 활동으로 투옥되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가혹한 대우를 받았다. 히로시마 원자 폭탄 투하 한 달 뒤에 풀려났을 때 그는 수척해지고 다리를 절고 시력의 80%를 잃었다.[55] 기독교 평화주의자인 가가와 도요히코는 1940년 일본의 중국 점령에 대해 중화민국에 사과한 혐의로 체포되었다.[56] 또 다른 기독교인인 야나이하라 타다오는 1936년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반전 잡지를 배포했다.
언론인 기류 유유는 반파시즘 게시판인 タザンの石|타잔노이시일본어(타잔의 돌)를 발행했지만, 심한 검열을 받았고 1941년 말 기류의 사망으로 발행이 중단되었다.
변호사 마사키 히로시는 近きより|지카키요리일본어(가까이에서)라는 독립 게시판으로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마사키는 검열에 대항하는 주요 기법으로 정부에 대한 비판을 얇게 가려진 풍자로 표현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는 검열관들에게 눈에 띄지 않았고,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정부에 대한 격렬한 공격을 계속해서 게재할 수 있었다. 그의 잡지는 하세가와 뇨제칸, 우치다 효켄, 라쉬 베하리 보스, 무샤노코지 사네아츠와 같은 많은 지식인 독자들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 후, 마사키는 독특한 변호사가 되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많은 경찰의 과실을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덜 알려진 게시판으로는 유머 작가 우부카타 토시로가 발행한 육군에 대한 월간 비판 故人今人|고진콘진일본어(고인·금인)이 있었다. 역시, 정치적 행동에 대한 명시적인 요구 없이 풍자를 사용하여 우부카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소를 피할 수 있었지만, 두 호가 금지되었다. 그는 1968년에 발행을 중단했다.[57]
기요사와 기요시는 미국에서 교육받은 정치 및 외교 문제 평론가였으며,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권력을 잡던 시대에 살았다. 그는 전쟁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한 메모로 일기를 썼지만, 곧 일본 정부를 비판하고 공개적으로 억눌러야 했던 의견을 표출하는 피난처가 되었다. 이 일기는 언론에서부터 사람들의 의복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대한 관료적 통제가 증가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기요사와는 도조와 고이소를 비웃었으며, 광적인 선전의 부상을 개탄했고, 체포를 피하기 위한 자신과 친구들의 투쟁을 기록했다. 그는 또한 증가하는 빈곤, 범죄, 무질서를 기록하면서, 일본의 전쟁 노력의 점진적인 붕괴와 패배의 확실성을 추적했다. 그의 일기는 1948년에 ''어둠의 일기: 기요사와 기요시의 전시 일기''(A Diary of Darkness: The Wartime Diary of Kiyosawa Kiyoshi)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오늘날 이 일기는 고전으로 여겨진다.[58]
가메이 후미오는 일본과 일본군을 찬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일본의 전쟁 범죄 피해자들을 묘사하고 "성전" 메시지와 "아름다운 일본" 선전을 조롱하는 두 편의 국비 지원 다큐멘터리를 공개한 후 치안유지법에 따라 체포되었다. 그는 전쟁 후 석방되었고 반체제 영화를 계속 제작했다.
마키구치 쓰네사부로는 일본의 논란이 많은 창가학회의 창시자이며, 때때로 정치적 반체제 인사로 여겨진다.[64] 전쟁이 진행되면서 일본 정부는 모든 가정과 사찰에 신토 오후다 (숭배 대상)를 배치하도록 명령했다. 마키구치와 창가학회 지도부는 이를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마키구치, 그의 제자 도다 조세이, 그리고 소카 교육학회(가치 창조 교육 학회)의 다른 지도자 19명은 1943년 7월 6일, 치안유지법 위반과 대역죄: "천황의 신성 모독" 및 이세 신궁 "중상" 혐의로 체포되었다. 1944년 11월 18일, 마키구치는 73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사이토 타카오는 중일 전쟁에 반대하는 격렬한 연설을 하여 정계에서 추방당하면서 당시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65] 훗날 총리 아베 신조의 외조부인 아베 간은 반도조 히데키 노선을 통해 1942년 미키 다케오와 함께 중의원에 당선되었으며, 미키 또한 아베와 상호 협력하여 반도조 노선을 통해 1942년 중의원에 진출했다.[66] 또 다른 반군국주의 인물인 미래의 총리 이시바시 탄잔은 일본의 식민주의와 비자유적 권위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수많은 기사와 단체를 전쟁 전후에 걸쳐 주도했으며, 기요사와 기요시, 요코타 기사부로와 같은 사상가들의 도움을 받았다.[67]
7. 2. 해외
가지 와타루는 상하이에 거주했던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작가였다. 그의 아내 이케다 유키는 일본 제국에 의해 고문을 당했다. 궈 모뤄와 친구였으며, 중일 전쟁 동안 충칭에서 국민당을 위해 포로가 된 일본 군인들을 재교육하는 데 관여했다.[33] 장제스의 반공주의로 인해 장제스와의 관계가 어려웠고,[34] 전쟁 후반에는 전략사무국과 함께 일했다.[35]
일본 공산당의 창립자 노사카 산조는 옌안에서 중국 공산당과 함께 일하며 포로가 된 일본 군인들을 재교육했다. 중국 주재 일본 정보국은 그를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산조는 전쟁 동안 "오카노 스스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36] 야마모토 겐조를 거짓으로 비난한 사실이 밝혀져 일본 공산당에서 불명예스러운 인물로 여겨진다.[37] 요시프 스탈린은 1939년에 야마모토를 처형했다.[38]
사토 타케오는 중일 전쟁 당시 노먼 베쑨의 의료팀에서 활동한 일본인 의사였다. 노먼의 팀은 중국 팔로군에게 의료 지원을 제공했다.[39]
야시마 타로(본명: 이와마츠 아츠시)는 1930년대 초 일본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진보적인 예술가 그룹에 합류했다. 만주 사변 이후 일본 정부의 탄압으로[40] 아내 사사코 토모에와 함께 수감되었다가 1939년 미국으로 건너가 전략사무국에서 화가로 활동했다.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야시마 타로라는 가명을 사용했고, 전쟁 후에도 가명을 계속 사용했다.[41]
이시가키 에이타로는 와카야마현타이치일본어 출신 이세이 화가였다.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발발 후 반전, 반파시스트 예술 작품을 그렸다.[42] 그의 그림은 미국의 공산주의 잡지 표지로 사용되기도 했다.[43] 전쟁 중 미국 전쟁 정보국에서 일했다.[44]
쿠니요시 야스오는 뉴욕에서 활동한 이세이일본어 반파시스트 화가였다. 1942년 중국 구호 기금 마련에 참여했다.[45] 히로히토, 히틀러, 무솔리니를 풍자하는 그림으로 《타임》에 소개되었다.[46] 후지타 츠구하루를 파시스트, 제국주의자 등으로 비판했다.[47] 진주만 공격 이후 "적국인"으로 낙인 찍혔음에도 전쟁 정보국에서 일했다.[48]
오카 시게키는 이세이 사회주의자이자 ''요로즈 쵸호'' 언론인으로, 코토쿠 슈스이의 친구였다. 오클랜드에 도착한 코토쿠를 환영했다.[49] Sekai Rodo Domeikai일본어(세계 노동 연맹) 회원이었다.[50] 1943년 영국 육군에 고용되어 콜카타에서 Gunjin Shimbun일본어(군인 신문) 등 선전 자료를 인쇄했다.[51]
리하르트 조르게는 독일과 일본에서 활동한 소련 군사 정보 장교였다. 1933년 요코하마에서 오자키 호츠미, 미야기 요토쿠 등을 포섭했다. 1941년 고노에 후미마로가 소련 공격 대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병력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는 정보를 소련에 전달하여 소련이 병력을 서부 전선으로 재배치할 수 있게 했다. 그 해 말 조르게와 오자키는 반역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1944년에 처형되었다.[54]
칼 요네다는 글렌데일 출신 니세이일본어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전 일본의 중국 침략에 항의했다.[59] 전쟁 중 미국 군사 정보부에 합류했다.[60]
아리요시 고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 육군 nisei일본어 중사로, 일본 군국주의 반대자였다. 딕시 미션 일원으로 노사카 산조, 마오쩌둥을 만났다.[61] 충칭에서 가지 와타루를 만났고,[62] 1972년 하와이-중국 인민 우호 협회를 결성했다.[63]
1937년 11월 24일, '''야나이하라 사건'''이 발생했다. 도쿄 제국 대학 히지카타 나루미가 야나이하라 교수를 비난하여 야나이하라가 사직했다.
1940년 8월 25일, 가가와 도요히코는 반전 평화론으로 헌병대에 구인되었다.
7. 3. 중도, 보수, 고전적 자유주의 저항
사이온지 긴모치는 세 번이나 총리를 지냈고, 진보적인 시각을 가진 황실 고문이자 마지막 겐로였다. 그는 의회 정부를 지지했으며, 군부와 자주 충돌하여 1936년 쿠데타 직전에는 암살 대상으로 여겨지기도 했다.[21] 시데하라 기주로는 외무대신 시절인 1920년대에 중국에 대해 간섭하지 않고, 영미권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시데하라 외교"로 유명했다.[22]사이토 타카오는 중일 전쟁에 반대하는 격렬한 연설을 했다가 정계에서 추방당해 당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65] 훗날 총리가 되는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 아베 간은 도조 히데키에 반대하는 노선을 걸어 1942년 미키 다케오와 함께 중의원에 당선되었고, 미키 또한 아베와 협력하여 도조에 반대하는 노선으로 1942년 중의원에 진출했다.[66]
참조
[1]
서적
Kotoku Shusui: Portrait of a Japanese Radical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04-14
[2]
웹사이트
High Treason Incident 1910
https://www.academia[...]
Acadamia
2014-01-14
[3]
문서
Treacherous Women of Imperial Japan: Patriarchal Fictions, Patricidal Fantasies
[4]
뉴스
Japanese lawyer made Koreans' cause his own
http://koreajoongang[...]
2014-01-16
[5]
간행물
The Commoners' Newspaper (Heimin Shimbun) (1903-1905)
Heiminsha (Society of Commoners)
1903-05
[6]
서적
Japanese Buddhism: a cultural history
Kosei Pub. Co
2000
[7]
서적
Zen at War
Weatherhill
1998
[8]
서적
Zen at War
Weatherhill
1998
[9]
서적
Zen at War
Weatherhill
1998
[10]
서적
Zen at War
Weatherhill
1998
[11]
논문
"Zen Internationalism, Zen Revolution: Inoue Shūten, Uchiyama Gudō and the Crisis of (Zen) Buddhist Modernity in Late Meiji Japan"
https://digitalcommo[...]
2022
[12]
웹사이트
"Zen at War" by Brian Victoria: Throwing Bombs at Kodo
https://www.thezensi[...]
2014
[13]
웹사이트
buddhanet: Deshimaru
http://www.buddhanet[...]
[14]
문서
Japan's Peace Preservation Law of 1925: Its Origins and Significance
[15]
문서
Labor and Imperial Democracy in Prewar Japan
[16]
잡지
JAPAN: Noble Expiation
http://content.time.[...]
2014-01-15
[17]
문서
e-Study Guide for: East Asia: A Cultural, Social, and Political History
[18]
문서
Japan and the High Treason Incident
[19]
웹사이트
Oi, Kentaro
http://www.ndl.go.jp[...]
[20]
서적
The Whites are Enemies of Heaven: Climate Caucasianism and Asian Ecological Protection
Duke University Press
2020
[21]
서적
The emperor's adviser : Saionji Kinmochi and pre-war Japanese politics
https://www.worldcat[...]
Routledge
1987
[22]
간행물
Shidehara Kijuro (1872-1951)
http://doi.wiley.com[...]
John Wiley & Sons, Ltd
2021-05-15
[23]
문서
The Modern Girl Around the World: Consumption, Modernity, and Globalization
[24]
문서
The 'Modern' Japanese Woman, The Chronicle 5/21/2004
[25]
웹사이트
Salon de the
http://hitorikyoto.w[...]
Worldpress
2014-01-14
[26]
웹사이트
Salon de the
http://www.timeout.j[...]
Timeout
2014-01-14
[27]
웹사이트
http://homepage2.nif[...]
[28]
문서
The Hatoyama Dynasty: Japanese Political Leadership Through the Generations
[29]
웹사이트
"戦争に反対して、命がけで活動した人たちの記録"
https://kure-sensai.[...]
kure-sensai.net
[30]
웹사이트
"「戦前の反戦兵士とその後」II、「聳ゆるマスト」発行の阪口喜一郎の足跡を追ってーー広島・呉で顕彰記念碑建立めざして"
https://www.yamashit[...]
kure-sensai.net
[31]
웹사이트
"「戦前の反戦兵士とその後」II、「聳ゆるマスト」発行の阪口喜一郎の足跡を追ってーー広島・呉で顕彰記念碑建立めざして"
https://www.yamashit[...]
kure-sensai.net
[32]
웹사이트
"「戦前の反戦兵士とその後」II、「聳ゆるマスト」発行の阪口喜一郎の足跡を追ってーー広島・呉で顕彰記念碑建立めざして"
https://www.yamashit[...]
kure-sensai.net
[33]
문서
From Kona to Yenan: The Political Memoirs of Koji Ariyoshi
[34]
문서
Imperial Eclipse: Japan's Strategic Thinking about Continental Asia before ...
[35]
웹사이트
Japan
http://www.asian-stu[...]
Asian Studies
2014-01-14
[36]
서적
From Kona to Yenan: The Political Memoirs of Koji Ariyoshi
[37]
뉴스
Sanzo Nosaka
https://www.nytimes.[...]
2014-01-14
[38]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Postwar Japan
[39]
서적
Pacific War, 1931–1945
[40]
간행물
"The Artist Belongs to the People": The Odyssey of Taro Yashima
https://www.academia[...]
2019-07-27
[41]
웹사이트
Taro Yashima: Artist for Peace
http://www.librarypo[...]
LibraryPoint
2014-01-15
[42]
웹사이트
Retrospective
http://www.momaw.jp/[...]
Momaw
2014-01-14
[43]
서적
Race, Ethnicity and Migration in Modern Japan: Imagined and imaginary minorities
[44]
서적
The Cultural Front: The Labouring of American Culture in the Twentieth Century
[45]
서적
Becoming American?: Asian Identity Negotiated Through the Art of Yasuo Kuniyoshi
[46]
서적
Becoming American? : the art and identity crisis of Yasuo Kuniyoshi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9-01-15
[47]
서적
Glory in a Line: A Life of Foujita--the Artist Caught Between East
[48]
웹사이트
Exhibitions: The Artistic Journey of Yasuo Kuniyoshi
http://americanart.s[...]
Americanart.si.edu
2014-01-16
[49]
서적
Kōtoku Shūsui, Portrait of a Japanese Radical
[50]
서적
The Origins of Socialist Thought in Japan
[51]
서적
Nisei linguists: Japanese Americans in the Military Intelligence Service
[52]
서적
Nisei Linguists: Japanese Americans in the Military Intelligence Service
[53]
서적
An Instance of Treason: Ozaki Hotsumi and the Sorge Spy Ring
https://books.google[...]
Stanford University Press
[54]
웹사이트
Sorge's spy is brought in from the cold
http://www.japantime[...]
2010-01-31
[55]
웹사이트
George Ohsawa, Macrobiotics, and Soyfoods Part 1
http://www.soyinfoce[...]
Soyinfocenter.com
2014-01-16
[56]
웹사이트
Sermon
http://www.ashlandme[...]
Ashland Methodist
2014-01-14
[57]
웹사이트
上之町生まれの作家 生方敏郎の『古人今人』と『明治大正見聞史』
https://web.archive.[...]
[58]
서적
A Diary of Darkness
http://press.princet[...]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8-09-07
[59]
웹사이트
Karl Yoneda
http://foundsf.org/i[...]
Founds
2014-01-14
[60]
서적
Notable American Women: A Biographical Dictionary, Volume 5
[61]
서적
From Kona to Yenan: The Political Memoirs of Koji Ariyoshi
[62]
서적
From Kona to Yenan: The Political Memoirs of Koji Ariyoshi
[63]
웹사이트
U.S.–China Peoples Friendship Association
https://scholarspace[...]
USCPFA – Hawai‘i Subregion
2019-01-15
[64]
서적
Soka Gakkai in America: accommodation and conversion
Oxford University Press
[65]
간행물
The Mouse That Roared: Saito Takao, Conservative Critic of Japan's "Holy War" in China
https://www.jstor.or[...]
1999
[66]
뉴스
Japanese prime minister's another DNA
http://english.donga[...]
2014-01-15
[67]
웹사이트
Ishibashi Tanzan's World Economic Theory: The War Resistance of an Economist in the 1930's
http://www.princeton[...]
2006
[68]
간행물
新聞はなぜ戦争に加担したのか ――平和を考える上での新聞昭和前史再検証
https://doi.org/10.2[...]
環太平洋大学
2010-03
[69]
뉴스
「唯物論研究」廃刊で、同人が発行『東京日日新聞』(昭和13年2月26日夕刊)『昭和ニュース辞典第6巻 昭和12年-昭和13年』p70
毎日コミュニケーションズ刊
1994
[70]
뉴스
十二月号が発禁処分『中外商業新聞』(昭和13年12月1日夕刊)『昭和ニュース辞典第6巻 昭和12年-昭和13年』p7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