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식민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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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식민 제국은 19세기 후반부터 제1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존재했던 독일의 해외 식민지들을 포괄한다. 독일은 한자 동맹 시기부터 무역을 통해 해외 진출을 시도했으며, 1884년 비스마르크 시대에 아프리카와 태평양 지역을 식민화하기 시작했다. 독일은 토고, 카메룬,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 독일령 동아프리카, 독일령 뉴기니 등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으나, 가혹한 통치와 원주민 저항에 직면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후 독일은 식민지를 모두 잃었고,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영토는 국제 연맹 위임 통치령으로 전환되었다. 전후 독일에서는 식민지 반환 요구가 있었지만, 나치 정권은 이를 유럽 확장의 수단으로 활용하려 했다. 현재에도 독일 식민 시대의 유산과 과거사 청산 문제가 남아있으며, 독일은 식민주의의 잔혹 행위에 대한 반성과 보상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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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식민제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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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일반 명칭 | 독일 식민제국 |
상태 | 식민 제국 |
수도 | 베를린 |
공용어 | 독일어 |
역사 | |
성립 | 설립(1884년) |
주요 사건 | 아부시리 반란(1888년) 헬골란트-잔지바르 조약(1890년) 아다마와 전쟁(1899년) 헤레로 전쟁(1904년) 마지마지 반란(1905년) |
해체 | 베르사유 조약(1919년) |
통계 | |
면적 (1912년) | 2,962,495 km² |
인구 (1912년) | 11,979,000명 |
통치 | |
독일 황제 | 빌헬름 1세(1880년-1888년) 빌헬름 2세(1890년-1918년) |
독일 총리 | 오토 폰 비스마르크(1880년-1890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1918년-1919년) |
통화 | |
통화 | 금 마르크, 파피에르마르크 |
현재 국가 | |
현재 국가 | () |
국기 및 국장 | |
국가 | |
국가 (비공식) | Heil dir im Siegerkranz(황제 찬가) Die Wacht Am Rhein |
2. 독일 식민지 이전의 역사
독일인들은 한자 동맹 시대부터 해외 해상 무역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발트해 연안, 러시아, 트란실바니아, 아메리카 대륙 등으로 이주했다. 북부 독일 상인들과 선교사들은 해외 참여에 관심을 보였다.[3] 함부르크와 브레멘의 한자 공화국은 전 세계에 상인들을 파견했다. 이들의 무역 회사는 아프리카와 태평양에서 추장 및 부족 지도자들과 조약 및 토지 매매를 체결하며 ''사적 식민지 개척자''로서 활동했다. 이러한 초창기 현지 단체와의 합의는 이후 독일 정부의 합병 조약, 외교적 지원 및 군사적 보호의 기반이 되었다.[4]
그러나 1871년 통일까지 독일 국가들은 해군 발전에 집중하지 않아, 초기 제국주의 경쟁에서 원격 식민지 영토에 대한 독일의 참여를 사실상 배제했다. 대양 해군 없이는 해외 영토를 안정적으로 방어, 공급, 무역할 수 없었다. 1870년 이전의 독일 국가들은 별도의 정치 구조와 목표를 유지했으며, 독일 외교 정책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 시대까지 유럽의 "독일 문제"를 해결하고 대륙에서의 독일의 이익을 확보하는 데 집중했다. 1891년까지 독일인들은 대부분 프로이센 통치하에 통일되었고,[5] 더 명확한 "독일" 국가를 원했으며, 식민지를 이를 달성하는 좋은 방법으로 보았다.
1815년에 설립된 독일 연방과 1834년에 설립된 관세 동맹의 여러 주에서는 1840년대에 특히 사적 및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독일 식민지 건설에 대한 요구가 있었으나,[6] 정부는 그러한 열망을 품지 않았다.
다른 서유럽 국가에 비해 통일 국가 건설이 늦었던 독일은 18세기 프로이센에 의한 브란덴부르크령 황금 해안 (현재의 가나) 등의 사례는 있었지만, 본격적인 해외 식민지 건설도 늦어졌다.
가장 오래된 독일인의 식민지 건설 사례는 1526년 카를 5세가 푸거 가문과 함께 당대 주요 금융업자였던 벨저 가문에게 부채 탕감을 조건으로 현재 남미 베네수엘라 지역의 전면적인 통치권과 사법권을 양도한 것이다. 벨저 가문은 란츠크네히트를 통해 베네수엘라 탐험을 진행했지만, 전설의 황금향 엘도라도를 찾기 위한 탐험은 원주민에 대한 학살 만행으로 이어졌다. 라스 카사스는 이를 "지상의 어떤 악당들보다 잔혹하다"라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벨저 가문은 베네수엘라 경영이 채산성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철수했고, 이 땅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다.[193]
통일 독일 제국 성립 후, 비스마르크 외교 동안 독일은 적극적인 식민지 정책을 펼치지 않았지만, 비스마르크의 은퇴 후 "세계 정책(Weltpolitik)"을 표방하여 아프리카, 태평양 등에 해외 식민지를 건설하고, 빌헬름 2세 아래에서 적극적인 해외 진출을 했다.
2. 1.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식민지 시도
독일인들은 한자 동맹 시대부터 해외 해상 무역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 이민자들은 발트해 연안, 러시아, 트란실바니아 및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했다. 함부르크와 브레멘의 한자 공화국 상인들은 아프리카와 태평양에서 추장 및 부족 지도자들과 조약 및 토지 매매를 체결하며 ''사적 식민지 개척자''로 활동했다. 이러한 초창기 합의는 이후 독일 정부의 합병 조약, 외교적 지원 및 군사적 보호의 기반이 되었다.[4]
1871년 통일 이전의 독일 국가들은 해군 발전에 집중하지 않아 초기 제국주의 경쟁에서 원격 식민지 영토에 대한 독일의 참여를 사실상 배제했다. 1870년 이전의 독일 국가들은 별도의 정치 구조와 목표를 유지했으며, 독일 외교 정책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 시대까지 유럽의 "독일 문제"를 해결하고 대륙에서의 독일의 이익을 확보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1891년까지 독일인들은 대부분 프로이센 통치하에 통일되었고,[5] 식민지를 국가를 달성하는 좋은 방법으로 보았다.
1815년에 설립된 독일 연방과 1834년에 설립된 관세 동맹의 여러 주에서는 1840년대에 특히 사적 및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독일 식민지 건설에 대한 요구가 있었다.[6] 1839년, 독일 식민 협회가 설립되어 뉴질랜드 동쪽의 채텀 제도를 매입하여 독일 이민자들을 정착시키려 했지만, 대영 제국이 이미 해당 섬에 대한 선점권을 가지고 있었다. 함부르크는 전 세계 해운 사업을 위해 영국 해군에 의존했기 때문에 식민 협회에 어떠한 정치적 지원도 하지 않았다.[7] 1842년 마인츠에서 설립된 텍사스 독일 이민자 보호 협회는 독일 정착지를 "신 독일"(Neu Deutschland|노이 도이칠란트de) 식민지로 확장하려 했으나, 약 7400명의 정착민이 참여한 이 사업은 완전히 실패했다. 물자와 토지가 부족했고, 식민지 개척민의 절반 가량이 사망했으며, 1845년 미국의 텍사스 합병으로 종료되었다.[175]
1850년대부터 독일 상업 기업들은 서아프리카, 동아프리카, 사모아 제도, 뉴기니 북동부, 카메룬의 두알라 삼각주, 잔지바르 건너편 본토 해안 등 이후 독일 식민지가 될 지역으로 뻗어 나갔다.[8] 1857년, 오스트리아의 프리깃함 ''노바라''는 인도양의 니코바르 제도를 탐사하고 점유하기 위한 노바라 원정에 나섰으나, 1858년 니코바르 제도에 도착했지만 오스트리아는 이후 이 섬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국가 주도의 식민지 획득 시도는 1859년에 일어났는데, 프로이센 왕국이 포르모사 (현대 타이완) 섬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려 시도했다. 프로이센은 제2 프랑스 제국 황제 나폴레옹 3세의 승인을 구했는데, 당시 프랑스 역시 동아시아에서 식민지를 획득하려 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포르모사가 아닌 응우옌 왕조의 베트남에 집중했기에, 프로이센은 섬을 획득하려 할 수 있었다. 1859년 말 독일에 출발한 프로이센의 오일렌부르크 원정 해군은 프로이센과 관세 동맹의 다른 국가들을 위해 아시아에서 통상 조약을 체결하고 포르모사를 점령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원정군의 제한된 전력과 청나라와의 통상 조약을 배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실행되지 않았다. 1862년 1월 6일의 내각 명령에서, 원정 대사 프리드리히 알브레히트 추 오일렌부르크는 "프로이센 정착에 적합한 해외 정착지를 식별하는 임무 수행에서 해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정대의 한 척인 ''테티스''는 식민지로서의 전망을 조사하기 위해 남아메리카의 파타고니아로 보내졌다. 프로이센 해군 사령부는 남아메리카 해안에 해군 거점을 건설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테티스''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달했는데, 함장은 1년 동안의 원정 후 선원들의 피로와 배의 수리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독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9]
독일은 다른 서유럽 국가에 비해 통일 국가 건설이 늦었기 때문에 18세기 프로이센에 의한 브란덴부르크령 황금 해안 (현재의 가나) 등은 있었지만, 본격적인 해외 식민지 건설도 늦은 시기가 되었다.
1526년 카를 5세가 푸거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금융업자 벨저 가문에게 부채 탕감을 조건으로, 현재 남미 베네수엘라 지역의 전면적인 통치권과 사법권을 양도한 것이 가장 오래된 독일인이 건설한 사례이다. 벨저 가문은 베네수엘라 탐험을 란츠크네히트에게 의뢰했지만, 전설의 황금향 엘도라도를 찾았던 탐험은 원주민에 대한 학살 만행을 극에 달했으며, 이는 라스 카사스에 의해 "지상의 어떤 악당들보다 잔혹하다"라고 격렬하게 비난받았다. 벨저 가문은 베네수엘라 경영이 채산성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철수했고, 이 땅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다.[193]
2. 2. 벨저 가문의 베네수엘라 통치
1526년 카를 5세는 푸거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금융업자 벨저 가문에게 부채를 탕감받는 조건으로, 현재 남미 베네수엘라 지역의 전면적인 통치권과 사법권을 양도했다[193]。 벨저 가문은 란츠크네히트에게 베네수엘라 탐험을 의뢰했지만, 전설의 황금향 엘도라도를 찾기 위한 탐험은 원주민에 대한 학살 만행으로 이어졌고, 라스 카사스는 이를 "지상의 어떤 악당들보다 잔혹하다"라고 격렬하게 비난했다[193]。 벨저 가문은 베네수엘라 경영의 채산성이 맞지 않아 철수했고, 이 땅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다[193]。3. 독일 제국의 식민지 확장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프랑스는 알자스-로렌 대신 프랑스 식민지인 코친차이나를 넘겨주자는 제안을 받았지만, 비스마르크와 북독일 라이히슈타크는 이를 거부했다. 독일 통일 이후에도 비스마르크는 이 입장을 유지했다.[19] 1870년대 독일에서는 식민주의 선전이 인기를 얻었고, 1882년 독일 식민협회가, 1887년 독일 식민화 협회가 설립되어 1887년 독일 식민 협회로 합병되었다.[19]
19세기 말, 독일 여론은 식민지 획득을 완전한 국가를 달성했음을 보여주는 지표로 간주했으며,[20] 대양 함대에 대한 꿈과 함께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 기업이 유럽 외 지역과 수익성 있는 무역을 하고, 영토 점령이나 국가 건설 없이 경제적 진출을 하는 비공식적인 상업적 제국주의를 선호했다.[21] 라이히슈타크의 많은 대표들은 단순히 넓은 영토를 확보하기 위한 식민지 정복에는 관심이 없었다.[22]
비스마르크는 "그 어느 때보다 식민지 꿈에 대해 경멸적이었다"고 하지만,[28] 1884년, 무역 보호, 원자재 및 수출 시장 확보, 자본 투자 기회 활용 등을 위해 독일 제국의 식민지 획득에 동의했다.[29]
비스마르크는 1884년까지 식민지 아이디어를 받아들였고, 재정적 고려로 인해 식민지 정부 수립보다는 "특허 회사" 토지 관리를 선호했다.[53] 그는 공식 보호 서한을 사용하여 개별 "독일 보호령"의 상업과 행정을 사기업으로 이전했다. 이러한 지역의 행정은 독일 동아프리카 회사(1885–1890), 독일 비투 회사(1887–1890), 독일 뉴기니 회사(1885–1899), 그리고 마셜 제도에 있는 잘루이트 회사(1888–1906)에 할당되었다.[54]
원주민 통치자들은 종종 법적 권리가 없는 광대한 지역을 보호와 터무니없이 낮은 구매 가격에 대한 모호한 약속과 교환하여 양도했다. 조약의 세부 사항은 언어 장벽으로 인해 종종 그들에게 불분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식민주의자들과의 긴 협상과 조약 서명이라는 의례적인 행위가 그들의 권위를 강화했기 때문에 이러한 거래에 참여했다. 이러한 조약은 독일 정부의 승인을 받았으며, 주권과 명시되지 않은 개입 권한만을 유지하면서 식민지 회사에 모든 권한을 부여했다. 이로써 식민지에 대한 국가의 재정적 및 행정적 참여는 최소한으로 유지되었다.[55]
그러나 이 전략은 몇 년 안에 실패했다. "보호령"의 열악한 재정 상황과 불안정한 보안 상황으로 인해 비스마르크와 그의 후임자들은 모든 식민지에서 직접적이고 공식적인 통치를 시행하게 되었다.[56]
비스마르크의 은퇴 후 빌헬름 2세는 "세계 정책(Weltpolitik)"을 표방하여 아프리카, 태평양 등에 해외 식민지를 건설하고 적극적인 해외 진출을 했다.
3. 1. 비스마르크 시대 (1871-1890)
독일인들은 한자 동맹 시대부터 해외 해상 무역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 이민자들은 발트해 연안, 러시아, 트란실바니아 및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했다. 북부 독일 상인들과 선교사들은 해외 진출에 관심을 보였다.[3] 함부르크와 브레멘의 한자 공화국은 전 세계에 상인들을 파견했다. 이들의 무역 회사는 아프리카와 태평양에서 추장 및 부족 지도자들과 조약 및 토지 매매를 체결하며 ''사적 식민지 개척자''로 활동했다. 이러한 초창기 합의는 이후 독일 제국의 합병 조약, 외교적 지원 및 군사적 보호의 기반이 되었다.[4]그러나 독일 통일 이전까지 독일 국가들은 해군 발전에 집중하지 않아 초기 식민지 영토 경쟁에서 독일의 참여를 배제했다. 1870년 이전 독일 국가들은 별도의 정치 구조와 목표를 가졌으며, 독일 외교 정책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 시대까지 유럽의 "독일 문제"를 해결하고 대륙에서의 독일의 이익을 확보하는 데 집중했다. 1891년까지 독일인들은 대부분 프로이센 통치하에 통일되었으며,[5] 더 명확한 "독일" 국가를 원했고, 식민지를 이를 달성하는 좋은 방법으로 보았다.
1840년대에 독일 연방과 관세 동맹에서는 사적 및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독일 식민지 건설 요구가 있었다.[6] 1839년, 독일 식민 협회가 뉴질랜드 동쪽의 채텀 제도를 매입하여 독일 이민자들을 정착시키려 했지만, 대영 제국이 이미 해당 섬에 대한 선점권을 가지고 있었다.[7] 1842년 마인츠에서 설립된 텍사스 독일 이민자 보호 협회는 독일 정착지를 "신 독일"(Neu Deutschland|노이 도이칠란트de) 식민지로 확장하려 했으나 실패했다.[175]
1850년대부터 독일 상업 기업들은 서아프리카, 동아프리카, 사모아 제도, 뉴기니 북동부, 카메룬의 두알라 삼각주, 잔지바르 건너편 본토 해안 등 이후 독일 식민지가 될 지역으로 뻗어 나갔다.[8]

1867년 북독일 연방 헌법 4.1조는 "식민지화"를 "연방의 감독" 하에 있는 영역 중 하나로 선언했으며, 이는 1871년 독일 제국 헌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868년,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전쟁부 장관 알브레히트 폰 론에게 보낸 편지에서 식민지 획득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했으며,[15] "... 나는 식민지를 위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16]
당시 북독일 연방의 정책은 식민지가 아닌 개별 해군 기지 획득에 초점을 맞추었다. 1867년, 5개의 해외 기지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1868년 일본 요코하마에 독일 해군 병원을 위한 부지가 매입되었고, 1869년 "동아시아 기지"가 최초의 해외 기지로 설립되었다. 칭다오를 군항으로 획득하기 전까지, 요코하마는 동아시아 독일 함대의 기지로 남아 있었다.[17]

1870년대 동안, 식민주의 선전은 독일에서 점점 더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1873년 독일 아프리카 협회가 설립되었으며, 1882년 식민주의 선전을 위한 로비 단체인 독일 식민화 협회가 설립되었다. 1887년 독일 식민화 협회가 설립되었고, 두 협회는 1887년 독일 식민 협회로 합병되었다.[19]
19세기 말 독일 여론은 식민지 획득을 완전한 국가를 달성했음을 보여주는 진정한 지표로 간주했으며,[20] 대양 함대에 대한 꿈과 함께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 기업이 유럽 외 지역과 수익성 있는 무역을 수행하고 영토 점령이나 국가 건설 없이 경제적 진출을 하는 비공식적인 상업적 제국주의를 선호했다.[21] 라이히슈타크의 많은 대표들은 단순히 넓은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식민지 정복을 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22]
비스마르크는 "그 어느 때보다 식민지 꿈에 대해 경멸적이었다"고 하지만,[28] 1884년, 무역 보호, 원자재 및 수출 시장 확보, 자본 투자 기회 활용 등을 위해 독일 제국의 식민지 획득에 동의했다.[29]
비스마르크는 1884년까지 식민지 아이디어를 받아들였고, 재정적 고려로 인해 식민지 정부 수립보다는 "특허 회사" 토지 관리를 선호했다.[53] 그는 공식 보호 서한을 사용하여 개별 "독일 보호령"의 상업과 행정을 사기업으로 이전했다. 행정은 독일 동아프리카 회사(1885–1890), 독일 비투 회사(1887–1890), 독일 뉴기니 회사(1885–1899), 마셜 제도에 있는 잘루이트 회사(1888–1906)에 할당되었다. [54]
원주민 통치자들은 종종 법적 권리가 없는 광대한 지역을 보호와 터무니없이 낮은 구매 가격에 대한 모호한 약속과 교환하여 양도했다. 조약 세부 사항은 언어 장벽으로 인해 불분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식민주의자들과의 협상과 조약 서명이라는 의례적인 행위가 그들의 권위를 강화했기 때문에 이러한 거래에 참여했다. 조약은 독일 정부의 승인을 받았으며, 주권과 명시되지 않은 개입 권한만을 유지하면서 식민지 회사에 모든 권한을 부여했다. 이로써 식민지에 대한 국가의 재정적 및 행정적 참여는 최소한으로 유지되었다.[55]
그러나 이 전략은 몇 년 안에 실패했다. "보호령"의 열악한 재정 상황과 불안정한 보안 상황으로 인해 비스마르크와 그의 후임자들은 모든 식민지에서 직접적이고 공식적인 통치를 시행하게 되었다.[56]
3. 1. 1. 아프리카
독일은 1884년부터 아프리카의 여러 영토를 침략했다. 여기에는 독일령 동아프리카(오늘날의 부룬디, 르완다, 탄자니아 본토 포함),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오늘날의 나미비아), 독일령 카메룬(오늘날의 카메룬, 가봉, 콩고,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차드 및 나이지리아 일부 포함), 토골란드(오늘날의 토고와 가나 일부)가 포함된다.[5]1883년 3월부터 함부르크의 대량 상품 상인이자 선주이며 함부르크 상공 회의소의 회원이기도 한 아돌프 워만은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외무부와 서아프리카 식민지 획득을 위해 극비리에 협상했다. 이는 서아프리카 전체가 영국 또는 프랑스의 통제를 받게 될 경우 함부르크 상인들이 지불해야 할 수수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38] 1883년 12월, 비스마르크는 함부르크에 제국 위원이 서아프리카로 파견되어 독일 무역의 안전을 확보하고 "독립 흑인 국가"와 조약을 체결할 것이라고 알렸다. 나사형 코르벳이 군사적 보호를 제공하기 위해 파견될 것이다.[39] 1884년 3월, 구스타프 나흐티갈이 서아프리카 해안 제국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포격선을 타고 서아프리카로 출항했다.[40]



1884년은 독일 제국을 위해 획득한 해외 영토와 권리를 바탕으로 실제적인 독일 식민지 획득이 시작된 해이다. 1년 만에 독일의 영토는 영국과 프랑스 제국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식민 제국이 되었다.[41]
먼저, 아돌프 뤼데리츠의 안가라 페케나 만('뤼데리츠 만')의 무역 기지와 주변 배후지(Lüderitzlandde)는 1884년 4월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로 독일 제국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7월에는 토고와 아돌프 보어만의 카메룬 재산이 뒤따랐다.[42] 1885년 1월, 독일 국기가 서아프리카 해안의 카피타이와 코바에 게양되었다. 2월에는 제국주의자이자 "행동가"인 카를 페터스가 독일 식민지화 협회를 위해 광대한 토지를 확보했는데, 이 지역이 독일령 동아프리카가 되었다.[42] 1885년 4월에는 클레멘스와 구스타프 덴하르트 형제가 현대 케냐의 비투랜드를 획득했다. 이로써 독일의 첫 번째 식민지 획득 물결은 대체로 완료되었다.
영토 | 수도 | 수립 | 해체 | 면적[191] | 총 인구[191] | 독일인 인구[191] | 현재 국가 |
---|---|---|---|---|---|---|---|
카메룬 Kamerun | 야운데 | 1884 | 1920 | 495000km2 | 2,540,000 | 1,359 | 카메룬 나이지리아 차드 가봉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콩고 공화국 |
토고랜드 Togo | 바기다 (1884–87) 세베 (1887–97) 로메 (1897–1916) | 1884 | 1920 | 87200km2 | 1,003,000 | 316 | 가나 토고 |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 Deutsch-Südwestafrika | 빈트후크 (1891년부터) | 1884 | 1920 | 835100km2 | 86,000 | 12,135 | 나미비아 |
독일령 동아프리카 Deutsch-Ostafrika | 바가모요 (1885–1890) 다르에스살람 (1890–1916) 타보라 (1916, 임시) [192] | 1891 | 1920 | 995000km2 | 7,511,000 | 3,579 | 부룬디 케냐 모잠비크 르완다 탄자니아 |
- Deutsch-Westafrika|label=독일령 서아프리카de
- 독일령 카메룬 (Kamerun) 1884년 - 1920년 현재의 카메룬.
- 독일령 토골란드 (Togo) 1884년 - 1920년 현재의 토고 (토골란드) 및 가나 동부.
- Deutsch-Witu|label=독일령 비투de 1885년 - 1890년 현재의 케냐 일부. 헬골란트-잔지바르 조약에 의해 영국령이 된다.
- 독일령 동아프리카 (Deutsch-Ostafrika) 1885년 - 1920년 현재의 탄자니아 대륙 부분(탕가니카), 르완다, 부룬디. 총독은 카를 페터스이다.
-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Deutsch-Südwestafrika) 1884년 - 1920년 현재의 나미비아. 총독은 아돌프 뤼데리츠이다.
3. 1. 2. 오세아니아
독일은 19세기 후반에 태평양 지역에서 활발한 식민 활동을 펼쳤다. 독일령 뉴기니(1885년-1920년)는 현재의 파푸아뉴기니 북부 지역(카이저-빌헬름스-란트), 비스마르크 제도, 독일령 솔로몬 제도 북부, 미크로네시아 연방, 마셜 제도, 팔라우, 마리아나 제도, 나우루를 포함했다.[5] 1878년에는 독일이 사모아의 우폴루 섬에 있는 팔레알릴리와 살루아파타를 "제국의 이름으로" 점령했지만, 1879년 1월에 철회되었다.[24] 이후 독일령 사모아(1899년-1920년)는 현재의 사모아에 해당한다.[5]1878년, 독일은 마셜 제도의 잘루이트 환초와 랄리크 섬의 일부 지역에 대한 특권을 얻는 조약을 체결했고,[25] 1885년에 마셜 제도에 대한 공식적인 식민지를 설립했다.[25] 또한 1878년에 듀크 오브 요크 제도의 마카다 섬과 미오코 섬에 항구를 획득했는데, 이곳은 1884년 독일령 뉴기니의 일부가 되었다.[26] 1879년에는 소시에테 제도 중 하나인 후아히네와 상업 및 우호 조약을 체결하여 독일 함대에 섬 항구 정박 권한을 부여했다.[27]
1885년에는 캐롤라인 위기가 발생하여 독일이 태평양 섬에 국기를 게양했지만, 결국 물러섰다.[43][44] 1886년에는 솔로몬 제도 여러 섬을 점령했고,[43][44] 1888년에는 나우루의 내전을 종식시키고 섬을 병합했다.[43][44]
영토 | 수도 | 수립 | 해체 | 면적[191] | 총 인구[191] | 독일인 인구[191] | 현재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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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령 뉴기니 Deutsch-Neu-Guinea 제국 독일 태평양 보호령 포함: | 핀쉬하펜 (1884–1891) 마당 (1891–1899) 헤르베르트스회 (1899–1910) 짐프슨하펜 (1910–1914) | 1884 | 1920 | 242776km2 | 601,000 | 665 | |
독일령 사모아 Deutsch-Samoa | 아피아 | 1899 | 1920 | 2,570 km2 | 38,000 | 294 |
3. 1. 3. 아시아
독일은 다른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통일 국가 건설이 늦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해외 식민지 건설도 늦은 시기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독일인의 식민지 건설 사례는 1526년 카를 5세가 벨저 가문에게 남아메리카 베네수엘라 지역의 통치권과 사법권을 양도한 것이 가장 오래된 예이다. 벨저 가문은 베네수엘라 탐험을 란츠크네히트에게 의뢰했지만, 엘도라도를 찾았던 탐험은 원주민 학살 만행을 극에 달했으며, 이는 라스 카사스에 의해 "지상의 어떤 악당들보다 잔혹하다"라고 격렬하게 비난받았다.[193] 벨저 가문은 베네수엘라 경영이 채산성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철수했고, 이 땅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다.통일 독일 제국 성립 후, 비스마르크 외교 동안 독일은 적극적인 식민지 정책을 펼치지 않았지만, 비스마르크 은퇴 후 "세계 정책(Weltpolitik)"을 표방하여 아프리카, 태평양 등에 해외 식민지를 건설하고, 빌헬름 2세 아래에서 적극적인 해외 진출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령 식민지는 독일령 동아프리카를 제외하고는 연합국 군에 점령되었지만, 독일령 동아프리카만은 파울 폰 레토우-보르베크 장군이 이끄는 현지인 중심의 게릴라 부대가 종전까지 저항을 계속했다.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결과, 독일령 식민지는 주로 영국, 프랑스, 일본, 기타 국가에 분할되어 소멸했다.
독일은 19세기 후반 이후 다음과 같은 식민지를 보유했다.
- 독일령 뉴기니 (Deutsch-Neuguinea) 1885년 - 1920년 현재의 파푸아뉴기니 북부 지역(Kaiser-Wilhelms-Land|카이저-빌헬름스-란트de), 비스마르크 제도, North Solomon Islands|label=독일령 솔로몬 제도영어 북부, 미크로네시아 연방, 마셜 제도, 팔라우, 마리아나 제도, 나우루.
- 독일령 사모아 (Samoa) 1899년 - 1920년 현재의 사모아.
- 자오저우만 (Kiautschou) 1898년 - 1920년 99년간의 조차지. 현재의 칭다오.
- 톈진 조계 1895년 - 1920년
- 한커우 조계 1895년 - 1920년
3. 2. 빌헬름 2세 시대 (1890-1918)
빌헬름 2세는 독일이 식민지 영토를 확장하는 데 열심이었다. 1890년 레오 폰 카프리비는 이미 존재하던 식민지의 부담을 유지하려 했지만, 새로운 모험에는 반대했다.[64] 외무 장관이자 재상을 역임한 베른하르트 폰 뷜로프를 비롯한 후임자들은 태평양 식민지의 추가 획득을 승인하고, 행정가, 상업 요원, 측량사, 지역 "평화 유지군" 및 세금 징수관을 고용하기 위해 기존 보호령에 상당한 재정 지원을 제공했다. 이는 팽창주의 정책과 독일 제국 해군의 강제적인 업그레이드와 일치했다.독일 식민지 협회는 1891년 극단적인 민족주의 단체인 범게르만 연맹과 합류했다. 식민주의를 지지하는 데 앞서 제기된 주장 외에도, 독일은 식민지에서 노예 무역을 종식시키고 원주민을 무슬림 노예 소유자로부터 해방시킬 의무가 있다고 주장되었다. 이러한 노예 폐지론자의 요구는 명백한 반무슬림 편견을 갖고 있었고, 1888년 동아프리카 해안에서 일어난 아랍 반란을 성전으로 만들었다.[65]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독일 국가의 위신과 독일이 다른 열강과 사회 다윈주의 경쟁을 벌이고 있으며, "늦게 등장한" 독일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주장해야 한다는 믿음이었다.[66]
빌헬름 2세는 독일이 지도자가 아닌 식민지 추종자라는 위치를 한탄했다. 1899년 3월 세실 로즈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이 딜레마를 분명히 말했다. "... 독일은 식민지 사업을 매우 늦게 시작했고, 따라서 모든 바람직한 장소가 이미 점령되어 있다는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67] 새로운 벨트폴리틱("세계 정책") 하에서, "늦게 온 국가"(1897년 12월 6일 베른하르트 폰 뷜로프 재상이 라이히스타크 연설에서 언급)를 위해 "태양 아래 자리"를 추구했는데, 이는 식민지 소유와 다른 식민지 문제에 발언권을 갖는 것을 의미했다.[68] 이 정책은 1884년과 1885년 비스마르크가 추진했던 실용적인 식민지 정책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며 국가 위신에 초점을 맞추었다.
비스마르크의 은퇴 후 빌헬름 2세는 "세계 정책(Weltpolitik)"을 표방하여 아프리카, 태평양 등에 해외 식민지를 건설하고 적극적인 해외 진출을 했다.
4. 독일 식민 통치의 특징
독일 식민 통치는 여러 특징을 보였다.
1867년 북독일 연방 헌법은 '식민지화'를 연방의 감독 하에 있는 영역 중 하나로 규정했고, 이는 1871년 제국 헌법에도 반영되었다. 그러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식민지 획득에 반대하며, "나는 식민지를 위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반복해서 말했다.[16] 그는 독일 기업이 영토 점령 없이 경제적으로 진출하는 비공식적 상업 제국주의를 선호했다.[21]
1830년대부터 독일 선박은 아프리카와의 무역에 참여하여 뵈어만-린네(Woermann-Linie)의 팩토리를 카메룬에 설치하는 등 거점을 마련했고, 1850년대부터 독일 회사가 남태평양에서 무역과 플랜테이션 농업을 시작했다. 이러한 경제 사업은 독일 식민지 전환의 기반이 되었다.[10]
코코야자의 커피, 카카오, 면화, 그리고 제품은 다른 독일 열대 식민지와 마찬가지로, 토고에서 독일과 국제 시장을 위해 생산된 거의 유일한 상품이었다.
독일은 군사력을 동원한 불평등 조약을 통해 식민지를 획득했다. 원주민 통치자들은 낮은 가격에 영토를 양도했고, 조약 내용은 언어 장벽으로 인해 불분명했다. 식민지 회사에 모든 권한을 부여하고, 국가의 재정적, 행정적 참여는 최소화되었다.[55]
독일 식민지 중 토고랜드와 독일령 사모아만이 수익성이 있었고, 전체적으로는 독일에 재정적 손실을 가져왔다.[75]
4. 1. 강압적 통치와 원주민 저항
독일은 원주민들을 강압적으로 통치했고, 이에 원주민들은 저항했다. 독일 식민 통치자들은 통제권을 강압적으로 행사하려 했고, 원주민들은 불평등 조약을 맺도록 강요받았다.[76] 이로 인해 지역 부족과 원주민들은 영향력과 권력을 잃었고, 결국 일부는 노예 노동자가 되었다. 독일은 원주민들을 상대로 여러 차례 군사적, 집단 학살적 작전을 감행했다.[77] 식민 당국과 정착민들은 아프리카 원주민을 하위 계급으로 간주하고, 그들의 땅을 빼앗아 정착민과 회사에 넘겨주고, 남은 인구는 보호 구역에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독일은 백인이 주로 거주하는 식민지, 즉 "새로운 아프리카 독일"을 건설할 계획이었다.[78]독일은 물질적, 기술적으로 우월했지만 군사적 주둔은 최소한이었기 때문에, 원주민들은 대체로 게릴라 전술을 채택했다. 독일 식민군은 초토화 작전을 통해 마을을 파괴하고, 경제 활동을 방해했으며, 야생 동물로부터의 보호를 거부했다. 이를 통해 인구를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으로 내몰았고,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이러한 의도적인 전략을 통해 독일은 전체 지형에 지속적인 변화를 일으켜 수십 년 동안 사람이 살 수 없게 만들었다.[79]
이러한 지역 인구에 대한 조치 중 가장 중요한 것은 1901~1902년 의화단 운동 이후 중국에 대한 보복,[80] 1904~1905년의 헤레로족과 나마족 집단 학살, 그리고 1905~1907년의 마지마지 반란 진압이었다.


1897년 남서 아프리카에서 가축 질병이 발생한 후, 헤레로는 생존한 가축을 식민지 전역으로 분산시켰다. 그러나 이 목초지는 정착민들이 매입한 곳이었고, 정착민들은 헤레로족의 가축을 자신들의 소유라고 주장했다. 1904년, 상황은 헤레로족과 나마의 반란으로 확대되었고, 인력이 부족한 독일 남서 아프리카 제국 보호군은 이를 진압할 수 없었다. 이에 독일 정부는 해군 원정군을 파견했고, 이후 보호군을 증원했다. 총 15,000명가량의 로타르 폰 트로타 중장은 1904년 8월 워터버그 전투에서 헤레로족 군대를 격파했다. 폰 트로타는 생존한 헤레로족을 황무지로 몰아내는 "섬멸 명령"(''Vernichtungsbefehl'')을 내렸다. 1904년 11월 말까지 생존자 1,800명이 영국 베추아날란드에 도착했고, 수천 명이 더 남서 아프리카의 최북단 지역과 사막으로 도망쳤다. 헤레로족 인구는 50,000명으로 추산되며, 이 중 약 절반이 1908년까지 사망했다.[81] 나마족은 10,000명이 사망했는데, 이 역시 인구의 약 절반에 해당한다. 나마족은 1904년 말까지 헤레로족에 대항하여 독일 측에서 싸웠다.[82] 이는 20세기의 첫 번째 집단 학살이었다.[83][84][85][86]
마지마지 반란은 1905~1906년 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 발생했으며, 이 반란 진압으로 약 100,000명의 원주민이 사망했는데, 그중 많은 수가 독일의 초토화 작전으로 인한 기근으로 사망했다.
토고랜드는 실제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유럽의 일부에서는 이곳을 독일의 "모델 식민지"라고 불렀다.[87] 그러나 이곳 역시 피를 흘렸다. 독일은 강제 노동과 가혹한 처벌을 통해 아프리카인들을 통제했다.[87]
반대 의견을 최소화하기 위해 독일 식민 언론법(1906~1912년 작성)은 검열과 무단 출판 금지를 통해 호전적인 정착민 언론을 통제했다. 그러나 토고랜드에서는 아프리카 작가들이 인접한 영국 골드 코스트 식민지에서 비판적인 기사를 출판함으로써 이 법을 피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동조자들의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했다.[88] 1904년 헤레로 반란에 대한 폭로 기사가 독일 전역의 인쇄 매체에 실렸고, 이는 헤레로 전쟁으로 이어져, 헤레로족 인구의 50%에서 70%가 사망한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오늘날의 나미비아)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헤레로족과 나마족 집단 학살로 알려져 있다.[89] 1905년 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마지마지 봉기의 진압 역시 널리 보도되었다. 1906년 말 식민지 분쟁에 대한 추가 자금 지원을 제공하기 위한 추가 예산안이 거부되면서 국회가 해산되고 새로운 선거가 치러졌다.[90] "독일에서 반식민주의 정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고", 1907년 1월 ''Reichstag'' 선거, 소위 "호텐토트 선거"에서 높은 투표율을 기록하는 결과를 낳았다.[91]
4. 2. 경제적 착취
뵈어만-린네(Woermann-Linie)의 팩토리가 카메룬에 있었다. 1830년대부터 독일 선박은 아프리카와의 무역에 참여하여 그곳에 팩토리를 설립했다. 1850년대부터 독일 회사가 남태평양에서 무역과 플랜테이션 농업을 시작했다. 이러한 경제 사업 중 일부는 결국 이 지역을 독일 식민지로 전환하는 기반을 형성했다.[10]1867년 북독일 연방 헌법 4.1조는 "식민지화"를 "연방의 감독" 하에 있는 영역 중 하나로 선언했으며, 이는 1871년에 제정된 제국 헌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868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전쟁부 장관 알브레히트 폰 론에게 보낸 편지에서 식민지 획득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했다.[15] 그는 또한 반복해서 "... 나는 식민지를 위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16]
1873년 공황 이후 독일에서 감소하는 소비자 수요를 대체하기 위해, 식민지가 일단 개발되면 독일 산업 제품을 위한 고정 시장을 제공할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9] 비스마르크는 이러한 주장에 반대했고, 독일 기업이 유럽 외 지역과 수익성 있는 무역을 수행하고 영토 점령이나 국가 건설 없이 경제적 진출을 하는 비공식적인 상업적 제국주의를 선호했다.[21] 비스마르크와 라이히슈타크의 많은 대표들은 단순히 넓은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식민지 정복을 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22]
이러한 지역은 군사력 시위 이후 매우 불평등한 조약을 통해 독일의 소유가 되었다. 원주민 통치자들은 종종 법적 권리가 없는 광대한 지역을 보호와 터무니없이 낮은 구매 가격에 대한 모호한 약속과 교환하여 양도했다. 조약의 세부 사항은 언어 장벽으로 인해 종종 그들에게 불분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식민주의자들과의 긴 협상과 조약 서명이라는 의례적인 행위가 그들의 권위를 엄청나게 강화했기 때문에 이러한 거래에 참여했다. 이러한 조약은 독일 정부의 승인을 받았으며, 궁극적인 주권과 몇 가지 명시되지 않은 개입 권한만을 유지하면서 식민지 회사에 모든 권한을 부여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식민지에 대한 국가의 재정적 및 행정적 참여는 최소한으로 유지되었다.[55]
독일 식민지 중 토고랜드와 독일령 사모아만이 수익성이 있고 자급자족하게 되었고, 전체 식민지에 대한 대차대조표는 독일에게 재정적 순손실을 나타냈다.[75]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의 지도부는 이러한 소유물의 재정적 지원, 유지, 개발 및 방어에 국가를 헌신했다.
4. 3. 인종 차별 정책
독일 식민지에서 독일인과 원주민 간의 관계는 법적, 사회적으로 불평등했다. 두 개의 별도 법률 시스템이 존재했으며, 사람들은 인종적 기준에 따라 한 시스템에 할당되었다. "백인"(즉, 식민지의 독일 및 유럽 거주자)은 소수의 특권 계층을 형성했으며, 식민지 전체 인구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149] 그들은 일반적인 독일법에 따른 모든 권리, 특권 및 의무를 누렸다. 독일인이 아닌 유럽인들은 법적으로 그들과 동등했다.[150]독일 식민 제국에 거주하는 약 1,300만 명의 "원주민"은 1913년에 독일 시민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제국 시민으로 간주되지 않고, 독일의 신하나 보호 대상일 뿐이었다. 독일 법은 개별 법규에 명시된 경우에만 그들에게 적용되었다. 특히, 그들은 사법 시스템에서 배제되었다. 식민 당국의 결정이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할 권리가 없었다. 독일령 동아프리카에 거주하던 아랍 및 인도 출신 약 1만 명의 사람들에게는 총독이 특별 규정을 발령할 수 있었다.[151] 그러나 보호령법에 따르면 "원주민"이 제국 시민권을 부여받고 자녀에게 그 시민권을 물려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혼혈 결혼의 자녀가 자동으로 독일 시민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독일 국가"와 "인종적 순수성"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되었다.[152] 인구 집단 간의 성적 관계가 점점 더 흔해지면서, 1905년부터 식민지에서는 "백인과 원주민 간의 결혼"을 점차 금지했다. 혼외 성관계는 "Kaffir화"(Verkaffirung)로 이어지면서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었다. 1912년, 제국 의회는 혼혈 가능성에 대한 토론을 벌였고, 대부분의 정당은 혼혈을 합법화해야 한다고 동의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법률은 제정되지 않았다.[153] 이 금지 조항은 독일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효력을 유지했다.
식민 당국과 정착민 모두 아프리카 원주민을 하위 계급으로 간주하고, 그들의 땅을 빼앗아 정착민과 회사에 넘겨주고, 남은 인구는 보호 구역에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독일은 백인이 주로 거주하는 식민지, 즉 "새로운 아프리카 독일"을 건설할 계획이었다.[78]
헤레로족 학살 기간 동안 독일 과학자 오이겐 피셔는 헤레로족 어린이와 헤레로 여성과 독일 남성 사이의 혼혈 어린이를 실험 대상으로 사용하여 인종에 대한 의학 실험을 수행하기 위해 강제 수용소에 도착했다.[160] 테오도어 몰리슨과 함께 그는 또한 헤레로족 수감자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161] 이러한 실험에는 불임 시술, 천연두, 티푸스, 결핵 주입이 포함되었다.[162] 수많은 혼혈아의 발생은 "인종 순수성"을 유지하는 데 우려를 표명한 독일 식민 정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162] 오이겐 피셔는 310명의 혼혈아를 연구하여 그들을 "열등한 인종적 질"을 가진 "레호보스 잡종"이라고 불렀다.[162] 피셔는 또한 그들에게 머리 및 신체 측정, 눈 및 머리카락 검사와 같은 수많은 인종적 테스트를 실시했다. 그의 연구 결론에서 그는 "인종 개념을 철저히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소위 "열등한 인종"의 학살을 옹호했다.[162]
사회 진화론은 "인간 집단과 인종이 찰스 다윈이 자연의 식물과 동물에서 인식한 것과 동일한 자연 선택 법칙의 적용을 받는다"는 이론이다.[165] 수많은 역사가들에 따르면, 지식인 엘리트가 발전시킨 독일 민족주의의 중요한 이념적 구성 요소는 사회 진화론이었다.[166] 이는 프랑스 제3공화국과 대영 제국과의 세계 강국 경쟁을 목표로, 독일의 세계 경제 및 군사 강국으로서의 자신감을 북돋았다. 1884년부터 1914년까지의 독일 아프리카 식민 통치는 '타자'로서 원주민의 이미지를 구축함으로써 정당화된 민족주의와 도덕적 우월성의 표현이었다. 독일 식민주의는 '문화'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억압적인 폭력을 사용하는 특징을 보였다. 그 기법에는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의 집단 학살이 포함되었다.[167] 또한, 역사학자 미하엘 슈베르트에 따르면, 지식인들 사이에서 사회 진화론이 널리 받아들여진 것은 '적자 생존'의 문제로서 독일의 식민지 획득 권리를 정당화했다.[168][169]
5. 제1차 세계 대전과 식민지 상실
베르사유 조약 체결과 함께, 국제 연맹 제22조에 따라 독일 식민지는 국제 연맹 위임 통치령으로 전환되어 벨기에, 영국 및 일부 영국 자치령, 프랑스, 일본에 분할되었으며, 독일로의 반환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결정되었다. 이는 제119조에 의해 보장되었다.[114]
아프리카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 카메룬과 토고랜드를 분할했다. 벨기에는 독일령 동아프리카 북서부의 르완다-우룬디를 획득했고, 영국은 이 식민지의 훨씬 더 큰 영토를 차지하여 남아프리카에서 이집트까지 이어지는 영국령 체인의 "잃어버린 연결고리" (케이프에서 카이로까지)를 확보했다. 포르투갈은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작은 조각인 키옹가 삼각지를 받았다. 독일령 남서아프리카는 남아프리카 연방의 위임 통치령으로 편입되었다.[115] 1914년 1,250만 명의 인구 중 42%는 영국과 그 자치령의 위임 통치령으로, 33%는 프랑스로, 25%는 벨기에로 이관되었다.[116]
태평양에서 일본은 적도 북쪽의 독일령 섬들(마셜 제도, 캐롤라인 제도, 마리아나 제도, 팔라우)과 중국의 자오저우만을 획득했다. 독일령 사모아는 뉴질랜드에, 독일령 뉴기니, 비스마르크 제도 및 나우루[117]는 호주에 위임 통치령으로 할당되었다.[118]
구 독일 식민지에 대한 대리 책임을 백인 정착민 자치령에 부여한 것은 당시 영국 정부에게 가장 편리한 선택이었으며, 영국을 위해 그리고 영국의 요청에 따라 군사적 개입을 통해 "크고 긴급한 제국적 봉사"를 수행한 자치령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었다.[119] 이는 또한 영국 식민지가 자체 식민지를 갖게 되었음을 의미했는데, 이는 파리 회의에서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연방의 총리인 W. M. 휴즈, 윌리엄 매시, 루이 보타에 의해 매우 큰 영향을 받았다.[120] 국제 연맹 규약에 구현된 "자기 결정"의 원칙은 이러한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졌다".[121]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의심을 완화"하기 위해, 점령된 적국 영토를 소유물이 아닌 "성스러운 신탁"으로 보유하는 장치인 "위임 통치령" 시스템이 영국 전쟁 내각에 의해 (프랑스 및 이탈리아와 함께) 작성되어 합의되었다.[122] 그러나 "전 독일 식민지의 궁극적인 독립을 예상하기는커녕, 파리 회의의 연합국 정치인들은 1919년을 제국 시대의 종말이 아닌 갱신으로 간주했다." 심의 과정에서 영국 "전쟁 내각은 모든 곳의 원주민들이 영국 통치를 선택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내각은 미국이 제국을 "땅을 삼키는 문어"[123]이자 "탐욕스러운 영토적 식욕"을 가진 존재로 여겼기 때문에 "독일 식민지에 대한 정책이 영토 확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필요성"을 인정했다.[124]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국제 연맹을 "탐욕스러운 정복자"에 의해 점령된 [독일] 식민지에 대한 "'잔여 신탁자'"로 보았다.[125] 승전국들은 독일의 해외 영토를 유지했고, 호주, 벨기에, 영국, 프랑스, 일본, 뉴질랜드, 포르투갈 및 남아프리카의 통치가 독일의 통치보다 우월하다고 믿었다.[126] 수십 년 후, 당시 존재했던 식민 제국들이 붕괴되는 동안, 아프리카인과 아시아인들은 연합국이 독일 식민 통치에 반대하여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주장을 인용하며, 이제 단순히 "스스로 설" 것을 요구했다.[127]
6. 독일 식민지 유산과 과거사 청산 문제
독일의 해외 식민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 패배 이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해체되었다. 독일 식민지는 국제 연맹 위임 통치령으로 전환되어 벨기에, 영국, 프랑스, 일본 등에 분할되었다.[114] 아프리카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 카메룬과 토고랜드를 분할했고, 벨기에는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일부를 획득했다. 태평양에서는 일본이 적도 북쪽의 독일령 섬들을, 뉴질랜드와 호주가 각각 독일령 사모아와 독일령 뉴기니 등을 차지했다.[118]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국제 연맹을 독일 식민지에 대한 "잔여 신탁자"로 보았고,[125] 승전국들은 독일의 통치보다 자신들의 통치가 우월하다고 믿었다.[126] 그러나 훗날 식민 제국들이 붕괴되면서 아프리카와 아시아인들은 연합국이 독일 식민 통치에 반대하며 사용했던 주장들을 인용하며 독립을 요구했다.[127]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에서는 식민지 강탈이 불법이라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1919년 바이마르 국민 의회의 거의 모든 정당이 식민지 반환을 요구하는 결의안에 찬성했다.[128] 최근에는 독일의 식민주의적 잔혹 행위와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대인, 로마인 등에 대한 처우를 연결하는 "연속성 테제"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독일의 남서 아프리카에서의 역할이 인종적 우월성 강조로 이어져 나치에 의해 이용되었다고 주장한다.[172]
다른 식민 제국들과 달리 독일은 옛 식민지에 자국의 언어, 제도 등의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현재 유럽 외 지역에서 독일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국가는 없지만, 나미비아에서는 나미비아의 독일어가 공식 언어로 인정받고 있으며, 독일식 지명과 건축물이 남아 있다. 또한 3만 명의 독일계 나미비아인이 거주하고 있다.
6. 1. 전후 독일의 식민지 반성과 보상 노력
제1차 세계 대전 패배 이후 독일의 해외 제국은 해체되었다. 베르사유 조약 제22조에 따라 독일 식민지는 국제 연맹 위임 통치령으로 전환되어 벨기에, 영국 및 일부 영국 자치령, 프랑스, 일본에 분할되었으며, 독일로의 반환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제119조에 의해 보장되었다.[114]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 전쟁 책임을 부여했지만,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연합국의 식민지 몰수를 강탈로 여겼다. 특히 남아프리카 공화국 총리 루이 보타가 연합국이 전쟁 중 독일 식민 제국에 대해 발표한 모든 주장이 예외 없이 근거 없는 날조라고 언급한 후 더욱 그러했다. 독일 식민지 수정주의자들은 "식민지 죄악 신화"에 대해 이야기했다.[134][135][136]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에도 식민지 반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당시 쾰른 시장이었던 콘라트 아데나워가 그중 한 명이었다. 아데나워는 1931년부터 1933년까지 독일 식민 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1924년부터 독일 연방 외무부에는 토고의 전 총독이었던 에드문트 브뤼크너가 이끄는 식민지 사무소가 설치되었다. 브뤼크너의 정책은 토고, 카메룬, 독일령 동아프리카를 반환받는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130] 1925년에는 상위 단체인 식민제국협회('Korag')가 설립되었고, 여기에서 1933년 국가식민동맹이 등장했다. 또한 1925년에는 셰이데만 내각의 식민부 장관이었던 요하네스 벨이 나치당에서 SPD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치적 스펙트럼의 구성원을 포함하는 "초당적 식민 연합"을 설립했다.[131]
아돌프 히틀러는 총리 연설에서 협상 카드로 잃어버린 식민지의 반환을 언급하기도 했지만, 그의 실제 목표는 항상 동유럽이었다.[137][138] 1934년, 나치당은 하인리히 슈니와 프란츠 리터 폰 에프가 이끌었던 자체 식민 정책국을 설립했다. 1936년에 설립된 제국 식민 연맹은 프란츠 리터 폰 에프 아래 모든 식민 조직을 흡수했으며, 친 식민 정서를 높이고 과거 독일 식민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조직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전후 독일 정치에서 이전 독일 식민지의 회복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서독의 일부 정치인들은 특히 탕가니카 또는 토고의 신탁 통치와 같은 식민 시대 말기 또는 탈식민적 사업을 제안했다.[176]
1904년부터 1908년 사이에 독일이 통치했던 남서 아프리카에서 수천 명의 조상이 살해당한 헤레로와 나마 대표들은 미국의 법원에서 독일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2017년 1월, 독일 정부를 상대로 한 집단 소송이 뉴욕시 법원에 제출되었다. 청구 진술서에는 1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언급되었다. 2017년 3월, 나미비아 정부가 헤이그의 국제 사법 재판소에서 독일을 상대로 소송을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손해 배상은 300억 달러 규모로 요구되었다고 한다.[180]
6. 2. 식민지 유산에 대한 지속적인 논쟁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 영국 식민지 관리들은 독일인들을 "식민지 적성"이 부족하다고 평가했지만, 그들의 식민지 행정은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우수하다고 보았다.[108] 1914년 이전 영국과 독일은 서로에게 화해적인 태도를 보였고, 외무장관 에드워드 그레이 경은 "친독일적 정신으로 아프리카 지도를 연구"하려 했다.[109] 그러나 1914년 초, 그레이와 H. H. 애스퀴스 총리에 대한 조언은 독일의 확장을 막는 방향으로 굳어졌다.[110]1914년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과 그 동맹국들은 즉시 독일 식민지를 공격했다. 영국은 독일 식민지가 위협적이며, 독일이 잔혹한 식민 강국이라는 입장을 내세웠다.[111][112] 독일 해외 식민지는 연합군에게 함락되기 시작했고, 토고가 가장 먼저 함락되었다. 파울 폰 레토-포어베크 장군이 이끌던 독일령 동아프리카만이 제1차 세계 대전 동아프리카 전역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저항했다.
태평양에서 영국의 동맹국 일본은 마리아나 제도, 캐롤라인 제도, 마셜 제도 등 독일의 섬 식민지를 점령했다.[113] 독일령 사모아는 뉴질랜드에게, 노이포메른은 오스트레일리아에게 함락되었다.
얀 스머츠는 독일의 세계 권력 계획과 군사화를 경고하며, 독일이 서구 문명을 위협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경고는 언론에 반복 보도되었고, 독일 식민지를 돌려주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113]
베르사유 조약 제22조에 따라 독일 식민지는 국제 연맹 위임 통치령으로 전환되어 벨기에, 영국, 영국 자치령, 프랑스, 일본에 분할되었으며, 독일로의 반환은 금지되었다(제119조).[114]
아프리카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 카메룬과 토고랜드를 분할했다. 벨기에는 독일령 동아프리카 북서부의 르완다-우룬디를, 영국은 더 큰 영토를 획득했다. 포르투갈은 키옹가 삼각지를, 독일령 남서아프리카는 남아프리카 연방의 위임 통치령이 되었다.[115] 1914년 기준, 독일 식민지 인구의 42%는 영국과 그 자치령, 33%는 프랑스, 25%는 벨기에로 이관되었다.[116]
태평양에서 일본은 적도 북쪽의 독일령 섬들과 중국의 자오저우만을 획득했다. 독일령 사모아는 뉴질랜드, 독일령 뉴기니, 비스마르크 제도, 나우루는[117] 호주에 위임 통치령으로 할당되었다.[118]
구 독일 식민지에 대한 책임 부여는 영국에게 편리한 선택이자, 영국을 위해 군사적 개입을 수행한 자치령에 대한 보상이었다.[119] 이는 영국 식민지가 자체 식민지를 갖게 되었음을 의미했고, 빌리 휴즈, 윌리엄 매시, 루이 보타 등 자치령 총리들의 영향이 컸다.[120] "자기 결정" 원칙은 이들 식민지에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었다.[121]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의심을 완화하기 위해 "위임 통치령" 시스템이 작성되었다.[122] 그러나 연합국 정치인들은 1919년을 제국 시대의 갱신으로 간주했다. 영국은 원주민들이 영국 통치를 선택할 것이라 확신했지만, 미국이 영국을 "탐욕스러운 영토적 식욕"을 가진 존재로 여겼기에, 독일 식민지에 대한 정책이 영토 확대를 위한 것이 아님을 증명할 필요성을 인정했다.[124]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국제 연맹을 독일 식민지에 대한 "'잔여 신탁자'"로 보았다.[125] 승전국들은 독일의 해외 영토를 유지했고, 자신들의 통치가 독일의 통치보다 우월하다고 믿었다.[126] 식민 제국들이 붕괴되는 동안, 아프리카인과 아시아인들은 연합국이 독일 식민 통치에 반대하여 사용했던 주장들을 인용하며 "스스로 설" 것을 요구했다.[127]
최근 학자들은 독일의 식민주의적 잔혹 행위와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대인, 로마인, 폴란드인, 러시아인에 대한 처우를 연결하는 "연속성 테제"에 대해 논쟁을 벌여왔다. 일부 역사가들은 독일이 남서 아프리카에서 수행한 역할이 인종적 우월성 강조로 이어졌고, 이는 나치에 의해 이용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독일 식민주의의 제한적인 성공이 중앙 및 동유럽으로 독일 팽창주의의 초점을 이동하는 결과를 낳았고, 미텔유럽 계획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즉, 독일 식민주의는 유럽 대륙으로 전환되었다.[172]
황제 시대에는 소수 견해였지만, 이 아이디어는 에리히 루덴도르프와 그의 활동 하에 발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러시아 제국의 패배 이후, 독일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통해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고, 오베르 오스트와 같은 행정 구역을 창설했다. 이곳에서도 독일 정착이 시행될 예정이었고, 정부 조직은 현지 민족 다양성을 통제하면서 독일의 필요에 봉사하도록 개발되었다. 중앙 유럽과 동유럽 지역은 독일 정착에 더 나은 잠재력을 제공했다.[173] 다른 학자들은 회의적이며 연속성 테제에 도전한다.[174] 단 한 명의 전직 식민지 관리만이 나치 행정 계층에서 중요한 지위를 얻었다.[175]

전후 독일 정치에서 이전 독일 식민지의 회복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서독의 일부 정치인들은 식민 시대 말기 사업을 제안했다.[176] 아프리카 독립 운동 내에서도 이러한 제안들은 탈식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와 공존했다. 1952년 말, 에웨의 구성원들은 유엔 신탁통치이사회에 토고랜드 재통합을 제안하는 각서를 제출했다.[177] 이 계획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1960년, 아돌프 프리드리히 추 메클렌부르크 공작은 토고 독립 기념식에 초청받았다.[178]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식민지 전쟁 연맹을 부활하려는 노력으로 1955년 함부르크에 "구 식민지 군인 연합"이 설립되었다.
보호령법의 마지막 잔재는 1975년 식민지 협회의 법적 만료와 1992년의 재정 조정까지 유지되었다. 식민지 역사는 식민지 기념물, 거리 이름, 건물들에 의해 계속 기념되고 있다. 많은 곳에서 이는 문화적 기억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고, 수정 또는 명칭 변경 요구가 제기되었다.[179]
1904년부터 1908년 사이에 독일이 통치했던 남서 아프리카에서 수천 명의 조상이 살해당한 헤레로와 나마 대표들은 미국에서 독일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2017년 1월, 집단 소송이 뉴욕시 법원에 제출되었다. 청구 진술서에는 1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언급되었다. 2017년 3월, 나미비아 정부가 헤이그의 국제 사법 재판소에서 독일을 상대로 소송을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손해 배상은 300억달러 규모로 요구되었다고 한다.[180]
연방 시민 교육국이 2012년에 식민주의를 주제로, 2019년에 독일 식민지 역사를 주제로 출판한 편집본은 "식민주의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부활"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181][182] 2015년, 하인리히 하이네 뒤셀도르프 대학교와 카메룬의 드상 대학교는 "식민지적 연계"에 관한 공동 연구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이는 2017년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전시회로 이어졌다.[183][184] 그 후, 전시회는 드상과 여러 독일 도시를 순회하며 지역 관련 내용이 추가되었다. 마지막으로, 전시회에 관한 책자가 2019년에 출판되었다.[185][186]
다른 식민 제국과는 달리, 독일은 자국의 언어, 제도 또는 관습의 흔적을 옛 식민지에 거의 남기지 않았다.
현재 유럽 외 지역에서는 독일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국가는 없지만, 나미비아에서는 나미비아의 독일어가 공식 언어로 인정받고 있으며, 독일식 지명과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3만 명의 독일계 나미비아인이 이 나라에 거주하고 있다. 1967년부터 1989년까지의 남아프리카 국경 전쟁 동안 동독 슈타지가 SWAPO 게릴라를 은밀히 지원한 것은 장기적인 유산으로 남아, 1989년 평화 혁명 이전 냉전 시대 동독에서 아이로 자란 흑인 인구 중 상당수가 독일어를 사용하는 소수 민족으로 남아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탕가니카 독립운동가들 중 상당수는 동아프리카 전역에서 빌헬름 2세를 위해 싸웠던 슐츠트루페 아스카리의 아들들이었다. 레오나드 모즐리와 로버트 가우디는 그들의 전기 작가들에 따르면 이들 활동가들이 아프리카의 탈식민지화 이전 수십 년 동안 서독을 방문하여 아버지들의 전 지휘관인 파울 폰 레토-보르벡의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187]
''슈피겔''의 기자 하인츠 호네와 헤르만 졸링에 따르면, 1918년 독일 식민 제국이 조기에 멸망한 것은 서독의 냉전 외교 정보 기관인 연방정보국(BND)과 창설 책임자 라인하르트 겔렌에게 탈식민지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의 새롭게 독립한 정부들을 다루는 데 상당한 이점을 가져다주었다. 이 때문에 많은 제3세계 군대와 외교 정보 기관이 BND 군사 고문에 의해 훈련받았다. BND의 제3세계에서의 비밀 활동은 겔렌 장군이 현지 정부를 반소련적이고 친 NATO 입장을 취하도록 유도하고 서독의 경제 기적을 장려하고 지원하기 위해 사용하려 했던 우호적 관계의 토대를 마련했다.[188]
동시에, 서독의 괴테 인스티튜트가 전 세계에서 독일어 학습과 문화 외교를 장려하기 위해 설립되었을 때, 첫 해외 지점은 1961년 마지막 황제의 옛 아프리카 식민지인 카메룬과 토고에 설립되었다. 탄자니아는 같은 해 대영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직후 괴테 인스티튜트 지점을 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르완다에서는 독일 식민 통치가 향수 어린 시선으로 미화되었고, 이 지역의 후속 통치자인 벨기에 식민 제국과 긍정적으로 비교되었다. 르완다 독립 직후 서독과의 긴밀한 관계가 회복되었고, 독일 군사 고문들이 르완다군 훈련을 도왔다. 괴테 인스티튜트는 2009년 수도 키갈리에 문을 열었고, 이후 별도의 건물로 확장되었다.[189]
독일어는 세 국가의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연구 대상이다. 게다가, 제국 독일 통치의 지속적인 유산은 스와힐리어의 탄자니아 방언에 있는 상당수의 독일어 차용어에 남아있다. 예로는 'shule'(학교), 'hela'(돈) 및 'nusu kaputi'(문자 그대로: 반쯤 부서짐 = 전신 마취)가 있다.[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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