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얀센주의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얀센주의는 17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종교 운동으로,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을 바탕으로 인간의 원죄와 은총의 역할을 강조하며 자유 의지에 대한 비관적인 시각을 보였다. 코르넬리우스 얀센의 저작 《아우구스티누스》에서 그 사상이 비롯되었으며, 얀센주의는 은총의 효력과 예정설을 옹호하며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대립했다. 18세기에는 파스키에 케넬의 저작이 논란을 일으키고, 교황 칙서 《Unigenitus》가 반포되면서 얀센주의는 탄압받았지만, 프랑스 혁명 시기에는 혁명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얀센주의는 이후 금욕주의적인 삶의 방식과 도덕적 엄격성을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신학용어 - 하나님께 감사
    '하나님께 감사'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라는 뜻의 라틴어 번역어로, 기독교 전례에서 감사의 표현으로 사용되며 중세 시대 일상생활에서도 사용되었고, 현대에는 종교적 의미를 넘어 긍정적 사고와 감사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인식된다.
  • 프랑스 왕국 - 삼부회
    삼부회는 프랑스에서 성직자, 귀족, 평민 대표로 구성된 신분제 의회로, 국왕의 과세 동의 기능을 수행하며 왕권 강화에 기여했으나, 프랑스 혁명 직전 소집 후 의결 방식 갈등으로 국민 의회 결성되어 해체되고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 프랑스 왕국 - 오랑주 공국
    오랑주 공국은 프랑스 남동부에 위치한 역사적인 공국으로, 오라녜-나사우 가문과 관련되어 네덜란드 독립 투쟁과 연관되었으나 1713년 프랑스에 할양되었고, 현재 네덜란드 왕세녀의 칭호로 그 유산이 이어지고 있다.
얀센주의

2. 정의

'얀센주의'라는 용어는 정작 '얀센주의자'로 불린 이들이 스스로 사용하기를 거부했던 명칭이다.[5] 이들은 역사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일치를 지속적으로 선언했다. 현대 얀센주의 연구의 선구자인 빅토르 카리에르(Victor Carrière) 수도원장은 "아마 얀센주의보다 더 복잡한 문제는 없을 것"이라며, 그 지지자들조차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상황에 따라 입장을 수정했기 때문에 그 역사를 완전히 파악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5] 일부 역사가들은 이를 "역사적 수수께끼"로[3], 다른 이들은 "변화하는 상황에 대한 적응"으로 보기도 한다. 얀센주의는 19세기까지 로마 가톨릭 교회와 병행하며 발전했지만, 그 안에서 통일된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코르넬리우스 얀센 (1585–1638), 루뱅 대학교 교수 및 총장이자 얀센주의 이름의 유래


얀센주의는 우선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 특히 인간의 원죄와 은총의 필요성에 대한 그의 사상을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과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의 신학 논쟁 속에서 옹호하려는 시도에서 시작되었다.[6] 얀센주의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하여, 신의 은총 없이는 인간이 선으로 향할 수 없다고 보았다. 또한 장 칼뱅 사상의 영향을 받아 구원받도록 예정된 인간은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에 물들어 있으며, 은총의 인도 없이는 선을 행할 수 없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죄의 상태에서 예수의 몸인 성체를 받는 것은 매우 두렵고 어려운 일로 간주되었고, 그 결과 얀센주의의 영향을 받은 신자들은 성체 배령 횟수를 현저하게 줄이는 경향을 보였다.

후기 로마 가톨릭 교리는 얀센주의가 자유 의지가 은총을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역할을 부정한다고 보아 '이단'으로 규정했다. 얀센주의는 신이 부여하는 은총은 인간이 저항할 수 없으며 인간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주도권은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을 요구한다"고 명시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입장과 대치된다.[9] 실제로 1653년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교서 Cum occasione를 통해 얀센주의의 핵심 주장 다섯 가지를 단죄했는데, 특히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신의 계명을 지킬 수 없다는 점, 타락한 인간이 내적 은총에 저항할 수 없다는 점, 자유 의지가 없는 상태에서도 공로를 세울 수 있다는 점 등이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얀센주의는 단순한 신학적 교리를 넘어 복합적인 운동으로 발전했다. 울트라몬타니즘과 교황 권위에 대한 반발은 얀센주의에 갈리아주의적 성격을 부여했다. 17세기와 18세기 프랑스의 절대주의 체제 하에서는 종교적 반대가 체제 전반에 대한 반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군주의 우려 속에 탄압을 받았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얀센주의가 권력에 저항하고 파르르망의 권리를 옹호하는 정치적 측면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8세기 프랑스에서는 세속주의 사회 구성원들이 운동에 참여하면서 도해주의나 생-메다르의 경련자들 현상 같은 대중적이고 기적적인 요소가 나타나기도 했으며,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오스트리아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근대성에 더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주로 과거의 입장을 고수하며 로마 가톨릭 교회의 새로운 변화에 맞서는 보수적인 성격이 강해졌다.

얀센주의 역사가 오귀스탱 가지에(Augustin Gazier)는 모든 얀센주의자들의 공통점으로 기독교의 엄격한 형태에 삶 전체를 맞추려 했으며, 교회 내부의 발전을 가혹하게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교회 자체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충성심을 유지했다는 점을 꼽았다.[7] 더 넓은 관점에서 마리-조제 미셸(Marie-José Michel)은 얀센주의자들이 로마 중심의 울트라몬탄 계획과 부르봉 절대주의 건설 사이의 빈 공간을 차지하며 프랑스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운동이었으며, 프랑스 혁명과 제1차 바티칸 공의회 때까지 그 생명력을 유지했다고 평가했다.[8]

결론적으로 얀센주의는 특정 시점의 고정된 신학 교리 체계라기보다는, 초기 근대 프랑스와 유럽의 로마 가톨릭교회 내에서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화하며 신학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다양한 양상을 보인 복합적인 운동으로 이해될 수 있다.

3. 기원



얀센주의는 17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 내에서 발생한 신학 운동으로, 네덜란드 출신의 신학자이자 이프르의 주교였던 코르넬리우스 얀센(Cornelius Jansen, 1585-1638)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이 운동의 사상적 뿌리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에 있으며, 인간의 원죄로 인한 타락과 자유 의지의 무력함, 그리고 구원을 위한 신적 은총의 절대적 필요성을 강조한다.[6] 이는 16세기 루뱅의 신학자 미셸 바이우스가 주장했던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얀센주의의 핵심 텍스트는 얀센이 사후 1640년 출판된 저서 《아우구스티누스 - 인간 본성의 건전함에 대하여》(Augustinus; humanae naturae sanitate|아우구스티누스; 후마나이 나투라이 사니타테la)이다. 이 책은 출판 직후 큰 파장을 일으켰다. 얀센의 친구였던 장 뒤베르지에 드 오란느(Jean Duvergier de Hauranne, 1581-1643), 통칭 '생 시랑 수도원장'(Abbé de Saint-Cyran|아베 드 생 시랑프랑스어)은 이 책을 프랑스에 소개하고 파리 근교의 포르 루아얄 수도원을 중심으로 얀센주의를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앙투안 아르노와 그의 가문, 그리고 블레즈 파스칼, 장 라신과 같은 인물들이 얀센주의에 동조했다.

그러나 얀센주의의 엄격한 교리, 특히 예정설과 유사하게 구원받는 이가 소수라고 보는 시각과 자유 의지에 대한 비관적 입장은 예수회를 중심으로 강력한 반발을 샀다.[71] 예수회는 얀센주의를 칼뱅주의와 유사한 이단으로 간주하고 비판했다. 이러한 대립 속에서 1649년 소르본 대학의 니콜라 코르네는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논란이 되는 다섯 가지 명제를 추출하여 단죄를 요청했다.

이 문제는 로마 교황청으로 이관되었고, 교황 인노첸시오 10세1653년 교황 교서 《쿠움 오카지오네》(Cum occasione|쿰 오카시오네la)를 통해 이 다섯 명제를 공식적으로 단죄했다.[73] 이에 대해 얀센주의자들은 다섯 명제 자체의 이단성은 인정하면서도, 이 명제들이 얀센의 저서에 실제로 포함되어 있다는 교황의 '사실 판단'(quaestio facti|콰이스티오 팍티la)에는 동의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하며, 교회의 교리적 결정('법규 문제', quaestio juris|콰이스티오 유리스la)과 역사적 사실 판단을 구분해야 한다고 항변했다.[71] 이 '법과 사실'의 구분은 이후 얀센주의 논쟁의 핵심 쟁점으로 부상하며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3. 1.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은총 논쟁

얀센주의는 반종교개혁의 틀 안에서 일어난 신학 학파에서 기원했으며,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수년에 걸쳐 나타났지만, 공의회보다 더 오래된 논쟁에서 비롯되었다. 얀센주의는 코르넬리우스 얀센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지만, 오랜 아우구스티누스 신학 전통과 연결되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 (서기 354–430) 히포의 주교, 교부, 얀센주의의 은총 교리의 시조라고 주장된다.


얀센주의에 기여한 논쟁의 대부분은 신적 은총 (하느님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것)과 구원 과정에서 인간의 자유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5세기에 북아프리카의 주교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을 의지하고 을 실천하며, 따라서 구원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을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영국 수도사 펠라기우스에 반대했다. 이 입장은 신적 은총의 중요성을 축소하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거부하고, 하느님만이 은총을 누구에게 부여하고 거두어들일지 결정하며, 이것이 인간을 구원한다고 선언했다. 인간의 선한 행위나 악한 행위 (따라서 그의 의지와 덕)는 이 과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데, 왜냐하면 전적 타락으로 인해 아담원죄의 결과로 인간의 자유 의지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효력 있는 은총을 통해 인간에게 작용하여 그의 의지를 파괴하지 않고 그를 확실하게 거듭나게 한다.[6] 따라서 인간은 효력 있는 은총의 작용에 의해 그 안에 주입된 선에 대한 저항할 수 없고 지배적인 열망을 받는다.

중세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에 지배를 받아 은총 문제에 대해 인간의 자유에 거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은총과 인간의 자유를 조화시키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주의를 중심으로 사상 체계를 조직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인간의 각 행위에 있어서 신의 작용과 인간의 자유를 모두 긍정했다.[6] 14세기와 15세기의 스콜라 철학자들은 인간 본성에 대한 더 낙관적인 관점으로 아우구스티누스주의에서 벗어났다.[6]

종교개혁은 스콜라 철학을 단절했으며,[6] 마르틴 루터장 칼뱅은 모두 아우구스티누스를 참고했지만 급진적인 견해도 나타냈다. 일부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들에게는 펠라기우스주의에서 과도하게 숭배된 인간의 자유에 반대하여 하느님의 전능성을 긍정하는 것만으로 충분했지만, 루터와 칼뱅은 은총 (하느님이 자유롭게 부여하거나 거부함)이 인간을 구원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 의지는 완전히 부정되었다.[3]

종교개혁에 맞서기 위해 로마 가톨릭 교회는 1547년 트리엔트 공의회 제6차 회의에서 은총과의 관계에 대해 발표하지 않고 자유 의지의 자리를 재확인했다.[6] 그 후, 로마 가톨릭의 입장은 완전히 통일되지 않았으며, 예수회 사제 디에고 라이네스는 비방자들이 펠라기우스주의라고 묘사한 입장을 옹호했다.[6] 실제로 예수회는 과도한 아우구스티누스주의가 구원에서 교회의 역할을 약화시키고 프로테스탄티즘의 거부에 타협할까 봐 우려하여 논쟁을 재개했다.[6]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여파로, 일부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인간에 대해 덜 비관적인 비전을 가지고 있었고 토미즘 신학에 의존하여 구원 과정에서 인간의 자리를 확립하려고 했다. 이는 은총과 자유 의지 사이의 합리적인 타협으로 보였다.[6] 이러한 맥락에서 아퀴나스는 1567년에 교회 박사로 선포되었다.

미셸 드 바 (1513–1589), 아우구스티누스주의 로마 가톨릭 신학자, 그의 신학 체계는 바니아주의로 알려져 있으며 얀센주의의 선구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67년부터 신학적

3. 2. 코르넬리우스 얀센과 《아우구스티누스》

얀센주의는 반종교개혁 시기 로마 가톨릭 교회 내에서 발생한 신학 운동으로, 코르넬리우스 얀센(Cornelius Jansen, 1585-1638)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 운동은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에 본격화되었지만, 그 뿌리는 신적 은총과 인간의 자유 의지 사이의 관계에 대한 오랜 논쟁에 닿아 있다. 특히 5세기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 사상에 깊이 의존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선을 행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 펠라기우스에 맞서, 원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간의 자유 의지가 아담의 타락 이후 상실되었으며, 오직 하느님이 선택적으로 부여하는 '효력 있는 은총'(gratia efficaxla)만이 인간을 구원으로 이끌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은총은 저항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6]

중세 동안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은 신학계를 지배했으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은총과 자유 의지를 조화시키려 시도했고,[6] 이후 스콜라 철학에서는 인간 본성에 대해 좀 더 낙관적인 견해가 나타났다.[6] 종교개혁 시기 마르틴 루터장 칼뱅은 다시 아우구스티누스를 강조하며 인간의 자유 의지를 부정하고 오직 은총에 의한 구원을 주장했다.[3] 이에 대응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1547년 제6차 회기)에서 자유 의지의 역할을 재확인했지만, 은총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을 정하지 않아 신학적 논쟁의 여지를 남겼다.[6]

특히 예수회는 아우구스티누스주의가 지나치게 강조될 경우 프로테스탄트의 주장과 유사해지고 교회의 역할을 약화시킬 것을 우려했다.[6] 이러한 배경 속에서 16세기 루뱅 대학교의 신학자 미셸 바이우스(Michael Baius, 또는 바이스)는 자유 의지를 부정하는 아우구스티누스적 주장을 펼치다 1567년 교황 비오 5세에 의해 단죄되었다. 그의 사상은 바이어스주의로 알려졌으며 얀센주의의 선구로 평가받는다. 반면 스페인 예수회원 루이스 데 몰리나는 인간의 자유 의지가 동의해야 효력을 발휘하는 '충분한 은총'(gratia sufficiensla) 개념을 제시하며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들과 격렬히 대립했다. 결국 신앙교리성1611년 은총 문제에 대한 출판을 금지하기에 이르렀다.[6]

이러한 신학적 긴장 속에서 루뱅 (구) 대학교의 교수였던 코르넬리우스 얀센은 1628년부터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집대성하여 은총 논쟁을 해결하고자 방대한 저술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1636년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의 추천으로 이프르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1638년 전염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임종 직전, 그는 거의 완성된 원고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lat)를 동료들에게 맡기며 출판을 지시하되, 만약 성좌(교황청)가 수정을 원한다면 순종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다.[10][6]

장 뒤베르지에 드 오란 (1581–1643), 통칭 생시랑 수도원장. 얀센의 절친한 친구이자 얀센주의 확산에 기여했다.


얀센의 사상 형성과 《아우구스티누스》 출판에는 그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였던 장 뒤베르지에 드 오란(Jean Duvergier de Hauranne, 1581-1643)의 역할이 컸다. 통칭 생시랑 수도원장(Abbé de Saint-Cyran프랑스어)으로 알려진 그는 루뱅 대학 동기였으며, 얀센의 후원자로서 파리와 바욘 등지에서 그가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왔다. 두 사람은 1610년대 바욘에서 함께 교부들의 저작,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깊이 연구했다.[6] 얀센이 루뱅으로 돌아간 후에도 둘은 서신을 통해 은총론에 대한 논의를 이어갔다. 얀센 사후, 생시랑은 친구에 대한 충성심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요 지지자가 되었다. 그는 파리 근교의 포르 루아얄 수도원의 영적 지도자가 되어 이곳을 얀센주의의 중요 거점으로 만들었으며, 앙투안 아르노와 같은 인물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생시랑은 리슐리외 추기경과의 정치적, 신학적 갈등으로 1638년 투옥되었다가 1642년 석방된 후 이듬해 사망했다.[11][12]

코르넬리우스 얀센 사후 1640년에 출판된 《아우구스티누스》의 표제지. 이 책은 이후 벌어진 얀센주의 논쟁의 핵심 텍스트가 되었다.


얀센의 유작 《아우구스티누스》는 1640년 루뱅에서 처음 출판되었고, 1641년에는 파리에서도 인쇄되었다. 약 1,300페이지에 달하는 이 방대한 저서는 총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 제1권: 펠라기우스주의의 역사와 이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반박, 그리고 반펠라기우스주의를 다룬다.

# 제2권: 인류의 타락과 원죄 문제를 논한다.

# 제3권: 당대의 '현대적 경향'(얀센이 직접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몰리니즘을 지칭)을 반펠라기우스주의로 비판한다.

이 책에서 얀센은 인간의 의지가 타락 이후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악으로 기울 수밖에 없으며, 오직 저항할 수 없는 '효력 있는 은총'만이 인간을 구원으로 이끌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칼뱅주의의 예정설과 유사한 입장을 보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출판 직후 신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프랑스에서는 예수회 오라토리안, 도미니코회, 소르본 대학교의 다수 신학자들이 이를 환영했으나,[6] 예수회와 리슐리외 추기경 등은 즉각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1642년 교황 우르바노 8세는 교황 칙서 In eminentilat를 통해 《아우구스티누스》가 교황청의 사전 허가 없이 은총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과 바이어스주의의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는 이유로 공식적으로 비난했다. 그는 또한 1567년 교황 비오 5세가 Ex omnibus afflictionibuslat에서, 그리고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바이어스주의의 여러 명제들을 비난한 것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이 칙서는 출판 날짜 문제 등으로 프랑스 내 수용이 지연되다가 1644년에야 소르본 대학에서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졌다.[19][14]

교황 인노첸시오 10세 (1574-1655). 그는 1653년 교서 를 통해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추출된 다섯 가지 명제를 단죄했다.


얀센주의 반대자들, 특히 예수회는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더 강력한 단죄를 원했다. 1649년 소르본 대학의 이사(syndic) 니콜라 코르네(Nicolas Cornet)는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논란이 되는 다섯 가지 명제를 추출하여 대학 교수들에게 단죄를 요청했다.[71] 이 문제는 프랑스 성직자 회의를 거쳐 1650년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에게 전달되었다. 교황은 특별 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문제를 검토하도록 했고,[73] 1653년 마침내 교황 교서 Cum occasionelat를 반포하여 코르네가 제시한 다섯 가지 명제를 공식적으로 단죄했다. 단죄된 다섯 명제는 다음과 같다.

# 의로운 사람들이 아무리 원하고 노력해도 지킬 수 없는 하느님의 계명이 있으며, 그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은총이 부족할 수도 있다. (이단)

# 타락한 본성의 상태에서는 내적인 은총에 결코 저항할 수 없다. (이단)

# 타락한 본성의 상태에서 공로를 세우거나 죄를 짓기 위해 내적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가 요구되지는 않으며, 강제로부터의 자유만으로 충분하다. (이단)

#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모든 내적 행위에 선행하는 은총의 필요성을 인정한 점에서는 옳았으나, 인간의 의지가 이 은총에 저항하거나 순응할 수 있다고 믿은 점에서는 이단이었다. (이단)

#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거나 피를 흘리셨다고 말하는 것은 반펠라기우스주의적이다. (거짓)

이 교서의 반포는 얀센주의 논쟁을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었다. 앙투안 아르노를 비롯한 얀센주의자들은 다섯 명제 자체는 이단적임을 인정하면서도, 이 명제들이 실제로 얀센의 《아우구스티누스》에 담겨 있다는 교황의 '사실 판단'(quaestio factila)에는 동의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교회의 가르침인 '법규 문제'(quaestio jurisla)와 역사적 사실에 대한 판단인 '사실 문제'를 구분하며, 얀센 자신과 그의 저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정통 가르침을 따랐다고 항변했다. 이 '법과 사실'의 구분은 이후 얀센주의 논쟁의 핵심 쟁점이 되었다.[71]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처럼 출판 직후부터 격렬한 신학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으며, 얀센주의 운동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다.

3. 3. 프랑스 아우구스티누스주의의 형성: 베르지에와 아르노 가문

코르넬리우스 얀센의 사후 1640년에 출판된 저서 『아우구스티누스 - 인간 본성의 건전함에 대하여』(Augustinus;humanae naturae sanitatela)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에 기반하여 인간의 자유 의지의 무력함과 죄의 깊음을 강조하며 얀센주의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 책은 16세기 루뱅의 신학자 미셸 바이우스가 주장했던 신의 은총 절대화와 인간 무력함 강조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얀센의 친구였던 프랑스인 장 뒤베르지에 드 오란느는 '생 시랑 수도원장'(Abbé de Saint-Cyran|아베 드 생 시랑프랑스어)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프랑스 내 얀센주의 확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앙투안 아르노와 친분을 맺고 『아우구스티누스』를 파리로 가져와 1641년에 출판하여 프랑스 상류층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6] 『아우구스티누스』는 1641년과 1643년에 프랑스에서 인쇄되었고, 신학계에서 널리 읽혔다.

생 시랑은 앙투안 아르노의 누이들이 있던 파리 교외의 여자 수도원 포르 루아얄 수도원의 영적 지도자가 되어 이곳을 프랑스 얀센주의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는 예수회의 도덕적 가르침이 신자들의 영적 해이를 초래한다고 비판하며 예수회와의 대립각을 세웠다. 이는 이후 프랑스에서 얀센주의와 예수회 간의 오랜 논쟁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아르노 가문은 이처럼 생 시랑과의 관계 및 포르 루아얄 수도원을 통해 얀센주의 운동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출판 초기, 예수회 오라토리안, 도미니코회, 그리고 소르본 대학교의 많은 신학자들은 이 책을 환영했다. 그러나 예수회는 즉시 반대 입장을 표명했으며, 당시 프랑스의 실권자였던 추기경 리슐리외의 지지를 받았다. 리슐리외는 얀센주의를 경계하고 탄압하는 입장이었다. 1642년 리슐리외가 사망한 후에도 아이작 아베르(Isaac Habert)와 푸이얀 수도회 신학자 피에르 드 생조제프 등이 예수회의 입장을 대변하며 얀센주의를 비판했다.

이러한 초기 논쟁 속에서 파리 대주교 장 프랑수아 드 곤디는 공식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를 금지했지만, 책의 유통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1642년 8월 1일, 로마의 신앙 교리성은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난하고 읽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발표했으나, 이 법령은 프랑스에서 법적 효력을 갖지 못했다.[19]

같은 해 1642년 3월 6일, 교황 우르바노 8세는 교황 칙서 In eminentila를 발표했다. 이 칙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성좌의 사전 허가 없이 은총에 관한 내용을 출판했다는 절차적 문제를 들어 비난했으며, 과거 바이어스주의를 단죄했던 교황들의 결정을 재확인하며 『아우구스티누스』가 유사한 오류를 담고 있다고 지적했다. 얀센주의자들은 칙서의 공포 날짜(구력과 신력의 차이)를 문제 삼아 프랑스 내 수용을 막으려 했으나,[19] 결국 소르본 대학교1644년에 이 칙서를 공식적으로 수용했다.[14]

4. 《아우구스티누스》의 프랑스 내 수용



Augustinus|아우구스티누스la는 1641년 프랑스에서 처음 인쇄되었고, 1643년에 두 번째 판이 나왔다.[6] 이 책은 스페인령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공화국을 포함한 신학계에서 널리 읽혔다. 프랑스에서 아우구스티누스주의 논쟁은 주로 은총과 예정설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을 강조하는 Augustinus|아우구스티누스la의 출판으로 촉발되었다.[6] 오라토리오회와 도미니코회, 그리고 소르본 대학교의 많은 신학자들은 이 책을 환영했으며, 그중 10명은 프랑스어판 출판을 승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회는 즉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이들은 추기경 리슐리외의 지원을 받았으며, 리슐리외 사후에는 1643년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설교를 통해 얀센을 공격한 이삭 아베르(Isaac Habert)와 같은 해 Defensio sancti Augusti|성 아우구스티누스 옹호la를 출판한 푸이얀 수도회 신학자 피에르 드 생조제프 등의 지지를 받았다.

초기 몇 년간 상황은 얀센주의자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파리 대주교 장 프랑수아 드 곤디는 출판물에서 은총에 대한 논의를 금지하고 Augustinus|아우구스티누스la를 공식적으로 금서로 지정했지만, 책은 계속 유통되었다. 1642년 8월 1일, 신앙 교리성은 Augustinus|아우구스티누스la를 비난하고 독서를 금지하는 법령을 발표했으나, 이 법령은 프랑스에서 법적 효력을 갖지 못했다.[19] 1642년 3월 6일, 교황 우르바노 8세교황 칙서 In eminentila를 발표하여 Augustinus|아우구스티누스la를 비난했다. 교황은 이 책이 성좌의 사전 허가 없이 은총 관련 저작을 출판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어기고 출판되었으며, 교황 비오 5세(1567년, Ex omnibus afflictionibusla)와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바이어스주의의 여러 명제를 비난했던 것을 상기시키며 해당 명제들이 Augustinus|아우구스티누스la에서 반복되었다고 주장했다.

In eminentila 칙서는 출판 날짜의 모호성 때문에 한동안 효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얀센주의자들은 플랑드르와 프랑스 양쪽에서 칙서 수용을 막으려 했다. 그들은 문서가 로마에서 1641년 3월 6일에 공포되었다고 증명하는 반면, 쾰른교황 대사브뤼셀로 보낸 사본에는 1642년으로 날짜가 기재되어 있어 진위가 의심스럽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사용되던 구력과 신력 날짜 차이에서 비롯된 혼란이었다.[19] 파리 고등법원에서 얀센주의자들의 활동 덕분에 프랑스 내 칙서 공포는 1643년 1월까지 지연되었다.[14] 소르본 대학교는 1644년에 이 칙서를 공식적으로 수용했다.

얀센주의 반대자들은 Augustinus|아우구스티누스la에 대한 더 강력한 단죄를 원했다. 특히 예수회는 얀센주의를 칼뱅주의 이단으로 간주했다. 리슐리외의 동맹이었던 바브르 주교 이삭 아베르는 1646년 12월, Augustinus|아우구스티누스la에서 이단으로 간주되는 여덟 가지 교리를 추출하여 발표했다. 몇 년 뒤인 1649년, 소르본 대학의 이사(syndic) 니콜라 코르네(Nicolas Cornet)는 Augustinus|아우구스티누스la의 지속적인 유통에 좌절감을 느끼고, 이 책에서 다섯 가지 교리와 De la fréquente communionla에서 두 가지 교리를 추출하여 소르본 교수들에게 단죄를 요청했다. 얀센의 이름이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그가 표적임을 알고 있었다.

교활한 이사는 충성심에 따라 이를 의무로 여기며 정확한 진술을 하지 않으며, 이 교리들을 누구에게도 귀속시키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 얀센의 이름을 거론했다면, 그는 "Non agitur de Jansenio|얀센과는 무관하다la"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얀센과 그만이 문제의 핵심이었다.[71]


교수진이 이 교리들을 단죄하기 전에 파리고등법원이 개입하여 이를 금지했다. 교수진은 이후 1650년 프랑스 성직자 회의에 교리들을 제출했다. 그 결과, 아베르는 같은 해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초기 일곱 교리 중 다섯 가지를 언급했다. 이 편지에서 그는 직접적으로 얀센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의 저서로 인해 프랑스에서 발생한 혼란을 설명했다. 이때까지 다섯 교리는 공식적으로 얀센에게 귀속되지 않았다.[71] 이 편지는 90명 이상의 프랑스 주교들이 서명했지만, 즉시 13명의 아우구스티누스주의 성향 대수도원장(prelate)들이 로마에 반박 편지를 보내는 등 논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다섯 교리가 '논쟁을 유발하기 위해 모호한 용어로 작성된 것'이라고 비판하며,[72] 교황에게 아우구스티누스주의를 성급하게 단죄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이 주교들 중에는 앙제의 주교이자 앙투안 아르노의 형제인 앙리 아르노(Henri Arnauld)와, 이후 포르 로얄의 강력한 지지자가 된 보베의 주교 니콜라 쇼아르 드 뷔젠발(Nicolas Choart de Buzenval)이 포함되어 있었다.[71] 동시에, 앙투안 아르노는 이 다섯 교리가 실제로 얀센의 저서에 존재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반대자들의 조작 가능성을 시사했다.

90명의 주교들은 또한 인노첸시오 10세에게 상황 해결을 위해 교황 클레멘스 8세 때와 유사한 위원회를 개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인노첸시오 10세는 다수의 요청을 받아들였지만, 소수의 견해도 고려하여 다섯 명의 추기경과 열세 명의 자문 위원으로 구성된 자문 위원회를 임명하여 상황을 보고하도록 했다. 다음 2년 동안 이 위원회는 36차례 회의를 열었고, 그중 10차례는 인노첸시오 10세가 직접 주재했다.[73] 위원회 내 얀센주의 지지자들은 세 가지 항목으로 구성된 표를 작성했는데, 첫 번째는 이단으로 단죄된 칼뱅주의 입장, 두 번째는 몰리니즘으로 분류된 펠라기우스주의/반펠라기우스주의 입장, 세 번째는 얀센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올바른 아우구스티누스주의 입장이었다.

결과적으로 1653년, 인노첸시오 10세는 다수의 입장을 지지하여 교서 형태의 사도헌장 Cum occasionela를 반포하고 얀센주의의 다섯 가지 교리를 단죄했다. 이 중 첫 네 가지는 이단으로, 다섯 번째는 거짓으로 선언되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의로운 사람들이 아무리 원하고 노력해도 지킬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으며, 그 명령을 지킬 수 있도록 은총을 받지 못하기도 한다.

# 타락한 상태의 인간은 내적인 은총에 저항할 수 없다.

# 자유 의지가 없는 상태의 인간 행위도 공로가 될 수 있다.

#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모든 내적 행위에 선행하는 은총이 필요하다고 가르친 것은 옳지만, 타락한 인류가 선행하는 은총을 받아들이거나 저항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고 가르친 것은 오류이다.

#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를 위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반펠라기우스주의이다.

프랑스는 이 교서를 수용했다. 앙투안 아르노를 포함한 일부 얀센주의자들은 다섯 교리가 이단이라는 점은 인정했지만, Augustinus|아우구스티누스la에서는 이를 찾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얀센과 그의 Augustinus|아우구스티누스la가 아우구스티누스가 가르친 바를 따랐으므로 정통적이며, 교황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단죄할 수는 없다고 믿었다. 아르노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신자의 마음을 어느 정도까지 구속할 수 있는지 구분하고자 했다. 그는 교리 문제(법적 문제, quaestio iurisla)에 대해서는 교회의 의견을 받아들일 의무가 있지만, 사실 인정의 문제(quaestio factila)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즉, 아르노는 Cum occasionela에서 제시된 교리에는 동의했지만, 얀센의 저서에 이러한 교리가 포함되었다는 교황의 사실 판단까지 받아들일 의무는 없다고 본 것이다. 얀센주의자들은 얀센 자신이 공개적으로 단죄되지 않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가 여전히 정통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이는 철저한 얀센주의 단죄를 원했던 예수회와 그 지지자들에게는 불만스러운 결과였다. 신학적 문제는 로마에서 기술적으로 해결되었지만, 얀센주의자들과 예수회 사이의 적대감은 더욱 깊어졌다.[71]

5. 다섯 교리

얀센주의 반대자들, 특히 예수회는 얀센주의를 칼뱅주의이단으로 간주하며 《아우구스티누스》가 더욱 철저히 단죄되기를 원했다.[71] 리슐리외의 동맹이었던 바브르 주교 이삭 아베르는 1646년 12월,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이단으로 여겨지는 여덟 가지 명제를 추출하여 발표했다. 이후 1649년, 소르본 대학의 이사(syndic) 니콜라 코르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지속적인 유통에 불만을 품고, 이 책에서 다섯 가지 명제와 앙투안 아르노의 저서 ''De la fréquente communion''에서 두 가지 명제를 추출하여 소르본 교수들에게 단죄를 요청했다. 얀센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얀센을 겨냥한 것이었다. 코르네는 "얀센과는 무관하다"(Non agitur de Janseniola)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얀센을 문제 삼았다.[71]

소르본 교수진이 이 명제들을 단죄하기 전에 파리 고등법원이 개입하여 심의를 금지시켰다. 결국 교수진은 1650년 프랑스 성직자 총회에 이 명제들을 제출했다. 같은 해, 아베르는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이 처음 추출했던 명제 중 다섯 가지를 언급했다. 그는 편지에서 얀센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저서로 인해 프랑스에서 발생한 혼란을 설명했다. 이때까지 다섯 교리는 공식적으로 얀센에게 귀속되지 않았다.[71] 이 편지는 90명 이상의 프랑스 주교들이 서명했지만, 곧바로 13명의 아우구스티누스주의 성향 주교들이 로마에 반박 편지를 보냈다. 이들은 다섯 교리가 '논쟁을 유발하기 위해 모호하게 작성되었다'고 비판하며,[72] 교황에게 아우구스티누스주의를 성급히 단죄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반박 편지에 서명한 주교 중에는 앙투안 아르노의 형제인 앙제의 주교 앙리 아르노와 보베의 주교 니콜라 쇼아르 드 뷔젠발 등이 있었다.[71] 동시에 앙투안 아르노는 얀센의 저서에 이 다섯 교리가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반대자들의 조작 가능성을 시사했다.

주교들은 인노첸시오 10세에게 교황 클레멘스 8세 때 열렸던 Congregatio de Auxiliisla와 유사한 위원회를 구성하여 상황을 해결해 줄 것을 요청했다. 교황은 다수 주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다섯 명의 추기경과 열세 명의 자문 위원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임명했다. 이 위원회는 2년간 36차례 회의를 열었으며, 그중 10차례는 교황이 직접 주재했다.[73] 위원회 내 얀센주의 지지자들은 칼뱅주의, 펠라기우스주의/반펠라기우스주의(몰리니즘적 관점), 그리고 올바른 아우구스티누스주의(얀센주의자들의 관점) 입장을 비교하는 표를 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1653년, 인노첸시오 10세는 다수의 의견을 따라 교황 칙서 형태의 사도 헌장 ''Cum occasione''를 반포하여 다섯 교리를 단죄했다. 첫 네 교리는 이단으로, 다섯 번째 교리는 거짓으로 선언되었다. 단죄된 다섯 교리는 다음과 같다.

# 의로운 사람들이 아무리 원하고 노력해도 지킬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으며, 그 명령을 지킬 수 있도록 은총을 받지 못하기도 한다.

# 타락한 상태의 인간은 내적인 은총에 저항할 수 없다.

# 자유 의지가 없는 인간도 공로를 세울 수 있다.

#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모든 내적 행위에 선행 은총이 필요하다고 가르친 것은 맞지만, 타락한 인류가 선행하는 은총을 수용하거나 저항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고 가르친 것은 틀렸다.

#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를 위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반펠라기우스주의이다.

프랑스는 이 칙서를 수용했다. 앙투안 아르노를 포함한 일부 얀센주의자들은 다섯 교리 자체는 이단임을 인정했지만,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발견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얀센과 그의 저서가 아우구스티누스가 가르친 바를 따랐기 때문에 정통적이며, 교황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단죄할 수는 없다고 믿었다. 아르노는 교회가 신자의 양심을 구속할 수 있는 범위를 법(de jurela, 교리)의 문제와 사실(de factola, 특정 저서에 특정 내용 포함 여부)의 문제로 구분했다. 그는 교리 문제에 대해서는 교회의 의견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사실 문제에 대해서는 그럴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다. 즉, Cum occasionela에서 제시된 교리 자체에는 동의하지만, 이 교리들이 얀센의 저서에 포함되었다는 교황의 사실 판단은 받아들일 의무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얀센주의자들은 얀센 자신이 직접 단죄되지 않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가 여전히 정통으로 간주된다는 점에 만족했다. 그러나 이는 얀센주의의 철저한 단죄를 원했던 예수회와 그 지지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했으며, 신학적 문제는 표면적으로 해결되었지만 얀센주의자와 예수회 사이의 적대감은 더욱 깊어졌다.[71]

6. 얀센주의자와 몰리나주의자 간의 논쟁

얀센주의의 반대자들, 특히 예수회는 얀센주의를 칼뱅주의이단으로 간주하며 《아우구스티누스》가 더욱 철저히 단죄되기를 원했다.[71] 리슐리외의 동맹이었던 이삭 아베르는 1646년 12월,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이단으로 여겨지는 여덟 가지 명제를 추출하여 발표했다. 1649년, 소르본 대학의 신디크인 니콜라 코르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지속적인 유통에 불만을 품고, 이 책에서 다섯 가지 명제와 ''De la fréquente communion''에서 두 가지 명제를 추출하여 소르본 교수진에게 단죄를 요청했다. 얀센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모두 그가 대상임을 알고 있었다. 코르네는 "Non agitur de Jansenio|논 아기투르 데 얀세니오la" (얀센과는 무관하다)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얀센을 겨냥했다.[71]

교수진이 이 명제들을 단죄하기 전에 파리고등법원이 개입하여 심의를 금지했다. 교수진은 1650년 프랑스 성직자 회의에 명제들을 제출했고, 아베르는 같은 해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에게 편지를 보내 초기 일곱 명제 중 다섯 가지를 언급하며 프랑스 내 혼란을 설명했다. 이 편지에는 90명 이상의 프랑스 주교가 서명했지만, 앙투안 아르노의 형제인 앙제 주교 앙리 아르노와 보베 주교 니콜라 쇼아르 드 뷔젠발 등 13명의 아우구스티누스파 주교들이 즉시 반박 편지를 로마에 보냈다. 이들은 다섯 명제가 '논쟁을 유발하기 위해 모호하게 작성되었다'고 비판하며 교황에게 아우구스티누스주의를 성급히 단죄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72][71] 동시에 앙투안 아르노는 얀센의 저서에 이 다섯 명제가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의문을 제기하며 반대자들의 조작 가능성을 시사했다.

주교들은 인노첸시오 10세에게 교황 클레멘스 8세 때 열렸던 Congregatio de Auxiliis|콩그레가티오 데 아욱실리스la와 유사한 위원회 개최를 요청했다. 교황은 다수 주교의 요청을 받아들여 다섯 명의 추기경과 열세 명의 자문 위원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임명했다. 2년간 36차례 회의(10차례는 교황 주재)가 열렸고,[73] 위원회의 얀센주의 지지자들은 칼뱅주의, 펠라기우스주의/반펠라기우스주의(몰리니스트의 가르침에 따른), 그리고 올바른 아우구스티누스주의 입장을 비교하는 표를 제출했다. 1653년, 인노첸시오 10세는 다수의 의견을 따라 교황 칙서 형태의 사도적 헌장 《쿰 오카시오네》(Cum occasionela)를 반포하여 다섯 가지 명제를 단죄했다. 처음 네 명제는 이단으로, 다섯 번째 명제는 거짓으로 선언되었다.

# 의로운 사람들이 아무리 원하고 노력해도 지킬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으며, 그 명령을 지킬 수 있도록 은총을 받지 못하기도 한다.

# 타락한 사람들도 내적인 은총에 저항할 수 없다.

# 자유 의지가 없는 인간도 공로를 세울 수 있다.

#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모든 내적 행위에 선행 은총이 필요하다고 가르친 것은 맞지만, 타락한 인류가 선행하는 은총을 수용하거나 저항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고 가르친 것은 틀렸다.

#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를 위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반펠라기우스주의이다.

이 칙서는 프랑스에서 수용되었다. 앙투안 아르노를 포함한 일부 얀센주의자들은 다섯 명제가 이단임을 인정하면서도, 《아우구스티누스》에서는 찾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얀센이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랐으므로 정통이며, 교황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단죄할 수는 없다고 믿었다. 아르노는 법률 문제(de jure|데 유레la, 즉 교리 문제)와 사실 문제(de facto|데 팍토la, 즉 얀센 저서에 해당 교리가 있는지 여부)를 구분하여, 교리에는 동의하지만 교황의 사실 판단을 받아들일 의무는 없다고 주장했다. 얀센주의자들은 얀센 본인이 직접 단죄되지 않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가 여전히 정통으로 인정된다는 점에 안주하려 했으나, 이는 철저한 단죄를 원했던 예수회와 그 지지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신학적 문제는 일단락되었지만, 얀센주의자와 예수회 사이의 적대감은 더욱 깊어졌다.[71]

여러 주교의 권고와 루이 14세 국왕의 요청에 따라, 교황 알렉산데르 7세는 1664년 프랑스에 사도 헌장 《레지미니스 아포스톨리시》(Regiminis Apostolici|레지미니스 아포스톨리치la)를 보내 모든 성직자와 교사에게 얀센주의자를 위한 복종의 공식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25]

이 공식은 교리 논쟁의 불씨가 되었다. 많은 얀센주의자들이 서명을 거부했고, 일부는 서명하되 교리(de jure|데 유레la)에만 동의하고 교황 칙서가 제기한 사실 주장(de facto|데 팍토la)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유보 조항을 달았다. 후자에는 앙투안 아르노, 니콜라 쇼아르 드 뷔젠발 등 4명의 얀센주의 성향 주교가 포함되었는데, 이들은 신자들에게 칙서를 전달하면서도 교리와 사실의 구분을 유지했다. 이는 루이 14세와 알렉산데르 7세를 격분시켰고, 9명의 프랑스 주교에게 조사를 위임하게 만들었다.

알렉산데르 7세가 1667년 사망하고 교황 클레멘스 9세가 즉위한 후에도 조사는 계속될 듯 보였다. 그러나 프랑스 내 얀센주의자들은 교황 위원회 허용이 갈리아주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주장하며 울트라몬타니즘에 대한 반감을 이용했다. 그들은 내각 각료 한 명과 19명의 주교를 설득하여 클레멘스 9세에게 편지를 보내 교회의 무류성은 계시 문제에만 적용되고 사실 문제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는 카이사르 바로니우스와 로베르토 벨라르미노의 입장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루이 14세에게는 조사가 정치적 불화를 야기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교황 클레멘스 9세 (1600–1669). 그의 교리 논쟁 개입은 얀센주의 논쟁에서 약 10년간의 휴지기(1669–1679)인 '클레멘스 평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 주재 교황 대사는 클레멘스 9세에게 얀센주의자들을 수용할 것을 권고했다. 클레멘스 9세는 동의하고 라옹 주교 세자르 데스트레를 중재자로 임명했다. 교황에게 편지를 보냈던 상스 대주교 루이 앙리 드 파르다이얀 드 곤드린과 샬롱쉬르마른 주교 펠릭스 비알라르 드 에르스가 데스트레를 도왔다. 데스트레는 4명의 주교(아르노, 쇼아르 드 부젠발, 콜레, 파비용)에게 복종 공식 서명을 설득했다(비록 그들이 여전히 사실 문제에 대한 동의는 유보했을 수 있지만). 교황은 처음에는 기뻐했으나 유보 조건을 알게 되자 분노하여 새로운 조사를 명령했다. 교황 대사는 "그들이 교회가 정죄한 모든 의미에서, 어떤 예외나 제한도 없이, 진심으로 다섯 가지 명제를 정죄하고 정죄하게 했다"고 보고했지만, 4명의 주교가 사실 문제에 동의했는지 여부는 모호하게 남겼다. 클레멘스 9세는 12명의 추기경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임명하여 추가 조사를 지시했다.[10] 위원회는 4명의 주교가 완전히 진심으로 서명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지만, 교회 분열을 막기 위해 문제를 중단할 것을 권고했다. 당시 프랑스가 외국과의 전쟁 중이었던 점도 루이 14세가 내부 갈등을 피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교황은 이에 동의하여 4통의 간략한 문서를 발행해 4명의 주교가 공식에 동의한 것을 인정함으로써, 1669년부터 1679년까지 지속된 '클레멘스 평화'(Paix clémentine|페 클레망틴프랑스어)를 확립했다.[20]

7. 블레즈 파스칼과 《지방의 편지》 캠페인

두 번째 공작과 귀족에게 보내는 편지에 대한 비난과 앙투안 아르노의 단죄가 확정되자, 블레즈 파스칼은 얀센주의자 편에서 논쟁에 참여했다. 그는 1년 남짓 전에 종교에 헌신하기로 결심한 상태였다.[23] 그의 누이 자클린 파스칼은 포르-로얄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으며, 파스칼 자신도 은둔자들과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누었다(특히 루이-이사크 르메스트르 드 사시와의 에픽테토스와 몽테뉴에 대한 대화가 유명하다).[20]

블레즈 파스칼(1623–1662). 얀센주의 변증서인 ''지방의 편지''는 1656년과 1657년에 쓰여졌으며, 얀센주의 관점에서 쓰인 문학적 걸작이자 예수회의 경우론에 대한 비판으로 유명하다.


파스칼은 아르노의 요청으로 이 문제를 대중에게 알리기로 했다.[23] 1656년 1월 23일, 아르노에 대한 첫 공식 단죄가 내려지기 9일 전, Lettre écrite à un provincial par un de ses amis, sur le sujet des disputes présentes à la Sorbonne|소르본의 현재 논쟁 주제에 관해 친구 중 한 명이 지방 사람에게 보낸 편지프랑스어라는 제목의 가상의 편지가 익명으로 비밀리에 출판되었다.[22] 이후 17편의 《지방의 편지》가 더 출판되었고, 1657년 3월 24일 파스칼은 Écrits des curés de Paris|파리 사제들의 글프랑스어이라는 작품에 기고하여[20] 예수회의 도덕적 해이를 비판했다.

파스칼은 그의 《지방의 편지》에서 '얀센주의 정파'의 존재를 부정한다. 오귀스탱 가지에(Augustin Gazier)에 따르면, 파스칼은 소위 '얀센주의'가 예수회의 기만적인 발명품이며, 예수회야말로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효과적인 은총의 진정한 적이라고 주장했다.[20]

《지방의 편지》는 아우구스티누스주의와 포르-로얄을 포괄적으로 변호하는 글이었지만, 예수회에 대한 풍자적인 공격으로 가장 유명해졌다. 이는 아르노의 Théologie morale des Jésuites|예수회의 도덕 신학프랑스어을 반영한 것이었다(다만 아르노와 달리 파스칼은 Cum occasionela 교서에 동의하지 않았고 단죄된 교리가 정통이라고 믿었으나, 법률 문제(de jurela)와 사실 문제(de factola)에 대한 아르노의 구분을 강조했다). 이 편지들은 파스칼의 예수회, 경우론자, 몰리니스트에 대한 조롱을 높이 평가한 당시 교양 있는 대중 사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처음 세 편지는 앙투안 아르노의 신념과 직접 관련되었지만, 이후 편지들은 파스칼이 예수회의 도덕적 해이를 격렬하게 공격하며 반격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세비녜 후작 부인이 '신성하다'고 묘사한 이 편지들은 여론을 신학적 문제에서 예수회의 추정된 도덕적 해이에 대한 비판으로 돌리는 캠페인이었다. 그러나 일부 얀센주의자들은 편지에 담긴 공격이 기독교적 자선 정신에 어긋난다고 보아 불편하게 여기기도 했다.[14]

마르그리트 페리에 (1646–1733), 프랑스 얀센주의 수녀이자 파스칼의 조카. 그림은 그녀의 기적적인 치유를 기념하는 봉헌물이다.


로마 교황청이 《지방의 편지》를 금서 목록에 올린 것은 얀센주의가 신학 논쟁의 영역을 넘어 세속 사회에서 점차 알려지고 확립된 운동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지에에 따르면, 금서 지정의 주된 이유는 신학적 내용이나 예수회 비판보다는 종교적 논쟁을 공개적으로, 그것도 프랑스어로 일반 대중과 여성들에게까지 알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14]

한편, 1656년 3월 24일에 발생한 '생-에핀의 기적' 사건은 얀센주의에 대한 공격을 완화하고 대중적 지지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파스칼의 조카이자 포르-로얄 기숙생이었던 마르그리트 페리에(Marguerite Périer)는 생-에핀의 유물과 상호 작용한 후 그녀를 흉하게 만들었던 눈물 누관 질환이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 얀센주의자들은 이를 신의 승인으로 보았고, 로마 가톨릭 교회가 공식적으로 치유를 기적으로 인정하면서 잠시나마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3]

8. 얀센주의에 대한 정치적 반대

마자랭 추기경(1602–1661), 루이 13세루이 14세 시기 수석 대신이자 얀센주의의 주요 반대자


얀센주의에 대한 반대는 처음에는 종교적인 이유에서 시작되었지만, 점차 정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특히 리슐리외의 뒤를 이은 마자랭 추기경은 얀센주의를 정치적 불안 요소로 간주했다. 1643년 루이 13세가 사망한 후 권력을 잡은 마자랭은 얀센주의자들이 1653년 진압된 프롱드의 난 가담자들을 끌어들인다고 의심했다. 실제로 얀센주의자들이 프롱드의 난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안느 제네비에브 드 부르봉 공작 부인이나 그녀의 오빠인 콩티 공 아르망 드 부르봉과 같은 일부 귀족들이 얀센주의를 지지하면서 반란 세력과의 연관성이 부각되었다. 특히 아르노 가문은 의회파 프롱드와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았다. 또한, 세속적인 삶을 버리고 왕실에서 물러나 포르-로얄 수도원 주변에 모여든 일부 은둔자들의 행동은 마자랭에게 정치적 반대 세력의 근거지가 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3]

마자랭은 얀센주의를 억누르기 위해 1654년과 1655년에 주교들을 소집하여 얀센의 교리를 비난하는 선언문에 서명하도록 요구했다. 그는 모든 성직자에게 서명을 권고했지만, 많은 주교들이 꺼려하여 이 시도는 대부분의 교구에서 실패로 돌아갔다.[3] 이 시기 리앙쿠르 공작(로제 뒤 플레시-리앙쿠르)이 얀센주의와 연관되었다는 이유로 파리 생 쉴피스 교구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거부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앙투안 아르노는 예수회의 '관대한 도덕'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여 논쟁이 격화되었다.[22][20] 아르노는 교황의 교리적 결정(de jure|데 유레la, 법률상 문제)은 받아들이지만, 특정 교리가 얀센의 저서에 실제로 포함되었는지 여부(de facto|데 팍토la, 사실 문제)에 대한 교황의 판단까지 받아들일 의무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아르노의 입장은 1656년 그가 소르본 대학교에서 추방되는 결과를 낳았고,[20] 블레즈 파스칼이 『지방의 편지』를 통해 얀센주의를 변호하고 예수회를 비판하는 계기가 되었다.

루이 14세(1638–1715), 마자랭으로부터 얀센주의 탄압 정책을 이어받아 강화했다.


마자랭은 얀센주의를 효과적으로 제압하지 못했지만, 그의 뒤를 이어 친정을 시작한 루이 14세는 훨씬 강력하게 얀센주의를 탄압했다. 어린 시절 겪었던 프롱드의 난에 대한 기억 때문에 왕권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세력을 용납하지 않았던 루이 14세는 1660년 12월, 마자랭과 회의 의장들을 소집하여 모든 성직자에게 신앙 고백서 서명을 강요하도록 지시했다.[20] 이 신앙 고백서는 교황 인노첸시오 10세가 교서 『Cum occasione』에서 비난한 다섯 가지 명제를 거부하는 내용으로, 사실상 얀센주의자인지 아닌지를 가려내는 시험대 역할을 했다.[3] 얀센주의자들과 포르-로얄 수녀들은 서명 여부를 두고 분열했다. 앙투안 아르노처럼 '법률상' 문제와 '사실상' 문제의 구분을 내세워 명제 자체는 비난하지만, 그것이 얀센의 책 『아우구스티누스』에 있다는 사실 인정은 유보하며 서명하려는 이들도 있었으나, 교회 당국은 이러한 구분을 인정하지 않았다.

마자랭이 사망한 1661년 3월 직후, 루이 14세는 포르-로얄 드 파리 수도원과 포르-로얄 데 샹 수도원의 견습생과 기숙생들을 해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이 수도원들이 새로운 수련자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여 자연스럽게 소멸하도록 조치했다. 1664년에는 파리 대주교 아르두앙 드 페레피크 드 보몽이 서명을 거부하는 포르-로얄 수녀들에게 성사를 금지했고, 얀센주의 지도자들을 수도원에서 추방했으며, 서명을 거부한 수녀들을 포르-로얄 데 샹에 감금하는 등 탄압의 강도를 높였다.[24]

이러한 상황에서 파미에 주교 프랑수아-에티엔 콜레, 알레 주교 니콜라 파비용, 보베 주교 니콜라 쇼아르 드 뷔젠발, 앙제 주교 앙리 아르노 등 네 명의 주교가 신앙 고백서 서명 시 '법률상' 문제와 '사실상' 문제의 구분을 고수하며 저항하자, 루이 14세와 교황 알렉산데르 7세와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이는 이후 '신앙고백서 논쟁'으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8. 1. 신앙고백서 논쟁: 1664-1669

여러 주교의 권고와 루이 14세 국왕의 개인적인 주장에 따라, 교황 알렉산데르 7세는 1664년 프랑스로 사도 헌장 Regiminis Apostolici|레지미니스 아포스톨리시la를 보냈다. 이 헌장은 Formula subscriptionis Alexandri VII|포르물라 숩스크립티오니스 알렉산드리 셉티미la에 따라 "모든 성직자와 교사"에게 포함된 교리인 '얀센주의자를 위한 복종의 공식'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25]

이 공식은 교리 논쟁의 기초가 되었다. 많은 얀센주의자들이 서명을 거부했으며, 일부는 서명했지만 교리(법적 문제, de jure|데 유레la)에는 동의하지만 사도 헌장이 주장하는 사실(de facto|데 팍토la)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유보 조항을 달았다. 후자의 범주에는 앙투안 아르노, 니콜라 쇼아르 드 뷔젠발, 콜레(Caulet), 파비용(Pavillon) 등 얀센주의 성향의 주교 4명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신자들에게 헌장을 전달하면서도 법적 문제와 사실 문제를 구분하는 입장을 유지했다. 이는 루이 14세와 알렉산데르 7세 모두를 불쾌하게 만들었고, 교황은 9명의 프랑스 주교에게 이 상황을 조사하도록 위임했다.

알렉산데르 7세는 위원회가 조사를 마치기 전인 1667년에 사망했고, 그의 후임자인 교황 클레멘스 9세는 처음에는 얀센주의 성향 주교들에 대한 조사를 계속할 의향을 보였다. 그러나 프랑스 내 얀센주의자들은 이러한 교황 직속 위원회를 허용하는 것이 갈리아주의의 전통적인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여론전을 펼쳤다. 이는 울트라몬타니즘(교황지상주의)에 대한 프랑스의 전통적인 반감을 자극했다. 그들은 내각 각료 한 명(리옹 대주교)과 19명의 다른 주교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이 19명의 주교들은 클레멘스 9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회의 무류성은 계시의 문제에만 적용될 뿐 사실 문제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이것이 카이사르 바로니우스와 로베르토 벨라르미노의 입장이었다고 덧붙였다. 또한 루이 14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조사를 계속 허용하면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 주재 교황 대사는 클레멘스 9세에게 얀센주의자들을 포용할 것을 권고했다. 클레멘스 9세는 이에 동의하고, 라옹 주교인 세자르 데스트레를 중재자로 임명했다. 교황에게 편지를 보냈던 주교 중 두 명, 즉 상스 대주교 루이 앙리 드 파르다이얀 드 곤드린과 샬롱쉬르마른 주교 펠릭스 비알라르 드 에르스가 데스트레를 도왔다. 데스트레는 문제의 4명의 주교(아르노, 쇼아르 드 뷔젠발, 콜레, 파비용)에게 '얀센주의자를 위한 복종의 공식'에 서명하도록 설득했다. 비록 그들은 서명이 사실 문제(de facto|데 팍토la)에 대한 동의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여겼을 수 있지만, 서명 자체는 이루어졌다. 교황은 처음에는 4명의 주교가 서명했다는 소식에 기뻐했지만, 그들이 유보적인 입장을 유지하며 서명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분노했다. 클레멘스 9세는 교황 대사에게 새로운 조사를 명령했다. 교황 대사는 보고서에서 주교들이 "교회가 정죄한 모든 의미에서, 어떤 예외나 제한도 없이, 진심으로 다섯 가지 명제를 정죄하고 정죄하게 했다"고 밝혔지만, 그들이 사실 문제에 대해 교황과 의견을 같이하는지에 대해서는 모호한 태도를 유지했다고 덧붙였다.[10] 이에 클레멘스 9세는 12명의 추기경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임명하여 문제를 더 심의하게 했다. 이 위원회는 4명의 주교가 완전히 진심으로 서명하지는 않았다고 결론 내렸지만, 교회의 추가적인 분열을 막기 위해 문제를 더 이상 확대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당시 프랑스가 참여하고 있던 대외 전쟁 역시 루이 14세에게 국내 갈등을 피해야 한다는 압력으로 작용했다. 교황은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동의했고, 4명의 주교가 공식에 동의하는 것을 인정하는 4개의 간략한 문서를 발행함으로써 1669년 Paix clémentine|펙스 클레망틴프랑스어('클레멘스 평화')를 선포했다. 이 평화는 1679년까지 지속되었다.[20]

9. 클레멘스 평화



교황 클레멘스 9세는 얀센주의 성향의 네 주교가 제출한 조건부 서명을 사실상 용인함으로써 교회의 분열을 막고자 했다. 당시 루이 14세 역시 외국과의 전쟁으로 국내 갈등을 피하려 했기에 이러한 결정에 동의했다.[10] 그 결과, 1669년 '클레멘스 평화'(Paix clémentine프랑스어)가 시작되어 약 10년간 지속되었으며, 일부 자료에서는 32년까지로 보기도 한다[10] 공개적인 신학 논쟁이 중단되었다.[20]

이 시기 동안 얀센주의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이어졌으며, 크게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었다.

# Cum occasionela 교서에서 단죄된 다섯 가지 명제를 계속 옹호하는 '속은 얀센주의자'.

# ''Cum occasione''의 교리는 받아들였지만, '사실 문제'(de factola)에 대한 교회의 무류성은 부인한 '완전한 얀센주의자'.

# 형식적으로는 ''Cum occasione''와 '사실 문제'에 대한 교회의 무류성을 모두 받아들였으나, 얀센주의의 엄격한 도덕성, 덕에 대한 헌신, 울트라몬타니즘에 대한 반대 등 특정 측면에 공감한 '준 얀센주의자'. 이들은 다른 두 그룹의 보호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클레멘스 평화 기간 동안 얀센주의자들은 불필요한 논란을 피하려 노력했다. 특히 루이 14세의 절대주의가 강화되면서, 과거 프롱드와 연관되었던 포르-로얄과 얀센주의에 대한 왕의 시선은 곱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블레즈 파스칼의 유고집인 《팡세》(1670년 출판)나 피에르 니콜의 《도덕 및 신학적 교육에 관한 에세이》(Essais de morale et d'instruction théologiques프랑스어) 등은 신학적, 정치적 논쟁거리를 담지 않았다.

포르-로얄 성서(또는 '사시 성서')의 표지. 1667년부터 1696년까지 출판되었으며, 얀센주의자 루이-이사크 르메스트르 드 사시가 클레멘스 평화 기간 동안 주로 작업한 프랑스어 번역본으로, 고전 프랑스어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대신 얀센주의자들은 이 시기에 지적 활동의 수준을 높이고 신자들에게 종교적 가르침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집중했다. 대표적인 예로 루이-이사크 르메스트르 드 사시는 1667년 프랑스어 신약성서 번역본, 일명 《포르-로얄 성서》(또는 '사시 성서')를 출판했다. 이 성서는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몬스에서 비밀리에 인쇄되었는데, 교황청은 1668년 성경을 토착어로 번역하고 얀센주의적 관점에서 편집했다는 이유로 이를 비난했다.[3] 그럼에도 사시는 1672년부터 불가타 성경 전체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1695년에 완간했다. 총 30권에 달하는 이 번역본은 성서 연구 분야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으며, 파스칼의 《팡세》와 더불어 17세기 고전 프랑스어의 뛰어난 사례로 평가받는다.[20]

이처럼 활발한 지적 활동이 있었지만, 프랑스의 문학 비평가 샤를 오귀스탱 생트-뵈브는 그의 저서 《포르-로얄》에서 이 시기를 더 큰 폭풍우가 오기 전 잠시 숨을 고르는 시기였다고 평가했다. 그는 "클레멘스 평화 이후 10년은 포르-로얄에게 영광의 시기였지만, 근본적으로는 쇠퇴기였다. 다만 그 쇠퇴는 가려지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마치 달콤한 가을날의 아름다운 시간, 풍요롭고 따뜻한 일몰과 같았다"라고 묘사하며, 평화 속에서도 쇠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음을 지적했다.[26]

10. 클레멘스 평화 이후 박해 재개

클레멘스 9세에 의해 마련된 이른바 '클레멘스 평화'(Paix clémentine프랑스어) 시기(1669년-1679년) 동안 얀센주의를 둘러싼 공개적인 신학 논쟁은 잠시 잦아들었다.[20] 그러나 일부 성직자들은 여전히 얀센주의, 특히 엄격한 도덕성과 울트라몬타니즘에 대한 반대에 매력을 느꼈다. 얀센주의자들은 이 시기 루이 14세의 절대주의 강화 속에서 불필요한 논란을 피하려 애쓰면서도,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사후 1670년 출판)나 루이-이사크 르메스트르 드 사시의 프랑스어 성경 번역과 같은 중요한 지적 활동을 이어갔다.[20] 샤를 오귀스탱 생트-뵈브가 지적했듯, 이 시기는 "근본적으로 쇠퇴의 10년이었지만, 가려지고 아름답게 꾸며진 쇠퇴"였다.[26]

그러나 1679년, 얀센주의의 주요 후원자였던 안 즈느비에브 드 부르봉 공작부인이 사망하고, 같은 해 네이메헨 조약과 생제르맹 조약이 체결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대외 전쟁에서 손을 뗀 루이 14세는 국내 문제, 특히 자신이 의심의 눈초리로 보던 얀센주의에 대한 탄압을 재개할 여력을 갖게 되었다.

왕의 의지에 따라 파리 대주교 프랑수아 드 아를레 드 샹발론은 포르-로얄-데-샹 수도원에 대한 조치를 단행했다. 수련 수녀와 고해 신부들을 추방하고 새로운 인원의 모집을 금지시킨 것이다. 이 조치에 위협을 느낀 주요 얀센주의 신학자들은 망명길에 올랐다. 앙투안 아르노는 1680년 브뤼셀로 피신했고,[3] 피에르 니콜 역시 스페인령 플랑드르로 떠났으며, 이후 다른 얀센주의자들도 그 뒤를 따랐다.[3] 이러한 박해 재개와 주요 인물들의 망명은 잠잠했던 얀센주의 논쟁이 다시 격화될 불씨를 지폈으며, 특히 망명지에서 활동을 이어간 파스키에 케넬과 그의 저서 《Réflexions morales프랑스어》(도덕적 성찰)이 다시금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10. 1. 파스키에 케넬과 그의 《도덕적 성찰》: 1692-1710

파스키에 케넬


18세기에 접어들면서 파스키에 케넬(Pasquier Quesnel)에 의해 얀센주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케넬은 1657년부터 1681년까지 파리의 예수 오라토리오 회원이었으나, 얀센주의 성향 때문에 추방되었다. 이후 오를레앙 주교였던 피에르 뒤 캉부 드 콰슬랭(Pierre du Cambout de Coislin)의 보호 아래 4년간 머물다가, 1689년 브뤼셀에서 앙투안 아르노와 합류했다. 1694년 아르노가 사망하자 케넬은 그의 실질적인 후계자이자 '얀센주의 정당'의 지도자로 여겨졌다.[20]

1692년 케넬은 《Nouveau Testament en français avec des réflexions morales sur chaque verset|프랑스어 신약성경과 각 구절에 대한 도덕적 성찰프랑스어》(이하 《도덕적 성찰》)을 출판했다. 이 책은 신약 각 구절에 대한 해설과 도덕적 성찰을 담은 헌신 지침서였지만, 얀센주의적 입장을 강하게 드러냈다.[20] 케넬은 이 책에서 고전적인 아우구스티누스주의를 표방하며 은총 문제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였으나, 에드몽 리셰(Edmond Richer)의 이론에 따라 갈리아주의를 강력하게 주장했다.[20] 그는 얀센주의를 프랑스 교회가 교황의 권위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갈리아주의와 결합시키고, 예수회를 "교황의 앞잡이"라고 비판하며 다시 얀센주의와 예수회 간의 대립 구도를 형성했다.

《도덕적 성찰》은 출판 초기에는 큰 논란 없이 받아들여졌다. 당시 샬롱쉬르마른의 주교였던 루이 앙투안 드 노아유(Louis Antoine de Noailles, 훗날 파리 대주교)가 추천했으며, 같은 교구의 주교 펠릭스 비알라르 드 에르세(Félix Vialart de Herse)가 출판을 승인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책에 담긴 얀센주의적 경향이 드러나자 여러 주교들이 이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1703년 아프 주교 조제프-이냐스 드 포레스타(Joseph-Ignace de Foresta), 1704년 가프 주교 샤를-베냉 에르베(Charles-Bénigne Hervé), 1707년 브장송 주교 프랑수아-조제프 드 그라몽(François-Joseph de Grammont)과 네베르 주교 에두아르 바르제데(Édouard Bargedé)가 공개적으로 책을 비난했다.[10]

결국 신앙교리성은 《도덕적 성찰》을 교황 클레멘스 11세에게 보고했고, 교황은 이 책이 "얀센주의 이단의 냄새가 난다"고 판단하여 1708년 교황 칙서 Universi dominici|우니베르시 도미니치la를 반포하여 공식적으로 금서 목록에 올렸다.[10] 이에 따라 1710년에는 뤼송 주교 장-프랑수아 드 레스퀴르 드 발데릴(Jean-François de Lescure de Valderil)과 라 로셸 주교 에티엔 드 샹플루르(Étienne de Champflour)도 각자의 교구에서 이 책의 열람을 금지했다.[10] 같은 해, 루이 14세는 정치적인 이유로 얀센주의의 중심지였던 포르 루아얄 수도원을 폐쇄하며 얀센주의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10. 2. 양심의 문제: 1701-1709

교황 클레멘스 11세(1649–1721). 그는 1705년 사도 헌장 를 통해 '존경하는 침묵'을 단죄했다.


1701년, 클레르몽페랑의 한 사제가 제기한 '양심의 문제'(Cas de conscience)는 프랑스 로마 가톨릭교회 내부에 여전히 남아있던 얀센주의 관련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이 문제는 교회의 결정이 사실(de facto)에 있어서도 무류하다고 믿지 않는 성직자에게 고해성사를 줄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해당 성직자가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고 '존경하는 침묵'(silence respectueux)을 지키는 경우에도 문제가 되는지 물었다.

소르본 대학의 저명한 신학자 노엘 알렉상드르(Noël Alexandre)를 포함한 40명의 교수들은 해당 성직자에게 고해성사를 주는 것이 가능하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이 결정은 얀센주의에 반대하는 세력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다수의 프랑스 주교들, 특히 파리 대주교인 추기경 루이 앙투안 드 노아이유(Louis Antoine de Noailles), 그리고 루뱅, 두에, 파리의 신학 교수진들이 이 결정을 비난했다. 마침내 1703년, 교황 클레멘스 11세 역시 이를 공식적으로 규탄했다.

압박이 거세지자 '양심의 문제' 결정에 참여했던 소르본 교수들은 결국 자신들의 입장을 철회했다. 이 결정을 옹호했던 신학자 Nicolas Petitpied|니콜라 프티피에프랑스어는 소르본에서 추방당했다.

루이 14세와 그의 손자인 스페인펠리페 5세는 교황에게 직접 나서서, 교회의 사실 판단에 대해 '존경하는 침묵'을 지키는 것조차 용납될 수 없음을 명확히 하는 교황 칙서를 발표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얀센주의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보여준다.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이러한 요청에 응답하여 1705년 7월 16일, 사도 헌장 Vineam Domini Sabaothla를 발표했다. 이 헌장은 '존경하는 침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교회의 결정에 대한 완전한 내적 동의가 필요하다고 명시했다.

이후 열린 프랑스 성직자 총회(Assemblée du clergé)에서는 생퐁스드토미에르의 주교인 P.-장-프. 드 페르생 드 몽가이야르(P.-Jean-Fr. de Percin de Montgaillard)를 제외한 모든 참석자가 이 사도 헌장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루이 14세는 이 결정을 프랑스 내에서 구속력 있는 법으로 선포하여 얀센주의에 대한 압박을 더욱 강화했다. 이로써 클레멘스 평화 시기는 사실상 막을 내리고 얀센주의에 대한 새로운 박해가 시작될 기반이 마련되었다.

10. 3. 포르-로얄 해산과 《Unigenitus》 반포: 1708-1713

루이 14세는 얀센주의 사상의 거점이었던 포르-로얄 데 샹 수녀원의 해산을 추진했다. 교황의 승인을 받아 1708년에 이 목표를 달성했다.[10] 남아있던 수녀들은 1709년에 강제로 다른 프랑스 수녀원으로 흩어져 이주되었으며, 건물은 1709년에 철거되었다.
1709년 포르-로얄 데 샹 수녀원에서 강제로 이주되는 수녀들의 모습
파리의 포르-로얄 수녀원은 프랑스 혁명 시기 프랑스의 탈기독교화가 진행될 때까지 존속하다가 폐쇄되었다.

이러한 탄압 속에서 루이 14세는 얀센주의 운동을 왕의 절대주의 정권에 반대하는 '공화주의적 분파'로 규정하려 했다. 그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이용하여 1703년 메헬렌 대주교 움베르투스 기욤 드 프레시피아노를 통해 케넬을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투옥시키고 그의 문서를 압수했다.[3] 케넬은 탈출하여 암스테르담으로 도망쳐 여생을 보냈다.[3] 케넬이 프랑스 전역에 구축했던 서신망이 발각되어 얀센주의자들은 스페인령 네덜란드나 네덜란드 공화국 등 국외로 망명해야 했다.[3]

루이 14세는 교황 클레멘스 11세에게 케넬의 저서 Réflexions morales프랑스어에 대한 최종적인 단죄를 요청했다. 클레멘스 11세는 1708년 교황 칙서 Universi dominicila를 통해 이 책을 "얀센주의 이단을 담고 있다"며 금지했지만,[10] 이 문서는 파리 고등법원에 의해 등록되지 않았다.[10] 국왕의 고해 사제인 예수회 신부 미셸 르 텔리에가 주교들에게 공식적인 단죄를 요청하도록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루이 14세는 교황에게 직접 새로운 교황 칙서를 요청했다.[10]

이에 클레멘스 11세는 1713년 9월 8일 교황 칙서 ''Unigenitus Dei Filius''를 반포했다.[10] 이 칙서는 성 토마스 대학교(훗날 ''Angelicum'')의 강사였던 그레고리오 셀레리(Gregorio Selleri) 등이 초안 작성에 참여했다.[27] ''Unigenitus''는 케넬의 Réflexions morales프랑스어에서 추출된 101개의 명제를 이단으로 단죄했으며, 이 명제들이 이전에 단죄된 얀센의 명제들과 동일하다고 간주했다.[10] 이 칙서는 퀘넬의 저작 자체와 함께 얀센주의 교리의 요약으로 여겨지며 얀센주의를 효과적으로 단죄했다.[20]

11. 교황 칙서 《Unigenitus》의 수용

파스키에 케넬의 저서 Réflexions morales sur chaque verset|각 구절에 대한 도덕적 성찰프랑스어에서 발췌한 101개의 명제를 단죄한 교황 칙서 ''Unigenitus Dei Filius'' (1713년 9월 8일 반포)는 얀센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20] 이 칙서는 성 토마스 대학교(Angelicum) 강사였던 그레고리오 셀레리(Gregorio Selleri)가 초안 작성에 기여했으며,[27] 케넬의 저서에서 발췌된 101개 명제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이전에 얀센의 저작에서 단죄된 명제들과 동일시했다. 이 칙서는 단순히 은총 문제뿐만 아니라 갈리아주의와 에드몽 리셰의 신학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까지 단죄하여, 얀센주의자들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고 더 많은 신학자들이 얀센주의에 반대하게 만들었다. 칙서를 받아들인 이들은 "수용자"(accepteurs프랑스어)로 불렸다.

필리프 2세, 오를레앙 공작 (1674–1723). 프랑스 섭정으로서 그는 전임자 루이 14세의 정책을 이어받아 교황과 갈리아 성직자 양측에 얀센주의를 단죄하도록 압력을 넣으려 했다.


칙서 발표 직후, 루이 14세 통치 말기의 프랑스는 반발 분위기가 강했다. 칙서가 법적 효력을 갖기 위해서는 파리 고등법원에 등록되어야 했으나, 고등법원은 프랑스 주교들이 입장을 정할 때까지 비준을 거부했는데, 이는 종교 문제에 대한 정치 권력의 개입을 경계했기 때문이다.[20] 일부 주교들과 다수 신학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의회 소집을 공개적으로 요구하며 "소환자"(appelants프랑스어)라 불리게 되었다. 1713년부터 1731년까지 이 주제에 관한 1,000권 이상의 팜플렛이 출판될 정도로 논쟁은 격화되었다.

1715년 루이 14세가 사망하고 필리프 2세, 오를레앙 공작이 어린 루이 15세섭정이 되면서 상황은 잠시 변했다. 필리프 2세는 루이 14세와 달리 얀센주의에 대해 양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예수회에 비우호적이었고, 루이 14세의 고해사제였던 미셸 르 텔리에를 해임하고 얀센주의자로 의심받던 갈리아주의자 클로드 플뢰리를 루이 15세의 고해사제로 임명했다.[28] 이 시기 파리, 낭트, 랭스의 세 신학부는 이전에 결의했던 ''Unigenitus'' 수용을 철회했다. 섭정은 교황 클레멘스 11세에게 칙서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으나, 교황은 교황 무류성을 내세우며 거부했다. 결국 필리프 2세는 루이 14세의 정책을 계승해야 한다는 정치적 판단 아래, 교황과 갈리아 성직자 모두를 만족시킬 타협안을 모색했으나 이는 본질적으로 종교적 해결보다는 정치적 봉합에 가까웠다.[20]

익명의 18세기 판화. 파스키에 케넬을 괴물로 묘사하며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의인화가 그를 짓밟고 있다. 라틴어 문구는 케넬의 이름을 이용한 아크로스틱으로 "오류의 발톱인 파스키에 [...]에 대한 교회의 승리, 이제 거룩한 교회를 찢어발기고 있다"고 적혀 있다.


논의가 실패로 돌아가자 1717년 3월, 세네즈의 장 소아넨, 몽펠리에의 샤를 조아킴 콜베르, 미르푸아의 피에르 드 라 브루에, 불로뉴쉬르메르의 피에르 드 랑글 등 네 명의 주교가 소르본에 공증 문서를 제출하며 ''Unigenitus''에 대한 항소를 위해 공의회 소집을 공식 요구했다. 이들은 수백 명의 프랑스 사제, 수도사, 수녀들의 지지를 얻었으며, 고등법원의 지원도 받았다. 이들은 프랑스 성직자 선언(1682년)에 명시된, 공의회의 권위가 교황보다 우위에 있다는 갈리아주의 원칙에 근거했다. 종교 재판소는 1718년 이 항소를 단죄했고 교황은 ''Pastoralis officii'' 서신을 통해 항소 주교들과 소환자들을 파문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프랑스 성직자들의 반발을 키웠고, 그들은 ''Pastoralis officii'' 자체에 대해서도 공의회에 항소했다. 1719년에는 파리 대주교 루이 앙투안 드 노아이유 추기경까지 소환자 측에 합류하여 항소를 갱신했다.[3] 노아이유는 칙서가 단죄한 명제 중 일부는 원문의 맥락에서 벗어나면 정통 교리일 수 있다고 판단하여 칙서 수용을 거부했다. 결과적으로 1명의 추기경, 18명의 주교, 3,000명의 프랑스 성직자가 공의회 소집 항소를 지지했으나, 여전히 프랑스 성직자의 다수(4명의 추기경, 100명의 주교, 10만 명의 성직자)는 교황을 지지했다.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섭정 정부는 1722년부터 다시 얀센주의자를 위한 복종의 공식 서명을 의무화했다. 섭정기 이후에도 탄압은 이어져, 1724년부터 1725년까지 많은 소환자들이 국왕의 체포 명령서인 ''칙서''(lettres de cachet)에 의해 재판 없이 투옥되었다. 1727년, 케넬 사후 얀센주의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장 소아넨 주교는 엠브렝 시노드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라 셰즈듀로 추방되어 1740년 사망했다.[20] 얀센주의자들은 이를 '엠브렝의 강도 행위'(brigandage d'Embrun프랑스어)라 비판했다. 마침내 1728년, 노아이유 추기경은 교황에게 복종하고 ''Unigenitus''에 동의했다. 그의 후임 파리 대주교 샤를 가스파르 기욤 드 방티미유 뒤 룩은 약 300명의 얀센주의 성향 사제를 교구에서 추방하고 생말로르 신학교 등 관련 기관들을 폐쇄하며 저항을 억눌렀다.[3] 1730년, ''Unigenitus'' 칙서는 프랑스의 국가 법으로 선포되었고, 복종 공식 서명을 거부한 성직자들은 직위를 박탈당했다.

1717년에서 1728년 사이 소환 운동에는 7,000명이 넘는 성직자와 약 30명의 고위 성직자(이들의 관할 하에 약 10만 명의 평신도 포함)가 참여했다. 이들 모두가 얀센주의자는 아니었으나, 갈리아주의 성향의 성직자들은 교황 클레멘스 11세의 강경한 태도에 반발하여 운동에 동참했다. 18세기 초 프랑스에서 얀센주의자와 갈리아주의자들의 활동은 특정 지역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다.[3][8] 소환 운동은 1718년 정점에 달했을 때 45개 교구에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파리, 샬롱, 투르, 세네즈 및 오세르 교구와 리옹 대교구 등에서 두드러졌다.[29]

12. 얀센주의 대중화

17세기부터 얀센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고 신자들을 결집시키기 위해 기적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3] 1656년 블레즈 파스칼의 조카 마르그리트 페리에가 포르-로얄에서 '성스러운 가시'(Sainte-Épine프랑스어) 유물로 눈병을 치유받은 사건은[3] 얀센주의가 극심한 공격을 받던 시기에 발생하여, 얀센주의자들에게는 신의 개입과 승인으로 해석되었다. 이 기적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받아 잠시나마 얀센주의에 대한 탄압이 완화되는 계기가 되었다.[3] 이후에도 퐁샤토의 수도원장 유물과 관련된 치유 기적(1690년) 등[3] 여러 기적이 보고되면서, 얀센주의는 점차 기적과 결부된 대중적인 운동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특히 교황 클레멘스 11세의 칙서 ''Unigenitus''(1713년) 반포 이후, 교황청 및 프랑스 왕정과 얀센주의자들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기적 현상은 더욱 두드러졌다. 1725년 파리 생트-마르그리트 교구에서 일어난 마담 라포스(Madame Lafosse)의 치유 기적은 당시 ''항소파''(Appellants)로 불리던 얀센주의 성향의 사제가 직접 관여했으며, 이 이야기는 팸플릿과 판화를 통해 널리 유포되어 얀센주의의 대중적 영향력을 보여주었다.[3]

표지는 얀센주의 운동의 중요하고 지속적인 지하 언론이었던 ''Nouvelles ecclésiastiques''의 모습이다.


''항소파''의 활동은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얀센주의의 입장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수많은 팸플릿 발행을 통해 뒷받침되었다. 신자들은 오라토리오회 소속 비비앙 드 라 보르드(Vivien de La Borde)와 같은 사제들의 글을 읽으며 논쟁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형성하도록 권장받았다. 공개적이든 비밀리에 발행되든, 언론 매체는 얀센주의 논쟁을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얀센주의자들은 Supplément à la Gazette d'Hollande|쉬플레망 아 라 가제트 드 올랑드프랑스어('홀란드의 가제트 부록')과 같은 인쇄물을 통해 공개적인 논쟁에 참여했으며, 특히 Nouvelles ecclésiastiques|누벨 에클레지아스티크프랑스어('교회 소식')라는 주간지는 얀센주의 운동의 핵심적인 선전 수단이 되었다.[14] 이 주간지는 원래 손으로 써서 유포되다가 1728년부터 비밀리에 인쇄되기 시작하여, 전성기에는 주당 약 6천 부가 발행되어 프랑스 사회의 다양한 계층에 광범위하게 읽혔다. Nouvelles ecclésiastiques|누벨 에클레지아스티크프랑스어는 복잡한 신학 논쟁을 대중화하고 프랑스 전역의 얀센주의 그룹들을 연결하는 구심점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이 매체는 반예수회 정서를 확산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1762년부터 1764년 사이에 프랑스에서 예수회가 추방되는 여론을 형성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30] 이 신문은 프랑스 혁명 이후인 1803년까지 발행을 지속했다.

계속되는 박해 속에서 얀센주의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성서적으로 해석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독특한 해석학인 ''형상주의''(Figurisme프랑스어)를 발전시켰다. 이는 1710년경 오라토리오회 소속 자크 조제프 뒤게(Jacques Joseph Duguet)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3] 형상주의는 구약성경의 사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예표(豫表)했듯이, 성서의 다른 이야기와 예언들, 특히 요한계시록이 현재 또는 미래의 사건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해석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황과 교회의 오류로 간주된 칙서 ''Unigenitus''는 종말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대격변의 시작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엘리야의 재림과 그리스도천년왕국 도래로 이어질 것이며, 이 왕국에서는 선택받은 소수의 '진리의 친구들'(즉, 얀센주의자들)이 유효 은총의 교리를 수호하며 통치하고 유대인들도 마침내 개종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종말론적 세계관은 성직자들과 일반 신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얀센주의자들에게 자신들을 교회를 장악한 세력에 맞서 신성한 진리를 지키는 충성스러운 소수자로 인식하게 하고 박해를 견뎌낼 신학적 명분을 제공했다.[3]

이 외에도 얀센주의가 대중에게 확산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대중 교육과 빈민 구제 등 사회적 지원을 강조하는 그들의 목회 신학이 자리 잡고 있었다.[31] 얀센주의의 대중화는 때로는 생-메다르의 경련자 현상과 같은 극단적인 양상을 띠기도 했다.

12. 1. 생-메다르의 경련자 현상

1731년부터 얀센주의의 극적인 대중화는 ''경련자''(convulsionnaires프랑스어) 현상을 낳았다. 이 현상은 처음에는 파리 생-메다르 묘지에 묻힌 얀센주의 부제 프랑수아 드 파리의 무덤과 관련된 일련의 기적과 종교적 황홀경으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교황과 왕의 권위에 대한 반대의 표현으로 변모했다.[32][33][34] 1730년대에 경련 현상은 부르주아를 포함한 파리 시민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경련자가 바스티유 감옥에 갇힌 익명의 18세기 판화. 얀센주의의 이 특이한 표현은 적어도 18세기 프랑스의 왕실 절대주의 권력의 눈에는 정치적 저항과 관련되기도 했다.


더 큰 프랑스 얀센주의 운동과 더 작고 더 급진적인 경련자프랑스어 현상 사이의 연관성을 정확하게 정의하기는 어렵다. 브라이언 스트레이어(Brian Strayer)는 거의 모든 경련자프랑스어가 얀센주의자였지만, 얀센주의자 중 경련자프랑스어 현상을 받아들인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3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현상은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33][34]

스트레이어에 따르면, 경련자프랑스어들의 의식 형태는 1732년 이후 눈에 띄게 변화했다. 초기에는 기도, 노래, 치유 기적을 강조했지만, 이후 신자들은 '영적 결혼'(때로는 실제 자녀를 낳기도 함), 격렬한 경련, 그리고 세쿠르|secours프랑스어(에로틱하고 폭력적인 고문 형태)를 포함하는 행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는 운동이 점차 신경증적인 양상으로 변해갔음을 보여준다. 이 운동은 참회와 육체적 고행의 관행에서 "분명히 성적인 뉘앙스를 가진" 잔혹한 행위로 변질되었다.

1735년, 프랑스 고등법원(Parlement프랑스어)은 다시 경련자프랑스어에 대한 관할권을 되찾았고, 이는 운동이 비밀 종파의 지하 활동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경련자프랑스어 혁명가들이 고등법원을 전복하고 루이 15세를 암살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음모"가 좌절되기도 했다. 이후 "아우구스티누스파 경련자프랑스어"는 경찰의 감시를 피해 파리를 떠나야 했으며, 이는 얀센주의 운동을 더욱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32]

스트레이어에 따르면 1741년까지 경련자프랑스어 운동의 지도부는 대부분 사망하거나, 추방되거나, 투옥되었고 운동은 분열되었다. 경찰의 역할은 증가했고, 고등법원의 역할은 "얀센주의의 사회적 통제"에서 감소했지만, 비밀 결사체는 계속해서 의식, 고문, 묵시록적이고 반역적인 수사를 이어갔다. 스트레이어는 1757년에 기록된 극단적인 고문 사례들을 언급하는데, 한 여성은 "정원 삽, 쇠사슬, 망치, 빗자루로 맞고 [...] 칼로 찔리고, 돌을 던지고, [...] 산 채로 매장되고, [...]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른 1757년 사례에서는 한 여성이 "칼로 여러 번 베여" 괴저를 일으켰다. 1755년까지 프랑스에는 800명 미만의 경련자프랑스어가 남아 있었다. 1762년 고등법원은 그들의 일부 관행을 "인간의 생명에 '잠재적으로 위험한'" 것으로 보고 형사 처벌 대상으로 삼았다.[32] 마지막 십자가형은 1788년에 기록되었다.[32]

13. 고등법원 내 얀센주의

구체제의 고등법원, 특히 파리 고등법원은 오랫동안 로마의 권위에 맞서 프랑스 교회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갈리아주의의 전통적인 옹호자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얀센주의 논쟁이 시작된 이래 고등법원은 얀센주의자들에게 동조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교황이 얀센주의를 비난하며 내린 교서들의 등록을 거부하거나 지연시키는 방식으로 저항했다. 교황 칙서 ''Unigenitus''에 대한 고등법원의 완강한 저항은 이러한 관계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3]

고등법원과 얀센주의의 결합은 사회적 기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얀센주의는 17세기부터 법복 귀족 가문들 사이에서 폭넓은 지지를 얻었는데, 이들은 고등법원의 주요 구성원이기도 했다.[8] 루시앙 골드만은 이를 프롱드 이후 강화된 중앙 집권적 절대주의에 대한 법복 귀족들의 불만과 비판적 태도가 반영된 것으로 분석했다.[37] 또한 르네 타베노는 법복 귀족들의 개인주의적 성향과 내면적 신앙 및 엄격한 도덕성을 강조하는 얀센주의의 가르침이 서로 잘 부합했다고 지적한다.[35][36]

18세기에 들어 고등법원은 군주 권력에 대한 반발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얀센주의자들은 이러한 고등법원의 저항에서 중요한 동맹 세력을 발견했다. 얀센주의자들은 교황이나 주교의 부당한 권한 행사에 대해 '월권 상소'(appel comme d'abus프랑스어)라는 합법적인 수단을 통해 고등법원에 이의를 제기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펼쳤다. 고등법원의 얀센주의 성향 판사들은 얀센주의 옹호와 고등법원의 독립성 강화를 결합하여 투쟁했으며, 이는 갈리아주의를 지지하거나 왕권에 비판적인 다른 의원들의 지지를 얻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38]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얀센주의자들은 신학적인 논쟁보다는 정치적이고 법적인 투쟁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고, 점차 얀센주의는 고등법원의 정치적 반란과 동일시되면서 본래의 신학적 성격이 희미해지기도 했다.[38]

고등법원과 얀센주의자들의 연대는 18세기 프랑스 정치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고해 노트' 사건[39]과 같이 얀센주의를 탄압하려는 시도에 대해 고등법원은 강력히 반발하며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켰다. 또한 예수회 추방(1764년) 과정에서는 얀센주의자들이 고등법원과 협력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후 모푸 재상의 고등법원 개혁 시도에 맞선 투쟁에서도 양측은 긴밀히 연대했다. 이러한 고등법원의 저항과 얀센주의자들의 활동은 루소 등의 계몽사상과 결합하여 프랑스 혁명의 이념적 배경을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40]

13. 1. 얀센주의와 의회주의의 결합

1789년 프랑스 왕국의 의회와 최고 또는 상위 의회


구체제 하의 고등법원, 특히 파리 고등법원은 오랫동안 로마에 맞서 갈리아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해왔다. 얀센주의 논쟁이 시작된 이후, 고등법원은 얀센주의자들에게 동조하는 경향을 보이며, 얀센주의 운동을 비난하는 교황 교서의 등록을 꺼렸다.

이러한 경향은 교황 칙서 ''Unigenitus''의 반포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앙리 프랑수아 다게소는 이 교서의 반포가 교황의 오류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여겼다. 그는 의원들에게 교서를 즉시 받아들이지 말고 주교들의 반응을 기다리라고 권고했다. 결국 루이 14세는 특허장을 통해 교서 등록을 강제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18년 반포된 'Pastoralis officii' 교서는 고등법원에 의해 접수되지 않아, 단기적으로 '항소자들'(얀센주의 지지자)의 우려를 덜어주었다.[3] 사실, 1730년에는 ''Unigenitus''를 국법으로 등록하기 위해 국왕이 직접 참석하는 회의인 'lit de justice'를 열어야 할 정도로 의회의 저항이 거셌다.

르네 타베노[35]는 그의 저서 ''얀센주의와 정치''[36]에서 18세기 고등법원 의원들 사이에서 얀센주의자들이 상당수 활동했음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얀센주의는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부르주아 기반'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르노, 르메스트르, 파스칼과 같은 '법복 귀족' 가문들이 이 기반을 형성했다. 마리-조제 미셸 역시 운동 초기부터 엘리트 가문 전체가 포르-로얄과 얀센주의에 매료되었음을 지적하며 "엘리트의 얀센주의화 확산"을 언급했다.[8]

루시앙 골드만은 이를 프롱드 시기에 뿌리내린 계급 정신의 표현이자, 중앙 집권적인 절대주의 군주제에 대한 불만이 결합된 결과로 분석했다. 왕실 위원들의 권한 강화가 관료(부르주아 출신)들의 입지를 약화시키자, 이들이 점점 더 반체제적인 '세상으로부터의 비판적 후퇴'를 실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37] 타베노는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일부 수용하면서도, 얀센주의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만남의 장소'를 강조한다. 그는 법복 귀족이 구체제 하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영주 계층에서 벗어나 있었으며, 이러한 개인주의적 상황이 트리엔트 전례의 화려함과 대비되는 내면적 신앙 생활을 중시하고, 예수회 신학의 특징인 쉬운 성사 접근보다는 엄격한 도덕성을 강조하는 얀센주의와 쉽게 연결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얀센주의의 도시적 기반 역시 의회 부르주아지와의 결합을 용이하게 했다.

크리스토프 드 보몽(1703–1781), 프랑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얀센주의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고해 노트'를 도입한 파리 대주교


18세기 내내 파리 고등법원을 포함한 여러 고등법원들은 군주 권력에 지속적으로 반발했다. 이 때문에 얀센주의자들과 '상소자'들은 고등법원 구성원들을 중요한 동맹으로 여겼다. 얀센주의자들이 왕과 교황 모두에게 저항하는 주요 수단은 법적인 것이었다. 즉, 부당함에 항의하고 교황이나 주교의 특정 권한 행사에 이의를 제기하는 '월권 상소'(appel comme d'abus)였다. '상소자'들은 얀센주의 성향의 판사들이 얀센주의의 대의와 고등법원의 독립성을 결합시키기 위해 법적 수단과 논리를 사용할 수 있는 사법 기관인 고등법원에 자신들의 주장을 제기함으로써, 갈리아주의자이거나 왕권에 저항하는 다른 의원들의 지지를 얻었다.[38]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얀센주의 판사들은 신학적 담론이 판사 회의에서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종교적 신념에 대한 언급을 신중하게 피했다."[38] 이러한 이유로 얀센주의는 18세기 고등법원의 정치적 투쟁과 혼동되기 쉬웠고, 점차 그 신학적 성격은 희미해졌다. 고등법원 내 얀센주의자들의 수는 많지 않았다. 파리의 경우, 1730년대에 판사의 약 4분의 1 정도가 얀센주의자였으며, 이들 중에는 1732년 고등법원의 독립성 강화를 위해 두 차례의 총파업을 주도할 만큼 영향력 있는 변호사 그룹도 포함되어 있었다.[3]

영향력 있는 변호사 중 한 명인 루이 아드리앵 르 파주는 망명 특권을 가진 탕플 탑의 치안 판사였다. 그는 이 지위를 이용해 수많은 금지된 얀센주의 출판물을 보호하는 등 얀센주의 네트워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탕플에는 얀센주의자들의 자금을 보관하는 것으로 알려진 '페레트 상자'가 있었는데, 이는 반(反)얀센주의자들 사이에서 큰 호기심과 상상의 대상이었다. 또 다른 주요 인물은 '이등 변호사'라는 별명을 가진 가브리엘-니콜라 몰트로로, 그는 많은 '상소자' 사제들을 변호했다.

고등법원과 얀센주의가 관련된 가장 중요한 갈등 중 하나는 '고해 노트' 사건이었다. 1746년, 파리 대주교 크리스토프 드 보몽은 종부성사를 받으려는 신자들에게 ''Unigenitus''를 승인한 사제가 서명한 '고해 노트'를 제시하도록 요구했다. 이 조치는 거센 반대에 부딪혔고 많은 법적 항소가 제기되었으나, 왕의 평의회는 이를 기각했다. 1749년, 고해성사를 받지 못하고 사망한 얀센주의 성향 대학 교장의 장례식 이후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으며, 시위에 참여한 4천 명 중에는 많은 고등법원 구성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39]

18세기 후반의 중요한 사건인 1764년 예수회 추방은 일시적으로 얀센주의와 군주제를 결합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이후 얀센주의는 모푸 재상과 그의 삼두정이 고등법원 제도를 약화시키려는 정책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다시 고등법원 편에 섰다. 저항 운동의 가장 급진적인 구성원들은 프랑스 혁명 이전 시위의 선봉에 섰던 '애국 정당'에 합류했다. 이들의 투쟁과 요구가 장 자크 루소의 사상과 결합되면서 프랑스 혁명의 이념적 기반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다.[40]

13. 2. 얀센주의 대의와 18세기 의회 반란



구체제의 고등법원, 특히 파리 고등법원은 오랫동안 로마 교황청에 맞서 갈리아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얀센주의 논쟁이 시작된 이래, 고등법원은 얀센주의자들에게 동조하는 경향을 보였고, 이 운동을 비난하는 교황 교서를 등록하는 것을 꺼렸다.

이러한 경향은 교황 칙서 ''Unigenitus''의 반포를 계기로 더욱 뚜렷해졌다. 법무장관 앙리 프랑수아 다게소는 이 교서의 반포를 교황의 오류를 증명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는 의원들에게 이 교서를 받아들이지 말고 주교들의 반응을 기다리라고 권고했다. 루이 14세는 교서의 등록을 강제하기 위해 특허장을 사용해야 했으며, 1730년에는 의회의 저항이 워낙 커서 국법으로 교서를 등록하기 위해 국왕 임석 어전 회의가 필요했다.[3]

르네 타베노[35]는 그의 저서 ''얀센주의와 정치''[36]에서 18세기 의원들 사이에서 얀센주의자들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얀센주의는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부르주아 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르노, 르메스트르, 파스칼 등의 가문들이 이 기반을 형성했는데, 이들은 '법복 귀족'으로 여겨졌다. 마리-조제 미셸은 또한 운동 초창기부터 엘리트 가문 전체가 포르-로얄과 얀센주의에 매료된 점을 강조하며 "엘리트의 얀센주의화 확산"에 대해 언급했다.[8] 루시앙 골드만의 주장에 따르면, 이는 프롱드 기간에 뿌리내린 계급 정신의 표현이었으며, 중앙 집권적인 절대주의 군주제에 대한 불만이 함께 작용했다는 것이다. 왕립 위원들의 권한 강화가 관료(부르주아 출신)의 입지 약화로 이어지자, 후자들은 점점 더 반체제적인 '세상으로부터의 비판적 후퇴'를 실천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37] 타베노는 얀센주의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만남의 장소'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분석을 통해 이 해석을 완화하며, 부르주아 귀족은 구체제 하에서 자유로웠고, 영주 계층에서 벗어나 있었으며, 이러한 개인주의적 상황이 트리엔트 전례의 화려함과 대조되는 내면의 삶의 발전을 선호하고, 예수회 신학의 특징인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성사보다는 엄격한 도덕적 엄격주의를 선호하는 얀센주의 도덕과 쉽게 연관되었다고 주장한다. 얀센주의의 본질적으로 도시적인 기반 또한 얀센주의와 의회 부르주아지 사이의 이러한 '만남의 장소'를 가능하게 했다.

18세기 동안 파리 고등법원을 비롯한 고등법원들은 군주 권력에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다. 따라서 얀센주의자들과 '상소자'들은 법원 구성원들을 가까운 동맹으로 여겼다. 게다가 얀센주의자들이 왕과 교황 모두에게 저항하는 수단은 합법적인 것이었다. 즉, 불의에 항의하고 교황이나 주교가 특정 사항에 대해 권한을 행사할 권리를 부정하기 위한 '월권 상소'였다. '상소자'들은 얀센주의 판사들이 얀센주의 대의와 고등법원의 독립 옹호를 결합하기 위해 그들의 수사법과 법적 무기고를 사용할 사법 기관인 고등법원에 그들의 요구를 제기하여 갈리아주의자이거나 왕권에 저항하는 법원 구성원들의 지지를 얻었다.[38]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얀센주의 판사들은 신학적 담론이 판사 회의에서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종교적 신념에 대한 언급을 신중하게 피했다."[38] 따라서 얀센주의는 18세기의 끊임없는 고등법원 투쟁과 쉽게 혼동되었고, 그 신학적 성격은 희미해졌다. 수적으로 얀센주의자들의 존재는 미미했다. 파리의 경우, 1730년대에 판사의 약 4분의 1이 얀센주의자였으며, 이들 중에는 1732년에 고등법원의 독립을 강화하기 위해 그들의 직업에 대한 두 번의 총파업을 시작할 만큼 영향력 있는 변호사 그룹이 있었다.[3]

이러한 영향력 있는 변호사 중 한 명은 루이 아드리앵 르 파주였다. 그는 망명 권한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얀센주의 네트워크의 가장 중요한 허브 중 하나였으며, 수많은 금지된 출판물을 보호할 수 있는 권한을 활용했던 탕플 탑의 치안 판사였다. 탕플에는 또한 얀센주의자들의 자금 펀드를 담고 있는 유명한 '페레트 상자'가 보관되어 있었다. 이 상자는 반 얀센주의자들 사이에서 호기심과 상상의 대상이었다. 이들 변호사 중 다른 한 명은 '이등 변호사'라는 별명을 가진 가브리엘-니콜라 몰트로였는데, 그는 많은 '상소자' 사제들을 변호했기 때문이다.

고등법원 구성원들과 얀센주의를 포함하는 가장 중요한 갈등은 '고해 노트' 사건이었다. 1746년, 파리 대주교 크리스토프 드 보몽은 종부성사를 받기 위해 신자들이 'Unigenitus'를 승인한 사제가 서명한 '고해 노트'의 증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 조치는 주요 반대에 부딪혔고, 많은 법적 항소가 제기되었지만 왕의 평의회에 의해 기각되었다. 1749년, 고해성사를 받지 못한 채 사망한 얀센주의 단과대학 교장의 장례식 이후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시위에 참여한 4천 명 중에는 많은 고등법원 구성원들이 있었다.[39]

18세기 후반의 중요한 종교적 사건은 1764년 예수회 추방이었는데, 이는 한동안 얀센주의와 군주제를 결합시켰다. 그러나 얀센주의는 모푸 재상과 그의 삼두정이 고등법원 제도를 파괴하려는 정책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법원 구성원들의 편에 섰다. 반란의 가장 급진적인 구성원들은 프랑스 혁명 이전의 시위의 선봉인 '애국 정당'이라고 불리는 곳에 합류했다. 그들의 투쟁과 요구를 장 자크 루소의 주장과 통합한 것은 프랑스 혁명의 이념적 시작에 실질적인 내용을 부여했다.[40]

14. 얀센주의와 프랑스 혁명

''아베 그레구아르''—앙리 그레고르(1750–1831), 얀센주의 사제이자 프랑스 혁명 지도자


프랑스 혁명의 초기 지지자 중에는 갈리아주의, 얀센주의에 대한 동조, 그리고 에드몽 리셰르의 신학을 지지하는 인물들이 있었다.[42] 혁명에서 얀센주의자들이 보여준 역할은, 본질적으로 갈리아주의적 성향을 띤 후기 얀센주의의 교회론적 특징에서 비롯되었다. 얀센주의 성직자들은 혁명 초기에 1789년 삼부회에서 제3 신분에 합류하여 국민 의회 선언에 기여했으며, 앙리 그레고르 신부가 이들을 이끌었다. 그레고르와 같은 인물들은 혁명을 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보기도 했다.[41]

얀센주의자들은 성직자 민사 헌장 제정 과정에도 깊이 관여했는데, 이 헌장은 교황의 영향력을 축소하고 갈리아 교회의 자율성을 강화하는 등 여러 면에서 얀센주의자들의 오랜 요구와 일치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42] 이들에게 성직자 민사 헌장은 18세기 내내 이어진 종교적, 의회적 투쟁의 결실로 여겨졌다. 그러나 모든 얀센주의자들이 혁명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으며, 일부는 성직자 민사 헌장과 혁명 자체에 강하게 반대하기도 했다.[43]

교황 칙서가 프랑스에 의해 교황에게 반환되는 18세기의 익명 풍자 판화, 인간 및 시민의 권리 선언 (1789)에 의해 강화됨. 교황 칙서에 대한 역사적 얀센주의의 반대는 혁명적 반성직주의와 일치했다.


혁명 이후, 얀센주의는 혁명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했다. 반혁명가들과 울트라몬탄주의자들은 얀센주의의 저항 정신, 엄격주의, 갈리아주의적 성향이 군주제와 교회의 권위를 약화시켜 혁명을 초래했다고 비판했다.[46] 반면, 19세기 공화주의 역사가들은 절대 군주제에 맞선 얀센주의의 투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혁명의 사상적 배경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현대 역사가들은 얀센주의가 혁명의 여러 원인 중 하나였을 뿐이며, 그 영향력은 복합적인 요인 속에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보인다.[43] 얀센주의자들 사이에 존재했던 저항의 전통과, 혁명을 주도했던 법률 및 의회 부르주아지가 18세기 얀센주의 지지 세력과 사회적 기반을 공유했다는 점은 얀센주의와 혁명 사이의 중요한 연결고리로 평가된다.

14. 1. 성직자 민사 헌장에서 얀센주의자들의 역할



프랑스 혁명의 초기 지지자들 중에는 갈리아주의, 얀센주의에 대한 동조, 그리고 에드몽 리셰르의 신학에 대한 다소 뚜렷한 지지를 보인 인물들이 있었다. 얀센주의자들이 혁명에서 맡은 역할은, 본질적으로 갈리아주의 성향을 보인 후기 얀센주의의 교회론적 특징에서 비롯되었다.

얀센주의 성직자들의 역할은 혁명 초창기부터 주목받았다. 실제로, 1789년 삼부회 회합에서 몇몇 성직자들이 제3 신분에 합류하지 않았다면, 1789년 6월 17일에 제3 신분이 스스로를 국민 의회로 선언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들 성직자들은 포르 로얄과 얀센주의에 대한 애착으로 알려진 앙리 그레구아르 신부가 이끌었다. 그레구아르는 얀센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역사를 형상주의적으로 해석했으며, 이는 혁명이 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의 일부라는 그의 발언의 기초가 되었다. 그레구아르와 혁명에 우호적인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주로 갈리아주의자들과 파를망(고등법원) 출신의 다른 얀센주의자들이 모였다. 루이 아드리앙 르 파주 역시 대체로 혁명에 우호적이었다. 마찬가지로, 유명한 의원이었던 아르망-가스통 카뮈와 장-드니 란쥐네는 얀센주의에 헌신하면서 혁명적 사건에 깊이 관여했다. 특히 란쥐네는 성직자 민사 헌장을 준비한 교회 위원회의 일원이었다. 이 헌장의 초안 작성에 얀센주의자들이 중요했던 점은, 헌장이 많은 부분에서 그들의 요구에 부응했기 때문이다. 이는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 신부가 "혁명에서 포르 로얄의 신학적 중요성을 높이고 그의 적들의 무덤 위에 얀세니우스의 신격화를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겼던 이들을 비판하게 만들었다.[41] 성직자 민사 헌장은 여러 면에서 얀센주의자들을 만족시켰다. 예를 들어, 교구 밖 주교 거주나 비 교회법적 교구 설정과 같이 널리 비판받던 관행을 폐지했다. 헌장은 교구 시노드를 복원하고 교황의 영향력을 상당히 축소했으며, Regiminis Apostolicila와 같은 복종 공식을 비난했다. 또한, 헌장은 갈리아 교회의 선거 제도를 확립하고, 고위 성직자에 대한 사제의 종속보다는 협력을 장려함으로써 저위 성직자들에게 만족감을 주었다.[42]

이러한 얀센주의자들에게 성직자 민사 헌장과 그에 따른 모든 교회 관련 입법은 18세기 내내 이어진 종교적, 의회적 투쟁의 정점으로 여겨졌다. 역사가 데일 K. 반 클레이는 갈리아주의적 얀센주의자들이 혁명 초기 프랑스의 이해관계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특히 카뮈가 발전시킨 주장을 중심으로 다음 다섯 가지 사항으로 설명한다.[42]

  • 교회 재산의 관리는 성직자 위계에 속하지만, 소유권은 프랑스 전체 교회에 속한다. 여기서 재산과 재화는 물질적 자산뿐 아니라 '영적 열쇠', 즉 가톨릭교회의 성사 집전권과 파문권까지 포함한다.
  • 교회는 성직자 계층뿐 아니라 모든 로마 가톨릭 신자로 구성된다. 당시 프랑스는 거의 전적으로 로마 가톨릭 신자였으므로, 모든 프랑스인을 대표하는 국민 의회가 교회를 대표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따라서 교회 재산은 국가 재산으로 선언될 수 있었고, 국가 부채 상환이나 사제 및 주교 급여 지급을 위해 매각될 수 있었다.
  • 이는 교회의 권한 찬탈이 아니었다. 국가는 교회의 사명 중 공적이고 외부적이며 세속적인 측면에만 관여했을 뿐, 영적인 측면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국민 의회가 수도회를 폐지하고 교회 행정 구역을 재조정하며 1515년 볼로냐 협약을 폐기했을 때에도, 이것이 교회의 영적 사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라고 부인했다.
  • 교회 통치권 폐지는 서품 성사가 순전히 영적인 것이며, 서품을 받은 이에게 설교하고 성사를 집행할 무제한적인 권한을 부여한다는 점에 근거하여 정당화되었다. 반면, 이 권한의 실제 행사는 세속적인 영역에 속하므로 의회의 관할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의회에 복종하지 않는 사제는 교구 배정을 거부당할 수 있었다.
  • 카뮈는 더 나아가 초대 교회가 세속 권력과 분리된 영적 권위의 모델이었으며, 따라서 헌법 교회는 이러한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헌법을 정당화했다. 이에 따라 교회는 다른 주교보다 우월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교황의 승인 없이도 운영될 수 있었다.


국민 제헌 의회가 성직자 민사 헌장 (1790)에 투표하는 모습. 반대하는 성직자들은 반헌법적인 독설을 퍼붓는 모습으로, 지지하는 성직자들은 헌법, 프랑스, 법률, 국왕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성직자 민사 헌장에 나타난 얀센주의와 갈리아주의의 영향은 새로 임명된 헌법 주교들이 얀센주의자 또는 최소한 얀센주의 동조자로 여겨진 이유를 설명해준다.[43] 따라서, '사실상' 헌법 교회의 수장이었던 블루아 주교 아베 그레구아르 외에도, 클로드 르 코즈, 장-밥티스트 피에르 사린, 루이 샤리에 드 라 로슈 등 약 15명의 주교들이 반드시 '항소파'는 아니었지만 얀센주의 및 리셰르주의와 강하게 동일시되었다.

평신도와 성직자들은 혁명 기간 동안 종교 연구를 수행한 Société de philosophie chrétienne|기독교 철학회프랑스어에 참여했다.[44] 혁명 말기, 이 학회는 갈리아주의 및 얀센주의 성향의 저널인 Annales de la religion|종교 연보프랑스어를 출판했는데, 여기에는 아베 그레구아르의 ''포르-로얄-데-샹의 폐허, 1801년'' 초판이 실리기도 했다. 학회 회원들은 종종 포르-로얄-데-샹에 머물며 사색했으며, 이탈리아 얀센주의자인 외스타슈 드골라(Eustache Degola)와 스키피오네 데 리치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혁명을 완전히 거부한 얀센주의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성직자 중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앙리 자비노(Henri Jabineau)와 돔 드포리(Dom Deforis)였다. 또한 아베 메이(Mayet), 달레아스(Daléas) 및 오라토리오회 소속 리옹 성직자들처럼 성직자 민사 헌장에 강력히 반대한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교회법 학자인 가브리엘-니콜라 몰트로(Gabriel-Nicolas Maultrot)와 리옹의 니콜라 베르가스(Nicolas Bergasse) 또는 파리의 루이 실비(Louis Silvy)와 같은 경건한 평신도들의 지지를 받았다. 오귀스탱-장-샤를 클레망(Augustin-Jean-Charles Clément)과 같은 주목할 만한 얀센주의자는 헌법에 대한 충성 맹세를 했지만, 매우 주저했다.[43]

"국민제헌의회가 시작을 알리는 격렬한 논쟁과 주요 국가 법안에 대한 투표를 마치고 나면 성직자 시민 헌법을 다룰 것이오. 얀센주의적 영감이 새로운 교회의 조직을 이끌 것이오. 카뮈는 루이 14세를 이길 것이고, 교회 위원회는 포르-로얄의 유해에 복수할 것이며, 초기 교회의 조직으로 돌아갈 것을 그렇게 많이 말했던 얀센주의 입법자들은 사실상 그것을 순교로 되돌릴 것이오."[45] (아베 시카르, ''L'Ancien clergé de France'', 1893)
얀센주의가 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닐지라도, 혁명 발발에 필요한 정신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는 주장이 자주 제기된다.[42] 이러한 비난은 얀센주의자를 프로테스탄트 및 프리메이슨과 함께 프랑스 군주제 몰락의 주범으로 간주한 반혁명가들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다. 비록 그 근거는 잘못되었을 수 있으나, 얀센주의와 혁명 사이에는 강력한 연관성이 존재했다.

19세기 반혁명가들과 울트라몬탄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얀센주의가 혁명을 준비하고 동반했다고 비난했다.[46]

  • 얀센주의는 선동적인 정신을 유지했다. 교황과 왕에 대한 반항과 저항은 대중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대중은 얀센주의자들의 종교적 태도를 정치 영역에서 모방할 수 있었다.
  • 얀센주의는 신자들을 신앙에서 멀어지게 했다. 신자들은 엄격한 얀센주의 사제의 요구를 따르기보다 종교 자체를 멀리하는 쪽을 택했다. 이러한 비난은 혁명 기간 동안 '아펠랑'(항소파) 성직자와 헌법 성직자의 지리적 분포가 탈기독교화 지역 분포와 유사하다는 점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 상관관계는 해석하기 어렵다.
  • 얀센주의는 갈리아주의와 결합하여, 국가 통제하의 교회를 지지하는 헌법파 성직자와 교황 비오 6세의 성직자 민사 헌장 단죄를 따르는 '비선서파 성직자' 사이의 분열을 초래함으로써 혁명 당시 프랑스 교회를 분열시킨 원인이 되었다.
  • 마지막으로, 얀센주의는 종종 공화주의와 연관되었다. 얀센주의자들이 궁정 생활과 거리를 두었고, 포르 로얄의 '솔리테르'(은둔자)들이 '문학 공화국'과 같은 공동체적 이미지를 보여주었으며, 아베 그레구아르 같은 혁명기의 주요 인물들이 포르-로얄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19세기의 공화주의자들은 절대 군주제와 왕권에 맞서 싸운 운동으로서 포르-로얄과 얀센주의에 매우 호의적이었으며, 얀센주의자들이 혁명 발발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는 주장을 지지했다. 따라서 쥘 미슐레, 루이 블랑, 앙리 마르탱, 샤를루이 샤생 등은 혁명의 얀센주의적 기원을 주장했다.

종교적 영역을 넘어 얀센주의와 혁명을 연결 짓는다면, 이는 얀센주의자들 사이에 저항의 전통이 있었고, 사회적으로 혁명을 주도했던 세력(법조계 및 의회 관련 부르주아지)이 18세기에 '아펠랑'(항소파)을 지지했던 이들과 사회적 기반이 같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일부(주로 예수회 측 인사들)는 군주제의 권력을 전복하려는 얀센주의 음모가 존재했다고 확신했다.[47] 20세기 초, 루이 마들랭과 알베르 마티에 같은 역사가들은 이러한 얀센주의 음모론을 반박하며, 혁명 발발과 성직자 민사 헌장 제정에는 여러 세력과 요구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음을 강조했다.[43] 얀센주의가 혁명의 여러 원인 중 하나였다는 설명이 현재 역사가들 사이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14. 2. 혁명에서 얀센주의 개입 분석



프랑스 혁명 초기 지지자 중에는 갈리아주의와 얀센주의에 동조하며 에드몽 리셰르의 신학을 지지하는 인물들이 있었다. 혁명에서 얀센주의자들의 역할은 주로 후기 얀센주의의 교회론적, 갈리아주의적 성격에서 비롯되었다.

얀센주의 성직자들의 역할은 혁명 초기부터 두드러졌다. 1789년 삼부회 소집 당시, 몇몇 성직자들이 제3 신분에 합류하지 않았다면 1789년 6월 17일 국민 의회 선언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들을 이끈 인물은 포르 로얄과 얀센주의에 대한 애착으로 잘 알려진 앙리 그레고르 신부였다. 그레고르는 얀센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역사를 형상주의적으로 해석했으며, 이는 혁명이 신의 뜻을 이루는 과정의 일부라는 그의 믿음의 바탕이 되었다. 그레고르와 혁명에 우호적인 성직자들 주변에는 갈리아주의자들과 고등법원 출신의 얀센주의자들이 모여들었다. 루이 아드리앵 르 파주 역시 대체로 혁명에 우호적이었으며, 유명한 의원이었던 아르망-가스통 카뮈와 장-드니 란쥐네는 얀센주의에 헌신하며 혁명에 깊이 관여했다. 특히 란쥐네는 성직자 민사 헌장을 준비한 교회 위원회 소속이었다. 이 헌장 초안 작성에 얀센주의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헌장이 여러 면에서 그들의 요구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이는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 신부가 "혁명에서 포르 로얄의 신학적 중요성을 높이고 그의 적들의 무덤 위에 얀세니우스의 신격화를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았다고 비판할 정도였다.[41] 성직자 민사 헌장은 교구 밖 주교 거주나 비 교회법적 교구 설정 같은 폐단을 없애고, 교구 시노드를 복원했으며, 교황의 영향력을 줄이고 레지미니스 아포스톨리치와 같은 공식을 비난하는 등 여러 면에서 얀센주의자들을 만족시켰다. 또한 갈리아 교회의 선거제를 확립하고, 사제와 고위 성직자 간의 협력을 장려하여 부유한 성직자들의 지지를 얻었다.[42]

이러한 얀센주의자들에게 성직자 민사 헌장과 그에 따른 교회 헌장은 18세기 종교 및 의회 투쟁의 정점이었다. 데일 K. 반 클레이는 갈리아 얀센주의와 혁명 초기 프랑스의 이해관계를 결합시킨 다섯 가지 사항을 지적한다.[42]

  • 교회 재산 관리는 위계에 속하지만, 소유권은 프랑스 전체 교회에 속한다. 재산에는 물질적 재화뿐 아니라 '영적 열쇠'(성사 집행권, 파문권)도 포함된다.
  • 교회는 성직자뿐 아니라 모든 로마 가톨릭 신자로 구성되었다. 프랑스는 거의 전적으로 로마 가톨릭 국가이므로, 모든 프랑스인을 대표하는 국민 의회는 교회를 대표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 재산은 국가 재산으로 선언되어 국가 부채 상환이나 성직자 급여 지급에 사용될 수 있었다.
  • 국가는 교회의 공적, 외부적, 세속적 측면에만 관여하며 영적 측면은 침해하지 않는다. 수도회 폐지, 교구 재편, 볼로냐 협약 폐지 등도 교회의 영적 사명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 교회 통치권 폐지는 서품 성사가 순전히 영적이며 무제한적인 설교 및 성사 집행 권한을 부여한다는 점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 권한의 실제 행사는 세속적이므로 의회의 책임이다. 따라서 의회에 불복종하는 사제는 교구를 거부당할 수 있었다.
  • 카뮈는 초대 교회가 세속과 분리된 영적 권위의 모델이었으며, 헌법 교회는 이러한 순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헌법을 정당화했다. 따라서 교회는 다른 주교보다 우월하지 않은 교황의 승인 없이도 운영될 수 있었다.


성직자 민사 헌장에 나타난 얀센주의와 갈리아주의의 영향력 때문에 새로운 헌법 주교들이 얀센주의자로 분류되거나 적어도 얀센주의 동조자로 분류된 이유를 설명한다.[43] 따라서, 블루아의 주교이자 헌법 교회의 '사실상' 수장인 아베 그레고르 외에, 클로드 데베르티에, 장-밥티스트 피에르 사린, 루이 샤리에 드 라 로슈, 그리고 반드시 "탄원자"는 아니지만, 얀센주의와 리셰르와 강하게 동일시한 약 15명의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평신도와 성직자들은 혁명 기간 동안 종교 연구를 수행한 '기독교 철학회'(Société de philosophie chrétiennefra)에 합류했다.[44] 혁명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이 사회는 아베 그레고르의 ''포르-로얄-데-샹의 폐허, 1801년''의 첫 번째 버전을 게재한 갈리아주의적이고 얀센주의적인 저널인 '종교 연보'(Annales de la religionfra)을 출판했다. 이 사회의 회원들은 포르-로얄-데-샹에서 숙소를 마련하여 숙고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탈리아 얀센주의자 외스타슈 드골라(Eustache Degola)와 스키피오네 데 리치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혁명을 완전히 거부한 얀센주의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성직자 중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앙리 자비노(Henri Jabineau)와 돔 드포리(Dom Deforis)였다. 그러나 아베 메이(May), 달레아스(Daléas), 그리고 오라토리오회리옹 성직자들과 같은 다른 사람들도 성직자 민사 헌장에 매우 반대했다. 그들은 교회법 학자인 가브리엘-니콜라 몰트로와 리옹의 니콜라 베르가스 또는 파리의 루이 실비(Louis Silvy)와 같은 경건한 평신도들의 지원을 받았다. 오귀스탱-장-샤를 클레망(Augustin-Jean-Charles Clément)과 같은 주목할 만한 얀센주의자는 헌법에 충성 맹세를 했지만, 매우 망설였다.[43]

얀센주의는 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혁명 발발에 필요한 정신 상태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42] 이러한 주장은 얀센주의자를 프로테스탄트, 프리메이슨과 함께 프랑스 군주제 몰락의 주범으로 본 반혁명가들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다. 비록 그 근거는 편향되었지만, 얀센주의와 혁명 사이에는 분명한 연관성이 존재했다.

19세기 반혁명가들과 울트라몬탄주의자들은 얀센주의가 다음과 같은 이유로 혁명을 준비하고 동반했다고 비난했다.[46]

  • 선동적인 정신 유지: 교황과 왕에 대한 저항 정신이 대중에게 영향을 미쳐 정치적 저항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주장.
  • 신자들의 이탈 조장: 엄격한 얀센주의적 요구를 피해 종교에서 멀어지게 했다는 비판. 이는 혁명기 '아펠랑'(항소파) 및 헌법 성직자 분포와 탈기독교화 지역 간의 상관관계에 근거하지만, 해석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 갈리아주의와의 연관: 국가 교회를 지지하는 헌법 성직자와 교황 비오 6세의 헌장 단죄를 따르는 '저항 성직자' 사이의 분열을 야기했다는 비판.
  • 공화주의와의 연관성: 궁정 생활에서의 이탈, '솔리테르'(은둔자)들의 '문학 공화국' 이미지, 아베 그레고르 같은 혁명 지도자들의 포르-로얄 애착 등이 근거로 제시되었다.


반면, 19세기 공화주의자들은 절대 군주제에 맞선 운동으로서 포르-로얄과 얀센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얀센주의자들이 혁명 발발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쥘 미슐레, 루이 블랑, 앙리 마르탱, 샤를루이 샤생(Charles-Louis Chassin) 등은 혁명의 얀센주의적 기원을 강조했다.

종교적 영역 외적으로 얀센주의와 혁명을 연결하는 근거는 얀센주의자들 사이에 존재했던 저항의 전통과, 사회적으로 혁명을 주도했던 계층(법률 및 의회 부르주아지)이 18세기 '아펠랑'을 지지했던 계층과 상당 부분 겹친다는 점이다.

일부(주로 예수회)에서는 군주제 전복을 노린 얀센주의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했다.[47] 그러나 20세기 초 루이 마들랭(Louis Madelin)과 알베르 마티에(Albert Mathiez) 같은 역사가들은 이러한 음모론을 반박하며, 혁명 발발과 성직자 민사 헌법 제정은 여러 세력과 요구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임을 강조했다.[43] 현재 역사가들은 얀센주의가 혁명의 여러 원인 중 하나였을 뿐이라는 견해를 공유한다.

15. 프랑스 외 지역의 얀센주의

얀센주의는 그 기원이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루뱅 지역 신학자 미셸 바이우스와 이프르 주교 코르넬리우스 얀센에게 있는 만큼, 처음부터 프랑스에만 국한된 사상은 아니었다. 은총에 관한 신학적 문제는 17세기 당시 모든 로마 가톨릭 국가의 관심사였으나, 얀센주의 논쟁의 초기 중심지는 주로 프랑스였다.[3]

얀센주의가 본격적으로 프랑스 외부로 확산된 계기는 교황 클레멘스 11세가 1713년에 반포한 교황 칙서 Unigenitusla였다.[3] 이 칙서는 프랑스 내 얀센주의를 겨냥했지만, 결과적으로 얀센주의 사상이 다른 유럽 지역으로 퍼져나가는 데 영향을 미쳤다. 주요 확산 지역으로는 얀센주의의 발상지이기도 한 스페인령 네덜란드(특히 루뱅), 많은 프랑스 얀센주의자들이 피난처를 찾았던 네덜란드 공화국, 그리고 이탈리아 북부 등이 있다.

특히 네덜란드 공화국에서는 얀센주의의 영향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된 구 가톨릭 교회가 형성되기도 했다. 이처럼 얀센주의는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역의 가톨릭 신앙과 문화에 장기간 영향을 미쳤으며, 그 영향력은 20세기 초까지 이어졌다.

15. 1. 스페인 네덜란드 - 루뱅

코르넬리우스 얀센(Cornelius Jansen, 1585–1638)의 초상화. 얀센의 모교인 (구) 루뱅 대학교는 얀센주의 신학의 주요 중심지가 되었다.


얀센주의는 코르넬리우스 얀센 자신이 활동했던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초기에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48] 얀센주의는 메헬렌 대주교인 야코부스 분과 겐트 주교인 안토니 트리스트와 같은 교회 고위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비록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교회는 결국 얀센주의를 박해하여 얀센주의 성직자들이 반대자들로 대체되고, 이프르 대성당에 있던 얀센의 기념비가 1656년에 상징적으로 철거되었지만, 스페인 당국은 프랑스보다 얀센주의 박해에 덜 열성적이었다.

얀센의 모교인 (구) 루뱅 대학교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출판했으며, 얀센 시대 이후로 아우구스티누스주의적 성향을 유지했다. 교황들은 루뱅 대학교에 덜 엄격했는데, 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같은 밀접한 정치적 관계를 맺지 않았기 때문이다. 1677년, 신학부의 바이우스주의자 분파는 교황 인노첸시오 11세에게 도덕적 해이에 관한 116개의 명제를 제안하여 비난을 받았다. 이 명제들은 루뱅 대학교 교수들의 고발 서신에서 발췌되었기 때문에, 로마 당국은 모호하다고 여겨지는 이 명제들의 진정한 기원에 대한 의문을 다루는 논문을 억압했다.[49] 인노첸시오 11세는 제출된 명제 중 65개를 선택하여 “도덕 교리의 일탈을 비난하는 데 그쳤으며”[25] 은총에 대한 논쟁의 부활을 피했다.[49] 65개의 명제는 “최소한 스캔들이고 실행에 해롭다”고 묘사되었고, 교황은 1679년 3월 종교 재판 법령을 통해 이를 비난했지만[49][25] “예수회 서클에서 만연한 가톨릭 확률주의를 언급하지 않았다.”[50] 신앙교리성은 이전에 1665년 9월 24일과 1666년 3월 18일의 두 법령 사이에서 45개의 도덕 교리에 대한 명제를 비난했다. 하인리히 요제프 도미니쿠스 덴징거(Heinrich Joseph Dominicus Denzinger)에 따르면, “루뱅 대학교와 파리 대학교에서 제출된 명제들은 맥락에서 자주 벗어나 때로는 원본에서 발견되지 않는 요소로 확장되었으며, 대부분 가공의 저자를 언급해야 했다.”

1690년대까지는 알렉산데르 7세 교황의 칙서를 ''법률상(de jure)'' 및 ''사실상(de facto)'' 문제에 대해 그 해석을 명시하지 않고 서명하는 것이 가능했다. 메헬렌의 훔베르투스 기렐무스 데 프레치피아노 대주교는 두 번이나 서명 조건을 강화하려 했지만, 대학교와의 소송에서 패했다. 칙서의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서명이 강제된 것은 1710년이 되어서였다.

교황 칙서 ''Unigenitus''는 1715년부터 아무런 의문 없이 받아들여졌지만, 교황 클레멘스 11세의 편지 ''Pastoralis officii''는 메헬렌 대주교와 대학교 사이에 격렬한 갈등을 일으켰다. 법적 절차, 1740년대 프랑스에서 발생한 것과 유사한 성사 거부 사건, 그리고 교수들의 네덜란드 공화국으로의 추방 등 갈등을 겪은 후, 대학교는 1730년에 이르러 교황 칙서와 그 교황적 해석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였다.[39]

루뱅 대학교는 졸업생 바이우스와 얀센 때문에 얀센주의의 요람이었으며, 17세기와 18세기 동안, 억압될 때까지 유럽에서 얀센주의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의 요새[51]이자 중심지[52]로 남아 있었다. 얀센, 페트루스 스톡만스, 요하네스 반 네르카셀, 요세 르 플라트와 같은 교수들과 특히 유명한 제거르 베르나르트 판 에스펜과 그의 제자들인 요한 니클라우스 폰 혼트하임 또는 샤를 조제프 마티외 람브레히트, 법학 교수이자 1786년 대학교 총장, 프리메이슨[54][55] 그리고 나폴레옹 치하 프랑스 총재정부의 법무부 장관이 있었다. 앙리 프랑코테는 “루뱅 대학교에서 얀센주의가 최고로 군림했다”고 말한다.[56]

1818년 늦게까지, 대학교 전 총장, 전 상원 의원, 그리고 나폴레옹의 장관이었던 샤를 람브레히트는 그의 전임자 판 에스펜에 대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괴롭힘’을 회상했다.

가톨릭 성직자들의 침해와 그들의 허세는 너무나 괴로워서, 그들의 종교가 지배적이었던 시대에, 그들의 권력 남용에 대한 다른 해결책은 문제가 된 상소 외에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것이 유명한 판 에스펜이 80세의 나이에 자신의 저서 ''De recursu ad Principem''을 써서 성직자 관할권의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남용에 대한 장벽을 세우도록 촉구한 이유였다. 그러나 루뱅 대학교에서 그가 점유했던 교회법 강좌에서 나오는 모든 수입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던 이 훌륭한 성직자는 곧 악용에서와 같은 상소에 의존해야 했다. 그러나 이 해결책은 그를 불관용적인 사제들의 박해로부터 완전히 구원할 수 없었다. 나이와 영광, 그리고 병으로 짓눌린 그는 그들의 괴롭힘으로부터 피난처를 구하기 위해 홀란드로 가야만 했다. 그는 곧 암스테르담에서 경건함과 체념의 감정 속에서 죽었는데, 이는 그가 초기 교회의 규율과 관습을 옹호하며 일생을 보냈기 때문이며, 그는 그중 가장 열성적인 사람이었다.[57]

15. 2.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네덜란드 공화국은 많은 프랑스 얀센주의자들의 망명지였다. 이들은 처음에는 암스테르담에 모였으나, 점차 위트레흐트로 이동하는 경향을 보였다. 16세기부터 위트레흐트는 주로 개혁주의 기독교로 개종한 네덜란드인들을 다시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기 위한 네덜란드 선교의 중심지였다. 프랑스와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온 얀센주의 난민들은 환영받았고, 이는 네덜란드 로마 가톨릭교도들 사이에서 얀센주의의 영향력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결과적으로 네덜란드 선교는 신학과 도덕에서 강력한 얀센주의적 요소를 띠게 되었다.[48] 정치적으로 네덜란드 얀센주의자들은 다른 로마 가톨릭교도들보다 프로테스탄트 당국과 타협하려는 경향이 더 강했으며, 교황의 통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보였다.[48] 또한 신학적으로 얀센주의 교리는 네덜란드에서 지배적이었던 개혁주의 기독교에 더 가깝다고 여겨졌다. 네덜란드 얀센주의(때때로 파스키에 케넬의 이름을 따 '케넬주의'라고도 불림)는 반대자들로부터 '교회 내부의 암호 칼뱅주의'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48] 얀센주의자와 반얀센주의자(예수회가 주도) 사이의 논쟁은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 네덜란드 로마 가톨릭 교회를 점점 더 분열시켰다. 이 과정에는 네덜란드 공화국 당국뿐만 아니라 교황청과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폴란드의 왕들도 개입했다. 교황의 통제로부터 더 큰 독립을 추구하는 일부 네덜란드 로마 가톨릭교도들은 얀센주의의 신학 교리를 반드시 따르지 않더라도 '얀센주의자'로 간주되기도 했다.[48]

1680년대에 이르러 공화국 내 예수회와 로마 가톨릭 성직자에 대한 반대는 네덜란드 로마 가톨릭교도들 사이에서 교황의 권위에서 벗어나 지역적 환경에 적응하려는 '민족적인 태도'를 촉발했다.[48] 로마 가톨릭교의 소수 지위는 역설적으로 지역 교회에 더 큰 자유를 허용하는 결과를 낳았다. 지역 교회는 자체적으로 주교를 선출하여 교황의 승인을 받았는데, 비록 정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사도 대리'라는 칭호만 사용했지만, 이는 상당한 자율성을 의미했다. 위트레흐트와 프랑스 얀센주의 사이의 관계는 일찍부터 발전했다. 사도 대리였던 요하네스 판 네르카셀은 앙투안 아르노와 파스키에 케넬의 친구였으며,[48] 1673년에는 예수회로부터 비판받았던 '타협하지 않는 얀센주의 작품'인 Amor Poenitens|la를 출판하기도 했다.[48] 그의 후임자인 페트루스 코데 역시 아르노와 케넬의 영향을 받았으며, 프랑스 얀센주의 난민을 수용하는 등 네덜란드 선교에서 얀센주의를 장려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그는 지역 주민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1702년 교황 클레멘스 11세에 의해 정직당했다.[48] 교황이 임명한 후임자는 지역 로마 가톨릭교도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1702년 8월, 홀란트 및 서프리지아 주 의회는 네덜란드 로마 가톨릭교도들이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은 대리인을 인정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는 네덜란드 로마 가톨릭교도들을 교황의 권위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주의 권위에 따를 것인가 하는 문제로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48]

성 게르트루이스 대성당, 위트레흐트 대주교의 자리이자 오늘날까지 존속하며 얀센주의의 영향을 받아 설립된 소규모 기독교 종파인 구 가톨릭 교회의 모 교회


1723년 4월, '강경파' 성직자들이 교황의 권위에 반대하여 로마 가톨릭 신도 대다수의 지지를 받은 코르넬리우스 판 스테에노번을 '위트레흐트 대주교'로 임명하면서 긴장은 절정에 달했다. 이는 교황 지지파와 얀센주의 성향의 로마 가톨릭교도 사이에 공식적인 분열을 초래했다.[48] 위트레흐트의 교회는 거의 15년 동안 주교 없이 지내야 했고, 이 기간 동안 주로 망명한 프랑스 얀센주의자들이 사역을 담당했다. 프랑스 주교들은 이 작은 교회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네덜란드 사제를 서임하기도 했다.[48]

1724년 위트레흐트는 다시 주교를 맞이하게 되었다. 바빌론의 in partibus|la 교구 보좌 주교였던 도미니크 마리 바를레는 성좌와의 격렬한 분쟁 끝에 네덜란드 공화국에 정착했다. 그는 위트레흐트 교구에서 선출된 네 명의 주교를 차례로 서임하는 데 동의했다. 이것이 바로 현재 구 가톨릭 교회라고 불리는 '위트레흐트의 작은 교회'가 창립된 배경이다. 새로운 주교의 서품이 있을 때마다 교회는 교황에게 정식 기관을 요청했지만, 교황은 변함없이 이를 분열 단체로 규탄했다.[39] 18세기 내내 이 두 개의 경쟁적인 가톨릭 교회는 서로 경쟁하며 활동했다. 이 분리된 교회가 얀센주의적인지, 어느 정도인지 하는 문제는 매우 논란의 여지가 있었으며, 특히 예수회는 이를 강조하는 데 분명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구 가톨릭 교회와 프랑스 얀센주의자들 사이의 연관성은 지속적이었다. 18세기 피난처였던 위트레흐트는 얀센주의 역사와 전통을 보존하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위트레흐트와 신학교가 위치한 아머스포르트에는 수많은 프랑스 얀센주의 문서 보관소가 남아 있다. 프랑스 얀센주의자들의 자금(페레트 상자)은 정기적으로 이 교회를 지원하는 데 사용되었다. 19세기 중반까지 프랑스 얀센주의자들은 프랑스에 같은 종류의 교회를 설립하기 위해 위트레흐트에서 사제를 서임받기를 희망했지만, 이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3]

15. 3. 이탈리아

이탈리아에서 얀센주의의 영향력은, 당시 교황청에 전통적으로 적대적이었던 여러 국가로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 반도의 정치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전개되었다. 17세기에는 베네딕토회와 도미니코회 같은 수도회와의 교류를 통해 프랑스 얀센주의자들과 관계가 형성되었다. 특히 베네치아 공화국은 프랑스 얀센주의 문헌을 라틴어나 이탈리아어로 번역하고 보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3] 그러나 얀센주의 사상은 주로 이탈리아 북부에 영향을 미쳤으며, 로마 이남 지역까지는 확산되지 못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피에몬트-사르데냐 왕국과 토스카나 대공국이 얀센주의의 주요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프랑스와 지리적으로 가깝고 일부 지역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했던 피에몬테는 얀센주의자들에게 이상적인 피난처를 제공했다. 자크 조제프 뒤게(Jacques Joseph Duguet)와 같은 인물들이 한때 타미에 수도원에 피신했으며, 다른 이들은 샹베리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사보이의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예수회를 추방하고 그 자리를 망명한 포르 로얄 지지자들로 채우는 등 얀센주의에 우호적인 정책을 폈다. 1761년에는 아스티 주교가 사제들에게 위트레흐트 교회를 지지하도록 독려하기도 했다. 이처럼 망명한 얀센주의자들은 이탈리아 북부 지역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3]

스키피오 데 리치(1741–1810), 얀센주의에 우호적이었던 이탈리아 로마 가톨릭 주교. 그는 피스토이아 시노드에서 공식적으로 승인을 받으려 했으나, 교황 비오 6세는 교황 칙서 ''Auctorem fidei''에서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이탈리아 영토에서는 상황이 더욱 복잡했다. 이곳에서는 얀센주의가 당시 오스트리아의 정책 기조였던 요제프주의와 결합하는 양상을 보였다. 두 사상 모두 갈리카니즘의 특징인 국가 권력의 종교 문제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며 교황과 예수회의 영향력에 맞서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얀센주의는 에드몽 리셰의 갈리카 신학과 혼합되면서 종교적으로는 다소 온건해졌지만, 정치적으로는 더욱 강경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1761년,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는 포르 로얄 정신에 입각하여 에 신학교를 열고 루뱅과 홀란드의 교수들을 초빙했으며, 영향력 있는 얀센주의자인 템므 수도원장을 고해신부로 삼았다. 그녀는 또한 1784년 빈에 얀센주의 성향의 간행물인 Nouvelles ecclésiastiques|누벨 에클레지아스티크프랑스어를 창간하도록 지원했다.[3]

빈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던 롬바르디아에서는 브레시아 신학교와 이후 파비아 대학교의 교수였던 신학자 피에트로 탐부리니와 주세페 졸라가 얀센주의의 영향을 깊이 받은 리셰의 신학을 전파했다. 그들은 포르 로얄 신학자들과 같은 맥락에서 은총에 관한 저술을 출판했으며, 이들의 사상은 피스토이아프라토의 주교였던 스키피오 데 리치를 비롯한 많은 성직자에게 영향을 미쳤다. 데 리치는 이전에 피렌체의 대리 주교로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종교 개혁을 도왔던 인물이다. 그는 생-메다르의 경련자 현상에도 관심을 보였으며, 자신의 신념에 따라 교구를 개혁하고자 했다.[58] 이를 위해 그는 얀센주의자들이 높이 평가했던 ''몽펠리에의 교리 문답서''를 교구에 도입하고, 사제들에게 파스퀴에르 케스넬의 ''도덕적 성찰''을 배포했다. 마침내 1786년에는 피스토이아 시노드를 소집하여 얀센주의적 개혁안을 승인받고 라틴 전례의 급진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시노드와 데 리치의 개혁 시도는 로마 교황청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고, 결국 그는 1791년에 사임해야 했다. 그의 입장은 1794년 교황 비오 6세의 교황 칙서 ''Auctorem fidei''에 의해 공식적으로 단죄되었다.[59][60]

제노바 공화국 역시 얀센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곳에서는 포르 로얄 관련 저술이 널리 읽혔다. 제노바의 사제 유스타슈 데골라(Eustache Degola)는 18세기 말 프랑스 얀센주의자들, 특히 앙리 그레고아르와 교류했다. 1801년 정교 협약 체결 당시 그레고아르와 함께 유럽 전역을 여행한 후, 1801년부터 1810년까지 포르 로얄-데-샹에 머물렀다.[39] 그는 친프랑스 성향의 이탈리아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개혁 기독교 신앙 배경을 가졌던 알레산드로 만초니의 어머니 만초니 백작 부인이 파리 방문 중 그의 영향으로 개종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탈리아 얀센주의는 리소르지멘토(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지도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는데,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인 카밀로 벤소, 카보르 백작과 이탈리아 혁명가 주세페 마치니 모두 얀센주의 성향의 사제들에게 교육을 받았다.[61]

16. 19세기 이후 얀센주의

19세기는 얀센주의(Jansenism)가 실제든 추정된 것이든, 로마 가톨릭 교회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마지막 세기로 평가된다.[62] 이 시기 얀센주의 아래에는 17세기와 18세기 얀센주의자들의 정신적, 물질적 후계자들, 즉 '포르-로얄 학회'(Société de Port-Royal프랑스어)를 결성한 이들과 갈리카니즘 지지자들이 통합되었다. 이들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갈리카니즘이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입지를 다지고자 했다.[63]

오귀스탱 가지에, 19세기 얀센주의 및 포르-로얄주의 역사가


은총과 교황 권위에 대한 오랜 논쟁은 교황 무류성을 선포하고 울트라몬타니즘을 확립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사실상 종결되었다. 이로 인해 얀센주의는 신학적 담론에서 점차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이후 얀센주의는 특정 신학 교리보다는 금욕주의와 도덕적 엄격함과 동의어가 되는 자질, 즉 일종의 삶의 방식을 의미하게 되었다. 1891년 레옹 세셰는 얀센주의자를 신비롭고 내성적이며 도덕적으로 엄격하고, 단순하며 절제하는 인물로 묘사하며, 정치적으로는 군주제든 공화제든 형태에 무관심하지만 항상 입헌적이고 자유주의적이며, 종교적으로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믿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64]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트라몬타니즘에 맞서 포르-로얄과 얀센주의의 기억을 지키려는 노력은 계속되었다. 19세기 프랑스 교회 내에서는 갈리카니즘 및 얀센주의 전통을 옹호하는 신문들이 등장했다.

  • '''''Chronique religieuse''''' ('종교 연대기', 1818-1821): 앙리 그레고르, 클로드 드베르티에 등 입헌 교회 인사들이 참여했으며, 1801년 정교 협약을 거부한 사제들을 옹호했다. 노골적인 갈리카니즘 성향을 보였고, 얀센주의가 교회의 전통 교리 이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39][65]
  • '''''Revue ecclésiastique''''' ('교회 잡지', 1838-1848): '포르-로얄 학회' 회원들이 자금을 지원하고 배포했으며, 울트라몬타니즘 출판물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샤를 오귀스탱 생트뵈브의 저서 ''포르-로얄''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39][66]
  • '''''L'Observateur catholique프랑스어''''' ('가톨릭 관찰자', 1855-1864): 처음에는 ''Revue ecclésiastique''의 전 편집자들이 이끌었고, 곧 단호한 성격의 사제이자 갈리카니즘 옹호자이며 예수회 비판자인 블라디미르 게테가 합류했다. 강력한 논쟁적 어조로 프랑스 교회의 오류를 비판했다. 특히 루이 브이요의 ''L'Univers''와 거친 논쟁을 벌였고, 샤를 라비제리의 얀센주의 관련 강좌를 비판하여 중단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 게테가 동방 정교회로 개종했을 때, 잡지 출판은 혼란 속에 1861년에 중단되었다.[39]


19세기 얀센주의자들은 프랑스의 노예 폐지 협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신세계에서의 예수회 선교 활동을 비판하고 노예 해방을 지지했다.

19세기의 얀센주의는 또한 특정 정치인이나 도덕적 엄격주의와 갈리카니즘 원칙에 대한 애착을 나타내는 지식인에게 부여된 자세, 즉 자격이기도 했다. 피에르 폴 로이에르-콜라르, 빅토르 쿠쟁, 쥘 아르망 뒤포르와 같은 부르봉 왕정복고기, 7월 왕정, 프랑스 제3공화국 시대의 인물들이 이러한 이유로 얀센주의와 연관되곤 했다.[39][64]

20세기에 들어 '얀센주의자'라는 용어는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그의 ''관용구 사전''에서 "얀센주의: 그것이 뭔지 모르지만,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유행이다"라고 쓴 것처럼, 본래의 신학적 의미보다는 현저한 도덕적 엄격성이나 금욕주의를 가진 인물과 주로 연관되었다. 예를 들어, 정치인 리오넬 조스팽은 "얀센주의적이고, 까다로우며, 엄격한 민주주의자"로 묘사되기도 했고,[67] 투우사 호세 토마스는 ''텔레라마''에 의해 "투우장의 얀센주의자, muleta|뮬레타프랑스어의 부패하지 않는 자"로 묘사되기도 했다.[68]

17. 얀센주의의 예술적 표현

얀센주의 사상은 여러 예술 작품에서도 그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 영화 감독 로베르 브레송은 얀센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에릭 로메르 감독의 1969년 영화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은 부분적으로 파스칼의 도덕관과 얀센주의를 다룬다. 로메르는 1992년작 ''겨울 이야기''에서도 이 주제를 다시 탐구했다.
  • 루이스 부뉴엘 감독의 1969년 영화 ''은하수''에는 예수회 사제와 얀센주의자 간의 결투 장면이 등장한다.
  • 알랭 코르노 감독의 1991년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은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얀센주의 철학의 추종자인 장 드 생 콜롱브가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 빈센트 디에트르 감독의 2006년 영화 ''프라그망 쉬르 라 그라스''(Fragments sur la Grâce프랑스어) 역시 얀센주의와 관련된 작품이다.
  • 외젠 그린 감독의 2009년 영화 ''포르투갈의 수녀''(La Religieuse portugaise프랑스어)도 얀센주의적 요소를 담고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Le jansénisme http://www.amisdepor[...] Société des Amis de Port-Royal 2008-01-21
[2] 간행물 The Reception of Unigenitus in the Faculty of Theology at Louvain, 1713-1719 Catholic Historical Review 2007
[3] 서적 Le Jansénisme. Entre hérésie imaginaire et résistance catholique Cerf 1996
[4] 서적 La Vie quotidienne des jansénistes aux XVIIe et XVIIIe siècles Hachette 1985
[5] 서적 Introduction aux études d'histoire ecclésiastique locale, tome 3 1936
[6] 서적 Le Jansénisme PUF 1967
[7] 서적 Histoire générale du mouvement janséniste, tome 2
[8] 서적 Jansénisme et Paris ; 1640 - 1730 Klincksieck 2000
[9] 서적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https://archive.org/[...] Doubleday
[10] 문서
[11] 웹사이트 Jansenism: a movement of great influence https://www.museepro[...]
[12] 서적 Les provincials; Pensées; [et opuscules divers] Livre de Poche
[13] 서적 De la fréquente Communion ou les sentimens des Pères, des papes et des Conciles, touchant l'usage des sacremens de pénitence et d'Eucharistie, sont fidèlement exposez, par M. A. Arnauld prestre Docteur A. Vitré 1643
[14] 서적 Le Jansénisme Desclée de Brouwer
[15] 서적 Apologie de Monsieur Jansenius evesque d'Ipre & de la doctrine de S. Augustin, expliquée dans son livre, intitulé, Augustinus. Contre trois sermons de Monsieur Habert, theologal de Paris, prononcez dans Nostre-Dame, le premier & le dernier dimanche de l'advent 1642. & le dimanche de la septuagesime 1643 s.l.s.n. 1644
[16] 서적 Seconde Apologie pour Monsieur Jansenius, évesque d'Ipre, & pour la doctrine de S. Augustin expliquée dans son livre intitulé « Augustinus » : contre la Response que Monsieur Habert, théologal de Paris, a faite à la première Apologie, & qu'il a intitulée « La Défense de la foy de l'Eglise, &c » s.l.s.n. 1645
[17] 서적 Apologie pour feu M. l'Abbé de Saint-Cyran, contre l'extrait d'une information prétendue que l'on fit courir contre luy l'an 1638, et que les Jésuites ont fait imprimer depuis quelques mois, à la teste d'un libelle intitulé : Sommaire de la théologie de l'abbé de Saint-Cyran et du sieur Arnauld s.l.s.n. 1644
[18] 서적 Les impostures et les ignorances du libelle, intitulé: la théologie morale des Jésuites "[s.n.]" 1644
[19] 서적 Tales of boyhood of great painters T. Nelson and Sons 1872
[20] 서적 Histoire générale du mouvement janséniste…, Tome 1
[21] 서적 Abrégé de l'histoire de Port-Royal
[22] 서적 Préface Bordas 1992
[23] 서적 Préface Gallimard 1987
[24] 서적 Chronologie de Port-Royal des Champs Chroniques de Port-Royal 2004
[25] 문서 Compendium of Creeds, Definitions, and Declarations on Matters of Faith and Morals Ignatius Press
[26] 서적 Port-Royal, Tome IV, livre cinquième
[27] 웹사이트 Selleri, O.P., Gregorio http://www.fiu.edu/~[...] Florida International University Libraries 2012-02-05
[28] 서적 Ibid.
[29] 서적 Les Jansénistes du xviiie siècle d'après les recueils des actes d'appel de Gabriel-Nicolas Nivelle Chroniques de Port-Royal, no 39 1990
[30] 문서 The Jansenists and the Expulsion of the Jesuits from France 1757–1765
[31] 서적 Histoire du jansénisme Éditions Perrin 2016
[32] 서적 Suffering Saints: Jansenists and Convulsionnaires in France, 1640–1799 https://books.google[...] Sussex Academic Press 2008
[33] 서적 Les convulsionnaires de Saint-Médard Archives Gallimard
[34] 서적 Les Amis de l'Œuvre de la Vérité. Presses Universitaires de Lyon 1998
[35] 서적 La Vie quotidienne des jansénistes aux XVIIe et XVIIIe siècles Hachette 1985
[36] 서적 Jansénisme et politique A. Colin 1965
[37] 서적 Le dieu caché, étude sur la vision tragique dans les Pensées de Pascal et dans le théâtre de Racine Gallimard 1955
[38] 간행물 Aux origines d'une forme de lutte politique : avocats, magistrats et évêques. Les crises parlementaires et les jansénistes (1727-1740) 1990
[39] 서적 Histoire générale du mouvement janséniste…, Tome 2
[40] 간행물 Du parti janséniste au parti patriote : l'ultime sécularisation d'une tradition religieuse à l'époque du chancelier Maupéou, 1770-1775 1989
[41] 서적 Archives parlementaires, tome 25 1791-05-07
[42] 서적 Les Origines religieuses de la Révolution française 1560-1791 Éditions du Seuil 2002
[43] 서적 Les jansénistes du XVIIIe siècle et la Constitution civile du clergé
[44] 서적 L'abbé Grégoire et la République des savants CTHS 2001
[45] 서적 Les évêques avant la Révolution V. Lecoffre 1893
[46] 서적 Mémoires pour servir à l'histoire du jacobinisme
[47] 서적 La Réalité du projet de Bourgfontaine, démontrée par l'exécution 1755
[48] 서적 The Dutch Republic Clarendon Press
[49] 서적 The History of the Popes Kegan Paul, Trench, Trubner & Co., LTD.
[50] 백과사전 Innocent XI, Bl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51] 서적 Dictionnaire historique de la Papauté Fayard 1994
[52] 서적 Le jansénisme et la franc-maçonnerie en Europe centrale aux XVIIe et XVIIIe siècles
[53] 서적 Histoire genérale du Jansénisme, Tome III 1700
[54] 서적 La franc-maçonnerie belge au XVIIIe siècle 1911
[55] 서적 Histoire de l'ordre maçonnique en Belgique 1854
[56] 서적 La Propagande des encyclopédistes français au pays de Liège (1750-1790) Hayez 1880
[57] 서적 Quelques réflexions à l'occasion du livre de M. l'abbé Frayssinous, intitulé Des vrais principes de l'Église gallicane A. Eymery et Delaunay 1818
[58] 서적 Histoire de l'Italie moderne, Tome 1 Hachette 1972
[59] 서적 Jansénisme et gallicanisme aux origines religieuses du Risorgimento Letouzey et Ané 1959
[60] Catholic Encyclopedia
[61] 간행물 Manzoni à Port-Royal en 1810 1908-03-14
[62] 간행물 Les jansénismes tardifs au XIXe siècle 2005
[63] 서적 L'Épiscopat français à l'époque concordataire. 1802-1905, Origines, formation, nomination Cerf 1996
[64] 서적 Les derniers jansénistes depuis la ruine de Port-Royal jusqu'à nos jours (1710-1870), Tome 1 Perrin 1891
[65] 서적 La Chronique religieuse, vol. 1
[66] 간행물 Tome VI 1843-12
[67] 서적 Libération 2006-08-30
[68] 웹사이트 Le janséniste de l'arène https://www.bib-port[...]
[69] 웹인용 Le jansénisme http://www.amisdepor[...] Société des Amis de Port-Royal 2008-01-21
[70] 간행물 "The Reception of Unigenitus in the Faculty of Theology at Louvain, 1713-1719" 2007
[71] 서적 Histoire générale du mouvement janséniste…, Tome 1
[72] 서적 Abrégé de l'histoire de Port-Royal
[73] 간행물 Jansenius and Jansenism Catholic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