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라트 아데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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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콘라트 아데나워는 1876년 쾰른에서 태어나 법학을 전공한 후, 1906년 독일 중앙당에 입당하여 쾰른 시장을 역임하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나치 시대에 반대하여 박해를 받았으나, 제2차 세계 대전 후 독일 기독교민주연합(CDU)을 창당하고 서독의 초대 총리(1949-1963)를 지냈다. 그는 서독을 서방 세계에 통합하고, '사회적 시장경제' 정책을 추진하여 경제 부흥을 이끌었으며, 프랑스와의 화해,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및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입을 통해 국제적 지위를 회복했다. 또한, 1955년 소련과의 협상을 통해 전쟁 포로를 석방시키기도 했다. 그는 1967년 사망했으며, 독일 재건과 민주주의 정착, 유럽 통합에 기여한 지도자로 평가받지만, 권위주의적 통치 스타일과 나치 과거사 청산 미흡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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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라트 아데나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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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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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콘라트 헤르만 요제프 아데나워 |
출생일 | 1876년 1월 5일 |
출생지 |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쾰른 |
사망일 | 1967년 4월 19일 |
사망지 | 서독 뢴도르프 |
묘지 | 뢴도르프, 바트 혼네프 발트프리드호프 |
정당 | 독일 중앙당 (1906–1933) / 독일 기독교민주연합 (1945–1967) |
배우자 | 엠마 바이어 (1904년 결혼, 1916년 사망) 아우구스테 친서 (1919년 결혼, 1948년 사망) |
자녀 | 8명 |
모교 |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뮌헨 대학교 본 대학교 |
서독 총리 | |
직책 | 서독 연방총리 |
임기 시작 | 1949년 9월 15일 |
임기 종료 | 1963년 10월 16일 |
대통령 | 테오도어 호이스 하인리히 뤼브케 |
부총리 | 프란츠 블뤼허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
전임자 | (없음) |
후임자 |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
외무장관 | |
직책 | 외무장관 |
임기 시작 | 1951년 3월 15일 |
임기 종료 | 1955년 6월 6일 |
총리 | (자신) |
전임자 | (신설) |
후임자 | 하인리히 폰 브렌타노 |
기독교민주연합 대표 | |
직책 | 독일 기독교민주연합 대표 |
임기 시작 | 1946년 3월 1일 |
임기 종료 | 1966년 3월 23일 |
분데스탁 대표 | 하인리히 폰 브렌타노 하인리히 크로네 라이너 바르첼 |
전임자 | (신설) |
후임자 |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
의회 평의회 의장 | |
직책 | 의회 평의회 의장 |
임기 시작 | 1948년 9월 1일 |
임기 종료 | 1949년 5월 23일 |
전임자 | (신설) |
후임자 | (폐지) |
쾰른 시장 | |
직책 | 쾰른 시장 |
임기 시작 | 1917년 10월 13일 |
임기 종료 | 1933년 3월 13일 |
전임자 | 막스 발라프 |
후임자 | 귄터 리젠 |
임기 시작 | 1945년 5월 4일 |
임기 종료 | 1945년 10월 6일 |
전임자 | 빌리 주트 |
후임자 | 빌리 주트 |
프로이센 국무원 의장 | |
직책 | 프로이센 국무원 의장 |
임기 시작 | 1921년 5월 7일 |
임기 종료 | 1933년 4월 26일 |
전임자 | (신설) |
후임자 | 로베르트 라이 |
의회 의원 | |
직책 | 연방의회 의원 (본 선거구) |
임기 시작 | 1949년 9월 7일 |
임기 종료 | 1967년 4월 19일 |
전임자 | (신설) |
후임자 | 알로 하우저 |
직책 | 주의회 의원 (지크크라이스 남부) |
임기 시작 | 1946년 9월 26일 |
임기 종료 | 1950년 6월 17일 |
전임자 | (신설) |
후임자 | 쿠르트 코르넬리우스 |
2. 어린 시절 및 교육
콘라트 아데나워는 1876년 1월 5일, 당시 프로이센 왕국 라인주에 속했던 쾰른에서 요한 콘라트 아데나워(1833~1906)와 그의 아내 헬레네(옛 성씨 샤르펜베르크, 1849~1919)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 자녀 중 셋째 자녀였다.[3][83][84][85][86][87][88][89] 그의 형제자매는 아우구스트(1872~1952), 요하네스(1873~1937), 릴리(1879~1950)였으며, 엘리자베트(1880년경 출생)는 태어난 직후 사망했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제빵사였다.[82][90]
아버지 요한 콘라트는 초등학교 졸업 후 공무원이 되기 위해 프로이센 육군에 입대하여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 참전했고,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중상을 입었으나 이때의 활약으로 훈장을 받았다.[82] 초등학교 졸업이라는 학력에도 불구하고 군에서 중위까지 승진한 후 제대하여 법원 서기로 일했다.[82]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아데나워 역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 신앙을 가졌다.[82] 아데나워의 가정은 안정적이었지만 아버지가 하급 공무원이었기에 경제적으로는 넉넉하지 못했다.[82] 3층짜리 임대주택에 살았지만 일부를 다시 세를 놓을 정도였고, 아데나워는 17세까지 형과 한 침대를 사용해야 했다.[91][92][82][93][94]
아데나워의 유년 시절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 중 하나는 프로이센 국가와 가톨릭 교회의 갈등이었던 문화투쟁(Kulturkampf)이었다. 부모로부터 들은 이 경험은 그에게 평생 동안 프로이센주의에 대한 반감을 갖게 했고, 당시 많은 라인란트 가톨릭 신자들처럼 프로이센 통치에 대한 불만을 품게 되었다.[4] 어린 시절 그는 발명에 열정을 보여 뒷마당에서 식물을 가지고 실험하거나, 자동차 먼지를 거르는 반응 증기 기관을 발명하기도 했으나, 비용 문제로 점차 그만두었다.[5]
1885년 봄, 아데나워는 쾰른의 가톨릭 계열 김나지움에 입학하여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중점적으로 배웠다.[95][96][82] 그는 수석은 아니었지만 꾸준히 상위권(6등 이내) 성적을 유지했다.[97] 1894년 봄,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아비투어를 통과했지만, 두 형이 이미 대학에 다니고 있어 집안 형편상 바로 대학에 진학하기 어려웠다.[82][98][99][100] 잠시 쾰른 시내 은행에 취직했으나, 2주 만에 그만두고 아버지의 도움으로 장학금을 받아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82] 그는 후일 은행원 생활에 대해 "싫은 직업에 붙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절실히 알게 되었다"고 회고했다.[82]
1894년 봄부터 아데나워는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뮌헨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 본 대학교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다.[6][82][101] 학업 능력은 뛰어났다기보다는 유능한 편이었다.[6] 1896년에는 프로이센 육군 징집 대상이었으나, 어린 시절부터 앓아온 만성 호흡기 질환으로 신체검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대학 시절에는 여러 가톨릭 학생 단체(K.St.V. 아르미니아 본 등)의 회원이었으나, 장학금으로 공부하고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탓에 음주나 흡연을 하지 않고 교우 관계도 넓지 않은 검소한 생활을 했다.[3][82]
1897년 5월 22일 제1차 국가시험에 합격하여 사법관 시보(무보수 수습 변호사)가 되었고,[82] 1901년 10월 19일 제2차 국가시험에 합격하여 정식 사법관 시보가 되었다.[102][103] 하지만 시험 성적이 좋지 않아 당시 시스템상 바로 변호사가 될 수 없었고, 본의 아니게 쾰른 검찰청에서 근무하게 되었다.[82][104][105] 검찰청 업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그는 2년간 근무한 후 사직하고,[106][82] 쾰른 법원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7]
3. 초기 정치 경력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던 아데나워는 1906년 독일 중앙당에 입당하여 같은 해 쾰른 시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법률사무소 소장이자 중앙당 의원단장이었던 카우젠의 추천을 받아[82][82][82][82], 1906년 3월 7일 투표를 통해 쾰른 시 부시장(10번째 순위, 세무 담당)으로 선출되었다.[107][108][109][110] 1909년 7월 22일에는 쾰른 시 부시장 겸 최고 부시장이 되었고[116], 당시 시장이었던 장인 막스 발라프가 공무로 베를린에 자주 출장을 가면서 사실상 쾰른 시정을 이끌었다.[82] 아데나워는 시민적 예의, 근면, 질서, 기독교적 도덕과 가치를 중시하며 정치 활동을 펼쳤다.
1917년 9월 18일,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찬성 50, 반대 0, 기권 2)로 쾰른 시장에 선출되어[119] 1933년까지 재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전쟁 장기화를 예상하고 쾰른 시의 식량 공급 문제 해결에 힘썼다.[82][117][82][118] 그는 주변 농가와 계약을 맺어 식량을 확보하고 시유지를 경작하게 하는 등의 정책으로[82], 다른 도시에 비해 쾰른의 식량 사정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82] 1918년에는 도시 식량 공급을 돕기 위해 콩 기반의 '쾰른 소시지'를 발명하기도 했다.[8][9]
전쟁이 끝난 후 독일 11월 혁명의 혼란 속에서도 사회민주당과의 협력을 통해 쾰른의 질서를 유지하고[82][82][82], 이후 들어선 영국군 점령 당국과도 협력 관계를 구축하여 시정을 안정시켰다. 그는 영국군의 일부 명령에는 반대했지만[82][82], 대체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라인란트의 지위 문제에 깊이 관여했다. 그는 프로이센으로부터 라인란트가 분리되어 독일 내의 새로운 자치 주(Land)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25][126][127] 이는 프랑스의 라인란트 합병을 막기 위한 방안이었으나[128][129][82][130], 중앙 정부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1923년 프랑스가 루르 지역을 점령하자[134], 아데나워는 프랑스와의 경제 연합을 통해 라인란트 문제를 해결하고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를 도모하려 했으나[135], 이 역시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총리의 반대 등으로 무산되었다.
1921년부터 1933년까지는 프로이센 주 평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이 시기 중앙당 내에서는 가톨릭 정당의 정체성을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종교 신자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할 것인지를 두고 논쟁이 있었는데, 아데나워는 개방을 주장하는 입장이었다. 이 문제는 1922년 아데나워가 의장을 맡은 독일 가톨릭 연례 회의에서 공개적인 충돌로 이어지기도 했다.
아데나워는 1921년과 1926년 두 차례 총리직 제안을 받았으나 모두 거절했다. 첫 번째는 내각 구성 문제, 두 번째는 임시직이라는 이유와 함께,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과의 불화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82][153][154][155][10][11]
쾰른 시장으로서 아데나워는 도시 발전을 위한 대규모 공공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철거된 성벽 자리에 녹지대를 조성하고[82], 라인 강에 새로운 다리(현수교)를 건설했으며[143][144][145], 쾰른과 본 사이에 독일 최초의 아우토반 일부 구간을 건설했다. 또한 운하 확장, 공항 및 항만 건설, 뮌거스도르퍼 슈타디온과 전시장 건설 등 다양한 사업을 벌였다.[82][82][146][147] 이러한 적극적인 사업 추진은 쾰른 시의 재정에 부담을 주어 '독일에서 가장 돈을 많이 쓰는 시장'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148] 그는 또한 쾰른 대학교를 재건하는 등 학문 발전에도 기여했다.[82][149][150][151]
3. 1. 나치 시대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가 되면서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하자, 쾰른 시장이었던 콘라트 아데나워는 나치에 대한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같은 해 2월 히틀러가 선거 운동차 쾰른을 방문했을 때, 아데나워는 히틀러가 국가 원수 자격으로 온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영접을 거부했다.[156][82][157][158][159][160][82] 또한 라인강 다리에 걸려 있던 나치당의 하켄크로이츠 깃발 철거를 명령하는 등 나치당의 반감을 샀다.[82][82][82][161][82]
1933년 3월 총선에서 나치당이 승리하고 쾰른 시의회도 나치당이 장악하자 아데나워는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 그는 나치당에 저항할 의사가 없음을 전달하려 했으나[167][82][82][168], 결국 1933년 4월 4일 쾰른 시장직에서 공식적으로 해임되었다.[169] 해임 후 연금 수급 자격을 박탈당하고 은행 계좌가 동결되는 등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으며[170][82][82][171], 암살과 체포 위협을 피해 마리아 라흐 수도원 등지에 몸을 숨겨야 했다.[82][82][172][173][82][174][175]
1934년 6월 30일 장검의 밤 사건 이후 잠시 체포되었으나[82][82][82][177][82][178], 에른스트 뢰름과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져 며칠 만에 석방되었다.[82][82][82][82][179] 이후 나치의 보복을 피해 거처를 자주 옮기며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갔다. 1934년 8월에는 헤르만 괴링과 빌헬름 프리크 등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해임이 부당함을 호소하고 연금 지급을 요청했다.[12][13][82][82][180] 이러한 노력 끝에 1936년 봄부터는 일부 연금을 지급받게 되었고[82][82][180], 1937년에는 몰수되었던 자택에 대한 일부 보상을 받았다. 경제적으로 다소 안정을 찾은 아데나워는 Rhöndorf|뢰엔도르프de에 정착하여 정원 가꾸기와 발명에 몰두하며 몇 년간 은둔 생활을 했다.[82][82][181][182]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록에 따르면, 히틀러는 아데나워가 쾰른 시장 시절 추진했던 도시 외곽 도로 건설이나 녹지대 조성 등 도시 계획 사업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그의 정치적 신념 때문에 나치 체제와는 함께할 수 없는 인물로 여겼다고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데나워는 카를 게르델러와 같은 반나치 인사들로부터 히틀러 암살 계획에 참여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했다.[183][184][185] 그가 반히틀러 운동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이유로는 군부 중심의 저항 운동에 대한 불신, 독일의 완전한 패배가 진정한 민주주의 회복에 필요하다는 판단, 나치의 감시와 가족의 안전에 대한 우려 등이 거론된다.[82]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실패로 돌아가자, 아데나워는 사건 연루 혐의로 8월 23일 다시 체포되었다.[186][82][82][187] 그는 자신이 시장 시절 건설했던 쾰른 전시장에 임시로 설치된 수용소에 수감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았다.[82] 수감 중 동료 수감자였던 공산주의자 오이겐 잔더(Eugen Zander)의 도움과 의사와의 공모를 통해 병원에 입원하여 강제 이송될 위기를 모면했다.[82] 이후 아내와 반나치 성향의 공군 소령의 도움으로 병원에서 탈출하여 잠시 은신했으나[82][188], 게슈타포가 아내 아우구스테를 고문하여 은신처를 알아내면서 다시 체포되었다.[189][82] 아우구스테는 이때 입은 고문 후유증과 괴혈병 등으로 고통받다 1948년 3월 3일에 사망했다.[82][190][191] 아데나워는 독일 국방군 중위로 복무 중이던 아들 막스가 베를린 게슈타포 본부를 직접 찾아가 아버지가 암살 계획과 무관함을 적극적으로 해명한 덕분에 1944년 11월 마침내 석방될 수 있었다.[192][193]
1945년 3월, 연합군이 쾰른에 진주하자 미군은 아데나워에게 다시 쾰른 시장직을 맡아달라고 제안했고, 그는 이를 수락하여 잠시 시장직에 복귀했다.[194][195][196][197][198][199][82] 그러나 이후 쾰른 지역의 군정을 담당하게 된 영국 군정 당국은 아데나워의 행정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 등을 들어 그를 다시 시장직에서 해임했다.
4. 전후 정치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 미군 점령군은 격렬한 폭격을 겪은 쾰른의 시장으로 아데나워를 다시 임명했다. 그러나 쾰른이 영국 점령 지역으로 이관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1945년 12월, 영국 군정청장 제럴드 템플러 장군은 아데나워가 독일인과 점령 연합군이 정치적으로 동등하다는 입장을 보인 것에 불쾌감을 느끼고, 그의 무능력을 이유로 시장직에서 해임했다.[17][42]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에 의한 해임은 아데나워에게 정치적 자산이 되었는데, 훗날 그가 서방 연합군과의 동맹 정책을 추진할 때 '매국노'라는 비난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시장직에서 물러난 아데나워는 새로운 정당 창당에 몰두했다. 그는 가톨릭교 신자뿐만 아니라 개신교 신자까지 아우르는 기독교민주연합(CDU)을 구상했는데, 이는 과거 가톨릭 중앙당의 한계를 극복하고 독일 정치가 다시 반민주적 세력에게 지배당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1946년 1월, 아데나워는 영국 점령 지역에서 열린 CDU 정치 회의를 장로(가장 연장자, ''Alterspräsident'') 자격으로 주재하며 비공식적인 당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총리 후보로 거론되었던 그의 정치적 비중은 전후 더욱 커졌으며, 다른 생존한 중앙당 지도자들은 시대적 과제를 감당하기에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데나워는 라인란트 출신 가톨릭 신자로서 오랫동안 프로이센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프로이센주의가 독일 국수주의의 근본 원인이며, 이를 청산해야만 독일이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프로이센 국가가 개인의 권리보다 국가 권력을 우선시하는 "거의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비판했으며, 이러한 반감 때문에 베를린을 서독의 수도로 삼는 것에도 반대했다.
그의 정치 이념의 핵심에는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특히 공산주의) 간의 대립 구도가 있었다. 그는 공산주의자와 사회민주당(SPD) 모두를 마르크스주의자로 간주했으며, 사회민주당을 프로이센주의와 국수주의의 계승자로 비판하기도 했다. 이러한 입장은 사회주의와 기독교의 통합을 추구했던 당내 일부 세력과 갈등을 빚기도 했으나, 아데나워는 CDU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꾸준히 확대하며 자신의 정치 철학을 당 노선에 반영시키려 노력했다.
영국 점령 지역 CDU에서의 지도력을 바탕으로 아데나워는 1948년, 서방 연합군이 독일 서부 3개 점령 지역의 헌법 초안 작성을 위해 소집한 의회 평의회(Parlamentarischer Rat)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이 헌법 제정 회의의 의장을 맡아 기본법 제정을 주도했으며, 1949년 5월 기본법이 공포된 후 서독의 초대 연방 총리로 선출되었다.
총리로서 아데나워는 서독의 재건과 서방 세계 편입을 이끌었다. 1957년에는 자를란트가 서독의 연방주로 편입되었고, 같은 해 총선에서는 "Keine Experimente"(실험은 없다)라는 보수적인 슬로건을 내세워 CDU/CSU에 절대 과반수 의석을 안겨주었다.[17][42] 이는 소련에 억류되었던 마지막 독일군 포로들의 귀환과 연금 개혁 등 사회 안정 정책이 성공을 거둔 결과이기도 했다. 또한 1957년 로마 조약 서명을 통해 서독은 유럽 경제 공동체(EEC)의 창립 회원국이 되었다. 1958년에는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과 처음 만나 프랑스와 독일 간 화해를 위한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아데나워는 드골을 깊이 신뢰하며 양국 관계 개선의 중요한 파트너로 여겼다.
그러나 그의 재임 기간 중 논란도 있었다. 1958년 울름 아인자츠그룹 재판을 계기로 나치 전범 수사를 위한 중앙청을 설립했지만,[43] 1959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전쟁 범죄 의혹이 제기된 테오도르 오버랜더를 난민 장관으로 계속 기용하다가 당내외의 압력으로 결국 1960년에야 사임시키는 등 과거사 문제 처리에서 비판을 받았다.[45][46][47] 또한, 오데르-나이세 선 문제와 관련하여 독일 추방자 로비의 압력에 굴복하여 폴란드와의 불가침 조약 체결을 포기하기도 했다. 1959년에는 연방 대통령 출마를 선언했다가 정치적 지지 부족으로 철회하면서 정치적 위신에 손상을 입기도 했다. 이는 그가 탐탁지 않게 여겼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총리직을 계승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1958년 흐루쇼프가 촉발한 베를린 위기 당시에는 소련과의 협상을 강경하게 반대하며 서방의 단호한 대응을 촉구했고, 위기 해소를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 영국 총리 해럴드 맥밀런을 '유화론자'라며 비판하기도 했다.[44]
5. 독일연방공화국 총리 재임
1949년 독일 연방 선거 결과, 아데나워가 이끈 기독교 민주연합(CDU)이 가장 많은 의석을 확보했다. 이에 따라 1949년 9월 16일, 아데나워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분단된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의 초대 연방 총리로 선출되었다. 초대 대통령으로는 테오도어 호이스가 선출되었다. 아데나워는 1963년까지 총리직을 수행하며 냉전 초기 서독의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그는 또한 프랑크푸르트 대신 자신의 고향 쾰른에서 가까운 본을 서독의 새로운 "임시" 수도로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82] 수도 후보지로는 사회민주당(SPD)이 지지하는 프랑크푸르트와 CDU가 지지하는 본이 있었는데, 아데나워는 프랑크푸르트가 서방 연합국의 영향력 아래 놓일 것을 우려했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본이 자신의 선거구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82]
총리가 되기 전, 아데나워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쾰른의 시장으로 복구에 힘썼으나, 1945년 10월 6일 점령군인 영국군에 의해 해임되었다.[200][201][202][203][204][205][82] 해임 사유로는 쾰른 복구 부진, 고령(당시 70세), 영국 노동당 정부와 SPD 간의 관계를 고려한 정치적 판단, 녹지 벌목 명령 거부 및 석탄 배분 문제에 대한 영국군과의 갈등 등이 거론된다.[82][206][207][208][209][210][211][212][213]
시장직 해임 후 아데나워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아우르는 새로운 기독교 민주주의 정당 창당 운동에 참여하여, 1945년 12월 독일 기독교민주연합(CDU) 창당에 기여했다.[214][82] 1946년 1월에는 CDU 영국 점령 지역 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215][216][217] 그는 이후 CDU를 이끌며 1947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선거에서 CDU를 제1당으로 만들었고,[219] 1947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 설치된 미·영 점령 지역의 입법 기관 격인 경제 평의회에서 자유민주당(FDP) 등과 연립하여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221][82]
1948년 9월 1일 서독 건국을 위한 헌법 제정 회의(의회 평의회)가 개최되자, 아데나워는 의장직을 맡아 회의를 이끌었다.[223][224][82][225][226][227] 당시 경쟁 관계였던 SPD 측은 아데나워의 고령 등을 이유로 의장직을 명예직 정도로 여겼다고 전해진다.[82] 아데나워는 서방 연합국과의 조정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헌법 제정 과정을 주도했고,[228][229] 1949년 5월 8일 기본법(헌법)이 제정되어 5월 23일 발효되었다.[82][232]
5. 1. 주요 정책 및 업적
콘라트 아데나워는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독일 연방 공화국의 초대 총리로서 국가 재건과 국제 사회 복귀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정책과 업적은 현대 독일의 기초를 다지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서방 세계와의 관계 강화 및 주권 회복아데나워는 패전국 독일이 국제 사회에서 신뢰를 회복하고 안정적인 국가로 발전하기 위해 서방 세계와의 긴밀한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서독을 나토(NATO)와 유럽 경제 공동체(EEC) 등 서방의 정치, 경제, 군사 공동체에 통합시키는 것을 외교 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255]
- 주권 회복 단계:
- 1949년 11월, 페터스베르크 협정을 통해 연합국으로부터 공장 해체(Demontage) 완화 등 일부 주권 제한 조치를 완화하는 성과를 거두었다.[249][250] 이는 서독이 외교 무대에서 동등한 협상 파트너로 나서는 첫걸음으로 평가받지만, 루르 국제관리청 가입 문제 등으로 국내 사회민주당(SPD) 등으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21][251] 당시 SPD 당수 쿠르트 슈마허는 아데나워를 "연합국의 총리"라고 비난했다.[82]
- 1951년 3월, 점령법 개정으로 외교권을 회복하고 외교부가 재설치되자 아데나워는 직접 외무장관을 겸임하며 외교 정책을 주도했다.[254]
- 1951년 4월, 슈만 선언에 기초한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ECSC) 창설 조약(파리 조약)에 서명했다. 이는 독일과 프랑스 간 화해의 상징이자 유럽 통합의 초석이 되었으나, 국내에서는 프랑스에 유리한 조약이라는 비판도 있었다.[82] 아데나워는 영국의 참여를 원했지만 윈스턴 처칠은 영연방과의 관계를 이유로 거절했다.
- 1955년 5월 5일, 파리 협정 발효로 서독은 점령 체제를 종식하고 주권을 완전히 회복했다.[82]
- 서방 군사 동맹 가입:
- 한국 전쟁 발발 이후 서독의 재군비 필요성이 대두되자, 아데나워는 이를 주권 회복 및 서방과의 동등한 관계 구축 기회로 삼았다.[82]
- 프랑스의 반대를 극복하기 위해 플레뱅 계획에 따른 유럽 방위 공동체(EDC) 창설을 지지했으나, 1954년 프랑스 의회 비준 실패로 무산되었다.[82][134]
- 영국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의 중재로 서유럽 연합(WEU)을 창설하고, 이를 통해 1955년 5월 9일 서독은 나토에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했다.[82][134] 같은 해 11월, 독일 연방군( Bundeswehr|분데스베어deu )이 창설되어 재군비가 완료되었다.[82][269] 아데나워는 연방군이 과거 베르마흐트와 단절된, 군의 민간 통제 원칙에 충실한 새로운 군대가 되도록 노력했다.[38]
- 프랑스와의 화해:
- 아데나워는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과 개인적인 신뢰 관계를 구축하며 양국 간 역사적 앙금을 해소하고 협력 시대를 여는 데 주력했다.
- 1963년 1월 22일, 파리 엘리제궁에서 드골 대통령과 함께 프랑스-독일 협력 조약(Élysée Treaty)에 서명하여 양국 간 화해를 공식화하고 유럽 통합의 핵심 동력을 마련했다.[376][377][378]


경제 재건과 "라인강의 기적"아데나워 정부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독일 경제를 재건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 마셜 플랜 수용: 아데나워는 미국의 유럽 부흥 계획인 마셜 플랜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미국 역사의 영광스러운 페이지"라고 칭송하며 경제 재건의 발판으로 삼았다.
- 사회적 시장경제 도입: 경제장관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와 협력하여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을 채택했다. 이는 자유 시장 경쟁 원리를 존중하면서도 사회 복지와 공정한 경쟁 질서를 강조하는 혼합 경제 체제로, 독일 경제의 빠른 성장을 이끌었다.
- 라인강의 기적: 사회적 시장경제 정책의 성공과 국민들의 노력에 힘입어 서독 경제는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여 '라인강의 기적'( Wirtschaftswunder|비르트샤프츠분더deu )이라 불리는 경제 부흥을 이루었다. 1950년부터 1963년까지 실질 임금이 두 배로 증가하고 실업률은 1950년 8%에서 1965년 0.4%로 급감하는 등 국민들의 생활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36]

민주주의 정착과 과거사 문제 처리아데나워는 나치즘의 악몽을 딛고 서독에 안정적인 민주주의 체제를 뿌리내리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 안정된 민주주의 구축: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패 경험을 교훈 삼아 강력한 총리 중심제(이른바 '총리 민주주의')를 구축하고, 독일 기본법 제정에 참여하여 안정적인 민주주의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 탈나치화와 그 한계: 연합국 주도의 탈나치화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며, 나치 부역자들에 대한 사면 및 공직 복귀를 허용하는 정책을 추진했다.[18][19][314] 이는 사회 통합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평가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나치 과거 청산이 미흡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한스 글로브케와 같이 나치 정권 하에서 뉘른베르크법 주석 작성 등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을 총리실 차관으로 중용한 것은 큰 논란을 일으켰다.[22][341][342][343][344][345] 아데나워는 "옛 나치당원을 폭로하는 것은 이제 그만하자."라고 발언하기도 했다.[316]
- 홀로코스트 배상: 1951년 9월, 의회 연설을 통해 나치 독일이 유대인에게 저지른 범죄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이스라엘 및 유대인 단체에 대한 배상 의사를 밝혔다.[273] 이는 독일인 전체의 집단적 책임은 부인하면서도[274] 도덕적 의무를 다하려는 노력이었으며, 1952년 룩셈부르크 협정 체결로 이어졌다. 이 협정에 따라 서독은 이스라엘에 상당의 물자를 제공하고, 유대인 단체에 를 현금으로 지급했다.[82][280] 이 협정 비준 과정에서 연립여당 내 반대가 있었으나 야당인 SPD의 지지로 통과되었다.[281] 이후 독일 배상법(Bundesentschädigungsgesetz) 제정을 통해 나치 박해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제도화했다.[34][82]
- 위헌 정당 해산: 자유민주주의 기본 질서를 위협한다고 판단된 독일 사회주의 제국당(1952년)과 독일 공산당(1956년)을 연방헌법재판소 제소를 통해 해산시켰다.[82][304][305][306] 이는 '방어적 민주주의' 원칙에 따른 조치였으나, 정치적 반대 세력 탄압이라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사회 정책아데나워 정부는 경제 성장과 더불어 사회 안정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 전쟁 피해자 및 난민 지원: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피해 복구와 동유럽 등지에서 추방된 독일인 난민들의 정착을 위해 1952년 부담 조정법( Lastenausgleichsgesetz|라스테나우스글라이히스게제츠deu )을 제정했다. 이는 전쟁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들에게 재산세를 부과하여 전쟁 피해자와 난민에게 재분배하는 방식으로, 사회 통합에 기여했다.[82][310] 또한 1953년 연방 난민법을 제정하여 난민들의 법적 지위 보장과 생활 개선을 도모했다.[82]
- 주택 건설: 심각한 주택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50년 제1차 주택건설법을 시작으로 대규모 주택 건설 프로그램을 추진하여 매년 수십만 호의 주택을 공급했다.[82]
- 연금 제도 개혁: 1957년, 기존의 적립 방식 연금 제도를 생산 연령 인구가 납부한 보험료로 퇴직 세대의 연금을 지급하는 부과 방식으로 전환하고, 연금액을 물가 상승률과 연동시키는 개혁을 단행했다. 이로 인해 연금 수급액이 대폭 인상되어 노년층의 생활 안정에 크게 기여했으며, 이는 1957년 총선 압승의 주요 요인이 되었다.[82]
- 노동 정책: 1951년 공동결정법( Mitbestimmungsgesetz|미트베슈티뭉스게제츠deu )을 제정하여 석탄·철강 산업 분야 대기업의 감사회에 노동자 대표가 경영진과 동수로 참여하도록 보장함으로써 '경제 민주주의'의 기초를 마련했다.[312]
- 가족 및 복지 정책: 1954년 아동 수당법을 제정하여 다자녀 가구를 지원했으며,[348] 1952년 모성 보호법을 통해 여성 근로자의 출산 휴가 및 해고 보호를 강화했다.[60] 실업 급여 제도를 개선하고,[61] 1961년에는 연방 사회부조법을 통해 최저 소득 보장 제도를 마련했다.[63]
독일 문제 및 기타 외교 정책
- 스탈린 노트 거부: 1952년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이 제안한 독일 통일 및 중립화 방안(스탈린 노트)을 거부했다. 아데나워는 소련의 제안이 서독의 서방 편입을 저지하려는 술책이며, 중립화가 결국 소련의 영향력 확대로 이어질 것이라고 판단했다.[82] 이는 독일 통일의 기회를 놓쳤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1953년 동독 봉기 진압 사태 이후 그의 판단이 옳았다는 평가도 나왔다.[291]
- 자를란트 편입: 프랑스와의 협상을 통해 1957년 1월 1일, 프랑스 보호령 하에 있던 자를란트 지역을 서독의 연방주로 편입시키는 데 성공했다.[82]
- 소련과의 관계: 1955년 소련을 방문하여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당시 소련에 억류되어 있던 마지막 독일군 전쟁 포로와 민간인 억류자 약 3만 명의 석방을 이끌어냈다. 이는 '1만 명의 귀환'으로 불리며 아데나워의 정치적 인기를 크게 높였다.[326][82][327][328][329][330]
- 할슈타인 원칙: 동독을 국가로 승인하는 국가와는 외교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할슈타인 원칙'을 내세워 동독의 국제적 고립을 추구했다. 1957년 유고슬라비아가 동독을 승인하자 즉각 단교 조치를 취했다.[334][335][336]
- 핵 정책: 서독의 자체 핵무장에는 반대했지만, 나토의 핵우산 아래에서 전술 핵무기 배치를 용인했다.[82] 또한 평화적 목적의 원자력 이용을 위해 유럽 원자력 공동체(Euratom) 창설에 참여했다.[82] 1957년에는 미국과 서독군이 핵무기 운반 수단을 보유할 수 있도록 하는 협정에 도달했으며, 한때 프랑스, 이탈리아와 공동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샤를 드골 집권 이후 무산되었다.
평가콘라트 아데나워는 전후 독일의 혼란을 수습하고 서방 민주주의 진영의 일원으로 국가를 재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강력한 리더십 아래 서독은 정치적 안정을 되찾고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으며, 프랑스와의 화해를 통해 유럽 통합의 기틀을 마련했다. 특히 사회적 시장경제 도입과 성공적인 연금 개혁, 홀로코스트에 대한 책임 인정과 배상 실현 등은 높이 평가받는 업적이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독일 분단을 고착화하고 통일의 기회를 놓쳤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또한 탈나치화 과정에서의 미흡함과 나치 관련 인사 등용 문제, 권위주의적 통치 스타일 등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1960년대 후반 서독 학생 운동은 아데나워 시대의 보수주의에 대한 반발이라는 성격을 띠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독일 사회에서 아데나워는 2003년 한 방송사 여론조사에서 '가장 위대한 독일인'으로 선정되는 등[203] 현대 독일의 초석을 다진 지도자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5. 2. 외교 정책
아데나워 외교 정책의 핵심 목표는 패전국 서독을 서방 세계에 통합시키고 완전한 주권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는 미국, 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과의 긴밀한 협력을 추구했으며, 특히 프랑스와의 역사적인 화해를 이끌어냈다.
서방 통합과 재군비아데나워는 서독을 나토(NATO)와 유럽 경제 공동체(EEC, 현 유럽 연합의 전신),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ECSC) 등 서방의 정치, 경제, 군사 공동체에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했다.[254] 그는 미국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유럽 부흥을 위한 마셜 플랜을 높이 평가했다.
냉전이 격화되고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서독의 재군비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255][256] 아데나워는 이를 서독의 주권 회복과 서방 동맹 편입의 기회로 삼아 재군비를 추진했다. 초기에는 프랑스의 반대로 유럽 방위 공동체(EDC) 구상이 제안되었으나[82][263], 1954년 프랑스 의회에서 부결되었다.[82] 이후 영국의 중재로 서유럽 연합(WEU)이 창설되고 서독의 나토 가입이 결정되었다.[266] 1955년 5월 5일 파리 협정이 발효되어 서독은 주권을 회복했고[82], 5월 9일 나토에 정식 가입했으며, 같은 해 11월 독일 연방군이 창설되어 재군비가 완료되었다.[82][269]

독일 통일 문제와 스탈린 노트1952년,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은 독일의 중립화 통일을 제안하는 이른바 '스탈린 노트'를 서방측에 보냈다.[283] 이 제안에는 통일 독일의 군대 보유 허용, 자유 선거 보장, 외세 철수 등이 포함되었으나, 서독의 서방 통합을 저지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290] 아데나워는 소련의 제안을 신뢰하지 않았고, 서방과의 통합을 우선시하여 이를 거부했다.[82] 이 결정은 후일 독일 통일의 기회를 놓쳤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82], 1953년 동베를린 봉기에 대한 소련의 무력 진압은 아데나워의 회의적인 시각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었다.[291] 아데나워는 강력하고 번영하는 민주주의 서독이 언젠가 동독을 흡수 통일할 것이라는 '자석 이론'을 바탕으로 통일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또한 오데르-나이세 선을 독일의 동부 국경으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는 실향민들의 지지를 확보하고 향후 통일 협상에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려는 정치적 고려가 있었기 때문이다.[20]
대 이스라엘 관계 정상화와 배상

아데나워는 나치 독일 정권 하에서 자행된 홀로코스트에 대한 독일 민족의 도덕적 책임을 인정하고 이스라엘과의 관계 개선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1951년 9월 27일, 그는 연방의회 연설을 통해 "독일 민족의 이름으로 자행된 형언할 수 없는 범죄"에 대해 언급하며 유대 민족에 대한 물질적, 도덕적 보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82][273] 국내외의 상당한 반대에도 불구하고[29], 아데나워 정부는 이스라엘 및 유대인 청구 회의와 협상을 진행했다. 1952년 9월 10일, 룩셈부르크 협정(Luxemburger Abkommen)이 체결되어, 서독은 이스라엘에 상당의 물품을 제공하고, 유대인 청구 회의에 를 현금으로 지급하기로 합의했다.[28][82][280] 이 협정은 서독과 이스라엘 관계 정상화의 초석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 협정에 강력히 반대한 이르군 출신의 메나헴 베긴(훗날 이스라엘 총리) 등은 1952년 3월 아데나워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31][32][33]
대 소련 및 동독 관계: 할슈타인 독트린


아데나워는 1955년 9월 소련의 초청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니키타 흐루쇼프 등 소련 지도부와 회담했다.[82] 이 방문의 가장 큰 성과는 소련에 억류되어 있던 마지막 독일군 전쟁 포로와 민간인 약 3만 명의 석방을 성사시킨 것이었다.[326][82] 이는 아데나워의 국내 지지율을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82] 서독은 포로 석방의 대가로 소련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지만[324],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더 나아가 아데나워 정부는 외무차관 발터 할슈타인의 이름을 딴 '할슈타인 독트린'을 채택하여, 소련을 제외하고 동독을 국가로 승인하는 나라와는 외교 관계를 단절한다는 강경 노선을 취했다.[334] 이 원칙에 따라 1957년 유고슬라비아가 동독을 승인하자 서독은 즉각 유고슬라비아와 단교했다.[335] 이 독트린은 이후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 정책으로 전환될 때까지 서독 외교의 기본 원칙으로 유지되었다.
프랑스와의 화해와 유럽 통합 심화아데나워 외교 정책의 또 다른 핵심 축은 프랑스와의 화해였다. 그는 1958년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과 첫 정상회담을 가진 이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양국 간 신뢰를 구축했다.[375] 이러한 노력은 1963년 1월 22일 파리 엘리제궁에서 체결된 엘리제 조약(프랑스-독일 협력 조약)으로 결실을 맺었다.[376][377][378] 이 조약은 수 세기에 걸친 양국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외교, 국방, 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협력의 제도적 틀을 마련함으로써 유럽 통합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82]
기타 외교 성과
- 자를란트 문제 해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의 관리 하에 있던 자를란트 지역의 독일 복귀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55년 주민 투표 결과에 따라 1957년 1월 1일 자를란트는 서독의 10번째 주로 편입되었다.[82]
- 핵무기 정책: 서독의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은 파리 협정에 의해 금지되었지만, 아데나워는 1957년 미국과 핵무기 운반 시스템 공유에 합의하고 프랑스 등과 핵 기술 협력을 추진했다.[82] 그는 유럽 원자력 공동체(Euratom) 창설을 지지하며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과 유럽 공동 관리를 통해 안보를 확보하고자 했다.[82]
5. 3. 슈피겔 사건
1962년 10월 8일, 서독의 유력 주간지 슈피겔(10월 10일자)은 NATO 기동훈련 'Fallex 62|팔렉스 62de'의 내용을 상세히 보도하며, 동쪽의 공격에 대한 독일 연방군의 방어 태세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고 비판하는 기사를 게재했다.[369][370][371] 당시 국방장관이자 CSU 당수였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이 보도를 군사 기밀 누설 및 반역 행위로 간주했다.[82]이에 슈트라우스의 지시 아래 경찰은 슈피겔 발행인 루돌프 아우구스타인을 포함한 기자 5명(이후 체포자는 10명 이상으로 늘어남)을 반역죄 혐의로 체포했다.[82][82][82][82][372] 슈피겔 편집국은 수 주 동안 당국에 의해 점거되었고, 관련 문서와 사진들이 증거물로 압수되어 편집 업무가 마비되었다.[82] 아우구스타인은 104일 동안 구금 상태에 있었다.[82]
아데나워 총리는 직접 체포를 지시하지는 않았으나, 초기에는 슈트라우스 국방장관을 옹호하며 슈피겔의 보도를 "반역의 심연"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슈피겔 측은 해당 기사가 이미 공개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군사 기밀 유출이 아니라고 반박했다.[82] 아우구스타인 역시 "법치 국가의 기본 원칙에 위배되는 행위"라며 정부의 조치를 비판했다.[373]
이 사건은 언론의 자유 침해 논란을 일으키며 거센 여론의 반발에 부딪혔다. 특히 연정 파트너였던 자유민주당(FDP) 소속 장관 5명 전원이 항의의 표시로 내각에서 사퇴했으며, 슈트라우스 국방장관의 해임을 연정 복귀의 조건으로 내걸었다.[82][82] 결국 슈트라우스는 국방장관직에서 물러났고, FDP 장관들은 내각에 복귀했다. 이 과정에서 아데나워와 CDU/CSU의 명성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51][52]
아데나워는 이후 약 1년 동안 총리직을 더 유지했지만, 슈피겔 사건은 임기 만료 전에 사임하겠다는 기존의 약속을 이행하라는 정치적 압력을 가중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결국 아데나워는 1963년 가을, 의회 임기 종료 후 총리직에서 물러나겠다고 공식적으로 약속했고,[82][82] 후임으로는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총리직을 계승했다. 아데나워는 1966년까지 CDU 당 의장직은 유지했다.
6. 대한민국과 관계
1957년 6월 5일, 당시 주미 대한민국 대사였던 양유찬이 친선사절로 서독을 방문하여 아데나워 총리와 회담하고 양국 간 국교 수립에 합의했다.[409]
1961년 2월 초, 아데나워 총리는 전규홍 당시 주 서독 대한민국 대사와의 회견에서 서독 정부가 한국의 경제 발전을 적극적으로 도울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이 회담에서는 서독의 민간 차관 제공 논의의 일환으로, 우선 10만 킬로와트급 화력발전소 건설을 위해 서독 기술자 5명을 제1진으로 한국에 파견하기로 합의했다.[410] 대사직 이임을 앞둔 전규홍 대사는 같은 해 6월 29일 아데나워 총리를 다시 방문하였다.[411]
7. 퇴임 이후
1963년 10월 15일 87세의 나이로 총리직에서 물러났으나[379][380][381], 90세가 되던 1966년까지 집권 여당인 기독교민주연합(CDU) 당수직을 유지했으며[382][383][82], 종종 "데어 알테"(Der Alte|데어 알테de, '노인')라고 불렸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본 선거구의 연방의회 의원직을 유지했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회고록 집필에 시간을 할애했으며, 1945년부터 1963년까지의 기간을 다루는 4권의 회고록을 집필했다. 마지막 4권(1959-1963년)은 미완성 상태로 아데나워 사후인 1968년에 출판되었다.[384]
1966년 5월에는 이스라엘을 개인적으로 방문하여 바이츠만 과학 연구소로부터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66] 프랑스와의 관계를 중시하여 1964년, 1966년, 1967년에 세 차례 방문했다.[67] 1967년 2월 마지막 해외 방문지인 마드리드에서는 프랑코 총통을 만났고, 프라도 미술관을 방문했다. 마드리드 아테네오 궁전에서 한 마지막 주요 연설에서는 유럽 통합 과정을 멈추지 말 것을 강조했다.[68]
90세를 넘기면서 건강이 악화되다가[385] 1967년 4월 19일 뢰엔도르프의 자택에서 9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385] 그의 딸에 따르면, 그의 마지막 말은 "Da jitt et nix zo kriesche!|다 이트 엣 닉스 초 크리셰!ksh" (쾰른 방언으로 "슬퍼할 것 없어!")였다고 한다.[69]
1967년 4월 25일 쾰른 대성당에서 국장이 거행되었으며[82], 샤를 드 골 프랑스 대통령,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 등 100개 이상의 국가와 기관을 대표하는 많은 해외 인사들이 참석했다.[70] 장례 미사 후 그의 유해는 독일 해군의 고속 공격정 ''콘도르'' 호에 실려 라인강을 따라 뢰엔도르프로 운구되었고[71], 그곳의 발트프리트호프(Waldfriedhof, 숲 묘지)에 안장되었다.[71]
그의 사망 후 독일 국민들에게 아데나워에 대해 가장 존경하는 점을 물었을 때, 대다수는 그가 소련에 억류되어 있던 마지막 독일 포로들을 귀환시킨 점("1만 명의 귀환")을 꼽았다. 2003년, 독일 공영 방송 ZDF가 주관한 "운저레 베스텐"(Unsere Besten, 우리의 최고) 투표에서 300만 표 이상을 얻어 '가장 위대한 독일인'으로 선정되었다.[73]
또한 2002년 발행된 벨기에의 유럽 통합의 3인 선구자 기념 주화에 로베르 슈만, 폴앙리 스파크와 함께 도안 인물로 포함되었다.[74] 그의 사망 직후인 1968년에는 기념 우표가 발행되었다.
8. 유산 및 평가
콘라트 아데나워는 "현대의 가장 타고난 재능이 있는 정치인들 중의 하나"로 평가받으며,[69]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폐허가 된 독일을 재건하고 안정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87세의 나이로 퇴임하며 독일 역사상 최고령 총리로 기록되었다.
평생 독실한 가톨릭교 신자였던 아데나워는 기독교 사회 윤리가 건강한 사회의 기초라고 믿었으며, 가치 교육의 장으로서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전쟁 패배 후 국제 사회에서 고립되고 비난받던 독일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서방 세계와의 협력을 통해 독일의 도덕적, 정치적 위상을 회복시키는 데 주력했다. 1953년 타임지는 그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며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 콘라트 아데나워는 훈족의 미워했던 대지를 이미 지도하였고, 나치를 도덕적 체면으로 도로 넣어 자신에게 서방 권력의 가장 높은 의회들에서 의석을 얻었다.
아데나워는 유럽 통합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아, 2002년 벨기에에서 발행된 유럽 통합 기념 주화에 로베르 쉬망, 폴앙리 스파크와 함께 주요 인물로 등장했다.[74] 주화 앞면에는 세 사람의 이름과 초상화가 새겨져 있다. 베를린에는 기독교민주연합과 연계된 콘라트 아데나워 재단 본부가 있다. 이 재단은 독일에서 가장 큰 정치 관련 연구소 중 하나로, 1956년에 설립되어 1964년 아데나워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독일 국민들은 아데나워의 가장 큰 업적으로 1955년 소련 방문을 통해 그곳에 억류되어 있던 마지막 독일 전쟁 포로 약 1만 명을 귀환시킨 것을 꼽는 경우가 많다. 이 사건은 "1만 명의 귀환"으로 알려져 있으며, 귀환자 중에는 전 나치 독일 국방군 장성들과 히틀러의 개인 조종사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72] 독일 여론조사 기관인 알렌스바흐 연구소(Allensbach Institute)가 1950년부터 실시한 "독일에 가장 공헌한 위대한 독일인은 누구인가?"라는 설문 조사에서 아데나워는 1958년 비스마르크를 제치고 1위에 오른 이후 계속 선두를 유지했다.[398][399][400][82] 2003년 독일 공영 방송 ZDF의 프로그램 "운저레 베스텐"(우리 최고) 시청자 투표에서도 아데나워는 '가장 위대한 독일인' 1위로 선정되었다.[73][82] 2009년 알렌스바흐 연구소 조사에서도 브란트나 콜과 같은 후임 총리들보다 아데나워가 가장 중요한 총리로 평가받았다.[82]
그러나 아데나워의 정치 스타일과 정책 결정 방식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특히 집권 후기에는 독선적인 모습과 실책이 두드러지며 권위가 약화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59년 연방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자신의 잠재적 경쟁자인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를 명예직인 대통령으로 보내려 하거나, 여의치 않자 본인이 직접 대통령에 출마하려 시도하는 등 독단적인 행동으로 여론의 비판을 받고 정치적 위신이 실추되었다.[355][356][357][358][82] 결국 아데나워는 출마를 포기하고 하인리히 뤼프케를 지명하여 당선시켰지만, 이 과정에서 그의 권위는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359][82] 또한, 나치 전력이 있는 테오도르 오버렌더(Theodor Oberländer)를 난민부 장관으로 임명했다가, 그가 1941년 리비우 학살에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1960년 결국 사임하는 일도 있었다.[360][82] 아데나워는 경제 문제에 밝지 않았다는 평가도 있으며,[82][82][401]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혼자 내리는 경우가 많아 장관들조차 다음 날 신문을 보고 정책을 알게 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402][403] 이러한 그의 권위주의적 통치 스타일을 비판적으로 일컫는 "총리 민주주의"나 배타적인 측근 그룹을 의미하는 "총리 부대"와 같은 신조어가 생겨나기도 했다.[404][82]
아데나워는 1967년 4월 19일 뢰엔도르프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쾰른 방언으로 "슬퍼할 것 없어!" (Da jitt et nix zo kriesche!|다 이트 엣 닉스 초 크리셰!ksh)였다고 전해진다.[69]
쾰른 대성당에서 열린 그의 장례 미사에는 전 세계 100여 개 국가와 국제기구 대표들이 참석하여 애도를 표했다.[70] 주요 참석 인사는 다음과 같다.
국가/기관 | 대표 |
---|---|
프랑스 | 대통령 샤를 드 골 |
미국 | 대통령 린든 B. 존슨 |
벨기에 | 총리 폴 반덴 부이낭츠 |
덴마크 | 총리 옌스 오토 크라그 |
영국 | 총리 해럴드 윌슨 |
이란 | 총리 아미르 아바스 호베이다 |
아이슬란드 | 총리 비아르니 베네딕츠손 |
이탈리아 | 총리 알도 모로 |
리히텐슈타인 | 총리 제라르트 바틀리너 |
룩셈부르크 | 총리 피에르 베르너 |
네덜란드 | 총리 피에트 더 용 |
노르웨이 | 총리 페르 보르텐 |
오스트리아 | 총리 요제프 클라우스 |
스웨덴 | 총리 타게 에를란데르 |
터키 | 총리 쉴레이만 데미렐 |
유럽 집행위원회 | 위원장 발터 할슈타인 |
NATO | 사무총장 만리오 브로시오 |
장례 미사 후 그의 유해는 독일 해군의 고속정 '콘도르' 호에 실려 라인강을 따라 운구되었으며, '제아들러' 호와 '슈페어베어' 호가 호위했다. 강 양 기슭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나와 그의 마지막 길을 지켜보았다. 그는 뢰엔도르프의 발트프리트호프(숲 묘지)에 안장되었다.[71]
아데나워는 쾰른 대학교 설립에 기여한 공로로 이 대학에서 정치학, 법학, 의학, 철학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405] 또한 1953년 미국 방문 시 메릴랜드 대학교와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82][406] 그는 메르세데스-벤츠의 고급 세단 모델인 300 모델을 공무와 사적인 용도로 즐겨 이용했으며, 이 때문에 이 차종은 "아데나워"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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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朝広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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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岳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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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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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妹尾
[237]
서적
大岳
[238]
서적
鹿島(1965年)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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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妹尾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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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妹尾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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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島(1965年)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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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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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島(1965年)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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加瀬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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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妹尾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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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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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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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島(1965年)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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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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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島(1965年)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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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島(1965年)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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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島(1965年)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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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島(1965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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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
[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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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妹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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宮田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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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島(1965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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ダルクール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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ユクスキュ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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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妹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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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
[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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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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ダルクール
[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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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島(1967年)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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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妹尾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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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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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広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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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島(1965年)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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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妹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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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島(1965年)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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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島(1965年)
[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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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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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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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島(1965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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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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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島(1965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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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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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島(1965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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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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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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ムスリ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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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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ムスリ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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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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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島(1965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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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広
[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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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島(1965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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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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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島(1965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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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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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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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島(1967年)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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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島(196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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ゲッパー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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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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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島(1965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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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妹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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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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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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ムスリン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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ゲッパー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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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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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島(1965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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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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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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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島(1965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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プリティ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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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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ゲッパー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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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
[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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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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ゲッパー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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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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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島(1965年)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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プリテ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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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妹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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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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ユクスキュ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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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島(1965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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プリテ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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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広
[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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ダルクール
[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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プリテ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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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プリテ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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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鹿島(1965年)
[406]
서적
ダルクール
[407]
서적
板橋,妹尾
[408]
글로벌2
아데나워방식
[409]
뉴스
正式國交에 合意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57-06-08
[410]
뉴스
對西獨覺書準備中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61-02-12
[411]
뉴스
아首相訪問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61-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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