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더러운 전쟁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더러운 전쟁은 1970년대 아르헨티나에서 일어난 정치적 탄압으로, 군사 정권이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불법 체포, 고문, 살해, 강제 실종 등을 자행한 사건을 의미한다. 1955년 후안 페론 축출 이후 페론주의와 포퓰리즘에 대한 적대감이 아르헨티나 정치를 지배하는 가운데, 1970년대 초 좌우익 세력 간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군부의 개입이 강화되었다. 이사벨 페론 정부 시기 준군사조직인 아르헨티나 반공 동맹(AAA)의 활동과 게릴라 공격에 맞서, 군부는 투쿠만 주에서 독립 작전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인권 침해가 발생했으며,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의 개입과 가톨릭 교회의 책임 논란이 제기되었다. 민주화 이후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노력이 이어졌지만, 여전히 논란이 남아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아르헨티나의 학살 - 에세이사 학살
    에세이사 학살은 1973년 아르헨티나에서 페론의 귀국 지지 집회 중 페론주의 내 좌우파 충돌로 우익 무장 괴한의 총격으로 최소 13명이 사망하고 300명 이상이 부상당한 사건으로, 이후 군부 쿠데타와 '더러운 전쟁'의 서막이 되었다.
  • 더러운 전쟁 (아르헨티나) - 몬토네로스
    몬토네로스는 1970년대 아르헨티나에서 활동하며 페론주의, 좌익 민족주의를 결합한 이념으로 군사 시설과 주요 인물을 공격하고, 후안 페론 사후 이사벨 페론 정부에 무장 투쟁을 선포했으나, 1976년 군사 쿠데타 이후 쇠퇴한 혁명적 게릴라 조직이다.
  • 더러운 전쟁 (아르헨티나) - 호세 로페스 레가
    호세 로페스 레가는 아르헨티나의 정치인이자 범죄자로, 후안 페론의 비서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 사회복지부 장관을 역임하며 권력을 휘둘렀고, 반공주의자 동맹을 결성하여 좌익 페론주의자들을 탄압했으며, 경제 정책 실패 후 해외 도피 중 체포되어 수감 중 사망했다.
  • 강제실종 사건 - 콘도르 작전
    콘도르 작전은 1970년대 남미 군사 독재 정권들이 '마르크스 혁명 세력 제거'를 명분으로 자행한 초국가적 비밀 공작으로, 납치, 고문, 살해 등 극심한 인권 유린을 초래했으며 미국의 묵인 또는 지원 의혹이 있는 잔혹한 작전이다.
  • 강제실종 사건 - 납북 일본인 문제
    납북 일본인 문제는 1970년대와 80년대에 북한 공작원에 의해 일본인들이 납치되어 대남 공작 활동에 활용된 사건으로, 북한은 이를 부인하다 2002년 인정하고 사과했으나 일본은 문제 해결 없이는 국교 정상화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더러운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의 이미지 ([[미국 정부]]의 [[정보|자료]])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의 이미지 (미국 정부의 자료)
분쟁 명칭더러운 전쟁
부분 분쟁냉전
콘도르 작전
기간1974년 – 1983년
장소아르헨티나
결과인데펜덴시아 작전
1976년 아르헨티나 쿠데타
국가 재조직 과정
포클랜드 전쟁 이후 작전 종료
교전 세력
교전국 1
아르헨티나 육군
아르헨티나 해군
아르헨티나 공군
정보국
아르헨티나 연방 경찰
아르헨티나 국가 헌병대
아르헨티나 해안 경비대
아르헨티나 반공주의자 동맹
정의주의당 (우익 파벌)
지원 세력: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파라과이
페루
우루과이
미국 정부의 지원
프랑스
이스라엘
영국 (1982년까지)
교전국 2ERP (1973–1979)
몬토네로스 (1974–1980)
FAP
RL
지원 세력:
지휘관 및 지도자
교전국 13차 페론 정부
후안 페론
호세 로페스 레가
이사벨 페론
국가 재조직 과정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에밀리오 에두아르도 마세라
올란도 라몬 아고스티
로베르토 에두아르도 비올라
카를로스 라코스테
레오폴도 갈티에리
교전국 2다양한 게릴라 지도자 및 시민 사회 지도자
사상자 및 피해 규모
교전국 1군인 및 경찰 539명 사망
게릴라에 의해 민간인 1,355명 사망
교전국 2몬토네로스 5,000명 사망
ERP 5,000명 사망 및 체포
RL 8명 사망
총 사상자22,000–30,000명 사망 또는 실종

2. 역사적 배경

"더러운 전쟁"의 정확한 시작 시점은 불분명하다. 다만 1975년 쿠바 등의 지원을 받은 공산주의 게릴라 조직 인민혁명군(Ejército Revolucionario del Pueblo|에헤르시토 레볼루시오나리오 델 푸에블로es, ERP)에 맞서 아르헨티나군이 투쿠만 주에서 벌인 탄압 작전을 중요한 기점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당시 ERP는 아르헨티나 내에서도 빈곤한 산악 지대인 투쿠만 주를 혁명 거점으로 삼으려 했고, 또 다른 게릴라 조직인 몬토네로스는 도시 지역에서 테러 활동을 벌였다. 이에 이사벨 페론 대통령은 이른바 "섬멸 지령"을 내려 군대에 강경 진압을 명령했고, 군은 독립 작전(Operativo Independencia|오페라티보 인데펜덴시아es)을 개시하여 게릴라 소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군은 게릴라 점령 지역에 큰 피해를 입혔다.

1975년 9월, 이사벨 페론 대통령이 병 치료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고 Ítalo Luder|이탈로 루데르es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시기, 몬토네로스의 군부대 공격으로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루데르 대행은 게릴라 진압 작전을 전국으로 확대했고, 각 지역의 치안은 사실상 군 사령관의 통제 하에 놓였다. 여기에 우익 민병 조직인 아르헨티나 반공 동맹(AAA)까지 가세하면서 군의 탄압과 게릴라의 보복 공격이 격화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이러한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폭력 사태는 결국 1976년 3월 24일 군부 쿠데타로 이어졌다. 육군 총사령관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해군 총사령관 에밀리오 에두아르도 마세라, 공군 총사령관 올란도 라몬 아고스티가 권력을 장악하고 군사 독재 정권을 수립했다.

군사 정권은 스스로를 "국가 재편성 프로세스(Proceso de Reorganización Nacional|프로세소 데 레오르가니사시온 나시오날es)"라 칭하며, 자유주의적 페론주의자나 좌익으로 간주된 수많은 반체제 인사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했다. 불법적인 체포, 고문, 살해, 강제 납치가 빈번했으며, 특히 정치범을 산 채로 비행기에서 바다에 떨어뜨리는 "죽음의 비행"은 악명이 높았다.[215] 이러한 폭압적인 통치에 맞서 평화 운동을 벌였던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1977년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지만, 그의 활동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198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216] 군부 독재 정권의 이러한 폭력적인 통치는 더러운 전쟁의 핵심적인 배경을 이룬다.

2. 1. 페론주의의 귀환과 혼란

1975년 쿠바 등의 지원을 받은 공산주의 게릴라 조직인 인민혁명군(Ejército Revolucionario del Pueblo, ERP)은 아르헨티나의 가난한 산악 지대인 투쿠만 주를 혁명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고, 한때 주의 3분의 1을 장악했다. ERP의 활동에 발맞춰 또 다른 게릴라 조직인 몬토네로스 역시 도시 지역에서 테러 활동을 벌였다.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여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사벨 페론은 "섬멸 지령"을 내리고, 군대가 투쿠만 주의 게릴라 세력을 소탕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군은 독립 작전 (Operativo Independencia)을 개시하여 특수 부대를 포함한 육군과 공군을 투입해 게릴라와의 전투를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게릴라가 장악했던 마을들이 파괴되고 주민들에게 피해가 발생했다.

1975년 9월, 이사벨 페론 대통령이 병 치료를 위해 잠시 직무를 떠나자 Ítalo Luder|이탈로 루데르es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그해 10월, 포르모사 주의 군부대가 몬토네로스의 공격을 받아(Operation Primicia) 28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루데르 대행은 국내 치안 협의회를 설립하고, 투쿠만 주에서 진행 중이던 게릴라 소탕 작전을 아르헨티나 전역으로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국가는 5개의 군관구로 나뉘었고, 각 지역의 치안은 사실상 군 사령관의 통제 하에 놓였다. 여기에 우익 민병대인 아르헨티나 반공 동맹(AAA)까지 가세하면서 군의 탄압과 게릴라의 공격이 격화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이러한 극심한 혼란은 결국 1976년 3월 24일 군부 쿠데타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2. 2. 이사벨 페론 정부

"더러운 전쟁"의 정확한 시작 시점은 명확하지 않지만, 1975년 이사벨 페론 정부 시기 투쿠만 주에서 벌어진 군사 작전을 중요한 기점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37] 당시 쿠바 등의 지원을 받은 공산주의 게릴라 조직인 인민혁명군(Ejército Revolucionario del Pueblo, ERP)은 아르헨티나 내에서도 특히 가난한 산악 지대인 투쿠만 주를 혁명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고, 한때 주 면적의 3분의 1을 장악하기도 했다. ERP에 호응하여 또 다른 게릴라 조직인 몬토네로스 역시 도시 지역에서 테러 활동을 벌였다.

이에 이사벨 페론 대통령은 이른바 "섬멸 지령"을 내려 "투쿠만 주에 있는 파괴 분자를 섬멸하기 위해 군은 모든 필요한 수단을 동원하라"고 명령했다. 군은 독립 작전 (Operativo Independencia)을 개시하여 특수 부대를 포함한 육군 병력과 공군력을 동원해 게릴라 소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군은 게릴라가 장악한 마을을 파괴하고 주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1975년 9월, 이사벨 페론이 병 치료를 위해 잠시 대통령직을 떠나자 이탈로 루데르(스페인어판)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그해 10월, 포르모사 주의 한 보병 연대 숙소가 몬토네로스의 공격(Operation Primicia)을 받아 군인 28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루데르 대행은 국내 치안 협의회를 설립하고, 투쿠만 주에 국한되었던 게릴라 진압 작전을 아르헨티나 전역으로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전국은 5개의 군관구로 나뉘었고, 각 지역의 치안은 사실상 군 사령관의 통제 하에 놓였다. 이 시기 극우 민병대인 아르헨티나 반공 동맹(AAA)도 활동을 본격화하며 군의 탄압 작전에 가담했고, 군경의 폭력과 게릴라의 보복 공격이 반복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이러한 극심한 혼란과 폭력 사태는 결국 1976년 3월 24일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등이 주도한 쿠데타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2. 3. 독립 작전

"더러운 전쟁"의 시작 시점은 불분명하지만, 1975년 이사벨 페론 정부가 쿠바 등의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 게릴라 조직 인민혁명군(Ejército Revolucionario del Pueblo|에헤르시토 레볼루시오나리오 델 푸에블로es, ERP)을 상대로 투쿠만 주에서 벌인 아르헨티나군의 진압 작전을 그 발단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인민혁명군(ERP)은 아르헨티나 내에서도 특히 가난한 산악 지대인 투쿠만 주를 "혁명 거점"으로 삼고자 했으며, 실제로 해당 지역의 3분의 1 가량을 장악했다. 이에 호응하여 또 다른 게릴라 조직인 몬토네로스 역시 도시 지역에서 테러 활동을 전개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이사벨 페론 대통령은 "섬멸 지령"을 발표하고, "투쿠만 주에 있는 파괴 분자를 섬멸하기 위해 군은 모든 필요한 수단을 동원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아르헨티나군은 독립 작전(Operativo Independencia|오페라티보 인데펜덴시아es)을 개시했다. 특수 부대를 포함한 보병과 공군력을 동원하여 게릴라와의 전투를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군은 게릴라가 장악했던 마을을 파괴하고 주민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1975년 9월, 이사벨 페론 대통령이 병 치료를 위해 잠시 직무를 떠나자 이탈로 루데르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그해 10월, 몬토네로스가 포르모사 주의 군부대를 공격하여 28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사건(Operation Primicia|오퍼레이션 프리미시아영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루데르 대행은 국내 치안 협의회를 설립하고, 투쿠만 주에 국한되었던 게릴라 진압 작전을 아르헨티나 전역으로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전국은 5개의 군관구와 그 하위 지구로 나뉘었으며, 각 지역의 치안은 사실상 해당 지역 군 사령관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군의 탄압 작전에는 극우 민병 조직인 아르헨티나 반공 동맹(AAA)도 가담하여 폭력과 보복의 악순환이 심화되었다.

2. 4. 1976년 군사 쿠데타

1975년, 이사벨 페론 정부 하에서 아르헨티나는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쿠바 등의 지원을 받은 공산주의 게릴라 조직 인민혁명군(ERP)은 특히 가난한 산악 지대인 투쿠만 주를 거점으로 삼아 주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려 시도했다. 또 다른 게릴라 조직인 몬토네로스는 도시 지역에서 테러 활동을 벌였다. 이에 이사벨 페론 대통령은 "섬멸 지령"을 내려 군에게 투쿠만 주의 "파괴 분자"를 섬멸하기 위해 모든 필요한 수단을 동원하라고 명령했다. 군은 '독립 작전'(Operativo Independencia)을 개시하여 특수 부대를 포함한 육군과 공군을 투입해 게릴라 소탕에 나섰으나, 이 과정에서 게릴라 점령 지역의 마을이 파괴되고 주민들에게 피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1975년 9월, 이사벨 페론 대통령이 병 치료를 위해 잠시 직무를 떠나자 이탈로 루데르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그해 10월에는 몬토네로스가 포르모사 주의 보병 연대 숙소를 공격하여 28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사건('프리미시아 작전', Operation Primicia)이 일어났다. 루데르 대행은 국내 치안 협의회를 설립하고, 투쿠만 주에서 진행되던 게릴라 진압 작전을 아르헨티나 전역으로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국가는 5개의 군관구와 그 하위 지구로 나뉘었으며, 각 지역의 치안은 사실상 군 사령관이 통제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익 민병 조직인 아르헨티나 반공 동맹(AAA)까지 가세하여 군의 탄압과 게릴라의 공격이 반복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결국 1976년 3월 24일, 군 고위 장교들이 주도한 쿠데타가 발생했다. 육군 총사령관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해군 총사령관 에밀리오 에두아르도 마세라, 공군 총사령관 올란도 라몬 아고스티가 함께 권력을 장악했다. 이들 군사 독재 정권은 스스로를 '국가 재편성 프로세스'(Proceso de Reorganización Nacional)라고 칭했다. 비델라를 비롯한 군부 지도자들은 집권 이후 자유주의 성향의 페론주의자나 좌익으로 간주된 수많은 반체제 인사에 대해 불법적인 체포, 고문, 살해, 강제 납치 등 극심한 탄압을 자행했으며, 이는 악명 높은 "죽음의 비행"[215]과 같은 반인도적 범죄로 이어졌다. 평화 운동가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 역시 1977년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으나, 198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며 군부 독재의 폭력성을 국제 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216]

3. 특징

더러운 전쟁은 일반적인 전쟁과 명확히 구분되는 특징을 지닌다. 가장 큰 차이점은 군사적 공격 대상의 범위이다. 1949년 제네바 협약 준비 과정에 참여했던 인도주의적 국제법 전문가 Jean Pictet|장 픽테프랑스어는 "죽일 수 있는 병사만 죽임당할 수 있다"[224]고 명시하며 일반적인 전쟁에서는 무장한 군인만이 합법적인 군사 목표임을 밝혔다. 그러나 더러운 전쟁에서는 이러한 구분이 모호해져 민간인까지 공격 대상에 포함된다.

일반 전쟁에서는 전투 조직과 민간 조직을 구분하는 반면, 더러운 전쟁에서는 이 경계가 흐려지고 훨씬 넓은 범위의 민간 조직이 분쟁에 휘말리게 된다. 군사 목표 역시 다르다. 일반 전쟁은 주로 적의 군사력과 직접 관련된 물리적 자산을 목표로 삼지만, 게릴라전의 양상을 띠는 더러운 전쟁은 사회 및 경제 모델 자체를 해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공격 대상이 훨씬 광범위해진다.[223] 이는 민간인의 삶의 기반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특징은 특정 국가의 군사 교리나 작전 계획에서도 확인된다. 예를 들어 콜롬비아의 대반란 전술 매뉴얼이나 과테말라의 Plan de Campaña Sofía|소피아 작전 계획spa 등은 민간인을 주요 목표 또는 작전 대상으로 명시하고 있다.[223][225] 장 픽테는 전쟁의 폭력이 목표 달성에 필요한 최소한에 그쳐야 하며, 비전투원인 민간인은 가능한 보호받아야 한다고 강조했지만[226], 더러운 전쟁은 이러한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 문화 및 종교 자산 보호, 식량 공급 통제 금지, 약탈 금지와 같은 국제적 규범이 무시되는 경우가 많으며, 지뢰, 공중 폭격, 부비트랩 등 민간인에게 무차별적인 피해를 줄 수 있는 무기나 수단이 사용되기도 한다.

강제 실종, 고문, 민간인 및 사회 운동가에 대한 광범위한 탄압과 같은 국가 테러리즘은 더러운 전쟁의 특징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로, 이는 단순히 군사적 충돌을 넘어 사회 전체를 공포로 통제하려는 시도였다.

3. 1. 군사적 목적

더러운 전쟁은 일반적인 전쟁과 군사적 목표 설정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1949년 제네바 협약 준비 과정에 참여했던 인도주의적 국제법 전문가 Jean Pictet|장 픽테fra가 "죽일 수 있는 병사만 죽임당할 수 있다"[224]고 명시했듯, 일반적인 전쟁에서는 합법적인 군사 목표가 되는 대상은 주로 무장한 군인이었다. 그러나 더러운 전쟁에서는 이러한 구분이 모호해지며 군사적 목표의 범위가 확장되어 민간인까지 포함된다.

일반 전쟁에서는 전투 조직과 민간 조직을 비교적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지만, 더러운 전쟁에서는 그 경계가 흐려지고 훨씬 넓은 범위의 민간 조직이 분쟁에 휘말리게 된다. 또한, 일반적인 전쟁에서는 전쟁 활동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물리적 자산만이 군사 목표물이 되지만, 게릴라전의 성격을 띠는 더러운 전쟁에서는 사회 및 경제 모델 자체를 해체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공격 대상이 훨씬 더 광범위해진다.

이러한 특징은 여러 국가의 사례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콜롬비아에서는 대반란 전술 매뉴얼에 "싸워야 할 적은 주로 민간인들 중에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1963년 매뉴얼에는 "현대전은 민간인들 자체에 설립된 조직과의 대결"로 구성되며, "전쟁 작전은 주민들 사이에서 시행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1979년 매뉴얼은 군인들이 훈련 과정에서 알아야 할 이론적인 측면으로 "비정규전의 주요 목표 중 하나로서의 민간인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이 매뉴얼은 공장 폐쇄, 파업, 학생 조직, 노동조합 운동 및 기타 대중 조직을 "혁명 전쟁이 나라에서 나타나는 방식"으로 분류했다. 특히 이 매뉴얼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주제는 "정보"와 "심리전"이며, 여기에는 비윤리적인 방법을 포함하여 수많은 민간인 통제, 괴롭힘, 억압 방법이 규정되어 있다.[223]

과테말라의 경우, Plan de Campaña Sofía|소피아 작전 계획spa은 1960년부터 1996년까지 이어진 내전 동안 키체 지역에서 당시 육군이 "익실 지역의 민간인을 박해하고 전멸시키기 위해" 수행했던 세부 행동 사항을 포함하고 있다.[225] 이는 더러운 전쟁에서 민간인이 어떻게 직접적인 군사적 목표가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이다.

3. 2. 고통 경제

더러운 전쟁은 일반적인 전쟁과 명확히 구분된다. 인도주의적 국제법 전문가이자 1949년 제네바 협약 준비 과정에 참여했던 장 픽테(fr)는 “죽일 수 있는 병사만 죽임당할 수 있다”[224]고 명시한 바 있다. 이는 일반 전쟁에서는 무장한 군인만이 합법적인 군사 목표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더러운 전쟁에서는 이러한 구분이 모호해지며, 공격 대상이 민간인까지 확대된다.

일반 전쟁에서는 전투 조직과 민간 조직이 비교적 명확히 구분되지만, 더러운 전쟁에서는 그 경계가 흐려지고 훨씬 넓은 범위의 민간 조직이 분쟁에 휘말리게 된다. 또한, 일반 전쟁에서는 전쟁 활동에 직접 기여하는 물리적 자산만이 군사 목표가 되지만, 게릴라전에서는 사회 경제 모델 자체를 해체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공격 대상이 훨씬 광범위해진다. 이는 민간인의 삶과 직결된 기반 시설, 경제 활동까지 포함하게 된다.

예를 들어, 콜롬비아에서는 대반란 전술 매뉴얼에 “싸워야 할 적은 주로 민간인들 중에 있다”고 명시하기도 했다. 1963년 매뉴얼은 “현대전은 민간인들 자체에 설립된 조직과의 대결”이며 “전쟁작전은 주민들 사이에서 시행한다”고 기술했고, 1979년 매뉴얼은 군인들이 훈련에서 알아야 할 이론으로 “비정규전의 주요 목표 중 하나로서의 민간인의 의미”를 강조했다. 이 매뉴얼은 공장 폐쇄, 파업, 학생 조직, 노동조합 운동 등을 “혁명전쟁이 나라에서 나타나는 방식”으로 규정하며, 정보전과 심리전을 통해 민간인을 통제, 괴롭힘, 억압하는 다양한 비윤리적 방법들을 제시했다.[223] 과테말라 내전(1960-1996) 당시 육군이 키체 지역에서 수행한 “소피아 작전 계획”에는 “익실 지역의 민간인을 박해하고 전멸시키기 위한” 세부 행동 지침이 포함되어 있었다.[225]

장 픽테는 전쟁의 폭력이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한 필요악으로서 행사되어야 하며, 목표 달성에 불필요한 폭력은 잔인하고 어리석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승리를 위해 적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되, 인명 피해는 최소화하고(사망보다는 부상, 부상보다는 포로 선호), 비전투원인 민간인은 가능한 공격받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226] 그러나 게릴라전과 더러운 전쟁은 이러한 원칙을 따르지 않았다. 문화 및 종교 자산 보호, 민간인 기근을 유발하는 식량 공급 통제, 약탈 금지 등 장소에 대한 보호 규범도 무시되었으며, 지뢰, 공중 폭격, 부비트랩 등 특정 무기 사용 제한 역시 지켜지지 않았다.

아르헨티나의 사례는 이러한 '고통 경제'의 단면을 보여준다. 후안 페론 사후 이사벨 페론 정부 시기와 이후 군부 독재 기간 동안 사회 운동에 대한 탄압이 극심했다. CONADEP 인권 위원회 보고서 ''Nunca Más''는 1973년부터 1975년 사이에만 458건의 암살 사건을 기록했는데[46], 이는 주로 호세 로페스 레가가 이끈 준군사조직 트리플 A(AAA) 등에 의해 자행되었다. 특히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주요 표적이 되었다.

  • 1973년: 살타의 CGT 지부 폐쇄, 코르도바 주의 CGT, SMATA, 루스 이 푸에르사(es) 사무실 피습. 루스 이 푸에르사 사무총장 아구스틴 토스코는 체포를 피해 은신.[46] 카를로스 바체(8월 21일), 엔리케 다미아노(코르도바 택시 노조, 10월 3일), 후안 아빌라(코르도바, 10월 4일), 파블로 프레데스(부에노스아이레스, 10월 30일), 아드리안 산체스(후후이 주, 11월 8일) 등 노조 간부 암살.[46]
  • 1974년: ''es'' 노조 대표 자격 박탈 및 사무총장 라이문도 온가로 체포(10월).[46] IKA-르노와 갈등을 겪던 SMATA 코르도바 노조 폐쇄 및 지도부/활동가 체포 (이들 다수는 1976–1983년 독재 정권 하에서 암살됨).[46] 코르도바 CGT 사무총장이자 전 주 부지사인 아틸리오 로페스 암살(9월 16일).[46]
  • 1975년: 빌라 콘스티투시온 급습 작전(3월 20일). 노조 분쟁을 빌미로 군경 4,000명 동원, 시민 및 노조 지도자 150여 명 체포, 우니온 오브레라 메탈루르기카(금속 노동자 연합) 자회사 폐쇄. 이 과정에는 포드, 피아트, 르노, 메르세데스-벤츠, 푸조, 크라이슬러 등 대기업 노조원 탄압이 포함되었으며, 때로는 기업 임원과 노조 관료들의 지원이 있었다.[46]


한편, 몬토네로스인민혁명군(ERP)과 같은 좌익 게릴라 조직들도 경제적 목표물을 공격했다. 굿이어, 파이어스톤 유통업체, 리커 및 엘리 제약 연구소, 제록스, 펩시콜라 병입 회사 등이 폭탄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47] 피아트 콘코드 아르헨티나 사장(1972년 납치 후 살해)[49], 포드 자동차 회사 임원(1973년 납치 시도 중 사망)[50], 푸조 대표(납치되었다가 20만달러의 몸값을 받고 석방)[51], 포드 미국인 총지배인(1973년 살해)[52], 푸조 이사(1973년 납치)[53], IKA-르노 노동 관계 관리자(1974년 살해), 자동차 부품 공장 관리자(1975년 납치)[54], 메르세데스-벤츠 생산 관리자(1975년 몬토네로스에 의해 납치)[55], 미국 크라이슬러 임원(1975년 살해)[56], 코르도바의 르노 공장 관리자(1975년 살해)[57], 독일 소유의 보르그와드 자동차 공장의 엔지니어와 크라이슬러 임원(1976년 살해) 등이 공격 대상이 되었다.

1975년 이사벨 페론 정부는 투쿠만 주에서의 ERP 활동을 진압하기 위해 Operativo Independencia을 명령(비밀 대통령령 261호)하여 군대에 "파괴 분자들의 행위를 무력화하거나 소멸"시킬 권한을 부여했다.[60][61] 이후 이탈로 루데르 임시 대통령 시기에는 국방 위원회를 창설하고 "전국적으로 파괴 분자들을 소멸"시키는 임무를 부여하는 법령(2770, 2771, 2772)이 발표되어[62][63][64] 국가적 차원에서 탄압이 확대되었다.[65] 이는 군사적 목표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기반과 민간인 자체를 전쟁의 대상으로 삼는 더러운 전쟁의 특징을 보여준다.

3. 3. 국가 범죄

멕시코에서는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 말까지 반정부 무장 반대 운동을 해산시키기 위해 군사 및 정치적 탄압이 자행되었다. 이는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에서 일어난 더러운 전쟁과는 본질적으로 분리적인 성격을 띠며, 군대와 공모한 언론에 의해 자행되었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강도가 낮은 전쟁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러한 언론 탄압 등으로 인해 멕시코의 더러운 전쟁은 대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후안 페론이 1974년 7월 1일 사망한 후, 그의 세 번째 부인인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승계했으나 1976년 3월 군부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1985년 CONADEP 인권 위원회의 보고서 ''Nunca Más''(다시는 없을 것이다)에 따르면, 1973년부터 1975년 사이에 458건의 암살 사건이 기록되었으며, 이는 주로 호세 로페스 레가가 조직한 준군사 단체 트리플 A(AAA)에 의해 자행되었다. 1973년에는 19건, 1974년에는 50건, 1975년에는 359건의 암살이 발생했으며, ''Argenpress''는 1974년에 최소 25명의 노동조합원이 암살되었다고 보고했다.[46] 사회 운동에 대한 탄압은 이미 그 이전부터 시작되어, 1973년 7월 17일에는 살타의 CGT 지부가 폐쇄되었고, 코르도바 주의 CGT, SMATA, 루스 이 푸에르자(Luz y Fuerza) 지부들이 무장 공격을 받았다. 루스 이 푸에르자의 사무총장 아구스틴 토스코는 체포를 피해 숨어 지내다 1975년 11월 5일 사망했다.[46]

노동조합 간부들 역시 탄압의 주요 대상이 되었다. 1973년에는 카를로스 바체(8월 21일), 코르도바 택시 노조의 엔리케 다미아노(10월 3일), 후안 아빌라(10월 4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파블로 프레데스(10월 30일), 후후이 주의 아드리안 산체스(11월 8일) 등이 암살되었다. 1974년과 1975년에도 노동조합원, 변호사 등에 대한 암살은 계속 증가했으며, 강성 노조들은 폐쇄되고 지도자들은 체포되었다. 1974년 8월, 이사벨 페론 정부는 사무총장 라이문도 온가로가 10월에 체포된 'Federación Gráfica Bonaerense'의 노동조합 대표 자격을 박탈했다.[46] 같은 달, IKA 르노와 갈등을 겪던 SMATA 코르도바 노조는 전국 지도부에 의해 폐쇄되었고, 다수의 지도자와 활동가들이 체포되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1976–1983년 독재 정권 기간 동안 암살되었다. 코르도바 CGT 사무총장이자 전 주 부지사였던 아틸리오 로페스는 1974년 9월 16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암살당했다.[46]

한편, 페론주의 게릴라 조직인 몬토네로스는 1977년 약 300~400명으로 추산되었으며(1975년에는 약 2,000명으로 정점에 달했으나 절반 가량은 민병대 관련 인원이었다[48]), 이들은 굿이어, 파이어스톤, 리커, 엘리 제약, 제록스, 펩시콜라 등에 폭탄 테러와 같은 공격을 감행했다.[47] 인민혁명군(ERP) 게릴라는 1972년 3월 피아트 콘코드 아르헨티나 사장을 납치하여 4월 10일 살해했고,[49] 1973년에는 포드 자동차 회사 임원이 납치 시도 중 사망했다.[50] 푸조 대표는 납치되었다가 몸값 20만달러를 받고 풀려났으며,[51] FAP 게릴라는 포드 자동차 미국인 총지배인 존 스윈트를 살해했다.[52] 12월에는 아르헨티나 푸조 이사가 납치되었다.[53] 1974년 FAP 게릴라는 코르도바 IKA-르노 자동차 회사의 노무 관리자를 살해했고, 1975년에는 자동차 부품 공장 관리자[54]와 메르세데스-벤츠 생산 관리자가 몬토네로스에 의해 납치되었으며,[55] 미국 크라이슬러 임원[56]과 코르도바 르노 공장 관리자가 살해되었다.[57] 1976년에는 독일계 보르그와드 자동차 공장의 엔리케 아로자 가레이와 크라이슬러 임원이 살해되었다. 총 83명의 군인과 경찰이 좌익 게릴라 활동으로 사망했다.[58]

1975년, 체 게바라포코 이론에 영감을 받은 게바라주의 ERP는 100명 미만의 인원으로 투쿠만 주에서 농촌 반란을 시도했으나 아르헨티나 육군에 의해 진압되었다.[59] 같은 해 2월, 이사벨 페론은 비밀 대통령령 261호에 서명하여 육군에게 투쿠만 주의 반란을 불법적으로 무력화하거나 "소멸"시키도록 명령했다. 이 ''Operativo Independencia''은 군대에 "투쿠만 주에서 활동하는 파괴 분자들의 행위를 무력화하거나 소멸시키기 위한 모든 군사 작전을 수행"할 권한을 부여했다.[60][61] 극우 암살단은 좌익 게릴라 소탕을 명분으로 삼아 좌파 이념을 가진 모든 반대자들을 제거하고 일반 범죄를 은폐하는 데 이를 이용했다.

7월에는 총파업이 발생했다. 이사벨 페론의 건강 악화로 임시 대통령직을 맡았던 상원 임시 의장 이탈로 루데르는 법령 2770, 2771, 2772호를 발표하여 대통령을 수장으로 하고 장관과 군 수뇌부를 포함하는 국방 위원회를 창설했다.[62][63][64] 이 위원회는 국가 및 지방 경찰과 교정 시설에 대한 지휘권을 부여받았으며, "전국적으로 파괴 분자들을 소멸"시키는 임무를 맡았다.[65]

군사재판 판결문에서는 "전복 세력이 국가 영토의 어떤 부분도 장악하지 못했고, 내전 또는 교전 상태 승인을 얻지 못했으며, 외국 세력의 대규모 지원이나 국민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고 명시했으나,[39] 이러한 위협은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1975년, 이사벨 페론 대통령은 군부의 압력으로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를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다. 비델라는 "국가가 다시 안전해지기 위해서는 아르헨티나에서 필요한 만큼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한다"[66]고 공언하며 암살단을 옹호했다. 그는 1976년 3월 24일 이사벨 페론을 축출한 쿠데타의 주역 중 한 명이었으며, 이후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장군, 에밀리오 에두아르도 마세라 제독, 올란도 아고스티 장군이 이끄는 군사 정부가 들어섰다.[67]

스스로를 국가 재조직 과정이라 칭한 군사 정부는 특히 "강제 실종(desaparecidos)"을 통해 탄압을 체계화했다. 시신을 찾을 수 없게 만들어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정권 하의 칠레와 마찬가지로 법적 소송 제기를 극도로 어렵게 만들었다. 이러한 국가 테러 전술은 아르헨티나 군대가 아메리카스 학교에서 받은 훈련과, 알제리 전쟁(1954-1962) 당시 프랑스군이 사용했던 "반란 진압" 전술을 전수한 비밀 정보국 출신 프랑스 교관들의 영향도 받았다.[46][68]

1976년까지 콘도르 작전은 최고조에 달했다. 아르헨티나에 망명 중이던 칠레인들은 다시 위협을 느껴 제3국으로 피신해야 했다. 칠레의 카를로스 프라츠 장군은 이미 1974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칠레 DINA에 의해 암살되었는데, 여기에는 전 DINA 요원 마이클 타운리와 엔리케 아란시비아가 가담했다. 쿠바 외교관들도 악명 높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오토모토레스 오를레티'' 고문 센터에서 암살되었다. 이곳은 독재 정권 시절 300여 개의 비밀 감옥 중 하나로, 과거 무장 강도 전과가 있고 SIDE 총사령관 오토 팔라디노에게 직접 보고했던 아니발 고든이 이끄는 'Grupo de Tareas 18'이 관리했다. ''오토모토레스 오를레티''는 콘도르 작전에 관련된 외국 정보 기관들의 주요 기지였다. 이곳에서 2개월간 구금되었던 생존자 호세 루이스 베르타초는 수감자들 중에 칠레, 우루과이, 파라과이, 볼리비아인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자국 정보 요원들에게 심문을 받았다고 증언했다.[69]

존 딩스의 저서 ''콘도르의 시대''에 따르면, 오를레티 센터에 수감되었던 칠레 MIR 수감자들은 호세 루이스 베르타초에게 두 명의 쿠바 외교관, 헤수스 세하스 아리아스와 크레센시오 갈라네가가 고든 그룹에게 고문당하고 마이애미에서 온 남성에게 심문받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 주재 쿠바 대사 에밀리오 아라고네스를 보호하던 이 두 외교관은 1976년 8월 9일, 독재 정권 보안군이 사용하던 포드 팔콘 차량으로 거리를 봉쇄한 40명의 무장 SIDE 요원들에게 납치되었다.[70] 존 딩스는 FBI와 CIA가 이 납치 사실을 통보받았다고 주장하며, 1976년 9월 22일 부에노스아이레스 FBI 요원 로버트 셰러가 보낸 전보를 공개했다. 이 전보에는 1976년 9월 21일 워싱턴 D.C.에서 전 칠레 장관 오를란도 레텔리에를 암살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마이클 타운리가 두 쿠바인 심문에 참여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전 DINA 수장은 1999년 12월 22일 아르헨티나 연방 판사 마리아 세르비니 데 쿠브리아에게 타운리와 쿠바인 기예르모 노보 삼폴이 오를레티 센터에 있었으며, 이들이 1976년 8월 11일 칠레에서 아르헨티나로 이동하여 "두 쿠바 외교관의 고문과 암살에 협력"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69] 1992년 파라과이에서 발견된 "테러 문서"에 따르면, 콘도르 작전의 틀 안에서 5만 명이 살해되고, 2만 2천에서 3만 명이 강제 실종되었으며, 40만 명이 수감되었다.[71][72]

구 은밀한 구금 센터 클럽 아틀레티코(Club Atlético), 부에노스아이레스 시, 파세오 콜론 1200 발굴 현장


이러한 인도에 반하는 범죄에는 기업들도 연루되었다. 포드, 메르세데스-벤츠,[73] 아신다르(Acindar), 달미네 시데르카(Dálmine Siderca), 잉헤니오 레데스마(Ingenio Ledesma), 아스타르사(Astarsa)[74][75] 등 여러 기업의 고위 임원들이 관여했다.

컬럼비아 대학교의 빅토리아 바수알도(Victoria Basualdo)는 대기업과 군부 간의 공모 관계를 조사하여, 수십 명의 노조 대표들이 납치되어 고문을 당하고, 종종 회사 내부에 억류되었다가 회사 제공 차량으로 은밀한 구금 센터(CDC)로 이송된 6개 회사를 확인했다. 달미네 시데르카의 경우, 공장 옆에 문으로 연결된 CDC가 설치되었으며, 아신다르에서는 이미 1975년 이사벨 페론 정부 시절부터 연방 경찰이 운영하는 구금 및 심문 센터가 존재했다.[75]

알리시아 벤스(Alicia Vence) 판사는 포드와 메르세데스-벤츠 시설 내에서 자행된 국가 테러리즘 행위와 당국의 개입 여부를 조사했다. 증언에 따르면 메르세데스-벤츠의 센터는 레이싱 드라이버 후안 마누엘 팡히오가 이끌었다고 하며, 2015년에 이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다.[76] 야금 회사 아신다르의 사장이자 1976년부터 1980년까지 경제부 장관을 지낸 호세 알프레도 마르티네스 데 오스는 SADECO 면화 회사 소유주인 사업가 페데리코와 미겔 구트하임의 납치 사건으로 형사 기소되기도 했다.[77]

3. 4. 언론의 역할

칠레피노체트 독재 기간 동안 일부 언론 매체는 정부의 테러 행위를 은폐하고 정부 선전을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974년과 1975년 사이, 콘도르 작전의 일환으로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의 정보 기관들은 서로 협력했다. 이들의 목표 중 하나는 아르헨티나에서 발생한 좌익 극단주의자들의 활동과 관련된 뉴스 보도를 조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칠레의 주요 언론사인 엘 메르쿠리오(El Mercurio)와 라 세군다(La Segunda) 등은 좌익 단체 간의 내부 다툼과 학살에 대한 허위 뉴스를 1면에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는 실제로는 칠레 군사 독재에 반대하던 119명의 강제 실종 사건을 은폐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언론의 행태는 훗날 "선전, 허위 정보 및 정보 조작의 국제적 행동"으로 평가받았다.

4. 국가별 더러운 전쟁

'더러운 전쟁'은 20세기 후반, 특히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을 중심으로 발생한 국가 주도의 폭력과 인권 침해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여러 국가에서 유사한 형태의 국가 테러리즘이 자행되었으며, 이 섹션에서는 주요 사례들을 살펴본다.

아르헨티나에서는 1976년부터 1983년까지 군사 정권이 '국가재편성과정'이라는 명분 아래 수많은 반대파 및 시민들을 조직적으로 강제 실종, 고문,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멕시코에서는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 말까지 반정부 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군사적, 정치적 조치가 이어졌으나, 강력한 언론 탄압으로 인해 그 실상이 오랫동안 가려져 있었다. 칠레에서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반대파 제거와 사회 통제를 목적으로 한 국가 테러리즘이 자행되어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각 국가별 상세한 내용은 이어지는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4. 1. 아르헨티나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대통령 집권 시기인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아르헨티나에서 군사정권이 '국가재편성과정'이라는 명분 아래 국가 주도의 테러, 조직적인 고문, 강제 실종, 정보 조작 등을 자행한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 학생, 기자, 페론주의 또는 사회주의 성향의 게릴라 및 동조자들이 주요 탄압 대상이 되었다. 약 1만 명의 몬토네로스와 인민혁명군(ERP) 게릴라를 포함하여, 최소 9,000명에서 최대 30,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실종되거나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남미 군사독재 정권들의 비밀 공작인 콘도르 작전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1976년 쿠데타 이전 수십 년간 아르헨티나 군부는 기득권 세력의 지원을 받아[28] 후안 페론의 포퓰리즘 정부에 반대하며 정치에 개입해왔다. 1955년 자유 혁명으로 페론을 축출하고 페론주의를 금지하자, 노동 계급을 중심으로 저항이 조직되었다.[29] 1960년대 들어 페론주의 탄압과 정치적 자유 제한에 대한 반발로 ''우투룽코스''[30], 인민 게릴라군(EGP) 등 좌익 게릴라 단체들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1973년 페론이 망명에서 돌아온 후 1973년 에세이사 학살을 계기로 페론주의 내 좌우익 분열이 심화되었고, 페론 사후 대통령이 된 이사벨 페론 정부 시기에는 사회복지부 장관 호세 로페스 레가가 조직한 극우 암살단 아르헨티나 반공 동맹(AAA)이 활동하며 좌익 인사들을 살해했다. 1975년, 이사벨 페론 정부는 군대와 경찰에게 좌익 "파괴 분자"를 "소탕"할 권한을 부여하는 법령에 서명했고, 이는 군부가 투쿠만주에서 독립 작전(Operativo Independencia)을 벌이며 게릴라를 탄압하는 명분이 되었다.

1976년 3월 24일,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육군 총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국가재편성과정'을 선포했다. 군사 정권은 정치적 반대 세력이나 좌파로 간주되는 이들을 탄압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비밀 수용소를 운영했으며,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불법 구금, 고문, 살해당했다. (상세 내용은 #비밀 수용소 참조) 또한, 당시 아르헨티나 가톨릭교회의 일부 지도층이 군사 정권의 인권 탄압을 묵인하거나 협조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상세 내용은 #가톨릭 교회의 군부 협조 참조) 희생자들의 정확한 수는 여전히 확인되지 않았으나, 실종자 가족들의 모임인 5월 광장 어머니회와 5월 광장 할머니회는 수십 년간 진상 규명과 정의 실현을 위해 활동해왔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주요 언론사인 클라린, 라 나시온, 라 라손은 군사 정권과의 유착 의혹 속에 신문용지 회사 파펠 프렌사를 인수하는 과정에 개입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들은 회사를 소유했던 다비드 그레이버의 미망인 리디아 파파레오에게 압력을 가해 주식을 매각하도록 강요했다는 증언이 나왔으나, 관련자들은 2016년 무죄 판결을 받았다.

'더러운 전쟁'이라는 용어는 군사 정권 스스로 사용한 것으로, 사회 질서 유지와 정치적 파괴 분자 소탕을 위해 불가피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하며 고문과 강간 등 비인도적 행위를 정당화하려 했다. 그러나 인권 단체들은 이것이 국가에 의한 테러 행위를 '전쟁'으로 포장하려는 완곡어법이라고 비판하며, 실제로는 내전 상태가 아니었고 군부가 일방적으로 반대 세력을 탄압한 반인도적 범죄라고 주장한다.[37][38][40][41] 1985년 군사 정부 재판에서 검사 훌리오 스트라세라는 게릴라 세력이 국가에 실질적 위협이 되지 않았으며 전쟁 상태로 간주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39]

군사 정권은 포클랜드 제도(말비나스 제도)를 침공하여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켰으나 영국에 패배하면서 급격히 민심을 잃고 몰락했다. 1983년 민주 정부가 수립된 후, 라울 알폰신 대통령 주도로 군사 정권 인사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다. 사면법 제정으로 잠시 중단되기도 했으나, 2003년 의회는 사면법을 폐지했고 2005년 아르헨티나 대법원이 해당 법의 위헌 판결을 내렸다. 이후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반인도적 범죄 및 집단 학살 혐의에 대한 조사가 재개되어 관련자 처벌이 이루어지고 있다.[36]

4. 1. 1. 비밀 수용소

아르헨티나 군부는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 아래 전국적으로 300곳이 넘는 비밀 수용소를 설치하고 운영했다.[227] 이 수용소들은 주로 외곽 지역의 학교나 체육관 같은 대규모 건물을 개조하여 비밀리에 사용되었으며,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변에만 수십 개가 존재했다.[227]

군사 정권과 아르헨티나 반공 동맹(AAA) 같은 우익 암살단은 정부 정책에 반대하거나 비판적인 활동가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주요 표적으로 삼았다. 특히 젊은 전문가, 고등학생 및 대학생, 노동조합원들이 정치 활동 참여를 이유로 집중적인 탄압 대상이 되었다.[33]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 실종되었는데, 이들은 ''데사파레시도스''(los desaparecidos, 사라진 사람들)로 불렸다.

비밀 수용소에서는 체포, 고문, 살인 등이 일상적으로 자행되었다. 군부는 약 22,000명에서 30,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실종과 죽음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31][11][12] 살해 방식으로는 집단 총살이나, 사람들을 비행기에 태워 남대서양에 던져버리는 잔인한 '죽음의 비행(death flights)'이 사용되었다.[33] 또한, 법적 절차 없이 약 12,000명의 사람들이 아르헨티나 전역의 340개 비밀 수용소 네트워크에 구금되었다.[33]

전 해군 대위 아돌포 스킬링고(Adolfo Scilingo)는 자신이 더러운 전쟁에 가담했던 사실을 공개적으로 자백하며, 아르헨티나 군대가 "나치보다 더 나쁜 짓을 했다"고 증언했다.[34] 그는 1983년 실종자 국가 위원회(CONADEP) 조사에서 "죄수들은 마취된 뒤 군용기에 실려 나체 상태로 반의식 상태에서 대서양에 던져졌다"고 끔찍한 살해 방식을 상세히 묘사했다.[34] 살해된 희생자 대다수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사라졌다.[33]

부에노스아이레스주 경찰청장을 지낸 라몬 캠프스(Ramón Camps) 장군 또한 1984년 ''클라린''과의 인터뷰에서 고문을 심문 수단으로 사용했으며, 5,000건의 강제 실종을 자신이 조작했다고 시인했다. 그는 심지어 수감된 어머니에게서 갓 태어난 아기를 빼앗는 행위를 "파괴적인 부모는 파괴적인 아이를 키울 것"이라며 정당화하기도 했다.[91] 이렇게 빼앗긴 아이들은 약 5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며, 5월 광장 어머니회는 수십 년간 이 아이들의 행방을 찾고 반환을 요구하는 활동을 벌여왔다.[97]

1976–83년 독재 정권 희생자들의 사진


비밀 구금 시설이었던 로사리오산타페 지방 경찰 본부, 현재는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자녀와 손자녀가 실종된 가족들의 사진 컬렉션


군사 정권은 행정명령(PEN, ''Poder Ejecutivo Nacional'')이라는 명목 하에 수많은 사람들을 불법적으로 구금했다. 1976년 3월 24일 쿠데타 당시 PEN 억류자는 최소 5,182명이었고,[113] 1977년 말에는 약 18,000명으로 늘어났다.[114] 이들은 외부와의 연락이 완전히 차단된 채 고문을 당했으며, 상원 의원 이폴리토 솔라리 이리고옌이나 사회주의 지도자 알프레도 브라보 교수 같은 저명인사들도 포함되었다.[115] 미래의 대통령 카를로스 메넴 역시 1976년부터 1981년까지 정치범으로 수감되었다.[117]

군부는 전국에 최소 340개의 강제 수용소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며 수감자들의 존재를 숨기려 했다.[116] 장기간 구금된 사람은 총 8,625명에 달했으며,[116] 이들 중 상당수는 국제적인 압력으로 인해 결국 석방되었다. 석방된 PEN 실종자들의 구금 기간은 다음과 같다.[118]

구금 기간인원 수
1년 미만4,029명
1년 ~ 3년2,296명
3년 ~ 5년1,172명
5년 ~ 7년668명
7년 ~ 9년431명



석방된 이들 중 최소 157명은 이후 살해당했다.[118]

1977년 아르헨티나 외무부의 내부 문서는 "외국 영사들의 억류자 접견 지연 (비엔나 협약 제34조 위반)", "PEN 억류자들의 변호인 접견권 거부", "PEN 억류자 정보 부재", "장기간 재판 없는 구금", "혐의 부재", "납치와 실종" 등 국제법상 옹호하기 어려운 문제점들을 인정하고 있었다.[119] 미국 국무부의 기밀 해제된 1979년 문서에 따르면 당시 매달 평균 55건, 즉 하루에 약 2건의 실종 사건이 발생하고 있었다.[93] 또 다른 국무부 문서는 보안군이 사람들을 구금 시설로 데려가지 않고 집에서 바로 살해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기록했다.[100] 고문 방법으로는 전기 충격, 물고문, 담배 불로 지지기, 성폭력, 강간, 이빨 및 손톱 뽑기, 거세, 끓는 물/기름/산으로 화상 입히기 등이 사용되었다.[99]

국제앰네스티는 1979년 말, 비델라 군사 정부가 1976년 쿠데타 이후 15,000명에서 20,000명에 달하는 아르헨티나 시민의 실종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다.[102] 칠레 비밀경찰의 기밀 해제된 문서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제601 정보 대대는 1975년부터 1978년 중반까지 22,000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된 것으로 추정했다.[104] 실종자 국가 위원회(CONADEP)는 1976년부터 1983년까지 8,961명의 강제 실종 사례를 공식 기록했지만, 실제 피해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105] '테러 국가 통합 희생자 등록부'(Ruvte)는 이사벨 페론 정부 시기 662명, 군사 독재 시기 6,348명의 실종 기록을 확인했다.[103] 반인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군사 정권 인사들은 여전히 희생자 명단 제출을 거부하고 있어 정확한 피해 규모는 아직도 불확실하다.[106]

4. 1. 2. 가톨릭 교회의 군부 협조

아르헨티나의 가톨릭교회는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가 주도한 군부 쿠데타를 사실상 묵인했다.[228] 쿠데타의 핵심 인물인 비델라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또 다른 주도 세력인 해군 참모총장 에밀리오 에두아르도 마세라는 당시 교황 외교사절이었던 피오 라기 추기경과 정기적으로 만나 테니스를 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229] 비델라는 가톨릭 정신에 입각한 국가 수립을 목표로 국가재편성과정을 이끌었다.[230] 이 과정에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비밀 구치소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거나 실종되었는데, 이 실종자들에 대한 보고서가 《눙카 마스》이다.

눙카 마스》 보고서에는 가톨릭 교회가 군부 독재에 협조하고 심지어 납치와 고문에 직접 가담했다는 증언들이 포함되어 있다. 아르헨티나 주교회는 1977년 5월 군부의 통치 방식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하였으나,[231] 다른 한편으로는 일부 성직자들이 직접적인 인권 탄압 행위에 연루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크리스티안 폰 베르니히 신부가 있다. 그는 반체제 인사들의 납치, 고문, 살해에 직접 가담한 정황이 《눙카 마스》 보고서를 통해 드러나 결국 법정에 서게 되었다. 베르니히 신부는 2007년, 살인 7건, 납치 42건, 고문 31건에 개입한 혐의가 인정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232] 그의 재판 기간 동안 침묵을 지켰던 아르헨티나 가톨릭 교단은 판결 이후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가톨릭 사제가 '심각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게 되어 고통스럽게 여긴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군정 시절 인권 보호에 실패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233]

교황 프란치스코 역시 교황이 되기 전, 즉 호르헤 베르골리오 추기경 시절에 더러운 전쟁 당시 군사정부에 협조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1979년 바이아블랑카에서 납치되었던 앨리사 파트노이는 한 인터뷰에서 "아르헨티나 교회는 역할 분담이 되어 있었는데, 그중 군을 지원하는 분야가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그 분야에 속해 있었다"고 주장했다.[234] 아르헨티나 신문 <파히나 12>는 1970년대 아르헨티나 예수회 총장이었던 베르골리오가 군사정권에 의한 예수회 소속 신부 2명(프란시스코 할릭스, 오를란도 요리오)의 체포 및 고문을 방조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정부 문서를 폭로했다. 이 문서에 따르면, 베르골리오는 할릭스 신부가 교단 명령에 불복종했고 게릴라와 접촉한 의혹이 있다며 그의 여권 발급을 거부하라고 군사정권에 권고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할릭스와 요리오 신부는 빈민가에서 활동하다 군사정권에 납치되어 6개월 동안 강제수용소에서 고문을 받았다. 이러한 내용은 언론인이자 더러운 전쟁 실종자 가족 모임인 '5월 광장의 어머니회'의 자문 변호사 오라시오 베르비츠키가 군부독재 시절 가톨릭교회의 역할을 비판한 저서 《침묵》(El Silencio)에서도 공개된 바 있다.[235] 베르골리오가 교황으로 선출된 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성당 벽에는 "새 교황은 비델라(호르헤 라파엘 비델라)의 친구"라는 낙서가 발견되기도 했다고 AFP 통신이 보도했다.[236]

그러나 이후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예수회 수장으로 있을 당시, 군사 독재 정권에 의해 박해받을 위험에 처한 반체제 인사들을 비밀리에 구출하고 국외로 탈출시키는 등 뒤에서 노력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200] 그가 예수회 수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1,000명이 넘는 반체제 인사의 생명을 구했다는 추정도 있다.[201] 처음에는 베르골리오를 비판했던 5월 광장의 어머니회는 그가 교황이 된 후 그와 화해했으며, 단체 지도자인 에베 데 보나피니는 그가 "국민과 함께한다"고 평가하기도 했다.[202]

전반적으로 아르헨티나의 가톨릭교회와 그 지도자들은 "더러운 전쟁" 당시 군사 정권을 지지하거나 침묵하며 신자들에게 "나라를 사랑할 것"을 요구하는 등, 군사 정권의 탄압에 맞섰던 브라질이나 칠레의 가톨릭교회와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비판이 존재한다.[218][219] 당시 군사 정권을 비판하다 살해된 사제주교(엔리케 안젤렐리, 카를로스 폰세 데 레온 등 주교 2명과 사제 17명[220])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교회 관계자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218][219] 2012년, 군사 정권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는 교회 지도자들이 정부의 탄압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사실상 공범이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219] 1976년에 살해된 엔리케 안젤렐리 주교 관련 재판에서는 군사 정권의 박해에 교회의 동의가 있었다는 지적이 나왔으며, 2013년 판결에서는 교회 조직이 사제 살해를 "눈감아 주었다"고 비판받았다.[218]

2000년, 아르헨티나 주교 평의회는 군사 정권에 대해 명확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시민들을 보호하지 못한 것에 대해 사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218][219]

4. 2. 멕시코

멕시코에서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 말까지 이어진 일련의 군사 및 정치적 탄압 조치를 의미한다. 이는 반정부적 무장 반대 운동을 해산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멕시코의 더러운 전쟁은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에서 일어난 유사한 사건들과는 본질적으로 분리적인 성격을 가지며, 군대와 이에 공모한 언론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일각에서는 이를 강도가 낮은 전쟁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당시 언론 탄압 등으로 인해 멕시코의 더러운 전쟁은 대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4. 3. 칠레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군사독재 기간 동안 칠레에서는 조직적이고 은밀한 국가 테러리즘이 자행되었다. 이러한 테러의 목적은 반정부 인사를 제거하고 공포 정치를 통해 사회 통제를 확립하고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 기간 동안 희생된 사람은 총 2,279명으로 집계되었으며, 이 중 164명은 정치적 폭력의 피해자였고 2,115명은 인권 유린의 피해자였다.

4. 3. 1. 과정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 기간 동안 자행된 아동 납치 및 강제 입양 문제는 심각한 인권 침해 사례로 기록되었다. 실종자 국가 위원회(CONADEP) 보고서 준비 당시, 5월 광장 어머니회는 부모와 함께 실종되었거나 수용소에서 태어나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한 172명의 아이들에 대한 기록을 확보하고 있었다.[120] 5월 광장 어머니회는 이후 최대 500명의 아이들이 납치되었으며, 그중 102명의 신원을 확인했다고 추정한다.[121]

이러한 비극 속에서 가족을 찾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2000년 4월 13일, 5월 광장 어머니회 소속 로사 로이신블리트는 구금 상태에서 태어난 자신의 손자 로돌포 페르난도의 출생 증명서가 위조되었고, 아이가 공군 민간 요원 부부에게 넘겨졌다는 익명의 제보를 받았다. 이후 DNA 검사를 통해 로돌포 페르난도는 친할머니 로사와 재회할 수 있었으며, 이는 5월 광장 어머니회의 노력으로 신원이 확인된 첫 사례 중 하나가 되었다.[122] 로돌포의 부모인 파트리샤 훌리아 로이신블리트 데 페레즈와 호세 마르티나스 페레즈 로호는 몬토네로스 조직원으로 활동하다 1978년 10월 6일 군사 정권에 의해 납치되었다.[123][124]

마리아 에우헤니아 삼팔로(1978년경 출생 추정)의 사례 역시 사회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그녀의 부모 역시 몬토네로스였으며, 실종된 후 마리아는 불법적으로 한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그녀의 할머니는 24년 동안 손녀를 찾아 헤맸다.[125] 2001년, DNA 검사를 통해 마리아를 길러온 오스발도 리바스와 마리아 크리스티나 고메스가 친부모가 아님이 밝혀졌고, 마리아는 이들을 고소했다. 법원은 아기를 불법적으로 넘겨준 육군 대위 엔리케 베르티에에게 징역 10년, 리바스와 고메스 부부에게는 각각 납치 혐의로 징역 8년과 7년을 선고했다.[126][127] 이러한 사례들은 더러운 전쟁 시기 군사 독재 정권의 잔혹성과 피해자들의 오랜 고통, 그리고 정의를 찾기 위한 끈질긴 노력을 보여준다.

4. 3. 2. 언론 매체의 동조

독재 정권 기간 동안 일부 언론 매체는 정부의 테러 행위를 은폐하고 정권 선전을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974년과 1975년 사이, 콘도르 작전의 일환으로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의 정보 기관들은 서로 협력했다. 이 작전의 목표 중 하나는 아르헨티나에서 발생한 좌파 극단주의자들의 활동에 대한 뉴스 보도를 통제하는 것이었다.

이후 엘 메르쿠리오와 라 세군다를 비롯한 칠레의 주요 언론들은 좌익 단체 내부의 갈등과 그로 인한 학살이 벌어진 것처럼 꾸며낸 뉴스를 1면에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러한 허위 보도는 칠레 군사 독재에 반대하다 실종된 119명의 행방을 감추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언론의 행태는 "선전, 허위 정보 및 정보 조작의 국제적 행동"으로 평가받는다.

5. 국제 관계

더러운 전쟁 시기 아르헨티나 군부 정권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지 않았으며, 여러 국가와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특히 남아메리카의 다른 군사 독재 정권들과는 "콘도르 작전"이라는 이름 아래 협력하여 국경을 넘나드는 정치적 반대 세력 탄압을 자행했다. 이는 아르헨티나 내부의 인권 침해를 넘어선 국제적인 범죄 네트워크의 일환이었다.

미국냉전이라는 국제 질서 속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과 지역 패권 경쟁 등 복합적인 이유로 아르헨티나 군부와 관계를 맺었다. 초기에는 군사 및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며 군부의 활동을 일정 부분 용인하거나 독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이후 인권 문제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면서 관계가 변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헨리 키신저와 같은 고위 관료들의 역할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프랑스 역시 아르헨티나 군부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알제리 전쟁 등에서 얻은 반란 진압 경험과 고문 기술 등을 아르헨티나 군부에 전수하며 더러운 전쟁의 잔혹한 양상에 영향을 미쳤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프랑스 정부는 이러한 의혹을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있으나, 관련 연구와 증언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이처럼 더러운 전쟁은 단순히 아르헨티나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냉전 시대의 국제 정치,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그리고 다른 국가들과의 협력 및 개입이 복잡하게 얽힌 사건이었다. 각 국가와의 구체적인 관계 및 개입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진다.

5. 1. 콘도르 작전

아르헨티나의 치안 부대와 죽음의 부대는 "콘도르 작전" (Operation Condor)이라는 틀 안에서 다른 남아메리카 군사 독재 국가들과 협력하여 활동했다. 이 작전의 일환으로, 아르헨티나에 망명해 있던 많은 칠레 및 우루과이 인사들이 아르헨티나 보안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1974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살해된 칠레의 카를로스 프라츠 장군, 그리고 1976년 역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살해된 우루과이의 정치인 엑토르 구티에레스 루이스와 젤마르 미첼리니 등이 있다. 윌슨 페레이라 알두나테와 같은 일부 인물들은 이러한 위협 속에서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135] 미국 정부는 당시 이들 군사 정권에 군사 물자와 자금을 지원했으며, 공개된 미국 정부 문서에 따르면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는 미 의회가 지원을 중단하기 전에 아르헨티나가 소위 "내전" 상황을 신속하게 마무리하도록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콘도르 작전 외에도 아르헨티나 군부는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비밀 공작 활동을 벌였다. 1980년에는 나치 전범 클라우스 바르비, 이탈리아 네오파시스트 스테파노 델레 키아이에, 그리고 주요 마약 거물들이 인접국 볼리비아에서 일으킨 유혈 쿠데타, 일명 "코카인 쿠데타"를 지원했다. 이 쿠데타는 루이스 가르시아 메사 테하다가 주도했으며, 아르헨티나 군부는 기예르모 수아레스 메이슨 장군이 지휘하는 악명 높은 제601 정보대대를 통해 70명의 외국 요원을 동원하여 이 작전을 관리했다.[133]

프랑스 군으로부터 반란 진압 전술을 전수받은 아르헨티나 군은 'Operation Charly'라는 작전명 하에 니카라과뿐만 아니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과테말라 등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의 군대를 훈련시켰다. 이 과정에서 아르헨티나 군부는 1977년부터 1984년 포클랜드 전쟁 패배 이전까지 자국에서 자행했던 체계적인 고문, 암살단 운영, 강제 실종과 같은 잔혹한 전술들을 이들 국가에 수출했다. 호르헤 알베르토 무지오 대령이 이끌었던 제601 정보대대와 같은 아르헨티나 특수 부대는 1980년대에 니카라과의 반정부 게릴라 조직인 콘트라스를 직접 훈련시키기도 했다.

미국의 CIA지미 카터 행정부(1977년 취임) 시기에는 인권 문제에 대한 비판 여론 때문에 이전처럼 특수전에 직접 개입하기 어려웠다. 아르헨티나의 유력 신문 ''클라린''은 전 CIA 관계자 듀안 클라리지와의 인터뷰와 기밀 문서를 근거로, 당시 아르헨티나 군부가 국가 안보 교리를 내세워 라틴 아메리카에서 미국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한편, 미국에게 반혁명 활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압박했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상황은 1981년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바뀌었고, CIA는 제601 정보대대가 수행하던 콘트라스 훈련 임무를 넘겨받아 직접 관여하기 시작했다.[134]

5. 2. 미국의 개입

냉전 시대 아르헨티나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단순히 남아메리카에서의 공산주의 확산 위협을 넘어서는 여러 요인에 기인했다. 미국은 아르헨티나 정부에 대항하는 좌익 및 일부 마르크스주의 단체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가 보유한 핵무기 개발 잠재력에도 주목했다. 미국 국무부 메모에 따르면 아르헨티나는 핵무기 획득 능력이 있지만 동기가 없거나, 동기는 있지만 능력이 부족한 국가 목록인 "더러운 12개국"에 포함되었다. 이 문서는 아르헨티나의 가장 큰 안보 우려가 경쟁국인 브라질칠레이며, 이 세 나라가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패권을 원했다고 언급한다.[110] 또한 아르헨티나 경제는 화석 연료 의존도를 줄이고 핵 프로그램을 확장할 강력한 동기가 있었다. 이는 아르헨티나에서 발생하던 인권 침해에 대한 미국의 소극적인 태도의 한 원인이 될 수 있었다. 1976년 미국 국무부의 기밀 해제된 메모는 비델라 대통령에게 "암살 계획의 불리한 영향 공개가 아르헨티나의 대출 획득 노력과 경제 개선을 위한 해결책 마련에 미칠 영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111] 이 문서는 "아르헨티나는 [미국이]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라고 명시했고, 이는 미국이 아르헨티나 독재 정권의 '약점'을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는 패권적 의도를 보여준다. 미국은 아르헨티나의 인권 유린에 대응해야 할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는데,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루과이, 파라과이, 칠레만을 문제 삼는 것은 매우 정치적으로 보일 것이며, 미국의 인권 정책이 미국의 주요 이익이 걸려 있지 않은 국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주장하는 비판가들에게 힘을 실어줄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112]

콘도르 작전의 배경에 대해, 멜리사 슬랫만 교수는 이것이 미국과 공산주의에 대한 인식된 투쟁, 또는 남부 콘(Southern Cone)과 그 통제에 대한 미국의 열망에 의해 촉발된 사회적 구성물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공개된 문서들이 주로 미국의 기관에서 나왔기 때문에 편향된 관점을 제시하며, 미국의 패권 확립과 일방적인 관계 설정을 목표로 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1976년까지 아르헨티나 군부에 의해 6명 이상의 미국 시민이 "실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를 포함한 고위 국무부 관리들은 비밀리에 아르헨티나의 새로운 군부 지도자들을 지지했다.[136] 키신저는 미국 정부를 떠난 후 아르헨티나 군부가 좌익에 맞서 싸운 것을 축하하며, "아르헨티나 정부가 테러 세력을 소탕하는 데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했다.[137] 그의 역할은 1987년 10월 ''The Nation''에 실린 마틴 에드윈 앤더슨의 기사를 통해 알려졌는데, 키신저가 군부의 국가 정책에 대해 비밀리에 "청신호"를 보냈다는 내용이었다.[138]

아르헨티나 군부 지도자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가 1977년 9월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와 만나는 모습


반면,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미국 대사였던 보수적인 공화당의 로버트 C. 힐은 아르헨티나 군부의 대규모 인권 침해를 막기 위해 비공개적으로 노력했다. 힐은 1976년 6월 산티아고에서 열린 미주 기구 회의에서 키신저가 아르헨티나 장군들에게 군부의 국가 테러에 대해 "청신호"를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되돌리려 애썼다. 키신저 측근들의 해고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력을 계속했다. 아르헨티나 외무 장관 세사르 아우구스토 구제티와의 회의에서 키신저는 미국이 동맹국임을 확신시켰다. 1987년 ''The Nation'' 기사에 따르면, 힐은 대사관 직원의 아들이 실종된 사건 이후 인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나, 비델라 대통령을 포함한 아르헨티나 고위 관리들로부터 아무런 답변도 얻지 못했다. 지미 카터 행정부에서 국무부 인권 담당 차관보를 지낸 패트리샤 데리안은 힐이 키신저의 역할을 보고한 후 "한 손짓으로 미국인이 싸구려 변덕에 근거하여 사람들에게 죽음을 선고할 수 있다는 것이 나를 역겹게 만들었다"고 말했다.[145][146][147][148][149] 키신저는 1987년 ''The Nation''에 보낸 편지에서 힐이 인권 옹호자였다는 주장을 부인했지만[150], 키신저의 측근이었던 헨리 슐라우데먼은 힐이 실제로 인권 침해를 매우 효과적으로 보고했다고 증언하며 키신저의 주장을 반박했다.[150]



2003년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정보 공개법에 따라 국가 안보 기록 보관소가 입수한 국무부 문서는 1976년 10월 키신저와 다른 고위 미국 관리들이 아르헨티나 군부에 전폭적인 지원을 보냈으며 의회가 군사 원조를 삭감하기 전에 서둘러 행동을 완료하라고 촉구했음을 보여준다.[136] 1976년 10월 5일, 키신저는 아르헨티나 외무 장관과 만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들어보세요, 우리의 기본적인 태도는 당신이 성공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나는 친구가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구식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이해되지 않는 것은 당신이 내전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권 문제에 대한 기사를 읽지만 맥락은 알지 못합니다. 당신이 빨리 성공할수록 더 좋습니다. [...] 인권 문제는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대사가 당신에게 알려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안정적인 상황을 원합니다. 우리는 불필요한 어려움을 야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의회가 돌아오기 전에 끝낼 수 있다면 더 좋습니다. 당신이 복원할 수 있는 자유는 무엇이든 도움이 될 것입니다.''[136]

미국은 탄압의 초기이자 가장 격렬한 단계에서 비델라 정권에 대한 주요 경제 및 군사 지원 제공자였다. 1976년 4월 초, 의회는 포드 행정부의 요청에 따라 군부에 대한 5000만달러의 안보 지원을 승인했다.[152] 1976년 말에는 3000만달러의 추가 군사 원조를 승인했으며, 다음 해에는 군사 원조를 6350만달러로 늘리는 방안도 고려되었다.[153] 비델라 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원, 훈련 및 군사 판매는 카터 행정부에서도 계속되었으며, 1977년과 1978년 미국은 아르헨티나에 1.2억달러 이상의 군사 부품을 판매했고, 1977년 국방부는 217명의 아르헨티나 군 장교 훈련에 70만달러를 지원했다.[154] 군사 원조는 1978년 9월 30일 대외 원조법 502B조에 따라 공식적으로 중단되었다. 국제 군사 교육 및 훈련(IMET) 프로그램이 중단될 때까지 1976년 이후 아르헨티나 군인에 대한 미국의 총 훈련 비용은 111.5만달러에 달했다.

1981년에 시작된 레이건 행정부는 카터 행정부가 아르헨티나와의 관계를 약화시켰다고 주장하며, 이전 행정부의 군부 인권 관행에 대한 공식적인 비난을 뒤집었다. 외교 관계의 재개는 중앙 정보국(CIA)이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민족 해방 전선 정부에 맞서 니카라과 콘트라스를 훈련하고 무장시키는 데 아르헨티나 정보 기관과 협력할 수 있도록 했다. 예를 들어, 601 정보대대는 온두라스의 레파테리케 기지에서 콘트라스를 훈련시켰다.[155]

1946년에 설립된 미국 육군 서반구 안보 협력 연구소(SOA, School of the Americas)는 반공주의 대테러 훈련을 목표로 했으며, 이곳에서 여러 라틴 아메리카 독재자들과 군인들이 국가 테러 전술, 특히 고문 기술을 배웠다는 비판을 받는다.[139][140] 2000/2001년, 이 연구소는 서반구 안보 협력 연구소(WHINSEC, Western Hemisphere Institute for Security Cooperation)로 개명되었다.[141][142][143] WHINSEC의 현재 교육 과정은 미국 군사 학교의 교육 과정과 호환되며, 교수진은 최신 교육 과정을 유지하기 위해 포트 리븐워스를 방문한다. 그러나 이 학교는 라틴 아메리카 문제에 대한 영향력과 라틴 아메리카 국가 군대 및 법 집행 기관 요원들에게 반인륜적 범죄 관련 기술을 교육했다는 의혹 때문에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144]

포드 자동차 회사 및 씨티 은행과 같은 미국 기업들도 노조 활동가들의 탄압과 실종에 군부와 협력했다는 의혹이 있다.[156]

''아르헨티나에 대한 미국 기밀 해제 프로젝트''는 1975년과 1984년 사이 아르헨티나의 인권 침해에 대한 기록을 공개하기 위한 미국 정부의 노력이다.[207] 이 프로젝트는 2016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아르헨티나의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과 인권 단체의 요청에 따라 발표했으며, 세 차례에 걸쳐 문서가 공개되었다. 이 문서들은 당시 인권 침해범에 대한 지속적인 재판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를 포함하고 있으며, 아르헨티나 독재 정권이 희생자를 살해하고 시신을 처리한 방법에 대한 설명도 담고 있다.[208] 오바마 대통령은 2016년 아르헨티나 방문 당시 미국이 군사 정권 시절의 인권 탄압을 비난하는 데 "너무 늦었다"고 언급했지만, 워싱턴이 군사 정부를 초기에 지지한 것에 대해 사과하지는 않았다.[209]

아르헨티나의 치안 부대와 "죽음의 부대"는 "콘도르 작전"에서 다른 남아메리카 군사 독재 국가와 협력했다. 미국 정부는 군사 정권에 군사 물자와 자금 지원을 제공했으며,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헨리 키신저는 아르헨티나 외무 장관에게 미국의 의회가 지원을 중단하기 전에 "내전"을 종결하도록 촉구했다.

5. 3. 프랑스의 개입

1981년 10월 15일, 헤이그에서 5월 광장 어머니회 연대 시위


프랑스 언론인 마리-모니크 로빈은 2003년 아르헨티나에 대한 프랑스군의 영향력을 조사하면서 중요한 사실을 밝혀냈다. 그녀는 프랑스 외무부(퀘 도르세) 기록 보관소에서 파리와 부에노스아이레스 간의 1959년 협정 원본 문서를 발견했는데, 이 협정은 아르헨티나에 "영구적인 프랑스 군사 임무"를 설치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임무단은 알제리 전쟁 참전 용사들로 구성되었으며, 아르헨티나군 참모장 직속으로 배속되었다. 이 임무는 프랑스 사회당 소속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1981년까지 지속되었다.[157]

로빈은 2003년 다큐멘터리 영화 ''Escadrons de la mort, l'école française'' (죽음의 부대, 프랑스 학교)를 통해 프랑스와 남아메리카 국가들 간의 관계를 탐구했다. 그녀는 신문 ''뤼마니테''와의 인터뷰에서 "프랑스는 도시 환경에서 라틴 아메리카 독재 정권이 그대로 베껴 사용할 군사 기술을 체계화했다"고 주장했다.[158] 로빈은 프랑스군이 1957년 알제리 전투에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들을 체계화하여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전쟁 학교에 전수했다고 지적했다.[157] 특히 로제 트리니에의 반란 진압에 관한 책은 남아메리카에 큰 영향을 미쳤다. 로빈은 또한 프랑스 정보기관인 DST가 칠레 비밀경찰(DINA)에게 프랑스에서 칠레로 돌아간 난민들의 명단(콘도르 작전의 일환인 Operation Retorno)을 넘겨주었으며, 이들이 모두 살해당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녀는 "이는 당연히 프랑스 정부, 그리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에게 책임이 있다. 정치적 난민을 환영하는 척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독재 정권과 협력했던 프랑스 외교 정책의 이중성에 매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158]

2003년 9월 10일, 프랑스 국회의원 노엘 마메르, 마르틴 빌라르, 이브 코셰는 에두아르 발라두르 (UMP)가 주재하는 국회 외무 위원회에 "1973년부터 1984년까지 라틴 아메리카 군사 정권 지원에 있어 프랑스의 역할"을 조사하기 위한 의회 위원회 구성을 요청했다. 그러나 프랑스 주요 언론 중 ''르몽드''를 제외하고는 이 요청을 보도하지 않았다.[159] 위원회 조사를 맡은 UMP 소속 롤랑 블룸 의원은 마리-모니크 로빈의 증언을 거부했으며, 위원회는 2003년 12월, 프랑스가 아르헨티나와 군사 협정을 체결한 적이 없다는 내용의 단 12페이지짜리 보고서를 발표하며 사실상 조사를 무마시켰다.[160][161] 2003년 2월 도미니크 드 빌팽 당시 외무부 장관도 칠레 방문 중 프랑스와 군사 정권 사이에 어떠한 협력도 없었다고 주장했다.[162]

한편, 아르헨티나에서는 로빈의 2003년 영화에서 더러운 전쟁 당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한 세 명의 장군(알바노 하르인데구이, 레이날도 비그노네, 라몬 헤나로 디아스 베소네)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일었다. 여론의 압력에 따라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대통령은 군부에 이들을 기소하라고 명령했다.[163]

로빈은 다음 해인 2004년, 같은 제목의 책 ''Escadrons de la mort: l'école française''를 출간하여 더 많은 자료를 공개했다. 그녀는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정부가 아르헨티나의 비델라 정권 및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정권과 비밀리에 협력했음을 밝혔다.[164][165] 알시데스 로페스 오프랑은 쿠바 혁명 2년 전이자 아르헨티나 게릴라가 존재하지 않던 1957년에 파리로 가서 에콜 드 게르 군사 학교에서 2년간 공부한 최초의 아르헨티나 장교 중 한 명이었다.[157] 로빈은 프랑스 군사 고문단의 아르헨티나 파견이 현대전 개념에서 고문을 반-전복 전쟁의 주요 무기로 사용하는 정보 기관의 대규모 확장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157]

이자벨 페론이 서명한 소위 "파괴령"은 프랑스 문건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알제리 전투 당시 경찰력이 육군 지휘 하에 놓였던 것처럼, 아르헨티나에서도 유사한 방식이 적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982년 7월 아르헨티나 정권의 대통령으로 임명된 레이날도 비그노네는 로빈의 영화에서 "1976년 3월의 전투 명령은 알제리 전투의 복사본"이라고 직접 증언했다.[157] 비델라 정권의 내무부 장관 알바노 하르기인데구이 장군과 정권의 이데올로그이자 전 기획부 장관인 디아즈 베소네 역시 같은 취지의 진술을 했다.[166] 프랑스군은 아르헨티나 측에 "내부의 적"이라는 개념과 함께 고문, 죽음의 부대, 지역을 분할하여 통제하는 ''quadrillages''(격자) 방식 등을 전수한 것으로 여겨진다.

마리-모니크 로빈은 또한 1930년대부터 프랑스 극우파와 아르헨티나 사이에 가톨릭 근본주의 조직인 시테 카톨리크(Cité Catholique)를 통해 유대가 형성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 조직은 샤를 모라스의 왕당파 운동인 ''아크시옹 프랑세즈'' 창시자의 비서였던 장 우세가 설립했다. ''라 시테''는 알제리 전쟁 중 군대에 영향을 미치며 고문 사용을 정당화하는 내용을 담은 리뷰 ''르 베르브''(Le Verbe)를 편집했다. 1950년대 말, ''시테 카톨리크''는 아르헨티나에 지부를 설립하고 군대 내부에 세포 조직을 만들었으며, 특히 1969년 후안 카를로스 오가니아 장군 정부 시절 크게 확장되었다.[157] 아르헨티나 ''시테 카톨리크''의 핵심 인물은 조르주 그라세 신부였는데, 그는 비델라의 개인 고해 신부가 되었다. 그라세 신부는 프랑코주의 스페인에서 설립된 친프랑스 알제리 테러 조직인 OAS의 영적 지도자이기도 했다.

로빈은 아르헨티나 군대 내의 이러한 가톨릭 근본주의 경향이 프랑스-아르헨티나 협력의 중요성과 지속 기간에 기여했다고 분석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조르주 그라세는 1970년 성 비오 10세회를 설립하고 1988년에 파문당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와 관계를 유지했다. 비오 10세회는 아르헨티나에 4개의 수도원을 두고 있으며, 가장 큰 곳은 라 레하(La Reja)에 있다. 그곳의 프랑스 신부는 로빈에게 "공산주의 신부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를 죽여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1989년부터 1999년까지 아르헨티나 대통령이었던 카를로스 메넴 정부에서 전 문화부 장관이었던 루이스 롤단은 수도원 담당 신부인 도미니크 라그노에 의해 로빈에게 "아르헨티나의 시테 카톨리크 씨"로 소개되었다. 호르단 브루노 겐타와 후안 카를로스 고예네체 역시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인물들이다.[157] 1959년부터 1975년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였던 안토니오 카지아노는 장 우세의 저서 ''르 마르크시즘-레닌주의''(Le Marxisme-Léninisme)의 1961년 스페인어판 서문을 썼다. 카지아노는 서문에서 "마르크스주의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부정"이며, 세계를 장악하려는 마르크스주의 음모를 언급하며 "결정적인 전투를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67]

"죽음의 비행"을 시작했던 아르헨티나 해군 제독 루이스 마리아 멘디아는 2007년 1월 아르헨티나 판사 앞에서 프랑스 정보 요원 베르트랑 드 페르세발이 프랑스 수녀 레오니 뒤케와 앨리스 도몽의 납치에 가담했다고 증언했다. 현재 태국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진 페르세발은 납치 연루 사실을 부인했지만, 자신이 OAS의 전 멤버였으며 1962년 3월 에비앙 협정으로 알제리 전쟁 (1954–1962)이 종결된 후 알제리에서 탈출했음은 인정했다.

2007년 청문회에서 루이스 마리아 멘디아는 로빈의 다큐멘터리 ''죽음의 부대 – 프랑스 학교'' (2003)에 제시된 자료를 언급하며, 아르헨티나 법원에 전 프랑스 대통령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전 프랑스 총리 피에르 메스메르, 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프랑스 대사 프랑수아 드 라 고세, 그리고 1976년과 1983년 사이에 부에노스아이레스 프랑스 대사관에 근무했던 모든 관계자들에게 증언을 요구했다.[168] 이러한 "프랑스 연계" 주장 외에도, 멘디아는 비델라의 1976년 쿠데타 이전에 "반란 진압령"에 서명했던 전 국가 원수 이자벨 페론과 전 장관 카를로스 루크아프, 안토니오 카피에로를 기소하려 했다. ESMA 심문의 생존자였던 그라시엘라 달로에 따르면, 멘디아는 1987년 제정된 오베디엔시아 데비다(Obediencia Debida, 직무상 명령 복종) 법을 근거로 자신들의 범죄가 정당했다고 주장하려 했으며, 나아가 ESMA에서의 행위가 이사벨 페론의 "반란 진압령"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주장함으로써 형식적인 합법성을 부여하려 했다 (비록 고문은 아르헨티나 헌법에 의해 금지되어 있지만).[169] 악명 높은 고문 기술자 알프레도 아스티스 역시 법정에서 증언하면서 "프랑스 연계"를 언급하며 책임을 외부로 돌리려는 시도를 보였다.[170]

6. 인권 침해

더러운 전쟁 기간(1976년 ~ 1983년) 동안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은 '국가 재조직 과정'이라는 미명 하에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인권 침해를 자행했다. 군사 정권은 정치적 반대 세력이나 좌파로 의심되는 이들을 주요 표적으로 삼았으나, 실제로는 노동조합원, 학생, 언론인, 예술가, 인권 운동가 등 다양한 배경의 수많은 민간인과 그 가족들까지 무차별적으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권 침해는 강제 실종으로, 수많은 사람이 법적 절차 없이 비밀리에 납치되어 고문과 살해의 대상이 되었다. 희생자들은 종종 흔적 없이 사라졌으며, 그 정확한 수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또한, 군사 정권은 구금된 상태에서 태어난 아기들을 강탈하여 불법 입양시키는 어린이 납치 범죄도 저질렀다.

이러한 인권 유린에 맞서 5월 광장 어머니회와 5월 광장 할머니회 같은 단체들이 결성되어 진실 규명과 정의를 요구하는 활동을 펼쳤다. 더러운 전쟁 시기 자행된 국가 주도의 폭력은 아르헨티나 사회 전체에 깊은 상흔을 남겼으며, 이후 반인도적 범죄로 규정되어 역사적 평가와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6. 1. 강제 실종



더러운 전쟁 기간 동안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은 국가 재조직 과정이라는 명분 아래 수많은 사람들을 강제 실종시켰다. 이 희생자들은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졌다는 의미에서 'los desaparecidos|로스 데사파레시도스es'(사라진 사람들)라고 불렸다.[33][92]

군부와 보안군은 정치적 반대자나 좌파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주요 표적으로 삼았지만[33], 실제로는 노동조합원, 학생, 언론인, 작가, 인권 운동가 등 다양한 배경의 민간인과 그 가족들까지 무차별적으로 납치하여 고문하고 살해했다.[98] 연필의 밤 사건처럼 아직 어린 학생들도 희생되었다.[37] 희생자의 정확한 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실종자 국가 위원회(CONADEP)가 공식적으로 기록한 8,961명[105]에서 많게는 30,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31][11][12] 아르헨티나 육군 제601 정보 대대는 1978년 중반까지 22,000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고 내부적으로 추산했으며[104], 국제 인권 단체인 국제앰네스티는 1979년 말 군사 정부가 15,000명에서 20,000명에 달하는 시민의 실종에 책임이 있다고 비판했다.[102]

납치된 사람들은 전국 곳곳에 설치된 최소 340개의 비밀 수용소에 감금되었다.[33] 정부는 이 시설들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으며, 수감자들은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채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악명 높은 해군 공학 학교(ESMA) 한 곳에서만 약 3,000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114] 고문은 전기 충격, 물고문, 담배 불로 지지기, 성폭력, 손톱 및 치아 뽑기 등 극도로 잔인한 방식으로 자행되었다.[99] 전직 경찰 고위 간부였던 라몬 캠프스는 1984년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이 직접 5,000건의 강제 실종을 지시했으며 고문을 심문 방법으로 사용했다고 인정했다.[91]

수많은 실종자들은 결국 살해되었고, 시신마저 찾을 수 없도록 유기되었다. 대표적인 방법 중 하나는 '죽음의 비행'으로 알려진 것인데, 희생자들을 마취시킨 뒤 군용기에 태워 대서양 바다 위로 떨어뜨려 살해하는 방식이었다.[33] 해군 장교 출신인 아돌포 실링고는 이 끔찍한 만행을 직접 증언하며 아르헨티나 군대가 "나치보다 더 나쁜 짓을 했다"고 고백했다.[34]

군사 정권은 또한 수감된 여성 반체제 인사들이 낳은 아기들을 빼앗아 군인이나 정권 협력자 가정에 강제로 입양시키는 비인간적인 범죄도 저질렀다. 라몬 캠프스는 "반체제 부모는 반체제 아이를 키울 뿐"이라며 이러한 아기 약탈을 정당화했다.[91] 1977년에 결성된 5월 광장 어머니회와 5월 광장 할머니회는 실종된 자녀와 손주들, 특히 빼앗긴 아기들(약 500명으로 추산[97])의 행방을 찾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끈질기게 활동해왔다.

한편, 공식적으로 행정권력(PEN, ''Poder Ejecutivo Nacional'')의 명령에 따라 구금된 사람들도 다수 존재했다. 1976년 쿠데타 당시 최소 5,182명이 PEN 억류 상태였으며[113], 1977년 말에는 그 수가 약 18,000명에 달했다.[114] 이들은 정식 재판 없이 장기간 구금되었고,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 등 기본적인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했다.[119] 총 8,600여 명의 PEN 억류자들은 국제 사회의 지속적인 압력 덕분에 결국 풀려날 수 있었다.[118]

이러한 강제 실종과 살해는 아르헨티나 사회 전체에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이후 반인도적 범죄이자 집단 학살이라는 법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36]

6. 2. 어린이 납치



더러운 전쟁 기간 동안 군사정권은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아동을 납치하는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다. 납치된 아동 중 상당수는 부모와 함께 끌려가거나, 비밀 구금 시설에서 태어난 후 강제로 다른 가정에 입양되었다.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실종된 아이들을 찾기 위해 5월 광장 할머니회(Asociación Abuelas de Plaza de Mayo, 약칭 Abuelas)가 결성되어 활동해왔다.

실종자 국가 위원회(CONADEP) 보고서가 작성될 당시, 5월 광장 할머니회는 부모와 함께 실종되었거나 수용소에서 태어나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한 172명의 아이들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120] 현재 5월 광장 할머니회는 최대 500명의 손자가 군사정권에 의해 납치되었고, 그중 102명이 확인된 것으로 추정한다.[121]

할머니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신원이 확인된 대표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 로사 로이신블리트의 손자: 2000년 4월, 할머니들은 구금 상태에서 태어난 로사 로이신블리트의 손자가 공군 민간 요원 부부에게 넘겨졌다는 익명의 제보를 받았다. 이후 DNA 검사를 통해 손자의 신원을 확인했고, 로돌포 페르난도는 할머니들의 노력으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첫 번째 사례가 되었다.[122] 로돌포의 어머니 파트리샤 훌리아 로이신블리트 데 페레즈(당시 25세)와 아버지 호세 마르티나스 페레즈 로호(당시 24세)는 몬토네로스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1978년 10월 납치되었다.[123][124]
  • 마리아 에우헤니아 삼팔로: 1978년경 태어난 마리아 에우헤니아는 몬토네로스 활동을 하던 부모가 실종된 후, 군인 부부에게 불법적으로 입양되었다. 그녀의 할머니는 24년 동안 손녀를 찾아 헤맸다. 2001년, 마리아 에우헤니아는 자신을 길러준 부부가 친부모가 아니라는 DNA 검사 결과를 확인하고 이들을 고소했다. 법원은 아이를 불법적으로 입양한 부부와 이들에게 아이를 넘긴 육군 대위 엔리케 베르티에에게 각각 7년, 8년, 10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125][126][127]


5월 광장 어머니회, 더러운 전쟁 기간 동안 자녀들이 "실종"된 아르헨티나의 어머니들.


5월 광장 어머니회(Madres de Plaza de Mayo)는 자녀들이 더러운 전쟁 기간 동안 "실종"된 어머니들이 모여 1977년 결성한 인권 단체이다. 이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5월 광장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시위를 벌이며 실종된 자녀들의 행방을 묻고 진상 규명을 요구해왔다. 이들의 활동은 아르헨티나 군사독재 정권의 만행을 국제 사회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86년, 5월 광장 어머니회는 활동 방향의 차이로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창립 노선'(Linea Fundadora)은 실종자 유해 발굴과 가해자 처벌에 중점을 두는 반면, '5월 광장 어머니회 협회'(Asociacion de Madres de Plaza de Mayo)는 실종된 자녀들을 사회 변혁을 위해 싸운 투사로 기억하며, 유해 발굴이나 금전적 보상을 거부하는 입장을 취했다.[129][130] 2004년, 협회 대표였던 헤베 데 보나피니는 실종된 두 아들이 좌익 게릴라로 활동한 것에 대해 존경심을 표하기도 했다.[131]

오늘날 5월 광장 어머니회와 할머니회를 상징하는 흰색 손수건은 아르헨티나 거리 곳곳에서 군사정권의 잔혹한 테러와 희생자들의 고통, 그리고 정의를 위한 투쟁을 상기시키는 강력한 상징으로 남아있다.[132]

7. 민주화 이후의 재판과 진상 규명 노력

1983년 포클랜드 전쟁 패배 이후 군사 정권이 물러나고 라울 알폰신이 이끄는 민주 정부가 들어섰다. 알폰신 정부는 더러운 전쟁 시기 자행된 인권 범죄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작가 에르네스토 사바토를 위원장으로 하는 실종자 조사 국가 위원회(CONADEP)를 설립했다.[35] 위원회는 광범위한 조사를 통해 약 9,000명의 실종자 명단을 포함한 보고서 Nunca Más|눈카 마스es(다시는 안 돼)를 발표하여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이를 바탕으로 1985년 군사 정부 재판이 열려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등 군부 최고 지도자들이 인권 침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군부의 강력한 반발과 추가 쿠데타 위협 속에 1986년에는 과거 범죄에 대한 기소를 제한하는 푼토 피날 법(종결법)이 통과되었다. 이후 1989년 집권한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은 군부와의 화해를 명분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인사들을 대거 사면하기도 했다.[35]

과거사 청산 노력은 2003년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정부 들어 다시 활기를 띠었다. 의회는 푼토 피날 법 등 사면 관련 법률들을 폐지했고, 2005년 아르헨티나 대법원은 이 법들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191] 이에 따라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재수사가 본격화되었고, 미겔 에체콜라츠[192], 알프레도 아스티스,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레이날도 비뇨네 등 다수의 전직 군 고위 인사들이 법의 심판을 받았다.

국제 사회에서도 프랑스, 독일 등 피해자 발생 국가들을 중심으로 책임자 처벌을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195][196] 아르헨티나 내부에서는 2006년 군부 쿠데타 발생일인 3월 24일을 진실과 정의를 위한 기억의 날로 지정하여 매년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한편, 기업의 책임[193]이나 전쟁 동원 군인의 처우 문제[194], 정확한 피해 규모[198] 등 더러운 전쟁과 관련된 논쟁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7. 1. 군사 정권 재판

라울 알폰신의 민주 정부는 1983년에 집권한 후, 더러운 전쟁 기간 동안 벌어진 범죄를 조사하기 위해 작가 에르네스토 사바토가 이끄는 실종자 조사 국가 위원회(CONADEP)를 설립했다. 위원회는 수백 명의 증언을 청취하고 범죄 증거를 수집했으며, 약 9,000명의 실종자 명단을 포함한 보고서 Nunca Más|눈카 마스es(다시는 안 돼)를 발표하여 국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35] 에르네스토 사바토는 보고서 서문에서 납치된 피해자들이 겪었던 비인간적인 처우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납치당한 순간부터 피해자들은 모든 권리를 잃었다. 외부 세계와의 모든 소통이 단절된 채,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 갇혀 야만적인 고문을 당했으며, 즉각적 또는 궁극적인 운명에 대해 알지 못한 채, 그들은 시멘트 덩어리에 묶여 강이나 바다에 던져지거나 재로 변할 위험에 처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고 여전히 모든 인간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고통을 느낄 수 있었고, 어머니, 아이 또는 배우자를 기억할 수 있었으며, 공개적으로 강간을 당하는 것에 무한한 수치심을 느낄 수 있었다.


알폰신 대통령은 위원회의 조사를 바탕으로 1985년 군사 정부 재판을 열어 군사 정권의 핵심 인물 9명을 기소하도록 명령했다. 이 재판을 통해 군부 최고 지도자였던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를 포함한 여러 장군들이 강제 실종, 고문, 살인 등 인권 침해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비델라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마그달레나 군 교도소에 수감되었으며, 다른 고위 장교들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군부는 이러한 재판에 강하게 반발하며 추가적인 기소 중단을 요구했고, 또 다른 쿠데타 가능성을 내비치며 민간 정부를 위협했다. 군부의 압력과 봉기를 우려한 알폰신 정부는 1986년, 과거 군사 정권 시절의 범죄에 대한 기소를 사실상 종결시키는 Ley de Punto Final|푼토 피날 법es(종결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고문에 연루된 군인들이 명령에 따른 "의무"를 수행했을 뿐이라고 규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군부 내 강경파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재판 완전 중단 등을 요구하며 여러 차례 봉기를 일으켰다. Carapintadas|카라핀타다스es(얼굴에 칠한 자들)라고 불린 이들 반란군은 1987년 4월 성주간(Semana Santa)에 알도 리코 중령의 주도로 캄포 데 마요 군 기지에서 첫 봉기를 일으켰다. 알폰신 대통령이 5월 광장에 모인 수십만 시민들의 지지에 힘입어 직접 협상에 나선 끝에 반란군은 항복했지만, 정부는 일부 군 고위 인사를 교체해야 했다. 1988년 1월, 리코는 몬테 카세로스에서 두 번째 봉기를 일으켰으나 이번에는 진압되었다. 같은 해 12월, 모하메드 알리 세이넬딘 중령이 이끄는 세 번째 봉기가 발생했고, 정부는 반란군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며 육군 사령관을 교체하는 등 타협적인 모습을 보였다.

1989년 새로 선출된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은 군부와의 화해를 명분으로 대대적인 사면을 단행했다. 이 조치로 군사 정부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인사들과 군사 반란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석방되었다. 메넴은 1994년 군대의 과거 행적을 "사전 진압 투쟁"이라 칭하며 옹호하기도 했다.[35]

아르헨티나 코르도바의 옛 비밀 수용소 '라 페를라'에서 열린 기억 행사 (2007년 3월 24일)


2004년, 실종자들의 사진으로 뒤덮인 부에노스아이레스 5월 광장의 5월의 피라미드


한편, 더러운 전쟁 피해자들의 국적 국가들(체코슬로바키아, 이탈리아, 스웨덴, 핀란드, 스페인, 독일, 미국, 영국, 파라과이, 볼리비아, 칠레, 우루과이, 페루 등)은 전 군사 정권 인사들에 대한 개별적인 법적 조치를 추진했다. 특히 프랑스는 자국 수녀 레오니 뒤케와 앨리스 도몬 등의 납치 및 살해 혐의로 알프레도 아스티스 대위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다.

시간이 흘러 2005년, 아르헨티나 대법원은 군사 정권 시절의 범죄를 처벌하지 않도록 했던 사면 관련 법률들(푼토 피날 법 등)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 이후 과거 범죄에 대한 재수사가 활발히 이루어졌고, 납치, 고문, 살해 등에 연루된 전직 군 고위 인사들에 대한 유죄 판결이 이어졌다. 2008년 종신형을 선고받은 루시아노 벤하민 메넨데스 전 사령관은 "공산주의로부터 국가를 지킨 군인을 처벌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항변하기도 했다. 2011년에는 비델라 전 대통령이 다시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2012년에는 레이날도 비뇨네 전 대통령 역시 유괴 및 고문 혐의로 징역 25년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비델라와 비뇨네는 정치범 수감자에게서 신생아를 빼앗아 불법 입양시킨 혐의가 추가로 인정되어 각각 징역 50년과 15년형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7. 2. 사면법 폐지와 재수사

2003년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아르헨티나 의회는 오랫동안 군사독재 시절의 범죄에 면죄부를 주었던 사면법, 즉 푼토 피날 법과 의무 복종법을 폐지했다. 이어 2005년, 아르헨티나 대법원은 이 법들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최종 판결하며, 과거사 청산을 위한 사법적 토대를 마련했다.[191]

대법원의 위헌 판결에 따라 정부는 더러운 전쟁 시기 자행된 반인도적 범죄와 집단 학살에 대한 재수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2006년에는 사면법 폐지 이후 처음으로 전직 군인 및 보안 요원에 대한 재판이 열렸는데, 1970년대 부에노스아이레스주 경찰청장이었던 미겔 에체콜라츠가 불법 구금, 고문,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2006년 9월, 6건의 살인, 6건의 불법 감금, 7건의 고문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192]

이후 과거 군사정권 인사들에 대한 처벌이 이어졌다. 2011년 10월까지 반인도적 범죄와 집단 학살 혐의로 아르헨티나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259명에 달했으며, 여기에는 악명 높은 고문 기술자이자 '금발의 죽음의 천사'로 불린 알프레도 아스티스도 포함되었다. 2008년 종신형을 선고받은 루시아노 벤하민 메넨데스 전 사령관은 "공산주의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한 전쟁에 종사한 군 사령관을 처벌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며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독재 정권의 최고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도 이루어졌다. 군사정권의 첫 번째 지도자였던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는 2011년 12월, 대통령 재임 중의 인권 침해 혐의로 종신형 판결을 받았다. 마지막 군사정권 대통령이었던 레이날도 비뇨네 역시 2012년 4월, 56명을 유괴하고 고문한 죄로 금고 25년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비델라와 비뇨네는 2012년 7월, 정치범 수감자로부터 아기를 불법적으로 빼앗아 은닉한 죄목으로 각각 금고 50년과 15년의 형을 추가로 선고받으며 과거 범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시위에서 강제 실종된 사람들의 사진이 담긴 깃발. 1976년 쿠데타 40주년을 맞아 열렸다.


국제 사회에서도 더러운 전쟁 범죄자들에 대한 책임을 묻는 노력이 있었다. 프랑스는 자국민 수녀 레오니 뒤케와 앨리스 도몬을 포함한 프랑스 국민 납치 및 살해 혐의로 알프레도 아스티스 대위의 인도를 요구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196] 독일 법원은 2010년 2월, 아르헨티나에서 실종된 독일 시민 롤프 스타보비오크(Rolf Stawowiok) 사망 사건과 관련하여 전 독재자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에 대한 국제 체포 영장을 발부하기도 했다.[195] 이탈리아, 스페인 등 다른 피해자 발생 국가 정부들도 전 군사 정권 인사들에 대한 개별 소송을 진행하며 국제적인 압박을 가했다.

아르헨티나 사회 내부에서도 과거사를 기억하고 정의를 실현하려는 노력이 꾸준히 이어졌다. 2006년,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던 3월 24일아르헨티나의 공휴일인 진실과 정의를 위한 기억의 날로 공식 지정되었다. 같은 해 쿠데타 30주년 기념일에는 군사 정권 시절의 참상을 기억하고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다짐하기 위해 수많은 시민이 거리로 나와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더러운 전쟁과 관련된 논란은 사법 처리 과정에서도 계속되었다. 2006년 2월, 포드 아르헨티나 공장의 전직 노동자들은 미국 본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포드 아르헨티나의 현지 관리자들이 보안군과 협력하여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약 64km 떨어진 공장 내 노조 활동가들을 구금하고 고문하는 데 가담했다고 주장하며 기업의 책임을 물었다.[193] 반면, 2007년 12월에는 투쿠만주에서 약 200명의 전직 군인들이 시위를 벌이며, 자신들 역시 강압적인 명령 체계 하에서 선택의 여지 없이 동원되었고 전쟁의 피해를 입었으므로 군사 정권의 피해자로 인정하고 군인 연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94]

7. 3. 진실과 정의를 위한 기억의 날

1976년 3월 24일, 아르헨티나에서는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육군 총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여 이사벨 페론 정부가 전복되었다. 군부는 스스로를 '국가 재편성 프로세스(Proceso de Reorganización Nacionales)'라 칭하며 독재 정치를 시작했다. 이날은 이후 아르헨티나에서 과거사를 기억하고 성찰하는 중요한 날로 여겨진다.

비델라와 그 뒤를 이은 로베르토 비올라, 레오폴도 갈티에리, 레이날도 비뇨네 등의 군사 정권은 페론주의자나 좌익 성향으로 간주된 수많은 반체제 인사와 시민들을 대상으로 불법적인 체포, 고문, 살해, 강제 납치 등 극심한 인권 탄압을 자행했다. 특히, 정치범들을 산 채로 비행기에 태워 바다에 떨어뜨려 살해한 '죽음의 비행'은 군사 독재 정권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악명이 높다.[215] 이러한 폭압적인 상황 속에서도 평화 운동가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은 좌우 양측 모두를 비판하며 활동하다 1977년 체포되어 고문을 겪었으나, 그의 노력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198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216]

군사 정권은 1982년 포클랜드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급격히 권위를 상실했고, 더 이상 정권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결국 1983년 10월 30일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군정 하에서 벌어진 인권 범죄 처리를 공약한 라울 알폰신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민주주의가 회복되었다.

알폰신 민주 정부는 집권 직후 '더러운 전쟁' 기간 동안 자행된 범죄를 조사하기 위해 실종자 조사 국가 위원회(CONADEP)를 설치했다. 위원회는 수백 명의 증언을 청취하고 증거를 수집하여 가해자들에 대한 기소를 준비했다. 이를 바탕으로 1985년 군사 정부 재판이 열렸고, 기소된 약 300명 중 다수의 고위 장교들이 유죄 판결을 받고 처벌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거사 청산 노력은 군부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군부는 더 많은 군인들이 재판받는 것에 반대하며 또 다른 쿠데타 가능성으로 민간 정부를 위협했다. 결국 군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1986년에는 '푼토 피날 법(종결법)'이 통과되었다. 이 법은 과거 군사 정권 시절의 범죄에 대한 추가 기소를 사실상 중단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고문에 가담했던 군인들조차 '임무 수행'을 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후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은 1994년 군대의 과거 행위를 칭찬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35] 이처럼 아르헨티나 사회는 '더러운 전쟁'의 진실을 규명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하려는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8. 더러운 전쟁 관련 논란

1989년 1월 23일, 약 40명으로 구성된 무장 단체 '조국을 위한 모든 운동'(Movimiento Todos por la Patria|모비미엔토 토도스 포르 라 파트리아spa, MTP)의 분파가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의 라 타블라다 군사 기지를 공격했다. 이들은 쿠데타를 막기 위한 행동이라고 주장했으나,[183] 정보부 군사 기관이 이 공격을 유도했을 수 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184] 이 공격으로 MTP 대원 28명이 사망하고 5명이 실종되었으며 13명이 투옥되었다. 군경 측 사상자는 사망 11명, 부상 53명이었다. 사망한 MTP 대원 중에는 인권 변호사였던 호르헤 바뇨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2002년에는 더러운 전쟁 초기 아르헨티나의 민간 각료였던 호르헤 소르레기에타의 딸 막시마 소레기에타가 당시 네덜란드 왕세자였던 빌럼알렉산더르와 결혼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그녀 아버지의 과거 경력 때문에 네덜란드 사회 전체에서 결혼의 적합성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으나, 결국 결혼식은 막시마의 부모가 불참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막시마는 남편이 2013년 왕위에 오르면서 네덜란드의 왕비가 되었다.

2016년 7월 9일, 아르헨티나 독립 200주년 기념 행사에서는 전 육군 대령 카를로스 카리조 살바도레스가 포클랜드 전쟁 참전 용사 및 '독립 작전'(아르헨티나 북부에서 벌어진 반게릴라 작전) 참전 용사들의 행진을 이끌어 좌파 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카리조 살바도레스는 카타마르카 주 로사리오 채플 학살 사건에 공수부대 대위로 참여한 혐의로 2013년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마우리시오 마크리 정부 하에서 무죄로 석방된 인물이었다.[186]

같은 해 2016년, 아르헨티나계 이스라엘인 단체는 이스라엘 정부를 상대로 정보 공개 요청을 제출했다. 이들은 더러운 전쟁 시기 군사 독재 정권과 이스라엘 간의 군사 및 외교 관계에 관한 모든 문서 공개를 요구했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당시 아르헨티나 군사 독재를 지원했다는 의혹 때문이었다.[187][188]

2023년 11월 16일에는 더러운 전쟁 기간 동안 최소 150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전 아르헨티나 해군 장교 루이스 키버그가 독일 베를린에서 사망한 사실이 알려졌다.[189][190] 그는 2013년부터 베를린에 거주해 왔으며, 사망 시점은 2023년 10월로 밝혀졌다. 이는 더러운 전쟁 기간 중 저지른 23건의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기 3주 전이었다.[189][190]

8. 1. 희생자 수 논란

국가 재조직 과정으로 불린 군사 정권 하에서 정부의 군대 및 보안군은 정치적 반대자로 간주된 이들에 대한 광범위한 탄압을 자행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정확한 희생자 수에 대해서는 논란이 존재한다.

군부 정권은 약 22,000명에서 30,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체포, 고문, 살인 및 강제 실종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31][11][12] 희생자 중 상당수는 공식적인 사망 기록 없이 '실종자(desaparecidos)'로 처리되었다. 이는 군부가 죽음의 비행과 같은 방식으로 희생자들을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하여 흔적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33][34] 전 해군 대위 아돌포 실링고는 이러한 행위를 증언하며, 죄수들이 마취된 상태로 비행기에서 대서양에 던져졌다고 밝혔다.[34] 이러한 은폐 시도 때문에 정확한 희생자 수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33]

희생자 수를 둘러싼 논란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2016년 8월, 당시 아르헨티나 대통령이었던 마우리시오 마크리는 실종자 수가 3만 명이라는 통계에 의문을 제기하고 해당 시기를 "더러운 전쟁"이라고 지칭하여 인권 단체로부터 광범위한 비판을 받았다.[185] 이는 희생자 수 문제가 단순한 통계적 차원을 넘어 아르헨티나 사회 내에서 여전히 민감한 정치적, 역사적 쟁점임을 보여준다. 비록 정확한 숫자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지만, 많은 인권 단체와 연구자들은 희생자 규모를 3만 명 규모로 추산한다.

8. 2. 가톨릭 교회의 책임 논란

아르헨티나의 가톨릭교회는 호르헤 비델라가 주도한 군부 쿠데타를 사실상 묵인했다는 비판을 받는다.[228] 쿠데타 주도 세력이었던 비델라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해군 참모총장 에밀리오 에두아르도 마세라는 당시 교황 외교사절이던 피오 라기 추기경과 정기적으로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229] 비델라는 가톨릭 정신에 입각한 국가 수립을 목표로 국가재편성과정을 이끌었다.[230] 브라질이나 칠레의 가톨릭교회가 군사 정권의 탄압에 맞선 것과 달리, 아르헨티나 가톨릭교회는 군사 정권을 지지하며 신자들에게 "나라를 사랑할 것"을 요구했다는 지적이 있다.[218][219] 군사 정권 지도자였던 비델라는 2012년 재판에서 교회 지도자들이 정부의 탄압에 공범이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219]

군부 독재 기간 동안 수만 명의 사람들이 비밀 구치소로 끌려가 고문당하고 실종되었는데, 이러한 인권 침해 실상을 담은 《눙카 마스》 보고서에는 가톨릭교회가 군부독재에 협조하고 심지어 납치와 고문에 가담했다는 증언이 포함되어 있다. 아르헨티나 주교회는 1977년 5월 군부의 통치 방식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으나[231], 일부 성직자들은 직접 범죄에 가담했다. 대표적인 인물인 크리스티안 폰 베르니히(Christian Von Wernichspa) 신부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지방 경찰의 사목 신부이자 라몬 캠프스 장군 휘하 감찰관 계급으로 활동하며[221] 반체제 인사들의 납치, 고문, 살해에 직접 가담한 정황이 드러나 법정에 세워졌다.[232] 그는 민주화 이후 1985년 재판에서 혐의를 부인했고, 관련자 처벌을 중단하는 법률 제정으로 수사가 중단되기도 했으나, 해당 법률이 위헌 판결을 받은 후 2003년 칠레에서 가명으로 잠복 중 체포되었다.[221] 결국 2007년 살인 7건, 납치 42건, 고문 32건(또는 31건[232]) 개입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종신형에 처해졌다.[232][221] 베르니히의 재판 기간 동안 침묵했던 아르헨티나 가톨릭 교단은 판결 후 "가톨릭 사제가 ‘심각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게 돼 고통스럽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군정 시절 인권 보호에 실패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233] 2010년까지도 교회는 베르니히에 대한 사제직 박탈 등의 처분을 내리지 않았고, 그는 교도소에서 미사를 집전했다.[221][222]

군사 정권 하에서 엔리케 안젤렐리(Enrique Angelellispa)와 카를로스 폰세 데 레온(Carlos Horacio Ponce de Leónspa) 두 명의 주교와 17명의 사제가 살해당했다.[220] 2013년 아르헨티나 법원은 안젤렐리 주교 살해 사건 재판에서 군사 정권의 박해에 교회의 동의가 있었다고 지적하며, 교회 조직이 사제 살해를 외면했다고 비판했다.[218][219]

교황 프란치스코 역시 더러운 전쟁 당시 아르헨티나 예수회 총장이었던 호르헤 베르골리오 추기경 시절, 군사정부에 협조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1979년 납치 피해자인 앨리사 파트노이는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군을 지원하는 교회 내 분야에 속해 있었다고 주장했다.[234] 아르헨티나 신문 <파히나 12>는 1979년 외교부 문서를 인용하여, 베르골리오 당시 총장이 군사정권에 의해 납치 및 고문당한 예수회 소속 프란시스코 할릭스 신부의 여권 발급을 거부하라고 권고했다고 보도했다. 이 문서에는 할릭스 신부가 교단 명령에 불복종했고 게릴라와 접촉한 의혹이 있다는 정보가 베르골리오 신부에 의해 제공되었다고 적혀 있다.[235] 이로 인해 할릭스 신부와 오를란도 요리오 신부는 빈민가에서 활동하다 납치되어 6개월간 강제수용소에서 고문을 받았다. 이 내용은 언론인이자 5월 광장의 어머니회 자문 변호사인 오라시오 베르비츠키의 저서 <침묵>에서도 공개된 바 있다.[235] 2005년에는 한 인권 변호사가 베르골리오 추기경을 두 신부 납치에 군부와 공모한 혐의로 고발하기도 했다.[199] 교황 선출 직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성당 벽에는 "새 교황은 비델라의 친구"라는 낙서가 발견되기도 했다.[236]

그러나 이러한 의혹에 대해 베르골리오 추기경 측은 예수회 내부 갈등 속에서 두 신부에게 사목 활동 중단을 요청했을 뿐이라며 혐의를 부인했으며,[199] 그가 예수회 수장 시절 군사 독재 하에서 박해받을 위험에 처한 반체제 인사 1,000여 명을 비밀리에 구출하고 탈출을 도왔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지기도 했다.[200][201] 처음에는 그를 비판했던 인권 단체 5월 광장의 어머니회 역시 그가 교황이 된 후 화해했으며, 단체 지도자인 헤베 데 보나피니는 교황이 "국민과 함께한다"고 평가했다.[202]

2000년, 아르헨티나 주교 평의회는 군사 정권 시절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고 시민들을 보호하지 못한 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성명을 발표했다.[218][219]

8. 3. 미국의 책임 논란

아르헨티나의 치안 부대와 죽음의 부대는 남아메리카의 다른 군사 독재 국가들과 협력하여 콘도르 작전을 수행했다. 미국 정부는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에 군사 물자와 자금을 지원했으며,[32] 미국에서 공개된 정부 문서에 따르면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는 아르헨티나 외무 장관에게 미국 의회가 원조를 중단하기 전에 "내전"을 끝내라고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2016년, 아르헨티나의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과 인권 단체들의 요청에 따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1976년 아르헨티나 군사 쿠데타 40주년을 맞아 '아르헨티나에 대한 미국 기밀 해제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이는 1975년에서 1984년 사이 아르헨티나의 인권 침해에 관한 기록을 찾아 검토하고 대중에게 공개하려는 미국 정부 부처 및 기관의 노력이었다.[207] 이 프로젝트를 통해 관련 문서들이 2016년 8월, 2016년 12월, 2019년 4월 세 차례에 걸쳐 공개되었다. 공개된 문서에는 아르헨티나 독재 정권이 희생자들을 살해하고 시신을 처리한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208] 오바마 대통령은 2016년 아르헨티나 방문 당시 미국이 군사 정권 시절의 인권 탄압을 비판하는 데 "너무 늦었다"고 인정했지만, 미국 정부가 군사 정부를 초기에 지지했던 것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않았다.[209] 인권 단체 셀스(Cels)의 가스톤 칠리어는 이 문서들이 "당시 인권 침해범에 대한 지속적인 재판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를 포함하고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208]

참조

[1] 서적 State Violence and Genocide in Latin America: The Cold War Years Routledge
[2] 서적 The Last Colonial Massacre: Latin America in the Cold War http://www.press.uch[...] University of Chicago Press
[3] 서적 The Myth of American Diplomacy: National Identity and U.S. Foreign Policy http://yalepress.yal[...] Yale University Press
[4] 웹사이트 Militares Muertos Durante la Guerra Sucia http://www.desaparec[...]
[5] 뉴스 Las víctimas del terror montonero no cuentan en Argentina https://www.abc.es/i[...] ABC 2011-12-28
[6] 뉴스 El ex líder de los Montoneros entona un "mea culpa" parcial de su pasado http://www.elmundo.e[...] El Mundo 1995-05-04
[7] 웹사이트 Cedema.org - Viendo: A 32 años de la caída en combate de Mario Roberto Santucho y la Dirección Histórica del PRT-ERP http://www.cedema.or[...] 2015-02-23
[8] 웹사이트 Resistencia Anticapitalista Libertaria "Autodefensa, Clasismo y Poder popular en anarquismo argentino de los 70s https://es.scribd.co[...] 2020-03-05
[9] 서적 The Jakarta Method: Washington's Anticommunist Crusade and the Mass Murder Program that Shaped Our World PublicAffairs 2020
[10] 뉴스 Reappearing the disappeared of Operation Condor http://www.aljazeera[...] Al Jazeera 2014-08-30
[11] 서적 State Terrorism and Neoliberalism: The North in the South http://www.routledge[...] Routledge 2009
[12] 서적 State Violence and Genocide in Latin America: The Cold War Years (Critical Terrorism Studies) Routledge
[13] 뉴스 Kissinger backed dirty war against left in Argentina https://www.theguard[...] The Guardian 2019-08-29
[14] 웹사이트 "Guerra sucia": la importancia de las palabras http://www.nuestrasv[...] 2018-02-06
[15] 서적 Predatory States: Operation Condor and Covert War in Latin America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2005
[16] 서적 Revolutionizing Motherhood: The Mothers of the Plaza de Mayo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17] 뉴스 El principal sostén del programa económico de Martínez de Hoz https://www.clarin.c[...] Clarín.com 2013-05-18
[18] 서적 Political Violence and Trauma in Argentin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 서적 Revolutionizing Motherhood: The Mothers of the Plaza De Mayo Rowman & Littlefield
[20] 뉴스 Argentina's Guerrillas Still Intent On Socialism https://news.google.[...] Sarasota Herald-Tribune 1976-03-07
[21] 웹사이트 Argentine Military Intelligence estimate on the number of disappeared http://www2.gwu.edu/[...] National Security Archive 2014-06-09
[22] 웹사이트 On 30th Anniversary of Argentine Coup: New Declassified Details on Repression and U.S. Support for Military Dictatorship https://nsarchive2.g[...] 2023-11-20
[23] 웹사이트 Argentina's Dirty War http://aliciapatters[...] 1985-08-10
[24] 웹사이트 Jorge Rafael Videla, Argentinian dictator who killed Jews, dies https://www.jta.org/[...] 2024-02-12
[25] 뉴스 Anthropology at War?: What Argentina's Dirty War Can Teach Us http://www.anthrosou[...] 2005-09
[26] 뉴스 Megacausa ESMA: perpetua para Alfredo Astiz y Jorge "Tigre" Acosta por crímenes de lesa humanidad https://www.clarin.c[...] Clarín.com 2019-10-22
[27] 웹사이트 Lesa humanidad: en 2016 se dictaron 136 condenas en juicios orales en todo el país http://www.cij.gov.a[...]
[28] 웹사이트 Página/12 :: El país :: La participación civil en la dictadura https://www.pagina12[...]
[29] 웹사이트 Prohibición de elementos de afirmación ideológica o de propaganda peronista. Decreto-Ley 4161, 5 de marzo 1956 http://www.geocities[...]
[30] 서적 Uturuncos. El origen de la guerrilla peronista Biblos
[31] 뉴스 Un exmilitante de Montoneros dijo que él inventó la cifra de 30 mil desaparecidos https://www.perfil.c[...] Perfil Newspaper 2014-12-22
[32] 웹사이트 On 30th Anniversary of Argentine Coup: New Declassified Details on Repression and U.S. Support for Military Dictatorship http://www.gwu.edu/~[...] 2022-12-27
[33] 서적 A History of Modern Latin America: 1800 to the Present Blackwell Publishing 2009-12-21
[34] 뉴스 Piden al Gobierno que proteja a los familiares de Scilingo https://www.clarin.c[...] Clarín.com 1997-10-09
[35] 간행물 Argentine Economy Consejo Técnico de Inversiones S.A.
[36] 뉴스 Condenaron a Etchecolatz a reclusión perpetua http://www.lanacion.[...] La Nación 2006-09-19
[37] 웹사이트 Julio Strassera's prosecution http://www.nuncamas.[...] 1985
[38] 웹사이트 Abuelas elogió la decisión de Obama de desclasificar archivos de la dictadura y deslizó algunas críticas – Política – INFOnews http://www.infonews.[...] 2016-03-29
[39] 웹사이트 El Estado de necesidad http://www.desaparec[...]
[40] 웹사이트 Abuelas elogió la decisión de Obama de desclasificar archivos de la dictadura y deslizó algunas críticas – Política – INFOnews http://www.infonews.[...] 2016-03-29
[41] 웹사이트 No fue una guerra sucia ni limpia, fue terrorismo de Estado http://www.minutouno[...] 2016-03-29
[42] 서적 Pius XII, The Holocaust, and the Cold War Indiana University Press
[43] 서적 Le désastre argentin. Péronisme, politique et violence sociale (1930–2001) Editions Syllepses
[44] 간행물 El derrumbe temprano de la democracia en Córdoba: Obregón Cano y el golpe policial (1973–1974) http://bibliotecavir[...] Estudios Sociales
[45] 웹사이트 El Ortiba - 19 de enero de 1974: asalto al regimiento 10 de Azul por el ERP http://www.elortiba.[...]
[46] 뉴스 Represión en Argentina y memoria larga http://www.argenpres[...] Argenpress 2006-04-10
[47] 웹사이트 Case Number: 200000044 https://foia.state.g[...]
[48] 서적 El drama de la autonomía militar: Argentina bajo las juntas militares Alianza Editorial
[49] 서적 The problems of U.S. businesses operating abroad in terrorist environments https://books.google[...] Rand
[50] 서적 Terrorism Crane, Russak
[51] 서적 The problems of U.S. businesses operating abroad in terrorist environments https://books.google[...] Rand
[52] 뉴스 Terrorists Gun Down Ford Executive in Argentina https://news.google.[...] The Palm Beach Post 1973-11-22
[53] 서적 Schooling and citizenship in a global age: An exploration of the meaning and significance of global education Indiana University
[54] 서적 The problems of U.S. businesses operating abroad in terrorist environments https://books.google[...] Rand
[55] 뉴스 Linke Guerrilleros entführten den Mercedes-Direktor Metz – weil Mercedes Unimogs produziert http://www.spiegel.d[...] Der Spiegel
[56] 서적 Chronologies of Modern Terrorism M.E. Sharpe
[57] 서적 Political Terrorism, 1974–78 Facts on File
[58] 서적 State Terrorism in Latin America: Chile, Argentina, and International Human Rights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59] 서적 Guerrillas & Generals: The "Dirty War" in Argentina Praeger Paperback
[60] 문서 El comando general del Ejército procederá a ejecutar todas las operaciones militares que sean necesarias a efectos de neutralizar o aniquilar el accionar de los elementos subversivos que actúan en la provincia de Tucumán
[61] 웹사이트 Decree No. 261/75 http://www.nuncamas.[...]
[62] 웹사이트 Decree No. 2770/75 http://www.nuncamas.[...]
[63] 웹사이트 Decree No. 2771/75 http://www.nuncamas.[...]
[64] 웹사이트 Decree No. 2772/75 http://www.nuncamas.[...]
[65] 웹사이트 Clarin.com http://www.clarin.co[...]
[66] 뉴스 Jorge Rafael Videla, Argentine junta leader, dies at 87 https://www.washingt[...] The Washington Post 2013-05-17
[67] 뉴스 Mrs. Peron Overthrown by Military in Argentina and Reported Arrested The New York Times 1976-03-24
[68] 서적 Escadrons de la mort, l'école française La Découverte
[69] 뉴스 Automotores Orletti el taller asesino del Cóndor http://www.elcorreo.[...] Juventud Rebelde 2006-01-03
[70] 뉴스 Suspected death squad cars found at Argentine base https://www.reuters.[...] Reuters
[71] 문서 Paraguay: The Forgotten Prison, the Exiled Country
[72] 서적 Los Archivos del Horror del Operativo Cóndor http://www.derechos.[...]
[73] 웹사이트 Juicio civil a Mercedes Benz por favorecer la represión http://www.lavoz.com[...] 2018-03-26
[74] 웹사이트 Página/12 :: El país :: Una falta de mérito que es absolución encubierta https://www.pagina12[...] 2023-04-18
[75] 웹사이트 Complicidad patronal-militar en la última dictadura argentina: Los casos de Acindar, Astarsa, Dálmine Siderca, Ford, Ledesma y Mercedes Benz https://periferiaact[...] 2006
[76] 웹사이트 Demoliendo mitos: el rol de Fangio en Mercedes Benz durante la dictadura https://laretaguardi[...] 2015-04-27
[77] 웹사이트 Anularon el indulto a Martínez de Hoz y lo vuelven a investigar https://www.clarin.c[...] Clarín.com 2006-09-05
[78] 뉴스 Isidoro Graiver refuta a la Presidenta http://www.lanacion.[...]
[79] 뉴스 Claves para entender el caso Papel Prensa https://chequeado.co[...]
[80] 뉴스 Página/12 :: El país :: Deleznable https://www.pagina12[...]
[81] 뉴스 Ante el fiscal, Lidia Papaleo dijo que firmó en un clima de presiones http://tiempo.elarge[...] 2011-07-10
[82] 뉴스 Página/12 :: El país :: Una venta en medio del horror https://www.pagina12[...]
[83] 뉴스 El pacto entre Clarín, La Nación y Videla que marcó el destino de Papel Prensa https://www.ambito.c[...]
[84] 뉴스 Lidia Papaleo dijo que le advirtieron que podía morir si no vendía https://www.ambito.c[...]
[85] 뉴스 La denuncia periodística que cambió la historia https://www.infonews[...]
[86] 웹사이트 Así robaron Papel Prensa http://www.nuestrasv[...] 2016-11-02
[87] 뉴스 Papel Prensa: sobreseyeron a Bartolomé Mitre, Héctor Magnetto y Ernestina Herrera de Noble https://www.lanacion[...]
[88] 웹사이트 Visit by Guillermo Novo Sampol to Chile in 1976 http://www.gwu.edu/~[...]
[89] 서적 Political Violence and Trauma in Argentin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011
[90] 웹사이트 Department of State, Ninety-first Meeting of the Working Group/Cabinet Committee to Combat Terrorism, Confidential Minutes, September 5, 1975 https://nsarchive.gw[...] 2023-08-04
[91] 뉴스 Ramón Camps: el peor de todos http://www.terra.com[...] Terra Actualidad 2006-03-18
[92] 웹사이트 Argentina: Secret U.S. Documents Declassified on Dirty War Atrocities https://nsarchive2.g[...] 2023-08-04
[93] 웹사이트 Department of State report, "Next Steps in Argentina," Secret, January 26, 1979 https://nsarchive.gw[...] 2023-08-04
[94] 뉴스 La masacre de Margarita Belén http://www.ellitoral[...] 2010-12-08
[95] 웹사이트 The Victims: Abducted, Tortured, Vanished http://www.yendor.co[...]
[96] 뉴스 Argentina begins tomorrow in landmark trial for stealing babies http://www.todanotic[...] Todanoticia.com 2011-02-27
[97] 웹사이트 Abuelas de Plaza de Mayo http://www.abuelas.o[...] 2015-10
[98] 웹사이트 State Department Opens Files on Argentina's Dirty War http://www2.gwu.edu/[...] National Security Archive
[99] 웹사이트 Memorandum on Torture and Disappearance in Argentina, May 31, 1978 http://www2.gwu.edu/[...]
[100] 웹사이트 Department of State report, "Next Steps in Argentina," Secret, January 26, 1979. https://nsarchive.gw[...]
[101] 논문 The influence of French "revolutionary war" ideology on the use of torture in Argentina's "dirty war"
[102] 서적 Human Rights and United States Policy Toward Latin America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4
[103] 웹사이트 Para un organismo oficial, los desaparecidos en la última dictadura fueron 6.348 http://www.lacapital[...]
[104] 문서 Entre resistentes e "irrecuperables": Memorias de ex presas y presos políticos (1974–1983) http://www.elortiba.[...]
[105] 뉴스 Una duda histórica: no se sabe cuántos son los desaparecidos http://edant.clarin.[...] 2003-06-10
[106] 웹사이트 Desaparecidos: "El número definitivo lo vamos a tener cuando hablen los perpetradores" https://notasperiodi[...] 2016-07-25
[107] 웹사이트 Bonafini contra las indemnizaciones https://www.lagaceta[...] 2004-10-18
[108] 서적 State terrorism in Latin America Rowman & Littlefield
[109] 뉴스 Luis Muiña handed life in jail for dictatorship-era murder at Posadas hospital https://www.batimes.[...] Buenos Aires Times 2020-06-10
[110] 웹사이트 The National Security Archive https://nsarchive.gw[...] 2021-03-29
[111] 웹사이트 Joint CIA/Department of State memorandum, "Meeting at Department of State to Discuss Operation Condor," Secret, August 13, 1976. National Security Archive https://nsarchive.gw[...]
[112] 문서 Attach briefing paper for Newsom on Argentine https://www.archives[...] 2022-12-11
[113] 서적 Behind the Disappearances: Argentina's Dirty War Against Human Rights and the United Nations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14] 서적 Armed Forces & Modern Counter-insurgency https://books.google[...] Technology & Engineering
[115] 서적 Power and Popular Protest: Latin American Social Movements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16] 서적 Political Injustice: Authoritarianism and the Rule of Law in Brazil, Chile, and Argentin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Pittsburgh Press
[117] 서적 The Handbook of Reparations: The International Center for Transitional Justice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118] 서적 Political Injustice: Authoritarianism and the Rule of Law in Brazil, Chile, and Argentin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Pittsburgh Press
[119] 서적 Behind the Disappearances: Argentina's Dirty War Against Human Rights and the United Nations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20] 서적 Human Rights from Exclusion to Inclusion: Principles and Practice https://books.google[...] Martinus Nijhoff Publishers
[121] 뉴스 Argentina's Dirty War Still Haunts Youngest Victims https://www.npr.org/[...] National Public Radio 2010-02-27
[122] 웹사이트 Desaparecidos: Mothers of the Disappeared http://www.sylviahor[...]
[123] 뉴스 Argentines Continue 22-year Quest for Justice https://archive.toda[...] San Jose Mercury News 1998-11-29
[124] 웹사이트 http://www.mfa.gov.i[...]
[125] 뉴스 Identifican al menor número 99 de los desaparecidos por la dictadura argentina http://www.jornada.u[...] La Jornada 2017-03-16
[126] 뉴스 Dirty War adoption couple jailed http://news.bbc.co.u[...] BBC News 2008-04-04
[127] 뉴스 Tibio fallo por el robo de un bebé durante la dictadura argentina http://www.elperiodi[...]
[128] 서적 Military Rebellion in Argentina: Between Coups and Consolidation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2019-07-24
[129] 서적 Women and war: a historical encyclopedia from antiquity to the present https://books.google[...]
[130] 서적 Sustaining human rights: women and Argentine human rights organizations https://books.google[...]
[131] 뉴스 Bonafini: el peso de lo irracional http://www.lanacion.[...] Diario La Nación 2004-04-08
[132] 문서 First Responders for Human Rights https://www.du.edu/k[...] University of Denver
[133] 문서 Hearing of Stefano Delle Chiaie http://www.parlament[...] 1997-07-22
[134] 뉴스 Los secretos de la guerra sucia continental de la dictadura http://www.clarin.co[...] Clarín 2006-03-24
[135] 웹사이트 Argentine Military Believed U.S. Gave Go-Ahead for Dirty War http://www.gwu.edu/~[...] 2002
[136] 웹사이트 The Dirty War in Argentina http://www.gwu.edu/~[...] 2017-03-16
[137] 뉴스 Kissinger hindered US effort to end mass killings in Argentina, according to files https://www.theguard[...] The Guardian 2017-03-16
[138] 뉴스 Andersen: Will Obama declassify 'dirty war' docs? http://www.cnn.com/2[...] CNN 2017-03-16
[139] 뉴스 School of the Dictators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2012-08-12
[140] 뉴스 Teaching Human Rights Violations https://pqasb.pqarch[...] The Washington Post 2012-08-12
[141] 뉴스 Teaching Torture http://www.laweekly.[...] 2008-10-12
[142] 서적 The School of the Americas: Military Training and Political Violence in the Americas https://archive.org/[...] Duke University Press 2016-03-13
[143] 웹사이트 The School of the Americas: Class over? http://www.aljazeera[...] Al Jazeera 2012-09-20
[144] 웹사이트 SOA Watch Border Encuentro – November 10–12, 2017 in Tucson/ambos Nogales http://www.soaw.org/[...] 2016-10-09
[145] 뉴스 Kissinger and the 'Dirty War,' http://www.thirdworl[...] 1987-10-31
[146] 웹사이트 Kissinger to the Argentine Generals in 1976: 'If There Are Things That Have To Be Done, You Should Do Them Quickly' http://nsarchive.gwu[...] 2004-08-27
[147] 뉴스 Kissinger Approved Argentinian 'Dirty War' https://www.theguard[...] 2003-12-05
[148] 뉴스 Kissinger Declassified http://www.vanityfai[...] 2004-12
[149] 뉴스 New Memo: Kissinger Gave the 'Green Light' for Argentina's Dirty War https://www.motherjo[...] 2014-01-14
[150] 웹사이트 Ambassador Harry W. Shlaudeman http://www.adst.org/[...] 1993-05-24
[151] 웹사이트 Original document http://www.gwu.edu/~[...]
[152] 웹사이트 On 30th Anniversary of Argentine Coup: New Declassified Details on Repression and U.S. Support for Military Dictatorship http://www.gwu.edu/~[...] 2010-08-06
[153] 보고서 Argentine-United States Bilateral Relations http://www.wilsoncen[...] 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
[154] 문서 Guest 1990
[155] 뉴스 Los secretos de la guerra sucia continental de la dictadura http://www.clarin.co[...] Clarín 2006-03-24
[156] 서적 The Jakarta Method: Washington's Anticommunist Crusade and the Mass Murder Program that Shaped Our World PublicAffairs 2020
[157] 웹사이트 Argentine – 'Escadrons de la mort, l'école française' http://risal.collect[...] RISAL 2004-10-22
[158] 웹사이트 L'exportation de la torture http://www.humanite.[...] L'Humanité 2003-08-30
[159] 웹사이트 MM. Giscard d'Estaing et Messmer pourraient être entendus sur l'aide aux dictatures sud-américaines http://www.lemonde.f[...] Le Monde 2003-09-25
[160] 문서 Série B. Amérique 1952–1963. Sous-série : Argentine, n° 74. Cotes : 18.6.1. mars 52-août 63
[161] 웹사이트 Rapport Fait Au Nom de La Commission des Affaires Étrangères Sur La Proposition de Résolution (n° 1060), tendant à la création d'une commission d'enquête sur le rôle de la France dans le soutien aux régimes militaires d'Amérique latine entre 1973 et 1984, par M. Roland BLUM http://www.assemblee[...] French National Assembly
[162] 웹사이트 Argentine : M. de Villepin défend les firmes françaises http://www.lemonde.f[...] Le Monde 2003-02-05
[163] 저널 Death Squadrons: The French School (review) https://muse.jhu.edu[...] 2005-09-13
[164] 서적 Escadrons de la mort : l'école française Éditions La Découverte 2004
[165] 웹사이트 Conclusion http://www.algeria-w[...]
[166] 웹사이트 Torture : l'école française http://www.europe-so[...] Rouge 2005-09
[167] 서적 Introduction to Jean Ousset, Le Marsisme-léninisme 1961
[168] 뉴스 Disparitions : un ancien agent français mis en cause http://www.lefigaro.[...] Le Figaro 2007-02-06
[169] 뉴스 Impartí órdenes que fueron cumplidas http://www.pagina12.[...] Página/12 2007-02-02
[170] 뉴스 Astiz llevó sus chicanas a los tribunales http://www.pagina12.[...] Página/12 2007-01-25
[171] 웹사이트 Twenty years on, amnesty end http://www.rnw.nl/in[...] International Justice Tribune 2005-06-27
[172] 웹사이트 Desaparecidos en Argentina: Padre Carlos Dorñak https://www-desapare[...]
[173] 웹사이트 Desaparecidos http://www.desaparec[...] Desaparecidos
[174] 웹사이트 Jorge Acosta and the murder of Dagmar Hagelin http://www.yendor.co[...] Yendor.com
[175] 웹사이트 Desaparacidos http://www.desaparec[...] Desaparecidos.org
[176] 웹사이트 Desaparecidos http://www.desaparec[...] Desaparecidos
[177] 웹사이트 Argentina rejects 'Dirty War' extradition requests http://www.latinamer[...] Latinamericanstudies.org
[178] 웹사이트 Desaparecidos http://www.desaparec[...] Desaparecidos
[179] 웹사이트 Desaparecidos en Argentina: Walter Kenneth Fleury y Claudia Julia Fita Miller https://www-desapare[...]
[180] 웹사이트 Desparacidos http://www.desaparec[...] Desaparecidos.org
[181] 웹사이트 Desaparecidos http://www.desaparec[...] Desaparecidos
[182] 웹사이트 Desaparecidos http://www.desaparec[...] Desaparecidos
[183] 뉴스 La Tablada – the Guerrillas' Last Stand http://www.theargent[...] The Argentine Times 2009-08-14
[184] 웹사이트 Ataque a La Tablada: Gorriarán Merlo, el MTP y la agonía de la guerrilla http://www.urgente24[...] 2017-03-16
[185] 뉴스 Mauricio Macri reactiva la polémica por el número de desaparecidos en Argentina http://internacional[...] 2016-08-11
[186] 웹사이트 Identifican a uno de los genocidas que marchó el 9 de Julio en Tucumán http://www.laizquier[...] 2017-03-16
[187] 간행물 Israelis demand state open up past ties to Argentine junta https://www.972mag.c[...] 2016-03-22
[188] 뉴스 Argentine-Israelis Urge Israel to Disclose Past Junta Ties https://www.haaretz.[...]
[189] 뉴스 Argentinian ex-officer who was charged over 23 murders dies in Berlin https://www.theguard[...] 2023-11-16
[190] 뉴스 Argentine 'Dirty War' Murders Accused Dies In Germany https://www.barrons.[...] Barron's 2023-11-16
[191] 웹사이트 La Corte declaró la nulidad de los indultos de Menem http://www.infobae.c[...] Infobae 2007-07-14
[192] 서적 The Shock Doctrine: The Rise of Disaster Capitalism https://books.google[...] Macmillan 2007
[193] 뉴스 Ford sued over Argentine abuses http://news.bbc.co.u[...] BBC News 2006-02-24
[194] 뉴스 Ex soldados exigen una pensión http://www.elsiglowe[...] El Siglo 2007-12-15
[195] 뉴스 Arrest warrant for ex-dictator https://archive.toda[...] IOL: News for South Africa and the World 2010-01-25
[196] 뉴스 Argentina's 'Blond angel of death' convicted for role in dirty war http://www.csmonitor[...] The Christian Science Monitor 2011-10-27
[197] 서적 Power and Popular Protest: Latin American Social Movements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1
[198] 웹사이트 On 30th Anniversary of Argentine Coup: New Declassified Details on Repression and U.S. Support for Military Dictatorship http://nsarchive.gwu[...] 2017-03-16
[199] 뉴스 Argentine Cardinal Named in Kidnap Lawsuit https://www.latimes.[...] 2005-04-17
[200] 웹사이트 Pope Francis Ran Underground Network to Save Suspected Dissidents https://www.huffpost[...] 2013-09-12
[201] 웹사이트 Book says pope saved more than 1,000 in 'Dirty War' https://www.ncronlin[...] 2013-10-07
[202] 웹사이트 'Pope Francis is with the people,' says Hebe de Bonafini, president of 'Madres de la Plaza de Mayo' https://www.americam[...] 2016-05-27
[203] 서적 Argentina: What Went Wrong Praeger Publishers
[204] 서적 30,000 desaparecidos. realidad, mito y dogma : historia verdadera y manipulación ideologica Santiago Apóstol 2003
[205] 서적 Modern Tyrants: the power and prevalence of evil in our age https://books.google[...] 1996-04-15
[206] 서적 Encyclopedia of modern worldwide extremists and extremist groups https://books.google[...]
[207] 웹사이트 ARGENTINA DECLASSIFICATION PROJECT https://www.intel.go[...] Office of Director of National Intelligence
[208] 뉴스 European spies sought lessons from dictators' brutal 'Operation Condor' https://www.theguard[...] 2019-04-16
[209] 뉴스 Obama honors Argentina's 'Dirty War' victims; faults U.S. on human rights https://www.reuters.[...] 2016-03-24
[210] 비디오 Video http://www.mefeedia.[...]
[211] 웹사이트 libremedia.home http://www.libremedi[...] 2017-03-16
[212] 웹사이트 The Disappeared – a film by Peter Sanders http://www.thedisapp[...] 2010-08-06
[213] 웹사이트 Nuestros Desaparecidos http://www.ourdisapp[...] 2010-08-06
[214] 논문 ラテンアメリカの民衆社会運動 ; 抵抗 要求行動から市民運動へ https://www.ide.go.j[...] アジア経済研究所 2007
[215] 뉴스 多数の政治犯を生きたまま海に突き落とす、70年代独裁政権「死のフライト」機をアルゼンチンに返還(字幕・25日) https://jp.reuters.c[...] 로이터 2023-06-26
[216] 웹사이트 汚い戦争とは?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23-07-06
[217] 뉴스 軍事独裁下で赤ん坊を奪った罪で元大統領に禁錮50年、アルゼンチン http://www.cnn.co.jp[...] CNN 2012-07-06
[218] 뉴스 Pope Francis: questions remain over his role during Argentina's dictatorship http://www.guardian.[...] 2013-03-14
[219] 뉴스 Pope must clean himself of history's stain http://www.theaustra[...] 2013-03-18
[220] 뉴스 Pope Francis, the Disappeared, and the Questions That Won’t Vanish http://blogs.wsj.com[...] 2013-03-15
[221] 뉴스 Argentine Church Faces ‘Dirty War’ Past http://www.nytimes.c[...] 2007-09-17
[222] 뉴스 Starting a Papacy, Amid Echoes of a ‘Dirty War’ http://www.nytimes.c[...] 2013-03-17
[223] 서적 Miradas desveladas sobre la guerra interna 2003
[224] 서적 Desarrollo y Principios del Derecho Internacional Humanitario TM Edit. 1997
[225] 웹사이트 Divulgan plan de "guerra sucia" usado por el Ejército durante conflicto en Guatemala https://todanoticia.[...] 2010-04-23
[226] 서적
[227] 웹사이트 로사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 http://h21.hani.co.k[...]
[228] 위키 1976년 아르헨티나 쿠데타
[229] 웹사이트 프란치스코가 아니었던 지난날, 그가 혹시 http://na-dle.hani.c[...] 2013-04-04
[230] 뉴스 '새 대통령 비델라 장군 반공 투철한 가톨릭 신자' http://newslibrary.n[...] 1976-03-26
[231] 서적 눈까마스, 아르헨티나 군사독재의 실상 나남
[232] 뉴스 아르헨 과거청산…군정 협력 신부에 종신형 https://news.naver.c[...] 2007-10-10
[233] 뉴스 아르헨 ‘더러운 전쟁’ 가톨릭사제에 종신형 http://www.hani.co.k[...] 2007-10-10
[234] 뉴스 “파파, ‘더러운 전쟁’ 때 어디에 임하셨나요” http://www.sisapress[...] 시사저널 2013-03-28
[235] 뉴스 ‘새 교황-독재군부 결탁 의혹’ 문서 파장 http://www.hani.co.k[...] 2013-03-18
[236] 뉴스 새 교황 아르헨 군부독재 묵인 논란 http://www.kookje.co[...] 2013-03-15
[237] 보고서 Informe Histórico presentado a la Sociedad Mexicana FISCALÍA ESPECIAL DE MOVIMIENTOS SOCIALES POLÍTICOS DEL PASADO. FEMOSPP
[238] 웹사이트 Los encontraremos https://web.archive.[...] 2007-07-06
[239] 뉴스 “Guerra Sucia”: la faz oscura de México https://www.laprensa[...]
[240] 보고서 Informe de la Comisión Nacional sobre prisión política y tortura La Nación
[241] 보고서 Informe de la Comisión Nacional de Verdad y Reconciliación, vol. 1, tomo 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