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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화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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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말레이시아 화교는 원나라 시대부터 말레이 반도와 보르네오 섬으로 이주를 시작한 중국인 후손으로, 말레이시아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초기에는 무역과 정착을 통해, 이후에는 영국 식민지 시대의 주석 채굴 산업 발달과 더불어 대규모 이주가 이루어졌다. 독립 이후에는 말레이시아의 경제 발전에 기여했으나, 말레이시아 신경제정책 등 정부의 정책 변화와 민족 간 갈등, 낮은 출산율 등으로 인해 사회적, 정치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말레이시아 화교는 다양한 방언과 문화를 유지하며, 불교, 도교, 중국 민간 신앙을 믿으며, 중국 설날 등 다양한 명절과 축제를 기념한다. 말레이시아 화교는 독특한 요리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21세기 중국 경제의 부상과 함께 경제적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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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화교
말레이시아 화인 정보
전통 의상을 입은 라부안의 중국계 소녀들, 1945년경.
전통 삼푸 복장을 입고 우산을 든 중국계 사람들, .
기본 정보
인구'6,712,200'
말레이시아 인구 비율22.4% (2024년)
주요 거주 지역페낭, 케다, 페를리스, 쿠알라룸푸르, 페락, 셀랑고르, 조호르, 사라왁
주요 디아스포라 지역호주
크리스마스 섬
싱가포르 (2010년 338,500명)
뉴질랜드
미국
캐나다
영국
타이완
홍콩
중국
언어
공용어만다린어 (링구아 프랑카), 말레이어, 영어 (학교 및 정부 공용어)
모국어호키엔어, 광둥어, 하카어, 차오저우어, 푸저우어, 하이난어, 타이산어, 푸셴어; 망글리시 (크리올)
종교
주요 종교대승불교 및 도교 (중국 민간 종교)
소수 종교이슬람, 힌두교, 기독교, 무종교, 기타 종교
관련 집단
관련 민족브루나이 중국인
싱가포르 중국인
인도네시아 중국인
필리핀 화교
태국 화교
페라나칸
시노-원주민
해외 화교
중국어 표기
정체자華人
간체자华人
페지Má-lâi-se-a Hôa-jîn
한어병음Mǎ lái xī yà Huá rén
웨이드-자일스Ma3lai2xi1ya4 Hua2ren2
통용 병음Ma3lai2xi1ya4 Hua2ren2
광동어Maa5 loi4 sai1 aa3 Waa4 jan4
예일Máh lòi hsā ia Wàh yàhn
정체자 2華裔
간체자 2华裔
한어병음 2mǎ lái xī yà huá yì
웨이드-자일스 2Ma3lai2xi1ya4 Hua2yi4
통용 병음 2Ma3lai2xi1ya4 Hua2yi4
예일 2Ma3lai2xi1ya4 Hua2yi4
기타 정보
말레이어Orang Cina Malaysia
중국어馬來西亞華人
영어Malaysians of Chinese origin

2. 역사

말레이시아 화교의 역사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초기에는 중국과 말레이 군도 왕국 간의 교류를 통해 시작되었다.[2] 원나라 시절인 1292년, 쿠빌라이 칸몽골 원정대가 보르네오에 도착하면서 현재 말레이시아 지역으로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키나바탄간 강을 따라 정착했으며, 원주민들과 교역하며 관계를 맺었다.

명나라 시대에는 탐험가 정화동남아시아 원정을 통해 말라카를 방문했다. 그의 동료 마환은 영야성란에서 말라카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당시 말라카는 명나라의 보호 아래 건국되었으며, 이슬람교로 개종한 왕이 통치했다.[3] ''명사''에는 이미 그 지역에 중국인 정착지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말라카와 브루나이는 중국 왕조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혼혈 결혼을 통해 관계를 강화했다. 정화의 원정은 말레이 군도의 이슬람 전파에 영향을 주었고, 푸젠과 광저우 출신 중국인 무슬림 상인들이 말레이시아 해안 도시에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인 묘지 중 하나인 말라카의 부킷 치나(중국 언덕)의 1860~1900년대 사진


1511년 말라카 정복 이후에도 중국인 이민은 계속되었다. 명나라는 포르투갈에 대한 보복 조치를 취했지만, 외교 정책 변화로 인해 폐위된 말라카 통치자의 복위를 돕지는 않았다. 일부 중국인들은 포르투갈에 협력하지 않았지만,[4] 중국계 무슬림들은 포르투갈 말라카 행정부를 통해 다른 이슬람 상인들과 협력했다.

1874년 6월 셀랑고르에서 해산 비밀결사의 "캡틴 차이나"와 그의 추종자들


1641년 네덜란드 제국의 말라카 점령 이후, 많은 현지 중국인들이 네덜란드 건물 건설에 고용되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중국인들의 근면함을 높이 평가하여 식민지 경제에 참여시켰다. 1650년 페락에 네덜란드 정착지가 설립되면서 중국인들은 주석 광산 개발에 참여하게 되었다.

19세기 초 말레이아와 보르네오에 영국 정착지가 설립되면서 중국인들의 대규모 이민이 시작되었다. 1786년 페낭, 1819년 싱가포르, 1846년 라부안에 영국 정착지가 설립되면서 중국인 이민이 증가했다. 북보르네오 특허회사 초기에도 이민은 계속되었다.

1904년 페락에서 영국 관리들과 함께 있는 중국인 거부 응 부 비(Ng Boo Bee)


사라왁에서는 찰스 브룩이 중국인과 다야크족의 이주를 장려하여 행정 중심지와 바자르가 설립되었다. 19세기까지 사라왁 제1, 제2, 제3 구역에 객가족과 복주 사람들, 광동 사람들이 후추 재배를 주도하며 사라왁을 세계적인 후추 생산지로 만들었다. 영국이 페락, 셀랑고르, 네게리 슴빌란, 파항을 장악한 후, 약 200만 명의 중국인이 이주했다.

1919년경 쿠칭에서 중국인 쿨리가 끄는 인력거를 탄 아이들


주석 매장지 발견 이후, 많은 중국 이민자들이 말레이아의 주석 채굴 산업에 종사했다. 이포(킨타 계곡), 타이핑, 세렘반, 쿠알라룸푸르(클랑 계곡) 등지에 중국인 주석 채굴 공동체가 설립되었다. 각 공동체는 카피탄 치나가 통치했으며, 이들의 의무와 특권은 조호르의 강추 시스템과 유사했다. 19세기까지 약 500만 명의 중국인이 이주한 것으로 추산된다.

19세기 말, 영국령 말레이아에서 주석 광산 개발과 고무 농장 확대로 인해 중국인 노동자들의 대규모 이민이 이루어졌다.[5] 신해혁명 이후, 손문을 비롯한 혁명가들은 해외 화교들의 지원을 받아 독립운동을 전개했다.[5] 말레이시아 화교 사회는 국민당과 공산당 활동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5]

흥중회의 이포 모금 회의, 광저우 제2차 봉기를 위한,


제2차 세계 대전일본 제국의 침략에 맞서 말레이시아 화교들은 항일 투쟁을 벌였다.[5] 말레이 인민 반일군(MPAJA)은 주로 말레이시아 화교들로 구성되어 일본 제국 육군(IJA)과 게릴라전을 벌였고, 영국 제136부대와 연락을 취했다.[5]

말레이 인민 반일군(MPAJA) 게릴라, 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쿠알라룸푸르에서 해산식 중


말레이 국민해방군(MNLA)으로 이름을 바꾼 공산주의 반군은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여 영국에 대항했다. 영국 정보 당국은 중국인 인구 중 약 50만 명이 MNLA를 지지한다고 추산했다. 1948년 말레이아 비상사태가 선포되었고, 대부분의 말레이시아 화교들은 MNLA에 반대했다.

1949년 영국과 말레이 경찰이 지역 내 공산주의 활동에 대해 중국계 민간인과 대화하는 모습


1950년 해럴드 브릭스가 고안한 브릭스 계획은 중국인 인구를 반군으로부터 격리하려는 의도였다. 재정착 계획에 따라 70만 명이 넘는 농촌 중국인 공동체가 새로운 정부 정착촌으로 이주했다. 1951년 영국 고등판무관 헨리 거니가 사망한 후, 제럴드 템플러가 새로운 고등판무관으로 임명되었다. 템플러는 마음 얻기를 선호하며 반군에 대한 군사 조치보다 유화 정책을 펼쳤다. 1948년 바탕 칼리 학살에서는 MNLA에 지원을 제공한 혐의를 받는 무장하지 않은 말레이시아 민간인 24명이 스코틀랜드 근위대 부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1950년대 공산주의 반군과 연계된 중국인들을 격리하기 위해 건설된 새로운 마을


친 펭에 따르면, 템플러 작전의 성공은 브릭스 계획의 재정착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거니는 비말레이인의 시민권 획득을 늘리는 법안을 도입했다. 1949년 중국 공산 혁명 이후, 외국 선교사들은 말레이아로 초청되어 새로운 정부 마을 주민들에게 영적 치유, 의학교육 및 복지 조치를 제공했다. 1952년 9월까지 말레이아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120만 명의 중국인 포함)에게 완전한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1950년대 세메니, 셀랑고르에서의 중국계-말레이계 공산주의 반대 시위


1950년대 조지타운, 페낭


말레이 연방이 195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었을 때, 여전히 반란이 있었다. 항복한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중국으로 송환되거나 말레이아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고 공산주의 이념을 포기하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공산주의 반대 운동은 1960년까지 계속되었고, 비상사태 종식이 선언되었다. 중국 본토에 공산 정부가 수립되면서 사라왁의 중국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쳐, 1960년 사라왁 공산주의 반란을 촉발했다. 말레이시아의 경제는 중국계와 인도계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주석과 고무 산업에 의존하여 계속 번영했다.

2. 1. 초기 역사 (원나라 ~ 1900년 이전)

중국과 말레이 군도의 초기 왕국들은 오랜 관계를 맺고 있었다.[2] 현재 말레이시아 지역으로 원나라 사람들이 처음 이동한 것은 1292년 쿠빌라이 칸몽골 원정대가 자바 침공을 준비하며 보르네오에 도착하면서였다. 칸을 따르던 많은 중국인들은 원정 이후 중국 상인들과 함께 섬에 정착하여 키나바탄강을 따라 거주지를 세웠다. 이들은 원주민들에게 환영받았는데, 원주민들은 중국인들이 가져온 항아리, 구슬, 비단, 도자기로부터 이익을 얻었다.

1415년 영락제 시대 명나라 지도


명나라의 탐험가 정화는 1405년에서 1430년 사이 동남아시아로 여러 차례 원정을 지휘했으며, 그중 세 번째 항해 때 말라카를 방문했다. 그의 동료이자 통역관이었던 마환은 자신의 저서 ''영야성란''에서 말라카에 대해 묘사했다. 과거 태국 영토였던 말라카는 명나라의 호송대가 도시를 건설하고 그 지역의 수장을 왕으로 즉위시킨 후 건국되었다.[3] 네 번째 황실 함대 방문 때 마환은 현지 왕이 이슬람교로 개종했고 아랍인처럼 옷을 입었다고 기록했다. 중국 공식 역사서인 ''이십사사'' 중 하나인 ''명사''에는 이미 그 지역에 중국인 정착지가 있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특히 남양 지역과의 무역 접촉 이후 다른 기록에서도 언급이 있다. 1537년 황중(Huang Zhong)이 저술한 ''해어(Hai Yü)''(''바다에 관한 말'')에 따르면 말라카의 중국인 공동체는 현지 말레이인과 생활 방식이 달랐다.

이러한 관계는 말라카와 브루나이 왕국의 이슬람화 과정에서도 유지되었는데, 이들의 탈라소크라시는 현재 말레이시아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슬람 술탄국들은 이웃 마자파힛이나 아유타야의 추가 정복으로부터 중국 왕조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관계는 술탄국의 왕족과 중국 사절 및 대표들 간의 혼혈 결혼으로 이어졌다. 정화의 도착은 말레이 군도의 이슬람 전파를 촉진했고, 푸젠과 광저우 출신의 중국인 무슬림 인구 증가에 기여했으며, 이들 중 많은 상인들이 15세기 초에 현재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해안 도시에 도착했다. 키나바탄간과 말라카의 초기 정착지 외에도, 트렝가누와 피낭에도 각 지역과의 무역 네트워크의 일부로 두 곳의 오래된 중국인 정착지가 있었다.

1511년 말라카 정복 이후 많은 중국 상인들이 포르투갈령 말라카를 피했지만, 중국에서의 이민자 유입은 계속되었다. 정덕제는 광저우에 포르투갈 함대가 도착한 후 명나라 시대 말라카에서의 포르투갈 활동에 대해 보복했다. 그러나 명나라 황제는 폐위된 말라카 통치자의 복위를 돕는 것을 꺼렸는데, 당시 왕조의 외교 정책이 포르투갈과의 우호 관계 유지를 위해 변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후계자인 가정제는 두 명의 정부 관리를 처형하고 말라카 문제의 중요성을 주요 정책 결정에서 재확인함으로써 명나라 조정의 태도를 바꾸었다. 무역을 위해 명나라 규정을 무시한 복건성 출신을 포함한 일부 중국인들은 포르투갈에 광둥성과 시암(Siam) 사이의 무역로를 알렸다. 현지 말라카 중국인들은 포르투갈인들에게 호의적인 대우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과 대부분의 해외 중국인들은 포르투갈인들과 협력하기를 거부했다.[4] 포르투갈 말라카 행정부를 통해 중국계 무슬림들은 배와 인적 자본을 제공함으로써 다른 이슬람 상인들과 함께 후자에 대항했다. 나중에 광둥성에서 중국 관리들과 포르투갈 사절들 사이에 말라카 문제에 대한 협상이 이루어졌고, 말라카는 포르투갈의 통치하에 남았다.

1641년 네덜란드 제국의 말라카 점령 이후, 많은 현지 말라카 중국인들이 네덜란드 건물 건설에 고용되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중국인들이 근면하다고 생각하여 식민지 경제 생활에 참여하도록 장려했다. 네덜란드인들은 또한 아체와의 이전 조약을 통해 1650년 페락에 정착지를 설립했고, 페락의 17대 술탄인 알라우딘(Alauddin)에게 중국인들이 주석 광산을 개발하도록 허용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알라우딘이 말라카에서 더 많은 중국인 노동자를 요청하려는 계획을 용이하게 했고, 술탄은 중국인을 학대한 죄를 지은 관리를 처벌할 것을 약속했다.

술탄의 동의하에 중국인들은 주석 채굴 산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1780년의 제4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은 주석 무역에 악영향을 미쳤고 많은 중국 광부들이 떠났다. 말라카와 군도 연안 여러 지역의 초기 중국 정착지에도 불구하고, 말레이시아로의 대규모 중국 이민은 19세기 초 말레이아와 보르네오에 영국 정착지가 설립된 후에 발생했다.

1786년 페낭에 영국 정착지가 설립되고 1819년 싱가포르에 또 다른 정착지가 설립되면서 중국에서 말레이 반도로 대규모 이주가 시작되었다. 1846년 라부안에 영국 통치가 수립된 후, 더 많은 중국계 주민들(주로 객가족과 싱가포르 출신이 많았다)이 보르네오에 도착했다. 이민은 북보르네오 특허회사의 초기 몇 년 동안 계속되었다.

라부안과 북보르네오로의 중국 이민은 주로 농업 부문에 국한되었고; 사라왁으로의 이민은 주로 광업과 농업 부문에 제한되었다. 사라왁 라자 찰스 브룩은 이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내륙 사라왁으로 중국인과 다야크족의 이주를 장려했다. 이로 인해 19세기까지 주로 사라왁의 제1, 제2, 제3 구역에 행정 중심지와 바자르가 설립되었다.

찰스 라자는 1876년 싱가포르에서 온 중국인 후추 재배자들을 쿠칭에 정착하도록 초대했고, 나중에 현지 중국 광부들과 이웃 네덜란드령 보르네오 출신 사람들이 합류했다. 왕국에 후추가 도입됨에 따라 사라왁 제1구역 쿠칭-세리안 지역의 후추 재배는 객가족이 주도했고; 복주 사람들과 광동 사람들은 제3구역 사리케이-비난탕 지역의 재배를 주도하여 사라왁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후추 생산국으로 만들었다. 영국이 페락, 셀랑고르, 네게리 슴빌란, 파항의 네 개 주를 장악한 후, 거의 200만 명의 중국인이 페락과 셀랑고르로 이주했다.

주석 매장지가 말레이아에서 발견된 후, 많은 중국 이민자들이 주석 채굴 산업에서 일했다. 페락에서 주석 광산이 개장하면서 이웃 페낭의 많은 중국인들이 부유해졌다. 1870년대에는 특히 이포(킨타 계곡), 타이핑, 세렘반, 쿠알라룸푸르(클랑 계곡)에서 말레이 반도에 많은 중국 주석 채굴 공동체가 설립되었다. 각 광산 공동체는 카피탄 치나가 통치했고, 그 의무와 특권은 조호르의 강추 시스템과 유사했다. 중국 이민은 중국 농촌의 빈곤과 영국 식민지 또는 보호령의 고용 기회에서 비롯되었고, 19세기까지 약 500만 명의 중국인이 이주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민 후 경제적 번영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중국 공동체는 여러 비밀 결사로 분열되었다. 이는 말레이 귀족들 사이의 정치적 불안을 악화시켰고, 말레이 귀족들은 비밀 결사의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현지 말레이 정치는 유사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무정부 상태와 내전으로 특징지어졌고, 이는 말레이 고위 정치 지도자들과 투자를 보호하는 중국과 유럽 관리들 사이의 동맹을 촉구했다.

2. 2. 영국 식민지 시대 (1900년 ~ 1945년)

19세기 말, 영국령 말레이아에서 주석 광산 개발과 고무 농장 확대로 인해 중국인 노동자들의 대규모 이민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주로 페락, 셀랑고르 등에서 광부나 농장 노동자로 일했다.[5]

신해혁명 이후, 손문을 비롯한 혁명가들은 해외 화교들의 지원을 받아 독립운동을 전개했다.[5] 말레이시아 화교 사회는 국민당과 공산당 활동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5]

제2차 세계 대전일본 제국의 침략에 맞서 말레이시아 화교들은 항일 투쟁을 벌였다.[5] 말레이 인민 반일군(MPAJA)은 주로 말레이시아 화교들로 구성되어 일본 제국 육군(IJA)과 게릴라전을 벌였고, 영국 제136부대와 연락을 취했다.[5]

2. 3. 독립 이후 (1945년 ~ 현재)



말레이 국민해방군(MNLA)으로 이름을 바꾼 공산주의 반군은 정글에서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여 수송망을 파괴하고 영국인의 농장을 공격했으며, 여러 유럽인 농장주를 암살했다. 영국 정보 당국은 총 312만 명의 중국인 인구 중 약 50만 명이 MNLA를 지지한다고 추산했으며, 대부분의 반군이 접근이 어려운 정글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반군과의 싸움은 어려웠다. 1948년 6월 18일 말레이아 비상사태 선포와 함께 초기 정부의 대응은 혼란스러웠으며, 주요 목표는 중요한 경제적 목표물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말레이시아 화교들은 MNLA에 반대했다.

1950년 영국 장군 해럴드 브릭스가 고안한 브릭스 계획은 중국인 인구를 반군으로부터 격리하려는 의도였다. 독립은 약속되었고 말레이인들에 의해 지지되었지만, 중국인들은 독립된 말레이아에서 2등 시민으로 취급될까 두려워했다. 새로운 마을 건설 외에도 이 계획에는 노동 재조직, 말레이아 전역에 걸친 군대 배치, 경찰, 군대, 정보 당국 간의 협력이 포함되었다. 재정착 계획에 따라 70만 명이 넘는 농촌 중국인 공동체가 582개의 새로운 정부 정착촌으로 이주했다. 1951년 영국 고등판무관 헨리 거니가 매복 공격으로 사망한 후, 윈스턴 처칠은 다음 해 제럴드 템플러를 말레이아의 새로운 고등판무관으로 임명했다. 템플러는 반군에 대한 군사 조치보다 마음 얻기를 선호했다. 그의 작전의 일환으로 템플러는 반군의 항복을 유도하고, 관련 지역에서 엄격한 통행금지와 식량 공급을 엄격히 통제하여 반군을 소탕했다. 반군이 재배한 농작물에는 제초제와 낙엽제가 살포되었고, 반군이 없는 지역은 "백색 지대"로 승격시켜 제한이 해제되었다. 1948년 말 바탕 칼리 학살에서 MNLA에 지원을 제공한 혐의를 받는 무장하지 않은 말레이시아 민간인 24명이 스코틀랜드 근위대 부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친 펭에 따르면, 템플러 작전의 성공은 주로 브릭스 계획의 재정착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거니는 또한 독립 후 시민권을 가질 자격이 있는 비말레이인의 수를 늘리는 법안과 함께 준장관 제도를 도입했다. 1949년 중국 공산 혁명 이후 중국의 외국 선교사들은 중국을 떠나야 했다. 템플러는 그들을 말레이아로 초청하여 새로운 정부 마을 주민들에게 영적 치유, 의학교육 및 복지 조치를 제공했다. 1952년 9월까지 말레이아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120만 명의 중국인 포함)에게 완전한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말레이 연방이 195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었을 때, 여전히 반란이 있었다. 항복한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중국으로 송환될지, 아니면 말레이아의 선출된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고 공산주의 이념을 포기할지 선택할 수 있었다. 공산주의 반대 운동은 1960년까지 계속되었고, 친 펭이 그의 부대를 해산하고 남부 태국의 은신처를 베트남을 거쳐 베이징으로 떠난 후 말레이시아 정부가 비상사태 종식을 선언했다. 베이징에서 친과 덩샤오핑의 회담에서 중국은 말레이시아 공산당에 무장 투쟁을 계속할 것을 촉구했다. 중국 본토에 공산 정부가 수립되면서 사라왁의 중국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쳐, 친중국계 사라왁 해외 중국 민주 청년 연맹(후에 사라왁 선진 청년 협회)을 조직하여 1960년 사라왁 공산주의 반란을 촉발했다. 말레이시아의 경제는 중국계와 인도계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주석과 고무 산업에 의존하여 계속 번영했다.

3. 인구 및 사회

말레이시아 화교 사회는 오랜 역사와 함께 복잡한 인구 구성을 가지고 있으며,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초기 툰쿠 압둘 라흐만 수상이 브루나이, 북보르네오, 사라왁, 싱가포르를 포함하는 "대 말레이시아 연합"을 구상했을 때, 싱가포르 수상 리콴유는 이를 지지했다. 리콴유인민행동당(PAP)은 모든 말레이시아인의 평등을 추구하며,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로 알려진 다민족 사회를 주장했다.[1] 1963년 말레이시아 건국 이후, 리콴유는 말레이시아 통일 원주민 기구(UMNO)와 범말레이시아 이슬람당(PAS)의 말레이 극단주의자들에게 ''케투아난 멜라유''에 반대하는 인물로 여겨졌으나,[2][3] 말레이어를 싱가포르의 국어로 채택하고 말레이인 유소프 이삭을 양 디-퍼르투안 네가라로 임명하기도 했다.[4]

말레이시아 중국인 협회(MCA)는 탄 청록이 이끌었으며, 말레이시아 연합당의 일원으로서 평등을 위한 투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MCA는 평등이 말레이인의 정치적 우세와 중국인의 경제적 지배라는 UMNO와 말레이시아 인도인 의회(MIC) 간의 합의를 깨뜨릴 것을 우려했다.[5]

말레이시아 헌법 제153조 제정 후, 리콴유는 통일 민주당, 진보당, 통일 인민당 등과 함께 말레이시아 연대 협약에서 평등을 위해 운동했다.[2] 1965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회의에서 리콴유는 "말레이시아는 말레이시아인에게 속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6]

리콴유의 말레이 지배 옹호 비판은 PAP-UMNO 관계 악화와 1964년 싱가포르 인종 폭동을 야기했다. 결국 싱가포르는 1965년 연방에서 추방되어 독립 국가가 되었다.[2][7][8]

3. 1. 인구 구성

말레이시아 화교는 대부분 한족으로, 중국 남부의 푸젠성광둥성 지역 출신이다.[7] 오늘날 말레이시아에 거주하는 거의 모든 화교들은 이러한 초기 이민자들의 부계 혈통 후손이거나 중국 본토에서 태어난 새로운 이민자들이다.[7]


  • 초기 이주 집단:
  • 켈란탄과 트렝가누의 페라나칸
  • 사바의 중국계 원주민
  • 말라카와 페낭의 해협 출신 중국인(바바-뇨냐)[7]


19세기 중반, 태평천국 운동으로 인해 중국 남부에 혼란과 고통이 야기되었고, 많은 화교 민간인들이 해외, 특히 남양 지역(동남아시아)으로 피난처를 찾았다.[7] 해협 식민지 설립과 함께 더 많은 이민자가 유입되면서 이 지역은 중국 이민의 중요한 목적지가 되었다.[7]

1880년 푸젠성 출신 중국 상인(왼쪽)과 페낭섬의 중국 관리를 그린 그림.

  • 주요 이주 집단 (19세기 후반 이후):


집단출신 지역주요 직업 및 특징
복건 사람들복건성 남부금융, 해상 운송 기술을 가진 부유하고 강력한 개인들이 주도. 이들의 언어는 다른 언어적 배경을 가진 중국인들 사이에서 접촉어가 됨.[7]
광둥 사람들광둥성광산 노동자, 간척 사업, 기계공, 경작 작물 재배.[7]
객가 사람들광둥성 북동부, 중국 남부 여러 지역산간 농부, 산림 개간, 광업, 금속 가공.[7]
차오저우 출신 티우저우 사람들광둥성 동부주로 농장 농업.[7]
푸저우 사람들푸젠 중부기업가 정신.[7]
하이난 사람들하이난요리사, 웨이터 (현지 중국식 커피숍과 식당 주방 지배).[7]
헌화와 혹치아푸젠 동부가족 사업 경영.[7]
광시 출신 광사이광시노동 부문.[7]



이후 세 번째 화교 이주 물결이 이어졌고, 말레이시아는 중국과 타이완 외부 국가 중 세계에서 가장 많은 중국어 사용 인구를 보유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7]

1974년 중국 본토와 말레이시아 간의 외교 관계 수립 후, 양국 간 공동 각서가 작성되었다.

3. 2. 경제적 역할

말레이시아 화교는 전통적으로 말레이시아 경제의 사업 부문에서 우세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6] 이들은 천연자원, 설탕, 팜유와 같은 식품 원료 산업에 종사하는 대규모 기업을 운영해왔으며, 말레이시아의 거의 모든 비스킷 제조업체를 장악하고 있다. 1970년대까지 화교의 경제 구조는 가족 및 혈연 관계와 매우 밀접하게 얽혀 있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중국 경제의 부상과 함께, 이들의 경제 네트워크는 화교를 통해 대나무 네트워크와 연결되었다. 현지 화교는 중국 자본의 말레이시아 투자를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양측 모두 확장된 시장, 낮은 노동 비용, 그리고 말레이시아가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ASEAN) 지역에서 중국과의 최대 교역국이 되면서 도입된 다양한 기술과 경영 시스템으로부터 이익을 얻었다.

1969년 인종 충돌 이후, 1971년부터 1990년까지 말레이시아 신경제정책(Malaysian New Economic Policy)으로 인해 말레이인을 우대하는 '''부미푸테라''' 정책으로 부미푸트라의 경제적 지배력이 60% 증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레이시아 화교들은 여전히 사업 부문의 주요 사업자이며, 1969년 22.8%였던 자기자본 소유는 1990년 45.5%로 두 배 증가했고, 거의 모든 말레이시아 최고 부자는 화교이다.[6]

3. 3. 사회적, 정치적 참여

말레이시아 화교는 말레이시아 중국인 협회(MCA), 민주행동당(DAP), 말레이시아 국민운동당(GERAKAN) 등 다양한 정당을 통해 정치에 참여해 왔다. 1963년 국가 건국 이후, MCA는 다인종 정치 연합인 말레이시아 연합당(후에 국민전선 연합으로 확장됨) 하에서 말레이시아 화교를 위한 유일한 합법적인 정치 대표였다.[9] 그러나 1970년대 이후 말레이시아 사회와 정치에서 비말레이계의 이익에 대한 제한이 증가하면서 화교들 사이에 심각한 불화가 발생했다. 그들의 민족 정당 대표들이 국민의 권리를 위해 설 수 없다는 인식이 커졌고, 의사 결정에 말레이시아 통일 말레이 국민기구(UMNO)가 주도하는 말레이계 우월주의자들이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이 퍼졌다. UMNO는 기존의 정치 연합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부분이었으며, 이슬람 가치를 옹호하기도 했다.[9]

1968년부터 MCA가 화교의 이익, 특히 그들의 문화, 교육, 언어와 관련된 이익을 보존하지 못하면서, 해외 유학을 한 중국계 엘리트가 이끄는 또 다른 화교 대표 정당인 GERAKAN이 결성되었지만, 이 정당도 1972년에 연합당 연합에 합류했다. "관용적이지 않고 개방적이지 않은 이슬람적 버전"의 증가하는 이슬람화, 연합 내 말레이계 당원들의 증가하는 인종차별, 그리고 그들의 교육과 고용에 대한 정부의 차별 정책이 국가 사회 인구 통계에 더욱 영향을 미치면서, 비말레이계, 특히 화교 사이에 더 큰 환멸을 불러일으켰다.[10][11] 이로 인해 많은 MCA 선거구 심지어 GERAKAN의 본거지가 후자의 당이 그들의 권리에 대해 더 목소리를 높이는 것으로 여겨지면서 DAP로 돌아서면서 화교의 지지가 줄어들었다.

2018년 총선에서는 특히 사바의 보르네오 지역구 의석의 추가적인 지원에 힘입어 국민전선 연합이 몰락했다. 이는 UMNO의 말레이계 우월주의 정부의 행정을 통해 장기간에 걸친 주 인구 통계 및 자원 조작과 개발 부족으로 인한 비슷한 불만이 커진 결과였다. 선거에서 DAP는 많은 화교 유권자의 지지를 받아 많은 의석을 획득했고, 그 결과 화교 사이에서 MCA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말레이시아 화교 인구는 매 인구 조사마다 증가하고 있지만, 낮은 출산율과 높은 이민율로 인해 최근 수십 년 동안 전체 인구에서 화교의 비율이 감소하고 있다. 정치적 대표성 상실에 대한 우려가 크다. 세계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 전 세계 말레이시아 디아스포라에는 약 백만 명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대부분이 화교이다. 많은 수의 이민자, 특히 교육이나 기술을 갖춘 젊은이들은 특히 인접 국가인 싱가포르로의 상당한 "두뇌 유출"을 구성한다.[12]

4. 문화

말레이시아 화교는 중국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동시에 말레이시아 문화와 융합된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말라카의 박물관으로 개조된 페라나칸(바바-뇨냐 또는 峇峇娘惹)의 옛 저택 내부. 전통 ''케바야''를 입은 뇨냐 여성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초기 중국과의 무역 관계와 이후 영국 식민지 시대의 대규모 이민은 말레이시아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초기 이민자들은 현지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페라나칸과 같은 독특한 혼합 문화를 만들어냈다.

서말레이시아의 나 투 콩(拿督公) 사당.


말라카의 바바 뇨냐는 종교, 이름, 정체성 등 중국 문화유산을 유지하면서도 의복과 음식에서 강한 말레이시아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의 음식은 말레이시아 재료와 조리법을 사용하지만 중국식 방법을 따르며, 건축 양식은 빅토리아 양식, 중국 양식, 말레이시아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페낭의 페라나칸들은 말레이시아어에서 차용한 단어가 섞인 호키엔어를 사용하는 반면, 말라카 페라나칸들은 일부 호키엔어 단어가 섞인 말레이시아어 방언을 사용한다. 페낭 페라나칸 요리는 중국과 말레이시아 요소 외에 태국 요리의 영향도 받았다.

말레이시아 동부 해안 켈란탄과 트렝가누의 페라나칸들은 대부분 말레이시아와 태국식 생활 방식을 채택하여 현지 말레이시아 및 태국 공동체와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북부 보르네오에서는 초기 왕국 시대부터 중국계와 현지 원주민 사이에 긴밀한 혈연 관계가 형성되어 사바의 "중국계 원주민"이 탄생했다. 이들은 중국어를 사용하지 않고 14세기부터 지역 사바 말레이 방언을 주요 공용어로 사용했다. 이러한 관계는 원주민 두순족이 중국계를 지칭하는 "키나"라는 용어에서 나타나며, 키나발루 산(중국 과부 산), 키나바탕간 강(중국 강) 등 여러 지명에 사용되었다.

나 투 콩 신앙은 서말레이시아와 인접한 싱가포르, 인도네시아의 일부 중국계가 숭배하는 현지 말레이시아 수호령을 보여주는 또 다른 문화 융합의 예시이다. ''나 투''는 말레이시아어 ''다툭''(할아버지)에서 유래했고, ''콩''(公, 때로는 '쿵'으로 불리며 노년 남성을 의미함)과 결합된 것으로, 동아시아에서 숭배되는 토지 신인 토지공()과 유사하다.

말레이시아는 중국과 타이완을 제외하고 포괄적이고 완전한 중국어 교육 시스템을 갖춘 유일한 국가이며, 식민 시대 이후 설립된 중국어 교육 시스템을 유지해 온 유일한 동남아시아 국가이다. 이는 말레이시아 화교 정치 지도자들의 노력과 현지 중국계 사회의 지속적인 지원 덕분이다.

중칭 중고등학교(Tshung Tsin Secondary School), 중국계 독립 고등학교의 사바에서의 교외 활동.


최초의 중국 학교는 19세기 영국 식민 통치 시대에 설립되었다. 독립 후, 일부 중국 독립 학교는 정부 지원을 받기 위해 영어 중심 학교로 전환되었지만, 1970년대 말레이시아 주도 정권에 의해 영어 중심 학교가 폐지되면서 말레이어 중심 학교로 전환되었다.

1996년, 남은 중국계 독립 학교(독중(独中))도 국가 학교 시스템에 포함되었지만, 여전히 연방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지 못하고 통일고시(UEC) 또는 统考는 정부에서 인정하지 않아 공립 고등 교육 기관에 입학할 수 없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말레이시아 화교들은 자체 만다린어 초등학교를 확장했고, 2006년에는 자녀의 약 90%가 이 학교에 등록했다. 이 학교들은 훌륭한 규율과 높은 수준의 교육을 제공한다는 평판을 얻어 부미푸테라 학부모들의 관심도 끌었다.

일부에서는 연방 정부의 소수 언어 교육 정책이 말레이시아 청소년에게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두뇌 유출을 증가시켰다고 주장한다.

4. 1. 언어

말레이시아 화교는 다양한 방언을 사용하며, 표준중국어가 공통어 역할을 한다. 영어말레이어도 널리 사용된다. 말레이어에는 중국어 차용어가 많이 존재한다.[14] 1970년 말레이시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말레이시아 화교의 약 41%가 표준중국어로 대화할 수 있었다.[14]

중국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중국계가 많은 국가에서 중국어가 사용되는 중화권 지도:


1970년 말레이시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남부 민어 방언이 말레이시아 중국계 인구의 34.2%를 차지하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다음으로 객가어(22.1%), 광둥어(19.8%), 차오저우어(12.4%), 해남어(4.7%) 순이었다.[15] 2003년에는 복건어 2,020,914명, 객가어 1,092,835명, 광둥어 1,068,008명, 차오저우어 497,280명, 복주 방언 251,553명, 해남어 141,045명, 광서어 51,674명, 흥화어 24,654명, 학가어 14,935명, 기타 중국계 202,977명 등 각 방언에 대한 더 자세한 통계가 보고되었다.[7]

말레이시아 복건어는 페낭 복건어(북부)와 말레이시아 남부 반도 복건어의 두 가지 지역 방언으로 나뉜다. 페낭 복건어는 페낭, 케다, 펄리스, 페락을 포함하고, 남부 반도 복건어는 조호르, 말라카 및 인접한 싱가포르에 있다. 북부 복건어는 남부 복건어보다 말레이어 차용어가 더 많고, 남부 복건어는 원래의 복건어 단어를 더 많이 유지하고 있다. 사라왁에 사는 많은 복건어 사용자들은 원주민 언어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켈란탄의 복건어는 현지 말레이인과 태국인과의 긴밀한 상호 작용으로 인해 지역화되었다. 말라카와 페낭의 페라나칸 공동체(바바-뇨냐)에서 주로 사용하는 지역화된 복건어도 있다. 일반적으로 복건어는 말레이시아 대부분 지역에서 서로 다른 언어적 배경을 가진 중국계 사이의 접촉어가 되었다.

말레이시아 광둥어는 쿠알라룸푸르에서 접촉어가 되었지만, 중국의 주장 삼각주 지역, 홍콩마카오에서 사용되는 표준 광둥어와는 다른 독특한 음운론과 문법을 가지고 있다. 사바에서는 객가어가 접촉어의 역할을 하지만, 나머지 지역에서는 중국계 사회 내에서 공용어보다는 그룹 내 언어로 더 많이 사용되며, 조호르의 객가어 사용자의 약 66.2%가 지역 표준중국어를 선호한다. 사라왁의 복주어 사용자에 대한 유사한 연구에서도 자신들의 방언에서 표준중국어와 영어로의 언어 선택 변화가 일반적으로 나타났다.

가장 큰 방언 집단은 아니지만 차오저우어는 중국의 차오저우 수출업체와 말레이시아 도매업체 간의 무역을 위한 가교 언어가 되었다. 해남어는 민어 방언군의 소수 방언이지만, 말레이시아에서는 독립적인 방언으로 취급된다.[15] 흥화어와 같은 다른 여러 방언들은 사실상 다른 중국 민족의 중국어의 여러 종류이다. 사바의 북부 중국계 소수 민족이 주로 사용하는 표준중국어는 말레이시아의 모든 중국계 사이에서 주요 공용어가 되었으며, 표준중국어는 지역 중국어 중학교와 독립 중등학교에서 교육 언어로 사용되지만, 일상 생활에서는 반드시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말레이어에 사용되는 중국어 차용어의 예'''
차용어영어 설명
bihun/mihunms쌀국수
cakoims튀긴 긴 빵
cawanms
cincaims아무렇게나, 서둘러, 무작위로
cincaums차가운 젤리
ginsengms약초의 뿌리
kapcaims언더본 오토바이
kuacims해바라기씨
kuetiaums쌀국수
kuihms간식과 디저트
longkangms배수구
mee/mims
paums찐빵
popia/popiahms튀긴 춘권
samsengms폭력배
tauhums두부
taukems큰 사장
tehms
tongkangms중국식 범선
출처: 및 DBP


4. 2. 종교

대부분의 말레이시아 화교는 불교, 도교, 중국 민간 신앙을 믿는다. 기독교이슬람교를 믿는 화교도 있다.[8] 2010년 통계에 따르면, 말레이시아 화교의 종교 분포는 다음과 같다.

종교비율 (%)
불교83.6
기독교11.0
중국 민간 종교3.4
무종교0.8
이슬람교0.7
힌두교0.2
기타 종교 또는 불명0.3



말레이시아 화교는 관우(관성제군(關聖帝君)), 관음(자비의 여신(觀世音菩薩)), 대보공(大伯公)(토지신) 및 마조(''해양의 여신(媽祖)'')와 같은 신들을 숭배한다. 가정과 상점에는 신들을 위한 제단이 설치되어 있고, 조상 숭배도 함께 이루어진다.

극락사


말레이시아의 거의 모든 도시에는 중국 불교 사원과 단체가 있다. 상좌부 불교와 금강승 등 다른 불교 분파에도 중국계 신자가 있다.

말레이시아 중국계 가톨릭 신자들이 셀랑고르의 세인트 이그나티우스 교회에서 종려주일을 지내고 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포함한 중국계 기독교인들은 동말레이시아에서 활발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다. 서말레이시아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도 중국계이다.

중국계 무슬림의 수는 중국계 기독교인에 비해 매우 적다. 이는 이슬람교가 말레이시아 화교에게 덜 매력적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말레이시아 화교, 특히 중국어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유교적 가치관을 따르며, 도교는 그보다 덜 따른다.

4. 3. 명절 및 축제

말레이시아 전역에 거주하는 많은 중국계 주민들 덕분에 중국 설날은 국가 공휴일로 기념된다. 말레이시아의 11개 주와 3개 연방 직할구역에서는 이틀간의 공휴일로 기념하는 반면, 켈란탄주와 트렝가누주는 하루만 공휴일로 기념한다.[8] 설날에는 도시 지역에 거주하는 많은 중국인들이 가족과 함께 축하하고, 시골 지역에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가족 상봉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간다. 온 가족이 함께 하는 전통적인 만찬이 축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특히 광둥계 사람들 사이에서는 전통적인 음식인 ''예 상''을 던지는 행사가 포함될 수 있다. 보통 어른들은 젊은이들에게 세뱃돈(''앵 파우'')를 준다. 방문객들을 위해 집에는 다양한 축제 과자가 준비되어 있다. 설날 전에는 대부분의 중국인 거주 지역과 차이나타운 거리가 형형색색의 등불로 장식된다. 사자 춤이 공연되고, 폭죽불꽃놀이도 축하 행사의 일부로 선보인다.

귤 외에도 다양한 간식이 중국 설날 내내 방문객들에게 제공된다.


말레이시아 수도에서 열리는 중국계 주요 축제 기간의 사자춤


칭가이 행렬도 특히 조호르바루페낭에서 설날 축제의 일환으로 열린다. 동지, 단오절, 중원절, 원소절(''첩고메''), 추석, 구황제 및 청명절 등의 여러 다른 축제들이 일 년 내내 계절에 따라 기념되는데, 이는 대부분 중국 민속 신앙과 전통적인 농업 사회에서 유래한 것이다. 특히 설날, 중원절, 추석과 같은 주요 중국 축제 기간에는 중국 사찰에서 문화 및 종교 행사를 개최한다. 중원절은 일반적으로 말레이시아의 대부분의 ''덕교''(''자'') 그룹에서는 지키지 않고, 중국의 ''덕교'' 협회에서 직접 내려온 쿠알라룸푸르(''자 방 거''), 프라우 케탐(''자 방 거''), 버터워스(''자 위 기'')의 세 ''자'' 협회에서만 주로 지키는데, 이들은 이 축제를 ''위안위안 생휘''라고 부르고 ''위란 상휘''라고 부르지 않는다. 추석은 월병을 교환하고 먹는 것으로 기념한다. 대부분의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부부가 서구식 영향을 받은 흰색 웨딩드레스와 검은색 턱시도를 선호하지만, 전통적인 중국식 결혼식은 여전히 인기가 있다.

4. 4. 음식

말레이시아 화교 요리는 초기 이민자들과 그 후손들의 요리 전통에서 유래하였으며, 말레이시아 문화의 영향을 받아 요리 전통을 채택하거나 변형시켰다.[10] 중국 요리는 말레이시아 문화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분이 되었다.[10] 말레이시아 화교 요리는 주로 중국 남부 출신 이민자들의 후손이기 때문에 현지 중국 요리는 복건, 광동, 객가, 차우저우 요리를 기반으로 한다.[11] 볶음 재료를 넣고 (锅)에 높은 온도에서 소량의 식용유를 넣는 기술은 전국적으로 널리 채택되었다.[12]

말레이시아 화교 요리는 향신료고추에 대한 강한 취향을 발전시켰는데, 현지 중국식 커피숍이나 식당에서는 면 요리와 밥 요리에 절인 녹색 또는 빨간 고추 삼발을 제공한다.[12] 인도인들로부터 카리 잎을 빌려왔고, 영국의 우스터셔 소스토마토 소스를 인도와 말레이시아 향신료와 함께 조리 용기에 적용했다.[12]

오른쪽 상단부터 시계 방향으로 말레이시아 화교 요리의 몇 가지 예시: 구아바젤리(凉粉)와 반둥, 용타우푸, 뇨냐 찐 층 케이크(娘惹千层糕)와 락사 국수.


말레이시아의 주목할 만한 중국 요리에는 박꾸떼(肉骨茶)(중국 약초를 넣은 돼지 갈비탕), 차르콰이테우(炒粿条)(볶음밥 국수), 딤섬(点心)(바로 먹을 수 있는 요리), 해미(虾面)(매콤한 새우 국수 수프), 하이난 치킨라이스(海南鸡饭), 카이시 호펀(鸡丝河粉)(닭고기 조각, 새우, 숙주나물을 넣은 납작한 쌀국수 수프), 콜록 또는 콜로미(干捞面)(사라왁식 계란 국수, 진한 소스, 토마토 소스 또는 고추 소스), 로미(卤面)(진한 노란색 국수, 진한 소스와 진한 국물), 니우짭미(牛杂面)(특별한 사바식 쇠고기 섞어 먹는 국수), 판미(板面)(수제 국수 수프, 돼지고기 완자, 다진 돼지고기, 말린 멸치, 구름버섯과 야채), 상뉴크미(生肉面)(특별한 사바식 마른 돼지고기 국수 또는 돼지고기 국수 수프), 완툰미(云吞面)(바비큐 돼지고기, 다진 돼지고기, 돼지고기 또는 새우 만두를 곁들인 마른 국수 또는 국수 수프), 용타우푸(酿豆腐)(두부와 다진 돼지고기 혼합물이나 생선 페이스트로 채워진 섞은 채소) 등이 있다.[12] 많은 말레이시아 화교인들은 말레이식 닭고기나 생선 요리를 할 수 있으며, 대부분의 락사(叻唦) 요리법은 화교들이 만든다.[12]

여러 가지 전통 쿠이를 만드는 뇨냐.


말레이시아에서 상업적으로 생산되는 기본적인 화교 말레이시아 음료로는 홍차, 국화차, 구아바젤리, 녹차, 자스민차, 두유, 화이트 커피가 있으며, 인기 있는 간식으로는 카코이(油炸鬼)(긴 튀긴 반죽), 에그타르트, 험지펭(咸煎饼)(속이 있거나 없는 원형 튀긴 반죽), 응오이싱타르트(外星塔)(UFO 모양 타르트), 응오히앙(炸五香)(다양한 향신료를 넣은 다진 고기 롤, 튀겨서 야채와 함께 제공), 파우(包)(찐빵), 포피아(薄饼)(튀긴 또는 일반적인 춘권, 섞은 채소로 채움), 타우사르피아(豆沙饼)(단맛 또는 짠맛이 나는 속을 넣은 페이스트리 비스킷) 등이 있다.[13]

첫 번째 이민 물결의 유산은 중국과 말레이시아의 혼합을 통해 페라나칸(土生华人)(바바-뇨냐(峇峇娘惹) 포함) 민족을 만들었고, 그 결과 페라나칸 요리가 생겨났는데, 인도식 카레를 제공하고, 젓가락 대신 말레이시아식 손가락 사용 관습을 따르는 주류 화교 사회와 다른 식사 예절을 가지고 있다.[14] 바바-뇨냐는 또한 쿠이라는 다양한 현지 간식을 만드는 데 특화되어 있는데, 이는 많은 인내와 기술이 필요하다.[15]

5. 현대 사회의 과제

말레이시아 화교는 낮은 출산율과 높은 이민율로 인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감소하고 있으며, 정치적 대표성 상실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세계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 전 세계 말레이시아 디아스포라의 대부분은 화교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주로 싱가포르로 이주하여 상당한 "두뇌 유출" 현상을 보이고 있다.[12]

5. 1. 민족 간 갈등

말레이시아 화교는 부미푸트라 정책으로 인한 차별과 이슬람화 경향으로 인해 사회적, 정치적 불평등을 경험하고 있다.[10][11] 1970년대 이후 말레이시아 사회와 정치에서 비말레이계의 이익에 대한 제한이 증가하면서, 화교 사회에서는 민족 정당 대표들이 국민의 권리를 옹호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커졌다. 의사 결정에는 말레이시아 통일 말레이 국민기구(UMNO)가 주도하는 말레이계 우월주의자들이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UMNO는 기존 정치 연합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부분이었으며, 이슬람 가치를 옹호했다.[9]

말레이시아 중국인 협회(MCA)가 화교의 이익, 특히 문화, 교육, 언어와 관련된 이익을 보존하지 못하면서, 해외 유학을 한 화교 엘리트가 이끄는 말레이시아 국민운동당(GERAKAN)이 1968년에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 정당도 1972년에 연합당 연합에 합류했다.[9]

"관용적이지 않고 개방적이지 않은 이슬람적 버전"의 증가하는 이슬람화, 연합 내 말레이계 당원들의 증가하는 인종차별, 그리고 교육 및 고용에 대한 정부의 차별 정책은 비말레이계, 특히 화교 사이에 더 큰 환멸을 불러일으켰다.[10][11] 이로 인해 많은 MCA 선거구와 GERAKAN의 본거지에서 민주행동당(DAP)으로 지지가 이동하면서, 화교의 지지가 줄어들었다.[10][11]

2018년 총선에서는 국민전선 연합이 몰락했는데, 이는 UMNO의 말레이계 우월주의 정부 행정을 통해 장기간에 걸친 주 인구 통계 및 자원 조작과 개발 부족으로 인한 불만이 커진 결과였다. DAP는 많은 화교 유권자의 지지를 받아 많은 의석을 획득했고, 그 결과 화교 사이에서 MCA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10]

말레이시아 화교 인구는 매 인구 조사마다 증가하고 있지만, 낮은 출산율과 높은 이민율로 인해 최근 수십 년 동안 전체 인구에서 화교의 비율이 감소하고 있다. 정치적 대표성 상실에 대한 우려가 크다. 세계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 전 세계 말레이시아 디아스포라에는 약 백만 명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대부분이 화교이다. 많은 수의 이민자, 특히 교육이나 기술을 갖춘 젊은이들은 특히 인접 국가인 싱가포르로의 상당한 "두뇌 유출"을 구성한다.[12]

5. 2. 두뇌 유출

말레이시아 화교 사회는 교육 및 사회 정책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해외 이주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싱가포르를 비롯한 다른 국가로의 이민이 증가하고 있으며, 이는 말레이시아의 인적 자원 손실, 이른바 "두뇌 유출"로 이어진다.[12]

이는 말레이어 학교에 다니지 않은 비말레이계 소수 언어 공동체 출신 학생들이 해외 대학에 진학해야 했기 때문에, 재능 있고 숙련된 젊은 인재들을 다른 국가로 잃게 되기 때문이다.[12]

참조

[1] 뉴스 Why are so many Malaysians in Penang settling in Hong Kong? https://www.scmp.com[...]
[2] 논문 Multiple Sources
[3] 웹사이트 Ma Huan (1433) - Anthropology & the Human Condition http://sc2218.wikifo[...] 2021-03-16
[4] 논문 Multiple Sources
[5] 논문 Multiple Sources
[6] 논문 Multiple Sources
[7] 논문 Multiple Sources
[8] 간행물 Key Findings of Population and Housing Census of Malaysia 2020: Urban and Rural Department of Statistics Malaysia 2022-12
[9] 논문 Multiple Sources
[10] 웹사이트 Racism drove me from Malaysia. Love brought me to America http://www.theguardi[...] 2016-08-16
[11] 논문 Multiple Sources
[12] 논문 Multiple Sources
[13] 논문 Multiple Sources
[14] 논문 Multiple Sources
[15] 서적 Food Trails Lonely Pl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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