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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173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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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지원(1737년)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문신, 소설가이다. 그는 북학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이용후생과 북학을 주장했으며, 소설 《양반전》, 《허생전》 등을 통해 양반 사회의 모순을 비판했다. 그는 1780년 청나라 연행을 다녀온 후 《열하일기》를 저술하여 실학 사상을 널리 알렸으며, 문학 작품을 통해 현실 비판과 개혁 의지를 드러냈다. 그의 사상은 손자 박규수를 통해 개화 사상으로 이어졌으며, 문학 작품은 한국 리얼리즘 소설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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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1737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손자 박주수가 그린 연암 박지원의 초상
이름박지원
한글 표기박지원
한자 표기朴趾源
로마자 표기Bak Jiwon
아호연암 (燕巖)
본관반남 박씨
출생1737년3월 5일 (음력)
출생지조선 한성부 반송방
사망1805년12월 10일 (음력)
사망지조선 한성부
직업문신, 실학자, 소설가
사상북학파
주요 저서열하일기
방경각외전
과농소초
가족 관계
아버지박사유 (朴師愈)
어머니함평 이씨
배우자전주 이씨 부인
자녀박종의, 박종채, 박종간
친척친조부: 박필균
손자: 박주수
박규수
박선수
외조부: 이창원
장인: 이보천
처숙부: 이양천
처숙부: 이군문
삼종형: 박명원
족질: 박종경
족손: 수빈 박씨
관력
정당노론 잔존 후예 중 낙론 예하 북학파 세력
관직충청도 면천군 군수
임기1797년 ~ 1801년
군주정조 이산
순조 이공

2. 생애

1737년(영조 13년) 3월 5일 (음력 2월 5일) 한성부에서 태어난 박지원은 조선 후기의 저명한 학자이자 문신이다. 본관은 반남 박씨이며, 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 는 연암(燕巖), 연상(煙湘), 열상외사(洌上外史)이고, 시호는 문도(文度)이다.[8][9][10][11]

박지원은 노론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당쟁에 휩쓸리지 않고 학문 연구와 저술에 힘썼다. 1765년 일부러 과거에 합격하지 않고 이후 과거를 피했다. 그는 성리학에 얽매이지 않고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북학파의 영수였다. 홍대용, 박제가 등과 교류하며 중상주의를 강조하고, 민중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했다.

1786년 음서로 선공감 감역이 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789년 평시서주부·사복시주부, 1791년 한성부판관, 1792년 안의현감, 1797년 면천군수, 1800년 양양부사 등을 역임했다. 안의현감 재직 중 북경 여행을 다녀왔으며, 면천군수 재직 중 《과농소초》,《한민명전의》, 《안설(按說)》 등의 저서를 남겼다.

1780년 삼종형을 따라 청나라를 방문한 경험을 바탕으로 《열하일기》를 저술하여 조선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진보적인 사상은 성리학 중심의 조선 사회에서 멸시와 비판을 받았으며, 그의 문체는 정조문체반정 대상이 되기도 했다.

1800년 정조가 사망하고 1801년 노론 벽파가 집권하자, 박지원은 관직에서 물러났다. 1803년 중풍으로 몸이 마비되었으며, 1805년 10월 20일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는 경기도 장단군 송서면 대세현에 있다.

2. 1. 출생과 가계

1737년(영조 13) 3월 5일(음력 2월 5일) 한양 서부(西部) 반송방(盤松坊 : 야동(冶洞))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반남(潘南)이다.[8][9][10][11] 아버지는 박사유이며, 어머니는 함평이씨(咸平李氏)로 이창원(李昌遠)의 딸이다. 위로 형 박희원과 누나 두 명이 있었다.

5대조 박미(朴瀰)의 동생 박의(朴漪)의 아들은 현석 박세채소론의 거물이었다. 그의 집안은 서인 당원이었으나 숙종노론소론으로 갈리면서 가문도 나뉘었고, 박세채는 소론을 선택하였다. 영조 때의 성리학자인 여호 박필주는 그의 재종조부였다. 할아버지 박필균은 당쟁에 초연했고, 연암 역시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당쟁에서 거리를 두었다.

1739년 형 박희원이 장가 들었다. 형수 이씨는 16세에 시집와서 어린 시동생인 박지원을 돌보았다. 1741년 4세 때 경기도 관찰사로 부임하는 할아버지 박필균의 임지에 따라갔다가 되돌아왔는데, 한번 본 감영의 모양과 칸수를 모두 말하여 신동이라 칭찬받았다.

2. 2. 유년 시절과 교육

1737년(영조 13) 3월 5일(음력 2월 5일) 한양 서부 반송방(야동)에서 박사유와 함평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노론 명문가였으나, 아버지 박사유는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가난하게 살았기에, 할아버지 박필균이 주로 양육했다.[12] 할아버지 박필균은 붕당에 관심이 없어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았고, 연암 역시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당쟁에서 거리를 두었다.

1739년 형 박희원이 장가들어, 16세의 형수 이씨가 어린 박지원을 돌보았다. 1741년 4세 때 경기도 관찰사로 부임하는 할아버지 박필균을 따라갔다가 돌아왔는데, 한번 본 감영의 모양과 칸수를 모두 말하여 신동이라 칭찬받았다. 그는 매우 영민하여 암기에 능하였다.

1752년(영조 28) 16세에 이보천의 딸과 결혼했다. 장인에게는 ≪맹자≫를, 처삼촌 이양천에게는 ≪사기≫를 배워 본격적으로 학문을 시작했다.[16] 처남 이재성과는 평생 학문적 교류를 했다. 또한 영조의 부마이자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8촌 형 박명원의 영향을 받아 외부 문물에 관심을 가졌다.

1754년(영조 30년) 우울증과 불면증이 나타나 고생하였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동정했지만, 나중에는 그를 미쳤다고 꺼리거나 피했다. 박지원은 스스로 극복하려 노력했고, 사람들을 청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며 우울증을 고쳐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때 만난 말동무 민유신은 그의 오랜 지기가 되었고, 소설 민옹전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 해, 거지 광문의 입을 빌려 몰인정한 사회를 풍자한 단편소설 광문자전을 썼다.

2. 3. 방황과 학문적 성장

1752년(영조 28) 16세에 처사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다. 장인에게는 ≪맹자≫를, 처삼촌 이양천(李亮天)에게는 ≪사기≫를 배워 본격적인 학문을 시작했다.[16] 처남인 이재성(李在誠)과는 평생의 문우(文友) 관계를 이어갔다.[16] 또한 영조의 부마이자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8촌 형 박명원의 영향을 받아 외부 문물에도 관심을 두었다. 박명원은 자신 외에도 청나라를 견문하고 온 사람들에게서 접한 새로운 사실을 그에게 전해 주었다.

1754년(영조 30년) 우울증과 불면증이 나타나 고생하였다. 처음에는 정신장애인 연암을 동정적으로 보던 이들은 나중에 그를 미쳤다고 하며 꺼리거나 피하였다. 그러나 박지원은 스스로 극복하려 했고, 사람들을 청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울증을 고쳐 보고자 했지만 실패한다. 이때 만난 말동무 민유신은 그의 오랜 지기가 되었는데, 자신의 소설 민옹전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해, 거지 광문의 입을 빌려 몰인정한 사회를 풍자한 단편소설 광문자전을 썼다.

그림작품 묵죽도


그는 장인인 이보천과 처삼촌인 이양천의 문하에서 학문과 글을 배웠다. 장인인 이보천에게서 《맹자》를 중심으로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이보천의 아우 이양천(李亮天)에게서는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하여 주로 역사서적을 교육받고, 짓는 법, 글과 문장 쓰는 법을 터득하고 많은 논설, 고전을 습작하였다. 수년간 이보천과 이양천의 학업에서 문장에 대한 이치를 터득하였다. 처남 이재성(李在誠)은 평생의 친구로 지냈고 동시에 그의 학문에 충실한 조언자가 되어주기도 했다.

1755년 연암의 학문을 지도했던 처삼촌 영목당 이양천이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연암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제영목당이공문(祭榮木堂李公文)'을 지었다. 1756년 〈마장전〉과 〈예덕선생전〉을 지었다. 이 무렵, 김이소, 황승원, 홍문영, 이희천, 한문홍 들과 북한산 봉원사 등을 찾아다니며 공부했다. 봉원사에서 윤영을 만나 그로부터 허생과 변승업 등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는 후일 허생전의 소재가 된다.

22세 때부터 원각사 근처에 살 때 박제가·이서구·서상수·유득공 등과 이웃하여 깊은 관계를 맺었다. 홍대용과도 사귀면서 지구 자전설을 비롯한 서양의 신학문을 배웠으며(30세 때[10]), 북학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방법을 토론하였다. 이후 산사나 강가, 정자를 떠돌며 김이소(金履素) 등 10여 명과 과거 공부에 힘썼다. 1760년 할아버지 박필균이 죽자 생활은 더욱 곤궁하였다.

1761년 초, 요양차 북한산에 들어가 독서에 매진하였는데 이때 삼국지, 수호전을 비롯한 중국의 고전, 일본의 서적 등을 새벽까지 보거나 밤새워 탐독하느라 새치가 돋아나고, 수염이 은백이 되었다고 한다.

1761년 봄, 단릉 처사 이윤영(李胤永)을 찾아가 주역을 배웠고 이 해에 홍대용을 만났다. 그 뒤 과거 시험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그해 성균관사마시험을 치러 들어가서는 답안지에 답 대신 고목이나 노송 등만 그려놓고, 나와 시중의 비웃음을 샀다. 할아버지의 사후 가세는 점점 어려워졌고 집안에서는 그가 과거에 나가기를 원하였다. 이후 각지를 방랑하며 여행하였다. 1764년 충청도에서 효종이 북벌 때 쓰라고 송시열에게 하사했다는 초구를 구경하고 '초구기(貂汨記)'를 썼다.

2. 4. 과거 단념과 북학파 형성

그는 장인인 이보천과 처삼촌인 이양천의 문하에서 학문과 글을 배웠다. 1755년 연암의 학문을 지도했던 처삼촌 이양천이 40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연암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제영목당이공문(祭榮木堂李公文)'을 지었다. 1756년 <마장전>과 <예덕선생전>을 지었다. 이 무렵, 김이소, 황승원, 홍문영, 이희천, 한문홍 들과 북한산 봉원사 등을 찾아다니며 공부했다. 봉원사에서 윤영을 만나 그로부터 허생과 변승업 등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데, 이는 후일 허생전의 소재가 된다.[10]

22세 때부터 원각사 근처에 살면서 박제가,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등과 이웃하여 깊은 관계를 맺었다. 홍대용과도 사귀면서 지구의 자전설을 비롯한 서양의 신학문을 배웠으며, 북학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방법을 토론하였다. 이후 산사나 강가, 정자를 떠돌며 김이소(金履素) 등 10여 명과 과거 공부에 힘썼다. 1760년 할아버지 박필균이 죽자 생활은 더욱 곤궁해졌다.

1761년 초, 요양차 북한산에 들어가 독서에 매진하였는데, 이때 삼국지, 수호전을 비롯한 중국의 고전, 일본의 서적 등을 탐독하였다. 같은 해 봄, 단릉 처사 이윤영(李胤永)을 찾아가 주역을 배웠고, 홍대용을 만났다. 그 뒤 과거 시험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그해 성균관 사마시에 응시하여 답안지에 답 대신 고목이나 노송 등만 그려놓고 나와 비웃음을 샀다. 이후 각지를 방랑하며 여행하였다.

1764년 충청도에서 효종이 북벌 때 쓰라고 송시열에게 하사했다는 초구를 구경하고 '초구기(貂汨記)'를 썼다. 1765년 집안의 염원을 받아들여 영조 46년 과거시험 1차에 장원했으나, 2차 시험에는 백지를 제출하였다. 그해 가을, 친구 김이중(金履中)이 나귀를 팔아 마련해준 돈으로 유언호, 신광온 등 친구들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왔다. 삼일포, 사선정 등 금강산 일대를 두루 돌아보고 '총석정 해돋이(叢石亭觀日出)'를 썼는데, 이 글은 후일 《열하일기》에도 수록되었다. 병조판서를 지낸 홍상한이 이 작품을 격찬했다고 한다. 이후 <김신선전>을 지었다. 이듬해 다시 과거에 응시했지만 낙방했고, 여러 번 낙방한 이후 과거 시험을 단념하고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시문에도 능하였으며 그림 재주도 뛰어나 동리 청년들을 모아 놓고 글과 그림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당색으로는 노론 명가였지만 사회의 부조리와 폐단을 계속 지적한 탓에 그의 답안지는 채택되지 않았다. 그는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 그리고 청나라에 존재한다는 신문물 연구에 전념하게 된다.

당시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 배우고 신기술을 유치해야 하며, 장사는 천한 것이 아니라는 이른바 북학파의 영수가 되어 이용후생의 과학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자유롭고 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여러 편의 한문소설을 발표하였다.

2. 5. 관직 생활과 문체반정

박지원은 유한준과 문학적 견해 차이와 선산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13] 박지원은 유한준의 글이 기교에 치우쳤다고 비판했고, 유한준은 박지원의 저작을 '오랑캐의 연호를 쓴 글'이라며 비난했다.[14] 이들의 갈등은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져,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는 과정록에서 유한준을 '백세의 원수'로 묘사했다.

1777년(정조 1년), 박지원은 권신 홍국영에게 벽파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이듬해 황해도 금천[15] 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하였다. '연암'이란 호는 이 골짜기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16]

1780년(정조 4) 44세 때, 박지원은 삼종형 진하사 박명원을 따라 청나라 북경과 열하를 여행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열하일기》를 저술하여, 청나라의 신문물을 소개하고 이용후생의 실학 사상을 제시했다.[16] 그러나 《열하일기》는 보수파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다.

1786년(정조 10년) 50세 때, 박지원은 음보로 처음 출사하여 선공감 감역에 제수되었다. 1787년 정조의 명을 받아 춘추관기주관으로 <송자대전> 편수에 참여했다. 1789년(정조 13년)에는 평시서주부, 사복시 주부, 금부도사, 사헌부감찰, 제능령을 지냈다.

1790년 금부도사, 사복시 주부, 사헌부 감찰, 제릉령을 거쳐 1791년(정조 15) 한성부 판관을 역임했다. 이후 안의 현감(1791년) · 면천 군수(1797년) · 양양 부사(1800년) 등 지방 수령을 지내며 이용후생론을 실험했다.

과농소초(1798년)


안의현감 부임 직후, 정조남공철을 통해 박지원에게 《열하일기》의 문체를 문제 삼아 순정한 글을 지어 바치라고 명령했다.[16] 1792년 정조가 다시 문체반정을 명하자, 박지원은 남공철에게 속죄하는 내용의 답서를 보냈다.

1798년 왕명을 받아 농서 2권, 《과농소초》를 지어 정조에게 바쳤다. 1800년(정조 24년) 8월 양양 부사가 되었으나, 정조 사후 1801년 사직했다.

2. 6. 은퇴와 죽음

1800년(정조 24년) 8월 양양부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해 정조가 죽고 1801년 관내의 신흥사의 승려들이 궁속과 결탁, 폐단을 끼치자 노론벽파가 집권했음에도 치사(致仕)하고 물러났다.

1803년 중풍으로 몸이 마비되어 글을 짓지 못하였다. 1805년(순조 5년) 10월 20일 한성부 가회방(嘉會坊)의 재동(齋洞) 자택에서 깨끗하게 목욕시켜 달라는 유언만을 남긴 채 69세로 세상을 떠났다.[16] 12월 5일 선영이 있는 경기도 장단 송서면의 대세현(大世峴)에 장사 지냈다.

손자 박규수
(북학파 사상을 개화파에게 계승시킨다.)


그의 묘는 경기도 장단군 송서면(松西面) 대세현(大世峴)에 있다.

3. 사상

박지원은 노론 출신이었으나, 북학파를 세워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홍대용과 함께 지구가 둥글다는 지구설과 지전설을 주장하여 주자학의 전통적인 우주관에 도전했다. 또한, 양반 계급의 특권과 횡포를 비판하고, 신분제에 얽매이지 않는 평등한 인간관계를 강조했다.


  • 북학(北學):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조선 사회를 개혁하고자 한 사상이다. 상업공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상주의를 주장하며, 수레 사용과 도로 정비를 통해 민중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양반 특권 비판: 소설 양반전을 통해 양반 계급의 무위도식과 횡포를 풍자하고, 국력 쇠퇴와 민중 빈곤의 원인이 양반 통치 계급 제도에 있다고 비판했다.
  • 북벌론 비판: 북벌론을 주장하면서도 실질적인 준비를 하지 않는 조선 양반 관료들의 무능함을 비판하고, 청나라의 발전된 기술을 목격한 후에는 북벌론이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 신분제 비판: 서얼 차별을 비판하고 능력에 따른 균등한 인재 등용을 주장했으며, 평민에게도 교육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자연과학: 홍대용과 함께 지구설, 지전설을 주장하여 주자학의 지방지정설(地方地靜說)에 반대했다. 신과 귀신은 허황된 것이며 자연은 스스로 움직인다고 보았다. 유교의 천주재설(天主宰說)을 비판하고, 자연은 자연필연성을 가지며 목적의지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물질적 (氣)의 존재를 주장했다.


박지원의 사상은 당시 조선 사회의 주류 사상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그의 현실 인식과 개혁 의지는 조선 후기 실학 사상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3. 1. 이용후생(利用厚生)

利用厚生중국어은 백성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고 나라에 보탬이 되게 하는 것을 뜻한다. 박지원은 학문이 실생활에 유용하게 쓰이지 못한다면 그 학문은 죽은 학문이라 보았다. 그는 "글을 읽고서 실용을 모르면 그것은 학문이 아니다. 학문이 귀한 것은 그의 실용에 있으니, 부질없이 인간의 본성이니 운명이니 하고 떠들어대고 이(理)와 기(氣)를 가지고 승강질하면서 제 고집만 부리는 것은 학문에 유해롭다."라고 지적하였다.[13] 그는 학문은 인간의 실생활에 보탬이 되는 학문이 진정한 학문이라 하였다.

그는 학문 공부의 목적을 유민익국(裕民益國)과 利用厚生중국어이라 하였다. 유민익국의 요체로서 생산력의 발전을 급선무라고 인식하고, 생산력의 발전을 위해서는 북(北), 즉 청나라에서 선진 기술을 배울 것을 주장했다. 그는 "그것이 백성들에게 유익하고 국가에 유용할 때에는, 비록 그 법이 오랑캐로부터 나왔다 할지라도 주저없이 배워야"하며 "다른 사람이 열 가지를 배울 때에는 우리는 백 가지를 배워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나라 백성들에게 이익을 주어야 한다."라고 했다. 인간에게 이롭게 하지 못하는 학문은 학문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라 평하였다.[14]

열하일기》에서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여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개혁하고 풍요하게 하기 위한 이용후생론을 제시하며, 조선 사회의 편견과 타성의 폐단을 예리하게 분석하여 그 개선책을 강구하였다. 또한 북벌론을 말하면서도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음을 꾸준히 지적하였다.

청나라로부터 괘종시계, 태엽시계, 자명종, 망원경, 안경 등을 본 뒤로 그는 조선의 수준으로 청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히려 청나라의 선진 기술을 받아들인 뒤 실력을 양성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편이 옳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그의 견해는 당시의 배청의식(排淸意識) 속에서 수용되기는 어려웠다. 그의 안의현감 시절은 열하 여행의 경험에서 본 것으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하였으며, 면천군수 시절에는《과농소초》·《한민명전의》·《안설》 등을 저술하였다.

3. 2. 북학(北學)

박지원은 노론임에도 열하와 베이징을 여행하고 돌아온 후 청나라와 서구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서구의 문물과 청나라의 기술 중 성곽 축조, 제련 기술 등을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상행위를 천시할 것이 아니라 상업과 무역을 적극 장려하고 무역항을 개설해야 하며 화폐를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수많은 동지들을 규합하고 문하생을 길러내 노론 내에서도 북학파라는 학파 및 정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문하생에 양반, 중인, 서자를 차별하지 않고 학문을 배우려는 자는 모두 받아들였다. 그는 서얼을 차별하는 것은 잘못이며 능력과 실력에 따른 균등한 인재 등용을 주장하였다.

그는 선대에 조광조, 이이, 송시열이 서자들도 요직에 등용할 것을 건의했던 점을 지적하며, 서자들에게도 관직에 나아갈 길을 주고 실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서얼 차별에 대해 '서자를 금고하는 것은 왕조를 세운 초기에 어떤 좀스러운 신하가 기회를 타서 앙갚음한 데 지나지 않는다.'며 서얼을 차별할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 또한 평민에게는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지만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환경을 지적하며, 나라에서 평민 자제들을 서당에 보낼 것을 역설하였다.

3. 3. 양반 특권 비판

그는 소설 양반전을 써서 양반의 특권과 횡포를 신랄하게 풍자했다.[21] 그는 국력의 쇠퇴, 민중의 극단적인 빈곤의 근본 원인이 양반 통치 계급 제도에 있다고 생각하여, 양반 계급의 실상을 폭로하고 비판하기 위해 양반전을 썼다. 그에 의하면 양반은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해도 거리낄 것이 없으며, 선비, 글공부라는 핑계 하에 국력에 해를 입히는데도 죄를 묻지 않는 이상한 존재라는 것이다.

'하늘이 백성을 낳았는데 그 백성이 넷이다. 그 중 으뜸은 사(士)로다. 양반이라고도 일컬으며 이익이 이보다 큰 것이 없다. 밭을 갈지 않고 장사를 하지 않으며, 글과 역사를 조금만 공부하면 크게는 문과에 합격하고 적어도 진사가 된다. 문과의 홍패는 두 자에 지나지 않지만 온갖 물건을 얻을 수 있으니 돈자루라고도 할 수 있다. 진사는 40세에 첫 벼슬을 해도 큰 고을의 남항(南行, 음직, 음서 제도와 같은 말로. 학식과 덕행이 특출하여 추천되었거나, 가문 덕에 하는 벼슬) 수령으로 가서 잘만 풀리면 귀가 양산 그늘에 휘어지고, 배는 종놈의 대답 소리에 저절로 불러지고, 방에는 노리개로 기생을 두고, 뜰에는 명학을 기른다.[21]'중국어며 양반의 무위도식을 조롱했다.

또한 시골의 선비, 혹은 낙향해서 생활하는 선비들에게도 풍자를 가하였다. '궁한 선비가 시골에 살더라도 꺼리낄 것이 없다. 이웃 소를 함부로 가져다가 먼저 밭을 갈고 마을 사람들을 함부로 불러다가 김을 매도 누가 감히 거역하겠는가? 네 코에 재를 붓고, 뜨거운 물을 붓고, 함부로 상투를 꺼들고, 수염을 뽑아도 감히 거역하지 못한다.[21]'중국어고 하였다. 정쟁에서 초연하거나 불의를 보고 낙향한 것처럼 행세하던 선비들 역시 낙향한 시골에서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면서 고결함을 가장한 위선을 질타하였다.

그는 인간관계가 엄격하게 신분제에 의해 규제되고 게다가 양반사회는 당론(黨論)으로 분열되어 있으며 이는 인간을 바로 보는 데 장애가 된다고 하였다. 그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자유로운 교제에 바탕을 둔 평등 윤리로서의 우정이 실현되기 어렵다며 신분과 붕당과 사상의 편견을 버리고 인간으로서 대할 것을 주장했다.

3. 4. 북벌론 비판

그는 북벌론을 주장하면서도 아무런 대책이 없는 조선의 양반 관료들을 비판하고, 복수설치(復讐雪恥)의 대의를 위해 아무도 준비하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나중에는 북벌론 자체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된다.

그는 조선 양반들이 복수설치를 외치면서도 무(武)를 천시하는 점, 병력을 양성하지 않는 점,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지 않는 점, 붕당정치에 몰두하여 음모로써 상대 정파를 제거하려 하는 점, 전쟁이나 유사시 피난 가는 데 장애가 되는 넓은 소매에 긴 옷자락을 가진 옷, 불필요하게 격식을 갖춘 복식 등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수용되지 않았고, 나중에는 북벌론 자체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갖게 된다.

청나라에서 괘종시계, 안경, 지구본, 망원경, 톱니바퀴 태엽으로 움직이는 시계와 기구를 목격한 이후에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기술도 뒤떨어진 조선의 북벌론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병자호란정묘호란으로 인해 조선에서는 반청 감정이 팽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지원은 청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주창했다.[3]

박지원은 청나라로부터 배우자는 사상을 주창했다. 당시 조선인들은 청나라에 머리를 숙이면서도 내심으로는 소중화 사상에서 비롯된 야만인으로 멸시했으며, 양반들은 "조선이야말로 명나라의 정통 계승자"라고 인식했다. 그러나 청나라를 야만인으로 여기는 풍조에서는 나올 수 없는 사상을 박지원이 만들어낸 것은, 그 자신이 양반으로부터 소외되었기 때문이다.[5] 하지만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음에도, 성리학에 반하는 사상이라는 이유로 멸시와 비판을 받아들여지지 못했다.[3]

3. 5. 신분제에 대한 비판

그는 노론임에도 열하와 베이징을 여행하고 돌아온 후 청나라와 서구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문하생을 가르칠 때도 양반, 중인, 서자를 차별하지 않고 학문을 배우려는 자를 모두 받아들였다. 그는 서얼을 차별하는 것은 잘못이며 능력과 실력에 따른 균등한 인재 등용을 주장하였다.

그는 선대에 조광조, 이이, 송시열이 서자들도 요직에 쓸 것을 건의했던 점을 계속 지적, 상소하여 서자들에게도 관직에 나갈 길을 줄 것과 실력에 따른 인재 등용을 주장하였다. 서얼 차별에 대해 그는 '서자를 금고하는 것은 왕조를 세운 초기에 어떤 좀스런 신하가 기회를 타서 앙갚음한데 지나지 않는다.'며 서얼을 차별할 이유가 없다고 부르짖었다. 또한 평민에게는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지만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환경을 지적하여 평민들에게도 과거를 보도록, 나라에서 서당에 보낼 것을 역설하였다. 그는 저서 『양반전』에서 조선의 유학자, 지식인, 양반을 통렬하게 풍자했지만, 양반이나 지식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1][2]

3. 6.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

홍대용과 함께 땅이 평평하지 않고 원형이라는 설을 주장했다. 그는 홍대용과 함께 지구설(地球說)·지전설(地轉說)을 주장해 주자학에서의 지방지정설(地方地靜說)에 반대했다. 그는 지구가 평평한 평지가 아니라 거대한 원형일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땅은 하나의 먼지와 흙으로 구성된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는 세계는 천체로부터 자연 만물에 이르기까지 객관적으로 실재하며, 티끌이라는 미립자가 응취결합(凝聚結合)하고 운동·변화하는 과정에서 우주만물이 생성된다고 주장했다. 지구가 둥근 원형이라는 박지원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신과 귀신은 허황된 것이며 자연은 스스로 움직일 뿐이라고 하였다. 유교의 천주재설(天主宰說) 역시 미신이라며 비판하고, 자연은 자연필연성을 가지고 자기운동을 할 따름이며, 그 어떤 목적의지도 없다고 했다. 또한 신비적인 참위설(讖緯說)과 오행상생상극설(五行相生相克說)에 반대했다. 그는 이런저런 재앙을 귀신의 진노로 보던 것을 허황되다고 비판했다. 그는 하늘이 어떤 뜻을 가지고 인간의 도덕적 행동에 감응한다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과 인과 응보론에도 반대했다. 천인감응설과 인과 응보론 같은 것도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물질적 (氣)의 존재를 주장했다. 그는 "만물이 발생함에서 무엇이나 기 아닌 것이 없다. 천지는 커다란 그릇이다. 차 있는 것은 기이며 차는 까닭은 이(理)이다. 음과 양이 서로 작용하는 그 가운데 이가 있으며 기로써 이를 싸는 것이 마치 복숭아씨를 품은 것과 같다."라고 했다. 만물의 근원은 어떤 기이고, 이는 그 가운데 내포되어 있는 기의 움직임의 변화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는 또 감각의 원천은 객관적 외부세계이며, 감각, 촉각, 의식 등은 어떤 사물이 객관적 외부세계를 느끼는 것, 감각 기관에 작용한 결과 발생한다는 견해를 선보이기도 했다.

4. 문학

박지원은 자유롭고 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당대 양반 계층의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함으로써 많은 파문과 영향을 끼쳤다. 기존의 시, 부, 문체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글을 썼으며, 열하일기를 비롯하여 청나라일본을 다녀온 후 본 장면과 풍경을 그대로 기술하였다. 죽은 누나의 행장을 쓸 때는 부덕이나 현모양처임을 강조하는 대신 어린 시절 자신이 누나에게 서운한 일이 있어 누나의 화장품에 물을 타서 장난친 일 등을 기록하는 등, 형식과 틀에 얽매이지 않은 수필과 각종 글을 발표하였고, 글씨체 역시 기존의 서체에 구애받지 않았다.

1791년(정조 15년) 안의현감 부임 직후 정조남공철을 통해 《열하일기》를 문체 타락의 장본인으로 지목하고 순정한 글을 지어 바치라 명령했으나, 박지원은 직접 응하지 않았다.[16] 1792년 정조가 다시 문체반정을 명하며 남공철을 통해 순정문(醇正文)으로 지을 것을 명하자, 남공철에게 속죄하는 내용의 답서를 보냈는데, 정조는 그의 편지를 보고 문장에 감탄하였다. 1793년 정조는 《열하일기》로 잘못된 문체를 퍼뜨린 잘못을 속죄하라고 하교하였고, 박지원은 '답남직각공철서(答南直閣公轍書)'를 써서 왕의 문책을 받은 처지로 새로 글을 지어 글로써 만든 과거 잘못을 덮으려 하는 것은 오히려 누가 되는 일이라고 답했다.

4. 1. 문학관

박지원의 문학 정신은 '법고창신(法古創新)'으로 요약할 수 있다. “옛것을 본받되 변화를 알고 새롭게 지어내라”는 의미이다. 그는 문학의 참된 정신은 변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창조적인 글을 쓰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비슷하게 되려는 것은 참이 아니며, ‘닮았다’고 하는 말 속엔 이미 가짜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연암은 억지로 점잖은 척 고상한 글을 써서는 안 되며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대상을 참되게 그려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틀에 박힌 표현이나 관습적인 문체를 거부하고 그만의 독특한 글투를 지향했다. 이러한 그의 글쓰기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연암체’라고 불렀다. 나아가 옛날 저곳이 아닌 지금 여기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중국이 아닌 조선을, 과거가 아닌 현재를 이야기할 때 진정한 문학 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일러 ‘조선풍(朝鮮風)’이라고 하는데 ‘조선의 노래’란 뜻이다.[16]

그는 자신의 실학 사상을 소설을 통해 생생하게 제시하고 있다.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양반들이 실속 없이 허울 좋은 이름만 내세우는 것을 미워하여 10편의 한문 소설을 지어 독특한 해학으로써 이들을 풍자하였다. 〈양반전〉은 조선 왕조 봉건사회의 와해와 그 속에서 군림하는 사(士) 계급의 올바른 개념을 정립하고 있으며, 〈허생전〉은 북벌론의 허위의식을 배격하면서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또한 〈광문자전(廣文者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등은 양반 계층과 도학자의 도덕적 위선을 신랄하게 풍자하여 사회 개혁 의식을 제시하고 있다.

자유로운 성정(性情)을 표현하기 위해 신문체를 수립함으로써 이덕무, 박제가 등의 한학신파의 4가를 낳게 했으며, 문학을 통해 양반 계급의 해체를 통찰하고 이를 비판, 새로운 현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의 문학은 공리공론을 배격하고 사실주의 문학을 수립했다. 청나라 문인들과 교류하며 정치·음악·천문·경의(經義) 등에도 관심을 갖고 연경에 갔다 온 기행을 쓴 《열하일기》 26권을 썼다. 그가 쓴 또 다른 책인 <상기>는 그가 열하행궁에서 코끼리를 본 경험을 통해 고정된 관념에서 대상을 인식하는 것의 위험성을 하늘의 이치에 관한 통념에 대한 논리적 반박을 문답법을 이용해 입증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허생전(許生傳)>, <양반전(兩班傳)>, <호질(虎叱)>, <민옹전(閔翁傳)>, <광문자전(廣文者傳)>, <마장전>, <우상전(虞裳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김신선전(金神仙傳)>,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 등의 단편 소설을 창작하였는데, 비록 그 표기가 한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리얼리즘 소설의 빛나는 걸작들이다.

그는 <양반전>을 통해 몰락해 가는 조선 사회를 풍자했으며, <호질>에서 유학자의 전형적인 위선을, <민옹전>에서 몰락해 가는 무인들의 울분을 반영하여 당시 사회의 이면사(裏面史)가 되어준다. <허생전>에서는 전시대의 허균이 쓴 《홍길동전》과 함께 현실과 유토피아 세계를 교착시키며 날카로운 사회비판의 작가정신을 보여주었다. 그의 소설은 근대적 비판 의식의 소산으로, 여러 가지 인간 유형을 통해 리얼리즘의 전통을 이룩하였고, 독특한 풍자와 해학으로써 양반 계급의 무능과 위선을 고발하는 등 사실적 문체를 구사하여 문체 혁신의 표본이 되었다.[23]

4. 2. 작품 세계

저서 중 하나인 연암집


박지원의 문학 정신은 '법고창신(法古創新)', 즉 "옛 것을 본받되 변화를 알고 새롭게 지어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문학의 참된 정신은 변화를 바탕으로 창조적인 글을 쓰는 데 있다고 보았다. 비슷하게 흉내 내는 것은 참이 아니며, '닮았다'는 말 속에는 이미 가짜가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박지원은 억지로 점잖은 척하는 글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대상을 그려내야 한다고 주장하며, 틀에 박힌 표현이나 관습적인 문체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글투, 즉 '연암체'를 추구했다. 또한, 중국이 아닌 조선, 과거가 아닌 현재를 이야기해야 진정한 문학 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이를 '조선의 노래'라는 뜻의 '조선풍(朝鮮風)'이라고 불렀다.[16]

그는 자신의 실학 사상을 소설을 통해 제시했다. 양반 가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양반들의 허울뿐인 모습을 비판하며 10편의 한문 소설을 지어 해학적으로 풍자했다. 〈양반전〉은 조선 봉건사회의 와해와 사(士) 계급의 올바른 개념을 정립하고 있으며, 〈허생전〉은 북벌론의 허위의식을 비판하고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광문자전(廣文者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등은 양반 계층과 도학자의 도덕적 위선을 풍자하여 사회 개혁 의식을 보여준다.

박지원은 자유로운 성정(性情)을 표현하기 위해 신문체를 수립하여 이덕무, 박제가 등 한학신파 4가를 낳게 했으며, 문학을 통해 양반 계급의 해체를 통찰하고 비판하며 새로운 현실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의 문학은 공리공론을 배격하고 사실주의 문학을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청나라 문인들과 교류하며 정치, 음악, 천문, 경의(經義) 등에도 관심을 가졌고, 연경에 다녀온 기행을 쓴 《열하일기》 26권을 남겼다. <상기>에서는 코끼리를 본 경험을 통해 고정관념의 위험성을 하늘의 이치에 관한 통념에 대한 논리적 반박을 문답법을 이용해 입증한다.

그는 <허생전(許生傳)>, <양반전(兩班傳)>, <호질(虎叱)>, <민옹전(閔翁傳)>, <광문자전(廣文者傳)>, <마장전>, <우상전(虞裳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김신선전(金神仙傳)>,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 등의 단편소설을 창작했는데, 이는 한국 리얼리즘 소설의 빛나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양반전>에서는 몰락해 가는 조선 사회를 풍자했고, <호질>에서는 유학자의 위선을, <민옹전>에서는 몰락해 가는 무인들의 울분을 반영하여 당시 사회의 이면사(裏面史)를 보여주었다. <허생전>은 허균의 《홍길동전》과 함께 현실과 유토피아 세계를 결합하여 날카로운 사회 비판 의식을 보여준다. 그의 소설은 근대적 비판 의식의 산물로, 다양한 인간 유형을 통해 리얼리즘의 전통을 이룩했고, 독특한 풍자와 해학으로 양반 계급의 무능과 위선을 고발하는 등 사실적 문체를 구사하여 문체 혁신의 표본이 되었다.[23]

조선 영조 13년 3월 5일 서울의 명문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박지원은 보수화된 조선 유교를 비판한 실학자 중 한 명이다.[1] 저서 『양반전』에서 조선의 유학자, 지식인, 양반을 풍자했지만, 양반이나 지식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2]

병자호란정묘호란으로 인해 반청 감정이 팽배했음에도, 박지원은 청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3] 당시 조선인들은 소중화 사상에 따라 청나라를 야만인으로 멸시하고, 양반들은 "조선이야말로 명나라의 정통 계승자"라고 인식했지만, 박지원은 이러한 풍조와 달리 청나라로부터 배우자는 사상을 주장했다. 이는 박지원 자신이 양반으로부터 소외되었기 때문이라고 분석된다.[5] 그러나 그의 주장은 성리학에 반하는 사상으로 여겨져 받아들여지지 못했다.[3]

저서로는 북경 사행(조선 연행사) 수행 시의 기행문 『열하일기』가 있다. 건륭제 말년에 황제의 별장이 있는 동북부 열하(현재의 청더시)로 향한 기록이다. 이씨 조선 시대의 기행문을 모은 『해행총재』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김태준은 저서 『조선한문학사』(1931년)에서 조선 통신사에도 시대 일본으로 건너간 신유한의 『해유록』과 함께 "조선 기행 문학의 쌍벽"으로 꼽았다.[6]

박지원은 유학자, 의사, 무당을 비판하며 양반을 조롱하는 작품을 썼다. 대표적인 단편 소설은 다음과 같다.

  • 『양반전』
  • 『허생전』
  • 『호질』

4. 3. 대표작


  • 열하일기 (1780-1793) : 호질, 허생전 수록
  • * 리상호 역, ''열하일기''. 보리. 1780-1793/1955/2004
  • * 김혈조 역, ''열하일기''. 돌베개. 1780-1793/1955/2009
  • * 고미숙, 길진숙, 김풍기 역,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상),(하)''. 그린비. 1780-1793/2008
  • 연암선생 서간첩 (1796-1797)
  • * 박희병 역,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 돌베게. 1796-1797/2005
  • 과농소초 (課農小抄, 1799)
  • * 최홍규 역, ''국역 과농소초''. 1799/1987.
  • 과정록 (過庭錄, 1826) : 차남 박종채가 쓴 박지원 평전
  • * 김윤조 역주, ''역주 과정록''. 태학사. 1826/1997
  • * 박희병 역, ''나의 아버지 박지원''. 돌베게. 1826/1998
  • 연암집 (1900년 초간) : 양반전 수록
  • * 신호열/김명호 역, ''연암집''. 돌베게. /1900/2007
  • * 홍기문 역, ''나는 껄껄 선생이라오''. 보리. /1900/2004
  • 한민명전의 (限民名田義)


=== 주요 문학작품 ===

  • 마장전 (馬駔傳)
  • 민옹전 (閔翁傳)
  • 양반전 (兩班傳)
  • 예덕선생전 (穢德先生傳)
  • 허생전 (許生傳)
  • 호질 (虎叱)
  • 우상전 (虞裳傳)
  • 광문자전 (廣文者傳)
  • 열녀함양박씨전 (烈女咸陽朴氏傳)
  • 김신선전 (金神仙傳)
  • 문효세자진향문
  • 홍덕보 묘지명 (홍대용)

5. 평가와 영향

박지원은 노론 출신으로,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북학파를 이끌며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상업과 공업을 중시하는 중상주의를 강조했으며, 이는 당시 조선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은 청나라를 본받아 수레를 사용하고 도로를 정비하여 생필품 유통을 원활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백성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실용적인 방안이었다. 그의 사상은 당시 소중화 사상에 젖어 청나라를 야만시하던 조선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박지원은 10편의 한문소설을 통해 독창적인 문체를 선보였다. 그는 해학적인 표현으로 고루한 양반과 무능한 위정자들을 풍자하며, 문체 혁신의 표본으로 평가받았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열하일기》, 《허생전》 등이 있다.

그의 저서와 학문은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5. 1. 당대의 평가

당시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북학파의 영수가 되어 이용후생의 과학을 강조하였으며, 자유롭고 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여러 편의 한문소설을 발표하였다. 그는 작품에서 아무 실속 없이 양반이라는 자존심에 사로잡혀 허세 부리는 자들을 조롱하고, 힘써 일하지 않는 게으른 풍조를 지적했다. 또한 당시의 양반 계층의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자신의 작품에 실음으로서 논란거리가 되고 많은 파문과 영향을 끼쳤다.[16]

박지원은 다른 사람과 쉽게 타협을 할 줄 몰랐던 성격이었다. 김기순은 박지원에 대해 "연암은 순수한 양기를 타고 나서 반 푼의 음기도 섞여있지 않으니, 지나치게 고상해서 매양 부드럽게 억누르는 공력이 모자라고, 지나치게 강해서 항상 원만한 면이 부족했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박지원 자신도 "일생 동안 이런 저런 험한 꼴 다 겪은 것은 모두 내 성격 탓이다.", "이는 내 타고난 기질의 병이라서 바로잡으려고 한 지 오래되었지만 끝내 고치지 못했다."라고 인정하고 있다.

병자호란정묘호란으로 인해 조선에서는 반청 감정이 팽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지원은 청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주창했다.[3] 당시 조선인들은 청나라를 야만인으로 멸시했으며, 양반들은 "조선이야말로 명나라의 정통 계승자"라고 인식했지만, 박지원은 청나라를 야만인으로 여기는 풍조에서는 나올 수 없는 사상을 만들어냈다. 이는 박지원 자신이 양반으로부터 소외되었기 때문이다.[5] 그러나,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창했지만, 성리학에 반하는 사상이라고 멸시와 비방을 받아들여지지 못했다.[3]

김태준은 저서 『조선한문학사』(1931년)에서, 조선 통신사에도 시대의 일본으로 건너간 신유한의 『해유록』과 함께 "조선 기행 문학의 쌍벽"으로 꼽았다.[6]

5. 2. 후대의 평가

박지원은 노론이었으나,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청나라의 우수한 점을 배워 백성들의 삶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상업과 공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상주의를 내세웠다. 이를 북학파라고 한다. 그의 제자로는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이 있다.[19] 손자 박규수는 북학파 사상을 개화파에게 계승시켰다.[19]

박지원은 청나라로부터 배우자는 사상을 주창했다. 당시 조선인들은 청나라에 머리를 숙이면서도 속으로는 야만인으로 멸시했지만, 박지원은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리학에 반하는 사상으로 여겨져 멸시와 비판을 받았다.[3]

그의 문집 《연암집》은 1900년에야 초록 형태로 처음 서울에서 간행될 만큼 늦게 출판되었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에야 그의 저서와 학문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19]

홍대용, 박제가와 함께 북학파의 영수로 청나라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또한 10편의 한문소설을 통해 독특한 해학으로 고루한 양반과 무능한 위정자를 풍자하는 등 독창적인 사실적 문체를 구사하여 문체 혁신의 표본이 되었다.

5. 3. 현대적 의의

홍대용, 박제가와 함께 북학파의 영수로 청나라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10편의 한문소설을 써 독특한 해학(諧謔)으로 고루한 양반, 무능한 위정자를 풍자하는 등 독창적인 사실적 문체를 구사하여 문체 혁신의 표본이 되었다. 조선 영조 13년 3월 5일에 서울의 명문 양반 자제로 태어났다. 보수화된 공론의 조선 유교를 비판한 두 명의 조선 실학자 중 한 명이다.[1] 저서 『양반전』에서 조선의 유학자, 지식인, 양반을 통렬하게 풍자했다. 그러나 양반이나 지식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2]

청나라침략 전쟁병자호란정묘호란으로 인해, 이씨 조선에서는 반청 감정이 팽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청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주창했다.[3]

이처럼 박지원은 청나라로부터 배우자는 사상을 주창했다. 당시 조선인들은 청나라에 머리를 숙이면서도, 내심으로는 소중화 사상에서 비롯된 야만인으로 멸시했으며, 양반들은 "조선이야말로 명나라의 정통 계승자"라고 인식했지만, 청나라를 야만인으로 여기는 풍조에서는 나올 수 없는 사상을 박지원이 만들어낸 것은, 박지원 자신이 양반으로부터 소외되었기 때문이다.[5] 그러나,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창했지만, 성리학에 반하는 사상이라고 멸시와 비방을 받아들여지지 못했다.[3]

저서로 북경 사행(조선 연행사) 수행 시의 기행문 『열하일기』가 있다. 건륭제 말년에, 황제의 별장이 있는 동북부 열하(현재의 청더시)로 향한 기록이다.

이씨 조선 시대의 기행문을 모은 『해행총재』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김태준은 저서 『조선한문학사』(1931년)에서, 조선 통신사에도 시대의 일본으로 건너간 신유한의 『해유록』과 함께 "조선 기행 문학의 쌍벽"으로 꼽았다.[6]

6.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고조부박세교
종증조부박태두성리학자, 박필주의 아버지
재종조부박필주
박필하(朴弼夏)
삼종숙박사익(朴師益)박홍수의 증조부[24]
박사정(朴師正)영조의 부마 박명원의 아버지
삼종형박명원화평옹주(和平翁主)의 부군
증조부박태길
종조부박필린(朴弼鄰)
대고모반남 박씨
반남 박씨
대고모부이사주(李師周)
김서린(金瑞麟)
할아버지박필균(朴弼均)? - 1760년 8월, 돈령부지사 역임, 시호는 장간
할머니여주 이씨? - 1761년
삼촌박사헌(朴師憲)
박사근(朴師近)당숙(박지원의 재종조부)인 박필주의 양자로 감
사촌박진원(朴進源)
박수원(朴綏源)
반남 박씨
사촌 매부황형(黃馨)
고모반남 박씨
고모부어용림(魚用霖)
고종사촌함종 어씨
어재소(魚在沼)
어재운(魚在雲)
고종사촌 매제박홍수(朴弘壽)8촌 형 박대원의 손자
아버지박사유(朴師愈)1703년 - 1767년 6월
어머니함평 이씨(咸平李氏)1700년 - 1759년 10월, 이창원(李昌遠)의 딸
박희원(朴喜源)1730년 - 1787년[25]
형수전주 이씨? - 1778년 7월 25일, 이동필(李東馝)의 딸, 중종의 서자 덕양군의 후손
누나반남 박씨
반남 박씨
매부이현모(李顯模)
서중수(徐重修)
부인전주 이씨? - 1787년 1월, 이보천의 딸
반남 박씨1759년 - 1788년
사위이종목(李鍾穆)
첫째 아들박종의(朴宗儀)1766년 - 1815년[26], 박희원의 양자로 입적[25]
며느리전주 이씨? - 1787년
둘째 아들박종채(朴宗采)1780년 - 1835년[27]
손자박규수(1807년 - 1877년)박종채의 장남
박주수
박선수1822년 - 1899년
장인이보천
처남이재성(李在誠)열하일기중존(仲存)이라는 자로 논평을 달음
외할아버지이창원(李昌遠)
처삼촌이양천
삼종형박명원(朴明源)
친족박준원
친족수빈 박씨정조의 후궁, 순조의 생모


7. 기타

박지원의 본관은 반남이며, 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 는 연암(燕巖), 연상(煙湘), 열상외사(洌上外史)이고, 시호는 문도(文度)이다.[8][9][10][11] 그는 노론이었으나, 북학파(北學派)를 세워 그 영수가 되었다.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청나라의 우수한 점을 배워 민중들의 삶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상업공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상주의를 내세웠다.

파격적인 글쓰기로 '문체반정(文體反正)'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그는 승려들과도 교류했다. 연암과 경윤이라는 스님의 대화에서, 스님은 몇 대에 걸쳐 다듬은 승안사 미륵불을 완성하자마자 다시 없었던 일로 한다고 했다.[17] 천상 영감을 닮은 천하태평 인간의 모습으로 만들었으나, 부처는 부처답기를 바라는 대중들이 그 인간 모양의 미륵불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17]

음식의 맛을 즐기는 것을 좋아하여, 눈 내리고 찬바람 부는 가을과 겨울에 야외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식도락 모임인 '난로회'를 만들기도 했다. 또한 제자들에게 손수 밥을 지어 먹이기도 했으며, 고령에도 직접 장을 담그기도 하였다.[28]

병자호란정묘호란으로 조선에 반청 감정이 팽배했음에도, 청의 선진 문물을 적극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 당시 조선인들은 청나라에 굴복하면서도 소중화 사상에 따라 야만인으로 멸시했고, 양반들은 "조선이야말로 명나라의 정통 계승자"라고 여겼다. 그러나 박지원은 양반으로부터 소외되었기 때문에 청을 야만시하는 풍조에서 나올 수 없는 사상을 만들어냈다.[5]

참조

[1] 서적 知の攻略「韓国」 作品社
[2] 서적 明清と李朝の時代 中央公論社 1998-04-01
[3] 뉴스 朴趾源 http://world.kbs.co.[...] KBSワールドラジオ 2011-03-18
[4] 서적 明清と李朝の時代 中央公論社 1998-04-01
[5] 뉴스 老論-植民史観 事大主義と連結された人脈 http://japan.hani.co[...] ハンギョレ 2016-11-02
[6] 논문 1974
[7] 서적 知の攻略「韓国」 作品社
[8] 웹사이트 박지원(朴趾源){1}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http://people.aks.ac[...]
[9] 웹사이트 박지원 http://enc.daum.net/[...] 한국브리태니커회사
[10] 백과사전 실학의 융성 글로벌세계대백과
[11] 백과사전 박지원 http://www.encyber.c[...] 엔싸이버 백과사전 2009-01-17
[12] 문서 사복시정은 사후에 증직된 벼슬이다.
[13] 웹사이트 저암집 http://encykorea.aks[...]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4] 문서 유한준과 박지원의 글쓰기 목표
[15] 웹사이트 금천군(金川郡) https://encykorea.ak[...] 2023-10-05
[16] 웹사이트 연암집 http://zmanz.blogi.k[...]
[17] 뉴스 '엉덩이 뿔 난' 연암 박지원… 현감 생활 4년을 엿보다 http://books.chosun.[...] 조선일보 2011-04-16
[18] 문서 계산서숙
[19] 웹사이트 박지원(朴趾源) http://seoul600.visi[...] 서울특별시 2008-04-22
[20] 웹사이트 표성흠 작가, 4000만원 고료 '연암문학상' 당선 http://www.ohmynews.[...]
[21] 서적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22] 웹사이트 연암집 http://zmanz.blogi.k[...]
[23] 백과사전 한문학과 실학파 글로벌세계대백과
[24] 문서 박사익-박대원-박상로-박홍수
[25] 서적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 돌베게 2006
[26] 서적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 돌베게 2006
[27] 서적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 돌베게 2006
[28] 간행물 문화재사랑 문화재청 20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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