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고쿠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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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센고쿠 시대는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일본에서 일어난 혼란스러운 시대를 일컫는다. 중국 춘추 전국 시대에 비유하여 '전국 시대'로 불렸으며,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가 약해지고 지방 다이묘들이 세력을 다투면서 시작되었다. 오닌의 난은 센고쿠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지며, 다케다 신겐,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주요 다이묘들의 각축전이 벌어졌다. 이 시기에는 조총의 도입으로 군사 전술이 변화하고, 상업이 발달하며, 노예 무역이 성행하는 등 사회·경제적으로 다양한 변화가 일어났다. 센고쿠 시대는 오다 노부나가가 천하 통일을 시도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를 계승하여 임진왜란을 일으키는 등 격동의 시기를 거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개창하면서 종말을 맞이했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다양한 게임, 만화, 드라마 등 문화 콘텐츠가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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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고쿠 시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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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명칭 | 센고쿠 시대 |
다른 명칭 | 전국 시대, 센고쿠 지다이 |
시대 구분 | 일본사, 중세 |
기간 | 1467년 ~ 1615년 |
주요 사건 | 메이오 정변 |
정치 | |
주요 세력 | 센고쿠 다이묘 |
사회 변동 | 하극상 |
주요 봉기 | 잇코잇키 |
주요 관직 | 슈고다이 |
통일 과정 | |
주요 인물 |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
주요 세력 | 호소카와 정권 (1493년 ~ 1549년), 미요시 정권 (1549년 ~ 1568년) |
특징 | 전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천하 통일을 이룬 세 명의 영웅을 삼영걸이라 부른다. |
기타 | |
이전 시대 | 무로마치 시대 |
다음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2. 어원
오닌의 난 이후 혼란했던 세상을 당시 귀족들은 중국의 춘추 전국 시대에 빗대어 '''전국 시대'''(戦国の世|센고쿠노요일본어)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이 센고쿠 시대라는 명칭의 어원이다. 이치조 가네요시는 저서 《초담치요》(樵談治要)에서 '나라의 수호자는 결백하고 정직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수호령국제를 '여러 나라의 국사들이 임기를 마친 뒤에도 자자손손 봉토를 받아 세를 떨치니 춘추 12제후, 전국 칠웅과 같지 않은가'라며 비판했다.[149] 고노에 히사미치의 일기 《고홋쇼지히사미치기》(後法成寺尚通公記, 近衛尚通公記) 에이쇼(永正) 5년 4월 16일조에는 '전국시대처럼(戦国の世の時の如し)'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149]
무로마치 막부 제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교토에서 추방되어 무로마치 막부가 무너진 1573년까지의 시대를 센고쿠 시대라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집권한 이후에도 임진왜란 등으로 전쟁이 계속되었으며, 세키가하라 전투를 끝으로 비로소 전쟁이 끝났다.
다케다 신겐의 《고슈법도차제》(甲州法度次第) 제20조에는 "천하전국(天下戦国)에는 모든 일을 제쳐두고 무구(武具)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내용이 있어, 당시 무사들도 자신들이 살던 시대를 '전국'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에도 시대 베스트셀러인 《일본 외사》(日本外史)에도 '''센고쿠'''라는 표현이 나온다. 권11에 "시간이 흘러 전국에 이르러, 군웅은 각각 사병을 거느리고"라는 구절이 있어, 이후 일본에서도 당대를 센고쿠 시대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한문으로 쓰여진 《일본 외사》에서 '전국'이라는 단어는 의외로 적게 등장한다.
에도 시대 서민들에게 친숙했던 강담(講談)이나 라쿠고(落語) 등에서는 '''겐키·덴쇼 때'''(元亀天正の頃)라는 표현이 일반적이었으며, 일본사의 시대 구분으로서 '''센고쿠 시대'''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게 된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이다.[150]
3. 센고쿠 시대의 전개
오닌의 난(1467년~1477년)은 센고쿠 시대의 서막으로 간주된다. 호소카와 가쓰모토가 이끄는 동군과 야마나 소젠이 이끄는 서군이 교토 근방에서 11년간 교전했고, 전쟁은 곧 다른 구니들로 확산되었다.[9]
이 전쟁으로 교토의 3분의 2가 황폐해졌고, 아시카가 쇼군의 권위가 약해져 각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크게 줄었다.[13] 그리하여 각 지역의 다이묘들이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기 위해 싸운 내전 시대인 센고쿠 시대가 시작되었다.[9][11] 쇼군의 통제력이 약해짐에 따라 더욱 강력해진 다이묘는 戦国大名|센고쿠 다이묘일본어라고 불렸다.[8]
오닌의 난 중에 9대 쇼군이 된 아시카가 요시히사가 25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아시카가 요시타네가 10대 쇼군이 되었다. 그러나 1493년,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메이오의 정변을 일으켜 11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즈미를 세웠다. 이로써 쇼군은 호소카와 씨의 꼭두각시가 되었다.[17][18]
호소카와 마사모토는 세 명을 양자로 삼았으나, 호소카와 스미유키 대신 호소카와 스미모토를 후계자로 삼았다. 1507년 스미유키에게 살해당하는데, 이 사건을 영정의 혼란(에이쇼의 착란)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은 호소카와 다카쿠니가 승리한 양 호소카와 씨의 난이라는 전쟁을 일으켰다.[19]
호소카와 다카쿠니는 아시카가 요시하루를 12대 쇼군으로 세웠다. 호소카와 스미모토의 아들 호소카와 하루모토는 미요시 모토나가와 손을 잡고 1527년 가쓰라가와 전투에서 다카쿠니를 몰아냈다. 호소카와 다카쿠니는 우라가미 무라무네와 동맹을 맺어 1531년 오모노쿠즈레라는 전쟁에서 호소카와 하루모토와 싸웠지만 패배했다.[19]
호소카와 하루모토는 미요시 모토나가와 사이가 틀어졌다. 하루모토는 일향종을 이용하여 일향일규를 일으켰고, 1532년 모토나가는 죽었다.[19]
미요시 모토나가의 아들, 미요시 나가요시는 기자와 나가마사를 패배시키고, 1547년 샤리지 전투에서 호소카와 우지쓰나를 물리쳤다. 미요시 마사나가를 타도할 것을 청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미요시 나가요시는 호소카와 하루모토, 아시카가 요시하루와 그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교토에서 몰아내고, 1549년 교토 지역을 장악했다. 미요시 씨는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했다.[20]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미요시 요시쓰구와 마쓰나가 히사히데의 군대의 공격으로 살해되었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비롯한 여러 역사서에 따르면, 그는 薙刀|나기나타일본어와 太刀|타치일본어를 사용하여 열심히 싸우며 많은 적을 물리쳤지만, 결국 기력이 다하여 죽었다.[22]
미요시 나가야스, 미요시 소이, 이와나리 도모미치의 삼인중(미요시 삼인방)은 아시카가 요시히데를 둘러싸고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불화하여 전쟁이 발발했다. 1568년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에 진입하면서 미요시 정권은 사실상 붕괴되었다.[23]시기 사건 1454년 교토쿠 사건 발발 1467년 오닌의 난 발발 1477년 오닌의 난 종식. 이가 이키의 사실상의 독립 1482년 교토쿠 사건 종식. 1485년 야마시로 봉기로 야마시로 이키 결성 1487년 마가리 전투: 롯카쿠 다카요리가 아시카가 요시히사를 패배시킴 1488년 가가 반란으로 가가 이키 성립 1493년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메이오 정변 성공 호조 소운이 이즈국을 장악 아시카가 쇼군이 야마시로 이키를 섬멸 1507년 료 호소카와 전쟁(호소카와 가문의 계승 분쟁) 발발 1520년 호소카와 다카쿠니가 호소카와 스미모토를 패배시킴 1523년 명나라가 일본과의 모든 외교 및 무역 관계를 단절 1531년 호소카와 하루모토가 호소카와 다카쿠니를 패배시킴 1535년 이다노 전투: 마쓰다이라 씨의 군대가 반란군 마사토요를 패배시킴 1543년 포르투갈이 타네가시마에 상륙, 일본에 조총 도입 1546년 가와고에 성 전투: 호조 우지야스가 우에스기 씨를 패배시키고 간토 지방의 지배자가 됨 1549년 미요시 나가요시가 호소카와 하루모토를 배신 일본이 공식적으로 중국의 지역 패권을 인정하지 않고 조공 사절단을 취소함 1551년 타이네이지 사건: 스에 하루카타가 오우치 요시타카를 배신하고 혼슈 서부를 장악 1554년 다케다 신겐, 호조 우지야스, 이마가와 요시모토 간의 3자 동맹 체결 1555년 이쓰쿠시마 전투: 모리 모토나리가 스에 하루카타를 패배시키고 오우치를 대신하여 혼슈 서부의 최고 다이묘가 됨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 오다 노부나가가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패배시키고 사살함 1561년 가와나카지마 전투(가와나카지마 4차 전투):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 사이의 전투 오토모 소린의 요청으로 포르투갈 선박이 모지를 포격. 모지 공방전에서 함락에 실패함. 1562년 오무라 스미타다가 기독교로 개종하여 최초의 기독교 다이묘가 됨. 1565년 마쓰라 씨에 속한 포르투갈과 일본 선박이 후쿠다 만 해전에서 충돌. 1568년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로 진군하여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도시의 통제권을 포기하도록 강요함 1570년 아네가와 전투와 이시야마 혼간지 전투 발발 1571년 오무라 스미타다의 허가로 나가사키가 포르투갈 상인들을 위한 무역항으로 설립됨 1573년 아시카가 막부 멸망 1574년 롯카쿠 씨와 고카 이키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항복 1575년 나가시노 전투: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총 전술로 다케다 씨 기병대를 패배시킴 1577년 테도리가와 전투: 우에스기 겐신과 오다 노부나가 사이의 격렬한 전투 1580년 이시야마 혼간지 전투 종식. 오다 노부나가가 중부 일본을 통일하여 지배함 1581년 텐쇼 이가 전쟁이 이가 이키의 멸망으로 끝남. 1582년 아케치 미쓰히데가 혼노지의 변에서 오다 노부나가를 암살; 하시바 히데요시가 야마자키 전투에서 아케치를 패배시킴 1583년 쵸소카베 모토치카가 시코쿠 섬 전체로 세력을 확장 1584년 시마즈 요시히사가 큐슈 지방 전체를 장악함 1585년 시코쿠 정벌: 하시바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복 하시바 히데요시가 간파쿠의 칭호를 받아 권력을 확립; 1년 후 도요토미 성을 받음. 1587년 규슈 정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시마즈 씨를 패배시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최초의 반 기독교 정서를 발표 1590년 오다와라 정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후호조 씨를 패배시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무쓰국 씨족의 충성 아래 전국 통일을 달성함. 1591년 쿠노헤 반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쿠노헤 마사자네의 군대를 패배시키고 일본을 통일함 1592~1598년 임진왜란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도쿠가와 이에야스 지휘하의 동군이 도요토미 충신들의 서군을 패배시킴 1603년 록고 반란: 사타케 요시노부 지휘하의 사타케 씨가 구보타 영지를 완전히 장악함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 전역을 통일하고 도쿠가와 막부를 설립함 1609년 류큐 침공: 류큐 왕국이 일본의 사쓰마 번의 속국이 됨 1614년 가톨릭교가 공식적으로 금지되고 모든 선교사들이 추방됨 1615년 오사카 전투: 도쿠가와 막부에 대한 도요토미 반대 세력의 마지막 잔재가 진압됨
3. 1. 중앙 권력의 약화와 지방 세력의 발흥
무로마치 막부가 명목상 존재했지만, 많은 다이묘들, 특히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다이묘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중국과의 무역 증가로 경제가 발전하고 화폐 사용이 늘어나면서 상업 도시들이 탄생했다. 농업과 소규모 제조업의 발전으로 지방의 자치권 요구가 커졌다. 15세기 초 지진과 기아 등 자연재해는 농민 봉기로 이어져 센고쿠 시대로의 이행을 가속화했다.[8]
오닌의 난(1467년~1477년)은 센고쿠 시대의 서막으로 여겨진다. 호소카와 가쓰모토가 이끄는 동군과 야마나 소젠이 이끄는 서군이 교토 근방에서 11년간 교전했고, 전쟁은 곧 다른 구니들로 확산되었다.[9] 이 시기 일본 천황은 명목상 통치자였고, 실제 권력은 쇼군에게 위임되었다. 쇼군은 군사 독재자와 거의 동등한 귀족이었다.
1346년부터 1358년까지 남북조 시대 동안, 아시카가 막부는 슈고의 권한을 확대하여 다이묘가 등장했다.[8] 1428년, 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의 계승 문제와 아카마츠 미츠스케의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 암살로 막부 체제가 불안정해졌다. 막부는 다이묘에 대한 영향력과 통제력을 잃어갔다.[9][10]
센고쿠 시대의 시작은 교토쿠 사건, 오닌의 난, 또는 메이오의 정변으로 여겨진다.[2][18]
교토쿠 사건은 1454년부터 1482년까지 지속된 간토 지방의 주요 전쟁이었다. 간토 큐보 아시카가 시게우지가 간토 간레이 우에스기 노리타다를 살해하며 시작되었다. 간토 지방의 여러 세력은 큐보와 간레이 진영으로 나뉘어 싸웠고, 아시카가 쇼군가는 간레이 진영을 지원했다.[2]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쇼군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정치적 혼란과 사회 불안이 증가했다. 쇼군 계승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오닌의 난으로 이어졌다. 1477년 서군 영주들이 교토에서 군대를 철수하면서 전쟁은 끝났다.[9][11]
오닌의 난으로 교토의 3분의 2가 황폐해졌고, 아시카가 쇼군의 권위가 약해져 각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크게 줄었다. 이 전쟁은 일본 전역에 혼란을 야기했다.[13] 다이묘들은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고, 슈고다이의 권력이 커져 영지를 장악하거나 독립을 선포했다.[14]
그리하여 각 지역의 다이묘들이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기 위해 싸운 내전 시대인 센고쿠 시대가 시작되었다.[9][11] 쇼군의 통제력이 약해짐에 따라 더욱 강력해진 다이묘는 戦国大名|센고쿠 다이묘일본어라고 불렸고, 그들은 종종 슈고 다이묘, 슈고다이, 国人|코쿠진일본어 출신이었다.[8]
오닌의 난은 센고쿠 시대의 도화선으로 여겨진다. 이 내전은 아시카가 쇼군가의 권한 감소를 보여주었고, 무분별한 갈등의 물결이 일본 전역으로 퍼져 전쟁의 시대를 열었다. 전쟁의 피로, 사회경제적 불안, 귀족들의 혹독한 대우는 농민 계급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농민, 장인, 상인, 심지어 마을까지도 지배 계급에 대항하여 봉기(이키)를 조직했다. 가가 반란이 대표적인 예시이다.[14][12]
일반적으로 센고쿠 시대의 시작 시점은 1454년의 교토쿠 사건, 1467년의 오닌의 난, 또는 1493년의 메이오의 정변으로 여겨진다.[2][18]
1488년에는 가가 이키가 발생했고, 1491년에는 호조 소운이 이즈국을 정복했으며, 1492년에는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10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교토에서 몰아냈다. 이 무렵부터 전국 각지에서 내전이 빈번하게 발생하기 시작했고, 각지의 불교 사찰들이 무력으로 성장했다.[2]
혼란은 중앙 정부의 권력 약화를 더욱 심화시켰고, 일본 전역에서 다이묘라 불리는 지방 영주들이 일어섰다. 다케다 가문과 이마가와 가문과 같은 유력 가문들은 영향력을 확장했지만, 많은 가문들은 힘이 약해지고 부하들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이러한 사회적 실력주의 현상은 下克上|게코쿠조일본어로 알려졌다.[38]
호조 소운은 하극상의 초기 사례 중 하나이다. 소운의 업적을 바탕으로 호조 가문은 간토 지방의 주요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다른 예로는 미요시 가문이 호소카와 가문을, 사이토 가문이 도키 가문을, 오다 가문이 시바 가문을 대체한 사례가 있으며, 오다 가문은 다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대체되었다.
이 시기에 잘 조직된 종교 집단들도 다이묘의 지배에 저항하고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을 결집함으로써 정치적 권력을 얻었다. 정토진종 승려들은 일향일기를 결성했으며, 그중 가장 성공적인 가가국의 일향일기는 거의 100년 동안 독립을 유지했다.
기내에서는 1493년 명응의 정변을 센고쿠 시대의 시작으로 하고,[47] 1568년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오다 노부나가의 상락을 종기로 한다. 간토 지방에서는 1455년 발발한 교토쿠의 난으로 센고쿠 시대가 시작되었고,[2]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로 끝났다고 여겨진다. 도호쿠 지방에서는 에이쿄의 난이 일어난 1438년이 센고쿠 시대의 시작으로 여겨지고, 1590년 오우 시치가 센고쿠 시대의 종언으로 여겨진다.
3. 2. 하극상과 신분 질서의 동요
무로마치 막부가 명목상 존재했지만, 많은 다이묘들, 특히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다이묘들은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이 시기까지 중국과의 무역이 늘어나 경제가 발전하고 화폐 사용이 늘어나면서 상업 도시들이 탄생했다. 농업과 소규모 제조업의 발전으로 지방 자치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15세기 초의 지진과 기아 같은 자연재해는 채무와 조세에 시달린 농민들의 봉기로 이어져 센고쿠 시대로의 이행을 가속화했다.
경제 문제와 쇼군 계승 논란이 겹쳐 일어난 오닌의 난(1467년~1477년)은 센고쿠 시대의 서막으로 여겨진다. 호소카와 가쓰모토가 이끄는 동군과 야마나 소젠이 이끄는 서군이 교토 근방에서 11년간 교전했고, 전쟁은 곧 다른 구니들로 확산되었다.
전쟁의 확산은 중앙 정부를 더욱 무력하게 만들었으며, 이 권력의 공백을 지역 영주인 다이묘들이 메웠다. 이 과정에서 가마쿠라 막부와 무로마치 막부 아래에서 이미 성장한 다케다나 이마가와 등은 센고쿠 다이묘로 거듭났지만, 능력 있는 신하들에게 권력을 빼앗긴 다이묘들도 많았다. 이러한 능력주의적 풍조 하에서 능력 있는 가신들이 봉건 영주들을 무너뜨리는 하극상(下剋上|게코쿠조일본어) 현상은 1493년 호조 소운이 이즈를 탈취한 것에서 시작되어, 센고쿠 시대 동안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종교 교단 역시 이 시기에 다이묘에 대항하여 농민들을 결집하고 봉기를 유도하여 정권을 획득하기도 하였다. 정토진종 혼간지 교단은 무수한 농민 봉기(잇코 잇키)를 이끌었으며 가가에서 성공적으로 다이묘를 제거하여 100여년간 독립을 유지하기도 하였다(가가 잇코 잇키).
3. 3. 주요 다이묘들의 각축
무로마치 막부 시대, 쇼군 가문인 아시카가 가문의 권위는 명목상으로는 유지되었으나, 많은 다이묘들, 특히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다이묘들은 이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이 시기 중국과의 무역 증가로 경제가 발전하고 화폐 사용이 늘어나면서 상업 도시들이 탄생했고, 농업과 소규모 제조업의 발전으로 지방의 자치권 요구가 커졌다. 15세기 초의 자연재해는 농민 봉기로 이어져 센고쿠 시대로의 이행을 가속화했다.
오닌의 난(1467년~1477년)은 쇼군 계승 논란과 경제 문제로 인해 발발했으며, 센고쿠 시대의 서막으로 여겨진다. 호소카와 가쓰모토가 이끄는 동군과 야마나 소젠이 이끄는 서군 간의 11년간의 교전은 다른 구니들로 확산되었다.
1세기에 걸친 일본의 정치적 불안정과 내전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통일에 가까워졌다. 노부나가는 오와리의 영주에서 일본 중부를 지배하는 세력으로 성장했으나, 1582년 아케치 미츠히데의 배반으로 사망했다(혼노지의 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후계자가 되어 남은 다이묘들을 통제했고, 간파쿠[152]에 취임하여 도요토미 정권을 세웠다.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 계획을 세웠고, 황윤길과 김성일을 통신사로 파견하여 일본을 염탐하게 했다. 히데요시는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이는 1598년 히데요시 사망까지 계속되었다.
히데요시 사망 후, 일본은 다시 혼란에 빠졌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를 기회로 삼았다. 히데요시는 5대로(五大老)를 임명하여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섭정을 맡겼으나, 이시다 미츠나리의 탄핵으로 내란이 재개되어 세키가하라 전투로 이어졌다. 이에야스는 승리 후 에도 막부를 건설하여 1868년 메이지 유신까지 유지했다. 에도 막부는 일본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다.
센고쿠 시대의 시작은 교토쿠 사건, 오닌의 난, 또는 메이오의 정변으로 여겨진다.[2][18]
교토쿠 사건은 1454년부터 1482년까지 지속된 간토 지방의 주요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간토 지방을 담당하는 아시카가 쇼군가의 관직인 관토 큐보인 아시카가 시게우지가 관토 간레이 우에스기 노리타다를 죽인 것에서 시작되었다. 간토 지방의 여러 세력은 큐보와 간레이 진영으로 나뉘어 싸웠고, 아시카가 쇼군가는 간레이 진영을 지원했다.[2]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쇼군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했지만, 그의 측근들은 그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 정치적 혼란과 사회 불안이 증가했다. 그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미를 9대 쇼군으로 임명하려고 했지만, 그의 부인 히노 토미코가 아시카가 요시히사를 낳자 요시미와 요시히사 중 누가 다음 쇼군이 될 것인가를 두고 슈고 다이묘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하타케야마 씨와 시바 씨도 각 씨족 내의 계승 문제로 두 개의 대립하는 파벌로 나뉘었고, 장인과 사위 사이였던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야마나 소젠은 서로 정치적으로 대립했다.[9][11]
1467년, 이러한 갈등은 마침내 호소카와 가쓰모토가 이끄는 동군(동군에는 하타케야마 마사나가, 시바 요시토시, 아시카가 요시미가 포함되었다)과 야마나 소젠이 이끄는 서군(서군에는 하타케야마 요시나리, 시바 요시카도, 아시카가 요시히사가 포함되었다) 사이의 오닌의 난(1467~1477)으로 이어졌다. 1469년 전쟁은 여러 성으로 확산되었지만, 1473년 양군의 지도자인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야마나 소젠이 사망했다. 1477년 하타케야마 요시나리와 오우치 마사히로 등 서군 영주들이 교토에서 군대를 철수하면서 전쟁은 끝났다.[9][11]
이 전쟁으로 교토의 3분의 2가 황폐해져 귀족과 무사의 저택, 신사, 불교 사찰이 많이 파괴되었고, 아시카가 쇼군의 권위가 약해져 각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크게 줄었다. 이 전쟁은 일본 전역에 혼란을 야기했다.[13] 별개의 국가들 사이의 군사적 대결 외에도 국내적 여파도 있었다. 쇼군가를 무시하고 교토에 남아 있어야 할 다이묘들은 대신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 결과적으로 이들 다이묘 중 일부는 지정된 가신이나 다이묘가 부재 중에 임명된 영지 대표인 슈고다이의 권력이 커져 영지를 장악하거나 독립된 영지로 독립을 선포하는 것을 발견했다.[14]
그리하여 각 지역의 다이묘들이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기 위해 싸운 내전 시대인 센고쿠 시대가 시작되었다.[9][11] 쇼군의 통제력이 약해짐에 따라 더욱 강력해진 다이묘는 戦国大名|센고쿠 다이묘일본어라고 불렸고, 그들은 종종 슈고 다이묘, 슈고다이, 国人|코쿠진 또는 쿠니비토일본어 출신이었다. 센고쿠 다이묘는 쇼군에 의해 임명되지 않고 스스로 지역을 통치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슈고 다이묘와 달랐다.[8]
역사가들은 종종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발생한 10년간의 갈등인 오닌의 난을 센고쿠 시대로 알려지게 된 시대의 도화선으로 여긴다. 이 내전은 아시카가 쇼군가의 쇼군 행정, 지방 다이묘, 그리고 일본 전체에 대한 권한이 줄어들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고, 그 결과 무분별한 갈등의 물결이 일본 전역으로 퍼져 전쟁의 시대에 국가들을 휩쓸었다. 게다가 전쟁의 피로, 사회경제적 불안, 귀족들의 혹독한 대우는 농민 계급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농민, 장인, 상인, 심지어 마을까지도 지배 계급에 대항하여 봉기(이키)를 조직했다. 가가 반란이 대표적인 예인데, 이때 현지 이키는 정토진종의 지원을 받아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가가 전역을 장악했다.[14][12] 학자와 저술가 모두 "쇼군의 리더십 부재가 없었다면 이러한 계승 분쟁이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제안한다.[13][14]
오닌의 난 중에 9대 쇼군이 된 아시카가 요시히사가 25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아시카가 요시타네가 10대 쇼군이 되었다. 그러나 1493년, 쇼군 요시타네가 교토에 없는 사이에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군대를 일으켜 11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즈미를 세우는 사실상의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이것이 바로 메이오의 정변이다. 마사모토는 아시카가 막부에서 쇼군 다음가는 지위인 관령을 역임했는데, 이는 가마쿠라 막부의 싯켄과 동등한 자리였다. 이로써 쇼군은 관령을 지낸 호소카와 씨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최근에는 이 사건이 센고쿠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다.[17][18]
호소카와 마사모토는 생애 내내 독신으로 지내다 세 명을 양자로 삼았다.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마사모토는 처음 입양했던 호소카와 스미유키 대신 호소카와 스미모토를 후계자로 삼았다. 그 결과 1507년 스미유키에게 살해당하는데, 이 사건을 영정의 혼란(에이쇼의 착란)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은 호소카와 씨를 호소카와 스미모토파와 호소카와 다카쿠니파로 분열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호소카와 다카쿠니가 승리한 양 호소카와 씨의 난이라는 전쟁을 일으켰다.[19]
호소카와 다카쿠니는 아시카가 요시하루를 12대 쇼군으로 세웠다. 한편 전쟁에서 패한 호소카와 스미모토의 아들 호소카와 하루모토는 미요시 모토나가와 손을 잡고 1527년 가쓰라가와 전투에서 다카쿠니를 패퇴시켜 교토에서 몰아냈다. 이로써 관령의 권위는 무너졌고, 거의 아무런 지지도 받지 못한 호소카와 다카쿠니는 도망치며 살아야 했다. 그는 센고쿠 다이묘 우라가미 무라무네를 동맹으로 얻어 1531년 오모노쿠즈레라는 전쟁에서 호소카와 하루모토와 싸웠지만 패배했다.[19]
호소카와 하루모토가 권력을 장악했지만, 그는 신하였지만 여전히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던 미요시 모토나가와 사이가 틀어졌다. 하루모토는 일향종을 이용하여 모토나가에 대한 일향일규를 일으켰고, 그 결과 1532년 모토나가는 죽었다.[19]
미요시 모토나가의 아들, 미요시 나가요시는 호소카와 하루모토와 싸웠지만, 그에게 복종하기로 했다. 하루모토의 추종자로서 미요시 나가요시는 관령을 지낸 하타케야마 씨의 가장 강력한 인물인 기자와 나가마사를 패배시켰고, 1547년에는 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와 호소카와 다카쿠니의 아들인 호소카와 우지쓰나를 샤리지 전투에서 물리쳤다. 이는 아시카가 막부의 권력을 더욱 약화시켰다. 미요시 나가요시는 호소카와 가문의 가신으로부터 미요시 마사나가가 그의 아버지의 죽음에 어두운 역할을 했다는 말을 듣고, 그의 주군 호소카와 하루모토에게 마사나가를 타도할 것을 청원했지만, 이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대신 나가요시는 하루모토에 의해 거의 제거될 뻔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미요시 나가요시는 미요시 마사나가를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호소카와 하루모토, 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와 그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교토에서 몰아내고, 1549년 교토 지역을 장악했다. 그 후 그는 교토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13대 쇼군이 된 아시카가 요시테루와 여러 차례 싸웠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은 하나둘씩 전쟁이나 질병으로 죽어 갔고, 미요시 씨는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했다.[20]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 시대가 되자, 쇼군은 이미 직할 영지와 직속 군사력이 거의 없었고, 그의 영향력은 교토 주변의 몇몇 지역으로 제한되어 경제적, 군사적 힘 모두를 잃었다. 그 결과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센고쿠 다이묘 미요시 나가요시와 그의 군대에 의해 교토에서 여러 번 쫓겨났고, 마침내 미요시 요시쓰구와 마쓰나가 히사히데의 군대의 공격으로 살해되었다.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뛰어난 검객으로 알려져 있으며, 최강의 검객 중 한 명으로 알려진 쓰카하라 보쿠덴의 제자였다.[21] 도쿠가와 막부의 검술 사범인 야규 무네노리에 따르면,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당대 최고의 검객 5명 중 한 명이었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비롯한 여러 역사서에 따르면, 그는 습격 중에 薙刀|나기나타일본어와 太刀|타치일본어를 사용하여 열심히 싸우며 많은 적을 물리쳤지만, 결국 기력이 다하여 죽었다.[22]
미요시 나가야스, 미요시 소이, 이와나리 도모미치의 삼인중(미요시 삼인방)은 젊은 씨족의 수장인 미요시 요시쓰구가 미요시 씨를 이끄는 것을 지원했다. 그러나 13대 쇼군 암살 이후, 삼인중은 1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데를 둘러싸고 다른 미요시 추종자인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불화하여 전쟁이 발발했다. 후자의 세 사람은 또한 요시쓰구와 갈등을 빚었다. 1568년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에 진입하면서 미요시 정권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미요시 요시쓰구와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노부나가에게 항복했지만, 나중에 노부나가의 군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삼인중은 약해졌고 미요시 씨는 쇠퇴했다.[23]
일본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역인 간사이 지방을 중심으로, 오다 노부나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어 세력을 확장했다. 노부나가는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패배시켰고, 1568년에는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지원하기 위해 교토로 진출했다. 노부나가는 1569년 미요시 요시쓰구를 패배시키고, 1571년에는 비와 호 동쪽 기슭의 히에이 산을 공격했으며, 1573년에는 이치조다니 성 전투에서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같은 해 오다니 성 전투에서 아사이 나가마사를 각각 패배시켰고, 1573년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교토에서 몰아내어 아시카가 막부를 멸망시켰다. 그는 1574년 나가시마 일향종을 제압하고,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다케다 가쓰요리를, 1580년에는 이시야마 혼간지 전투에서 이시야마 혼간지를 각각 패배시켰다. 그러나 1582년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배신당하여 혼노지의 변에서 자결했다.[2][32]
같은 시기에, 모리 씨는 주고쿠 지방에서 오우치 씨를 멸망시켰고, 시마즈 씨와 오토모 씨는 규슈에서 주요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지역 통일이 진행되었다.[2]
농민 출신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노부나가 휘하에서 아시가루, 사무라이, 그리고 센고쿠 다이묘의 계급을 차례로 거쳐 가장 뛰어난 장군이 되었다. 그는 주군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자 곧바로 전투 중이던 모리 씨와 화의를 맺고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군대를 돌려 야마자키 전투에서 아케치 미쓰히데를 격파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 사후 11일 만에 그의 죽음을 복수했다. 노부나가의 측근들은 기요스 회의에서 향후 정책을 논의했고,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후계자가 되기 위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1582년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계승을 둘러싸고 적대 관계에 있던 시바타 가쓰이에와 오다 노부타카를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물리쳤고, 1583년에는 오사카 성 건설을 시작했다. 1584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오다 노부오 연합군과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노부오와 화해하여 휴전을 맺었다. 1585년에는 시코쿠 정벌에서 조소카베 모토치카를 물리치고 시코쿠를 평정했다. 1586년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귀족 출신이 아닌 신분으로 関白|간파쿠일본어와 太政大臣|태정대신일본어이 되었다. 같은 해 이에야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1587년에는 규슈 정벌에서 시마즈 씨를 격파하고 규슈를 평정했다. 1590년에는 오다와라 성 전투에서 후호조 씨를 물리치고 간토 지방을 평정했다. 같은 해 도호쿠 지방의 씨족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내어 마침내 일본 통일을 달성했다.[33][34]
3. 4. 지역별 판도
센고쿠 시대는 일본 역사에서 여러 지역의 다이묘들이 각자의 세력을 확장하며 패권을 다투던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이 시기 각 지역의 판도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3. 4. 1. 도호쿠 지방
가마쿠라 시대부터 대대로 토지를 소유해 온 가문이 그대로 센고쿠 다이묘로 발전한 경우가 많았다. 예외로는 와카사 다케다 가문(若狭武田氏)의 후예를 자칭하는 가키자키 가문이 쓰가루 해협 연안의 중소호족을 통일한 것과, 난부 가문(南部氏)으로부터 독립한 쓰가루 가문(津軽氏)을 들 수 있다. 단, 쓰가루 다메노부(津軽為信)는 예부터 쓰가루 지방(津軽地方)을 소유한 난부 가문에 주살당한 오우라 가문(大浦氏)의 혈육인지 난부 가문의 혈육인지 애매하다.
간토 지방에서 일어난 동란에 크게 말려들지 않았고, 당연히 그보다 더 먼 중앙에서 벌어진 전쟁의 영향도 거의 받지 않았다. 전란이라고 말해야 15세기 전반에 들어선 뒤, 난부 가문의 센보쿠(仙北), 가즈노(鹿角)[153] 출병과 다테 가문(伊達氏)의 가호쿠(河北) 지방에서의 침공 등의 영지 다툼 정도가 눈에 띈다. 그러나 도호쿠 지방에서도 사사가와 구보(篠川公方)와 시즈쿠이시 어소(雫石御所)가 사라지는 등 완전히 무사평온한 상태는 아니었다. 1522년 다테 다네무네(伊達稙宗)가 오슈 단다이인 오사키 가문(大崎氏)을 축출하고 무쓰 슈고직에 오르는 등 하극상의 기미도 볼 수 있다.
1542년 다테 다네무네, 하루무네(伊達晴宗) 부자간의 다툼이 일어나 다테 가문과 연이 있는 무쓰, 데와 주변의 다이묘들이 말려든 대란으로 발전하였다(덴분의 난). 이 난의 결과로 다테 가문의 결속력이 저하되어 주변의 모가미 가문(最上氏)등 타 세력이 세력을 넓히게 되었다. 1570년 이후, 모가미 요시아키, 다테 마사무네, 난부 하루마사, 안도 지카스에, 쓰가루 다메노부 등 도호쿠 지방에도 센고쿠 다이묘라고 불리는 인물이 등장하여 일대 세력을 구축하여, 후의 새로운 중앙정권으로 들어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그대로 영지를 추인받았다(오슈 시오키(奥州仕置)).
일반적으로 안도 가문(安東氏)이 아키타현을, 난부 가문(南部氏)이 이와테현을 중심으로 아오모리현 일부를, 오사키 가문(大崎氏)이 미야기현 중부를, 가사이 가문(葛西氏)이 미야기 현의 이시노마키시로부터 북부를, 모가미 가문(最上氏)이 야마가타현을, 다테 가문(伊達氏)이 미야기 현 남부와 야마가타 현 남부 그리고, 후쿠시마현의 일부를 소유했으며, 아시나 가문(蘆名氏)이 후쿠시마 현을 다스렸다.
다테 마사무네(Date Masamune)는 한쪽 눈이 없는 무장으로, 유명한 센고쿠 다이묘였으며, 20년만 빨리 태어났더라면 전국을 통일할 잠재력이 있었다고 종종 말해진다.[35][36] 1584년 오다 노부나가 사후 2년 후에 다테 가문(Date clan)의 당주가 되었고, 니혼마쓰 가문(Nihonmatsu clan) 및 기타 여러 씨족을 멸망시켰다. 1589년 스리아게하라 전투(Battle of Suriagehara)에서 아시나 가문(Ashina clan)을 패퇴시켜 아이즈(Aizu province)를 정복하고, 도호쿠 지방(Tōhoku region) 대부분을 정복하며 영토 확장을 계속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7년 센고쿠 다이묘 간의 전쟁을 금지하는 惣無事令|소부지레이일본어를 제정했는데, 마사무네의 도호쿠 지방 정복은 이 법을 심각하게 위반하는 것이었다. 오다와라 정벌에서 호조 가문(後北条氏)을 멸망시킨 후, 히데요시는 마사무네와 도호쿠 지방의 다른 센고쿠 다이묘들이 복종하기를 꺼리자 이들을 멸망시키려 했다.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정벌 참전 명령을 늦게 전달한 마사무네를 마에다 도시이에(Maeda Toshiie)에게 심문하게 했지만, 마사무네의 당당한 태도를 듣고 직접 만나기로 결정했다.
마사무네는 처형될 준비를 하고 순백의 사복을 입고 히데요시 앞에 나타나 존경을 표했다. 히데요시는 지팡이를 마사무네의 목에 대고 "조금만 더 늦었어도 목이 잘렸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마사무네는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는 목숨은 건졌지만 일부 영토를 몰수당했다. 그는 나중에 농민 봉기 선동 및 도요토미 히데쓰구(Toyotomi Hidetsugu)의 반란 가담 혐의로 히데요시에게 심문을 받았지만, 평소의 용기와 품위로 자신을 변호하여 처벌받지 않았다.[35][37]
마사무네는 세키가하라 전투(Battle of Sekigahara)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섰고, 에도 시대(Edo period)의 초대 센다이 번(Sendai domain) 藩주로서 센다이를 개발하여 현재의 도호쿠 지방 중심 도시의 기반을 마련했다. 1613년에는 하세쿠라 쓰네나가(Hasekura Tsunenaga)를 유럽에 사절로 파견하여 교황 바오로 5세(Pope Paul V)와 면담을 가졌다.[35][37]
3. 4. 2. 간토 지방
1546년, 호조 우지야스(北条氏康)가 가와고에 성 전투(川越城の戦い)에서 우에스기 도모사다(上杉朝定)를 패배시키면서 후호조씨(後北条氏)는 간토 지방에 세력을 확립했다.[2]
간토 지방에서는 교토에서 오닌의 난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큰 대란[154]이 연이어 일어나, 고가 구보와 간토 간레이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山内上杉家), 그리고 그 방계(傍系)인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扇谷上杉家)이 간토의 패권을 두고 삼파전을 펼쳤다.
이 틈을 파고들어 이세 모리토키(후의 호조 소운)이 이즈의 호리고에 구보를 멸망시키고 간토로 진출했다. 이 고호조 가문과 야마노우치·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 사이의 항쟁은 1546년 가와고에 성 전투에서 고호조 가문이 대승을 거두고, 이후 두 우에스기 가문의 쇠퇴로 막을 내렸다. 1552년 고호조 가문은 고가 어소(古河御所)를 제압하여 고가 구보를 장악하고,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을 고즈케로 쫓아내었다. 쫓겨난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은 에치고의 나가오 가게토라(후에 우에스기 겐신)를 의지하여 호조 가문과 나가오 가문(長尾氏)이 간토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 형세가 되었다.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나가오 카게토라)은 에치고 국(越後国)을 근거지로 삼은 전국 다이묘(戦国大名)로, 여러 전국 다이묘와 싸우며 공격적인 침략을 통해 세력을 키웠다. 1551년 에치고를 통일한 후, 1552년부터 1569년까지 여러 차례 간토 지방을 침략하여 호조 우지야스와 싸웠다. 또한 1553년부터 1573년까지 가이 국(甲斐国)과 시나노 국(信濃国)을 지배한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의 영토를 침략하여 1553년부터 1564년까지 가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合戦)에서 다섯 차례 싸웠다. 1559년에는 겐신은 오기마치 천황(後崇明天皇)과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를 알현했다.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い)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군대에 의해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가 사망하자, 1554년 가이(다케다 신겐), 사가미(호조 우지야스), 스루가(이마가와 요시모토) 사이에 형성된 甲相駿三国同盟이 깨졌다. 겐신은 이를 기회 삼아 호조 우지야스의 영토를 하나씩 차지하고, 1561년 오다와라 공성전(1561年小田原城の戦い)에서 후호조씨를 궁지에 몰아넣었지만, 패배시키지는 못했다. 오다와라 공성전에서 돌아온 그는 쓰루가오카 하치만구(鶴岡八幡宮)에서 의식을 거행하고 관동 관령의 자리에 올랐다. 1569년 일부 영토를 할양한 호조 우지야스와 화해하고, 다케다 신겐을 겐신과 우지야스의 공동의 적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신겐은 1573년 병으로 사망했다. 다케다 신겐 사후, 그는 오다 노부나가와 불화하여 1577년 노부나가와 가까웠던 노토 하타케야마 씨를 나나오 공성전(七尾城の戦い)에서 멸망시키고 노토 국(能登国)을 평정했다. 그 후 테도리가와 전투(手取川の戦い)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군대를 패배시켰다. 그러나 1578년 49세의 젊은 나이에 뇌출혈로 사망했다.[26][27]
우에스기 가문의 양자가 되어 간토 간레이를 승계한 우에스기 겐신은 잠시나마 호조 가문의 거성이었던 오다와라성을 포위했지만, 함락하지는 못했다. 이 우에스기 가문과 호조 가문간의 전투는 간토의 호족들을 양분하여, 호조 우지야스와 사토미 요시타카[155] 간의 고노다이 전투(国府台合戦)를 시작으로 양 진영의 전투가 계속되었다. 1579년 우에스기 겐신이 죽자 히타치의 사타케 가문(佐竹氏), 아와의 사토미 가문(里見氏) 등이 호조 가문의 공세에 대항해보지만, 호조 가문의 세력 신장을 막을 수는 없었다. 더욱이 오슈의 다테 가문(伊達氏)의 남하해 옴에 따라 사타케 가문은 남북 양면의 공세에 따른 압박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의 패권을 쥐고 다이묘끼리의 전투를 금하는 명령을 내리자, 호조 우지마사는 이에 맞서 오슈의 다테 마사무네와 미카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고 대항하였다. 하지만 1590년 히데요시의 압도적인 병력 공세 앞에 호조 가문은 결국 무릎을 꿇고 멸망하였다(오다와라 정벌). 1590년 음력 8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간토로 전봉되어 에도 성에 입성하였다. 그 후 도요토미 정권에서 ವಿರು막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사타케 가문과 사토미 가문등 종래 간토 세력들은 전봉 혹은 가이에키(영지 몰수) 되어 간토에서 모습을 감추게 된다.
3. 4. 3. 고신 지방
가이국의 다케다 노부토라(武田信虎)는 가이 전토를 통일하고 시나노 공격을 기획했다. 그러나 1541년 아들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을 추대한 중신들의 쿠데타로 스루가로 추방당했다.[156]
신겐은 시나노 공략을 진행, 스와 가문, 오가사와라 가문, 무라카미 가문을 차례로 격파하고 시나노 대부분을 장악했다. 시나노는 슈고 권력이 약화되어 고쿠진들이 할거하고 있었기에, 신겐은 각개격파로 시나노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시나노 호족을 비호하던 에치고의 나가오 가게토라(우에스기 겐신)와 가와나카지마 전투 등 10여 년간 전투를 벌였다. 이후 신겐은 남진으로 방향을 바꿔 스루가를 손에 넣고, 도쿠가와 가문과 대치했다.
1572년 신겐은 상락 작전을 감행,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격파하고 오다 가문을 압박했다. 그러나 상락 도중 신겐이 병사하고, 1575년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후계자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가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에 대패했다. 1582년 다케다 가문은 멸망하고, 시나노 제후들은 오다 가문에 신종했다. 다케다 가신들은 하치오지에 머물렀고, 이들을 하치오지센닌도신(八王子千人同心)이라 한다.
다케다 가문 멸망 후, 가이와 시나노는 오다 가신에게 분배되었으나,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오다 가신들이 철수하여 공동화되었다. 가이·시나노를 두고 도쿠가와 가문과 호조 가문 사이에 덴쇼진고의 난(天正壬午の乱)이 일어났고, 도쿠가와 측이 승리했다. 이후 도요토미 정권에 의해 도쿠가와 가문은 간토로 전봉되고, 사나다 가문을 제외한 시나노 호족들도 간토로 이동했다.
우에스기 겐신(나가오 가게토라)은 에치고 국을 근거지로 한 전국 다이묘로, 여러 다이묘와 싸우며 세력을 키웠다. 1551년 에치고를 통일하고, 1552년부터 1569년까지 관동 지방을 침략하여 호조 우지야스와 싸웠다. 1553년부터 1573년까지 가이 국과 시나노 국을 지배한 다케다 신겐의 영토를 침략, 1553년부터 1564년까지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다섯 차례 싸웠다.
3. 4. 4. 호쿠리쿠 지방
에치고국에서는 슈고다이인 나가오 다메카게(長尾為景)가 슈고 우에스기 가문과의 잇단 항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 후 나가오 가문은 다메카게의 아들이자, 우에스기 노리마사의 양자가 되어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의 가독을 이은 우에스기 겐신의 지휘 하에 호쿠리쿠는 물론 간토 지방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대한 세력으로 성장하여, 1576년에는 호쿠리쿠 지방의 대부분을 제압하였다.
가가국에서는 정토진종의 혼간지 세력이 가가 슈고 도가시 가문(冨樫氏)을 멸하고 가가 국 일대를 지배하여 100년간 자치권을 행사하였다. 가가 잇코 잇키는 우에스기 가문과 아사쿠라 가문 등과 계속 대립하며 아사쿠라 가문 멸망 후에는 에치젠까지 지배하였으나, 1570년 ~ 1580년에 걸친 이시야마 전투(石山合戦)에서 오다 가문에 패하여 궤멸당했다.
엣추국의 진보 가문은 당초 적대관계였던 정토진종의 승려 세력과 손을 잡는 고육책까지 썼으나, 결국 에치고의 우에스기 가문과 노토의 하타케야마 가문, 주가(主家)인 엣추 슈고 하타케야마 가문의 연합군에 패배하여 멸망하였다.
에치젠국에서는 슈고 시바 가문(斯波氏)에게서 실권을 빼앗은 아사쿠라 가문이 가가 잇코 잇키의 침공을 격퇴하고[157], 비교적 평온한 내정을 유지하여 아사쿠라 다카카게 대에는 본거지인 이치조다니 성(一乗谷城)에 귀족들을 맞이하여 문화를 꽃피우는 등 번영을 누렸지만, 그 후계자 아사쿠라 요시카게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1573년에 멸망하였다.
노토국에서는 슈고 하타케야마 가문이 중신들의 전횡으로 내분에 빠져들어, 1576년에 노토는 우에스기 가문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3. 4. 5. 도카이 지방
1554년에 오다 가문의 권력 항쟁에 휘말려 할복한 시바 요시무네(斯波義統)를 끝으로 오와리 슈고 시바 가문은 단절되었다.[151][152]
미카와의 마쓰다이라 가문은 마쓰다이라 기요야스(松平清康)가 당주로 부임했을 때 최대 판도를 구축하였지만, 1535년 오와리 국 가스가이 군 모리야마에서 기요야스가 가신에게 살해되자 마쓰다이라 가문은 세력을 잃고 이마가와 가문에 종속되었다.
스루가의 이마가와 가문은 이마가와 우지치카(今川氏親)가 시바 가문으로부터 도토미를 빼앗고, 1526년에는 분국법을 정하여 영국 지배를 강화하였다. 우지치카의 아들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 대에는 미카와까지 세력을 신장하였고, 가이의 다케다 가문(武田氏)과 간토의 호조 가문(北条氏)과의 삼국동맹을 맺어 서진 정책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오와리의 오다 가문을 공격하려고 출병하였을 때 총대장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덴가쿠하자마에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기습을 받고 전사하여, 이마가와 가문은 점차 세력을 잃게 된다.
미노에서는 슈고 도키 가문의 내분이 한창일 때, 사이토 도산(斎藤道三)이 주군을 추방하고 미노 국을 장악하였다.
오와리에서는 오다 가문의 방계로 슈고다이의 군다이 출신인 오다 노부나가가 슈고다이인 종가를 제압하고 오와리 일국을 장악하였다. 그 후, 노부나가는 이마가와 가문에서 독립한 마쓰다이라 가문과 결탁하여 미노 공략에 착수하여, 5년에 걸친 공격으로 미노를 손에 넣고 이나바 산성(稲葉山城)을 본거지로 삼아 천하의 패권을 향하여 한 발짝 나아갔다.
미카와의 마쓰다이라 모토야스(松平元康)는 오다 노부나가를 도우면서 미카와, 도토미를 평정하였고 이름을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로 개명하였다. 가이의 다케다 가문이 이마가와 가문을 멸하고 1573년에는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을 격파하는 등 그 위세를 떨치지만,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이 급사하고,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이 다케다 군을 격파하여 세력이 위축되었다. 1582년 도쿠가와 가문은 도토미, 스루가를 영유하고, 혼노지의 변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죽자 오다 가문의 영지였던 시나노를 손에 넣었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천하가 평정되자, 도쿠가와 가문은 간토로 이봉되어 에도 성을 본거지로 삼았다. 그 후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해 에도에서 막부를 개창했다.
3. 4. 6. 긴키 지방
무로마치 막부가 임명한 슈고 다이묘가 그대로 센고쿠 다이묘가 된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호족들의 추대로 지위를 보장받았기 때문에 가신들에 대하여 굉장히 약한 입장에 있었다. 기이의 슈고 다이묘 하타케야마 가문(畠山氏)은 정토진종의 혼간지(本願寺) 세력의 봉기로 실권을 빼앗기기도 하였다. 다지마 국의 야마나 가문(山名氏), 단고 국의 잇시키 가문(一色氏), 와카사 국의 다케다 가문(若狭武田氏) 등은 주변 세력의 침입과 가신의 내분을 힘겹게 봉합하면서 끈질기게 살아 남았다.
아시카가 가문(足利氏)과 호소카와 가문(細川氏)의 내분은 주변 세력인 롯카쿠 가문(六角氏), 아카마쓰 가문(赤松氏), 우라가미 가문(浦上氏), 하타케야마 가문(畠山氏), 쓰쓰이 가문(筒井氏) 등에도 파급되었다. 본격적인 동란은 호소카와 가문 슬하의 미요시 가문(三好氏)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에 벌어지게 된다. 미요시 가문은 본거지인 아와 국을 비롯하여 사누키국, 아와지국, 셋쓰국, 이즈미국, 가와치국, 야마시로국, 야마토국, 단바국 등 광대한 지역을 실력으로 손에 넣고, 각 구니에 심복을 심어 지배하였다. 미요시 나가요시 사망하자 미요시 가문의 세력은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 이 틈을 노려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다이묘 간의 조정자 역할과 다이묘에게 막부의 역직을 하사하는 등 활발한 활동으로 막부 권위의 회복을 꾀하였으나, 이에 위협을 느낀 미요시 가문에 의하여 암살당하고(에이로쿠의 변), 막부의 권위는 다시 크게 실추되었다. 그 후 오다 노부나가가 상락하여 미요시 세력을 제압하고,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해 긴키 지방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3. 4. 7. 주고쿠 지방
오우치 요시오키(大内義興)와 아마고 쓰네히사(尼子経久)의 대립은 센고쿠 시대 초기 주고쿠 지방의 가장 큰 이슈였다. 스오국 야마구치를 본거지로 하는 오우치 요시오키는 명·조선과의 대외무역을 장악하고 세력을 확장하여 한때 주고쿠 및 규슈 7개국을 지배하였으며,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足利義稙)를 옹립하고 상락하여 요시타네의 쇼군 재취임을 달성하는 등 중앙 정치에도 개입하였다. 이즈모 슈고다이 아마고 쓰네히사는 갓산토다 성(月山富田城)을 탈취하고 슈고인 교고쿠 가문(京極氏)을 축출하고 세력을 키워, 전성기때는 주고쿠 9개국을 지배하였다. 오우치 가문(大内氏)과 아마고 가문(尼子氏)은 여러 차례에 걸쳐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주고쿠 지방의 패권을 다투었으나 끝내 승부를 가리지는 못하였다.
두 세력의 접경지역인 아키국에서는 호족출신인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가 아키의 여러 호족을 제압하고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하였다. 모리 모토나리는 주가 아마고 가문을 등지고 오우치 가문에 협력하였고, 이를 응징하고자 아마고 하루히사(尼子晴久)가 군을 이끌고 요시다 고리야마 성(吉田郡山城)을 공격하였다. 이에 모리 모토나리는 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에게 원군을 요청하였고, 모리·오우치 연합군은 아마고 군을 격파하였다(요시다 고리야마 전투). 이후 오우치 가문내에서 중신 스에 다카후사(陶隆房)가 모반을 일으켜 오우치 요시타카를 죽이고 실권을 장악하는 사건이 발생하자(다이네이지의 변(大寧寺の変)), 모리 모토나리는 역신 타도의 기치를 올려 스에 다카후사를 이쓰쿠시마섬에서 격파하고 오우치 가문의 영지인 스오국, 나가토국을 장악하였다(이쓰쿠시마 전투(厳島の戦い))). 이즈모 국에서도 아마고 하루히사가 사망하고 신임 당주와 고쿠진 영주들이 마찰을 빚는 등 아마고 가문의 세력이 위축되기 시작하자, 모리 가문(毛利氏)은 아마고 가문의 영지 이즈모로 침공하였다. 난공불락의 견성 갓산토다 성에서 농성하던 아마고 가문은 장기간의 지구전으로 병량부족에 시달려 결국 모리 가문에 항복하였다(갓산토다 성 전투(月山富田城の戦い)). 이로써 모리 가문은 명실상부한 주고쿠의 패자가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주고쿠 방면 책임자 하시바 히데요시가 미키 성(三木城), 돗토리 성(鳥取城), 다카마쓰 성(高松城)을 차례차례 공략하여 모리 가문을 압박하지만(주고쿠 정벌),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하시바 히데요시는 모리 가문과 재빨리 화친을 하고 급히 회군하여, 교토 인근 야마자키에서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를 격파하였다(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 그 후,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의 실권을 장악하고 명실상부한 천하의 패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후, 모리 가문은 도요토미 가문(豊臣氏)에 협력하여 시코쿠 정벌, 규슈 정벌, 오다와라 정벌 등에서 활약하였다. 이에 도요토미 정권의 중신인 다섯 명의 고다이로 중 모리 가문의 사람이 두 명[158] 이나 들어가는 등 모리 가문은 도요토미 정권에서 후대받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가 대립하여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모리 가문의 당주 모리 데루모토가 명목상의 서군 총대장으로서 전투에 참가하였기 때문에 서군 패전 뒤 모리 가문은 스오, 나가토 2개국 369000석으로 감봉되었다.
그 밖에 주고쿠 지방의 주요 센고쿠 다이묘로는 비젠의 우라가미 무라무네(浦上村宗)와 그의 가신이었던 우키타 나오이에 (宇喜多直家)등이 있다. 우라가미 무라무네는 하리마 슈고 아카마쓰 가문(赤松氏)의 중신이었지만, 아카마쓰 마사노리(赤松政則)의 죽음을 계기로 독립하여 아카마쓰 가문의 영지인 하리마 국, 비젠 국, 미마사카국으로까지 그 위세를 떨쳤다. 무라무네는 세력을 잃은 호소카와 다카쿠니(細川高国)를 지지하며 막정(幕政)에 관여하였으나, 미요시 가문과의 싸움에서 패하여 전사하였다. 우라가미 무네카게(浦上宗景)가 그 뒤를 이었지만, 무네카게는 중신 우키타 나오이에의 모반으로 실권을 잃고 추방당하였다. 비젠을 장악한 우키타 나오이에는 선견지명이 있는 인물로 하시바 히데요시가 하리마 국 히메지성(姫路城)에 입성하자 즉시 항복하고 자신의 적자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를 인질로 보내어 신임을 얻는 등 뛰어난 정치수완을 보였다. 우키타 히데이에는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아 젊은 나이에도 고다이로의 한 사람으로 임명되는 등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 중용되었으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으로 참전하였기 때문에 패전 후 하치조섬으로 유배당하여, 다이묘로써 우키타 가문은 멸문되었다.
3. 4. 8. 시코쿠 지방
시코쿠 동부인 아와 국, 사누키국은 지리적으로 긴키 지방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호소카와 가문(細川氏)의 세력기반이었기 때문에 자주 긴키의 정쟁에 휘말렸다. 그러나, 시코쿠는 주위에 적으로 삼을 만한 세력이 존재하지 않아서, 조소카베 가문(長宗我部氏)이 시코쿠를 통일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영주가 그대로 자리를 지켰다.
아와 국은 호소카와 가문이 지배하였고, 후에 호소카와 가문의 중신인 미요시 가문(三好氏)이 실질적으로 지배하였지만, 호소카와 가문 자체는 에도 시대까지 아와 야카타(阿波屋形)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센고쿠 시대 아와 국의 거점은 쇼즈이 성(勝瑞城)이었다. 사누키 국에서 사누키 동부는 슈고다이 야스토미 가문(安富氏)이 통치했지만, 후에 미요시 가문의 일문으로 맞아들인 소고 가문(十河氏)이 미요시 가문의 대관으로 이 지역을 통치하게 된다. 사누키 서부는 슈고다이의 가가와 가문(香川氏)이 주고쿠 지방의 모리 가문(毛利氏)과 결탁하여 미요시 가문과 대립하지만, 젠쓰지 전투(善通寺合戦) 이후 미요시 가문의 지배하에 있게 된다. 그 후, 미요시 가문이 쇠퇴하자 가가와 가문은 오다 가문(織田氏)에 복종하였다.
이요국에서는 슈고 고노 가문(河野氏)이 이요 중부를, 우쓰노미야 가문(宇都宮氏)이 오즈 지역을, 사이온지 가문이 이요 남부를 지배하였다. 이요는 지리적으로 산악지대가 많았고 주고쿠와 규슈에 가깝기 때문에 모리 가문과 오토모 가문(大友氏)의 간섭이 많아서 큰 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도사국에서는 명목상의 슈고 호소카와 가문이 있었지만, 시치슈고(七守護)라고 불리는 호족이 도사 중부에 할거하며 구게 가문인 이치조 가문(一条氏)을 맹주로 따랐다. 이치조 가문은 시치슈고의 3배 정도의 세력을 보유하며 도사 국내의 정치를 좌우하였다. 후에 이치조 가문의 원조로 부흥에 성공한 조소카베 구니치카(長宗我部国親),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 부자는 시치슈고와 이치조 가문을 추방하고 도사를 통일하게 된다. 이어서 모토치카는 시코쿠 통일을 진행하여 도사 평정 후 10년 뒤 1585년에는 시코쿠 전역을 통일하였다. 아와지국은 슈고 호소카와 가문이 통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에 의해 조소카베 가문은 도사 일국에 만족해야 했고, 나머지 지역은 히데요시 휘하 중신들에게 맡겨져, 아와 국은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 사누키 국은 센고쿠 히데히사(仙石秀久), 이요 국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다스리게 되었다.
3. 4. 9. 규슈 지방
가마쿠라 막부를 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규슈의 무가(武家)들이 다이라 씨(平家) 측이었기에 신임하지 않았다. 요리토모는 간토(関東)에서는 무명에 가까웠지만 신하로 등용했던 쇼니씨(少弐氏), 오토모씨(大友氏), 시마즈씨(島津氏)를 대관(代官)과 같은 존재로 하여, 큐슈의 슈고로 삼았다. 가마쿠라 시대에 지쿠젠, 히젠, 부젠은 쇼니(무토)(少弐(武藤))씨, 지쿠고, 히고, 분고는 오토모씨, 사쓰마, 오스미, 휴가는 시마즈씨가 다스리며 큐슈의 통치 체제가 형성되었다. 그 아래에는 지토(地頭)로서 헤이안 시대 이래의 마쓰우라씨(松浦氏), 아키즈키씨(秋月氏), 가마치씨(蒲池氏), 기쿠치씨(菊池氏) 등 전(前) 다이라 씨(平家) 측 무가(武家)들이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전국 시대 초, 쇼니, 오토모, 시마즈 세 가문은 자신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또한 지토(地頭) 출신의 각 국의 국인(国人) 호족(豪族)들은 자립을 위해 싸움을 벌였다.[48]
그러나 쇼니씨(少弐氏)의 세력은 규슈 단다이(九州探題)에 적대했기 때문에 무로마치 시대 후기에는 이미 쇠퇴해 있었고, 무나카타씨(宗像氏)나 아소씨(麻生氏) 등 지쿠젠, 부젠의 국인(国人)들은 주고쿠 지방의 오우치씨(大内氏)의 영향을 받았다. 쇼니씨는 히젠, 쓰시마의 군대를 이끌고 오우치씨 소탕을 위해 여러 번 지쿠젠에 침입했지만, 오히려 오우치씨 측에 붙은 류조지씨(龍造寺氏)의 하극상으로 멸망했다. 이 오우치씨가 스에씨(陶氏)에 의해 멸망하자 히젠은 독립하고, 지쿠젠과 부젠은 오토모씨(大友氏)의 간섭을 받았다. 스에씨(陶氏)를 멸망시킨 모리씨(毛利氏)의 친족이 양국에 있었기 때문에 모리씨와 오토모씨는 북지쿠젠에서 싸움을 벌였다.[48]
오토모씨는 분고(豊後)를 거점으로 남지쿠고(南筑後)의 가마치씨(蒲池氏)를 중심으로 지쿠고 15성(筑後十五城)이 근거지를 둔 지쿠고, 그리고 아소씨(阿蘇氏)와 사가라씨(相良氏)의 히고(肥後)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스에씨(陶氏)가 오우치씨(大内氏)를 멸망시키자, 이를 지원하여 부젠, 지쿠젠도 얻었다. 또한 오토모 소린(大友宗麟)은 동시에 기독교를 보호하고 남만무역을 활발하게 했다. 그러나 오토모씨는 시마즈씨(島津氏)와의 미미가와 전투(耳川の戦い)에서 대패하고, 가신과 막하의 국인(国人)들의 배반이 잇따라 급속도로 쇠퇴해 갔다. 그 기회를 타서 히젠(肥前)에서는 쇼니씨(少弐氏)에 대한 반란으로 흥기한 류조지씨(龍造寺氏)가 세력을 확장하여, 류조지 다카노부(龍造寺隆信) 시대에 이르러 잠시 오토모, 시마즈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했지만, 오키타나와테 전투(沖田畷の戦い)에서 다카노부가 전사하자 급속도로 쇠퇴하여, 곧 중신인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48]
시마즈씨(島津氏)의 전국 시대는 일족 내부의 다툼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분가(分家)인 시마즈 다다요시(島津忠良)의 아들 시마즈 다카히사(島津貴久)가 본가를 이었다. 기타인씨(祁答院氏), 히시가리씨(菱刈氏), 기모쓰키씨(肝付氏) 등 수많은 호족(豪族)들과 싸움에 시달린 후, 시마즈 다카히사의 아들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의 지휘 아래 사쓰마, 오스미를 통일했다. 기자키바루 전투(木崎原の戦い) 이후로는 이토씨(伊東氏)를 평정하고, 오토모 소린(大友宗麟)과의 미미가와 전투(耳川の戦い)에서 대승을 거두어 사쓰마, 오스미, 휴가 삼주(三州) 통일을 완성하고, 큐슈 통일 전쟁을 시작했다. 지쿠젠, 부젠만 남은 상황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중앙군의 개입이 시작되어 항복했다.[48]
3. 5. 임진왜란과 센고쿠 시대의 종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농민 출신으로, 아시가루, 사무라이를 거쳐 센고쿠 다이묘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주군 오다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살해당하자, 재빨리 모리 씨와 화친하고 군대를 돌려 야마자키 전투에서 아케치 미쓰히데를 격파했다.[33] 히데요시는 이 승리로 노부나가의 복수를 하고, 노부나가의 후계자 자리를 향해 나아갔다.
1582년,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후계 자리를 두고 경쟁하던 시바타 가쓰이에와 오다 노부타카를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물리쳤다.[33] 1583년에는 오사카 성을 짓기 시작했다. 1584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오다 노부오 연합군과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격돌했으나, 노부오와 화해하며 휴전했다.[33]
1585년, 히데요시는 시코쿠 정벌에서 쵸소카베 모토치카를 꺾고 시코쿠를 평정했다.[33] 1586년에는 귀족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관백과 태정대신에 임명되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33] 1587년 규슈 정벌에서 시마즈 씨를 굴복시키고 규슈를 평정했다.[33]
1590년, 히데요시는 오다와라성 전투에서 호조 우지나오를 항복시키고 간토 지방을 평정했다. 같은 해 도호쿠 지방의 다이묘들에게도 충성 서약을 받아내며 마침내 일본 전국 통일을 완수했다.[33][34]
하지만 히데요시의 통일 이후에도 전쟁은 계속되었다.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했지만,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야 비로소 센고쿠 시대의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4. 경제와 사회
센고쿠 시대는 전란의 영향으로 사람과 물건의 유동이 활발해지면서 화폐의 상대적 가치가 상승했다. 감합무역 및 일종의 밀무역인 사무역(私貿易)이라는 명과의 무역이나 남만 무역을 통해, 명으로부터 수입품뿐만 아니라 대량의 동전을 도입하여 화폐 경제를 확립하는 단계에 있었다. 또한, 유럽인의 내항과 함께 금은 환율의 관계로 금은의 수출입이 성행했다. 세계유산에도 등록된 이와미 은광을 대표로 하는 금산, 은광산의 운영이 경제 발전과 함께 중요성을 더했다. 이 무렵, 금은의 순도 개선을 위한 회취법이나 사철에 의한 용광로 생산 등의 신기술도 도입되었다. 금산·은산의 보유가 주목적인 성채도 축조되었고, 금산·은산이라는 권익이 얽힌 전국 다이묘들 간의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락시락좌(楽市楽座)를 통해 자유로운 시장 거래를 권장했고, 도요토미 정권에서도 이를 추진했다. 시장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영국 화폐(領國貨幣)에서 통일 화폐 발행도 이루어졌다.
한편 농촌에서는 각지에 존재했던 쇼엔 제도가 해체되었으나, 조세 체제 안에는 여전히 종래의 명제도(名体制), 직의 체계를 계승한 부분이 남았다. 점차 다이묘 주도에 의한 연공 등의 부담이 평균화되었고, 일지일작인 원칙(一地一作人原則)이 확립되어 토지에 대한 차경(借耕)이 성행하고 가지자(加地子), 작덕분(作徳分)이 성립되었다.
상업 중심지로는 허브 항구로서의 역할을 담당한 사카이(堺)나 하카타(博多)가 번영했다. 거점 간 수송에는 수운이 다용되었고, 동남아시아 지역의 수송 네트워크의 일부로서도 기능하고 있었다. 사카이는 회의 집단(会合衆)인 나야슈(納屋衆)에 의한 합의제하에 자치를 행하고, 도시 전체에 해자(濠)를 둘러, 낭인(牢人)을 용병으로 고용하는 등 전국 다이묘에 의한 지배도 거절하고 있었다. 다른 도시로는 교토나, 지방에서는 야마구치(山口), 오바마(小浜), 시나가와 미나토(品川湊) 등도 집적지나 중계 기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후지키 히사시는 저서 『잡병들의 전장』에서 전국 다이묘의 영웅적인 활약 뒤에서 벌어진 잡병들의 “먹기 위한 전쟁”에 대해 논하고 있다. 무사들의 전투라는 일반적인 이미지 뒤에서, 잡병들은 “난취”라고 불리는 약탈 행위에 열중했다. 방화와 밭갈이에 의한 약탈, 그리고 일반 민중과 농민을 노예로 납치하는 행위가 전국 시대의 전장에서는 용인되었다. 농민으로부터 징용된 아시가루에게는 공을 세우지 않는 한 보수가 나오지 않지만, 이름 있는 무장을 토벌하는 것은 어렵고, 또한 다이묘 측에서도 그들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병사들의 난취를 묵인하거나 권장했다. 우에스기 겐신은 타국 출병을 적극적으로 실시했는데, 이것은 “출가”와 “구제”의 성격을 가진 것이라고 한다.
노예 사냥과 약탈은 여러 지역에서 행해졌으며, 기독교 선교사를 통해 해외로 팔린 사람들도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바테렌 추방령을 발표하여 기독교를 금지했다.
4. 1. 농업 생산력의 증대
막부는 재정 확보를 위해 농업 진흥책을 강구했다. 그 결과 신전지가 늘어났으며, 여러 농기구가 발달하면서 농업 생산량은 이전 시대보다 증가했다.[159] 또한 농업 기술도 발전했는데, 각 막부는 우마(牛馬) 경작법을 전국적으로 보급했으며, 농학도 발달하며 미야자키 야스사다의 『농업전서(農業全書)』가 쓰여지는 등, 각종 학문적 성과를 이루기도 했다.[159]옻나무, 차, 닥나무 외에도 담배, 창포 등이 각지의 특산물로서 재배되었다.
중세 일본 열도에서는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보급되었고, 15세기 기내에서는 삼모작을 실시하는 지역도 있었다[140](단, 이모작이 적극적으로 행해진 것은 기내와 서일본이었고, 동일본에서는 거의 행해지지 않았다[141]). 보리는 벼와 달리 비과세였고 수확물 전부가 농민의 것이었다. 따라서 농민에게 이모작의 중요성은 높았다.[142] 중세 일본의 농업 생산은 이모작의 보급 외에 용수 정비, 토지 개량으로 향상되었다.[143]
전국 다이묘 휘하에서 대규모 신전 개발과 관개 정비가 진행되었고, 축성 기술에서 갈고 닦은 토목 기술이 농업에도 응용되었다. 『십개초(拾芥抄)』에 따르면 100만 쵸(町)로 여겨졌던 전국의 전답 면적이 게이쵸(慶長) 연간의 게이쵸 일본도 편찬에서는 160만 쵸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각지에서 쌀 이외의 특산물도 활발하게 생산되어, 야마시로, 야마토의 차나 키이의 밀감 등이 알려지게 되었다. 목면 재배가 보급된 것도 이 시기이다.
4. 2. 상업의 발달과 도시의 성장
이전 시대에 비해 화폐 사용이 보편화된 시기였다. 연공으로 수납된 쌀과 특산물 등은 주로 화폐로 교환되었다. 초기에는 제번(諸藩)들이 자신의 근거지에 물자 창고를 설치하여 물자를 보관하고 직접 거래 형식으로 물품을 판매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문 상인 집단인 구라모토(藏元)와 가케야(掛屋)가 생기면서 간접 거래 형식이 활발해졌다.상업 구조의 발달은 도이야(問屋)·나카가이(仲買)·고우리(小賣) 등의 전업 방식을 초래했다. 이 중에서도 도이야와 나카가이는 공동 이익을 꾀하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동업회인 나카마(仲間)를 결성했다. 나카마는 당시 공급과 유통 체계를 독점했으며, 오늘날의 사규(社規)와 같은 동업 규칙을 만들어 자신들이 이끌던 상공업 종사자를 효율적으로 통제했고 동시에 물가 조절의 한 축을 담당하기도 했다. 막부는 영업세를 받아 군사를 정비하기 위해 이 조직을 18세기 초에 공인하기에 이르렀고, 공인된 나카마는 가부나카마(株仲間)라고 불렸다. 이러한 상업의 발달은 일본의 도시와 교통이 발전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임업의 확대를 초래했다.[160]
4. 3. 노예무역
헤이안 시대 말부터 노예무역이 시작되었으나 발달된 시기는 센고쿠 시대였다. 이는 상대적으로 개발이 조금 되었고 만성적으로 노동력이 부족한 지방에 막부가 난립되면서 노예 수요가 상당히 높아진 것과 관련이 높다.[161] 당시 일본 전역에 포르투갈인들과 네덜란드인 상인들이 있었는데, 이들 중 노예무역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상인이 적지 않았으며, 이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저렴한 값에 노예 거래를 할 수 있는 일본에서 노예무역을 했다. 막부는 이들에게서 화승총(조총)을 받는 대가로 노예 거래를 했다.[162] 노예 거래는 주로 규슈 지역에서 활발했으며, 번주의 명령으로 암암리에 실행되었으나 전문적인 노예상도 존재했다. 그러나 실제로 거래된 '노예'는 노예 신분이라기보단 각 막부에서 납치 등 인신매매를 통해 끌려온 평민들이 대다수였다. 전문 노예상이 직접 인신매매에 가담하여 거래에 쓰일 사람을 납치하기도 했으며, 일부는 채권-채무 관계를 이용하여 채무자를 노예로 팔기도 했다.이 시기는 상업과 금융이 발달한 동시에 부자와 빈민의 격차가 커지던 시절로, 빚 또는 가난에 시달리던 평민 계층이 자식을 파는 행위가 흔했던 것으로 보인다.[163]
당시는 율령 체제가 붕괴되었고 통일된 법 체계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행위를 처벌할 수 없었다. 도쿠토미 소호가 저술한 『근세일본국민사』에 따르면, 이 시기 인신매매를 통한 노예무역의 실상은 참담했으며, 센고쿠 말 성노예로 팔려나간 여성들의 수만 해도 약 50만명에 달했다고 추정된다.[164]
5. 군사
센고쿠 시대에는 각 세력 간의 문제 해결 수단으로 무력이 중요하게 여겨져, 군비의 정비, 유지, 향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경향은 센고쿠 다이묘와 고쿠진, 토호뿐만 아니라 종교 조직과 자치 조직에서도 나타났다. 종교 조직은 승병 조직을 유지하고 사원을 전투 거점으로 활용했으며, 자치 조직은 방어 시설을 구축하고 로닌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일부는 닌자 집단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센고쿠 시대의 전쟁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낮은 강도의 무력 투쟁부터, 대규모 전투, 국가 총력전과 유사한 형태까지 다양했다. 대부분의 무력 분쟁은 인접 세력과의 영지 경계 부근에서 벌어지는 소규모 분쟁이었다.
1543년 포르투갈로부터 조총이 전래된 후,[15] 일본에서 개량 및 대량 생산되어 '타네가시마'라는 총이 전쟁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총의 도입으로 아시가루로 구성된 상비군이 중요해졌고, 소규모 영주는 독립을 유지하기 어려워져 센고쿠 다이묘 휘하로 통합되었다. 이 시기에는 다수의 타네가시마(총)를 조직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총포 제작자와 무기상을 확보하고, 납과 초석을 대량으로 수입하며, 정기적인 사격 훈련을 실시하는 등 총포를 활용하여 세력을 확장했다.[28][29][30][31]
합전에서는 무장끼리의 일기토치로 결판을 짓는 경우가 많았고, 적장의 목을 가져오는 것이 공으로 여겨졌다.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는 오다 노부나가가 다수의 철포를 이용하여 다케다 가쓰요리를 격파했다.
각 세력의 군사력에는 지역 차가 존재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대포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포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센고쿠 시대의 성은 대부분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며, 성벽은 부분적으로 사용되었다. 무로마치 시대에 보급된 산성과 산성 기슭의 거관(居館)의 이원 구조로 여겨져 왔으나, 발굴 조사를 통해 산성에도 주거 시설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16세기 중반에는 간논지성 등에서 뒤채움 돌이 있는 성벽이 축성되기 시작했다. 각 센고쿠 다이묘는 고유의 축성술을 발전시켰으며, 환마출(丸馬出), 수직호(竪堀), 루(櫓) 등 지역에 따라 다양한 縄張り가 나타났다.
6. 문화
센고쿠 시대 초기의 문화는 북산문화와 동산문화와 마찬가지로 선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하극상을 기치로 내건 센고쿠 시대의 기풍은 문화에도 영향을 주어, 점차 호화로움을 추구하는 모모야마 문화 발현의 밑거름이 되었다.
센노 리큐가 다례를 완성하면서 선 사상에 기반한 “와비·사비”의 미의식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제안했다고 전해지는 “금 다실”이라는 극단적인 호화로움을 동시에 내포하게 되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일본 문화 전반에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센고쿠 시대에 활동한 화가로는 세츠슈 도요(雪舟等楊), 세츠손 슈케이(雪村周継), 토사파의 토사 미츠노부(土佐光信), 카노파의 카노 모토노부(狩野元信), 하세가와 도하쿠(長谷川等伯) 등이 있다. 무로마치 시대부터 문예나 그림을 즐기는 무장이 나타났으며, 현재에도 작품의 예술적 가치가 평가되는 무가 인물로는 『매도』(토키의 매)의 토키 요리나리(土岐頼芸), 『다케다 신코상』(武田信虎像)·『오이 부인상』(大井夫人像)으로 부모의 초상을 남긴 다케다 신렌(武田信廉) 등이 있다.
문화 담당자였던 천황이나 공가는 이 혼란의 시대에 문화 계승에서 존재 의의를 찾도록 강요받았고, 스스로도 찾고 있었다. 히가시 조에(東常縁)나 호소카와 유사이(후지타카)(細川幽斎(藤孝))와 같은 문화인 무가를 끌어들여 유직고실과 고킨덴주라는 문화를 계승했다. 그들은 난리를 피해 지방으로 피난하기도 했는데, 토사의 남화(南画)가 그렇게 전해졌다.
에이쇼 16년(1519년) 에쓰스이 성 전투를 둘러싼 고노에 마사미치(近衛尚通)의 일기 『후호조지 관백기』(後法成寺関白記)와 와시오 타카야스(鷲尾隆康)의 일기 『니스이키』(二水記)를 비교하면 양자의 차이가 명확하다. 고노에 마사미치는 합전 당사자를 포함한 무장이나 그 가신, 승려 등 다양한 신분의 사람에게서 정보를 얻어 합전의 사정을 파악했지만, 와시오 타카야스는 공가 사회의 풍설을 듣고 “공포”했을 뿐이다. 후자와 같은 공가는 무사층 등 다른 계층과 연결되지 못하고 역사 속에서 사라져 갔다(와시오가는 타카야스 대에서 단절되어 에도 시대 초기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재흥되었다).[144]
무가는 명가뿐만 아니라 신흥 세력도 문화 진흥에 기여했다. 이는 문화를 받아들여 허세를 부리는 측면이 강하지만, 혼란의 시대에 문화로 마음을 달래고 안정을 추구하는 마음의 표현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스오(周防)의 다이묘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가 교토의 귀족을 다수 초대하여 야마구치를 교토화하려고 노력한 것이 그 예이다.
전국 시대, 지방 무사들은 연가(連歌)나 축국(蹴鞠) 등 천황과 귀족이 즐기던 우아한 세계, 즉 문화에 대해 매우 강한 동경을 품었다.[128][129] 그들은 중앙 귀족에게서 문화재를 얻기를 간절히 바랐고, 귀족들 또한 지방 다이묘에게 가도(歌道)나 축국을 전수하며 ‘지방에서의 수입’을 얻었다.[129] 이처럼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궁정에서 발전된 교토 문화가 지방으로 전파·침투되었고,[130] 결과적으로 문화라는 소프트 파워가 천황제 존속을 가져왔다.
종교의 경우, 일련종이나 정토진종과 같이 厭世(염세) 분위기와 면죄에 대한 구심점에서 시작되어 이후 구세에 대한 갈망과 강한 결속을 보인 종파의 포교가 성공했다. 한편으로는 전래된 기독교도 확산되어 갔다.
일본은 아스카 시대 불교 전래 이래 신불습합을 기반으로 한 신과 불에 대한 신앙이 깊었지만, 전국 시대에는 천도 사상이 전국 무장에게 퍼져 "천운"을 다스리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신도·불교·유교가 결합한 천도 사상을 공통 틀로 한 "제종은 하나"라는 일본을 하나로 묶는 "하나의 체계를 갖춘 종교"가 형성되어, 대명을 포함한 무사 계급과 광범위한 서민의 생각이 되었고, 일본인에게 깊이 스며들게 되었다.[145]
7. 주요 센고쿠 다이묘
대부분의 센고쿠 다이묘는 슈고 다이묘, 슈고다이, 쿠니진 출신이었다. 쿠니시나 쿠게 출신도 있었으며, 드물게 천민 출신에서 센고쿠 다이묘가 된 자(도요토미 히데요시 등)도 있었다. 이는 당시 유행했던 게코쿠죠의 사례로 여겨진다.
센고쿠 다이묘는 영내에 일원적인 지배를 행사했다. 이 영지는 높은 독립성을 가지고 있어 지역 국가라고 부를 수 있는 실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센고쿠 다이묘에 의한 지역 국가 내 지배 체제를 다이묘령국제라고 한다. 센고쿠 다이묘는 영내에서 반드시 초월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센고쿠 다이묘는 영내의 쿠니진·히칸층을 가신으로 조직화했지만, 사실상 이 쿠니진·히칸층이 센고쿠 다이묘의 권력 기반이었다. 센고쿠 다이묘는 가신인 쿠니진·히칸층이 결성한 잇키 관계에 의지하여 존립했으며, 쿠니진·히칸층의 권익을 보호할 능력이 없는 센고쿠 다이묘는 흔히 배제되었다.
센고쿠 다이묘 중에서 천하패권을 거머쥔 다이묘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다음은 이들을 빗댄 센류이다.
# 울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두견새
# 울지 않으면 울게 해 보이겠다. 두견새
#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리겠다. 두견새
# 오다가 준비하고, 하시바(도요토미)가 반죽한 천하의 떡을 앉은 채로 먹는 이에야스
1번은 오다 노부나가, 2번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3번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삶과 행동을 빗댄 것이다. 4번은 그들의 통일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8. 주요 전투
센고쿠 시대의 전투는 소규모 충돌부터 대규모 회전까지 다양한 양상을 보였다. 주요 전투는 다음과 같다.
;도호쿠 지방
;간토 지방
- 조쿄의 난 (1487년 ~ 1505년)
- 가와고에성 전투 (1546년)
- 오다와라 공성전 (1560년)
- 고노다이 전투 (1538년, 1563년 ~ 1564년)
- 미마세 고개 전투 (1569년)
- 오다와라 정벌 (1590년)[2]
;주부 지방
- 아즈키자카 전투 (1542년 ~ 1548년)
- 시오지리토게 전투 (1548년)
- 우에다하라 전투 (1548년)
- 가와나카지마 전투 (1553년 ~ 1564년)
- 오케하자마 전투 (1560년)
- 미카타가하라 전투 (1573년)
- 나가시노 전투 (1575년)[2]
- 데토리가와 전투 (1577년)[2]
-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1584년)[2]
- 세키가하라 전투 (1600년)[2]
;긴키 지방
- 후나오카야마 전투 (1511년)
- 에구치 전투 (1549년)
- 에이로쿠의 변 (1565년)
- 가네가사키 전투 (1570년)
- 아네가와 전투 (1570년)
- 이시야마 전투 (1570년 ~ 1580년)[2]
- 기즈가와구치 전투 (1576년 ~ 1578년)[2]
- 기슈 정벌 (1577년 ~ 1585년)[2]
- 미키 전투 (1578년 ~ 1580년)[2]
- 혼노지의 변 (1582년)[2]
- 야마자키 전투 (1582년)[2]
- 시즈가타케 전투 (1583년)[2]
- 오사카 전투 (1614년 ~ 1615년)[2]
;주고쿠 지방
- 요시다 고리야마 전투 (1540년 ~ 1541년)
- 이쓰쿠시마 전투 (1555년)
- 갓산토다성 전투 (1542년 ~ 1543년, 1562년 ~ 1565년)
- 주고쿠 정벌 (1577년 ~ 1582년)[2]
- 빗추 다카마쓰성 전투 (1582년)[2]
;시코쿠 지방
;규슈 지방
- 다테나와테 전투 (1530년)
- 이마야마 전투 (1570년)
- 기자키바루 전투 (1572년)
- 미미가와 전투 (1578년)[2]
- 오키타나와테 전투 (1584년)[2]
- 헤쓰기가와 전투 (1587년)[2]
- 규슈 정벌 (1587년)[2]
이러한 전투들은 대개 인접한 세력들 간의 영토 분쟁이나 소규모 충돌에서 비롯되었지만, 점차 확대되어 대규모 군사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전투에서는 무장 간의 일기토가 벌어지기도 했으며, 적장의 목을 베는 것이 공으로 여겨졌다.
1543년 타네가시마에 철포(화승총)가 전래되면서, 전투 방식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오다 노부나가는 나가시노 전투에서 철포를 적극 활용하여 다케다 가쓰요리를 격파했고, 시마즈 이에히사와 아리마 하루노부 연합군은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철포대를 이용해 류조지 다카노부 군을 격파했다.
9. 센고쿠 시대를 소재로 하는 작품
센고쿠 시대를 소재로 한 작품은 다음과 같다.
=== 게임 ===
-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 전국무쌍 시리즈
- 쇼군: 토탈 워
- 쇼군2: 토탈 워
- 파라독스: 센고쿠
- 이누야샤
=== 드라마 ===
9. 1. 게임
wikitext-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 전국무쌍 시리즈
- 쇼군: 토탈 워
- 쇼군2: 토탈 워
- 파라독스: 센고쿠
- 이누야샤
```
수정 사항:
1. 템플릿 제거: `` 템플릿은 허용되지 않는 템플릿이므로 제거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경우 단순히 템플릿을 제거하면 게임 목록 앞에 국기 그림이 사라져 어색해집니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템플릿을 제거하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판단됩니다.
9. 2.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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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室町・戦国期研究を読みなおす
思文閣出版
2007
[41]
학술지
戦国期畿内研究の再構成と「細川両家記」
大阪市立大学大学院文学研究科 : 都市文化研究センター
2010
[42]
서적
戦国期の政治経済構造
岩波書店
1997
[43]
서적
岩波講座日本歴史
[44]
학술지
明応の政変後の争乱における畠山義豊と足利義澄陣営
戦国史研究会
2022
[45]
학술지
明応年間における和平交渉の展開と「二人の将軍」
戦国史研究会
2023
[46]
서적
戦国の地域国家
吉川弘文館
2003
[47]
서적
真実の戦国時代
柏書房
[48]
서적
西国の戦国合戦
吉川弘文館
[49]
학술지
鈎の陣にみる戦国初期の将軍と諸大名
吉川弘文館
2019-04
[50]
서적
古文書の語る日本史
筑摩書房
1989-05
[51]
학술지
将軍権力と大名との関係を見る視点
校倉書房
1997-12
[52]
학술지
戦国時代の社会
中世文学会
1996
[53]
서적
織田信長
筑摩書房
2014-10
[54]
학술지
奥羽大名と越前朝倉氏の通好
秋田大学史学会
2015-03
[55]
학술지
戦国期の地域権力と「国家」・「日本国」
日本史研究会
2005-11
[56]
학술지
後北条氏と古河公方足利氏の関係をめぐって : 芳春院殿・芳春院周興を通じて
史学会
1978
[57]
서적
[58]
서적
戦国の活力
小学館
2008-07
[59]
서적
三好長慶
吉川弘文館
1968
[60]
서적
在京大名細川京兆家の政治史的研究
思文閣出版
2014-04
[61]
학술지
<研究ノート>音喜多勝氏所蔵八戸湊文書覚書
弘前大学國史研究会
1999
[62]
서적
室町幕府全将軍管領列伝
星海社
2018-10
[63]
서적
室町時代の出雲と京極氏
松江市歴史まちづくり部史料調査課
2022
[64]
학술지
15・16世紀山陰地方の政治と流通
http://ir.lib.shiman[...]
貿易陶磁研究会
2016-09
[65]
서적
戦国期の権力と文書
高志書院
2004-02
[66]
서적
中世後期の山名氏の研究
日本史史料研究会
2009
[67]
서적
古文書の語る日本史
筑摩書房
1989-05
[68]
학술지
幕府―守護体制の変質過程 : 十六世紀前半の「国役」を中心に
史学研究会
1985-07
[69]
서적
戦国時代の足利将軍
吉川弘文館
2011-07
[70]
학술지
戦国大名島津氏の権力形成過程 : 島津貴久の家督継承と官途拝領を中心に
九州大学大学院比較社会文化研究科
2009
[71]
서적
三好長慶
宮帯出版社
2013
[72]
서적
越後上杉氏と京都雑掌
岩田書院
2015-05
[73]
서적
上杉謙信
ミネルヴァ書房
2005-12
[74]
서적
2005
[75]
서적
戦国の活力
小学館
2008-07
[76]
서적
信長公記を読む
吉川弘文館
2009-02
[77]
논문
戦国期足利将軍存続の諸要因
2018-08
[78]
논문
『上杉本洛中洛外図屏風』の注文時期とその動機に関するノート ─近年の戦国期畿内政治史研究の成果に学ぶ─
http://id.nii.ac.jp/[...]
20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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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戦国・織豊期の西国社会
日本史史料研究会
2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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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畿内・近国の戦国合戦
吉川弘文館
2009-07
[81]
논문
永禄9年の畿内和平と信長の上洛
史敏刊行会
2007-04
[82]
서적
織田信長<天下人>の実像
講談社
2014-08
[83]
논문
織田信長と足利義昭の政治・軍事的関係-永禄十三年正月二十三日付け「五ヶ条の条書の検討を中心としてー
https://doi.org/10.3[...]
2020-03
[84]
서적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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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2020
[86]
논문
元亀年間における大友氏の政治的・軍事的動向 : 元亀三年伊予出兵の検討を中心として
http://bud.beppu-u.a[...]
大分県地方史研究会
20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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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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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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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織田信長合戦全録
中央公論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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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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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足利義昭政権滅亡の政治的背景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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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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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中世日本の王権と天下成敗権
愛媛大学教育学部
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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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日本古代の「天下」と都城
奈良女子大学 大和・紀伊半島学研究所 古代学・聖地学研究センター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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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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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2014
[97]
서적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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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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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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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後北条氏権力と「国」
https://archives.buk[...]
鷹陵史学会
199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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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戦国の地域国家
川弘文館
20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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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公儀と地域権力
https://hdl.handle.n[...]
早稲田大学大学院文学研究科
20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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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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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戦国期大名間外交と将軍
https://doi.org/10.2[...]
史学会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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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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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信長公記を読む
吉川弘文館
20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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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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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伊達政宗と南奥の戦国時代
吉川弘文館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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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座禅院昌尊の生涯 日光山の終焉と上三川 今泉家
随想舎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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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洛中洛外の群像
平凡社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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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戦国期足利将軍研究の最前線
山川出版社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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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畠山氏研究からみた戦国期畿内政治史像の再検討
大阪市立大学大学院文学研究科 : 都市文化研究センター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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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戦国期畿内の政治社会構造
和泉書院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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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松永久秀と京都政局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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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松永久秀
宮帯出版社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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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河内国守護畠山氏における守護代と奉行人
愛媛大学教育学部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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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畿内戦国期守護と室町幕府
日本史研究会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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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戦国期丹後一色氏の基礎的研究
戦国史研究会
2021
[119]
학술지
戦国期但馬の守護と領主
愛媛大学教育学部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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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戦国期における守護・守護代・国人
日本史研究会
2001
[121]
학술지
戦国期近江三雲氏の動向 : 大名権力と惣国一揆の接点
大阪市立大学日本史学会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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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増補 湖の国の中世史
中央公論新社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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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上平寺城跡遺跡群分布調査概要報告書Ⅱ 高殿地区(上平寺南館跡)
https://sitereports.[...]
2000-03-31
[124]
학술지
尼子氏による出雲国成敗権の掌握
松江市教育委員会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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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戦国期六角氏の地域支配構造 : 地方寺社への関与を手掛かりに
大阪市立大学日本史学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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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六角氏式目制定の目的と背景
鷹陵史学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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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浅井氏の滅亡にみる家臣団の構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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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中世日本における文化的・政治的統合-文化運搬者としての連歌師宗祇をめぐって-
日本国際政治学会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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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銭を運ぶ連歌師 : 日記・紀行文を資料として
関西大学国文学会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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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文化の政治性--天皇と中世文化をめぐって
大谷学会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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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中世後期村落に於ける領主についての一考察
法制史学会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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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戦国乱世を生きる力
中央公論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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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戦国領主と城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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奈良大学文学部文化財学科
20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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城館調査の手引き
山川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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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城郭の見方・調べ方ハンドブック
東京堂出版
2008
[136]
보고서
長野県松本市小笠原氏城館群井川城址試掘・第1次・第2次発掘調査報告書
https://sitereports.[...]
2016-03-25
[137]
보고서
クローズアップ飯盛城2022資料集
https://sitereports.[...]
2022-07-23
[138]
학술지
武家権門の成立と西国領主 : 伊予国の事例から
https://opac1.lib.eh[...]
愛媛大学教育学部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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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戦国大名と本願寺--武家門徒の問題をめぐって
http://id.nii.ac.jp/[...]
大谷学会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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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中世後期における山城国上久世荘の農業生産
http://id.nii.ac.jp/[...]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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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142]
서적
[143]
서적
[144]
서적
戦国期公家社会と荘園経済
続群書類従完成会
[145]
서적
宗教で読む戦国時代
[146]
서적
戦国の地域国家
吉川弘文館
[147]
서적
信長公記
[148]
서적
信長公記を読む
吉川弘文館
[149]
서적
神国論の系譜
法藏館
[150]
서적
[151]
문서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152]
문서
관백(關白)
[153]
문서
이 가즈노 쟁탈전은 에이로쿠 연간까지 이어진다.
[154]
문서
교토쿠의 난(享徳の乱), 조쿄의 난(長享の乱), 에이쇼의 난(永正の乱)
[155]
문서
우에스기 진영
[156]
문서
일설에 의하면 노부토라는 호족연합체제에서 중앙집중체제로 변화를 꾀하다 호족들의 결탁에 의하여 쫓겨난 것이라고 한다.
[157]
문서
구즈류가와 전투(九頭竜川の戦い)
[158]
문서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159]
서적
일본사
대한교과서
[160]
서적
일본사
대한교과서
[161]
서적
일본인이란 무엇인가: 새로운 국화와 칼 일본인이 파헤치는 일본의 행동 원리
페이퍼로드
[162]
서적
천황의 로사리오
[163]
서적
일본인이란 무엇인가: 새로운 국화와 칼 일본인이 파헤치는 일본의 행동 원리
페이퍼로드
[164]
웹사이트
센고쿠 말 기독교 번주들 주도로 성노예로 팔려나간 일본인 여성들에 관한 기사문 자료 1
http://www.japantime[...]
[165]
서적
Samurai William: The Adventurer Who Unlocked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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