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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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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웨덴의 역사는 선사 시대 암각화 발견으로 시작되어, 스베아 왕국을 중심으로 국가가 형성되었다. 바이킹 시대를 거치며 1000년경 스베알란드와 예탈란드를 통치한 올로프 셰트코눙이 등장했다. 1397년 칼마르 동맹을 통해 북유럽 국가들을 통합했으나, 1523년 스웨덴 해방 전쟁에서 승리하여 독립했다. 구스타브 1세 바사 국왕은 근대 스웨덴의 기초를 다지고 종교 개혁을 통해 루터교를 국교로 정했다. 17세기에는 강대국으로 부상하여 발트해 지역을 지배했으나, 대북방 전쟁에서 패배하며 세력 약화를 겪었다. 19세기에는 노르웨이와 동군 연합을 이루고 산업 혁명을 통해 산업 사회로 변모했으며, 중립주의 정책을 펼쳤다. 20세기에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서 중립을 유지하며 복지 국가를 건설했고, 1995년 유럽 연합에 가입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중립 정책을 폐기하고 2024년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가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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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역사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스웨덴 국기
스웨덴 국기
공식 명칭스웨덴 왕국 (스웨덴어: Konungariket Sverige)
표어'스웨덴의 힘과 함께 (스웨덴어: Med Gud för Sverige)'
위치유럽 북부 스칸디나비아 반도
면적450,295 제곱킬로미터
수도스톡홀름
공용어스웨덴어
역사
선사 시대기원전 12000년경 - 기원후 800년
바이킹 시대800년 - 1050년
스웨덴 왕국 성립1050년 - 1397년
칼마르 동맹1397년 - 1521년
바사 왕조1523년 - 1654년
스웨덴 제국 (발트 제국)1611년 - 1721년
팔츠-츠바이브뤼켄 왕조1654년 - 1720년
헤센 왕조1720년 - 1751년
자유의 시대1718년 - 1772년
홀슈타인-고토르프 왕조1751년 - 1818년
구스타프 시대1772년 - 1809년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1814년 - 1905년
베르나도테 왕조1818년 - 현재
현대 스웨덴 왕국1905년 - 현재
제1차 세계 대전1914년 - 1918년
제2차 세계 대전1939년 - 1945년
정치
정치 체제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국왕칼 16세 구스타프
총리울프 크리스테르손
인구 통계
인구약 1,037만 명 (2024년)
경제
통화스웨덴 크로나 (SEK)
기타
국가 코드SE
국가 도메인.se
전화 코드+46

2. 선사 시대와 초기 스웨덴

스웨덴에서는 노르웨이와 마찬가지로 전국에서 많은 암각화(스웨덴어: hällristningar)가 발견된다.[2] 특히 보후슬렌 지방과 칼마르 주의 북부 지역인 튜스트에 암각화가 집중되어 있다.[3] 가장 오래된 암각화는 옘틀란드 지방에서 발견된 기원전 5000년경의 그림으로,[4] 엘크, 순록, 곰, 물개 등 야생 동물을 묘사하고 있다. 기원전 2300년에서 500년 사이에는 농업, 전쟁, 배, 가축 등을 묘사한 조각들이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보후슬렌에서는 기원전 800년에서 500년 사이의 성적 본능을 주제로 한 암각화도 발견되었다.[5]

스웨덴이 정확히 언제 국가로 성립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고대 웁살라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스베아 왕국(Svea Rike)이 발전하여 스웨덴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타키투스는 100년경에 이미 스베아 왕국의 존재를 언급했다. 서쪽과 동쪽에 있던 예아트스(Geats) 역시 국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000년경, 스베아와 예타 왕국(Göta Riken)의 왕으로 기록된 올로프 셰트코눙이 처음으로 등장하지만, 그의 재위 기간과 실제 권력은 불확실하다. 12세기 스웨덴에서는 에릭 가문(Erik clan)과 스베르케르 가문(Sverker clan) 사이에 왕위 다툼이 계속되었다.

3. 바이킹 시대와 중세

스웨덴은 수 세기 동안 상인 항해사로서 광범위한 무역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11세기와 12세기 동안 스웨덴은 점차 핀란드를 포함하는 통일된 기독교 왕국이 되었다. 1060년까지 웁살라의 왕들은 17세기까지 덴마크의 지배를 받던 남부 및 서부 해안 지역을 제외하고 현대 스웨덴의 대부분을 통치했다.[6] 1세기의 내전을 거쳐 새로운 왕가가 등장하여 귀족에게 군 복무의 대가로 세금 면제와 같은 특권을 부여하면서 귀족을 희생시켜 왕권의 힘을 강화했다. 스웨덴은 완전하게 발달된 봉건제도를 가진 적이 없었으며, 농민은 농노로 전락하지 않았다.

노르드 신화에서 기독교로의 개종은 복잡하고 점진적이며 때로는 폭력적인 (참조: 웁살라 사원) 과정이었다. 종교적 영향의 주요 초기 원천은 잉글랜드였는데, 이는 데인로에서 스칸디나비아인과 색슨족 사이의 상호 작용과 아일랜드 선교 수도사와의 상호 작용 때문이었다. 독일의 영향은 안스가르의 초기 선교 시도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덜 분명했지만 점차 이 지역의 지배적인 종교 세력으로 부상했으며 특히 노르만 잉글랜드 정복 이후에 그러했다.[6]

1000년경 올로프 셰트코눙은 스베알란드예탈란드를 모두 통치한 최초의 알려진 왕이 되었다. 중세 초기 왕에 대한 역사적 세부 사항은 불분명하며, 심지어 통치 기간의 날짜도 불분명하다. 12세기에는 스웨덴이 여전히 에릭가와 스베르케르가 사이의 왕조 투쟁을 겪고 있었다. 스베알란드와 스웨덴인들은 일반적으로 에릭 왕조를 더 지지했고, 예탈란드와 예트족은 덴마크와 더 우호적인 관계를 원했던 스베르케르 왕조를 더 지지했다. 이 분열은 세 번째 씨족이 에릭 씨족과 결혼하여 비엘보가 왕조를 세우면서 끝났다. 이 왕조는 점차 스웨덴을 강력한 국가로 통합했다.[8]

바이킹 원정 (파란색): 유럽, 북대서양, 지중해 전역에 걸친 광대한 원정의 폭을 묘사


1814년 북유럽의 스웨덴 부족


스웨덴 출신의 바이킹은 유럽 서부와 남부 지역을 약탈하는 데 부분적으로 참여했지만 주로 러시아, 콘스탄티노플, 이슬람 세계(세르클란드)로 동쪽으로 이동했다.[6] 러시아 본토와 많은 항해 가능한 강은 상품과 약탈에 좋은 전망을 제공했다. 9세기 동안 발트해 동쪽에서 광범위한 스칸디나비아 정착이 시작되었다.

초기 중세 시대에 스웨덴 왕국은 또한 노를란드핀란드를 통제하기 위해 확장되었다. 이러한 확장은 스웨덴 역사 전반에 걸쳐 지속될 긴장감을 러시아 국가와 촉발했다.

1319년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마그누스 에릭손 왕 아래에서 통일되었다. 1336년 7월 21일, 마그누스는 스톡홀름에서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으로 즉위했다.

1332년 덴마크 왕 크리스토퍼 2세는 "나라 없는 왕"으로 사망했다. 마그누스 왕은 이웃의 약점을 이용하여 동부 덴마크 지방의 토지를 은 6500kg에 구매했으며, 여기에는 스카니아가 포함되었다.

스웨덴의 흑사병과 스웨덴 내부의 권력 투쟁 이후,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1세 여왕은 1397년 칼마르 동맹에서 스웨덴 귀족의 승인을 받아 북유럽 국가를 통일했다.

스칸디나비아에는 북 게르만 부족들의 소왕국이 난립했지만, 점차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3개 왕국으로 수렴되어 갔다. 그들은 로마인이나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북쪽 사람"(「노르만니」 또는 「노르만족」)이라고 불리며, 선단, 함대를 조직하여 발트해에서 북해 연안에서의 교역, 약탈을 행했다. 특히 약탈을 하는 노르만니는 "바이킹"이라고 불리며, 9세기에는 그 흉포함과 야만성을 두려워했다.(포로가 된 사람들을 노예로 이슬람 세계 등에 수출하는 등 북유럽 사회에도 노예 무역과 노예 제도가 존재했다.) 또한 스웨덴과 그 왕국령이었던 핀란드의 노예 제도는, 1335년에 "기독교도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노예"가 사실상 모든 본토에서 폐지되었다.[57]

12세기가 되자 에리크 9세의 핀란드 진출(북방 십자군[68])이 이루어졌고, 발데마르 왕을 개조로 하는 폴쿵가 왕조 시대에는 핀란드 남부를 병합했다.(스웨덴-핀란드의 형성).

4. 칼마르 동맹 해체와 스웨덴 독립

16세기 구스타브 바사(1496-1560)는 독립적인 스웨덴을 위해 싸웠고, 칼마르 동맹을 복원하려는 시도를 분쇄하며 근대 스웨덴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교황청과 결별하고 스웨덴에 루터교를 세웠다.[9]

16세기 초, 칼마르 동맹이 완전히 해체되면서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사이에 경쟁이 시작되었다. 가톨릭 주교들은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2세를 지지했지만, 그는 구스타브 바사에 의해 전복되었고 스웨덴은 다시 독립했다. 구스타브 1세는 개신교 종교 개혁을 이용하여 교회의 권력을 제한했으며, 1523년 국왕으로 즉위했다. 1527년, 그는 베스테로스 국회(귀족, 성직자, 시민, 자유 농민으로 구성)를 설득하여 농지의 21%를 차지하는 교회 토지를 몰수하도록 했다. 구스타브 1세는 루터교 개혁가들을 보호하고 자신의 사람들을 주교로 임명했으며, 자신의 교회 정책과 중앙 집권화 노력에 대한 귀족들의 반대를 억압했다.[9]

1538년과 1558년에 세금 개혁이 이루어졌으며, 독립 농민에 대한 여러 복잡한 세금이 단순화되고 지역 전체에 걸쳐 표준화되었다. 농장당 세금 평가는 지불 능력을 반영하도록 조정되었다. 국세 수입이 증가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시스템이 더 공정하고 더 수용 가능한 것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1535년 뤼베크와의 전쟁으로 이전에 외국 무역을 독점했던 한자 동맹 상인들이 추방되었다. 사업가들이 책임을 맡으면서 스웨덴의 경제력은 빠르게 성장했으며, 1544년까지 구스타브 1세는 스웨덴 전체 농지의 60%를 통제했다. 스웨덴은 정교한 세금 제도와 정부 관료제를 통해 지원되는 유럽 최초의 근대적 군대를 건설했다. 구스타브 1세는 스웨덴 왕위를 세습제로 선포했고 바사 왕가는 스웨덴(1523–1654)과 폴란드(1587–1668)를 통치했다.[9]

1397년 덴마크노르웨이섭정마르그레테 1세 하에 칼마르 동맹이 결성되어 스웨덴은 덴마크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73] 그러나 스웨덴은 1430년대부터 덴마크 지배로부터의 탈피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기사칼 크누트손은 1438년부터 1470년까지 섭정 및 국왕으로 단속적으로 선출되었으나, 그의 중앙 집권주의에 반대하는 귀족들의 저항이 강했고, 1451년부터 덴마크와 전쟁 상태에 들어갔기 때문에 여러 차례 왕위를 쫓겨났다.[74]

덴마크 지배에 대한 스웨덴인의 저항 운동은 끊임없이 전개되었고, 덴마크에 의한 탄압은 1520년 크리스티안 2세에 의한 "스톡홀름의 피바다"로 극점에 달했다. 이러한 탄압에 대해 스웨덴인은 구스타브 바사를 지도자로 하여 봉기했다. 한자 동맹의 도움을 받아 독립을 쟁취하여 바사 왕조가 개창되었다.[74]

5. 근대 스웨덴

17세기에 스웨덴은 덴마크, 모스크바,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강대국으로 떠올랐다. 인구는 100만 명에 불과했지만,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종교적, 정치적 이유와 유럽의 균형을 위해 30년 전쟁에 참전했다.[10]

1645년 브룀세브로 조약과 1658년 로스킬레 조약을 통해 스웨덴은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주요 지역을 획득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스웨덴은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북부 독일이 되는 잉그리아, 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지배하게 되었다.[10]

스웨덴 제국의 형성, 1560-1660


1700년 모스크바, 작센-폴란드, 덴마크-노르웨이는 동맹을 맺고 스웨덴 제국을 공격했다. 어린 칼 12세대북방 전쟁 초기 나르바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폴타바 전투에서 모스크바에 대패했다. 칼 12세1718년 노르웨이의 프레데릭스텐 요새 공성전 중 사망했다. 이후 평화조약에서 프로이센영국-하노버가 합세한 동맹군은 스웨덴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제한된 왕권과 의회 정치 시대를 열었다.[105]

의회 정치는 200년 동안 지속되었다. 구스타브 3세의 무혈 쿠데타로 스웨덴은 절대 왕정으로 복귀했다. 이러한 지배는 나폴레옹 전쟁에 휘말릴 때까지 지속되었고, 1809년 핀란드를 러시아에 넘겨주게 되었다.

구스타브 바사(구스타브 1세) 1542년


16세기 구스타브 바사(1496-1560)는 독립적인 스웨덴을 위해 싸웠고, 칼마르 동맹 복원 시도를 분쇄하며 근대 스웨덴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교황청과 결별하고 스웨덴에 루터교를 세웠다.[9]

16세기 초 동맹 해체 후,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사이에 경쟁이 시작되었다. 구스타브 바사는 개신교 종교 개혁을 이용하여 교회의 권력을 제한하고, 1523년 국왕으로 즉위했다. 1527년 베스테로스 국회(귀족, 성직자, 시민, 자유 농민)를 설득하여 교회 토지(농지의 21%)를 몰수했다. 구스타브는 루터교 개혁가들을 보호하고 자신의 사람들을 주교로 임명했다.[9]

1538년1558년 세금 개혁으로 독립 농민에 대한 세금이 단순화되고 표준화되었다. 농장당 세금 평가는 지불 능력을 반영하도록 조정되었다. 국세 수입이 증가했고, 새로운 시스템은 더 공정하게 인식되었다. 1535년 뤼베크와의 전쟁으로 한자 동맹 상인들이 추방되었다. 사업가들이 책임을 맡으면서 스웨덴의 경제력은 빠르게 성장했고, 1544년까지 구스타브는 스웨덴 농지의 60%를 통제했다. 스웨덴은 정교한 세금 제도와 관료제를 통해 지원되는 유럽 최초의 근대적 군대를 건설했다. 구스타브는 스웨덴 왕위를 세습제로 선포했고 바사 왕가는 스웨덴(1523–1654)과 폴란드(1587–1668)를 통치했다.[9]

구스타브 아돌프,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승리, 1631


스웨덴 제국, 1560–1815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 데이비드 벡, ca. 1650


30년 전쟁에서 스웨덴의 역할은 유럽의 정치적, 종교적 세력 균형을 결정했다. 슈트랄준트(1628)와 포메라니아(1630)의 교두보에서 출발한 스웨덴군은 신성 로마 제국 남부로 진격했고, 전쟁의 부수적 전선에서 덴마크-노르웨이로부터 덴마크령 에스토니아, 옘틀란드, 고틀란드, 할란드, 헤리에달렌, 이데와 세르나를 빼앗았으며, 사운드 통행료 면제를 얻고 브레멘-페르덴에 대한 권리를 확립했는데, 이 모든 것은 브룀세브로 조약(1645)에서 공식화되었다. 1648년, 스웨덴은 30년 전쟁을 종식시키고 브레멘-페르덴, 비스마르 및 스웨덴령 포메라니아를 추가로 얻은 베스트팔렌 조약의 보증국이 되었다. 1638년부터 스웨덴은 북아메리카의 델라웨어 강을 따라 뉴 스웨덴 식민지를 소유했다.

1655년, 제2차 북방 전쟁에서 스웨덴의 칼 10세 구스타브는 서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침공하여 점령했는데, 동부 절반은 이미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었다. 스웨덴의 빠른 진격은 폴란드에서 스웨덴 대홍수로 알려지게 되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스웨덴의 봉토가 되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정규군은 항복했으며, 폴란드 국왕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는 합스부르크로 도망갔다. 대홍수는 5년 동안 지속되었고,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큰 피해를 입혔다. 국토는 황폐해지고, 보물은 약탈당했으며, 엄청난 인명 손실이 발생했다.

스웨덴은 외레순 동쪽 해안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할 수 있었고, 이는 로스킬레 조약(1658)에서 공식화되었으며, 올리바 조약(1660)에서 유럽의 열강에 의해 남동부 영토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스웨덴은 발트해 남쪽 해안에서 더 이상의 확장을 할 수 없었다. 스웨덴은 스칸 공방전에서 프랑스가 스웨덴의 적들을 퐁텐블로(1679) ( 룬드에서 확인) 및 생제르맹(1679) 조약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약간의 손실만을 입고 전쟁을 마쳤다.

이어진 평화로운 시기는 스웨덴의 칼 11세가 왕국을 개혁하고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는 1680년의 대환수를 통해 왕실의 재정을 통합했다. 재정, 상업, 국가 해군 및 육군 무기, 사법 절차, 교회 행정 및 교육에 추가적인 변화가 이루어졌다.[11]

스웨덴은 1630년대에 시작된 식민지 아메리카의 "뉴 스웨덴"과 현재의 가나에 위치한 "스웨덴 골드 코스트"를 포함하여 해외 식민지를 잠시 운영했다. 스웨덴은 1784년 프랑스로부터 작은 카리브해 섬인 생바르텔레미를 매입한 후 1878년에 다시 매각했다. 이 섬의 인구는 1847년 스웨덴 정부에 의해 노예가 해방되기 전까지 노예를 포함하고 있었다.

1570년부터 1800년까지 스웨덴은 두 번의 도시 팽창기를 겪었다. 대략 1580년부터 1690년까지와 18세기 중반이었으며, 1690년대부터 약 1720년까지는 상대적으로 정체기를 겪었다. 초기 단계는 더 활발하여, 다른 유럽의 수도 및 항구 도시의 증가하는 도시 인구와 마찬가지로 스톡홀름의 도시 거주자 비율 증가를 포함했으며, 다수의 작은 신도시가 건설되었다. 두 번째 도시 성장기는 스웨덴 무역 패턴이 발트 해에서 북대서양으로 이동하면서 1750년경에 시작되었다.[18] 이 시기는 북부와 서부의 작은 도시에서 인구가 증가하는 특징을 보였다.

바사 왕조는 에리크 14세의 치세부터 발트해로 세력 확장을 목표로 삼았다. 1558년부터 시작된 리보니아 전쟁에 참전했다. 그러나 당시 스웨덴은 유럽 내에서 소국이었고, 덴마크와도 악연이 있었기 때문에 덴마크와도 전쟁을 시작했다. 스웨덴은 리보니아 전쟁의 대전국인 모스크바 루스와 덴마크에 대항하기 위해 중동부 유럽의 대국이었던 폴란드와 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은 폴란드 야기에우워 왕조와의 혼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1568년 에리크 14세는 왕제인 핀란드 공작요한에게 왕위를 찬탈당했다. 국왕이 된 요한 3세는 덴마크와의 전쟁을 종결하고, 폴란드와 공조하여 러시아를 발트 지방에서 몰아냈다[75](1561년에스토니아 공국을 건국하고, 1595년에 확정). 요한 3세의 아들이자 야기에우워 가문의 혈통인 지그문트 3세가 1587년에 폴란드 왕으로 추대되었다. 지그문트 3세는 1592년에 스웨덴 왕도 계승했지만, 그는 열렬한 가톨릭교도였고, 스웨덴이 대국 폴란드의 지배하에 놓일 우려가 있었다. 1598년 숙부인 칼에게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박탈당했다(1600년 숙청의 주체는 지그문트 측 가톨릭교도 귀족이었다).[76] 폴란드 바사 가문에게는 왕위 찬탈이었고, 그로 인해 스웨덴, 폴란드 양 바사 가문의 왕위를 둘러싼 유감이 생기게 되었다.[77] 1604년 국왕이 된 칼 9세는 다시 발트 지방에 세력 확장을 목표로 하고, 동시에 대국이 되기 위해 매진했지만, 덴마크, 러시아, 폴란드와 같은 주변 국가에 포위되었고, 국력도 약화되고 있었다.[78] 이러한 정세 속에서 러시아 대혼란에 참전하는 것을 시작으로 스웨덴은 17세기, 유럽 열강이 되기 위해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된다.

16세기 중반, 스웨덴의 민족주의가 높아지면서, 1555년 요하네스 마그누스가 역사서 '고트인들과 스웨덴 왕국의 역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창작한 스웨덴 왕국의 건국 신화에 따른 고트 기원설[79]이 생겨나, 17세기의 대국 시대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에는 역사적 근거가 없는 속설이다.[80] 하지만 당시에는 사실로 받아들여져, 정치적 이념으로 활용되었다.[81] 1581년 핀란드 공작의 상위에 핀란드 대공이 설치되었다(이는 핀란드의 지배층인 스웨덴계 핀란드인들의 요청도 있었다). 불필요해진 핀란드 공작은 1606년에 폐지되었다. 국어고대 노르드어에서 파생된 고 스웨덴어에서, 1526년 종교 개혁활판 인쇄 도입으로 인한 근세 스웨덴어로 변경되었다. 이는 스웨덴의 종교 개혁에 따른 루터파의 국교회 설립 운동과 연동되어 있다.[82] 16세기까지 스웨덴 국내에는 많은 가톨릭교도를 안고 있었다. 1598년 가톨릭 주체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에서 이탈한 스웨덴은 1600년에 국내의 가톨릭교도를 숙청하고 루터파를 국교로 삼았다. 핀란드도 마찬가지로 루터파가 되었다. 다만, 핀란드의 교회 개혁은 핀란드어로 이루어졌다.[83]

이 무렵 스웨덴의 왕권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지만, 바사 가문이 세습되면서 왕권도 전체적으로 상승해 갔다. 그러나 귀족층은 왕권에 대한 반발이 강했고, 근세 이후에도 왕가와 귀족층은 왕권을 두고 줄다리기를 계속하게 되었다. 바사 가문은 독립과 대국주의를 표방하기 위해 절대 왕정으로 가는 길을 근대화 정책과 연동하여 실행하게 된다. 스웨덴의 왕권 이념은 다른 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신분제 의회의 아래에서 법률과 인민에 구속된 '입헌주의'적 왕권관을 가지고 있었다.[84]

바사 왕조는 발트해 연안으로 영토를 확장했고,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시대에는 신분제 의회가 설치되었으며, 1617년에 최초의 의회법이 제정되었다.[85]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하여, 북아메리카델라웨어식민지를 건설하고(뉴스웨덴), 각종 산업을 보호 육성했다.[86] 구스타브 2세의 업적은 1612년 스웨덴 재상이 된 악셀 옥센셰르나가 없었다면 달성될 수 없었다. 옥센셰르나는 내정 면에서 주군을 계속 지원했다. 초기 구스타브 2세의 덴마크와의 칼마르 전쟁은 스웨덴의 패배였지만, 크네뢰드 조약에서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함으로써 영토 반환을 이루어냈다. 1620년대 폴란드와의 스웨덴-폴란드 전쟁의 어려운 시기에도 곁에서 주군을 간했다. 옥센셰르나는 주군과 함께 스웨덴을 대국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주군 사후에는 어린 크리스티나를 보좌하여 스웨덴을 일으켜 세웠으며, 최종적으로 스웨덴을 열강의 지위로 끌어올렸다.[87][88]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북방의 사자"라고 불리며, 덴마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러시아 차르국과 싸워 잉그리아, 리가 등 발트해 연안을 정복 지배하며, 발트 제국을 확립했다.[89] 폴란드(연방)와는 왕위 계승 문제를 안고 있었고, 스웨덴군은 연방을 침공하여 국내 각지를 횡행했지만, 오스만 제국 대책을 일단락하고 남쪽에서 돌아온 폴란드의 명장 스타니스와프 코네츠폴스키에게 격퇴당해 폴란드 병합은 좌절되었다.[90] 그러나 폴란드도 재정 문제를 안고 있었고, 알트마르크 휴전 협정이 체결되어 리보니아의 대부분을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91][92] 이로 인해 구스타브 2세는 당시 강국이었던 폴란드로부터 외교적 승리를 거둠으로써 유럽에서의 명성을 높였다. 1618년 시작된 30년 전쟁에는 1630년 프로테스탄트 측에 가담하여 개입했다. 포메른에서 바이에른까지 파죽지세로 진격했지만 뤼첸 전투에서 전사했다.[93] 국왕 전사 후, 재상 옥센셰르나는 하일브론 동맹 결성 등을 계획하며 전쟁을 속행, 중앙 유럽으로 진출,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스웨덴은 전승국이 되었다. 그러나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후계자 크리스티나는 이 조약에서 요구의 절반인 배상금, 서포메른 획득 등 대폭적인 양보를 했다.[94] 30년 전쟁 후기에는 덴마크와도 전투를 시작하여, 1645년 고틀란드 섬이나 외레순 해협 통행세 면제 등을 획득, 스웨덴은 북유럽에서의 패권을 확립했다.[95] 30년 전쟁 후 스웨덴은 유럽의 세력 균형 체제 (베스트팔렌 체제)의 일원이 되었다.[96]

크리스티나는 정치보다는 학문에 관심이 있어, 데카르트 등을 궁정에 불러 철학적 사유에 몰두했다. 재정 문제 등을 초래하여 퇴위했고[97], 로마에서 "살롱의 여왕"으로서 여생을 보냈다.[98][99] 크리스티나의 퇴위로, 팔츠 선제후 가문의 방계 팔츠-클레부르크 가문이 왕위에 올랐다. 크리스티나의 여자 사촌인 초대 국왕 칼 10세는 1655년부터 폴란드, 덴마크와 전쟁을 일으켜 1661년까지 이어졌다 (북방 전쟁). 침공한 폴란드에서는 스웨덴군의 만행으로 인해 연방이 황폐화되어 고립되어 격퇴되었지만, 리보니아는 확정되었고, 팔츠 왕조도 승인되었으며, 왕위 계승 문제는 해소되었다. 러시아의 발트해 진출도 억제되었다 (대홍수 시대). 1658년 덴마크로부터 스코네를 빼앗아, 스웨덴은 팽창의 극에 달했다. 이 시대가 스웨덴의 절정기이다.[100] 1670년대 주변국과의 전쟁에 휘말렸지만, 칼 11세가 1680년 토지 개혁을 실시하여 자작농을 늘리고, 국력 증강에 노력했다. 프로이센 발흥과 덴마크의 복수전에 골머리를 앓았지만, 발트 제국은 유지되었고[101], 절대 왕정 (절대 군주제)이 시작되었다.[102][103] 그러나 스웨덴의 국력은 대륙 국가의 범주를 벗어나, 식민지 제국 형성까지는 이르지 못했다.[104]

1697년 칼 12세가 즉위하자, 발트해 출구를 요구하는 러시아 표트르 1세, 덴마크-폴란드 연합군과 1700년 시작된 대북방 전쟁을 치렀다 (반스웨덴 동맹). 스웨덴은 개전 초기 덴마크를 동맹에서 끌어내고 (1709년까지), 러시아와의 나르바 전투에서도 승리, 칼 12세는 "북방의 알렉산드로스"라는 이명을 얻었다. 스웨덴은 일시적으로 폴란드를 괴뢰 국가로 만드는 데 성공했고, 1706년 스웨덴의 위세는 다시 정점에 달했지만, 러시아 원정에서 겨울 장군과 초토 작전으로 인해 스웨덴군은 피폐해졌다. 1709년 폴타바 전투에서 대패를 당했고[105], 칼 12세는 오스만 제국으로 도망쳤다. 반스웨덴 동맹은 재구축되었다. 발트해에서도 러시아 해군에 패배하여, 제해권을 상실함과 동시에 1718년 노르웨이 침공 중 칼 12세가 전사하여, 발트 제국은 붕괴되었다. 여동생 울리카 엘레오노라가 즉위하지만, 전황은 스웨덴에 불리하게 전개되었고, 1720년까지 덴마크를 포함한 발트해 연안 국가들과 신성 로마 제국 제후들과 강화하고, 1721년 니스타트 조약에서 리보니아, 에스토니아, 카렐리아 등 발트해 연안의 패권을 상실했다.[106]

6. 노르웨이와의 통합과 스웨덴의 산업화

스웨덴-노르웨이 지도


노르웨이 독립을 강력히 반대했지만, 관대한 연합 조건을 제시했던 스웨덴의 왕세자 샤를 요한(베르나도트).


1810년, 나폴레옹의 최고 장군 중 한 명인 프랑스 원수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가 릭스다그에 의해 샤를 14세 요한(1818–44)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자코뱅 출신이었고 혁명적 원칙에 정통했지만, 스웨덴을 나폴레옹에 반대하는 연합에 참여시켰다.[20] 1813년, 그의 군대는 나폴레옹에 대항하여 연합군에 합류하여 보른회베트에서 덴마크군을 격파했다. 킬 조약에서 덴마크는 노르웨이 본토를 스웨덴 왕에게 할양했다. 그러나 노르웨이는 독립을 선언하고 헌법을 채택하고 새로운 왕을 선출했다. 스웨덴은 킬 조약의 조건을 강요하기 위해 노르웨이를 침공했는데, 이는 스웨덴이 벌인 마지막 전쟁이었다. 짧은 전투 후 모스 조약은 두 국가 간의 동군연합을 수립했다. 비록 같은 왕을 공유했지만, 노르웨이는 스웨덴의 외교 통제를 제외하고는 스웨덴으로부터 대체로 독립적이었다. 국왕의 통치는 환영받지 못했고, 스웨덴이 노르웨이의 자체 외교관 파견을 허용하지 않자, 노르웨이는 1905년에 스웨덴 국왕을 거부하고 자체 국왕을 선출했다.

샤를 14세의 통치 기간 동안 산업 혁명의 첫 번째 단계가 스웨덴에 도달했다. 이 첫 번째 도약은 농촌 제철소, 섬유 원시 산업 및 제재소를 기반으로 했다.

19세기는 자유 기업을 위해 길드 독점 폐지, 과세 및 투표 개혁 도입, 국가 군사 복무 설치, 그리고 사회 민주당, 자유당, 보수당의 세 주요 정당 그룹의 유권자 증가로 특징지어졌다.

스칸디나비아 통화 동맹에서 발행된 2개의 금화 20 크로나. 이 동맹은 금본위제에 기반했다. 왼쪽 동전은 스웨덴, 오른쪽은 덴마크 동전이다.


스웨덴은 1860년대부터 1910년대 사이에 정체된 농촌 사회에서 활기찬 산업 사회로 변모했다. 농업 경제는 점차 공동체 마을에서 더 효율적인 사유 농지 기반의 농업으로 전환되었다. 농장에서의 수작업 노동의 필요성이 줄어들면서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갔고, 1850년과 1890년 사이에 100만 명의 스웨덴계 미국인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많은 사람들이 돌아와서 미국 산업의 더 높은 생산성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고, 이는 더 빠른 근대화를 자극했다.

1873년, 스웨덴과 덴마크는 스칸디나비아 통화 동맹을 결성했다.

19세기 후반에는 야당 언론의 등장, 장인의 길드 독점 폐지, 그리고 조세 개혁이 이루어졌다. 젊은 남성에게 2년간의 군 복무가 의무화되었지만, 전쟁은 없었다.

7. 20세기 이후의 스웨덴

스웨덴은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에서 중립을 지켰지만, 양 진영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에 협력하여 철강과 볼 베어링을 공급하기도 했다.[26] 그러나 라울 발렌베리와 같은 인물은 홀로코스트에서 유대인을 구출하는 데 헌신했고, 백색 버스 계획을 통해 강제 수용소에서 유대인을 구출하기도 했다.

전후 스웨덴은 국제 연합(UN)에 가입하고, 다그 함마르셸드가 제2대 사무총장을 역임하는 등 국제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29] 냉전 시기에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가입하지 않고 중립을 유지하면서도, 미국과 비공식적인 군사 협력 관계를 맺기도 했다.[33][34]

사회민주당은 1932년부터 1976년까지 장기 집권하며 복지 국가 모델인 ''인민의 집(Folkhemmet)''을 건설했다.[25][30] 그러나 1970년대 경제 위기를 겪으며 사회민주당의 장기 집권은 막을 내렸다.[32] 1980년대에는 "가교 정책"을 통해 복지 국가와 자본주의 모델을 유지하려 했으나, 1990년대 경제 위기를 겪기도 했다.

1986년에는 올로프 팔메 총리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35] 1994년에는 MS 에스토니아호 침몰 사고로 많은 스웨덴인이 사망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36][37]

1995년 스웨덴은 유럽 연합(EU)에 가입했지만,[38][39] 유로화를 도입하지는 않았다.[40]

스웨덴은 국제 연합을 비롯한 국제기구에서 중립적이고 인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북유럽 블록'으로 평가받았다.[129] 소련-핀란드 전쟁에서의 중립은 핀란드를 실망시키기도 했지만, 이후 핀란드를 배려하며 무장 중립 정책을 추진했다.[131] 냉전 종식 후에는 중립주의를 사실상 포기하고 타국과의 협력 관계를 강화했다.

스웨덴 외교 정책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43][44][45][46]

정책내용
중립 정책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까지 중립 정책을 추구했으나, 이후 중립 정책을 폐기하고 2024년 NATO에 가입했다.[47][48]
북유럽 세력 균형북유럽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하고, 지역 강대국의 과도한 영향력을 견제했다.
국제 협력국제 연합 등 국제기구에 참여하고, 인도주의적 지원 및 군축을 옹호하며 국제 협력, 인권 증진에 힘썼다.
평화 중재분쟁 해결과 평화 협정 중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노르딕 국가 협력덴마크, 핀란드,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등 노르딕 국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했다.
EU 관계1995년 EU에 가입했지만, 국익과 EU 회원 자격을 균형 있게 유지하며 신중한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
세계 개발개발 도상국에 대한 지원을 통해 세계 불평등 해소와 지속 가능한 개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여성주의 외교 정책21세기 들어 성 평등을 외교 노력에 통합하는 여성주의 외교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7. 1. 제1차 세계 대전과 그 이후

스웨덴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중립을 유지했지만, 스웨덴 정부는 분쟁 기간 동안 여러 시기에 양측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독일과 함께 올란드 제도를 잠시 점령하기도 했다. 초기 스웨덴 정부는 중립에서 벗어나 동맹국 측에 가담하는 방안을 모색했고, 발트해로 진입하려는 연합군 군함을 막기 위해 외레순 해협에 기뢰를 설치하는 등 동맹국에 양보했다. 이후 스웨덴은 연합국과의 교역을 허용하고 동맹국과의 교역을 제한하는 협정을 체결했지만, 이는 얄마르 함마르셸드 정부의 붕괴를 초래했다.[119]

1차 세계 대전과 1920년대 동안 스웨덴의 산업은 강철, 볼 베어링, 펄프, 성냥 등에 대한 유럽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확장되었다. 전후 번영은 현대 스웨덴의 특징인 사회 복지 정책의 기반을 제공했다.

7. 2. 제2차 세계 대전과 중립 정책

스웨덴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무장 중립 정책을 따랐지만,[26] 수천 명의 스웨덴 자원병이 소련에 맞서 겨울 전쟁에 핀란드와 함께 참전했다. 스웨덴은 독일군이 노르웨이 점령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자국 영토를 통과하도록 허용했고,[26] 나치 정권에 강철과 볼 베어링을 공급했다.

전후 수십 년 동안 지배적인 역사학은 홀로코스트를 무시하고 소위 "소국 현실주의" 주장을 사용했다. 이는 독일이 훨씬 더 강력했기 때문에 중립과 독일과의 협력이 생존에 필수적이었으며, 양보는 제한적이었고 위협이 너무 클 때만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중립은 굽혀졌지만 깨지지는 않았고, 국가적 단결이 가장 중요했으며, 어쨌든 스웨덴은 독일과 교역할 중립적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독일은 스웨덴의 철을 필요로 했고, 스웨덴은 침략으로 얻을 것은 없고 잃을 것이 많았다.[27] 국가는 공산당을 제외한 릭스닥의 모든 주요 정당을 포함하는 국민 통합 정부에 의해 운영되었다. 주요 지도자로는 페르 알빈 한손 총리, 구스타프 5세 국왕, 크리스티안 귄터 외무 장관 등이 있었다.

라울 발렌베리 스웨덴 외교관은 홀로코스트에 직면한 유대인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수행했다. 그는 1944년 헝가리 주재 스웨덴 대표단의 서기로서 유럽 유대인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유대인에 대한 인도적 구호를 조정했다. 그는 1944년 말 나치 점령 하의 헝가리에서 수만 명의 유대인을 구출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1945년 1월에 실종되었으며, 1947년 소련 감옥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28]

스웨덴 해군의 연안 방어함 HM Pansarskepp Gustaf V (1957년까지의 아그파컬러 사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박해받던 유대인 구출에 헌신한 라울 발렌베리1945년 봄에 스웨덴 적십자사와 덴마크 정부가 협력하여 강제 수용소에서 구출된 유대인을 중립국 스웨덴으로 탈출시키는 백색 버스 계획이 실행되었다.

7. 3. 전후 복지 국가 건설

스웨덴은 민주주의 초창기에 노동 지도자, 정치인, 계층이 협력한 독특한 방식 덕분에 성공적인 사회 민주주의 모델을 만들었다. 스웨덴의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온건하고 개혁적인 정치 노선을 선택하여, 1911년 이후 많은 유럽 국가들을 괴롭힌 극단주의적 도전과 정치적, 계급적 분열을 피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사회민주노동당은 산업화의 도전과 스웨덴의 사회, 정치, 경제 구조에 미치는 영향을 초기에, 협력적으로, 효과적으로 대처함으로써 복지 국가와 광범위한 시민 자유 보호를 모두 포함하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회 민주주의 시스템 중 하나를 만들 수 있었다.[24]

사회민주노동당이 1932년 집권했을 때, 지도자들은 새로운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을 도입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스웨덴 모델" 또는 ''폴크헤메트''(국민의 집)로 알려지게 되었다.[25] 당은 중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가능한 한 상호 이해와 타협에 정책을 기반으로 하려고 노력했다. 다양한 이익 단체들이 항상 정부 결정에 앞서 공식 위원회에 참여했다.

스웨덴은 전후인 1946년에 국제 연합의 회원국이 되었다. 그 후 다그 함마르셸드가 2대 사무총장이 되었다. 함마르셸드는 제3세계의 분쟁 중재 역할을 하는 등 활약했지만, 냉전 한가운데인 1961년에 추락사했다. (함마르셸드는 사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7. 4. 냉전 시대와 그 이후

스웨덴은 1946년에 국제 연합에 가입했다.[29]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여하지 않은 국가들 중 최초로 국제 연합에 가입했으며,[29] 이후 냉전 기간 동안 NATO에 가입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중립을 유지했다.

사회민주당은 1932년부터 1976년까지 44년 동안 정부를 장악했다. 그들은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상당 부분을 스웨덴 복지 국가인 ''인민의 집(Folkhemmet)''을 건설하는 데 사용했다.[30] 스웨덴의 산업은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입지 않았고, 1945년 이후 수십 년 동안 북유럽 재건을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이는 복지 시스템을 가능하게 한 전후 시대의 경제적 호황으로 이어졌다.[31]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른 서유럽 국가들의 경제는 번영하며 빠르게 성장했지만, 스웨덴 경제는 정체되었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과도한 세금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공공 부문을 그 원인으로 지목했다.[32]

1976년, 사회민주당은 과반수를 잃었다. 1976년 총선에서 자유/우익 연합이 집권했다. 그 후 6년 동안, 1976년에 승리한 정당의 전부 또는 일부로 구성된 4개의 정부가 집권하고 붕괴되었다. 이 기간 동안 네 번째 자유 정부는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 및 온건당으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결국 1982년 사회민주당이 다시 권력을 잡았다.

냉전 시대 동안 스웨덴은 이중적인 접근 방식을 유지했다. 공식적으로는 엄격한 중립국 정책을 강력하게 유지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미국, 노르웨이, 덴마크, 서독 및 기타 NATO 국가들과 강력한 유대 관계를 유지했다. 스웨덴 사람들은 소련이 스웨덴을 공격할 경우 미국이 재래식 무기와 핵무기를 사용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스웨덴 자체 제작의 군용기를 포함하여 상륙 공격에 대한 강력한 방어 능력을 유지했지만, 장거리 폭격 능력은 없었다.[33]

1960년대 초, 중거리 폴라리스 A-1 핵 미사일로 무장한 미국 핵 잠수함이 스웨덴 서부 해안 근처에 배치되었다. 사거리와 안전 문제를 고려할 때, 이곳은 모스크바에 대한 보복 핵 공격을 시작하기에 좋은 지역이었다. 미국은 비밀리에 스웨덴에 군사적 안전 보장을 제공하여 소련의 침략에 대비해 스웨덴에 군사력을 제공할 것을 약속했다. 군사 협력의 일환으로 미국은 사브 37 비겐 개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강력한 스웨덴 공군은 소련 잠수함 공격 항공기가 미사일 발사 구역에서 활동하는 것을 막는 데 필요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왕립 공과대학교의 스웨덴 과학자들은 폴라리스 미사일의 목표 성능을 향상시키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34]

1986년 2월 28일, 사회민주당 지도자이자 총리인 올로프 팔메암살되었다. 살인범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충격을 받은 스웨덴 사람들은 국가가 순수함을 잃었는지 걱정했다.[35]

1994년 9월 28일, MS 에스토니아호가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향하던 중 발트해를 건너다가 침몰했다. 이 재해로 852명(그 중 501명이 스웨덴인[36])이 사망했으며, 20세기의 최악의 해상 재해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37]

1995년, 냉전 종식 몇 년 후, 스웨덴은 유럽 연합의 회원국이 되었고 "중립 정책"이라는 오래된 용어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38][39] 2003년에 실시된 스웨덴의 국민 투표에서, 다수는 국가의 공식 통화로 유로를 채택하는 것에 반대했다. 안나 린드 외무 장관은 국민 투표 직전에 살해되었다.[40]

1980년대 동안 스웨덴은 "가교 정책"이라고 불리는 것을 통해 관대한 복지 국가와 자본주의 모델을 유지하려고 시도했다. 1990년대에는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타났다. 높은 실업률과 여러 은행 및 기업의 파산으로 경제 위기가 발생했다. 높은 인플레이션뿐만 아니라 부동산 및 금융 시장의 과열과 마이너스 실질 금리도 발생했다. 1991년 이후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높은 실업률과 함께 경기 침체가 발생했다.

7. 5. 현대 스웨덴과 국제 관계

스웨덴은 1946년 국제 연합 회원국이 되었으며, 이후 다그 함마르셸드가 제2대 사무총장을 역임했다.[43][44][45][46] 함마르셸드는 제3세계 분쟁 중재에 힘썼으나, 냉전 중이던 1961년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함마르셸드는 사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스웨덴 출신 폴케 베르나도트 역시 UN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제1차 중동 전쟁 당시 유엔 팔레스타인 조정관으로 파견되었으나, 시온주의자 과격파에게 암살되었다.[129]

스웨덴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UN에서 중립적이고 인도적인 입장을 취해 '북유럽 블록'으로 불리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129] 전후 스칸디나비아 방위 동맹을 구상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중립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인해 협상이 난항을 겪었고, 결국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NATO에 가입했다.[130] 소련-핀란드 전쟁에서 스웨덴의 중립은 핀란드를 실망시켰고, 이후 스웨덴은 핀란드를 더욱 배려하며 소련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무장 중립 정책을 추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유럽은 노르딕 균형 시대로 접어들었다.[131]

냉전 시기 1952년 북유럽 이사회코펜하겐에 설립되자 스웨덴은 북유럽 국가들과 함께 가입하여[132] 노르딕 균형을 구축했다. 그러나 스웨덴의 중립 정책은 소련에 의해 자주 방해받았고, 외교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스웨덴은 서방 국가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냉전 종결 후, 스웨덴이 서방 편에서 소련과 개전하는 밀약을 NATO와 맺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133]) 발트해동구권과의 최전선이었기 때문에 스웨덴은 국방력을 강화해야 했다. 1950년대~1960년대 스웨덴 원자 폭탄 개발 계획도 그 일환이었으며, 계획 좌절 후에는 독자적인 잠수함, 전투기, 전투 차량 개발에 주력하는 등 무장 중립 국가였다. 냉전 종식 후 스웨덴은 직접적인 위협이 사라지자 국방 예산을 삭감하고 2010년 병역 의무를 폐지했으며, 중립주의를 사실상 포기하고 타국과의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그러나 현재도 군수 산업을 추진하며 무기 수출국으로서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134]

1993년 EU이 출범하자 1995년 스웨덴은 핀란드와 함께 EU에 가입했다.[135] 그러나 유럽 환율 메커니즘에는 참여하지 않아 유로 도입은 불가능했다.

이라크 전쟁에 대한 파병 반대 등 적극적인 국제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발트 3국에 대한 지원도 지속하고 있다. 1992년 수도 스톡홀름에 발트해 연안 국가 이사회를 설립하고 북유럽 자본 수출의 중심지가 되는 등 발트 3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다.

스웨덴 외교 정책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43][44][45][46]

  • 중립 정책: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까지 역사적으로 중립 정책을 추구하여 강대국 간 분쟁에 휘말리지 않고 주권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응하여 중립 정책을 폐기하고 2024년 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가입했다.[47] 2024년 3월 7일, 스웨덴은 NATO의 32번째 회원국이 되었다.[48]
  • 북유럽 세력 균형: 북유럽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 했으며, 지역 강대국에 대한 균형추 역할을 하여 단일 강대국의 과도한 영향력을 견제했다.
  • 국제 협력: 국제 연맹 및 국제 연합과 같은 국제기구 설립에 참여하고, 인도주의적 지원 및 군축과 같은 대의를 옹호하며 국제 협력, 인권, 인도주의적 이니셔티브를 증진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 평화 중재: 분쟁 해결과 평화 협정을 중재하기 위한 노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 베스트팔렌 조약과 20세기 동안의 다양한 중재 노력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 노르딕 국가 협력: 덴마크, 핀란드,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등 이웃 노르딕 국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스칸디나비아 단결을 위해 외교, 무역, 문화 교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해 왔다.
  • EU 관계: 1995년 유럽 연합(EU)에 가입했지만, 자국의 국익과 EU 회원 자격을 균형 있게 유지하며 신중한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
  • 세계 개발: 개발 도상국에 상당한 지원을 제공하며, 원조 프로그램을 통해 세계 불평등 해소와 지속 가능한 개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여성주의 외교 정책: 21세기 들어 성 평등을 외교 노력에 통합하는 여성주의 외교 정책을 추진하며, 전 세계적으로 여성의 권리, 평화 구축, 분쟁 해결, 개발 과정에서 여성의 포용과 역량 강화를 강조하고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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