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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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도 시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센고쿠 시대를 통일하고 에도 막부를 세운 1603년부터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가 붕괴될 때까지의 일본 역사 시기이다. 막부는 '막한 체제'를 통해 중앙 집권과 지방 분권을 조화롭게 관리했으며, 다이묘를 통제하고 쇄국 정책을 펼쳤다. 사회는 신분제로 구성되었으며, 농업 생산성 향상과 상업 발달로 경제가 성장했다. 이 시기에는 유교, 국학, 란가쿠 등 다양한 사상이 발전했고, 가부키, 우키요에 등 서민 문화가 번성했다. 19세기에는 서구 열강의 압력과 개항 요구에 직면하여 사회적 혼란이 심화되었고, 결국 막부의 권위가 실추되어 도막 운동으로 이어졌으며,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가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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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 | |
---|---|
지도 | |
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에도 시대 |
다른 이름 | 도쿠가와 시대 오에도 |
지속 기간 | 1603년 ~ 1868년 |
이전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다음 시대 | 메이지 시대 |
정치 체제 | 에도 막부 |
수도 | 에도 |
역사 | |
주요 사건 | 에도 막부 설립 시마바라의 난 간세이 개혁 덴포 개혁 아편 전쟁 미일 화친 조약 사쿠라다 문 밖의 변 보신 전쟁 |
문화 | |
주요 문화 | 우키요에 가부키 분라쿠 다도 무사도 신도 불교 |
사회 계층 | 사농공상 (사무라이, 농민, 장인, 상인) |
정치 | |
지배 가문 | 도쿠가와 씨 |
쇼군 |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히데타다 도쿠가와 이에미쓰 도쿠가와 이에쓰나 도쿠가와 쓰나요시 도쿠가와 이에노부 도쿠가와 이에쓰구 도쿠가와 요시무네 도쿠가와 이에시게 도쿠가와 이에하루 도쿠가와 이에나리 도쿠가와 이에요시 도쿠가와 이에사다 도쿠가와 이에모치 도쿠가와 요시노부 |
주요 관직 | 로주 와카도시요리 부교 다이묘 |
경제 | |
주요 산업 | 농업 상업 수공업 |
화폐 | 고반 분 센 |
경제 정책 | 긴세이 개혁 덴포 개혁 |
기타 | |
관련 주제 | 막부 쇄국 정책 번 무사 조닌 |
로마자 표기 | Edo jidai |
일본어 표기 | 江戸時代 |
2. 에도 막부 성립과 권력 강화
가마쿠라 막부 이래, 일본의 권력은 천황이 아닌 막부와 사무라이에게 있었다. 에도 막부 또한 무가 계급인 사무라이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모든 권력은 막부의 최고 권력자인 쇼군에게 있었다. 에도 막부는 특유의 봉건제를 채택, 다이묘에게 봉지를 하사하고 그 대신 충성심을 요구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도쿠가와 시대는 일본에 250년간의 안정을 가져왔다. 당시 정치 체제는 "한"(영지)과 "막부"라는 용어를 결합한 "막한"으로 불렸으며,[3] 쇼군은 국가 권력을, 다이묘는 지역 권력을 가졌다. 이는 중앙집권적 권력과 분권적 권력을 모두 관리하는 관료제가 확대되는 새로운 통합을 의미했다. 도쿠가와 막부는 통치 첫 100년 동안 토지 재분배를 통해 약 700만 곡(koku, 쌀 생산량 단위)을 확보하고, 주요 도시들을 장악했으며, 막대한 수입을 얻는 토지 평가 시스템을 구축하여 더욱 강력해졌다.
일본의 봉건제는 다이묘들을 다음과 같이 계급으로 나누어 구분했다.
- 신판 다이묘: 도쿠가와 가문과 가장 혈연적으로 가깝고 충성심이 깊은 가문. 23개 다이묘 가문이 해당되었으며, 막부 최고위 관직 독점.
- 후다이 다이묘: 신판 다이묘 다음으로 비옥하고 중요한 봉토를 받은 가문. 18세기경 약 145개 가문이 있었으며, 대부분의 막부 관직 차지.
- 도자마 다이묘: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에도 막부에 복종한 가문. 약 97개 가문이 있었으며, 최전방의 쓸모없는 토지를 봉토로 받는 등 견제 대상.
에도 막부는 천황과 조정, 다이묘, 종교 단체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천황은 쇼군보다 상위에 있는 일본 최고 권력자로 여겨졌으나, 실제로는 쇼군의 허수아비였다. 다만 에도 막부는 황궁을 보수하고 황실 소유 토지를 늘려주며 황실의 권위를 높여주었다. 또한 도쿠가와 가문은 황실과 혼인하여 권력의 정통성을 강화하고, 형식적으로나마 천황의 재가를 받아 국정을 운영하는 방식으로 천황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무가제법도 등 법령을 제정하여 다이묘들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사생활, 결혼, 병사/무기 소유, 옷의 종류 등을 통제하고, 산킨코타이 제도로 매 2년마다 에도에 방문, 가족 일부를 인질로 삼았다. 해양 무역과 기독교를 금지하고, 다이묘 당 하나의 성만 소유하도록 했다. 중앙 정부는 번의 농민에게 직접 세금을 걷지 않고, 번주들에게 궁궐, 성, 도로, 다리 공사 등을 명분으로 각종 세금을 요구했다. 이러한 규제는 쇼군의 권력을 강화하고 다이묘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독립적인 번은 점차 지방 행정 조직으로 약화되었고, 다이묘는 막부 관료로 변모했다. 그럼에도 다이묘는 번에서 독립적인 행정, 사법 권한을 갖고 세금을 걷고 행정을 실시할 수 있었다. 막부는 종교 단체(사찰, 신토 신사)에게도 충성을 맹세받아 종교적 명분도 얻었다.
2. 1.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집권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장악했다. 이미 강력한 다이묘(봉건 영주)였던 이에야스는 부유한 관동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이익을 얻었다.[2] 그는 200만 곡(koku, 쌀 생산량 단위) 혹은 36만 헥타르의 토지를 유지했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성곽 도시인 에도(미래의 도쿄)에 새로운 본부를 설치했으며, 추가로 200만 곡의 토지와 38명의 가신을 지휘했다.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이에야스는 신속하게 도요토미 씨족을 장악하기 위해 움직였다.
1600년 10월 21일 (구 일본 달력으로는 게이초(慶長) 5년 9월 15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쪽 다이묘들을 물리치고 일본 전체를 장악하게 되었다. 그는 적대적인 다이묘 가문들을 신속하게 폐지하고, 도요토미 가문과 같이 다른 가문들의 세력을 축소했으며, 전리품을 자신의 가족과 동맹들에게 재분배했다. 이에야스는 여전히 서쪽 다이묘들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지만, 쇼군이라는 칭호를 얻으면서 동맹 시스템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603년 3월 24일(게이초 8년 2월 12일)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어 '''에도'''(현재의 도쿄)에 막부를 수립했다.
이에야스는 권력 기반을 더욱 강화한 후, 1605년에 자신의 아들인 도쿠가와 히데타다(1579~1632)를 쇼군으로, 자신은 은퇴한 쇼군으로 임명했다. 도요토미 가문은 여전히 상당한 위협이었고, 이에야스는 다음 10년 동안 그들을 제거하는 데 전념했다. 1615년 도쿠가와군은 오사카에 있는 도요토미의 거점을 파괴했다.
2. 2. 초기 막부의 권력 강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룩한 기반을 바탕으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권력을 장악했다.[2] 1603년 쇼군에 취임하여 에도 막부를 수립했다. 하지만, 여전히 도요토미 가문은 위협적인 존재였고, 이에야스는 1615년 오사카 전투를 통해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고 권력을 공고히 했다.[3]에도 막부는 다이묘를 신판 다이묘, 후다이 다이묘, 도자마 다이묘로 분류하여 통제했다. 신판 다이묘는 도쿠가와 가문과 혈연적으로 가까운 다이묘, 후다이 다이묘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부터 도쿠가와 가문을 섬긴 다이묘, 도자마 다이묘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복종한 다이묘였다. 신판 다이묘와 후다이 다이묘는 막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중요한 영지를 받은 반면, 도자마 다이묘는 견제 대상이었으며 변방의 영지를 받았다.
막부는 무가제법도 등 법령을 제정하여 다이묘의 사생활, 결혼, 무기 소유, 영지 운영 등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특히, 산킨코타이 제도를 통해 다이묘가 격년으로 에도에 거주하게 하고, 가족을 인질로 잡아 반란을 억제했다. 또한, 다이묘에게 성, 도로, 다리 건설 등 공공사업 비용을 부담시켜 재정을 약화시켰다. 이러한 정책은 다이묘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막부의 중앙집권적 통제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3. 막번 체제와 사회
- -에도 시대의 통치 체제는 '''막번체제(幕藩制)'''라고 불리며, '''장군가'''(幕府) 아래에 '''다이묘''' 가문(藩)과 기본·고케닌이 복속하는 체제이다. 직할지는 막령·덴료라고 불렸으며, 중요 지점에는 조쿠다이·소시다이·마치부교·엔고쿠부교 등이 파견되었고, 그 외 막령에도 군다이·다이칸이 배치되어 지배를 담당했다.[99]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어 '''에도'''(현재의 도쿄)에 막부를 수립하면서 시작되었으며, 1868년 개원될 때까지 265년간 지속되었다.
에도 시대는 정이대장군도쿠가와씨를 중심으로 무사 계급이 지배했던 봉건사회였다. 주요 신분제는 지배 계층인 무사와 피지배 계층인 농민·상인으로 구성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도가리 정책으로 무사는 조카, 상인은 마치야, 농민은 무라토와 같이 주거가 고정되면서 무사 계급과 농민이 명확하게 분리되었다(병농분리).[100]
막부와 조정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98] 관백·태정대신을 지낸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마찬가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정이대장군에 취임하여 외척관계를 맺음으로써 조정의 권위를 이용했다. 막부는 금중병공가제법도 제정과 자의사건 등을 통해 조정 지배를 강화했다.
막부는 에도, 오사카, 교토에 마치부교·소시다이를 두고 중시했지만, 그 외 이즈, 히타, 나가사키, 니이가타, 히다와 중요한 광산에 다이칸을 배치하여 지배했다.
무케쇼하토(武家諸法度) 위반으로 상당수의 다이묘가 카이에키(改易)·겐푸(減封) 처분을 받았지만, 이 처벌은 친반(親藩), 푸다이(譜代), 소야마(外様)의 구분 없이 시행되었다.[100] 다이묘에게는 산킨코타이(参勤交代)와 오테츠다이(御手伝い) 의무가 부과되었다.
18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각 번(藩)에서 한세이카이카쿠(藩政改革)가 실시되었다. 초기에는 검약과 한사츠(藩札) 발행이 주였지만, 18세기 중반이 되면 소금, 도자기 등 토지 산물의 센바이세이(専売制)가 상당수의 번에서 실시되었다.[101]
18세기 중반 무렵 에도의 인구는 100만 명이 넘었는데,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을 가능성이 높다.[18] 오사카와 교토는 각각 40만 명이 넘는 주민이 거주했다. 다른 많은 성시(城下町)들도 성장했다. 오사카와 교토는 활발한 무역과 수공업 생산의 중심지가 된 반면, 에도는 식량과 필수적인 도시 소비재 공급의 중심지였다. 1700년경 일본의 도시화율은 약 10~12%로, 세계에서 가장 도시화된 국가 중 하나였다.[18] 도시 인구의 절반은 사무라이였고, 나머지 절반은 조닌(町人)이라 불리는 상인과 장인이었다.[18]
에도 시대 초기에는 일본의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지만, 약 3000만 명에서 정체되었다.[19] 1720년대부터 1820년대 사이에 일본은 거의 인구 정체 상태였는데, 이는 널리 퍼진 기근(1782~1788년 덴메이 대기근)에 대한 반응으로 출산율이 낮아진 것으로 종종 설명되지만, 일부 역사가들은 영아 살해의 높은 비율로 인구를 인위적으로 조절했다는 등의 다른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다.[20] 1721년부터 도쿠가와 막부 말기까지 정기적인 전국 인구 조사가 실시되었다.[19]
겐로쿠 시대의 급격한 경제 성장으로 화폐경제가 농촌에도 확산되었고, 뽕나무, 옻나무, 측백나무, 닥나무 등의 '''상품작물''' 재배가 진행되었다. 어업에서는 상방 어법(上方漁法)이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세토나이카이 연안에서는 들입식염전이 개발되어 소금의 대량 생산 체제가 갖춰지고 각지로 유통되었다. 수공업에서는 면직물이 발달하였고, 전통적인 견직물에서는 고급품인 니시진오리가 생산되었으며, 나다고고와 이타미의 주조업, 아리다와 세토의 도자기업도 발전하였다. 18세기에는 농촌 공업으로서 도매상제가내공업이 각지에 흥성하였다.
막부에 의해 다이묘의 대규모 배치 변경이 실시된 에도 시대는 동시에 일본 전역에서 활발한 문화 교류가 이루어진 시대이기도 했다.
3. 1. 막번 체제의 특징
가마쿠라 막부 이래, 일본의 권력은 천황이 아닌 막부와 사무라이에게 있었다. 에도 막부 또한 무가 계급인 사무라이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모든 권력은 막부의 최고 권력자인 쇼군에게 있었다. 특히 에도 막부는 특유의 봉건제를 채택, 다이묘에게 봉지를 하사하고 그 대신 충성심을 요구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져놓은 초석을 기반으로 삼아 혼란의 시대였던 센고쿠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막부를 세웠다. 1603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명실상부한 일본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그는 수많은 정적 다이묘를 숙청했고, 이들에게서 빼앗은 토지와 농민들을 그의 동맹과 가족들에게 전리품으로 하사하였다.
에도 막부는 대략 250년 동안 일본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이 당시 정치 체제는 중앙에 막부가 버티고 있고, 지방은 다이묘들이 각각 다른 번을 다스리고 있는 구조였다. 막부 체제에서는 쇼군과 중앙 정부가 국가적인 권력을 잡았으며, 다이묘와 지방 정부들이 지역적인 권력을 맡아 처리했다. 이처럼 독특한 일본적인 봉건제는 중앙집권제와 지방자치제를 절묘히 섞어놓은 것으로, 이후 일본 전체에 번영과 안정을 불러오게 되었다.
일본의 봉건제는 지방의 모든 다이묘를 계급을 나누어 구분했다. 도쿠가와 가문과 가장 혈연적으로 가깝고 충성심이 깊은 가문은 신판 다이묘로 불렸다. 신판 다이묘 다음가는 계급은 후다이 다이묘였다. 마지막 계급은 도자마 다이묘였으며,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가문이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된 이후에 어쩔 수 없이 에도 막부에 복종한 자들이었다. 에도 막부는 이들을 가장 주의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에도 막부는 일본 전역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천황, 조정, 다이묘, 종교 단체들에게도 전례 없을 정도로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원래 천황은 쇼군보다도 상위에 존재하는 일본 최고 권력자였으나, 이는 허울일 뿐이었고 실제로는 쇼군의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무가제법도와 같은 다양한 법령들이 제정되어 다이묘들을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이 법률들에는 개인적인 사생활, 결혼, 소유할 수 있는 병사 수, 무기의 종류, 옷의 종류 등까지도 엄격히 통제했다. 또한 다이묘들이 매 2년마다 에도에 들러 쇼군을 뵙게 하였고, 가족들 일부를 인질로 삼았다. 해양 무역도 엄격하게 금지하였고, 기독교를 박해하였으며 한 명의 다이묘가 오직 한 개의 성만 소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규제들은 쇼군의 권력을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다이묘들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3. 2. 사회 신분제도
일본은 다이카 개신 이후 중국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사회 신분제도인 양천제(良賤制)를 도입했으나, 10세기경 자연 소멸되고 일본화된 신분 제도가 자리 잡아 에도 시대에 이르렀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은 법적 신분제가 아니었다.
에도 시대 일본의 신분 구조는 다음과 같다.
- '''지배층'''
- * 공가/신관/승려: 공가는 천황을 보필해 온 오랜 역사를 가진 조정 귀족이며, 신관과 승려는 각각 일본의 사상적 기반인 신토와 불교계를 유지하는 집단이다. (다만 권력의 바깥고리에 있는 하급 신관 및 승려, 예를 들어 이누지닌(犬神人)은 되려 천민 취급을 받았다.)
- * 무사: 혈연으로 이어지는 세습 신분층으로 에도 시대 일본의 실질적인 지배 계층이다. 하지만 하급 사무라이들은 가장 대우가 좋았던 시절에도 상급 병졸 정도의 지위였고, 18세기에 들어서는 아예 몰락했다. 심지어 이들은 죠닌 계층에게조차도 결혼 기피 대상이 될 정도로 에도 시대 중기에는 그 처지가 안 좋아졌다.
- '''피지배층'''
- * 죠닌: 일본의 막부와 각 지방의 정치/경제 거점인 죠카마치(城下村)에 집단 거주하는 상공인 계층이다. 에도 시대 중기부터 이들의 영향력이 막강해져서 후기에는 이들이 메이지 유신의 숨은 주역이 된다.
- * 농민: 일본의 주력 산업인 농업을 책임지는 서민층이었다. 하지만 법제적 혹은 사회규범적으로 서양의 농노와 같은 상태였다.
- * 부라쿠민: 사실상의 불가촉천민 집단으로, 에타(穢多)와 히닌(非人)으로 구성되어 있다. 에타와 히닌의 경계는 모호하지만, 대체로 에타는 불교의 도에 거스르는 등의 사회적으로 천시받는 직종(도축업자 등)에 종사하는 자들을 일컫는 용어이며, 히닌은 인륜에 거스르는 행위를 한 자를 일컫는 말이다.
히닌은 대체로 걸식자, 노숙자였으나 중질의 범법자도 이 범주에 포함되었다. 이들은 사회적 압력에 의해 '부락'이라고 불리는 그들만의 마을에 집단 거류하였기 때문에 '''부라쿠민'''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히닌의 경우 치안, 미풍양속 유지를 위한 공적인 차원에서 수용 구역을 설정하여 히닌 무리의 대장인 히닌가시라의 통제를 받게 하여 공권력의 지배하에 놓았다. 피차별 신분은 1871년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으나, 폐지된 이후에도 관습적으로 여전히 잔존하여 현대에도 약간의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만 이러한 사회 신분은 경직된 구조가 아니었고, 다음과 같은 방법들을 통해 사회 이동이 가능했다.
- 귀농/죠닌화 (무사 계층에서 피지배층으로 이동): 말 그대로 무사가 무사 계급을 포기하고 생산 활동에 종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사회 신분 이동이다.
- 요닌에 의한 등용 (피지배층에서 무사 계층으로 이동): 요닌(用人)은 에도 시대 사무를 관장하던 일종의 공무원을 의미한다. 이 요닌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등용되는 방법으로 신분 이동이 가능했다.
- 고케닌 카부 매입 (피지배층에서 무사 계층으로 이동): 에도 시대에는 사무라이의 몰락 현상이 큰 사회 문제로 대두할 정도로 심각했다. 이러한 몰락 사무라이의 카부(족보)를 매입하는 방법으로 신분 이동이 가능했다. 동시기 몰락한 양반 가문의 족보를 매입해서 양반으로 신분 상승한 조선의 상민 부자들을 떠올리면 된다.
- 입양과 결혼 (피지배층에서 무사 계층으로 이동): 무사 계급과 결혼하거나 서민의 자제를 무사가에서 입양하는 방법으로 신분 이동이 가능했다. 에도 시대에는 중하급 사무라이와 서민 간의 결혼이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었고, 이러한 방법으로 신분 이동이 이루어졌다.
3. 3. 경제 발전과 도시화
에도 시대에는 농업 생산성이 향상되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경제가 크게 성장했다. 특히, 산킨코타이 제도로 인해 에도와 각 지역 간의 물자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도시화가 촉진되었다.[21]농업 분야에서는 새로운 농기구와 비료의 사용, 경지 면적 확대 등으로 쌀 생산량이 꾸준히 증가했다.[22] 1600년 160만 정(町)이었던 논은 1720년까지 300만 정으로 증가했다.[22]
상업 분야에서는 오사카와 에도를 중심으로 대규모 쌀 시장이 발달했고,[21] 각 다이묘들은 자신의 영지에서 생산된 쌀과 특산물을 판매하여 수입을 올렸다.[18] 상인들은 신용 거래 방식을 도입하고 화폐를 널리 사용하면서 상업 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전개했다.[27]
이러한 경제 발전에 힘입어 에도, 오사카, 교토 등 3대 도시를 비롯한 여러 도시들이 성장했다. 18세기 중반 에도의 인구는 100만 명이 넘어 당시 세계 최대 도시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18] 오사카와 교토는 각각 40만 명이 넘는 인구를 가진 상공업 중심지로 발전했다.[18] 1700년경 일본의 도시화율은 약 10~12%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도시화된 국가 중 하나였다.[18]
다음은 에도와 오사카, 교토의 특징을 정리한 표이다.
이처럼 에도 시대에는 농업과 상업의 발전, 그리고 도시화를 통해 경제가 크게 성장하고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화가 일어났다.
3. 4. 인구 변화
에도 시대 초기에는 일본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여 17세기 말에는 약 3천만 명에 달했다.[19] 그러나 1720년대부터 1820년대까지는 기근 등의 영향으로 인구 성장률이 거의 0%에 가까웠다.[20] 1721년 일본 인구는 대략 3천만 명 정도였고, 약 150년 후 메이지 유신 무렵에도 약 3200만 명에 불과했다.[21][18]1721년부터 도쿠가와 막부는 정기적인 전국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19] 또한, 기독교를 근절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된 종교 조사도 인구 통계 자료로 활용되었다.[19]
후대의 학자들은 이 시기 낮은 인구 성장률의 원인 중 하나로 마비키(間引)라 불리는 영아 살해 풍습을 지적하기도 한다.[20] 마비키는 간토 지방과 도호쿠 지방에서는 농민들의 가난 때문에, 도시에서는 상인과 수공업자 계층의 간통(피임 기술 부족)이 주된 원인이었다. 에도 막부와 각 번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비난했지만, 처벌은 드물었고 일반 살인과 동일하게 취급되지 않았다.
특히 영주들은 노동력 감소와 농지 황폐화를 우려하여 마비키를 막으려 했고, 막부도 금지령을 내렸지만, 영아 살해 풍습은 메이지 시대까지 계속되었다.
18세기 중반, 에도는 인구 약 100만 명에 달하는 대도시였으며,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다.[18] 오사카와 교토는 각각 40만 명이 넘는 인구를 가진 대도시였다. 1700년경 일본의 도시화율은 약 10~12%로, 세계에서 가장 도시화된 국가 중 하나였다.[18] 도시 인구의 절반은 사무라이였고, 나머지 절반은 조닌(町人)이라 불리는 상인과 수공업자들이었다.[18]
4. 대외 관계
에도 시대 초기에는 유럽 열강과의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던 남만 무역 시대의 마지막 시기와 겹친다. 이 시기 일본은 산후안 바우티스타호와 같은 서양식 군함을 건조하고,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이끄는 사절단을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으로 파견하기도 했다. 또한, 막부는 아시아 내부 무역을 위해 적선을 건조하여 야마다 나가마사와 같은 일본인 모험가들이 아시아 전역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외국인에 대해 의심을 품고, 기독교를 탄압하면서 점차 대외 관계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결국, 1641년에는 쇄국 정책을 통해 외국과의 접촉을 나가사키로 제한했다.
쓰시마번을 통해 조선과의 왜관에서의 무역이 막부의 공인을 받아 이루어졌으며, 조선 통신사를 통해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사쓰마번의 지배를 받던 류큐 왕국을 통한 청나라・동남아시아와의 중개 무역, 마쓰마에번의 세력 아래 있던 아이누와의 무역 등도 이루어졌다. 막부는 나가사키의 청나라인 거류지에서 청나라와, 나가사키 데지마에서 네덜란드와 무역했다. 이 네 곳을 “네 개의 입구”라고 부르기도 한다.
1715년(쇼토쿠 5년)에는 무역 제한령(나가사키 신령)을 내려 청나라와의 무역을 제한하기도 했지만, 청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구리를 일본에서 수입했기 때문에 무역은 재개되었다.[116]
네덜란드 상관장이 에도 막부에 제출한 네덜란드 풍설서와 중국 배가 가져온 것을 막부가 정리한 당선 풍설서는 해외 사정을 아는 실마리가 되었다.[117][118]
1825년(분세이 8년)에는 이국선 타벌령을 실행하는 등, 쇄국 정책을 유지하려 했다. 1854년(가에이 7년) 일미화친조약 체결로 “쇄국”은 종료되었다.[120]
기후 불순으로 인해 해외에서 온 난파자들도 있었는데, 다이코쿠야 코타로나 존 만지로 등이 그 예이다.
4. 1. 쇄국 정책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해외 무역을 장려했지만, 외국인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 1635년의 국교 폐쇄령으로 모든 일본인의 해외 여행이 금지되었고, 만약 일본을 떠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었다. 1636년, 네덜란드인들은 나가사키 항구의 작은 인공섬인 데지마에만 머물도록 제한되었다.[4]쇼군은 기독교를 매우 불안정한 요소로 여겨 탄압했다. 1637년~1638년 시마바라의 난에서 불만을 품은 로마 가톨릭 신자인 사무라이와 농민들이 막부에 반란을 일으키자, 에도는 반란군 거점 폭격을 위해 네덜란드 배를 불렀다. 이는 기독교 운동의 종말을 의미했다. 시마바라의 난으로 약 3만 7천 명(대부분 기독교인)이 학살당했고, 50년 만에 도쿠가와 쇼군은 일본 내 기독교인 수를 거의 0명에 가깝게 줄였다.[4]
일부 기독교인은 지하에서 살아남아 가쿠레 키리시탄이라 불렸다. 이후 포르투갈인들은 영구 추방되었고, 포르투갈 외교 사절단원들은 처형되었다. 모든 일본 국민은 불교 또는 신토 사찰에 등록해야 했다. 네덜란드인과 중국인은 각각 데지마와 나가사키의 특별 구역으로 제한되었다. 1641년까지 일본 본토 남서쪽의 한국 및 류큐 제도와 일부 외곽 다이묘의 소규모 무역을 제외하고, 외국과의 접촉은 나가사키로 국한된 쇄국 정책에 의해 제한되었다.
마지막 예수회원은 1644년까지 살해되거나 개종했다.[5] 1660년대까지 기독교는 거의 완전히 근절되었고, 일본에 대한 외부의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영향력은 매우 제한적이 되었다.[6] 이 기간 동안 중국,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그리고 짧은 기간 동안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만이 상업적 목적으로 일본을 방문할 수 있었고, 이마저도 나가사키의 데지마 항구로 제한되었다. 일본 해안에 상륙한 다른 유럽인들은 재판 없이 처형되었다.

「쇄국」(해금) 정책 아래, 나가사키의 청나라인 거류지에서 청나라와, 나가사키 데지마에서 네덜란드와의 무역이 막부에 의해 이루어졌다.
네덜란드 상관장이 에도 막부에 제출한 네덜란드 풍설서와 중국 배가 가져온 것을 막부가 정리한 당선 풍설서는 해외 사정을 아는 실마리가 되었다.
쓰시마번을 중개한 이씨조선과의 왜관에서의 무역도 막부의 공인을 받았다. 막부의 공식적인 무역 관계는 아니지만, 사쓰마번의 지배를 받던 류큐왕국을 통한 청나라・동남아시아와의 중개 무역, 마쓰마에번의 세력 아래 있던 아이누와의 무역 등도 이루어졌다.
이상의 네 곳을 “네 개의 입구”라고 부르기도 한다.
1854년(가에이 7년) 일미화친조약 체결로 “쇄국”은 종료되었다.
4. 2. 조선과의 관계
조선 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에도 막부 사이의 관계 회복과 문화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쟁 이후, 조선은 일본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지 않고, 외교적 노력을 통해 관계 개선을 추구했다.1607년부터 1811년까지 총 12회에 걸쳐 조선 통신사가 일본에 파견되었다.[1] 이들은 에도(지금의 도쿄)까지 긴 여정을 통해 일본의 지도층과 만나 외교적 현안을 논의하고, 양국 간의 평화 유지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 통신사의 방문은 단순한 외교 사절단을 넘어, 문화 교류의 장이 되기도 했다. 조선의 학자, 예술가, 기술자들은 일본의 학문, 예술, 기술 발전에 영향을 주었으며, 일본의 문화 역시 조선에 소개되었다. 특히, 조선 통신사를 통해 전해진 선진 문물과 학문은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19세기 초, 일본 내의 정치적, 경제적 변화와 조선 통신사의 파견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증가하면서, 1811년의 통신사 파견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조선 통신사는 파견되지 않았다.
4. 3. 기타 국가와의 관계

에도 시대 일본은 데지마(出島)의 네덜란드 상인을 통해 서양의 과학과 기술을 연구하였고('란가쿠(蘭学)', "네덜란드 연구"), 조선통신사를 통해 조선과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그 외 류큐 왕국, 아이누와도 관계를 맺었다.
5. 문화와 사상
유교는 일본에서 주자학으로 발전하여, 에도 시대 초기부터 중기까지 주자학과 양명학이 성행하였다.[121] 주자학의 심화된 연구와 응용은 사회 및 정치 질서가 봉건적 규범에서 계급 및 대규모 집단 중심의 관행으로 이행하는 데 기여했으며, 법치주의의 발달을 가져왔다. 막부는 새로운 법률과 행정 장치를 도입하여 보다 포괄적인 통치를 정당화했다.
각 개인은 사회에서 고유한 위치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백성들은 통치자들에 의해 자애롭게 다스려져야 했고, 정부는 전능하지만 책임감 있고 인도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계급 제도는 주자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중국 모델과는 달리 군인과 승려가 지배 엘리트를 구성했다.
무가제법도를 비롯한 다양한 법령들이 제정되어 다이묘들을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이 법률들은 개인적인 사생활, 결혼, 소유할 수 있는 병사 수, 무기의 종류, 옷의 종류 등까지 규제했다. 다이묘들은 매 2년마다 에도에 들러 쇼군을 알현해야 했고, 가족 일부는 인질로 잡혔다. 해양 무역은 엄격하게 금지되었고, 기독교는 박해받았으며, 다이묘는 한 개의 성만 소유할 수 있었다. 중앙 정부는 번의 농민들에게 직접 세금을 걷지 않았지만, 번주들에게 궁궐, 성, 도로, 다리 공사 등을 명분으로 세금을 부과했다. 이러한 규제들은 쇼군의 권력을 강화하고 다이묘들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독립적인 번들은 점차 지방 행정 조직으로 약화되었고, 다이묘들은 막부의 관료로 변모했다. 그러나 다이묘들은 여전히 자신의 번에서 독립적인 행정적, 사법적 권한을 가지고 세금을 걷고 행정을 실시할 수 있었다.
사무라이 계급은 일본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유교 학자 관리의 방식을 배우며 무사 전통을 고수했다. 오사카, 교토, 에도와 같은 도시에서는 천민도(町人道)''("서민의 길")라는 독특한 문화가 등장했다. 이 문화는 신토, 주자학, 불교 신앙을 조화시키면서 근면, 정직, 명예, 충성, 검소함과 같은 무사도의 자질에 대한 열망을 고무했다. 수학, 천문학, 지리학, 공학, 의학 연구도 장려되었고, 특히 예술 분야에서 솜씨의 질이 중요시되었다.
모든 국민은 가족 단위로 불교 사찰의 신도가 되어야 하는 단가제도(檀家制度)가 제정되어, 막부는 국민의 동향을 개인 수준에서 파악하고 통제할 수 있었다. 출생, 사망, 결혼, 여행, 이주 등의 개인 정보가 사찰에 집약되어, 불교 사찰은 막부에게 필수적인 통제 기관이 되었다. 단가제도(檀家制度)는 기독교도 색출 및 배제 수단으로도 기능했다.[122]
불교와 신토는 모두 도쿠가와 시대 일본에서 여전히 중요했다. 불교는 주자학과 함께 사회 행동의 기준을 제공했으며, 상류층의 지지를 받았다. 1640년 막부가 모든 사람에게 사찰에 등록하도록 명령했을 때 기독교 금지령은 불교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도쿠가와 사회가 번, 마을, 구역, 가구로 엄격하게 분리되면서 지역 신토에 대한 애착이 재확인되었다. 신토는 정치 질서에 영적 지원을 제공하고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중요한 유대감을 형성했으며, 국가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신도에서는 막부와 여러 번의 유교 장려와 함께 신도와 유교가 융합된 신유일치의 수가신도 등 유교 신도가 나타났다. 국학의 융성과 함께 유불을 배척한 복고 신도가 주창되었고, 일부에서는 신불 분리가 시작되었다. 복고 신도는 유교와 불교의 가르침을 배척했지만, 수가 신도와 복고 신도는 막말의 존왕 사상에 영향을 미쳤고,[124] 메이지 시대의 정책에도 영향을 주었다.
신토는 주자학적 합리주의와 유물론에 의해 형성된 지적인 형태를 취했다. 고쿠가쿠(国学) 운동은 이 두 신앙 체계의 상호 작용에서 생겨났다. 고쿠가쿠는 근대 일본의 천황 중심 민족주의와 18세기와 19세기에 신토의 국가 신조로서의 부흥에 기여했다.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 만요슈(万葉集)가 새롭게 연구되었다.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와 같은 고쿠가쿠 운동의 일부 순수주의자들은 일본의 고대 방식을 오염시킨 유교와 불교의 영향, 즉 외국 영향을 비판하며, 일본이 가미(神)의 땅이므로 특별한 운명을 지녔다고 주장했다.[36]
이 기간 동안 일본은 데지마(出島)의 네덜란드 무역상을 통해 받은 정보와 책을 통해 서양 과학과 기술(''란가쿠(蘭学)'', "네덜란드 연구")을 연구했다. 주요 연구 분야는 지리학, 의학, 자연 과학, 천문학, 예술, 언어, 전기 현상 연구와 같은 물리 과학, 그리고 서양 기술에서 영감을 받은 일본 시계인 와도케이(和時計) 개발로 대표되는 기계 과학이었다. 도시바(東芝)의 창립자 다나카 히사시게(田中久重)는 당시 기계 과학을 연구한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그의 만년시계와 가라쿠리 인형(からくり人形)은 기술적 독창성과 정교함으로 인해 오늘날에도 복원하기 어렵고, 일본 근대화 이전의 고도로 기계적인 유산으로 여겨진다.[37][38][39]
5. 1. 교육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신판 다이묘들의 영지에 유교 학당을 세웠고, 다른 다이묘들도 이를 따라 자신의 영지에 번교(藩校)를 설립했다.[18][29] 한 세대가 지나자 사무라이들은 문학적 소양을 갖추는 것이 필수가 되었고, 번교의 학생들은 대부분 사무라이였으며, 불교 승려와 신토 사제도 있었다. 이들은 성리학과 주희의 학문을 배우고, 한자, 유교 경전, 서예, 산수, 예절, 무술, 전술 등을 익혔다.[18][29]
조닌들은 데라코야(寺子屋, "절 학교")를 후원했는데,[18] 데라코야는 사찰에 위치하며 문해력과 산수를 가르쳤다.[18] 에도 시대 도시의 높은 문해율은 연극과 소설 같은 고급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29] 도시에서는 무사가 아닌 사무라이들이, 시골에서는 불교 사찰이나 신사의 승려들이 교육을 담당했다.[29] 시골에서는 부유한 농민의 자녀들만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29]

성인 남성의 3분의 1, 여성의 6분의 1 정도가 글을 읽을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18] 에도 말기에는 성인 남성의 40%, 여성의 10%가 글을 알았다는 조사도 있다.[31] 높은 문해력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빠른 성장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다.[29]
5. 2. 문화
에도 시대에는 도시 거주민들이 여가와 오락을 즐길 만한 부를 축적하면서 대중문화가 크게 발전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우키요라고 불렀다. '우키요'는 본래 '근심스러운 세상'을 뜻했지만, 에도 시대에 이르러 '덧없는 세상, 즐겁게 살자'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변화했다. 이러한 풍조는 부와 향락을 추구하는 분위기를 만들었고, 에도 시대의 자본주의적 성향과 결합하여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43]
에도 시대에는 요시와라와 같은 대규모 유곽이 발달했다. 이곳의 여성들은 대부분 빚 때문에 유곽에서 일해야 했으며, 손님들에게 춤, 노래, 악기 연주, 말동무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요시와라는 유흥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고, 여성들의 의상은 신분을 나타내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화려한 의상은 높은 신분을 상징했고, 이는 의상 산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요시와라는 여성 인권 침해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으며, 결국 1956년에 폐쇄되었다.[43]
이 시기에는 게이샤, 음악, 대중 소설, 가부키, 분라쿠, 시, 문학, 우키요에 등 다양한 예술 분야가 발전했다. 지카마쓰 몬자에몬, 마쓰오 바쇼와 같은 예술가들이 등장하여 명성을 얻었다. 마츠무라 케이분은 새, 꽃, 동물 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화가로 유명하다.[43]
우키요에는 17세기 후반에 발전한 일본의 판화이다. 초기에는 에도의 유흥가를 그리는 데에서 시작되었으며, 히시카와 모로노부의 단색 그림 작품들이 인기를 끌었다. 18세기에 스즈키 하루노부가 비단에 여러 색상을 사용한 니시키에를 발명하면서 우키요에는 더욱 발전했다.[43]
우키요에는 대량 생산이 가능하여 서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초기에는 유곽의 창부, 스모 역사, 가부키 배우들의 초상화나 공연 장면을 주로 다루었으며, 이후에는 풍경화도 제작되었다. 정치적인 주제나 권력층의 모습은 많이 등장하지 않았으며, 춘화(春画 슌가[

에도 시대의 복식은 다양한 디자인과 화려한 장식이 특징이다. 특히 여성들의 기모노에서 이러한 특징이 두드러졌다. 사무라이들은 화려한 기모노를 통해 자신을 과시하고자 했고, 이는 직물 산업, 바느질, 염색, 보석 세공 기술 발전을 이끌었다. 여성들은 밝고 대담한 느낌의 옷을 선호했고, 상인 계급의 등장은 기모노 산업을 더욱 발전시켰다. 에도 시대 이전에는 기모노를 가정에서 제작했지만, 에도 시대에는 전문적인 남성 디자이너들이 기모노를 제작했다.[43]
군 계급을 위한 기모노는 고쇼도키(御所解)라고 불렸으며, 쇼군이나 다이묘와 같은 고위 계급이 착용했다. 주로 풍경을 묘사하거나 고전 문학에서 따온 무늬를 사용했다. 사무라이들은 허리 부분에 기하학적인 문양이 있는 단순한 기모노를 입었다. 잠옷용 기모노는 부드러운 소재로 두껍게 만들었고, 문양도 단순했다.[43]
'쓰마 모요'는 허리 아래에만 장식이 있고, 목과 어깨 부분에는 가문의 상징이 새겨진 의복 양식으로, 상인 계급의 여성들이 주로 입었다. 상인 계급의 기모노는 사무라이의 것보다 덜 화려했지만, 밝은 색깔과 자연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장식되었다. 부유한 여성들은 젊음과 열정을 상징하는 붉은색을 선호했는데, 붉은색 염료가 비쌌기 때문에 붉은색 옷은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네덜란드 상인들이 가져온 인도 직물은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었고, 일본 장인들은 인도 문양에서 영향을 받아 자신들의 작품에 적용했다.[43]
5. 3. 사상
에도 시대에는 다양한 사상이 발전하였다.주자학의 발전은 도쿠가와 시대의 주요 지적 발전이었다.[18] 오랫동안 일본에서는 불교 승려들에 의해 유교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지만, 도쿠가와 시대에 유교는 불교의 종교적 통제에서 벗어났다. 이 사상 체계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세속적인 관점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켰다. 유교적 인본주의, 합리주의, 그리고 역사적 관점은 관리 계급에게 호소력을 지녔다. 17세기 중반까지 주자학은 일본의 지배적인 법철학이 되었고, (국학) 사상의 발전에 직접적으로 기여했다.
주자학의 심화된 연구와 응용은 사회 및 정치 질서가 봉건적 규범에서 계급 및 대규모 집단 중심의 관행으로 이행하는 데 기여했다. 백성 또는 유교적 인간의 통치는 점차 법치주의로 대체되었다. 새로운 법률이 제정되었고 새로운 행정 장치가 도입되었다. 막부의 더 포괄적인 통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새로운 정부 이론과 새로운 사회 비전이 등장했다.
각 개인은 사회에서 고유한 위치를 가지고 있으며, 삶에서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노력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백성들은 통치할 임무를 부여받은 자들에 의해 자애로 다스려져야 했다. 정부는 전능했지만 책임 있고 인도적인 정부였다. 계급 제도는 주자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것과 동일하지는 않았다. 중국 모델에서는 군인과 승려가 계층의 맨 아래에 있었던 반면, 일본에서는 이 계급의 일부 구성원이 지배 엘리트를 구성했다.
사무라이 계급의 구성원들은 일본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유교 학자 관리의 방식을 함양하면서 무사 전통을 고수했다. 오사카, 교토, 에도와 같은 도시에서는 천민도(町人道)''("서민의 길")로 알려진 독특한 문화가 등장했다. 이 문화는 신토, 주자학, 불교 신앙을 조화시키면서 근면, 정직, 명예, 충성, 검소함과 같은 무사도의 자질에 대한 열망을 고무했다. 수학, 천문학, 지리학, 공학, 의학의 연구도 장려되었다. 특히 예술 분야에서 솜씨의 질에 중점을 두었다.

불교와 신토는 모두 도쿠가와 시대 일본에서 여전히 중요했다. 불교는 주자학과 함께 사회 행동의 기준을 제공했다. 불교는 과거만큼 정치적으로 강력하지는 않았지만, 상류층에 의해 계속해서 지지되었다. 1640년 막부가 모든 사람에게 사찰에 등록하도록 명령했을 때 기독교에 대한 금지령은 불교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도쿠가와 사회가 한(藩), 마을, 구역, 가구로 엄격하게 분리됨에 따라 지역 신토에 대한 애착이 재확인되었다. 신토는 정치 질서에 영적 지원을 제공했으며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중요한 유대감이었다. 신토는 또한 국가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신토는 결국 주자학적 합리주의와 유물론에 의해 형성된 지적인 형태를 취했다. 고쿠가쿠 운동은 이 두 신앙 체계의 상호 작용에서 생겨났다. 고쿠가쿠는 근대 일본의 천황 중심의 민족주의와 18세기와 19세기에 신토의 국가 신조로서의 부흥에 기여했다. 일본 정신을 찾는 과정에서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 만요슈(万葉集)가 모두 새롭게 연구되었다.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와 같은 고쿠가쿠 운동의 일부 순수주의자들은 일본의 고대 방식을 오염시킨 유교와 불교의 영향, 즉 외국 영향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들에 따르면, 일본은 가미(神)의 땅이었으며, 따라서 특별한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36]
이 기간 동안 일본은 데지마(出島)의 네덜란드 무역상을 통해 받은 정보와 책을 통해 서양 과학과 기술(''랑가쿠(蘭学)'', "네덜란드 연구")을 연구했다. 연구된 주요 분야는 지리학, 의학, 자연 과학, 천문학, 예술, 언어, 전기 현상 연구와 같은 물리 과학, 그리고 서양 기술에서 영감을 받은 일본 시계인 와도케이(和時計)의 개발에서 예시된 기계 과학을 포함했다. 당시 기계 과학을 연구한 사람들 중에서 도시바(東芝)의 창립자 다나카 히사시게(田中久重)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의 만년시계와 からくり人形(Karakuri puppet)의 기술적 독창성과 정교함 때문에 오늘날에도 복원하기 어렵고, 일본의 근대화 이전의 고도로 기계적인 유산으로 여겨진다.[37][38][39]
6. 에도 막부의 쇠퇴와 멸망
가마쿠라 막부 이래, 일본의 권력은 천황이 아닌 막부와 사무라이에게 있었다. 에도 막부 또한 무가 계급인 사무라이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모든 권력은 막부의 최고 권력자인 쇼군에게 있었다. 에도 막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져놓은 초석을 기반으로 센고쿠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막부를 세웠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명실상부한 일본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고, 1615년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면서 에도 막부의 통치는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에도 막부는 중앙의 막부와 지방의 다이묘들이 권력을 분담하는 막번체제를 통해 약 250년 동안 일본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도쿠가와 가문은 토지 재분배, 주요 대도시 장악, 새로운 토지 경작 등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창출했다.
일본의 봉건제는 지방의 모든 다이묘들을 신판 다이묘, 후다이 다이묘, 도자마 다이묘의 세 계급으로 나누어 구분했다. 이들은 막부 내에서의 지위와 역할에 차이가 있었으며, 특히 도자마 다이묘는 에도 막부에게 가장 주의해야 할 대상이었다. 에도 막부는 무가제법도와 같은 법령과 산킨코타이 제도를 통해 다이묘들을 통제하고 세력을 약화시켰다.
에도 막부는 천황과 조정, 종교 단체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내외적인 요인으로 인해 쇠퇴하기 시작했다.
6. 1.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 불안
에도 시대 후기에는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 불안이 심화되었다. 잦은 기근과 자연재해는 농민들의 삶을 핍박했고, 이는 농민 봉기로 이어졌다. 도시에서는 빈민 문제가 심각했으며, 사회 전반적으로 불안감이 고조되었다.18세기 중반, 에도의 인구는 100만 명이 넘어 당시 세계 최대 도시였을 가능성이 높다.[18] 오사카와 교토도 각각 40만 명이 넘는 인구를 가진 대도시였다.[18] 1700년경 일본의 도시화율은 약 10~12%로, 세계에서 가장 도시화된 국가 중 하나였다.[18]
에도 시대 초기에는 인구가 급증했지만, 이후 3000만 명 수준에서 정체되었다.[19] 1720년대부터 1820년대 사이에는 잦은 기근으로 인해 인구가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20] 1721년경 일본의 인구는 약 3000만 명이었고, 약 150년 후 메이지 유신 무렵에는 약 3200만 명에 불과했다.[21][18]

도쿠가와 시대는 평화를 가져왔지만, 잦은 자연재해와 기근은 사회 불안을 야기했다. 특히 18세기 초반에는 대규모 재해가 잇달아 발생했다.[107] 1708년에는 막부가 전국적인 과세를 실시하기도 했다.[108] 교호 대기근과 덴메이 대기근 무렵에는 인구가 감소세를 보이기도 했다.[109]
다음은 에도 시대에 발생한 주요 재해들이다.
유형 | 재해명 | 내용 |
---|---|---|
기근 | 간에이 대기근, 교호 대기근, 덴메이 대기근, 덴포 대기근 | 사망자 1만 명 이상 |
화재 | 메이레키 대화재, 미토사마 화재, 메이와 대화재 | 사망자 1만 명 이상 |
지진 | 게이초 대지진, 겐로쿠 대지진, 호에이 대지진, 야에야마 지진, 안세이 대지진 | Mw 8.5 이상, 사망자 1만 명 이상 |
화산 폭발 | 호에이 대분화, 덴메이 대분화, 안에이 대분화, 시마바라 대변 고후 폐해 | 화산폭발지수 VEI 4 이상, 사망자 1만 명 이상 |
18세기에는 흉년이 빈발했고, 덴포 대기근 때는 일부 번에서 수확량이 0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인들이 경제 주도권을 쥐게 되었고, 사회 불안은 더욱 심화되었다.
6. 2. 서구 열강의 압력과 개항
1853년 매슈 페리 미 해군 코모도어가 이끄는 함대(흑선으로 불림)가 에도 만에 나타나 무력을 과시하며 개항을 요구했다.[55] 1854년 일본은 미일화친조약을 시작으로 서구 열강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다.이러한 개항은 존황양이 사상을 고취시켰고, 막부 고위 관료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되는 등 정국 혼란을 야기했다.
6. 3. 막부 권위 실추와 도막 운동
매슈 페리 미 해군 코모도어의 흑선 내항으로 일본 개국이 강요되면서 막부의 권위는 실추되기 시작했다. 19세기 중반, 존왕양이 사상을 내세운 반(反)막부 운동이 지속되면서 결국 도쿠가와 막부는 무너지게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도쿠가와 막부 쇠퇴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쇼군에 의한 중앙 정부의 부실한 관리로 인해 일본의 사회 계급이 와해되었다"고 평가한다.[55]1867년 11월 9일,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선언하고 다음 해인 1868년 5월 3일에 에도 성이 메이지 정부군의 손에 넘어가면서 도쿠가와 막부는 붕괴되었다.
사쓰마 번과 조슈 번 등 웅번(雄藩)을 중심으로 한 도막 운동은 더욱 거세졌다. 이들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통일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였으며, 외세에 대항하여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결국, 보신 전쟁(1868년~1869년) 이후 막부는 폐지되었고, 요시노부는 평범한 다이묘의 신분으로 강등되었다. 1868년 내내 북쪽에서 저항이 계속되었고, 에노모토 다케아키 제독 휘하의 막부 해군은 에조 공화국을 단명하게 건설했던 홋카이도에서 6개월 동안 더 버텼다.
6. 4. 대정봉환과 메이지 유신
1867년 11월 9일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을 선언했다.[65] 이는 쇼군의 정치적 권력을 천황에게 돌려주고, 자신은 전 도쿠가와 쇼군이 의장인 다이묘 평의회를 통해 통치에 참여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사쓰마 번, 조슈 번 등은 이에 반발하여 1868년 1월 3일 왕정복고를 선언하고 일본 황궁을 장악했다.1868년부터 1869년까지 보신 전쟁이 발발했다. 막부 세력은 1868년 내내 북쪽에서 저항했고, 에노모토 다케아키 제독 휘하의 막부 해군은 홋카이도에서 에조 공화국을 세워 6개월 동안 저항했지만 결국 진압되었다. 1868년 5월 3일 에도 성이 메이지 정부군의 손에 넘어가면서 도쿠가와 막부는 붕괴되었다.[65]
7. 연표
연도 | 사건 |
---|---|
1600년 | 세키가하라 전투.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여러 다이묘 연합군을 패배시키고 일본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게 된다.[2] |
1603년 | 덴노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쇼군으로 임명하고, 이에야스는 정부를 에도(도쿄)로 옮겨 도쿠가와 쇼군가를 세운다. |
1605년 |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직에서 물러나고 그의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뒤를 잇는다. |
1607년 | 조선 왕조가 도쿠가와 막부에 사절을 파견한다. |
1611년 | 류큐 제도가 사쓰마 번의 속국이 된다. |
1614년 |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에서 기독교를 금지한다. |
1615년 | 오사카 전투.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사카 성을 포위하고, 도요토미 가문에 충성하는 세력들의 모든 저항을 진압한다. 도쿠가와의 권력이 일본 전역에서 절대적인 것이 된다. |
1616년 |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사망한다. |
1620년 | 이에야스 사후 농민과 조닌의 인구가 증가한다. |
1623년 |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세 번째 쇼군이 된다. |
1633년 | 이에미쓰가 해외 여행과 외국 서적의 열람을 금지한다. |
1635년 | 이에미쓰가 에도에의 상번 교대(참근교대) 제도를 공식화한다. |
1637년 | 과세에 시달린 농민들이 일으킨 시마바라 반란(1637~1638)이 발생한다. |
1638년 | 이에미쓰가 배 만드는 것을 금지한다. |
1639년 | 국내 봉쇄(쇄국령)을 공포하는 칙령이 완성된다. 네덜란드인을 제외한 모든 서양인의 일본 입국이 금지된다. |
1641년 | 이에미쓰가 중국, 조선, 네덜란드인을 제외한 모든 외국인의 일본 입국을 금지한다. |
1657년 | 메이레키 대화재로 에도 시가 대부분 소실된다. |
1700년 | 가부키와 우키요에가 유행한다. |
1707년 | 후지산이 분화한다. |
1774년 | 최초의 완전한 서양 의학 서적 일본어 번역본인 해체신서가 스기타 겐파쿠와 마에노 료타쿠에 의해 출판된다. |
1787년 |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쇼군의 고문이 되어 간세이 개혁을 실시한다. |
1792년 | 러시아 사절 아담 락스만이 동쪽 에조(현 홋카이도)의 네무로에 도착한다. |
1804년 | 러시아 사절 니콜라이 레자노프가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일본과의 통상 관계 수립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
1837년 |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이 발생한다. |
1841년 | 덴포 개혁이 실시된다. |
1853년 | 미 해군 매슈 C. 페리 제독의 4척 함대가 에도 만(도쿄 만)에 나타난다. |
1854년 | 미국이 일본에 통상 협정("가나가와 조약") 체결을 강요하여 2세기 만에 일본이 다시 외국에 문호를 개방한다. |
1855년 | 러시아와 일본이 외교 관계를 수립한다. |
1860년 | 사쿠라다몬 사건이 발생한다. |
1864년 |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의 군함이 시모노세키를 포격하고 외국인을 위해 더 많은 일본 항구를 개방한다. |
1868년 |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사임하고, 도쿠가와 막부가 멸망하며, 덴노(미카도)인 메이지 천황이 복고된다. 수도는 에도/도쿄이며 천황은 신성한 속성을 지닌다. |
일본 역사상의 시대 구분으로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또는 도요토미 정권 시대)와 함께 「'''근세'''」로 여겨진다.
에도 시대의 기간은 일반적으로 1603년 3월 24일 (게이초 8년 2월 12일)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어 '''에도'''(현재의 도쿄)에 막부를 수립한 때부터, 1868년 10월 23일 (게이오 4년/메이지 원년 9월 8일)의 「일세일원의 칙어」 발포(일세일원으로의 이행)에 따라, 게이오에서 메이지로 개원될 때까지의 265년간이다.
초장기의 정권 안정, 특히 전반기 100여 년은 경제 성장 기조 아래, 도시민 계층이 발전하고 다양한 분야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에도 시대는 경제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고, 그 자본 축적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의 경제 발전 원동력이 되었다.
각지의 여러 다이묘(大名)들은 에도 번저(江戸藩邸)와 상근 교대(参勤交代)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자번(自藩)에서 생산된 쌀과 어패류, 농산물을 오사카에서 팔았기 때문에, 오사카에는 여러 다이묘의 창고(蔵屋敷)가 설치되었고, 전국의 특산품이 즐비하여 활황을 보였다. 또한, 상근 교대와 보조 공사(お手伝い普請)로 많은 다이묘들이 가도(街道)의 여관(宿屋)·여관(旅籠)에 머물렀기 때문에, 경제 유통이 활발해졌다. 에도 막부는 주식 동업 조합(株仲間)을 결성시켜 특정 상인의 독점을 인정함으로써 상업 통제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에도 시대 후기에 접어들면서 도시와 지방 모두 신흥 상인의 등장이 시작되어 활발한 전개를 보이게 된다. 막부는 이러한 경제 발전 움직임에 충분한 대응을 할 수 없었고, 물가 변동에 의한 사회적 혼란을 진압하지 못하여 막부가 동요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앵거스 매디슨에 따르면, 1820년 (분세이 연간) 시점의 GDP는 미국을 1로 했을 경우, 일본은 그 1.75배, 네덜란드는 0.3배, 영국은 2.8배였고, 1850년이 되면서 미국이 일본의 2배 가까이에 이른다. 에도 시대의 1인당 생산량은 미국의 0.15%이다.
대외 정책으로서 막부는 해금(이른바 쇄국(鎖国)) 정책을 펴고 있었다. 그러나 쇼군(将軍) 교체 시에 방문한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에 의해 청나라(清国) 동향을, 또한 자주 방문한 네덜란드 상관장(オランダ商館長)에 의해 유럽(欧州) 동향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네덜란드 풍설서(オランダ風説書)). 예를 들어 덴포 개혁을 실시한 로쥬(老中) 미즈노 다다쿠니(水野忠邦)는 청나라에서 아편 전쟁(アヘン戦争)이 일어나자 즉시 이국선(異国船) 타파령(打払令)을 철회하고 있는데, 이것도 영국(英国)을 비롯한 서양 열강(西洋列強)의 청나라에 대한 외교 자세를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대응이었다. 참고로, 나가사키 나루타키(長崎鳴滝)에 서양 의술 학숙(나루타키 학숙(鳴滝塾))을 연 필립 프란츠 폰 지볼트 밑에는 많은 일본인이 수학하고 있어, 제한된 범위에서 서양인과 일본인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 농업·임업
: 농업 기술: 농업 기구 발전, 센바코키(千歯扱き)·빗추구와(備中鍬), 비료(肥料)(호시카(干鰯), 기름 찌꺼기(油粕)), 근면 혁명(勤勉革命)
: 농학: 니노미야 손토쿠(二宮尊徳)
; 수산업
: 다와라모노(俵物): 말린 해삼(煎海鼠), (전복(アワビ)(말린 전복(干鮑)), 상어 지느러미(フカヒレ)…모두 중화요리(中華料理)의 고급 식재료)
; 광업
: 사도 금광(佐渡金山), 이쿠노 은광(生野銀山), 이와미 은광(石見銀山), 벳시 동광(別子銅山)
; 수공업
: 상품 작물(商品作物), 매뉴팩처(マニュファクチュア)
; 교통
: 육상 교통: 오가도(五街道)(도카이도(東海道), 나카센도(中山道), 닛코 가도(日光街道), 고슈 가도(甲州街道), 오슈 가도(奥州街道))
: 수상 교통: 벤자이센(弁才船), 스미노쿠라 료이(角倉了以), 가와무라 즈이켄(河村瑞賢), 히가시마와리 해운(東廻海運), 니시마와리 해운(西廻海運)
: 통신: 히캬쿠(飛脚) 제도
; 도시
: 삼도(三都): 에도(江戸)·오사카(大坂)·교토(京都), 조카마치(城下町), 슈쿠바마치(宿場町), 몬젠마치(門前町)(나가노시(長野市)(나가노)·이세시(伊勢市)(야마다)(山田) 등)
; 상인
: 에도 상인(江戸商人), 가미가타 상인(上方商人)(오사카 상인(大坂商人)·오미 상인(近江商人)), 이세 상인(伊勢商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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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史の内幕
中公新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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経済成長の日本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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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貨幣史 本文 - 貨幣博物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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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士と米事情~給料を米でもらい、派手な生活で借金も… 連載54 孫に伝えたい 江戸人のこころ 日本老友新聞 [ro-y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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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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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大学出版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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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世日本の国家形成と外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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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4回 江戸時代の貿易:株式会社日立システム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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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立システム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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オランダ風説書(オランダフウセツガキ)とは? 意味や使い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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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船風説書(とうせんふうせつがき)とは? 意味や使い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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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戸時代に東海道を通ったという朝鮮通信使について教えてくだ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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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1部 4. 日本の開国と日蘭関係 江戸時代の日蘭交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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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幕末期の教育:文部科学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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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8回:徳川幕府の政治体制に組み込まれた仏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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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蓮宗不受不施派の弾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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垂加神道(スイカシントウ)とは? 意味や使い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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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和大殉教(ゲンナダイジュンキョウ)とは? 意味や使い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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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教の自由」の扉開いた流刑地の隠れキリシタ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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浦上崩れ(ウラカミクズレ)とは? 意味や使い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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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におけるおもな時代区分(にほんにおけるおもなじだいくぶん)とは? 意味や使い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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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辻哲郎 埋もれた日本 ――キリシタン渡来文化前後における日本の思想的情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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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川弘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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毎日新聞秋田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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鳥栖市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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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明治百年記念関係行事等概況「明治百年記念100歳以上の高齢者の慶祝」よ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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