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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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유교는 중국에서 전래되어 삼국시대부터 민족 정신 형성에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조선 시대에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지배적인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유교는 오륜, 효, 충, 예 등 핵심 가치를 통해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윤리 의식을 함양하는 데 기여했으나, 지나친 형식주의, 신분 차별, 여성 차별 등의 폐단도 낳았다. 현대 사회에서도 유교는 가족 중심주의, 교육열, 기업 문화 등 다양한 측면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부정적인 측면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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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송나라 시대 학자 주희(1130~1200)는 도교와 불교 사상을 유교에 더했다. 주희는 생전에 거의 주목받지 못했지만, 사후 그의 사상은 유교 경전의 실제 의미에 대한 새로운 정통 견해가 되었다. 현대 역사가들은 주희가 이전의 유교와는 다소 다른 것을 창조했다고 보고 그의 사고방식을 신유학(New Confucianism)이라고 부른다.[1] 신유학은 19세기까지 중국, 일본, 한국, 베트남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국 유교의 역사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자(漢字)와 함께 유교 사상이 전래된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시대에는 국가 통치 이념으로 적극 수용되었다. 고구려는 태학, 신라는 국학 등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38] 당시 유교는 유능한 관리를 양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고, 부차적으로 지도계급이 경사(經史)에 통하고 사부(詞賦)와 문장을 잘 쓰게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조선은 유교, 특히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아 통치 체제를 확립하였다. 정도전, 권근 등은 성리학에 기반하여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불교를 비판하며 유교 중심의 사회 질서를 구축하였다. 세종대왕(재위 1418–1450) 시대에는 모든 학문 분야가 유교 사상에 뿌리를 두게 되었다. 조광조는 대중에게 신유학을 널리 알리려 노력하였으며, 이는 이황(1501–1570)과 이이(1536–1584)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종종 각각 호인 '퇴계'와 '율곡'으로 불린다. 17세기 초, 신유학 사상은 서인과 동인, 남인과 북인 사이의 분열을 겪었다.
1894년, 한국 보수주의자, 민족주의자, 신유학자들은 동학 농민 혁명을 일으켰다.[20] 이들은 외래의 영향으로 한국 사회와 문화가 상실되었다고 보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 반란은 청일 전쟁으로 이어져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10년, 일본은 한국을 보호령으로 합병하여 조선 왕국을 종식시키고 30년 간의 일제강점기를 초래했다.[6]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한국 전쟁과 그 뒤를 이은 억압적인 독재 기간 동안 유교와 신유학 사상은 탄압은 아니더라도 계속해서 무시당했다.[27] 그러나 비밀 유교 관행과 조직은 여전히 존재했고, 1945년에 '유교 연합'의 형태로 나타났다.[7]
조선의 성리학(신유교)은 충, 효, 인, 신과 같은 유교의 사상과 이상을 장려했다. 조선 유교는 16세기에 최성기를 맞이했다. 조광조의 성리학 보급 노력은, 이황과 이이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이황과 이이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1천 원 지폐와 5천 원 지폐에 각각 그려지거나, 서울 중심부의 주요 대로에 그 이름이 붙여져 기념되고 있다.
2. 1. 유교의 전래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자(漢字)와 함께 유교 사상이 전래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구려는 태학, 신라는 국학 등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38] 당시의 유교는 유능한 관리를 양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고, 부차적으로 지도계급이 경사(經史)에 통하고 사부(詞賦)와 문장을 잘 쓰게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유교는 한국이 여러 국가로 분열된 시기부터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으며, 한국 문자의 발전은 상류층이 유교를 연구하고 지지하기 시작한 시기를 나타낸다. 낙랑군(오늘날 평양시 위치)에서 발견된 "채화된 바구니"와 유교 기관의 상징이 새겨진 기와 등 유물들은 유교적 이상을 묘사한다. 이러한 유물들은 한국인 자체보다는 한(漢) 사람들의 영향과 한국 내 외국인들 사이에서 유교가 널리 퍼져 있었음을 보여준다.[2]
삼국 시대가 사군(四郡)에서 시작되면서 각 왕국은 백성을 통합하고 권위를 강화할 수 있는 이념을 찾았다.[3] 338년 백제에 유교가 전래된 이후, 한국 불교는 삼국 시대의 모든 국가로 빠르게 확산되었다.[4]
2. 2. 삼국시대
삼국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적극 수용하여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백성을 교화하는 데 활용하였다. 특히 충(忠)과 효(孝)를 강조하여 국가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장려하였다.[39][40][41]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년)에 태학을 세워 제자를 교육하였고,[39] 지방 곳곳에 경당을 두어 청년들에게 유교 경전과 궁술(활쏘기)을 가르쳤다. 백제는 근초고왕 때 박사 왕인이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파하였다.[40]
신라는 682년(신문왕 2년) 국학을 설립하여 오경(五經)을 가르쳤으며, 논어와 효경을 필수로 하였다.[41] 설총은 이두로 구경(九經)을 설명하였다. 진흥왕 때 화랑 제도를 만들면서 “효제충신은 나라 다스림의 대요”라고 하여 유교 이념을 근본으로 삼았고, 화랑들은 임신서기석에서 볼 수 있듯이 유교 경전을 공부했다. 진흥왕 순수비에는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논어 구절과 '충신정성', '위국진절' 등의 용어가 나타나는데, 이는 유교 사상이 통치 이념의 기초였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유교 사상은 삼국시대에 오경사상을 중심으로 정치 이념이 되고 백성을 가르치는 원리가 되었다. 유교는 효(孝)를 중시하는데, 삼국시대에는 국가 체제가 정비되면서 국가의 기반을 튼튼히 하고 국력을 키우며 나라를 지키기 위해 효(孝)와 더불어 충(忠)의 의미가 더욱 강조되었다. 충과 효는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한국 유교의 보편적 정신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유학의 목표는 첫째, 경전과 역사서에 통달하여 정치나 법률 제도를 잘 알고 운영할 수 있는 관리가 되는 것이었고, 둘째는 글을 잘 쓰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었다.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로는 신라의 설총, 최치원 등이 있다. 설총은 방언(우리말)으로 구경(九經)을 해석하여 가르쳤고, 최치원은 12세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황소의 난 때 〈토황소격〉을 지어 문장 실력을 뽐냈다.
2. 3. 고려 시대
태조 왕건은 불교를 장려하고 도교적인 풍수설을 숭상하였으나, 통치 이념은 유교 사상에서 찾았다. 태조십훈요를 통해 후대 왕들에게 어진 정치를 베풀 것을 유언으로 남겼고, 서경(西京)에 학교를 세워 유교 이념으로 인재를 교육하였다.제4대 광종 때부터 과거를 시행하여 글을 숭상하는 풍습이 나타났으나, 경학보다는 시나 글을 짓는 제술(製述)을 중시하여 경학 연구는 미약하였다. 제6대 성종은 국자감을 설립하고 경학박사를 두었으며, 최승로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정을 쇄신하였다.[42] 광종은 과거 제도를 만들고, 성종은 국자감을 설립하여 유교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11대 문종 때에는 최충의 구재(九齋)를 비롯한 사립 학교(십이도(十二徒))가 성행하여 경사(經史)를 중심으로 연구하는 학풍이 나타났다. 그러나 최충 이후 200여 년간 유교는 부진하였고, 문장학에 치중하였다. 당시 유학은 유교, 불교, 도교가 혼합된 상태였다.
고려 말, 혼란과 문화적 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유교 혁신 운동이 일어났다. 1289년(충렬왕 15) 안향이 대도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가져와 국학 설립과 문묘 중수를 건의하는 등 유학 부흥에 기여하였다.[42][43] 안향은 성균관을 중심으로 백이정, 우탁, 권부와 같은 유학자들을 배출하였다. 백이정은 정주학을 연구하고, 우탁은 정주(程朱)의 역전(易傳)을 연구하여 고려에 처음으로 역리(易理) 학문을 전파하였으며, 권부는 《주자전서》 간행을 건의하였다. 안향의 학문은 이제현, 이색을 거쳐 정몽주, 정도전, 권근에게 이어졌다. 정몽주는 성리학에 정통하였고, 도덕과 경륜에서도 뛰어났으며,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 불린다. 이숭인도 유학 진흥에 힘썼으나, 문학자로 더 유명했다.
2. 4. 조선 시대
조선은 유교, 특히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아 통치 체제를 확립하였다. 정도전, 권근 등은 성리학에 기반하여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불교를 비판하며 유교 중심의 사회 질서를 구축하였다.세종대왕(재위 1418–1450) 시대에는 모든 학문 분야가 유교 사상에 뿌리를 두게 되었다. 한국의 유교 학교는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으며, 대부분 외국에서 교육받은 학자, 대규모 도서관, 장인과 예술가에 대한 후원, 13~15개의 주요 유교 저작물로 구성된 교육 과정을 갖추고 있었다. 한국의 불교는 주요 정치 중심지 밖에서 여전히 용인되었다. 명나라(1368–1644)에서는 신유학이 국가 이데올로기로 채택되었으며, 조선 왕조(1392–1910)[8] 역시 신유학을 학자와 관리자들 사이의 주요 신념 체계로 채택했다. 조광조는 대중에게 신유학을 널리 알리려 노력하였으며, 이는 이황(1501–1570)과 이이(1536–1584)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종종 각각 호인 '퇴계'와 '율곡'으로 불린다.
17세기 초, 신유학 사상은 서인과 동인, 남인과 북인 사이의 분열을 겪었다. 이러한 분열의 핵심에는 한국 군주제의 계승 문제와 대립하는 파벌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있었다. 점점 더 많은 신유학 학자들이 특정 형이상학적 신념과 관행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고, 실학('실용적 학습'을 의미) 운동은 신유학 사상이 현상 유지를 유지하는 것보다 개혁에 더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94년, 한국 보수주의자, 민족주의자, 신유학자들은 동학 농민 혁명을 일으켰다.[20] 이들은 외래의 영향으로 한국 사회와 문화가 상실되었다고 보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 반란은 청일 전쟁으로 이어져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10년, 일본은 한국을 보호령으로 합병하여 조선 왕국을 종식시키고 30년 간의 일제강점기를 초래했다.[6] 이 기간 동안 일본은 한국인들에게 일본 문화, 언어, 교육, 관행, 심지어 일본 성씨까지 강요했다.[6]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한국 전쟁과 그 뒤를 이은 억압적인 독재 기간 동안 유교와 신유학 사상은 탄압은 아니더라도 계속해서 무시당했다.[27] 그러나 비밀 유교 관행과 조직은 여전히 존재했고, 1945년에 '유교 연합'의 형태로 나타났다.[7] 이 조직은 식민주의의 영향을 근절하고 방지하며, 성균관을 업데이트하는 것을 목표로 설립되었다.[7]
이승만 정부의 토지 개혁 이후, 유교 연합은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고, 고령화되는 추종자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1963년 조사에 따르면 지역 지부당 평균 유교 추종자 수는 40대였고, 지역 회장의 평균 연령은 63세였다.[7]
조선의 성리학(신유교)은 충, 효, 인, 신과 같은 유교의 사상과 이상을 장려했다. 1392년 이후 조선 시대에 유교는 학구적인 양반 계급과 군인들 사이에서 신념의 기본적인 지주가 되었다.
조선 유교는 16세기에 최성기를 맞이했다. 조광조의 성리학 보급 노력은, 이황과 이이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이황과 이이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1천 원 지폐와 5천 원 지폐에 각각 그려지거나, 서울 중심부의 주요 대로에 그 이름이 붙여져 기념되고 있다.
2. 4. 1. 사림파 대두
정도전과 이성계의 쿠데타로 조선이 건국된 이후, 이방원이 또 쿠데타로 태종이 되었다. 이후 쿠데타는 하나의 풍조가 되어,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세조가 되었다. 이들 세력이 바로 훈구파이다. 훈구파의 잦은 쿠데타는 유교의 '충효' 이념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었다. 이에 유교 이념에 철저한 일군의 양심적 학자들이 나와서 훈구파의 반역을 비난했다. 이들이 바로 사림파이다. 사림파는 성종 때 등용된 김종직으로부터 시작한다.[1]김종직의 문하에 김굉필, 정여창이 유명하였는데, 무오사화 때 훈구파는 김종직을 부관참시한 것을 비롯하여, 김굉필과 정여창 등 그 문인들을 탄압했다. 갑자사화에 사림파는 또 다시 화를 입었다.[1] 김굉필의 문인에 김안국, 김정국, 이장곤, 조광조 등이 있었다. 연산군의 폭정을 뒤엎은 쿠데타로 즉위한 중종은 연산군의 방탕을 반성한 도덕 정치를 했다. 이에 중종은 성리학의 도덕적 원칙주의에 충실한 조광조를 기용했다. 그는 중종의 지지를 뒷받침으로 하여 지치(至治)주의와 왕도정치를 서둘렀다. 현량과의 설치 및 위훈 삭제에 극도의 위기감을 느낀 훈구파 홍경주, 남곤, 심정 등이 반격을 가했다. 이에 중종이 조광조를 유배 보냈다가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이것이 기묘사화이다.[1]
기묘사화 이후로 사림파는 정계 진출을 단념하고 산림에 돌아와 학문에 전심하고 제자를 키워서 뒷날을 기약하는 풍조가 일어났다. 학문의 경향도 성리학적 사색과 이론의 방면으로 일변, 서경덕, 이언적 등을 배출하였지만,[1] 이언적은 을사사화 때 몰락하였다.[1]
2. 4. 2. 이황과 이이의 성리학
이황과 이이는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학자들로, 각각 주기론과 주리론을 주장하며 학문적 논쟁을 벌였다. 이황은 도덕적 실천을 강조하였고, 이이는 현실 개혁을 위한 실천적 지식을 중시하였다. 이황과 이이의 학문적 논쟁은 사상적 발전뿐 아니라, 동인과 서인이라는 붕당 정치의 기반이 되었다.[44] 이황은 경상도 지역, 이이는 경기 충청 지역의 맹주가 되었으며, 동인과 서인의 분당은 이 두 학파의 대립의 연장선 위에 있다.이황은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고 그 이론을 완전히 이해한 첫 번째 세대의 학자였다. 그의 성리학 이론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은 기대승과 벌인 사칠(四七) 논쟁이다.
- 사단(四端):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의 네 가지 도덕적 감정.
- 칠정(七情):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의 일곱 가지 육체적 감정.
이황은 사단은 마음의 리(理)에서 발(發)하고, 칠정은 기(氣)에서 발(發)한다고 보았다. 반면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 모두 마음의 기에서 발한다고 주장했다.
이이는 기대승의 이론을 받아들여 기일원론을 주장했다. 이이는 리와 기는 공간적으로 서로 떨어지거나 붙음(離合)이 없고, 시간적으로 선후가 없다고 보았다. 리(理)는 조리(條理; 당연의 법칙)으로 천지의 체(體)요, 기(氣)는 그 조리를 구체화하는 재료이니 천지의 용(用)이다. 이이는 기가 드러나면 리가 올라타는(氣發理乘) 하나의 길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황의 제자로는 유성룡, 김성일, 정구, 이덕홍 등이 유명하며, 정구를 이은 사람이 허목이다. 이이의 문인으로는 김장생, 조헌, 정엽, 이귀, 황신, 안방준 등이 있다.
이황의 학설은 일본 주자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45]
2. 4. 3. 이황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 사회는 큰 혼란을 겪었고, 유교는 예송(禮訟) 논쟁과 모화(慕華)사상[46] 등의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세치용(經世致用)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을 강조하며 사회 개혁을 추구한 실학파(實學派)가 대두하였다.[46]3. 기본 사상
유교의 핵심 사상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의 오상(五常)과 충(忠), 효(孝), 열(烈) 등의 덕목으로 구성된다.
공자는 유교 사상의 기초를 다졌으며, 그의 가르침은 논어에 기록되어 있다. 한나라와 당나라를 거치며 유교 사상은 널리 퍼졌고, 송나라 시대 주희는 도교와 불교의 사상을 유교에 더하여 신유학을 정립했다.[1] 신유학은 19세기까지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 시대에는 세종대왕 시대부터 유교가 모든 학문의 기반이 되었으며, 신유학은 국가 이념으로 채택되었다.[8] 조광조는 신유학을 널리 알리고자 노력했으며, 이황(퇴계)과 이이(율곡)는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로 꼽힌다. 조선 성리학은 충, 효, 인, 신 등의 유교 사상을 강조했다. 양반 계급과 군인들은 유교를 기본적인 신념으로 삼았고, 세종 시대에는 유교 학교가 건설되어 유교적 교육 과정을 갖추었다.
17세기에는 실학 운동이 일어나 신유학의 형이상학적 측면에 의문을 제기하고 개혁을 주장했다. 19세기 말에는 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났고, 이후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거쳐 일제강점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유교는 억압받았으나, 광복 이후 유교 단체가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
3. 1. 인(仁)의 사상
인(仁)은 유교 사상 최고의 원리이다. 공자는 "인이라는 것은 사람이다(仁者人也)"라고 말하였다.[48] 이때 '사람'은 개별적인 실체를 가리키고, 인은 이 개체가 본래 갖춘 덕성, 즉 사람이 가야 할 길(人道)을 말한다. 이 인도(人道)는 금수(禽獸)와 구별되는 인간의 본성으로 인간이 마땅히 걸어야 할 큰 길이다. 그래서 주자(朱子)는 인(仁)이란 "사람이 사람되는 까닭의 원리(人之所以爲人之理)"라고 말하였다.[49] 유교에서는 인(仁)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사랑을 들고 있다. 그래서 공자는 그의 제자 번지가 인에 관하여 물었을 때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이라 답변하였다. 인은 원리이고 사랑은 실천 요목으로 이해된다.윤리는 보편성을 띠어야 하므로 모든 인간에게 고루 적용되는 준칙이 요구된다. 이 준칙으로 공자는 서(恕)의 관념을 제기한다. 서(恕)는 자신을 미루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으로 적극적·소극적인 두 가지 면이 있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서는 안 된다(己所不欲勿施於人)"는 것은 소극적인 준칙이고, "자기가 자립하고자 하듯이 다른 이를 일으켜 주고 자기가 이루고자 하듯이 다른 이가 이루게 도우라(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는 것은 적극적인 준칙이다.
이러한 서(恕)의 사상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완성이 선행되어야 가능하다. 이 자기 완성이 곧 충(忠)이다. 충이란 "자기의 성실성(誠實性)을 완전히 다하는 것(盡己之謂忠)"[50]으로 윤리 행위의 전제가 된다. 《대학》(大學)에서 충의 관념은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으로, 서(恕)의 관념은 "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로 구체화되었다. 그래서 자기 인격 완성은 다른 이의 인격 완성 과 뗄 수 없는 관계로 맺어지고 개별성의 원리가 보편성의 원리로 승화된다.
3. 2. 효제(孝悌) 사상
효제(孝悌)는 유교의 근본 덕목으로, 공자에 의해 그 내용이 심화된 이래 동양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효(孝)는 부모를 섬기는 것에서 시작하여 조상 숭배, 나아가 천지(天地) 숭배로 이어진다. 이는 자신의 신체가 부모로부터 비롯되었고, 더 나아가 만물이 천지로부터 나왔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효도는 경천(敬天) 사상과 결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효의 실천은 혈연공동체인 가정에서 시작된다. 자식이 부모를, 동생이 형을 섬기면서 사랑(愛)을 경험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랑이 충만한 사회를 이루는 것이 유교의 충서(忠恕) 사상이다. 효제는 임금, 사대부, 백성 모두에게 해당되는 덕목이며, 임금이 효제로 천하를 다스리고 백성이 효제로 임금을 섬기면 충성(忠誠)이 된다. 따라서 효제는 가정 윤리를 넘어 사회 규범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한국은 삼국시대부터 《논어》, 《효경》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삼국유사》에도 효행 관련 일화가 많이 나타나는 등 민간 생활에 깊이 침투해 있었다. 고려 말 권부가 지은 《효행록》은 효행 설화를 집대성한 최초의 책이다.
조선시대에는 효 사상이 지배층에까지 영향을 미쳐 정치적 대립이나 당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연산군의 갑자사화(甲子士禍)는 생모 복위 문제로 인한 신하들과의 마찰이 확대된 사건으로, 개인적인 효와 대의명분의 대립이 원인 중 하나였다. 효종 때 모후 조대비의 복제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이 대립한 사건도 효제 관념과 관련된 갈등이었다.
효제 관념은 이러한 폐해도 낳았지만, 효자와 효녀를 배출하고 가정의 화목을 촉진하며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3. 3. 예(禮)의 사상
예(禮)는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실천함이다. 신(神)을 섬기어 복이 이르게 하는 바이다"라는 뜻이다.[31][32] 조선의 성리학(신유교, 성리학)은 충, 효, 인, 신과 같은 유교의 사상과 이상을 더욱 크게 장려했다.1392년 이후 조선 시대에 유교는 학구적인 양반 계급과 군인들 사이에서 신념의 기본적인 지주가 되었다.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종교가 자연스럽고 쉽다고 여겼으며, 모든 종교의 공통 부분을 유지했다. 이왕가의 장군들은 불교를 박해하고 농촌 지역에서 무속을 유지했지만, 통치와 사회적 규제에 이용하기 위해 유교를 장려했다. 이는 중국으로부터의 문화적 이전을 늘리기 위해 중국의 관료적인 통치 모델을 매우 빠르게 문명사회에 통합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조선 유교의 학교가 건설되었고, 그 학교들은 모두 외국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학자, 큰 도서관, 장인과 예술가 후원자, 그리고 유교의 생각에 기초한 교육 과정을 갖추고 있었다. 세종 (재위 1418년-1450년) 시대까지는 다른 종교들이 관용적으로 다루어지는 가운데 조선의 불교 종파가 주요 정치 중심지 밖으로 밀려났지만, 학문의 모든 분야는 이러한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조선에서의 유교는 16세기에 최성기를 맞이했다. 조광조의 성리학을 사람들 사이에 보급하려는 노력은, 조선의 두 명의 가장 저명한 유학자인 이황 (1501년–1570년)과 이이 (1536년–1584년)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퇴계와 율곡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1천 원 지폐와 5천 원 지폐에 각각 그려지거나, 서울 중심부의 주요 대로에 그 이름이 붙여져 기념되고 있다.
17세기 후기에 이르러 일부 유학자들은 성리학의 형이상학적인 성질에 반발하기 시작했다. 박지원이나 정약용 등은 실학 운동을 통해 보다 실천적인 사회 변혁을 주장했다.
유교에서는 나이, 성별, 계급에 따른 대응의 차이가 있었는데, 이로 인해 이씨 조선에서는 차별적인 해석이 가장 현저한 형태로 나타났다. 보통 지위가 높으면 덕이 높은 자로 여겨져 상위자에게 거역해서는 안 되었고 봉건 사회이기도 했기에 관직이나 귀족들은 그 이하의 천민, 노비를 자유롭게 사용했으며, 그 재산을 강제적으로 접수해도 지위가 높았기에 서민들은 소송을 제기할 수 없어 착취당하는 것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범죄에 있어서 죄를 범한 자는 극악인으로 여겨졌으며, 특히 횡포한 양반이 죄로 인해 신분을 박탈당하면 사람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 외의 자들도 살인 등 중범죄라면 끔찍한 죽음이나 평생 죄인의 오명을 짊어져야 했다. 이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발각 후의 위험이 높다고 해도 범죄가 적은 것은 아니었고, 절도 등은 매우 많았으며 그 때문에 벌도 무거웠다. 형벌의 목표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
문맹이었던 서민은 문자를 통해 유교를 배우지 않았기에 예외였지만, 양반에 속하는 여성에 대해서는 특히 엄격했으며 대우에도 악영향이 나타났다. 양반의 부녀자는 밖을 나다닐 때 머리부터 몸통까지 가리는 외투를 쓰고 얼굴만 드러내야 했으며, 시간도 해시(오후 10시부터 2시간) 사이로 정해졌다. 이자벨라 버드의 기행에는 낮의 서울을 본 적이 없는 여성도 언급되어 있다.
양반 여성은 자택에 있어도 모르는 남자가 방문하면 주인의 허락 없이 만나는 것은 불가능했고, 만약 이야기를 나누는 등 최악의 경우 손이 스치기만 해도 잘려나갈 수도 있었다. 헨드릭 하멜의 하멜 표류기에는 남녀 간에 형벌의 차이가 있었음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즉 남편을 죽인 아내는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가에 어깨까지 흙에 묻히고, 그 곁에 나무 톱이 놓입니다.
> 그리고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귀족 외에는 그녀의 목을 그 톱으로 썰어 죽여야 합니다.
> 남편이 아내를 죽인 경우, 그에 대해 상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다면 그 이유가 간통이든 아니든 그 죄로 소송을 당하지 않습니다.
>
> --헨드릭 하멜 『하멜 표류기』
>
이는 여성을 보호하고 정숙함을 요구하는 것을 규범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공자가 유교를 체계화한 당시부터 여성에 대해서는 남존여비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 있었으며, 조선 유교는 이것이 극히 현저했다. 결혼해도 부부는 같은 혈족이 아니므로 다른 성을 사용하며, 딸이 태어나 시집을 가도 집안의 성은 자손에게 남지 않는 등 봉건주의 체제로 인해 남존여비로 기울어졌다.
유교의 확대와 함께 숭불 억제 정책도 추진되어 불교 미술에서 일반 미술, 공예에도 피해가 미쳤다. 이 때문에 신라와 고려 시대에 번성했던 문화가 크게 손실되었다.[31][32]
4. 의식
유교 의식은 제례(祭禮)와 상례(喪禮)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제례는 조상 숭배와 천지신명(天地神明)에 대한 제사를 통해 공동체의 유대감을 강화하고, 상례는 죽음에 대한 경건한 태도를 통해 삶의 가치를 되새기는 의미를 지닌다.[51]
제례는 제사 대상, 시기, 장소, 절차, 참례자에 따라 구조가 달라진다. 하늘은 '상제(上帝)' 또는 '천(天)'이라 불리는 유교의 가장 높고 초월적인 신이다. 하늘에 제사 지내는 곳은 원구라고 하며, 동지에 교외에서 깨끗한 자리를 정해 제사를 지냈다. 원구는 주례에 천자(天子)만이 제사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어, 조선 시대에는 왕이 제사를 지내기도 했지만 공식화되지는 않았다.[51] 사직(社稷)은 토지신인 사(社)와 곡물신인 직(稷)에게 제사 지내는 곳으로, 왕실의 조묘(祖廟)인 종묘(宗廟), 공자를 비롯한 성현(聖賢)에게 제사하는 문묘(文廟)와 함께 조선 사회의 세 가지 기본 신전(神殿)이었다. 국토 안전과 백성의 생활 근본인 농사의 풍작을 기원하는 사직은 지방에서는 산천(山川)·성황(城隍)의 형태로 나타난다. 종묘나 가묘(家廟)는 조상신에게 제사함으로써 생명의 근본에 보답하고 혈족의 결속을 다지는 중심이 되었다.[52]
문묘는 중앙의 성균관(成均館)과 지방의 향교(鄕校)에 설치되었으며, 유림(儒林) 계층의 중심 조직으로서 유교 정신을 밝혀 후세에 교화를 남긴 선사(先師)를 존숭하고 사회에 정신적 지도력을 발휘하는 역할을 했다. 사직이나 산천·성황 등은 그 지역 최고 관료가 제관(祭官)이 되고, 종묘는 왕이 제관이 된다. 가묘는 종가(宗家)에 설치되어 종자(宗子)가 제주(祭主)가 되었다. 제사 시기는 제사 대상에 따라 엄격히 규정되었으나, 대체로 4계절의 자연적 순환을 중시한 시제(時祭)가 행해졌다. 납일이나 동지는 한 해를 끝맺는 뜻으로 태양을 중심으로 한 것이고, 삭망은 달을 중심으로 한 제일(祭日)이었다.[53]
제사 절차에는 제기(祭器)와 제수(祭需)의 선택·배열, 헌작(獻酌)과 재배(再拜) 등 세분화된 규정이 있다. 제관의 경건한 마음 상태가 중요시되며, 큰 제사에는 4일간의 산재(散齋)와 3일간의 치재(致齋)를 합쳐 7일간의 재계(齋戒)가 지켜졌다.
상례(喪禮)는 임종(臨終) 때 신체를 정침(正寢)에 옮기고, 절명하면 시체를 가리는 데서 시작한다. 곡(哭), 초혼(招魂), 염습(殮襲), 성복(成服) 등의 절차를 거쳐 입관(入棺)하며, 상여(喪輿)에 실려 나갈 때까지 신분에 따라 3일에서 5개월의 기간 차이가 있다. 산역(山役)을 할 때도 개토제(開土祭)에서 시작하여 법식에 따라 광(壙)을 파고 하관(下棺) 후 성분(成墳)할 때까지 절차마다 향을 피우고 술을 올리며 축(祝)을 읽는다. 집에 돌아와 반혼례(返魂禮)를 함으로써 장례(葬禮)를 마친다.[54]
상례 절차는 삼우(三虞), 졸곡(卒哭), 소상(小祥), 대상(大祥) 순서로 진행되며, 만 2년 후 대상을 마치고 신주(神主)를 조상의 사당(祠堂)에 모시는 부제를 지내면서 상례가 끝나고 제례가 시작된다. 사자(死者)와의 관계, 즉 촌수에 따라 상복을 입는 기간이나 종류가 달라지는 오복제(五服制) 체계가 규정되어 있다. 이러한 상례의 복잡하고 엄격한 절차는 유교의 '죽음에 대한 경건함'을 잘 나타낸다.
5. 조직
유교 조직은 국가, 사회, 가정 등 다양한 차원에서 존재한다.
국가 차원에서는 예조(禮曹)가 중심 역할을 했다. 예조는 통례원, 봉상사, 예빈사, 소격서, 종묘서, 사직서, 전생서, 귀후서, 각전, 각능전 등을 두어 국가 의례와 제례에 필요한 모든 의식과 운영을 관할했다. 또한 홍문관, 성균관(成均館), 춘추관, 승문원, 교서관, 세자시강원, 종학, 도화서, 사학 등에서는 유교에 필요한 서적 간행, 역사 기록, 교육 실시를 담당했다. 예조는 의정부나 다른 부처와 긴밀하게 협력하여 업무를 수행했다. 지방 관청에는 중앙 관청의 축소판인 예방을 두었는데, 이는 아전 관료층이 담당했다.
일반 민간에서는 서원(書院), 정사 등을 중심으로 교육 기관 단체가 활동했고, 향약(鄕約) 등의 지방 자치 단체가 활동했다. 또한, 이러한 조직에서 뛰어난 인재를 발탁하고 등용하는 방법으로 과거 제도(科擧制度)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1]
6. 유교 사상의 공과
유교는 한국 사회에 긍정적 영향과 부정적 영향을 모두 끼쳤다. 세종대왕(재위 1418-1450) 시대에 유교는 학문 분야의 뿌리가 되었고, 조선(1392-1910)은 신유학을 주요 신념 체계로 삼았다.[8] 조광조는 신유학을 대중에게 알리려 노력했고, 이황(1501-1570)과 이이(1536-1584)는 한국의 대표적인 유학자로 꼽힌다.[8]
17세기 초, 신유학은 서인과 동인, 남인과 북인 등으로 분열되었고, 왕위 계승 문제와 파벌 처리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 실학 운동은 신유학이 개혁에 더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구 열강의 압력과 기독교 선교 활동 증가는 유교 및 신유학 학파 간 갈등을 심화시켰다.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은 외세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으며, 이는 청일 전쟁으로 이어져 한국은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20]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은 1910년 한국을 강제 병합하여 일제강점기를 시작했다.[6]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은 한국인에게 일본 문화, 언어, 관습 등을 강요했지만,[6] 한국인은 독립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을 통해 저항했다. 해방 이후 유교는 성균관을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갔지만,[7] 이승만 정부의 토지 개혁과 사회 변화로 어려움을 겪었다.[7]
6. 1. 공헌
유교는 한국 사회 발전에 다양한 방면으로 기여했다.정치 제도 면에서는 삼국시대 부족 연맹 국가를 봉건 군주 국가로 전환하는 데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고, 고려를 거쳐 조선 시대에는 중앙집권적 군주 국가 및 관료 국가 체제를 완성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과거 제도를 통해 인재 등용 기준을 마련하여 유교 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유교화를 촉진했다.[8]
사상 면에서는 국민의 윤리·도덕 의식 함양에 크게 공헌했다. 오륜(五倫)은 가정, 사회, 국가 생활의 기본 윤리가 되었으며, 충(忠)·효(孝)·절(節)·의(義) 사상은 국민에게 보편화되어 가정과 국가를 유지하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예의와 염치를 중시하고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여 군자가 되기를 힘쓰는 윤리 의식은 '동방예의지국'이라는 평가를 받게 했다.
조선 시대 송학(宋學), 특히 정주학(程朱學)은 정치를 담당하며 부패 세력과 싸우다 희생되기도 했지만, 그들이 남긴 도의 정신은 사화(士禍)와 사림(士林), 서원(書院)을 통해 계승되었다. 비록 서원은 후일 폐단을 낳기도 했지만, 본래 도의를 위해 순절한 선현을 추모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조선 시대 사화와 당쟁(黨爭)은 유학자들을 산림으로 내몰아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둔 이론 유학을 발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심성(心性)·이기(理氣) 토론,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변론 등은 중국 성리학을 능가할 정도였으며, 일본에 퇴계학파가 생길 정도로 영향을 미쳤다.
임진왜란 이후 유학은 자기반성을 통해 철학, 형이상학적 이론 유학에서 현실 정치, 경제, 사회 문제로 관심을 돌리며 실학(實學)을 탄생시켰다. 실학은 '치인(治人)'과 '이용후생(利用厚生)' 측면의 이론과 실천에 힘썼으며, 한국의 역사, 지리, 문물 제도에 대한 검토와 비판을 통해 유학의 한국화와 토착화를 이끌었다. 또한, 청나라를 통한 서구 문물 수입으로 '북학(北學)'과 '서학(西學)'에 대한 관심도 넓혔다.
6. 2. 폐단
유교는 한국 역사 발전에 여러 폐단을 드러냈다.- 예의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관혼상제(冠婚喪祭) 절차가 복잡하고 형식에 치우쳐, 진실성이 부족해지는 문제가 발생했다.[31]
- '사농공상(士農工商)' 신분 질서에서 '사(士)' 계급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양반 계급이 특권 의식을 갖고 평민을 천시하고 노동을 기피하는 풍조가 생겼다. 유교의 이름을 악용하여 국민을 속이는 무리도 있었다.
- 도의(道義)와 덕성(德性) 함양을 중시하여 물질적 생산과 상공업을 천시하고, 관련 기술을 배우지 않아 상공업과 과학기술 발전을 저해했다.
- 유교 경전을 존중하고 한문(漢文) 학습에 몰두하여 한글 사용을 소홀히 하고, 민족적 문학·예술 발전을 늦추었다. 경전의 가르침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보수적이고 완고한 사고방식이 유교의 특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 나이, 성별, 계급에 따른 차별이 있었는데, 특히 이씨 조선 시대에 두드러졌다. 지위가 높으면 덕이 높은 것으로 여겨져 상위자에게 거역할 수 없었고, 천민이나 노비는 착취당해도 저항할 수 없었다.
- 범죄자는 극악인으로 취급되어 심한 처벌을 받았고, 특히 횡포한 양반이 죄로 신분을 잃으면 사람들의 증오 대상이 되었다. 이 때문에 죄를 인정하지 않고 회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 양반 여성은 외출 시 몸을 가리고 밤에만 다녀야 했으며, 낯선 남자와 만나는 것이 엄격히 제한되었다. 헨드릭 하멜의 하멜 표류기에는 남녀 간 형벌 차이가 기록되어 있다.
- 남존여비 사상이 강하여 여성은 차별받았고, 결혼 후에도 남편과 다른 성을 써야 했으며, 딸은 집안의 성을 잇지 못했다.
- 유교의 확산과 함께 숭불억제 정책으로 신라와 고려 시대의 불교 문화가 크게 훼손되었다.[31][32]
-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조선 시대 유교의 영향으로 윗사람에게 절대 복종하고, 윗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기 어려운 문화가 남아있다. 대한항공 땅콩 회항 사건과 같이 지위가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한다.
- 여성이 억압받는 일이 여전히 많으며,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매일 안부를 묻는 관습이나 남편과 성씨가 달라 소외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화병이 여성에게 많은 것도 사회적 냉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유교에서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가난한 사람이 도움을 당연하게 여기고 근면하게 일하는 것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했다.
7. 현대 사회와 유교
1910년 조선 왕조가 몰락하면서 신유학은 그 영향력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8][9] 현대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종교를 묻는 질문에 유교 신자라고 답하는 사람은 극소수이지만,[10][11] 유교는 조직적인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유교 신자라고 쉽게 정의하기는 어렵다.[11][12] 지배적인 이념으로서의 명성은 퇴색했지만, 유교 사상과 관습은 여전히 대한민국 문화와 일상생활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13][14][15]
신유학이 학교 교육 과정에서 제외되고 한국인의 일상생활에서 두드러진 위치에서 제거되면서, 한국 역사에 필수적인 무언가가 사라졌다는 인식은 1990년대 후반에 대한민국에서 유교의 부활로 이어졌다.[9][14]
북한의 종교나 관습에 대한 유교 관련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27] 그러나 주체 사상은 유교의 충성, 경건, 복종의 미덕을 장려한다.[28]
7. 1. 긍정적 영향
전통적인 유교의 교육에 대한 존중은 대한민국 문화의 중요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16] 조선 시대 유교 신자에게 과거 시험은 명예와 권력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오늘날에도 시험은 대한민국 생활의 중요한 측면으로 남아 있다. 연구하는 내용도 수년에 걸쳐 변화했다. 유교적 가르침은 외국어, 현대사, 경제, 과학, 수학과 같은 다른 주제로 대체되었다. 과거의 유교와 마찬가지로, 암기하고 공부하는 능력에 많은 비중을 둔다.[17] 시험은 더 나은 학교와 직장에 들어가는 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학생의 전체 삶은 필요한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준비에 맞춰져 있다.[18]지속적인 유교적 영향의 가장 강력한 증거는 대한민국 가족 생활에서 찾을 수 있다. 대한민국은 가족과 집단 중심적인 생활 방식을 강조하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흔히 행해지는 유교 의례인 조상 제사(차례)에서 나타난다. 이는 돌아가신 부모, 조부모, 조상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방식이며, 유교의 효를 보여주는 방식이다.[8][19] 어떤 경우에는 종교적 관점에 맞게 제사가 바뀌기도 했다. 이것은 유교가 대한민국에서 종교와 경쟁하기보다는 융합된 사례이다.[20]
1980년에는 "가정 의례 준칙"이 법으로 제정되었다. 이 법은 조상 제사를 부모와 조부모에게만 지낼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장례 의식을 간소화하며, 허용되는 애도 기간을 단축했다. 이 법은 엄격하게 시행되지 않으며, 이를 위반한 혐의로 기소된 사람은 없다.[19]
최근에는 부모의 권위에 대한 완전한 존경과 복종이라는 전통적인 유교 사상에서 벗어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는 결혼이 가족의 결정보다는 개인의 선택이 되어가는 방식에서 볼 수 있다.[21]
유교가 개인보다 가족과 집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대한민국 기업에도 적용되었다. 직원들은 회사를 가족으로 여기고, 회사의 수장은 특권을 누리는 가장으로 간주되며, 직원들은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기업들은 직원들 간의 조화로운 관계와 회사에 대한 충성심과 같은 유교적 윤리에 따라 운영되는 경향이 있다. 나이, 친족 관계, 성별, 사회 정치적 지위의 차이와 같은 속성이 중요하게 여겨진다.[22][23]
유교적 윤리적 수사는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다른 종교들도 적절한 인간 행동에 대한 논의에 이를 통합할 것이다. 정부와 기업 세계에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개인적인 필요보다 집단의 필요를 우선시하도록 장려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8][23][24]
예술은 여전히 주요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 도자기, 다도, 한국 정원, 한국 꽃꽂이는 유교의 원칙과 유교적 미학을 따른다. 학문적인 서예와 시도 또한 훨씬 적은 수이지만 이러한 유산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에서 교육적 틀 내에서의 예절과 코믹한 상황에 대한 학교 이야기는 초기 저술의 유교에 대한 풍자에 잘 들어맞는다. 학교에 대한 충성과 교사에 대한 헌신은 여전히 대중적인 코미디에서 중요한 장르이다.
한국에서는 지폐의 초상 등 유교가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33] 1000원 지폐에는 주자학자인 이황이, 5000원 지폐에는 주자학자인 이이가 그려져 있다. 50000원 지폐에는 이이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그려져 있다.[33]
7. 2. 부정적 영향 및 변화
1910년 조선 왕조가 몰락하면서 신유학은 그 영향력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8][9] 현대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종교를 묻는 질문에 유교 신자라고 답하는 사람은 극소수이다.[10][11] 그러나 유교는 조직적인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유교 신자라고 쉽게 정의하기는 어렵다.[11][12] 지배적인 이념으로서의 명성은 퇴색했지만, 유교 사상과 관습은 여전히 대한민국 문화와 일상생활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13][14][15]전통적인 유교의 교육에 대한 존중은 대한민국 문화의 중요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16] 조선 시대 유교 신자에게 과거 시험은 명예와 권력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오늘날에도 시험은 대한민국 생활의 중요한 측면으로 남아 있다. 연구하는 내용도 수년에 걸쳐 변화했다. 유교적 가르침은 외국어, 현대사, 경제, 과학, 수학과 같은 다른 주제로 대체되었다. 과거의 유교와 마찬가지로, 암기하고 공부하는 능력에 많은 비중을 둔다.[17] 시험은 더 나은 학교와 직장에 들어가는 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학생의 전체 삶은 필요한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준비에 맞춰져 있다.[18]
지속적인 유교적 영향의 가장 강력한 증거는 대한민국 가족 생활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대한민국이 가족과 집단 중심적인 생활 방식을 강조하는 것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흔히 행해지는 유교 의례, 즉 조상 제사에서도 나타난다. 이는 돌아가신 부모, 조부모, 조상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방식이며, 유교의 효를 보여주는 방식이다.[8][19] 어떤 경우에는 종교적 관점에 맞게 제사가 바뀌기도 했다. 이것은 유교가 대한민국에서 종교와 경쟁하기보다는 융합된 사례이다.[20]
1980년에는 "가정 의례 준칙"이 법으로 제정되었다. 이 법은 조상 제사를 부모와 조부모에게만 지낼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장례 의식을 간소화하며, 허용되는 애도 기간을 단축했다. 이 법은 엄격하게 시행되지 않으며, 이를 위반한 혐의로 기소된 사람은 없다.[19]
최근에는 부모의 권위에 대한 완전한 존경과 복종이라는 전통적인 유교 사상에서 벗어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는 결혼이 가족의 결정보다는 개인의 선택이 되어가는 방식에서 볼 수 있다.[21]
유교가 개인보다 가족과 집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대한민국 기업에도 적용되었다. 직원들은 회사를 가족으로 여기고, 회사의 수장은 특권을 누리는 가장으로 간주되며, 직원들은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기업들은 직원들 간의 조화로운 관계와 회사에 대한 충성심과 같은 유교적 윤리에 따라 운영되는 경향이 있다. 나이, 친족 관계, 성별, 사회 정치적 지위의 차이와 같은 속성이 중요하게 여겨진다.[22][23]
유교적 윤리적 수사는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다른 종교들도 적절한 인간 행동에 대한 논의에 이를 통합할 것이다. 정부와 기업 세계에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개인적인 필요보다 집단의 필요를 우선시하도록 장려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8][23][24]
15세기부터 시작된 신유학 철학은 한국 여성을 남성 지배의 단순한 연장선이자 필수적인 자손 생산자로 격하시켰다.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이러한 전통적인 관점은 사라지고 있다.[16] 대학과 직장, 정치에서 좋은 지위를 차지하는 여성 학생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25]
예술은 여전히 주요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 도자기, 다도, 한국 정원, 한국 꽃꽂이는 유교의 원칙과 유교적 미학을 따른다. 학문적인 서예와 시도 또한 훨씬 적은 수이지만 이러한 유산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에서, 교육적인 틀 내에서의 예절과 코믹한 상황에 대한 학교 이야기는 초기 저술의 유교에 대한 풍자에 잘 들어맞는다. 학교에 대한 충성과 교사에 대한 헌신은 여전히 대중적인 코미디에서 중요한 장르이다.
신유학이 학교 교육 과정에서 제외되고 한국인의 일상생활에서 두드러진 위치에서 제거되면서, 한국 역사에 필수적인 무언가가 사라졌다는 인식은 1990년대 후반에 대한민국에서 유교의 부활로 이어졌다.[9][14] 2006년, 대한민국 인구의 약 1.2%가 유교 신자였다.[26]
북한의 종교나 관습에 대한 유교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찾기는 어렵다.[27] 그러나 주체 사상은 유교의 충성, 경건, 복종의 미덕을 장려한다.[28]
전통적으로 한국 여성은 유교적 성 역할에 따라 가정주부 역할을 맡았다. 이는 여성이 집 밖에서 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은 변화하기 시작하여 2001년에는 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율이 49.7%에 달했는데, 이는 1960년대의 34.4%에 비해 크게 증가한 수치였다.[29] 1987년에는 남녀고용평등법이 도입되었고, 이후 여성 근로자의 권리를 향상시키기 위해 개정되었다.[29] 한국의 여성주의 단체가 영향력을 얻으면서 정부는 이에 귀 기울였고, 2000년에는 여성의 정책 참여를 허용하기 위해 여성가족부를 설립했다.[29] 여성의 근로 권이 신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정에서의 역할은 완전히 바뀌지 않았다. 여성 근로자는 여전히 가정의 주된 가사 노동을 담당하는 것으로 여겨진다.[29]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대한민국 여성에게 가정주부 역할과 직장 생활 사이에서 더 많은 선택지를 제공했다.
정부의 변화와 법률 제정으로 인해 직장을 선택한 여성들은, 현재까지도 직장에서 주요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대한민국 주요 기업들은 채용 방식을 바꾸기 시작했는데, 삼성이 이러한 변화를 주도한 주요 기업 중 하나였다. 1997년 삼성은 채용 과정에서 성차별을 없앴고, 2012년에는 56,000명의 여성 직원을 고용했다.[30] 그러나 1997년 이전에도 일부 여성들은 삼성에서 일할 수 있었지만, 가부장적인 기업 문화 속에서 차별을 겪었다. 삼성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직무는 대부분 하위 직급이었다. 회사가 여성에게 더 높은 직책을 제안하려 할 때, 많은 남성 최고 경영진은 여성들을 이용해 잡무를 시키는 등, 가정에서 남편이 아내에게 기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행태를 보였다.[30]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1994년 삼성 회장의 공개적인 인사 개혁으로 인해 변화하기 시작했고, 최고 경영진은 남성과 여성을 동등하게 대우하고 급여를 지급해야 했다.[30] 삼성의 최신 목표는 2020년까지 여성 최고 경영진의 비율을 2%에서 10%로 늘리는 것이다.[30] 그러나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에서는 특히 직장 환경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 여전히 존재한다.
유교에서는 나이, 성별, 계급에 따른 대응의 차이가 있었는데, 이로 인해 이씨 조선에서는 차별적인 해석이 가장 현저한 형태로 나타났다. 보통 지위가 높으면 덕이 높은 자로 여겨져 상위자에게 거역해서는 안 되었고 봉건 사회이기도 했기에 관직이나 귀족들은 그 이하의 천민, 노비를 자유롭게 사용했으며, 그 재산을 강제적으로 접수해도 지위가 높았기에 서민들은 소송을 제기할 수 없어 착취당하는 것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또, 범죄에 있어서는 죄를 범한 자는 극악인이며 특히 횡포한 양반이 죄로 인해 신분을 박탈당하면 일제히 사람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고, 그 외의 자들도 살인 등 중범죄라면 끔찍한 죽음이나 평생 죄인의 오명을 짊어지거나 갚으면서 살아야 했기에, 이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게 된다. 발각 후의 위험이 높다고 해도 범죄가 적은 것은 아니었고, 절도 등은 매우 많았으며 그 때문에 벌도 무거워 형벌의 목표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
문맹이었던 서민은 문자를 통해 유교를 배우지 않았기에 예외였지만, 지위가 높은 자의 아내 등 양반에 속하는 여성에 대해서는 특히 엄격했으며 대우에도 악영향이 나타났다. 양반의 부녀자는 밖을 나다닐 때 머리부터 몸통까지 가리는 외투를 쓰고, 얼굴만 드러내야 했으며, 시간도 해시(오후 10시부터 2시간) 사이로 정해져 이자벨라 버드의 기행에는 낮의 서울을 본 적이 없는 여성도 언급되어 있다. 또 자택에 있어도 모르는 남자가 방문하면 주인의 허락 없이 만나는 것은 불가능했고, 만약 이야기를 나누는 등 최악의 경우 손이 스치기만 해도 잘려나갈 수도 있었다. 헨드릭 하멜의 하멜 표류기에 남녀 간에 형벌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즉 남편을 죽인 아내는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가에 어깨까지 흙에 묻히고, 그 곁에 나무 톱이 놓입니다.
> 그리고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귀족 외에는 그녀의 목을 그 톱으로 썰어 죽여야 합니다.
> 남편이 아내를 죽인 경우, 그에 대해 상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다면 그 이유가 간통이든 아니든 그 죄로 소송을 당하지 않습니다.
>
> --헨드릭 하멜 『하멜 표류기』
>
이것들은 여성을 보호하기 위함과 정숙함을 요구하는 것을 규범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공자가 유교를 체계화한 당시부터 여성에 대해서는 남존여비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 있었으며 조선 유교는 이것이 극히 현저하여, 결혼해도 부부는 같은 혈족이 아니므로 다른 성을 사용하며, 딸이 태어나 시집을 가도 집안의 성은 자손에게 남지 않는 등 봉건주의 체제로 인해 남존여비로 기울어졌다.
유교의 확대와 함께 숭불 억제 정책도 추진되어 불교 미술에서 일반 미술, 공예에도 피해가 미쳤다. 이 때문에 신라와 고려 시대에 번성했던 문화가 크게 손실되었다.[31][32]
오늘날, 관광객이나 학자들에게만 가치가 있는 역사적 유물이나 잊혀진 유물로 치부될 수 있다 하더라도, 유교의 학교, 문묘, 조상 숭배 장소 및 학문의 전망은 축소되었다. 그러나 유교의 가치는 아마도 여전히 한국인의 정신에 거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게다가 유교는 반드시 종교로 여겨지는 것은 아니다. 도교 신자, 기독교인, 불교 신자이면서 동시에 유교를 신봉하는 것도 허용된다.
유교 사상의 강력한 요소는 지금도 일상적인 정치적 및 조직적 계층 안에 존재하지만, 이러한 요소를 낳은 도구와 의례는 사라졌다. 유교가 교육 과정과 한국인의 일상생활에서 제거된 이후, 조선의 역사에 필수적인 무언가가 상실되었다는 감각이 1990년대 후반 유교 부흥으로 이어졌다. 14세기 이후, 조선의 새롭게 부상한 엘리트들은 결합력 있는 유교의 모든 장치에 의존했고, 이 엘리트를 지켜주는 통치 위에 올라가는 요소로서, 외국 학자들 또한 한국의 유교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문화적으로, 예술은 주요한 전통을 지키고 있다. 조선 백자, 차례는 유교의 원리와 미학을 따른다. 그 수는 적지만, 학문적인 서예와 가장 진지한 시 또한 이러한 유산을 계승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교육적인 틀 내에서 매너와 희극적 상황을 다루는 학원물은 과거의 저작에서 유교에 대한 풍자에 잘 부합한다. 학교에 대한 충성심과 교사에 대한 존경은 지금도 인기 있는 코미디에서 중요한 분야이다.
한국에서는, 지폐의 초상 등 유교가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33] 1000원 지폐에는 주자학자인 이황이, 5000원 지폐에는 주자학자인 이이가 그려져 있다. 50000원 지폐에는 이이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그려져 있다.[33]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조선 시대에 굳어진 조선 유교로 인해 윗사람에게 절대 복종하며, 설령 윗사람이 잘못했더라도 이를 지적하여 망신을 주는 일은 할 수 없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을 혹사하는 것은 대한항공 부사장이었던 조현아가 일으킨 땅콩 회항 사건이나 물벼락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이들이 비판을 받은 것은 격앙된 태도도 있었지만, 그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도 있다. 이는 윗사람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면 곤란해지고, 죄를 인정하면 범죄자가 되어 불명예스러운 삶을 살게 될 것이 확정되기 때문인데, 이는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재임 중의 공적도 무시된 채 여러 죄목으로 체포되는 것에서도 볼 수 있으며, 이를 두려워한 나머지 국외 도피나 자살을 시도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여성이 억압받는 일도 아직 많으며,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매일 안부를 묻는 것이 관습이고, 남편과 성씨가 달라 소외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한국인 특유의 정신 질환인 화병이 여성에게 많은 것도, 사회에서 냉대받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유교에서는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하지만, 이로 인해 가난한 사람은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근면하게 일하여 돈을 버는 것에 소극적이었던 조선에서는, 타인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만큼의 재산을 획득하는 것이 많이 선택되었기에, 그 습관이 지금도 약간이나마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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