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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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 국왕은 고구려를 다스린 군주들을 의미하며, 동명성왕을 시작으로 보장왕까지 총 28명의 왕이 존재했다. 고구려 왕들은 시조 동명성왕이 중국 하백의 딸 유화부인과 괄리국 출신 해모수의 아들이라는 건국 신화를 공유하며, 중국 황제의 후손을 자처하기도 했다. 초기에는 동명성왕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유리명왕, 대무신왕 등이 영토를 확장했다. 이후 중앙집권화와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과 함께, 고구려는 주변국과의 관계 속에서 부침을 겪었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기에는 전성기를 맞이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했으나, 수·당과의 전쟁을 거치며 멸망했다.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부흥 운동이 일어났으며, 유민들은 각지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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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국왕 | |
|---|---|
| 고구려 국왕 | |
| 칭호 | 고구려 국왕 |
| 원어 명칭 | 해당 정보 없음 |
| 임기 | 해당 정보 없음 |
| 호칭 | 해당 정보 없음 |
| 초대 국왕 | 동명성왕 |
| 성립 | 기원전 37년 |
| 마지막 국왕 | 보장왕 |
| 폐지 | 668년 |
2. 시조 및 건국 신화
고구려의 건국 신화는 여러 기록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환단고기』 등에 따르면, 시조인 동명성왕(주몽)은 해모수와 유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광개토왕기·백제 본기·의자왕기에 따르면, 고구려 왕들은 중국 황제의 손자인 고양씨와 증손인 고신씨의 후손이라고 칭했다.[5][6][7][8][9]
『일주서』 「왕회해」는 고구려를 고이족의 자손으로 보았으며, 중국 학계는 고구려의 선조인 고이족과 고양씨를 연결하고, 고이족의 기원을 고양씨로 확정하여 "난생 신화, 조우관(새의 깃털로 장식된 모자)의 풍습, 귀신 사상 등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라고 주장한다.[10]
『삼국사기』에서 고구려 왕계는 시조 동명성왕을 "성 고씨, 휘 주몽"이라고 기록했지만, 이후 왕들에 대해서는 성을 명확히 기록하지 않았다. 삼품창영은 고구려 왕이 고씨를 칭한 것은 북연 왕의 고씨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언급한다.[11]
『구당서』와 『신당서』에 따르면, 고구려 왕은 기자조선을 건국한 중국인 기자의 자손을 칭하고, 기자를 조상으로 숭배하며, 사당을 세우고 사계절 동안 제사를 지냈다.[12][13][15]
2. 1. 동명성왕과 해모수
동명성왕의 어머니는 중국 영웅 하백의 딸인 유화부인이며, 동명성왕이 중국인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1][2][3] 동명성왕의 아버지 해모수는 괄리국인이며, 나이토 코난은 괄리국이 송화강 지류에 거주하던 다우르족이라고 지적하고 있다.[4]2. 2. 유화부인과 주몽의 탄생
해모수와 유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주몽은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이다. 동명성왕의 어머니인 유화부인은 하백의 딸로, 동명성왕이 중국인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1][2][3] 동명성왕의 아버지 해모수는 괄리국인이며, 나이토 코난은 괄리국이 송화강 지류에 거주하던 다우르족이라고 보았다.[4]2. 3. 고구려 건국 과정
동명성왕(주몽)은 해모수와 유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나 기원전 37년 고구려를 건국하였다.[1][2][3] 부여에서 탈출하여 엄호수(또는 엄리대수)를 건너 졸본 지역에 도착했다.『삼국사기』, 『삼국유사』, 『환단고기』등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건국 신화는 다양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 항목 | 내용 |
|---|---|
| 건국 시조 | 동명성왕(주몽) |
| 주몽의 부모 | * 아버지: 해모수 (또는 천제의 아들) |
| 건국 과정 | * 주몽은 부여에서 성장하며 뛰어난 능력을 보였으나, 왕자들의 시기를 받아 남쪽으로 탈출했다. |
| 고구려 왕의 성씨 | * 『삼국사기』에는 시조 동명성왕만 성이 고씨로 기록되어 있다. |
고구려 왕은 기자의 사당을 세우고 숭배하며, 사계절을 통하여 제사를 지냈다.[12][13][15]
3. 역대 국왕
대수 왕호 휘 재위 기간 비고 1 동명성왕 고주몽|高朱蒙한국어, 추모|鄒牟한국어, 상해|象解한국어 기원전 37년 - 기원전 19년 고구려 건국 2 유리명왕 유리|琉璃한국어 , 누리|類利한국어, 유류|孺留한국어 기원전 19년 - 서기 18년 부여와의 관계 유지, 왕권 강화 3 대무신왕 무휼|無恤한국어 18년 - 44년 개마국, 구다국 복속, 동부여 공격 (대소왕 사망) 4 민중왕 해색주|解色朱한국어 44년 - 48년 내치 안정 5 모본왕 해우|解憂한국어, 해애루|解愛婁한국어 48년 - 53년 북평, 어양, 상곡, 태원 공격 (실패), 두로에게 살해 6 태조대왕 궁|宮한국어, 어수|於漱한국어 53년 - 146년 중앙집권화, 요동 진출 7 차대왕 수성|遂成한국어 146년 - 165년 폭정, 명림답부에게 살해 8 신대왕 백고|伯固한국어, 백구|伯句한국어 165년 - 179년 왕권 회복, 민생 안정 9 고국천왕 남무|男武한국어, 이이모|伊夷謨한국어 179년 - 197년 진대법 실시, 왕위 부자 상속 10 산상왕 연우|延優한국어, 위궁|位宮한국어 197년 - 227년 왕권 강화 11 동천왕 우위거|憂位居한국어, 교체|郊彘한국어 227년 - 248년 위나라와의 전쟁, 서안평 점령 12 중천왕 연불|然弗한국어 248년 - 270년 내정 안정 13 서천왕 약로|藥盧한국어, 약우|若友한국어 270년 - 292년 안정적인 대외 관계 유지 14 봉상왕 상부|相夫한국어, 삽시루|歃矢婁한국어 292년 - 300년 폭정, 창조리에 의해 폐위 15 미천왕 을불|乙弗한국어, 우불|憂弗한국어 300년 - 331년 낙랑군 축출, 영토 확장 16 고국원왕 사유|斯由한국어, 유|劉한국어, 쇠|釗한국어 331년 - 371년 전연 침공, 백제 근초고왕과의 전투 중 전사 17 소수림왕 구부|丘夫한국어 371년 - 384년 불교 공인, 율령 반포, 태학 설립 18 고국양왕 이련|伊連한국어, 어지지|於只支한국어 384년 - 391년 내치 안정 19 광개토대왕 담덕|談德한국어 391년 - 412년 정복 활동, 영토 확장 20 장수왕 거련|巨連한국어, 련|璉한국어 412년 - 491년 평양 천도, 남진 정책 21 문자명왕 나운|羅雲한국어, 운|雲한국어 491년 - 519년 북위와 외교 관계 강화 22 안장왕 흥안|興安한국어, 안|安한국어 519년 - 531년 왕권 강화 23 안원왕 보연|寶延한국어, 연|延한국어 531년 - 545년 왕위 계승 분쟁 24 양원왕 평성|平成한국어 545년 - 559년 귀족 세력 간 권력 다툼 25 평원왕 양성|陽成한국어, 탕|湯한국어, 양|陽한국어 559년 - 590년 내치 안정, 돌궐과 관계 개선 26 영양왕 영양왕한국어, 평양왕한국어 원|元한국어 590년 - 618년 수나라와 전쟁 (살수대첩) 27 영류왕 건무|建武한국어, 성|成한국어, 무|武한국어 618년 - 642년 당나라와 외교, 연개소문에게 살해 28 보장왕 장|藏한국어, 보장|寶藏한국어 642년 - 668년 연개소문 집권, 나·당 연합군에 멸망
3. 1. 전기 (기원전 37년 ~ 165년)
기원전 37년 동명성왕이 고구려를 건국한 후, 유리명왕, 대무신왕, 민중왕, 모본왕을 거쳐 태조대왕이 6대 왕으로 즉위하여 146년까지 통치하였다. 태조대왕 사후 차대왕이 즉위했으나, 폭정으로 165년 명림답부에게 살해당했다. 이후 신대왕이 즉위하여 179년까지 재위했다.
| 시호 | 한글 | 성씨 | 재위 기간 | |
|---|---|---|---|---|
| 1 | 동명성왕 | 동명성왕한국어 | 고주몽|高朱蒙한국어, 추모|鄒牟한국어, 상해|象解한국어 | 기원전 37년 - 기원전 19년 |
| 2 | 유리명왕 | 유리명왕한국어 | 유리|琉璃한국어 , 누리|類利한국어, 유류|孺留한국어 | 기원전 19년 - 서기 18년 |
| 3 | 대무신왕 | 대무신왕한국어 | 무휼|無恤한국어 | 18년 - 44년 |
| 4 | 민중왕 | 민중왕한국어 | 해색주|解色朱한국어 | 44년 - 48년 |
| 5 | 모본왕 | 모본왕한국어 | 해우|解憂한국어, 해애루|解愛婁한국어 | 48년 - 53년 |
| 6 | 태조대왕 | 태조왕한국어 | 궁|宮한국어, 어수|於漱한국어 | 53년 - 146년 |
| 7 | 차대왕 | 차대왕한국어 | 수성|遂成한국어 | 146년 - 165년 |
| 8 | 신대왕 | 신대왕한국어 | 백고|伯固한국어, 백구|伯句한국어 | 165년 - 179년 |
3. 1. 1. 동명성왕 (기원전 37년 ~ 기원전 19년)
추모|鄒牟한국어 또는 상해|象解한국어라고도 불리는 동명성왕(기원전 37년 ~ 기원전 19년)은 고구려의 건국 시조이다. 동명성왕은 기원전 37년 고구려를 건국하고 기원전 19년까지 재위하며 고구려의 초기 국가 기틀을 다졌다.
3. 1. 2. 유리명왕 (기원전 19년 ~ 18년)
유리|琉璃한국어, 누리|類利한국어, 유류|孺留한국어라고도 불리는 유리명왕은 동명성왕(고주몽)의 아들로, 기원전 19년부터 서기 18년까지 고구려를 다스렸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대소왕이 다스리는 부여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2]| 시호 | 한글 이름 | 재위 기간 |
|---|---|---|
| 유리명왕 | 유리|琉璃한국어, 누리|類利한국어, 유류|孺留한국어 | 기원전 19년 - 서기 18년 |
3. 1. 3. 대무신왕 (18년 ~ 44년)
대무신왕은 유리명왕의 아들이며, 이름은 무휼(無恤)이다. 18년부터 44년까지 고구려를 다스렸다.[3]대무신왕은 활발한 정복 활동을 통해 고구려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재위 기간 동안 개마국과 구다국을 복속시켰으며, 동부여를 공격하여 대소왕을 죽이기도 했다.[3]
3. 1. 4. 민중왕 (44년 ~ 48년)
민중왕(閔中王, ? ~ 48년, 재위: 44년 ~ 48년)은 고구려의 제4대 왕으로, 이름은 해색주(解色朱)이다. 대무신왕의 아들이며, 모본왕의 숙부이다.| 시호 | 민중왕(閔中王) |
|---|---|
| 이름 | 해색주(解色朱) |
| 재위 기간 | 44년 ~ 48년 |
44년, 대무신왕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민중왕은 내치 안정에 힘썼다.[1]
3. 1. 5. 모본왕 (48년 ~ 53년)
모본왕은 민중왕의 아들이다.[1] 이름은 해우(解憂) 또는 해애루(解愛婁)이다.[1] 모본왕은 성격이 포악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1]49년, 고구려가 중국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공격했으나, 요동 태수 채동(蔡彤)이 은혜와 신의로 대우하자 화친하였다.[1]
53년, 모본왕은 신하 두로(杜魯)에게 살해당했다.[1]
3. 1. 6. 태조대왕 (53년 ~ 146년)
태조대왕(53년 ~ 146년)은 고구려의 제6대 국왕으로, 이름은 궁(宮) 또는 어수(於漱)이다. 53년부터 146년까지 93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재위하며 고구려의 중앙집권화를 추진하고 요동으로 진출하는 등 고구려 발전의 기틀을 다졌다.[1]
3. 1. 7. 차대왕 (146년 ~ 165년)
차대왕(次大王)은 이름이 수성(遂成)이다. 태조대왕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수성을 왕으로 세웠다.[7]폭정을 행하고 백성을 수탈하여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165년에 명림답부에게 살해당했다.[7]
3. 1. 8. 신대왕 (165년 ~ 179년)
신대왕은 태조대왕의 뒤를 이은 차대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신대왕은 왕권 회복과 민생 안정에 힘썼다.[8]| 시호 | 한자 | 재위 기간 |
|---|---|---|
| 신대왕 | 新大王|신대왕중국어 | 165년 - 179년 |
3. 2. 중기 (179년 ~ 391년)
고국천왕부터 고국양왕까지의 시기로, 고구려는 이 시기에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왕권 강화 및 영토 확장을 이룩하며 발전해 나갔다.| 시호 | 한글 이름 | 재위 기간 |
|---|---|---|
| 고국천왕 | 남무|男武한국어, 이이모|伊夷謨한국어 | 179년 - 197년 |
| 산상왕 | 연우|延優한국어, 위궁|位宮한국어 | 197년 - 227년 |
| 동천왕 | 우위거|憂位居한국어, 교체|郊彘한국어 | 227년 - 248년 |
| 중천왕 | 연불|然弗한국어 | 248년 - 270년 |
| 서천왕 | 약로|藥盧한국어, 약우|若友한국어 | 270년 - 292년 |
| 봉상왕 | 상부|相夫한국어, 삽시루|歃矢婁한국어 | 292년 - 300년 |
| 미천왕 | 을불|乙弗한국어, 우불|憂弗한국어 | 300년 - 331년 |
| 고국원왕 | 사유|斯由한국어, 유|劉한국어, 쇠|釗한국어 | 331년 - 371년 |
| 소수림왕 | 구부|丘夫한국어 | 371년 - 384년 |
| 고국양왕 | 이련|伊連한국어, 어지지|於只支한국어 | 384년 - 391년 |
- 고국천왕은 진대법을 실시하고 왕위 계승을 부자 상속으로 바꾸어 왕권 안정을 이루었다.[9]
- 산상왕은 고국천왕의 동생으로 왕권 강화에 힘썼다.[10]
- 동천왕은 위나라와의 전쟁에서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 중천왕은 동천왕의 아들로 내정 안정에 힘썼다.[12]
- 서천왕은 중천왕의 아들로 비교적 안정적인 대외 관계를 유지했다.[13]
- 봉상왕은 폭정을 휘둘러 폐위되었으며, 국상 창조리는 백성들의 지지로 미천왕을 옹립하였다.[15]
- 미천왕은 낙랑군 축출, 영토 확장 등 고구려 발전의 기틀을 다졌다.[15]
- 고국원왕은 전연의 침공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백제 근초고왕과의 전투 중 평양성에서 전사하였다.[16]
- 소수림왕은 불교 공인, 율령 반포, 태학 설립 등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했다.
- 고국양왕은 소수림왕의 동생으로 내치 안정에 힘썼다.
3. 2. 1. 고국천왕 (179년 ~ 197년)
고국천왕(신대왕의 둘째 아들)은 남무|男武한국어 또는 이이모|伊夷謨한국어라고도 불리며, 179년부터 197년까지 고구려를 다스렸다. 그는 고구려의 국력을 강화하고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힘썼다.고국천왕은 194년에 진대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이 곡식을 빌려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였다.[9] 또한 왕위 계승 방식을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으로 바꾸어 왕권의 안정을 도왔다.[9]
3. 2. 2. 산상왕 (197년 ~ 227년)
고국천왕의 동생인 산상왕은 이름이 연우延優한국어이다. 197년 형인 고국천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10] 산상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3. 2. 3. 동천왕 (227년 ~ 248년)
우위거|憂位居한국어, 교체|郊彘한국어라고도 불리는 동천왕은 227년부터 248년까지 고구려의 왕위를 지켰다. 동천왕의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는 위나라와의 전쟁을 치렀고, 서안평을 점령하였다.3. 2. 4. 중천왕 (248년 ~ 270년)
동천왕의 아들로, 이름은 연불(然弗)이다.[12] 248년 왕위에 올라 내정을 안정시켰다.[12]3. 2. 5. 서천왕 (270년 ~ 292년)
중천왕의 아들인 서천왕은 이름이 약로(藥盧) 또는 약우(若友)이며, 270년부터 292년까지 고구려를 다스렸다.[13]서천왕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는 비교적 안정된 대외 관계를 유지했다.
3. 2. 6. 봉상왕 (292년 ~ 300년)
봉상왕은 폭정을 휘둘러 폐위된 왕이다. 서천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제14대 왕이 되었으며[14], 이름은 상부(相夫) 또는 삽시루(歃矢婁)이다.[14]봉상왕은 즉위 초부터 숙부 안국군을 반역죄로 처형하는 등 공포정치를 펼쳤다.[14] 293년 8월에는 신성(新城)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9월에는 서리가 내려 곡식이 피해를 입는 등 자연재해가 잇따랐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봉상왕은 백성을 돌보지 않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다.[14]
294년, 봉상왕은 동생 돌고가 인기가 많아 백성들이 그를 따르자 그를 죽이려 하였다.[14] 돌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4]
296년, 선비족 모용외가 침입해오자 봉상왕은 신성으로 피신하였다.[14] 이때 신성 태수 북부 소형(小兄) 고노자(高奴子)가 군사를 이끌고 나가 모용외를 격퇴하였다.[14] 봉상왕은 고노자의 공을 치하하며 대형(大兄)으로 승진시키고 신성을 국성(國城)으로 승격시켰다.[14]
300년, 국상 창조리는 백성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봉상왕을 폐위시키고 미천왕을 옹립하였다.[15] 봉상왕은 폐위된 후 별실에 유폐되었고, 두 아들과 함께 자결하였다.[15]
3. 2. 7. 미천왕 (300년 ~ 331년)
미천왕은 봉상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제15대 왕이 되었다. 이름은 을불(乙弗) 또는 우불(憂弗)이라고 한다. 300년부터 331년까지 재위하면서 낙랑군을 축출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등 고구려 발전의 기틀을 다졌다.[15]| 시호 | 한글 이름 | 재위 기간 |
|---|---|---|
| 미천왕 | 을불|乙弗한국어, 우불|憂弗한국어 | 300년 - 331년 |
3. 2. 8. 고국원왕 (331년 ~ 371년)
고국원왕(故國原王, ? ~ 371년, 재위: 331년 ~ 371년)은 미천왕의 아들로 이름은 사유(斯由)이며, 쇠(釗)라고도 한다. 331년에 왕위에 올랐다.[16]342년, 전연의 모용황이 4만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다. 고국원왕은 단기(單騎)로 도망쳤고, 모용황은 미천왕의 시신과 왕모(王母) 주씨(周氏) 등을 포로로 잡아갔다.[16]
369년, 고국원왕은 보병과 기병 20,000명을 보내 백제를 공격했지만, 근초고왕이 이끄는 백제군에 패하였다.[16]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이 군사 30,000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평양성을 공격했다. 고국원왕은 평양성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16]
3. 2. 9. 소수림왕 (371년 ~ 384년)
고구려의 제17대 왕 소수림왕(재위 371년~384년)은 구부|丘夫한국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소수림왕은 불교를 공인하고, 율령을 반포하였으며, 태학을 설립하는 등 고구려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3. 2. 10. 고국양왕 (384년 ~ 391년)
고국양왕은 고국원왕의 아들이자 소수림왕의 동생으로, 이름은 이련(伊連) 또는 어지지(於只支)이다. 384년 소수림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고국양왕은 재위 기간 동안 내치 안정에 힘썼다.
3. 3. 후기 (391년 ~ 668년)
고구려는 391년 광개토대왕의 즉위부터 668년 보장왕 대에 멸망할 때까지 후기 역사를 이어갔다.| 시호 | 한글 | 이름 | 재위 기간 |
|---|---|---|---|
| 광개토대왕 | 광개토왕한국어 | 담덕|談德한국어 | 391년 ~ 412년 |
| 장수왕 | 장수왕한국어 | 거련|巨連한국어, 련|璉한국어 | 412년 ~ 491년 |
| 문자명왕 | 문자명왕한국어 | 나운|羅雲한국어, 운|雲한국어 | 491년 ~ 519년 |
| 안장왕 | 안장왕한국어 | 흥안|興安한국어, 안|安한국어 | 519년 ~ 531년 |
| 안원왕 | 안원왕한국어 | 보연|寶延한국어, 연|延한국어 | 531년 ~ 545년 |
| 양원왕 | 양원왕한국어 | 평성|平成한국어 | 545년 ~ 559년 |
| 평원왕 | 평원왕한국어 | 양성|陽成한국어, 탕|湯한국어, 양|陽한국어 | 559년 ~ 590년 |
| 영양왕 | 영양왕한국어, 평양왕한국어 | 원|元한국어 | 590년 ~ 618년 |
| 영류왕 | 영류왕한국어 | 건무|建武한국어, 성|成한국어, 무|武한국어 | 618년 ~ 642년 |
| 보장왕 | 보장왕한국어 | 장|藏한국어, 보장|寶藏한국어 | 642년 ~ 668년 |
광개토대왕은 정복 활동을 통해 고구려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장수왕은 427년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남진 정책을 추진하여 백제와 신라를 압박했다. 문자명왕은 북위와 외교 관계를 강화했다. 안장왕은 왕권 강화에 힘썼으며, 안원왕 시대에는 왕위를 둘러싼 내분이 발생했다. 양원왕 재위 기간에는 귀족 세력 간의 권력 다툼이 심화되었다. 평원왕은 돌궐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고구려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영양왕 재위 기간 중 고구려는 수나라와 큰 전쟁을 치렀으며, 612년 살수대첩에서 수나라의 침략을 막아냈다. 영류왕은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 개선에 힘썼으나, 642년 연개소문의 정변으로 살해당했다. 보장왕은 연개소문에 의해 옹립되었으며, 연개소문 집권 시기에 당나라와 지속적인 갈등을 겪었다. 666년 연개소문 사후 권력 다툼으로 약화된 고구려는 668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했다.
3. 3. 1. 광개토대왕 (391년 ~ 412년)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제19대 국왕으로, 이름은 담덕이다. 재위 기간은 391년부터 412년까지이며,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끈 정복 군주로 평가받는다. 고국양왕의 아들로 태어나 왕위에 올랐으며,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적극적인 정복 활동을 통해 고구려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3. 3. 2. 장수왕 (412년 ~ 491년)
장수왕은 광개토왕의 아들로 412년에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끌었는데, 특히 427년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남진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였다. 장수왕의 재위 기간은 412년부터 491년까지로, 고구려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던 왕이다.
3. 3. 3. 문자명왕 (491년 ~ 519년)
문자명왕은 장수왕의 손자이자 조다의 아들로, 이름은 나운(羅雲) 또는 운(雲)이다. 491년부터 519년까지 고구려를 통치했다.문자명왕 시기에는 북위와 외교 관계를 강화하였다.
3. 3. 4. 안장왕 (519년 ~ 531년)
안장왕은 이름이 흥안(興安)이며, 문자명왕의 맏아들이다. 문자명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안장왕은 왕권 강화에 힘썼다.3. 3. 5. 안원왕 (531년 ~ 545년)
안원왕은 이름이 보연(寶延) 또는 연(延)이며, 안장왕의 동생이다. 안원왕 시대에 왕위를 둘러싼 내분이 발생하였다.3. 3. 6. 양원왕 (545년 ~ 559년)
양원왕(陽原王, ? ~ 559년, 재위: 545년 ~ 559년)은 고구려의 제24대 왕으로, 이름은 평성(平成)이다. 안원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재위 기간 동안 귀족 세력 간의 권력 다툼이 심화되었다.3. 3. 7. 평원왕 (559년 ~ 590년)
평원왕(平原王, 559년 ~ 590년)은 고구려의 제25대 국왕으로, 이름은 양성(陽成)이다. 양원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559년에 왕위에 올랐다.평원왕은 내정 안정에 힘쓰고 돌궐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고구려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3. 3. 8. 영양왕 (590년 ~ 618년)
영양왕|嬰陽王한국어은 평원왕의 아들이며, 이름은 원(元)이다. 590년부터 618년까지 고구려를 다스렸다.영양왕 재위 기간 중 고구려는 수나라와 큰 전쟁을 치렀다. 특히, 612년에 벌어진 살수대첩은 고구려가 수나라의 대규모 침략을 막아낸 대표적인 전투이다.
3. 3. 9. 영류왕 (618년 ~ 642년)
영류왕(618년 ~ 642년)은 고구려의 제27대 왕이다. 영양왕의 이복 동생으로, 이름은 건무(建武) 또는 성(成)이다. 618년 영양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영류왕은 수나라와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 개선에 힘썼다. 622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고, 624년에는 당 고조로부터 '상주국 요동군공 고구려왕'(上柱國遼東郡公高句麗王)에 책봉되었다. 631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불교와 도교를 들여왔다.
그러나 642년 연개소문의 정변으로 살해당했다.
3. 3. 10. 보장왕 (642년 ~ 668년)
보장왕|寶藏王|보장한국어 (재위 642년 ~ 668년)은 고구려의 마지막 왕으로, 영류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하면서, 실권은 연개소문에게 있었다.연개소문 집권 시기에 고구려는 당나라와 지속적인 갈등을 겪었다. 645년에는 당 태종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안시성 전투에서 고구려군에게 패배하여 퇴각했다. 이후에도 당나라는 여러 차례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연개소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키지 못했다.
660년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한 후, 고구려는 더욱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666년 연개소문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지면서 고구려는 급격히 약화되었다. 668년 나·당 연합군은 평양성을 함락시켰고, 보장왕은 당나라로 압송되면서 고구려는 멸망했다.
4. 계보
| 시조 | 2세 | 3세 | 4세 | 5세 | 6세 | 7세 | 8세 | 9세 | 10세 | 11세 | 12세 | 13세 | 14세 | 15세 | 16세 | 17세 | 18세 | 19세 | 20세 | 21세 | 22세 | 23세 |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
| 해모수 | |||||||||||||||||||||||||||
| 해부루 | |||||||||||||||||||||||||||
| 금와 | 추모 (기원전 37년~기원전 19년) | ||||||||||||||||||||||||||
| 대소 | 갈사 | 유리 (기원전 19년~18년) | |||||||||||||||||||||||||
| 무휼 (18년~44년) | 해색주 (44년~48년) | 재사 | |||||||||||||||||||||||||
| 해우 (48년~53년) | 궁 (53년~146년) | ||||||||||||||||||||||||||
| 수성 (146년~165년) | 백고 (165년~179년) | ||||||||||||||||||||||||||
| 남무 (179년~197년) | 연우 (197년~227년) | ||||||||||||||||||||||||||
| 위궁 (227년~248년) | |||||||||||||||||||||||||||
| 연불 (248년~270년) | |||||||||||||||||||||||||||
| 약로 (270년~292년) | |||||||||||||||||||||||||||
| 상부 (292년~300년) | 돌고 | ||||||||||||||||||||||||||
| 을불 (300년~331년) | |||||||||||||||||||||||||||
| 사유 (331년~371년) | |||||||||||||||||||||||||||
| 구부 (371년~384년) | 이련 (384년~391년) | ||||||||||||||||||||||||||
| 담덕 (391년~412년) | |||||||||||||||||||||||||||
| 거련 (412년~491년) | |||||||||||||||||||||||||||
| 조다 | |||||||||||||||||||||||||||
| 나운 (491년~519년) | |||||||||||||||||||||||||||
| 흥안 (519년~531년) | 보연 (531년~545년) | ||||||||||||||||||||||||||
| 평성 (545년~559년) | |||||||||||||||||||||||||||
| 양성 (559년~590년) | |||||||||||||||||||||||||||
| 원 (590년~618년) | 건무 (618년~642년) | 대양 | |||||||||||||||||||||||||
| 장 (642년~668년) |
5. 정치 및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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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문화
고구려는 불교, 도교, 샤머니즘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했던 국가였다.
6. 1. 종교
고구려는 불교, 도교, 샤머니즘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했던 국가였다.7. 대외 관계
고구려는 주변 국가들과 복잡하고 다양한 관계를 맺었다.
8. 멸망과 그 이후
고구려는 7세기 후반에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 공격으로 멸망했다.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고 보장왕이 항복하면서 고구려는 900년 가까운 역사의 막을 내렸다.[1]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유민들은 당나라, 신라, 발해 등지로 흩어졌다. 일부 유민들은 고구려 부흥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2]
고구려 유민 중 일부는 당나라로 끌려갔으며, 일부는 신라에 흡수되었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함께 세운 국가로,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했다.[3] 발해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상당 부분 회복하고, 고구려의 문화를 이어받아 발전시켰다.[4]
고구려의 멸망은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이후 한반도의 정세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의 멸망으로 한반도는 신라 중심으로 통일되었지만, 고구려 유민들의 활동은 이후 발해 건국으로 이어져 한국사의 또 다른 흐름을 형성했다.[5]
9. 고구려 관련 논쟁
고구려는 한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그 역사적 귀속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특히 중국은 고구려를 자국 역사의 일부로 편입하려는 시도를 지속하고 있어, 한국과의 역사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동명성왕의 생모는 중국의 영웅 하백의 딸인 유화부인으로, 동명성왕이 중국인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1][2][3] 또한 동명성왕의 아버지 해모수는 괄리국인이며, 나이토 코난은 괄리국이 송화강 지류에 거주하던 다우르족이라고 주장한다.[4]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왕들은 중국 황제의 손자인 고양씨와 증손인 고신씨의 후손을 자처했다.[5][6][7][8][9] 『일주서』에서는 고구려를 고이족의 자손으로 보며, 중국 학계는 이를 근거로 고구려가 고양씨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10] 또한 『진서』에는 모용운의 조부 고화가 고구려족이지만 고양씨의 후예이므로 고씨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어, 중국 학계는 이를 고구려가 고양씨의 후손이라는 또 다른 증거로 제시한다.[10]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왕의 성씨가 시조인 동명성왕에게만 '고'씨로 명기되어 있고, 삼국유사에는 고구려가 국호에서 '고'씨를 따왔다는 기록이 있다. 삼품창영은 고구려 왕이 고씨를 칭한 것은 북연왕의 고씨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11]
한편, 『삼국사기』, 『구당서』, 『신당서』에는 고구려 왕이 기자조선을 건국한 중국 은나라의 정치가 기자의 자손을 칭하며 그를 조상으로 숭배했다는 기록이 있다.[12][13][14][15] 박대종은 고구려 왕이 기자를 고구려의 시조이자 조선의 조상으로 인식했다고 지적한다.[16]
9. 1. 귀속 문제
고구려의 역사가 한국사와 중국사 중 어느 쪽에 속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고구려사가 한국사의 일부임을 분명히 하며, 중국의 역사 왜곡에 강력히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동명성왕의 생모는 중국의 영웅 하백의 딸인 유화부인이며, 동명성왕이 중국인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1][2][3]。 동명성왕의 아버지인 해모수는 괄리국인이며, 나이토 코난은 괄리국은 송화강 지류에 거주하던 다우르족이라고 지적하고 있다[4]。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광개토왕기·백제 본기·의자왕기에 따르면, 고구려 왕들은 중국 황제의 손자인 고양씨, 중국 황제의 증손인 고신씨의 후손이라고 칭했다[5][6][7][8][9]。
『일주서』 「왕회해」는 고대 중국의 소수 민족과 그 분포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진의 공조에 의한 주석이 붙어 있지만, "고이"에 대해 "고이 동북 이 고구려"라고 주석하여, 고구려를 고이족의 자손으로 보고 있다. 이로 인해 중국 학계는 고구려의 선조인 고이족과 고양씨를 연결하고, 고이족의 기원을 고양씨로 확정하여, "난생 신화, 조우관(새의 깃털로 장식된 모자)의 풍습, 귀신 사상 등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고 하며, 고구려를 고양씨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10]。 중국 학계는 또 다른 증거로 『진서』 「모용운재기」를 들고 있으며, 모용운의 조부인 고화는 고구려족이지만, 고양씨의 후예이므로 고씨를 사용하고, 모용운의 본래 이름은 "고운"이라는 기사이다. 중국 학계는 "고양씨→고이족→고구려족"으로 연결하여, 고구려의 조상은 고이족이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양씨라고 보고 있다[10]。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 왕계에 대해, 본기의 시조왕 기록 처음에 고구려에서는 "시조 동명성왕 성 고씨. 휘 주몽"이라고 쓰여, 왕계의 성을 명기하고 있지만, 고구려 왕에 대해서는 시조왕에만 성 "고"가 쓰여 있다. 고구려 왕의 성 "고"는 『삼국사기』의 시조조와 『삼국유사』의 왕력과 『삼국유사』 기이 제1 "고구려"조에 쓰여 있지만, 『삼국유사』 "고구려"조가 더 자세하며, "국호 고구려. 인이 고위 씨. 본성 해. 금일언 시 천제자. 승일광 이야. 금자생. 고자이 고위 대."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품창영은 "고구려의 고를 따서 씨로 했다고 하지만, 구려왕이 고씨를 칭한 최초의 기록은 『송서』 고구려전에 '고구려왕 고련. 진 안제 의희 9년'이라고 있는 고련(장수왕)이다. 광개토왕(장수왕의 아버지) 17년조에 '춘삼월. 견사 북연. 차서 종족. 북연왕 운견 시어사 이발 보지. 운조부 고화 구려지 지. 자운 고양씨지 묘예. 고이 고위 씨언'이라고 있으며,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이 기사는 『자치통감』에서 인용하고 있다. 즉 고구려왕이 고씨를 칭한 것은 북연왕의 고씨에서 유래한 것이며, 고구려의 고를 딴 것이 아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11]。
『삼국사기』 권32, 『구당서』 고려전, 『신당서』 고려전에 따르면 고구려 왕은 조선을 정복하여 기자조선을 건국한 중국 은나라의 정치가인 중국인 기자의 자손을 칭하고, 기자를 조상으로 숭배하며, 기자의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고구려 왕은 기자의 사당을 세우고 숭배하며, 사계절을 통하여 제사를 지냈다. 박대종(대종언어연구소 소장)은 고구려 왕은 기자를 고구려의 시조, 조선의 조상으로 인식했다고 지적했다[16]。
9. 2. 기타 논쟁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의 생모는 중국의 영웅 하백의 딸인 유화부인이며, 동명성왕이 중국인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1][2][3] 동명성왕의 아버지인 해모수는 괄리국인이며, 나이토 코난은 괄리국은 송화강 지류에 거주하던 다우르족이라고 지적하고 있다.[4]『삼국사기』 고구려 본기·광개토왕기·백제 본기·의자왕기에 따르면, 고구려 왕들은 중국 황제의 손자인 고양씨, 중국 황제의 증손인 고신씨의 후손이라고 칭했다.[5][6][7][8][9]
『일주서』 「왕회해」는 고대 중국의 소수 민족과 그 분포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진의 공조에 의한 주석이 붙어 있지만, "고이"에 대해 "고이 동북 이 고구려"라고 주석하여, 고구려를 고이족의 자손으로 보고 있다. 이로 인해 중국 학계는 고구려의 선조인 고이족과 고양씨를 연결하고, 고이족의 기원을 고양씨로 확정하여, "난생 신화, 조우관(새의 깃털로 장식된 모자)의 풍습, 사상 등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고 하며, 고구려를 고양씨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10] 중국 학계는 또 다른 증거로 『진서』 「모용운재기」를 들고 있으며, 모용운의 조부인 고화는 고구려족이지만, 고양씨의 후예이므로 고씨를 사용하고, 모용운의 본래 이름은 "고운"이라는 기사이다. 중국 학계는 "고양씨→고이족→고구려족"으로 연결하여, 고구려의 조상은 고이족이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양씨라고 보고 있다.[10]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 왕계에 대해, 본기의 시조왕 기록 처음에 고구려에서는 "시조 동명성왕 성 고씨. 휘 주몽"이라고 쓰여, 왕계의 성을 명기하고 있지만, 고구려 왕에 대해서는 시조왕에만 성 "고"가 쓰여 있다. 고구려 왕의 성 "고"는 『삼국사기』의 시조조와 『삼국유사』의 왕력과 『삼국유사』 기이 제1 "고구려"조에 쓰여 있지만, 『삼국유사』 "고구려"조가 더 자세하며, "국호 고구려. 인이 고위 씨. 본성 해. 금일언 시 천제자. 승일광 이야. 금자생. 고자이 고위 대."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품창영은 "고구려의 고를 따서 씨로 했다고 하지만, 구려왕이 고씨를 칭한 최초의 기록은 『송서』 고구려전에 '고구려왕 고련. 진 안제 의희 9년'이라고 있는 고련(장수왕)이다. 광개토왕(장수왕의 아버지) 17년조에 '춘삼월. 견사 북연. 차서 종족. 북연왕 운견 시어사 이발 보지. 운조부 고화 구려지 지. 자운 고양씨지 묘예. 고이 고위 씨언'이라고 있으며,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이 기사는 『자치통감』에서 인용하고 있다. 즉 고구려왕이 고씨를 칭한 것은 북연왕의 고씨에서 유래한 것이며, 고구려의 고를 딴 것이 아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11]
『삼국사기』 권32 "당서운, 고구려속다음사, 사령성 및 일기자 가한 등 신.[12]" 『구당서』 고려전 "기속다음사, 사령성신, 일신, 가한신, 기자신.[13]" 『구당서』 고려전 "사용빈두, 보궤, 존조, 뢰세, 파유기자지 유풍.[14]" 『신당서』 고려전 "속다음사, 례령성 및 일, 기자, 가한 등 신.[15]"이라고 되어 있으며, 고구려 왕은 조선을 정복하여 기자조선을 건국한 중국 은나라의 정치가인 중국인 기자의 자손을 칭하고, 기자를 조상으로 숭배하며, 기자의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고구려 왕은 기자의 사당을 세우고 숭배하며, 사계절을 통하여 제사를 지냈다. 박대종(대종언어연구소 소장)은 고구려 왕은 기자를 고구려의 시조, 조선의 조상으로 인식했다고 지적했다.[16]
참조
[1]
뉴스
유화부인 柳花夫人,?~?
https://www.doopedia[...]
[2]
뉴스
하백 河伯
https://www.doopedia[...]
[3]
뉴스
하백(河伯)
http://encykorea.aks[...]
[4]
서적
東北亜細亜諸国の開闢伝説
1919-04-01
[5]
뉴스
A Comparison of the Korean and Japanese Approaches to Foreign Family Names
http://www.sciea.org[...]
東アジア文化交渉学会
2014-01-01
[6]
뉴스
三國史記 卷第二十八 百濟本紀 第六
http://db.history.go[...]
国史編纂委員会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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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卷第十八 髙句麗本紀 第六
http://db.history.go[...]
国史編纂委員会
[8]
뉴스
의자왕 義慈王
http://terms.naver.c[...]
韓国人文古典研究所
[9]
뉴스
광개토왕 廣開土王
https://terms.naver.[...]
韓国人文古典研究所
[10]
뉴스
"고구려는 조기 중국의 소수민족정권입니다.”
https://www.khan.co.[...]
2014-10-08
[11]
서적
三国遺事考証〈上〉
塙書房
1975-01-01
[12]
인용문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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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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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국정교과서 기자조선 퇴출, 알고보니 일제식민사학 탓
https://newsis.com/v[...]
ニューシス
2016-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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