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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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 철학은 고조선 시대부터 시작되어 유교, 불교, 도교 등 다양한 사상의 영향을 받아 발전해 왔다. 삼국 시대에는 유교, 불교, 도교가 수용되어 사회 체제를 개혁하는 데 기여했으며, 특히 불교는 한국 사상가들에 의해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하여 일본에 전파되기도 했다. 고려 시대에는 유교와 더불어 선종 불교가 융성했으며,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이 통치 이념으로 자리 잡아 한국 철학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근현대에 들어서는 서양 철학의 유입과 함께 다양한 사상적 조류가 등장하여 한국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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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철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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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분야 | |
철학 분야 | 동양 철학 |
국가 | 한국 |
주요 개념 | |
성리학 | 이기론, 심성론, 수양론 |
실학 | 실사구시, 이용후생, 북학 |
동학 | 인내천, 경천, 보국안민 |
불교 철학 | 화엄, 선 |
주요 인물 | |
성리학 | 정도전, 서경덕, 이언적, 이황, 이이, 조식 |
실학 | 유형원, 이익, 박지원, 정약용, 김정희 |
동학 | 최제우, 최시형, 손병희 |
불교 철학 | 원효, 의상, 지눌, 혜초 |
한국 철학 | |
주요 특징 | 독자적인 사상 체계 발전 외래 사상의 수용 및 변용 사회 및 정치 현실에 대한 관심 인간 본성 및 도덕적 수양 강조 |
역사적 발전 | 삼국시대: 불교 수용 및 발전 고려시대: 성리학 도입 조선시대: 성리학 발전 및 실학, 동학 등장 현대: 서양 철학 수용 및 한국 철학 연구 활발 |
2. 역사
2. 1. 삼국 시대 (기원전 57년 ~ 668년)
고조선 시대부터 보전되어 오던 원시 종교와 원시 사상의 고유성은 이 때에 이르러 중국으로부터 밀려들어오는 유교, 불교, 도교의 충격을 받아 크게 위축되고,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은 다투어서 이러한 외래사상을 수용하고, 사회 체제를 개혁하였다.== 불교 ==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 백제 침류왕(枕流王) 원년, 신라 법흥왕(法興王) 14년에 각각 시작된 개화 운동으로 불교가 전래되었다. 중국 삼론종(三論宗)의 3대조까지 된 고구려의 승랑(僧朗), 인도에까지 가서 경률(經律)을 가져와 번역한 백제의 겸익(謙益), 중국에 유학하여 새로운 불교 이론을 배워와 진호국가사상(鎭護國家思想)을 특징으로 하는 신라 불교를 일으킨 원광(圓光), 자장(慈藏) 등이 한국 불교의 조사(祖師)들이다. 이들에 의하여 삼론학(三論學)·성실론(成實論)·천태학(天台學)·율학(律學)·열반학(涅槃學)·화엄학(華嚴學) 등이 개창되니 한편으로는 불교사상의 황금시대가 준비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에 진출하여 일본에서는 개화를 촉진시켰다.
한국 불교 사상가들은 원래 중국에서 유입된 사상을 독특한 형태로 다듬었다. 한국의 삼국 시대는 불교를 일본에 전파했고, 일본에서 불교는 서양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 불교는 대부분 선 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중국의 선(禪) 불교에서 파생되었고, 일본을 통해 서양에 알려진 선불교의 전신이다.
불교 사찰은 한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많은 사찰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 유교 ==
유교는 한문의 전래와 함께 더 일찍 도입되어 고대 국가의 정치 이념과 사회 윤리로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유교 교육 기관인 태학(고구려)과 경당의 설치(고구려), 유교박사 고흥과 왕인의 활약(백제) 등이 한국 유학의 첫 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하나의 사상이론으로 발전하는 데는 좀 더 시간을 기다려야만 하였다.
한국 지성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 중 하나는 중국과의 문화 교류의 일환으로 유교 사상이 전래된 것이다. 오늘날 유교의 유산은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부분을 차지하며, 도덕 체계, 생활 방식, 노소 간의 사회 관계, 고급 문화를 형성하며 심지어 법률 체계의 현대화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 도교 ==
도교(道敎)는 4∼6세기 경에 이미 고구려에 보급되어 왕실과 귀족의 숭신(崇信)을 받았다. 양원왕 이후로 중국과의 접촉을 통하여 도사(道士)와 천존상(天尊像)이 들어오고, 나라에서 불교를 억압하고 도교를 장려하니 혜량, 보덕 등의 고승이 이를 탄식하여 신라로 넘어가는 일까지 생겼고, 연개소문은 불교 배척의 중심 인물이었다. 한편 백제에서도 4세기에 이미 《도덕경》이 전해진 기록이 있으나, 신라는 통일 이후에야 도교를 수용하였다.
2. 1. 1. 불교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 백제의 침류왕(枕流王) 원년, 신라의 법흥왕(法興王) 14년에 각각 시작된 개화 운동으로 불교가 전래되었다. 중국 삼론종(三論宗)의 3대조까지 된 고구려의 승랑(僧朗), 인도에까지 가서 경률(經律)을 가져와 번역한 백제의 겸익(謙益), 중국에 유학하여 새로운 불교 이론을 배워와 진호국가사상(鎭護國家思想)을 특징으로 하는 신라 불교를 일으킨 원광(圓光), 자장(慈藏) 등이 한국 불교의 조사(祖師)들이다. 이들에 의하여 삼론학(三論學)·성실론(成實論)·천태학(天台學)·율학(律學)·열반학(涅槃學)·화엄학(華嚴學) 등이 개창되니 한편으로는 불교사상의 황금시대가 준비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에 진출하여 일본에서는 개화를 촉진시켰다.한국 불교 사상가들은 원래 중국에서 유입된 사상을 독특한 형태로 다듬었다. 한국의 삼국 시대는 불교를 일본에 전파했고, 일본에서 불교는 서양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 불교는 대부분 선 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중국의 선(禪) 불교에서 파생되었고, 일본을 통해 서양에 알려진 선불교의 전신이다.
불교 사찰은 한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많은 사찰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2. 1. 2. 유교
유교는 한문의 전래와 함께 더 일찍 도입되어 고대 국가의 정치 이념과 사회 윤리로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유교 교육 기관인 태학(고구려)과 경당의 설치(고구려), 유교박사 고흥과 왕인의 활약(백제) 등이 한국 유학의 첫 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하나의 사상이론으로 발전하는 데는 좀 더 시간을 기다려야만 하였다.한국 지성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 중 하나는 중국과의 문화 교류의 일환으로 유교 사상이 전래된 것이다. 오늘날 유교의 유산은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부분을 차지하며, 도덕 체계, 생활 방식, 노소 간의 사회 관계, 고급 문화를 형성하며 심지어 법률 체계의 현대화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2. 1. 3. 도교
도교(道敎)는 4∼6세기 경에 이미 고구려에 보급되어 왕실과 귀족의 숭신(崇信)을 받았다. 양원왕 이후로 중국과의 접촉을 통하여 도사(道士)와 천존상(天尊像)이 들어오고, 나라에서 불교를 억압하고 도교를 장려하니 혜량, 보덕 등의 고승이 이를 탄식하여 신라로 넘어가는 일까지 생겼고, 연개소문은 불교 배척의 중심 인물이었다. 한편 백제에서도 4세기에 이미 《도덕경》이 전해진 기록이 있으나, 신라는 통일 이후에야 도교를 수용하였다.2. 2. 통일 신라 시대 (668년 ~ 935년)
2. 2. 1. 화랑도
최치원의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통일 신라의 중추 사상인 화랑도를 이해하는 데 주요한 자료인데, 최치원은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國有玄妙之道 曰風流)"라고 하였다. 최남선은 풍류(風流)를 '부루'란 한국어 고유어(固有語)의 한음역(漢音譯)이라고 보고 화랑사상을 그가 주장하는 '태양 숭배(太陽崇拜)'란 고유 신앙(固有信仰)에 결부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현상윤은 《삼국유사》의 화랑 창설 기록에 나오는 "왕은 또 천성이 풍미로워 신선을 몹시 숭상한다 (王又天性風味多尙神仙)"라는 문구에 근거하여 최남선의 순어음적(純語音的) 해석에 찬동하지 않았다.[1]최치원의 서문(序文)에는 풍류교(風流敎), 풍월도(風月道)로 호칭(呼稱)되는 화랑도(徒)의 현묘지도는 선사(仙史)에 자세히 적혀 있다 하고, 그것은 유(儒)·도(道)·불(佛) 3교(敎)를 포함하여 군생(群生)을 접화(接化)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다시 말하면 화랑의 근본 사상을 이룬 현묘한 도(道)는 유·도·불 3교의 사상을 다 포함했다는 것이다. 만약 3교를 포괄한 고유사상이 있었다면 모두 단군 신화를 토대로 하여, 샤머니즘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보편적이요, 최남선과 같이 '밝', '불'의 태양 숭배 종교로 보는 견해가 그 다음이요, 샤머니즘이란 용어 대신 신도(神道)란 용어(用語)를 사용하여 원시 다신교적 신앙(信仰)과 토템 사상까지 포함시키는 견해가 있다.[1]
3교 중 어느 한 교가 주가 되어 기타 3교를 포섭하여 3교 합일을 이루었다고 보는 견해도 가능한데, 지금까지의 문헌으로 보아 도교(혹은 仙敎)가 주가 되어 유·불의 2교를 포섭했다고 보는 견해(이능화의 《조선도교사》)가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화랑들의 기록 ― 김유신의 산중기도(山中祈禱) 같은 ― 을 보든지, 고구려 영류왕 때 당(唐)에서 도사(道士)와 천존상(天尊像)을 보내와 도법(道法)을 강(講)했다는 기록을 보든지, 그 당시 당에서의 도교의 형세로 미루어 보면, 신라 통일 무렵의 도교란 것은 한국의 무속(巫俗) 신앙과 중국의 오두미교적 요소가 혼합하여 그 바탕을 이루고, 그 위에 노장(老莊)의 '허무자연(虛無自然) 장생구시(長生久視)'의 사상, 연·제 방사(燕齊方士)들의 신선 사상(神仙思想), 추연의 음양5행설(陰陽五行說), 한대(漢代)의 참위 사상(讖緯思想) 등을 유합해서 구성된 혼합체로서의 도교로 생각된다.[1]
최치원의 《난랑비서문》에서 말한 '무위지사(無爲之事)'와 '불언지교(不言之敎)'라 함은 이 복합적 요소중의 신선(神仙), 선교적(仙敎的) 요소를 가리켜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풍월이다 풍류다 하는 것도 이 선교적 요소를 지칭하는 말이며, 화랑이 반드시 젊은 소년, 소녀로 풍월주(風月主)를 삼는 것은 동남(童男), 동녀(童女)를 이상화(理想化)하는 선교 사상과 관련이 있는 것이며, 산수(山水)를 오유(娛遊)하며 가악(歌樂)으로 서로 즐긴다는 것도 유선 사상(遊仙思想)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1]
만약 도교의 토대 위에서 유·불 2교를 포섭했다 하면 유·불 2교는 어떻게 받아들여 어떻게 소화하였는가에 관해서도 문헌이 부족하여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이 보여 주는 바에 의하면 최치원의 말과 같이 유교는 '들어와서는 집에서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임금께 충성한다(入則孝於家 出則忠於君)'는 정도로, 불교는 '악한 일은 하지 말고 선한 일은 받들어서 행하라(諸惡莫作 諸善奉行)'는 정도로 이해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다시 말하면 유교나 불교는 일반 화랑도들 - 그때의 엘리트라고 볼 수 있는 계층 - 에 있어서는 다만 실천적인 일상생활의 윤리로서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1]
2. 2. 2. 유교
유교는 통일 이전의 신라에 있어서 이미 국가의 제도를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로 변전(變轉)시키는 주요 이념으로 받아들여졌고 신문왕 이후는 국학(國學)이 세워지고 《5경(五經)》, 《논어(論語)》, 《효경》, 《문선(文選)》 등이 교재로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유교의 저술로서는 전해진 것이 없다.한국 지성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 중 하나는 중국과의 문화 교류의 일환으로 유교 사상이 전래된 것이다. 오늘날 유교의 유산은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부분을 차지하며, 도덕 체계, 생활 방식, 노소 간의 사회 관계, 고급 문화를 형성하며 심지어 법률 체계의 현대화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2. 2. 3. 불교
불교는 법흥왕 이후 국가의 숭불 정책(崇佛政策)으로 인하여 고승(高僧), 대덕(大德)이 배출되고 많은 유당(留唐) 학승(學僧)들이 돌아와서 심오한 철리를 말하고 불교 저술도 나오고 여러 산문(山門)이 종파(宗派)도 창설하였지만, 원광이 귀산·추항 두 청년에게 보살계(菩薩戒) 대신 유교화한 세속5계(世俗五戒)를 가르친 것이나 원효, 의상이 대승불학(大乘佛學)의 대사(大師)이면서 《청구비결(靑丘秘訣)》 같은 도참서(圖讖書)를 저술했다는 것(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하》)을 보아, 일반 국민에 있어서는 역시 호국 사상이나 유교와 혼합된 세속 윤리나 무속(巫俗)과 혼합되기 쉬운 소승 불교적 요소가 우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1]한국 불교 사상가들은 원래 중국에서 유입된 사상을 독특한 형태로 다듬었다. 한국의 삼국 시대는 불교를 일본에 전파했고, 일본에서 불교는 서양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 불교는 대부분 선 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중국의 선(禪) 불교에서 파생되었고, 일본을 통해 서양에 알려진 선불교의 전신이다.
불교 사찰은 한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많은 사찰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2. 3. 고려 시대 (918년 ~ 1392년)
2. 3. 1. 불교
신라의 불교사상을 계승한 고려의 불교는 여전히 봉건적인 근왕 사상과 결합하여 이른바 호국 불교(護國佛敎)의 성격을 분명히 하였다. 건국 초부터 계속된 팔관회(八關會)·연등회(燃燈會) 등의 국가적인 행사는 불교 의식(儀式)의 토착화인 것이며 국사(國師)·왕사(王師)제를 통한 왕권과의 연결, 국난 극복을 위하여 2차례나 이루어진 대장경 판각, 그리고 묘청, 신돈 등 승려의 정치 활동은 모두 이것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신라 말기에 전래된 선종(禪宗) 불교의 융성과, 태고(太古), 지눌(知訥), 혜심(慧諶) 등 고승이 배출되었고, 의천(義天)은 천태종(天台宗)을 다시 일으켜 선·교 양종의 화합을 모색하였다.한국 불교 사상가들은 원래 중국에서 유입된 사상을 독특한 형태로 다듬었다. 한국의 삼국 시대는 불교를 일본에 전파했고, 일본에서 불교는 서양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 불교는 대부분 선 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중국의 선(禪) 불교에서 파생되었고, 일본을 통해 서양에 알려진 선불교의 전신이다.
불교 사찰은 한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많은 사찰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2. 3. 2. 유교
이미 신라 중, 말기(中末期)부터 융성하기 시작한 한문학과 유학은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는 정신 문화의 중요한 일부분이 되었고 후기에 새로이 정주학이 도입되어 전통적인 종교와 문학에 충격을 주더니 마침내 진보적인 사상 집단을 형성시켜 조선의 이념적 기초가 되었다. 즉 유학은 이미 봉건사회를 배경으로 한 정치·사회·철학·문학 전반에 걸친 이념체계로서 과거제(科擧制), 충효 사상(忠孝思想), 명분론(名分論)으로 봉건 사회 정비에 기여했고, 중기에는 교육·문학 등에 크게 활용되어 사학(私學)의 융성, 사장(詞章) 문학의 발달 등을 가져 왔으며, 정주학의 전래와 함께 정치·교육상의 혁신사상으로 발전하여 척불론(斥佛論) 또는 척사위정론(斥邪衛正論)이 전개되었다.한국 지성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 중 하나는 중국과의 문화 교류의 일환으로 유교 사상이 전래된 것이다. 오늘날 유교의 유산은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부분을 차지하며, 도덕 체계, 생활 방식, 노소 간의 사회 관계, 고급 문화를 형성하며 심지어 법률 체계의 현대화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2. 3. 3. 음양도참사상
신라 말기 도선이 도입하였다고 하는 풍수지리설이 합리적 사고에 눈뜨지 못한 민중 속에 널리 퍼져 각종 미신적인 비기(秘記)와 도참(圖讖)을 낳았고 이에 중국 전래의 음양5행 사상이 서로 어울려서 마침내는 왕도(王都)의 지덕성쇠설(地德盛衰說), 산천압승술(山川壓勝術), 연기설(延基說) 등이 나타나서 마침내는 귀족들의 정권 싸움에까지 이용되었다.2. 4. 조선 시대 (1392년 ~ 1897년)
조선 초기에 정도전, 권근 등은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였으나 이때의 유학은 아직 정치, 경제, 법률, 문장에 관련된 이념에 머물렀다. 수 차례의 사화 이후에 유학자들은 인간의 심성에 주로 관심을 가지며 성리학을 연구하게 된다.[2] 16세기부터 정주계 성리학(주자학)만이 정통을 자처했다. 정주계 성리학에서 주로 논의된 것은 사칠론과 이기론이다. 사단칠기와 이기의 해석을 둘러싸고 주리파, 주기파로 대립하였다. 이러한 논의는 18세기에 호락 논쟁으로 이어진다. 낙론은 사람과 짐승의 본성이 같다고 주장했고, 호론은 다르다고 주장했다.한편 18세기에 왕양명 계통의 성리학인 양명학(심학)이 소수의 학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수용됐다. 16세기부터 양명학이 논의되긴 했지만 정주계 성리학자들로부터 사문난적으로 이단시 되어 철저히 배척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8세기에 정제두가 양명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였다. 정제두는 퇴계의 양명학 변박에 대해 반론을 펴며 양명학을 옹호하였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현실 문제에 관한 주자학의 한계를 절감해 주자학을 넘어선 실용 학문인 실학이 연구되었다. 경세치용은 토지제도 등을 강조하며, 이용후생은 상공업에 역점을 둔다. 19세기에는 고증학의 영향으로 실사구시가 강조되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은 정약용의 경학 사상과 최한기의 유기론(唯論)적 경험 철학에서 총괄적으로 융합된다.[3]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호와 함께 본명을 나열한다.
- 삼봉 정도전 (1337–1398)
- 양촌 권근 (1352–1409)
- 매월당 김시습 (1435–1493)
- 화담 서경덕 (1489–1546)
- 퇴계 이황 (1501–1570)
- 하서 김인후 (1511–1560)
- 고봉 기대승 (1527–1572)
- 우계 성혼 (1535–1598)
- 율곡 이이 (1536–1584)
- 여헌 장현광 (1554–1637)
- 우암 송시열 (1607–1689)
- 백호 윤휴 (1617–1680)
- 반계 유형원 (1622–1673)
- 우담 정시한 (1625–1707)
- 서계 박세당 (1629–1703)
- 하곡 정제두 (1649–1736)
- 성호 이익 (1681–1763)
- 남당 한원진 (1682–1750)
- 담헌 홍태용 (1731–1783)
- 연암 박지원 (1737–1805)
- 다산 정약용 (1762–1836)
- 화서 이항로 (1792–1868)
- 노사 기정진 (1798–1876)
- 한주 이진상 (1818–1885)
조선 시대의 성리학은 이전 불교에서 주자학으로 전환되었으며, 주희 학파는 한국 종교 철학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이 시기 형이상학적 연구는 이 (理, principle)와 기 (氣, material/vital force) 사이의 관계, 그리고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사이의 관계를 탐구했다. 이러한 탐구는 조선 유학자들을 "기"를 중시하는 학파와 "이"를 중시하는 학파로 나누었다. 화담 (서경덕, 1489–1546)은 이와 기를 통합하려 노력했고 대화 (大和, Great Harmony)를 언급했다.
기대승과의 사단칠정 논쟁에서 퇴계 (이황, 1501–70)는 이원론적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이와 기의 상호 발출(互發, hobal)을 옹호함으로써 주희로부터 벗어났다. 그는 사단에 대해 이가 발현될 때 기가 이를 따르고, 칠정에 대해 기가 발현될 때 이가 기를 '탄다'고 주장했다. 율곡 (이이, 1536–84)은 퇴계가 기가 이를 따른다는 주장이 이원론적이라고 비판했지만, 이가 기를 '탄다'는 개념은 받아들였다. 그는 오직 기만이 발현하고, 이가 그 발현을 움직이며, 이와 기는 '두 가지도 아니고 한 가지도 아니다' (既非二物,亦非一物)라고, '묘합'(妙合, wondrous fusion)으로 이를 증명했다. 율곡에게 본연지성(本然之性, i)과 기질지성(氣質之性, ki)은 하나의 인간 본성으로 융합된다. 퇴계와 율곡은, 그들의 사상이 화합적 융합주의로 귀결되면서, 이와 기의 개념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변증법적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동아시아 신유학의 정점을 이루었다. 이는 중국에서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퇴계는 또한 경 (敬, single-mindedness)이라는 신유학적 개념을 발전시켰는데, 이는 그의 확고한 인본주의의 표현이었다. 그는 천명 (天命, Mandate of Heaven)을 완전히 거부함으로써 이를 보여주었으며, 이는 주희를 포함한 중국인들에게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퇴계의 경은 한국 고유의 지극정성(至誠, supreme-efforts-come-earnest-devotion)의 감각과 유학적 마음을 지키는 것(執敬, jik-yung)의 개념을 통합했다. 그는 의미 있는 삶을 창조하기 위한 자기 노력을 옹호했다. 특히 그의 경 개념은 에도 시대의 일본 신유학자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모든 주요 한국 신유학자들은 퇴계의 경에 대한 관심을 공유했으며, 이는 한국 신유학 발달에 있어 실천(praxis)에 대한 새로운 강조를 나타냈다. 즉, 형이상학과 현실의 융합은 이론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사색보다는 행동을 통해 더 잘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율곡이 성(誠, sincerity)과 경을 통합한 요점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 신유학은 지나치게 사변적이었던 중국 신유학의 정주학 (程朱學, Cheng-Chu school)과 결별했다.
2. 4. 1. 성리학
조선 왕조는 이전 시대의 군사 독재와 혼란 속에서 일어섰다. 이 시대의 변화는 불교에서 무인적 접근 방식으로의 주자학으로의 전환이었다. 특히 주석 작업이 많이 이루어졌으며, 주희 학파는 실제로 한국 종교 철학의 황금기를 대표했다. 이 시기의 형이상학적 연구는 이 (理, principle)와 기 (氣, material/vital force) 사이의 신학적 관계, 그리고 사단(四端, four beginnings)과 칠정(七情, seven feelings) 사이의 관계를 탐구했다. 이러한 탐구는 조선 유학자들이 "기"를 중시하는 학파와 "이"를 중시하는 학파, 이렇게 두 주요 학파로 나뉘는 결과를 낳았다. 철학자 화담 (서경덕, 1489–1546)은 이와 기를 통합하려 노력했고 대화 (大和, Great Harmony)를 언급했다.기대승과의 사단칠정 논쟁에서 퇴계 (이황, 1501–70)는 이원론적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이와 기의 상호 발출(互發, hobal)을 옹호함으로써 주희로부터 벗어났다. 그는 사단에 대해 이가 발현될 때 기가 이를 따르고, 칠정에 대해 기가 발현될 때 이가 기를 '탄다'고 주장했다. 율곡 (이이, 1536–84)은 퇴계가 기가 이를 따른다는 주장이 이원론적이라고 비판했지만, 이가 기를 '탄다'는 개념은 받아들였다. 그는 오직 기만이 발현하고, 이가 그 발현을 움직이며, 이와 기는 '두 가지도 아니고 한 가지도 아니다' (既非二物,亦非一物)라고, '묘합'(妙合, wondrous fusion)으로 이를 증명했다. 율곡에게 본연지성(本然之性, i)과 기질지성(氣質之性, ki)은 하나의 인간 본성으로 융합된다. 퇴계와 율곡은, 그들의 사상이 화합적 융합주의로 귀결되면서, 이와 기의 개념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변증법적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동아시아 신유학의 정점을 이루었다. 이는 중국에서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퇴계는 또한 경 (敬, single-mindedness)이라는 신유학적 개념을 발전시켰는데, 이는 그의 확고한 인본주의의 표현이었다. 그는 천명 (天命, Mandate of Heaven)을 완전히 거부함으로써 이를 보여주었으며, 이는 주희를 포함한 중국인들에게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퇴계의 경은 한국 고유의 지극정성(至誠, supreme-efforts-come-earnest-devotion)의 감각과 유학적 마음을 지키는 것(執敬, jik-yung)의 개념을 통합했다. 그는 의미 있는 삶을 창조하기 위한 자기 노력을 옹호했다. 특히 그의 경 개념은 에도 시대의 일본 신유학자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모든 주요 한국 신유학자들은 퇴계의 경에 대한 관심을 공유했으며, 이는 한국 신유학 발달에 있어 실천(praxis)에 대한 새로운 강조를 나타냈다. 즉, 형이상학과 현실의 융합은 이론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사색보다는 행동을 통해 더 잘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율곡이 성(誠, sincerity)과 경을 통합한 요점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 신유학은 지나치게 사변적이었던 중국 신유학의 정주학 (程朱學, Cheng-Chu school)과 결별했다.
2. 4. 2. 양명학
(소스와 요약이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2. 4. 3. 실학
후기 조선 시대에 새로운 형태의 성리학인 실학이 등장했다. 가장 뛰어난 실학 철학자 중 한 명은 정약용이었다.3. 근현대 (1897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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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개화기 (1897년 ~ 1910년)
3. 1. 1. 동학
동학은 주요한 한국 철학 사상 중 하나이다.3. 1. 2. 서학
3. 2. 일제강점기 (1910년 ~ 1945년)
3. 2. 1. 민족주의
3. 2. 2. 사회주의
(내용 없음)3. 2. 3. 서양 철학의 유입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이들은 서양 철학 전반에 대한 지식이 제한적이었으나, 일본의 독일 교육의 영향으로 마르크스, 헤겔 및 변증법가들을 제외하고는 간접적인 지식을 통해 한국에서 독일 관념론에 대한 관심이 시작되었다.3. 2. 4. 기독교 사상
1890년대부터 선교 학교를 통한 낮은 교회 기독교의 강력한 영향으로 실용적인 미국식 YMCA 스타일의 철학이 한국에 유입되었다. 한국 기독교와 한국 기독교 철학에 대한 논의는 많은 분열로 복잡하며, 다른 문서에서 논의된다.3. 3. 대한민국 (1945년 ~ 현재)
해방 이후 한반도는 극심한 혼란과 이념 대립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은 철학계에도 영향을 미쳐, 다양한 사상적 조류가 등장하고 충돌하는 양상을 보였다.권위주의 정권 시기에는 독일 관념론과 신유학의 혼합이 주류를 이루며, 이는 지배 이념을 강화하는 데 활용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철학의 자유로운 발전을 억압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이후, 한국 철학은 마르크스주의, 분석철학, 포스트구조주의, 자유주의 및 자유지상주의 등 서구의 다양한 학파의 영향을 받아 급격히 분화되기 시작했다. 이는 한국 사회의 다원화와 개방화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특히,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사회 변혁의 이론적 토대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과 중세 철학은 학계의 철학자들과 기독교인들의 관심을 받았다. 이들은 신학대학과 대학교에서 연구되어 왔다. 한국 기독교 철학으로서 민중신학을 언급할 수 있지만, 이는 한국 기독교의 주류 신학은 아니다. 민중신학은 1970년대 유신 체제 하에서 억압받던 민중들의 해방을 추구하며 등장한 진보적인 신학 사조였다.
대부분 동아시아의 제자백가, 신유학, 도교와 불교 철학은 학계의 철학자와 불교도들에 의해 연구되어 왔다. 일반적인 인도 철학과 일본 철학은 제한적으로 연구된다. 대한민국에서는 학계 밖에서 동양 철학을 삶의 교훈의 원천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한국 무속 신앙과 동학은 한국 민족과의 관계 속에서 연구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동학은 조선 말기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고 외세에 맞서기 위해 등장한 민족 종교로서, 한국 근대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3. 3. 1. 해방 이후의 혼란과 이념 대립
(내용 없음)3. 3. 2. 권위주의 정권 시기의 철학
(내용 없음)3. 3. 3. 민주화 이후의 다양한 철학 사조
대한민국은 1948년부터 1980년대 초까지 권위주의 정권의 통치 하에 있었으며, 주로 독일 관념론과 신유학의 혼합의 영향을 받았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이후, 한국 철학은 많은 서구 학파에 의해 분화되었다. 마르크스주의, 분석철학, 포스트구조주의, 자유주의 및 자유지상주의는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 학계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대 그리스 철학과 중세 철학은 학계의 철학자들과 기독교인들의 관심을 받았다. 이들은 신학대학과 대학교에서 연구되어 왔다. 한국 기독교 철학으로서 민중신학을 언급할 수 있지만, 이는 한국 기독교의 주류 신학은 아니다.
3. 3. 4. 동양 철학 연구
대부분 동아시아의 제자백가, 신유학, 도교와 불교 철학은 학계의 철학자와 불교도들에 의해 연구되어 왔다. 일반적인 인도 철학과 일본 철학은 제한적으로 연구된다. 대한민국에서는 학계 밖에서 동양 철학을 삶의 교훈의 원천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한국 무속 신앙과 동학은 한국 민족과의 관계 속에서 연구되는 경향이 있다.
3. 3. 5. 한국 고유 사상 연구
대부분 동아시아의 제자백가, 신유학, 도교와 불교 철학은 학계의 철학자와 불교도들에 의해 연구되어 왔다. 일반적인 인도 철학과 일본 철학은 제한적으로 연구된다. 대한민국에서는 학계 밖에서 동양 철학을 삶의 교훈의 원천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한국 무속 신앙과 동학은 한국 민족과의 관계 속에서 연구되는 경향이 있다.
4. 주요 철학자 목록
승랑(6세기경), 원측(613–696), 원효(617–686), 의상(625–702), 균여(923–973), 의천(1055–1101), 지눌(1158–1210) 등은 불교 철학을 발전시킨 주요 인물들이다. 정몽주(1338–1392), 정도전(1342–1398)은 조선 건국에 기여한 성리학자들이다. 서경덕(1489–1546), 이언적(1491–1553), 조식(1501–1572), 이황(1501–1570), 이이(1536–1584) 등은 성리학을 심화시킨 대표적인 학자들이다. 정제두(1649–1736)는 양명학을 연구했으며, 정약용(1762–1836)은 실학 사상을 집대성했다. 김정희(1786–1856)는 추사체를 창시한 서예가이자 금석학 연구에 기여했다.
삼봉 정도전(1337–1398), 양촌 권근(1352–1409), 매월당 김시습(1435–1493), 화담 서경덕(1489–1546), 퇴계 이황(1501–1570), 하서 김인후(1511–1560), 고봉 기대승(1527–1572), 우계 성혼(1535–1598), 율곡 이이(1536–1584), 여헌 장현광(1554–1637), 우암 송시열(1607–1689), 백호 윤휴(1617–1680), 반계 유형원(1622–1673), 우담 정시한(1625–1707), 서계 박세당(1629–1703), 하곡 정제두(1649–1736), 성호 이익(1681–1763), 남당 한원진(1682–1750), 담헌 홍태용(1731–1783), 연암 박지원(1737–1805), 다산 정약용(1762–1836), 화서 이항로(1792–1868), 노사 기정진(1798–1876), 한주 이진상(1818–1885)등 이 있다.
현대 철학자로는 김재권(1934–2019), 김용옥(1948–), 한병철(1959–) 등이 있다.
이들은 주로 호(號)와 함께 본명이 나열되어 있다.
참조
[1]
서적
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 통일신라시대의 사상〔槪說〕
범한
[2]
웹사이트
글로벌세계대백과, 조선전기의 철학사상
http://donation.enc.[...]
[3]
웹사이트
글로벌세계대백과, 조선후기의 철학사상
http://donation.e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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