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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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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철학은 고대 불교 사상에서 시작하여 유교, 도교, 국학, 난학 등 다양한 사상적 흐름을 거쳐 발전해 왔다. 고대에는 불교가 일본 사상의 주류를 이루며, 국가 수호 사상으로 발전했고, 중세에는 가마쿠라 불교의 등장과 함께 정토종, 선종, 일련종 등 새로운 종파가 등장했다. 근세에는 유교가 주류를 이루며, 주자학, 양명학, 고학 등이 발전했고, 국학과 난학을 통해 일본 고유의 사상과 서양 학문이 소개되었다. 근대에는 계몽주의와 인권 사상이 유입되어 자유민권 운동이 일어났고, 기독교와 사회주의 사상도 영향을 미쳤으며, 재패니즘이 대두되었다. 현대에는 서양 철학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연구 성과가 나타났으며, 마르크스주의, 현상학, 분석 철학 등이 주요 연구 분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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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철학
개요
분야철학
지역일본
역사적 맥락
형성 시기아스카 시대에서 나라 시대
주요 영향불교
유교
신토
주요 학파 및 사상
불교 철학선불교
정토종
천태종
진언종
유교 철학주자학
양명학
신토 철학국학
복고신도
근대 철학교토학파
실존주의
마르크스주의
주요 인물
불교구카이 (고보대사)
사이초 (덴교대사)
혼넨
신란
도겐
니치렌
유교후지와라 세이카
하야시 라잔
나카에 도주
이토 진사이
오규 소라이
신토모토오리 노리나가
히라타 아쓰타네
근대니시다 기타로
와쓰지 데쓰로
미키 기요시
특징
융합적 성격외래 사상과 전통 사상의 조화 추구
실천 중시이론적 탐구와 더불어 윤리적, 사회적 실천 강조
자연관자연과의 조화와 인간의 본성 탐구
관련 개념
무 (無)선 철학에서의 핵심 개념
공 (空)불교 철학에서의 핵심 개념
기 (気)생명력, 우주의 근원적인 힘
화 (和)조화와 균형의 추구
영향
문화다도
무도
정원
사회윤리
교육
정치
추가 정보
관련 항목일본 사상사
동양 철학
불교 철학
유교 철학
신토
참고 문헌和辻哲郎『日本倫理思想史』1952年、岩波書店

2. 고대

고대 일본에서는 불교, 유교, 도교 등 외래 사상과 일본 고유의 신앙이 융합되는 과정을 거쳤다.

백제로부터 불교가 전래되면서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쇼토쿠 태자는 불교를 국가 통치의 이념으로 삼았으며, 나라 시대에는 국가 주도로 불교가 융성했다. 헤이안 시대에는 밀교가 유행하며 일본 불교의 독자적인 발전을 이끌었다.[1]

도교는 신선 사상, 음양오행설 등 다양한 형태로 일본에 전래되어 일본 고유의 신앙과 결합하여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일본서기에는 신선들이 사는 이상향인 '상세(常世)' 사상이 나타나는데, 이는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1] 나라 시대에는 도교가 점술, 주술 등 실용적인 형태로 유행했으며, 헤이안 시대에는 일본 도교가 가장 흥성했던 시기였다.[1]

백제의 사신 아직기와 박사 왕인이 일본에 유교 경전을 전래하면서 유학이 전래되기 시작하였다.[1] 쇼토쿠 태자는 중앙집권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유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다이카 개신을 통해 유교적 정치 개혁이 추진되었다. 헤이안 시대에는 후지와라씨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봉건 제도가 형성되었고, 봉건 통치 계급은 유학을 통해 통치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2. 1. 불교

백제로부터 불교가 전래되면서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쇼토쿠 태자는 불교를 국가 통치의 이념으로 삼고 사찰 건립과 불교 장려 정책을 펼쳤다.[1] 나라 시대에는 국가 주도로 불교가 융성했으며, 헤이안 시대에는 밀교가 유행하며 일본 불교의 독자적인 발전을 이끌었다. 고대 불교 전래 과정에서 백제의 역할이 컸으며, 많은 승려와 기술자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불교 문화 전파에 기여했다.

일본서기중국어에 따르면, 긴메이 천황은 백제 왕이 보내온 불상을 받고 매우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신하들 사이에서는 불교 수용에 대한 찬반 논쟁이 있었고, 시험 삼아 불상을 안치하고 예배를 드렸으나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자 불교 반대파는 불상을 땅에 묻기도 했다. 불교 수용 문제는 종교적인 문제라기보다는 권력 문제였다.

비다쓰 천황 즉위 후 백제와 고구려에서 불교가 계속 유입되었다. 요메이 천황은 불교에 귀의하고자 아나호베 황자를 추대하려 했으나, 소가노 우마코스이코 천황의 조서를 받들어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백제의 사원 건축가와 화공들이 승려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왔다. 스이코 천황 시대에는 고구려 승려 혜자와 백제 승려 혜총이 일본에 왔다.

쇼토쿠 태자 사후 20년 뒤인 645년, 다이카 개신이 일어나 황실은 유학을 다녀온 승려들과 함께 당나라 제도를 모방한 개혁을 추진했다. 대화 원년에는 불교 융성 조서가 반포되었고, 덴무 천황은 집집마다 불단을 설치하고 예배를 드리도록 칙령을 내렸다.

쇼무 천황 시대(729-749)는 나라 불교의 전성기였다. 쇼토쿠 태자 시대부터 불교는 국가 통일의 사상적 기반으로 여겨졌으며, 율령국가 성립과 함께 더욱 중요해졌다. 쇼무 천황은 사회 안정을 위해 지방 각지에 절을 세웠다.

간무 천황헤이안성으로 천도하면서 정치 중심이 북쪽으로 이동하여 나라 불교는 불리해졌다. 헤이안 정부는 불교 보호 정책을 포기하고 나라 사원들의 새 도읍 이전을 금지했으며, 법을 어기는 승려들을 외지로 내쫓았다. 헤이안 초기 불교는 국가 안정과 재앙 제거를 목적으로 하였고, 밀교가 이러한 시대적 추세에 부합하여 사이초천태종구카이진언밀교가 성행했다.

고대 일본에서 불교의 도래는 국가 건설 및 정치 권력 집중과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쇼토쿠 태자와 소가씨는 고대 일본 종교를 담당했던 모노노베씨와 싸워 이기고, 법전 체계와 불교의 통일을 기반으로 한 국가 통치 계획을 수립했다. 스이코 천황의 섭정이었던 쇼토쿠 태자는 불교를 통해 국가 정치를 안정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불교의 힘을 통해 국가의 평화와 안보가 온다는 생각은 "국가 안보" 사상이라고 불린다. 특히 나라 시대, 쇼무 천황 시대에는 전국에 국분사와 국분니사가 세워졌고, 도다이 사와 대불이 나라에 세워졌다.

나라 불교가 "국가 안보" 사상만을 따랐던 반면, 헤이안 불교는 국가의 평화와 안보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현세적 이익도 가져왔다. 헤이안 불교의 수행자들은 산에서 가혹한 고행 수행, 주문, 기도를 자주 했기 때문에, 이 불교는 밀교라고 불리게 되었다. 불교 승려인 구카이는 중국 밀교를 배우고 일본 불교와 중국 밀교의 수행을 결합하여 일본 진언종을 형성했다. 또한 중국으로 여행한 불교 승려인 사이초는 중국 천태종의 수행을 배우고 법화경의 가르침이 일본 불교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 이르러, 헤이안 불교의 현세적 관심은 불교 승려들로 하여금 현세에서의 구원의 가능성이 부정되는 "죄악의 시대"를 선언하게 했고, 이에 따라 죽음 이후 불교의 극락으로의 윤회를 찾는 경향이 일어났다. 또한 "불교는 세상의 말세에 쇠퇴할 것이다"라는 새로운 사상은 정토교 운동의 부상을 이끌었다. 이 운동은 정토교의 추종자인 구야를 중심으로 아미타불에 대한 믿음을 설파하고 모든 사람이 불교 승려뿐만 아니라 불교의 극락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2. 2. 도교

도교는 신선 사상, 음양오행설 등 다양한 형태로 일본에 전래되어 일본 고유의 신앙과 결합하여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가장 오래된 일본 문헌 중 하나인 일본서기에는 '상세(常世)' 사상이 나타나는데, 이는 신선들이 사는 이상향으로 묘사되며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1] 그 외에도 일본 초기 제사에서 중국 도교의 풍습이 발견되는데, 가난한 자는 부유해지고 늙은이는 젊어진다는 믿음으로 상세신(常世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등의 풍습이 있었다.[1]

나라 시대에는 도교가 점술, 주술 등 실용적인 형태로 유행했으며, 상위층에서 시작하여 점차 하위층으로 퍼져나가 일본 고유 신앙과 결합하면서 여러 폐단을 낳기도 했다.[1] 그러나 기비노 마키비(695-775)와 구카이(774-835) 같은 인물들은 도교를 깊이 연구하여, 기비노 마키비는 중국에서 도교 밀법을 배우고 돌아와 일본 음양도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1] 당시 일본에는 전약료(典藥寮)와 음양료(陰陽寮)라는 관청이 있었는데, 전약료는 도교적 방술을 중심으로 안마와 주문을, 음양료에서는 천문, 역수, 기상 관찰, 길흉화복 점치는 일을 담당했다.[1] 나라 시대에 금지되었던 주술은 음양료에서 계속 이어져 헤이안 시대음양도로 발전하였다.[1]

헤이안 시대는 일본 도교가 가장 흥성했던 시기였다.[1] 그 원인으로는 첫째, 이전 시대에 흡수한 외래 문화를 일본 문화에 소화시키는 단계였고, 당나라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 가져온 도교 경전이 연구 자료로 활용되었다는 점,[1] 둘째, 귀족들은 신선 세계와 불로장생을 추구하고, 백성들은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1]

2. 3. 유교

백제의 사신 아직기와 박사 왕인이 일본에 유교 경전을 전래하면서, 일본에 유학이 전래되기 시작하였다.[1] 초기에는 황태자나 상위 귀족 자제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전수되었으나, 6세기 이후 게이타이 천황긴메이 천황 시기에 백제와 고구려의 박사들이 일본에 오면서 유학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스이코 천황 시기에는 일본이 중국에서 직접 유학을 받아들였다. 쇼토쿠 태자는 중앙집권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유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그는 수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유학을 공부하게 하였고, 귀국한 유학생들은 유학 서적과 중국 문물을 가져와 유학 보급에 기여하였다.

7세기 다이카 개신을 통해 유교적 정치 개혁이 추진되었다. 신흥 봉건 세력은 고토쿠 천황을 옹립하고 ·의 제도를 본따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학은 사회 변혁의 정치이념을 제공하며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헤이안 시대에는 후지와라씨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봉건 제도가 형성되었고, 봉건 통치 계급은 유학을 통해 통치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유학은 일본 사회 각 분야에 응용되었으며, 천황의 '조서'에도 반영되었다.

3. 중세

중세 일본에서는 무사 계급이 등장하면서 사회 질서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불교가마쿠라 시대(1185-1333)에 여러 종파로 분화되며 발전했다.

3. 1. 불교

일본 불교는 가마쿠라 시대(1185-1333)에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무사와 평민 등 새로운 계급이 성장하면서, 이들은 기존 불교와는 다른 새로운 가르침을 찾고자 했다.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정토종, 선종, 일련종 등 여러 종파들이 등장했다.[2]

정토 신앙은 아미타불의 자비에 의지하여 구원받는 것을 강조했다. 호넨은 다른 수행을 버리고 오직 아미타불을 믿고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의 제자 신란정토진종을 창시하여 호넨의 가르침을 더욱 발전시켰다. 신란은 아미타불의 구원은 욕망 많은 죄인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잇펜은 시종을 창시하고 "염불 춤"을 통해 가르침을 전파했다.

선종 불교는 선 명상을 통해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목표로 했다. 에이사이는 중국에서 린자이종을 배워와 일본에 전파했다. 린자이 선은 어려운 문제를 풀게 하여 깨달음을 얻도록 하는 방식으로, 가마쿠라 시대 상위 사무라이 계급의 지지를 받았다. 도겐은 소토종을 배워와 좌선을 통한 깨달음을 강조했으며, 지방 사무라이들의 지지를 얻었다.[2]

니치렌은 법화경을 중심으로 하는 니치렌 불교를 창시했다. 그는 현세에서 성불을 강조하고, "나무묘법연화경"을 외우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의 가르침은 오늘날까지 니치렌 불교 종파와 단체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3. 2. 도교

가마쿠라·무로마치 시대는 사회의 실권이 무가(武家)에 있었던 무사 시대였다. 무사들은 칼을 차고 싸움판에 나가는 사람들로서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처지였기에, 신선의 경지나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도교보다는 생사를 초탈하는 가르침을 주는 불교가 더 필요했다. 이 때문에 현실 세계는 허무하며 진정한 존재의 의미는 저 세상에 있다는 불교가 크게 유행하고, 도교는 자연히 푸대접을 받게 되었다.[1]

일본에 전래된 도교는 완전한 체계를 갖춘 종교가 아니라 도교의 한 부분이었다. 게다가 일본에 전래된 후 그 문화 모체에서 오는 보충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 도교는 자생할 능력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 유교, 도교의 내용들은 부분적으로 일본 민족 신앙 속으로 흡수되었다. 이것이 바로 신토(神道), 수험도(修驗道), 음양도(陰陽道) 등인데, 이들은 가마쿠라·무로마치 시대에 이르러 각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도교는 자연히 이들 일본 종교 신앙 속에 흡수되어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1]

4. 근세

근세 일본은 에도 막부의 통치 아래 사회가 안정되고 학문과 사상이 발전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유교, 도교, 국학(고쿠가쿠), 난학(란가쿠) 등 다양한 사상이 발전하였다.

에도 시대유교는 공인된 학문이었으며, 주자학, 왕양명 학파, 고학파 등 다양한 신유학 학파가 유행했다.[2] 주자학은 가마쿠라 막부 초기에 불교 승려들이 송나라에 왕래하면서 일본에 전파되었으며, 에도 시대부터 진정한 학문으로 전개되었다.[1] 왕양명 학파는 도쿠가와 막부의 지속적인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2] 고학파는 공자맹자의 원본 텍스트의 실제 의도를 고려했다.[2]

에도 시대는 헤이안 시대에 이은 일본 도교의 두 번째 흥성기였다. 중국의 도교 경전이 다시 대량으로 일본에 들어왔고, 인쇄술 발달로 많은 도교 경전(道經|도경중국어)이 간행되었으며, 도교가 학문으로서 광범위하게 연구되었다.

에도 시대 중기, 국학(고쿠가쿠)은 불교유교와 같은 외래 사상에 대항하여 고대 일본 사상과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인기를 얻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 정책으로 에도 지식인들은 서구 문명과 긍정적인 접촉을 할 수 없었고, 란가쿠(난학), 즉 네덜란드 학문은 서구로 통하는 유일한 창구였다.

4. 1. 일본 주자학

가마쿠라 막부 초기에 불교 승려들이 송나라에 왕래하면서 주자학을 일본에 전파하였다. 1199년 승려 슌조는 송나라에 들어가 불학(佛學)과 주자학을 함께 배웠고, 1211년 귀국하면서 많은 유학 서적을 가져왔다. 주자학은 전파된 이래로 줄곧 불교에 예속되어 있었으나 에도 시대부터 진정한 학문으로 전개되었다. 후지와라 세이카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온 강항에게서 주자학을 배우고,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초청을 받아 에도에서 주자학을 강의하여 일본 주자학의 시조가 되었다.[1]

에도 시대유교는 공인된 학문이었으며, 다양한 신유학 학파가 유행했다.[2]

주희 학파의 신유학은 고정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는 가족과 같은 봉건 질서를 존중했다. 하야시 라잔은 주희 학파의 신유학을 도쿠가와 막부의 이론적 기초로 삼았다. 문민 정부의 원칙에 따라 공자에게 헌신하는 유시마 세이도가 설립되었다. 간세이 개혁으로 주희 학파의 신유학은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더욱 강화되고 공인되었다. 또한 주희 학파의 사상은 도쿠가와 시대 말기에 천황을 존경하고 외국인을 배척하는 정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2]

주희 학파와 대조적으로 실용적인 윤리를 존중하는 왕양명 학파의 신유학은 도쿠가와 막부 하의 사회 정치적 조건에 대한 비판으로 인해 도쿠가와 막부의 지속적인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2]

세 번째 신유학 학파는 공자맹자의 원본 텍스트의 실제 의도를 고려했다. 야마가 소코는 유교 윤리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확립하고 사무라이를 최고 계급으로 간주했다. 이토 진사이는 공자의 ""에 주목했고, "인"을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진실"을 순수한 배려로 존중했다. 또한, 고대 중국 고전에 대한 그의 실질적인 연구에서 파생된 오규 소라이는 원래의 유교 정신이 세계를 다스리고 시민을 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2]

4. 2. 도교

에도 시대는 헤이안 시대에 이은 일본 도교의 두 번째 흥성기였다. 이 시기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이 나타났다.

  • 중국의 도교 경전이 다시 대량으로 일본에 들어왔다.
  • 인쇄술 발달로 많은 도교 경전(道經|도경중국어)이 간행되었다.
  • 도교가 학문으로서 광범위하게 연구되었다.


에도 시대 초기, 중국은 · 교체기였다. 반청복명(反淸復明)을 추진하던 중국 인사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불교와 함께 도교를 전파했다. 명청 시기 일본에 전파된 도교는 주로 중국에서 성행한 민간 도교였다. 그 가운데 은원선사(隱元禪師)가 1654년에 일본으로 가져간 善書|선서중국어는 일본 민간 도교에 큰 영향을 주었다. 1770년에는 正統道藏|정통도장중국어도 일본에 전해졌다.

인쇄술 발달에 따라 에도 시대에 많은 도경과 번역본이 간행되었다. 대표적으로 太上感應篇|태상감응편중국어, 太上感應篇和解|태상감응편화해중국어 등이 있다. 이 외에도 많은 도교 경전들이 출간되거나 번역되었다. 이것은 당시 사회가 도교에 대해 많은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시기에는 도교 서적들이 일반화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혔는데, 그 가운데 진정으로 도교를 숭상한 이도 적지 않았다. 일본은 도교를 완전히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중국의 민간 도교를 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도교를 다시 자국의 고유신 숭배를 핵심으로 하는 신앙 체계 속에 흡수하여 일본인의 심층 의식과 사회 습속에 깊이 뿌리내리게 하였다.

4. 3. 국학과 난학

에도 시대 중기에 고쿠가쿠(국학)는 불교유교와 같은 외래 사상에 대항하여 고대 일본 사상과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인기를 얻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 정책으로 에도 지식인들은 서구 문명과 긍정적인 접촉을 할 수 없었고, 따라서 란가쿠(난학) 즉, 네덜란드 학문은 서구로 통하는 유일한 창구였다.

에도 시대 중기에 고쿠가쿠는 국수주의를 배경으로 실증적인 유교의 영향을 받으며 인기를 얻었다. 고쿠가쿠는 "고지키", "니혼쇼키", "만요슈" 등을 포함한 고대 일본 사상과 문화를 긍정적으로 연구했으며, 유교와 불교와는 다른 일본 고유의 도덕 문화를 발굴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가모노 마부치는 "만요슈" 연구에 몰두하여 관대하고 남성적인 스타일인 "마스라오부리"를 주창했으며, 이 시집을 순수하고 단순하다고 평가했다.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고지키'' 연구를 통해 일본 문학의 본질은 사물과 접촉할 때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감정인 "모노노아와레"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국 (유교/불교) "가라 정신" 대신 일본의 "야마토 정신"을 존중했다. 그에 따르면 고쿠가쿠는 일본의 옛 방식인 "신토"를 추구해야 했다. 히라타 아쓰타네는 고쿠가쿠 연구를 통해 국가주의적 국가 신토, 천황에 대한 복종, 유교와 불교의 폐지를 옹호했다. 이것은 도쿠가와 막부의 종말과 메이지 유신의 원동력이 되었다.

에도 시대의 쇄국 기간 동안 서구와의 직접적인 접촉은 없었지만, 교호 개혁 동안 중국으로부터 번역된 서양 서적의 수입을 장려하면서 란가쿠가 인기를 얻었다. 마에노 료타쿠와 스기타 겐파쿠는 네덜란드어 "해체신서"를 일본어로 번역했다. 네덜란드 학문은 도쿠가와 시대 말기에 영국, 프랑스, 미국의 연구와 같은 다른 서양 연구로 발전했다. "일본 정신, 서양 문명"의 방식은 사쿠마 쇼잔의 "동양 윤리와 서양 기술"이라는 솔직한 표현으로 완성되었다. 다카노 조에이와타나베 가잔은 쇄국을 엄격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탄압을 받았다.

5. 근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서양 문물의 유입과 함께 급격한 사회 변화를 겪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사상적 논쟁이 전개되었는데, 계몽주의자유, 평등, 인권 개념의 확산, 기독교사회주의 사상의 대두, 그리고 국수주의적 경향인 재패니즘 등이 주요 흐름이었다. 이러한 사상적 변화는 제국주의, 군국주의, 파시즘과 같은 이데올로기와 연결되기도 했다.

5. 1. 계몽주의와 인권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의 계몽주의 사상이 일본에 유입되면서 자유, 평등, 인권 등의 개념이 확산되었다. 모리 아리노리메이로쿠샤라는 문화 단체를 만들어 서양 사상을 연구하고 일본의 근대화를 추진했으며, 교육부 장관으로서 국가 교육 발전에 힘썼다.[3] 니시 아마네는 이익에 기반한 인간 행동을 긍정하는 등 서양의 공리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3] 가토 히로유키는 사회 다윈주의의 영향을 받아 적자 생존을 옹호했다.[3]

후쿠자와 유키치영국공리주의를 일본에 소개하고 천부 인권을 옹호했다. 그는 문명의 발전을 인간 정신의 발전으로 보았고, 개인의 독립이 국가의 독립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했다.[3] 또한, 정부는 "편의를 위한 것"이며, 문화에 적합한 형태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단 하나의 이상적인 정부 형태는 없다고 말했다.[4]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자유민권 운동을 통해 민주주의 사상을 확산시켰다.[3] 우에키 에모리는 이타가키를 도와 급진적인 민주주의 사상을 발전시켰고, 나카에 초민은 장 자크 루소의 영향을 받아 국민 주권과 개인의 정치적 자유를 주장했다.[3]

5. 2. 기독교와 사회주의

에도 막부에 의해 금지되었던 기독교메이지 시대의 많은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우치무라 간조는 전통적인 무사도와 기독교 정신을 통합하기 위해 "두 개의 J"(일본과 예수)를 제시하고, 무교회주의를 주장하였으며, 교육에 관한 칙어에 도전하고 러일 전쟁에 반대하였다.[5] 니토베 이나조퀘이커 교도로서 일본 문화와 기독교를 통합하려 노력했고, 일본 문화를 해외에 소개하며 국제 연맹의 사무총장을 역임하였다. 니지마 조는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교토도시샤 대학을 설립하여 기독교적 인격 수양에 힘썼다.

청일 전쟁러일 전쟁을 거치며 일본이 산업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를 도입하자, 사회주의가 이에 대항하여 확산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은 1900년 치안경찰법에 의해 억압되었고, 1910년 고도쿠 사건(幸徳事件)으로 군국주의 파시스트 정권에 의해 진압되었다. 가와카미 하지메는 신문에 빈곤에 대한 기사를 기고하며 초기에는 개인적 개혁을 강조했으나, 이후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 사회적 강제에 의한 개혁을 주장하였다. 고토쿠 슈스이는 의회를 통한 사회주의 실현을 추구하다 조합주의자가 되어 총파업과 같은 직접 행동을 주장하였고, 고도쿠 사건의 주동자로 사형되었다. 오스기 사카에무정부주의와 조합주의를 바탕으로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다 간토 대지진의 혼란 속에서 헌병에 의해 암살되었다.

5. 3. 재패니즘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서구화에 대한 반발로 일본의 전통과 문화를 강조하는 국수주의적 경향이 나타났다.[6] 이러한 경향은 제국주의군국주의, 파시즘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도쿠토미 소호는 일본의 서구화에 반대하여 자유 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을 주장하는 잡지를 발행했지만, 부르주아에 대해 환멸을 느꼈다. 구가 가쓰난은 일본의 정치 문화와 국가 전통을 매우 높이 평가하며 국가적 감정의 회복과 향상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그는 군대를 비판하고 의원 내각제 정부와 선거권 확대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편협한 국수주의자는 아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는 신토를 국가 신도로 취급하며 천황과 밀접하게 연결시켰고, 국가 통치의 도구로 사용했다. 메이지 국가주의청일 전쟁러일 전쟁을 통해 제국주의식민주의를 추구했으며, 군국주의적 경향은 초국가주의로 발전했다. 기타 잇키재벌, 원로 및 정당의 배제와 천황과 국민을 직접 연결하는 정부 수립을 옹호했다.[7]

교토 학파는 선불교와 같은 동양 사상과 서양 사상을 조화시키려 했다. 니시다 기타로는 선과 서양 사상의 융합을 통해 독창적인 사상인 니시다 철학을 확립하고, 주관성과 객관성 사이에 어떠한 대립도 없는 순수한 경험을 주장했다.[8] 와츠지 테츠로는 서양의 이기적인 개인주의를 비판하고,[9] 인간은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관계적 존재라고 주장했다.

6. 현대

현대 일본 사상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대륙 철학, 미국 철학 등 서양 철학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오모리 쇼조, 히로마쓰 와타루, 유아사 야스오, 요시모토 다카아키 등은 마르크스주의, 현상학, 분석 철학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저작을 창작하였다.[19] 가라타니 고진, 나가이 히토시, 노야 시게키, 모리오카 마사히로, 이리후지 모토요시 등이 현대 일본 학계의 주요 철학자로 꼽힌다.[19]

6. 1. 현대 사상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많은 철학자들이 대륙 철학과 미국 철학에 관한 책을 출판하였다. 그중 오모리 쇼조, 히로마쓰 와타루, 유아사 야스오, 요시모토 다카아키마르크스주의, 현상학, 분석철학의 영향을 받아 독창적인 저작들을 만들었다.[19][10]

오모리 쇼조는 "표상 일원론", "이중 묘사", "언어 애니미즘"의 개념을 바탕으로 독특한 일원론적 인식론을 창시했다. 히로마쓰 와타루는 "세계의 다중 주관적 존재론적 구조" 이론을 발전시켰다. 유아사 야스오는 메를로-퐁티의 영향과 중국 의학에서 발견되는 신체상에 기반한 새로운 신체 이론을 발전시켰다.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공유 환상 이론"과 일본 문화에 관한 다양한 철학 에세이로 유명하다.[10]

오늘날에는 가라타니 고진 (문학 이론), 나가이 히토시 (유아론), 노야 시게키 (분석 철학), 모리오카 마사히로 (생철학), 이리후지 모토요시 (분석철학)와 같은 학자들이 일본 학계의 특징적인 철학자로 여겨진다.[10]

참조

[1] 문서 Sangyo Gisho
[2] 논문 Dōgens Sprachdenken: Historische und symboltheoretische Perspektiven http://www.verlag-al[...] Verlag Karl Alber 2013
[3] 문서 Encouragement of learning 1872-76
[4] 문서 Datsu-A Ron
[5] 문서 How I became a Christian 1895
[6] 문서 Total war
[7] 문서 February 26 Incident
[8] 문서 An inquiry into the good
[9] 문서 The significance of ethics as the study as man
[10] 웹사이트 Collected works of Shozo Omori http://www.iwanami.c[...]
[11] 서적 日本倫理思想史 岩波書店 1952
[12] 서적 '「日本思想史」の成立とイスラム世界' 岩波書店 2003
[13] 서적 近世初期実学思想の研究 創文社 2004
[14] 문서 学問のすゝめ 1872-76
[15] 문서 脱亜論
[16] 문서 How I became a Christian(余は如何にして基督信徒となりし乎) 1895
[17] 문서 善の研究
[18] 문서 人間の学としての倫理学
[19] 웹사이트 Collected works of Shozo Omori http://www.iwanam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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