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기독교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아시아의 기독교는 1세기부터 레반트를 통해 전파되었으며, 아르메니아와 조지아가 4세기 초에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했다. 초기에는 파르티아 제국을 통해 동쪽으로 확산되었으며, 사도 토마스에 의해 인도와 스리랑카에도 전파되었다. 5세기부터 14세기까지는 네스토리우스파가 중앙아시아와 중국에 전파되었고, 당나라 시대에는 경교가 중국에 전래되었으나 당나라의 외국 종교 금지령으로 쇠퇴했다. 원나라 시대에는 종교적 관용 정책으로 부흥했으나 명나라에 의해 쇠퇴했다. 13세기부터 가톨릭 선교가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몽골 제국과의 교류를 통해 동서 교류가 이루어졌다. 16세기에는 예수회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선교했으며,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등지에도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한국 천주교는 자생적으로 발전하여 박해를 받았으나, 20세기 이후 급성장하여 사회 운동에 기여했다. 오늘날 아시아에서는 필리핀, 동티모르, 아르메니아, 조지아 등 6개국에서 기독교가 지배적 종교이며, 종교 간 대화와 사회 봉사, 복음의 토착화, 문화적 다양성 존중 등의 과제를 안고 있다.
기독교는 1세기 레반트 지역에서 시작되어 서아시아, 인도 등지로 퍼져나갔다. 터키의 안티오크는 초기 기독교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캅카스 지역의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는 각각 301년과 326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여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4][5]
4세기 네스토리우스파 분열 이후 사산 제국의 박해와 기독교인들의 동방 이주로 튀르크 유목민들이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로 개종했다.[19] 7세기부터 중앙아시아 유목민인 튀르크족이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했는데, 781-2년과 1007년에 대규모 개종이 기록되었으며, 이때 20만 명의 튀르크족과 몽골족이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한다.[19] 조지아와 동맹을 맺은 튀르크족 킵차크도 조지아인의 제안에 따라 기독교로 개종했다. 조지아 왕 다비드 4세의 요청으로 많은 수가 세례를 받았으며, 1120년부터 킵차크 민족 기독교 교회와 영향력 있는 성직자가 있었다.[20]
2. 초기 기독교의 확산 (1세기~5세기)
파르티아 제국은 종교적으로 관용적인 정책을 펼쳐 기독교가 동쪽으로 확산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사도 토마는 메소포타미아와 이란 고원을 거쳐 중앙아시아에 기독교를 전파했으며, 인도의 기독교를 설립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기독교 확산은 헬라어와 아람어 보급, 유대인의 확산과도 관련이 깊다.[6][7]
성 토마스는 인도-파르티아의 곤도파레스 왕을 개종시키고, 남인도로 건너가 성 토마스 기독교인 (시리아 말라바르 나스라니)의 기원이 되는 원주민들에게 세례를 주었다.[9][11] 그는 말라바르 해안 전역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으며, 이후 인도 남동부 코로만델 해안에서 사역하다 순교했다.[12]
1세기(72년)에는 스리랑카에 기독교가 전래되었으며, 아누라다푸라 십자가는 이 섬에서 기독교를 나타내는 오래된 상징이다.[13][14]
2. 1. 서아시아
서아시아는 기독교가 탄생하고 초기 확산된 핵심 지역 중 하나이다.
기독교는 서기 1세기부터 레반트(동부 지중해) 지역을 통해 퍼져나갔으며, 터키의 안티오크가 초기 중심지 중 하나였다. 안티오크는 사도 베드로, 바나바, 바울로 등에 의해 복음화되었고, 이곳의 개종자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렸다.[4] 이들은 빠르게 증가하여 4세기 후반에는 약 10만 명에 이르렀다. 안티오크는 5대 총대주교 중 하나의 자리가 되었다.
캅카스 지역에서는 아르메니아와 조지아가 각각 301년과 326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여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유다 타대오와 바르톨로메오 두 사도의 전도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전해진다. 조지아는 1세기에 열심당 시몬과 성 안드레아에 의해 처음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326년에 국교가 되었다. 조지아의 기독교 개종에는 성 니노 (290–338)의 역할이 컸다.[5]
2. 1. 1. 레반트 지역
기독교는 서기 1세기부터 레반트(동부 지중해)를 통해 퍼져나갔다. 주요 중심지 중 하나는 오늘날 터키에 위치한 헬레니즘 셀레우코스 제국의 이전 수도였던 안티오크였다. 안티오크는 사도 베드로에 의해 복음화되었다는 전통이 있으며,[3] 바나바와 바울로에 의해서도 복음화되었다. 안티오크의 개종자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다.[4] 이들은 빠르게 증가하여 테오도시우스 1세(347–395) 시대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요한 크리소스토무스(347–407)에 의해 약 10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252년과 300년 사이에 안티오크에서 10차례의 교회 회의가 열렸고, 이곳은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폴리스, 로마와 함께 최초의 5대 총대주교 중 하나의 자리가 되었다.
2. 1. 2. 캅카스 지역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는 각각 301년과 326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한 최초의 국가였다.
유다 타대오와 바르톨로메오는 예수의 열두 사도 중 두 명으로, 서기 40~60년 사이에 아르메니아에서 기독교를 전파하였다. 이 두 명의 창립 사도 때문에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교회로 여겨진다.
조지아에서는 1세기에 사도 열심당 시몬과 성 안드레아가 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파했다. 기독교는 326년에 카르틀리, 이베리아 (조지아 수도 지역)의 국교가 되었다. 조지아의 기독교 개종은 카파도키아 출신의 성 니노 (290–338)의 노력에 기인한다.[5]
2. 2. 파르티아 제국과 중앙아시아
파르티아 제국은 종교 문제에 대해 높은 관용을 보였으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기독교는 더욱 동쪽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6] 전승에 따르면, 메소포타미아와 이란 고원을 시작으로 중앙아시아의 기독교 개종은 사도 토마에 의해 서기 1세기에 시작되었다.[7] 성 토마는 인도의 기독교를 설립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란의 기독교인들은 여러 주교 아래 조직되었으며, 서기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했다.[7]
중앙아시아에서 기독교의 확산은 이 지역에서 헬라어가 광범위하게 보급(셀레우코스 제국, 그레코-박트리아 왕국, 인도-그리스 왕국)되고, 예수가 사용한 언어인 아람어가 널리 쓰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바빌론으로부터의 유배와 티투스에 의한 예루살렘 점령 이후 아시아에서 유대인이 확산된 것 또한 기독교 전파에 기여한 요인으로 여겨진다.[7]
중앙아시아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가장 초기의 언급은 196년경 바르 데이산의 저술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는 "우리의 길라니아와 박트리아 자매들은 이방인들과 아무런 교류가 없다"고 기록했다.[8]
사산 제국은 조로아스터교 사제 카르티르에 의한 바흐람 2세(276–93 AD) 치하의 박해 이전까지는 기독교에 비교적 관용적이었다. 샤푸르 2세(310–379)와 야즈데게르드 2세(438–457) 치하에서도 박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338년의 사건은 기독교 신앙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7]
2. 3. 인도와 스리랑카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사도 토마스와 바르톨로메오는 파르티아와 인도로 파견되었다.[9][10] 3세기 초 시리아어 작품인 ''토마스 행전''[9]은 토마스의 인도 사역을 북쪽과 남쪽에 있는 두 왕과 연결한다. ''행전''에 따르면, 토마스는 인도-파르티아의 곤도파레스 왕의 섬김을 받게 되었고, 그의 사역은 왕과 그의 형제를 포함하여 왕국 전역에서 많은 개종자를 낳았다.[9]
그 후 토마스는 남쪽 케랄라로 가서 원주민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들의 후손은 성 토마스 기독교인 또는 시리아 말라바르 나스라니를 형성한다.[11] 토마스는 배를 타고 인도 대륙 남서 해안을 따라 말라바르 해안으로 이동했으며, 서기 52년에 코친 근처 섬에 있는 무지리스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말라바르 해안 전역에 복음을 전파했다. 그가 세운 교회는 주로 페리야르 강과 그 지류, 그리고 해안을 따라 위치해 있었다. 그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설교했고 약 170명의 개종자를 얻었다. 나중에 교회들이 세워진 곳에 돌 십자가가 세워졌고, 그것들은 순례 중심지가 되었다. 토마스는 교사, 지도자 또는 장로를 임명했다.
토마스는 다음으로 인도 남동부의 코로만델 해안으로 육로로 가서 현재 마드라스 지역에서 사역했으며, 그곳에서 지역 왕과 많은 사람들이 개종했다. 한 전설에 따르면, 그는 거기에서 말라카를 거쳐 중국으로 가서 그곳에서 얼마 동안 머물다가 마드라스 지역으로 돌아왔다.[12] 그의 사역은 브라만들의 분노를 샀는데, 그들은 기독교가 그들의 사회 계급 제도를 훼손할까 두려워했다. ''토마스 행전''의 시리아어 버전에 따르면, 마일라포르의 지역 왕인 마즈다이는 서기 72년경에 그를 사형에 처했다. 왕은 토마스가 근처 산으로 끌려가 기도를 허락받은 후 분노한 브라만이 휘두른 창에 찔려 돌에 맞아 죽도록 명령했다.[9][11]
기독교는 서기 1세기(72년)에 스리랑카에 전래되었다. 아마도 사도 토마스가 인도를 방문한 이후일 것이다.[13] 아누라다푸라 십자가는 이 섬에서 기독교를 나타내는 고대 기록된 상징이다.[14]
3. 네스토리우스파의 동방 전파 (5세기~14세기)
당나라 시대인 7세기에는 알로펜의 선교로 경교가 전래되었다.[21] 최초로 문서화된 기독교 도입은 당나라 (618–907) 때였다. 635년 알로펜 사제의 지도 하에 기독교 선교단이 도착했고, 이들은 교회를 설립할 수 있도록 황제의 칙령을 받았다.[21] 중국에서 이 종교는 '로마의 광명교'(大秦景教 ''Dàqín Jǐngjiào'')로 알려졌다. '대진'은 로마와 근동을 의미하는 중국어 용어였지만, 서방에서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라틴 기독교인들에게 이단으로 여겨졌다.
781년 장안에 경교비가 건립되어 당나라 내 기독교 공동체의 번성을 보여주었다.[21] 698–699년에는 불교도들로부터, 713년에는 도교도들로부터 기독교에 대한 반대가 있었지만, 기독교는 계속 번성하여 781년 장안에 경교비가 세워졌으며, 이 비에는 황제의 지원을 받은 중국 기독교의 150년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비문에는 중국 전역에 기독교 공동체가 번성했다는 내용이 있지만, 이 비문과 몇몇 다른 단편적인 기록 외에는 그들의 역사에 대해 알려진 바가 비교적 적다. 이후 몇 년 동안 다른 황제들은 종교적으로 관대하지 않았다. 845년, 중국 당국은 외국 종교에 대한 금지령을 시행했고, 기독교는 13세기 몽골 제국 시대까지 중국에서 쇠퇴했다.[21][22]
원나라 시대에는 몽골 제국의 종교적 관용으로 기독교가 재부흥했다. 몽골인들은 대부분의 종교에 대해 매우 관대했으며, 여러 종교를 동시에 후원했다. 7세기경부터 개종을 통해 네스토리우스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23] 케레이트,[24] 나이만, 메르키트, 카라 키타이(불교와 함께 기독교를 실천)와 같은 여러 몽골 부족들이 기독교인이었다.[25][26]
칭기즈 칸은 샤머니즘 신자였지만 다른 종교에 대해 관대했다.[27] 그의 아들들은 케레이트 씨족의 기독교 공주들과 결혼했는데,[27] 소르칵타니 베키[28]와 도쿠즈 하툰이 그 예이다.
3. 1. 네스토리우스파의 분리와 동방 교회
410년, 사산 제국의 황제는 페르시아 교회 지도자들을 셀레우키아 시노드에 소집했다. 황제의 목적은 셀레우키아-크테시폰의 카톨리코스를 제국 내 기독교 소수 종교의 지도자로 임명하고, 페르시아 제국 전역에서 그들의 선행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시노드는 황제의 뜻을 받아들였다.[1]
424년, 페르시아의 주교들은 카톨리코스 다디소의 지도 아래 회의를 열어 징계 또는 신학적 문제에 대해 다른 권력, 특히 로마 제국 내 어떤 교회 회의에도 언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 시노드에서 안티오키아 교구와 로마(비잔틴) 황제 치하의 서(西) 시리아 교회의 공식적인 분리가 발생했다.[1]
동방 기독교의 발전은 서방과의 분리를 지속했는데, 이는 431년 에페수스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던 시리아의 주교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으로 기소된 사건과 같은 요인들에 의해 촉진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자신의 기독교 교리를 설파한 혐의를 받았으며,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비잔틴 제국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다른 종교 및 정치 기관들이 그를 보호했다. 동방 기독교는 분리되어 동방 교회를 형성했지만, 일부 역사가들은 많은 동방 기독교인들이 네스토리우스가 설교한 교리를 따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포괄적인 용어인 네스토리우스 교회로 지칭하기도 한다.[1]
3. 2. 중앙아시아와 중국
사산 제국의 박해와 기독교인들의 동방 이주는 튀르크 유목민들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개종으로 이어졌다.[19] 7세기부터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인 튀르크족이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했는데, 781-2년과 1007년에 대규모 개종이 기록되었으며, 이때 20만 명의 튀르크족과 몽골족이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한다.[19] 튀르크족 킵차크 역시 조지아인들과 동맹을 맺으면서 조지아인의 제안에 따라 기독교로 개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수가 조지아 왕 다비드 4세의 요청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 1120년부터 킵차크 민족 기독교 교회와 영향력 있는 성직자가 있었다.[20]
당나라 시대인 7세기에는 알로펜의 선교로 경교가 전래되었다.[21] 기독교는 더 일찍 중국에 존재했을 수도 있지만, 최초로 문서화된 도입은 당나라 (618–907) 때였다. 알로펜 (페르시아, 시리아 또는 네스토리우스파로 다양하게 묘사됨) 사제의 지도 하에 기독교 선교단이 635년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교회를 설립할 수 있도록 황제의 칙령을 받았다.[21] 중국에서 이 종교는 '로마의 광명교'(大秦景教 ''Dàqín Jǐngjiào'')로 알려졌다. '대진'은 로마와 근동을 의미하는 중국어 용어였지만, 서방의 관점에서는 네스토리우스 기독교는 라틴 기독교인들에게 이단으로 여겨졌다.
781년에는 장안에 경교비가 건립되어 당나라 내 기독교 공동체의 번성을 보여주었다.[21] 698–699년에는 불교도들로부터, 713년에는 도교도들로부터 기독교에 대한 반대가 일어났지만, 기독교는 계속 번성하여 781년에는 장안에 경교비가 세워졌으며, 이 비에는 황제의 지원을 받은 중국 기독교의 150년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비문에는 중국 전역에 기독교 공동체가 번성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지만, 이 비문과 몇몇 다른 단편적인 기록 외에는 그들의 역사에 대해 알려진 바가 비교적 적다. 이후 몇 년 동안 다른 황제들은 종교적으로 관대하지 않았다. 845년, 중국 당국은 외국 종교에 대한 금지령을 시행했고, 기독교는 13세기의 몽골 제국 시대까지 중국에서 쇠퇴했다.[21][22]
원나라 시대에는 몽골 제국의 종교적 관용으로 기독교가 재부흥했다. 몽골인들은 대부분의 종교에 대해 매우 관대했으며, 일반적으로 여러 종교를 동시에 후원했다. 그들은 7세기경부터 개종을 통해 네스토리우스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23] 케레이트,[24] 나이만, 메르키트, 그리고 상당 부분 카라 키타이 (불교와 함께 기독교를 실천했다)와 같은 여러 몽골 부족들이 기독교인이었다.[25][26]
칭기즈 칸(1162–1227)은 샤머니즘 신자였지만 다른 종교에 대해 관대함을 보였다.[27] 그의 아들들은 케레이트 씨족의 기독교 공주들과 결혼했는데,[27] 예를 들어 소르칵타니 베키[28]와 도쿠즈 하툰이 있다. 도쿠즈 하툰은 토그릴 칸의 손녀이자 열정적인 기독교인으로 칸의 궁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이슬람에 대한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고, 모든 종파의 기독교인들을 돕는 데 열심이었다.[29] 칭기즈 칸의 손자인 몽케 칸(1205–1259)의 통치 하에서 기독교인들이 주요 종교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몽케는 어머니를 기억하며 그들에게 특별한 호의를 보였다.[30]
4. 가톨릭 선교와 동서 교류 (13세기~19세기)
13세기에서 19세기 사이 가톨릭 선교는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몽골 제국은 종교에 관대하여 여러 종교를 후원했다. 13세기 몽골 제국이 확장되면서 서방 세계와 접촉했고, 프랑코-몽골 동맹을 맺으려는 시도도 있었다. 루이 9세는 윌리엄 드 루브루크를 몽골에 보내 개종을 시도했고, 교황 니콜라오 4세는 몬테 코르비노의 요한을 중국에 파견하여 선교 활동을 벌였다.[34] 요한의 영향으로 옹구트족 등 일부 몽골인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도 했다.[34] 그러나 원나라가 멸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기독교인들은 추방되었다.[34]
1054년 동서교회 분열 이후 동서 교회를 재결합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 간의 연합이 선포되기도 했지만, 지역 성직자와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31] 비잔틴 제국도 로마 가톨릭 교회와 재결합을 시도했으나, 제2 리옹 공의회에서 맺은 연합은 국내 반대로 인해 불안정했다.
16세기와 17세기 예수회는 중국과 서방 세계 간의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34]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마테오 리치 등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활동하며 황제의 조언자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18세기와 19세기 중반에는 비밀리에 활동해야 했다.[34]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세부 도착으로 필리핀에서 기독교 개종이 시작되었다.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의 원정대는 세부와 마닐라 등을 정복하며 선교를 진행했다.[34] 민다나오와 코르디예라 행정 구역 등 일부 지역은 20세기 초까지 서방의 식민화에 저항하며 고유 신앙을 지켰다.[34]
북수마트라의 바루스에는 12세기경 성 토마스 기독교도와 관련된 교회가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다.[35] 16세기 포르투갈은 말라카 술탄국을 점령했지만, 이는 무슬림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34] 19세기 스탬퍼드 래플스에 의해 파견된 선교사들은 바탁족이 새로운 종교에 긍정적이라고 보았지만, 미국 해외 선교 위원회의 선교사들은 살해당했다.[36][34] 이후 루트비히 잉워르 노멘센이 이끄는 라인 선교 협회는 토바 바탁족 등을 개종시키는 데 성공했다.[34]
조선에서는 이승훈이 중국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하여 한국 천주교가 자생적으로 시작되었다.[37] 조선 정부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한국 천주교는 성장했으며, 1984년에는 순교자 103명이 시성되었다.[37]
4. 1. 몽골 제국과의 관계
몽골인들은 대체로 대부분의 종교에 대해 매우 관대했으며, 여러 종교를 동시에 후원하기도 했다. 7세기경부터 네스토리우스 기독교를 받아들인 케레이트,[24] 나이만, 메르키트와 같은 여러 몽골 부족들이 기독교인이었다.[25][26]13세기 몽골 제국이 유럽과 팔레스타인으로 확장되면서 몽골과 서방 세계 사이에 접촉이 이루어졌고, 프랑코-몽골 동맹을 결성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253년, 루이 9세는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윌리엄 드 루브루크를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으로 보내 몽골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했다. 윌리엄은 1254년 몽케 칸의 궁정을 방문하여 여러 종교 대표들이 참여하는 토론을 벌였고, 같은 해 8월에 몽케가 루이 9세에게 보낸 답신을 가지고 돌아갔다.[33][9]
1289년, 교황 니콜라오 4세는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몬테 코르비노의 요한을 중국으로 보냈다. 1294년에 중국에 도착한 요한은 칸발리크에 정착하여 최초의 가톨릭 선교사로 활동하며 몽골어로 신약성서와 시편을 번역하고, 교회를 건설하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1305년까지 6,000명의 세례 신자를 보고했다.[34] 요한의 영향으로 옹구트족과 같은 많은 몽골인들이 동방 네스토리우스 교회에서 가톨릭으로 바꾸었다.[34]
몬테 코르비노의 요한 사망 이후, 1336년 토곤 테무르는 교황 베네딕토 12세에게 사절단을 보내 새로운 영적 지도자를 요청했다. 1338년, 교황은 총 50명의 성직자를 베이징으로 보냈는데, 그중 마리뇰리의 요한은 1342년에 칸발리크에 도착하여 1347년까지 머물렀다.[34]
그러나 몽골이 세운 원나라는 쇠퇴하여 1368년 명나라에 의해 전복되었다. 1369년까지 모든 기독교인이 추방되었다.[34]
4. 2. 동서 교회 재결합 시도
1054년 동서교회 분열 이후, 여러 세기에 걸쳐 동서 기독교를 재결합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1198년,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의 총대주교인 그리고르 6세 아피라트에 의해 로마 가톨릭 교회와 아르메니아 교회 간의 연합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지역 성직자와 주민들의 반대로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31] 1441년, 시스의 아르메니아 총대주교 그리고르 9세 무사베키안츠는 피렌체 공의회에서 아르메니아 교회와 라틴 교회의 연합을 선포했지만, 키라코스 1세 비라페치 아래 아르메니아 분열로 이어져 에치미아진에 총대주교좌를 설치하고 시스를 소외시켰다.[31]
화해를 돕기 위해 수많은 로마 가톨릭 교회 선교단이 킬리키아 아르메니아로 파견되었다. 프란체스코회가 이러한 선교를 담당했다. 윌리엄 오브 루브루크는 1254년에, 존 오브 몬테코르비노는 1288년에 킬리키아를 방문했다.[32] 아르메니아 왕 헤툼 2세(1266–1307)는 여러 차례 퇴위한 후 스스로 프란체스코회 수도사가 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 재결합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1272년, 몽테코르비노의 요한은 비잔틴 제국 미카엘 8세 팔레올로고스 황제로부터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에게,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재결합을 협상하도록 위임을 받았다. 1274년 제2 리옹 공의회에서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 간의 불안정한 연합이 서명되었다. 미카엘 8세의 양보는 국내에서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고, 감옥은 연합 반대자들로 가득 찼다.
4. 3.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선교

16세기와 17세기 예수회의 선교 활동은 중국과 서방 세계 간의 지식, 과학, 문화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오늘날 중국 사회의 기독교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가톨릭과 개신교 선교가 크게 발전하기 시작한 19세기까지, 중국에 파견된 예수회는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선교사였다. 나바라 왕국 출신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이탈리아인 마테오 리치는 저명한 예수회 선교사였다. 예수회 선교단은 전성기에 황제의 가장 신뢰받는 조언자로 여겨졌으며, 황실 정부에서 여러 요직을 맡았다.[34] 그러나 18세기와 19세기 중반 사이에 거의 모든 서양 선교사들은 비밀리에 활동해야 했다.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세부에 도착한 것은 스페인이 원주민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마젤란은 세부의 라자 후마본을 만났는데, 후마본에게는 탐험가나 그의 부하 중 한 명이 치료해 줄 수 있었던 아픈 손자가 있었다. 감사함에 후마본과 그의 아내는 스스로를 "카를로스"와 "후아나"로 개명했으며, 그의 신하 약 800명도 세례를 받았다. 이후 인근 막탄 섬의 군주 라푸라푸는 그의 부하들에게 마젤란을 살해하도록 했고, 불운한 스페인 원정을 격퇴했다.[34]
1564년,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 루이스 데 벨라스코는 바스크인 탐험가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를 필리핀으로 보냈다. 아우구스티누스회 수사이자 세계 일주 항해사인 안드레스 데 우르다네타가 포함된 레가스피의 원정대는 현재 세부 시티를 성스러운 아기의 후원 아래 세웠고, 이후 1571년에는 마닐라 왕국, 1589년에는 인근 톤도 왕국을 정복했다. 식민주의자들은 1898년까지 현재 필리핀의 나머지 지역을 탐험하고 정복하면서 선교를 진행했다. 단, 늦어도 서기 10세기부터 필리핀의 이슬람이 존재했던 민다나오의 일부와 코르디예라 행정 구역은 예외였는데, 이곳의 이고로트족을 비롯한 다수의 산악 부족은 20세기 초 미국의 도착까지 서방 식민지화에 저항하며 고대 신앙을 유지했다.[34]
12세기 기독교 이집트 기록에 따르면, 인도 상인들이 자주 왕래했던 북수마트라(North Sumatra) 서해안의 무역 거점인 바루스(Barus)에 교회가 세워졌으며, 이는 인도 성 토마스 기독교도(Saint Thomas Christians)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35]
1509년, 포르투갈은 부를 얻기 위해 말라카 술탄국(Malacca Sultanate)(오늘날 말레이시아)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고아 정복(Portuguese Conquest of Goa (1510))과 다른 무슬림-기독교 분쟁으로 인해 말라카 무슬림들은 포르투갈 기독교인들이 적대적인 존재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결과 발생한 말라카 함락(Capture of Malacca (1511))은 기독교 포르투갈에 대항하는 무슬림 연대감을 강화한 것으로 여겨지며, 무슬림 아체(Aceh)와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으로부터 포르투갈에 대한 지속적인 저항이 이어졌다. 포르투갈은 포르투갈 말라카(Portuguese Malacca) 자체에 몇몇 교회를 세웠지만, 인근 지역에서의 복음 전파 영향은 기독교 전파에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이었을 것이다.[34]
1824년, 수마트라가 일시적으로 영국의 통치를 받던 시기에 스탬퍼드 래플스(Stamford Raffles)에 의해 첫 번째 선교사들이 파견되었다. 그들은 바탁족이 새로운 종교 사상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개종을 시도하는 첫 번째 선교 단체(이슬람교 또는 기독교)에 쉽게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고 관찰했다.[36]
미국 해외 선교 위원회(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의 두 번째 선교는 1834년, 외부의 간섭에 저항하는 바탁족에 의해 두 선교사가 살해당하면서 비참하게 끝났다.[34]
북수마트라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는 앙콜라(Angkola)족(바탁족)이 거주하는 시피로크(Sipirok)에 세워졌다. 네덜란드 에르멜로(Ermelo, Netherlands)의 한 독립 교회에서 온 세 명의 선교사들이 1857년에 도착했고, 1861년 10월 7일 에르멜로 선교사 중 한 명이 반자르마신 전쟁의 결과로 칼리만탄에서 최근 추방된 라인 선교 협회와 합류했다.[34]
이 선교는 독일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1862년부터 1918년 사망할 때까지 대부분의 생애를 북수마트라에서 보낸 루트비히 잉워르 노멘센(Ludwig Ingwer Nommensen)이 이끄는 효과적인 전도 전략을 채택하여 시말룽운(Simalungun)과 토바 바탁족(Batak Toba) 그리고 소수의 앙콜라(Angkola)족을 성공적으로 개종시켰다.[34]
4. 4. 한국 천주교의 자생적 발전
이승훈은 1784년 중국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귀국하여, 여러 종교 서적을 가져와 많은 동포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로써 한국 천주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836년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성직자들이 사역을 위해 한국에 도착하기 전까지, 한국 천주교는 공식적인 선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존속했다.[37]19세기 동안 천주교는 조선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조선 정부는 천주교가 조상 숭배를 우상 숭배로 간주하여 거부하는 것을 국가의 문화적 기반에 대한 도전으로 여겼다. 수 세기에 걸친 박해로 수천 명의 순교자가 발생했으며, 그 중 103명은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시성된 103위 중에는 1845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1846년에 순교한 최초의 한국인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도 포함된다.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한국 천주교는 계속 성장했다. 1831년에 한국 대목구가 설립되었고, 이후 교회 구조가 확장되어 1962년에 현재와 같이 3개의 관구와 여러 교구로 구성된 체계가 갖춰졌다.
5. 아시아 기독교의 현재 (20세기~현재)
20세기 초, 아시아의 기독교는 여러 도전에 직면했지만, 동시에 성장과 발전의 기회를 맞이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아시아 국가들이 독립하면서 기독교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가장 큰 기독교 국가 중 하나이며, 대한민국의 기독교 인구 비율은 23%로 무종교 다음으로 높다. 싱가포르는 19%, 레바논은 41%의 기독교 인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시아의 많은 국가에서 기독교는 여전히 소수 종교이다. 인도는 2.3%, 일본은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7%이다. 중국의 기독교 인구는 3%에서 5% 사이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통계는 확인하기 어렵다.
아시아 기독교는 종교 간의 대화와 협력을 증진하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봉사에 힘쓰며, 복음의 토착화와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5. 1. 국가별 기독교 현황
| 국가 또는 지역 | 기독교인 비율 | 총 인구 | 기독교인 인구 | 지배적인 종교적 소속, 총 인구 비율 |
|---|---|---|---|---|
| 아르메니아 | 98.7% | 3,299,000 | 3,256,113 |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
| 동티모르 | 98% | 1,108,777 | 1,086,601 | 가톨릭교, 97% |
| 필리핀 | 85.3%[39] | 109,035,343 | 92,746,021 | 가톨릭교, 78.8%; 개신교, 3.5% |
| 조지아 | 88.6% | 4,636,400 | 4,107,850 | 조지아 정교회, 83.9% |
| 키프로스 | 79.3% | 792,604 | 628,535 | 키프로스 정교회, 70% |
| 러시아 | 73.6%[40][41][42][43] | 142,200,000 | 58,800,000–120,000,000[44][45][46] | 러시아 정교회, 70% |
| 레바논 | 41% | 4,200,000 | 1,800,000 | 시아 이슬람 및 수니 이슬람, 각각 27% |
| 카자흐스탄 | 25% | 16,536,000 | 4,134,000 | 수니 이슬람, 69%–70% |
| 대한민국 | 23% | 51,709,098 | 14,375,990 | 무종교 (민간 신앙 또는 유교 포함, 60%) |
| 싱가포르 | 19% | 5,638,700 | 1,060,016 | 불교 (다양한 종파), 31.1%[47] |
| 쿠웨이트 | 17.9% | 4,621,638 | 837,87 (2020)[48] (259–400명의 기독교 쿠웨이트 시민 포함)[49] | 수니 이슬람, 70% |
| 키르기스스탄 | 7% | 5,587,443 | 949,865 | 수니 이슬람, 86.3% |
| 바레인 | 14.5% | 718,306 | 180,000[50] (기독교 바레인 시민 1,000명 포함)[51] | 시아 이슬람, 66–70% |
| 카타르 | 13.8% | 928,635 | 240,000[51] | 와하비 이슬람 (살라피 이슬람), 72.5% |
| 아랍에미리트 | 12.6% | 4,621,399 | 940,000[51] | 수니 이슬람, 거주민의 65%, 시민의 85% |
| 홍콩 | 11.7% | 7,122,508 | 833,333 | 무종교, 유교, 불교, 도교 또는 중국 민간 신앙, 57% – 80% |
| 인도네시아 | 10.47% | 282,477,584 | 29,579,316[52] | 수니 이슬람, 83% |
| 브루나이 | 10% | 381,371 | 40,000[51] | 수니 이슬람, 81% |
| 시리아 | 10% | 19,747,586 | 1,974,759 | 수니 이슬람, 74% |
| 말레이시아 | 9.10% | 33,938,222 | 3,091,000 | 수니 이슬람, 63% |
| 마카오 | 9% | 460,823 | 41,474 | 무종교, 대승 불교 또는 중국 민간 신앙, 75% 이상 |
| 투르크메니스탄 | 9% | 4,997,503 | 449,775 | 이슬람 (주로 수니 이슬람), 89% |
| 우즈베키스탄 | 3% | 28,128,600 | 2,531,574 | 이슬람 90% |
| 베트남 | 8.3% | 95,500,000 | 7,926,500 | 무종교, 70%[53] |
| 스리랑카 | 8% | 21,128,773 | 1,690,302 | 상좌부 불교, 70% |
| 오만 | 4.3% – 6.5% | 3,311,640 | 120,000[54][55] – 180,000[51] | 이바디 이슬람, 75% |
| 요르단 | 6% | 6,198,677 | 371,921 | 수니 이슬람, 90% |
| 아제르바이잔 | 4.8% | 8,845,127 | 424,566 | 시아 이슬람, 81% |
| 대만 | 4.5% | 22,920,946 | 1,031,443 | 불교 (다양한 종파), 35.1% |
| 미얀마 (버마) | 6.2% | 47,758,224 | 1,910,329 | 상좌부 불교, 89% |
| 중국 | 3% – 5% | 1,322,044,605 | 39,661,338 – 67,070,000[56] | 무종교, 60% – 70% |
| 팔레스타인 | 3% | 4,277,000 | 128,310 | 수니 이슬람, 98% |
| 인도 | 2.3% | 1,147,995,226 | 26,403,890 | 힌두교, 79.8% |
| 몽골 | 2.1% | 2,996,082 | 62,918 | 티베트 불교, 53% |
| 이스라엘 | 2% | 7,112,359 | 161,000[57] | 유대교 (다양한 종파), 75.4% |
| 일본 | 2% | 127,920,000 | 2,558,400 | 신토, 불교/무종교, 70% – 84%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1.7% | 25,368,620 | 431,266 | 무종교, 64.3% |
| 라오스 | 1.5% | 6,677,534 | 100,163 | 상좌부 불교, 67% |
| 파키스탄 | 1.5% | 167,762,049 | 2,516,431 | 수니 이슬람, 80% – 95% |
| 네팔 | 1.4% | 29,535,000 | 413,900 | 힌두교, 80.6% |
| 캄보디아 | 1% | 13,388,910 | 133,889 | 상좌부 불교, 95% |
| 타지키스탄 | 1% | 4,997,503 | 499,750 | 수니 이슬람, 93% |
| 부탄 | 0.9% | 682,321 | 12,255[58] | 금강승 불교, 67% – 76% |
| 태국 | 1.17% | 65,493,298 | 787,589 | 상좌부 불교, 94.5% |
| 이란 | 0.4% | 70,472,846 | 300,000 | 시아 이슬람, 90% – 95% |
| 방글라데시 | 0.3% | 153,546,901 | 460,641 | 수니 이슬람, 89.7% |
| 튀르키예 | 0.2% | 74,724,269 | 149,449 – 310,000[59] | 수니 이슬람, 70–80% |
| 예멘 | 0.17% | 23,013,376 | 3,000 – 41,000[54] | 수니 이슬람, 53% |
| 아프가니스탄 | 0.02% – 무시할 정도 | 32,738,775 | 500 – 8,000[60] | 수니 이슬람, 80% – 85% |
| 이라크 | 0.003% | 46,523,657 | ~150,000 | 시아 이슬람, 60%–65% |
| 몰디브 | 0% – 무시할 정도 | 379,174 | 300 – 1,400[61] | 수니 이슬람, 100% |
| 사우디 아라비아 | 0% – 무시할 정도 | 23,513,330 | 외국인 기독교인은 약 1,200,000명 (4.4%)[62] | 수니 이슬람, 85% – 90% |
위 목록에 언급된 국가는 아시아의 유엔 지리 계획에 언급된 국가 및 영토 목록을 따른다. 압하지야와 같이 인정되지 않은 지역은 이 목록에 언급되지 않는다. 위의 표에 포함된 데이터는 관련 기사에 출처가 있는 경우 해당 출처를 따르고, 그렇지 않은 경우 CIA 월드 팩트북을 따른다. 국가별 기독교인 수는 해당 비율을 총 인구에 적용한 결과이다. 이 결과는 실제 집계가 가능한 경우 실제 집계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국가별 주요 종교 및 영적 전통 목록은 주요 분파를 언급한다. 예를 들어, 예멘의 경우, 수니파 이슬람교가 전체 인구의 53%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나머지 전체 인구의 47% 중 45%가 시아파 이슬람교 분파에 속한다는 점은 언급되지 않는다.
5. 2. 아시아 기독교의 과제와 전망
아시아 기독교는 종교 간 대화와 협력을 증진하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봉사에 힘쓰며, 복음의 토착화와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참조
[1]
웹사이트
The Global Religious Landscape: Christians
http://www.pewforum.[...]
[2]
PDF
Status-of-Global-Christianity-2021
https://www.gordonco[...]
2022-03
[3]
문서
Acts xi
[4]
성경
Acts
[5]
웹사이트
Saint Nina Orthodox Christian Mission :: Vancouver, BC, Canada
https://web.archive.[...]
2008-01-03
[6]
서적
Religions of the Silk Road
Palgrave Macmillan
2010
[7]
서적
L'Asie Centrale
[8]
서적
Religions of the Silk Road
[9]
서적
India and The Apostle Thomas
[10]
웹사이트
Thomas the Apostole
https://web.archive.[...]
2010-04-25
[11]
서적
"The Acts of Thomas" in ''The Apocryphal New Testament''
Oxford
1966
[12]
서적
Breviary of the Mar Thoma Church in Malabar
[13]
웹사이트
A Brief History Of Christianity In Sri Lanka
https://www.colombot[...]
2013-09-20
[14]
웹사이트
Features {{!}} Online edition of Daily News – Lakehouse Newspapers
http://archives.dail[...]
[15]
웹사이트
Mar Aprem Metropolitan Visits Ancient Anuradhapura Cross in Official Trip to Sri Lanka {{!}} Assyrian Church News
http://news.assyrian[...]
2015-02-26
[16]
서적
L'Asie Centrale
[17]
서적
L'Asie Centrale
[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L'Asie Centrale
[21]
서적
[22]
서적
[23]
서적
The Silk Road
[24]
서적
[25]
서적
Empire
[26]
서적
Les Croisades, origines et conséquences
[27]
서적
[28]
인용구
[29]
서적
[30]
서적
[31]
서적
[32]
서적
[33]
서적
Empire
[34]
서적
[35]
서적
Ensiklopedi Gereja
2005
[36]
서적
History of Christianity in Indonesia
[37]
서적
The Liturgy of the Hours Supplement
Catholic Book Publishing Co.
1992
[38]
논문
Believers in Christ from a Muslim Background: A Global Census
https://www.academia[...]
2015-11-20
[39]
웹사이트
Religious Affiliation in the Philippines (2020 Census of Population and Housing)
https://psa.gov.ph/c[...]
2023-05-26
[40]
웹사이트
Global Christianity – A Report on the Size and Distribution of the World's Christian Population
http://www.pewforum.[...]
Pew Research Center
2011-12-19
[41]
웹사이트
VTSIOM
http://wciom.ru/inde[...]
[42]
웹사이트
Ipsos MORI
http://www.fgi-tbff.[...]
[43]
웹사이트
Public Opinion Foundation
http://fom.ru/obshch[...]
[44]
웹사이트
Levada Center
http://www.levada.ru[...]
[45]
문서
Members of the Russian Orthodox Church; 4% — 5,900,000 people identifying as Christians without belonging to any church; 1.5% — 2,100,000 people believing in Orthodox Christianity without belonging to any Orthodox church or belonging to non-Russian churches; 0.2% — 400,000 Old Believers
[46]
웹사이트
Главная страница проекта "Арена" : Некоммерческая Исследовательская Служба "Среда"
http://sreda.org/are[...]
[47]
웹사이트
20% of Singapore residents have no religion, an increase from the last population census
https://www.channeln[...]
2021-06-17
[48]
웹사이트
PACI Statistics
http://stat.paci.gov[...]
2019-02-01
[49]
웹사이트
Nationality By Religion and Nationality
http://stat.paci.gov[...]
Government of Kuwait
2015-12-06
[50]
웹사이트
2010 Census Results
http://www.census201[...]
2012-06-15
[51]
웹사이트
Global Christianity – A Report on the Size and Distribution of the World's Christian Population
https://assets.pewre[...]
Pew Research Center
[52]
웹사이트
Map of the distribution of religions 2024
https://gis.dukcapil[...]
2024-08-10
[53]
웹사이트
Average intelligence predicts atheism rates across 137 nations
http://davesource.co[...]
2018-10-22
[54]
뉴스
Guide: Christians in the Middle East
https://www.bbc.com/[...]
[55]
웹사이트
Operation World
http://www.24-7praye[...]
[56]
웹사이트
Global Christianity
http://www.pewforum.[...]
Pewforum.org
2012-08-17
[57]
뉴스
CBS: 161,000 Christians live in Israel
http://www.ynetnews.[...]
[58]
웹사이트
Bhoutan, Aide à l'Église en détresse, "Appartenance religieuse".
https://archive.toda[...]
[59]
웹사이트
Global Christianity – A Report on the Size and Distribution of the World's Christian Population
https://assets.pewre[...]
Pew Research Center
[60]
웹사이트
International Religious Freedom Report 2021
https://www.state.go[...]
USSD Bureau of Democracy, Human Rights, and Labor
2010-03-06
[61]
서적
The Oxford Handbook of Christianity in Asia
Oxford University Press
[62]
웹사이트
International Religious Freedom Report 2008 – Saudi Arabia
https://2001-2009.st[...]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