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로마-페르시아 전쟁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로마-페르시아 전쟁은 로마 공화정 시기부터 비잔티움 제국 시기까지 로마와 파르티아, 사산 왕조 페르시아 간에 벌어진 일련의 전쟁을 포괄한다. 이 전쟁들은 아르메니아의 지배권을 두고 벌어진 경쟁, 양국의 영토 확장, 그리고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갈등으로 인해 발생했다. 전쟁은 로마와 페르시아 양국 모두에게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입혔으며, 특히 마지막 전쟁은 양국을 약화시켜 아랍 제국의 침공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로마는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기병 전술에 대응하기 위해 중장기병의 중요성을 인식했고, 사산 왕조와의 전쟁에서는 공성전과 방어선 구축에 힘썼다. 이러한 전쟁의 역사적 기록은 로마와 그리스, 페르시아 측의 기록을 통해 전해지며, 전쟁의 전략과 전술, 그리고 양국의 사회와 문화에 미친 영향을 보여준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지정학적 경쟁 - 시리아 내전
    시리아 내전은 2011년 아사드 정권에 대한 반정부 시위에서 시작되어 무력 분쟁으로 확대, 다수 국가 개입과 극단주의 세력 부상으로 국제적인 대리 전쟁 양상을 띠며 수많은 인명 피해와 난민을 발생시켰으나, 2024년 반군 공세로 아사드 정권이 붕괴되며 종식되었다.
  • 지정학적 경쟁 - 군비 경쟁
    군비 경쟁은 국가 간 군사력 증강 경쟁으로, 전쟁의 원인이 되거나 국제 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며, 냉전 시대 핵무기 경쟁이나 최근 동아시아 군사적 긴장 고조와 자율 무기 시스템 개발 경쟁 등의 양상을 보인다.
로마-페르시아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분쟁 개요
로마-페르시아 전쟁 발생 위치
로마-페르시아 전쟁 발생 위치
기본 정보
분쟁 명칭로마-페르시아 전쟁
다른 이름로마-이란 전쟁 (Roman–Iranian Wars, Roman–Persian Wars)
기간기원전 54년 – 서기 628년 ()
장소메소포타미아
시리아
남부 레반트
이집트
트란스캅카스
아트로파테네
소아시아
발칸 반도
에게 해
결과전쟁 이전 상태로 복귀
교전 세력
교전국 1 (기원전 54년 – 628년)기원전 54–27년: 로마 공화정
기원전 27년–224년: 로마 제국
224–395년: 로마 제국
395–628년: 비잔티움 제국
교전국 1 동맹/클라이언트알란
알바니아
아르메니아
악숨
카파도키아
콤마게네
갈라티아
게르만족
가산족
고트족
하트라
헤룰리족
이베리아
하자르족
킨다
라지카
나바테아
오스로에네
팔미라
폰토스
소페네
차니
서돌궐
교전국 2 (기원전 54년 – 628년)기원전 54–27년: 파르티아 제국
기원전 27년–224년: 파르티아 제국
224–395년: 사산 왕조
395–628년: 사산 왕조
교전국 2 동맹/클라이언트아바스기아
아디아베네
알바니아
아르메니아
아바르
콤마게네
다일람족
하트라
힘야르
이베리아
유대인
라흠족
라지카
아트로파테네
오스로에네
폼페이우스
사비르족
스크라베니
시오니테스
지휘관
로마 측 지휘관크라수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네로
트라야누스
루키우스 베루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
마크리누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고르디아누스 3세
발레리아누스
발리스타
카루스
갈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2세
율리아누스
요비아누스
발렌스
아나스타시우스 1세 디코루스
유스티니아누스
티베리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
마우리키우스
포카스
헤라클리우스
로마 측 동맹/클라이언트히르카누스 2세
파사엘
헤로데
아르타바스데스 2세
티그라네스 6세
안티오쿠스 4세
폴레몬 2세
칼키스의 아리스토불루스
파르타마스파테스
사나트루크 2세
아르샤크 2세 (아르메니아)
무셰그 1세 마미코니안
헤룰리족 파라스
오다에나투스
라지카의 구바제스 1세
이베리아의 바크탕 1세
자발라 4세 이븐 알-하리스
라지카의 구바제스 2세
라지카의 차트 1세
알-하리스 이븐 자발라
알-문디르 3세 이븐 알-하리스
지에벨
페르시아 측 지휘관수레나
오로데스 2세 (파르티아)
아르타바누스 3세 (파르티아)
볼로가세스 1세 (파르티아)
오스로에스 1세
시나트루케스 2세
볼로가세스 4세
아르다시르 1세
샤푸르 1세
나르세스
샤푸르 2세
바흐람 5세
야즈데게르드 2세
카바드 1세
호스로 2세
바흐람 6세
페르시아 측 동맹/클라이언트퀸투스 라비에누스
마타티아스 안티고노스 2세
아르타바스데스 1세
티리다테스 1세
모노바주스 2세 (아디아베네)
메하라페스 (아디아베네)
미리안 3세
'암르 이븐 임루 알-카이스
그룸바테스
우르나이르 (캅카스 알바니아)
알-문디르 1세 이븐 알-누만
알-문디르 3세 이븐 알-누만
라지카의 구바제스 2세
알-문디르 4세 이븐 알-문디르
스테판 1세 (이베리아)
후시엘의 아들 느헤미야
티베리아스의 벤자민
피해 규모
로마 측 피해 규모확인 불가
페르시아 측 피해 규모확인 불가

2. 역사적 배경

제임스 하워드-존스턴에 따르면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7세기 초까지 동쪽의 경쟁자들은 제국적 야심을 품고 지역적 분열을 넘어 안정적인 영토를 구축하고 확보할 수 있었던 거대한 정치체였다."[3] 로마인과 파르티아인은 각각 셀레우코스 제국의 일부를 정복하면서 접촉하게 되었다. 기원전 3세기 동안 파르티아인들은 중앙 아시아 대초원에서 이란 북부로 이주했다. 셀레우코스에 의해 한동안 제압되었지만, 기원전 2세기에 그들은 떨어져 나와 이전 통치자들을 희생시켜가며 꾸준히 확장하여 독립 국가를 세웠고, 기원전 2세기와 기원전 1세기 초에 걸쳐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아르메니아 왕국을 정복했다.[4] 파르티아아르사케스 왕조가 통치하는 파르티아인들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으려는 여러 셀레우코스의 시도를 막아냈고, 특히 아르메니아 아르사케스 왕조, 이베리아 아르사케스 왕조, 그리고 코카서스 알바니아 아르사케스 왕조를 코카서스에 세웠다. 한편, 로마인들은 기원전 2세기 초에 안티오코스 3세를 테르모필레와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격파한 후 아나톨리아에서 셀레우코스를 몰아냈다. 기원전 64년 폼페이우스는 시리아에 남아있던 셀레우코스 영토를 정복하여 그들의 국가를 멸망시키고 로마 동부 국경을 유프라테스 강까지 진출시켜 파르티아의 영토와 맞닿게 했다.[4]

2. 1. 로마와 파르티아의 첫 만남

공화정 로마와 파르티아는 모두 셀레우코스 제국의 영토를 정복하면서 처음으로 접촉하였다. 기원전 3세기중앙아시아 초원에서 이란 북쪽으로 이주해 온 파르티아는 일시적으로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하에 놓였으나, 기원전 2세기에 독립하여 국가를 세우고 예전 지배자의 영토인 페르시아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하였다. 아르사케스 왕조가 지배하고 있던 파르티아는 여러 차례에 걸쳐 셀레우코스 제국의 반격을 물리치고 인도 대륙까지 영토를 넓혔다.[180] 한편 로마 공화국은 기원전 2세기 초에 안티오코스 3세를 물리치고, 아나톨리아반도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을 몰아내었다. 기원전 64년 폼페이우스가 시리아에서 셀레우코스를 멸망시키고 유프라테스 강까지 국경을 확장시켰을 때, 양국은 처음으로 접촉하게 되었다.[180]

로마, 파르티아 그리고 기원전 200년 셀레우코스 제국. 곧 로마인과 파르티아인 모두 셀레우코스 제국이 지배하던 영토를 침략하여 서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될 것이다.

2. 2. 로마-파르티아 관계의 시작

공화정 로마와 파르티아는 모두 셀레우코스 제국의 영토를 정복하면서 처음으로 접촉하였다. 기원전 3세기중앙아시아 초원에서 이란 북쪽으로 이주해 온 파르티아는 일시적으로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기원전 2세기에 독립하여 국가를 세우고 예전 지배자의 영토인 페르시아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하였다. 아르사케스 왕조가 지배하고 있던 파르티아는 여러 차례에 걸쳐 셀레우코스 제국의 반격을 물리치고 인도 대륙까지 영토를 넓혔다.[180] 한편 로마 공화국은 기원전 2세기 초에 안티오코스 3세를 물리치고, 아나톨리아반도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을 몰아내었다. 기원전 64년 폼페이우스가 시리아에서 셀레우코스를 멸망시키고 유프라테스 강까지 국경을 확장시켰을 때, 양국은 처음으로 접촉하게 되었다.[180]

3. 로마-파르티아 전쟁

파르티아의 서방 진출은 미트리다테스 1세 시대에 시작되어 미트리다테스 2세에 의해 부활되었는데, 그는 기원전 105년경 로마와의 동맹을 위해 술라와 협상했지만 실패했다.[5] 기원전 69년 루쿨루스가 남부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티그라네스를 공격했을 때, 그는 파라아테스 3세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개입하지 않도록 설득했다. 파르티아인들은 중립을 유지했지만, 루쿨루스는 그들을 공격하는 것을 고려했다.[6] 기원전 66-65년, 폼페이우스는 파라아테스와 합의에 도달했고, 로마-파르티아 군대는 아르메니아를 침공했지만, 곧 유프라테스 경계를 두고 분쟁이 발생했다. 마침내 파라아테스는 오스로에네의 서부 지역을 제외한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했는데, 이곳은 로마의 종속국이 되었다.[7]

로마 장군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기원전 53년에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했지만, 수레나 장군 휘하의 파르티아군에 의해 카르해 전투에서 사망했다.[8] 파르티아인들은 이듬해 시리아를 약탈했고, 기원전 51년에 대규모 침공을 감행했지만, 안티고니아 근처에서 로마군에 의해 매복에 걸려 후퇴했다.[9]

파르티아인들은 카이사르의 내전 동안 대체로 중립을 유지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와 관계를 유지했고, 폼페이우스가 패배하고 사망한 후, 파코루스 1세 휘하의 군대는 카이사르 군대에 의해 아파메아 계곡에서 포위된 폼페이우스 장군 Q. 카에킬리우스 바수스를 지원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파르티아를 상대로 원정을 준비했지만, 그의 암살로 전쟁은 면하게 되었다. 파르티아인들은 브루투스카시우스를 해방자 내전 동안 지원했고,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에서 그들을 위해 싸우기 위해 파견대를 보냈다.[10]

해방자들의 패배 이후, 파르티아인들은 기원전 40년에 로마 영토를 침공하여 시리아 속주를 점령하고 유대로 진격하여 로마의 고객국인 히르카누스 2세를 전복하고 그의 조카 안티고누스를 세웠다. 그러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벤티디우스를 파견하여 파르티아군을 격퇴하고 시리아와 유대를 회복했다. 안토니우스는 아트로파테네로 진격했으나, 파르티아의 진지에 진격을 하지 못하고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철수했다. 기원전 33년 안토니우스는 다시 아르메니아에 있었으나, 다른 일들로 인해 철수해야 했고, 그 지역 전체가 파르티아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13]

서기 1년의 파르티아, 그 부왕국들과 이웃 국가들


옥타비아누스프라아타케스는 서기 1년에 타협안을 내놓았는데, 파르티아는 아르메니아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그곳에서 로마의 ''사실상'' 보호령을 인정하기로 했다.[14] 서기 36년 아르타바누스 3세가 자신의 아들을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히려 하자 로마와의 전쟁이 발발했고, 아르타바누스 3세가 아르메니아에 대한 파르티아의 세력권 주장을 포기하면서 종결되었다.[15] 58년에 볼로가세스 1세가 자신의 형제인 티리다테스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강제로 앉히면서 다시 전쟁이 발발했다.[16] 로마군은 티리다테스를 몰아내고 카파도키아의 왕자를 그 자리에 앉혔고, 이로 인해 결과가 불분명한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로마가 티리다테스와 그의 후손들이 로마 황제로부터 왕위를 받는 조건으로 아르메니아를 통치하도록 동의하면서 서기 63년에 끝이 났다.[17]

서기 2세기에 새로운 일련의 분쟁이 시작되었고, 로마는 파르티아에 대해 일관되게 우위를 점했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114년과 115년에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하여 로마의 속주로 병합했다. 그는 파르티아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점령한 후 강을 따라 페르시아만으로 항해했다.[18] 그러나 115년에 점령된 파르티아 영토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로마 영토에서 유대교 반란이 발발하여 로마의 군사 자원이 소진되었다. 트라야누스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반군을 진압했지만, 파르타마스파테스를 속국 통치자로 왕위에 앉힌 후, 군대를 철수하고 시리아로 돌아갔다. 트라야누스는 117년에 사망했다.[19] 하드리아누스는 유프라테스 강을 직접 통제의 경계로 재설정하고, ''원상태''로 돌아가 아르메니아, 메소포타미아, 아디아베네 영토를 이전 통치자들과 속국 왕들에게 돌려주었다.[20]

로마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에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묘사한 부조


161년 볼로가세스 4세가 아르메니아에서 로마군을 격파하고 에데사를 점령했으며 시리아를 황폐화시키면서 전쟁이 다시 발발했다. 163년에 로마는 반격 작전으로 아르메니아에서 파르티아군을 격파하고 아르메니아 왕위에 유력한 후보를 앉혔다. 이듬해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하여 승리하고 165년에 크테시폰을 약탈했다. 당시 파르티아를 휩쓸던 천연두로 추정되는 전염병이 로마군으로 번져 철수를 강요받았고,[21] 이것이 안토니누스 역병의 기원이 되었다. 195~197년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이끄는 로마의 공세로 로마는 니시비스, 싱가라 주변 지역과 크테시폰을 점령했다.[22] 카라칼라 황제는 216년에 아르벨라를 약탈했다. 암살 후 그의 후계자 마크리누스는 니시비스 근처에서 파르티아군에게 패배하고, 카라칼라가 일으킨 피해에 대한 배상을 해야 했다.[23]

3. 1. 로마 공화정 대 파르티아

파르티아의 미트리다테스 1세가 파르티아의 서쪽 영토 확장을 시작했고, 그의 아들 미트리다테스 2세는 기원전 105년 경 술라에게 로마와의 동맹을 제안하였다.[181] 루쿨루스는 기원전 69년 아르메니아 남부를 침공할 때 프라아테스 3세에게 개입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파르티아는 중립으로 남았지만, 루쿨루스는 파르티아 공격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182] 폼페이우스는 프라아테스 3세와 연합하여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였으나, 곧 유프라테스 유역의 국경 문제로 분쟁을 일으켰다. 결국, 프라아테스는 로마의 속국이 된 오스로에네 서부를 제외한 메소포타미아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였다.[183]

로마는 기원전 53년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하였으나 카레 전투에서 파르티아의 수레나 장군에게 대패했다. 칸나에 전투 이후 로마군 최대의 참패로 기록된 이 전투에서 지휘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아들 푸블리우스가 전사했다.[184] 이듬해 파르티아는 시리아를 약탈하였고, 기원전 51년에는 본격적인 침공을 개시했으나, 안티고네아 근처에서 로마군의 기습을 받아 패퇴했다.[185]

티그라네스 대제 치세의 아르메니아


카이사르를 지지하는 이들과 폼페이우스를 지지하는 로마 원로원의 전통적 파벌 사이에 벌어진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에 파르티아는 대체로 중립을 유지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가 패하여 사망한 후에는 아파메아 계곡에서 농성 중이던 폼페이우스의 부하 장군 카이킬리우스 바수스를 구원하기 위해 파코루스 1세가 군사를 끌고 달려왔다. 내전이 끝난 후 카이사르는 파르티아에 대한 전쟁 계획을 세웠으나 암살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 후 이어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브루투스 사이의 내전에서 파르티아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기원전 42년 벌어진 필리피 전투에도 지원병을 보냈다.[186]

필리피 전투에서 패전한 후인 기원전 40년, 파코루스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후원자였던 퀸투스 라비에누스와 연합하여 로마 영토를 침공하였다. 시리아 속주의 로마 군단을 빠른 속도로 격파한 연합군은 티레를 제외한 시리아의 모든 해안 도시를 점령하였다. 시리아를 넘어 하스모네아 왕가가 다스리고 있던 유대 속주를 점령한 파코루스는 로마 속국 정부의 왕 히르카누스 2세를 폐위하고 히르카누스의 조카 안티고누스(재위: 기원전 40년-기원전 37년)를 왕좌에 앉혔다. 이때 로마의 동쪽 영토 전체가 파르티아의 손에 넘어가는 듯 보였다.

한편 안토니우스는 아나톨리아를 침공한 라비에누스를 상대하기 위해 벤티디우스를 파견했다. 라비에누스는 곧 벤티디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 시리아로 후퇴했고, 동맹군 파르티아가 구원병을 보냈으나 패배하여 로마군에게 사형당했다. 파르티아 또한 로마군에게 패배를 맛보고 시리아에서 후퇴하였다. 파코루스는 기원전 38년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벤티디우스에 패하여 전사하였다. 로마는 이듬해 에돔 왕가 헤로데 1세의 도움으로 유대 속주에서 안티고누스를 몰아내고 지배권을 회복하였다.[187] 시리아와 유대 속주를 회복한 안토니우스는 대군을 이끌고 아제르바이잔을 침공하였으나, 파르티아에 의해 공성병기가 파괴되고 아르메니아의 동맹군 또한 달아났다. 교착 상태에 빠진 로마군은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다. 기원전 33년 안토니우스는 다시 아르메니아로 돌아와 옥타비아누스와 파르티아에 대항하기 위해 메디아와 동맹을 시도하였으나, 로마 국내의 정치적 사정으로 후퇴하였고, 아르메니아는 파르티아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188]

3. 2. 로마 제국 대 파르티아

1년 가이우스 카이사르프라아테스 5세가 양국 간의 대략적인 합의에 도달하면서 양국 간의 긴장이 완화되었다. 합의 내용은 파르티아가 아르메니아로부터 군사를 물리고 아르메니아가 사실상 로마의 보호령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수십 년간 아르메니아에서 양국의 불화는 사그라들지 않았다.[189] 36년 아르메니아 왕좌가 공석이 되자 파르티아 왕 아르타바누스 2세가 아들 아르사케스를 왕위에 앉히려 시도함으로써 로마와의 전쟁이 촉발되었다. 그러나 아르타바누스는 로마 장군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와의 협상 끝에 아르메니아를 파르티아의 세력권에 끌어들이는 것을 포기하였다.[190] 58년에 또 다른 위기가 발생하였는데, 볼로가세스 1세가 동생 티리다테스를 강제로 아르메니아 왕좌에 앉히자 로마군이 아르메니아를 침공한 것이다.[191] 코르불로가 이끄는 로마군은 티리다테스 왕실을 전복시키고 카파도키아 왕자를 왕위에 앉혔고, 결과가 불확실한 전쟁이 계속되었다. 양국의 전쟁은 63년 티리다테스 왕가가 왕위를 계승하되, 왕위 등극을 로마 황제에게 승인받기로 합의함으로써 종료되었다.[192]

2세기 로마의 우세 속에 두 나라 사이에 새로운 갈등이 시작되었다. 114년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는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파르티아 왕 오스로에스 1세가 왕으로 세운 그의 동생을 살해하고 아르메니아를 로마의 속주로 병합하였다.[193] 로마군은 뒤이어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을 점령하고 강을 따라 페르시아만까지 남하했다.[193] 그러나 같은 해 점령지에서 파르티아인들과 유대인들의 반란이 동시에 일어나 로마군의 발목을 붙잡았다. 셀레우키아, 니시비스, 에데사에 주둔한 로마군이 주민들에게 공격받는 때를 놓치지 않고 파르티아는 로마의 주둔지를 공격하였다. 트라야누스는 메소포타미아의 반란을 제압하였으나 파르티아 출신인 파르타마스파테스를 왕좌에 앉히고 시리아로 진군하여 안티오크에 본부를 세웠다. 트라야누스는 군사를 재조직하여 파르티아로 돌아가지 못하고 117년에 사망했다.[194]

트라야누스의 원정은 로마 제국의 동방 전략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나, 후임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로마의 지배권을 유프라테스 서쪽으로 제한하는 것이 로마의 이익을 위해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발적으로 아르메니아, 메소포타미아, 아디아베네를 원래 지배자에게 돌려주고 국경을 전쟁 이전 상태로 되돌렸다.

161년 볼로가세스 3세가 아르메니아에 주둔한 로마군을 공격하여 에데사를 점령하고 시리아를 약탈하면서 전쟁이 재개되었다. 163년 로마 장군 스타티우스 프리스쿠스는 아르메니아에서 파르티아군을 몰아내고 로마에게 호의적인 속국 정부를 세웠다. 이듬해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하여 두라-에우로포스와 셀레우키아에서 파르티아를 패퇴시키고 크테시폰을 파괴했다. 그러나 당시 파르티아를 휩쓸었던 천연두로 추정되는 역병이 로마군에 번져 로마군은 후퇴해야 했다.[195] 이 역병은 한 세대 동안 로마 제국 전체를 휩쓴 안토니누스 역병의 원인이 되었다. 195년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또다시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하여 다시 크테시폰을 파괴하고, 니시비스와 싱가라 주변에 이르는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영토를 획득했다.[196] 황제 카라칼라는 마지막으로 대 파르티아 전쟁을 일으켜 216년 아르벨라를 파괴하였다. 그러나 카라칼라가 암살된 후 후임이 된 마크리누스는 니시비스 근처에서 파르티아에 패하여 카라칼라가 입힌 피해에 대해 배상하는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었다.[197]

4. 제1차 로마-이란 전쟁 (사산 왕조)

파르티아 멸망 이후 아르다시르 1세사산 제국을 건국하면서 로마와 페르시아 간의 갈등이 다시 시작되었다. 아르다시르 1세는 230년에 메소포타미아시리아를 침공하며 아케메네스 제국의 옛 영토를 요구했다.[24] 협상이 결렬되자 232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가 원정을 시작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5] 238년에서 240년 사이, 아르다시르는 다시 공격하여 카르헤, 니시비스, 하트라 등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도시를 점령했다.[26]



샤푸르 1세는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하고 하트라를 점령했으나, 243년 레사에나 전투에서 패배하여 카르헤와 니시비스를 빼앗겼다.[29] 고르디아누스 3세 황제는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진격했으나, 244년 크테시폰 근처 미시케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망했다. 필리포스는 황제가 된 후 페르시아에 500000데나리우스를 지불하는 평화 조약을 맺었다.[30]

로마 제국이 약해진 틈을 타 샤푸르 1세는 공격을 재개했다. 250년대 초, 필리포스 황제는 아르메니아 통제권을 놓고 갈등을 겪었다. 샤푸르는 아르메니아를 정복하고 왕을 죽였으며, 253년 바르발리소스 전투에서 로마군을 격파하고 안티오크를 약탈했다.[31] 258년에서 260년 사이, 샤푸르는 에데사 전투에서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사로잡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팔미라오다에나투스의 공격으로 페르시아군은 로마 영토에서 철수해야 했다.[32]

275년 아우렐리아누스와 282년 프로부스 황제는 페르시아 침공을 계획했지만 실행 전에 암살당했다.[33] 283년 카루스 황제는 페르시아를 침공하여 수도 크테시폰을 약탈했으나, 같은 해 12월 사망하여 원정이 중단되었다.[34]

디오클레티아누스 초기 통치 기간 동안 짧은 평화가 있었지만, 나르세는 아르메니아를 침략하고 296년 또는 297년 카르헤에서 갈레리우스를 격파하며 적대 행위를 재개했다.[36] 그러나 298년 갈레리우스는 사탈라 전투에서 나르세를 격파하고 수도 크테시폰을 약탈하며 페르시아 보물과 왕실 하렘을 사로잡았다. 평화 조약 결과, 로마는 티그리스강과 그레이터 자브 사이 지역, 티그라노케르타, 사르드, 마르티로폴리스, 발라레사, 모크소스, 다우디아, 아르잔 등 티그리스강 동쪽의 많은 도시들과 아르메니아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다.[37][38]

율리아누스의 363년 실패한 원정은 299년 평화 조약 하에서 로마가 얻은 영토를 상실하게 했다.


299년의 평화는 330년대 중반 샤푸르 2세가 공세를 시작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샤푸르 2세는 싱가라 (348) 전투 등에서 승리했지만, 세 번의 니시비스 포위전은 실패했고, 아미다와 싱가라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곧 로마에 다시 빼앗겼다.[39] 350년대 샤푸르 2세는 동부와 북부 국경에서 유목민의 공격을 막아냈고, 359년 이들의 도움을 받아 아미다를 다시 점령하고, 이듬해 베자브데와 싱가라를 점령했다.[39] 율리아누스 황제는 363년 대규모 공세를 시작하여 크테시폰 전투에서 승리했지만[41][42], 사마라 전투에서 사망했다. 요비아누스 황제는 티그리스강 동쪽 영토와 니시비스, 싱가라를 포기하고 아르메니아를 샤푸르에게 넘겨주는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맺었다.[43]

383년 또는 384년 아르메니아는 다시 분쟁의 원인이 되었지만, 384년 또는 387년 샤푸르 3세테오도시우스 1세가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아르메니아를 분할했다.[44] 이후 두 제국은 북쪽의 야만족 위협에 몰두하면서, 421–422년과 440년의 두 차례 짧은 전쟁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평화로운 기간이 이어졌다.[45]

나크셰 로스탐의 암벽 부조로, 샤푸르 1세가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와 아라비아의 필리포스를 상대로 승리한 것을 묘사하고 있다.

4. 1. 분쟁 초기

이란 황제 샤푸르 1세(말에 탄 사람)가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무릎 꿇은 사람)와 아랍인 필리푸스(서 있는 사람)를 붙잡은 광경을 새긴 부조


아르다시르 1세파르티아를 멸망시키고 사산 왕조를 세운 직후, 로마와 페르시아 간의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아르다시르는 230년에 메소포타미아시리아를 약탈하고 아케메네스 왕조 시절의 옛 영토를 돌려줄 것을 로마에 요구했다.[198] 몇 차례의 협상이 실패한 후, 232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아르다시르를 로마 영토에서 몰아냈다.[199] 아르다시르는 그의 치세 말기인 238년부터 240년까지 다시 로마를 침공하여 카레, 니시비스를 비롯한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들을 점령했다.[200]

아르다시르의 후계자인 샤푸르 1세는 메소포타미아를 다시 침공하였으나, 243년 레세나 부근에서 로마군에게 패배하고 카레와 니시비스를 빼앗겼다.[201] 이 승리에 고무된 로마 황제 고르디아누스 3세유프라테스강을 따라 남하하였으나, 244년 크테시폰 인근에서 벌어진 미시케 전투에서 패배했다.[202]

250년대 초, 로마 황제 필리푸스는 아르메니아 분쟁에 휘말렸다. 아르메니아 왕을 암살하고 로마와의 전쟁을 재개한 샤푸르 1세는 바르발리소스 전투에서 로마군을 물리치고 안티오크를 약탈한 것으로 추정된다.[203] 258년과 260년 사이에 샤푸르 1세는 에데사 전투에서 로마군을 물리치고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포로로 삼았으나, 아나톨리아까지 진출하였다가 로마군에게 패했다. 때마침 팔미라 제국이 페르시아를 침공하여 페르시아군은 로마 영토에서 물러나야 했다.[204]

283년 카루스 황제의 명령으로 로마군은 페르시아를 침공하여 사산 왕조의 새 수도 크테시폰을 약탈하였다. 그해 12월 카루스가 죽지 않았다면 로마는 더 많은 영토를 획득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205]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의 짧은 평화 후, 페르시아는 아르메니아를 다시 침공하고 296년 또는 297년에 카레 근처에서 로마군을 물리쳤다.[206] 그러나 황제 갈레리우스가 살라타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에 대승을 거두고 황제의 하렘을 약탈하여 사산 왕조에 치욕을 안겼다. 이어진 평화협정에서 로마는 티그리스강에서 자브 강에 이르는 영토와 아르메니아의 지배권을 획득하여 수십 년 만에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다.[207]

299년의 평화 조약은 330년대 중반 샤푸르 2세가 로마를 다시 침공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샤푸르 2세는 여러 차례 작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 성과는 오래가지 못했다. 페르시아군의 세 차례에 걸친 니시비스 포위 공격은 실패했고, 아미다싱가라 두 도시를 점령하였으나 로마군은 곧 두 도시를 탈환하였다.[39] 샤푸르 2세는 350년 중반 북방 유목민들의 페르시아 약탈을 물리치기 위해 잠시 전선을 떠났다가 359년에 다시 로마 전선으로 돌아와 아미다를 침공하여 점령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는 대규모 원정을 단행하여 유프라테스강을 남하, 크테시폰을 공격하였다.[208] 율리아누스는 크테시폰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도시를 점령하지는 못하고 티그리스강까지 후퇴하던 중 페르시아군과의 전투에서 살해당했다. 율리아누스의 후계자 요비아누스는 유프라테스강 동안에 갇힌 로마군이 안전하게 후퇴하는 대신 티그리스강 동쪽의 영토와 니시비스, 싱가라 및 아르메니아의 지배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맺었다.[209]

384년 또는 387년에 샤푸르 3세테오도시우스 1세는 양국 간에 항구적인 평화 조약을 맺고 아르메니아 영토를 분할 점령하였다. 이 무렵 민족 대이동이 시작되면서 게르만족, 알라니족, 훈족이 로마의 북방 영토를 침공하는 한편, 페르시아의 북방 영토 또한 다수의 훈족과 에프탈족의 침공에 시달리게 되었다. 따라서 로마와 페르시아 양국은 421년 및 440년의 짧은 분쟁 외에는 더 이상의 분쟁을 지속할 여력을 잃게 되었다.[210]

5. 제2차 로마-이란 전쟁 (비잔티움 제국)

384년 아르메니아 분할 이후 로마-페르시아 국경. 5세기에는 양국의 국경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이란의 샤한샤 카바드 1세는 로마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에게 조공을 요구하며 502년에 테오도시오폴리스를 기습 점령하고[212] 아미다를 공격했으나, 3개월 후에야 점령할 수 있었다.[213] 503년 페르시아가 오스로에네를 침공하여 에데사를 공략하는 동안 로마는 아미다를 공격했고,[214] 504년 로마가 아미다를 함락시킨 직후 캅카스에서 온 훈족의 침공에 대응하기 위해 양국은 강화조약을 맺었다.

505년 아나스타시우스 황제는 메소포타미아의 다라에 요새를 건설하고, 에데사와 아미다의 요새도 보수했다.[215] 국경 지대에 요새를 짓는 것은 양국 간 조약으로 금지되어 있었으나, 다라 요새는 507-508년 사이에 완공되었다.[216]

이후, 양국 간의 긴장 관계는 아나스타시우스 전쟁, 이베리아 전쟁 등으로 이어졌다.

5. 1. 아나스타시우스 전쟁

524-525년 구아람 1세가 다스리는 캅카스 이베리아가 반란을 일으키고 로마 편으로 돌아서자, 양국 간의 긴장이 전쟁으로 촉발되었다.[217] 526-527년 양국은 남캅카스 남부와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에서 충돌하였다.[218] 전쟁 초기는 페르시아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527년에는 이베리아의 반란이 진압되었고, 로마의 니시비스 및 테베타 공격은 실패한 반면, 페르시아는 탄누리스와 멜라바사를 공격하여 로마측의 방어력 보강을 방해하였다.[219] 페르시아의 공격으로 드러난 로마측의 약점을 보강하기 위해 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동로마 군단을 재조직하였다.[220]

다라 전투 당시의 배치도


530년 다라 전투에서 장군 벨리사리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페르시아군의 대규모 침공을 물리쳤다. 페르시아는 캅카스 지방으로 다시금 침공을 감행했으나 사탈라에서 시타스에게 패퇴하였다. 한편 531년에는 칼리니쿰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이 벨리사리우스 장군을 물리쳤다. 그 해에 로마군은 아르메니아에서 몇 개의 성채를 획득했고 페르시아는 에그리시 동부의 성채 두 개를 획득하였다.[221] 칼리니쿰 전투 이후 페르시아와 로마는 평화회담을 시작하였으나 소득이 없었다.[222] 양국의 회담은 532년 봄에 재개되어, 532년 9월 영구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양국은 점령한 모든 영토를 반환하고 로마가 배상금 를 지불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이베리아는 페르시아의 영향권 아래 남게 되었고, 이베리아인들은 고향에 남을지, 고향을 떠나 로마 영토로 이주할지 선택하게 되었다.[223]

비잔티움의 사산 제국 대표단의 부조, 대리석, 4~5세기,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아나스타시우스 전쟁은 두 강대국(로마, 페르시아)이 누렸던 가장 긴 평화 시기를 종식시켰다. 페르시아 왕 카바드 1세가 비잔틴 제국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에게 무력으로 재정 지원을 요구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황제가 이를 거부하자 페르시아 왕은 무력으로 빼앗으려 했다.[46] 서기 502년, 그는 준비되지 않은 테오도시오폴리스(Theodosiopolis (Armenia))를 신속하게 점령했고,[47] 가을과 겨울(502~503) 동안 아미다(Amida (Roman city)) 요새 도시를 포위했다. 요새 도시의 포위는 카바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수비군은 3개월 동안 페르시아의 공격을 격퇴했고, 결국 패배했다.[48] 503년, 로마군은 페르시아가 점령한 아미다를 포위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카바드는 오스로에네를 침공하여 에데사를 포위했지만 같은 결과를 낳았다.[49]

504년, 로마군은 아미다에 대한 투자를 갱신하여 도시를 장악했고, 이로 인해 도시가 함락되었다. 그 해, 코카서스에서 온 훈족의 아르메니아 침공으로 휴전이 이루어졌다. 두 강대국은 협상했지만, 506년 11월이 되어서야 조약에 합의했다.[50] 협상 과정에서 로마군은 페르시아의 배신을 의심하여 페르시아 관리들을 체포했으나, 이후 풀어주고 페르시아인들이 니시비스에 머물도록 하였다.[51] 506년 11월, 마침내 조약에 합의했지만, 조약의 내용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프로코피우스는 7년 동안 평화가 합의되었다고 언급했으며,[52] 페르시아에 약간의 지불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53]

505년, 아나스타시우스는 다라(Dara (Mesopotamia))에 거대한 요새 도시를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동시에, 에데사, 바트나 및 아미다에서도 낡은 요새가 개축되었다.[54] 아나스타시우스의 재위 기간 동안 더 이상의 대규모 분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특히 다라에서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긴장이 지속되었다. 이 건설 프로젝트는 로마의 방어의 핵심 요소가 되었고, 또한 페르시아와의 지속적인 논쟁의 원인이 되었는데, 페르시아는 두 제국이 국경 지대에 새로운 요새를 건설하지 않기로 합의한 422년 조약을 위반했다고 불평했다. 아나스타시우스는 페르시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로젝트를 추진했고, 성벽은 507~508년에 완공되었다.[55]

5. 2. 이베리아 전쟁

524년에서 525년경, 페르시아의 왕 카바드 1세유스티누스 1세에게 자신의 아들 호스로 1세를 입양해 줄 것을 제안했지만,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 제안은 로마 황제와 그의 조카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처음에는 환영받았지만, 유스티누스의 ''퀘스토르'' 프로쿨루스는 호스로의 입양이 로마 제국의 왕좌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우려하여 반대했다.[56][57]

이후 이베리아 왕 고르겐이 로마로 망명하면서 양국 간의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524년 또는 525년에 이베리아인들은 인근 기독교 왕국 라지카의 선례를 따라 페르시아에 반란을 일으켰고, 로마는 코카서스 북부의 훈족을 모집하여 이들을 지원했다.[58] 초기에는 양측 모두 남쪽의 아랍 동맹과 북쪽의 훈족을 통한 대리전을 선호했다.[59]

526년에서 527년까지 트란스코카서스 지역과 메소포타미아 상부에서 로마와 페르시아 간의 공개적인 전투가 벌어졌다.[60] 전쟁 초기에는 페르시아가 우세했다. 527년까지 이베리아 반란은 진압되었고, 그 해 니시비스와 테베타에 대한 로마의 공세는 실패했으며, 타누리스와 멜라바사를 요새화하려던 로마군은 페르시아의 공격으로 저지되었다.[61] 이러한 페르시아의 성공으로 드러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새 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동부 군대를 재편성했다.[62]

528년 벨리사리우스는 타누리스에서 로마 노동자들을 보호하려 했으나 실패했다.[63] 529년 라흐미드족의 시리아 습격은 유스티니아누스가 자신의 아랍 동맹을 강화하도록 자극하여, 가산 왕조 지도자 알-하리트 이븐 자발라가 느슨한 연합을 강력한 왕국으로 만들도록 도왔다.

530년, 메소포타미아에서 벌어진 주요 페르시아 공세는 벨리사리우스 휘하의 로마군에 의해 다라 전투에서 격파되었고, 코카서스에서 벌어진 두 번째 페르시아의 진격은 시타스에 의해 사탈라에서 격파되었다. 531년 칼리니쿰 전투에서 벨리사리우스는 페르시아 및 라흐미드군에게 패배하여 해임되었다. 같은 해에 로마는 아르메니아에서 몇 개의 요새를 확보했지만, 페르시아는 동부 라지카에서 두 개의 요새를 점령했다.[64] 칼리니쿰 전투 직후, 유스티니아누스의 사절 헤르모게네스와 카바드 1세 사이의 협상은 실패했다.[65]

카바드 1세의 죽음으로 마르티로폴리스 포위전이 중단되었고, 새로운 페르시아 왕 호스로 1세는 532년 봄에 다시 회담을 열어 532년 9월에 영구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양 세력은 모든 점령지를 반환하는 데 동의했고, 로마는 110 ''센테나리아''(11,000 파운드의 금)를 일회성으로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로마는 라지카 요새를 되찾았고, 이베리아는 페르시아의 손에 남았으며, 고국을 떠났던 이베리아인들에게는 로마 영토에 남거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졌다.[66]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세의 로마와 페르시아 영토


565년 유스티니아누스 사망 당시 동로마-페르시아 국경. 에그리시가 동로마 (비잔티움) 영토에 소속되어 있다


그러나 532년의 영구 평화조약은 8년도 채 지속되지 못했다. 평화조약 이후 동쪽 국경이 안정된 사이 동로마 제국은 과거 서로마 제국의 영토 상당부분을 되찾았다. 이에 자극받은 호스로 1세는 540년 로마를 침공하여 시리아를 약탈하고,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들로부터 많은 돈을 빼앗았다. 또한 안티오케이아를 비롯한 많은 도시를 약탈하고 주민들을 페르시아 영토로 강제 이주시켰다.[224]

서부전선에서 다시 호출된 벨리사리우스는 541년 니시비스를 공격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호스로 1세는 542년 메소포타미아를 재침공하여 세르기오폴리스를 공격하였으나,[225] 벨리사리우스의 방해로 물러나 후퇴하는 길에 칼리니쿰을 약탈하였다.[226] 페르시아는 많은 로마 도시를 공격하였으나 모두 격퇴되었다.[227] 543년 로마는 대규모 군단을 이끌고 두인을 침공하였으나 앙글론에서 페르시아의 소규모 군사에게 격퇴되었다. 호스로는 544년 에데사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228] 이때 로마는 크테시폰에 평화협정을 위한 대사를 파견했다.[229] 545년 양국은 로마가 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5년간의 정전협정에 합의했다.[230]

548년 초, 에그리시 국왕 구바세스 2세는 페르시아의 가혹한 지배에서 벗어나 로마의 속국이 되기를 희망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548년에서 549년에 걸쳐 에그리시와 로마 연합군을 조직하여 페르시아를 상대로 수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551년에는 페르시아의 요충지 페트라를 정복하는데 성공했으나, 페르시아 장군 미흐르-미흐로에가 에그리시 동부를 침공하여 점령하였다.[231] 이때 양국은 로마가 매년 1톤의 금화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에그리시를 제외한 지역에서 5년간의 정전협정을 갱신하였다.[232] 에그리시에서의 전쟁은 몇 년간 줄다리기를 반복하며 계속되었다.[233] 에프탈족의 침공을 막아내느라 바빴던 호스로 1세는 557년, 에그리시를 포함하여 정전협정을 갱신하였다.[234] 이후 완전한 평화협정을 위한 교섭이 계속되어 561년에는 유스티니아누스와 호스로의 대사가 만나 50년간의 평화협정에 합의하였다. 페르시아는 매년 3만 노미스마의 금화를 받는 조건으로 에그리시에서 완전히 물러났다.[235] 양국은 또한 외교와 교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국경 근처에 새로운 요새를 짓지 않기로 합의하였다.[236]

5. 3. 유스티니아누스 대 호스로 1세 (라지카 전쟁)

532년에 체결된 영구 평화조약은 8년도 지속되지 못했다. 동로마 제국이 이 조약으로 동쪽 국경이 안정된 사이 과거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상당 부분 되찾자, 이에 자극받은 사산 제국의 호스로 1세는 540년 로마를 침공하여 시리아를 약탈하고 많은 도시를 파괴했다. 특히 안티오케이아를 비롯한 여러 도시들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페르시아 영토로 강제 이주시켰다.[224]

서부 전선에서 활약하던 벨리사리우스는 다시 동부 전선으로 호출되어 541년 니시비스를 공격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호스로 1세는 542년 메소포타미아를 재침공하여 세르기오폴리스를 공격했으나,[225] 벨리사리우스의 방해로 물러나 후퇴하면서 칼리니쿰을 약탈했다.[226] 페르시아는 많은 로마 도시를 공격했지만 모두 격퇴되었다.[227] 543년 로마는 대규모 군단을 이끌고 두인을 침공했으나 앙글론에서 페르시아의 소규모 군사에게 패배했다. 호스로는 544년 에데사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228] 이후 로마는 크테시폰에 평화협정을 위한 대사를 파견했고,[229] 545년 양국은 로마가 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5년간의 정전협정에 합의했다.[230]

548년 초, 에그리시(라지카) 국왕 구바제스 2세는 페르시아의 가혹한 지배에서 벗어나 로마의 속국이 되기를 희망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이 기회를 활용하여 548-549년에 에그리시와 로마 연합군을 조직, 페르시아를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했다. 551년에는 페르시아의 요충지 페트라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으나, 페르시아 장군 미흐르-미흐로에가 에그리시 동부를 침공하여 점령했다.[231] 이때 양국은 로마가 매년 1톤의 금화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에그리시를 제외한 지역에서 5년간의 정전협정을 갱신했다.[232] 이후 에그리시에서의 전쟁은 몇 년간 계속되었다.[233] 에프탈족의 침공을 막느라 바빴던 호스로 1세는 557년, 에그리시를 포함하여 정전협정을 갱신했다.[234]

이후 완전한 평화협정을 위한 교섭이 계속되어, 561년에는 유스티니아누스와 호스로의 대사가 만나 50년간의 평화협정에 합의했다. 페르시아는 매년 30000노미스마의 금화를 받는 조건으로 에그리시에서 완전히 물러났다.[235] 양국은 또한 외교와 교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국경 근처에 새로운 요새를 짓지 않기로 합의했다.[236]

5. 4. 캅카스 전쟁

568년부터 569년까지 로마는 페르시아에 맞서 돌궐과 동맹을 맺었다.[237] 예멘과 주변 로마 속국들 사이의 분쟁 직후, 아르메니아와 캅카스 이베리아(현재 조지아)는 페르시아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237] 유스티누스 2세는 아르메니아를 속국으로 삼고, 사촌 마르키아누스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페르시아령 메소포타미아를 공격해 승리했다.[238] 그러나 마르키아누스가 갑작스럽게 해임되고, 퇴각하던 로마군이 페르시아군에 크게 패하면서 로마는 니시비스 공성에 실패하고 시리아 일부 영토와 중요 거점인 다라 요새까지 잃었다.[239] 로마는 45,000 노미스마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1년간의 휴전 협정을 맺었고, 이는 나중에 5년으로 연장되었다.[240] 그러나 캅카스와 사막 지역에서는 전쟁이 계속되었다.[241] 575년, 호스로 1세는 아르메니아를 공격하는 한편, 항구적인 평화 협정을 맺으려 했다. 페르시아군은 아나톨리아를 침공하여 세바스테이아를 약탈했으나, 멜리테네 부근 전투에서 로마군에 패하고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퇴각하면서 큰 피해를 입었다.[242]

600년경의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과 동로마 제국 및 주변 국가


유스티니아누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은 페르시아의 혼란을 틈타 페르시아 영토 깊숙이 침입하여 아트로파테네를 공격했다.[242] 호스로 1세는 강화 조약을 맺으려 했으나, 탐쿠스루 장군이 아르메니아에서 승리하자 다시 전쟁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243] 578년 봄, 페르시아는 다시 로마령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했다. 로마 장군 마우리키우스는 반대로 페르시아령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하여 아푸몬 요새를 점령하고 싱가라를 약탈했다. 호스로 1세는 다시 평화 협정을 맺으려 했으나, 579년 초 사망하고 제위를 계승한 호르미즈드 4세는 전쟁을 계속했다.[244]

4세기에서 7세기까지의 로마-페르시아 국경


580년대에도 양국의 전쟁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우세 없이 계속되었다. 마우리키우스는 582년 콘스탄티아 전투에서 승리하여 탐쿠스루 장군을 죽였으나, 더 이상 전과를 확대하지 않고 황제가 되려는 정치적 야망을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245] 586년 솔라콘 전투에서도 로마가 승리했지만, 교착 상태는 깨지지 않았다.[246]

589년, 마르티로폴리스가 로마를 배신하고 페르시아 편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바흐람 초빈 장군이 호르미즈드 4세에게 해임과 모욕을 당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궁정 내부 쿠데타로 호르미즈드 4세가 축출되고 그의 아들 호스로 2세가 제위에 올랐으나, 바흐람 장군은 이에 관계없이 반란을 계속하여 호스로 2세를 물리치고 바흐람 6세로 즉위했다. 로마 영토로 망명한 호스로 2세는 로마 황제가 된 마우리키우스의 도움을 받아 바흐람 6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로마와 그의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호스로 2세는 591년 제위를 되찾았다. 그 대가로 호스로 2세는 다라와 마르티로폴리스는 물론, 캅카스 이베리아의 절반과 페르시아령 아르메니아 영토의 절반을 로마에 돌려주었다.[247]

5. 5. 클라이맥스 (602-628년 비잔틴-사산 전쟁)

로마 후기의 은화. "Deus adiuta Romanis"(신이여 로마인들을 도우소서) 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602~628년 비잔틴-사산 전쟁은 로마-페르시아 전쟁의 클라이맥스로, 포카스가 황제 마우리키우스를 살해하고 제위에 오른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페르시아의 호스로 2세는 이를 구실로 전쟁을 일으켰고, 초기에는 페르시아가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248][97] 로마 장군 나르세스의 반란도 페르시아에 유리하게 작용했다.[249][98]

603년, 호스로 2세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로마 장군 게르마누스를 격파하고 살해한 뒤 다라를 포위, 9개월 만에 함락시켰다.[250] 이후 수년간 페르시아는 메소포타미아의 요새들을 점령하고, 아르메니아에서 승리하며 캅카스의 로마군 저항을 분쇄했다.[99][100]

610년, 헤라클리우스가 카르타고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와 포카스를 폐위시키고 황제가 되었다.[251][101] 그 무렵 페르시아는 메소포타미아와 캅카스 정벌을 완료하고, 611년 시리아아나톨리아를 침공하여 카이세리를 점령했다.[252][102] 612년 헤라클리우스는 페르시아군을 아나톨리아에서 몰아냈으나, 613년 시리아 반격에서 샤흐르바라즈와 샤힌 바흐만자데간에게 대패했다.[253][103]

이후 페르시아는 팔레스타인이집트를 점령하고,[254][104] 아나톨리아를 약탈했다.[255]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의 침공까지 겹쳐 동로마 제국은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256][107]

헤라클리우스는 군사력과 경제 재건에 주력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르기우스 1세의 도움을 받아 군비를 마련했다.[257][108] 622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세르기우스 1세와 보누스 장군에게 맡기고 원정을 떠나 성전을 시작했다.[258][109]

헤라클리우스는 캅카스와 아르메니아에서 페르시아군과 연합한 아랍 군, 샤흐르바라즈에게 승리했다.[259][110] 623년 아바르족과 휴전 후, 624년 동방 정벌을 재개하여 호스로 2세를 패퇴시켰다.[260][111] 625년에는 샤흐르바라즈, 샤힌, 샤흐라플라칸을 격파하고 샤흐르바라즈의 숙영지를 기습했다.[261][112]

626년, 페르시아 지원을 받은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는 실패했고,[262][113] 샤힌의 페르시아군은 헤라클리우스의 동생 테오도루스에게 대패했다.[263][114]

1535년경 무굴 제국 작품에 그려진 호스로 2세의 암살. 페르시아어 시는 피르다우시샤나메에서 발췌.


헤라클리우스는 서돌궐과 동맹을 맺고, 627년 겨울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하여 니네베 전투에서 대승했다.[264][115] 티그리스강을 따라 남하하여 다스타기르드에서 호스로 2세의 궁전을 불태웠으나, 나라완 운하 다리가 파괴되어 크테시폰 진군은 좌절되었다. 연이은 패전으로 호스로 2세는 아들 카바드 2세에게 살해되었고, 카바드 2세는 평화를 요구하며 모든 점령지에서 철수했다.[265][116] 헤라클리우스는 개선하여 예루살렘성십자가를 반환했다.[266][117]

6. 전쟁의 영향

수 세기에 걸쳐 거의 쉼 없이 이어진 전쟁과 더불어, 마지막의 가장 격렬했던 전쟁은 양국 모두를 크게 약화시켰다. 카바드 2세가 제위에 오른 지 몇 달 만에 죽자, 페르시아는 수 년에 걸친 왕위 다툼과 내전에 휘말렸다. 또한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호스로 2세가 부과한 가혹한 세금과 지역 제후들의 영향력 확대로 페르시아의 경제력 또한 크게 약화되었다.[267] 동로마 제국 또한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나고, 발칸반도마저 대부분 슬라브족에게 빼앗겼다.[268] 아나톨리아 고원은 여러 차례에 걸친 페르시아의 침략으로 황폐화되었고, 페르시아가 오랫동안 점령하고 있던 캅카스,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팔레스타인, 이집트를 회복하였으나 이미 해당 지역의 지배력은 약화되었다.[269]

650년의 동로마 제국(주황색). 이 시점에서 사산 왕조는 아랍 무슬림 칼리파에게 멸망했고, 동로마 제국의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역시 잃었다.


두 제국은 모두 힘을 회복할 시간을 갖지 못한 채, 몇 년 후 이슬람교로 통일된 아랍 제국의 "인간 해일"에 비견할 만한 침공을 받게 되었다.[270] 조지 리스카(George Liska)에 의하면 "비잔티움과 페르시아 간의 지나치게 긴 싸움은 이슬람 제국의 앞길을 열어 주었다."[271] 사산 왕조 페르시아는 순식간에 아랍 제국에 굴복하여 멸망했다. 동로마 제국 또한 페르시아로부터 되찾은 시리아, 아르메니아, 이집트 및 북아프리카 영토를 빼앗기고 아나톨리아의 일부 영토와 지중해의 섬들, 그리고 발칸반도와 이탈리아의 일부 영토만 남게 되었다.[272] 남은 영토 또한 잦은 침략으로 고대의 도시 문명으로부터 중세의 봉건사회로 변화하였다. 그러나, 페르시아와는 달리 동로마 제국은 아랍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살아남아 두 차례의 수도 공략을 견뎌내었다.[273] 동로마 제국은 이후의 전쟁에서 크레타와 이탈리아 남부를 아랍 제국에 빼앗겼으나 나중에 되찾게 된다.

7. 전략 전술

로마와 파르티아 간의 전쟁에서는 파르티아가 기마 궁병과 중장기병에 의존하는 전술을 사용했고, 이는 사산 왕조에서도 이어졌다. 사산 왕조는 인더스 계곡에서 데려온 전투 코끼리를 추가했지만, 보병의 질은 로마군에 비해 떨어졌다.[278] 로마 보병은 카르해 전투 (기원전 53년),[279]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원정 (기원전 36년), 에데사 전투 (서기 260년) 등에서 페르시아 중장기병에게 여러 차례 패배했다.[280] 그 결과 3세기 이후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양측 모두 중장기병을 중요하게 여겼다.[276]

사산 왕조는 파르티아보다 공성전과 방어전에 더 뛰어났다.[283] 로마군은 투석기나 공성탑 등 다양한 공성무기를 활용했지만, 사산 왕조 역시 비슷한 수준의 공성전을 수행했다.[281]

로마군은 "리메스"라는 방어선 체계를 구축했고,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개선한 이후 7세기까지 유지되었다.[284] 페르시아도 샤푸르 2세가 로마의 방어선을 모방하여 장벽을 세웠다. 양국 사이에는 여러 위성국가들이 있었으나 점차 흡수되었고, 마지막 위성국가인 라크미드족은 7세기 페르시아에 흡수되었다.[285]

7. 1. 로마와 파르티아

로마 공화국과 파르티아가 처음 충돌했을 때, 파르티아는 에게해지중해까지 전선을 확장할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로마는 파코루스와 라비에누스가 이끄는 대규모 시리아 및 아나톨리아 침공을 격퇴했고, 조지 롤린슨에 따르면 방어에는 적합했지만 정복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파르티아 군사 시스템의 약점을 점차 이용했다. 반면 로마는 트라야누스 시대부터 "대 전략"을 지속적으로 수정하고 발전시켰으며, 파코루스 시대에 이르러 파르티아를 상대로 공세를 취할 수 있었다.[274] 파르티아는 메소포타미아를 방어하는 것을 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로마 원정대가 메소포타미아 저지대에 도달할 즈음에는 항상 공격적인 추진력을 소진했고, 충분히 평정되지 않은 지역을 통과하는 확장된 통신망은 반란과 반격을 초래했기 때문에 이란 고원은 결코 함락되지 않았다.[275]

군사적으로 파르티아는 기마 궁병과 귀족들이 제공하는 중기병인 캐터프랙터 기병에 의존했다. 파르티아의 보병은 로마군에 비해 질이 떨어졌다.[278] 파르티아는 기원전 53년 카르해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이끄는 로마 보병에게 패배했고,[279] 기원전 36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전쟁에서도 패배했다.[280] 파르티아의 전술은 점차 로마 제국에서 표준적인 전쟁 방법이 되었고,[276] ''카타프락타리''와 ''클리바나리'' 부대가 로마 군대에 도입되었다.

로마는 공성전에서 높은 수준의 정교함을 달성하고 유지했으며 다양한 로마 공성 무기를 개발했다. 반면 파르티아는 공성에 서툴렀고, 그들의 기병대는 기원전 36년 안토니우스의 공성 열차를 파괴한 기습 전술에 더 적합했다.[281]

7. 2. 로마와 사산 왕조

로마 공화국과 파르티아가 처음 충돌했을 때, 파르티아는 에게해지중해까지 전선을 넓힐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로마군은 파코루스와 라비에누스의 지휘 아래 파르티아의 대규모 시리아 침략을 막아내고, 정복 전쟁보다는 방어전에 적합했던 파르티아군 조직의 약점을 차차 공략해 나갔다. 반면 트라야누스 시대부터 로마군의 "대전략"은 차츰 진화하여, 파르티아의 파코루스 1세 재위 기간부터는 로마가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274] 파르티아 왕조와, 이후 이어진 3세기 말과 4세기까지의 사산 왕조는 로마군의 공세에 맞서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방어하는 것을 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로마군이 메소포타미아 너머까지 원정할 무렵에는 적지에서의 지나치게 긴 통신선으로 인해 항상 공세의 한계를 맞았으므로, 페르시아가 이란 고원을 내준 일은 한 번도 없었다.[275]

4세기부터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힘을 키워 공세적 입장을 취했다. 그들은 파르티아와 사산 왕조 초기 시절에 로마가 획득한 동방 영토가 페르시아의 정당한 소유라고 보았다.[276] 에버렛 휠러는 "파르티아에 비해 중앙집권화된 사산 왕조는 공식적인 영토 방위군을 유지하였다"고 주장한다. 로마인들은 사산 왕조를 파르티아보다 위험한 적이라고 여겼고, 사산 왕조는 로마를 뛰어난 맞수로 여겼다.[277]

경무장 궁기병과 귀족들로 이루어진 중장기병인 캐터프랙터 기병에 의존하는 파르티아의 전술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서도 이어졌다. 사산 왕조는 여기에 인더스 계곡에서 데려온 전투 코끼리 용병을 추가했으나, 보병의 질은 로마군에 비해 떨어졌다.[278] 기원전 53년 크라수스의 대패를 포함,[279] 기원전 36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서기 260년 발레리아누스 등 로마 보병은 페르시아의 중장기병에게 여러 차례 패배를 맛보았다.[280] 그 결과, 3세기 이후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로마군과 페르시아군 양쪽에서 중장기병이 중요한 위치를 갖게 되었다.[276] 로마는 또한 세련된 공성전술을 개발하고 유지했으며, 다양한 공성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 파르티아는 공성전을 방어하는데 익숙하지 않았고, 기병 위주로 구성된 파르티아군은 기원전 36년 안토니우스의 공성부대에 사용한 것과 같은 치고 빠지는 전술에 보다 익숙했다. 사산 왕조가 들어서면서 이런 양상은 바뀌었다. 로마군은 이제 투석기나 공성탑, 혹은 로마군에게 빼앗은 공성무기를 이용하여 자신들과 같은 수준의 공성전을 수행하는 적을 상대하게 되었다.[281] 파르티아와 사산 왕조를 비교한 최신 연구는 사산 왕조가 공성전과 공병조직의 활용[282]은 물론 방어전에도 더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준다.[283]

로마군은 "리메스(limes)"라 불리는 방어선 체계를 구축하여 동쪽 전선을 방어했다. 이 방어선 체계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한차례 개선한 이후 7세기 아랍의 정복 전쟁 때까지 유지되었다.[284] 페르시아 또한 적국의 반대편에 장벽을 세워 국경을 방어했다. R. N. 프라이에 의하면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 설치한 방어선을 모방하여 샤푸르 2세가 장벽을 세웠다고 한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들어선 직후 두 제국 사이에는 여러 개의 위성국가들이 있었다. 이 위성국가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양국에 흡수되어 마지막 중간지대 국가인 아랍의 라크미드족까지 7세기 페르시아에 흡수되었다. 3세기에는 이 위성국가들이 양국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나, 양국은 차차 이 국가들을 흡수하여 중앙정부가 지휘하는 방어선과 다라와 같은 요새도시로 대체하였다.[285]

8. 평가

로마-페르시아 전쟁은 "무의미"하고 "우울하고 괴로운"것으로 평가받는다.[286] 디오 카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예언적인 말을 남겼다. "(세베루스의) 정복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쟁과 비싼 비용의 원인이라는 것은 이미 명백하다. 이 전쟁은 너무나 많은 대가를 치르는 반면 얻는 것은 거의 없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의 이웃보다 메데스와 파르티아의 이웃이 있는 곳에 가까이 이르렀으므로 이들의 방식으로 싸우게 되었다."[287]

두 강대국의 오랜 전쟁 동안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전선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역사가들은 니시비스, 싱가라, 다라 등 국경도시의 주인이 몇 차례 바뀌긴 했으나 그토록 긴 시간에 걸쳐 전선이 안정되어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말한다. R. N. 프라이는 양국이 전쟁에서 너무나 많은 피를 흘리고 양쪽에 너무나 적은 실질적인 이득을 가져온 것은, 끔찍한 비용으로 고작 몇 미터의 땅을 얻곤 했던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호전을 연상케 한다고 언급했다.

로마인들이 페르시아를 바라보는 관점[288]
"나의 가장 소중한 물건을 이방인, 야만인, 저주스러운 적의 지배자, 정의와 신념을 시험받지 않은 자, 그리고 무엇보다 이교도에게 넘겨주는 것이 어찌 좋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가티아스, 역사, 4.26.6.



두 제국은 각자의 군사적 목표를 정당화하곤 했다. 로마는 서양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평화와 질서의 보호자가 되려는 열망으로 세계 정복에 나섰다. 로마측의 기록에는 동방 국가들의 관습, 종교체계, 언어와 정부형태에 대한 오랜 편견이 드러난다. 존 F. 핼던은 "페르시아와 동로마 제국은 동방 전선의 전략적 지배를 두고 다투었으나, 종교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요소가 항상 깔려 있었다"고 말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로마 황제들은 자신을 페르시아에 사는 기독교인들의 보호자라고 여겼다.[289] 로마의 이런 태도로 인해 페르시아는 끊임없이 자국에 거주하는 기독교인들의 충성을 의심하였고, 양국의 긴장이나 군사적 충돌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290] 전쟁의 마지막 단계, 특히 611-612년에 이르러서는 로마 제국의 종교적 선전이 발전하여 십자가가 황제가 거둔 승리의 상징이 되었다. 헤라클리우스는 호스로 2세를 기독교 세계의 공적으로 선언했고, 6세기와 7세기의 작가들은 페르시아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었다.[291]

9. 사학사

로마와 전쟁을 다룬 파르티아 측 기록은 많지 않고,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다. 아케메네스 왕조 시절부터 페르시아 역사가들은 구전 역사 서술을 선호했으므로, 정권이 멸망하고 나면 해당 정권의 기록은 왜곡되는 일이 흔했다. 따라서 이 시대에 관해 알 수 있는 사료는 주로 로마인들(타키투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유스티누스)과 그리스인들(헤로디아노스, 디오 카시우스,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이다.[293] 시뷜라의 신탁 제13권은 고르디아누스 3세부터 팔미라 제국의 오데나투스에게 점령될 때까지 시리아에서 벌어진 로마-페르시아 전쟁의 영향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헤로디아노스의 기록을 끝으로, 4세기 초 락탄티우스와 에우세비우스가 남긴 기독교적 관점의 사료가 나타날 때까지 동시대 로마인들의 기록은 모두 소실되었다.[293]

사산 왕조 초기를 다룬 페르시아 측 기록은 동시대인이 쓴 것은 남아 있지 않다. 사산 왕조 초기 기록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인 아가티아스와 말랄라스, 페르시아인 알타바리피르다우시, 아르메니아인 아가탄젤로스, 그리고 에데사와 아르벨라에 남아있는 시리아의 기록이다. 이 기록들은 대부분 사산 왕조 말기의 기록인 《콰다이-나마그》에 의존하고 있다. 《황제들의 역사》는 동시대인의 기록도 아니고 신뢰도도 떨어지지만, 세베루스와 카루스에 관한 중요한 서술을 담고 있다. 샤푸르 1세에 관해 남은 세 가지 언어(그리스어, 파르티아어, 중세 페르시아어)로 된 기록 또한 중요한 사료이다.[294] 이들은 페르시아가 문자 서술로 역사를 남기려는 노력의 흔적을 보여주지만, 4세기 말엽에는 바위에 부조를 새기거나 짧은 기록을 남기는 일조차 페르시아 문화에서 사라진다.[295]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353년에서 378년까지 동방 전선에서 일어난 일을 직접 눈으로 보고 기록으로 남겼다. 4세기부터 6세기까지는 소조메누스, 조시무스, 프리스쿠스, 요안네스 조나라스가 남긴 귀중한 기록이 있다.[296] 유스티니아누스의 동방 원정에 관한 가장 중요한 기록은 프로코피우스가 남긴 553년까지의 기록이다. 그 뒤를 이어 아가티아스와 수호자 메난드로스 또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테오필락토스 시모카테스의 기록은 마우리키우스 시대의 주된 사료이다.[297] 참회자 테오파네스와 유월절 연대기, 그리고 피시디아의 게오르기오스가 남긴 시 또한 로마-페르시아 전쟁 말기의 유용한 사료이다. 비잔티움 측의 기록과, 아르메니아의 역사가 세베오스와 모우세스 코레나치의 기록은 헤라클리우스의 전쟁에 관해 일치된 서술을 하고 있어, Howard-Johnston은 "가장 중요한 비이슬람 측 기록"이라고 평했다.[298]

참조

[1] 서적 The Age of the Parthians – Google Knihy https://books.google[...] I.B.Tauris 2010-03-24
[2] 웹사이트 Byzantine–Iranian Relations – Encyclopaedia Iranica http://www.iranicaon[...] 2018-03-31
[3] 문서 Howard-Johnston (2006), 1
[4] 문서 Ball (2000), 12–13; Dignas–Winter (2007), http://assets.cambri[...]
[5] 문서 Plutarch, Sulla, 5. https://penelope.uch[...]
[6] 문서 Bivar (1993), 46
[7] 문서 Sherwin-White (1994), 264
[8] 문서 Plutarch, Crassus, https://penelope.uch[...]
[9] 문서 Bivar (1993), 56
[10] 문서 Justin, Historiarum Philippicarum, XLII. http://www.shsu.edu/[...]
[11] 문서 Bivar (1993), 57
[12] 문서 Justin, Historiarum Philippicarum, XLII. http://www.shsu.edu/[...]
[13] 문서 Cassius Dio, Roman History, XLIX, https://penelope.uch[...]
[14] 문서 Sicker (2000), 162
[15] 문서 Sicker (2000), 162–163
[16] 문서 Tacitus, Annals, XII. https://penelope.uch[...]
[17] 문서 Tacitus, Annals, XV. https://penelope.uch[...]
[18] 문서 Sicker (2000), 167
[19] 문서 Cassius Dio, Roman History, LXVIII, https://penelope.uch[...]
[20] 문서 Lightfoot (1990), 115: "Trajan succeeded in acquiring territory in these lands with a view to annexation, something which had not seriously been attempted before ... Although Hadrian abandoned all of Trajan's conquests ... the trend was not to be reversed. Further wars of annexation followed under Lucius Verus and Septimius Severus."; Sicker (2000), 167–168
[21] 문서 Sicker (2000), 169
[22] 문서 Herodian, Roman History, III, https://www.livius.o[...]
[23] 문서 Herodian, Roman History, IV, https://www.livius.o[...]
[24] 문서 Herodian, Roman History, VI, https://www.livius.o[...]
[25] 문서 Herodian, Roman History, VI, https://www.livius.o[...]
[26] 문서 Frye (1993), 124–125; Southern (2001), 234–235
[27] 간행물 A Roman Emperor at Bishapur and Darabgird 2009-06-30
[28] 웹사이트 Šāpur I: Rock Reliefs http://www.iranicaon[...] 2017-11-03
[29] 문서 Frye (1968), 125
[30] 문서 Aurelius Victor, Liber de Caesaribus, 27. http://www.thelatinl[...]
[31] 문서 Frye (1993), 125; Southern (2001), 235–236
[32] 문서 Lactantius, De Mortibus Persecutorum, http://www.thelatinl[...]
[33] 문서 Dodgeon-Greatrex-Lieu (2002), I, 108–109, 112; Southern (2001), 241
[34] 문서 Aurelius Victor, Liber de Caesaribus, 38. http://www.thelatinl[...]
[35] 문서 Dodgeon–Greatrex–Lieu (2002), 114
[36] 서적 Frye (1968), 130; Southern (2001), 242
[37] 서적 Aurelius Victor, Liber de Caesaribus, 39 http://www.thelatinl[...]
[38] 서적 Aurelius Victor, Liber de Caesaribus, 39 http://www.thelatinl[...]
[39] 서적 Frye (1993), 130; Southern (2001), 242
[40] 서적 Frye (1993), 137
[41] 서적 The Emperor Julia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8
[42] 서적 The Roman World, Volume 1 Routledge; 2 edition 2001
[43] 서적 Frye (1993), 138
[44] 서적 Frye (1968), 141
[45] 서적 Bury (1923), XIV.1; Frye (1968), 145; Greatrex-Lieu (2002), II, 37–51 https://penelope.uch[...]
[46] 서적 Procopius, Wars, I.7.1–2
[47] 서적 Joshua the Stylite, Chronicle, XLIII http://www.tertullia[...]
[48] 서적 Zacharias Rhetor, Historia Ecclesiastica, VII, 3–4
[49] 서적 Greatrex–Lieu (2002), I I, 69–71
[50] 서적 Procopius, Wars, I.9.24
[51] 서적 Greatrex-Lieu (2002), II, 77
[52] 논문 Procopius and the East https://www.academia[...] 2022
[53] 서적 Procopius, Wars, I.9.24
[54] 서적 Joshua the Stylite, Chronicle, XC http://www.tertullia[...]
[55] 서적 Joshua the Stylite, Chronicle, XCIII–XCIV http://www.tertullia[...]
[56] 서적 Procopius, Wars, I.11.23–30
[57] 서적 The wars of Justinian Hackett Publishing Company, Inc 2014
[58] 서적 Greatrex-Lieu (2002), II, 82
[59] 서적 Greatrex-Lieu (2002), II, 81–82
[60] 서적 Greatrex–Lieu (2002), II, 84
[61] 서적 Zacharias Rhetor, Historia Ecclesiastica, IX, 2
[62] 서적 Greatrex–Lieu (2002), II, 85
[63] 서적 Greatrex-Lieu (2002), II, 86
[64] 서적 Greatrex–Lieu (2002), II, 92–96
[65] 서적 Greatrex–Lieu (2002), II, 93
[66] 서적 Evans (2000), 118; Greatrex–Lieu (2002), II, 96–97
[67] 서적 Greatrex–Lieu (2002), II, 102
[68] 서적 Greatrex-Lieu (2002), II, 102
[69] 웹사이트 Justinian I – Foreign Policies and Wars http://www.britannic[...] 2008
[70] 서적 Procopius, Wars, II.20.17–19
[71] 서적 Wars
[72] 서적 Johannidos
[73] 서적 2002
[74] 서적 Wars
[75] 서적 Wars
[76] 웹사이트 Justinian I – Foreign Policies and Wars http://www.britannic[...] Encyclopædia Britannica Online 2008
[77] 웹사이트 Justinian (527–565) http://www.roman-emp[...]
[78] 서적 1997
[79] 서적 1997
[80] 서적 1997
[81] 서적 1997
[82] 서적 2007
[83] 서적 2005
[84] 서적 History
[85] 웹사이트 Justinian (527–565) http://www.roman-emp[...]
[86] 웹사이트 2 AncientSites.com http://www.ancientsi[...] 2011-06-21
[87] 서적 1997
[88] 서적 2000
[89] 서적 2002
[90] 서적 Chronicle
[91] 웹사이트 History http://www.humanitie[...] 2011-06-10
[92] 서적 1997
[93] 웹사이트 Theophylact Simocatta and the Persians http://www.humanitie[...] 2011-06-10
[94] 웹사이트 Theophylact Simocatta and the Persians http://www.humanitie[...] 2011-06-10
[95] 서적 2002
[96] 웹사이트 History http://www.humanitie[...] 2011-06-10
[97] 서적 1975
[98] 서적 Chronicle
[99] 서적 Chronicle
[100] 서적 2002
[101] 서적 1997
[102] 서적 2002
[103] 서적 2002
[104] 서적 2002
[105] 서적 2002
[106] 서적 1975
[107] 서적 2006
[108] 서적 2002
[109] 서적 Chronicle
[110] 서적 Chronicle
[111] 서적 Chronicle
[112] 서적 Chronicle
[113] 서적 Chronicle
[114] 서적 Chronicle
[115] 서적 2002
[116] 서적 Chronicle
[117] 서적 1997
[118] 서적 2006
[119] 서적 1997
[120] 서적 1997
[121] 서적 1975
[122] 서적 1998
[123] 서적 1997
[124] 서적 1997
[125] 서적 2007
[126] 서적 2007
[127] 서적 2005
[128] 서적 2005
[129] 웹사이트 An Overview of the Sassanian Persian Military https://archive.toda[...]
[130] 서적 1966
[131] 웹사이트 The Cambridge History of Iran https://www.cambridg[...]
[132] 서적 Epitoma Rei Militaris http://www.thelatinl[...]
[133] 서적 Warfare, State and Society in the Byzantine World, 565-1204 https://books.google[...] Psychology Press 2018-03-31
[134] 서적 Sassanian Elite Cavalry AD 224–642 Bloomsbury Publishing 2012
[135] 서적 2005
[136] 서적 The Roman Empire in Late Antiquity: A Political and Military Histo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8
[137] 뉴스 Death Underground: Gas Warfare at Dura-Europos http://www.archaeolo[...] Current Archaeology 2014-10-03
[138] 뉴스 Early Chemical Warfare – Dura-Europos, Syria http://www.archaeolo[...] Archaeology 2014-10-03
[139] 뉴스 Buried Soldiers May Be Victims of Ancient Chemical Weapon http://www.livescien[...] LiveScience 2014-10-03
[140] 서적 Siege Warfare and Counter-Siege Tactics in Late Antiquity (ca. 250–640) https://brill.com/vi[...] Brill 2013-01-01
[141] 논문 Elephants in Warfare in Late Antiquity http://real.mtak.hu/[...] 2003-12
[142] 뉴스 Excavations In Iran Unravel Mystery Of "Red Snake" https://www.scienced[...] Science Daily
[143] 웹사이트 The Enigma of the Red Snake http://www.archaeolo[...]
[144] 서적 Frye (1993), 139
[145] 서적 Shahîd (1984), 24–25; Wagstaff (1985), 123–125
[146] 서적 Frye (1993), 139; Levi (1994), 192
[147] 간행물 DEPORTATIONS http://www.iranicaon[...] 2012-12-30
[148] 서적 East Rome, Sasanian Persia and the End of Antiquity: Historiographical and Historical Studies https://books.google[...] Ashgate Publishing, Ltd. 2018-03-31
[149] 서적 The No-nonsense Guide to World History Verso
[150] 서적 Roman History https://penelope.uch[...]
[151] 서적 Greatrex (2005), 477–478
[152] 서적 Brill's Companion to the Reception of Alexander the Great https://books.google[...] BRILL 2018
[153]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Iran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3
[154] 웹사이트 ARDAŠĪR I i. History http://www.iranicaon[...] 2011-08-11
[155] 서적 Julian (Routledge Revivals): An Intellectual Biography Routledge 2014
[156] 서적 Barnes (1985), 126
[157] 서적 Ecclesiastical History http://www.freewebs.[...]
[158] 서적 Haldon (1999), 20; Isaak (1998), 441
[159] 서적 Dignas–Winter (2007), [http://assets.cambridge.org/97805218/49258/excerpt/9780521849258_excerpt.pdf 1–3] (PDF)
[160] 서적 Dodgeon–Greatrex–Lieu (2002), I, 5; Potter (2004), 232–233
[161] 웹사이트 Shahbazi, [http://www.iranica.com/newsite/index.isc?Article=http://www.iranica.com/newsite/articles/unicode/v12f3/v12f3036b.html Historiography http://www.iranica.c[...]
[162] 웹사이트 Historiography http://www.iranica.c[...]
[163] 서적 Dodgeon–Greatrex–Lieu (2002), I, 7
[164] 서적 Boyd (1999), 160
[165] 서적 Howard-Johnston (2006), 42–43
[166] 웹사이트 LIBER DE CAESARIBUS http://www.thelatinl[...] 2018-03-31
[167] 웹사이트 LacusCurtius • Cassius Dio's Roman History https://penelope.uch[...] 2018-03-31
[168] 웹사이트 Chronicon paschale https://books.google[...] Impensis Ed. Weberi 2018-03-31
[169] 서적 Johannidos: De laudibus Justini Augusti minor libri quattuor https://archive.org/[...] 2018-03-31
[170] 웹사이트 Eutropius: Abridgement of Roman History http://www.forumroma[...] 2018-03-31
[171] 웹사이트 Herodian's Roman History https://www.livius.o[...] 2018-03-31
[172] 웹사이트 AncientSites.com http://www.ancientsi[...] 2008-06-08
[173] 웹사이트 Joshua the Stylite, Chronicle composed in Syriac in AD 507 (1882) pp. 1-76 http://www.tertullia[...] 2018-03-31
[174] 웹사이트 Justin XLI http://www.thelatinl[...] 2018-03-31
[175] 웹사이트 Lactantius: de Mortibus Persecutorum http://www.thelatinl[...] 2018-03-31
[176] 웹사이트 Freewebs.com http://www.freewebs.[...]
[177] 문서 DocumentaCatholicaOmnia.eu http://www.documenta[...]
[178] 웹사이트 Humanities.uci.edu http://www.humanitie[...] 2008-04-27
[179] 웹사이트 Vegetius Liber III http://www.thelatinl[...] 2018-03-31
[180] 간행물 Ball (2000), 12-13; Dignas-Winter (2007) http://assets.cambri[...]
[181] 문서 플루타르코스, 술라, 5 http://penelope.uchi[...]
[182] 간행물 Bivar (1993), 46
[183] 간행물 Sherwin-White (1994), 264
[184] 문서 플루타르코스, 크라수스 http://penelope.uchi[...]
[185] 간행물 Bivar (1993), 56
[186] 간행물 Bivar (1968), 56–57
[187] 간행물 Bivar (1968), 57–58
[188] 문서 디오 카시우스, 《로마사》 제 49권 http://penelope.uchi[...]
[189] 간행물 Sicker (2000), 162
[190] 간행물 Sicker (2000), 162–163
[191] 간행물 Sicker (2000), 163
[192] 문서 타키투스, 연대기, 제 15권 http://en.wikisource[...]
[193] 간행물 Sicker (2000), 167
[194] 문서 디오 카시우스, 로마사, 제 68권 http://penelope.uchi[...]
[195] 간행물 Sicker (2000), 169
[196] 문서 헤로디아노스, 로마제국사, 제 3권 http://www.livius.or[...]
[197] 문서 헤로디아노스, 로마제국사, 제 4권 http://www.livius.or[...] 2015-05-04
[198] 문서 헤로디아노스, 로마제국사, 제 6권 http://www.livius.or[...] 2014-11-05
[199] 문서 헤로디아노스, 로마제국사, 제 6권 http://www.livius.or[...]
[200] 간행물 Frye (1993), 124–125; Southern (2001), 234–235
[201] 간행물 Frye (1993), 125
[202] 문서 빅토르 아우렐리우스, 황제들의 생애, 제 27권 http://www.thelatinl[...]
[203] 간행물 Frye (1993), 125; Southern (2001), 235–236
[204] 문서 락탄티우스, 박해자들의 죽음 http://www.thelatinl[...]
[205] 문서 빅토르 아우렐리우스, 황제들의 생애, 제 38권 http://www.thelatinl[...]
[206] 간행물 Frye (1993), 130; Southern (2001), 242
[207] 문서 빅토르 아우렐리우스, 황제들의 생애, 제 39권 http://www.thelatinl[...]
[208] 간행물 Frye (1993), 137
[209] 간행물 Frye (1993), 138
[210] 간행물 Bury (1923) http://penelope.uchi[...]
[211] 서적 프로코피우스, 전사, I.7.1–2 2002
[212] 웹사이트 고행자 여호수아, 연대기, XLIII http://www.tertullia[...] 2002
[213] 서적 미틸레네의 자카리아스, 교회사, VII, 3–4 2002
[214] 서적 2002
[215] 웹사이트 고행자 여호수아, 연대기, XC http://www.tertullia[...] 2002
[216] 웹사이트 고행자 여호수아, 연대기, XCIII–XCIV http://www.tertullia[...] 2002
[217] 서적 2002
[218] 서적 2002
[219] 서적 미틸레네의 자카리아스, 교회사, 제 9권, 2 2002
[220] 서적 2002
[221] 서적 2002
[222] 서적 2002
[223] 서적 2000
[224] 서적 2002
[225] 서적 프로코피우스, 전사, 제 2권. 20.17–19 2002
[226] 서적 프로코피우스, 전사, 제 2권. 21.30–32 2002
[227] 서적 코리푸스, 요한니도스, 제 1권. 68–98 2002
[228] 서적 2002
[229] 서적 프로코피우스, 전사, 28.7–11 2005
[230] 웹사이트 프로코피우스, 전사, 28.7–11 http://www.roman-emp[...]
[231] 서적 1997
[232] 서적 1997
[233] 서적 2007
[234] 서적 2005
[235] 서적 메난드로스, 역사, 일부 발췌. 6.1 2005
[236] 웹사이트 http://www.roman-emp[...]
[237] 웹인용 에피파니아의 요한이 지은 《역사》 2 AncientSites.com http://www.ancientsi[...] 2011-06-21
[238] 서적 1997
[239] 서적 로마측 전선의 요새 다라는 처음으로 페르시아군에게 넘어갔다. 2000
[240] 서적 2002
[241] 서적 테오파네스, 연대기, 246.11–27 2000
[242] 웹인용 테오필락토스 시모카투스, 역사, 제 1권, 9.4 http://www.humanitie[...] 2010-06-12
[243] 서적 1997
[244] 웹인용 Soward, Theophylact Simocatta and the Persians http://www.humanitie[...] 2010-06-12
[245] 웹인용 Soward, Theophylact Simocatta and the Persians http://www.humanitie[...] 2010-06-12
[246] 서적 Greatrex–Lieu (2002), II, 168-169
[247] 간행물 테오필락토스, 역사, 제 1권, I, 3.11 http://www.humanitie[...]
[248] 서적 Foss (1975), 722
[249] 간행물 테오파네스, 연대기, 290–293
[250] 간행물 테오파네스, 연대기, 292–293
[251] 서적 Haldon (1997), 41; Speck (1984), 178.
[252] 서적 Greatrex–Lieu (2002), II, 188–189
[253] 서적 Greatrex–Lieu (2002), II, 189–190
[254] 서적 Greatrex–Lieu (2002), II, 190–193, 196
[255] 서적 Greatrex-Lieu (2002), II, 193–197
[256] 서적 Howard-Johnston (2006), 85
[257] 서적 Greatrex–Lieu (2002), II, 196
[258] 간행물 테오파네스, 연대기, 303–304, 307
[259] 간행물 테오파네스, 연대기, 304.25–306.7
[260] 간행물 테오파네스, 연대기, 306–308
[261] 간행물 테오파네스, 연대기, 308–312
[262] 간행물 테오파네스, 연대기, Chronicle, 316
[263] 간행물 테오파네스, 연대기, 315–316
[264] 서적 Greatrex–Lieu (2002), II, 209–212
[265] 간행물 테오파네스, 연대기, 317–327
[266] 서적 Haldon (1997), 46; Baynes (1912), passim; Speck (1984), 178
[267] 서적 Howard-Johnston (2006), 9
[268] 서적 Haldon (1997), 43–45, 66, 71, 114–15
[269] 서적 Haldon [1997], 49–50
[270] 서적 Foss (1975), 746–47; Howard-Johnston (2006), xv
[271] 서적 Liska (1998), 170
[272] 서적 Haldon (1997), 49–50
[273] 서적 Haldon (1997), 61–62; Howard-Johnston (2006), 9
[274] 서적 Rawlinson (2007), 199
[275] 서적 Wheeler (2007), 259
[276] 서적 Frye (2005), 473
[277] 서적 Greatrex (2005), 478; Frye (2005), 472
[278] 웹아카이브 An Overview of the Sassanian Persian Military http://www.derafsh-k[...] 2008-06-30
[279] 서적 로마는 카레 전투를 계기로 군단을 재조직했다.
[280] 간행물 베게티우스, 군사학논고, 26 http://www.thelatinl[...]
[281] 서적 Campbell–Hook (2005), 57–59; Gabba (1966), 51–73
[282] 뉴스 Excavations In Iran Unravel Mystery Of "Red Snake" http://www.scienceda[...] Science Daily 1994
[283] 웹사이트 The Enigma of the Red Snake http://www.archaeolo[...] Rekavandi–Sauer–Wilkinson–Nokandeh
[284] 서적 Shahîd (1984), 24–25; Wagstaff (1985), 123–125
[285] 서적 Frye (1993), 139
[286] 서적 Brazier (2001), 42
[287] 서적 디오 카시우스, 로마사, 제 75권, 3 http://penelope.uchi[...] Garnsey–Saller 1987
[288] 서적 Greatrex (2005), 477–478
[289] 서적 Barnes (1985), 126
[290] 서적 소조메누스, 교회사, 제 2권 http://www.freewebs.[...] McDonough 2006
[291] 서적 Haldon (1999), 20; Isaak (1998), 441
[292] 간행물 Dignas–Winter (2007) http://assets.cambri[...]
[293] 서적 Dodgeon–Greatrex–Lieu (2002), I, 5; Potter (2004), 232–233
[294] 웹사이트 Historiography http://www.iranica.c[...] Shahbazi 2009-01-29
[295] 웹사이트 Historiography http://www.iranica.c[...] Shahbazi 2009-01-29
[296] 서적 Dodgeon–Greatrex–Lieu (2002), I, 7
[297] 서적 Boyd (1999), 160
[298] 서적 Howard-Johnston (2006), 42–43
[299] 웹사이트 TheLatinLibrary.com http://www.thelatinl[...]
[300] 웹사이트 Uchicago.edu http://penelope.uchi[...]
[301] 웹사이트 Books.Google.gr http://books.google.[...]
[302] 웹사이트 Books.Google.com http://books.google.[...]
[303] 웹사이트 ForumRomanum.org http://www.forumroma[...]
[304] 웹인용 Livius.org http://www.livius.or[...] 2011-10-21
[305] 웹인용 AncientSites.com http://www.ancientsi[...] 2011-06-21
[306] 웹사이트 Tertullian.org http://www.tertullia[...]
[307] 웹사이트 TheLatinLibrary.com http://www.thelatinl[...]
[308] 웹사이트 TheLatinLibrary.com http://www.thelatinl[...]
[309] 웹사이트 Freewebs.com http://www.freewebs.[...]
[310] 웹사이트 DocumentaCatholicaOmnia.eu http://www.documenta[...]
[311] 웹인용 Humanities.uci.edu http://www.humanitie[...] 2008-04-27
[312] 웹사이트 TheLatinLibrary.com http://www.thelatinl[...]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