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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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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탕헤르는 지중해와 대서양을 잇는 모로코 북부의 항구 도시이다. 페니키아 시대부터 로마, 반달, 비잔틴 제국을 거쳐 이슬람 왕조,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등의 지배를 받았으며, 1923년부터 1956년까지 국제 관리 지구로 운영되었다. 1956년 모로코에 재통합된 이후 탕헤르-메드 항의 개장과 함께 지중해 지역의 주요 항구 도시로 성장했다. 탕헤르는 4개의 언어 교육 시스템을 제공하며, 다문화적 특성을 바탕으로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하는 문화적 중심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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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헤르
지도
탄제-테투안-알호세이마 지역(옅은 빨강) 및 탄제-아실라현(빨강)의 위치
탄제-테투안-알호세이마 지방(옅은 빨강)과 탄제-아실라현(빨강)의 위치
모로코 내 탕헤르 위치
모로코 내 탕헤르 위치
탕헤르
탕헤르
기본 정보
정식 명칭
Tangier
별칭푸르고 하얀 도시
보우가즈의 도시
북쪽의 신부
국가모로코
행정 구역탄제-테투안-알호세이마 지방
하위 행정 구역탄제-아실라 현
지역탄제-테투안-알호세이마 지방
탄제-아실라 현
도시 유형도시
면적199.5 km²
면적 (참고)124km²
고도80m
최대 고도230m
설립일기원전 1000년경
우편 번호90000
90010
90020
90030
90040
90050
90060
90070
90080
90090
90100
지역 번호0539
차량 번호판40
공식 웹사이트탕헤르
인구 밀도7026명/km²
도시 인구1,275,428명
정치
시장Mounir Laymouri
시장 소속 정당진실과 현대당
언어 정보
공식 언어아랍어 (, 탄자)
프랑스어 (Tanger, 탕제)
스페인어 (Tánger, 탕헤르)
영어 (Tangier/Tangiers, 탠지어)
포르투갈어 (Tânger)
기타
시간대중앙 유럽 시간
UTC 시간대+1
인구 통계2014년 947,952명
2024년 1,275,428명
인구 순위모로코에서 2번째
인구 통계 (참고)모로코 고등 계획 위원회에서는 탕헤르 시를 브니 마카다, 샤르프-므고가, 샤르프-스와니, 탕헤르-메디나의 4개 행정 구역으로 정의함.
별칭푸르고 하얀 도시
해협의 도시
북쪽의 신부

2. 역사

(내용 없음)

2. 1. 고대

로마 시대 탕헤르 성벽의 일부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아프리카 지도. 로마의 마우레타니아 팅기타나를 보여준다.


탕헤르는 기원전 10세기 초 또는 적어도 기원전 8세기에 페니키아의 식민지로 건설되었다.[7][8] 탕헤르 주변의 기원전 6세기경 베르베르인 무덤에서 다수의 푸니크 유물이 발견되어 당시 활발한 무역 활동이 있었음을 보여준다.[9] 기원전 5세기에는 카르타고인들이 이곳을 카르타고 제국의 중요한 항구로 개발했으며,[7] 한노의 서아프리카 해안 탐험에도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다.[8] 이 도시는 오랫동안 페니키아 전통을 유지했으며, 마우레타니아 왕들 시대에는 푸니크 문자가 새겨진 청동 주화를 발행했다. 로마 제국 시대에는 앞면에 아우구스투스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초상과 라틴 문자가, 뒷면에는 가나안 신 바알의 이미지가 새겨진 다른 주화도 발행되었다.

고대 베르베르인들은 이 도시를 '팅기(Tingi)'(ⵜⵉⵏⴳⵉber)[4]라고 불렀으며,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를 '팅기스(Tingís)'(Τιγγίςgrc)라 칭하고 베르베르 신화를 바탕으로 한 건국 설화를 기록했다. 전설에 따르면, 아틀라스의 딸이자 안타이오스의 미망인인 틴지스가 헤라클레스와의 사이에서 시팍스를 낳았고, 틴지스가 죽은 후 시팍스가 항구를 건설하고 어머니를 기려 도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10] 안타이오스의 거대한 해골과 무덤은 고대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명소였으며,[10] 헤라클레스가 노역 중 휴식을 취했다고 전해지는 스파르텔 곶 인근의 헤라클레스의 동굴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포에니 전쟁 이후 팅기스는 로마 공화국의 동맹국이었던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세르토리우스 전쟁 중에는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술라 정권에 맞서 싸우면서 기원전 70년대에 몇 년간 팅기스를 점령하기도 했다. 이후 마우레타니아인들에게 반환되었으나, 기원전 38년 보쿠스 3세 통치 시기에 로마 공화국 형태의 자유 도시로 지정되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치하에서 팅기스는 특정 시정 권한을 부여받았고,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 승격되어 마우레타니아 팅기타나 속주의 주도가 되었다. 로마 식민지로서 공식 명칭은 '''콜로니아 율리아 팅기'''(Colonia Julia Tingila)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291년 개혁 이후 팅기스는 백작(comesla)과 팅기타나 속주 총독(praesesla)의 주재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대박해의 영향으로 298년 성 마르켈루스와 카시아누스가 참수당하는 순교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팅기스는 4세기까지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로 번성했다.

2. 2. 중세

5세기 초인 429년, 가이세리크가 이끄는 반달족북아프리카로 건너와 탕헤르를 점령했다.[11][85] 이는 당시 서로마 제국의 장군 보니파키우스가 황후 갈라 플라키디아와의 권력 다툼 속에서 반달족을 끌어들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12] 그러나 반달족은 곧 베르베르인들의 지속적인 반란으로 탕헤르를 포함한 마우레타니아 지역의 지배권을 상실했다.

6세기 전반,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명을 받은 벨리사리우스 장군이 533년 반달 전쟁을 통해 탕헤르를 재정복했다.[11][85] 하지만 동로마 제국의 새로운 지방 행정 중심지는 방어가 더 용이한 셉템(오늘날의 세우타)으로 이전되었다. 탕헤르에 대한 동로마의 통치는 618년경 서고트 왕국의 압력으로 끝났을 가능성이 있다.[13]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 이슬람 세력이 북아프리카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탕헤르도 우마이야 칼리파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707년에서 711년 사이,[14][86] 무사 븐 누사이르가 이끄는 군대가 탕헤르를 점령했으며, 당시 세우타의 율리안 백작이 마지막 방어를 지휘했다고 전해진다. 무사는 그의 부관 타리크 이븐 자이드를 탕헤르에 남겨두고 이베리아 반도 침공을 개시하게 했다. 우마이야 왕조 치하에서 탕헤르는 모로코 지역('마그레브 알 악사')의 수도 역할을 했으나, 이슬람으로 개종한 베르베르인들에게도 여전히 차별적인 세금(지즈야)을 부과하는 등[16] 압제적인 통치가 이어졌다. 특히 여성 노예나 부드러운 양가죽으로 세금을 납부하게 한 조치는 큰 반발을 샀다.[16] 결국 740년 여름, 평등주의적인 하리지파 사상에 영향을 받은 마이사라 알 마트가리의 지도 아래 베르베르 반란이 일어나 탕헤르를 장악했다.[17][87] 이후 벌어진 귀족들의 전투와 바그두라 전투에서 베르베르 군대는 우마이야 군대를 연이어 격파하며 사실상 독립을 이루었고, 탕헤르 주변 지역은 785년까지 혼란 상태가 지속되었다.

8세기 후반, 시아파 계열의 아랍 망명객 이드리스 1세가 탕헤르에 도착하여 지역 부족과 연합, 군대를 모아 790년경 탕헤르를 점령하고 이드리스 왕조의 지배를 확립했다. 829년 이드리스 2세 사후 왕국이 분할되면서 탕헤르는 그의 아들 카심 이븐 이드리스에게 넘어갔다가, 곧 형제인 우마르 이븐 이드리스와 그의 아들 알리 이븐 우마르, 카심의 아들 야히야 이븐 알 카심 등이 차례로 통치했다.

10세기 초,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가 모로코에 영향력을 행사하자, 이베리아 반도의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한 후우마이야 왕조의 아미르 압드 알 라흐만 3세는 스스로 칼리프를 칭하고 파티마 왕조에 대항했다. 그는 마그라와 베르베르족을 지원하여 949년(또는 951년[85]) 탕헤르를 점령했다. 이후 탕헤르 총독은 코르도바의 모로코 영토 전체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11세기 초 코르도바 칼리파국이 내전에 휩싸이자, 세우타 총독 알리 이븐 함무드 알 나시르는 탕헤르와 말라가를 정복한 후 코르도바까지 장악하고 1016년 스스로 칼리프가 되었다. 이 시기 탕헤르는 그의 동맹인 바르가와타 부족의 리즈크 알라가 자치적으로 통치했다.

11세기 후반, 알모라비드 왕조가 부상하여 1077년(또는 1075년[85]) 유수프 이븐 타시핀이 탕헤르를 점령했다. 12세기 중반인 1147년(또는 1149년[85])에는 알모하드 왕조의 압드 알 무민이 이곳을 차지했고, 알모하드 왕조 통치 아래 탕헤르는 항구를 중심으로 크게 번영하며 활기를 띠었다.

알모하드 왕조가 쇠퇴한 후, 탕헤르는 즉시 마리니드 왕조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지역 지도자 유수프 이븐 무하마드가 튀니지하프스 왕조와 동쪽의 압바스 왕조에 충성을 맹세하며 독자적으로 통치했으나, 1266년 후반 또는 1267년 초에 살해되었다. 결국 1274년(또는 1275년[85]), 마리니드 왕조의 술탄 아부 유수프 야쿠브 이븐 압드 알 하크가 3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탕헤르를 점령하여 마리니드 왕조의 지배하에 두었다.

다음 세기는 도시에 대한 반란과 어려움이 있었던 불분명한 시대로 기록된다. 이 기간 중인 1304년, 중세의 가장 위대한 여행가 중 한 명인 이븐 바투타가 탕헤르에서 태어나 20세에 메카 순례(하지)를 위해 고향을 떠났다. 14세기 후반부터 탕헤르와 살레를 거점으로 한 바르바리 해적들이 지브롤터 해협과 북대서양에서 활동하며 유럽 선박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11]

2. 3. 근세

17세기 탕헤르


1680년 판화에 그려진 탕헤르의 영국군 요새와 항구


1415년 포르투갈이 세우타 정복을 통해 아프리카 북부 해안의 해적 행위에 대한 보복으로 식민지 확장을 시작했을 때, 탕헤르는 주요 목표 중 하나였다.[11][18] 포르투갈은 1437년, 1458년, 1464년에 탕헤르 점령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1471년 8월 28일, 아실라가 포르투갈에 정복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탕헤르 수비대가 도망치면서 포르투갈은 전투 없이 도시를 점령했다.[19][85] 포르투갈은 세우타에서처럼 주요 모스크를 도시의 대성당으로 개조하고, 점령 기간 동안 여러 차례의 복원을 통해 건물을 꾸몄다. 또한 유럽식 주택과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예배당 및 수도원을 건설했다.[11] 와타스 왕조는 1508년, 1511년, 1515년에 탕헤르를 탈환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7세기에는 이베리아 연합의 일환으로 포르투갈과 함께 스페인 왕의 지배하에 놓였으나, 포르투갈 수비대와 행정부는 유지되었다.

1661년, 포르투갈 공주 브라간사의 카타리나잉글랜드의 찰스 2세와 결혼하면서 탕헤르는 결혼 지참금의 일부로 영국에 양도되었다.[20][85] 제1대 샌드위치 백작 에드워드 몬태규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11월에 도착하여 1662년 1월에 도시를 완전히 점령했다. 찰스 2세는 영국령 탕헤르를 "왕관의 엄청난 가치를 지닌 보석"이라고 칭송했지만,[11] 떠나는 포르투갈인들은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꽃, 창문, 문까지도" 가져가는 등 가능한 모든 것을 가져갔다. 탕헤르는 주둔군과 함께 다른 영국 도시들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헌장을 받았지만, 수도회는 몰수되었고 포르투갈 거주자들은 거의 모두 떠났으며, 도시의 유대인들은 충성심에 대한 우려로 인해 추방되었다.

탕헤르 연대는 자신들을 지하드를 수행하는 무자히딘으로 여기는 현지인들의 공격을 거의 끊임없이 받았다. 그들의 주요 지도자는 바누 구르파트(Banu Gurfat)의 카디르 가일란(Khadir Ghaïlan)이었으며, 제2대 피터버러 백작 헨리 모돈트는 그를 매수하려 시도했다. 휴전은 1663년과 1664년의 일부 기간 동안만 지속되었고, 1664년 5월 4일 제1대 테비엇 백작 앤드루 러더퍼드와 약 470명의 주둔군이 유대인 언덕(Jew's Hill) 근처에서 매복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 제1대 벨라시즈 남작 존 벨라시즈는 1666년에 더 오래 지속되는 조약을 체결했다.[21] 카디르 가일란은 새로운 알라위 왕조 술탄 알라시드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려 했으나 실패했고, 1673년 사망할 때까지 조약 조건을 준수해야 했다.

영국인들은 이 휴전 기간을 이용하여 포르투갈 시대의 방어 시설을 크게 개선했다. 또한 방파제를 건설하여 항구를 개선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는 나중에 지브롤터가 영국 해군 전략에서 수행한 역할과 유사한 역할을 기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능, 낭비, 그리고 노골적인 사기와 횡령으로 인해 비용이 급증했으며, 이 과정에서 부를 축적한 인물 중에는 새뮤얼 피프스도 있었다.[22] 방파제 건설에는 34만파운드의 비용이 들었고, 파괴되기 전까지 길이는 약 437.69m에 달했다. 방어 시설 자금은 마련되었지만, 주둔군의 봉급은 1677년 12월까지 2년 하고도 3개월이나 지급되지 않았고, 팔메스 페어본 총독은 병사의 소총을 빼앗아 현장에서 처형하는 방식으로 반란을 진압했다.

모로코의 물레이 이스마일 술탄이 1678년부터 1680년까지 감행한 탕헤르 대포위는 실패했지만,[23] 식민지 유지에 드는 막대한 비용[25]과 포위 공격으로 인한 어려움[24] 때문에 영국 의회는 1680년에 탕헤르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25] 당시 탕헤르의 인구는 주둔군 1,000명을 제외하고 약 700명에 불과했으며, 퍼시 커크 총독은 그중 400명이 같은 성매매 여성으로부터 임질에 걸렸다고 추산했다.[25] 제1대 다트머스 남작 조지 레그가 이끄는 군대(새뮤얼 피프스 포함)는 5개월 동안 도시와 항구 시설을 체계적으로 파괴했고, 1684년 2월 7일 모로코 군대가 도시를 점령했다.[85]

알리 이븐 압달라와 그의 아들 아메드 이븐 알리는 1743년까지 차례로 도시의 총독으로 재임하면서 주변 시골에서 온 주민들로 도시를 재건했다. 그들은 여러 차례 통치했던 압달라 술탄에 대항할 만큼 강력했으며, 왕실 내외의 여러 경쟁자들에게 지원과 망명을 제공했다.

1790년에는 스페인의 공격을 받았다.

2. 4. 근대

18세기부터 탕헤르는 모로코의 외교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미국조지 워싱턴 대통령 재임 시절 탕헤르에 첫 영사관을 설립했으며,[26] 1821년에는 모로코 술탄 무라이 슬리만이 선물한 공관 건물이 미국 정부가 해외에서 처음으로 취득한 부동산이 되었다.[26]

1828년 영국은 해적 행위에 대한 보복으로 탕헤르 항구를 봉쇄했다.[27] 알제리를 점령 중이던 프랑스는 모로코가 압델카데르를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프랑스-모로코 전쟁을 일으켰다. 1844년 8월 6일, 주앙빌 공작 프랑수아가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탕헤르를 폭격하여[85] 방어 시설에 큰 피해를 입혔다. 이후 프랑스가 이스리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1844년 탕헤르 조약이 체결되어 프랑스에 유리한 조건으로 전쟁이 종결되었다. 이탈리아의 혁명가 주세페 가리발디는 1849년 말부터 1850년 초까지 로마 공화국이 몰락한 후 탕헤르에서 망명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13년경 독일 사업가 아돌프 렌슈하우젠이 세운 렌슈하우젠 건물. 제1차 세계대전 이전 탕헤르에서 독일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빌 누벨(Ville Nouvelle)에 있는 옛 증권거래소 건물


탕헤르의 전략적 위치 때문에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는 유럽 열강의 외교 및 상업적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무대가 되었다.[29] 1870년대에는 모로코에 주재하는 모든 외국 대사관과 영사관이 탕헤르에 있었으나, 당시 약 2만 명의 인구 중 외국인은 400명 정도에 불과했다. 점차 프랑스의 영향력이 커지자, 1905년 독일 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가 직접 탕헤르를 방문하여 모로코의 독립 지지를 선언하며 프랑스를 견제하는 탕헤르 사태(제1차 모로코 위기)를 일으켰다.[85] 이는 독일이 장차 모로코를 자국의 영향권 아래 두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듬해 열린 알헤시라스 회의에서는 탕헤르의 경찰 훈련과 관세 징수를 국제 공동 관리 체제로 두기로 합의했으나,[85] 영국이 프랑스와의 영불 협상을 지지하면서 모로코에 대한 독일의 야심은 사실상 좌절되었다. 1907년에는 항만 시설이 개선되어 내부와 외부 방파제가 완공되었다.

1905년, 술탄 압델아지즈의 지시로 모로코 최초의 신문인 Lisan al-Maghrib|리산 알마그리브ar("모로코의 목소리")가 탕헤르에서 창간되었다. 이는 프랑스 대사관이 운영하던 아랍어 신문 al-Sa'adah|알사아다ar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30][31] 초기에는 레바논 출신 언론인들이 정부를 대변했으나, 점차 개혁적인 주장과 함께 술탄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30][31] 제1차 세계 대전 직전 탕헤르의 인구는 약 4만 명으로, 절반은 무슬림, 4분의 1은 유대인, 나머지 4분의 1은 유럽계 기독교인이었으며, 유럽인 중 약 4분의 3은 스페인 출신 노동자들이었다.

1912년 페스 조약으로 모로코 대부분은 프랑스 보호령이 되고 북부와 남부 일부는 스페인 보호령이 되었으나, 탕헤르는 그 지위가 보류되어 국제 관리 지역으로 지정되었다.[86] 당시 프랑스 총독 위베르 리오테는 마지막 술탄 압델하피드를 설득하여 퇴위시키고 탕헤르에 거주하게 했다.[32] 압델하피드는 연금 일부를 사용하여 1914년 압델하피드 궁전을 완공했다.[33] 이 건물은 나중에 이탈리아 측에 매각되어 '이탈리아 기관 궁전'으로 불린다.[34] 1919년부터 1927년까지는 프랑스와 스페인 합작으로 표준궤 탕헤르-페스 철도(탕헤르-페스 프랑스-스페인 회사)가 건설되었다.

1923년 12월 18일, 파리에서 프랑스, 스페인, 영국 간에 탕헤르 국제지구 설립에 관한 협약이 체결되었고,[35] 1925년부터 공식적인 국제 공동 관리가 시작되었다.[85] 이후 이탈리아, 포르투갈, 벨기에, 네덜란드, 미국, 소련 등도 이 협약에 참여했다.[85] 1928년에는 영국의 오스틴 체임벌린 경의 제안으로 이탈리아의 지위가 격상되었다.[37] 국제 관리 하의 탕헤르는 무슬림, 기독교인, 유대인이 공존하는 다문화 사회를 이루었으며, 정치적, 이념적으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피난처를 찾는 도시가 되었다. 스페인 내전의 난민들,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온 유대인들, 모로코의 반체제 인사들이 이곳에 머물렀다. 또한 매우 자유로운 경제 및 재정 법규 덕분에 국제적인 조세 피난처이자 자유 무역 지대로 기능했다.[38] 탕헤르 국제지구의 면적은 약 373km2였고, 1930년대 중반 인구는 약 5만 명(무슬림 3만, 유대인 1만 2천, 유럽인 8천 이상)이었으며, 1940년대에는 유대인 인구가 2만 2천 명에 달하기도 했다.[39]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0년 6월 14일, 나치 독일이 파리를 점령하자 스페인 군대가 기회를 틈타 탕헤르를 점령하고 일방적으로 스페인령 모로코에 합병한다고 선언했다.[85] 프랑코 정권은 이 점령이 일시적인 전시 조치라고 주장했지만,[40] 1940년 11월 국제 관리 기구를 폐지하면서 영국과 외교적 마찰을 빚었다. 결국 스페인은 영국의 권리를 보장하고 탕헤르를 요새화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인 1945년 10월 11일, 탕헤르는 다시 국제 관리 지역으로 복귀했다.[41][85]

2. 5. 현대

탕헤르 국제지구는 모로코 독립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42] 국제 지구라는 법적 지위 덕분에 활동가들은 탕헤르에서 프랑스스페인 당국의 감시를 비교적 피해 만날 수 있었다.[42] 1951년, 모로코의 네 개 민족주의 정당은 모로코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운동을 조정하기 위해 탕헤르에서 국가전선을 결성했다.[43]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인 1940년 6월, 스페인 군대는 탕헤르를 침공하여 일방적으로 스페인령 모로코로의 합병을 선언하였다.[85]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인 1945년 8월 31일, 탕헤르는 다시 국제 관리 지역으로 복귀하였다.

1952년 7월, 관련 보호국들은 라바트에서 회의를 열어 국제 지구의 미래를 논의하고 그 폐지에 합의했다.[44] 탕헤르는 모로코가 1956년 완전한 주권을 회복한 후 모로코의 다른 지역과 합쳐졌다.[44] 인계 당시 탕헤르의 인구는 무슬림 약 4만 명, 기독교인 3만 1천 명, 유대인 1만 5천 명으로 구성되었다.[45]

1956년 10월 페다라(Fedala, 현 모함메디아) 회의에서 조약 가입국들은 탕헤르의 국제 관리 종결을 결정하였다. 1956년 12월 31일을 기해 국제 관리는 종료되었고, 탕헤르는 모로코로 완전히 복귀하였다.[86][85] 복귀 과정에서 1960년 4월 18일까지 한시적으로 환율 및 무역에 관한 특별 조치가 시행되었다.[85]

3. 지리

우주에서 본 탕헤르 (2005)


탕헤르는 지브롤터 해협에 면한 항만 도시이다. 중심부는 지브롤터 해협 남쪽의 스파르텔 곶에서 동쪽으로 약 약 22.53km 떨어져 있다.[46] 탕헤르 만의 북서쪽 끝에 두 개의 언덕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과거에는 선박 크기가 작아 모로코 해안에서 가장 좋은 천연 항구 중 하나였으나, 선박 크기가 커지면서 점차 먼바다에 정박해야 했다.[46] 점차 높아지는 지형 때문에 도시는 마치 원형극장처럼 보이며, 상업 지구는 중앙에 위치해 있다.[46]

서쪽 언덕에는 도시의 성채인 카스바가 있다.[46] 동쪽 언덕은 말라바타 곶을 형성하는데,[47] 이곳은 지브롤터 해협 횡단 지점으로 제안되기도 했지만[47], 여러 해 동안 연구에도 불구하고 아직 실질적인 진전은 없다.[48]

마르샨 고원은 시내 서쪽 바닷가를 따라 약 약 1188.72m 길이로 펼쳐져 있는 고원이다.[47] 탕헤르 북서쪽 교외에는 지브롤터 해협과 대서양의 경계선인 스파르텔 곶이 있다.

4. 기후

탕헤르는 지중해성 기후(쾨펜 기후 구분 ''Csa'')를 나타낸다. 지리적으로 노출된 위치 때문에 북아프리카의 다른 지역이나 인근 이베리아 반도보다 강수량이 많은 편이다.[49] 바다에서 불어오는 우세풍은 과거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았던 시절에도 도시의 공기를 비교적 깨끗하게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28]

여름은 비교적 덥고 화창하며, 겨울은 습하고 온화한 특징을 보인다. 연평균 기온은 17.7°C이며, 가장 추운 달은 1월(평균 12.5°C), 가장 더운 달은 8월(평균 23.9°C)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735.9mm로, 주로 11월부터 2월 사이 겨울철에 집중된다. 서리가 내리는 경우는 드물지만, 2005년 1월에는 기록적인 최저 기온인 -4.2°C가 관측되기도 했다.[49]

탕헤르(탕헤르 이븐 바투타 공항)의 기후 (1961년~1990년, 극값 1961년~현재)
1월2월3월4월5월6월7월8월9월10월11월12월연간
역대 최고 기온(°C)22.027.025.027.034.036.041.039.039.530.027.024.541.0
평균 최고 기온(°C)16.216.817.919.221.924.928.328.627.323.719.617.021.8
일평균 기온(°C)12.513.114.015.217.720.623.523.922.819.715.913.317.7
평균 최저 기온(°C)8.89.410.111.213.416.218.719.118.315.612.29.713.6
역대 최저 기온(°C)-4.21.03.51.07.010.011.011.010.07.03.04.0-4.2
평균 강수량(mm)103.598.771.862.237.313.92.12.514.965.1134.6129.3735.9
평균 강수일수 (≥ 1.0 mm)11.211.410.19.36.13.70.80.83.18.011.112.087.6
평균 상대 습도(%)80817878767470727376798176
월평균 일조 시간169.2166.9231.7251.7298.9306.8344.0330.7275.6238.2180.6166.92,960.7
출처 1: NOAA[102]
출처 2: 독일 기상청 (습도, 1973년~1993년)[103], Meteo Climat (최고 및 최저 기록)[104]


5. 행정 구역

탕헤르-아실라 주는 행정적으로 다음과 같이 나뉜다.[52]

이름지리 코드유형가구 수인구 (2004)외국인 인구모로코 인구참고
아실라511.01.01.시(Municipality)6,24528,2176628,151
브니 마카다511.01.03.군(Arrondissement)47,384238,38274238,308
샤르프-므고가511.01.05.군(Arrondissement)30,036141,987342141,645
샤르프-수아니511.01.06.군(Arrondissement)25,948115,839273115,566
탕헤르-메디나511.01.07.군(Arrondissement)40,929173,4772,323171,154
알 만즐라511.03.01.농촌 코뮌(Rural commune)5553,03103,031
아쿠아스 브리에시511.03.03.농촌 코뮌(Rural commune)7874,13234,129
아지나테511.03.05.농촌 코뮌(Rural commune)9204,89504,895
다르 샤우이511.03.07.농촌 코뮌(Rural commune)8774,49504,4951,424명의 주민이 다르 샤우이 중심지에 거주하며, 3,071명의 주민이 농촌 지역에 거주한다.
르칼루아511.03.09.농촌 코뮌(Rural commune)2,40512,946112,945
사헬 샤말리511.03.11.농촌 코뮌(Rural commune)1,0875,58825,586
시디 리야마니511.03.13.농촌 코뮌(Rural commune)1,88310,895110,8941,101명의 주민이 시디 리야마니 중심지에 거주하며, 9,794명의 주민이 농촌 지역에 거주한다.
부칼레프511.81.03.농촌 코뮌(Rural commune)3,65718,699418,6953,187명의 주민이 구즈나이아 중심지에 거주하며, 15,512명의 주민이 농촌 지역에 거주한다.


6. 경제

탕헤르 항구


탕헤르 메디나(구시가지)의 거리


탕헤르는 카사블랑카 다음으로 모로코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산업 중심지이다. 주요 산업 부문은 섬유, 화학, 기계, 야금 및 조선 등으로 다양하다.[91] 현재 도시에는 4개의 산업 단지가 있으며, 그중 2개는 탕헤르 자유구역(TFZ) 지위를 가지고 있다. 이븐 바투타 국제공항 근처에 위치한 탕헤르 자유무역지구에는 60억모로코 디르함이 투자되어 45,000개의 일자리를 창출했으며,[92] 특히 일본의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들이 많이 진출해 있다.[93] 파이낸셜 타임스는 2015년 탕헤르 자유무역지구를 아프리카 최고의 자유무역지구로 평가했다.[94]

탕헤르 경제는 관광 산업에 크게 의존한다. 1960년대와 70년대에는 히피 트레일의 일부로 인기를 끌었으나,[53] 이후 저렴한 항공편으로 마라케시 같은 다른 도시들의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탕헤르의 인기는 감소하고 관광 명소는 황폐해졌다. 범죄율 증가와 다소 위험하다는 평판 역시 관광객 감소에 영향을 미쳤다.[53] 그러나 2010년 이후 모하메드 6세 국왕은 도시의 해운 및 관광 시설 복원과 산업 기반 개선에 주력했다. 해변을 정비하고 새로운 카페와 클럽이 들어섰으며, 새로운 상업 항구 건설로 크루즈 선박이 더 이상 화물 컨테이너 옆에 정박하지 않게 되었다.[53] 외국인 투자에 힘입어 해변 휴양지가 늘어나고 있으며, 부동산건설 회사들이 관광 인프라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시내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만은 7km 이상 펼쳐져 있다.

2007년과 2008년은 탕헤르에 중요한 시기였는데,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들이 완료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도시 외곽 40km 지점에 위치한 새로운 항구인 탕헤르-메드와 산업 단지, 4만 5천 석 규모의 스포츠 경기장, 확장된 비즈니스 지구 및 개조된 관광 인프라가 포함된다. 2004년 건설을 시작하여 2007년부터 가동된 탕헤르-메드 항은 지브롤터 해협의 중요한 지점에 위치하여 유럽과 아프리카를 잇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항구 물동량의 85%는 환적 화물이며, 15%는 모로코 국내 수출입 물량이다.[54] 이 항구는 규모, 인프라, 효율적인 선박 통행 관리로 주목받으며, 모로코를 유럽의 화물 운송 산업 및 지중해, 아프리카, 아메리카 국가들과 연결하는 데 기여했다. 이를 통해 탕헤르는 국제적인 기회를 활용하여 경제 성장을 촉진하는 더욱 세계화된 도시로 발돋움했다.[55] 항구 건설 및 운영은 항구 자체에서 2만 개, 연관 경제 활동을 통해 10만 개 등 총 12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탕헤르 지역의 농업은 3차 산업이며 주로 곡물 농업이 이루어진다. 이 도시는 한때 메디나 남쪽 과수원에서 처음 재배된 탄자린(만다린 오렌지의 일종)으로 유명했지만, 널리 수출되지는 못했다. 1900년대 초 이미 지역 소비량이 공급량을 초과하여 테투안 등지에서 수입해야 할 정도였다.[56] 탄자린의 대규모 재배는 오히려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시작되었는데, 첫 번째 나무는 1843년 이전에 메이저 앳웨이(Major Atway)에 의해 팔라트카에 도입되었다.

메디나(구시가지)의 수공업은 주로 가죽 세공, 나무와 은으로 만든 수공예품, 전통 의류 및 모로코식 신발 제작에 특화되어 있다.

한편, 다른 소도시와 마을에서의 농촌 유출로 인해 도시 인구가 빠르게 증가했다. 2014년 인구는 약 85만 명으로, 1982년의 25만 명에 비해 3배 이상 늘어났다. 이러한 급격한 성장은 주로 빈곤층이 거주하고 기반 시설이 부족한 외곽 교외 지역의 확산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2023년 탕헤르는 커넥트 노선 개발 포럼을 개최했다.[57][58]

7. 교통

탕헤르는 모로코 북부의 주요 교통 중심지로, 항공, 철도, 도로, 해상 교통망을 통해 국내외 주요 도시와 연결된다. 시 외곽에는 이븐 바투타 국제공항이 위치해 있으며, 탕헤르 빌 역에서는 ONCF가 운영하는 일반 철도 노선과 아프리카 최초의 고속철도인 케니트라-탕헤르 고속철도(알 보락)를 이용할 수 있다. 라바트-탕헤르 고속도로는 라바트, 카사블랑카, 페스 등 주요 도시 및 탕헤르-메드 항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도로망이다. 또한, 지중해와 대서양을 잇는 전략적 위치에 자리한 탕헤르-메드 항과 시내 페리 터미널을 통해 활발한 해상 교통이 이루어진다.

7. 1. 항공

탕헤르 시내에서 남서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이븐 바투타 국제공항이 있다.

7. 2. 철도

탕헤르 빌 역에 정차한 알 보락


탕헤르 빌 역(Tanger-Ville railway station)에서는 모로코 국영 철도 회사인 ONCF가 운영하는 열차를 이용할 수 있다. 이 역을 통해 남쪽으로는 라바트, 카사블랑카, 마라케시까지, 동쪽으로는 페스, 우이다까지 연결된다.

2018년 11월 18일에는 아프리카 대륙 최초의 고속철도인 케니트라-탕헤르 고속철도가 개통되었다.[95] 프랑스의 TGV 기술을 기반으로 한 이 고속철도는 '알 보락'(البُراق|알부라끄ara)이라는 이름으로 운행되며, 탕헤르와 카사블랑카를 2시간 10분 만에 연결한다. 향후 카사블랑카케니트라 사이의 노선 개선을 통해 전체 운행 시간을 1시간 30분으로 단축할 계획이 있었다.

7. 3. 도로

라바트-탕헤르 고속도로는 라바트를 경유하여 탕헤르를 페스와 250km 거리로 연결하며, 카사블랑카를 경유하여 세타트와 330km 거리로 연결한다. 또한 이 고속도로는 탕헤르-메드 항과도 연결된다.

7. 4. 항만

새로운 탕헤르-메드 항은 덴마크 회사 A. P. 몰러-머스크 그룹이 관리하며, 기존 항구는 관광 및 레크리에이션 개발을 위해 사용될 예정이다. 시내의 페리 터미널에서는 알헤시라스 등을 향하는 페리가 운항된다.

8. 교육

탕헤르에서는 아랍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영어 등 4가지 언어를 기반으로 한 교육 시스템이 운영되고 있다. 각 시스템은 유치원부터 12학년까지의 과정을 제공하며, 고등학교 마지막 3년 동안에는 독일어 수업도 선택할 수 있다. 12학년 과정을 마치면 학생들은 바칼로레아 또는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게 된다.

도시 안팎으로 여러 고등 교육 기관이 자리 잡고 있다. 압델말렉 에사디 대학교(Abdelmalek Essaâdi University)는 법학, 경제학 및 사회과학 학부(FSJEST)와 기술과학 학부(FST) 등 다양한 학부를 운영하고 있으며, 가장 많은 학생이 다니는 OFPPT 산하 ISTA 연구소도 이 대학 소속이다. 국제 관광 고등 연구소(Institut Supérieur International de Tourisme, ISIT)는 모로코에서 가장 권위 있는 관광 학교 중 하나로, 경영학부터 호텔 경영까지 다양한 과정을 제공하며 졸업장을 수여한다. 국립 상업 경영학교(ENCG-T)는 모로코의 주요 경영대학 중 하나이며, 국립 응용과학대학교(ENSA-T)는 성장하고 있는 공과대학이다.

탕헤르 시내 전역에는 100개가 넘는 모로코 초등학교가 분포해 있다. 이들 학교는 사립과 공립으로 나뉘며, 대부분 아랍어와 프랑스어로 수업을 진행한다. 일부 학교에서는 5학년까지 영어를 가르치기도 한다. 초등학교에서는 수학, 미술, 과학 활동 등 비종교 과목을 공통적으로 배운다.

탕헤르에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국제 학교 및 외국계 학교들이 있다.

학교명구분비고
탕헤르 아메리칸 스쿨국제 학교영어권
아드리앵 베르셰 학교(École Adrien Berchet)프랑스 초등학교프랑스어권
르 드트로아 학교 그룹(Groupe scolaire Le Détroit)프랑스 학교프랑스어권
라몬 이 카할 학교(Colegio Ramón y Cajal)스페인 초등학교스페인어권
탕헤르 잉글리시 칼리지(English College of Tangier)국제 학교영어권
탕헤르 레뇨 뤼세(Lycée Regnault de Tanger)프랑스 고등학교프랑스어권
세베로 오초아 스페인 학교(Instituto Español Severo Ochoa)스페인 고등학교스페인어권
탕헤르 무함마드 파티흐 터키 학교(Mohammed Fatih Turkish School of Tangier)국제 학교터키어권
탕헤르 앵글로 모로칸 스쿨(Tangier Anglo Moroccan School)국제 학교영어권


9. 문화

탕헤르는 독특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다양한 문화가 교차하는 도시로 발전했다. 특히 탕헤르 국제지구 시절에는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덕분에 모로코 독립 운동가들이 프랑스와 스페인 당국의 감시를 피해 활동할 수 있는 중요한 공간이 되기도 했다.[42] 1951년에는 모로코의 여러 민족주의 정당들이 이곳에서 만나 독립 운동을 위한 국가전선을 결성하기도 했다.[43]

1956년 모로코가 완전한 주권을 회복하면서 탕헤르도 모로코 영토로 통합되었다.[44] 통합 당시 탕헤르의 인구는 약 4만 명의 무슬림, 3만 1천 명의 기독교인, 1만 5천 명의 유대인으로 구성되어 있어 다문화적인 특징을 보여주었다.[45]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배경은 탕헤르를 예술가와 작가들에게 매력적인 장소로 만들었으며, 이는 하위 섹션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진다. 오늘날 탕헤르는 스페인지브롤터에서 오는 크루즈 여행객과 당일 여행객들에게 인기 있는 관광지로 남아 있다.

9. 1. 문화적 특징

''탕헤르의 광신자들'' (1830년대) 외젠 들라크루아


''무레이 압드 에르 라만 모로코 술탄, 메키네스 궁전을 떠나며'' (1845년) 외젠 들라크루아


''탕헤르 테라스의 젊은 여성들'' (1880년대) 루돌프 어니스트 작


''탕헤르의 황혼'' (1914년) 엔리케 시모네


: 내 생애 처음으로 탕헤르를 보았을 때보다 더 기이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마치 ''천일야화''의 한 이야기 같았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인종과 의상들이 섞여 있었죠... 이 온 세상이 열병에 걸린 듯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64]

: — 외젠 들라크루아, 알렉시 드 토크빌에게 보낸 편지

탕헤르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였다. 무슬림, 기독교인, 유대인 공동체가 함께 살아가며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이러한 다문화적 배경과 이국적인 풍경은 많은 예술가와 작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19세기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는 1832년 탕헤르를 방문하여 이곳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탕헤르의 강렬한 빛과 색채, 사람들의 모습에서 고전 고대의 생생함을 발견했으며, 이는 그의 작품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들라크루아는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은 바로 내 문 앞에 있습니다..."[65]라고 말하며 당시의 감흥을 표현했다. 그는 탕헤르에서 수많은 스케치와 수채화를 남겼고, 이는 이후 ''탕헤르의 광신자들'', ''알제리의 여인들''과 같은 유명 작품으로 이어졌다. 들라크루아의 작품은 반 고흐, 고갱, 피카소 등 후대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특히 탕헤르의 독특한 빛은 많은 예술가들을 매료시켰는데, 세잔은 "이 모든 빛나는 색깔...은... 마치 술잔에 가득 찬 와인이 목구멍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처럼 눈에 들어와 곧바로 취하게 만듭니다."[66]라고 묘사했다. 이후 탕헤르는 들라크루아가 경험한 빛과 색을 직접 체험하려는 예술가들의 필수 방문지가 되었다. 앙리 마티스 역시 여러 차례 탕헤르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했고, 캘리포니아 예술가 리처드 디벤콘은 마티스의 모로코 그림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들어 탕헤르는 더욱 다양한 예술가와 작가들을 끌어들였다. 특히 1940년대부터 1956년까지 국제 지대였던 시기에는 독특한 자유와 무법적인 분위기 속에서 기이한 백만장자, 비밀 요원, 사기꾼, 투기꾼들이 모여드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67] 이러한 배경 속에서 작가 조지 오웰, 작가이자 작곡가 폴 볼스,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 비트 작가인 윌리엄 S. 버로우즈, 앨런 긴즈버그, 잭 케루악, 화가 브라이언 기신, 그리고 록 밴드 롤링 스톤스 등이 탕헤르에 거주하거나 방문하며 작품 활동을 펼쳤다. 바버라 허튼과 같은 세계적인 부호들도 이곳에 별장을 소유하고 머물렀다.

특히 폴 볼스는 50년 이상 탕헤르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했고, 윌리엄 S. 버로우즈는 이곳에서 그의 대표작 ''벌거벗은 점심''을 집필했다. 소설 속 배경인 인터존은 당시 탕헤르의 모습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모로코 작가 모하메드 추크리 역시 탕헤르에서 활동하며 북아프리카 문학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의 자전적 소설 ''빵을 위해서만''은 폴 볼스와의 협력을 통해 영어로 번역되어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테네시 윌리엄스는 이 작품을 "인간의 절망에 대한 진정한 기록"이라고 평가했다. 이 외에도 장 제네, 압데슬람 벌라이시, 라르비 라야치, 모하메드 므라베트, 아메드 야쿠비 등이 탕헤르를 배경으로 활동한 주요 문학가들이다.

탕헤르 주민들은 다른 모로코 지역과 구별되는 독특한 모로코 아랍어 방언을 사용한다. 이 방언은 발음, 속도, 문법, 어휘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 공용어인 아랍어와 함께 프랑스어가 교육 및 비즈니스 분야에서 널리 사용되며, 지리적 근접성으로 인해 스페인어 역시 많은 주민들이 유창하게 구사한다. 영어는 주로 관광 부문에서 사용된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이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많은 탕헤르 토착 주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인근 스페인으로 이주하면서 도시의 인구 구성에 변화가 생겼다. 동시에 모로코 남부 지역에서의 국내 이주가 증가하면서 탕헤르 고유의 방언은 점차 희석되거나 변화하고 있으며, 공공장소에서는 남부 방언이 더 자주 들리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소셜 미디어의 영향과 함께 탕헤르의 정체성 변화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탕헤르 출신이거나 이곳과 깊은 관련이 있는 다른 유명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이름주요 활동/설명
이븐 바투타중세 시대의 유명한 여행가
장뤼크 멜랑숑프랑스 정치인
하인츠 티티엔독일의 지휘자 및 오페라 감독
압데르라흐만 유수피모로코 총리


9. 2. 언어

탕헤르 주민 대부분은 다른 다리자 방언과 구별되는 매우 독특한 모로코 아랍어 방언을 사용한다. 이러한 차이는 발음, 속도, 문법 및 고유한 어휘에서 나타난다. 아랍어프랑스어와 함께 정부 문서와 도로 표지판에 사용되는 공용어이다. 프랑스어는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교육 과정에 포함되어 있으며, 대학교와 대기업에서도 널리 사용된다. 스페인어는 많은 탕헤르 현지인들이 유창하게 이해하고 구사하는 언어이다. 반면 영어는 주로 관광 부문에서 사용되어 왔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탕헤르의 토착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특히 젊은 세대가 인근 스페인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도시의 산업 부문은 꾸준히 확장되고 있지만, 모로코 남부 지역에서 북부로의 국내 이주 또한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인구 구성의 변화는 탕헤르 방언의 독특성이 약화되거나 변화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연구에서는 소셜 미디어 역시 이러한 언어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중 하나로 지목하기도 했다.

오늘날 공공장소에서는 탕헤르 고유의 방언보다는 남부 지역의 다리자 방언이 더 흔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일부에서는 탕헤르가 과거의 언어적 정체성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9. 3. 종교

탕헤르 주민의 대다수는 무슬림이며, 소수의 기독교인과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한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유럽계 기독교인과 유대인이 각각 도시 인구의 거의 4분의 1을 차지했으나, 1956년 모로코 독립 이후 유럽 인구가 크게 감소했다. 현재는 소규모의 모로코 기독교인 공동체와 외국인 로마 가톨릭 및 개신교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으며,[69][70] 모로코 유대인은 세계 유대인 회의에 따르면 약 150명 정도 남아 있다.[71]

탕헤르 가톨릭 대성당


탕헤르의 모로코 기독교인들


탕헤르는 무슬림 정복 이전부터 기독교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의 명목 주교좌로 남아 있다. 로마 제국 시대에는 마우레타니아 팅기타나 속주에 속했으며, 3세기 말에는 탕헤르의 마르켈루스와 탕헤르의 카시아누스가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포르투갈 지배 하에서는 탕헤르 교구가 리스본 총대교구의 보좌 주교였으나 1570년 세우타 교구와 통합되었다. 프랑스스페인의 보호령 시기에는 모로코의 사도대목구장 거주지였으며, 1630년 설립된 사도대목구는 프란치스코회에 위탁되었다. 당시 탕헤르에는 가톨릭 교회, 예배당, 학교, 병원 등이 있었다. 사도대목구는 1908년 모로코 사도대목구로 승격되었고, 1956년에는 탕헤르 대주교구가 되었다.[68]

주요 종교 시설로는 탕헤르 가톨릭 대성당(무염시태 성모 교회)과 영국 성공회의 세인트 앤드류 교회가 있다.

9. 4. 스포츠

탕헤르 시민들은 스포츠 중에서 축구를 가장 중요한 오락거리로 여기며, 도시 곳곳에는 여러 개의 축구장이 있다. 탕헤르는 모로코의 다른 도시들과 함께 이븐 바투타 스타디움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축구 토너먼트의 개최 도시 중 하나였으나, 모로코가 참가를 거부하면서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참가가 금지되었다.[72] 대신 탕헤르는 기니가 개최권을 반납한 후 2025년 대회 경기를 개최할 예정이며, 2030년 FIFA 월드컵 경기를 개최할 가능성도 있다.

농구는 탕헤르에서 두 번째로 많이 행해지는 스포츠이다. 이 도시는 IRT, 아약스 탕헤르, 유벤투스 탕헤르 등 지역 팀들로 유명하다.

탕헤르 국립 크리켓 경기장은 모로코에 있는 유일한 최고 수준의 크리켓 경기장이다. 이 경기장은 2002년 8월 12일부터 21일까지 첫 국제 토너먼트를 개최했으며, 파키스탄, 남아프리카 공화국, 스리랑카가 50오버 원데이 삼각 시리즈에 참가했다. 국제 크리켓 위원회는 탕헤르 크리켓 경기장에 국제 경기장 지위를 부여했으며, 이는 탕헤르 크리켓 경기장이 북아프리카 최초의 국제 크리켓 경기장이 되는 것을 허용한 공식 승인이다.

탕헤르를 연고지로 하는 축구 클럽은 다음과 같다.

  • 아틀레티코 탕헤르
  • 이티하드 탕헤르


탕헤르에는 이븐 바투타 스타디움을 중심으로 74ha에 달하는 스포츠 시설이 있으며, 테니스 코트, 럭비 경기장, 농구 경기장 등이 있다.[98]

9. 5. 자매 도시

탕헤르의 자매 도시는 다음과 같다.[78]


10. 주요 명소

카스바 문


탕헤르 대모스크의 정문


밥 알-아사(Bab al-Assa)의 분수


모세 나혼 회당(Moshe Nahon Synagogue) 내부


탕헤르에는 역사적인 구시가지(메디나)부터 현대적인 신시가지, 그리고 경치 좋은 외곽 지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명소가 분포해 있다.

구시가지는 좁은 골목과 전통적인 건물들이 특징이며, 카스바 궁전, 대모스크, 미국 공사관 박물관, 여러 유대교 회당 등 역사적, 문화적 장소들이 밀집되어 있다.

신시가지는 구시가지 성벽 외부에 형성된 지역으로, 그랑 소코(Grand Socco) 광장을 중심으로 상업 시설과 행정 건물, 현대미술관, 그란 테아트로 세르반테스(Gran Teatro Cervantes) 등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외에도 마르샨(Marshān) 지역과 외곽 지역에는 스파르텔 곶(Cape Spartel), 헤라클레스 동굴(Caves of Hercules), 퍼디카리스 공원(Perdicaris Park) 등 자연 경관을 즐길 수 있는 명소들이 있다.

각 명소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아래 하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10. 1. 구시가지 (메디나)



메디나(옛 도시)는 과거 약 1828.80m(약 1800m)가 넘는 석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이 성벽의 대부분은 도시의 포르투갈 점령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이후 여러 시대에 걸쳐 보수 공사가 이루어졌다. 주요 성채 세 곳은 아일랜드 타워(Bordj al-Naʿam), 요크 성(Bordj dar al-Barud), 그리고 Bordj al-Salam이다.

메디나 내부의 주요 장소는 다음과 같다.

  • 카스바 궁전: 탕헤르 총독의 옛 저택으로, 과거 영국 상층 성(English Upper Castle)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현재 지중해 문화 박물관(Museum of Mediterranean Cultures)으로 사용된다.
  • 카스바 모스크
  • 이븐 바투타의 무덤: 유명한 여행가 이븐 바투타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
  • 쁘띠 소코(Petit Socco): 메디나 남쪽(하부) 지역의 중앙 광장이다.
  • 뤼 에스 시아긴(Rue Es-Siaghine): 쁘띠 소코로 이어지는 길이다.
  • 다르 니아바(Dar Niaba)
  • 무염시태 성당
  • 탕헤르 대모스크
  • 컨티넨탈 호텔
  • 회당: 메디나 안에는 여러 유대교 회당이 있다. 아브라함 톨레다노 회당[59], 베이트 예후다 회당(Beit Yehuda Synagogue), 모세 나혼 회당(Moshe Nahon Synagogue)[60] 등이 있다.
  • 로랭 재단 박물관: 옛 랍비 모르데카이 벵지오 회당 자리에 1930년 문을 열었다.[61][74] 예술 작품 외에도 탕헤르의 역사를 보여주는 신문, 사진, 포스터 등이 전시되어 있다.[74]
  • 탕헤르 미국 공사관 박물관: 1821년 술탄 무라이 술리만(Sultan Moulay Suliman)이 미국에 하사한 건물이다. 이곳은 미국 영사관과 공사관으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정보 요원들의 주요 거점이자 평화 봉사단 훈련 시설이기도 했다. 오늘날 박물관으로 사용되며 미국과 모로코 간의 관계와 모로코 유산을 보여주고, 작가 폴 보울스(Paul Bowles)를 기리는 전시관도 있다.[73]
  • 카르멘-마세인 박물관(Musée de Carmen-Macein)


10. 2. 신시가지


  • 항구에 위치한 랄라 아블라 모스크(Lalla Abla Mosque)
  • 그랑 소코(Grand Socco), 옛 시장이자 옛 성벽 밖의 중앙 광장
  • 멘두비아(Mendoubia) 궁전, 현재 모로코의 식민지 저항을 기리는 박물관(museum of Moroccan resistance against colonialism)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주변 공원은 과거 묘지 자리이다.
  • 시디 부 아빕 모스크(Sidi Bou Abib Mosque)
  • 세인트 앤드류 교회
  • 옛 영국 영사관 건물에 자리한 현대미술관
  • 탕헤르 로마 가톨릭 대성당(Roman Catholic Cathedral of Tangier)
  • 압델하피드 궁전(Abdelhafid Palace)
  • 모하메드 5세 모스크
  • 프랑스 영사관, 파스퇴르 대로(Boulevard Pasteur) 시작 부분에 위치한다.
  • 모로코 채무 관리청(Moroccan Debt Administration) 건물, 현재 관광 안내소로 사용된다.
  • 그란 테아트로 세르반테스(Gran Teatro Cervantes)
  • 탕헤르 프랑스 교회(French Church of Tangier)
  • 새로운 예술과 문화의 궁전(New Palace of Arts and Cultures), 2024년 국제 재즈의 날 기념 행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건축물이다.[62][63]

10. 3. 기타


  • 말라바타 곶(Cape Malabata)
  • 투우장
  • 샤르프 언덕(Charf Hill)
  • 퍼디카리스 공원(Perdicaris Park)
  • 스파르텔 곶(Cape Spartel): 탕헤르 북서쪽에 위치한 곶으로, 지중해대서양의 경계 지점이다. 이곳의 등대는 2012년부터 2023년까지 발행된 200 DH 지폐에 그려져 있었다.[96]
  • 헤라클레스 동굴(Caves of Hercules): 탕헤르 북서부 대서양 연안에 있는 동굴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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