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역사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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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 역사 논쟁은 고대 왕국 고구려의 역사를 둘러싸고 중국, 한국, 북한 등 주변 국가 간에 벌어지는 해석상의 갈등을 의미한다. 중국은 고구려가 자국의 지방 정권이었다고 주장하며, 한국은 고구려가 한국사의 일부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논쟁은 영토 주권, 민족 정체성, 역사적 정통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2002년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다. 고구려사 귀속 문제는 현대 국가의 경계를 기준으로 과거 역사를 해석하는 데서 발생하는 한계를 보여주며, 보다 넓은 동북아시아사적 시각과 탈(脫)민족주의적 역사관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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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역사 논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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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적 배경
2004년 4월, 중국 외교부가 홈페이지에서 고구려 관련 내용을 삭제하고 관영 매체들이 고구려를 중국 지방정권으로 보도하면서 중국의 역사 왜곡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같은 해 6월, 동북공정 사무처가 홈페이지를 통해 공정 내용을 공개하면서 한중 간 갈등이 심화되었다.[184]
이 문제와 관련하여, 2004년 8월 아시아 유럽 정상회의(ASEM)에서 원자바오 중국 총리가 노무현 대통령에게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했고, 양국은 고구려사 문제에 대해 5개 항에 구두 합의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중국 정부는 고구려사 문제가 양국 간 중대한 현안임을 인지한다. |
2. 역사 문제로 인해 한중 우호 협력 관계가 손상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 발전에 힘쓴다. |
3. 고구려사 문제의 공정한 해결을 추구하고, 정치 문제화를 방지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
4. 중국 측은 중앙 및 지방 정부 차원의 고구려사 관련 기술에 대한 한국 측의 관심에 이해를 표명하고, 문제가 복잡해지지 않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
5. 학술 교류를 조속히 개최하여 문제를 해결한다. |
2006년 10월 한중 정상회담에서도 역사 인식 문제가 양국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 다시 합의했다.[184] 그러나 2022년 9월 중국국가박물관이 고구려와 발해 역사를 의도적으로 삭제한 한국사 연표를 전시하면서 갈등이 다시 격화되었다.[185]
마오이즘 전성기 중국 정부는 고구려를 한국 역사로 인정했다.[3] 1963년 저우언라이 총리는 한국인이 고대부터 중국 동북 지역에 거주했으며,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 국가라고 발언했다.[1]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중국 학계에서 중국 영토 내 모든 정체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간주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2] 장멍산은 고구려를 중국 역사로도 간주하는 "하나의 역사, 이중 사용"(, yīshǐ liǎngyòng) 시스템을 제안했다.[2]
고구려는 기원전 1세기경부터 7세기까지 존속했으며, 전성기에는 만주 남부, 한반도 중부, 연해주 일부까지 지배했다. 이 지역은 19세기 후반부터 여러 국가의 쟁탈 대상이 되었고, 근대 국민 국가 형성 과정에서 "구 고구려 영토"의 역사 귀속 문제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 논쟁은 20세기부터 21세기에 걸쳐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었다. 2002년 중국에서 동북공정이 시작되어 고구려를 포함한 동북(만주) 역사를 "중화민족" 역사로 편입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129][127] 2003년 북한의 고구려 벽화 고분 세계유산 등재 신청이 중국의 반대로 무산되면서, 고구려 "귀속" 문제는 2000년대 한중 간 외교 문제로 떠올랐다.[126]
2. 1. 일본의 대륙 정책과 만선사
근대 초기에 고구려를 포함한 북동아시아사 연구를 가장 열정적으로 추진한 것은 일본이었다.[130]。 이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벌어진 청일·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후, 일본이 한반도·만주로 세력을 확대해나간 데 따른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에서의 조선과 만주 역사 연구도 활발해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일본과 중국의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만주를 둘러싼 "역사 논쟁"도 벌어졌다.[130]일본에서 만주·조선 역사 연구를 주도한 시라토리 쿠라키치와 이나바 군잔(이나바 이와키치)은 현실의 일본 대륙 정책에 대한 제언과 일본이 이 지역을 지배하는 것의 역사적 정통성을 의식하면서 연구를 진행했다.[131][132]。 그들의 견해에서 중요한 점은 만주와 조선을 불가분의 영역으로 파악하고, 고구려를 이를 체현한 존재로 위치시켰다는 것이다. 시라토리와 이나바는 각각 조선반도와 만주의 일체성을 설파했고, 일본의 조선반도 지배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요동반도의 영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나바 군잔은 그 역사적 정통성과 과거의 교훈으로서 바로 조선반도에서 요동반도를 포함한 남만주를 영유했던 과거 왕국인 고구려를 참조했다.[131][132]。 그는 "반도 존립을 옹호할 수 있는 일본"은 "요동반도의 확실한 수호"가 꼭 필요하며, 이를 동시에 지배하는 "만한일통(滿韓一統)의 경영"을 설파했다.[133]。 그리고 고구려가 요동반도를 지배하여 대륙 세력을 격퇴한 것을 "진정으로 반도 경영의 모범을 후세에 보여주는 것"으로, 처음으로 "만한일통의 경영"을 체현한 고구려의 역사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133]。 이나바는 더 나아가 만주와 조선의 역사적 일체성을 전제로, 1907년에 발표한 논고에서 만주로의 조선인 이주를 "마치 고향에 돌아가는 듯한 감상을 품는 자가 적지 않다"라고 하여 당연한 일이라고 논했다.[134] 이러한 만주와 조선을 일체로 파악하는 틀은 일반적으로 만선사라고 불렸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종결까지 동양사의 한 분야로 연구되었다.
그 후,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총재가 된 고토 신페이의 협력을 얻은 시라토리 쿠라키치는 이나바 군잔, 이케우치 히로시와 쓰다 소키치 등과 함께 만철(満鉄) 역사조사부를 발족시켜 만주·조선의 역사 연구를 진행했다.[136]。 이나바 군잔의 회상에 따르면, 그들은 조선총독부 설치 시 의견을 요청받아, 그 수도는 만주와 조선의 일체성 관점에서 경성(현: 서울)은 너무 남쪽에 위치하므로 평양이 적절하고, 명칭도 고려총독부가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제시했다.[137]。 이 안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고려는 수도를 평양으로 하고 만주 경영과의 관계가 전망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후의 고려(왕씨)가 아닌 고구려를 의식한 명칭이었다고 생각된다.[138]。
이러한 만주와 조선의 일체성을 둘러싼 논의는 현실 정치에 대응하여 다양하게 변용되었다. 일본에 의한 한국 병합 후, 1919년에 조선의 독립운동인 3·1 운동이 발생하자, 독립운동 세력은 역사적인 근거로서 단군조선 이래의 조선 민족의 "영광스러운 4천 년"의 역사를 받들었다. 이나바 군잔은 일본에 의한 한국 병합을 "은혜"로 보는 입장에서 이를 비판했다. 이나바는, 단군조선은 실존성이 부족하고, 기자조선·위만조선은 한인의 식민지에 불과하며, 고구려와 백제도 "순수한 만주인"의 왕국이며, 신라는 진(秦)으로부터의 망명자가 만든 나라이므로, "순수한 한인에게서 나와 주권자의 지위를 차지한 것은 전무(絶無)"라고 하여 조선 독립의 역사적 정통성을 부정했다.[139]。 한편 그는 당시 다수 존재했던 조선인의 만주 이주는 "민족적 대사명"이라고 하여, 그 문맥에서 고구려와 백제를 조선 민족의 역사에 위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나바는 "조선인은, 그 전통적이라고 생각되는 신라 본위의 역사관을 포기하고, 삼국 일체의 본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만약, 조선 민족을 광의로 생각하여, 신라 통일 이전의 삼국 시대를 기초로 한다면, 조선의 영토를 만주까지 미칠 수 있다"라고 말했다.[140]。 다만, 이나바의 논의에서는 고구려와 백제는 어디까지나 만주인의 한 파(派)로 여겨졌으며, 그것을 조선 민족의 역사로 하는 것은, "오늘날의 조선 민족 안에는 다수의 만주 민족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여 "광의로는"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이유였다.[140]
2. 2. 만주사변과 만주국의 등장
1931년의 만주사변과 그 후의 만주국 건국은 만주의 귀속을 둘러싼 논쟁을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일으켰다[141]. 일본 학자들은 만주가 독자적인 역사를 가진 공간이며 중국의 일부가 아니라고 주장한 반면[142], 중국 학자들은 만주를 중국의 동북으로 간주하여 중국 본토와 역사적으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고 주장했다[143]. 이러한 논쟁 속에서 고구려사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졌다.당시 만주국의 건국대학 교수였던 이나바 군잔은 고대부터 만주국에 이르는 '통사' 확립을 시도했다. 그는 퉁구스라고 불렸던 만주국 영토 내의 여러 민족이 한민족과는 계통이 다른 '만주 민족'이라고 주장했고, 고구려사도 중국사로부터 독립된 '만주 민족'의 역사로 간주했다[144]. 반면, 중국 학자 김유부는 고구려를 중국사의 일부로 보았다[145]. 이처럼 고구려사의 귀속 문제는 만주국의 역사적 정통성을 둘러싼 일본과 중국 간의 정치적 문제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이 무렵, 만주국과 일본의 역사적 일체성(일만 일체)을 추구하는 논의도 진행되었고, 만주에서의 역사·고고학적 조사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발해가 중시되었는데, 발해를 만주국의 역사로 위치 지은 후, 일만 관계는 "1200년 전의 국교가 부활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발굴 조사에 참여한 학자 하라다 요시토는 "일만 양국인의 피는 천이백 년 전부터 이어져 왔으므로, 이제 와서 일만 친선을 새롭게 설파하는 것은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이다."라고 말했다[146].
"일만 일체"를 전제로, "일본과 일체인 만주"와 조선도 정치·경제·군사에서 불가분의 영역이라는 "선만 일여"라는 구호가 조선총독부와 관동군을 중심으로 제창되었다. 고고학자 후지타 료사쿠는 고고학적 관점에서 조선과 만주 사이에 경계가 없고 고구려·백제·신라, 더 나아가 일본은 공통된 문화적 성격을 지녔으며, 특히 고구려를 "선만 일여"를 체현한 존재로 중시했다[147]. 언어학자 고노 로쿠로는 고구려어를 비롯한 부여족의 언어가 퉁구스어인 만주어에 가깝고, 한국어도 이들과 동계의 언어라고 하여, 언어학적 견지에서 "선만 일여"를 지지했다[148].
만선사의 관념은 20세기 초 일본의 조선·만주 지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발달했으며, 그 속에서 조선과 만주를 일체로 지배했던 고구려는 이 틀에 근거를 부여하는 존재로서 중시되었다[151]. 역사학자 이노우에 나오키는 "만선사는 고구려사였다고 할 수 있겠다."라고 평했다[151].
만주와 조선을 하나의 틀로 다루는 만선사의 관점은 독립된 만주국의 존재와 모순되기도 했고, 일본 역사 연구에서 확고한 지위를 구축하지는 못했다[152]. 다만, 만주사라는 틀에서도 야노 진이치나 와다 기요시 등은 만주가 중국과는 별개의 독립된 세계임을 주장했다[153].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하면서 대륙에서 일본의 세력이 사라지자, 만주를 둘러싼 일본 역사학의 틀은 존립 기반을 상실하고 소멸해 갔다[152].
2. 3. 해방 이후 한국, 북한, 중국의 고구려사 인식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일본 제국은 한국의 고구려를 다른 삼국 시대와 구분하여 일본(왜)의 영향력이 고구려가 아닌 백제와 신라에 있었다고 주장하며, 한국 식민 지배를 정당화했다.[13] 그들은 자신들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원래 요동에 있던 비석(《주선현신사비》)을 평양으로 옮겼다.[13]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고구려의 독립성을 주체사상의 일환으로 미화하며 고구려와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반면, 대한민국을 신라에, 미국을 당나라에 비유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사군의 존재와 같이 한반도의 외세 점령에 대한 모든 징후를 부인하며 주체사상에 부합하도록 자국의 역사를 서술한다.[1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관영 매체는 중국의 주장에 대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역사를 조작하려는 가련한 시도" 또는 "편향된 시각을 통해 의도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행위"라고 비난했다.[1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한반도에는 대한민국·북한이 수립되었고, 만주(둥베이 지방)는 중국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그 결과, 구 고구려 영토에 해당하는 지역은 압록강을 경계로 중국과 북한이라는 현대 국가에 각각 통치되게 되었다. 전후 중국에서는 고구려사 연구가 저조했다.[154] 이는 냉전 구조 속에서 자본주의 진영에 대항할 필요가 있었던 중국에서 국경 문제 등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고구려사 연구에 대한 논의를 피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있다.[154] 이러한 고구려사 연구의 정체 속에서, 중국에서는 일본이나 소련의 조선사 연구가 크게 참고되었고, 그 결과 고구려를 언급할 때는 이를 조선사로 하는 틀이 사용되었다.[155] 또한, 수도가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겨진 427년을 경계로 그 이전은 중국사, 이후는 조선사로 하는 "일사양용론"도 유력했다.[156][157][158] 그러나, 문화 대혁명 이후 1980년대에는 중국의 역사를 한족의 발전 과정이 아니라, 여러 민족이 규합하여 "중화민족"을 형성하는 과정으로 파악하는 이해 속에서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위치시키는 학설이 발전했다.[159]
마오이즘 전성기 동안, 중국 정부는 고구려(''중국어: 高句麗, Gaogouli'')의 역사가 한국의 역사라는 입장을 보였다.[3] 1963년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는 한국인이 고대부터 중국 동북 지역에 거주해 왔으며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 국가로 여겨지는데, 발해 유물은 고대 한국의 분파임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전 중국 총리의 발언은 "저우언라이 총리의 중-한 관계에 대한 대화"라는 제목의 문서를 통해 공개되었다.[1] 이 시기에 중국의 입장은 주요 동맹국 중 하나인 북한과의 좋은 관계에 부분적으로 기인했다.[6] 1980년대 이후, 학문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완화되었고, 1949년 이후 중국 연구의 90%를 차지하는 500권이 넘는 고구려 관련 서적이 출판되었다.[3][6] 이 기간 동안, 탄치샹과 같은 일부 학자들은 국가의 기존 역사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며, 중국 영토 내의 모든 정체(polities)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멍산은 고구려 역시 중국의 역사로 간주하는 "하나의 역사, 이중 사용"(, yīshǐ liǎngyòng) 시스템을 제안했다.[2] 그는 고구려의 수도가 706년 중 460년 동안 현대 중국 동북부에 있었고, 인구의 3/4이 한민족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3][6][4] 그는 고대 정체성을 현대 사람들과 연결하여 "부여와 고구려 사람들은 동북 지역의 중국인과 같은 계통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인은 신라 계통의 일부"라고 주장했다.[5]
한편 한국과 북한은 고구려를 자국사에 위치시켰다. 1990년대에 들어 중국의 고구려사 연구가 더욱 진전되고, 또한 중국 전역과 동아시아 각국의 학자가 참여하는 고구려사 학술 회의가 개최되면서,[160] 한국·북한과 중국의 고구려사 위치를 둘러싼 견해 차이가 실제적인 논의로 부상하게 되었다.[161] 이노우에 나오키에 따르면, 그 시초는 1993년 지린성 지안 시에서 개최된 고구려 문화 국제 학술 토론회였다.[161] 이 토론회에는 타이완·홍콩까지 포함한 동아시아 각국의 연구자가 참여했다. 토론회에서 북한 학자 박시형은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위치시키는 중국의 역사 연구에 대한 비판을 가했고, 한국의 연구자는 박시형의 견해를 지지하는 기사를 신문 등에 발표했다.[161] 이에 대해 중국의 주요 연구자들은 한국·북한 연구자들의 생각을 "침략적인", "영토 요구와 결부된" 반동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각종 반론을 펼쳤다. 이 가운데 고구려를 중국사에 위치시키는 견해가 더욱 발전했다.[162][156] 2001년에는 북한이 고구려 벽화 고분을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 유산에 등록 신청하면서 현실의 정치적 문제로 고구려 귀속 문제가 부상하게 되었다.[163] 중국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를 "정치적 행위"라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중국 정부는 북한에 공동 신청을 타진했지만 북한은 처음에는 이를 거부했다.[163]
2002년 2월, 중국에서 중국 사회 과학원과 랴오닝 성·헤이룽장 성에 의한 공동 대형 프로젝트인 "동북 변강의 역사와 현상에 대한 계열 연구 프로젝트"(동북공정)가 시작되었다.[164] 이는 중국 동북사 연구에 대한 "일부 국가의 연구 기구와 학자"로부터의 "도전"에 대응하고, 또한 중국 동북사 연구를 촉진하기 위한 연구 프로젝트로 간주되었다.[164] 이에 따라 조직적이고 대대적인 연구가 진행되었고, 2003년 말경 "고구려는 고대 중국에 있던 소수 민족인 부여인의 일부가 일으킨 정권"이며, "고구려는 중국의 일부이며 자국의 지방 정권이다"라는 견해가 중국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다.[165][156]
한국의 발해사 학자 송기호는 이를 중국에 의한 고구려사 "강탈"로 표현하고, 국제 사회에서 고구려사가 한국사(조선사)임을 주장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한국의 17개 역사 학회는 2003년 11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대책 학술 회의"(고구려사 왜곡 공동 대책 위원회)를 개최하고, 중국에 대해 "역사 왜곡"의 즉시 중단을 요구했으며, 한국 정부에 대해서는 엄중한 항의 실시와 고구려를 포함한 고대 동북아시아사 연구 거점의 설립을 요구했다.[165][166] 더욱이 한국에서는 언론이 각종 반대 캠페인을 펼치는 동시에, 시민 수준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서명 운동과 항의 활동이 열렬하게 전개되었다.[167][166] 이 서명 운동에서는 20일 동안 100만 명이 넘는 서명이 모였다.[166] 시민 단체에 의해, 고구려의 중국사 편입을 비판하는 영문 문서의 유네스코로의 송부와, 주한 중국 대사관에 대한 항의문 제출이 이루어졌고,[168] 2004년 3월에는 한국 정부의 지원 하에, 조직적인 연구를 수행하기 위한 고구려 연구 재단이 설립되었다.[165][168]
한국 정부 내에서도 "고구려사 왜곡"에 관한 협의가 이루어졌고 외교적 조치가 취해졌다.[165] 이러한 사태의 진전을 받아, 2004년 8월에 중국과 한국의 외교 관계자는, 양국의 우호 관계 유지, 역사 논쟁의 정치 문제화 회피, 중국은 고구려 기술에 있어서 한국의 관심에 이해를 표명할 것, 문제는 학술 교류를 통해 해결되어야 할 것 등을 약속하는 구두 양해 각서를 체결했다.[169] 이후, 동북공정을 둘러싼 정치 문제는 침정화로 향했고, 그 후의 외교 관계에 대한 배려에서 중국에서는 동북공정 자체가 흐지부지되어 2007년에 조용히 종료되었다.[169] 이후, 중국에서는 고구려사 중한 양속론도 적극적으로 주장하게 되었고, 한국에서는 고구려 연구 재단이 역할을 마치고, 2006년 9월보다 광범위한 "역사 문제"를 다루는 동북아역사재단이 새롭게 발족했다.[169]
3. 동북공정과 고구려사 논쟁의 전개
2004년 4월,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고구려 관련 내용이 삭제되고, 중국 관영 매체들이 고구려를 중국 지방정권으로 보도하면서 동북공정이 본격적으로 한중 간의 갈등으로 부상하였다.[184] 2004년 6월, 동북공정 사무처가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공정 내용을 공개하면서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 논란은 한국의 인접한 중국 영토에 대한 미래 영토 회복주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붕괴 가능성, 그리고 분리주의로부터의 중국에 대한 도전 등 역사의 재평가에 대한 외부적 동기로 분석되기도 한다.
2003년, 중국은 자국 영토 내의 고구려 고분군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 신청했다.
3. 1. 동북공정의 시작과 한국의 반발
2004년 4월,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고구려 관련 내용이 삭제되고, 중국 관영 매체들이 고구려를 중국 지방정권으로 보도하면서 동북공정이 본격적으로 한중 간의 갈등으로 부상하였다.[184]2004년 8월,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제6차 아시아 유럽 정상 회의(ASEM)에서 원자바오 총리가 노무현 대통령에게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하였고, 같은 해 8월 24일 한중 양국은 고구려사 문제와 관련해 다음 5개 항에 대해 구두 합의하였다.[184]
1. 중국 정부는 고구려사 문제가 양국 간 중대한 현안으로 대두된 데 유념한다. |
2. 역사 문제로 한중 우호협력 관계가 손상되는 것을 방지하고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 발전에 노력한다. |
3. 고구려사 문제의 공정한 해결을 도모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해 정치 문제화되는 것을 방지한다. |
4. 중국 측은 중앙 및 지방 정부 차원에서의 고구려사 관련 기술에 대한 한국 측의 관심에 이해를 표명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해 나감으로써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을 방지한다. |
5. 학술 교류의 조속한 개최를 통해 해결한다. |
2006년 10월 한중 정상회담에서 양국은 동북공정 문제를 비롯한 역사 인식 문제가 양국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 다시 합의하였다.[184] 그러나 2022년 9월, 중국국가박물관이 고구려와 발해 역사를 의도적으로 삭제한 한국사 연표를 전시하면서 논란이 다시 격화되었다.[185]
2002년, 중국 사회과학원이 주도한 동북공정은 고구려를 중국의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 정권으로 규정했다. 이는 한국의 고구려사 전문가들이 중국 정부가 정치적 목적으로 역사를 이용한다고 비판하면서 학문적, 외교적으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6] 대한민국은 2004년 고구려연구재단(2006년 동북아역사재단으로 명칭 변경)을 설립하고 주한 중국 대사를 소환하는 등 대응에 나섰다.[6]
민족주의 사관은 양측의 논쟁을 격화시켰는데, 한국 민족주의는 강력한 고구려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주제를 핵심으로 삼는 반면(참고: 한국 민족주의 사관), 중국 민족주의는 자국 영토의 불가침성과 민족 단결을 강조한다.[6]
2003년, 중국은 자국 영토 내의 고구려 고분군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 신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구려가 중국 역사의 일부로 간주될 수 없다는 보고서를 발표하고, 한국 민족주의 단체와 대한민국의 대중 언론은 동북공정에 대해 분노를 표출했다.[6][7]
2004년 3월, 대한민국 정부는 고구려연구재단을 설립했고,[11] 4월에는 중국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가 자국 웹사이트에서 한국의 전근대사에 대한 언급을 삭제하여, 대한민국이 중국 대사를 소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6] 8월에는 중국이 우다웨이 외교부 부부장을 서울로 파견하여 긴장을 완화하려 했다.[6] 중국은 한국의 우려를 인지하고, 동북공정의 결론을 역사 교과서에 포함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며, 양국은 이 문제가 관계에 손상을 주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했다.[12]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은 아시아-유럽 정상회의에서 이러한 연구에 대해 항의했다. 그해, 정부는 고구려연구재단의 명칭을 동북아역사재단으로 변경하고, 그 임무를 확대했다. 2007년, 동북공정이 종료되었지만, 논쟁 이후 중국과 한국 모두 고구려 역사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6]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준영 교수는 중국의 고구려 역사 해석이 미국과의 관계에서 중국에 대한 한국의 긍정적인 시각을 완전히 뒤집었다고 지적했다. 동아시아연구원 여론분석센터 한울 부원장에 따르면 동북공정은 한 획으로 중국의 대 한국 외교 성과를 훼손했다.[12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한반도에는 대한민국과 북한이 수립되었고, 만주(둥베이 지방)는 중국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그 결과, 구 고구려 영토에 해당하는 지역은 압록강을 경계로 중국과 북한이라는 현대 국가에 각각 통치되게 되었다.[154]
1990년대에 들어 중국의 고구려사 연구가 더욱 진전되고, 또한 중국 전역과 동아시아 각국의 학자가 참여하는 고구려사 학술 회의가 개최되면서,[160] 한국·북한과 중국의 고구려사 위치를 둘러싼 견해 차이가 실제적인 논의로 부상하게 되었다.[161] 1993년 지린성 지안 시에서 개최된 고구려 문화 국제 학술 토론회에서 북한 학자 박시형은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위치시키는 중국의 역사 연구에 대한 비판을 가했고, 한국의 연구자는 박의 견해를 지지했다.[161]
2001년에는 북한이 고구려 벽화 고분을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 유산에 등록 신청하면서 현실의 정치적 문제로 고구려 귀속 문제가 부상하게 되었다.[163] 2002년 2월, 중국에서 중국 사회 과학원과 랴오닝 성·헤이룽장 성에 의한 공동 대형 프로젝트인 "동북 변강의 역사와 현상에 대한 계열 연구 프로젝트"(동북공정)가 시작되었다.[164]
한국의 발해사 학자 송기호는 이를 중국에 의한 고구려사 "강탈"로 표현하고, 국제 사회에서 고구려사가 한국사(조선사)임을 주장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한국의 17개 역사 학회는 2003년 11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대책 학술 회의"(고구려사 왜곡 공동 대책 위원회)를 개최하고, 중국에 대해 "역사 왜곡"의 즉시 중단을 요구했으며, 한국 정부에 대해서는 엄중한 항의와 고구려를 포함한 고대 동북아시아사 연구 거점의 설립을 요구했다.[165][166] 한국에서는 언론이 각종 반대 캠페인을 펼치는 동시에, 시민 수준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서명 운동과 항의 활동이 열렬하게 전개되었다.[167][166] 2004년 3월에는 한국 정부의 지원 하에, 고구려 연구 재단이 설립되었다.[165][168]
2004년 8월, 중국과 한국의 외교 관계자는 양국의 우호 관계 유지, 역사 논쟁의 정치 문제화 회피, 중국은 고구려 기술에 있어서 한국의 관심에 이해를 표명할 것, 문제는 학술 교류를 통해 해결되어야 할 것 등을 약속하는 구두 양해 각서를 체결했다.[169] 이후 동북공정을 둘러싼 정치 문제는 침정화되었고, 2007년에 동북공정은 조용히 종료되었다.[169]
3. 2. 외교적 갈등과 봉합
2004년 4월, 중국 외교부가 홈페이지에서 고구려 관련 내용을 삭제하고, 관영 매체를 통해 고구려를 중국 지방정권으로 보도하면서 고구려사 왜곡 움직임이 노골화되었다. 같은 해 6월, 동북공정 사무처가 홈페이지를 통해 공정 내용을 공개하면서 한중 간 갈등이 본격화되었다.[184]이 문제와 관련하여, 2004년 8월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서 원자바오 총리가 노무현 대통령에게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양국은 고구려사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 5개 항에 대해 구두 합의하였다.[184]
- 중국 정부는 고구려사 문제가 양국 간 중요한 현안임을 인지한다.
- 역사 문제로 인해 한중 우호 협력 관계가 손상되지 않도록 하고,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 발전에 노력한다.
- 고구려사 문제의 공정한 해결을 추구하고, 정치 문제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 중국 측은 중앙 및 지방 정부 차원에서의 고구려사 관련 기술에 대한 한국 측의 관심에 이해를 표명하고,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 학술 교류를 조속히 개최하여 문제를 해결한다.
2006년 10월 한중 정상회담에서는 동북공정 등 역사 인식 문제가 양국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 다시 합의했다.[184]
그러나 2022년 9월 중국국가박물관이 고구려와 발해 역사를 의도적으로 삭제한 한국사 연표를 전시하면서 갈등이 다시 격화되었다.[185]
3. 3. 2022년 중국국가박물관 사건
2022년 중국국가박물관이 고구려와 발해 역사를 의도적으로 삭제한 한국사 연표를 전시하면서 동북공정을 둘러싼 역사 논쟁이 다시 격화되었다.[185] 중국국가박물관은 한중 수교 30주년을 기념하여 고대 한국사 연표를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백제 (기원전 18년-서기 660년)와 신라 (기원전 57년-서기 935년)에 대한 정보만 포함되었고, 주요 영토가 현재 북한과 중국 영토인 만주 일부에 속했던 고구려와 발해는 생략되었다.[124] 이는 대한민국의 외교적 항의와 사과 요구를 촉발했으며, 대한민국은 중국국가박물관이 한국이 처음에 중국에 제공한 연표를 조작했다고 비난했다.[124]이러한 상황은 중국 사회과학원이 2002년에 시작한 "동북공정"을 재가동하고 있다는 추측을 불러일으켰다.[125]
4. 고구려사 귀속 논쟁의 주요 쟁점
고구려사 귀속 논쟁은 고구려가 어느 나라의 역사에 속하는가를 두고 벌이는 논쟁이다. 고구려는 기원전 1세기경부터 7세기까지 존속했던 국가로, 그 영역은 현재의 중국 동북 지방(만주) 남부에서 한반도 중앙부, 러시아 연해주 일부까지 걸쳐 있었다. 이 지역은 19세기 후반 이후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여러 나라가 각축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128]
이 논쟁은 단순한 역사 논쟁을 넘어 20세기부터 21세기에 걸쳐 정치적인 문제로도 주목받았다. 2002년 중국에서 시작된 동북공정은 고구려를 포함한 동북(만주)의 역사를 "중화민족"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시도였다.[129][127] 2003년 북한의 고구려 벽화 고분 세계 유산 등재 신청은 중국의 반대로 무산되었고,[126] 이는 2000년대 중국과 한국 간의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다.
이러한 논쟁은 현대 역사학의 발전과도 관련이 있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네이션(국민/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로 규정하며, 근대에 만들어진 새로운 존재라고 보았다.[170] 앤서니 D. 스미스 등은 네이션 형성에서 '보존된 과거'의 중요성을 지적하지만, 역사상의 '민족'이 현대의 민족·국가와 연속적인 동질적인 공동체라고 보지는 않는다.[171]
고구려사 연구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나 '조선 민족의 역사'나 '중화 민족의 형성 과정'으로 고구려사를 보는 일국사적 시각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172] 현대 역사학에서 조선사는 현대의 중국과 조선의 국경을 기반으로 하며, 조선 시대 이후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다.[172] 조선사는 조선 이전 한반도를 무대로 활동했던 모든 국가와 종족의 역사를 포함하며,[172] 고구려사는 조선사의 틀 안에 있지만, 고구려는 고구려였을 뿐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아니었다고 파악된다.[172][174]
따라서 현대 역사학의 관점에서는 고구려가 어느 국가의 역사에 귀속되는가 하는 문제 설정 자체가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역사학자 야기 타케시는 고구려는 '중국사'인가 '조선사'인가 하는 문제는 개인의 '세계관' 문제이며, 역사학적으로는 '근대 국가 성립 이전의 영역에 근대 국가의 영역관을 억지로 적용하는 무의미한 논쟁'이라고 지적한다.[174]
중국 동북 지역과 북한은 모두 이 지역을 점유했던 고대 왕국들의 역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해 왔다. 이 지역의 역사 해석은 현대 영토 주권에 영향을 미친다.[3] 마오이즘 전성기 동안, 중국 정부는 고구려의 역사가 한국의 역사라는 입장을 보였다.[3] 1963년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는 한국인이 고대부터 중국 동북 지역에 거주해 왔으며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 국가이고, 발해 유물은 고대 한국의 분파임을 증명한다고 말했다.[1] 당시 중국의 입장은 주요 동맹국 중 하나인 북한과의 관계에 영향을 받았다.[6] 1980년대 이후, 학문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완화되면서 탄치샹과 같은 일부 학자들은 중국 영토 내의 모든 정치체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멍산은 고구려 역시 중국의 역사로 간주하는 "하나의 역사, 이중 사용"(, yīshǐ liǎngyòng) 시스템을 제안했다.[2] 그는 고구려의 수도가 706년 중 460년 동안 현대 중국 동북부에 있었고, 인구의 3/4이 한민족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3][6][4] 그는 "부여와 고구려 사람들은 동북 지역의 중국인과 같은 계통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인은 신라 계통의 일부"라고 주장했다.[5]
고구려 역사 논쟁에 대한 연구는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전략적 의도에 초점을 맞춰왔다.[6] 위안부와 한국 및 일본의 역사 논쟁을 연구해 온 한국 학자 안연상은[16] 전철주, 쑨진지, 김희교, 마크 바이팅턴과 같은 역사가들이 "프로젝트 시작을 중국의 영토 보전과 안정을 위한 방어적 반응으로 인식한다"고 적고 있다.[16]
중국이 동북아 역사에 관심을 갖는 이유로는 한국의 간도에 대한 미회수 영토주의,[3] 한국 정부가 중국 내 한국인에게 부여한 특혜,[3] 북한의 붕괴 가능성[17][18][19] 등이 거론된다.
현대 중국 민족주의는 한국 민족주의와 달리 "순수한 혈통"에 기반하지 않고 다양성 속의 통일과 초민족적인 "중국인" 또는 ''중화 민족''을 강조한다. 중국은 국경 지역의 안정과 영토적 현상 유지를 촉진하는 데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6]
반면에 일부 중국 학자들은 일부 한국인(북한 및 남한 모두)의 한국 민족주의 정서가 중국의 영토 보전에 위협이 된다고 인식한다. 한국의 자유주의 및 보수 진영 모두에서 "잃어버린 옛 영토의 회복"을 옹호하는 지지자들이 있다.[20] 중국 학자들은 북한 정부가 붕괴될 경우 국경이 바뀔 것을 우려한다. 중국 지린 성에는 200만 명 이상의 한족이 살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중국에서 분리되어 통일 한국에 합류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다.[21]
전반적으로 고구려 논쟁은 중국보다 한국인에게 더 중요하다. 현대 한국 민족주의에서 고구려의 역사는 일제강점기와 냉전을 거친 19세기와 20세기 한국 역사와 대조적으로 제시된다. 한국 민족주의는 중국과의 독립을 중요시하는데, 한국은 오랫동안 중국의 조공 체제의 일원이었다. 20세기에 한국인들은 건국 신화의 중심인물을 중국인 기자에서 신인 단군으로 바꾸었다.[6]
4. 1. 중국 측 주장
마오이즘 전성기 동안, 중국 정부는 고구려(''중국어: 高句麗, Gaogouli'')의 역사가 한국의 역사라는 입장을 보였다.[3] 1963년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는 한국인이 고대부터 중국 동북 지역에 거주해 왔으며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 국가이고, 발해 유물은 고대 한국의 분파임을 증명한다고 말했다.[1] 당시 중국의 입장은 주요 동맹국 중 하나인 북한과의 좋은 관계에 부분적으로 기인했다.[6]1980년대 이후, 학문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완화되었고, 탄치샹과 같은 일부 학자들은 중국 영토 내의 모든 정치체(polities)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멍산은 고구려 역시 중국의 역사로 간주하는 "하나의 역사, 이중 사용"(, yīshǐ liǎngyòng) 시스템을 제안했다.[2] 그는 고구려의 수도가 706년 중 460년 동안 현대 중국 동북부에 있었고, 인구의 3/4이 한민족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3][6][4] 그는 "부여와 고구려 사람들은 동북 지역의 중국인과 같은 계통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인은 신라 계통의 일부"라고 주장했다.[5]
흑룡강성 사회과학원의 쑨진지(, ''Sūn Jìnjǐ'')와 장비보(, ''Zhāng Bìbō'')를 중심으로 한 역사학자들은 고구려가 중국 역사의 지역적 일부("중국 지방 역사")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그들은 기자가 한국을 건국했다는 중국 역사학의 전통적인 견해와 고구려가 고대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2002년, 이들은 중국 사회과학원에 동북공정을 설립했다.[3] 동북공정의 설립은 현대 고구려 논쟁의 시작을 알린다.
중국은 고구려가 퉁구스 국가이며, 현대 중국의 만주족, 시버족, 오로첸족, 나나이족과 같은 퉁구스 민족은 중국 시민이며 중국의 다민족 역사 문명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퉁구스족 예맥이 고구려를 건국했고 퉁구스족 말갈인도 고구려에 거주했다.
2003년, 중국은 자국 영토 내의 고구려 고분군을 유네스코에 세계 유산으로 등재 신청했다.
일부 중국 학자들은 한국인(북한 및 남한 모두)의 한국 민족주의 정서가 중국의 영토 보전에 위협이 된다고 인식한다. 한국의 자유주의 및 보수 진영 모두에서 "잃어버린 옛 영토의 회복"을 옹호하는 지지자들이 있다.[20] 중국 학자들은 북한 정부가 붕괴될 경우 국경이 바뀔 것을 우려한다. 중국 지린 성에는 200만 명 이상의 한족이 살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중국에서 분리되어 통일 한국에 합류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21]
베이징 대학 국제 관계 연구원인 리양판은 한국의 역사적 과장이 이 갈등의 원동력이었다고 본다. 그는 한국 역사가들이 고구려의 중국과의 연결을 거부하는 동기는 단군조선에서 고려와 현대 한국에 이르는 연속적인 한국 민족 국가의 서사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개리 레디야드는 고구려가 현대 한국 정체성에서 중요한 부분인 것처럼, 해당 지역의 학자들에게 동북 중국(둥베이)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진다고 언급했다. 고구려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등록과 관련하여, 그는 중국 중앙 정부에 상당한 지역적 압력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24]
중국 학자들은 고구려의 역사적 위치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1940년대 초, 진유부(金毓黻)는 부여와 고구려가 중화 민족의 일원이라고 주장했다.[23] 1980년대 이후 쑨진지(孙进己), 장비보(张柏波) 등은 고구려를 중국의 국가로 간주하고, "하나의 역사, 두 가지 사용"의 관점을 지지하며 중국과 한국 역사 모두의 일부로 간주한다.
다른 중국 역사학자들은 고구려를 한국사의 일부로 본다. 중국의 국제 관계에 대한 많은 현대 중국 출판물에서, 중국 왕조와 고구려 간의 관계는 외교 관계 또는 중-한 관계(Sino-Korean relations)로 다루어진다.[25]
- 고구려는 한나라의 현도군에서 성장했다.[24] 고구려 국가는 현재의 환런 현, 랴오닝 성에 건국되었으며, 정복 전쟁을 통해 중국 동북 지방의 광대한 지역으로 확장되었다.[25]
- 고구려의 수도는 기원전 37년부터 서기 427년까지 중국 동북 지방에 있었다.[25]
- 고구려는 건국 후 1세기 이상 현도군의 관할 하에 있었다. ''삼국지''에는 한나라 시기에 고구려현의 현령이 고구려의 호적을 관리했으며, 현도군은 정기적으로 의례용 기물과 의복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후한서'', ''삼국지'', ''삼국사기''는 고구려 왕이 서기 111년부터 169년까지 현도군 또는 요동군의 관할 아래에 놓이기를 요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26]
- 고구려는 4세기 이후 중국 왕조와 길고 안정적인 조공 관계를 유지했다. 기원전 32년부터 서기 666년까지 고구려는 중국 중원 왕조에 205번 조공했다. 기원전 32년부터 서기 391년까지는 17번, 서기 423년과 666년 사이에는 188번 조공했다.[27] 고구려 통치자들은 중국 정부에서 왕의 칭호 인정과 관직 임명을 받았는데, 이는 고구려가 스스로를 중국 세력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주며, 조선 등 외국 조공국과 구별된다.[28]
- 고구려인은 중국 동북 지역에서 기원했다. 고구려는 맥족의 한 갈래로, 혼강 유역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왕족은 부여에서 기원했다고 한다.[26]
- 고구려의 토지와 인구 대다수는 현재 중국 내에 있으며, 중국은 고구려의 주요 계승자이다.[48][49] 연개소문 등 고구려 왕족과 귀족 후예들은 당나라에서 관리와 장군으로 복무했다. 일부는 중국 동북 지역에 남아 한족에 동화되었다. 태안 고씨는 고연(고구려 장수왕)을 조상으로 여겼다.[29] ''구당서''와 ''신당서''는 신라에 병합된 고구려 잔존 세력 대부분이 돌궐 제국 또는 말갈족으로 도망갔다고 기록했다.[30]
- 고구려 국가는 고려(918–1392)나 고조선의 계승 국가가 아니다. 고구려 멸망과 고려 건국 사이에는 250년의 간격이 있었다. 고려는 고구려 영토의 극히 일부만을 통치했다.[28] 고려는 후고구려의 반란을 통해 건국되면서 국호를 채택했다. ''삼국사기''는 고구려를 신라의 적으로, 당나라에 반항한 존재로 부정적으로 평가했으며,[31] 한국인들은 설인귀와 소정방을 신격화하고 숭배했다.[32]
- 고조선과 초기 고구려 사이의 영토 및 인구 중첩은 최소화되었다. 고조선의 영토는 낙랑군에 해당하며, 고구려의 건국지는 현도군 및 요동군에 위치했다. 고구려는 400년 이상 중국의 지배를 받은 후에야 낙랑을 정복했다.[28]
- 200개가 넘는 고구려 요새와 도시 대부분이 수천 개의 묘지와 함께 중국에 보존되어 있다.[29]
많은 중국 역사학자들은 고구려의 위치를 중국 역사와 한국 역사의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28] "하나의 역사, 두 가지 사용"(一史两用)은 1980년대 탄치샹이 제안했다.[33] 서기 427년, 고구려는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고,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는 한반도로 이동했다. 탄치샹은 고구려 역사를 두 단계로 나누어 427년까지는 중국의 지방 세력으로, 수도를 옮긴 후에는 외국으로 간주했다. 장멍산은 고구려가 중국과 한국 역사에 동시에 속한다고 주장하며, 원나라에 비유했다.[34]
탄치샹의 견해에 대한 비판은 이러한 구분이 당시의 역사적 현실에 근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장비보는 평양은 낙랑군에 속했으며, 고구려에 정복되기 전까지 한, 위, 진나라의 영토 안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한의 고조선 정복 이전에는 이 지역은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일부였으며, 주, 진, 한나라에 복속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과 만주국 건국은 만주의 귀속을 둘러싼 논쟁을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일으켰다.[141] 일본 학자들은 만주가 독자적인 역사를 가진 공간이며 중국의 일부가 아니라고 주장한 반면,[142] 중국 학자들은 만주를 '''동북'''으로 하여 중국 본토와 역사적으로 불가분의 일체성을 가진다고 보았다.[143]
만주국 건국대학 교수 이나바 군잔은 고대부터 만주국에 이르는 '통사' 확립을 시도했다. 그는 퉁구스계 민족은 한민족과 계통이 다른 '만주 민족'이며, 고구려 역사도 퉁구스계 '만주 민족'의 역사로서 중국사로부터 독립한다고 주장했다.[144] '동북사 연구 개척자' 김유부는 고구려를 '동북사'를 구성한 부여계 국가로 간주하여 중국사의 일부로 보았다.[14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대한민국·북한이 수립되었고, 만주(둥베이 지방)는 중국 통치하에 들어갔다. 전후 중국에서는 고구려사 연구가 저조했다.[154] 냉전 속에서 국경 문제로 발전할 수 있는 고구려사 연구 논의가 피하게 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154] 중국에서는 일본이나 소련의 조선사 연구가 참고되었고, 고구려를 조선사로 하는 틀이 사용되었다.[155] 수도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겨진 427년을 경계로 이전은 중국사, 이후는 조선사로 하는 "일사양용론"도 유력했다.[156][157][158] 문화 대혁명 이후 1980년대에는, 중국 역사를 여러 민족이 규합하여 "중화민족"을 형성하는 과정으로 파악하며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위치시키는 학설이 발전했다.[159]
한국과 북한은 고구려를 자국사에 위치시켰다. 1990년대 중국 고구려사 연구가 진전되고, 학술 회의가 개최되면서,[160] 한국·북한과 중국의 고구려사 위치를 둘러싼 견해 차이가 논의로 부상했다.[161] 1993년 지린성지안 시 고구려 문화 국제 학술 토론회에서 북한 학자 박시형은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위치시키는 연구를 비판했고, 한국 연구자는 이를 지지했다.[161] 중국 연구자들은 이를 "침략적", "영토 요구와 결부된" 반동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반론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를 중국사에 위치시키는 견해가 발전했다.[162][156] 2001년 북한이 고구려 벽화 고분을 세계 문화 유산에 등록 신청하면서 고구려 귀속 문제가 부상했다.[163] 중국 학자들은 이를 "정치적 행위"라고 비판했고, 중국 정부는 공동 신청을 타진했지만 북한은 거부했다.[163]
2002년 2월, 중국 사회 과학원과 랴오닝 성·헤이룽장 성의 공동 프로젝트 "동북 변강의 역사와 현상에 대한 계열 연구 프로젝트"(동북공정)가 시작되었다.[164] 이는 중국 동북사 연구에 대한 "도전"에 대응하고 연구를 촉진하기 위한 것이었다.[164] 2003년 말 "고구려는 고대 중국 소수 민족인 부여인의 일부가 일으킨 정권", "고구려는 중국의 일부이며 지방 정권"이라는 견해가 알려졌다.[165][156]
한국의 송기호는 이를 중국에 의한 고구려사 "강탈"로 표현하고, 국제 사회에서 고구려사가 한국사임을 주장해야 한다고 했다.
4. 2. 한국 측 주장
다음은 한국 역사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주장하는 내용이다.[35]- 고구려는 부여 (예맥)인에 의해 건국된 국가로, 삼한의 원주민과 함께 현대 한국인의 주요 조상 중 하나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모두 부여의 후계자였다. 고구려인의 일부가 중국에 동화되었다는 사실이 반드시 고구려를 중국의 일부로 만드는 것은 아니며, 멸망 이후 다수가 한국 왕조(예: 신라, 발해)로 동화되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36] 또한, 당나라에 붙잡힌 고구려인들 중 상당수는 696년 거란의 난 때 인질에서 벗어나 인근 국가로 탈출했고, 이들 중 다수는 발해 선왕 시대에 소고구려를 정복한 발해에 의해 정복되었다.[37] 몽골의 고려 침략(고려)[38], 정묘호란(조선) 등 전쟁 시기에 분산된 인구가 타국에 동화된 현상은 다른 한국 왕조에서도 발생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몽골이나 만주 역사의 일부로 만들지는 않는다.
- 한국 학자들은 한국의 삼국 사람들이 유전학, 문화, 언어 측면에서 인근의 퉁구스계 (말갈), 몽골계 (선비), 튀르크계 (돌궐) 부족과 구별되는 예맥족이라는 공통 조상을 공유했다고 믿는다. 고구려가 말갈인에 대해 취한 태도와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고구려가 말갈인을 차별했으며, 문화적, 민족적으로 고구려와 다른 모든 집단에 대해 이러한 태도를 취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의 정체성은 다른 예맥 부족(예: 고조선, 부여, 백제, 신라, 발해)과 공유하는 문화 유산의 존재라는 인식에 기반했다.[39]
- 현대 한국인은 삼한(만주)의 경계 밖에서 기원한 예맥 부족의 직계 후손이며, 즉 고구려[40]이며, 한국어는 알렉산더 보빈과 제임스 마셜 언거와 같은 언어학자들에 의해 고구려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정된다.[41] 신라가 나당 전쟁 이후 한반도를 단일 정치 체제로 통일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와 백제 인구에게 공유된 정체성을 심어주어 동화하는 데는 실패했다. 정복당한 고구려와 백제 사람들은 신라가 자신들의 왕국을 파괴하는 데 일조한 역할 때문에 신라인에 대해 뿌리 깊은 원한을 품었고, 이는 그들의 집단 의식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42] 이는 신라의 골품제의 계급 경직성에 의해 악화되었으며, 특히 고구려와 백제 출신 사람들의 계급 상승을 막았다. 그 결과, 후신라가 9세기 말과 10세기 초에 붕괴되기 시작했을 때, "호족"으로 알려진 지역 군벌들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부활시켜 신라의 지배에서 벗어났다.[43] 한민족을 단일 의제로 통일하는 역할은 고려가 맡게 되었으며, 왕건이 이끄는 고구려계 인구에 의해 건국되었다.[44][45]
- 신라, 백제와 함께 고구려는 고대부터 전통적으로 한국의 삼국 중 하나로 여겨졌으며, 후신라와 고려 시대의 한국인과 당나라 이후의 중국인 모두에게 한국 민족의 선구자 중 하나로 여겨지는 국가로 인식되었다.[46] 따라서 고구려의 역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와 같은 역사 기록에 포함되었다. 반면, 고전 중국 기록은 고구려를 포함한 북한 왕국을 자국 역사에서 제외하고, 이를 시대에 걸쳐 조선 민족의 역사로 분류했다. 예를 들어, 당나라 기록은 고구려가 삼한의 일부였다고 나타냈다.[46] 만주에 존재했던 고대 한국 왕국 (고조선, 부여, 발해, 고구려 등)을 중국 역사로 편입하려는 최근의 움직임은 동북공정 이후 정치적 동기를 가지고 최근에 일어난 일이다.[47]
- 고구려가 중국의 일부라는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많은 고구려 사람들이 중국으로 강제 이주되었다고 주장하지만(전쟁 후 690,000가구 중 약 28,200~38,200가구가 공식 역사 기록/한국 자료, 78,000가구는 중국 학자 왕전핑에 의해),[48][49][50] 이는 고구려가 중국보다는 한국이라는 주장을 강화한다고 볼 수 있다. 승리한 당나라는 수만 명의 고구려 민간인을 중국으로 강제 이주시켜야 했지만, 많은 생존 고구려 잔당은 당나라의 안동도호부에 저항했다. 대부분의 고구려 잔당은 반란을 일으켜 말갈인과 함께 발해를 형성하거나 신라로 도망쳤다. 고구려와 백제의 잔당이 오랜 적이었던 신라 편에 서서 나당 전쟁 당시 한반도 나머지 지역을 정복하려는 당나라의 시도에 저항했다는 사실은 한국과 중국 역사 기록에 여러 차례 증명되었다. 예를 들어, 마지막 고구려 왕의 조카 또는 서자였던 안승은 당나라 통치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그는 4,000가구를 이끌고 신라로 도망쳤고, 신라 왕은 그에게 귀족 작위와 영토를 하사하여 신하로 통치하게 했다. 고구려 이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신라로 피신했다는 (그리고 보상을 받았다는) 점은 그들이 당나라에 의해 강제로 중국으로 이주된 방식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나타낸다. 신라에는 고구려의 옛 영토와 개성 등 고구려의 요새 지역의 거주민들도 있었다. 고구려에 대한 신라의 이중적이고 모순된 정책은 정복당한 백제와 고구려 사람들을 통일된 삼한 정체성의 일부로 포함시키는 동시에 그들을 신라의 2등 구성원으로 취급하는 자비로운 정복자의 정책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는 많은 현대 국가에서 특정 지역 정체성이 권위 방언과 권위 정체성으로 우선시되는 반면, 덜 중요한 지역 정체성은 훨씬 적은 인식과 존중을 받으면서도 공통 정체성 내에서 여전히 받아들여지는 방식과 유사하다. 이는 고구려 사람들이 신라 통치 2세기 동안에도 집단적 정체성을 유지한 이유를 설명하며, 고려가 결국 삼국 후기 시대 말에 신라의 마지막 잔재를 자비롭게 살리기로 결정한 이유를 설명한다.[51]
-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반군은 670년부터 673년까지 매년 봉기를 일으켰으며, 마지막 고구려 왕 고구려 보장왕, 그의 조카 또는 서자 안승, 고구려 장군 검모잠, 신라(구 고구려와 백제 영토의 지배권을 놓고 이전의 후원-동맹국과 전쟁 중)와 발해의 창건자 대중상과 대조영에 의해 고구려를 부활시키고 당나라를 몰아내려는 수많은 노력이 있었다.
- 고구려는 약 700년 동안 존속한 반면, 고구려의 통치와 동시대에 존재한 중국 왕조는 500년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 고구려는 존속 기간 동안 일부 기간 동안만 제국 중국의 조공국이었다. 제국 중국의 조공국이라는 것이 그 국가가 중국의 일부라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고, 그 국가의 완전한 굴복을 상징하지도 않는다. 중국 왕조가 적용한 조공 시스템은 조공국이 정치적/외교적 인정, 주최국이 부여한 문명의 산물로부터 이익을 얻고, 주최국은 조공국을 존중하여 자국의 제국적 지위와 패권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양 당사자가 수행한 관행이었다.[52][53] 신라, 고려, 일본, 류큐 등 많은 동아시아 왕조와 왕국은 중국 왕조와 조공 관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오해는 조공국과 종속국의 차이에 대한 혼동과 당시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채택된 조공 시스템에 기인한다. 예를 들어, 신라, 고구려, 백제, 고려 전기와 중기는 수, 당, 명, 청 등 다양한 중국 왕조의 조공국이었지만, 중국에서는 독립 국가로 간주되었다. 이는 원나라 치하의 고려 왕조나 청나라의 속국이었던 조선 후기와는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54]
- 이름의 유산: 조선("고조선")은 최초의 한국 왕국으로 여겨진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나라 황제는 마지막 고구려 통치자 고구려 보장왕에게 원래의 조선 왕국에서 이름을 따서 "조선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여 중국 스스로가 고구려와 조선을 같은 계통으로 간주했음을 보여주었다. 고구려는 고려("후고구려")에 의해 계승되었고, 다시 "조선"에 의해 계승되었다.
- 고구려가 중국이라는 견해는 과거 중국 왕조의 중국 역사 기록과 모순되며, 이는 고구려를 문화적 중화권의 일부로 간주했지만, 별개의 외국 정치 실체였다. 4~5세기의 비문에 따르면, 고구려는 천자와 독립된 ''천하''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55][56][57] 고려의 통치자들은 황제와 천자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삼한의 역사적 영역을 포함하는 "해동" "바다의 동쪽" ''천하''의 중심에 고려를 두었다. 즉, 한국의 삼국의 또 다른 이름이다.[58]
- 고려는 왕건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그는 고구려 귀족 출신인 개성 왕씨의 후손이었다. 현대 역사가들은 왕건의 조상이 수 대 동안 중국과 해상 무역을 했던 강력한 씨족이었다고 믿는다.[59] 송나라 사신 서긍의 ''고려도경''(12세기 초)에 따르면, 왕건의 조상은 고구려 귀족이었다.[60] 장덕호에 따르면 그의 조상은 송악 주변에 정착한 고구려 난민이었으며, 해상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예성강을 포함한 지역을 장악했다.[61] 후신라 시대에는 송악을 포함한 북부 지역이 고구려 난민들의 거점이었으며,[62][63] 왕건의 고향인 송악은 901년에 후고구려의 수도가 되었다.[64] 고려는 고구려의 연속(계승 국가)으로 간주되었으며, 고구려의 옛 영토를 되찾으려는 야망을 품었다. 고려는 신라 정부를 기반으로 설립되지 않았고, 그 이름을 계승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후신라에 대한 고려의 정치적 계승은 없었다. 그렇기에 신라는 고려에 병합되었다. 왕건과 그의 후계자들이 수행한 '북진 정책'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는 조상에게 잃어버린 정당한 상속 재산으로 간주되는 영토를 되찾기 위해 여러 주요 군사 작전을 감행했다. 윤관의 여진 정벌(1104~1109), 고려 공민왕과 이성계가 이끈 반원 원정 및 요동 원정(1356~1370)은 모두 왕건이 처음 시행한 북진 정책의 연장선이었다.[65]
- ''삼국사기''는 고려 왕조의 중요한 한국 역사가인 김부식에 의해 쓰여졌다. 그러나 김부식이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직계 후손인 경주 김씨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한국 역사가들은 김부식이 삼국 시대에 신라의 역사를 광범위하게 집중하고 고구려와 백제에 대해서는 훨씬 적은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에 주목했다. ''삼국사기''에서 발견된 친유교적 정서와 신라와 당나라에 대한 호의적인 편견은 ''삼국사기'' 편찬 당시 고려의 경주 김씨의 정치적 지배에 크게 기인했다.[66]
중국, 일본 및 중세 시대의 다른 외국 국가들은 고구려의 정당한 계승자로 고려와 조선과 같은 한국 왕조를 인정했으며 이를 정당한 계승자로 여겼다. 이러한 사실은 기록과 문서에서 입증된다.[91][92]
- 고려-거란 전쟁 발발 당시의 외교 회담에서 서희는 요의 지휘관 소손녕에게 "우리나라는 사실 옛 고구려입니다. 그래서 국호를 고려라고 하고 평양을 수도로 삼았습니다. 옛 영토 경계를 논하려 한다면 귀국의 동경이 우리나라 안에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93]
- 북송의 서긍은 《고려도경》에 기록된 텍스트를 통해 고려가 고구려의 연속이자 동일한 국가였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고려 왕족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선조가 쇠퇴한 후 백성들이 다시 나라를 세웠다고 진술한다.[94]
- 중국의 역사서, 특히 중국 왕조의 정사에서는 고구려를 중국의 역사가 아닌 한국 역사의 일부로 여러 번 묘사하고 고려의 고구려 계승을 확인하고 있다.[95] 예를 들어, 《원사(元史)》에서 명나라의 중국 역사가들은 후고구려와 고려의 고구려 계승에 대해 "왕의 성은 고씨였다. 그의 나라는 당나라의 간봉 연간에 멸망했다. 추공 연호 이후 그의 후손들이 작위를 받았고, 점차 독립하게 되었다. 오대 시대(오대 십국 시대)에 그들은 나라를 송악으로 옮기고 왕을 세웠는데, 그의 성은 왕이고 이름은 건이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96] 또 다른 예는 《명사(明史)》로, 청나라의 중국 역사가들은 고려의 고구려 계승과 이후 후삼국의 통일에 대해 "부여족 출신의 고씨는 한나라 말에 땅을 세워 고려 또는 고구려라고 이름 짓고 평양에 살았다... 그러나 나중에 패하여 동쪽으로 이주해야 했다. 후당 시대에 왕건은 고씨의 뒤를 이어 신라와 백제를 흡수하고 수도를 송악으로 옮겼다."라고 묘사하고 있다.[96] 역사학자 이순근은 "구오대사는 973년에, 송사, 요사, 금사는 1344년에, 명사는 1739년에 완성되었다... 위 기록(중국 제국의 정사)들은 모두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3-1에서는 마지막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이름이 고려로 기록되어 있으며, 마지막 경우에는 위에 언급된 예와 같이 고구려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고려와 고구려 사이에 구별이 없었음을 다시 보여준다. 즉, 당나라 이후에 쓰여진 중국의 공식 역사 문서를 통해 중국이 고구려의 역사를 고려가 이어받았다고 보았다는 것이 확인된다."라고 지적한다.[95] 이순근은 또한 명사와 청사에서도 고려의 고구려 계승을 인정하고 명확하게 묘사했다고 지적한다.[97]
- 쿠빌라이 칸은 고려를 고구려와 동일한 국가로 여겼다. 몽골의 고려 침략 말, 쿠빌라이 칸은 아릭 부케와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아릭 부케는 카라코룸에 머물고 있었고 쿠빌라이 칸은 중국 원정에 참여하고 있었다. 수십 년간의 싸움 끝에 고려 태자가 그에게 와서 항복하자, 쿠빌라이 칸은 기뻐하며 "고려는 오래 전에 당 태종이 직접 원정을 벌였지만 정복하지 못한 나라이다. 그러나 지금, 그 태자가 나에게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일 것이다!"라고 말했다.[98][99][100]
- 일본 속담인 "몽골(무쿠리)과 고구려(코쿠리) 귀신이 온다!"는 일본 원정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코쿠리는 일본어로 고구려의 이름이며, 침략 당시 몽골을 따랐던 고려 군인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101][102][103][104]
- 1488년 명나라에 표류했던 최부는 명나라 관리로부터 "귀국이 특별한 기술이 있기에 수나라와 당나라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최부는 "고구려는 전략 전문가와 강력한 장군들이 있어 군사에 능하고 상사를 위해 죽을 각오로 헌신하는 병사들이 있었다. 그래서 고구려는 작은 나라이지만 천하의 백만 대군을 두 번이나 물리쳤다. 지금은 신라, 백제, 고구려가 한 나라가 되었고, 풍부한 생산물과 넓은 영토, 부유함과 강력한 군사력,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충성스럽고 현명한 학자들이 있다."라고 답했다.[105][106]
5. 현대 역사학의 관점과 과제
고구려 역사 논쟁에 대한 연구는 중국이 한반도에 대해 가지는 전략적 의도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었고, 중국 학자들의 역사적 주장이 얼마나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다뤄지지 않았다.[6]
위안부 문제와 한국 및 일본의 역사 논쟁을 연구해 온 한국 학자 안연상은[16] 전철주, 쑨진지, 김희교, 마크 바이팅턴과 같은 역사가들이 동북공정을 "중국의 영토 보전과 안정을 위한 방어적 반응"으로 본다고 설명한다.[16]
중국이 동북아 역사에 관심을 갖는 이유로는 한국의 간도에 대한 미회수 영토주의,[3] 한국 정부가 중국 내 한국인에게 부여한 특혜,[3] 그리고 북한의 붕괴 가능성[17][18][19] 등이 제기된다.
현대 중국 민족주의는 한국 민족주의와 달리 "순수한 혈통"보다는 다양성 속의 통일과 초민족적인 "중국인", 즉 ''중화 민족''을 강조한다. 중국은 마약 밀매, 근본주의 종교 선교, 민족 분리주의, 불법 이민 등 국경 간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국경 지역의 안정과 영토적 현상 유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6] 그러나 중국의 "평화로운 굴기" 정책이나 23건의 영토 분쟁 중 17건을 평화적으로 해결한 사례를 보면, 중국의 공격적인 동기를 의심하는 해석은 설득력이 떨어진다.[6]
반면, 일부 중국 학자들은 일부 한국인(북한 및 남한 모두)의 한국 민족주의 정서가 중국의 영토 보전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한국의 자유주의 및 보수 진영 모두에서 "잃어버린 옛 영토의 회복"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20] 중국 학자들은 북한 붕괴 시 국경 변경 가능성을 우려한다. 중국 지린 성에는 200만 명 이상의 한족이 살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중국에서 분리되어 통일 한국에 합류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21]
고구려 논쟁은 한국인에게 더 중요한 문제로 인식된다. 그 이유는 현대 한국 민족주의에서 고구려 역사가 일제강점기와 냉전 시기와 대조적으로 긍정적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 민족주의는 오랫동안 중국의 조공 체제에 속했던 한국이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확립하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삼고 있다. 예를 들어, 20세기에 한국인들은 건국 신화의 중심인물을 중국계 인물인 기자에서 신화적 존재인 단군으로 바꾸었다.[6]
베이징 대학 국제 관계 연구원 리양판은 한국의 격동적인 현대사로 인해 발생한 역사적 과장이 갈등의 원동력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한국 역사가들이 한국사에서 강한 선택적 서사를 밀어붙이며, 고구려와 중국의 연결을 거부하는 것은 단군조선에서 고려를 거쳐 현대 한국으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한국 민족 국가 서사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리양판은 중국과 한국 모두 국가 건설 과정에 있으므로, 한국의 변화를 인식하고 호환 가능한 역사적 관점을 확립하는 것이 양국 관계에 필요하다고 본다.[22]
개리 레디야드는 고구려가 현대 한국 정체성에서 중요한 부분인 것처럼, 해당 지역 학자들에게 동북 중국(둥베이)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진다고 언급했다. 고구려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등록과 관련하여, 그는 중국 중앙 정부에 상당한 지역적 압력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둥베이의 자존심은 그러한 고구려 문화 유산에 대한 더 나은 관리를 요구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24]
고구려와 백제는 모두 부여 (예맥)인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삼한의 원주민과 함께 현대 한국인의 주요 조상 중 하나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모두 부여의 후계 국가였다. 고구려인의 일부가 중국에 동화되었지만, 멸망 이후 다수가 한국 왕조인 신라와 발해로 동화되었다.[36] 또한, 당나라에 붙잡힌 고구려인들 중 상당수는 거란의 난 때 인근 국가로 탈출하여 발해 선왕 시대에 소고구려를 정복한 발해에 의해 정복되었다.[37] 고려 (몽골의 고려 침략)[38]와 조선 (만주 침략) 등 전쟁 시기에 다른 한국 왕조에서도 분산된 인구가 타국에 동화된 현상이 발생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몽골이나 만주 역사의 일부로 만들지는 않는다.
한국 학자들은 한국의 삼국 사람들이 예맥족이라는 공통 조상을 공유했다고 믿는다. 고구려는 다른 예맥 부족과 공유하는 문화 유산을 가지고 있었다.[39] 현대 한국인은 예맥 부족의 직계 후손이며,[40] 한국어는 고구려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정된다.[41] 신라는 나당 전쟁 이후 한반도를 통일했지만, 고구려와 백제 인구에게 공유된 정체성을 심어주는 데는 실패했다. 정복당한 고구려와 백제 사람들은 신라인에 대해 원한을 품었고, 이는 집단 의식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42] 고려는 고구려계 인구에 의해 건국되어 한민족을 통일하는 역할을 맡았다.[44][45]
신라, 백제와 함께 고구려는 전통적으로 한국의 삼국 중 하나로 여겨졌으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포함되었다. 반면, 고전 중국 기록은 고구려를 포함한 북한 왕국을 자국 역사에서 제외하고 조선 민족의 역사로 분류했다.[46] 고구려가 중국의 일부라는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많은 고구려 사람들이 중국으로 강제 이주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고구려가 한국이라는 주장을 강화한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고구려 잔당은 발해를 형성하거나 신라로 도망쳤다.[51]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반군은 670년부터 673년까지 매년 봉기를 일으켰으며, 고구려 보장왕, 안승, 검모잠, 대중상, 대조영 등에 의해 고구려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고구려는 약 700년 동안 존속한 반면, 고구려와 동시대에 존재한 중국 왕조는 500년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 중국 왕조가 적용한 조공 시스템은 양 당사자가 수행한 관행이었다.[52][53] 많은 동아시아 왕조와 왕국은 중국 왕조와 조공 관계를 유지했지만, 중국에서는 독립 국가로 간주되었다.[54]
고조선의 이름을 딴 "조선"은 최초의 한국 왕국으로 여겨진다. 고구려는 고려(후고구려)에 의해 계승되었고, 다시 "조선"에 의해 계승되었다. 고구려는 천자와 독립된 ''천하''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55][56][57] 고려의 통치자들은 황제와 천자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한국의 삼국의 또 다른 이름인 "해동" ''천하''의 중심에 고려를 두었다.[58]
고려는 왕건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그는 고구려 귀족 출신이었다.[59] 송나라 사신 서긍의 ''고려도경''에 따르면, 왕건의 조상은 고구려 귀족이었다.[60] 고려는 고구려의 연속으로 간주되었으며, 고구려의 옛 영토를 되찾으려는 야망을 품었다.[65] ''삼국사기''는 김부식에 의해 쓰여졌지만, 김부식은 신라 마지막 왕의 직계 후손이었다.[66]
고구려는 발해에 의해 계승되었다. 요나라에 정복된 후 발해의 마지막 태자와 왕족 귀족들이 고려로 망명하여[69] 고구려의 두 후계 왕조를 통합했다.[70] 고려 태조는 발해를 고구려인으로 구성된 '친척' 국가로 여겼다. 고려 건국 250년 후에도 고구려 정체성이 유지되었다. 견훤은 후백제를, 궁예는 후고구려를 부활시켰다.[42][74] 왕건은 고구려 명문 가문 출신이었다.[78][42]
고구려는 평양을 재건하여 '서경'으로 명명하고 두 번째 수도로 삼았다.[67] 고려 초기에 회복한 많은 땅은 고구려의 중심지였다.[68] 고려의 여진 정벌(1104~1109)의 주요 이유 중 하나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되찾기 위한 것이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윤관은 "이 땅은 원래 고구려가 소유했던 땅이다."라고 말했다.[87] 중국, 일본 및 중세 시대의 다른 외국 국가들은 고려와 조선과 같은 한국 왕조를 고구려의 정당한 계승자로 인정했다.[91][92]
고려-거란 전쟁 당시 서희는 요의 지휘관 소손녕에게 "우리나라는 사실 옛 고구려입니다."라고 말했다.[93] 북송의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가 고구려의 연속이자 동일한 국가였음을 밝혔다.[94] 중국 역사서, 특히 중국 왕조의 정사에서는 고구려를 한국 역사의 일부로 묘사하고 고려의 고구려 계승을 확인하고 있다.[95] 쿠빌라이 칸은 고려를 고구려와 동일한 국가로 여겼다.[98][99][100]
일본 속담인 "몽골(무쿠리)과 고구려(코쿠리) 귀신이 온다!"는 일본 원정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101][102][103][104]
온돌,[107] 한국의 요새,[108] 김치,[109] 불고기 등 고구려의 전통은 한국 문화의 핵심적인 기둥이다. 씨름, 전통 춤, 장구, 거문고,[116] 한복, 갓[117] 등은 한국 문화에 존재한다. "한국"이라는 단어는 고려에서 유래되었다. 현대 한국어는 개성 방언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18]
알렉산더 보빈은 고구려가 기원적으로 한국어족이라고 믿고 있다. 제임스 마셜 엉거 또한 유사한 모델을 제시했다. UCLA의 존 B. 덩컨에 따르면 "고구려는 한국 역사의 일부이다."[120]
하버드 대학교의 마크 바이팅턴은 고구려는 "어떤 의미에서도 중국 국가가 아니었다".[91] 핀란드 언어학자 유하 얀후넨은 "퉁구스어족을 사용하는 엘리트"가 고구려와 발해를 통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믿는다. 안드레이 란코프는 "현대의 논쟁은 현대적 정체성을 과거로 투사한 경우"라고 말한다.[121]
안연상과 임지현은 현대적 개념의 국가 영토와 정체성을 고대 국가에 투영하는 것은 자의적이라고 믿는다.[16] 안연상은 중국의 고구려 역사에 대한 주장은 영토에, 한국의 주장은 혈통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16]
베네딕트 앤더슨은 네이션을 '상상의 정치 공동체'로 규정했다.[170] 고구려사 연구는 일국사적 시각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172] 역사학자 야기 타케시는 고구려가 '중국사'인가 '조선사'인가 하는 이분법은 무의미한 논쟁이라고 말한다.[174]
일국사적 시각의 한계를 극복하고, 광범위한 동북아시아사적 시각이 필요하다.[181] 한국의 중국사 학자 김한규는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요·금 등을 '요동사'라는 범주 안에서 파악할 것을 제창했다.[183]
5. 1. 일국사적 시각의 극복
안연상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중국이 동북아시아 역사에 관심을 갖는 이유로 간도에 대한 미회수 영토주의,[3] 중국 내 한국인에 대한 한국 정부의 특혜 부여,[3] 북한 붕괴 가능성[17][18][19] 등을 꼽는다. 현대 중국 민족주의는 다양성 속의 통일을 강조하며, 국경 지역의 안정과 영토적 현상 유지를 중시한다.[6] 반면, 일부 중국 학자들은 한국인의 민족주의 정서가 중국의 영토 보전에 위협이 된다고 인식한다.[20]베이징 대학의 리양판은 한국의 역사적 과장이 갈등의 원동력이며, 한국 역사가들이 고구려와 중국의 연결을 거부하는 것은 단군조선에서 고려와 현대 한국으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한국 민족 국가 서사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22] 개리 레디야드는 고구려가 현대 한국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인 것처럼, 동북 중국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진다고 언급했다.[24]
고구려와 백제는 모두 부여의 후계 국가였다. 고구려인의 일부가 중국에 동화되었지만, 멸망 이후 다수가 한국 왕조인 신라와 발해로 동화되었다.[36] 또한, 당나라에 붙잡힌 고구려인들 중 상당수는 거란의 난 때 인근 국가로 탈출하여 발해 선왕 시대에 소고구려를 정복한 발해에 의해 정복되었다.[37]
한국 학자들은 한국의 삼국 사람들이 예맥족이라는 공통 조상을 공유했다고 믿는다. 고구려는 다른 예맥 부족과 공유하는 문화 유산을 가지고 있었다.[39] 현대 한국인은 예맥 부족의 직계 후손이며,[40] 한국어는 고구려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정된다.[41] 신라는 나당 전쟁 이후 한반도를 통일했지만, 고구려와 백제 인구에게 공유된 정체성을 심어주는 데 실패했다. 정복당한 고구려와 백제 사람들은 신라인에 대해 원한을 품었고, 이는 집단 의식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42] 고려는 고구려계 인구에 의해 건국되어 한민족을 통일하는 역할을 맡았다.[44][45]
신라, 백제와 함께 고구려는 전통적으로 한국의 삼국 중 하나로 여겨졌으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포함되었다. 반면, 고전 중국 기록은 고구려를 포함한 북한 왕국을 자국 역사에서 제외하고 조선 민족의 역사로 분류했다.[46] 고구려가 중국의 일부라는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많은 고구려 사람들이 중국으로 강제 이주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고구려가 한국이라는 주장을 강화한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고구려 잔당은 발해를 형성하거나 신라로 도망쳤다.[51]
고구려는 약 700년 동안 존속한 반면, 고구려와 동시대에 존재한 중국 왕조는 500년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 중국 왕조가 적용한 조공 시스템은 양 당사자가 수행한 관행이었다.[52][53] 많은 동아시아 왕조와 왕국은 중국 왕조와 조공 관계를 유지했지만, 중국에서는 독립 국가로 간주되었다.[54]
고조선의 이름을 딴 "조선"은 최초의 한국 왕국으로 여겨진다. 고구려는 고려("후고구려")에 의해 계승되었고, 다시 "조선"에 의해 계승되었다. 고구려는 천자와 독립된 ''천하''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55][56][57] 고려의 통치자들은 황제와 천자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한국의 삼국의 또 다른 이름인 "해동" ''천하''의 중심에 고려를 두었다.[58]
고려는 왕건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그는 고구려 귀족 출신이었다.[59] 송나라 사신 서긍의 ''고려도경''에 따르면, 왕건의 조상은 고구려 귀족이었다.[60] 고려는 고구려의 연속으로 간주되었으며, 고구려의 옛 영토를 되찾으려는 야망을 품었다.[65] ''삼국사기''는 고려 왕조의 한국 역사가인 김부식에 의해 쓰여졌지만, 김부식은 신라 마지막 왕의 직계 후손이었다.[66]
고구려는 발해에 의해 계승되었다. 요나라에 정복된 후 발해의 마지막 태자와 왕족 귀족들이 고려로 망명하여[69] 고구려의 두 후계 왕조를 통합했다.[70] 고려 태조는 발해를 고구려인으로 구성된 '친척' 국가로 여겼다. 고려 건국 250년 후에도 고구려 정체성이 유지되었다. 백제와 고구려의 난민들은 각자의 집단 의식을 유지하며 신라에 대한 깊은 원한을 품었다.[42] 견훤은 백제를 부활시키고, 궁예는 고구려를 부활시켰다.[42][74] 왕건은 고구려 명문 가문 출신이었다.[78][42]
고려의 여진 정벌(1104~1109)의 주요 이유 중 하나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되찾기 위한 것이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윤관은 "이 땅은 원래 고구려가 소유했던 땅이다."라고 말했다.[87] 중국, 일본 및 중세 시대의 다른 외국 국가들은 고려와 조선과 같은 한국 왕조를 고구려의 정당한 계승자로 인정했다.[91][92]
고려-거란 전쟁 당시 서희는 요의 지휘관 소손녕에게 "우리나라는 사실 옛 고구려입니다."라고 말했다.[93] 북송의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가 고구려의 연속이자 동일한 국가였음을 밝혔다.[94] 중국 역사서, 특히 중국 왕조의 정사에서는 고구려를 한국 역사의 일부로 묘사하고 고려의 고구려 계승을 확인하고 있다.[95] 쿠빌라이 칸은 고려를 고구려와 동일한 국가로 여겼다.[98][99][100]
일본 속담인 "몽골(무쿠리)과 고구려(코쿠리) 귀신이 온다!"는 일본 원정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코쿠리는 일본어로 고구려의 이름이며, 침략 당시 몽골을 따랐던 고려 군인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101][102][103][104]
온돌,[107] 한국의 요새,[108] 김치,[109] 불고기 등 고구려의 전통은 한국 문화의 핵심적인 기둥이다. 씨름과 같은 무술, 전통 춤, 악기(예: 장구, 거문고),[116] 의복(예: 한복, 갓 등)[117]은 한국 문화에 존재한다. "한국"이라는 단어는 고구려의 계승 국가 중 하나인 고려에서 유래되었다. 현대 한국어는 개성 방언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18]
알렉산더 보빈은 고구려가 기원적으로 한국어족이라고 믿고 있다. 제임스 마셜 엉거 또한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유사한 모델을 제시했다. UCLA의 존 B. 덩컨에 따르면 "지난 1,000년 동안 고구려는 현대 한국이 정체성을 찾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구려는 한국 역사의 일부이다."[120]
하버드 대학교의 마크 바이팅턴에 따르면, 고구려는 "중국 왕조의 역사 자체에서도 풍부하게 드러나듯 어떤 의미에서도 중국 국가가 아니었다".[91] 핀란드 언어학자 유하 얀후넨은 "퉁구스어족을 사용하는 엘리트"가 고구려와 발해를 통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믿는다. 학자 안드레이 란코프에 따르면 "현대의 논쟁은 현대적 정체성을 과거로 투사한 경우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121]
일부 학자들은 민족주의와 자민족 중심주의의 관점에서 실증적 증거를 분석한다. 안연상과 임지현은 현대적 개념의 국가 영토와 정체성을 고대 국가에 투영하는 것은 자의적이라고 믿는다.[16] 안연상은 중국의 고구려 역사에 대한 주장은 영토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고, 한국의 주장은 조상, 즉 공통의 혈통에서 비롯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16]
베네딕트 앤더슨은 네이션을 '상상의 정치 공동체'로 규정하고, 그것이 근대에 만들어진 새로운 존재라고 했다.[170] 고구려사 연구도 이러한 연구 동향과 무관하지 않으며, '조선 민족의 역사' '중화 민족의 형성 과정'으로 고구려사를 그리는 일국사적 시각은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172] 현대 역사학의 관점에서는 고구려가 어느 국가(네이션)의 역사에 귀속되는가 하는 문제 설정 자체가 적극적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학자 야기 타케시는 고구려는 '중국사'인가 '조선사'인가 하는 이분법은 결국 개인의 '세계관' 문제이지만, 역사학의 입장에서는 '근대 국가 성립 이전의 영역에 근대 국가의 영역관을 억지로 적용하는, 극히 무의미한 논쟁'이라고 말한다.[174]
고구려와 같이 현대의 국경선과 일치하지 않는 과거의 국가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일국사의 시각에서 그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에는 자연히 한계가 있으며, 보다 발전적으로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동북아시아사적 시각이 필요하다.[181] 한국·중국의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연속적인 '자국사'에 고구려를 위치시키는 것을 전제로 한 논설이 활발하지만,[182]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일국사의 틀에 의한 서술에 비판적인 견해가 제출되고 있으며,[182] 한국의 중국사 학자 김한규는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요·금 등을 모두 중국사도 조선사도 아닌 '요동사'라는 범주 안에서 파악할 것을 제창했다.[183]
5. 2. 만선사적 시각의 재조명
시라토리 쿠라키치와 이나바 군잔 등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만주와 조선을 하나로 묶어 파악하고, 고구려를 이러한 관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존재로 보았다.[131][132] 특히 이나바 군잔은 조선반도에서 요동반도를 포함한 남만주를 함께 지배했던 고구려를 참고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요동반도의 확실한 수호"가 "반도 존립을 옹호할 수 있는 일본"에게 필수적이며, 이를 함께 지배하는 "만한일통(滿韓一統)의 경영"을 주장했다.[133] 그는 고구려가 요동반도를 지배하여 대륙 세력을 물리친 것을 "반도 경영의 모범"으로 보았고, "만한일통의 경영"을 처음으로 보여준 고구려의 역사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133]이러한 만주와 조선을 하나로 보는 관점은 만선사라고 불렸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동양사의 한 분야로 연구되었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총재가 된 고토 신페이의 도움을 받아 시라토리 쿠라키치는 이나바 군잔, 이케우치 히로시, 쓰다 소키치 등과 함께 만철(満鉄) 역사조사부를 만들어 만주와 조선의 역사를 연구했다.[136] 이나바 군잔은 조선총독부 설치에 대한 의견을 묻는 자리에서, 만주와 조선의 일체성을 고려하여 수도는 경성(서울)보다 평양이 적절하고, 명칭도 고려총독부가 좋다는 견해를 밝혔다.[137] 이 제안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고려는 수도를 평양으로 하고 만주 경영과의 관계를 고려했다는 점에서 고구려를 염두에 둔 명칭이었다.[138]
일본이 한국 병합을 한 후, 1919년에 조선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 세력은 단군조선 이래 조선 민족의 "영광스러운 4천 년" 역사를 역사적 근거로 내세웠다. 이나바 군잔은 일본의 한국 병합을 "은혜"라고 생각하며 이를 비판했다. 그는 단군조선은 실존성이 부족하고,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한족의 식민지였으며, 고구려와 백제도 "순수한 만주인"의 왕국이고, 신라는 진(秦)에서 망명 온 사람들이 세운 나라이므로, "순수한 한인에게서 나와 주권자의 지위를 차지한 것은 전무(絶無)"하다고 주장하며 조선 독립의 역사적 정통성을 부정했다.[139]
하지만 그는 당시 많았던 조선인의 만주 이주를 "민족적 대사명"이라고 칭하며, 고구려와 백제를 조선 민족의 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나바는 "조선인은, 그 전통적이라고 생각되는 신라 본위의 역사관을 버리고, 삼국 일체의 본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만약, 조선 민족을 광의로 생각하여, 신라 통일 이전의 삼국 시대를 기초로 한다면, 조선의 영토를 만주까지 미칠 수 있다"라고 말했다.[140] 그러나 이나바의 주장에서는 고구려와 백제는 만주인의 한 갈래로 여겨졌고, 이를 조선 민족의 역사로 보는 것은 "오늘날의 조선 민족 안에는 다수의 만주 민족이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로 "광의로는"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140]
5. 3. 요동사 개념의 등장
위안부와 한국 및 일본의 역사 논쟁을 연구해 온 한국 학자 안연상은[16] 전철주, 쑨진지, 김희교, 마크 바이팅턴과 같은 역사가들이 동북공정의 시작을 중국의 영토 보전과 안정을 위한 방어적 반응으로 인식한다고 적고 있다.[16]중국이 동북아 역사에 관심을 갖는 이유로는 한국의 간도에 대한 미회수 영토주의,[3] 한국 정부가 중국 내 한국인에게 부여한 특혜,[3] 북한의 붕괴 가능성[17][18][19] 등이 거론된다.
현대 중국 민족주의는 한국 민족주의와 달리 다양성 속의 통일과 초민족적인 "중국인", 즉 ''중화 민족''을 강조한다. 중국은 마약 밀매, 근본주의 종교 선교, 민족 분리주의, 불법 이민 등 국경 간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국경 지역의 안정과 영토적 현상 유지를 촉진하는 데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6]
일부 중국 학자들은 일부 한국인(북한 및 남한)의 한국 민족주의 정서가 중국의 영토 보전에 위협이 된다고 인식한다. 한국의 자유주의 및 보수 진영 모두에서 "잃어버린 옛 영토의 회복"을 옹호하는 지지자들이 존재한다.[20] 중국 학자들은 북한 붕괴 시 국경 변경 가능성을 우려한다. 중국 지린 성에는 200만 명 이상의 한족이 거주하고 있어, 이들이 중국에서 분리되어 통일 한국에 합류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21]
베이징 대학 국제 관계 연구원 리양판은 한국의 격동적인 현대사로 인한 역사적 과장이 갈등의 원동력이라고 본다. 그는 한국 역사가들이 한국사에서 강한 선택적 서사를 밀어붙이며, 고구려와 중국의 연결을 거부하는 동기는 단군조선에서 고려를 거쳐 현대 한국으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한국 민족 국가 서사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리양판은 중국과 한국 모두 국가 건설 과정에 있으므로, 한국의 변화를 인식하고 호환 가능한 역사적 관점을 확립하는 것이 양국 관계에 필요하다고 본다.[22]
개리 레디야드는 고구려가 현대 한국 정체성에서 중요한 부분인 것처럼, 해당 지역 학자들에게 동북 중국(둥베이)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진다고 언급했다. 고구려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등록과 관련하여, 중국 중앙 정부에 상당한 지역적 압력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둥베이의 자존심은 그러한 고구려 문화 유산에 대한 더 나은 관리를 요구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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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국가박물관, 고구려 뺀 한국사 연표 논란 끝 수정 않고 철거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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