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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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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르웨이의 경제는 산업 혁명 이전 농업, 임업, 어업에 기반을 두었으며, 바이킹 시대에는 가난했지만 13세기에는 잉글랜드와의 교역으로 번영했다. 19세기 산업 혁명 이후 해운업과 수산업을 중심으로 성장했으며, 2차 세계 대전 이후 사회 민주주의 개혁을 통해 복지 국가를 건설했다. 1960년대 북해 유전 발견과 석유 수출로 경제가 급성장하여 세계적인 석유 및 천연가스 수출국이 되었으며, 정부는 국부 펀드를 통해 석유 수입 의존도를 낮추려 노력하고 있다. 노르웨이는 높은 생활비, 공공 부문의 역할, 복지 국가의 미래, 탈산업화 시대의 경쟁력 확보 등의 과제를 안고 있으며, 2009년에는 상당한 재정 흑자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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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경제
일반 정보
국가노르웨이
오슬로 야경
일반 정보
가입 기구EFTA
OECD
WTO
EEA
기타
경제 그룹선진 경제국
고소득 경제국
인구 (2020년 1월 1일)5,367,580명
경제 지표
GDP (명목, 2024년 추정치)5,037억 5,200만 달러 (미국 달러)
GDP (PPP, 2024년 추정치)5,762억 3,600만 달러 (미국 달러)
GDP 성장률3.3% (2022년)
2.1% (2023년)
1.5% (2024년)
1인당 GDP (명목, 2023년)103,446 달러 (미국 달러)
1인당 GDP (PPP, 2024년)90,433 달러 (미국 달러)
부패 인식 지수 (2023년)84/100점 (4위)
산업별 GDP 구성 (2016년 추정치)농업: 1.6%
산업: 34.7%
서비스: 63.5%
인플레이션 (2024년 추정치)3.3%
빈곤율정보 없음
빈곤 또는 사회적 배제 위험에 처한 인구 (AROPE, 2023): 15.8%
지니 계수 (2023년)24.7 (낮음)
인간 개발 지수 (HDI, 2022년)0.966 (매우 높음, 2위)
불평등 조정 인간 개발 지수 (IHDI, 2022년)0.903 (매우 높음, 2위)
기업 환경 평가 (2020년)9위 (매우 쉬움)
노동 시장
노동 인구 (2020년 2분기)280만 명
고용률 (2023년)80.4%
직업별 구성 (2016년 추정치)농업: 2.1%
산업: 19.3%
서비스: 78.6%
실업률 (2024년 1월)3.9%
청년 실업률 (15-24세, 2020년 6월)12.8%
실업자 수 (2020년 2분기)129,000명
평균 연봉55,200 유로 (총액)
평균 순 연봉40,500 유로 (순액)
산업
주요 산업석유
천연 가스
해운
어업
양식업
식품 가공
조선업
펄프 및 제지
금속
화학 제품
목재
광업
섬유
대외 교역
수출 (2017년 추정치)1,028억 달러 (미국 달러)
주요 수출 품목석유 및 석유 제품, 기계 및 장비, 금속, 화학 제품, 선박, 어류
주요 수출 대상국 (2023년)영국 19%
독일 19%
네덜란드 8.3%
스웨덴 7.7%
폴란드 6.1%
프랑스 5.9%
수입 (2017년 추정치)950억 6천만 달러 (미국 달러)
주요 수입 품목기계 및 장비, 화학 제품, 금속, 식료품
주요 수입 대상국 (2023년)독일 11.4%
중국 11.2%
스웨덴 10.8%
미국 7.6%
네덜란드 4.8%
덴마크 4.7%
경상수지 (2024년 추정치)731억 3천만 달러 (미국 달러)
외국인 직접 투자 (FDI, 2017년 12월 31일 추정치)국내: 2,365억 달러 (미국 달러)
해외: 1,963억 달러 (미국 달러)
총 외채 (2016년 3월 31일 추정치)6,423억 달러 (미국 달러)
재정
국가 부채 (GDP 대비, 2017년 추정치)36.5%
재정 수입 (2017년 추정치)2,171억 달러 (미국 달러)
재정 지출 (2017년 추정치)1,995억 달러 (미국 달러)
재정 수지 (GDP 대비, 2017년 추정치)+4.4%
공적 개발 원조 (ODA, 2017년)40억 달러 (미국 달러), GDP의 1.1%
신용 평가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 (Standard & Poor's)국내: AAA
해외: AAA
T&C 평가: AAA
전망: 안정적
무디스 (Moody's)Aaa
전망: 안정적
피치 (Fitch)AAA
전망: 안정적
스코프 (Scope)AAA
전망: 안정적
외환 보유고 (2017년 12월 31일 추정치)659억 2천만 달러 (미국 달러)

2. 역사

바이킹 시대를 거치며 해상 교역으로 번영했던 노르웨이는 페스트의 유행과 한자동맹의 경제적 영향력 확대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397년 칼마르 동맹을 통해 덴마크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1536년에는 덴마크의 속주가 되었다. 덴마크-노르웨이 시대에는 농업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수산업, 임업, 해운업이 발달하였고, 30년 전쟁 이후 국왕 직할지 매각 과정에서 자영 농민이 증가하기도 했다.[56][57]

나폴레옹 전쟁 이후 1814년 킬 조약을 통해 노르웨이는 스웨덴과의 동군 연합(스웨덴-노르웨이)을 이루게 되었다. 비록 외교권은 스웨덴에 있었으나, 독자적인 헌법 제정과 자치권을 바탕으로 근대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19세기 중반부터 산업 혁명의 영향을 받아 섬유 공업, 목재 가공업, 수산업 등이 기계화되었고, 철도전신이 도입되는 등 인프라가 확충되었다. 특히 해운업이 크게 성장하여 1880년대에는 세계 3위의 해운국으로 발돋움했다.[66] 산업화와 함께 도시화가 진행되었고, 농촌의 과잉 인구는 미국으로 대규모 이민을 떠나는 배경이 되었다[68]. 노동 운동과 민족주의가 성장하면서 스웨덴과의 갈등을 겪었고, 결국 1905년 평화적으로 독립을 이루었다.

독립 이후 노르웨이는 풍부한 수자원을 활용한 수력 발전을 기반으로 화학 공업 등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켰다.[70][71] 이 과정에서 외국 자본의 영향력이 커지자, 천연자원에 대한 국가 통제권을 강화하는 콘세션법을 제정하기도 했다.[72][71][73]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중립을 지켰으나 독일의 U보트 공격으로 상선 피해를 입었고, 전후에는 인플레이션디플레이션을 겪으며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다.[74][75][76]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실업률이 급증하자 1935년 집권한 노르웨이 노동당 정부는 적극적인 재정 정책과 함께 고용 보호법, 노령 연금, 실업 수당 등 사회 복지 제도를 확충하며 위기 극복을 시도했다.[81]

제2차 세계 대전나치 독일에 점령되었으나, 망명 정부와 국내 레지스탕스의 저항이 이어졌다. 종전 후 마셜 플랜의 지원을 받아 경제를 빠르게 복구했으며[84][85], 노르웨이 노동당 주도로 복지 국가의 기틀을 강화해 나갔다. 1960년대 후반 북해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면서 노르웨이 경제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89] 석유와 천연 가스 수출은 막대한 국부를 창출하여 복지 시스템을 더욱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지만, 동시에 석유 산업에 대한 높은 의존도와 다른 제조업의 경쟁력 약화라는 과제를 안겨주었다.[90]

2. 1. 산업 혁명 이전

산업 혁명 이전 노르웨이의 경제는 농업, 목재, 어업에 크게 기반을 두고 있었다. 노르웨이인들은 대체로 부족한 환경 속에서 살았지만, 기근은 드물었다. 헤드마르켄과 외스트폴주의 일부 비옥한 지역을 제외하면, 작물은 귀리, 호밀, 보리와 같은 강인한 곡물에 한정되었고, 가축은 , 염소, , 돼지, 그리고 약간의 가금류 정도였다. 중앙 및 북부 지역에서는 사미인들이 순록 유목으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사냥으로 식량을 보충했다. 해안 전역에서 청어, 대구, 넙치 등 한대성 어종이 풍부했지만, 어업은 위험한 활동이었다. 18세기에 감자가 도입되면서 노르웨이인들의 식량 사정은 크게 나아졌고, 감자는 주요 식량원이 되었다.[29]

해안 지역, 특히 북부와 서부에서는 어업이 농업의 중요한 보조 수단이자 주요 생계 수단이었다. 어업은 보통 소규모 농장에서의 작물 재배 및 가축 사육과 병행되었다.

1580년경의 베르겐


노르웨이의 경제적 조건은 봉건제도가 발달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으나, 몇몇 왕들은 충성스러운 신하들에게 토지를 하사하여 기사로 삼기도 했다. 자작농은 노르웨이 농업의 중심이었고 현재도 그러하지만, 19세기 초에는 경작 가능한 토지가 부족해졌다. 이로 인해 많은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이는 북미 이민을 촉진하는 요인이 되었다. 노르웨이는 아일랜드 다음으로 인구 대비 가장 많은 이민자를 보낸 나라가 되었다.[29]

바이킹 시대를 거치며 한때 크누즈가 이끄는 데인족의 북해 제국 지배하에 놓이기도 했으나(11세기 중반), 12세기 말에 독립을 회복했다. 13세기에는 잉글랜드와의 교역으로 번영했는데, 소금에 절인 청어나 말린 생선 같은 해산물과 목재를 수출하고 곡물, 무기, 모직물을 수입했다.[49] 그러나 14세기 중반 유럽을 휩쓴 페스트는 노르웨이에도 큰 타격을 주어 1400년경 인구가 13세기의 절반으로 급감했다. 살아남은 농민들은 더 비옥한 땅으로 이동하면서 경작 포기지가 늘어났다.[50][51] 노르웨이 귀족층 역시 영지 경영에 어려움을 겪으며 스웨덴이나 덴마크 귀족과의 혼인을 통해 세력을 유지하려 했다.[52]

한편, 발트해를 중심으로 뤼베크를 맹주로 한 한자동맹이 세력을 확장하며 베르겐에 상관을 설치했다. 노르웨이는 독일로부터 소금이나 곡물을 수입하는 동시에, 수입한 소금을 이용해 말린 대구나 소금 절인 청어를 가공하여 수출하는 등 한자동맹의 경제권 주변부에 편입되어 원료 공급지 및 상품 시장 역할을 하게 되었다.[53]

1397년,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1세 주도로 칼마르 동맹이 결성되어 노르웨이는 덴마크, 스웨덴과 함께 덴마크의 지배 아래 놓였다. 15세기에는 칼마르 동맹이 한자동맹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며 한자동맹이 쇠퇴했지만, 크리스티안 2세가 1520년 스톡홀름의 피바다 사건을 일으키면서 스웨덴이 동맹에서 이탈하여 독립했다. 이후 덴마크와 스웨덴은 대립 관계에 놓였다. 이 시기 마르틴 루터종교 개혁이 북유럽에도 영향을 미쳤다. 루터파인 크리스티안 3세는 퇴위한 크리스티안 2세와 대립했고, 1534년부터 시작된 백작 전쟁에서 스웨덴 구스타브 1세의 지원을 받아 승리했다. 이 전쟁에서 크리스티안 2세를 지지했던 한자동맹은 패배했고, 발트해에서의 지배력을 상실했다. 크리스티안 3세는 덴마크 지배 지역을 루터파로 개종시키고 반대파의 교회령을 몰수하여 왕권을 강화했다.[54] 페스트 이후 인구와 경제력에서 상대적으로 약화된 노르웨이는 1536년 덴마크의 속주가 되었다.[55]

덴마크-노르웨이 시대에 노르웨이는 농업이 어려운 환경이었기에 수산업, 임업, 해운업 등이 발달하고 중산 계급이 성장했다.[56] 크리스티안 4세가 30년 전쟁에 개입하면서 덴마크 정부의 재정이 악화되자, 국왕은 직할지 매각을 강요당했고, 그 결과 노르웨이에서는 자영 농민이 증가하는 계기가 되었다.[57] 대북방 전쟁프랑스 혁명 시기에는 덴마크-노르웨이가 중립을 지키며 해운업 발전에 힘썼다.[58]

노르웨이의 경제가 발전하면서 영내에 은행과 대학 설치 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지만, 덴마크 정부는 중앙 집권을 강화하고 노르웨이의 부를 수탈하려 했기 때문에 양측의 갈등이 깊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이 노르웨이의 완전한 분리 독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59]

2. 2. 산업 혁명

나폴레옹 전쟁 당시 덴마크-노르웨이프랑스 제국 편에 서면서 영국의 해상 봉쇄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60][61]. 1814년 킬 조약과 모스 조약을 거쳐 노르웨이는 스웨덴과의 동군 연합을 이루게 되었다. 비록 외교권은 스웨덴에 있었으나, 노르웨이는 독자적인 에이츠볼 헌법을 제정하고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확보했다. 전쟁 중 발생한 국채와 통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16년 크리스티아니아노르웨이 중앙은행이 설립되었다[62].

콩스베르그, 뢰로스, 뢰켄 지역의 광업을 제외하면, 노르웨이의 본격적인 산업화는 19세기 중반 방직 공장 건설과 함께 시작되었다. 기업가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은행이 설립되면서 대규모 산업 기업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산업 발전은 농업 부문에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고용 기회를 제공했다. 산업 임금이 농업 임금보다 높아지면서 농촌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고 경작지가 감소하는 장기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노동 계급은 노르웨이 사회에서 독자적인 문화와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집단으로 부상했다.

1846년 영국이 곡물법을 폐지하자, 노르웨이는 영국에 수산물과 목재를 수출하고 해운업을 발전시키며 대영 제국 경제권에 편입되었다. 영국 자본은 저렴한 노동력과 풍부한 천연자원을 찾아 노르웨이에 투자했고, 이를 통해 섬유 공장에 기계가 도입되었다. 전동 톱 도입으로 목재 생산량이 증가했으며[63], 수산업에서는 개량된 어망과 증기선 도입으로 어획량이 늘었다. 건조 대구는 지중해와 남미로, 가공된 청어는 미국, 영국, 독일 등지로 수출되었다[63]. Svend Foynno의 포경포 개발은 포경 산업의 근대화를 이끌었다[64].

1854년 크리스티아니아와 Eidsvoll영어 사이에 철도가 개통되었고, 1855년에는 전신 서비스가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1880년에는 최초의 전화선이 설치되었고, 전국 단일 요금의 우편 서비스도 시작되었다[65]. 이러한 발전에 힘입어 1880년대 노르웨이는 미국, 영국에 이어 세계 3위의 해운 강국으로 부상했다[66]. 산업 혁명이 진행되면서 자본 축적이 이루어졌고, 19세기 말에는 국내총생산(GDP)의 28%를 공업이 차지했다. 농촌 인구의 도시 이동으로 1900년에는 전체 인구의 30%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게 되었다[67].

자본 형성 1865–2003
출처: Statistics Norway


1865년부터 2003년까지의 GDP 추이


농업 기계화와 인구 증가는 농촌에 과잉 노동력을 발생시켰다.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한 많은 노르웨이인들은 미국으로 이주하여 노르웨이계 미국인(Norwegian American영어) 공동체를 형성했다[68]. 19세기 후반에는 노동 조합[69]사회주의 사상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전역에 퍼진 민족주의는 노르웨이에도 영향을 미쳤다. 수산업과 해운업 중심의 경제 성장은 스웨덴 정부의 외교 정책과 노르웨이의 국익이 충돌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결국 여러 정치적 과정을 거쳐 1905년, 호콘 7세를 국왕으로 추대하며 노르웨이는 스웨덴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

독립 전후 노르웨이는 제2차 산업 혁명의 흐름에 합류했다. 당시 비료로 쓰이던 칠레 초석 고갈 문제에 대응하여, 사업가 Sam Eyde영어/Sam Eydeno와 과학자 크리스티안 빌케란은 공기 중 질소를 이용한 질소 고정 기술로 화학 비료 생산을 추진했다. 대량의 전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텔레마르크주의 폭포를 활용한 수력 발전소 건설에 주목했고, 스웨덴과 프랑스 자본을 유치하여 1905년 화학 비료 공장과 함께 노르스크 하이드로(Norsk Hydro)를 창업했다[70][71]. 이를 계기로 국내외 투자자들이 수력 발전소와 공장을 건설하면서 중화학 공업화가 진행되었고, 전력 소비량은 1905년에서 1914년 사이에 10배로 급증했다. 전기 사용 가구 비율도 1900년 10%에서 1920년대 3분의 2로 크게 늘었다[71]. 그러나 수력 발전소 건설에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해 외국 자본 의존도가 높아졌다. 1906년에는 개발된 폭포의 4분의 3[72], 1914년에는 화학 및 광공업의 80% 이상이 외국 자본 소유였다[71]. 이에 천연자원에 대한 외국 자본의 지배력 강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1909년부터 1920년까지 일련의 콘세션법(konsesjonsloveneno)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기업의 자원 개발 시 정부 허가를 의무화하고, 수력 발전소 부지를 일정 기간 후 국가에 반환하도록 했으며, 외국 기업의 삼림 구매를 제한하는 등 국가의 자원 통제권을 강화하는 조치였다[72][71][73].

노르스크 하이드로가 텔레마르크주에 건설한 베모르크(Vermork) 수력 발전소.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중수 제조를 막기 위한 파괴 공작이 이루어졌다.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빈부 격차가 심화되자, Gunnar Knudsen영어이 이끈 노르웨이 자유당 정권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질병 보장법, 공장 검사법, 노동자 보호법, 10시간 노동법 등 노동자와 빈민을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사회 정책을 도입했다[72]. 제1차 세계 대전 중 노르웨이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영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아 영국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로 인해 독일 U보트의 공격을 받아 보유 상선의 절반을 잃는 큰 피해를 입었고, 전쟁 말기에는 식량 배급제를 시행해야 했다[74][75].

제1차 세계 대전 후 노르웨이는 심각한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를 겪었다. 전쟁 중 금본위제 이탈[77]과 통화량 증가는 물가 급등과 노르웨이 크로네 가치 하락을 초래했다. 1915년부터 1917년까지 물가 상승률(GDP 디플레이터 기준)은 연 27% 이상을 기록했다[76]. 전쟁 후 물가 안정을 위해 중앙은행은 금리를 인상하고 금본위제 복귀(1928년~1931년)[78]를 시도했으나, 이는 오히려 농민과 어민의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생산 확대를 시도했지만 수요 감소로 농수산물 가격이 하락했다. 이에 정부 지원 하에 각종 시장 조정 위원회가 설립되어 가격 설정, 수출 관리 등을 담당했다. 어민 구제를 위해 1919년 노르웨이 국립 어업 은행이 설립되었고, 1926년 결성된 노르웨이 어업 조합은 수산물 판매 규제와 가격 인상을 통해 위기 극복을 모색했다. 기업들도 생존을 위해 기업 연합을 결성했고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79]. 1920년대는 실질 GDP 성장률은 플러스를 유지했지만, 명목 GDP 성장률은 대부분 마이너스를 기록하며 디플레이션이 지속되었다[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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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시작된 세계 대공황은 노르웨이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실업률은 10%를 넘었고, 1930년대 내내 인구의 10%가 구호 조치에 의존하며 지방 재정이 악화되었다. 많은 은행이 부실 채권 문제로 도산했다[80]. 1935년 집권한 Johan Nygaardsvold영어의 노르웨이 노동당 정부는 유효 수요 창출을 위한 적극적인 재정 확장 정책을 폈다. 1일 8시간 노동과 연 9일 유급 휴가를 보장하는 고용 보호법을 제정하고, 노동자를 위한 질병 수당, 노령 연금, 실업 수당 등을 도입하며 사회 복지 제도를 크게 확충했다[81]. 이러한 정책들은 경제 회복에 기여했으며[76], 현대 노르웨이 복지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940년 나치 독일의 침공으로 노르웨이는 점령 하에 놓였으나, 호콘 7세 국왕과 정부는 영국으로 망명하여 저항을 이어갔다. 노르웨이 선주들은 망명 정부와 협력하여 상선 회사 Nortraship영어 / Nortrashipno을 운영하며 망명 정부의 재정을 지원했다[82]. 국내에서는 레지스탕스 활동이 전개되었다. 전쟁으로 노르웨이 경제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전시 경제 체제는 기존의 부채 문제를 해소하고 국민적 단결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83].

호콘 7세(왼쪽)와 올라프 왕태자. 호콘 7세는 나치 독일의 지배 하에서 노르웨이 국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2. 3. 사회 민주주의 개혁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노르웨이 노동당은 에이나르 게르하르센 총리를 중심으로 소득 분배를 평등하게 하고, 빈곤을 없애며, 모든 국민에게 연금, 의료, 장애 수당과 같은 사회 서비스를 보장하고, 더 많은 자본을 공공의 신탁으로 이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일련의 사회 민주주의 개혁을 시작했다. 매우 누진적인 소득세, 부가가치세 도입, 그리고 광범위한 특별 할증세와 세금으로 인해 노르웨이는 세계에서 가장 세금이 높은 경제 중 하나가 되었다. 당국은 특히 재량적 지출에 세금을 부과하여 자동차, 담배, 술, 화장품 등에 특별세를 부과했다.

노르웨이의 장기적인 사회 민주주의 정책, 광범위한 정부 정보 추적, 그리고 인구의 동질성은 경제 연구에 특히 적합했으며, 노르웨이의 학문적 연구는 이 시대에 거시 경제학 분야에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노르웨이가 석유 수출국이 되면서 경제적 효과는 더욱 연구 대상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노르웨이 경제는 순조롭게 복구되었다. 1946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인 1939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84]。 경제 복구 과정에서 식료품 등의 수입보다는 외국의 새로운 기계 설비 수입을 우선했기 때문에 국제 수지 제약에 직면했지만, 마셜 플랜이 이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85]。 즉, 기계 설비 수입에 따른 외화 유출이 설비 투자를 제약했지만, 마셜 플랜에 의해 미국으로부터 노르웨이로 자본이 유입되면서, 이를 원천으로 설비 투자가 가능해져 경제 성장의 제약 조건이 해소된 것이다.

전후부터 1960년대의 순조로운 경제 성장을 기반으로 노르웨이 정부는 복지 국가 건설에 매진해 갔다. 1946년 아동 수당 지급이 시작되었고, 1950년대에는 건강 보험이 의무화되었으며, 1964년에는 사회 복지법이 발효되었다[86]。 한편, 1950년대부터 농업, 수산업에서 기계화에 따른 합리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에[87], 1960년대에는 경제 성장의 부정적인 측면으로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 이동, 환경 파괴가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88]

1969년 에코피스크 유전을 발견한 시추선의 모형. (노르웨이 과학기술 박물관)


1969년에는 필립스 페트롤리엄의 시추선 Ocean Viking|오션 바이킹no이 북해에서 에코피스크 유전을 발견했다[89]。 1970년대에 들어서 오일 쇼크로 인한 원유 가격 급등이 미국, 일본, 서유럽 국가의 경제에 타격을 준 반면, 노르웨이에게는 북해 유전 채굴의 채산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노르웨이 정부는 북해 유전 개발에 주력했다(#석유・천연가스)。 석유와 천연 가스 수출을 통해 노르웨이는 경상 수지 흑자국이 되었다. 안정적인 원유 수입을 바탕으로 사회 복지를 확장할 수 있었던 점은 인근의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와 다른 점이었다. 한편, 원유 수입으로 노르웨이가 경제 성장을 지속하면서 임금 및 생활 수준이 지나치게 상승한 결과, 노르웨이 제품은 국제 경쟁력을 잃게 되는 문제도 발생했다[90]

2. 4. 석유 시대와 탈산업화

노르웨이 해역의 석유 생산량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노르웨이 경제는 빠르게 회복하여 1946년에는 전쟁 이전 수준을 되찾았다.[84] 초기에는 식료품보다 기계 설비 수입을 우선시하여 국제 수지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마셜 플랜을 통한 미국의 자본 지원으로 설비 투자를 확대하며 경제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85] 전후 순조로운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노르웨이 정부는 복지 국가 건설에 힘썼다. 1946년 아동 수당 지급을 시작으로 1950년대 건강 보험 의무화, 1964년 사회 복지법 발효 등이 이루어졌다.[86] 하지만 1960년대 들어 농업과 수산업의 기계화로 농촌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고 환경 문제가 발생하는 등 성장통을 겪기도 했다.[87][88]

1963년 5월, 노르웨이는 북해 자국 수역의 천연자원에 대한 주권을 선언하고, 1966년부터 본격적인 탐사를 시작했다.[30] 초기 탐사는 난항을 겪었으나, 1969년 필립스 페트롤리움의 시추선 오션 바이킹(Ocean Viking)이 스타방에르 서쪽 약 190km 해상에서 에코피스크 유전을 발견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30][31][89] 이는 북해에 막대한 석유와 천연 가스가 매장되어 있음을 확인시켜 준 중요한 발견이었다. 에코피스크 유전은 1980년 한 해에만 약 427,442 배럴의 원유를 생산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석유 발견 이후, 올라 스캬크 브레크 당시 산업부 장관 주도로 국가 에너지 정책이 수립되었다. 노르웨이는 OPEC에 가입하지 않고 독자적인 에너지 가격 정책을 유지하며, 석유 수입은 미래를 위해 노르웨이 정부연기금(국부 펀드)에 적립하여 현명하게 관리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국영 석유 회사인 스타토일(현 에퀴노르)을 설립하고, 노르스크 하이드로, 사가 페트롤리움 등에도 시추 및 생산 권한을 부여하여 석유 개발을 주도했다. 석유 수출에는 표준 법인세 24%에 특별 석유세 54%를 더해 총 78%의 높은 세율을 적용했다.[32]

북해 유전 개발은 혹독한 자연환경으로 인해 많은 기술적 어려움이 따랐지만, 노르웨이 기업들은 조선 산업 등 기존 산업 기반을 활용하여 해양 플랜트 건설 및 엔지니어링 역량을 키워나갔다. 특히 스타방에르는 관련 기술 연구 및 해상 시추 산업의 중심 기지로 발전했다. 북해의 석유 생산량은 정점을 지났지만, 이후 노르웨이 해와 바렌츠 해의 스노비트 유전 등 새로운 유전 개발이 이어지고 있다.

석유 수출은 노르웨이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며 경상수지 흑자국으로 만들었고, 이는 복지 국가 시스템을 더욱 공고히 하는 재정적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석유 산업에 대한 높은 의존도는 다른 제조업 분야의 국제 경쟁력 약화라는 과제를 안겨주었으며, 이는 이후 탈산업화 시대의 경제 정책 논의로 이어지게 된다.[90]

2. 4. 1. 유럽 연합 (EU) 가입 문제

노르웨이의 수출과 수입


1972년 9월, 노르웨이 스토르팅은 노르웨이의 유럽 경제 공동체 가입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쳤으나, 근소한 차이로 부결되었다. 이에 노르웨이 정부는 유럽 연합과의 무역 협정을 통해 노르웨이 기업이 유럽 시장에 접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노르웨이는 이 협정을 재협상하고 개선하여 유럽 자유 무역 연합(EFTA)과 유럽 경제 지역(EEA)에 가입했다.

노르웨이의 무역 정책은 오랫동안 유럽 연합과의 산업 및 무역 정책 조화를 목표로 했지만, 1994년에 실시된 두 번째 국민투표 역시 1972년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 이로써 노르웨이는 아이슬란드와 함께 유럽 연합 회원국이 아닌 단 두 개의 북유럽 국가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유럽 연합 가입에 대한 논쟁은 노르웨이 사회를 양분시켰으며, 경제적 문제보다는 정치적 문제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쟁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노르웨이 경제 정책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 정치인과 대중 모두 노르웨이 경제 발전이 특정 분야 수출에 특화하고 나머지는 수입에 의존하는 비교 우위 활용에 달려있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는 자급자족보다는 인구 패턴을 고려하여 재편된 노르웨이 농업 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 미래의 석유 매장량 고갈에 대비하여 노르웨이가 지속적인 번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석유 수입을 현재의 민간이나 공공 소비에 직접 사용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 유럽 시장에 참여하기 위해 노르웨이는 국내 시장을 유럽 수입품에 개방해야 했다. 일부 가격 및 유통 문제(예: 주류, 자동차)는 여전히 남아있지만, 노르웨이의 소비자, 자본, 고용 시장은 점차 유럽 시장 전체와 통합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현재 노르웨이는 양식업 제품, 농산물, 배출 기준 등 다양한 특정 문제에 대해 유럽 연합과 지속적으로 합의를 모색하고 있으며, 이는 실제 유럽 연합 회원국이 추구하는 정책 방향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평가도 있다. 향후 유럽 연합 회원 가입 문제에 대한 국민투표가 다시 실시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2. 4. 2. 탈산업화 시대의 경제 발전

노르웨이가 석유 수출국으로 부상하면서 경제 정책과 관련한 여러 쟁점이 제기되었다. 노르웨이의 인적 자본 투자의 상당 부분이 석유 관련 산업에 집중되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어 왔다. 노르웨이의 경제 구조는 숙련된 노동력이 필요 없는 천연자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이들 천연자원에 대한 수요 변동과 가격 책정에 경제 성장이 매우 취약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러한 석유 수입 의존도를 완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노르웨이 정부연기금이 설립되었다.

1970년대 이후 석유 호황으로 스웨덴과 특히 핀란드와 같은 다른 북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민간 부문에서 새로운 산업을 개발하고 장려하기 위한 정부 인센티브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간 국가 및 지방 정부 차원에서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새로운 "본토" 산업(석유 외 산업)의 형성을 장려하기 위한 인센티브를 받기 시작했다. 첨단 산업에 대한 포부와 더불어 미래 고용 창출원으로서 중소기업 성장을 독려하는 데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2006년 노르웨이 정부는 이러한 사업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9개의 "전문 센터"를 구성했다.[135] 이후 2007년 6월 노르웨이 정부는 노르웨이 암 연구의 80%가 오슬로와 근접해 이루어지고 대부분의 노르웨이 생명공학 회사들이 암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을 활용하여 전문 지식의 중심지로서 오슬로 암 클러스터(Oslo Cancer Cluster, OCC)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다.[135]

2006년 노르웨이 수출 품목


1970년대 이후 노르웨이 경제에 대한 논쟁을 지배해 온 몇 가지 문제들은 다음과 같다.

  • '''생활비''': 노르웨이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국가 중 하나이며, 이는 빅맥 지수 및 기타 지수에 반영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운송 비용과 자유 무역의 장벽이 이러한 불균형을 야기했지만, 최근 몇 년 동안 노르웨이의 노동 관계, 세금 및 기타 분야의 정책이 크게 기여했다.
  • '''"본토" 산업의 경쟁력''': 높은 인건비와 노르웨이 환경의 다른 구조적 특징은 석유 이후 시대에 노르웨이가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우려를 낳았다. 특정 산업("보호 산업" - ''vernede industrier'')을 "보호"하는 관행을 끝내고 더 많은 산업을 "경쟁에 노출"시키는("konkurranseutsettelse") 분명한 추세가 있다. 정보 기술에 대한 관심 외에도, 고도로 전문화된 기술 솔루션을 개발하고 마케팅하기 위해 여러 중소기업이 설립되었다.
  • '''공공 부문의 역할''': 공공 소유에 대한 사회주의적 관점과 비사회주의적 관점 사이의 이념적 격차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감소했다. 노르웨이 정부는 민간 자본 시장에 접근해야 하는 기업에 대한 소유권을 줄이려고 노력해 왔으며, 자본 형성을 통제(또는 제한)하기보다는 정부가 기업가 정신을 촉진하는 데 점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이윤 동기"에 대한 잔존하는 불신이 여전히 존재하며, 노르웨이 기업은 특히 노동 관계와 관련하여 과도하게 규제되고 있다.
  • '''복지 국가의 미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역대 노르웨이 정부는 질병 및 장애 수당, 최소 보장 연금, 대폭 지원 또는 무료 보편적 의료, 실업 보험 등의 형태로 시민들에게 공공 혜택을 확대하고 연장하려고 노력했다. 공공 정책은 여전히 이러한 혜택 제공을 선호하지만, 이를 더욱 공정하고 필요 기반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논쟁이 증가하고 있다.
  • '''도시화''': 수십 년 동안 노르웨이의 농업 정책은 최소한의 자급자족을 전제로 했다. 이후 몇 년 동안, 이는 주요 도시 지역 밖의 인구 패턴을 유지하는 데 더 큰 중점을 두는 것으로 바뀌었다. "지구 정책"(distriktspolitikk|디스트릭츠폴리티크no)이라는 용어는 오래되고 주로 농촌 지역의 노르웨이가 지속 가능한 경제적 기반을 제공함으로써 존속될 수 있도록 요구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 '''과세''': 노르웨이 조세 제도의 주요 목적은 공공 지출을 위한 수입을 올리는 것이지만, 소득 재분배, 알코올 및 담배 소비 감소, 특정 행동에 대한 억제와 같은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으로도 간주된다. 조세 제도의 세 가지 요소가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보인다.
  • 누진세: 한때 세계에서 가장 공격적인 세금 제도 중 하나였지만, 소득에 대한 최고 한계세율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감소했다. 또한 노르웨이인들은 신고된 순자산에 대해 과세를 받는데, 일부에서는 이것이 저축을 억제한다고 주장한다.
  • 부가가치세: 정부 수입의 가장 큰 원천이다. 현재 표준 세율은 25%, 음식 및 음료는 15%, 영화관 티켓 및 대중교통은 8%이다.
  • 특별 할증료 및 세금: 정부는 자동차, 알코올, 담배 및 다양한 종류의 혜택을 포함한 특정 구매와 관련된 여러 세금을 부과했다.
  • 스발바르 제도: 스발바르(Spitsbergen)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스발바르 조약으로 인해 세금을 감면받는다.
  • '''환경 문제''': 여러 정치적 문제는 몽스타드의 정유 공장과 알타의 수력 발전소를 포함하여 생태학적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3. 경제 구조 및 지속적인 성장

노르웨이가 석유 수출국으로 부상하면서 경제 정책에 대한 여러 문제가 제기되었다. 특히 인적 자원 투자가 석유 관련 산업에 지나치게 집중되고 있다는 우려가 있다. 노르웨이 경제는 숙련 노동력이 크게 필요하지 않은 천연자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이들 자원의 수요 변화나 가격 변동에 경제 성장이 매우 취약하다는 지적이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석유 수입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노력 중 하나로 노르웨이 정부연기금이 운용되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석유 호황기를 거치면서, 스웨덴이나 핀란드 같은 다른 북유럽 국가들과 달리 노르웨이 정부는 민간 부문의 새로운 산업 개발이나 육성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최근 수십 년간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 차원에서 국제 경쟁력을 갖춘 새로운 '본토' 산업 육성을 위한 지원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첨단 산업 육성과 더불어, 미래 고용 창출을 위해 중소기업 성장을 장려하는 데에도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2006년 노르웨이 정부는 이러한 사업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9개의 '전문 센터'를 구성했다.[135] 이후 2007년 6월에는 노르웨이 암 연구의 80%가 오슬로 인근에서 이루어지고, 대부분의 노르웨이 생명공학 회사들이 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을 활용하여, 전문 지식의 중심지로서 오슬로 캔설 클러스터(OCC)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135]

4. 주 소유권 역할

공공 소비와 민간 소비 출처: 노르웨이 통계청


노르웨이 정부는 천연자원 및 전략 산업 분야에서 주요 기업의 소유 지분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전략적인 석유 부문(에퀴노르), 수력 에너지 생산(스태트크래프트), 알루미늄 생산(노르스크 하이드로), 노르웨이 최대 은행(DNB), 통신 사업자(텔레노르) 등이 대표적이다. 정부는 오슬로 증권거래소 상장 기업 총 가치의 약 35%를 통제하며, 상위 7개 상장 기업 중 5곳의 지분을 일부 소유하고 있다.[130][33] 비상장 기업까지 포함하면, 특히 석유 직접 라이선스 소유를 통해 국가의 소유 지분은 훨씬 더 높아진다. 노르웨이의 국영기업은 전체 비농업 고용의 9.6%를 차지하며, 국가가 소수 지분만 가진 기업까지 포함하면 그 비율은 약 13%까지 늘어나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131][34] 이렇게 국가 소유 지분이 높은 기업들도 시장 중심적이며 고도로 자유화된 시장 경제 체제 내에서 운영되고 있다. 노르웨이의 개방된 시장 경제 속에서 나타나는 높은 수준의 국가 소유 형태는 일종의 국가자본주의로 평가받기도 한다.[132][35]

석유 및 가스 산업은 노르웨이 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노르웨이 복지국가 재정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정부는 유전 직접 소유, 에퀴노르 주식 배당금, 라이선스 수수료, 세금 등을 통해 석유 및 가스 산업으로부터 수입을 얻는다. 이 산업은 정부 수입과 부가가치 측면에서 노르웨이 최대 규모이다. 이러한 구조는 석유 자원의 탐사, 개발, 추출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익이 사회 전체의 공공 가치 창출로 이어지도록 설계되었다. 이를 위해 조세, 라이선스, 국가 직접 소유를 혼합한 '국가 직접 금융 이익'(SDFI, State's Direct Financial Interest) 시스템이 운영된다. 1985년에 설립된 SDFI는 다수의 석유 및 가스전, 파이프라인, 육상 시설에 대한 국가 소유 지분과 에퀴노르 지분 67%를 포함한다. 석유 산업에서 발생한 정부 수입은 노르웨이 정부연기금 글로벌(Government Pension Fund Global)로 이전된다. 이 기금은 정부가 공공 지출을 위해 원금에 직접 접근하는 것을 금지하며, 오직 기금 운용을 통해 발생한 수익만을 정부 지출에 사용할 수 있도록 엄격히 관리된다.[133][36]

노르웨이 정부가 높은 수준의 국영 소유를 유지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동기는 천연자원 활용에 대한 국가적 통제를 확보하려는 의지이다. 국가의 직접적인 경제 개입은 20세기 이전 공공 인프라를 제공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여러 제조업체에서 독일 자산을 인수하면서 산업 및 상업 기업으로 그 범위가 크게 확장되었다. 국가 소유가 가장 크게 확대된 계기는 1972년 스타토일(현 에퀴노르)의 설립이었다. 국가가 지분을 소유한 산업 및 상업 기업들은 시장 원리에 따라 운영되며, 이러한 시장화는 산업 부문뿐만 아니라 공공 서비스 제공업체에까지 적용되고 있다.[134][35]

5. 산업

콩스베르그, 뢰로스, 뢰켄 등 일부 지역의 광업을 제외하면, 노르웨이의 본격적인 산업화는 19세기 중반 섬유 공장이 건설되면서 시작되었다. 기업가들의 정치적 요구에 부응하여 은행이 설립되면서 대규모 산업 기업 형성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산업 발전은 농업 부문에서 일자리를 잃은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고용 기회를 제공했으며, 산업 임금이 농업 임금을 넘어서면서 농촌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고 노동 계급이라는 새로운 사회 계층이 형성되는 장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20세기 초, 노르웨이는 풍부한 수자원을 활용한 수력 발전 개발과 함께 화학 공업을 중심으로 한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했다. 사업가 샘 아이데와 과학자 크리스티안 빌케란이 설립한 노르스크 하이드로(1905년)는 이러한 흐름을 대표하는 사례이다.[70][71] 수력 발전소 건설 등에 막대한 외국 자본이 유입되면서(1914년 화학 및 광공업의 80% 이상 외국 자본 소유[71]), 천연자원에 대한 통제권 확보를 위해 1909년부터 일련의 konsesjonslovene|콘세션법no을 제정하여 자원 개발에 대한 국가 통제를 강화했다.[72][71][73]

제1차 세계 대전 중 노르웨이는 중립을 표방했지만, 영국 의존도가 높아 독일 U보트의 공격으로 상선 피해를 입었다.[74][75] 전후에는 인플레이션과 불황을 겪었으며[76],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실업률이 급증하고 은행 도산이 이어졌다.[80] 1935년 집권한 요한 니고르스볼 노동당 정권은 재정 확장 정책과 함께 고용 보호법, 사회 복지 제도를 도입하여 경제 회복과 복지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81] 제2차 세계 대전나치 독일의 점령으로 경제적 타격을 입었으나, 마셜 플랜의 도움으로 전후 빠르게 경제를 복구했다.[84][85]

1969년 북해 유전 발견은 노르웨이 산업 구조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89] 1970년대 이후 석유 및 천연 가스 산업은 국가 경제의 핵심 동력으로 부상했으며, 막대한 수입은 복지 국가 재정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석유 및 가스 산업은 정부 수입과 부가가치 측면에서 노르웨이 최대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석유 산업에 대한 높은 의존도는 숙련 노동력이 필요 없는 천연자원에 대한 의존도를 높여 경제 성장이 자원 가격 변동에 취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이에 노르웨이 정부는 석유 수입을 노르웨이 정부연기금으로 이전하여 직접적인 공공 지출을 제한하고 기금 운용 수익만을 활용하는 등[36], 석유 의존도를 완화하고 미래 세대를 위한 부를 축적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1970년대 이후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비(非)석유 부문 민간 산업 육성을 위해, 최근 정부는 국제 경쟁력을 갖춘 새로운 "본토" 산업 육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2006년에는 9개의 "전문 센터"를 지정하는 등 중소기업 및 첨단 산업 성장을 지원하고 있다.[135]

2009년 산업별 노동 인구 구성
산업노동 인구(천 명)
(구성비, %)
일차 산업67
2.7%
이차 산업503
20.1%
삼차 산업1,912
76.2%
합계2,508
[48]



2005년 기준 노르웨이의 국내총생산(GDP) 구성비는 제1차 산업 1.3%, 제2차 산업 39.1%(건설업, 공익 포함), 제3차 산업 59.6%로 제3차 산업의 비중이 높다.[91] 2009년 노동 인구 구성은 오른쪽 표와 같다.[92]

노르웨이 정부는 천연자원 활용에 대한 국가 통제를 중시하며, 주요 전략 산업 분야에서 대규모 지분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석유 부문(에퀴노르), 수력 발전(Statkraft), 알루미늄 생산(노르스크 하이드로), 최대 은행(DNB), 통신 제공업체(텔레노르) 등 핵심 기업에 대한 국가 소유 비중이 높다.[33] 정부는 오슬로 증권 거래소 상장 기업 총 가치의 약 35%를 통제하며[33], 국영 기업(소수 지분 포함)은 비농업 부문 고용의 약 13%를 차지하여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34] 이러한 국영 기업들은 높은 수준의 국가 소유에도 불구하고, 고도로 자유화된 시장 경제 체제 내에서 시장 지향적으로 운영된다.[35]

5. 1. 1차 산업

산업 혁명 이전 노르웨이의 경제는 농업, 목재, 어업에 크게 기반을 두고 있었다. 노르웨이인들은 대체로 부족한 환경에서 살았지만, 기근은 드물었다.[29] 일부 비옥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작물 재배가 제한적이었고, 가축 사육과 사냥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특히 해안 지역에서는 어업이 농업의 중요한 보조 수단이자 주요 생계 수단이었다.[29] 이러한 경제적 조건은 봉건제가 발달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농림수산업 종사자 수는 감소하는 추세지만, 농지 면적은 1990년대부터 2007년까지 약 8000km2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93] 수산업은 연안에 흐르는 노르웨이 해류와 풍부한 어장 덕분에 여전히 노르웨이 경제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5. 1. 1. 농업

산업 혁명 이전 노르웨이 경제는 농업, 목재, 어업에 크게 의존했다. 노르웨이인들은 대체로 부족한 환경에서 살았지만, 기근은 드물었다.[29] 헤드마르켄과 오스트폴 같은 특정 비옥한 지역을 제외하면, 작물은 귀리, 호밀, 보리와 같은 강한 곡물로 제한되었고, 가축은 , 염소, , 돼지, 그리고 일부 가금류에 한정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사냥으로 식량을 보충하기도 했다. 노르웨이 중부와 노르웨이 북부 지역에서는 사미족순록 유목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해안 전역에서 청어, 대구, 넙치 등 냉수 어종을 잡는 어업은 농업의 중요한 보조 수단이었으며, 북부와 베스틀란데트의 많은 지역에서는 주요 생계 수단이었다. 어업은 보통 작은 농장에서의 작물 재배와 가축 사육으로 보완되었다. 18세기에 감자가 도입되면서 노르웨이인들에게 상당한 안도감을 주었으며, 주요 식량이 되었다.

노르웨이의 경제적 조건은 봉건제가 발달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으나, 몇몇 왕들은 충성스러운 신하들에게 토지를 주어 기사로 삼기도 했다. 자작농은 노르웨이 농업의 기본 단위였으며 현재도 그러하지만, 19세기 초에는 경작 가능한 토지가 부족해지는 문제에 직면했다. 많은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며 빈곤을 겪었고, 이는 북미로의 이민을 촉진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노르웨이는 아일랜드 다음으로 인구 대비 이민으로 가장 많은 사람을 잃은 국가가 되었다.

노르웨이는 산이 많은 지형이지만 저지대에서는 낙농 등을 하고 있다. 사진은 노르란주의 플락스타.


현대 노르웨이 농업은 국토가 고위도에 위치하고 스칸디나비아 산맥이 국토를 가로지르는 지리적 제약으로 인해 곡물 및 채소 생산보다는 낙농이 주를 이룬다. 2007년 농업 생산량 기준으로 낙농 생산량이 약 160만 톤으로 가장 많았고, 그 뒤를 보리(약 48.5만 톤), (약 40.1만 톤), 귀리(약 33만 톤)가 이었다.[94] 밀과 같은 곡물 생산은 주로 노르웨이 남동부에 집중되어 있으며, 북부 지역에서는 원주민인 사미인순록 방목을 계속하고 있다. 농림수산업 종사자 수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감소하는 추세지만, 활용되는 농지 면적은 1990년대부터 2007년까지 약 8000km2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93]

국가 전체의 농약 사용에 대한 정보는 노르웨이 통계청에서 확인할 수 있다.[136][40] 식품 공급망 전반에서 항생제 내성 위험은 낮은 수준으로 평가된다. 특히 소, 우유/유제품, 생선, 해산물, 식수, 돼지고기는 위험도가 무시할 만한 수준으로 간주된다. 다만 살아있는 돼지나 가금류, 그리고 가금류 고기와의 접촉은 일부 위험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41]

5. 1. 2. 임업

산악 지형과 아한대 기후로 인해 국내에는 침엽수림(타이가)이 널리 분포하여 임업이 활발하다.

5. 1. 3. 수산업

양식장의 예. Norwegian Sea Farming Center


노르웨이 해안은 멕시코 만류의 연장인 노르웨이 해류가 흘러 고위도임에도 항구가 얼지 않으며(부동항), 피오르가 천연 어항을 형성한다. 또한 북해노르웨이해에는 대서양 연어, 대구, 청어, 넙치 등 어패류가 풍부한 좋은 어장이 있어 수산업이 활발하다.[95] 수산업은 예로부터 노르웨이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왔다. 산업 혁명 이전에는 농업의 중요한 보조 수단이었으며, 특히 북부와 서부의 많은 지역에서는 주요 생계 수단이었다.[29][53] 13세기에는 소금에 절인 청어와 말린 생선을 잉글랜드 등에 수출했으며,[49] 이후 한자동맹의 상권에도 편입되어 말린 대구와 소금에 절인 청어의 공급지 역할을 했다.[53]

19세기 산업 혁명 시기에는 개량된 어망과 증기선 도입으로 어획량이 늘었으며, 말린 대구는 지중해와 남미로, 통조림으로 가공된 청어는 미국, 영국, 독일에 수출되었다.[63] 스벤 포인(Svend Foyn)이 포경포를 개발하여 포경의 근대화가 이루어지기도 했다.[64]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어민들은 1919년 설립된 노르웨이 국립 어업 은행의 융자를 받았고, 1926년에는 노르웨이 어업 조합을 결성하여 수산물 판매 규제, 생산 억제, 가격 인상 등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79]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50년대에는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수산업에서도 기계화에 따른 합리화가 진행되었다.[87]

오늘날 노르웨이는 특히 연어 양식에 주력하고 있으며, 이는 고용 창출에도 기여하고 있다. 2007년 기준 총 어획고는 252.8만ton이며,[95] 이 중 212.8만ton를 해외로 수출한다. 주요 수출 대상국은 러시아, 덴마크, 프랑스, 영국, 일본 순이다.[96][97]

노르웨이는 오랜 포경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19세기 스벤 포인이 개발한 노르웨이식 포경 기술은 메이지 시대 일본에도 전해졌다. 노르웨이는 상업 포경을 둘러싸고 비포경 국가들과 대립하고 있으며, 국제 포경 위원회(IWC)의 상업 포경 모라토리엄(전면 중지) 채택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1993년에는 상업 포경을 공식적으로 재개하여 독자적인 어획 쿼터를 설정하고 포경을 계속하고 있다. 2007년에는 597마리의 고래를 포획했다.[98]

5. 2. 2차 산업

노르웨이의 2차 산업은 국내총생산(GDP)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며, 특히 석유 및 천연가스 관련 산업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2005년 기준 GDP에서 2차 산업의 구성비는 39.1%였으며, 이 중 석유 관련 산업이 23.0%를 차지했다.[45] 2009년 기준 노동 인구 구성비에서는 2차 산업이 20.1%를 차지했다.[92]

콩스베르그, 뢰로스, 뢰켄 등 일부 지역의 광업을 제외하면, 노르웨이의 본격적인 산업화는 19세기 중반 섬유 공장이 건설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기업가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은행이 설립되면서 대규모 산업 기업 형성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 시기 산업 발전은 농업 부문에서 이탈한 인구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했으며, 산업 임금이 농업 임금을 넘어서면서 농촌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는 장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노동 계급이라는 새로운 사회 계층이 형성되었다.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 혁명은 노르웨이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1846년 영국이 곡물법을 폐지하자, 노르웨이는 영국에 수산물과 목재를 수출하고 해운업을 발전시키며 대영 제국 경제권에 편입되었다. 영국 자본이 유입되어 섬유 공장 기계화가 이루어졌고, 전동 톱 도입으로 목재 생산량이 증가했으며, 개량된 어망과 증기선 도입으로 수산업 어획량도 늘어났다.[63] 스벤 포인이 개발한 포경포는 포경 산업의 근대화를 이끌었다.[64] 1854년에는 첫 철도가 개통되었고, 1855년에는 전신이 도입되는 등 사회 기반 시설도 확충되었다.[65]

1905년 스웨덴으로부터 독립한 전후 시기, 노르웨이는 제2차 산업 혁명의 흐름 속에서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했다. 특히 풍부한 수자원을 활용한 수력 발전이 핵심 동력이 되어, 이를 기반으로 한 화학 공업(예: 1905년 노르스크 하이드로 창업[70][71]) 등이 발달했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 수력 발전소 건설 등에 외국 자본 유입이 늘어나자(1914년 화학 및 광공업의 80% 이상 외국 자본 소유[71]), 천연자원에 대한 통제권 확보를 위해 1909년부터 일련의 konsesjonslovene|콘세션법no을 제정하여 자원 개발에 대한 국가 통제를 강화했다.[72][71][73]

제1차 세계 대전 중 노르웨이는 중립을 표방했지만, 영국 의존도가 높아 독일 U보트의 공격으로 상선 피해를 입었다.[74][75] 전후에는 인플레이션과 불황을 겪었으며[76],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실업률이 급증하고 은행 도산이 이어졌다.[80] 1935년 집권한 요한 니고르스볼 노동당 정권은 재정 확장 정책과 함께 고용 보호법, 사회 복지 제도를 도입하여 경제 회복과 복지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81] 제2차 세계 대전나치 독일의 점령으로 경제적 타격을 입었으나, 마셜 플랜의 도움으로 전후 빠르게 경제를 복구했다.[84][85]

1960년대 말 북해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89] 노르웨이 2차 산업 구조는 석유 및 천연가스 중심으로 크게 재편되었다. 특히 1970년대 오일 쇼크 이후 유가 급등은 북해 유전 개발을 가속화했다. 석유 수출은 경제 성장에 크게 기여했지만, 높은 임금 수준 등으로 인해 다른 제조업 부문의 국제 경쟁력이 약화되는 이른바 '네덜란드 병' 현상도 나타났다.[90] 이에 노르웨이 정부는 노르웨이 정부연기금 운용 등을 통해 석유 수입 의존도를 낮추고 경제 구조를 다변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1970년대 이후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비(非)석유 부문 민간 산업 육성을 위해, 최근 정부는 국제 경쟁력을 갖춘 새로운 "본토" 산업 육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2006년에는 9개의 "전문 센터"를 지정하는 등 중소기업 및 첨단 산업 성장을 지원하고 있다.[135]

5. 2. 1. 식품 가공

2005년 GDP에서 제2차 산업의 구성비는 39.1%였지만, 석유 관련 산업이 23.0%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그 외에는 수산업을 기반으로 한 식품 가공, 금속, 화학 등이 주를 이룬다.[45]

로포텐 제도에서 현재도 이루어지고 있는 건어물 생산


수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예로부터 소금에 절인 청어와 말린 대구를 수출해왔다. 산업 혁명 이후에는 어류를 통조림으로 가공하여 해외에 수출하고 있다.

5. 2. 2. 금속

노르웨이는 풍부한 수력 발전소(에너지 절 참조)를 바탕으로 대량의 전력을 확보할 수 있어, 이를 활용한 알루미늄 생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환경 덕분에 노르웨이는 세계 7위의 알루미늄 생산국으로 자리매김했다.[99] 대표적인 알루미늄 생산 기업으로는 노르스크 하이드로(Norsk Hydro)가 있다.

5. 2. 3. 조선업

전통적으로 수산업이 발달하고 해운업 강국이었던 노르웨이는 조선업 역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일본대한민국의 조선업이 크게 성장하고, 2000년대 들어서는 중화인민공화국까지 부상하면서 세계 조선 시장에서 노르웨이의 입지는 점차 줄어들었다.[100] 이에 노르웨이 조선업은 북해 유전 등 해상 유전 개발에 필요한 시추 리그나 석유 플랫폼과 같은 특수 선박 건조에 집중하며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101]

5. 2. 4. 석유 및 천연가스



노르웨이 경제에서 석유 및 천연가스 산업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2005년 기준 국내총생산(GDP)의 약 23.0%를 차지했으며[45], 2009년 기준 취업자 구성비는 약 0.8%로 낮지만[47]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산업이다. 노르웨이는 세계 9위의 석유 수출국이자[102] 세계 3위의 천연가스 수출국이다[103]. 국내 전력 수요는 대부분 수력 발전으로 충당하기 때문에 생산된 석유 및 천연가스의 약 90%는 해외로 수출된다.

1960년대 네덜란드 흐로닝언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북해 유전 개발이 시작되었다. 1963년 5월, 노르웨이는 북해 자국 해역의 천연자원에 대한 주권을 선언했다. 탐사는 1966년 7월 19일 오션 트래블러호가 첫 시추를 시작하며 본격화되었다.[30] 1967년 스타방에르 서쪽 약 190km 지점의 우치라 하이 측면에서 발더 유전이 처음 발견되었으나[31], 초기 탐사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정적인 발견은 1969년 8월 21일 오션 바이킹호가 석유를 발견하면서 이루어졌고[30], 같은 해 말에는 북해에 대규모 석유 및 가스 매장량이 존재함이 명확해졌다. 첫 번째 주요 유전은 에코피스크 유전으로, 1980년에는 하루 427,442 배럴의 원유를 생산했다. 이후 대규모 천연 가스 매장량도 속속 발견되었다. 특히 1969년 필립스 페트롤리엄사의 오션 바이킹호가 에코피스크 유전 시추에 성공한 것은 북해 유전 시대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89] 1968년부터는 천연가스 개발도 시작되었다[104].

1970년대에 들어 오일 쇼크로 인한 유가 급등은 해상 석유 시추의 경제성을 확보해주었고, 이는 노르웨이의 북해 유전 개발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104]. 노르웨이 정부는 유럽 연합 가입 국민투표 부결을 배경으로, 올라 스캬크 브레크가 이끄는 노르웨이 산업부 주도 하에 신속하게 국가 에너지 정책을 수립했다. 노르웨이는 OPEC에 가입하지 않고 독자적인 에너지 가격 정책을 유지하며, 석유 수입은 "통화 선물"이라는 개념 아래 노르웨이 국부 펀드를 통해 신중하게 관리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정부는 1972년 국영 석유 회사인 스타토일(현 에퀴노르)을 설립하고[105], 노르스크 하이드로, 신설된 사가 페트롤리움 등과 함께 시추 및 생산 권한을 부여하며 국가 주도의 개발을 추진했다. 같은 해, 석유성 산하에 석유감독국을 설치하여 유전 개발 및 파이프라인 투자를 국가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104]. 석유 수출에는 표준 법인세 24%와 특별 석유세 54%를 합쳐 총 78%의 높은 한계 세율이 부과된다.[32]

북해 유전 개발은 혹독한 해상 환경으로 인해 많은 기술적 어려움을 동반했지만, 노르웨이 기업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기술 역량 강화에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특히 쇠퇴하던 조선 산업 기반의 여러 엔지니어링 및 건설 회사들이 이 분야로 전환하며 스타방에르오슬로 서부 교외 지역에 기술 역량 센터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스타방에르는 해상 시추 산업의 중요한 육상 기지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현재 북해 지역의 석유 생산량은 정점을 지났지만, 노르웨이 해와 바렌츠 해 등 더 넓은 노르웨이 해역에서 스노비트 유전을 포함한 새로운 유전 및 가스전이 지속적으로 발견되고 개발되고 있다.

석유 및 가스 산업은 노르웨이 경제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유전 직접 소유, 에퀴노르 주식 배당금, 라이선스 수수료, 세금 등을 통해 국가 복지 시스템의 중요한 재원을 마련하고 있다. 정부 수입과 부가가치 측면에서 노르웨이 최대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석유 자원의 탐사, 개발, 추출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익이 사회 전체의 공공 가치 창출로 이어지도록 과세, 라이선스, 국가 직접 소유를 혼합한 '국가 직접 금융 이익(SDFI)' 시스템이 1985년에 도입되었다. SDFI는 다수의 석유 및 가스전, 파이프라인, 육상 시설에 대한 국가 소유 지분과 에퀴노르 주식의 67%를 포함한다. 석유 산업에서 발생하는 정부 수입은 노르웨이 정부 연금 기금 글로벌로 이전되며, 정부는 이 기금의 원금이 아닌 운용 수익만을 공공 지출에 사용할 수 있도록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36]

노르웨이 정부는 천연자원과 전략 산업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석유 부문(에퀴노르), 수력 발전(Statkraft), 알루미늄 생산(노르스크 히드로), 최대 은행(DNB), 통신사(텔레노르) 등 핵심 산업 분야에서 상당한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정부는 오슬로 증권 거래소 상장 기업 총 가치의 약 35%를 통제하며, 상위 7개 상장 기업 중 5개가 부분적으로 국영 기업이다.[33] 비상장 기업(주로 직접적인 석유 라이선스 소유)까지 포함하면 국가의 소유 비중은 훨씬 더 높아진다. 국영 기업은 비농업 부문 고용의 9.6%를 차지하며, 소수 지분 국영 기업까지 포함하면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인 약 13%에 달한다.[34] 이러한 국영 기업들은 고도로 자유화된 시장 경제 체제 내에서 시장 지향적으로 운영된다.[35] 높은 수준의 국영 소유는 천연자원 활용에 대한 국가 통제 확보라는 목표 아래 추진되었으며, 이는 공공 인프라 제공과 함께 20세기 이전부터 시작되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자산 인수를 통해 산업 및 상업 기업으로 확장되었고, 1972년 스타토일 설립으로 정점에 달했다.[35]

안정적인 석유 수입은 노르웨이가 사회 복지 제도를 크게 확장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지만, 동시에 높은 임금과 생활 수준으로 인해 다른 산업 분야의 국제 경쟁력이 약화되는 부작용도 낳았다.[90]

5. 2. 5. 에너지



노르웨이의 에너지 산업은 수력 발전석유, 천연 가스를 중심으로 발달했다. 20세기 초, 스칸디나비아 산맥의 풍부한 수자원을 활용한 수력 발전소 건설이 시작되었다. 특히 사업가 샘 아이데와 과학자 크리스티안 빌케란은 공기 중 질소를 이용한 질소 고정 방식으로 화학 비료를 생산하기 위해 대규모 전력이 필요했고, 이에 텔레마르크주의 폭포를 이용해 수력 발전소를 건설하며 1905년 노르스크 하이드로를 창업했다.[70][71] 이를 계기로 노르웨이 곳곳에 수력 발전소와 공장이 들어서며 중화학 공업화가 진행되었고, 전력 소비량도 급증했다.[71] 그러나 수력 발전소 건설에 막대한 외국 자본이 유입되면서 천연 자원에 대한 통제권 상실 우려가 커졌고, 이에 노르웨이 정부는 1909년부터 일련의 konsesjonslovene|콘세션법no을 제정하여 천연 자원 개발에 정부 허가를 받도록 하고, 외국 기업의 삼림 구매를 제한하는 등 자원 주권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다.[72][71][73]

1963년 5월, 노르웨이는 북해의 자국 수역 내 천연 자원에 대한 주권을 선언했다. 1966년부터 탐사가 시작되었고[30], 초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으나 1969년 유전 탐사선 오션 바이킹(Ocean Viking)이 대규모 유전인 에코피스크 유전을 발견하면서[30] 북해 유전 시대가 열렸다. 1970년대 오일 쇼크로 유가가 급등하자 해상 유전 개발의 경제성이 확보되었고, 노르웨이 정부는 석유 및 천연가스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노르웨이는 OPEC에 가입하지 않고 독자적인 에너지 정책을 추진했다. 석유 수입은 국부 펀드를 통해 신중하게 관리되었으며, 에너지 가격은 국제 시장 가격에 연동시켰다. 1972년에는 국영 석유 회사인 스타토일(현 에퀴노르)을 설립하고, 노르스크 하이드로, 사가 페트롤리움 등과 함께 개발을 주도했다. 석유 수출에는 표준 법인세 24%와 특별 석유세 54%를 합쳐 총 78%의 높은 한계 세율을 부과하여 국고 수입을 확보했다.[32]

북해 유전 개발은 혹독한 환경으로 인해 많은 기술적 어려움이 따랐지만, 노르웨이 기업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기술 역량을 꾸준히 축적했다. 특히 쇠퇴하던 조선 산업 기반의 여러 엔지니어링 및 건설 회사들이 석유 산업으로 전환하며 스타방에르오슬로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관련 산업 클러스터를 형성했다. 스타방에르는 해상 시추 산업의 주요 육상 기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현재 북해 유전은 생산 정점을 지났다는 평가를 받지만, 노르웨이 해와 바렌츠 해 등 새로운 해역에서 스노비트(Snøhvit)를 포함한 신규 유전 및 가스전이 지속적으로 발견되고 개발되고 있다. 노르웨이는 여전히 세계 9위의 석유 수출국[102] 및 세계 3위의 천연가스 수출국[103]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생산된 석유와 천연가스의 약 90%는 해외로 수출되는데, 이는 국내 전력 수요의 대부분을 풍부한 수력 발전으로 충당하기 때문이다.

노르웨이는 국토를 가로지르는 스칸디나비아 산맥과 겨울철 많은 강설량, 낮은 인구 밀도 등 수력 발전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2007년 기준으로 노르웨이에는 총 719개의 발전소가 있으며, 이 중 675개가 수력 발전소이고, 그 외에 지열 발전소 28기, 풍력 발전소 16기가 운영 중이다.[106]

한편, 기후 변화는 노르웨이 에너지 부문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강수량 패턴의 변화는 수력 발전량 변동을 야기할 수 있으며, 기온 상승은 에너지 수요 변화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또한 풍력 발전과 같은 다른 재생 에너지원의 잠재력에도 변화가 있을 수 있다.

5. 3. 3차 산업

2022년 기준으로 노르웨이에 등록된 회사가 가장 많은 분야는 서비스업으로 총 296,849개였으며, 금융, 보험부동산 분야가 합쳐서 118,411개로 그 뒤를 이었다.[38]

5. 3. 1. 금융업

오슬로 증권 거래소


2022년 기준으로 노르웨이에는 금융, 보험 및 부동산 분야에 총 118,411개의 회사가 등록되어 있었다.[38] 이는 서비스업(296,849개) 다음으로 많은 수치이다.

노르웨이의 금융업은 혼합 경제 체제 하에서 국가가 관리하고 있다. 국내 최대 금융 기관인 DNB의 주식 34%는 노르웨이 재무부가 보유하고 있다.[107] 다른 주요 금융 기관으로는 스토라브란트(Storebrand)가 있다.

증권업 분야에서는 오슬로 증권 거래소가 1881년에 주식 및 채권 매매를 시작하며 증권 거래의 역사를 열었다.[108] 오슬로 증권 거래소에는 노르웨이 기업이 주로 상장되어 있으며, 해외의 석유 및 해운 관련 기업들도 다수 상장되어 있다. 오슬로 증권 거래소의 유동성이 높은 상위 25개 기업으로 구성된 OBX 지수는 석유 관련 종목이 절반 가량을 차지하며, 시가 총액 기준으로는 그 비중이 더욱 높다.

5. 3. 2. 교통 및 운송

노르웨이는 일본 등에서 사용하는 협궤인 1067mm 궤간의 발상지이다. 이는 노르웨이 기술자 카를 아브라함 필이 처음 도입한 것으로, 당시 먼저 철도가 부설되었던 스웨덴표준궤(1435mm)와의 직접 연결을 고려하지 않은 구간(도중에 배로 환적해야 했던 지역)에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기술 발달로 노선들이 연결되면서 환적에 드는 비용 문제가 커졌고, 이에 따라 현재 노르웨이의 철도는 모두 1435mm 표준궤로 통일되었다. 1067mm 협궤 노선은 더 이상 운영되지 않는다.[109]

5. 3. 3. 관광업

기후 변화는 노르웨이의 관광 산업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겨울철 스키 리조트는 강설량 감소와 스키 시즌 단축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반면, 따뜻해진 날씨는 여름철 관광객 유치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기후 변화는 노르웨이의 대표적인 자연 경관인 피오르나 산악 지형 자체를 변화시켜 관광 자원으로서의 매력을 감소시킬 위험도 안고 있다.

5. 3. 4. 공공 부문

노르웨이 경제에서 공공 부문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2005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에서 공공 부문(공무, 국방, 교육, 의료 서비스 포함)이 차지하는 비중은 15.3%이며, 전체 취업자의 35.1%인 약 88만 1천 명이 공공 부문에서 일하고 있다.[45][4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역대 노르웨이 정부는 복지 국가 건설에 힘써왔다. 1946년 아동 수당 지급을 시작으로[86], 질병 및 장애 수당, 최소 보장 연금, 대폭 지원되거나 무료인 보편적 의료, 실업 보험 등 시민을 위한 공공 혜택을 꾸준히 확대해왔다. 공공 정책은 여전히 이러한 혜택 제공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유지되고 있으나, 혜택을 더욱 공정하고 필요에 기반하여 제공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가 증가하고 있다.

과거 사회주의적 관점과 비사회주의적 관점 사이의 공공 소유에 대한 이념적 격차는 시간이 지나면서 줄어들었다. 노르웨이 정부는 민간 자본 시장에 접근해야 하는 기업에 대한 소유 지분을 줄이려는 경향을 보이며, 자본 형성을 통제하거나 제한하기보다는 정부가 기업가 정신을 촉진하는 데 점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윤 동기에 대한 일부 부정적인 인식이 여전히 존재하며, 노르웨이 기업들은 특히 노동 관계와 관련하여 과도하게 규제되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공공 부문의 재원은 주로 세금을 통해 마련된다. 노르웨이 조세 제도의 주요 목적은 공공 지출을 위한 수입을 확보하는 것이지만, 소득 재분배, 알코올담배 소비 감소, 특정 행동에 대한 억제와 같은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으로도 간주된다. 조세 제도와 관련하여 주로 논의되는 세 가지 요소는 다음과 같다.

  • 누진세: 한때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누진세 제도 중 하나였으나, 소득에 대한 최고 한계세율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감소했다. 또한, 신고된 순자산에 대해서도 세금이 부과되는데, 이는 저축을 저해한다는 비판이 있다.
  • 부가가치세: 정부 수입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현재 표준 세율은 25%이며, 음식 및 음료는 15%, 영화관 티켓 및 대중교통은 8%의 세율이 적용된다.
  • 특별 할증료 및 세금: 정부는 자동차, 알코올, 담배 및 다양한 종류의 혜택과 관련된 특정 구매에 대해 여러 세금을 부과한다.


스발바르 제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스발바르 조약에 따라 세금 감면 혜택을 받는다.

6. 재정 및 사회 복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노르웨이 노동당은 에이나르 게르하르센 총리를 중심으로 사회 민주주의 개혁을 추진했다. 이 개혁은 소득 분배의 평등 증진, 빈곤 퇴치, 그리고 모든 국민에게 연금, 의료, 장애 수당과 같은 사회 서비스를 보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또한 공공 부문의 역할을 강화하여 더 많은 자본을 공공의 관리 아래 두려고 했다.

이러한 정책 기조 하에 노르웨이는 매우 높은 수준의 누진적인 소득세부가가치세를 도입했으며, 자동차, 담배, 술, 화장품 등 특정 소비재에 대해서는 특별 할증세와 세금을 부과했다. 이로 인해 노르웨이는 세계적으로 세금 부담이 높은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높은 세금은 광범위한 사회 복지 시스템을 유지하는 재원으로 활용되었다. 전후부터 1960년대까지 순조로운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노르웨이 정부는 복지 국가 건설에 힘썼다. 1946년 아동 수당 지급이 시작되었고, 1950년대에는 건강 보험이 의무화되었으며, 1964년에는 사회 복지법이 발효되었다.[86]

1969년 북해 유전의 발견과 1970년대 석유 파동으로 인한 유가 급등은 노르웨이 경제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석유 및 천연가스 수출을 통해 막대한 수입을 얻게 되면서 노르웨이는 경상수지 흑자국이 되었고, 안정적인 재정을 바탕으로 사회 복지 시스템을 더욱 확장할 수 있었다. 이는 당시 다른 북유럽 국가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석유 수입에 의존한 경제 성장으로 인해 임금과 물가가 상승하면서 제조업 등 다른 산업의 국제 경쟁력이 약화되는 문제도 발생했다.[90]

1970년대 이후 노르웨이 경제 및 사회 정책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문제들이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 '''생활비''': 노르웨이는 세계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국가 중 하나이다. 과거에는 운송 비용과 무역 장벽이 주요 원인이었으나, 최근에는 높은 인건비, 세금 등 국내 정책 요인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 '''"본토" 산업(석유 외 산업)의 경쟁력''': 높은 인건비와 기타 구조적 요인으로 인해 석유 자원 고갈 이후에도 현재의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있다. 특정 산업을 보호하는 정책에서 벗어나 경쟁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정보 기술에 대한 관심과 함께, 고도로 전문화된 기술 솔루션을 개발하고 마케팅하는 중소기업들이 설립되고 있다.
  • '''공공 부문의 역할''': 과거 사회주의적 관점과 비사회주의적 관점 간의 이념적 대립은 완화되었으나, 공공 부문의 역할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정부는 점차 기업에 대한 직접적인 소유를 줄이고 기업가 정신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노동 관계 등에서 여전히 규제가 많다는 지적도 있다. 이윤 동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일부 남아있다.
  • '''복지 국가의 미래''': 질병 및 장애 수당, 최소 보장 연금, 보편적 의료, 실업 보험 등 광범위한 공공 혜택을 제공하는 복지 국가 모델은 여전히 지지받고 있으나, 재정적 지속 가능성과 혜택의 공정성 및 필요 기반 배분에 대한 논쟁이 증가하고 있다.
  • '''도시화 및 지역 정책''': 과거 자급자족 중심의 농업 정책에서 벗어나, 농촌 지역의 인구를 유지하고 지속 가능한 경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지역 균형 발전 정책(distriktspolitikkno)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이는 농촌 인구의 도시 유출과 지역 불균형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다.[88]
  • '''과세''': 노르웨이 조세 제도는 공공 지출 재원 마련 외에도 소득 재분배, 특정 소비(술, 담배 등) 억제 등 사회적 목표 달성의 수단으로 활용된다. 주요 논쟁점으로는 높은 누진세율(과거보다 완화되었으나 여전히 높은 수준), 재산세의 저축 억제 효과, 높은 부가가치세율(표준 25%, 식음료 15%, 영화 티켓 및 대중교통 8%), 자동차, 알코올, 담배 등 다양한 품목에 부과되는 특별 할증료 및 세금 등이 있다. 스발바르 제도 거주자는 스발바르 조약에 따라 세금 감면 혜택을 받는다.
  • '''환경 문제''': 몽스타드 정유 공장 건설, 알타 지역의 수력 발전소 건설 등 개발 사업과 관련된 환경 문제가 주요 정치적 쟁점이 되기도 했다.

6. 1. 중앙 정부

노르웨이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주 코뮌, 주의 하위 행정 구역인 코뮌)는 주요 기능을 분담하고 있다.

  • 중앙 정부: 고등 교육, 국민 보험 제도, , 사법·경찰, 외교, 실업자 대책, 고도 의료, 환경 보호 등을 담당한다. 출장 기관으로 주에 주 장관 사무소를 설치하여 주 코뮌을 감독한다.
  • 주 코뮌: 고등학교, 국민 고등학교, 아동 복지 시설 운영, 항만·공항 정비, 대중 교통, 주립 도서관 운영 등을 맡으며, 코뮌과 중앙 정부 간의 조정 기능을 수행한다.
  • 코뮌: 기초 학교(초등학교, 중학교에 해당), 보육, 보건 서비스(초기 의료 포함), 복지 서비스, 상하수도, 교회·묘지 유지 관리 등을 담당한다.[112]


기능 분담을 바탕으로 중앙 정부의 세입·세출 구조를 살펴보면, 2009년 기준 중앙 정부의 세입은 약 1.1352조노르웨이 크로네, 세출은 약 8790억노르웨이 크로네로 상당한 재정 흑자를 기록했다. 주요 세입원은 소득세재산세 등, 소비세, 사회 보험료, 재산으로부터의 소득(이자, 배당, 국유 기업으로부터의 출자금 회수 등)이다. 주요 세출 항목은 공무원 급여, 사회 보장, 경상 이전(지방 정부로의 이전)이다.[113]

세출을 기능별로 보면, 사회 보장(사회적 보호, 건강)에 대한 지출이 약 5014억노르웨이 크로네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특히, 질병 보험(sickness and disability)과 노령 연금(old age)이 각각 전체 세출의 14.7%를 차지하여 높은 비중을 보인다.[114]

중앙 정부의 세입·세출 구조(2009년)[113]
세입세출
항목금액
(100만 NOK)
구성비
(%)
항목금액
(100만 NOK)
구성비
(%)
소득세, 자산세 등4617.51억노르웨이 크로네34.7공무원 급여1418.37억노르웨이 크로네12.5
소비세2852.78억노르웨이 크로네21.4재화·서비스 사용948.95억노르웨이 크로네8.4
자본세24.31억노르웨이 크로네0.2고정 자본의 구입230.64억노르웨이 크로네2.0
사회 보험2345.94억노르웨이 크로네17.5사회 보장(현물)364.06억노르웨이 크로네3.2
재산 소득2748.15억노르웨이 크로네20.6이자 지불234.85억노르웨이 크로네2.1
행정 서비스625.37억노르웨이 크로네4.7사회 보장(현금)3169.19억노르웨이 크로네27.9
이전 수지101.15억노르웨이 크로네0.8보조금396.48억노르웨이 크로네3.5
rowspan="4" colspan="3"|경상 이전1835.14억노르웨이 크로네16.2
자본 이전23.21억노르웨이 크로네0.2
비금융 자산의 순 구입169.06억노르웨이 크로네1.5
순 대출2731.54억노르웨이 크로네24.1
합계13315.21억노르웨이 크로네100.0합계13315.21억노르웨이 크로네100.0



중앙 정부의 기능별 세출 항목(2009년)[114]
항목금액
(100만 NOK)
구성비
(%)
일반 공공 서비스1664.41억노르웨이 크로네18.9
국방411.83억노르웨이 크로네4.7
사법·경찰·소방208.24억노르웨이 크로네2.4
경제 관련844.53억노르웨이 크로네9.6
환경 보호22.84억노르웨이 크로네0.3
주택 및 지역 편의 시설13.22억노르웨이 크로네0.2
건강1338.46억노르웨이 크로네15.2
레크리에이션, 문화, 종교70.35억노르웨이 크로네1.4
교육482.32억노르웨이 크로네5.5
사회적 보호3675.83억노르웨이 크로네41.8
합계[115]8789.96억노르웨이 크로네100.0


6. 2. 지방 정부

(100만 NOK)구성비
(%)항목금액
(100만 NOK)구성비
(%)소득세, 자산세 등132,51237.0공무원 급여185,46751.8소비세8,5382.4재화·서비스 사용67,11218.7재산 소득11,8033.3고정 자본의 구입25,1377.0행정 서비스 수수료41,43117.5사회 보장 (현물)18,9045.3이전 수입140,52339.2이자 지급10,5072.9순차입23,7366.5사회 보장 (현금)9,5852.7rowspan="4" colspan="3" |보조금11,0943.1경상 이전11,9533.3자본 이전7210.2비금융 자산의 순구입17,7034.9합계358,183100.0합계358,183100.0



지방 정부의 기능별 세출 항목 합계 (2009년)
항목금액
(100만 NOK)
구성비
(%)
일반 공공 서비스37,86310.6
경제 관련24,1336.7
환경 보호13,0743.7
주택 및 지역 편의 시설15,2544.3
보건49,50913.8
레크리에이션, 문화, 종교21,5766.0
교육95,92026.8
사회적 보호 (사회 보장)97,19027.1
합계358,183100.0


7. 금융 제도

노르웨이 중앙은행(노르게스 방크)은 노르웨이의 중앙은행으로서 물가 안정을 유지하고 화폐를 발행하는 발권 은행의 역할을 수행한다. 노르웨이는 유럽 연합(EU)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체 통화인 노르웨이 크로네를 발행하여 사용하고 있다.

노르웨이 중앙은행은 이러한 기본적인 역할 외에도, 석유 수출로 얻은 수입을 미래 세대에게 분배하기 위해 설립된 국부 펀드인 노르웨이 정부 연금 기금을 운용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다.

8. 무역



1972년 9월, 노르웨이 스토르팅은 노르웨이가 당시 유럽 경제 공동체(EEC)에 가입할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으나, 근소한 차이로 부결되었다. 이후 노르웨이 정부는 유럽 연합(EU)과의 무역 협정을 통해 노르웨이 기업들이 유럽 시장에 접근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노르웨이는 이 협정을 지속적으로 개선하여 유럽 자유 무역 연합(EFTA)과 유럽 경제 지역(EEA)에 가입했다.

노르웨이의 무역 정책은 오랫동안 EU와의 산업 및 무역 정책 조화를 목표로 해왔지만, 1994년에 실시된 EU 가입 관련 국민투표 역시 1972년과 마찬가지로 부결되었다. 이로써 노르웨이는 아이슬란드와 함께 EU 회원국이 아닌 단 두 개의 북유럽 국가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EU 가입을 둘러싼 노르웨이 내부의 논쟁은 경제적 문제보다는 정치적 쟁점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 과정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방식으로 노르웨이 경제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노르웨이는 양식 어업 제품, 농산물, 배출 기준 등 다양한 특정 문제에 대해 EU와 지속적으로 합의점을 찾아왔으며, 이는 실제 EU 회원국들이 추구하는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따라서 언젠가 EU 회원 가입 문제가 다시 국민투표에 부쳐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2009년 기준으로 노르웨이의 무역 및 서비스 수지는 수출 약 1.055조노르웨이 크로네, 수입 약 6578억노르웨이 크로네으로 약 3477억노르웨이 크로네의 흑자를 기록했다. 상품 무역만 보더라도 수출 약 7553억노르웨이 크로네, 수입 약 4365억노르웨이 크로네으로 상당한 흑자를 나타냈다. 이러한 흑자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유가 급등에 따른 원유 및 천연가스 수출 증가이다. 2000년대 들어 원유 및 천연가스 수출액은 2002년 약 2739억노르웨이 크로네로 최저치를 기록했지만, 이는 이미 1990년대 최고치였던 1997년의 약 1741억노르웨이 크로네를 넘어서는 수준이었다.[119]

북해 유전 개발 이후 석유 및 천연가스는 노르웨이 경제의 핵심 동력이 되었으며, 1989년부터 노르웨이는 지속적으로 무역·서비스 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구분주요 품목
주요 수출품석유, 천연가스, 기계, 금속(공업 원료), 식료품 등
주요 수입품기계, 화학 제품, 금속(공업 원료), 식료품, 섬유 등



노르웨이 경제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약한 농업 부문과 풍부한 수산 자원을 보유한 어업 부문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유럽 공동체(EC) 또는 유럽 연합(EU) 가입 시 농업 부문이 경쟁에 노출되어 타격을 입고, 어업 부문의 풍부한 수산 자원을 다른 회원국들에게 개방해야 할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결국 이러한 우려는 1972년 EC 가입 국민투표와 1994년 EU 가입 국민투표가 모두 부결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1994년 발효된 EEA 협정에서도 농업과 수산업 분야는 적용 예외 대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12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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