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미국 관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독일-미국 관계는 독일계 미국인의 이민, 특히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대규모 이민으로 시작되었다. 19세기 말 독일 통일 이후 양국은 경쟁과 갈등을 겪었지만, 20세기 초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거치며 관계가 악화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은 서독의 재건을 지원하며 동맹 관계를 맺었고, 냉전 시기에는 서독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21세기에는 테러와의 전쟁, 이라크 전쟁, 미국의 감시 프로그램, 나토 분담금 문제 등으로 갈등을 겪기도 했으나, 경제적으로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양국은 문화, 교육, 군사 분야에서도 교류를 지속하고 있으며, 2024년에는 미국이 독일에 탄도 미사일을 배치할 예정으로, 이는 새로운 군비 경쟁을 촉발할 수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독일-미국 관계 | |
---|---|
관계 개요 | |
국가 | 독일 미국 |
외교 공관 | 독일 대사관, 워싱턴 D.C. 미국 대사관, 베를린 |
대사 | 독일 대사: 안드레아스 미하엘리스 미국 대사 대리: 앨런 멜처 |
관련 문서 | 독일-미국 관계 |
일반 정보 | |
공식 명칭 | 독일-미국 관계 |
중요성 | 미국은 독일과의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음 |
경제 규모 | 세계 5대 경제 대국 |
관계 역사 | |
시작 | 초기 이민자들의 미국 정착 |
특징 | 2차 세계 대전 이후 긴밀한 협력 관계 구축 |
정치적 관계 | |
협력 분야 | NATO 안보 협력 국제 문제 공동 대응 |
주요 이슈 | 무역 및 경제 정책 이란 핵 합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입장 차이 |
경제적 관계 | |
교역 규모 | 상당한 규모의 양국 간 교역 |
투자 | 미국 기업의 독일 투자 활발 |
협력 분야 | 기술 개발 에너지 자동차 산업 |
문화적 관계 | |
교류 프로그램 | 학술 교류 학생 교환 |
문화적 영향 | 상호 문화 교류 및 영향 |
기타 | |
미국 국무부 | 미국-독일 관계 |
2. 독일계 미국인의 이민사
3백년 이상 동안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독일 출신이었다. 독일계 미국인은 미국 사회와 정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집단으로 자리 잡았다. 2000년 미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5명 중 1명 이상, 백인 미국인 4명 중 1명이 독일계 혈통이라고 밝혔다.[16] 이들은 특히 미국 중서부를 포함한 미국 북부 지역에 많이 분포하며, 텍사스를 제외한 미국 남부에서는 상대적으로 그 수가 적다.[16]
독일인의 미국 이민은 17세기 저먼타운 설립으로 시작되었으며, 18세기 중반과 특히 19세기에 대규모 이민 물결이 이어졌다. 이 시기 독일 이민자들은 주로 미국 중서부와 주요 도시에 정착하며 농업과 기술 분야 발전에 기여했다.[18] 실패한 1848년 독일 혁명 이후 망명한 48년 혁명가들은 미국의 정치, 특히 노예제 폐지 운동과 초기 공화당 형성에 기여했으며,[20] 독일계 이민자들은 노동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노동자의 권익 향상에 힘썼다.[21]
그러나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반독 감정이 확산되자, 많은 독일계 미국인들은 독일과의 문화적 유대를 끊고 미국 주류 문화에 빠르게 동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독일어 사용이 급격히 줄어들고 관련 단체들이 해산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22] 나치 시대에는 알버트 아인슈타인, 헨리 키신저와 같은 독일계 유대인 및 정치적 난민들이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으나, 당시 미국의 제한적인 이민 정책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입국에 어려움을 겪었다.[24]
오늘날 독일계 미국인은 미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민족 집단 중 하나이며,[25] 미국 사회 다방면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2. 1. 17세기~19세기: 초기 이민과 정착

3세기 이상 동안, 독일로부터의 이민은 모든 미국 이민자의 큰 비중을 차지했다. 2000년 미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모든 미국인의 20% 이상, 그리고 백인 미국인의 25%가 독일계 혈통이라고 밝혔다. 독일계 미국인은 미국 전체의 정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동화된 집단이다. 이들은 특히 미국 중서부를 포함한 미국 북부에서 가장 흔하게 스스로 밝힌 민족 집단이다. 미국 남부 대부분 지역에서는 텍사스를 제외하고 독일계 미국인이 상대적으로 덜 흔하다.[16]
독일 이민의 첫 기록은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현재 필라델피아의 일부인 저먼타운이 1683년에 설립되었다. 독일로부터의 이민은 1749년과 1754년 사이에 첫 번째 정점을 찍었으며, 이때 약 37,000명의 독일인이 북아메리카로 이주했다. 주요 정착지는 펜실베이니아였으며, 이곳의 독일계 주민들은 펜실베이니아 더치로 알려지게 되었다. 식민지 시대에는 뉴욕 북부 지역도 독일인들을 끌어들였다.
1840년부터 1914년까지 약 700만 명의 독일인이 미국으로 이민했다. 독일에서 토지를 매각한 농부들은 미국 중서부에서 더 큰 농장을 구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술자들은 볼티모어, 신시내티, 세인트루이스, 시카고, 디트로이트, 그리고 뉴욕 시에 정착했다. 텍사스에 형성된 독일인 공동체를 제외하고, 뉴잉글랜드나 남부로 이주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었다.[18] 1890년까지 클리블랜드, 밀워키, 호보켄, 신시내티와 같은 도시에서는 인구의 40% 이상이 독일계였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독일인은 미국에서 스스로 밝힌 가장 큰 민족 집단을 형성했으며, 강력한 독일어 사용 인구를 유지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영구적인 정착민이었으며, 독일로 돌아가거나 모국에 충성을 보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일부는 정치적 망명자였고, 다른 이들은 보편적 징병제를 피하기 위해 이주했다. 젊은 세대는 이중 언어를 구사했지만, 미국이 1917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할 때까지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다.[19]
실패로 끝난 1848년 독일 혁명은 정치적 망명자들의 이주를 촉발했다. 미국으로 건너온 이들은 48년 혁명가라고 불렸다.[20] 이들 중 다수는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새로운 공화당에 가입했으며, 칼 슈르츠와 같이 전국적으로 중요한 정치인도 배출했다. 19세기 말 독일인들은 노동 운동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노동 조합은 숙련된 장인들이 작업 조건을 통제하고 미국 사회에서 발언권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21]
2. 2. 19세기: 대규모 이민과 독일계 미국인 사회 형성
3세기 이상 동안 독일로부터의 이민은 모든 미국 이민자 중 큰 비중을 차지했다. 독일계 미국인은 미국 전체의 정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동화된 집단으로 성장했다. 특히 미국 중서부를 포함한 미국 북부에서 가장 흔하게 자가 보고된 민족 집단이며, 텍사스를 제외한 미국 남부 대부분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흔하다.[16] 2000년 미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모든 미국인의 20% 이상, 그리고 백인 미국인의 25%가 독일계라고 응답했다.1840년부터 1914년까지 약 700만 명의 독일인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독일에서 토지를 판 농부들은 중서부에서 더 넓은 농장을 구입했고, 기술자들은 볼티모어, 신시내티, 세인트루이스, 시카고, 디트로이트, 그리고 뉴욕 시에 정착했다. 텍사스에 형성된 정착촌을 제외하면, 뉴잉글랜드나 남부로 이주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18] 이민 과정은 순탄치 않았는데, 비좁은 배를 타고 독일에서 미국까지 평균 6개월이 걸렸으며, 이 기간 동안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특히 1848년 독일 혁명의 실패는 많은 독일인의 미국 이주를 가속화했다. 이때 미국으로 건너온 정치적 망명자들은 48년 혁명가(Forty-Eighters)라고 불렸다.[20] 이들 중 다수는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신생 공화당에 가입했으며, 칼 슈르츠와 같이 전국적으로 중요한 정치인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1848년 이후 약 6백만 명의 독일인이 추가로 미국으로 이주하여 시카고, 디트로이트, 뉴욕 등지에 정착했다.
1890년까지 클리블랜드, 밀워키, 호보켄, 신시내티와 같은 도시에서는 인구의 40% 이상이 독일계일 정도로 그 수가 많았다. 19세기 말, 독일인은 미국에서 스스로를 가장 큰 민족 집단으로 여겼으며, 강력한 독일어 사용 인구를 유지했다. 이들은 대부분 영구 정착민이었고, 독일로 돌아가거나 독일에 충성심을 보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일부는 정치적 망명자였고, 다른 이들은 보편적 징병제를 피하기 위해 이주했다. 젊은 세대는 이중 언어를 구사했지만, 미국이 1917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기 전까지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19]
독일계 미국인들은 노동 운동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새로 결성된 노동조합은 숙련된 독일계 장인들이 작업 환경을 개선하고 미국 사회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1] 독일인들의 관습과 문화는 미국 사회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2. 3. 20세기 초: 동화와 반독 감정
3세기 이상 동안, 독일로부터의 이민은 미국 전체 이민자 중 큰 비중을 차지했다. 2000년 미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전체의 20% 이상, 그리고 백인 미국인의 25%가 독일계 혈통이라고 밝혔다. 독일계 미국인은 미국 전체의 정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동화된 집단이며, 특히 미국 중서부를 포함한 미국 북부에서 가장 흔하게 스스로 밝힌 민족 집단이다. 미국 남부 대부분 지역에서는 텍사스를 제외하고 독일계 미국인이 상대적으로 덜 흔하다.[16]
1840년부터 1914년까지 약 700만 명의 독일인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독일에서 토지를 매각한 농부들은 미국 중서부에서 더 큰 농장을 구입했고, 기술자들은 볼티모어, 신시내티, 세인트루이스, 시카고, 디트로이트, 뉴욕 등에 정착했다. 텍사스에 형성된 식민지를 제외하면 뉴잉글랜드나 미국 남부로 이주한 경우는 드물었다.[18] 1890년에는 클리블랜드, 밀워키, 호보켄, 신시내티 같은 도시 인구의 40% 이상이 독일계였다. 19세기 말, 독일인은 미국에서 스스로 밝힌 가장 큰 민족 집단이었으며, 강력한 독일어 사용 인구를 형성했다. 이들은 대부분 영구 정착민이었고, 독일로 돌아가거나 독일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일부는 정치적 망명자였고, 다른 이들은 보편적 징병제를 피하기 위해 이주했다. 젊은 세대는 이중 언어를 구사했지만, 미국이 1917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기 전까지는 일반적으로 독일어를 사용했다.[19]
실패한 1848년 독일 혁명 이후 정치적 망명자들이 미국으로 건너왔는데, 이들은 48년 혁명가로 불렸다.[20] 이들 중 다수는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신생 공화당에 가입했으며, 칼 슈르츠와 같이 전국적으로 중요한 정치인도 배출되었다. 19세기 말, 독일계 이민자들은 노동 운동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노동조합은 숙련된 장인들이 작업 조건을 통제하고 미국 사회에서 발언권을 얻는 데 기여했다.[21]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미국 내 애국주의와 반독 감정이 고조되자, 대부분의 독일계 미국인들은 이전의 유대 관계를 끊고 주류 미국 문화에 동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독일 문화 단체들이 해산되었고, 학교와 대학에서의 독일어 교육이 중단되었으며, 독일과 관련된 지명이 변경되기도 했다.[22]
1937년, 미국과 독일 사이의 빠른 대서양 횡단 수단으로 선호되었던 비행선 힌덴부르크호가 63번째 항해 중 뉴저지주 레이크허스트 해군 비행장에서 착륙 중 폭발하여 파괴되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 비극적인 사건 이후, 일부 독일 시민들 사이에서는 미국 정부 내 세력이 사보타주를 조직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소문과 추측이 돌기도 했다.[23] 이러한 의혹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이 1937년 당시 미국과 나치 독일 간의 외교 관계에 미친 영향은 비교적 제한적이었다.
제3제국(1933–1945) 시기에는 많은 독일계 유대인과 반나치 성향의 정치적 난민들이 독일을 탈출했다. 하지만 미국의 제한적인 이민 정책으로 인해 상당수가 미국 입국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헨리 키신저와 같은 인물들이 미국으로 망명할 수 있었다.[24]
오늘날, 독일계 미국인은 미국에서 가장 큰 자가 보고된 조상 그룹을 형성하며, 캘리포니아와 펜실베이니아에 독일계 조상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다.[25]
2. 4. 나치 시대 이후: 이민 제한과 새로운 이민 물결
제2차 세계대전 중 고조된 애국주의와 반독 감정은 많은 독일계 미국인들이 이전의 유대 관계를 단절하고 주류 미국 문화에 동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독일 문화 단체들이 해산되고, 학교와 대학에서의 독일어 교육이 중단되었으며, 독일과 관련된 지명이 변경되기도 했다.[22]1937년에는 독일과 미국 사이의 주요 대서양 횡단 수단이었던 비행선 힌덴부르크가 63번째 항해 중 미국 뉴저지주 레이크허스트에서 추락하여 파괴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 이후 일부 독일인들 사이에서는 미국 정부 내 세력이 사보타주를 벌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소문과 추측이 돌기도 했으나,[23] 이러한 의혹이 1937년 당시 미국과 나치 독일 간의 외교 관계에 미친 영향은 비교적 제한적이었다.
제3제국(1933–1945) 시기에는 많은 독일계 유대인과 반나치 성향의 정치적 난민들이 독일을 탈출했다. 그러나 미국의 제한적인 이민 정책으로 인해 이들 중 상당수는 미국 입국이 거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버트 아인슈타인이나 헨리 키신저와 같은 인물들은 미국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24]
오늘날 독일계 미국인은 미국에서 스스로 밝힌 조상 중 가장 큰 규모를 차지하는 집단이다.[16] 2000년 미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전체의 20% 이상, 백인 미국인의 25%가 독일계 혈통이라고 답했다. 이들은 미국 전체의 정치 지형에도 영향을 미치는 동화된 집단으로 평가받으며, 특히 미국 중서부를 포함한 미국 북부 지역에서 가장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민족 집단이다. 반면 미국 남부 대부분 지역에서는 텍사스를 제외하고는 독일계 미국인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다.[16] 캘리포니아와 펜실베이니아는 독일계 미국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주이다.[25]
3. 양국 관계의 발전
독일과 미국의 관계는 18세기와 19세기에 걸친 대규모 독일인의 미국 이주로 시작되었으며[6], 초기에는 독일의 철학 및 교육 시스템이 미국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7] 그러나 이 시기 양국 간 외교 및 경제 관계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다.[7]
1871년 독일 통일을 계기로 강대국으로 부상한 독일과 미국은 해군력 증강과 제국주의적 확장 과정에서 사모아 제도를 둘러싸고 경쟁하기도 했으나[8], 전반적으로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외교적으로 협력하는 경우가 많았다. 20세기 초 독일 해군의 급격한 성장은 미국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9]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초기 미국은 중립을 표방했으나, 영국 등 연합국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지속했다.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 특히 RMS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과 미국을 겨냥한 동맹 제안인 치머만 전보[12] 등은 미국의 참전을 이끄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전쟁 후 미국은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한 조건에 반대하며 독일과 별도의 평화 조약을 체결했고[7], 1920년대에는 미국 자본이 독일 경제 재건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7]
1933년 히틀러와 나치가 집권하면서 양국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미국 내 여론은 나치 정권에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에 군사 및 재정 지원을 제공했다. 1941년 12월 독일이 미국에 선전 포고하자, 미국은 나치 독일의 패배를 전쟁의 최우선 목표로 삼고 참전했다.[7]
제2차 세계 대전 후 미국은 독일 점령 및 재건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특히 마셜 플랜을 통한 막대한 경제 원조는 서독의 경제 부흥과 양국 관계 개선에 크게 기여했다.[7] 냉전 시대에 서독은 미국의 핵심 동맹국으로서 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고 반공주의 노선을 함께하며 긴밀한 경제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7] 미국은 독일의 재통일 과정을 적극 지지했으며, 이는 양국 간 협력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오늘날 미국은 유럽 연합 외에 독일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 중 하나로 여겨진다.[13] 양국 국민은 서로를 신뢰하지만, 독일의 군사적 역할 증대 문제[14], 이라크 전쟁 참여 여부[138], NSA의 도청 스캔들[123] 등 일부 정책 현안에서는 이견을 보이기도 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기에는 NATO 방위비 분담금, 무역 갈등 등으로 관계가 경색되었으나[127][128],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관계 회복 및 다자 협력 강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131][132] 양국 관계는 서구 문화와 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기반 위에 있으며, 경제 협력은 관계의 긍정적인 측면으로 평가받는다.[138]
3. 1. 19세기 이전: 우호적 관계와 제한적 교류
1800년 이전 독일과 미국 관계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18세기부터 시작된 대규모 독일인의 미국 이주였다.[6] 특히 펜실베이니아, 중서부, 텍사스 중부 지역으로 많은 이주가 이루어졌다.[6]이 시기 양국 간의 외교 관계는 우호적이었으나, 1870년대 이전까지는 양측 모두에게 부차적인 중요성을 가졌다.[7] 미국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준 독일의 철학적 이상주의 흐름이 있었고, 독일의 교육 시스템, 특히 공교육과 고등 교육의 발전은 미국 교육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프로이센 교육 시스템을 모델로 삼기도 했다.[7] 그러나 경제적 관계는 1920년 이전까지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7]
3. 2. 19세기: 독일 통일과 관계 강화
1800년 이전부터 독일에서 미국으로의 이민자가 대규모로 이동했으며, 특히 펜실베이니아, 미국 중서부, 텍사스 중부에 정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18세기와 19세기 내내 이어지며 양국 관계의 주요 배경이 되었다.[6] 독일의 철학적 이상주의는 미국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주었으며, 독일의 공교육과 고등 교육 시스템, 특히 프로이센 교육 시스템은 미국 교육 시스템의 모델이 되었다. 많은 미국의 고급 학생들, 특히 과학자와 역사학자들이 독일 대학에서 유학했지만, 영구적으로 독일에 이주하거나 독일 지식인이 미국에서 공부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경제 관계는 1920년 이전까지는 부차적이었고, 외교 관계는 우호적이었으나 1870년대 이전에는 양측 모두에게 큰 중요성을 갖지 못했다.[7]19세기 동안 미국과 여러 독일 국가 간의 관계는 대체로 우호적이었다. 미국인들은 1848년 혁명 운동을 지지했으며, 혁명 실패 후 정치적 망명객들을 환영했다. 독일 국가들은 남북 전쟁 동안 미국을 지지했으며, 남부 연합에 대한 지원은 없었다. 당시 미국과 프랑스 간의 긴장이 높았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1870년에서 1871년 사이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독일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다.[15] 워싱턴은 이 전쟁에서 중립을 지켰지만, 여론은 독일 편이었다.
1868년, 미국 공사 조지 밴크로프트는 독일로 귀국한 이민자 남성의 군 복무 의무 문제를 해결하는 조약을 체결했다.[50] 1871년 독일 통일 이후 새로 건국된 독일 제국과의 관계는 좋은 출발을 보였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재상 치하의 독일은 1870년부터 1890년까지 급속도로 산업화되었지만, 주로 경쟁 대상은 영국이었다. 독일은 미국산 농산물, 특히 면화, 밀, 담배 수입을 늘려갔다.[51] 그러나 1876년 필라델피아 박람회의 독일 위원은 자국 출품작의 품질이 영국 및 미국 제품보다 떨어진다고 평가하기도 했다.[51]
1880년대에는 미국산 돼지고기를 둘러싼 무역 분쟁, 이른바 '돼지고기 전쟁'이 발생했다. 독일 제국을 포함한 10개의 유럽 국가는 미국산 돼지고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는 트리키넬라증 발병 보고를 이유로 수입을 금지했다.[52][53] 이는 연간 1억달러에 달하는 13억 파운드 이상의 돼지고기 제품 수출에 영향을 미쳤다. 유럽 농부들은 값싼 미국산 농산물 유입에 반발했고, 제조업계 역시 미국 산업 수출 증가와 높은 미국 관세에 불만을 품었다. 비스마르크 재상은 독일 지주들의 정치적 지지를 의식하여 보호무역주의적 강경 노선을 취했으며, 미국 아서 대통령의 공동 과학 연구 제안을 거부하고 금수 조치가 부당하다고 비판한 독일 최고 전문가 루돌프 피르호 교수의 의견도 무시했다.[54][55] 미국의 여론은 독일에 대해 분노했다.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보복을 거부했지만, 후임 벤자민 해리슨 대통령은 화이트로 리드 주 프랑스 공사와 윌리엄 월터 펠프스 주 독일 공사에게 보이콧 종식을 위한 압박을 지시했다. 해리슨 행정부는 또한 의회를 설득하여 수출품의 품질을 보증하는 1890년 육류 검사법을 제정하고, 농무부 장관 제레마이아 맥클레인 러스크를 통해 독일의 주요 수출품인 사탕무 설탕 수입 금지라는 보복 조치를 위협했다. 결국 독일은 1891년 9월 금수 조치를 철회했고, 다른 유럽 국가들도 뒤따르면서 보이콧은 종식되었다.[56][57]
19세기 말, 독일 통일 이후 강대국으로 부상한 독일과 미국은 모두 세계적인 해군력을 건설하고 제국주의적 팽창을 추구했다. 이 과정에서 사모아 제도를 둘러싸고 양국 간의 갈등, 즉 제2차 사모아 내전이 발생했다. 1898년 사모아 통제권을 둘러싼 위기는 1899년 삼국 협약을 통해 해결되었으며, 양국은 사모아를 분할하여 분쟁을 종식시켰다.[8] 1898년 이후 미국은 국제 외교 무대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때로는 독일과 의견 차이를 보이기도 했지만 대체로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20세기 초, 강력한 독일 해군의 부상과 라틴 아메리카, 카리브해 지역에서의 활동 증가는 미국의 군사 전략가들에게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1902–03년 베네수엘라 위기처럼 양국 관계가 긴장되기도 했지만, 대체로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9]
3. 3. 19세기 말~20세기 초: 경쟁과 갈등
1871년 독일 통일 이후, 독일은 주요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독일과 미국 모두 세계적 수준의 해군을 건설하고 전 세계에서 제국주의적 확장을 시작하면서 경쟁 관계에 들어섰다. 이로 인해 사모아 제도를 둘러싸고 제2차 사모아 내전이라는 소규모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1898년 양국 간의 긴장은 고조되었으나, 1899년 삼국 협약을 통해 사모아를 분할하여 분쟁을 종식시켰다.[8]경제적인 측면에서도 갈등이 있었다. 1880년대 독일 제국을 포함한 10개 유럽 국가는 미국산 돼지고기 수입을 금지했다.[52] 표면적인 이유는 미국산 돼지고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는 트리키넬라증에 대한 우려였지만,[53] 실제로는 값싼 미국 농산물로 인해 자국 시장이 잠식당하는 것에 대한 유럽 농민들의 불만과, 미국의 높은 공산품 수입 관세에 대한 유럽 제조업계의 반발이 배경에 있었다. 당시 독일의 비스마르크 재상은 보호무역주의적 입장에서 강경 노선을 취하며 미국의 과학적 공동 조사 제안을 거부했다.[54][55] 이에 미국 여론은 독일에 분노했고, 해리슨 대통령 행정부는 1890년 육류 검사법 제정으로 수출품 품질을 보증하는 한편, 독일산 사탕무 설탕 수입 금지라는 보복 조치를 위협했다. 결국 독일은 1891년 9월 금수 조치를 철회했고, 다른 유럽 국가들도 뒤따르면서 이른바 '돼지고기 전쟁'은 마무리되었다.[56][57]
1898년 이후 미국은 국제 외교 무대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독일과 때로는 의견 차이를 보이기도 했지만 종종 합의에 이르기도 했다. 특히 20세기 초, 강력한 독일 해군의 부상과 라틴 아메리카, 카리브해 지역에서의 활동은 미국의 군사 전략가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독일 해군은 카리브해 지역에 석탄 보급 기지 건설을 시도했는데, 이는 미국의 전통적인 영향권인 서반구에서 먼로 독트린과 충돌할 가능성이 있었다.[65] 독일 해군 기획자들은 먼로 독트린을 미국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간주하며 불쾌감을 드러냈고, 특히 건설 중이던 파나마 운하가 카리브해에서 미국의 완전한 패권을 가져올 것을 우려했다.[66] 이에 미국 역시 서반구에서 독일의 팽창을 경계하며 카리브해의 해군 기지 확보에 적극적으로 나섰다.[67] 이러한 긴장 관계는 1902–03년 베네수엘라 위기와 같은 사건으로 표출되기도 했지만, 대체로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9]
한편, 독일의 빌헬름 2세는 1907-1908년 베른하르트 폰 뷜로 재상을 통해 미국과 청나라를 포함하는 삼국 동맹을 제안하기도 했으나[11],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3. 4. 제1차 세계 대전: 미국의 참전과 적대 관계
미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중립국으로 남으려 했으나, 대서양 항로를 통제하는 영국과 다른 연합국에 더 많은 무역 및 재정 지원을 제공했다. 독일은 멕시코에서 미국의 이익을 약화시키려 시도했다. 1917년, 독일이 치머만 전보를 통해 미국에 대한 군사 동맹을 멕시코에 제안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의 참전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12] 독일 잠수함의 영국 선박 공격, 특히 민간인 승객이 구명정에 탈 시간을 주지 않고 공격한 RMS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은 미국 여론을 격분시켰다. 독일은 미국의 중단 요구에 동의했으나, 1917년 초 미국 군대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빠른 승리를 위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하며 입장을 번복했다.1917년 4월, 윌슨 대통령은 "세계를 민주주의를 위해 안전하게 만들고" 군국주의와 독재를 타도하기 위해 의회에 독일에 대한 전쟁 선포를 요청했다. 미국은 초기에 자금, 군수품, 식량, 원자재 제공을 주로 예상했으나, 서부 전선에서 연합군의 어려움을 인지한 후 대규모 병력 파견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1917년 말 러시아의 혁명과 전쟁 이탈로 독일은 동부 전선의 병력 약 60만 명을 서부 전선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여름부터 매일 약 1만 명의 미군 병력이 도착하여 연합군의 손실을 메웠고, 점차 약화된 독일 제국 육군은 1918년 11월 결국 항복했다. 미국 내에서 독일계 미국인 사회는 대체로 미국의 전쟁 노력을 조용히 지지했으나, 일부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기도 했다. 독일은 미국의 자유와 생활 방식을 위협하는 존재로 묘사되었다.[78]

독일 내부에서는 미국을 또 다른 적대국이자 유럽 지배를 노리는 위선적인 해방자로 비난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갈 무렵 독일 국민들은 공정한 평화 조약에 대한 희망을 담은 윌슨의 14개 조항을 받아들였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윌슨은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와 협력하여 베르사유 조약에서 프랑스가 독일에 요구한 가혹한 조건들을 완화하려 노력했다. 윌슨은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국제 연맹 창설에 힘썼고, 독일의 재침략을 막기 위해 미국이 프랑스와 영국을 지원하는 조약 체결도 추진했다. 그러나 윌슨은 의회를 장악한 미국 공화당과의 타협을 거부했고, 그 결과 미국 상원은 베르사유 조약을 비준하지 않았으며 국제 연맹에도 가입하지 않았다.[79] 양국은 1921년에 별도의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전쟁은 경제적인 영향도 미쳤다. 독일은 화학 및 제약 분야에서 지배력을 가지고 중요 특허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미국 의회는 이 특허들을 무효화하고 미국 기업들에게 매독 치료제인 살바르산과 같은 제품 생산을 허가했다.[80] 독일 제약사 바이엘은 세계적으로 인기 있던 약인 아스피린에 대한 특허와 막대한 이익을 잃었다.[81]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미국에서는 독일 작곡가들의 음악이 일시적으로 클래식 음악 공연 목록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자였던 칼 묵 박사는 1919년에 체포되어 추방되었으며, 뉴욕 시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는 1924년에야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를 다시 공연 목록에 올렸다.[143]
3. 5. 전간기: 경제 협력과 문화 교류
1920년대 동안 독일과 미국의 경제적, 외교적 관계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프랭크 코스티글리올라에 따르면, 당시 워싱턴과 월가는 번영하고 안정적인 유럽을 원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번영하는 독일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정책을 주도한 주요 인물로는 찰스 G. Dawes와 오웬 D. 영, 월가 은행가들, 뉴욕 연방 준비 은행, 그리고 초대 전후 대사인 앨런슨 B. 호튼(1922–1925) 등이 있었다. 특히 뉴욕의 은행들은 독일 경제 재건을 위한 자금 조달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82][83] 이러한 정책은 1923년 이후 효과를 보였으나, 지속적인 달러 유입에 의존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이러한 자금 흐름은 대부분 중단되었다.[84]미국 정부는 1920년 독일에 가혹했던 베르사유 조약을 거부하고, 대신 독일에 대한 처벌 조항이 없는 새로운 평화 조약을 1921년에 체결했다. 또한 영국과 협력하여 실행 가능한 유럽 평화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노력했다.[85] 호튼 대사는 평화, 유럽의 안정, 그리고 미국의 번영이 유럽의 경제 및 정치 시스템 재건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유럽 문제에 대한 미국의 정치적 참여를 촉진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미국의 반대와 무관심을 극복하고자 했다. 당시 핵심 문제들이 모두 연합국의 대미 전쟁 부채, 독일의 대 연합국 배상금,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국제 무역 및 투자와 같은 경제 문제와 얽혀 있음을 빠르게 파악했다. 그는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 새로운 미국의 정책과 영국 및 독일과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Dawes Plan을 주도하는 역할을 했다.[86]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상호 영향이 있었지만, 온도 차이도 존재했다. 독일 문화의 고급 문화를 중시하는 이들은 미국 문화를 다소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보수 혁명을 지지하는 독일 우파 세력은 미국에서 유입된 아이디어와 취향으로 대표되는 근대성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졌다.[87] 하지만 독일의 젊은 세대는 미국의 재즈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등 미국 대중문화에 열광했다. 할리우드 영화는 모든 연령대에 걸쳐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독일어 자막이 달린 영화나 1929년 이후 독일어로 더빙된 유성 영화 상영관은 관객들로 붐볐다.[88][89][90] 산업 분야에서는 포드주의로 대표되는 미국의 효율적인 생산 방식 모델이 주목받았다.[91]
반면, 1914년 이후 독일 문화가 미국 사회와 문화에 미치는 영향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다. 미국으로의 독일 이민자 유입은 줄어들었고, 미국의 학자들이 독일 대학에서 수학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미국 대중은 전반적으로 독일 문화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제프리 S. 칸에 따르면, 미국의 음악계 엘리트들은 아놀드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파울 힌데미트 등이 작곡한 무조 음악이나 음렬주의 음악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이들은 해당 음악들이 불협화음으로 가득하고 메마르다고 평가했다.[92]
3. 6. 나치 시대: 관계 악화와 반나치 정서
1933년 히틀러와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미국 내 여론은 독일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변했고, 1938년 이후 양국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나치의 박해를 피해 많은 독일 지식인, 과학자, 예술가들이 영국이나 프랑스 등지로 망명길에 올랐지만, 미국은 1924년 이민법에 따라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탈출하려는 유대인 난민들의 입국을 엄격하게 제한했다.
한편,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부터 영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에 상당한 규모의 군사 및 재정 지원을 제공하며 간접적으로 연합국을 지지했다. 1941년 12월, 나치 독일이 미국에 선전 포고를 하자, 미국 정부는 진주만 공격으로 자국을 직접 공격한 일본 제국보다 나치 독일을 먼저 패배시키는 것을 전쟁의 최우선 목표로 설정했다.
3. 7. 제2차 세계 대전: 적대 관계와 연합국의 승리
1933년 히틀러와 나치가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하자 미국 내 여론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두 국가의 관계는 1938년 이후 더욱 나빠졌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많은 수의 지식인, 과학자, 예술가들이 독일을 떠나 영국과 프랑스 등지로 피난했다. 그러나 1924년 이민법과 같은 미국의 엄격한 이민 정책은 유대인 난민의 입국을 크게 제한하는 결과를 낳았다.[7]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미국은 초기에는 직접 참전하지 않았으나, 영국과 프랑스에 상당한 규모의 군사 및 재정 지원을 제공했다. 1941년 12월, 나치 독일은 진주만 공격 직후 미국에 선전 포고를 했다.[7] 이에 미국은 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전했으며, 워싱턴은 유럽 전선에서의 나치 독일 패배를 태평양 전쟁의 일본 제국 격퇴보다 우선적인 목표로 설정했다.[7]
전쟁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후, 미국은 1945년부터 독일의 점령과 재건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마셜 플랜을 통해 서독의 경제 회복을 위해 수십억 달러 규모의 원조를 제공했다.[7] 이를 계기로 양국 관계는 민주주의 가치 공유, 냉전 시기 반공주의 연대, 그리고 높은 수준의 경제 교류를 바탕으로 매우 긍정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7]
3. 8. 냉전 시대: 서독과의 동맹, 동독과의 적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패배한 후, 미국은 독일 분할 점령에 참여한 국가 중 하나였다. 미국 점령군은 나치화 제거와 산업 시설 해체 정책을 추진하는 동시에 독일 민간인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1948년부터 1949년까지 이어진 베를린 봉쇄와 1948년부터 1952년까지 시행된 마셜 플랜은 독일인들의 미국에 대한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다.냉전이 시작되면서 서독(독일 연방 공화국)은 서유럽 민주주의 진영의 최전선 국가가 되었고, 미군의 주둔은 서독 사회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냉전 기간 동안 서독은 유럽 최대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으며, 미국과의 관계는 새로운 대서양 관계로 발전했다. 양국은 상당 부분 문화를 공유하고, 긴밀한 국제 무역 관계를 구축했으며, 첨단 기술 분야에서 협력을 지속했다. 그러나 양국 간 정책 접근 방식의 차이로 인한 긴장도 존재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와 이후 독일의 재통일은 양국 관계에 새로운 협력의 시대를 열었다.

반면, 미국과 동독(독일 민주 공화국)의 관계는 적대적이었다. 미국은 콘라트 아데나워 서독 총리가 내세운 할슈타인 독트린을 지지했는데, 이는 특정 국가가 동독을 승인할 경우 서독과의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은 오랫동안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동서 간 데탕트(긴장 완화) 분위기와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동방 정책 추진에 따라 양국 관계에도 변화가 생겼다. 미국은 1974년 9월, 에리히 호네커가 사회주의통일당 서기장으로 동독을 이끌던 시기에 동독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냉전 시대 동안 반미주의는 동독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었으며, 친미적인 태도를 보이는 반대자들은 처벌받았다. 서독에서는 반미주의가 주로 좌파 진영에서 나타났으나, 대다수 국민은 미국에 대해 우호적인 시각을 유지했다.[146] 다만, 1960년대 후반 서독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감이 커지기도 했다.
3. 9. 독일 통일: 미국의 지지와 새로운 협력
냉전의 시작은 서독을 민주적인 서유럽의 최전선 국가로 만들었으며, 미국의 군사적 주둔은 서독 사회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이 시기 서독은 유럽에서 가장 큰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고, 서독과 미국의 관계는 새로운 대서양 관계로 발전했다. 양국은 문화의 상당 부분을 공유하고, 집중적인 글로벌 무역 환경을 구축했으며, 첨단 기술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협력했다. 그러나 때로는 대서양 양측의 서로 다른 접근 방식으로 인해 긴장이 발생하기도 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와 이후 이어진 독일의 재통일은 독일과 미국 간 협력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재임 1989–1993) 행정부는 독일 통일을 일관되게 지지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많은 미국 역사가들은 부시가 통일된 독일이 NATO에 잔류하도록 보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114]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재통일에 대해 경계심을 나타냈지만, 부시 대통령은 1990년 서독 총리 헬무트 콜을 강력하게 지지하며 신속한 독일 통일을 추진했다.[115] 부시는 통일된 독일이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의 상징적인 종결을 의미한다고 보았다.[116] 광범위한 협상 끝에,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통일된 독일이 NATO의 일원으로 남는 것에 동의했다. 다만, 옛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 영토는 비무장화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따랐다. 이는 이전 소련의 입장을 고려할 때 상상하기 어려웠던 상황이었지만, 동독 정권이 붕괴하면서 실현 가능해졌다.[117][118] 마침내 독일은 1990년 10월 공식적으로 통일되었다. 부시 행정부는 미국 내 여론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미국 유대인과 폴란드계 미국인 공동체에서는 나치즘으로 인한 고통의 기억 때문에 통일에 대해 상당한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미국 내에서는 독일 통일에 대해 긍정적인 여론이 우세했으며, 이는 대체로 소극적이었던 독일계 미국인 공동체의 정서와도 일치했다.[119]
3. 10. 21세기: 동맹 관계의 지속과 갈등
오늘날 미국은 유럽 연합 외에 독일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이자 파트너 중 하나이다.[13] 양국 국민은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동맹국으로 여기지만, 일부 주요 정책 현안에 대해서는 이견을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은 독일이 국제 사회에서 보다 적극적인 군사적 역할을 수행하기를 기대하지만, 독일은 이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14]
2001년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 노력 속에서 양국 정치 관계는 강화되었고, 독일은 나토의 일원으로 아프가니스탄에 병력을 파병했다. 그러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와 요슈카 피셔 외무장관이 전쟁을 막으려 노력하고,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과 영국 주도의 이라크 다국적군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갈등이 불거졌다.[120][121] 반미주의는 9.11 테러 이후 다시 부상했으며, 일부 독일 지식인들은 세계화, 미국화, 테러리즘 간의 연관성을 주장하기도 했다.[122]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독일 내 미국의 이미지를 크게 변화시켰다.[145]

2013년 대량 감시 폭로 과정에서 NSA가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전화 통화를 포함한 독일 주요 기관을 도청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자,[123] 독일은 미국 및 영국과의 1968년 정보 공유 협정을 취소했다.[124] 이후에도 미국 요원들의 독일 내 스파이 활동 사례가 추가로 드러나면서[125] 미국에 대한 불신감이 고조되었다.[148]

오바마 행정부(2009–2017) 시기에는 양국 간의 긴밀한 관계가 유지되었다. 2016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자신의 "가장 가까운 국제 파트너"라고 평가했다.[126]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2017–2021) 동안에는 나토 방위비 분담, 무역 문제, 관세, 독일의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 등을 둘러싸고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었다.[127][128] 2017년 5월, 메르켈 총리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만났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전 행정부 시기 미국이 무역에서 불이익을 당했다고 주장하며 이미 여러 EU 국가 및 동맹국들과의 관계를 경색시킨 바 있었다. 메르켈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나토 정상회담 이후 "타인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 있었던 시대는 어느 정도 끝났다"고 발언했다.[129]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독일인들은 나쁘다, 아주 나쁘다"며 "미국에 팔고 있는 수백만 대의 자동차를 보라. 끔찍하다. 우리는 이것을 중단시킬 것"이라고 말한 이후였다.[130]
2021년 조 바이든 대통령은 메르켈 총리 및 다른 유럽 지도자들과의 회담에서 양자 관계 및 대서양 횡단 관계를 나토와 유럽 연합을 통해 강화하고, 이란, 중국, 러시아, 아프가니스탄, 기후 변화, 코로나19 범유행, 다자주의 등 주요 현안에 대해 긴밀히 협력할 것을 강조했다.[131] 2021년 2월 초, 바이든 대통령은 트럼프 행정부가 계획했던 독일 주둔 미군 9,500명 감축 계획을 중단시켰다. 이 조치는 베를린에서 환영받았으며, 독일 정부는 이것이 "유럽 및 대서양 횡단 안보에 기여하므로 상호 이익에 부합한다"고 밝혔다.[132] 메르켈 총리는 2021년 7월 15일 워싱턴에서 바이든 대통령을 만나 코로나19 범유행, 지구 온난화, 경제 문제 등을 논의했다. 트럼프 행정부 시기부터 논란이 된 110억달러 규모의 노르트스트림 2 가스관 문제는 바이든 행정부 하에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 있다.[133]
독일 내 미국의 영향력에 대한 인식은 시기에 따라 변동이 컸다. 2013년 BBC 월드 서비스 여론 조사에서는 긍정적(35%)과 부정적(39%) 인식이 엇갈렸다.[137] 2007년 조사에서 미국인들은 독일의 이라크 전쟁 불참을 양국 관계의 주요 불만 사항으로 꼽았으나, 그 중요성은 점차 감소하는 추세였다. 미국인들은 독일을 영국, 캐나다, 일본 다음으로 네 번째로 중요한 국제 파트너로 간주했으며, 경제 협력을 양국 관계의 가장 긍정적인 측면으로 보았다.[138] 서유럽 국가 중 독일 국민의 미국에 대한 인식은 2002년 비교적 긍정적(60%)에서 2007년 부정적(30%), 2012년 다시 긍정적(52%), 2017년 다시 부정적(35%)으로 크게 변동하는 경향을 보였다.[139] 2021년 조사에서는 독일인들은 미국을 가장 중요한 외교 파트너로 생각하는 반면, 미국인들은 독일을 다섯 번째로 중요한 파트너로 간주했다.[140] 21세기 들어 독일을 위한 대안 (AfD)과 같은 우파 정당에서도 반미주의적, 반이민적 성향이 나타났다.[148]
4. 문화 및 교육 교류
독일과 미국은 역사적으로 문화 및 교육 분야에서 깊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19세기에는 독일의 철학, 교육 시스템, 음악 등이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많은 미국 학자들이 독일 대학에서 유학하며 학문적 발전을 이끌었다.[26][27][28][29][30][31][32][33][34][35]
그러나 20세기 들어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양국 간 문화 교류는 단절과 변화를 겪었다.[72][76][77] 특히 나치 시대에는 많은 독일 지식인과 과학자들이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여 미국의 학문과 과학 기술 발전에 기여했으며,[179][180] 전후에는 페이퍼클립 작전 등을 통해 독일의 과학 기술 인력이 미국으로 유입되기도 했다.[181][182][183]
오늘날 양국은 다양한 교환 프로그램과 공동 연구 프로젝트를 통해 과학, 기술, 교육, 예술 등 여러 분야에서 활발한 교류를 이어가고 있으며,[184] 워싱턴 D.C.의 독일-미국 우호 정원은 이러한 우호 협력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177][178] 독일계 미국인들은 건축, 예술, 음악,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미국 문화 발전에 지속적으로 기여해왔다.
4. 1. 철학과 교육의 영향
1914년 이전 독일 문화는 미국의 사상가들에게 중요한 영감을 주었다. 19세기 초 뉴잉글랜드에서 등장한 초월주의 운동은 랄프 왈도 에머슨을 중심으로 유럽의 낭만주의, 독일의 성서 비평, 그리고 이마누엘 칸트와 독일 관념론의 초월 철학에서 영향을 받았다.[26] 19세기 후반에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라우흐와 윌리엄 T. 해리스, 그리고 세인트루이스 헤겔학파에 의해 독일 헤겔 철학이 전파되었으며, 이는 실용주의에 반대하는 관념론적 경향을 나타냈다.[27]교육 분야에서는 1837년 매사추세츠 교육부 장관이 된 호레이스 만(1796-1859)이 "공립 학교"의 프로이센 모델을 기반으로 주 전체의 전문 교사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프로이센은 모든 학생이 공립 교육을 통해 동일한 내용을 배울 자격이 있다는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었고, 만은 이를 바탕으로 초등 교육과 교사 훈련에 집중했다. 공립 학교 운동은 북부 주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었으며, 대부분의 주에서 학교 시스템의 독일적 기원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만은 프로이센에서 배운 방식을 따라 학생들을 연령별로 학년에 배치하고, 유럽 대학에서 흔히 사용되는 강의 방식을 도입하여 전문적인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했다.[28] 또한, 미국은 독일의 유치원 제도를 채택했으며, 독일 이민자들은 투르너 운동을 통해 체조와 체육 교육을 미국 사회에 소개했다.[29]
1914년 이전에 15,000명이 넘는 미국의 학자와 과학자들이 독일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그중 약 8%는 여성이었다. 이들은 박사 학위를 가지고 돌아와 코넬, 존스 홉킨스, 시카고, 스탠포드와 같이 독일 대학을 모델로 한 연구 중심 대학을 설립하거나, 하버드, 컬럼비아, 위스콘신과 같은 기존 대학의 연구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30][31] 풍부한 자금을 활용하여 유럽에서 주요 장서를 구매해 단기간에 연구 도서관을 구축하기도 했는데, 시라큐스 대학교가 독일의 저명한 역사가 레오폴트 폰 랑케(1795-1886)의 연구 도서관을 구입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32]
4. 2. 음악과 과학의 교류
1914년 이전부터 독일 문화는 미국의 사상가들에게 중요한 영감을 주었다. 특히 음악 분야에서의 교류가 활발했다. 식민지 시대에 펜실베이니아의 독일계 종교 공동체들은 음악에 대한 깊은 애정을 미국 사회에 전파했으며, 모라비안 음악은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33] 19세기 중후반에는 필라델피아, 보스턴, 뉴욕, 신시내티, 시카고 등 주요 도시들이 독일 고전 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교향악단을 창설했다. 이 과정에서 저명한 독일 지휘자들과 연주자, 교사들이 초빙되었다. 테오도르 토마스(1835–1905)는 당시 현대 유럽 작곡가들과 오케스트라 기법을 뉴욕, 신시내티, 시카고 등에 소개하며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34][35] 반대로, 1857년 마티아스 호너는 하모니카를 독일로 가져가 대중화시키는 데 기여했다.[36] 주목할 만한 독일계 미국인 음악가로는 작곡가 파울 힌데미트, 지휘자 오토 클렘페러, 기타리스트 레슬 폴 등이 있다.과학 분야에서도 중요한 인적 교류가 있었다. 1933년 나치가 독일에서 집권하고 전문 공무원 복원법을 통과시키면서, 많은 학자들이 박해를 피해 독일을 떠나야 했다. 특히 반대파 인사나 유대인 조상을 둔 학자들이 정부 및 학계에서 추방되었는데, 이들 중 수백 명의 물리학자를 포함한 다수의 학자들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노벨상 수상자인 제임스 프랑크와 세계적인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이때 미국으로 망명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들 망명 과학자 중 상당수는 이후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핵무기 개발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일부는 독일로 돌아갔지만, 많은 수가 미국에 남아 학문 활동을 이어갔다.[179][180]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냉전 시기에는 페이퍼클립 작전이라는 비밀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 합동 정보 목표 기구(JIOA)가 1,600명 이상의 독일 과학자, 기술자, 엔지니어를 미국으로 데려왔다. 이들 중에는 과거 나치당에 가입했던 이들이나 당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181][182] 독일의 V-2 로켓 개발을 이끌었던 베르너 폰 브라운과 그의 연구팀도 이 작전을 통해 미국으로 건너와 미국의 우주 탐사 프로그램 구축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183]
오늘날에도 독일과 미국의 대학 연구자들은 다양한 교환 프로그램과 공동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다. 주요 협력 분야는 우주 탐사, 국제 우주 정거장 운영, 환경 기술, 의학 등이며, 생화학, 공학, 정보 통신 기술, 생명 과학 분야에서도 독일 학술 교류처(DAAD) 등의 네트워크를 통해 활발한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양국은 2010년 2월 과학 기술 협력에 관한 양자 협정을 체결하며 협력 관계를 더욱 공고히 했다.[184]
4. 3. 20세기 문화 교류의 단절과 회복
1914년 이전까지 독일 문화는 미국의 사상가들에게 중요한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20세기 초, 독일의 공격적인 외교 정책과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이 미국 내에서 제기되기 시작했다. 특히 베네수엘라 사건 이후 빌헬름 2세의 변덕스럽고 공격적인 모습이 부각되면서 반독일 감정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계 미국인들은 대부분 중립을 지켰으며, 많은 이들이 독일의 징병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상태였다.[72]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미국은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주도 하에 중립을 선언했다. 윌슨은 평화 중재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으나,[73][74] 독일의 벨기에 침공과 잔혹 행위에 대한 보도는 연합국 측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1915년 여객선 ''RMS 루시타니아''호 침몰로 100명 이상의 미국인이 사망하면서 미국 내 여론은 독일에 대해 더욱 비판적으로 변했다.[76] 윌슨은 독일 잠수함이 국제법을 준수할 것을 요구했고, 독일은 잠시 여객선 공격을 중단했다. 그러나 1917년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 재개를 선언하고, 멕시코에 미국과의 전쟁 동맹을 제안하는 치머만 전보가 공개되면서 미국 여론은 격분했고, 결국 미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독일 문화에 대한 관심은 급격히 줄어들고 양국 간 문화 교류는 사실상 단절되었다.[77]
전쟁 후 1920년대에는 경제적, 외교적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와 월가는 번영하는 유럽을 위해 독일 경제 재건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고, 뉴욕 연방 준비 은행을 중심으로 한 뉴욕 은행들이 자금 조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82][83] 미국은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한 조항을 거부하고 독일과 새로운 평화 조약을 체결했으며, 도스 안(Dawes Plan) 등을 통해 독일의 전쟁 배상금 문제 해결과 경제 안정화를 지원했다.[85][86] 이러한 경제적 관계 개선은 문화 교류 회복의 발판을 마련했지만, 1929년 대공황 발생으로 미국의 자금 지원이 중단되면서 한계를 맞았다.[84]
문화적인 측면에서, 독일의 전통적인 고급 문화계는 미국의 대중문화를 다소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독일 내 보수적인 우파 지식인들은 미국적 가치와 문화 유입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기도 했다.[87] 하지만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미국의 재즈 음악이 인기를 끌었고, 할리우드 영화는 모든 연령대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1929년 이후에는 독일어로 더빙된 유성 영화가 상영되면서 그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88][89][90] 또한, 포드주의로 대표되는 미국의 산업 효율성 모델도 독일에서 주목받았다.[91]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문화가 미국 사회에 미치는 전반적인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독일로부터의 이민 유입이 줄었고, 미국 학자들의 독일 대학 유학도 드물어졌다. 대중적인 관심도 낮았으며, 특히 미국의 음악계 엘리트들은 아놀드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파울 힌데미트 등 독일 현대 음악가들의 무조 음악에 대해 불협화음적이고 난해하다며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92] 서부극 작가 카를 마이는 독일에 미국의 가상적인 서부 이미지를 제공했지만, 정작 미국 내에서는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독일계 미국인들이 미국의 문화 예술 발전에 기여했다.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분야 | 인물 | 주요 활동 |
---|---|---|
예술/교육 | 요제프 알버스 | 예술가, 교육자 |
미술 | 알버트 비어슈타트 | 미국 서부 풍경화가 |
문학 | 필립 K. 딕 | 작가 |
건축 | 발터 그로피우스 | 건축가, 바우하우스 설립자 |
건축 | 앨버트 칸 | 산업 건축가 |
건축 |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 | 건축가 |
음악 | 파울 힌데미트 | 작곡가 |
건축 | 필립 존슨 | 건축가 |
음악 | 오토 클렘페러 | 지휘자 |
문학 | 헨리 밀러 | 작가 |
음악 | 레슬 폴 | 기타리스트, 발명가 |
정치/문학 | 칼 슈르츠 | 정치인, 작가 |
문학/삽화 | 닥터 수스 | 아동 문학 작가, 삽화가 |
사진 | 앨프리드 스티글리츠 | 사진 작가 |
문학 | 커트 보네거트 | 작가 |
시간이 흘러 양국 관계가 회복되면서, 워싱턴 D.C.에는 독일-미국 우호 정원이 조성되었다. 이 정원은 백악관과 워싱턴 기념탑 사이의 내셔널 몰에 위치하며, 독일과 미국 원산의 식물, 좌석, 분수 등을 갖추고 있다. 독일인의 미국 이민 300주년을 기념하여 1988년 11월 15일에 헌정되었으며, 오늘날 미국과 독일 간의 긍정적이고 협력적인 관계를 상징하는 장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177][178]
5. 군사 관계
독일과 미국의 군사 관계는 미국 독립 전쟁 시기부터 시작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은 독일에 군대를 영구적으로 주둔시키며 냉전 시기 동안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149][150] 양국은 NATO 회원국으로서 군사적으로 협력하고 있으며, 독일에는 람슈타인 공군 기지 등 주요 미군 시설이 위치해 있다.[153] 그러나 최근에는 주둔 미군 비용 분담 문제, 병력 감축 및 재배치 논의, 새로운 미사일 배치 계획, 그리고 미국의 정보 활동 등으로 인해 양국 간 군사 관계에 긴장이 존재하기도 한다.[155][156][161][165]
5. 1. 독립 전쟁부터 냉전까지
독일과 미국의 군사 관계는 미국 독립 전쟁 시기부터 시작되었는데, 당시 독일군은 양측에서 싸웠다. 전 프로이센 육군의 대위였던 폰 슈토이벤 장군은 대륙군의 감찰총감으로 임명되어 미국 군인들을 유럽 최고 수준으로 훈련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미국 육군의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149]
20세기 들어, 특히 1930년대 나치 독일과 아돌프 히틀러의 등장 이후 양국 관계는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미국 내 여론은 나치 정권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졌지만, 동시에 전쟁에 대한 깊은 혐오와 유럽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꺼리는 고립주의 정서도 강했다.[93][94]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행정부는 대공황 극복을 위한 국내 뉴딜 정책에 집중하느라 외교 정책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95] 루스벨트 행정부는 1938년 뮌헨 협정을 전쟁을 피했다는 이유로 공개적으로 환영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이것이 독일의 재무장을 위한 시간 벌기에 불과하다고 인식했다.[96]
히틀러는 초기에는 미국의 이민 제한 정책이나 아프리카계 미국인 및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차별적 대우를 언급하며 미국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보이기도 했다.[97] 그러나 역사학자 옌스-우베 귈텔은 미국 서부 개척과 나치의 동방 팽창 정책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으며, 히틀러가 미국 서부나 인디언 학살을 자신의 정책 모델로 삼았다는 주장을 부정한다.[98] 1933년 집권 이후 히틀러는 점차 미국을 주요한 적으로 간주하게 되었고, 특히 유대인이 루스벨트 대통령을 조종하고 있다는 믿음을 굳혔다. 제프리 허프에 따르면, 나치의 미국에 대한 태도는 뉴딜 정책 시기의 모호한 공통 관심사 언급에서 점차 적대감과 분노로 변해갔다.[99] 양국 간의 공식 관계는 1938년 11월까지 냉랭한 상태를 유지하다가, 11월 9~10일 독일 전역에서 벌어진 유대인 박해 사건(수정의 밤) 이후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 사건은 평화주의 성향이던 미국의 종교 단체들마저 독일에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100]
1930년대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전체 난민 수는 비교적 적었지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나 헨리 키신저와 같은 많은 지식인들이 나치 정권을 피해 미국에 정착했다.[101] 이들 중 다수는 유대인이었으나, 미국의 엄격한 이민 제한 정책 때문에 망명을 원했던 많은 유대인들이 입국하지 못했다.[102][103] 한편, 노트르담 대학교의 발데마르 구리안과 같은 독일 가톨릭 망명 지식인들의 유입은 미국의 가톨릭 대학들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104] 당시 미국의 메이저 영화 스튜디오들은 대부분 나치 독일 시장을 의식하여 영화를 검열하거나 편집했지만, 워너 브라더스 픽처스는 강력한 반나치 정책을 견지했다.[105][106]

제2차 세계 대전이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으로 발발했을 때, 미국은 공식적으로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격 이후, 독일이 12월 11일 미국에 선전포고하자 미국도 즉각 독일에 선전포고하며 전쟁에 참전했다. 루스벨트의 외교 정책은 이미 1939년부터 독일보다는 영국과 프랑스를 강력하게 지원하는 방향이었다. 1940년부터 1941년 사이, 미국이 공식적으로 참전하기 전부터 대규모 군비 증강과 평시 최초의 징병제가 실시되었다. 미국 내 여론은 격렬하게 나뉘어 초기에는 고립주의가 우세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약화되었다. 독일계 미국인들은 나치 독일을 지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중립 유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많았다.[107] 하지만 진주만 공격은 독일계 미국인들 사이에서 강력한 애국심을 불러일으켰고, 당시에는 독일 본토의 친척들과 연락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108][109][110]

루스벨트 대통령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계 미국인들이 겪었던 차별과 반감이 반복되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일부 사기업들이 독일이나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나 시민권자의 고용을 거부하는 사례가 발생하자, 루스벨트는 이를 "어리석고 부당하다"고 비판하며 충성스러운 미국인들의 사기를 꺾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1941년 6월, 그는 행정명령 8802를 발령하고 공정고용실천위원회를 설립하여 인종이나 출신 국가에 따른 차별을 금지했는데, 이는 흑인, 유대인 및 기타 소수 민족 보호에도 기여했다.[111] 루스벨트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 체스터 W. 니미츠 제독, 칼 앤드루 스파츠 장군 등 독일계 미국인들을 전쟁 지휘부의 핵심 요직에 임명했다. 또한 1940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였던 웬델 윌키(독일 이민자의 아들)를 개인 특사로 임명하기도 했다. 유창한 독일어 구사 능력을 가진 독일계 미국인들은 통역가나 스파이로 활동하며 전시 정보 수집에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112]

미국은 추축국 패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히틀러는 미국에 대해 극심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나치 독일은 미국의 참전을 선전을 통해 맹렬히 비난했다. 1944년에 제작된 악명 높은 "해방자(LIBERATORS)" 포스터는 미국을 유럽 문화를 파괴하려는 야만적이고 사악한 전쟁 기계로 묘사했다. 이 포스터는 쿠 클럭스 클랜, 아메리카 원주민 억압, 흑인 린칭 등 미국 역사의 어두운 단면들을 들추어내고, 미국의 자본주의를 비난하며 미국이 유대인에게 조종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미군 폭격기가 무고한 유럽 마을을 파괴하는 장면을 담았다. 반면, 루스벨트 행정부의 선전은 나치 정권을 표적으로 삼았을 뿐, 독일 국민 전체를 적으로 돌리거나 제1차 세계 대전 때처럼 잔혹 행위를 부각하는 방식은 피했다.[113]
제3제국이 패망한 후, 미국은 전후 독일 분할 과정에서 점령국의 일원이 되었다. 미국 점령 지역에서는 나치화 제거와 산업 시설 해체 작업이 진행되었고, 동시에 미국인들과 독일인들 간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1948년부터 1949년까지 이어진 베를린 봉쇄 사태와 이후 시행된 마셜 플랜(1948–1952)은 독일인들이 미국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다.
5. 2. 현대의 군사 협력과 갈등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에 영구적인 군사 주둔을 시작하여 냉전 기간 내내 지속했다. 1962년에는 독일에 주둔한 미군 병력이 27만 4천 명을 넘어서며 정점을 찍었으나, 21세기 초에 감축되었다.[150] 2013년에는 마지막 미군 전차가 독일에서 철수했지만,[151] 다국적 훈련 기회 부족을 이유로 이듬해 다시 배치되었다.[152] 2017년 기준으로 독일에 주둔하는 미군은 35,000명 수준이다.[150]

독일과 미국은 공동 NATO 회원국으로서 긴밀한 군사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테러와의 전쟁에서는 독일이 다른 어떤 국가보다 더 많은 병력을 지원하며 협력했다. 독일에는 미국 아프리카 사령부 본부와 미 공군 기지인 람슈타인 공군 기지 등 주요 미군 시설이 위치해 있다.[153]

그러나 양국 간에는 정책적 갈등도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이라크 자유 작전 당시 독일은 전쟁 개시에 앞서 미국이 유엔 결의안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서남아시아에서 미국의 일부 군사 활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독일 군인들은 쿠웨이트의 캠프 도하에서 군사 생화학 정화 장비를 운용했으며, 독일 해군 함정은 페르시아만에서 알 카에다의 공격으로부터 미군과 장비를 보호하기 위해 해상 항로를 확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독일 연방군 군인들은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이라크 전쟁에 투입된 독일 주둔 미군을 대신하여 남부 독일 전역의 미군 기지에서 병력 보호 임무를 맡았다.[154] 이라크에서 부상당한 미군 병사들은 라인란트팔츠에 위치한 미군 병원인 란츠튈 지역 의료 센터에서 치료를 받았다.
2019년 3월, 트럼프 행정부는 독일을 포함한 여러 동맹국에 자국 영토에 배치된 미군 병력 주둔 비용의 150%를 미국에 지불하라는 요구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되었다. 이 제안은 전문가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는데, 퇴역 장군이자 전 NATO 주재 미국 대사인 더글러스 루트는 트럼프가 "이러한 시설이 해당 국가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는 잘못된 설명을 사용하고 있다. 사실은 그 시설이 우리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고 우리가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155]
2020년 여름, 양국 관계가 악화되면서 미국 정부는 독일에 주둔하는 미군 병력을 34,500명에서 25,000명으로 대폭 감축할 계획을 발표했다.[156] 독일 정부 관계자들은 이 조치를 "용납할 수 없다"고 비난하며 당시 미독 관계가 "복잡하다"고 평가했다.[157] 트럼프 대통령은 감축 이유에 대해 "독일을 보호하기 위해 거기에 있는 것"이며 "독일이 그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청구서를 지불하지 않기 때문에 병력을 줄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158] 2020년 8월 구체화된 계획은 11,900명의 병력을 독일에서 철수시켜 미국으로 복귀시킨 후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 재배치하는 것이었으며, 이 이동에는 수십억 달러의 비용이 들 것으로 추산되었다.[159] 그러나 2021년 2월, 새로 출범한 바이든 행정부는 전임 행정부가 추진했던 병력 철수 계획을 전 세계 미군 배치에 대한 재검토를 위해 보류하기로 결정했다.[160]
2024년 7월, 바이든 행정부는 2026년부터 탄도 미사일을 독일에 배치할 의향을 밝혔다.[161] 배치될 무기에는 SM-6 및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 그리고 극초음속 무기가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다.[163] 미국의 이러한 결정은 1979년 서유럽에 퍼싱 II 미사일을 배치했던 것과 비교되기도 하며,[162][163] 일각에서는 이 조치가 새로운 군비 경쟁을 촉발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164]
한편, 독일 내에서의 미국 정보 활동 역시 양국 관계의 주요 쟁점 중 하나이다. 철의 장막이 독일을 가로지르던 냉전 시대부터 분단된 독일은 미국의 간첩 활동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미국 정보기관은 서독 정치를 감시하는 동시에 동구권에 대한 첩보 및 선전 활동을 수행했으며, CIA 등은 서독의 BND와 긴밀히 협력했다. 독일 통일 이후에도 이러한 정보 활동은 상당 부분 지속되었다. 2013년에는 미국의 NSA가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포함한 독일 고위 정치인들을 도청했다는 사실이 폭로되어 파문을 일으켰다.[165] 이 과정에서 CIA가 독일 정치 및 보안 기관 내부에 정보원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166] 미국은 독일 영토 내에서 독일 보안 기관보다 훨씬 강력한 감시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독일 내 여러 테러 공격이 미국 정보기관의 정보 제공으로 예방된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이로 인해 독일은 대테러 작전에서 미국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다.[167] 독일 BND 역시 독일 시민에 대한 대규모 감시 활동에 NSA와 협력한 것으로 알려졌다.[168]
2010년 추정에 따르면 약 120명의 CIA 요원이 외교관 신분으로 위장하여 독일에서 활동했으며, 이들은 주로 베를린의 미국 대사관과 뮌헨, 프랑크푸르트의 영사관을 거점으로 활동했다. 프랑크푸르트의 CIA 본부는 오랫동안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군이 점령했던 IG 파르벤 빌딩에 위치해 있었다.[169] 2017년 위키리크스 폭로에 따르면 프랑크푸르트 주재 미국 총영사관에는 유럽, 중동, 아프리카를 담당하는 볼트 7이라는 비밀 해킹 부대가 존재한다. 비스바덴에는 2015년에 건설된 미국 육군의 통합 정보 센터가 있으며, 이 시설은 NSA도 사용하고 있다. 이 센터는 주요 인터넷 교환 지점인 DE-CIX 근처에 위치해 있다.[170] 독일 내 미군 기지는 치외 법권 지역으로 간주되어 미국 법의 적용을 받는다.[171]
6. 경제 관계
독일과 미국의 경제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2007년 독일의 제안으로 시작된 미국과 EU 간의 대서양 횡단 경제 파트너십과 이후 설립된 대서양 횡단 경제 위원회는 양국 간 경제 협력의 기회를 넓혀주고 있다. 미국은 EU 회원국을 제외하면 독일의 가장 중요한 무역 상대국이며, 독일 역시 유럽 내에서 미국의 가장 중요한 무역 상대국이다. 미국의 상품 수입 및 수출 총액 기준으로 독일은 캐나다, 중국, 멕시코에 이어 4위를 차지하고 있다. 독일의 무역 상대국 중에서는 네덜란드, 중국, 프랑스 다음으로 미국이 4위에 해당한다. 2023년 양국 간 무역 규모는 2360억달러에 달했다.
1985 | 1990 | 1995 | 2000 | 2005 | 2010 | 2015 | 2020 | 2023 | |
---|---|---|---|---|---|---|---|---|---|
독일로의 미국 수출 | 91억달러 | 188억달러 | 224억달러 | 294억달러 | 342억달러 | 482억달러 | 500억달러 | 580억달러 | 767억달러 |
독일로부터의 미국 수입 | 202억달러 | 282억달러 | 368억달러 | 585억달러 | 848억달러 | 825억달러 | 1249억달러 | 1149억달러 | 1593억달러 |
무역 수지 | -112억달러 | -94억달러 | -144억달러 | -291억달러 | -506억달러 | -343억달러 | -749억달러 | -569억달러 | -826억달러 |
독일과 미국은 서로에게 중요한 투자 대상국이기도 하다. 2012년 말 기준으로 양국 간 투자는 총 3200억달러에 달했으며, 이 중 독일의 대미 직접 투자는 2660억달러, 미국의 대독일 직접 투자는 1210억달러 규모였다. 세부적으로 보면, 2012년 말 미국의 대독일 직접 투자는 약 1210억달러로, 전년도(약 1060억달러) 대비 14% 가까이 증가했다. 같은 기간 독일의 대미 직접 투자는 약 1990억달러로, 전년도 수준(약 2150억달러)보다는 다소 감소했다. 독일은 영국 다음으로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외국인 투자국이며, 미국은 독일 입장에서 외국인 직접 투자를 유치하는 대상 국가 중 3위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에 진출한 약 5,800개의 독일 기업은 약 924,000명의 미국인을 고용하고 있다.
2019년 미국 상원은 독일과 러시아 간의 노르트스트림 2 가스 파이프라인 완공에 참여하는 독일 또는 유럽 연합 기업에 제재를 가하겠다는 내용의 논란이 많은 법안 통과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7. 주요 외교 공관
;독일의 미국 주재 외교 공관
- 워싱턴 D.C. (대사관)[185]
- 애틀랜타 (총영사관)
- 보스턴 (총영사관)
- 시카고 (총영사관)
- 휴스턴 (총영사관)
- 로스앤젤레스 (총영사관)
- 마이애미 (총영사관)
- 뉴욕 (총영사관)
-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
;미국의 독일 주재 외교 공관
참조
[1]
웹사이트
U.S. Relations With Germany
https://www.state.go[...]
United States Department of State
2021-06-21
[2]
서적
Coming of Age: German Foreign Policy Since 1945
München
[3]
웹사이트
The 5 Largest Economies In The World And Their Growth In 2020
https://www.nasdaq.c[...]
2021-06-16
[4]
학술지
The U.S.'s "Special Relationship" is with Germany, Not Britain
https://hbr.org/2016[...]
2016-06-29
[5]
웹사이트
Germany: America's real special relationship
https://www.politico[...]
2016-06-30
[6]
서적
The German Element in the United States with Special Reference to Its Political, Moral, Social, and Educational Influence
[7]
서적
Germany and the United States, a "special Relationship?"
Harvard UP
[8]
서적
The Samoan Tangle: A Study in Anglo-German-American Relations 1878–1900
University of Queensland Press
[9]
서적
Politics of frustration: the United States in German naval planning, 1889–1941
[10]
학술지
German Fear of a Quadruple Alliance, 1904-1905
https://www.jstor.or[...]
[11]
학술지
The Abortive German-American-Chinese Entente of 1907-8
https://www.jstor.or[...]
[12]
서적
The Zimmermann telegram: intelligence, diplomacy, and America's entry into World War I
Naval Institute Press
[13]
웹사이트
United States of America
http://www.auswaerti[...]
Federal Foreign Office
2016-04-02
[14]
뉴스
Germany and the United States: Reliable Allies: But Disagreement on Russia, Global Leadership and Tarde
http://www.pewglobal[...]
Pew Research Center: Global Attitudes and Trends
2015-05-07
[15]
서적
The United States and Germany: a diplomatic history
[16]
간행물
Harvard Encyclopedia of American Ethnic Groups
https://archive.org/[...]
Harvard University Press
[17]
간행물
America and the Germans, Volume 1: An Assessment of a Three-Hundred Year History--Immigration, Language, Ethnicity
U of Pennsylvania Press
[18]
서적
German Seed in Texas Soil: Immigrant Farmers in Nineteenth-century Texas
[19]
간행물
America and the Germans, Volume 1
[20]
서적
Refugees of Revolution: The German Forty-Eighters in America
https://archive.org/[...]
[21]
서적
Trade Unions and Community: The German Working Class in New York City, 1870-1900
[22]
간행물
America and the Germans, Volume 2
[23]
웹사이트
The Hindenburg Disaster - Events of May 6, 1937
https://www.thoughtc[...]
2023-09-01
[24]
간행물
America and the Germans, Volume 2
[25]
웹사이트
Ancestry 2000 : Census 2000 Brief
https://www.census.g[...]
2016-08-27
[26]
백과사전
Transcendentalism
http://plato.stanfor[...]
[27]
서적
The Saint Louis Hegelians
Thoemmes Press
[28]
서적
Saving Schools: From Horace Mann to Virtual Learning
[29]
학술지
"The role of German Turners in American physical education."
[30]
서적
The Emergence of the American University
[31]
서적
The Classical German Concept of the University and Its Influence on Higher Education in the United States
[32]
문서
Pochmann and Schultz, pp xx–xxi.
[33]
학술지
Ideas and the arts: Germanic music in early Pennsylvania.
[34]
서적
The German Element in the United States
[35]
간행물
Theodore Thomas and the Cultivation of American Music
U of Chicago Press
[36]
간행물
"Harmonicas are... hooty, wheezy, twangy and tooty."
Smithsonian
1995
[37]
서적
America's alternative religions
https://archive.org/[...]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Albany
1995
[38]
서적
Germany from Napoleon to Bismarck
1966
[39]
문서
[40]
논문
"Frederick the Great and the American Revolution"
https://www.jstor.or[...]
American Historical Review
1904
[41]
서적
Prussian-American Relations: 1775–1871
1960
[42]
서적
Merchants and Migrations: Germans and Americans in Connection, 1776–1835
2001
[43]
서적
The United States and Germany
1985
[44]
문서
[45]
서적
Refugees of Revolution: The German Forty-Eighters in America
https://archive.org/[...]
1952
[46]
논문
"Did Abraham Lincoln Receive the Illinois German Vote?"
https://www.jstor.or[...]
Journal of the Illinois State Historical Society
1942
[47]
논문
"Civil Warfare in the Streets"
https://www.jstor.or[...]
American Scholar
2011
[48]
간행물
"Gold, Cotton and Newsprint"
Lincoln Herald
1966
[49]
문서
[50]
문서
[51]
논문
"'Cheap and Nasty': German Goods, Socialism, and the 1876 Philadelphia World Fair."
International Review of Social History
2001
[52]
논문
Public Health or Protectionism? The German-American Pork War, 1880-1891
https://www.jstor.or[...]
1989
[53]
웹사이트
"Dangerous Meat? German-American Quarrels Over Pork And Beef, 1870–1900"
https://www.ghi-dc.o[...]
Bulletin of the GHI
2010
[54]
논문
"The American-German Pork Dispute, 1879-1891."
https://www.jstor.or[...]
Journal of Modern History
1945
[55]
논문
"Pigs, Politics, and Protection: The European Boycott of American Pork, 1879-1891,"
https://www.jstor.or[...]
Agricultural History
1961
[56]
서적
The Presidency of Benjamin Harrison
1987
[57]
논문
"Public health or protectionism? The German-American pork war, 1880-1891."
https://www.jstor.or[...]
Bulletin of the History of Medicine
1989
[58]
서적
The Encyclopedia of the Spanish-American and Philippine-American Wars: A Political, Social, and Military History
https://books.google[...]
ABC-CLIO
[59]
간행물
"'An Appalling Calamity'--In the teeth of the Great Samoan Typhoon of 1889, a standoff between the German and US navies suddenly didn't matter."
Naval History Magazine
2011
[60]
서적
The Presidency of Benjamin Harrison
1987
[61]
서적
The Foreign Policy of the United States in Relation to Samoa
1933
[62]
서적
The New Empire: An Interpretation of American Expansion, 1860–1898
1963
[63]
문서
[64]
서적
The Samoan Tangle: A Study in Anglo-German-American Relations 1878–1900
2013
[65]
서적
German Naval Strategy, 1856–1888: Forerunners to Tirpitz
https://books.google[...]
Routledge
[66]
서적
Militarism in a Global Age: Naval Ambitions in Germany and the United States before World War I
https://books.google[...]
Cornell U.P.
[67]
서적
The Banana Wars: United States Intervention in the Caribbean, 1898–1934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68]
서적
Secret War in Mexico: Europe, the United States and the Mexican Revolution
1981
[69]
논문
"Catalyst for the Roosevelt Corollary: Arbitrating the 1902–1903 Venezuela Crisis and Its Impact on the Development of the Roosevelt Corollary to the Monroe Doctrine."
https://doi.org/10.1[...]
Diplomacy & Statecraft
2009
[70]
논문
"The height of the german challenge: the venezuela blockade, 1902–3."
Diplomatic History
1996
[71]
서적
From colony to superpower: U.S. foreign relations since 1776
2011
[72]
논문
Germans in Hollywood Films: The Changing Image, 1914-1939
https://muse.jhu.edu[...]
1973
[73]
간행물
The Schrippenfest Incident
2003
[74]
서적
Woodrow Wilson's right hand: the life of Colonel Edward M. House
Yale UP
2006
[75]
서적
Rich Man's War, Poor Man's Fight: Race, Class, and Power in the Rural South during the First World War
U. of North Carolina Press
[76]
서적
The United States and Germany
[77]
논문
The Role of the Zimmermann Telegram in Spurring America's Entry into the First World War
https://www.jstor.or[...]
2015
[78]
서적
The United States and Germany
1985
[79]
서적
A Diplomatic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
1980
[80]
논문
The American Reception of Salvarsan
1981
[81]
논문
What's in a name? Aspirin and 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https://www.jstor.or[...]
1987
[82]
서적
American Money and the Weimar Republic: Economics and Politics on the Eve of the Great Depression
1986
[83]
서적
Cosmopolitan finance in the 1920s: New York's emergence as an international financial centre
1999
[84]
논문
The United States and the Reconstruction of Germany in the 1920s
1976
[85]
논문
The First 'Real' Peace Settlements after the First World War: Britain, the United States and the Accords of London and Locarno, 1923–1925
2003
[86]
서적
Alanson B. Houghton: ambassador of the new era
2004
[87]
논문
Anti-Americanism within the German Right, 1917–1933
1976
[88]
논문
The Jazz Experience in Weimar Germany
1988
[89]
서적
Jazz reception in Weimar Germany: in search of a shimmy figure
1994
[90]
서적
Hollywood in Berlin: American Cinema and Weimar Germany
1994
[91]
서적
Visions of modernity: American business and the modernization of Germany
Oxford University Press
1994
[92]
논문
Weimar Music in America: Its Reception and Impact
1985
[93]
서적
Cautious crusade: Franklin D. Roosevelt, American public opinion, and the war against Nazi Germany
2001
[94]
서적
Hitler's American Friends: The Third Reich's Supporters in the United States
2018
[95]
서적
Summits : six meetings that shaped the twentieth century
https://www.worldcat[...]
Basic Books
2009
[96]
서적
Franklin D. Roosevelt and American Foreign Policy, 1932–1945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97]
간행물
How American Racism Influenced Hitler
https://www.newyorke[...]
2018-04-23
[98]
논문
The US frontier as rationale for the Nazi east? Settler colonialism and genocide in Nazi-occupied Eastern Europe and the American West
2013
[99]
서적
The Jewish Enemy: Nazi Propaganda during World War II and the Holocaust
2008
[100]
서적
American religious responses to Kristallnacht
2009
[101]
서적
The intellectual migration: Europe and America, 1930–1960
1968
[102]
논문
The Outsider As Outsider, German Intellectual Exiles In America After 1930
http://americanjewis[...]
1986
[103]
논문
The State Department, the Labor Department, and German Jewish Immigration, 1930-1940
1984
[104]
논문
After Forty Years: Notre Dame and The Review of Politics
1978
[105]
웹사이트
Hollywood 'turned a blind eye' to the Nazis, says Kelsey Grammer
https://www.independ[...]
2017-07-28
[106]
뉴스
Hollywood and Hitler: Did the studio bosses bow to Nazi wishes?
https://www.theguard[...]
2013-06-29
[107]
논문
Isolationism and German-Americans.
Journal of the Illinois State Historical Society
1964
[108]
서적
Germans
Harvard Encyclopedia of American Ethnic Groups
1980
[109]
서적
The burden of ethnicity: the German question in Chicago, 1914-1941
Garland
1990
[110]
서적
German Americans in the World Wars
K.G. Saur
1995
[111]
서적
Wartime America: The World War II Home Front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112]
웹사이트
US World War II Treatment of German Americans
http://www.traces.or[...]
Traces.org
2003-04-23
[113]
서적
Cautious crusade: Franklin D. Roosevelt, American public opinion, and the war against Nazi Germany
Oxford UP
2001
[114]
서적
When the World Seemed New: George H. W. Bush and the End of the Cold War
2018
[115]
뉴스
Together Again
https://www.nytimes.[...]
1996-03-31
[116]
서적
Destiny and Power: The American Odyssey of George Herbert Walker Bush
2015
[117]
서적
The Presidency of George Bush
2015
[118]
서적
Germany Unified and Europe Transformed: A Study in Statecraft
https://www.amazon.c[...]
1995
[119]
논문
Diasporas and American debates on German unification.
https://www.academia[...]
Journal of Transatlantic Studies
2017
[120]
뉴스
Classified Papers Prove German Warnings to Bush
http://www.spiegel.d[...]
2010-11-24
[121]
Youtube
Joschka Fischer interviewed by Gero von Boehm
https://www.youtube.[...]
[122]
논문
German anti-Americanism in context.
Journal of European Studies
2003
[123]
뉴스
U.S. spied on Merkel and other Europeans through Danish cables
https://www.reuters.[...]
2021-05-21
[124]
뉴스
Germany ends spy pact with US and UK after Snowden
https://www.bbc.co.u[...]
2013-08-02
[125]
뉴스
Merkel says U.S spying allegations are serious
https://www.reuters.[...]
2014-07-07
[126]
논문
Germany and the United States: Whither 'Partners in Leadership'?
German Politics and Society
2018
[127]
논문
Trump’s trade wars: America, China, Europe, and global disorder.
Journal of Transatlantic Studies
2020
[128]
간행물
Berlin's Balancing Act: Merkel Needs Trump-But Also Needs to Keep Her Distance.
Foreign Affairs
2017
[129]
뉴스
How a single sentence from Angela Merkel showed what Trump means to the world
http://www.cnn.com/2[...]
CNN
2017-05-29
[130]
뉴스
Trump in Brussels: 'The Germans Are Bad, Very Bad'
http://www.spiegel.d[...]
Spiegel Online
2017-05-26
[131]
뉴스
Biden: How Europeans have reacted to president's visit
https://www.bbc.com/[...]
BBC News
2021-06-15
[132]
뉴스
Germany welcomes Biden plan to halt US troop withdrawal
https://www.dw.com/e[...]
Germany Welcomes Biden plan
2021-02-05
[133]
뉴스
Germany's Merkel to visit Biden at White House on July 15
https://www.reuters.[...]
Reuters
2021-06-11
[134]
논문
Finding a new Heimat in the Wild West: Karl May and the German Western of the 1960s.
https://www.jstor.or[...]
Journal of Film and Video
1995
[135]
서적
Spaghetti Westerns: Cowboys and Europeans from Karl May to Sergio Leone
2006
[136]
논문
Elusive authenticity: The quest for the authentic Indian in German public culture.
https://www.academia[...]
Comparative Studies in Society and History
2006
[137]
웹사이트
Views of China and India Slide While UK's Ratings Climb
http://www.globescan[...]
2013-05-22
[138]
웹사이트
German Missions in the United States – Home
http://www.germany.i[...]
[139]
웹사이트
Home – Indicators Database – Pew Research Center
http://www.pewglobal[...]
2010-04-22
[140]
웹사이트
U.S.-German Relations on the Mend as New Leadership Takes Hold
https://www.pewresea[...]
2021-11-22
[141]
논문
German Views of Negro Life in the United States, 1919-1933
https://doi.org/10.2[...]
Journal of Negro History
1963
[142]
간행물
A German Bluegrass Festival: The 'Country-Boom' and Some Notes on the History of American Popular Music in West Germany.
Journal of Popular Culture
1977
[143]
간행물
When Wagner Was Verboten: The Campaign Against German Music in World War I.
New York History
1983
[144]
간행물
German anti-Americanism in context.
Journal of European Studies
2003
[145]
간행물
German foreign policy and the war on Iraq: Anti-Americanism, pacifism or emancipation?.
Security Dialogue
2005
[146]
서적
America in the eyes of the Germans: an essay on anti-Americanism
1996
[147]
간행물
German foreign policy and the war on Iraq: anti-Americanism, pacifism or emancipation?.
https://dk-media.s3.[...]
Security Dialogue
2005
[148]
뉴스
Ami go Home
https://www.economis[...]
Economist
2015-02-07
[149]
웹사이트
Jungkenn, Frederick Christian Arnold, freiherr von, 1732-1806
http://www.clements.[...]
The University of Michigan
2006-11-17
[150]
웹사이트
Trump was reportedly surprised by the number of US troops stationed in Germany and expressed interest in pulling some of them out
https://www.business[...]
2018-06-30
[151]
웹사이트
US Army's last tanks depart from Germany
http://www.stripes.c[...]
2016-04-02
[152]
웹사이트
American tanks return to Europe after brief leave
http://www.stripes.c[...]
2014-02-03
[153]
뉴스
Trump Seeks Huge Premium From Allies Hosting U.S. Troops
https://www.bloomber[...]
2019-03-08
[154]
서적
Cobra II: The Inside Story of the Invasion and Occupation of Iraq
New York
2006
[155]
뉴스
Trump Seeks Huge Premium From Allies Hosting U.S. Troops
https://www.bloomber[...]
2019-03-08
[156]
웹사이트
Trump orders massive cut to US troop numbers in Germany: report
https://www.airforce[...]
2020-06-07
[157]
뉴스
U.S. decision to withdraw troops from Germany "unacceptable" - Merkel ally
https://www.reuters.[...]
2020-06-08
[158]
뉴스
US to pull 12,000 troops out of Germany as Trump blasts 'delinquent' Berlin
https://www.theguard[...]
The Guardian
2020-07-29
[159]
웹사이트
Trump's planned troop pullout from Germany has many military holes
https://www.cnn.com/[...]
2020-08-25
[160]
뉴스
Biden Freezes Trump's Withdrawal of 12,000 Troops From Germany
https://www.nytimes.[...]
2021-02-04
[161]
뉴스
A new arms race in Europe? US long-range weapons in Germany
https://www.dw.com/e[...]
2024-07-13
[162]
뉴스
Russia says US missiles in Germany signal return of Cold War
https://www.aljazeer[...]
2024-07-11
[163]
뉴스
Putin warns US against deploying long-range missiles in Germany
https://www.theguard[...]
2024-07-28
[164]
뉴스
Germany split on US stationing long-range cruise missiles
https://www.dw.com/e[...]
2024-07-11
[165]
웹사이트
Neue NSA-Enthüllungen - Lausch angriff auf 320 wichtige Deutsche
https://www.bild.de/[...]
2024-07-05
[166]
웹사이트
Medien: Mehr als ein Dutzend Spione in Ministerien
https://www.faz.net/[...]
2024-07-05
[167]
웹사이트
Warum deutsche Geheimdienste so abhängig von den USA sind
https://www.prosiebe[...]
2024-07-09
[168]
뉴스
BND-Spionageaffäre: BND liefert NSA 1,3 Milliarden Metadaten – jeden Monat
https://www.zeit.de/[...]
2024-07-13
[169]
웹사이트
Undercover in der Bundesrepublik
https://www.sueddeut[...]
2024-07-05
[170]
웹사이트
Wiesbadener Kurier - Wiesbaden: Weiter Unklarheit über NSA-Abhörzentr…
https://archive.toda[...]
2024-07-05
[171]
웹사이트
US-Spionage auf deutschem Boden ist vollkommen legal
https://deutsche-wir[...]
2024-07-09
[172]
서적
The American Economy from Roosevelt to Trump
Palgrave Macmillan
2018
[173]
웹사이트
Trade in Goods with Germany
https://www.census.g[...]
2024-07-13
[174]
웹사이트
Deutsche Unternehmen: Motor für Investitionen und gut bezahlte Arbeitsplätze in den USA
https://www.bmwk.de/[...]
[175]
웹사이트
Sen. Cruz: ‘The Administration Needs to Immediately Begin Implementing These Sanctions’ on Nord Stream 2 Pipe-Laying Vessels
https://www.cruz.sen[...]
U.S. Senator Ted Cruz
2019-12-12
[176]
뉴스
US Senate approves Nord Stream 2 Russia-Germany pipeline sanctions
https://www.dw.com/e[...]
Deutsche Welle
2020-03-02
[177]
웹사이트
Histories of the National Mall - German-American Friendship Garden
http://mallhistory.o[...]
1983-10-05
[178]
웹사이트
German Missions in the United States - the German-American Friendship Garden webapp
http://www.germany.i[...]
2018-10-29
[179]
간행물
The scientific exodus from Nazi Germany
https://physicstoday[...]
Physics Today
2018-09-26
[180]
간행물
The Forgotten Women Scientists Who Fled the Holocaust for the United States
https://www.smithson[...]
Smithsonianmag
2017-11-09
[181]
서적
Operation Paperclip : the secret intelligence program to bring Nazi scientists to America
Little, Brown and Company
[182]
웹사이트
Joint Intelligence Objectives Agency
https://www.archives[...]
U.S.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2008-10-09
[183]
서적
Von Braun: Dreamer of Space, Engineer of War
https://books.google[...]
Random House Digital, Inc.
[184]
논문
Science and Technology Agreements as Tools for Science Diplomacy
http://www.sciencedi[...]
2012-12-10
[185]
웹사이트
Embassy of Germany in Washington, D.C.
https://www.germany.[...]
[186]
웹사이트
Embassy of the United States in Berlin
https://de.usembassy[...]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