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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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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은 1392년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건국한 왕조이다. 조선 전기는 개국과 왕자의 난을 거쳐 태종의 왕권 강화, 세종의 문화 융성, 세조의 왕위 찬탈과 제도 정비, 성종의 경국대전 완성으로 이어졌다. 조선 중기에는 훈구와 사림의 대립, 연산군의 폭정과 중종반정, 사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으로 인한 혼란을 겪었다. 조선 후기에는 붕당 정치의 변질과 환국,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 사회 변동과 민란, 세도 정치와 외세의 침투를 겪으며 쇠퇴했다. 19세기 말, 개항 이후 열강의 침략과 외세의 간섭 속에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 농민 운동 등이 일어났으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며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어 1910년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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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
지도 정보
기본 정보
국호조선 (朝鮮)
다른 이름대조선국(大朝鮮國)
조선왕국(朝鮮王國)
이조(李朝)
수도한성
공용어한국어
종교유교
불교
도교
무속신앙
통치 체제군주제
역사
건국1392년
멸망1897년
주요 사건조선 건국 (1392년)
임진왜란 (1592년 ~ 1598년)
병자호란 (1636년 ~ 1637년)
강화도 조약 (1876년)
갑오개혁 (1894년 ~ 1896년)
대한제국 선포 (1897년)
정치
정치 체제군주제
국왕조선 왕 목록 참고
관직조선 관직 목록 참고
사회
계급양반, 중인, 상민, 천민
경제
화폐엽전
주요 산업농업
상업
수공업
문화
문자한자, 한글
주요 문화유산조선왕조실록
훈민정음
경복궁
기타
국가 코드KR (대한민국)
관련 국가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 조선 전기

조선 전기는 1392년 이성계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면서 시작되었다.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아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2] 초기에는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태종은 사병을 혁파하고 조세 및 호적 제도를 개혁했으며, 의정부를 설치하고 왕실 외척과 공신 세력을 숙청하여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다.[3]

세종대왕은 학문, 군사, 과학, 문화 등 다방면에서 업적을 남겨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4군 6진 개척으로 국경선을 확정하고, 한글을 창제하여 백성들의 문자 생활을 가능하게 했다.[3] 세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육조 직계제를 부활시키고, 집현전을 폐지했다.[3] 성종경국대전을 완성하여 조선 사회의 기본 통치 방향과 이념을 제시하고, 사림파를 등용하여 훈구파를 견제하며 통치 체제를 확립했다.[3]

2. 1. 개국과 왕자의 난 (1392년 ~ 1400년)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1392년 음력 7월 17일 고려 공양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조선을 개국했다.[2] 1393년 음력 2월 15일에는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바꾸고, 1394년 음력 1월에는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태조는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고, 명나라조공·회사 형식의 무역을 하는 등 조선의 기틀을 다졌다.

태조의 초상화


태조는 막내 아들 의안대군 방석을 왕세자로 삼았으나, 개국 공신이었던 다섯째 아들 정안대군 이방원은 이에 불만을 품고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2] 이방원은 정도전과 그의 일파, 왕세자 방석 등을 살해하고, 둘째 형 영안대군 이방과를 왕세자로 만들었다. 그해 음력 9월, 태조는 이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이방과는 정종이 되었다.

1400년, 왕위에 야심을 품은 회안대군 방간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나, 이방원의 군대에 패하여 유배되었다.[2] 이 사건을 계기로 정종은 이방원을 왕세자로 삼고, 음력 11월에 이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방원은 태종이 되었다.

2. 2. 제도의 정비와 문화 융성 (1400년 ~ 15세기 말)

태종은 두 차례의 왕자의 난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오른 후 왕권 강화와 임금 중심의 통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병을 혁파하고 양전 사업과 호구 조사를 통해 조세 및 호적 제도를 개혁했다. 도평의사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설치했으며, 왕실 외척과 공신 세력을 숙청하여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다. 또한 언론 기관인 사간원을 독립시켜 신하들을 견제하게 했다.[3]

태종은 국새를 넘겨주기를 주저하는 아버지에 맞서 자신의 통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즉위 후 첫 조치로 정부 고위층과 귀족들의 사병 유지 특권을 폐지하여, 대규모 반란 가능성을 차단하고 국군의 병력을 증강시켰다. 또한 토지 소유에 대한 세금 부과 및 국가 백성 기록 관련 법률을 개정했다. 1405년 토지 소유 재조사를 통해 은닉된 토지를 발견하여 국가 수입을 두 배로 늘렸다. 1413년에는 최초의 인구 조사를 실시하여 모든 한국 남성의 신상 정보를 기록하게 했다. 16세 이상 남성은 신분과 관계없이 신상 정보가 새겨진 목패를 휴대해야 했는데, 이는 주민등록 및 사회보장 제도의 전신으로 여겨지며, 남성들의 병역 회피 방지에도 효과적이었다.[3]

1399년(정종 2년) 태종은 고려 말기 권력을 독점했던 도평의사사를 폐지하고 조선의 의정부를 설립했다. 의정부의 결정은 왕의 승인을 받아야 효력을 갖도록 하여 왕권을 강화했다. 또한 신문고를 설치하여 백성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사건을 심리하게 했다.[3]

근정전 (어좌가 있는 전당)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대왕은 학문, 군사, 과학, 문화 등 다방면에서 업적을 남겼다. 주자학을 국가 이데올로기로 정착시켰고, 면화 보급을 장려했다. 4군 6진 개척으로 국경선을 확정하고, 화포 제작 및 조선 기술 발전을 통해 왜구의 약탈을 방지했다. 궁중 안에 집현전을 설치하여 학문을 진흥시켰으며, 한글을 창제하고 측우기와 금속활자를 개량하고 아악을 정리했다. 개량된 금속활자로 다양한 책을 간행하고, 의서 편찬(《향약집성방》)을 통해 의료 관계 개선을 이루었다.[3]

1418년 태종은 퇴위하고, 세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태종은 1422년 사망할 때까지 군사 문제 등 조정의 특정 권한을 유지했다. 세종은 1419년 5월 기해동정을 통해 쓰시마의 일본 해적을 소탕했다. 1443년 계해약조를 체결하여 다이묘에게 공물을 받는 대가로 조선과 무역할 권리를 부여했다.[3][4][5][6]

북쪽 국경에서는 여진족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4군 6진을 설치했다. 1433년 김종서(김종서|金宗瑞한국어)를 파병하여 여진족을 토벌하고, 현재의 북한과 중국 국경 부근까지 영토를 확장했다.[7] 세종은 자연 과학, 농업, 문학, 한의학 분야의 기술 발전을 이루었으며, 1443년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그 이전에는 한자한문을 사용했으나, 20세기 후반에 점차 한글 사용으로 전환되었다.[3]

세종의 맏아들 문종은 짧은 재위 후 서거하고, 아들 단종이 왕위를 이었으나,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세조는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육조 직계제를 부활시켜 왕권을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사육신 등 많은 신하가 숙청되고 집현전이 폐지되었다. 세조는 태종처럼 신하의 권력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호패법을 복원하고,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을 편찬했다.[3]

세조의 손자인 성종은 개국 이후의 문물제도를 정비했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유학을 장려하고 홍문관을 설치하여 집현전의 기능을 계승했다. 수많은 역사책을 편찬하고, 《경국대전》 편찬을 완료하여 조선 사회의 기본 통치 방향과 이념을 제시했다. 또한 영남의 사림파를 등용하여 훈구파를 견제하여, 조선 왕조의 통치 체제를 확립했다.[3]

3. 조선 중기

조선 시대가 흐르면서 여러 제도에 문제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지배 계층의 경제적 기반이었던 토지 제도가 문란해지면서 훈구 재상들이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는 토지 분배 혜택을 받지 못한 신진 사류들의 불만을 야기했고, 여러 차례의 사화라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신진 사류들이 빈번하게 화를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지방에서 학문에만 전념했다. 그러나 선조 때부터 이들을 등용하기 시작하여 결국 사류들이 승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류들 사이에 다시 대립이 발생하여 자신들의 세력만이 정권을 잡기 위해 대대로 싸우는 당쟁이 시작되었다. 지방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서원은 넓은 토지를 소유하며 지방 세력의 중심이 되었고, 끈질긴 당쟁의 기반이 되어 심각한 폐단을 야기했다.

3. 1. 훈구와 사림의 대립 (15세기 말 ~ 16세기)

연산군의 폭정과 중종반정으로 훈구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 사림 세력은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림은 잦은 사화로 인해 피해를 입고 낙향하여 학문에 열중하기도 했다. 선조 대에 이르러 사림이 등용되면서 정권을 장악했지만, 사림 내부의 대립으로 당쟁이 시작되었다. 이는 서원이 지방 세력의 중심이 되고 당쟁의 기반이 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1]

양반 관리들은 과전, 공신전, 별사전 등을 통해 토지를 세습하고, 매입, 겸병, 개간 등으로 소유지를 확대했다. 특히 비옥한 삼남 지방의 공전을 침식하며 농장을 확대했고, 직전법 폐지 이후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유망하게 되었고, 이는 사회 문제로 이어졌다.[2]

양반 관리들의 사치를 위한 특산물과 수공업 제품의 공납, 진상은 농민들에게 큰 고통이었다. 방납의 폐단까지 더해져 농민들의 고통은 극심해졌다. 이이는 이러한 폐단을 개혁하기 위해 수미법을 주장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3] 환곡 제도 역시 농민 구휼 정책에서 변질되어 고리대로 변질되었다.[4]

군역은 신역의 포납화 경향을 촉진하여 제도를 해체시켰다. 군역 대가로 바치는 포는 인두세처럼 변질되었고, 그 가치는 절하되어 양인들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었다. 이로 인해 농민들의 생활은 불안정해졌고, 유민이 증가하면서 농촌은 황폐해졌다. 각지에는 도적이 횡행했으며, 대표적인 인물이 임꺽정이었다.[5]

1506년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왕권 안정을 위해 조광조사림파를 등용하여 유교적 개혁 정치를 실시했다. 그러나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은 훈구 세력의 반발을 샀고, 중종 역시 싫증을 내게 되었다. 조광조의 반정 공신 명부 정리 작업으로 훈구파의 위기감이 커지자, 1519년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이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들을 실각시키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기묘사화). 이후 외척 세력이 등장하여 정권 다툼이 이어졌다.[6]

1545년 명종 즉위 후 문정왕후수렴청정 기간 동안, 파평 윤씨 일가 간의 당쟁이 극에 달했다. 세자를 옹호하는 대윤과 경원대군을 옹호하는 소윤의 대립은 을사사화로 이어져 대윤 세력이 숙청되었다. 이후 윤원형의 세력이 조정을 장악하고, 문정왕후는 불교 중흥 정책을 펼쳤다. 1553년 수렴청정이 끝났으나, 문정왕후의 정치 간섭은 계속되었고, 명종은 문정왕후 사후까지 제대로 된 친정을 펼치지 못했다. 1565년 문정왕후 사후 정치는 안정을 되찾았으나, 이미 조정은 부패한 상태였다. 명종 역시 2년 만에 사망했다.[7]

1567년 즉위한 선조이황, 이이 등 사림을 대거 중용하고, 조광조를 비롯한 유학자들을 복권시키고 훈구 대신들을 단죄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사림은 김효원을 지지하는 동인과 심의겸을 지지하는 서인으로 분열되어 붕당이 형성되었다. 선조는 특정 세력의 성장을 견제하여 정국 교체가 잦았다.[8]

사림들은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발전했으나, 전랑직을 둘러싼 심의겸김효원의 대립으로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되었다. 1589년 기축옥사는 동인 정여립의 모반 혐의 사건으로, 서인 정철이 조사를 맡아 동인들을 숙청했다. 이 과정에서 천 명에 달하는 동인들이 죽거나 유배되었다.[9]

3. 2.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16세기 말 ~ 17세기)

1592년 일본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0만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는데, 이를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전쟁 준비가 미흡했던 조선군은 조총 부대를 앞세운 일본군에 크게 패하여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대파하여 보급을 끊었고,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의병과 명나라의 지원으로 조선군은 7년 만에 일본군을 몰아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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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국토를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청나라와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쳤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면서 명나라와의 친선 정책을 펼쳤고, 이에 자극받은 청나라는 1627년(정묘호란)과 1636년(병자호란)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략하였다. 조선은 이 전쟁에서 패하여 청나라를 대국으로 섬기게 되었다.

전란과 붕당이 심해지는 와중에도, 의학자 허준은 《동의보감》을 저술하여 다양한 약재와 치료법을 소개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효종은 송시열, 이완 등 주전파를 중용하여 북벌을 준비했으나, 1659년 효종의 서거로 사실상 중단되었다. 이후 북벌론은 서인들의 집권 유지 수단으로 변질되었지만, 민심 수습과 국방력 강화에는 기여하였다. 그러나 외부 세계와의 고립을 초래하여 조선 사회의 낙후를 가속화하였다는 평가도 받는다.

반면, 청나라가 중국 대륙을 장악하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조선에서는 청나라의 이로운 것을 배우자는 북학론이 대두되었다.

4. 조선 후기

병자호란 이후 효종은 청나라에 대한 복수심으로 송시열, 이완 등과 함께 북벌론을 추진했다. 군대 양성, 성곽 수리 등 북벌을 준비했으나, 1659년 효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계획은 중단되었다.[12] 효종 사후에도 남인을 중심으로 북벌론이 제기되었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실행되지 못했다.

북벌론은 서인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고 남인들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변질되기도 했지만, 민심 수습과 국방력 강화에 기여했다. 그러나 외부 세계와의 고립을 초래하여 조선 사회의 낙후를 가속화했다는 비판도 있다.

한편, 중국 대륙을 장악한 청나라는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문화 국가로 발전했다. 이에 조선에서는 청나라를 무조건 배척하기보다는 이로운 점을 배우자는 북학론이 대두되었다.

4. 1. 붕당 정치의 변질과 환국 (17세기 ~ 18세기)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은 지주제를 기반으로 하여 개혁에 한계가 있었고, 남인의 도전을 받았다. 특히 현종의 스승이었던 윤선도는 남인의 지위를 높이는 역할을 했다. 남인은 서인의 개혁과 북벌론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예송 논쟁을 일으켰다. 예송은 효종과 인선왕후의 국상에서 자의왕대비의 복제 문제를 둘러싼 논쟁으로, 효종을 적통으로 보느냐의 문제였다. 1차 예송(1659년)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2차 예송(1674년)에서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남인의 정치적 지위가 높아졌다.[12]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붕당 간 대립이 심화되었다. 서인은 남인을 완전히 몰아내려는 노론과 남인과의 화해를 주장하는 소론으로 분열되었고, 이들의 대립으로 정국이 불안정해졌다. 이로 인해 붕당정치의 기본 원리가 무너지고, 상대 당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당전제화 경향이 나타났다. 상대 당에 대한 보복으로 사사(賜死)가 빈번했고, 왕위 계승 문제까지 정쟁의 초점이 되면서 붕당정치는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했다.

숙종은 붕당 간 대립을 이용하여 한 당파를 몰아내고 다른 당파에 정권을 위임하는 환국을 일으켜 정국을 주도했다. 숙종의 잦은 환국은 경종 때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의 대립으로 이어졌고, 경종 때에는 연잉군의 대리청정 문제로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는 17세기 후반 상품 화폐 경제 발달과 관련이 있다. 정치 집단들은 상업적 이익을 독점하려 했고, 정치적 쟁점도 군사력과 경제력 확보에 필수적인 군영 장악으로 옮겨갔다. 또한 향촌 사회에서는 지주제와 신분제의 동요로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가 어려워져 붕당 정치의 기반이 약화되었다.

영조는 즉위 후 당쟁을 타파하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했다. 탕평책은 편을 가르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정치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를 등용하고, 쌍거호대(雙擧互對)를 실시하여 탕평책을 실천했다.

영조의 탕평정치는 정조에게 이어졌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시파벽파 간의 갈등을 경험한 정조는 탕평정치를 더욱 발전시켰다. 정조는 대신들이 정승을 고발하거나 풍문에 의거하여 탄핵하지 못하도록 하고, 인사권에 직접 개입하여 당파의 영향력을 줄였다. 또한 연좌법과 대역죄 적용 범위를 제한하고, 대신들이 당파를 지목하거나 당파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정조는 규장각을 강화하여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왕권과 정책을 뒷받침하게 했다. 또한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시행하여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들을 재교육시켰다.[17]

4. 2. 사회 변동과 민란 (18세기 ~ 19세기)

19세기에 들어와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발생하여 큰 기근을 야기했다. 지배층은 곡식에 대한 세금을 늘리고 굶주리는 농민들에게 더 많은 무상 노동을 요구하여 백성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정부 및 반지주 감정이 폭발하여 격렬한 봉기로 이어졌다. [14]

1812년 홍경래평안도 가산의 농민들을 이끌고 무장 봉기를 일으켜 수개월 동안 청천강에서 의주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점령했다. 이 봉기는 군대가 파견되어 잔혹한 초토화 작전을 벌인 후에야 진압되었다. [14] 홍경래의 난 이후에도 민란은 계속 이어져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1820년에는 전국적인 수해와 이듬해 콜레라의 만연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비참한 사태가 발생하였고, 그 뒤 수년 동안 굶주려 떠도는 백성들이 거리를 메울 정도였다.

1862년 경상도 진주의 농민들은 궁핍한 농민들의 착취에 맞서 지방 관리와 부유한 지주들에게 맞서 봉기했다.( 진주민란) 조선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최제우(1824~1864)는 1860년대에 동학 사상을 창시했고, 1862년부터 1864년까지 반정부 민병대를 조직하여 한국 남부 일부 지역을 장악하는 등 반란 및 분리주의 운동을 시작했다.[14]

이와 전후하여 천주교가 전래되었으나, 1880년대 후반까지 한국 정부에 의해 잔혹하게 탄압받았다.[14]

4. 3. 세도 정치와 외세의 침투 (19세기)

1800년 정조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어린 아들 순조가 즉위하면서,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이 정권을 장악하여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이후 헌종, 철종 3대에 걸쳐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외척 세력의 세도 정치가 60여 년 동안 이어졌다.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으로 잠시 주춤했던 당쟁과 일당독재체제는 어린 임금들이 연달아 즉위하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로 변질되었다. 이는 선조 이후 조선 정치권력의 기본 구조였던 붕당정치가 완전히 붕괴되었음을 의미했다.

순조 때 정권을 잡았던 안동 김씨 세력은 헌종 즉위 후 풍양 조씨에게 잠시 권력을 내주었으나, 철종 즉위 후 다시 정권을 잡아 세도를 떨쳤다. 60년간 이어진 세도정치의 영향으로 왕권은 약화되었고, 백성들은 물론 왕족들마저도 안동 김씨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러한 기형적인 정치 형태는 삼정(三政)의 문란 등 온갖 부정부패를 야기했다.

외척들의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 혼란 속에서 홍경래의 난(순조), 진주민란(철종) 등 민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몰락한 양반 홍경래의 지도하에 몰락한 농민들과 영세농들이 참가한 홍경래의 난은 한때 청천강에서 의주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장악했으나 4개월 만에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홍경래의 난 이후에도 민란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그럼에도 세도 정권의 탐학과 횡포는 심해져 갔고, 재난과 질병이 거듭되었다. 1820년 전국적인 수해와 이듬해 콜레라 만연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비참한 사태가 발생하였고, 이후 수년 동안 계속되어 굶주린 백성들이 거리를 메울 정도였다.

이와 전후하여 천주교(天主敎)가 전래하였으나 박해를 당하였다.

흥선대원군


철종의 뒤를 이어 흥선군 이하응의 어린 둘째 아들이 순조의 양자가 되어 왕위에 올라 고종이 되었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왕권 회복과 국가 위기 극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정권을 잡자마자 세도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중들의 원망을 사던 조세 제도를 개정하였다. 환곡 제도를 사창제로 전환시키고, 양반에게까지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려 노력하였다. 또한 붕당의 온상으로 여겨지던 사액서원을 제외한 서원들을 대부분 철폐하였으나 유생들의 불만을 샀다.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비변사를 폐지 수준으로 축소시켜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회복시켰으며, 대전회통을 편찬하여 법전을 재정비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왕권 강화를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하는 데 재정을 투입하였다. 경복궁 중건 외에도 의정부, 종묘, 종친부, 육조 이하 각 관서 및 도성, 북한산성 수축도 함께 이루어져 서울이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으나, 수많은 백성들이 세금, 강제 노동, 당백전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에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흥선대원군이 로마 가톨릭을 탄압하면서 프랑스인 신부들을 처형한 것을 구실로 1866년 프랑스가 군대를 파견해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프랑스는 조선에 사과, 손해 배상, 통상을 요구하였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려 하였으나, 조선군은 여러 곳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고, 결국 프랑스군은 재물을 약탈한 뒤 철수하였다(병인양요). 5년 뒤, 미국이 조선을 침략하였다. 미국인들은 1866년 미국 상인이 대동강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배가 불에 탄 사건을 추궁하고 사과와 통상 교섭을 요구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이들의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군은 강화도를 공격하였고, 조선군의 저항에 못 이겨 결국 물러갔다(신미양요). 미국과의 전쟁 후 ‘서양 오랑캐가 쳐들어왔는데, 싸우지 않으면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화친해야 하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넘기는 것’이라 적힌 척화비(斥和碑)가 전국 각지에 세워졌다. 이후 강력한 쇄국 정책으로 서양과의 수교를 단호히 거부하여 흥선대원군의 집권 시절에는 외세가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이러한 정책은 전통적인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여 국가 기강을 바로잡고 민생을 안정시킴과 동시에 외세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저지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전통 체제 안의 개혁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문호 개방을 늦추는 결과를 가져왔다.

1873년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면서 10년간 정권을 잡고 있던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명성황후를 필두로 한 여흥 민씨 정권이 들어섰다. 통상 개화론자들이 대두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1875년 일본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에게 문호를 개방하라며 압박했다. 조선에서는 찬반 양론이 엇갈렸으나 결국 개항 찬성론자들의 입지가 강화되어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하였다. 고종은 일본에 파견한 수신사 김홍집이 귀국할 때 가져온 《사의조선책략》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조선 조정은 부국강병을 목표로 개화파 인물을 등용하여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청나라에 영선사를 파견하였다.

조정에서는 개화정책 전담 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두었고, 군사제도를 개혁하여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였다. 1880년 미국과 국교를 열었으며,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이들과 맺은 조약들은 모두 치외 법권을 규정하고 국내 산업에 대한 보호 조처를 거의 취할 수 없게 규정된 불평등 조약들이었다.

개화정책에 대하여 보수적인 유생층은 성리학적 전통질서를 지키고 외세를 배척하자는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외세의 침략을 막으려는 반외세 자주 운동이었지만 전통적인 사회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여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진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유생층 가운데서도 일부 혁신적 인사들은 유교 문화를 계승하면서 서양의 물질 문명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자는 동도서기론을 주장하며 개화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18]

4. 4. 개화와 멸망 (19세기 말 ~ 20세기 초)

1873년 음력 11월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면서 10년간 정권을 쥐고 있던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명성황후를 필두로 한 여흥 민씨 정권이 들어섰다. 이에 따라 자연스레 통상 개화론자들이 대두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1875년 음력 9월 20일 일본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에게 문호를 개방하라며 압박했고, 조선에서는 찬반 양론이 엇갈렸으나 결국 개항 찬성론자들의 입지가 강화되어 1876년 음력 2월 3일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하였다. 고종은 일본에 파견한 수신사 김홍집이 귀국할 때 가져온 《사의조선책략》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조선 조정은 부국강병을 목표로 개화파 인물을 등용하여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뒤이어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청나라에 영선사를 파견하였다.

조정에서는 개화정책을 전담하기 위한 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두었고, 군사제도를 개혁하여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였다. 1880년 음력 10월 11일 미국과 국교를 열었으며, 뒤이어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이들과 맺은 조약들은 모두 치외 법권을 규정하고 국내 산업에 대한 보호 조처를 거의 취할 수 없게 규정된 불평등 조약들이었다.

개화정책에 대하여 보수적인 유생층은 성리학적 전통질서를 지키고 외세를 배척하자는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외세의 침략을 막으려는 반외세 자주 운동이었지만 전통적인 사회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여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진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유생층 가운데서도 일부 혁신적 인사들은 유교 문화를 계승하면서 서양의 물질 문명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자는 동도서기론을 주장하며 개화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18]

1882년 임오군란은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일본의 후원으로 조직한 신식군대인 별기군과 구식 군인에 대한 정부의 차별 대우, 봉급미 연체와 불량미 지급에 대한 불만 및 분노로 구 훈련도감 소속의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항쟁이다. 처음에는 우발적이었으나, 나중에는 대원군의 지시를 받아 민씨 정권에 대항하면서 일본 세력의 배척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이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한 정변이다. 그러나 이 정변은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만에 무너졌으며,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조정의 개화 정책 추진과 유생층의 위정 척사 운동은 점점 격화되는 열강의 침략 경쟁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근대 문물의 수용과 배상금 지불 등으로 국가 재정이 궁핍해져 농민에 대한 수탈이 심해졌고,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농촌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이 팽배해졌고, 정치·사회에 대한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들 사이에 사회 변혁의 욕구가 높아졌다.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한 동학은 당시 농민들의 변혁 요구에 맞는 것이었고, 농민들은 동학의 조직을 통하여 대규모의 세력을 모을 수 있었다.

1894년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에서 봉기한 동학 농민군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을 내세우고 전라도 일대를 공략한 다음 전주를 점령하였다. 농민군은 조정에 폐정 개혁 12개조를 건의하고, 산발적으로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며 개혁을 실천해나갔다. 그러나 조정의 개혁이 부진하고 일본의 침략과 내정 간섭이 강화되자 농민군은 외세를 몰아낼 목적으로 다시 봉기하여 서울로 북상하였다. 먼저 공주를 점령하려 한 농민군은 우금치에서 근대 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하고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동학 농민 운동은 좌절되었다.[19]

한편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였다는 명분으로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고, 급기야 서로 무력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청일전쟁). 그 와중에 일본은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협박하여 친일적 개혁을 이루게 되는데, 이른바 갑오개혁이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지배권을 빼앗고, 요동반도를 할양받아 만주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였다(→시모노세키 조약). 이에 불안을 느낀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한 삼국간섭을 시도하였다. 고종은 이에 미국, 러시아 등과 가까운 김윤식, 이범진 등으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반일정책을 구체화하였다.

삼국간섭을 받은 일본은 요동 반도를 잃었고, 남하하는 러시아는 조선에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흥선대원군을 옹립하여 조선에 친일 정권을 세우고자 일본군 수비대와 대륙낭인 등을 집합시켜 몰래 경복궁에 난입시킨 후 친러시아파인 명성황후를 암살하였다(→을미사변). 1895년 일본의 강요에 따라 김홍집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조정 내각이 구성된다. 이때 김홍집 내각의 개혁 정책 중 하나인 단발령은 전국에 있는 유생들과 백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미국인과 러시아인에게 목격되어 국제 문제가 되었다.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을 받고 일본 외무성은 명성황후 암살의 주동자인 미우라 공사 등을 소환하여 재판과 군법회의에 회부하였지만 증거 불충분임을 판시하고 전원 무죄를 선고하여 석방시켰다. 이에 조선에서는 반일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었고,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선비들의 주도 아래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여 친일파와 일본의 상인 및 어인 등을 공격하고 일본군 수비대와 각지에서 교전하였다. 을미의병은 유인석, 김복한, 기우만, 이강년 등이 주도하였다. 일본군이 의병 토벌로 서울을 비우게 되자 고종은 1896년 2월 11일에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고종은 1897년덕수궁으로 환궁하고 몇달 후 대한제국을 선포함으로써 조선이란 국호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러일전쟁 당시의 정치풍자 그림엽서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하고 연호를 광무(光武), 왕을 황제(皇帝)라 일컬어 표면으로는 독립국가로서 새 출발을 하는 듯하였으나, 러시아 제국 등의 외세(外勢)에 의존하려는 태도는 여전하였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는 각종의 정당·사회·교육단체 및 언론기관 등이 생겨 신문화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으나 기울어지기 시작한 나라의 정세는 어쩔 수가 없었다. 러일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은 한반도에서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을 밀어내고 대한제국에서의 이권을 차례로 독점하고, 1905년에는 을사늑약이, 1910년에 한일 병합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후에 대한제국이 대한민국으로 전환하게 된다.

5. 멸망 원인

조선 선조 이후 붕당정치는 정조 사후 붕괴되었다. 정조가 갑작스럽게 서거하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순조의 장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안동 김씨 집안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20] 이후 헌종, 철종 3대에 걸쳐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외척 세력의 세도 정치가 6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들은 왕권을 약화시키고 삼정(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의 문란을 야기하는 등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적 혼란은 홍경래의 난, 진주민란 등 민란을 야기했다. 1820년에는 전국적인 수해와 콜레라 만연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등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철종의 뒤를 이어 순조의 양자로 왕위에 오른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왕권 회복과 국가 위기 극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세도 정권을 무너뜨리고 조세 제도를 개정하였으며, 사창제와 호포제를 실시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또한 붕당의 온상으로 인식되어 온 서원들을 철폐하고, 비변사를 축소하고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회복시켰으며, 대전회통을 편찬하여 법전을 재정비하였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을 중건하는 등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백성들은 세금과 강제 노동, 당백전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에 큰 고통을 겪었다.

흥선대원군은 로마 가톨릭 탄압을 구실로 침략한 프랑스(병인양요)와 미국(신미양요)을 물리치고 척화비를 세워 쇄국 정책을 강화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조선의 문호 개방을 늦추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제는 조선의 멸망 원인으로 노론의 일당독재, 소수 문벌의 권력 독점, 부정부패 등을 지목했다. 또한, 한국의 역사학자 이정식은 이홍장의 야욕이 대한제국은 물론 청나라의 멸망 원인이라고 지적했다.[20]

6. 평가

1876년 강화도 조약을 통해 조선이 문호를 개방한 이후, 조선 조정은 부국강병을 목표로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된 김홍집이 가져온 《사의조선책략》은 고종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이에 따라 개화파 인물들이 등용되었다.[18] 조정은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는 등 군사 제도를 개혁했다. 1880년에는 미국과 국교를 맺고,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그러나 이들 국가와 맺은 조약은 대부분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국내 산업 보호 조치가 미흡한 불평등 조약이었다.[18]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보수 유생들은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며 성리학적 전통 질서 유지와 외세 배척을 주장했다. 이들은 외세 침략에 맞서 싸우는 자주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전통 사회 체제를 고수하려 했기 때문에 시대 흐름에 뒤떨어진다는 한계도 있었다. 그러나 일부 혁신적인 유생들은 유교 문화를 계승하면서 서양의 물질 문명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자는 동도서기론을 주장하며 개화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18]

참조

[1] 웹사이트 Nat'l museum on Annals of Joseon Dynasty set to open https://en.yna.co.kr[...] 2023-11-11
[2] 논문 Rethinking the Late Koryŏ in an International Context https://www.jstor.or[...] 2017
[3] 서적 Korea https://books.google[...] Routledge/Curzon 1999-09-01
[4]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04-27
[5] 웹사이트 계해약조 癸亥約條 http://100.nate.com/[...]
[6] 웹사이트 계해조약 癸亥約條 http://100.nate.com/[...]
[7] 서적 책한권으로 읽는 세종대왕실록
[8] 서적 The Imjin War. Japan's Sixteenth-Century Invasion of Korea and Attempt to Conquer China The 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 2005
[9] 서적 Samurai Invasion. Japan’s Korean War 1592-98 Cassell & Co 2002
[10] 논문 Yi Sun-shin, an Admiral Who Became a Myth 2004
[11] 간행물 宣祖實錄二十五年 (1592) 五月壬戌 (May 3) http://sillok.histor[...]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1592-05-03
[12] 문서 Lee 1984
[13] 문서 Lee 1984
[14] 서적 A Handbook of Korea Korean Overseas Culture and Information Service 1993-12-01
[15] 뉴스 Characteristics of Queen of Corea https://timesmachine[...] The New York Times 1895-11-10
[16] 뉴스 일본인 폭도가 가슴을 세 번 짓밟고 일본도로 난자했다 http://www.donga.com[...] 2002-01-01
[17] 서적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2004
[18] 서적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2004
[19] 서적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2004
[20] 서적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2006
[21] 서적 고등학교 국사 (주)두산 2004-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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