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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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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튀르키예의 역사는 구석기 시대부터 시작되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시대 유적을 포함한다. 아나톨리아는 농업의 기원지였으며, 기원전 2000년경 점토판 기록이 시작된다. 고대에는 페르시아, 헬레니즘 제국, 로마의 지배를 받았고, 중세에는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이 번성했으나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 오스만 제국은 13세기 말 건국되어 16~17세기에 전성기를 누렸으나 쇠퇴하여, 1923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에 의해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공화국은 아타튀르크의 개혁을 통해 근대화를 추진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 시대에 미국과 동맹을 맺었다. 이후 여러 차례의 군부 쿠데타와 정치적 변동을 겪었으며, 2000년대 이후 유럽 연합 가입을 추진하는 등 현대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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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의 역사
지도
개요
아시아 소아시아와 트란스카프카시아, 1921년의 튀르키예
아시아 소아시아와 트란스카프카시아, 1921년의 튀르키예
국가튀르키예
선사 시대
아나톨리아의 선사 시대선사 시대
구석기 시대 아나톨리아기원전 500,000년 - 10,000년경
중석기 시대 아나톨리아기원전 11,000년 - 9,000년경
신석기 시대 아나톨리아기원전 8,000년 - 5,500년경
청동기 시대
트로이기원전 3000-700년
하티족기원전 2500-2000년
아카드 제국기원전 2400-2150년
루위족기원전 2300-1400년
아시리아기원전 1950-1750년
쿠사라기원전 1780-1680년
아카이아인 (호메로스)기원전 1700-1300년
키주와트나기원전 1650-1450년
히타이트기원전 1680-1220년
아르자와기원전 1500-1320년
미탄니기원전 1500-1300년
하야사-아지기원전 1500-1290년
리키아기원전 1450-350년
아수와기원전 1300-1250년
디아우에히기원전 1200-800년
신-히타이트 국가기원전 1200-800년
프리지아기원전 1200-700년
카리아기원전 1150-547년
티아나 (투와누와)기원전 1000-700년
이오니아기원전 1000-545년
우라르투기원전 859-595/585년
철기 시대
디아우에히기원전 1200-800년
신-히타이트 국가기원전 1200-800년
프리지아기원전 1200-700년
카리아기원전 1150-547년
도리스 육두정기원전 1100-560년
아이올리스기원전 1000-560년
티아나 (투와누와)기원전 1000-700년
이오니아기원전 1000-545년
우라르투기원전 859-595/585년
메디아 제국기원전 678-549년
리디아기원전 685-547년
고전 시대
고전 아나톨리아고전 아나톨리아
고전 트라키아고전 트라키아
아케메네스 제국기원전 559-331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왕국기원전 334-301년
카파도키아 왕국기원전 322-130년
안티고노스 왕조기원전 306-168년
셀레우코스 제국기원전 305-64년
프톨레마이오스 왕국기원전 305-30년
폰토스 왕국기원전 302-64년
비티니아기원전 297-74년
아탈로스 왕국기원전 282-129년
갈라티아기원전 281-64년
파르티아 제국기원전 247년 - 서기 224년
아르메니아 제국 (고대)기원전 190년 - 서기 428년
로마 공화국기원전 133-27년
콤마게네기원전 163년 - 서기 72년
고대 로마기원전 133-27년 - 서기 330년
사산 제국서기 224-651년 (아나톨리아에서 잠시)
중세 시대
중세 아나톨리아중세 아나톨리아
동로마 제국(330–1453; 1204-1261 니케아 제국으로 망명)
라시둔 칼리파국(637–656)
셀주크 제국(1037–1194)
다니슈멘드(1071–1178)
룸 술탄국(1077–1307)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1078–1375)
아나톨리아 베이국(1081–1423)
에데사 백국(1098–1150)
아르투크(1101–1409)
트라페준타 제국(1204–1461)
라틴 제국(1204–1261)
카라만(1250–1487)
일 칸국(1256–1335)
카라 코윤루(1375–1468)
아크 코윤루(1378–1501)
오스만 제국 시대
오스만 제국의 역사오스만 제국의 시대
오스만 제국의 부상(1299–1453)
오스만 제국의 고전 시대(1453–1566)
오스만 제국의 변혁(1566–1703)
오스만 구체제(1703–1789)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근대화 (1828–1908)(1789–1908)
오스만 제국의 패배와 해체 (1908–1922)(1908–1922)
튀르키예 공화국
튀르키예 공화국의 역사튀르키예의 시대
튀르키예 독립 전쟁(1919–1922)
튀르키예 대국민 의회 정부(1920–1923)
튀르키예 공화국의 일당제 시대(1923–1930)
(1930–1945)
튀르키예 공화국의 다당제 시대(1945–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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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구즈 튀르크족오구즈 튀르크족
튀르크화튀르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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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BT 역사LGBT 역사
연표
아나톨리아 역사 연표연표

2. 선사 시대

현재의 튀르키예는 현생 인류가 후기 구석기 시대부터 거주해 왔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시대 유적지를 포함하고 있다.[3][4] 괴베클리 테페는 약 12,000년이나 되었다.[3] 아나톨리아의 일부 지역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포함하며, 이는 농업의 기원이다.[5]

우르파에서 발견된 우르파 조각상


우르파 남자 조각상은 기원전 9000년경, 즉 도자기 이전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인간을 묘사한 가장 오래된 자연주의적인 실물 크기 조각상"으로 정의된다.[11]

초기 아나톨리아 농부들은 이란과 요르단 계곡의 농부들과 유전적으로 달랐으며, 유럽으로 이주하여 약 9,000년 전에 시작되었다.[8][9][10]

현생 인류는 후기 구석기 시대부터 현재의 튀르키예 지역에 거주해 왔으며, 이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시대 유적지를 포함하고 있다.[3][4] 괴베클리 테페는 기원전 1만년 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인류가 지은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며, 현재 발굴 중인 유적에서는 기원전 10000년~기원전 8000년경의 구조물이 발견되었고, 레이저 스캔을 통한 지형 측량 결과에 따르면 기원전 13000년~기원전 12000년경의 구조물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근의 카라한 테페 유적 역시 미발굴 상태이나, 동시대의 유적일 가능성이 있다.[3]

아나톨리아의 일부 지역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포함하며, 이는 농업의 기원이다.[5] 차탈회위크는 기원전 7,500~5,700년까지 사람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신석기 시대 부락이다. 기원전 7400년~기원전 6200년경, 차탈회위크 동쪽 유적에서 농경 목축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6] 이 외에도 알라자 회위크와 같은 중요한 신석기 유적들이 존재한다.[6] 신석기 시대 아나톨리아 농부들은 이란과 요르단 계곡의 농부들과 유전적으로 달랐으며,[7] 이들은 유럽으로 이주하여 약 9,000년 전에 시작되었다.[8][9][10]

기원전 9500년~기원전 9000년경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우르스 댐에 수몰된 하산케이프 호유크 유적에서는 수렵 채집인들이 정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시기의 할란 체미 유적에서는 어패류와 조류 뼈의 분석을 통해 연중 상시 거주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밝혀졌다. 기원전 8630년~기원전 6800년경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차요뉘 유적은, 수렵·채집에서 재배·가축화로의 이행을 보여준다. 또한 돼지가 최초로 가축화된 장소로 여겨진다. 기원전 8400년~기원전 8100년경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네발리 촐리 유적에서는 기원전 8300년경까지 재배와 가축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트로이의 가장 초기 층은 기원전 45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6]

인류는 후기 구석기 시대부터 현재의 터키 지역에 거주해 왔으며, 이 지역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시대 유적지들이 있다.[3][4] 괴베클리 테페는 약 12,000년 전 유적이다.[3] 아나톨리아 일부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속하며, 이곳은 농업의 기원이다.[5] 차탈회위크와 알라자 회위크는 아나톨리아의 중요한 신석기 유적지이다.[6] 신석기 시대 아나톨리아 농부들은 이란과 요르단 계곡의 농부들과 유전적으로 달랐으며,[7] 유럽으로 이주하여 약 9,000년 전부터 유럽에 농업을 전파했다.[8][9][10] 트로이의 초기 층은 기원전 45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6]

아나톨리아의 역사 기록은 기원전 2000년경 퀼테페에서 발견된 점토판에서 시작된다.[12] 이 점토판은 아시리아 무역 식민지와 관련된 기록이다.[12] 당시 아나톨리아에서는 하티어, 후리어, 히타이트어, 루위아어, 팔라어 등이 사용되었다.[13] 하티어는 아나톨리아 고유 언어로, 다른 언어와의 관련성은 알려져 있지 않다.[13][14] 후리어는 북부 시리아에서 사용되었다.[13] 히타이트어, 루위아어, 팔라어인도유럽어족아나톨리아어파에 속하며,[15] 히타이트어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 있는 인도유럽어"였다.[16] 인도유럽어의 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나톨리아가 원산지일 가능성도 제기된다.[18][19]

기원전 6200년~기원전 5200년경, 차탈회위크 서쪽 유적에서 채색 토기 등의 문화가 행해졌다.

2. 1. 구석기 시대

현재의 튀르키예는 현생 인류가 후기 구석기 시대부터 거주해 왔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시대 유적지를 포함하고 있다.[3][4] 괴베클리 테페는 약 12,000년이나 되었다.[3] 아나톨리아의 일부 지역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포함하며, 이는 농업의 기원이다.[5] 우르파 남자 조각상은 기원전 9000년경, 즉 도자기 이전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인간을 묘사한 가장 오래된 자연주의적인 실물 크기 조각상"으로 정의된다.[11] 초기 아나톨리아 농부들은 이란과 요르단 계곡의 농부들과 유전적으로 달랐으며, 유럽으로 이주하여 약 9,000년 전에 시작되었다.[8][9][10]

2. 2. 신석기 시대

현생 인류는 후기 구석기 시대부터 현재의 튀르키예 지역에 거주해 왔으며, 이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시대 유적지를 포함하고 있다.[3][4] 괴베클리 테페는 기원전 1만년 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인류가 지은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며, 현재 발굴 중인 유적에서는 기원전 10000년~기원전 8000년경의 구조물이 발견되었고, 레이저 스캔을 통한 지형 측량 결과에 따르면 기원전 13000년~기원전 12000년경의 구조물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근의 카라한 테페 유적 역시 미발굴 상태이나, 동시대의 유적일 가능성이 있다.[3] 우르파 남자 조각상은 기원전 9000년경, 즉 도자기 이전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인간을 묘사한 가장 오래된 자연주의적인 실물 크기 조각상"으로 정의된다.[11]

아나톨리아의 일부 지역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포함하며, 이는 농업의 기원이다.[5] 차탈회위크는 기원전 7,500~5,700년까지 사람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신석기 시대 부락이다. 기원전 7400년~기원전 6200년경, 차탈회위크 동쪽 유적에서 농경 목축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6] 이 외에도 알라자 회위크와 같은 중요한 신석기 유적들이 존재한다.[6] 신석기 시대 아나톨리아 농부들은 이란과 요르단 계곡의 농부들과 유전적으로 달랐으며,[7] 이들은 유럽으로 이주하여 약 9,000년 전에 시작되었다.[8][9][10]

기원전 9500년~기원전 9000년경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우르스 댐에 수몰된 하산케이프 호유크 유적에서는 수렵 채집인들이 정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시기의 할란 체미 유적에서는 어패류와 조류 뼈의 분석을 통해 연중 상시 거주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밝혀졌다. 기원전 8630년~기원전 6800년경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차요뉘 유적은, 수렵·채집에서 재배·가축화로의 이행을 보여준다. 또한 돼지가 최초로 가축화된 장소로 여겨진다. 기원전 8400년~기원전 8100년경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네발리 촐리 유적에서는 기원전 8300년경까지 재배와 가축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트로이의 가장 초기 층은 기원전 45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6]

2. 3. 금석병용 시대 (동기 시대)

인류는 후기 구석기 시대부터 현재의 터키 지역에 거주해 왔으며, 이 지역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시대 유적지들이 있다.[3][4] 괴베클리 테페는 약 12,000년 전 유적이다.[3] 아나톨리아 일부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속하며, 이곳은 농업의 기원이다.[5] 차탈회위크와 알라자 회위크는 아나톨리아의 중요한 신석기 유적지이다.[6] 신석기 시대 아나톨리아 농부들은 이란과 요르단 계곡의 농부들과 유전적으로 달랐으며,[7] 유럽으로 이주하여 약 9,000년 전부터 유럽에 농업을 전파했다.[8][9][10] 트로이의 초기 층은 기원전 45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6] 우르파 남자 조각상은 기원전 9000년경 도자기 이전 신석기 시대 유물로, "인간을 묘사한 가장 오래된 자연주의적인 실물 크기 조각상"으로 정의된다.[11]

아나톨리아의 역사 기록은 기원전 2000년경 퀼테페에서 발견된 점토판에서 시작된다.[12] 이 점토판은 아시리아 무역 식민지와 관련된 기록이다.[12] 당시 아나톨리아에서는 하티어, 후리어, 히타이트어, 루위아어, 팔라어 등이 사용되었다.[13] 하티어는 아나톨리아 고유 언어로, 다른 언어와의 관련성은 알려져 있지 않다.[13][14] 후리어는 북부 시리아에서 사용되었다.[13] 히타이트어, 루위아어, 팔라어인도유럽어족아나톨리아어파에 속하며,[15] 히타이트어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 있는 인도유럽어"였다.[16] 인도유럽어의 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나톨리아가 원산지일 가능성도 제기된다.[18][19]

기원전 6200년~기원전 5200년경, 차탈회위크 서쪽 유적에서 채색 토기 등의 문화가 행해졌다.

3. 고대

페르시아아케메네스 왕조가 기원전 6세기 중반에 이 지역의 남부를 차지했으며, 그것을 이어받은 헬레니즘 제국이 아나톨리아 반도 남부의 일부분만을 세력권 안에 편입했다. 기원전 1세기경에는 사산왕조가 아나톨리아에 진출하였고 로마가 아나톨리아를 일부에 진출하였다. 대아르메니아 왕국은 서쪽의 비잔티움 제국, 동쪽의 파르티아 제국사산 제국 사이의 완충국으로 남아 있었다. 기원후 5세기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시기 아나톨리아 지역이 비잔틴 제국의 영향권 안에 들어갔으나 아나톨리아에 사는 인종들은 셈족과 페르시아인, 인도유럽어족인들과 아랍인 등 여러 인종이 살고 있었다.

현재의 터키는 현생 인류가 후기 구석기 시대부터 거주해 왔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시대 유적지를 포함하고 있다.[3][4] 괴베클리 테페는 약 12,000년이나 되었다.[3] 아나톨리아의 일부 지역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포함하며, 이는 농업의 기원이다.[5] 다른 중요한 아나톨리아 신석기 유적지로는 차탈회위크와 알라자 회위크가 있다.[6] 신석기 시대 아나톨리아 농부들은 이란과 요르단 계곡의 농부들과 유전적으로 달랐다.[7] 이 초기 아나톨리아 농부들은 또한 유럽으로 이주하여 약 9,000년 전에 시작되었다.[8][9][10] 트로이의 가장 초기 층은 기원전 45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6] 우르파 남자 조각상은 기원전 9000년경, 즉 도자기 이전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인간을 묘사한 가장 오래된 자연주의적인 실물 크기 조각상"으로 정의된다.[11]

아나톨리아의 역사 기록은 기원전 2000년경에 오늘날의 퀼테페에서 발견된 점토판으로 시작된다.[12] 이 점토판은 아시리아 무역 식민지에 속했다.[12] 당시 아나톨리아의 언어에는 하티어, 후리어, 히타이트어, 루위아어, 팔라어 등이 있었다.[13] 하티어는 아나톨리아 고유의 언어로, 오늘날 알려진 관련성은 없다.[13][14] 후리어는 북부 시리아에서 사용되었다.[13] 히타이트어, 루위아어, 팔라어는 인도유럽어족아나톨리아어파에 속하며,[15] 히타이트어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 있는 인도유럽어"였다.[16] 인도유럽어의 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다.[17] 아나톨리아가 원산지일 수 있다[18]거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19]

하티 통치자들은 점차 히타이트 통치자들로 대체되었다.[12] 히타이트 왕국은 중앙 아나톨리아에 위치한 큰 왕국으로, 하투사가 수도였다.[12] 이 왕국은 기원전 1700년에서 1200년경 사이에 아나톨리아에서 팔라인과 루위인과 공존했다.[12] 히타이트 왕국이 붕괴되면서, 인도유럽 민족의 추가적인 물결이 동남 유럽에서 이주해 왔고, 이로 인해 전쟁이 발생했다.[20] 트라키아인은 오늘날의 터키령 트라키아에도 존재했다.[21] 트로이 전쟁이 역사적 사건에 근거한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22] 트로이의 청동기 시대 후기 층은 대부분 일리아스의 이야기와 일치한다.[23]

기원전 750년경에는 프리기아가 설립되었으며, 중심지는 고르디움과 오늘날의 카이세리였다.[24] 프리기아인은 인도유럽어를 사용했지만, 아나톨리아어보다는 그리스어에 더 가까웠다.[15] 프리기아는 아나톨리아를 신히타이트와 우라르투와 공유했다. 루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다양한 아나톨리아 신히타이트 국가의 다수를 차지했을 것이다.[25] 우라르투는 비(非) 인도유럽어를 사용했고, 수도는 반 호 주변에 있었다.[26][24] 우라르투는 종종 아시리아와 분쟁을 벌였지만,[27] 기원전 7세기에 메디아인과 스키타이인의 공격으로 멸망했다.[24] 킴메르인이 공격했을 때, 프리기아는 기원전 650년경에 멸망했다.[28] 그들은 카리아인, 리키아인, 리디아인으로 대체되었다.[28] 이 세 문화는 "아나톨리아의 하티 도시들의 고대, 토착 문화를 재확인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28]

현재 튀르키예 공화국 영토의 중심이 되는 아나톨리아 지역은 세계적으로도 역사가 오래된 땅으로, 기원전 18세기에는 인도유럽어족히타이트 왕국이 건국되었다. 철기를 처음 사용한 히타이트는 기원전 14세기에는 전성기를 맞이하지만, 기원전 1200년경에는 해양 민족에 의해 멸망했다. 기원전 9세기에는 프리기아 왕국, 기원전 7세기에는 리디아 왕국이 이 땅에 건국되었다.

기원전 6세기에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으며,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치렀다.

기원전 4세기의 다리우스 3세 때,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당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에는 디아도코이 전쟁을 거쳐 셀레우코스 제국 시리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셀레우코스 제국 시대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다섯 차례에 걸친 시리아 전쟁이 벌어졌다. 로마 공화정과의 로마-시리아 전쟁(기원전 192년-기원전 188년)에서는, 기원전 191년에는 로마에 패배하여 페르가몬 왕국 등의 소국으로 분열되었다. 로마 제국 시대에 각 소국은 속주가 되었다.

3. 1. 히타이트 제국

인도유럽어족히타이트 왕국기원전 18세기아나톨리아 지역에 건국되었다. 철기를 처음 사용한 히타이트는 기원전 14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지만, 기원전 1200년경 해양 민족에 의해 멸망했다.

3. 2. 철기 시대의 아나톨리아

히타이트 왕국철기를 처음 사용하였으며 기원전 14세기에는 전성기를 맞이하지만, 기원전 1200년경 해양 민족에 의해 멸망했다. 기원전 9세기에는 프리기아 왕국이, 기원전 7세기에는 리디아 왕국이 건국되었다.

기원전 6세기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 및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치렀다.

기원전 4세기 다리우스 3세 때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당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디아도코이 전쟁을 거쳐 셀레우코스 제국 시리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셀레우코스 제국 시대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다섯 차례에 걸친 시리아 전쟁이 벌어졌다. 로마 공화정과의 로마-시리아 전쟁(기원전 192년-기원전 188년)에서 기원전 191년에 패배하여 페르가몬 왕국 등의 소국으로 분열되었고, 로마 제국 시대에 각 소국은 속주가 되었다.

3. 3. 페르시아와 헬레니즘 시대

아나톨리아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가 기원전 6세기 중반에 이 지역의 남부를 차지하면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29] 페르시아는 아나톨리아를 여러 사트라피로 나누고, 각 사트라피는 페르시아 중앙 정부가 임명한 사트라프(총독)가 통치했다. 일부 사트라프들은 주기적으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심각한 위협은 되지 않았다.[29] 기원전 5세기에 다리우스 1세는 왕의 길을 건설하여 수사의 주요 도시와 아나톨리아 서부의 도시인 사르디스를 연결했다.[29]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초기 단계를 보여주는 지도.


아나톨리아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원전 5세기 초,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이오니아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는 이오니아 반란으로 절정에 달했다. 이 반란은 페르시아 당국에 의해 쉽게 진압되었지만,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직접적인 발단을 제공했으며, 이는 유럽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쟁 중 하나가 되었다.

아나톨리아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통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으로 끝났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원전 334년에서 330년 사이에 다리우스 3세를 격파하고 아나톨리아 전역을 점령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그의 정복지는 신뢰할 만한 여러 장군들에게 분할되었지만, 골족과 페르가몬, 폰토스 왕국,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의 다른 강력한 통치자들의 침략 위협을 끊임없이 받았다. 알렉산드로스의 영토 중 가장 컸던 셀레우코스 제국은 아나톨리아를 포함하여 로마 공화국과의 재앙적인 전쟁에 휘말렸고, 이는 테르모필레 전투와 마그네시아 전투로 절정에 달했다. 그 결과인 아파메아 조약 (기원전 188년)으로 셀레우코스는 아나톨리아에서 물러났다.[30] 전쟁에서 로마의 동맹국이었던 페르가몬 왕국과 로도스 공화국은 셀레우코스 제국이 아나톨리아에서 차지했던 영토를 받았다.

3. 4. 로마 시대

페르시아아케메네스 왕조가 기원전 6세기 중반에 이 지역의 남부를 차지했으며, 이후 헬레니즘 제국이 아나톨리아 반도 남부 일부를 세력권에 편입했다. 기원전 1세기경에는 사산 왕조가 아나톨리아에 진출하였고 로마가 아나톨리아 일부에 진출하였다. 대아르메니아 왕국은 서쪽의 비잔티움 제국, 동쪽의 파르티아 제국사산 제국 사이의 완충국 역할을 하였다. 기원후 5세기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시기 아나톨리아 지역이 비잔틴 제국의 영향권 안에 들어갔으나, 아나톨리아에는 셈족과 페르시아인, 인도유럽어족, 아랍인 등 여러 인종이 거주하고 있었다.

기원전 4세기 다리우스 3세 때,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당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에는 디아도코이 전쟁을 거쳐 셀레우코스 제국 시리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셀레우코스 제국 시대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다섯 차례에 걸친 시리아 전쟁이 벌어졌다. 로마 공화정과의 로마-시리아 전쟁(기원전 192년-기원전 188년)에서는, 기원전 191년에 로마에 패배하여 페르가몬 왕국 등의 소국으로 분열되었다. 로마 제국 시대에 각 소국은 속주가 되었다.

4. 중세

330년 비잔티움은 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의 이스탄불)로 개명되었다.[48] 395년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48] 동로마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 로마 제국 판도의 대부분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지만,[48] 602–628년 비잔틴-사산 전쟁은 제국의 자원을 고갈시켰고, 7세기의 초기 무슬림 정복 동안, 제국은 가장 부유한 속주인 이집트와 시리아를 라시둔 칼리파조에게 잃었다.[48] 이후 698년에 우마이야 왕조에 아프리카를 잃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세(555년)의 제국,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최대 영토를 회복함 (종속국은 분홍색)


원래 교회였으나, 나중에 모스크가 되었고 현재는 대 모스크인 아야 소피아는 6세기에 비잔틴 제국에 의해 이스탄불에 건설되었다.


7세기 초 황제 헤라클리우스는 사산 왕조에 승리했지만, 융성해진 이슬람 제국과 슬라브족의 침공을 받아 판도는 급격히 축소되었고, 수세에 몰렸다.[48] 또한, 서유럽 국가나 로마 가톨릭 교회와도 대립이 깊어져, 이전의 지중해 주변 전체를 지배하는 대제국에서, 당시 그리스인이 다수를 차지했던 현재의 그리스·터키 주변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로 변모했으며, 공용어도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바뀌었다. 이 시대, 현재의 터키에 해당하는 소아시아는 대 이슬람 전선으로서, 그리고 곡창 지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9-10세기가 되자, 동로마 제국은 국력을 회복하여 재공세에 나섰다. 그 결과, 11세기 초에는 발칸 반도 전역이나 북시리아, 남이탈리아, 아르메니아 등을 지배하는 대제국으로 부활한다. 그러나, 11세기 중반 무렵에는 다시 국력이 쇠퇴하고, 동쪽으로부터 튀르크계 셀주크 제국의 침공을 받게 된다.

아나톨리아에서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 제국과 패권을 다투는 동안, 555년에 동쪽의 알타이 산맥 기슭에서 돌궐이 유연을 멸망시키고 중앙 아시아에 대제국을 건설했다. 582년에 서돌궐이 분열되면서 돌궐은 동서로 나뉘었다. 7세기에 서돌궐과 사산 왕조의 전쟁 (, , 세 번째 페르소-튀르크 전쟁)에서 포로가 된 튀르크족은, 이슬람교도의 페르시아 정복으로 651년에 사산 왕조가 멸망하자, 이후 이슬람권에서 유목 생활을 하는 동시에, 맘루크로 침투해 갔다.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비잔틴 제국은 멸망했다.[48] 함락 이후 도시를 탈출한 난민들은 이탈리아와 유럽의 다른 지역에 정착하여 르네상스를 촉발하는 데 기여했다. 트레비존드 제국은 8년 후인 1461년에 수도가 오스만군에 의해 포위된 후 항복하면서 정복되었다. 마지막 비잔틴 잔여 국가인 테오도로 공국은 1475년에 오스만인들에게 정복되었다.

4. 1. 동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

330년 비잔티움은 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의 이스탄불)로 개명되었다.[48] 395년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48] 동로마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 로마 제국 판도의 대부분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지만,[48] 602–628년 비잔틴-사산 전쟁은 제국의 자원을 고갈시켰고, 7세기의 초기 무슬림 정복 동안, 제국은 가장 부유한 속주인 이집트와 시리아를 라시둔 칼리파조에게 잃었다.[48] 이후 698년에 우마이야 왕조에 아프리카를 잃었다.

7세기 초 황제 헤라클리우스는 사산 왕조에 승리했지만, 융성해진 이슬람 제국과 슬라브족의 침공을 받아 판도는 급격히 축소되었고, 수세에 몰렸다.[48] 또한, 서유럽 국가나 로마 가톨릭 교회와도 대립이 깊어져, 이전의 지중해 주변 전체를 지배하는 대제국에서, 당시 그리스인이 다수를 차지했던 현재의 그리스·터키 주변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로 변모했으며, 공용어도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바뀌었다. 이 시대, 현재의 터키에 해당하는 소아시아는 대 이슬람 전선으로서, 그리고 곡창 지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9-10세기가 되자, 동로마 제국은 국력을 회복하여 재공세에 나섰다. 그 결과, 11세기 초에는 발칸 반도 전역이나 북시리아, 남이탈리아, 아르메니아 등을 지배하는 대제국으로 부활한다. 그러나, 11세기 중반 무렵에는 다시 국력이 쇠퇴하고, 동쪽으로부터 튀르크계 셀주크 제국의 침공을 받게 된다.

아나톨리아에서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 제국과 패권을 다투는 동안, 555년에 동쪽의 알타이 산맥 기슭에서 돌궐이 유연을 멸망시키고 중앙 아시아에 대제국을 건설했다. 582년에 서돌궐이 분열되면서 돌궐은 동서로 나뉘었다. 7세기에 서돌궐과 사산 왕조의 전쟁 (, , 세 번째 페르소-튀르크 전쟁)에서 포로가 된 튀르크족은, 이슬람교도의 페르시아 정복으로 651년에 사산 왕조가 멸망하자, 이후 이슬람권에서 유목 생활을 하는 동시에, 맘루크로 침투해 갔다.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비잔틴 제국은 멸망했다.[48] 함락 이후 도시를 탈출한 난민들은 이탈리아와 유럽의 다른 지역에 정착하여 르네상스를 촉발하는 데 기여했다. 트레비존드 제국은 8년 후인 1461년에 수도가 오스만군에 의해 포위된 후 항복하면서 정복되었다. 마지막 비잔틴 잔여 국가인 테오도로 공국은 1475년에 오스만인들에게 정복되었다.

4. 2. 튀르크족의 이동과 셀주크 제국

6세기 중반 돌궐족은 중앙아시아에서 동북아시아까지 이르는 제국을 세웠고, 중국을 속국으로 만들었으며, 이후 아나톨리아에 자리를 잡게 된다.[49] 튀르크족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중국의 기록에 나타나며, 이 기록에서는 튀르크 부족이 소그드인과 실크로드를 따라 교역했다고 언급했다.[51] 11세기 중반에는 투르크의 한 집단인 오구즈족이 동쪽으로부터 침입해 들어왔다. 이 무렵 최초의 무슬림 왕조인 셀주크 제국(튀르키예어: Selçuklular ''셀주크룰라르'', 페르시아어: سلجوقيان ''살주키얀''; 아랍어 سلجوق ''살주크'', 또는 السلاجقة ''알-살라지카'')이 등장하게 된다. 셀주크 투르크멘족은 중세 시대에 힌두쿠시산맥에서 동부 아나톨리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과 중앙아시아에서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는 제국을 건설했다.[61] 아랄해 근처의 고향에서 셀주크는 먼저 호라산으로 진출한 다음 페르시아 본토로 진출하여 마침내 동부 아나톨리아를 정복했다.[61]

셀주크 제국은 투그릴 베그 (1016–1063)에 의해 1037년에 건국되었다. 투그릴은 그의 할아버지인 셀주크 베그에 의해 길러졌으며, 셀주크는 셀주크 제국과 셀주크 왕조 모두에게 자신의 이름을 부여했다. 1055년에는 투그릴 베그가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로부터 술탄의 지위를 받았다. 셀주크 제국은 수니파의 보호자로서의 정당성을 얻어, 서아시아의 이슬람권의 주도적 입장이 되었다. 셀주크는 분열된 동부 이슬람 세계의 정치 상황을 통일했으며, 제1차 및 제2차 십자군 전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문화와 언어에서 매우 페르시아화된 셀주크는 또한 투르크-페르시아 전통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심지어 페르시아 문화를 아나톨리아로 수출했다.[62]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제국이 동로마 제국을 격파하자, 아나톨리아로 진출하여 룸 술탄국이 탄생했다. 셀주크 왕조의 일원인 룸 셀주크는 아나톨리아의 지배 세력이 되었다. 룸 술탄국의 지배 하에 아나톨리아의 튀르크화, 이슬람화가 진행되었다. 1241년몽골 제국군이 카이호스로 2세의 룸 술탄국을 침공하여, 1243년의 쾨세다 전투에서 바이주가 이끄는 몽골군에게 항복하고, 훌레구가 일 칸국을 수립했다. 아나톨리아에 대한 몽골의 침략 이후 룸 셀주크는 멸망했다.[63] 셀주크 제국은 아나톨리아로 중심을 옮겼지만, 아나톨리아에는 베이릭이 난립했고, 그 혼란기는 오스만 제국에 의한 통일 (콘스탄티노플 함락)까지 200년 정도 이어졌다.

4. 3. 몽골 제국의 침입과 베이리크 시대

6세기 중반 돌궐족은 중앙아시아에서 동북아시아까지 이르는 제국을 세웠고, 중국을 속국으로 만들었으며 아나톨리아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11세기 중반, 투르크의 한 집단인 오구즈족이 동쪽으로부터 침입해 왔고, 이 무렵 최초의 무슬림 왕조인 셀주크 제국(튀르키예어: Selçuklular ''셀주크룰라르'', 페르시아어: سلجوقيان ''살주키얀''; 아랍어 سلجوق ''살주크'', 또는 السلاجقة ''알-살라지카'')이 등장하게 되었다. 셀주크 제국은 11세기 중반부터 12세기 후반까지 중앙 아시아와 중동 일대를 다스린 수니파 무슬림 왕조이며, 중앙아시아의 부족연합체에서 발흥하여 중동에서 튀르크 세력의 시조를 이루었다. 12세기 말에 수많은 토후국으로 분할되었다.

맘루크 중 튀르크계 오구즈족의 셀주크가 부족을 규합하여, 1038년에는 호라산의 지배를 확립하고 셀주크 제국을 수립했다. 1055년에는 투그릴 베그가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로부터 술탄의 지위를 받았다. 셀주크 제국은 수니파의 보호자로서의 정당성을 얻어, 서아시아의 이슬람권의 주도적 입장이 되었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제국이 동로마 제국을 격파하자, 아나톨리아로 진출하여 룸 술탄국이 탄생했다. 룸 술탄국의 지배 하에 아나톨리아의 튀르크화, 이슬람화가 진행되었다.

1241년몽골 제국군이 카이호스로 2세의 룸 술탄국을 침공하여, 1243년의 쾨세다 전투에서 바이주가 이끄는 몽골군에게 항복하고, 훌레구가 일 칸국을 수립했다. 셀주크 제국은 아나톨리아로 중심을 옮겼지만, 아나톨리아에는 베이릭이 난립했고, 그 혼란기는 오스만 제국에 의한 통일 (콘스탄티노플 함락)까지 200년 정도 이어졌다.

5. 오스만 제국

최근 연구에서는 이 시대의 발칸 반도를 "팍스 오토마니카(Pax Ottomanica)" 아래 통합과 공존, 평화를 누렸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오스만 제국의 권력과 위신은 16세기와 17세기에 정점에 달했으며, 특히 쉴레이만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그랬다. 제국은 발칸 반도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남부를 통해 중부 유럽으로 꾸준히 진격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과 자주 대립했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은 영토 분쟁으로 페르시아와 자주 전쟁을 벌였으며, 이로 인해 티무르 르네상스를 계승할 수 있었다. 해상에서 제국은 합스부르크 스페인, 베네치아 공화국 및 성 요한 기사단으로 구성된 신성 동맹과 지중해의 지배권을 놓고 경쟁했다. 인도양에서 오스만 해군은 동아시아와 서유럽 간의 해상 무역로에 대한 전통적인 독점을 방어하기 위해 포르투갈 함대와 자주 대결했다. 쉴레이만 1세 시대에는 1526년의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 왕국을 멸망시키고 정복했다. 1529년에는 제1차 빈 포위를 감행하여 신성 로마 제국에 육박했다. 1522년에는 프레베자 해전에서 기독교국 연합을 격파하고, 지중해를 "오스만의 바다"로 만들었다.

술레이만 1세 시대는 오스만 제국의 절정기로, 법제의 정비, 예니체리의 개혁과 교육 정책의 충실, 학예의 진흥 등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술탄 쉴레이만 1세(1494년 ~ 1566년)의 통치 이후로는 정치적·행정적·재정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123] 1718년경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투르크족을 축출했으며, 러시아는 1783년에 크리미아를 합병했다.

그리스(1830년, 왕국)도 영국의 지원을 받고 독립하였다. 1881년에는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가 독립하였으며(루마니아1861년부터 공국) 1908년에는 불가리아(1879년부터 오스만 제국의 자치령), 1912년에는 알바니아가 독립하였다.

19세기 말에는 세계 정세의 변화로 4세기동안 소수 민족과 소수 종교분파에게 지방자치를 용인했던 밀레트(비이슬람 종교자치제) 체제가 완전히 붕괴하면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가 시작되었고, 결국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라는 비극이 일어나고 만다.

1908년에 청년 투르크당 일파가 제국을 되살리려는 시도를 하였지만 발칸 제국에서의 군대와 영토 상실로 인한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터키는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편에 가담했다. 전후 아라비아의 여러 속주와 일부 지역을 잃었지만 격렬한 시민전쟁과 그리스와의 전쟁 결과 1923년 로잔 조약으로 지금의 국경선이 생겼고, 케말 아타튀르크를 대통령으로 한 터키 공화국이 탄생했다. 술탄제와 칼리프제는 폐지되고 아타튀르크의 지도 아래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5. 1. 제국의 성립과 발전

오스만 제국(오스만 터키어 : دولت عالیه عثمانیه ''Devlet-i Âliye-yi Osmâniyye'', 현대 터키어 : Osmanlı İmparatorluğu)은 오스만 가문을 왕가로 하여, 현재 터키의 최대 도시인 이스탄불을 수도로 정하여 서쪽의 모로코부터 동쪽의 아제르바이잔에 이르러 북쪽의 우크라이나에서 남쪽의 예멘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던 다민족 제국이다.

13세기 말, 오구즈족의 일파인 카이족이 아나톨리아 동부와 중부를 차지하고, 오스만 1세가 오스만 왕조를 세웠다. 초기에는 투르크족의 가지스(ghazis:비잔틴 제국에 대항해 싸우는 이슬람교 전사들)를 지도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14세기 후반, 오스만족은 서부 아나톨리아와 남동부 유럽의 비잔틴 영토를 차지하고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발칸 국가들을 점령했으며, 동부 아나톨리아의 투르크멘 공국을 점령했다.

아나톨리아(소아시아)의 한구석에서 건국한 소 군후국으로부터 발전한 이슬람 왕조인 오스만 왕조는 14세기 후반 동유럽불가리아 제국을 점령했다. 1453년 메흐메트 2세의 통치 하에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함으로써 비잔티움 제국의 정복을 거의 완료했다.[64] 콘스탄티노플은 아드리아노플에 이어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64]

메흐메트 2세가 파올로 조나로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에 입성


15세기 중반에는 동로마 제국로 대표되는 기독교 제국의 상징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였고, 16세기 초반에는 맘루크 왕조를 정복하여 서아시아·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 제국까지 정복하여 지중해 세계의 과반을 차지한 세계 제국으로 발전하였다. 이로써 오스만 제국은 과거 히타이트 제국의 영광을 모두 회복한다. 15, 16, 17세기에 오스만 제국은 동부 아나톨리아, 중부 유럽, 코카서스, 북아프리카 및 동아프리카, 지중해의 섬, 대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및 아라비아 반도로 계속 확장될 것이다.[64]

황금 시대의 술탄, 쉴레이만 1세.


오스만 제국의 권력과 위신은 16세기와 17세기에 정점에 달했으며, 특히 쉴레이만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그랬다.[65] 제국은 발칸 반도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남부를 통해 중부 유럽으로 꾸준히 진격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과 자주 대립했다.[65] 게다가 오스만 제국은 영토 분쟁으로 페르시아와 자주 전쟁을 벌였으며, 이로 인해 티무르 르네상스를 계승할 수 있었다.[65] 해상에서 제국은 합스부르크 스페인, 베네치아 공화국 및 성 요한 기사단으로 구성된 신성 동맹과 지중해의 지배권을 놓고 경쟁했다.[65] 인도양에서 오스만 해군은 동아시아와 서유럽 간의 해상 무역로에 대한 전통적인 독점을 방어하기 위해 포르투갈 함대와 자주 대결했다.[65] 쉴레이만 1세 시대에는 1526년의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 왕국을 멸망시키고 정복했다. 1529년에는 제1차 빈 포위를 감행하여 신성 로마 제국에 육박했다. 1522년에는 프레베자 해전에서 기독교국 연합을 격파하고, 지중해를 "오스만의 바다"로 만들었다.

술레이만 1세 시대는 오스만 제국의 절정기로, 법제의 정비, 예니체리의 개혁과 교육 정책의 충실, 학예의 진흥 등이 이루어졌다.

5. 2. 전성기

최근 연구에서는 이 시대의 발칸 반도를 "팍스 오토마니카(Pax Ottomanica)" 아래 통합과 공존, 평화를 누렸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는 쉴레이만 1세의 통치 기간(1520년 ~ 1566년)에 해당한다. 쉴레이만 1세는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 왕국을 멸망시키고 정복하였으며, 1529년에는 제1차 빈 포위를 감행하여 신성 로마 제국에 육박했다. 1522년 프레베자 해전에서는 기독교 연합 함대를 격파하고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오스만의 바다"로 만들었다.

쉴레이만 1세 시대는 오스만 제국의 절정기로, 법제 정비, 예니체리 개혁 및 교육 정책 강화, 학예 진흥 등이 이루어졌다. 오스만 제국은 이 시기에 다민족·다종교 제국으로서 '팍스 오토마나'를 구가하며 번영을 누렸다. 제국은 발칸 반도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남부를 통해 중부 유럽으로 꾸준히 진격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과 자주 대립했다.[65] 또한 영토 분쟁으로 페르시아와 자주 전쟁을 벌였으며,[65] 지중해의 지배권을 놓고 합스부르크 스페인, 베네치아 공화국, 성 요한 기사단으로 구성된 신성 동맹과 경쟁했다.[65] 인도양에서는 포르투갈 함대와 자주 대결했으며,[66] 동남아시아의 아체 술탄국에 군대를 파견하는 등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66]

5. 3. 쇠퇴와 개혁 노력

쉴레이만 1세(1494년 ~ 1566년)의 통치 이후, 오스만 제국은 정치적·행정적·재정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123]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스페인 함대에 패배하며 오스만 제국은 기독교 세력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겪었으나, 지중해의 제해권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1683년의 제2차 빈 포위 실패 후에는 쉴레이만 1세 이래의 제도의 변질이 두드러졌으며, 제국은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18세기 초 튤립 시대라 불리는 평화로운 시기가 도래했지만, 합스부르크 군주국이나 러시아 제국 등과의 전쟁으로 인해 제국은 약화되었다. 18세기 후반에는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결과 크림 반도를 예카테리나 2세의 러시아 제국에 할양해야 했다.[64] 1718년경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투르크족을 축출했으며, 러시아는 1783년에 크리미아를 합병했다.

그리스(1830년, 왕국)는 영국의 지원을 받고 독립하였다.[67] 1881년에는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가 독립하였으며(루마니아1861년부터 공국) 1908년에는 불가리아(1879년부터 오스만 제국의 자치령), 1912년에는 알바니아가 독립하였다.

이러한 제국의 쇠퇴에 셀림 3세와 같은 술탄은 개혁을 시도했지만, 예니체리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19세기 초에는 탄지마트라고 불리는 개혁이 실행되었고, 1876년에는 오스만 제국 헌법이 제정되는 등 근대화가 시도되었지만, 압뒬하미트 2세가 전제 군주제를 부활시켜 오히려 반동화되었다.

발칸 반도 여러 민족의 독립 운동, 강대국들의 개입, 러시아의 남하 정책 등으로 영토는 축소되었다. 산업 혁명에서도 서유럽에 뒤처지면서 대외 채무 증가와 국민 경제 궁핍화 등 국력은 더욱 쇠퇴해 갔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젊은 장교들이 통일과 진보 위원회를 결성하고, '헌법 부활'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혁명을 일으켰다. 이른바 '청년 튀르크 혁명'이다. 이 혁명으로 '범 튀르크주의'에 의한 근대화가 추진되지만, '통일과 진보 위원회'의 엔베르 파샤는 독일 제국과 제휴하여 러시아에 대항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중앙 동맹 측에 참전하여 패전하면서, 오스만 제국은 붕괴하게 된다.

5. 4. 제1차 세계 대전과 제국의 멸망

오스만 제국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함께 동맹국으로 참전하였으나 결국 패전하였다.[71] 갈리폴리 전역에서 다르다넬스 해협 방어에 성공하고, 메소포타미아 전역 초기 쿠트 포위전에서 승리하는 등 초반에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아랍 반란으로 인해 중동 전선에서 어려움을 겪었다.[71] 코카서스 전역에서는 사리카미쉬 전투 패배 이후 러시아군에게 밀렸으며, 이 과정에서 전쟁 장관 엔베르 파샤는 러시아와 협력했다는 이유로 아르메니아인들을 탄압했다.[72] 오스만 제국 정부는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자행하여 수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희생되었다.[73]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 분할에 따라 제국을 구성하던 방대한 영토와 다양한 민족들은 여러 개의 새로운 국가들로 분리되었다.[74] 1918년 10월 30일 무드로스 휴전이 체결되었고, 1920년 8월 10일 연합국 측이 세브르 조약을 제시했지만 비준되지는 않았다. 세브르 조약은 오스만 제국의 해체와 그리스,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에게 유리한 영토 할양을 강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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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mb의 튀르키예 공화국 정부에 의한 제정 폐지를 받고, 돌마바흐체 궁전을 떠나는 메흐메트 6세. 이 사진이 찍힌 지 며칠 후, 영국의 전함으로 몰타로 망명. 그 후 산레모에 거주하며, 1926년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6. 터키 공화국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923년 10월 29일 "터키 공화국"을 건국하고 독립을 선언하였다.[83]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국의 일부 점령은 터키 국민 운동의 수립을 촉발했으며,[65] 1920년 4월 23일 국가의 합법 정부임을 선언한 앙카라의 터키 임시 정부는 구 오스만 제국에서 새로운 공화국 정치 체제로의 법적 전환을 공식화하기 시작했다. 앙카라 정부는 무장 및 외교 투쟁에 참여하여 1921~1923년에는 아르메니아, 그리스, 프랑스, 영국 군대를 축출했다.[75][76][77][78] 앙카라 정부의 군사적 진격과 외교적 성공은 1922년 10월 11일 무다니아 휴전의 서명으로 이어졌다. 차나크 위기 (1922년 9월~10월)를 대영 제국과 앙카라 정부 사이에서 처리하면서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의 로이드 조지 내각이 1922년 10월 19일에 붕괴되었고[79] 캐나다가 영국으로부터 정치적 자율성을 얻었다.[80] 1922년 11월 1일, 앙카라의 터키 의회는 공식적으로 오스만 술탄국을 폐지하여 623년간의 군주제 오스만 통치를 종식시켰다.

1923년 7월 24일에 체결된 로잔 조약세브르 조약을 대체했고,[81][82] 오스만 제국의 후계 국가로서 새로운 터키 국가의 주권에 대한 국제적 인정을 받았다. 1923년 10월 4일, 마지막 연합군이 이스탄불에서 철수하면서 터키에 대한 연합군의 점령이 종료되었다.[83] 로잔 협약은 그리스와 터키 간의 인구 교환을 규정했다.[84]

아타튀르크가 표지에 실린 ''타임'' 잡지, Vol. I No. 4, 1923년 3월 24일. 제목: "무스타파 케말 파샤"


무스타파 케말은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많은 개혁을 도입했다. 이 개혁은 낡은 종교 기반의 다중 공동체 오스만 군주국을 세속 헌법 하에서 의원 내각제 공화국으로 통치될 터키 국가로 변모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85] 페즈는 금지되었고, 여성의 정치적 권리가 완전히 확립되었으며, 터키어를 위한 새로운 문자가 라틴 문자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86] 그 외에도 외국인에 대한 경제적 특권이 폐지되었고 생산 수단과 철도가 국유화되었다. 외국 학교는 국가 통제를 받게 되었다. 칼리프제는 1924년 3월 3일에 폐지되었다. 같은 해, 터키는 샤리아를 폐지했고 1925년에는 남성을 위한 의복 개혁(모자 법)이 제정되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전체 법률 시스템이 유럽 국가에서 채택되어 터키 상황에 적용되었다. 1926년에는 스위스 민법이 처음으로 채택되어 남녀 평등을 포함한 일부일처제가 도입되었고, (하지만 성 평등은 일상생활에서 부분적으로만 달성되었다) 일부다처제는 금지되었다. 이어서 독일 상법과 이탈리아 형법이 도입되었다. 1925년에는 이슬람 종파 로지가, 1935년에는 메이슨 로지가 금지되었다.[87][88][89] 농민에게 부과된 높은 세금이 감면되었다. 1926년에는 아랍력그레고리력으로 대체되었고 미터법이 도입되었다. 1927년에는 남녀공학이 도입되었다. 산업 장려법(1927년)이 통과되었고 산업에 대한 최초의 5개년 계획이 시행되었다(1934년). 1928년에는 세속화가 선포되었다. 농촌 인구의 문맹 퇴치를 위해 교육 동원이 시작되었다.

1934년의 성씨법으로 터키 대국민 의회는 케말에게 "아타튀르크"(''터키의 아버지'')라는 명예로운 성씨를 수여했다.[82] 아타튀르크의 개혁은 일부 쿠르드족과 자자족 부족에서 불만을 야기하여 1925년 셰이크 사아드 반란과[90] 1937년 데르심 반란으로 이어졌다.[91]

6. 1. 터키 독립 전쟁과 공화국 수립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923년 10월 29일 "터키 공화국"을 건국하고 독립을 선언하였다.[83]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국의 일부 점령은 터키 국민 운동의 수립을 촉발했으며,[65] 1920년 4월 23일 국가의 합법 정부임을 선언한 앙카라의 터키 임시 정부는 구 오스만 제국에서 새로운 공화국 정치 체제로의 법적 전환을 공식화하기 시작했다. 앙카라 정부는 무장 및 외교 투쟁에 참여하여 1921~1923년에는 아르메니아, 그리스, 프랑스, 영국 군대를 축출했다.[75][76][77][78] 앙카라 정부의 군사적 진격과 외교적 성공은 1922년 10월 11일 무다니아 휴전의 서명으로 이어졌다. 차나크 위기 (1922년 9월~10월)를 대영 제국과 앙카라 정부 사이에서 처리하면서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의 로이드 조지 내각이 1922년 10월 19일에 붕괴되었고[79] 캐나다가 영국으로부터 정치적 자율성을 얻었다.[80] 1922년 11월 1일, 앙카라의 터키 의회는 공식적으로 오스만 술탄국을 폐지하여 623년간의 군주제 오스만 통치를 종식시켰다.

1923년 7월 24일에 체결된 로잔 조약세브르 조약을 대체했고,[81][82] 오스만 제국의 후계 국가로서 새로운 터키 국가의 주권에 대한 국제적 인정을 받았다. 1923년 10월 4일, 마지막 연합군이 이스탄불에서 철수하면서 터키에 대한 연합군의 점령이 종료되었다.[83] 로잔 협약은 그리스와 터키 간의 인구 교환을 규정했다.[84]

무스타파 케말은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많은 개혁을 도입했다. 이 개혁은 낡은 종교 기반의 다중 공동체 오스만 군주국을 세속 헌법 하에서 의원 내각제 공화국으로 통치될 터키 국가로 변모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85] 페즈는 금지되었고, 여성의 정치적 권리가 완전히 확립되었으며, 터키어를 위한 새로운 문자가 라틴 문자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86] 그 외에도 외국인에 대한 경제적 특권이 폐지되었고 생산 수단과 철도가 국유화되었다. 외국 학교는 국가 통제를 받게 되었다. 칼리프제는 1924년 3월 3일에 폐지되었다. 같은 해, 터키는 샤리아를 폐지했고 1925년에는 남성을 위한 의복 개혁(모자 법)이 제정되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전체 법률 시스템이 유럽 국가에서 채택되어 터키 상황에 적용되었다. 1926년에는 스위스 민법이 처음으로 채택되어 남녀 평등을 포함한 일부일처제가 도입되었고, (하지만 성 평등은 일상생활에서 부분적으로만 달성되었다) 일부다처제는 금지되었다. 이어서 독일 상법과 이탈리아 형법이 도입되었다. 1925년에는 이슬람 종파 로지가, 1935년에는 메이슨 로지가 금지되었다.[87][88][89] 농민에게 부과된 높은 세금이 감면되었다. 1926년에는 아랍력그레고리력으로 대체되었고 미터법이 도입되었다. 1927년에는 남녀공학이 도입되었다. 산업 장려법(1927년)이 통과되었고 산업에 대한 최초의 5개년 계획이 시행되었다(1934년). 1928년에는 세속화가 선포되었다. 농촌 인구의 문맹 퇴치를 위해 교육 동원이 시작되었다.

1934년의 성씨법으로 터키 대국민 의회는 케말에게 "아타튀르크"(''터키의 아버지'')라는 명예로운 성씨를 수여했다.[82] 아타튀르크의 개혁은 일부 쿠르드족과 자자족 부족에서 불만을 야기하여 1925년 셰이크 사아드 반란과[90] 1937년 데르심 반란으로 이어졌다.[91]

6. 2. 아타튀르크의 개혁과 근대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923년 10월 29일 튀르키예 공화국을 건국하고 독립을 선언하였다.[83] 그는 튀르키예의 정치·경제·사회 체제 전반에 대한 급진적 개혁을 시도했다. 아타튀르크의 개혁은 낡은 종교 기반의 다중 공동체 오스만 군주국을 세속 헌법 하에서 의원 내각제 공화국으로 통치될 터키 국가로 변모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85]

아타튀르크는 이슬람의 지배적 역할을 축소하고, 튀르키예어를 아랍 문자 대신 라틴 문자로 쓰도록 함으로써 터키 사회에서 종교의 영향을 축소시켰다.[86] 1924년에는 칼리프제가 폐지되었고,[85] 샤리아가 폐지되었다. 1925년에는 남성을 위한 의복 개혁(모자 법)이 제정되었다.[85] 페즈는 금지되었고,[86] 여성의 정치적 권리가 완전히 확립되었으며, 터키어를 위한 새로운 문자가 라틴 문자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86] 그 외에도 외국인에 대한 경제적 특권이 폐지되었고 생산 수단과 철도가 국유화되었다. 외국 학교는 국가 통제를 받게 되었다.

1926년에는 스위스 민법이 채택되어 남녀 평등을 포함한 일부일처제가 도입되었고, 일부다처제는 금지되었다. 이어서 독일 상법과 이탈리아 형법이 도입되었다. 같은 해 아랍력그레고리력으로 대체되었고 미터법이 도입되었다. 1927년에는 남녀공학이 도입되었다. 산업 장려법(1927년)이 통과되었고 산업에 대한 최초의 5개년 계획이 시행되었다(1934년). 1928년에는 세속화가 선포되었다. 농촌 인구의 문맹 퇴치를 위해 교육 동원이 시작되었다.

1934년 성씨법으로 터키 대국민 의회는 케말에게 "아타튀르크"(''터키의 아버지'')라는 명예로운 성씨를 수여했다.[82] 또한 이후 오랫동안 영향력이 지속된 국가통제 방식의 경제발전 정책을 마련했다. 이러한 개혁들은 일부 쿠르드족과 자자족 부족에서 불만을 야기하여 1925년 셰이크 사아드 반란과[90] 1937년 데르심 반란으로 이어졌다.[91] 1925년에는 이슬람 종파 로지가, 1935년에는 메이슨 로지가 금지되었다.[87][88][89] 농민에게 부과된 높은 세금이 감면되었다.

1938년 아타튀르크 사망 후 불안정한 기간과 짧은 군부 통치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의회정치 및 다당제가 정착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아직도 아타튀르크는 터키의 역사에서 국가의 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다.

6. 3. 제2차 세계 대전과 냉전 시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튀르키예는 중립을 유지했으나, 1945년 2월 23일 연합국의 압력으로 독일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92][93] 이는 상징적인 조치였으며, 튀르키예가 신생 국제 연합에 가입할 수 있게 하였다.[92] 전후 튀르키예는 서유럽과 제휴하고 미국의 군사·경제 원조를 받았다. 터키 해협에 군사 기지를 세우라는 소련의 요구에 따라, 미국은 1947년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하여 튀르키예와 그리스의 안보를 보장하고 대규모 군사 및 경제 지원을 제공했다.[94]

1950년 아드난 멘데레스내각은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와 중앙 조약 기구에 가맹하여 친서방 노선을 강화했다. 튀르키예는 한국 전쟁에 UN군으로 참전한 후, 1952년 NATO에 가입하여 지중해 분지로의 소련 확장에 대한 방파제 역할을 수행했다.[95] 1954년에는 그리스, 유고슬라비아와 발칸 군사 동맹을 체결하여 주변국과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시켰다.[122] 그러나 경제 불황으로 정부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면서 1960년 쿠데타가 발생하여 멘데레스는 실각하고 처형되었다.

이후 공화인민당이스메트 이뇌뉘와 정의당의 쉴레이만 데미렐이 정권을 담당했다. 1967년 소련과 경제 기술 원조 협정을 체결하는 등 외교 다각화가 진행되기도 했지만, 군사 쿠데타 미수와 노동자 및 학생 운동 등으로 정정 불안이 지속되었다. 1971년과 1980년에는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여 민주주의가 중단되기도 했다.[96] 1980년 쿠데타 이후에는 양원제단원제로 바뀌는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으며, 치안과 경제가 개선되어 민정 이양이 이루어졌다.

1984년부터 쿠르디스탄 노동자당(PKK)이 터키 정부에 대한 반란을 시작하여 4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으며, 이 분쟁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97]

6. 4. 현대 터키의 발전과 과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923년 터키 공화국을 건국한 이후, 터키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중립을 유지하다가 1945년 연합국 측에 가담하였다.[92][93] 전후에는 냉전의 영향으로 트루먼 독트린에 따른 미국의 군사·경제 원조를 받았고, 1952년 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가입하여 친서방 노선을 강화했다.[94][95]

1960년, 1971년, 1980년 세 차례의 군부 쿠데타로 정치적 혼란을 겪었지만,[96] 1983년 총선거 실시와 함께 점진적으로 민정이양되었다. 투르구트 외잘 총리 재임 기간(1983-1989) 중에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98]

1980년 군사 쿠데타 이후에는 양원제단원제로 바뀌는 등의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으며, 치안과 경제가 개선되었다.[122] 하지만, 쿠르드족 분리주의 운동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지속적인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97]

1991년 걸프 전쟁에서는 다국적군에 기지를 제공하였고, 2002년에는 사형 제도를 폐지하였다. 2000년대 이후 유럽 연합(EU) 가입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으나, 키프로스 문제, 인권 문제, 쿠르드족 문제 등으로 난항을 겪고 있다.

2014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2016년 쿠데타 시도가 발생했으나 실패했다.[100][101] 2017년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의 권한이 크게 확대되었으며,[103] 2018년 에르도안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했다.[104]

2018년 자말 카쇼기가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아라비아 영사관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105] 2022년에는 국가 명칭을 Türkiye로 변경해 줄 것을 국제사회에 요청했다.[106]

2023년 에르도안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하였고,[107]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발생한 난민들을 수용하고 있다.[108] 2024년 지방 선거에서는 공화인민당이 주요 도시에서 승리하는 등 야당이 약진하였다.[111]

6. 5. 한국과의 관계

튀르키예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중립을 지켰으나, 1945년 연합국의 압력으로 2월 23일 대일 및 대독 선전 포고를 했다.[122] 전후 튀르키예는 미국에 의해 그리스와 함께 반공, 대소련 봉쇄의 최전선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122] 트루먼 독트린마셜 플랜을 통해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받았으며, 1950년 아드난 멘데레스 내각은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와 중앙 조약 기구에 가입하여 친서방 노선을 취했다.[122]

1954년에는 그리스, 유고슬라비아와 발칸 군사 동맹을 체결하여 주변국과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시켰다.[122] 그러나 경제 불황으로 1960년 쿠데타가 발생하여 멘데레스는 처형되었다.[122] 이후 이스메트 이뇌뉘쉴레이만 데미렐이 정권을 담당했고, 1967년 소련과의 경제 기술 원조 협정을 체결하는 등 외교 다각화가 진행되었지만, 군사 쿠데타 미수와 노동자, 학생 운동으로 정정 불안이 계속되었다.

1970년대 키프로스 문제로 군사비가 늘고 경제가 악화되었으며, 좌우 양측의 테러가 잇따랐다.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미국과의 관계가 개선되었고, 1980년 군사 쿠데타로 헌법 개정이 이루어져 치안과 경제가 개선되었다. 그러나 쿠르드족 조직의 테러 등 불안정 요소가 남았고, 1991년 걸프 전쟁에서는 다국적군에 기지를 제공했다.

1989년 투르구트 외잘 대통령 취임 이후 쉴레이만 데미렐, 아흐메트 네제트 세제르 대통령으로 이어지며 정치의 문민화가 이루어졌다. 2002년에는 사형 제도를 폐지했다. 이라크 전쟁에서는 미국에 대한 기지 제공이 의회에서 무효화되어 사실상 제공하지 않았다.

2000년대 이후 튀르키예는 유럽 연합(EU) 가입 교섭을 진행하고 있지만, 키프로스 문제, 인권 문제, 쿠르드족 억압 등 복잡한 문제로 난항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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