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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대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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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회의 대분열은 1054년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분열을 의미하며, 수 세기에 걸쳐 발생한 정치적, 문화적, 신학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수도원 운동, 동로마 제국과 이탈리아의 관계, 이슬람의 부상, 레온 3세의 우상 파괴령 등이 분열의 배경이 되었으며, 교황의 권위, 전례 형식, 필리오케 문제, 성직자 결혼 등에 대한 이견이 갈등을 심화시켰다. 1054년의 상호 파문은 분열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지만, 분열은 단일 사건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의 갈등의 결과였으며, 1960년대에 상호 파문이 해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호 배찬과 영성체가 이루어지지 않아 완전한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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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흐메트 2세는 1432년에 태어나 1451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되어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고 오스만 제국을 강대국으로 만들었으며 1481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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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대분열
분열 배경
원인교회론적 차이
신학적, 전례적 논쟁
사건 개요
시기1054년 7월 16일 – 현재
관련 인물교황 레오 9세
세계 총대주교 미카엘 1세 케룰라리오스
다른 이름대분열
1054년 분열
동방 교회 분열
라틴 교회 분열
결과현대의 가톨릭 교회동방 정교회로 분열되어 현재까지 이어짐
분열의 원인
교황 수위권견해 차이
교회론적 차이교회론적 차이
필리오케견해 차이
신학적 차이신학적 차이
추가 분열 요인
라틴인 대학살1182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1204년
프라툴린 순교자1874년
중세 재통합 시도
바리 공의회1098년
제2차 리옹 공의회1274년
피렌체 공의회1438년–1445년
현대 에큐메니즘 관계
가톨릭-정교 공동 선언1965년
발라망 선언1993년
도미누스 예수스2000년
라벤나 문서2007년
프란치스코 교황과 키릴 총대주교 공동 선언2016년 쿠바 아바나

2. 당시 주변 상황

7세기8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에서는 수도원 운동, 프랑크 왕국의 성립, 이슬람의 팽창, 동서 교회의 대분열, 신성 로마 제국의 수립 등 중요한 사건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중세 서방 세계의 종교적·정치적 구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무함마드를 따르는 무슬림들은 북아프리카와 동지중해기독교의 영역에서 빼앗아갔다. 북유럽에서는 새로운 수도원 운동이 교황의 권위를 세워나갔으며, 로마 교황청은 동로마 제국게르만족, 프랑크 왕국 사이에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들의 결단은 이후 중세 유럽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사건들은 726년 동로마 황제의 우상파괴령으로 이어진다.

2. 1. 수도원 운동

7세기8세기 유럽에서는 수도원 운동이 주요 사건 중 하나로 나타났다.[56] 수도원 운동은 초기 중세 유럽 문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전 문화를 보존 및 전달하고, 이교도들을 개종시키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이들은 타종교의 침입으로부터 고전 문화를 보존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전도 사업을 펼쳤다.

동지중해와 이집트의 사막에서 출발한 엄격한 수도원 운동은 갈리아로 전파되었고, 다시 잉글랜드아일랜드로 건너갔다. 6세기7세기에 걸쳐, 이 두 섬에서는 활발한 전도 활동과 수도원 운동이 전개되었다. 7세기와 8세기에 아일랜드와 잉글랜드에서의 선교 사업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들이 보존한 여러 고전 문화들이 대륙으로 역수출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라틴어로, 아일랜드 수도사들은 고전 문법책을 통해 라틴어를 완벽하게 재현했다.

카롤링거 왕조의 첫 번째 왕, 피핀 3세


아일랜드 출신 수도사인 보니파시오는 대륙에서 섬나라로 들어갔던 기독교를 다시 섬나라에서 대륙으로 퍼지게 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독일인의 사도’(또는 게르만 사도)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게르만족 선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56] 서로마 교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프랑크 왕국과의 제휴를 위해 파견되었으며, 카롤링거 왕조의 첫 번째 왕 피핀 3세에게 왕으로서 자격을 부여하는 세례식을 하기도 했다. 아일랜드와 잉글랜드 출신의 수도사들은 농촌 지역의 미개하고 원시적인 농민 대중을 대량 개종시켜 유럽을 기독교 대륙으로 만들었다.

당시 기독교는 삼위일체설을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 계열이었으며, 로마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반도에서 시작되었다. 대륙의 기독교 수도원들은 대부분 보니파키우스의 영향을 받아 베네딕토계의 계율을 받아들였다.

보니파키우스의 업적은 게르만족을 기독교 세계에 편입시키고, 프랑크 국왕과 로마 교황 간의 관계를 밀접하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2. 2. 동로마 제국과 이탈리아

7세기와 8세기에 동로마 제국지중해 동쪽에 집중하면서도 이탈리아반도에 계속 간섭했다. 그러나 이탈리아반도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로마와 이탈리아가 갖는 역사적 중요성과 베드로의 영향력 때문에, 동로마 제국은 8세기에도 이탈리아반도를 수중에 넣으려 했다.[23]

동로마 제국은 지중해 동쪽에서 이슬람 세력과 오랫동안 싸웠다. 8세기 초, 이슬람의 침략을 막아냈지만, 이 때문에 심각한 재정 위기를 겪었다.[23]

2. 3. 이슬람과 프랑크 왕국

7세기8세기에 이슬람은 북아프리카와 동지중해를 장악하고 동로마 제국을 위협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서유럽에서는 프랑크 왕국이 통일을 이루었다. 이슬람은 동로마 황제의 우상파괴령에 영향을 미쳤고, 프랑크 왕국은 우상파괴령을 둘러싼 동서 교회의 대립에서 서로마 교회를 지지하여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630년 메카 정복을 시작으로 무슬림들은 아라비아 반도와 북아프리카, 동지중해를 장악했다. 661년까지 무슬림 아랍인들은 정복을 통해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령으로 지정된 영토를 점령했다.

3. 레온 3세의 우상파괴령

수도원 운동으로 서로마 교회는 수많은 야만족들을 개종시켰으며, 그중 프랑크족은 통치상의 필요로 로마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726년 동로마 제국 황제 레온 3세는 성상파괴령을 내렸다.[57] 이는 성인의 그림, 조각, 모자이크 등 성상(이콘) 공경이 기독교 자체보다 우선시되는 경향을 바로잡고, 면세 특권을 누리던 수도원과 교회의 대토지 소유를 억제하여 조세 수입을 늘리고자 한 조치였다.

레온 3세의 성상파괴령은 로마콘스탄티노폴리스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았다. 이전까지 로마 교황들은 동로마 황제의 충성스러운 신하로 자처했지만, 로마 대주교 그레고리오 2세는 성상파괴령을 거부하고 황제에게 도전했다. 격분한 레온 3세는 라벤나 총독에게 그레고리오 2세 체포를 명했으나 롬바르드족 군대에 저지되었고, 남이탈리아와 일리리쿰에 대한 로마 교구의 권리를 몰수하여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게 넘겨주었다.

3. 1. 우상파괴령에 대한 로마 교회의 반발

롬바르드족은 기독교를 신봉하여 로마교회에 우호적이었으나, 아이스툴프 왕이 이탈리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망을 품고 로마교회를 새로운 이탈리아의 중심 교구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성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전 기독교를 다스린다는 명분이 있었기에 롬바르드 왕국의 최고 성직자가 될 수 없었다. 동로마 제국의 보호를 청할 수도 없었던 로마교회는 새로운 보호자로 피핀 3세를 선택했다.[1]

751년 피핀 3세는 왕이 되기 위해 로마교회에 왕위 계승 재가를 요청했고, 자카리아는 보호를 대가로 그를 프랑크 왕국의 군주로 인정했다. 752년 피핀은 아이스툴프를 격파하고 중부 이탈리아와 라벤나를 차지했으나, 동로마 제국의 반환 요구를 거부하고 피핀의 기증을 선언했다. 이로써 로마교회는 프랑크 왕국과 밀접하게 연결되었고, 동로마 제국 및 다른 교회들과의 관계는 멀어졌다.[1]

서방이 692년 트룰로 공의회를 거부하면서 동방 제국은 서방에 많은 라틴 관습을 정통적이지 않다고 비판했다. 여기에는 사순절 평일 미사 거행, 1년 내내 토요일 금식, 사순절에 "알렐루야" 생략,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묘사, 무교병 사용 등이 포함되었다.[1]

사제와 부제의 독신주의에 대한 동방과 서방의 태도 차이도 큰 논쟁거리였다. 트룰로 공의회는 결혼한 남자가 사제가 될 권리를 확인하고, 주교를 제외한 성직자가 아내와 분리되거나 아내를 쫓아내는 것을 금지했다.[1]

교황 세르지우스 1세는 이 공의회를 거부했고,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그를 체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694년 서고트 히스파니아의 공의회는 비티자 왕의 요청으로 톨레도 제18차 공의회에서 비준되었으나, 아스투리아스의 프로일라 1세는 재위 기간(757-768) 중 톨레도의 결정을 번복했다.[1]

4. 동서 교회의 분열

비교파 중심의 기독교 교파 계통도/하승무 교수의 교회사관에 의한 계통도


동서 교회의 분열은 395년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고,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동서 교회 간 교류가 줄어들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수백 년 동안 교리 해석(필리오케 문제 등), 예배 방식, 교회 조직 형태(교황 수위권, 사제 결혼 등)의 차이가 커졌다.[31][32]

1054년 로마 교황 레오 9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하일 1세 케룰라리오스(미카엘 케룰라리오스)의 상호 파문 사건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발생했다. 이 사건은 동서 교회 분열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여겨지지만, 결정적인 분열로 보기는 어렵다.

"상호 파문"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 서방 교회 측에서는 사건 전에 로마 교황 레오 9세가 사망했고, 파문의 주체가 사절 훔베르트의 독단이었다.[35]
  • 동방 교회 측에서는 사절단인 훔베르트 일행만을 파문했다고 인식했다.[36]
  •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간의 상호 파문일 뿐,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이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다.[37]


이러한 이유로 "상호 파문"의 유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38] 실제로 1960년대에 양측에서 해소되었다. 그러나 동서 교회의 완전한 일치는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다.

4. 1. 분열의 배경

야로슬라프 펠리칸은 "동서 분열은 대체로 정치적, 교회적 불화에서 비롯되었지만, 이러한 불화는 기본적인 신학적 차이도 반영했다"고 강조한다. 펠리칸은 11세기 적대자들이 신학적 차이를 과장한 반면, 현대 역사가들은 이를 최소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하며, 당시 문서들이 "기독교 두 부분 사이에서 발전한 지적 소외의 깊이"를 증명한다고 말한다. 양측은 이단보다는 분열에 더 죄가 있었지만, 종종 서로에게 신성 모독 혐의를 씌웠다. 분쟁의 많은 부분은 "관습과 관행의 지역적 차이"를 다루며, 그 중 일부는 아디아포라(명령하거나 금지되지 않은 것)였다.[4] 그러나 아디아포라의 존재를 원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만, 무해한 관습과 교리적 함의가 있는 관습을 구별하는 것은 어렵다고 펠리칸은 지적한다.

서부와 동부 지중해 기독교 간의 분열은 수세기에 걸쳐 발생한 다양한 정치적, 문화적, 신학적 요인에서 비롯되었다. 역사가들은 1054년의 상호 파문을 종말의 사건으로 간주한다. 분열의 시작 시점을 결정하는 것은 어려우나, 교황 빅토르 1세 시대(180년경)의 14일 축제 논쟁이 그 시작일 수 있다. 정교회 옹호론자들은 이 사건을 로마가 교황 수위권을 주장하고 동방 교회가 이를 거부한 사례로 지적한다.

4세기와 5세기에 교황 다마수스 1세 치하에서 공동 연합 내 산발적인 분열이 발생했다. 신학적 문제와 기타 논쟁으로 482년부터 519년까지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플 교회 사이에 37년 동안 분열(아카키우스 분열)이 있었다. 대부분의 자료는 동서 분열이 863년부터 867년까지의 포티우스 분열에 의해 명확하게 드러났다는 데 동의한다. 로마 교회가 다른 교회에 특별한 권위를 주장했지만, 당시 문서에서는 "교황 수위권에 대한 명확한 주장이나 인정을" 찾아볼 수 없다.

2세기 말경, 로마 주교 빅토르는 쿼데시먼 논쟁을 해결하려 했다. 이 문제는 로마의 아시아 지역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의 유월절과 동시에 부활절을 기념해야 할지, 아니면 다른 동부 지역에서 정한 대로 다음 일요일까지 기다려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교황은 일요일 준수를 거부한 아시아 교회들을 파문하려 했고, 다른 주교들은 그 행동을 비난했다.

342년에 교황 율리우스 1세는 "주교들이 고발당하는 경우(특히 사도 교회의 경우) 우선 우리에게 글을 쓰고, 그 다음 이 곳에서 정당한 판결을 내리는 것이 관례였다"라고 썼다. 이는 사르디카 공의회에서도 규정되었으며, 성 아타나시우스를 알렉산드리아의 합법적인 주교로 선언했다.

382년 로마 시노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알렉산드리아보다 높은 지위로 격상시킨 것에 항의했고, 로마를 "사도좌"라고 언급했다. 교황 시리시우스(384–399)는 교황 칙령에 시노드 결정과 동일한 구속력을 부여했으며, 교황 인노첸시오 1세(401–417)는 모든 주요 사법 사건은 로마에 유보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교황 보니파시오 1세(418–422)는 로마 교회가 "온 세상의 교회에 머리가 그 지체에 해당하는 것처럼" 서 있으며, 모든 주교들은 "교회적 규율을 위해 그들이 복종해야 하는 자들을 인정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하기아 소피아, 분열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성당


330년에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겼고, 이곳은 후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되었다. 제국 내 역학 관계의 중심은 완전히 동지중해로 이동했다. 로마는 로마 원로원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잃었고, 수도로서의 지위와 권위를 잃었다.

콘스탄티누스가 수도를 옮기기 전, 비잔티움 주교는 헤라클레아 수도 대주교의 관할 하에 있었다. 이후 주교는 황실과의 관계로 헤라클레아의 교회적 종속에서 벗어났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에서 로마 다음 서열을 인정받았다.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는 로마 주교 다음의 영예를 누릴 것이다. 왜냐하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새로운 로마이기 때문이다"라고 결의했다. 이는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관구보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지위를 높여, 동서 교회 분열의 한 요인이 되었던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로마 간 교회적 경쟁의 씨앗을 뿌렸다.

로마 제국 분열은 교회의 분열에 기여했다. 380년에 니케아 신조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확립한 테오도시우스 1세는 통일된 로마 제국을 다스린 마지막 황제였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사후 제국은 서부와 동부로 분할되었다. 4세기에 로마 황제(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통치)는 자신의 영토 내에서 교회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들은 종종 다른 총대주교들에게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려고 시도했고, 이는 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431년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키릴루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고발했다.

알렉산드리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승진에 반대했는데, 이는 5세기 전반에 두 관구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을 야기했으며, 로마의 지지를 받았다. 로마는 가장 중요한 관구는 로마,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의 세 베드로 관구이며, 로마가 첫 번째라는 이론을 제안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권력은 계속 커졌다. 동방 정교회칼케돈 공의회 제28조(451)가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의 동등성을 선언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교회 항소의 최고 법원을 설립했다고 주장한다. 황실 수도의 총대주교는 비잔틴 제국에서 최고의 주교가 되려는 노력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 그는 "광대한 행정 기구를 이끌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거주하는 다른 주교들은 상시 시노드를 구성했는데, 이는 교회의 실제 통치 기구가 되었다."

595년에 사망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요한 4세 총대주교는 "세계 총대주교"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황실 수도가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전되면서 교회 내 수위권도 이전되었다는 생각은 요한 필로포누스(490년경 – 570년경) 시대부터 나타났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포티오스 1세(810년경 – 893년경)에 의해 발전되었다. 제국의 통치자, 즉 세계 통치자의 자리에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총대주교들 중 최고였으며, 황제처럼 그들을 다스릴 권리가 있었다.

4. 1. 1. 신학적 요인

야로슬라프 펠리칸은 "동서 분열은 대체로 정치적, 교회적 불화에서 비롯되었지만, 이러한 불화는 기본적인 신학적 차이도 반영했다"고 강조한다. 펠리칸은 11세기 적대자들이 신학적 차이를 부적절하게 과장한 반면, 현대 역사가들은 이를 최소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하며, 그 시대의 문서들이 "기독교의 두 부분 사이에서 발전한 지적 소외의 깊이"를 증명한다고 말한다. 양측은 이단보다는 분열에 더 죄가 있었지만, 종종 서로에게 신성 모독 혐의를 씌웠다. 분쟁의 많은 부분은 "관습과 관행의 지역적 차이"를 다루고 있으며, 그 중 일부는 아디아포라(adiaphorous, 즉 명령하거나 금지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아디아포라의 존재를 원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만, 무해한 아디아포라적 관습과 교리적 함의가 있는 관습을 실제로 구별하는 것은 어렵다고 펠리칸은 지적한다.[4]

서방 교회들은 삼위일체에 대한 동방과 서방의 이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존 로마니데스나 미하일 포마잔스키와 같은 동방 신학자들은 ''필리오케'' 조항이 서방의 이해에 치명적인 결함의 징후이며,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와 그 연장선상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필리오케''는 라틴어로 "그리고 (아들)으로부터"라는 뜻으로, 서방 기독교에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조의 라틴어 텍스트에 추가되었다. 이 텍스트는 또한 원래 그리스어 텍스트와 달리 ''Deum de Deo''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라는 구절과 원래의 "우리는 믿습니다"(그리스어 Πιστεύομεν) 대신 단수형 "나는 믿습니다"(라틴어, ''Credo'', 그리스어 Πιστεύω)를 사용하며, 이는 오리엔트 정교회가 보존하고 있다. 동방 아시리아 교회는 동방 정교회 및 오리엔트 정교회와 친교를 맺지 않으며 "우리는 믿습니다"를 사용한다.

''필리오케''는 성령이 아버지뿐만 아니라 아들로부터도 나온다고 주장하며, 이는 가톨릭 교회,[5] 성공회 및 일반적으로 개신교 교회에서 받아들여지는 교리이다. 이들은 니케아 신조를 암송할 때 이 구절을 포함하지만, ''필리오케''가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확립된 원래 텍스트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으며, 신조를 말할 때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가톨릭 교회는 로마 전례의 라틴 교회 가톨릭 신자를 포함하여, 신조의 그리스어 텍스트에 ''필리오케''에 해당하는 구절(καὶ τοῦ Υἱοῦgrc)을 추가하지 않는다.

879–880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동방 정교회는 "신조의 새로운 첨가"로서 ''필리오케'' 구절을 파문했으며, 1848년 회칙에서 동방 총대주교들은 이를 이단으로 언급했다. 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포티오스 1세, 에페소스의 마르코 및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 등 동방 정교회의 성인들에 의해 규정되었으며, 이들은 정교회의 세 기둥이라고 불린다. 동방 교회는 서방 교회가 ''필리오케''를 일방적으로(동방과 협의하거나 공의회를 열지 않고) 신조에 삽입함으로써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 사이의 친교를 깨뜨렸다고 믿는다.[6]

블라디미르 로스키와 같은 동방 정교회 신학자들은 '창조되지 않은 본질 안의 하나님'에 대한 서방 신학의 초점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며, 이는 양태론적이며, 따라서 사벨리우스주의 이단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투기적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동방 정교회 신학자 미하일 포마잔스키는 성령이 신조에서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유출되기 위해서는 신성 안에 두 근원이 있어야 한다(이중 유출)고 주장하지만, 한 분 하나님 안에는 신성의 근원이 하나만 있을 수 있으며, 이는 삼위일체의 아버지 위격이며, 하나님의 본질 자체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반대로, 칼리스토스 웨어 주교는 문제는 근본적인 교리적 차이보다는 의미론적 문제에 더 가깝다고 제안한다.

로스키는 동서 교회의 차이점이 가톨릭 교회가 ''신학''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테오리아''(theoria), 즉 신에 대한 실제적인 경험 대신 이교도 형이상학 철학(그리고 스콜라 철학)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이 때문에 동방 정교회와 가톨릭 신자들이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 로마니데스와 나프팍토스의 메트로폴리탄 히에로테오스와 같은 다른 동방 정교회 신학자들도 이와 유사한 발언을 했다. 정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테오리아''는 바르람 오브 세미나라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된 헤시카즘과 같은 금욕적 수행을 통해 얻을 수 있다.

동방 정교회 신학자들은 동방 정교회 신학과 대조적으로 서방 신학은 인류와 자연을 차가운 기계적 개념으로 축소하는 철학적 담론에 기초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동방 정교회 신학자들은 서방 신학의 초점이 마음(이성, 합리성)인 반면, 동방 신학에서는 마음이 심장 안에 놓여야 하며, 이로 인해 누스로 불리는 하나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심장으로서의 통일성이 동방 정교회 신앙의 초점이며, 끊임없는 마음의 기도를 포함한다. 정교회 신학에서 동방 금욕 전통에서 금욕 수행의 목표 중 하나는 의식의 명료함, 깨어 있음(넵시스)을 얻는 것이다. 인류에게 이것은 영혼/심장을 포괄하는 전 인격의 치유를 통해 도달한다. 사람의 마음이 그들의 정신과 화해될 때, 이것은 누스 또는 "심장 또는 영혼의 눈, 초점"의 치유로 일컬어진다.

이 과정의 일부는 인류의 이성(''로고스'' 또는 ''디아노이아'')과 마음 또는 영혼의 치유와 화해이다. 인간의 영과 육신은 영혼에 의해 생기를 얻는 에너지인 반면, 정교회는 죄, 고통, 슬픔이 마음과 정신의 갈등에 의해 야기된다고 가르친다. 정교회 신학에 따르면, 지성적 이해의 부족(질병)은 합리적이거나 담론적인 생각(예: 체계화)에 의해 우회하거나 만족될 수 없다. 인간의 마음의 필요(영혼의 필요)를 부인하는 것은 중독, 무신론, 악한 생각 등과 같은 다양한 부정적이거나 파괴적인 현상을 야기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정화되고, 치유되거나 회복된 ''누스''는 마음의 절제, 즉 넵시스의 상태를 만들어낸다.

4. 1. 2. 교회적 요인



동방 정교회 신학자 필립 셰라드는 동서 분열의 근본 원인이 "두 개의 근본적으로 화해할 수 없는 교회론의 충돌"이며, 이는 현재에도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로저 헤이트는 교회의 주교 권한 문제를 "심각한" 문제로 묘사하며,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상대적 지위가 반복적으로 긴장의 원천이 되었다"고 말한다. 헤이트는 교회론의 차이점을 "보편적 관할권을 가진 교황과, 키프리아누스에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한 주교 및 시노달 공교회론과 결합된 총대주교 구조의 대조"로 특징지었다. 그러나 니콜라스 아파나시예프는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 모두 "오직 하나의 참되고 보편적인 교회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카르타고의 성 키프리아누스의 보편적 교회론을 따르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다른 논쟁점은 서방 사제들의 독신 (수도원과 교구 모두)과, 교구 사제가 기혼 남성일 수 있었던 동방의 규율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라틴 교회는 항상 법적으로 결혼한 사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12세기 이후 소수였다.

로마 교황 수위권

몇 가지 다양한 교회론이 존재한다: "친교 교회론", "성찬 교회론", "세례 교회론", "삼위일체 교회론", "케리그마 신학". 다른 교회론으로는 "계층적-제도적" 교회론과 "유기적-신비적" 교회론, 그리고 "회중주의" 교회론이 있다.

동방 교회들은 주교, 사제, 부제, 그리고 성찬례를 거행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모든 지역 교회는 전체 교회를 구성한다는 생각을 유지했다. 성찬 교회론(또는 최근에는 홀로그램 교회론)이라고 불리는 이 견해에서, 모든 주교는 자신의 교회("교회")에서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이며, 교회들은 에우세비우스가 교회의 공통된 연합이라고 부른 것을 형성한다. 이것은 모든 주교가 존재론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기능적으로 특정 주교는 다른 주교로부터 특별한 특권을 부여받아 관구 대주교, 대주교, 또는 총대주교로 봉사할 수 있었다. 서로 다른 교회들은 동방 정교회에서 동등한 자치권을 누린다. 콘스탄티누스 시대부터 1453년 제국의 멸망까지, 로마 제국 내에서는 성찬 교회론보다는 보편적 교회론이 작동 원리가 되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가 되었을 때, 하느님이 원하신 완벽한 세계 질서가 이루어졌습니다. 즉 하나의 보편 제국이 주권을 가졌고, 그것과 함께 하나의 보편 교회가 존재했습니다."라는 견해가 우세했다. 초기에 로마 교회의 교회론은 보편적이었으며, 교회는 신성하게(기능적으로가 아닌) 임명된 중심, 즉 로마의 교회/주교를 가진 전 세계적 유기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두 가지 견해는 오늘날에도 현대 동방 정교회와 가톨릭교회에 존재하며, 동서방 분열과 대분열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정교회는 1870년 바티칸 공의회에서 제시되고 오늘날 가톨릭교회에서 가르치는 교황의 권위에 대한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정교회는 항상 주교의 공동 책임의 원래 입장을 유지해 왔으며, 그 결과 교회의 구조는 연합에 더 가깝다. 정교회는 각 교회 공동체의 최고 권위자들이 함께 모이는 종교 회의를 갖지만, 가톨릭교회와 달리 교회 교리에 대한 절대적이고 무류한 마지막 말을 할 수 있는 중앙 개인이나 인물은 없다. 실제로 이것은 때때로 그리스, 러시아,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정교회 사이의 분열로 이어졌으며, 중앙 권위가 다양한 내부 분쟁의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부터 성찬 교회론은 가톨릭 신학자들에 의해 지지받고 있다. 앙리 드 뤼박은 "교회는 성찬례와 마찬가지로 통일의 신비, 즉 동일한 신비이며, 고갈되지 않는 풍요로움을 가진다. 둘 다 그리스도의 몸, 즉 동일한 몸이다."라고 썼다. 요제프 라칭거는 성찬 교회론을 "십자가에 대한 바티칸 2차 공의회의 가르침의 진정한 핵심"이라고 불렀다. 라칭거에 따르면 하느님의 한 교회는 다양한 개별 지역 회중에서만 존재한다. 이 회중들 안에서 성찬례는 어디에서나 교회와 함께 거행된다. 성찬 교회론은 공의회가 "지역 교회의 신학적 중요성을 확언하도록" 이끌었다. "만약 성찬례의 각 거행이 제단에 있는 그리스도의 성사적 현존뿐만 아니라 모인 공동체에 있는 그의 교회적 현존의 문제라면, 각 지역 성찬 교회는 보편 교회의 부분 집합 이상이어야 한다. 그것은 '그 장소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어야 한다."

동서방 분열의 교회론적 차원은 교구 내 주교의 권위와 서로 다른 교구의 주교들 간의 권위 체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가톨릭교회는 교부들의 저술과 공의회 문서를 근거로 교황 수위권과 교황의 권위를 주장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동방 정교회가 받아들일 수 없는 가톨릭 교회의 교황 특권과 권위에 대한 현재 공식적인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즉, 신앙과 도덕 문제에 대해 교황이 전 교회에 의해 지켜져야 하는, 공식적으로 "베드로의 자리에서(ex cathedra Petri)" 말할 때의 교황 무류성 교리는 이러한 정의가 "교회의 동의 없이, 그 자체로" (''ex sese et non-ex consensu ecclesiae'') 수정될 수 없고, 세상의 모든 (가톨릭) 기독교인에게 구속력을 갖는다. 교황의 전 세계 모든 (가톨릭) 기독교인에 대한 직접적인 주교 관할권; 교황의 (그리고 해임할) 권한은 총대주교 관할 구역을 제외한 모든 (가톨릭) 기독교 교회의 주교를 임명하는 것이며; 전 세계 모든 (가톨릭) 기독교 주교의 정당성과 권위는 로마 관구와 그 주교, 곧 베드로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지상의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최고 교황과의 결합에서 비롯된다는 단언이다.

두 교회를 분리하는 주요 교회 문제는 미래의 통일된 교회 내에서 교황 수위의 의미이다. 정교회는 그것이 "명예의 수위"여야 하며 "권위의 수위"가 아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가톨릭은 교황의 역할을 권력과 권위를 행사하는 데 필요하다고 여기며, 그 정확한 형태는 다른 기독교인과의 논의에 열려 있다. 동방 정교회 신념에 따르면, 가톨릭성의 시험은 교회의 ''성경''과 ''성전''의 권위에 대한 준수이다. 이는 어떤 특정 관구에 대한 준수로 정의되지 않는다. 정교회는 교황을 전 교회의 ''사실상'' 지도자로 결코 받아들인 적이 없다는 입장이다.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우스를 언급하며, 칼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회는 삼위일체의 형상이며, 성육신의 현실을 반영한다.

분열의 주요 원인은 관할권에 대한 상반된 주장에 대한 논쟁, 특히 교황의 권위—교황 레오 9세는 4명의 동방 총대주교에 대한 권위를 주장했다—와 서방 총대주교가 1014년에 니케아 신경에 필리오케 조항을 삽입한 것에 대한 논쟁이었다. 오늘날 동방 정교회는 칼케돈 공의회 28조가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주교의 평등을 명시적으로 선언하고 콘스탄티노플에 교회의 최고 항소 법정을 설립했다고 주장한다. 에페소스 공의회 7조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오늘날 동방 정교회는 에페소스 공의회의 이 조항이 325년에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작성된 니케아 신경의 수정을 명시적으로 금지했으며, 그 문구는 (내용이 아닌)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 의해 "성부에게서 발원하는"과 같은 내용이 추가되면서 수정되었다고 주장한다.

동방 정교회는 에페소스 공의회 7조가 325년에 제1차 공의회에서 작성된 니케아 신경을 어떤 사람(공의회가 아닌)에 의해 수정하는 것을 명시적으로 금지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는, 그 공의회는 공의회나 다른 주교 단체에 대한 예외를 두지 않았으며, 피렌체 공의회에 참여한 그리스인들은 공의회조차 신경에 어떤 것을 추가할 권한이 없다고 단호하게 부인했다.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세 번째 공의회)의 회의록에 인용된 신경은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381년에 "성부에게서 발원하는"과 같은 내용을 추가하는 등 수정한 것으로 이해되는 내용을 제외한 제1차 공의회의 신경이다. 동방 정교회 신학자들은 교회의 원래 신경의 이 변화는 교회 외부의 다양한 가르침, 특히 공의회가 성령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왜곡했다고 주장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마케도니우스 1세의 가르침을 다루기 위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이것은 교회의 원래 신경의 정통성에 대한 변화가 아니었다.

따라서 후기 에페소스 공의회의 7조에 있는 단어 ἑτέρανgrc은 이미 존재하는 신경에 대한 단순한 설명적 추가의 의미가 아닌 "다른" 또는 "모순되는" 의미로 이해된다. 일부 학자들은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 기인한 추가 사항이 에페소스 공의회 20년 후인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채택되었으며, 알렉산드리아의 영향력이 지배적이었던 에페소스 공의회가 이 조항에 의해 니케아에서 채택된 신경의 이름과 명성을 결국 병합한 콘스탄티노플 신경을 배제했다고 주장한다.

교황 수위권 교리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더욱 발전하여,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로마 교회는 다른 모든 교회에 대한 통상적인 권한의 우위를 지닌다"고 선언했다. 이 공의회는 또한 교황 무류성 교리를 확정하여, 기독교 공동체의 무류성이 교황 자신이 신앙이나 도덕에 관한 교리를 온 교회에 의해 지켜져야 한다고 정의할 때 교황에게도 적용된다고 선언했다. 이 새로운 교리, 그리고 몇 년 전 ''Ineffabilis Deus''에서 반포된 원죄 없이 잉태되심 교리는 동방 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분명히 거부되었다.

일반적으로 동서 양 교회가 분열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1054년의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상호 파문"이라고 하는 사건이지만, 이 이전에도 다음과 같은 여러 문제가 있었다.

위와 같은 여러 문제를 둘러싸고 양 교회 사이에는 수백 년에 걸친 논쟁과 차이가 이미 현저해졌다. 따라서 동서 교회의 분열은 11세기가 되어서 양 교회의 양 지도자의 의도에 의해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다.

4. 1. 3. 정치적 요인

비잔틴 제국은 신정 정치 체제였으며, 황제는 교회와 국가 모두에서 최고 권위자였다. "왕은 인간들 가운데 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그는 Λόγος|로고스grc의 화신이 아니라 Λόγος|로고스grc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특별히 임명되었으며 끊임없이 하나님의 친구이자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자인 하나님의 영감을 받는다. 그의 눈은 위를 향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는다. 그는 하나님의 지상적 모형에 어울리는 존경과 영광으로 둘러싸여야 하며, '신의 군주제와 일치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원형을 따라 그의 지상 정부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힘을 찾아야 한다."[34]

동방에서는 지배적인 정치 질서의 종교적 주장에 교회를 종속시키는 황제교황주의가 첫 천년 말 비잔틴 제국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다. 반면 서방에서는 제국 권위의 쇠퇴로 교회가 상대적으로 독립성을 유지하게 되면서 교황의 권력이 성장했다. 초기 이슬람 정복으로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령 영토가 정복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로마, 단 두 개의 강력한 교회 권위 중심지만이 남게 되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로마는 동방 총대주교들 사이의 분쟁에서 중립적인 중재자 역할을 자주 하려고 했다.

동방 기독교에서는 교황 수위권에 대한 가르침이 가짜 이시도르 칙서에 기초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 문서는 초기 교황들에게 귀속되었지만, 실제로는 9세기 초에 대주교와 세속 권위에 대항하여 주교들의 지위를 옹호하기 위해 위조되었다. 동방 정교회는 베드로가 로마의 총대주교였다는 가르침에 반대하는데, 서방도 그에게 그 칭호를 부여하지 않는다. 성 이레네우스와 같은 초기 자료는 교황 리누스를 로마의 첫 번째 주교로, 교황 클레투스를 두 번째 주교로 묘사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옥스퍼드 교황 사전』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2세기 말 또는 3세기 초에 전통적으로 베드로를 로마의 첫 번째 주교로 여겼다. 이는 단일 주교에 의한 지역 교회의 정부, 즉 장로-주교 그룹과 구별되는 군주제 주교제가 2세기 중반 로마에서 마침내 등장하면서 자연스러운 발전이었다. 그러나 베드로와 바울을 로마 교회를 함께 세우고 사역을 시작한 선구자로서 구분하는 이전의 전통은 결코 잊혀지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성 베드로는 한때 안티오키아의 주교였으며, 그 뒤를 성 에보디우스와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우스가 이었다. 동방 정교회는 로마 교황이 동방 교회를 지배한다는 수위권을 인정하지 않으며, 로마 교황이 동등한 사람들 중 첫 번째라고 가르친다. 최초의 7개 세계 공의회는 동방에서 열렸고 동방 황제에 의해 소집되었으며, 로마 교황은 그 어떤 공의회도 주재하지 않았다.

330년에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겼고, 이곳은 후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되었다. 제국 내 역학 관계의 중심은 완전히 동지중해로 이동했음이 분명해졌다. 로마는 원로원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잃었고, 제국의 수도로서의 지위와 권위를 잃었다.

콘스탄티누스가 수도를 옮기기 전, 비잔티움의 주교는 헤라클레아의 수도 대주교의 관할 하에 있었다. 그 후 주교는 황실과의 관계를 통해 헤라클레아의 교회적 종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반 세기가 조금 넘어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381)에서 로마 다음의 서열을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는 로마 주교 다음의 영예를 누릴 것이다. 왜냐하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새로운 로마이기 때문이다." 이는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관구보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지위를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동서 교회의 분열의 한 요인이 되었던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로마 간의 교회적 경쟁의 씨앗을 뿌린 것으로 묘사된다. 미국 정교회 웹사이트에 따르면 비잔티움 주교는 이미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총대주교로 격상되었다고 한다.

로마 제국의 분열은 교회의 분열에 기여했다. 380년에 니케아 신조의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확립한 테오도시우스 대제 (참조 4세기 기독교)는 통일된 로마 제국을 다스린 마지막 황제였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사후 제국은 서부와 동부로 최종 분할되었다. 4세기에 로마 황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통치)는 자신의 영토 내에서 교회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들은 종종 다른 총대주교들에게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려고 시도했고, 이는 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어, 431년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키릴루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고발했다.

알렉산드리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승진에 반대했는데, 이는 5세기 전반에 두 관구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을 야기했으며, 로마의 지지를 받았다. 로마는 가장 중요한 관구는 로마,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의 세 개의 베드로 관구라는 이론을 제안했고, 로마가 첫 번째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권력은 계속해서 커져갔다. 동방 정교회는 칼케돈 공의회의 제28조 (451)가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의 동등성을 명시적으로 선언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교회 항소의 최고 법원을 설립했다고 주장한다. 황실 수도의 총대주교는 비잔틴 제국에서 최고의 주교가 되려는 노력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 그는 "광대한 행정 기구를 이끌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거주하는 다른 주교들은 상시 시노드를 구성했는데, 이는 교회의 실제 통치 기구가 되었다."

595년에 사망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요한 4세 총대주교는 "세계 총대주교"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황실 수도가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전되면서 교회 내 수위권도 이전되었다는 생각은 요한 필로포누스 (c. 490 – c. 570) 시대부터 초기 형태로 나타났다. 이 생각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포티오스 1세 (c. 810 – c. 893)에 의해 가장 발전된 형태로 명시되었다. 제국의 통치자, 즉 세계의 통치자의 자리에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총대주교들 중 최고였으며, 황제처럼 그들을 다스릴 권리가 있었다.

서로마 제국 멸망도 참조

476년, 로마 제국 서부의 마지막 황제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폐위되고 서부의 황실 휘장이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지면서 다시 단일 로마 황제가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서방에서 거의 권한이 없었고, 서방은 다양한 게르만 부족들에 의해 거의 완전히 지배되었다. 랜달 R. 클라우드의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 동방과 라틴 서방의 영구적인 분리는 "그리스도교와 라틴 기독교 사이에서 곧 일어난 소원함의 근본적인 이유"였다.

서방의 지배적인 언어는 라틴어였고, 동방의 지배적인 언어는 그리스어였다. 서방이 침략자들에게 멸망한 직후, 두 언어를 모두 구사하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들었고, 동방과 서방 사이의 의사소통이 훨씬 더 어려워졌다. 언어적 통일성이 사라지면서 문화적 통일성 역시 무너지기 시작했다. 교회의 두 부분은 자연스럽게 유사한 선을 따라 분열되었고, 다른 기독교 전례를 발전시켰으며 종교 교리에 대한 접근 방식도 달랐다. 분열은 아직 수백 년이나 남아 있었지만, 그 윤곽은 이미 감지할 수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통제하에 있는 지역에서 황제가 "그의 법으로 예배와 규율의 가장 세세한 부분을 규제할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교회에서 지켜야 할 신학적 의견을 지시할 권리도 가졌다"는 계획에 따라 황제교황주의를 교회의 헌법으로 확립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 용어 사전》에 따르면, 이러한 황제교황주의는 "1054년 분열로 이어진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갈등의 원천"이었다. 제국 내 주교 서임을 위해서는 콘스탄티노플 황제의 명시적인 승인이 필요했다. 비잔틴 교황 시대라고 불리는 이 기간 동안, 이 규정은 그리스 또는 시리아 출신이 대부분이었던 로마의 주교들에게도 적용되었다. 비잔틴 황제의 교회 통치에 대한 서방의 불만은 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아리안 고트 왕의 관용이 콘스탄티노플의 황제교황주의적 주장에 우선했다". 서방과 동방의 뚜렷한 태도의 기원은 때로는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신의 도시'와 '세상의 도시' 사이의 긴장 관계"로 보았고, 에우세비우스는 "국가를 교회의 보호자, 황제를 땅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보았다.

4. 2. 1054년의 상호 파문

1053년, J. B. Bury에 따르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우스(미하일 1세)는 오흐리드의 레오를 시켜 교황을 포함한 모든 라틴 주교들에게 편지를 보내도록 했다. 이 편지는 트라니의 주교 요한에게 보내는 것으로, 성찬례에 무교병을 사용하는 것이나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다른 금식 규정 등 서방 교회의 관행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한편 케룰라리우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모든 라틴 교회를 폐쇄했다.

이에 대응하여 레오 9세는 1053년 9월 2일 케룰라리우스와 오흐리드의 레오에게 ''In terra pax''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 레오 9세는 성 베드로를 통해 로마 교황청에 부여된 특권에 대해 자세히 언급했다. 또한 편지의 41개 항목 중 하나에서 황제들이 부여한 특권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자신이 진본이라고 믿었던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문서를 인용했다(제20항). 일부 학자들은 이 편지가 실제로 발송되지 않고 보류되었으며, 실제로 발송된 교황의 답신은 1054년 1월에 보낸 더 부드럽지만 여전히 가혹한 편지 ''Scripta tuae''라고 주장한다.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 정복은 비잔틴 제국과 교황령 모두에게 위협이 되었고, 양측은 서로의 지원을 구했다. 이에 따라 황제와 케룰라리우스는 교황에게 화해적인 내용의 편지를 썼으나, 내용은 보존되지 않았다. 레오 9세는 1054년 1월 황제에게 보낸 답신 ''Quantas gratias''에서 노르만족에 맞서 도움을 요청하고, 케룰라리우스의 오만함으로 여겨지는 점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다. 그는 케룰라리우스에게 보낸 답신에서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를 자신에게 복종시키려 하고, 세계 총대주교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로마 교황청의 수위권을 주장한 것을 질책했다.

이 두 통의 편지는 외교에 능숙하지 못한 추기경 실바 칸디다의 움베르토를 수장으로 하고, 교황 비서이자 산타 마리아 인 도미니카의 추기경 부제인 로렌의 프리드리히, 아말피의 대주교 페테르를 포함한 3명의 사절단에게 맡겨졌다. 사절단은 황제의 우호와 지원을 받았지만, 총대주교에게는 거부당했다. 결국 1054년 7월 16일, 교황 레오가 1054년 4월 사망한 지 3개월 후이자 다음 교황이 취임하기 9개월 전, 이들은 성 소피아 대성당의 제단에 케룰라리우스와 그의 지지자들에 대한 파문 교서를 놓았다. 당시 성 소피아 대성당은 성찬 예식을 거행하기 위해 준비된 곳이었다. 1054년 7월 20일에 열린 시노드에서 케룰라리우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사절단을 파문했다. 실제로 미카엘만 당시 살아 있던 추종자들과 함께 파문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흔히 분열의 해는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상호 파문한 1054년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395년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된 후,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동서 양 교회의 교류는 줄어들었다. 그 후 수백 년 동안 교리 해석의 차이(필리오케 문제 등), 예배 방식의 차이, 교회 조직 형태의 차이(교황권에 대한 생각 차이, 사제의 결혼 가능 여부 등) 등이 커졌다.[31][32]

이러한 흐름 속에서 1054년의 사건이 발생했다. 1054년의 "상호 파문"은 일본의 세계사 교과서 등에서 일반적인 기준으로 사용되지만, 이견도 적지 않다. 1054년의 상호 파문 자체는 동서 양쪽에서 해소되었지만, 동서 양 교회의 "합동"은 아직 성립되지 않았다.[33]

기독교 교파의 성립 개요를 나타내는 수형도. 더 세부적인 분류 방법과 경위가 있으며, 이 그림은あくまで 개략도이다.


1054년,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는 주로 로마 교황의 교황 수위권을 둘러싸고 대립이 깊어졌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한 추기경 훔베르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하일 1세 케룰라리오스의 무례함에 분노하여, 미하일 1세 케룰라리오스와 그 동조자에 대한 파문장을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의 보좌에 내던졌다. 이에 대해 미하일 1세 케룰라리우스는 추기경 훔베르트와 그 일행을 파문했다.[34]

앞서 언급한 것처럼 11세기 전반까지 동서 교회의 차이는 이미 벌어져 있었다. 1054년에 일어난 로마 교황 레오 9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하일 1세 케룰라리오스(미카엘 케룰라리오스)의 상호 파문 사건은 동서 교회 분열의 시작으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이 사건은 동서 교회의 차이를 상징하는, 알기 쉬운 사건 중 하나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더욱이 이 "상호 파문"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 서방 교회 측에서는 사건 전에 로마 교황 레오 9세가 사망했고, 파문의 주체가 로마 교황이 아니라 사절 훔베르트의 독단이었던 측면이 매우 강하다.[35]
  • 동방 교회 측에서는 사절단인 훔베르트 일행만을 파문했다고 인식했다.[36]
  • 이 사건은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간의 상호 파문일 뿐,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이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동서 양 교회의 분열"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37]


이러한 이유로 "결정적인 교회 분열"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인지 의문일 뿐만 아니라, 상호 파문 자체가 양 교회 전체에 대해 유효했는지조차 의심스럽다.[38] 사실, 이 사건 후에도 로마 교황에게 새 교황이 취임한 후에도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교류는 계속되었다.[39]

실제로 이 "상호 파문"은 1960년대에 들어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 양측에서 해소되었다. 그러나 동서 교회의 합동, 완전한 친교 내지 상호 영성체 (상호 배찬)는 현재까지도 실현되지 않고 있다. 이는 1054년의 "상호 파문"이 갖는 사건성에 대한 과대 평가에 의문을 제기하는 근거가 된다. 정교회에서는 동서 교회의 분열이 1204년까지 확정되지 않았다고 간주하고 있다.

4. 3. 분열의 심화

381년, 로마 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수도에서 제2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콘스탄티노폴리스 1차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관구를 로마를 제외한 다른 주요 관구보다 우위에 두어, 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 관구보다 높였다.[16] 이는 동서 교회 분열의 원인이 된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로마 사이의 교회적 경쟁의 씨앗을 뿌린 것으로 묘사된다.

일반적으로 서방 주교는 이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테살로니카의 아스콜리우스는 참석하여 교황 다마수스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를 선출하도록 지시받았다. 라틴 교회는 이 공의회의 정경을 처음에는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로마의 레오 1세의 칙서는 높이 평가되었으며, 칼케돈 공의회의 공식 결정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이 칙서는 만장일치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불경스럽다"고 "신성 모독적"이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다음 공의회는 교황 레오의 발표에 나타난 불균형을 바로잡았다. 비록 로마 주교가 이 초기에도 존경을 받았지만, 동방 교회는 교황 수위권교황 무류성의 개념이 훨씬 후에 발전했다고 본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 제28조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에게 폰투스와 트라키아에 대한 관할권을 부여했다. 공의회는 또한 안티오키아예루살렘 간의 협정을 비준하여 예루살렘이 세 개의 주에 대한 관할권을 갖도록 했으며, 이를 다섯 개의 주요 교구 중 하나로 간주했다.

이 결의안이 통과될 때 대표가 부재했던 레오 1세는 공의회를 에큐메니컬로 인정하고 교리적 결정을 확정했지만, 니케아 공의회의 여섯 번째 규정을 위반하고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제28조를 거부했다.

이 규정은 1054년 상호 파문으로 인해 이 문제와 관련하여 무의미해질 때까지 동방과 서방 사이의 끊임없는 마찰의 원인이 되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권위에 대한 그 적용 가능성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같은 논쟁적인 규정은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권위를 "야만인들 사이"의 교구 주교들에게 인정했는데, 이는 비잔틴 제국 외부의 모든 지역을 의미하거나, 폰투스, 아시아 및 트라키아 인근 지역만을 의미하거나, 제국 내의 비(非) 그리스인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공의회 제9조는 또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만약 주교나 성직자가 해당 지역의 대주교와 이견이 있을 경우, 그는 교구의 엑사르크 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황제의 도시의 보좌에 의지하여 그곳에서 재판을 받도록 하라." 이는 어떤 공의회도 로마에 부여한 것보다 더 큰 특권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부여하는 것으로 해석되거나, 그보다 훨씬 덜 중요한 것으로 해석된다.

10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우스는 교황을 포함한 모든 라틴 주교들을 대상으로 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성찬례에 무교병을 사용하는 것과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다른 금식 규정과 같은 서방의 관행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한편 케룰라리우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모든 라틴 교회를 폐쇄했다.

이에 대응하여 레오 9세는 케룰라리우스에게 보낸 답신에서 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를 자신에게 복종시키려 하고, 세계 총대주교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교황 수위권을 주장한 것을 질책했다.

이 두 통의 편지는 외교에 능숙하지 못한 추기경 실바 칸디다의 움베르토를 수장으로 하는 3명의 사절단에게 맡겨졌다. 그들은 황제의 우호와 지원을 받았지만, 총대주교에게 거부당했다. 1054년 7월 16일, 교황 레오가 사망한 지 3개월 후이자 다음 교황이 취임하기 9개월 전, 그들은 성 소피아 대성당의 제단에 케룰라리우스와 그의 지지자들에 대한 파문 교서를 놓았다. 1054년 7월 20일에 열린 시노드에서 케룰라리우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사절단을 파문했다. 실제로 미카엘만 당시 살아 있던 추종자들과 함께 파문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054년 동서 교회의 분열을 결정지은 단일 사건은 없었다. 오히려 두 교회는 여러 세기 동안 분열과 화해를 반복하며 점차 분열되었다. 이후 수세기 동안 황제, 교황, 총대주교들은 교회 간의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여러 요인과 역사적 사건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분열을 심화시켰다.

11세기 말부터, 베네치아 공화국의 해군에 대한 비잔틴 제국의 의존은 비잔틴 제국 내에서 가톨릭 상인들의 우위를 가져왔고, 이는 결국 경제적, 사회적 격변을 야기했다. 이탈리아인들의 오만함과 더불어, 이는 시골과 도시의 중산층과 하류층 사이에 대중적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12세기 후반에 이르러, 각 도시 국가 출신 경쟁자들 간의 사실상 통제 불가능한 경쟁은 이탈리아인들이 수도에서 다른 이탈리아인들의 구역을 습격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비잔틴 당국의 보복적인 가혹한 조치는 도시 내 종교 간 관계를 악화시켰다.

1182년, 라틴 상인과 대귀족 지주들에게 편애를 보인 것으로 악명 높았던 안티오키아의 마리아 섭정이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노스에 의해 폐위되자, 새로운 황제는 폭도들이 미움을 받던 외국인들을 학살하도록 허용했다. 그 이후 비잔틴의 외교 정책은 서방에서 항상 불길하고 반라틴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비잔틴 신학자 테오도르 발사몬은 1190년에 라틴인이 라틴 교리와 관습을 삼가고 동방 관습에 따르겠다고 먼저 선언하지 않는 한 성사를 받을 수 없다고 기록했다.

제4차 십자군은 1203년 4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라틴 십자군과 베네치아 상인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자체(1204년)를 약탈하여 성 소피아 성당과 여러 다른 정교회 성지를 약탈하고, 이를 라틴 가톨릭 예배로 전환했다. 십자군은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 라틴 총대주교를 임명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과 최종 조약은 동방 라틴 제국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라틴 총대주교를 세웠다. 나중에 일부 종교 유물은 비잔틴 제국의 라틴 제국에 자금을 대거나 지원하기 위해 유럽에서 판매되었다. 1261년 비잔틴 황제 미카엘 8세 팔레올로고스가 라틴 제국을 종식시켰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심장에 대한 서방의 공격은 15세기에 오스만 무슬림에 의한 정복으로 이어진 요인으로 간주된다. 많은 학자들은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이 1054년 사건보다 분열에 더 기여했다고 믿는다.

북유럽에서는 튜턴 기사단동방 정교회 러시아 공화국인 프스코프 공화국노브고로드 공화국을 정복하려 시도했다(1240년). 이는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다소 지지받았다. 가톨릭 스웨덴도 정교회 노브고르드를 상대로 여러 원정을 수행했다. 가톨릭 폴란드와 정교회 러시아 사이의 분쟁도 있었는데, 이는 동서 간의 분열을 굳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제2차 리옹 공의회는 동방 교회를 서방 교회와 재결합하겠다는 미카엘 8세의 약속에 따라 소집되었다. 로마콘스탄티노폴리스를 분열시킨 대분열을 끝내기를 원했던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재정복하여 동방의 라틴 제국 잔재를 종식시킨 미카엘 8세에게 사절단을 보냈다.

6월 29일 그레고리우스 10세는 성 요한 교회에서 미사를 거행했으며, 양측이 모두 참여했다. 공의회는 로마 교회가 "보편적인 가톨릭 교회에 대한 최고의 완전한 수위권과 권위를 소유한다"고 선언했다.

이루어진 통합은 "가짜이자 정치적 책략"이었으며, 1261년에 잃었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서방인들이 재탈환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황제가 유지한 허구였다. 사제와 백성은 이에 격렬히 반대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요한 11세 총대주교가 통합의 대의를 옹호하기 위한 지적인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미카엘이 반대자들을 강력하고 잔혹하게 탄압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시행되지 않았다. 1278년 교황 니콜라오 3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절을 보내 모든 정교회 성직자의 개인적 복종과 ''필리오케''의 채택을 요구했다. 미카엘 황제의 분열 해결 시도는 교황 마르티노 4세가 통합이 단지 허구임을 깨닫고, 1281년에 미카엘 8세를 파문하면서 끝났다. 미카엘 8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안드로니코스 2세는 이 통합을 거부했고, 베코스는 사임해야 했으며, 결국 유배되어 투옥되었다.

15세기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는 오스만 제국의 압박을 받아 서방과의 동맹에 열을 올렸고, 이를 위해 교황 에우제니오 4세와 재통합 논의를 재개하기로 합의했으며, 이번에는 페라라-피렌체 공의회에서 열리게 되었다. 여러 차례의 긴 논의 끝에 황제는 동방 대표들을 설득하여 서방의 교리인 필리오케, 연옥, 교황 수위권을 받아들이게 했다. 1439년 6월 6일, 참석한 모든 동방 주교들이 협정에 서명했지만, 에페소스의 마르코스만은 예외였다. 그는 로마가 여전히 이단과 분열 상태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대분열이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동방 주교들은 귀국 후 서방과의 합의가 일반 대중과 시민 당국으로부터 광범위하게 거부당하는 것을 발견했다. 피렌체에서 서명된 이 통합은 동방 교회에서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요 사건 중 하나는 교황 바오로 6세와 동방 정교회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가 발표한 1965년 가톨릭-정교회 공동 선언이다. 동시에, 그들은 11세기부터 시작된 상호 파문을 해제했다. 이 행위가 친교의 회복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4. 4. 분열의 결과

1054년 동서 교회의 분열은 단일 사건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수 세기에 걸쳐 분열과 화해가 반복되며 점차 심화되었다. 황제, 교황, 총대주교들은 분열을 치유하려 노력했지만, 여러 요인과 역사적 사건들이 분열을 심화시켰다. 1054년 당시 기독교인의 과반수는 동방 기독교도였고, 나머지는 서방 기독교도였다.[23] 티모시 웨어는 "1054년 이후에도 동서 간의 우호적인 관계는 지속되었다. 기독교 세계의 두 부분은 아직 그들 사이에 큰 분열의 골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 이 분쟁은 동서의 일반 기독교인들이 거의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라고 설명했다.

파문 당시, 많은 동시대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교회들은 평소처럼 관계를 지속했으며, 예루살렘 성묘 교회와 같은 동방 교회에 대한 성금도 유지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예루살렘 총대주교의 피레네 산맥의 레 마르셰에 있는 교회에 대한 소유권을 확인하기도 했다.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 황제가 1080년대에 로마와의 관계 단절에 대한 정식 결정을 내렸는지 질문했을 때,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참석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12세기에는 라틴 십자군과 현지 주민들 간의 상호 작용이 있었는데, 십자군은 현지 주민들을 이단자나 분열주의자로 여기기보다는 자신들의 것으로 통합했다.

오스만 제국이 1453년 5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을 일으켰을 때, 정교회는 이미 러시아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는 키예프에서 모스크바로 옮겨졌다. 러시아 정교회는 1589년에 완전한 독립(자치)을 얻어 모스크바 및 전 러시아 총대주교의 지위를 얻었다. 러시아의 정치 및 교회 지도부는 모스크바를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비잔티움의 정당한 후계자인 제3의 로마로 여겼다.

오스만 제국 통치 하에, 정교회는 자치 밀레트, 특히 룸 밀레트의 지위를 획득했다. 에큐메니칼 총대주교는 제국의 모든 정교회 신민의 통치자(밀레트 바쉬)가 되었다. 메흐메트 2세는 총대주교 겐나디오스 2세를 임명하며 비잔틴 황제의 법적 기능을 수행했다. 술탄들은 그리스 정교회 계층의 세속적 권력을 강화했고, 이들은 그리스 귀족들과 함께 오스만 제국의 발칸 정교회 영토를 운영하게 되었다.

러시아에서는 17세기 초 혼란의 시대 동안 폴란드의 개입으로 반 카톨릭 정서가 강화되었는데, 이는 모스크바를 카톨릭으로 개종시키려는 시도로 여겨졌다. 국민 통합의 날은 1612년 폴란드에 의한 모스크바 정복으로부터의 구원을 기념하는 교회 축일 날에 제정되었다. 모스크바의 헤르모게네스 총대주교는 이 기간 동안 폴란드인과 그 지지자들에 의해 처형되었다.

16세기와 17세기에는 로마 교회와 동방 정교회 내의 다양한 그룹 간의 여러 통합 시도가 있었다.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 간의 최종 분리는 18세기에 이루어졌다. 1729년, 교황 베네딕토 13세 치하의 로마 교회는 정교회와의 성찬례를 금지했고, 1755년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들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로마 교회와의 성찬례를 최종적으로 중단하고 카톨릭을 이단으로 선언했다.[23]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요 사건 중 하나는 교황 바오로 6세와 아테나고라스 1세가 발표한 1965년 가톨릭-정교회 공동 선언이다. 이들은 11세기부터 시작된 상호 파문을 해제했지만, 친교의 회복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동방 가톨릭 교회는 역사적으로 정교회에서 "유니에이트"라고 불리며, 서방과의 분열을 화해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들은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받아들이면서 비잔틴 전례와 같은 동방 전통에 따른 일부 교회법 규칙과 전례 관습을 유지한다. 일부 동방 정교회는 이러한 일치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한 교리적 차이와 과거의 만행을 무시하는 대가라고 주장한다.

우크라이나벨라루스에서는 폴란드 지배 시기에 정교회와 동방 가톨릭 교회 사이에 주기적인 갈등이 있었고, 트란실바니아에서도 갈등이 있었다. 러시아 제국소련에서는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와 같은 동방 가톨릭 교회에 대한 압력과 정부 주도의 보복이 가해졌다. 1980년대 후반부터 모스크바 총대주교청(러시아 정교회)은 우크라이나에서 "유니에이트" 교회 구조를 복원하는 방식과 러시아에서 가톨릭의 개종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비판했다.

1993년, 보고서는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 간의 신학적 대화를 위한 공동 국제 위원회가 레바논의 바르라만 신학 대학교에서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가톨릭과 정교회가 교회의 신비에 대한 관계에서 서로를 다시 고려하고 자매 교회로서 서로를 다시 발견하는 방식 때문에, 위에 설명된 이러한 형태의 '선교적 사도직'은 더 이상 따라야 할 방법으로, 또는 우리 교회가 추구하는 일치의 모델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명시했다.

2016년 2월, 교황 프란치스코러시아 정교회의 총대주교 키릴은 쿠바에서 회담을 갖고 교황 프란치스코와 키릴 총대주교의 공동 선언에 서명했다. 이 선언은 "'유니에티즘'의 과거 방식은 일치를 재건하는 방법이 아님"을 명확히 했다. 한편, 힐라리온 알페예프 대주교는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와 러시아 정교회(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우크라이나 정교회 간의 긴장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고조되었다고 말했다. 이 선언은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 수장인 스비아토슬라프 셰브추크에 의해 비판받았으며, 그는 자신의 신자들이 바티칸에 "배신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분열의 해를 1054년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395년 로마 제국의 동서 분열과 476년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동서 교회 간 교류가 줄어들었고, 수백 년 동안 교리 해석 차이(필리오케 문제 등), 예배 방식, 교회 조직 형태 차이 등이 증가했다.[31][32] 1054년의 "상호 파문"은 일반적인 기준이지만, 이견도 적지 않다. 상호 파문은 해소되었지만, 동서 양 교회의 "합동"은 성립되지 않았다.[33]

"상호 파문" 이후에도 양 교회에게 분열 해소는 큰 과제였다. 이슬람 세력의 침공에 시달린 동로마 제국 황제들은 로마 교황의 교회 수위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서유럽 제국으로부터의 원군을 기대했다. 그러나 교리, 문화, 조직, 정치적 상황의 차이는 계속 확대되었다.

제4차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폴(1204년) 함락과 시민들에 대한 학살, 약탈, 부녀자 강간, 교구 제도 파괴, 정교회 박해는 정교회 측의 반 가톨릭 감정을 악화시켰다.[40] 십자군은 예루살렘 총대주교청을 무시하고 동방 가톨릭 교회 교구를 설립하기도 했다.

13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전반 팔레올로고스 왕조 동로마 황제도 로마와의 화해를 모색했지만, 민중, 귀족, 수도사, 교회의 반대로 달성되지 않았다.

15세기 피렌체 공의회오스만 제국의 압박을 받던 동로마 제국의 위기를 배경으로 정교회의 타협을 통해 필리오케를 용인하려 했으나, 정교회 측 참석자 1명이 합의 문서에 서명을 거부하여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동로마 제국의 대신 겸 군사령관 루카스 노타라스 대공은 "로마 교황의 삼중관을 보는 것보다 술탄터번을 보는 것이 낫다"고 공언했다.

16세기 예수회는 동방 선교를 활발하게 진행하며 정교회의 가톨릭 교회로의 개종을 추진했다. 우크라이나 · 러시아 서부에서는 폴란드 왕 지그문트 3세의 지배하에 놓인 정교회가 압박과 탄압을 받았다. 1596년 브레스트 연합으로 우크라이나 동방 가톨릭 교회가 성립되었지만, 이는 강압적인 경위를 거쳐 성립되었고, 동서 교회의 주요 대립 원인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십자군 시대 동지중해 지역에 동방 가톨릭 교회 교구가 정교회 교구를 무시하는 형태로 설립되면서, 정교회 측에서는 가톨릭이 힘으로 로마 교황의 권위 아래 타자를 병합하려 한다는 위구심과 불신감이 조성되었다. 이는 가톨릭과의 대화에 회의적인 세력을 정교회 내부에 키웠고, 그 영향은 현재에도 남아 있다. 동로마 제국이 서방으로부터 대규모 증원 없이 멸망한 것도 동방 교회 측의 일치에 대한 동기를 감소시켰다.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 무류성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로 채택되었다. 이는 총대주교라도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공의회 결정에 따라야 한다는 동방 정교회의 생각과는 맞지 않아, 가톨릭교회와 정교회의 차이를 더욱 키웠다. 교황 무류설은 가톨릭교회 내부에서도 이견을 낳아 구 가톨릭 교회 성립을 초래했다.

폴란드에서는 150곳의 정교회 성당이 가톨릭교회 성당으로 강제 전용되는 사건이 1920년대에 발생하여, 우크라이나와 폴란드에서 동서 양 교회의 관계에 앙금을 남겼다.

5. 평가

동방교회 시각에서는 기독교 5개 대교구 중 로마 대교구인 로마교회가 이탈한 것이라고 간주한다. 서방교회 시각에서는 로마교회와의 일치에서 동방교회 공동체들이 이탈한 것이라고 간주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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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논문 The Stations of the filioque 2002
[3] 논문 The Stations of the filioque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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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서적 Armenia Christiana: Armenian Religious Identity and the Churches of Constantinople and Rome (4th–15th Century) Volumen 8 de Jagiellonian Studies in History https://books.google[...] Wydawnictwo UJ 2016
[20] 서적 The Crusades and the Christian World of the East: Rough Tolerance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010-11-24
[21] 서적 Heresy and the Making of European Culture: Medieval and Modern Perspectives Routledge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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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문서 Orthodoxy under the Ottomans (1453–1821). Relations with the West Encyclopedia Britannica
[24] 문서 Missale Romanum 2002 (Roman Missal in Lat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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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뉴스 ローマ法王、ロシア正教総主教とハグ 分裂以来の初会談 http://www.asahi.com[...] asahi.com
[50] 뉴스 ローマ法王、「カトリック教会だけが唯一の教会」 http://japanese.dong[...] 東亜日報
[51] 뉴스 ロシア正教キリル総主教、カトリックへの親近感示す http://www.christian[...] Christian Today 2010-02-16
[52] 뉴스 ローマ法王、異宗教間サミットで「人類の和解」呼びかけ https://www.afpbb.co[...] AFPBB News
[53] 웹사이트 教皇、ロシア正教会のキリル府主教と会見 http://www.radiovati[...] バチカン放送局
[54] 뉴스 Pope meets Orthodox patriarch but reunion of churches unlikely, Tokyo priests say | The Japan Times http://www.japantime[...] The Japan Times 2016-06-18
[55] 위키백과 십자군
[56] 서적 교양 들녘 2001
[57] 문서 843년에 성상파괴령은 최종적으로 폐기되었다. 오늘날 [[정교회]]의 성상(이콘)은 아주 정교하고 매우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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