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단군조선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단군조선은 근대 역사학 형성 이전 고조선 역사를 구분하는 시기 중 하나로, 단군이 기원전 2333년에 아사달 또는 평양에서 건국했다고 전해진다. 초기에는 한반도 북부나 요동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했다는 주장이 있으며, 미송리형 토기, 비파형동검 등이 유물로 추정된다. 중국 문헌에는 기원전 7세기 무렵부터 조선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며, 기원전 3세기 초 연나라의 공격으로 세력이 위축되기도 했다. 단군조선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국가의 시조로 중요하게 여겨졌으나, 일제강점기에 식민사학에 의해 역사적 실체를 부정당하기도 했다. 현대에는 단군 신화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존재하며, 남북한, 일본, 중국 등 각국의 역사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단군조선 - 단군 신화
    단군 신화는 환웅과 웅녀의 결합으로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홍익인간의 이념과 고조선 사회의 특징을 보여주는 한국의 건국 신화이다.
  • 단군조선 - 환단고기
    환단고기는 환국, 배달국, 고조선 등 고대 국가의 역사를 다룬다고 주장하며, 1911년에 간행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역사학계에서는 위서로 판단한다.
  • 고조선 - 공무도하가
  • 고조선 - 환인
    환인은 단군신화에 나오는 환국의 임금이자 환웅의 아버지로, 삼국유사에서는 제석으로도 불리며 아들에게 천부인 세 개를 주어 인간 세계를 다스리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단군 - 환인
    환인은 단군신화에 나오는 환국의 임금이자 환웅의 아버지로, 삼국유사에서는 제석으로도 불리며 아들에게 천부인 세 개를 주어 인간 세계를 다스리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단군 - 단군 신화
    단군 신화는 환웅과 웅녀의 결합으로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홍익인간의 이념과 고조선 사회의 특징을 보여주는 한국의 건국 신화이다.
단군조선 - [전쟁]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약칭檀君朝鮮 (단군조선)
한국어 국명檀君朝鮮 (단군조선)
공식 국명(정보 없음)
건국 시기기원전 2333년
멸망 시기기원전 1112년
선대 국가 1배달국
선대 국가 깃발 1(정보 없음)
선대 국가 2(정보 없음)
선대 국가 깃발 2(정보 없음)
선대 국가 3(정보 없음)
선대 국가 깃발 3(정보 없음)
선대 국가 4(정보 없음)
선대 국가 깃발 4(정보 없음)
계승 국가 1진국
계승 국가 깃발 1(정보 없음)
계승 국가 2(정보 없음)
계승 국가 깃발 2(정보 없음)
국기 링크(정보 없음)
국기 폭(정보 없음)
국기 테두리(정보 없음)
국장 이미지(정보 없음)
국장 링크(정보 없음)
국장 폭(정보 없음)
표어(정보 없음)
표어 설명(정보 없음)
국가(정보 없음)
국가 설명(정보 없음)
위치 이미지 설명(정보 없음)
위치 이미지 폭(정보 없음)
공용어(정보 없음)
종교(정보 없음)
수도아사달(阿斯達)
원수 직함檀君王儉 (단군왕검)
원수 재임 시작 1?
원수 재임 종료 1?
원수 이름 1단군
원수 재임 시작 2?
원수 재임 종료 2?
원수 이름 2?
대륙moved from Category:Asia to East Asia
지역East Asia
국가South Korea
시대Ancient
상태(정보 없음)
상태 설명(정보 없음)
왕국(정보 없음)
정치 체제Monarchy
시작 사건Establishment
시작 날짜(정보 없음)
종료 사건Handover to the Goryeo Dynasty
종료 날짜(정보 없음)
사건 1Introduction of Buddhism
날짜 1527
사건 2Campaigns of King Jinheung
날짜 2551-576
사건 3Unified Silla
날짜 3676-935
이전 사건(정보 없음)
이전 날짜(정보 없음)
깃발(정보 없음)
깃발 종류(정보 없음)
상징(정보 없음)
상징 종류(정보 없음)
Silla at its height in 576.
576년 신라의 전성기.
위도(정보 없음)
국가 표어(정보 없음)
국가(정보 없음)
통화(정보 없음)
지도자 직함King
지도자 1Hyeokgeose (first)
지도자 임기 157 BC - 4
지도자 2Jinheung
지도자 임기 2540-576
지도자 3Muyeol
지도자 임기 3654-661
지도자 4Munmu
지도자 임기 4661-681
지도자 5Sinmun
지도자 임기 5681-692
지도자 6Gyeongsun (last)
지도자 임기 6927-935
통계 년도 1(정보 없음)
면적 통계 1(정보 없음)
인구 통계 1(정보 없음)
현재 국가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각주(정보 없음)
조선의 사물
제목檀君朝鮮 (단군조선)
한글단군조선
한자檀君朝鮮
히라가나だんくんちょうせん
가타카나タングンチョソン
로마자 표기Dan-gun Joseon
매큔-라이샤워 표기법Tan-gun Chosŏn

2. 역사

근대 역사학이 정립되기 이전에는 고조선의 역사를 지배자의 이름에 따라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세 시기로 나누어 이해했다. 단군은 기원전 2333년(무진년)에 아사달 또는 평양에서 나라를 세웠으며, 약 1000여 년간 통치하다가 기원전 1122년(기묘년)에 기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설, 혹은 기자가 오기 전인 기원전 1286년에 왕위를 떠났다는 설이 전해진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으며, 위만조선이 성립된 기원전 194년 이전까지의 시기를 모두 고조선(단군조선)의 역사로 보고 있다.

초기 고조선의 중심지에 대해서는 평양 일대라는 주장[98]과 요동 지역이라는 주장[99] 등이 있으며, 일부 재야사학계에서는 요서 지역까지 포함되었다고 보기도 한다.[100] 고조선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미송리형 토기와 비파형동검이 꼽히며, 이 유물들은 주로 랴오닝성한반도 북부에서 발견된다. 다만, 유물의 출토 범위가 당시 고조선의 강역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중국 문헌상 고조선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전 7세기 무렵[101]의 《관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원전 323년에는 중국 전국시대의 연나라와 외교적 마찰이 있었고, 기원전 3세기 초에는 연나라의 공격을 받아 서쪽 영토 2천여 리를 잃고 만번한을 경계로 삼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에서 평양 일대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02] 《위략》에 따르면, 기원전 2세기 말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자 고조선의 부왕(否)이 형식적으로 진나라에 복속하기도 했다. 진나라 말기의 혼란기에는 중국 유민들이 고조선으로 많이 유입되었는데, 기원전 195년 망명해 온 위만에게 서쪽 변경 수비를 맡긴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기원전 194년, 위만은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하여 위만조선을 세웠다.

2. 1. 건국 이전

고려 시대 일연이 저술한 《삼국유사》(1280년대 성립)는 단군고조선 건국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을 담고 있다.[1] 이 책은 《위서》를 인용했다고 밝히고 있으나, 진수의 《삼국지》 위서나 위수의 《북위서》 등 현존하는 중국의 주요 역사서에는 단군 관련 기록이 전혀 발견되지 않아, 《삼국유사》의 단군 이야기가 후대에 만들어진 내용일 가능성이 제기된다.[44][46] 실제로 많은 연구자들은 단군이라는 인물이 역사적으로 실존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보고 있으며, 이를 뒷받침할 만한 고고학적 또는 문헌적 증거는 거의 없다.[2]

삼국유사》 이전의 기록에서는 단군이나 단군조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단군 신화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한국 민족주의 역사학 맥락 외에서는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기 어렵다.[1] 중국 역사서에는 단군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35] 한국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도 13세기로 비교적 늦은 편이다. 등장 방식 또한 역사적 사실로서가 아니라 "불교 설화"의 일부로 소개되고 있어, 일반적으로는 신화로 분류된다.

근래에 등장한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와 같은 책들은 《삼국유사》와는 다른 내용을 담고 있으나, 학계에서는 이들을 20세기에 만들어진 위서로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1][4] 한편, 이영훈 등 일부 연구자는 단군 신화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일본 신화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지적하기도 한다.[3] 또한 신화 속 '왕검'이라는 호칭이 중국 삼황오제 신화의 임금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중국 신화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1]

삼국유사》 자체의 성격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일부에서는 이 책이 단순한 역사서라기보다는 민간에 떠도는 기이한 이야기들을 모아 놓은 기록물에 가깝다는 지적도 있으며,[5] 단군 이야기가 고대의 구전되어 오던 내용에 후대의 요소들이 덧붙여졌을 가능성도 제기된다.[6] 한국의 주류 역사학계에서도 단군을 실존 인물이나 역사적 사실로 보기보다는 "창작전설"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7]

2. 2. 건국 및 발전

과거 역사학에서는 고조선의 역사를 지배자의 이름에 따라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세 시기로 나누어 보았다. 이 관점에 따르면, 단군은 기원전 2333년(무진년)에 아사달 또는 평양에서 단군조선을 건국했다고 전해진다. 단군은 약 1000여 년간 나라를 다스리다가 기원전 1122년(기묘년)에 기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아사달의 산신이 되었다고 하거나, 기자가 오기 164년 전인 기원전 1286년에 왕위를 떠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현대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기원전 11세기경 단군조선이 소멸했다는 주장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대신 위만조선이 성립된 기원전 194년까지의 역사를 모두 단군조선 또는 고조선의 역사로 간주한다.

단군조선 초기 강역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다.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설[98]과 요동 일대를 중심으로 요동반도 및 한반도 북부(평안도, 황해도)에 걸쳐 있었다는 설[99]이 대표적이다. 일부 재야사학계에서는 "난하 요서설" 등을 근거로 요서 지역까지 강역에 포함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100] 고고학적으로는 미송리형 토기와 비파형동검이 단군조선(고조선)의 대표적인 유물로 여겨지는데, 이 유물들은 주로 랴오닝성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출토된다. 그러나 이 유물들의 출토 범위가 곧 단군조선의 강역 전체를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다수 역사학자들의 신중한 입장이다.

중국 문헌 중 고조선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전 7세기 무렵[101]의 《관자》에 나타난다. 기원전 323년경에는 중국 전국시대의 연나라와 외교적 갈등을 겪었으며, 기원전 3세기 초에는 연나라의 침공으로 서쪽 영토 2천여 리를 상실하고 만번한을 경계로 삼게 되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에서 평양 지역으로 이동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102] 중국의 역사서 《위략》에 따르면, 기원전 2세기 말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자 당시 고조선의 왕이었던 부왕(否)이 형식적으로 진나라에 복속하였다고 한다. 이후 진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많은 중국 유민들이 고조선으로 유입되었으며, 특히 기원전 195년에는 한나라에서 망명해 온 위만을 받아들여 서쪽 국경 수비를 맡겼다. 그러나 기원전 194년, 위만은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위만조선을 세웠다.

단군조선에 대한 문헌 기록은 고려 시대 일연이 저술한 《삼국유사》(1280년대 편찬)에 처음 등장한다. 《삼국유사》는 《위서》를 인용했다고 밝히고 있으나[1], 실제 진수의 《삼국지》 위서나 위수의 《북위서》 등 현존하는 중국 정사에는 단군 관련 기록이 전혀 없어, 《삼국유사》의 인용 부분은 후대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44][46]동국통감》(1485년)에도 유사한 설화가 실려 있다. 단군이라는 인물이 실존했거나 단군조선이라는 국가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고고학적, 문헌적 증거는 매우 부족하며, 연구자들은 단군이 실존 인물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2] 또한 《삼국유사》 이전의 기록에서 단군의 실존을 입증할 수 없기 때문에, 단군 신화는 한국 민족주의 역사학의 중요한 근거로 삼는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의 국제 학계에서는 신뢰성이나 가치가 있는 문헌으로 간주되지 않는다.[1] 단군 이야기는 중국 사서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35], 한국 역사서에서도 13세기에 이르러서야 불교 설화의 일부로 나타날 뿐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신화'''로 취급된다. 근래에 등장한 《환단고기》나 《규원사화》 등에는 《삼국유사》와 다른 내용의 단군조선 역사가 기록되어 있으나, 이 책들은 학계에서 위서로 판단하고 있다.[1] 이영훈은 단군신화가 창작 과정에서 일본 신화를 차용했으며, 모방한 점이 보인다고 지적하기도 했다.[3]

"왕검"이라는 호칭은 중국 삼황오제임금의 호칭과 유사하며, 이를 근거로 단군 신화가 중국 삼황오제 신화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

삼국유사》에는 단군조선의 첫 번째 왕인 단군과 마지막 왕으로 언급되는 준왕 등에 대한 기록만 있을 뿐 중간 시기의 왕들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여, 일부 한국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단군조선의 구체적인 실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4]규원사화》나 《환단고기》에는 47대에 이르는 단군 왕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이 문헌들은 20세기에 만들어진 위서로 여겨진다.[4]

삼국유사》 자체의 성격에 대해서도 중국의 《수신기》처럼 민간의 기이한 전승을 모은 괴이 역사 전설집에 가깝다는 지적이 있으며,[5] 단군 역시 "괴이소설 기사 속의 개국 시조"라는 평이 있다.[5] 《삼국유사》의 단군 건국 신화는 《고기》(古記)를 인용했다고 하나, 그 내용은 고대의 구술사 일부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상당 부분은 후대에 덧붙여졌을 것으로 추정된다.[6] 일각에서는 한국주류 역사학계조차 단군을 "창작전설"로 부인하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7]

2. 3. 멸망 이후

근대 역사학이 형성되기 이전에는 기묘년(기원전 1122년)에 단군기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단군조선이 끝났다고 보았다. 혹은 기원전 1286년에 단군이 왕위를 떠났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현대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이러한 전통적인 구분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44][46] 따라서 기원전 11세기 무렵 단군조선이 소멸되었다는 내용 역시 인정되지 않으며, 위만조선이 성립되는 기원전 194년까지의 역사를 모두 단군조선 및 고조선의 역사로 간주한다.

말기의 혼란기에 중국 유민들이 고조선으로 많이 이주해왔다. 기원전 195년, 연나라 출신 위만이 망명해오자 당시 고조선의 왕이었던 준왕은 그를 받아들여 서쪽 변경의 수비를 맡겼다. 그러나 기원전 194년, 위만은 세력을 모아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위만조선을 세웠다. 이로써 단군을 시조로 하는 고조선 시대는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다.

3. 역사적 평가

단군조선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해왔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는 단군을 국가의 시조(國祖)로 여겨 제사를 지내는 등 중요하게 인식하였다. 특히 단군조선은 중국에 버금가는 오랜 역사를 지녔다는 민족적 자부심의 근거로 강조되기도 했다. 그러나 문자 기록이 부족했던 고대의 역사인 탓에 관련 기록이 매우 적고 정확한 연대도 불분명하다. 또한 중화사상에 기반한 사대주의의 영향으로 중국에서 온 기자를 시조로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많은 사찬 역사서들은 단군조선 대신 기자조선이나 삼국 시대부터 역사를 서술하는 경우가 많았다. 단군조선은 기자조선 기록에 덧붙여지거나 별도로 간략히 다루어지는 데 그쳤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단군조선과 단군신화의 역사성을 부정하며 신화로 폄하하였다. 이들은 식민사관의 '타율성론'에 근거하여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영향력을 강조하며 한국사의 자율적 발전을 부정하려 했다.[103] 이에 맞서 박은식, 신채호민족사학자들은 단군조선을 한민족 역사의 시작이자 민족 정신의 뿌리로 강조하며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103]

광복 이후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학계는 각기 다른 시각에서 단군조선을 연구하고 해석해왔다. 대한민국 학계에서는 주로 고조선 연구의 틀 안에서 단군신화와 관련 기록을 분석하며, 단군을 특정 시기 지배자의 칭호나 상징적 존재로 보는 경향이 있다.[104] 반면 북한 학계는 1990년대 이후 단군을 실존 인물로 보고 평양 중심의 고조선 역사를 강조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는데, 이는 정치적 요인과 관련이 있다는 평가가 있다.[106][107]

단군 신화의 성립 시기와 배경에 대해서도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삼국유사》에 처음 기록된 단군 이야기가 그 이전의 고유 신앙에 기반한 것인지, 혹은 고려 시대의 민족적 자각 속에서 형성된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몽골의 고려 침공과 같은 외세의 침입에 맞서 민족적 통합을 이루기 위해 단군 신화가 강조되었다고 보기도 하며,[14][15] 또 다른 연구자들은 여진족의 건국에 대한 고려인의 민족적 자존 의식이 반영된 결과라고 분석하기도 한다.[51] 신화 내용에 나타나는 풍백, 우사, 운사나 '천부인', 삼재사상 등에서 중국 고대 사상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9][11][12]

단군 및 단군조선의 실존 여부는 여전히 논쟁적인 주제이다. 《삼국유사》 외의 기록이나 고고학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점,[2][4] 중국 정사에 관련 기록이 없다는 점[44][46][35] 등을 근거로 단군조선의 실체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비판적 시각이 국내외 학계에 존재한다.[1][16][63] 특히 일본 학계에서는 에도 시대부터 단군에 대한 관심을 보이면서도, 메이지 시대 이후로는 단군 신화의 후대 창작설이나 비역사성을 주장하는 견해가 주를 이루었다.[86][88]

오늘날 단군은 한민족의 시조로서 민족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 역사적 실체와 해석을 둘러싼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단군 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시각에 대한 비판과 함께,[2][7] 이를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과도하게 해석하거나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경향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39][78]

3. 1. 대한민국

일제강점기 식민사관에 맞서 박은식, 신채호 등 민족사학자들이 단군조선을 민족의 시원으로 강조한 흐름은 광복 이후 대한민국 역사 인식에 영향을 미쳤다.[103]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단군신화 및 단군조선 기록을 통해 고조선의 역사와 사회상을 분석하는 연구를 진행해왔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단군조선이라는 독립된 왕조보다는 고조선위만조선의 2단계 구분을 따르며, 단군왕검의 건국 연대로 전해지는 기원전 2333년 전후 시기는 아직 국가 형성 이전 단계로 본다. '단군'은 랴오닝성 및 한반도 서북부 지역의 초기 정치·종교적 지배자를 가리키는 칭호였을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104]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단군을 신화적 존재나 전설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는 지적도 있으며,[7] 일부 연구자들은 《삼국유사》 기록의 한계 등을 들어 단군조선의 실존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4]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고조선을 "역사상 한반도에 탄생한 최초의 국가"로 설명하며, 기원전 2333년부터 기원전 108년까지 존속했다고 기술한다. 청동기 유물 등을 근거로 제시하지만, 일부 연구자들은 당시 사회가 '국가'로 불릴 만한 규모였는지, 또는 설명에 정치적 의도가 개입되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2]
교과서 서술 변화와 논쟁대한민국의 역사 교과서는 오랫동안 고조선 관련 서술에서 단군 신화를 중요하게 다루어 왔다. 교과서는 단군 신화가 청동기 시대 문화를 배경으로 한 고조선의 성립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며,[28] 농경 사회와 토테미즘 신앙 등 당시 사회상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고 설명한다.[27] 이러한 교육을 통해 많은 학생들은 단군과 고조선 건국을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게 된다는 평가가 있다.[34]

1999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일본 교과서가 한사군부터 서술하여 한국사의 시작을 늦춘다고 비판하며, 한국 교과서처럼 고조선을 최초의 국가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4][26] 2000년대 들어 정선, 춘천 등지에서 기원전 20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기 유물이 발굴되면서, 청동기 시대 시작 시점을 올려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를 배경으로 2007년 교육인적자원부(현 교육부)는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서술 지침을 변경하여, 기존의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라는 표현을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로 수정하도록 했다.[31]

그러나 이러한 교과서 개정은 학계의 논란을 낳았다. 송호정(한국교원대학교) 등 일부 학자들은 해당 유물이 발굴 초기 단계이며, 본격적인 청동기 시대 시작은 기원전 10세기경이라는 것이 학계의 주류 의견이라고 지적했다.[32] 또한, 중화인민공화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개입된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되었다.[32] 노태돈(서울대학교) 역시 기원전 2333년이라는 연대는 중국의 요(堯)와 시대를 맞추기 위해 후대에 설정된 것으로 역사적 근거가 부족하며, 고고학적으로도 기원전 10세기 이전으로 소급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79]
학계의 비판적 성찰단군 신화와 고조선 역사 해석을 둘러싼 담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도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특히 '단군의 자손', '5000년 단일 민족'이라는 개념에 대해, 이선복(서울대학교), 한홍구, 허동현(경희대학교) 등은 이것이 교육적, 민족주의적 목적을 위해 강조되었을 뿐, 실제 역사 기록이나 사회 구조(외부 유입 인구, 신분제 등)를 고려할 때 과학적,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지적한다.[72][73][47][48][76]

또한, 단군 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도 높다. 이청규(영남대학교), 이기백(서강대학교), 이종욱(서강대학교) 등은 단군 신화가 배타주의나 극단적 민족주의로 이어질 수 있음을 우려하며, 신화 자체보다는 그것이 형성되고 수용된 역사적 맥락을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2][4][71] 노태돈은 단군이 몽골의 고려 침공 시기 민족 통합의 상징으로 부각되었고, 일제강점기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강조되었지만, 현대 사회에서 이를 국가주의 강화의 기호로 사용하는 것은 역사의 반동일 수 있다고 비판했다.[78] 일부 학자들은 단군 신화에 대한 강조가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 등 다른 고대사 부분을 소홀히 다루게 만드는 문제점도 지적한다.[32]

북한1993년 단군릉 발굴 이후 단군을 민족 시조로 내세우는 것에 대해, 대한민국 학계에서는 이를 주체사상 강화 등 정치적 목적과 연관 지어 해석하는 시각이 일반적이다.[107][79]

3.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의 역사학계는 1990년대 이전까지 사회주의 역사학에 입각하여 단군조선 및 기자조선의 실체를 모두 인정하지 않고 고조선이라는 국가로 이해하였다. 또한 고조선의 강역을 랴오닝성 중심으로 보았다.[105]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입장을 바꾸어, 1993년 평양 인근에서 단군릉을 발굴했다고 발표하는 등 단군 신화를 역사적 실체로 보고 평양 일대를 고조선의 중심지로 강조하기 시작했다.[106] 북한은 발굴된 유골을 "전자 스핀 공명법"으로 연대 측정한 결과 5011년 전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단군을 실존 인물로 발표했다. 하지만 이 연대는 단군 신화에 기반한 건국 연대와 667년의 차이가 있으며, 연대 측정의 구체적인 해석 방법은 공개되지 않아 그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또한, 해당 유적은 본래 고구려 시대의 고분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북한은 이 자리에 콘크리트 구조물로 된 새로운 단군릉을 건설했다.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북한의 이러한 입장 변화가 주체사상을 강조하려는 정치적 요인에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107]

북한 정권은 초기에는 사회주의 이념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단군 전설을 미신으로 여겼으나, 이후에는 단군 신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김씨 일가가 단군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2] 김일성 스스로 단군의 후손임을 자처하며 "조상의 가호로 승리를 얻었다"고 연설하기도 했다.[35]

북한의 정부 기관지인 『민주조선』은 1993년 8월 31일 자 기사에서 "일본의 황당무계한 건국 신화에 의해서도, 그들의 국가 기원 연대는 기원전 660년을 더 넘을 수 없지만, 우리의 단군 신화(조선의 건국 신화)나 단군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조선의 건국 연대는 기원전 23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로써 일본의 역사가 조선보다 1600년 이상 짧아지며, 따라서 자연스럽게 문화도 그만큼 뒤떨어진다"고 주장하며 단군을 통해 민족사의 우월성을 강조했다.[36]

3. 3. 일본

일제강점기에 단군조선은 고조선과 함께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역사적 실체가 부정당하였다. 일제는 단군조선과 단군신화가 신화에 불과하고 역사성이 없어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식민사관의 일환인 ‘타율성론’에 입각하여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식민지배가 계속되었다고 주장하였다.[103]

에도 시대부터 일본 학자들은 단군조선에 관심을 보였다. 1667년 도쿠가와 미쓰쿠니의 명으로 간행된 『동국통감』의 화각본 서문에서 하야시 라잔은 단군을 조선의 시조로 언급하면서도, 일본 신화의 스사노오노미코토를 삼한의 시조 중 하나로 여겨 일본과 조선을 동일시하려는 시각을 드러냈다.[82] 이는 이후 일부 일본 학자들이 단군과 스사노오노미코토를 연결 짓는 주장의 배경이 되었다.[82] 예를 들어 오치아이 나오즈미는 단군이 스사노오노미코토의 아들인 이소타케노 미코토와 같은 신이라고 주장했다.[83] 그러나 하야시 타이슈는 이러한 주장을 "억지스럽다"고 비판하며, 단군 자체를 "황당무계하여 갑자기 믿을 수 없다"고 평가절하했다.[84]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 학계에서는 단군조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함께 비판적인 시각이 주를 이루었다.

  • 요시다 도고는 1893년 저서에서 단군을 "결코 믿을 수 없다"고 단정했다.[85]
  •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단군 전설이 불교 설화에 기반한 "가공의 선담(禪談)"이며 "망탄하다"고 주장했다.[86][87]
  • 나카 미치요 역시 단군 전설이 한반도 고유의 것이 아니라 후대 승려들이 불교 설화를 바탕으로 날조한 것이라고 비판하며 시라토리의 주장을 지지했다.[88][52]
  • 쓰보이 구마조는 단군을 포함한 신라 고전설이 불교적 색채가 강해 비판적인 분석이 필요하다고 보았다.[89]
  • 하야시 다이스케도 단군 설이 "황당무계하여 믿을 수 없다"고 평가했다.[53][54]
  • 오다 쇼고는 단군 전설이 불교와 관련 있으며, 이이, 이익, 안정복 등 조선의 학자들도 이를 부정했다고 주장하며 단군조선을 역사로 인정할 수 없다고 보았다.[53][56][92]
  • 구로이타 가쓰미는 단군과 기자는 역사적 인물이 아닌 신화적 존재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95]


일부 학자들은 단군 신화의 형성 배경이나 성격에 주목했다.

  • 미우라 슈코는 단군 신화가 기자조선 전설에 대한 반발과 민족 자결 의지 속에서 형성되었다고 분석했다.[90]
  • 다카하시 도루는 단군 전설의 원형은 북조선 지역 군장 이야기였으나 후대에 불교 등의 영향으로 각색되었으며, 대종교 등이 단군을 한민족 전체의 시조로 보는 것은 역사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비판했다.[91]
  • 이마니시 류는 단군을 퉁구스계 민족 중 부여의 신으로 규정하며, 한민족 전체의 시조신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조선 신궁에 단군을 합사하려는 움직임에도 반대했다.[60][61][62][96]
  • 스에마쓰 야스카즈는 단군조선 관련 기록이 고려 후기에 처음 등장하며, 이는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과는 달리 고려인들이 자신들의 역사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것이라고 분석했다.[97]
  • 후지나가 소는 위만조선은 실존했지만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은 설화적 요소가 강하다고 보았다.[59]
  • 야기 다케시는 단군 신화가 고려 시대에 여진족의 에 대한 반감과 민족 의식이 고조되면서 민족 시조로서 탄생했다고 분석했다.[51]
  • 미야와키 준코는 몽골 제국의 지배 하에 있던 고려에서 민족주의를 고취하기 위해 단군 신화가 창작되었다고 주장했다.[67]


한편, 식민사관에 입각하여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한반도 역사의 타율성을 강조하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 이나바 이와키치는 단군 신화의 허구성을 주장하며 만선사관에 입각해 조선 역대 왕조가 만주나 중국 대륙에서 온 이주민에 의해 세워졌으며 조선만의 독자적인 역사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단군 숭배를 민족 자결 움직임으로 보면서도 역사적 사실과는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57][58][62][93] 이러한 주장은 하다 다카시 등에 의해 비판받았다.[57][62]
  • 아오야기 난메이는 단군과 일본 신화를 동일시하며 내선일체를 정당화하려는 시각을 보이기도 했다.[94]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사』에서는 단군을 역사적 사실로 다루지 않았다. 편찬 위원회에서 최남선은 단군 관련 내용을 포함할 것을 주장했으나, 구로이타 가쓰미 등 일본 측 위원들은 단군이 신화적 인물이라며 반대하여 결국 단군은 '조선사'에서 역사 속 자리를 잃게 되었다.[5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일본 학계에서는 단군조선에 대한 다양한 연구와 평가가 이어졌다.

  • 다케다 사치오가 편저한 『한국사』에서는 단군 신화가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며 민족성 파악에는 유용할 수 있으나, 이를 통해 역사적 사실을 추구하기는 어렵다고 서술했다.[24]
  • 다나카 도시아키는 북한의 단군릉 발굴 등을 언급하며 단군 실재화 시도가 있지만, 기록상 신화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45]
  • 오카다 히데히로는 단군 신화가 13세기 『삼국유사』에 처음 등장하며, 북한의 단군릉 발굴은 주체사상에 기반한 정치적 행위라고 평가했다.[46]
  • 호가 가즈오는 역대 왕명이 전해지지 않는 점 등을 들어 단군조선의 실재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지적하고 있다.[63]
  • 가토 도루는 한국에서 단기를 사용한 것을 민족주의적 필요성과 연결하며, 후발 국민 국가일수록 역사의 오래됨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50]
  • 스에히라는 단군 신화가 위만조선 건국(중국인)과 중화 제국에 대한 속국 의식이라는 열등감에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했다.[64]
  • 구라야마 미쓰루는 한국인들이 단군 신화를 통해 중국과 대등한 오랜 역사를 가졌다고 생각하며, 이는 중화사상에 대한 반발 심리와 관련 있다고 평가한다.[65][66]
  • 나가시마 히로키는 한국 사회 내부의 단군 인식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49]


일본 교과서에서의 단군조선 및 고조선 서술 문제도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1999년 대한민국교육부 산하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일본 중등학교 역사 교과서 분석 보고서에서, 일부 일본 교과서가 고조선을 생략하거나 한사군부터 서술함으로써 한국사의 시작을 의도적으로 늦추고 초기부터 중국의 지배를 받은 것처럼 암시한다고 비판했다.[24][25] 보고서는 일본 교과서가 한반도의 선사 시대와 고조선의 실체를 인정하고, 한국의 청동기 문화가 일본에 미친 영향을 명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26]

3. 4. 중국

고려 시대 일연의 저서 《삼국유사》(1280년대 성립)에는 《위서》를 인용하여 단군조선에 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하지만[1], 정작 진수의 《삼국지》 위지나 위수의 《북위서》 등 중국의 사서에는 단군에 해당하는 기록이 전혀 없다[44][46][35]. 이는 단군조선의 실존 여부에 대한 논쟁의 주요 근거 중 하나가 된다.

과거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한 사대주의의 영향으로, 중국 은·주에서 도래한 기자를 국가의 시조로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때문에 사대부들이 편찬한 많은 역사서에서는 단군조선 대신 기자조선이나 삼국부터 역사를 서술하였고, 단군조선은 기자조선 기록에 부수적으로 언급되거나 별도로 다루어지곤 했다. 또한 단군의 칭호인 "왕검"이 중국 삼황오제 임금의 호칭과 같다는 점에서, 단군 신화가 중국 신화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1].

현대에 들어 대한민국의 역사 교육에서는 단군조선을 한국사의 시작점으로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1999년 대한민국교육부 산하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일본과 중국의 일부 중등학교 역사 교과서가 고조선 대신 한사군 설치부터 한국사를 서술하는 경향을 비판했다. 이는 한국사의 시작 시점을 의도적으로 늦추고, 초기부터 중국의 지배를 받은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지적이었다[24]. 반면 한국의 교과서는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음을 명시하고 단군 신화를 소개하며, 이를 통해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고자 한다[24][27][28]. 특히 2007년에는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는 서술을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로 수정하여[31], 단군조선의 건국을 역사적 사실로 더욱 명확히 기술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중화인민공화국의 동북공정과 같은 역사 왜곡 시도에 대응하여 한국사의 독자성과 유구함을 강조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해석되기도 한다[32].

한편, 1981년 당시 교육부 장관이었던 안호상은 단군과 기자가 실존 인물이며 그 영토가 중국베이징까지 미쳤고, 한사군 역시 베이징 부근에 있었다는 등의 주장을 담은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다[29][30]. 또한 일부 연구자들은 위만조선이 중국 출신인 위만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사실과 이후 중국 왕조의 영향력 아래 놓였던 역사적 경험에 대한 반작용으로, 민족의 독자적 기원인 단군 신화가 더욱 강조되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분석하기도 한다[64]. 베이징 대학의 송성유와 같은 일부 중국 학자들은 한국의 민족주의 사학이 신화와 역사적 사실을 혼동하여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44].

중국이 고구려사를 자국 역사의 일부로 편입하려는 동북공정과 같은 시도를 하는 상황에서, 한국에서는 단군을 중심으로 한 민족사의 독자성과 오랜 역사를 강조하며 이에 대응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단군 신화가 단순한 고대 설화를 넘어 현대 한국의 민족 정체성 및 역사 인식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68].

4. 문헌 기록

현존하는 문헌 중 단군조선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전 7세기 무렵[101]의 중국 문헌인 《관자》(管子)에 등장한다. 이후 기원전 323년에는 중국 전국시대의 연나라와 외교적 마찰이 있었으며, 기원전 3세기 초에는 연의 공격으로 영토 일부를 상실했다는 기록이 있다. 《위략》(魏略)에는 기원전 2세기 말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자 당시 조선왕 (否)가 형식적으로 진나라에 복속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의 문헌 기록으로는 《삼국유사》, 《제왕운기》, 《동국통감》, 《조선왕조실록》 등이 주요하다. 이 중 《삼국유사》 <기이>(紀異) 편에 실린 단군신화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는 현존하지 않는 《고기》(古記) 또는 《조선고기》(朝鮮古記)를 인용하여, 환인(桓因)의 서자 환웅(桓雄)이 태백산(太伯山, 현재의 묘향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고 인간 세상을 다스렸다고 전한다. 이때 호랑이가 사람이 되기를 원했는데, 환웅이 내린 쑥과 마늘을 먹고 햇빛을 피하는 금기를 지킨 곰만이 웅녀(熊女)라는 여자가 되었다. 웅녀는 환웅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단군왕검(檀君王儉)이다. 단군왕검은 요(堯)임금 즉위 50년인 경인년(庚寅年)에 평양성(平壤城)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이후 아사달(阿斯達)로 도읍을 옮겨 1,500년간 나라를 다스리다가, 주나라 무왕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후에 아사달에 돌아와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고려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 환웅의 손녀가 약을 먹고 인간이 되어 단수신(檀樹神)과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기록하여 《삼국유사》와는 다른 계보를 전한다. 또한 단군이 1,028년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기록했다.

조선 시대에 편찬된 《동국통감 외기》(東國通鑑外紀)에는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자 사람들이 임금으로 삼아 단군이라 하였고, 국호를 조선이라 했으며 이는 요(堯)임금 무진년(戊辰年, 기원전 2333년)의 일이라고 기록했다. 처음에는 평양에 도읍했다가 뒤에 백악(白岳)으로 옮겼으며, 상나라 무정(武丁) 8년(기원전 1317년)에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단군을 한민족의 시조로 인식하고 국가 차원에서 제사를 지낸 기록이 다수 나타난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년), 태조는 단군을 동방 최초의 임금으로 언급하며 평양부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명했다. 1416년(태종 16년), 태종은 단군이 요(堯)임금 무진년에 하늘에서 내려온 시조이며, 중국의 제후국이 아님을 강조했다. 1436년(세종 18년), 유사눌(柳思訥)은 《역대세년가》(歷代世年歌)를 근거로 단군이 처음 평양에 도읍했다가 백악으로 옮겼고, 구월산(九月山)이 단군이 신이 된 아사달산이며 그곳에 사당이 있다고 주장했다. 1695년(숙종 21년), 황해도 삼성사(三聖祠)의 단군 축문을 평양 단군사의 예에 따라 '전조선(前朝鮮) 단군'이라 쓰도록 했다. 1763년(영조 39년), 영조는 단군, 기자 및 삼국 시조의 능을 수리하도록 명했으며, 1765년(영조 41년)에는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의 삼성(三聖)이 환인, 환웅, 단군임을 확인하고 이들의 관계(환웅은 단군의 아버지, 환인은 단군의 할아버지)를 언급했다.

이러한 기록들은 단군신화가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오랫동안 한민족의 정체성과 역사 인식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왔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단군조선의 구체적인 역사나 사회상을 상세하게 전하는 신뢰할 만한 동시대 기록은 부족한 실정이다.

한편, 20세기 초에 알려진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환단고기》(桓檀古記), 《부도지》(符都誌) 등은 고조선의 역사를 상세히 서술하고 있으나,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이들 서적을 내용과 형식상의 문제로 인해 위서로 판단하고 있다. 특히 《환단고기》의 경우, 청나라 가경 5년(1800년)에야 명명된 '장춘'(長春) 지명이 등장하거나, '남녀평등', '부권' 등 근대 이후의 사회 용어가 사용된 점 등을 근거로 20세기 이후에 창작된 위서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규원사화》 역시 17세기에 저술되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위서 논란을 해소하지는 못하고 있다.

5. 현대적 의의

단군조선은 현대 한국 사회에서 단순한 고대사를 넘어 민족 정체성, 남북 관계, 역사 교육 등 다양한 영역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한민족의 기원과 유구한 역사를 상징하는 존재로서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오늘날에도 단군조선은 남한북한 모두에게 중요한 역사적 상징이지만, 각기 다른 정치적, 이념적 맥락 속에서 해석되고 활용되면서 남북 간의 역사 인식 차이를 드러내는 지점이 되기도 한다. 또한 학교 역사 교육에서의 서술 방식, 역사적 실체와 신화적 성격에 대한 학술적 논쟁은 동아시아의 역사 인식 문제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지속적인 논의를 낳고 있다. 이처럼 단군조선은 과거의 기록을 넘어 현대 한국 사회의 여러 단면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되고 있다.

5. 1. 한국 민족주의와 단군조선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단군조선은 국가의 시조로서 중요하게 여겨졌다. 단군과 기자는 국조(國祖)로서 제사를 지냈으며, 단군조선은 조선의 역사가 중국에 못지않게 오래되었다는 자부심의 근거로 강조되었다. 그러나 문자 기록이 부족했던 고대 국가였기에 단군조선 관련 기록은 매우 적고 정확한 연대도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중화사상에 기반한 사대주의로 인해 중국에서 온 기자가 시조로 더 선호되면서, 사대부들이 편찬한 많은 역사서는 대부분 단군조선이 아닌 기자조선이나 삼국 시대부터 서술하기 시작했다. 단군조선은 기자조선 기록에 덧붙여지거나 별도로 다루어졌다.

일제강점기에 단군조선은 고조선과 함께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역사적 실체가 부정당했다. 일제는 단군조선과 단군신화가 신화일 뿐 역사성이 없다고 주장했으며, 식민사관의 '타율성론'에 따라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식민지배가 계속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일제의 식민사관에 맞서 박은식, 신채호 등 민족사학자들은 단군조선을 민족의 시초 국가로 강조했다. 신채호에게 단군은 조선 민족과 조선 최초 국가의 창시자이며, 조선 역사에 필요한 출발점이었다[20]. 그는 단군과 같은 고대 인물이 조선을 건국했다는 것은 조선이 중국보다 오래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며, 단군이 중국을 식민지화했다는 가공의 이야기는 조선이 중국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중국 신화의 황제와 현인은 사실 조선인이었다고 주장했다[22]. 조선 시대 역사가들은 조선의 기원을 중국 난민에게서 찾고 기자조선과 신라를 중시했으나[17], 신채호의 영향으로 1930년대 이후 단군조선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게 되었다[18]. 단군조선은 민간 신앙을, 기자조선은 유교를 배경으로 하여, 한국에서는 자국 문화 존중이라는 측면에서 민족 문화를 형성하는 단군조선이 점차 유리해졌다[19]. 민족사학자들은 한민족뿐 아니라 만주, 몽골 등도 단군조선의 후계 국가 또는 민족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103] 한편, 시라토리 구라키치이마니시 류와 같이 단군을 『삼국유사』 저자의 창작물이라고 비판한 일본 학자들에 대해, 민족주의 역사학자 최남선일본 신화 역시 창작된 것이라고 반박하기도 했다[21].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단군신화 및 단군조선 연구를 통해 고조선의 역사와 사회상을 분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단군조선이라는 별도의 왕조는 인정하지 않고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두 시기로 구분하며, 단군은 랴오닝성 및 한반도 서북부 여러 부족 국가의 정치·종교적 지배자를 가리키는 칭호로 이해한다.[104] 2007년 2월 23일 대한민국 교육인적자원부는 교과서 서술 지침을 변경하여,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는 표현을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로 수정하여 단군 건국을 좀 더 명시적으로 기술하도록 했다. 이는 정선, 춘천 등지에서 발견된 청동기 초기 유물(덧띠새김무늬 토기 등)이 기원전 2000년경으로 추정되면서, 고조선 건국 시기와 청동기 도입 시기가 일치할 수 있다는 학계의 지적을 반영한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학계는 1990년대 이전까지 사회주의 역사학에 입각해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실체를 모두 부정하고 고조선이라는 국가로 이해했다.[105]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입장을 바꿔 단군릉을 발굴하는 등 단군신화를 역사적 실체로 보고 평양 일대를 고조선의 중심지로 강조하기 시작했다.[106]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이러한 북한의 입장 변화가 주체사상을 강조하는 정치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107] 북한 학계는 "단군 신화는 비록 판타지적인 내용이 담겨 있어도 고조선의 건국 과정이 반영되어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단군 신화에서 샤머니즘의 종교관과 토템의 사회적 요소를 찾으려는 이기백(서강대학교)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23].

현대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단군 신화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2002년 제7차 국정 교과서 개정 『국사』는 "신화는 그 시대 사람들의 관심이 반영된 것이며,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단군 기록 또한 청동기 시대문화를 배경으로 한 고조선의 성립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기술했다[23]. 중학교 『국사』에서는 신화 속 인물인 단군이 조선 최초의 국가를 건국했음을 명시하고, 신화를 통해 건국 당시의 상황(곰과 호랑이 숭배 신앙, 농경 사회 배경 등)을 추측할 수 있다고 서술한다[27]. 고등학교 『국사』 역시 단군 신화가 조선의 시조 신화이지만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서술하며[28], 고조선을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로 명시하고 중국과 대결할 정도로 발전했다고 기술한다[28]. 초등학교 『사회』에서도 청동기 문화를 기초로 기원전 2333년에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했으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라고 명시한다[33].

1981년 대한민국교육부 장관이었던 안호상은 단군과 기자의 실존, 그 영토가 중국 베이징까지 이르렀다는 주장 등을 담은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다[29][30]. 이후 1982년부터 2006년까지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한다'''"라고 『삼국유사』 등을 인용하여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을 서술했으나[31], 2007년 『국사』부터는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했다'''"라고 단정적으로 서술하여 역사적 사실로 확정했다[31]. 또한 2006년까지 교과서는 한반도 청동기 시대를 기원전 10세기경으로 보았으나[31], 2007년 『국사』부터는 청동기 시대를 기원전 2000년경부터 기원전 1500년경에 본격화되었다고 기술하여[31], 기원전 2333년이라는 고조선 건국 연대까지 사실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교과서 개정에 대해 송호정(한국교원대학교)은 한국 고고학계의 주류 견해(본격적인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10세기 시작)와 다르며, 개정 근거가 된 유물 발굴이 완료되지 않았고 보고서도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졌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것이 중화인민공화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여 역사의 기원을 끌어올리려는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것이며, 교과서가 단군조선의 실존을 주장하면서도 구체적인 생활상 등을 증거에 기반하여 기술하지 못하고,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에 대한 서술을 소홀히 하는 점도 지적했다[32]. 대한민국교육부 산하 한국교육과정평가원1999년 보고서에서 일본 교과서가 고조선을 제대로 다루지 않아 한국사의 시작점을 끌어내리고 중국 지배를 암시한다고 비판하며, 한국 교과서처럼 고조선의 실체를 인정하고 청동기 문화의 영향을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4][26].

한국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고조선을 "역사상 한반도에 탄생한 최초의 국가"로 설명하며, 기원전 2333년부터 기원전 108년까지 존속했고 중국 왕조와 "대등하게 경쟁할 정도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술한다. 증거로 청동기 단검이나 도자기 등 고조선 시대 유물로 추정되는 것들을 전시하지만, 이러한 설명의 세부 내용과 국가 규모에 대해서는 그 진위를 놓고 논란이 있으며 정치적인 의도에 의해 왜곡되었다고 역사학자들은 지적한다. 이 시대 한반도에 국가라고 부를 만한 규모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신빙성이 의심받고 있다[2].

일부 연구자들은 단군조선의 실존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고려 시대 일연의 《삼국유사》에 처음 등장하나[1], 인용했다는 《위서》 등 중국 사서에는 단군 기록이 없어 창작으로 보기도 한다[44][46]. 단군의 실존 증거는 거의 없으며[2], 《삼국유사》 이전 기록으로도 입증되지 않아 국제적으로 신뢰성 있는 문헌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평가도 있다[1]. 《환단고기》, 《규원사화》 등은 위서로 여겨지며 내용도 《삼국유사》와 다르다[1]. 이영훈은 단군신화가 창작 과정에서 일본 신화를 차용하고 모방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3]. 또한 《삼국유사》 자체가 민간 전승을 모은 지괴소설적 성격이 강하다는 지적도 있다[5].

단군조선의 실존에 대해 한국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삼국유사》에 첫 왕 단군과 마지막 왕 준왕 사이의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4]. (《규원사화》, 《환단고기》에는 47대 왕 이름이 있지만 위서로 간주된다[4].) 야기 타케시는 중국 사서에 단군조선 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을 들어, 해당 사서 편찬 당시에는 단군 전승이 성립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단군 설화가 고려 중기 평양 지역의 토속적인 신앙에서 창출된 후세의 설화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노우에 나오키 역시 비파형 동검이나 고인돌 분포를 바탕으로 한 연구 성과를 볼 때 『삼국유사』 등의 단군조선 기사를 긍정하기 어렵다고 보며, 일본 학계에서는 단군 설화가 10~11세기 거란 침입 시기에 형성되어 민족 통합의 상징이 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며 역사적 사실 추구는 어렵다고 평가한다[16].

단군 신화의 내용 분석을 통해 후대에 형성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예를 들어, '왕검'이라는 호칭이 중국 삼황오제임금 호칭과 유사하다는 점[1], '천부인'의 '인(印)'이 진나라 이후 천자가 사용한 어새 개념과 관련될 수 있다는 점[9], '삼(三)'이라는 숫자의 강조가 한나라 시대 동중서의 천인상관설과 천지인 사상이 정착된 이후의 개념일 수 있다는 점[9], 풍백, 우사, 운사라는 용어가 중국 문헌(『한비자』, 『사기』, 『주례』 등)에 등장하며 한나라 이후 중원에 퍼진 개념으로 보인다는 점[11], 주곡·주명·주병·주형·주선악 등 관직명이 『주례』와 매우 흡사하여 이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12] 등을 근거로 단군 신화의 성립 시기가 중국 사상이 한반도에 전파되고 숙성될 시간을 고려할 때, 한나라 이후, 혹은 육조 시대를 거쳐 · 시대까지 내려올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10].

다케다 유키오는 단군조선 설화가 13세기 말 이전에 등장했으며, 그 근거가 된 기록은 11세기 이전으로 소급될 수 있고, 거란의 고려 침공 시기에 형성되어 몽골의 고려 침공 시기에 민족 통합의 정신적 에너지가 되었다는 견해를 제시한다[14]. 다나카 토시아키는 몽골 침공 시 저항의 근거로 성립되었다고 보면서도, 전거의 성립이 10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거란 침입이 배경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15].

5. 2. 남북한 관계와 단군조선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광복 이후 단군신화 및 단군조선으로부터 고조선의 역사와 사회상을 분석하는 연구를 진행해왔다. 일반적으로 기자조선과 함께 단군조선이라는 특정 왕조의 실체는 인정하지 않으며,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두 시기로 구분한다. 고조선의 건국 연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통상 단군조선 시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기원전 23세기에서 기원전 11세기에 이르는 기간은 아직 고조선이라는 국가가 완전히 형성되지 않았던 시기로 본다. 한편, 단군이라는 명칭은 랴오닝성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분포했던 여러 촌락 또는 부족 국가의 정치적·종교적 지배자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칭호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104]

2000년대 들어 대한민국정선, 춘천 등지에서 청동기 시대 초기 유물로 보이는 덧띠새김무늬 토기가 기원전 2000년경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빗살무늬토기와 함께 발굴되면서, 청동기 문화를 기반으로 한 고조선 건국 시기와 청동기 도입 시기가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 주목받았다. 이에 따라 청동기 시대의 연대를 더 올려야 한다는 학계의 지적이 제기되었고, 2007년 2월 23일 교육인적자원부는 교과서 서술 지침을 수정하여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는 표현을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로 보다 명시적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한국의 주류 역사학계가 여전히 단군을 "창작된 전설"로 간주하며 그 실존 가능성을 낮게 본다는 지적도 있다.[7]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고조선을 "역사상 한반도에 탄생한 최초의 국가"(기원전 2333년~기원전 108년)로 설명하며, 당시 중국 왕조들과 "대등하게 경쟁할 정도의 세력"을 가졌다고 기술한다. 관련 유물도 전시되어 있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설명의 세부 내용에 대해 진위 논란이 있으며 정치적 의도가 개입되었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당시 한반도에 국가라고 부를 만한 규모의 정치체가 존재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2] 한국의 교과서는 2002년 제7차 국정 교과서 개정 당시, 신화 속에 당대 사람들의 관심과 역사적 의미가 반영되어 있으며, 단군 기록 역시 청동기 시대 문화를 배경으로 한 고조선 성립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다고 기술하고 있다.[23]

북한의 역사학계는 1990년대 이전까지 사회주의 역사학의 관점에서 단군조선 및 기자조선의 실체를 모두 부정하고 고조선이라는 단일한 국가로 이해하였다. 당시 고조선의 중심 강역은 랴오닝성 일대로 보았다.[105]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입장을 변경하여, 단군릉을 발굴했다고 주장하는 등 단군신화를 역사적 실체로 해석하고 평양 일대를 고조선의 중심지로 강조하기 시작했다.[106] 대한민국의 학계에서는 이러한 북한의 입장 변화가 주체사상을 역사관에 적용하려는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한다.[107]

북한 정권은 초기에는 사회주의 이념과 맞지 않는다며 단군 전설을 미신으로 치부했으나, 이후 정치적 목적을 위해 단군 신화를 적극 활용하여 김일성 일가를 단군 전설의 계승자로 포장하려는 시도를 보였다.[2] 김일성 자신도 단군의 후손임을 내세우며 "조상의 가호"를 언급하기도 했다.[35] 1993년에는 단군의 유골을 발견했다고 발표하며, "전자 스핀 공명법" 연대 측정을 통해 5011년 전의 것이라고 주장, 단군을 실존 인물로 공식화했다. 그러나 이 연대는 단군 신화상의 건국 연대와 600년 이상 차이가 나며, 측정 방법의 구체적인 내용이 공개되지 않아 결과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또한, 같은 해 고구려 시대의 고분을 단군 묘라고 주장하며 그 자리에 콘크리트 구조물인 "단군릉"을 건설하였다. 북한 학계는 단군 신화가 비록 환상적인 요소를 포함하지만 고조선 건국 과정을 반영하며, 샤머니즘이나 토템 사상 등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고 본다.[23] 1993년 8월 31일 자 민주조선은 "일본의 황당무계한 건국 신화에 의해서도, 그들의 국가 기원 연대는 기원전 660년을 더 넘을 수 없지만, 우리의 단군 신화(조선의 건국 신화)나 단군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조선의 건국 연대는 기원전 23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로써 일본의 역사가 조선보다 1600년 이상 짧아지며, 따라서 자연스럽게 문화도 그만큼 뒤떨어진다"는 내용의 기사를 통해 일본의 건국 신화와 비교하며 단군 신화에 근거한 조선의 오랜 역사를 내세워 민족적 우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36]

5. 3. 동아시아 역사 논쟁과 단군조선

일제강점기에 단군조선은 식민사관에 입각한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역사적 실체가 부정되었다. 이들은 단군 신화가 신빙성이 없으며, 고조선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식민지배 역사라고 주장하는 '타율성론'을 내세웠다. 이에 맞서 박은식, 신채호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단군조선을 한민족의 뿌리 깊은 역사의 시작점으로 강조하며 일제의 주장에 반박했다.[103]

광복 이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사학계는 단군조선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대한민국 학계는 일반적으로 단군을 신화적 존재로 보며, 고조선 역사의 시작을 설명하는 상징적 인물로 이해한다. 단군조선이라는 독립된 왕조보다는 고조선이라는 큰 틀 안에서 다루며, 건국 연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2007년에는 교육인적자원부가 교과서 서술 지침을 변경하여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좀 더 명확하게 기술하도록 한 바 있다.[104] 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학계는 1990년대 이전까지 사회주의 역사관에 따라 단군조선의 실체를 부정했으나, 이후 입장을 바꿔 단군릉 발굴 등을 통해 단군을 실존 인물로 보고 평양을 고조선의 중심지로 강조하기 시작했다.[105][106] 대한민국 학계에서는 이러한 북한의 입장 변화가 주체사상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목적에 따른 것으로 해석한다.[107]

단군조선의 실존 여부와 역사적 의미에 대한 논쟁은 학계에서 지속되고 있다. 단군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 시대 일연이 저술한 《삼국유사》(13세기)에 등장하며, 《위서》를 인용한 것으로 보이나 해당 중국 사서에는 관련 기록이 없어 후대의 창작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1][44][46]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단군이라는 인물의 실존 가능성을 낮게 보며[2], 《삼국유사》 이전 기록으로 실존을 증명할 수 없어 국제적으로는 역사적 사실보다는 신화로 간주된다.[1] 최근 등장한 《환단고기》, 《규원사화》 등은 위서로 여겨진다.[1][4] 일부 학자들은 단군 신화의 내용 분석을 통해 그 성립 시기를 추정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왕검'이라는 명칭이 중국 요 임금과 관련 있거나[1], '천부인', '삼위태백' 등 '3'이라는 숫자의 상징성이 한나라 시대 동중서의 천인상관설과 관련 있다는 분석[9], 또는 풍백, 우사, 운사 등의 용어가 중국 고대 문헌에 등장하는 점[11], 주곡, 주명 등 관직명이 《주례》와 유사하다는 점[12] 등을 근거로 신화의 형성 시기를 한나라 이후 또는 · 시대로 보기도 한다.[10]

단군 신화의 형성 배경에 대해서도 여러 주장이 있다. 몽골의 고려 침공 시기(13세기) 민족적 저항 의식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견해(다나카 토시아키)[15], 또는 그보다 앞선 거란의 고려 침공 시기(10~11세기) 민족 자존 의식의 발로로 형성되었다는 견해(다케다 유키오)[14], 혹은 고려 중기 평양 지역 토착 신앙에서 유래했다는 견해(야기 타케시) 등이 있다.

단군조선은 한국 민족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왔다. 조선 시대에는 중화사상의 영향으로 중국에서 온 기자를 시조로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나[17], 20세기 초 신채호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영향으로 단군이 민족의 시조로서 중요하게 부각되었다.[18][20] 이들은 단군을 통해 한국 역사의 유구함과 중국으로부터의 독자성을 강조하고자 했다.[22] 그러나 현대에 들어 단군을 중심으로 한 단일 민족 의식은 비판적으로 검토되고 있다. 이선복[72][73], 한홍구[47][48], 허동현[76] 등은 단일 민족 신화가 근대에 형성된 '상상의 공동체'이며,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고 지적한다. 노태돈은 단군을 국가주의전체주의 강화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경계하며[78], 기원전 2333년 건국설 역시 중국 요 임금 시기와 맞추어 역사의 유구함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일 뿐 고고학적 증거와는 차이가 있다고 비판한다.[79]

여러 국내외 학자들은 단군 신화와 그 역사적 해석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제시한다. 배형일은 단군에 대한 강조가 초국가주의적 경향을 반영한다고 보았고[37], 마이클 J. 세스는 남북한 모두에서 단군이 민족의 통일성과 독자성을 강조하는 데 이용된다고 평가했다.[39][2] 이기백은 신화 속에서 민족주의를 찾는 시대는 지났다고 비판했으며[4], 서영대는 신화가 허구일지라도 고조선 형성기의 사회·정치적 상황을 반영하는 역사적 함의를 지닌다고 해석한다.[79] 일본 학계에서는 단군 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시각이 일반적이며(이노우에 나오키[16], 다케다 사치오[24]), 일부는 단군 신화가 여진에 대한 고려인의 우월 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야기 타케시[51]). 조선총독부의 '조선사' 편찬 과정에서 최남선은 단군 관련 내용을 포함할 것을 주장했으나, 일본 학자들은 단군을 신화적 인물로 간주하여 역사 서술에서 배제했다.[55]

참조

[1] 뉴스 故事》建國神話:檀君開國 https://talk.ltn.com[...] 自由時報 2015-07-08
[2] 뉴스 North Korea's box of bones: A mythical king and the dream of Korean unification https://www.reuters.[...] 2018-10-21
[3] 서적 最純潔の種族:北韓人眼中的北韓人 台北:臉譜出版社 2012
[4] 뉴스 卷頭 特别 インタビュー 韓國史新論の著者 李基白 先生が語る 韓國史の大勢と正統 http://monthly.chosu[...] 2001-11
[5] 뉴스 「韓國起源論」はこうして生まれた:中華への継承から積極的な脱漢へ、韓国の千年の自己探求の道 https://www.thenewsl[...] 関鍵評論網 2015-08-24
[6] 서적 韓國歷史與現代韓國 https://books.google[...] 台湾商務印書館 2005-08-01
[7] 뉴스 中国が土台を築き、日本が釘を打った「平壌」の漢四郡 https://www.hani.co.[...] 2009-05-21
[8] 서적 2005
[9] 서적 2005
[10] 서적 2005
[11] 서적 2005
[12] 서적 2005
[13] 서적 2005
[14] 서적 隋唐帝国と古代朝鮮 中央公論社 1997-01
[15] 서적 朝鮮地域史の形成 岩波書店 1999
[16] 서적 2010
[17] 서적 2009
[18] 서적 1999
[19] 뉴스 東アジアの祝祭日 https://www.kankyo-u[...] 公立鳥取環境大学地域イノベーション研究センター 2002
[20] 서적 1995
[21] 서적 1990
[22] 서적 2000
[23] 뉴스 北韓歴史教科書の古代史記述の問題 http://163.239.1.207[...] 西江大学 2007-12
[24] 서적 2003
[25] 서적 2003
[26] 서적 2003
[27] 서적 2012
[28] 서적 2012
[29] 서적 国史教科書の波動 ヘアン 1999
[30] 서적 2012
[31] 서적 2012
[32] 뉴스 古朝鮮歴史編入と青銅器起源 https://www.khan.co.[...] 京郷新聞 2007-03-06
[33] 서적 2012
[34] 서적 2012
[35] 뉴스 【軍事情勢】中朝韓人民を支配する「神話」 恥ずかしいウソを堂々と… https://www.sankeibi[...] 産経新聞 2014-06-08
[36] 논문 「相互認識」 東アジア・イデオロギーと日本のアジア主義 https://www.jkcf.or.[...] 日韓歴史共同研究 2005-06
[37] 서적 Constructing "Korean" Origins: A Critical Review of Archaeology, Historiography, and Racial Myth in Korean State Formation Theories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2000
[38] 서적 Constructing "Korean" Origins: A Critical Review of Archaeology, Historiography, and Racial Myth in Korean State Formation Theories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2000
[39] 서적 A History of Korea: From Antiquity to the Present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2010
[40] 서적 Archaeology of Asia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2008
[41] 서적 Korea Between Empires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3
[42] 서적 Brief History of Korea https://books.google[...] Infobase Publishing 2009
[43] 서적 The History of Korea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4
[44] 뉴스 中国边疆史学争议频发 http://phtv.ifeng.co[...] 鳳凰衛視 2006-12-11
[45] 서적 朝鮮地域史の形成 岩波書店 1999
[46] 서적 歴史とはなにか 文藝春秋 2001-02-20
[47] 서적 韓洪九の韓国現代史 韓国とはどういう国か 平凡社 2003-12-17
[48] 서적 韓洪九の韓国現代史 韓国とはどういう国か 平凡社 2003-12-17
[49] 뉴스 中韓が歴史共同研究 確信犯で嘘の主張押し通そうとするつもり (2/2) http://www.news-post[...] NEWSポストセブン 2014-04-23
[50] 서적 貝と羊の中国人 新潮社 2006-06-16
[51] 논문 書評 矢木毅著『韓国・朝鮮史の系譜 : 民族意識・領域意識の変遷をたどる』 https://ushimane.rep[...] 島根県立大学北東アジア地域研究センター 2014-03
[51] 서적 韓国・朝鮮史の系譜 : 民族意識・領域意識の変遷をたどる 塙書房 2012
[52] 서적 2005
[53] 서적 2005
[54] 서적 1987
[55] 서적 2005
[56] 서적 謂ゆる檀君伝説に就て 朝鮮教育会 1926-02
[57] 서적 「満鮮史」の虚像―日本の東洋史家の朝鮮観― 鈴木俊教授還暦記念会 1964-10
[58] 서적 朝鮮史研究の課題 太平出版社 1966-11
[59] 간행물 アジア-ノート-後期 http://www.dce.osaka[...] 大阪産業大学
[60] 서적 1987
[61] 서적 檀君考 近沢書店 1937-04
[62] 논문 「満鮮史観」の再検討 : 「満鮮歴史地理調査部」と稲葉岩吉を中心として https://hdl.handle.n[...] 新潟大学大学院現代社会文化研究科 2007-07
[63] 뉴스 「扶桑」概念の伝播-扶桑と箕子朝鮮を結ぶもの- http://wwr2.ucom.ne.[...]
[64] 뉴스 朝鮮半島が高句麗の時代から繰り返されてきた騒動の原因を検証 http://www.sankei.co[...] 2017-07-08
[65] 서적 嘘だらけの日韓近現代史 扶桑社 2013-11-30
[66] 서적 嘘だらけの日韓近現代史 扶桑社 2013-11-30
[67] 서적 韓流時代劇と朝鮮史の真実 扶桑社 2013-08-08
[68] 논문 朝鮮半島の領土論争 https://www.publicat[...] 日本大学 2013-06
[69] 서적 민족인가, 국가인가? 소나무출판사 2006-12-30
[70] 뉴스 “한국사의 정통성은 신라에… 고구려 중심사관 폐기해야” https://www.donga.co[...] 2007-01-16
[71] 뉴스 『高句麗史는 고구려 사람의 눈으로 다시 보아야 한다』 http://monthly.chosu[...] 2005-10
[72] 논문 2012
[73] 서적 화석인골 연구와 한민족의 기원 일조각 2003
[74] 서적 反日種族主義との闘争 文藝春秋 2020-09-17
[75] 서적 곰이 성공하는 나라 동인서원 2005-01-03
[76] 논문 한국 근대에서 단일민족 신화의 역사적 형성 과정 http://contents.nahf[...] 東北アジア歴史財団 2009-03
[77] 뉴스 고조선(단군조선)의 건국 기원(서기전 24세기) 불신론의 실체 https://www.skyedail[...] skyedaily 2021-04-08
[78] 뉴스 실체와 상징을 구분하자 http://legacy.h21.ha[...] 1999-09-16
[79] 뉴스 ‘단군은 누구인가’다양한 학문적 해석 https://www.khan.co.[...] 2000-09-03
[80] 서적 「三国遺事」王暦の高句麗と新羅 大谷学会 1994-03
[81] 서적 韓流時代劇と朝鮮史の真実 扶桑社 2013-08-08
[82] 논문 2021
[83] 논문 2021
[84] 논문 2021
[85] 논문 2021
[86] 논문 2021
[87] 논문 2021
[88] 논문 2021
[89] 논문 2021
[90] 논문 2021
[91] 논문 2021
[92] 논문 2021
[93] 논문 2021
[94] 논문 2021
[95] 논문 2021
[96] 논문 2021
[97] 논문 2021
[98] 서적 아방강역고 1811
[99] 서적 독사신론 1908
[100] 서적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2006
[101] 백과사전 고조선 http://100.empas.com[...]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02] 서적 동사강목 1778
[103] 서적 배달족 역사 1922
[104] 논문 KBS방영 “비밀의 왕국 고조선”을 비판한다 2000
[105] 서적 고조선연구 사회과학출판사 1963
[106] 간행물 대동강유역은 인류의 발상지이며 조선사람의 발원지 1999
[107] 간행물 북한에서의 단군연구와 그 숭앙운동 200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