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초기 기독교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초기 기독교는 예수의 승천 이후 사도들과 신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로마 제국 내에서 급속도로 확산된 기독교의 초기 시기를 지칭한다. 사도 바울의 전도로 복음이 널리 퍼졌지만, 로마인들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소종파로 여겼다. 예루살렘 멸망 이후 기독교는 유대교 소종파의 성격을 잃고 세계 종교로 발전했으며, 신약성서 기록, 로마의 기존 종교와의 경쟁, 밀라노 칙령 등 중요한 사건들이 이 시기에 일어났다. 예수의 신성과 인성, 삼위일체 교리를 중심으로 신앙 체계가 발전했고, 사도, 교부, 변증가 등 다양한 인물들이 기독교 확산에 기여했다. 초기 기독교는 아나톨리아, 동로마 제국, 서로마 제국, 아르메니아, 조지아, 인도 등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갔으며, 박해와 이단과의 갈등을 겪으면서도 성장했다.

2. 역사

예수 승천 후 맛디아(마티아)가 합류하면서 사도[108]과 신자들은 예루살렘 마가(마르코)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며 성령을 받았다. 교회력을 지키는 교파들은 이 사건을 성령강림주일(성령강림절, 성령강림대축일)로 기념한다. 이후 기독교 복음은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를 만난 사도 바울(바울로)의 전도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바울(바울로)은 고린도(코린토스) 교우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어느 사도보다도 더 열심히 일했다고 말할 정도로 열성적으로 전도 활동을 했다.[109]

로마인들에게 기독교유대교의 소종파(나자렛당)에 불과했고,[110] 기독교인들도 유대교의 신앙 전통을 따랐다.[111][112] 그러나 예루살렘 붕괴 이후인 기원후 90년 바리새파의 유대교 재건 회의에서 '나자렛당 사람들', 즉 기독교 신자들을 저주하는 기도문을 발표하면서, 기독교유대교 소종파로서의 성격을 잃고 로마 제국 내의 비유대인 사이에 전파되어 세계 종교로 발달하게 되었다.

로마 시대 당시 기독교는 캘수스 등 반대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캘수스는 "기독교인들은 무지한 사람들을 자신들이 믿는 하느님에게 적합한 것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그들은 어리석고 천하고 우둔한 사람들과 노예들, 여자들 그리고 어린이들만 바라고 개종시킬 수 있다."고 비판하며, 당시 기독교인들 대부분이 배움이 없는 사람들임을 지적했다.[114] 100년대 중반부터 순교자 유스티누스(유스틴) 등 기독교 변증론자들이 기독교를 변호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기독교가 반사회적인 종교가 아님을 설명하고자 노력했다.

사도들의 사후, 예수의 가르침을 다르게 해석하는, 소위 "이단"이라 불리는 세력들이 점차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소위 "정통" 세력이 결집되었다. 각 지역 교회의 주교들은 원로들과 구분되어 지역 교회의 대표자로서 더 높은 권위를 갖게 되었고, 사도들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그 업무를 계승했다. 2세기 초 안티오키아의 주교였던 이그나티우스(이냐시오)가 보편교회(Catholic)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후, 보편교회는 정통 교회의 고유명사처럼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계 제도를 실질적으로 확립한 인물은 리옹의 주교였던 이레네우스(이레네오)였다.

교부들은 저술을 통해 기독교를 옹호하고, 이교 및 이단에 맞섰다. 대표적인 교부로는 클레멘스 1세(Clemens Romanus), 폴리카르푸스(Polycarpus) 등이 있다.

2. 1. 예수 승천 직후와 사도시대

예수가 승천한 후 맛디아(마티아)가 합류한 예수의 주요 제자들이었던 사도[108]과 그 외 신자들은 예수의 가르침대로 예루살렘에서 열흘 동안 마가(마르코)의 다락방에서 기도했다. 그들은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여 방언을 받고 사목하기 시작하는데, 교회력을 지키는 교파들은 이 사건을 성령강림주일(성령강림절, 성령강림대축일)로 기념한다. 이후 기독교 복음은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를 만난 사도 바울(바울로)의 전도로 급속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어느 사도보다도 더 열심히 일했다고 고린도(코린토스) 교우들에게 말할 정도로 열성적인 전도 활동을 했다.[109] 로마인들에게 기독교유대교의 소종파(나자렛당)에 불과했고,[110] 기독교인들도 유대교의 신앙전통을 따랐다.[111][112] 그러나, 예루살렘 붕괴 이후인 기원후 90년 바리새파의 유대교 재건 회의에서 '나자렛당 사람들', 즉 기독교 신자들을 저주하는 기도문을 발표하면서, 기독교는 나자렛 도둑, 나자렛 도당[113], 나자렛 사람 등으로 불리던 유대교 소종파로서의 성격을 잃게 되었으며, 로마 제국 내의 비유대인 사이에 전파되어 세계종교로 발달하게 된다.

2. 2. 기독교 변증 및 교계 제도 성립 시대

로마 시대 당시 기독교는 캘수스 등 반대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캘수스는 "기독교인들은 무지한 사람들을 자신들이 믿는 하느님에게 적합한 것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그들은 어리석고 천하고 우둔한 사람들과 노예들, 여자들 그리고 어린이들만 바라고 개종시킬 수 있다."고 비판하며, 당시 기독교인들 대부분이 배움이 없는 사람들임을 지적했다.[114] 100년대 중반부터 순교자 유스티누스(유스틴) 등 기독교 변증론자들이 기독교를 변호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기독교가 반사회적인 종교가 아님을 설명하고자 노력했다.

사도들의 사후, 예수의 가르침을 다르게 해석하는, 소위 "이단"이라 불리는 세력들이 점차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소위 "정통" 세력이 결집되었다. 각 지역 교회의 주교들은 원로들과 구분되어 지역 교회의 대표자로서 더 높은 권위를 갖게 되었고, 사도들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그 업무를 계승했다. 2세기 초 안티오키아의 주교였던 이그나티우스(이냐시오)가 보편교회(Catholic)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후, 보편교회는 정통 교회의 고유명사처럼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계 제도를 실질적으로 확립한 인물은 리옹의 주교였던 이레네우스(이레네오)였다.

교부들은 저술을 통해 기독교를 옹호하고, 이교 및 이단에 맞섰다. 대표적인 교부로는 클레멘스 1세(Clemens Romanus), 폴리카르푸스(Polycarpus) 등이 있다.

2. 3. 초기 기독교의 확산

예수 승천 후, 사도들은 예루살렘 마가(마르코)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며 성령을 받았다. 교회력을 지키는 교파들은 이 사건을 성령강림주일(성령강림절, 성령강림대축일)로 기념한다. 이후 기독교 복음은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를 만난 사도 바울(바울로)의 전도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바울(바울로)은 고린도(코린토스) 교우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어느 사도보다도 더 열심히 일했다고 말할 정도로 열성적으로 전도 활동을 했다.[109]

로마인들에게 기독교유대교의 소종파(나자렛당)에 불과했고,[110] 기독교인들도 유대교의 신앙 전통을 따랐다.[111][112] 그러나 예루살렘 붕괴 이후인 기원후 90년 바리새파의 유대교 재건 회의에서 '나자렛당 사람들', 즉 기독교 신자들을 저주하는 기도문을 발표하면서, 기독교유대교 소종파로서의 성격을 잃고 로마 제국 내의 비유대인 사이에 전파되어 세계 종교로 발달하게 되었다.

베드로(페트로)와 바울(바울로) 등 사도들의 활동은 신약성경의 여러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2. 3. 1. 제2성전 시대 유대교

기독교는 제2성전 시대 유대교 내의 소수 종파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기원전 516년경 바빌론 유수 이후 건설된 제2성전의 이름을 딴 유대교의 한 형태이다. 페르시아 제국유대인들이 유대 본토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했지만, 더 이상 토착 유대 왕국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정치 권력은 대제사장에게 넘어갔고, 그는 유대인과 제국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했다. 이러한 상황은 알렉산드로스 대왕(기원전 356~323년)이 이 지역을 정복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알렉산더의 죽음 이후, 이 지역은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기원전 301~200년경)와 그 후 셀레우코스 제국(기원전 200~142년경)에 의해 통치되었다.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기원전 175~164년 통치)의 반유대 정책은 기원전 167년 마카비우스 혁명을 촉발시켰고, 이는 왕이자 대제사장으로 통치한 하스모네아 왕조 아래 독립적인 유대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이 독립은 기원전 63년 유대가 로마 제국의 속국이 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제2성전 시대 유대교의 중심 교리는 유일신교와 유대인이 선민이라는 믿음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계약의 일환으로, 유대인들은 하느님께 토라를 준수할 의무가 있었다. 그 대가로 그들은 이스라엘 땅과 하느님이 성전에 거하시는 예루살렘을 받았다. 묵시문학과 지혜 문학은 제2성전 시대 유대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알렉산더의 정복은 헬레니즘 시대를 시작했고, 그때 근동은 헬레니즘화( 그리스 문화의 확산)를 겪었다. 그 후 유대교는 문화적, 정치적으로 헬레니즘 세계의 일부가 되었지만, 헬레니즘 유대교는 이스라엘 땅에 사는 유대인들보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사이에서 더 강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코이네 그리스어를 사용했고,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인 칠십인역을 만들었다. 칠십인역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사용한 구약 성경 번역이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성전 순례를 했지만, 기원전 3세기 초부터 회당이라고 하는 지역 종교 기관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마카비우스 혁명은 유대교가 서로 다른 신학적, 정치적 목표를 가진 경쟁 종파로 분열되도록 만들었고, 각 종파는 헬레니즘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을 취했다. 주요 종파는 사두개인, 바리새인, 에세네파였다. 사두개인은 주로 유대 정치와 종교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려는 예루살렘 귀족들이었다. 사두개인의 종교는 성전과 그 의식에 집중되었다. 바리새인들은 개인적인 경건을 강조하고 토라를 해석하여 일상생활에 대한 종교적 지침을 제공했다. 사두개인과 달리 바리새인들은 죽은 자의 부활과 사후 세계를 믿었다. 에세네파는 그들이 악한 제사장들에 의해 더럽혀졌다고 믿었던 성전 예배를 거부했다. 그들은 유대교의 더 광범위한 묵시 운동의 일부였는데, 이 운동은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회복할 때 종말이 가까워졌다고 믿었다. 로마의 지배는 이러한 종교적 긴장을 악화시켜 급진적인 열심당원들이 바리새인들로부터 분리되도록 만들었다. 로마 유대와 갈릴리 지역은 잦은 반란과 메시아 청구자들로 인해 혼란에 빠졌다.

''메시아''(히브리어: meshiachhe)는 "기름부음 받은 자"를 의미하며, 구약 성경에서 유대 왕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고, 어떤 경우에는 제사장과 예언자를 지칭하기도 했는데, 그들의 지위는 거룩한 기름으로 기름부음 받음으로써 상징되었다. 이 용어는 하느님이 영원한 왕국을 약속하신 왕 다윗과 가장 관련이 있다(사무엘하 7:11–17). 다윗의 왕국과 혈통의 멸망 이후, 이 약속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예언자들에 의해 재확인되었는데, 그들은 다윗의 집에서 나온 미래의 왕이 이상적인 왕국을 건설하고 통치할 것을 예견했다.

제2성전 시대에는 메시아가 누구이며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가 없었다. 가장 일반적으로 그는 종말의 다윗의 아들로서 "심판을 집행하고, 하느님의 원수들을 물리치고, 회복된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끝없는 평화를 수립하는" 일을 하는 것으로 상상되었다. 그러나 완벽한 제사장이나 죽은 자의 부활과 최후 심판을 가져오는 천상의 인자와 같이 제안된 다른 종류의 메시아적 인물도 있었다.

2. 3. 2. 예수

예수갈릴래아 지방의 도시 나자렛에서 자랐으며, 30세경에 사역을 시작했다. 예수의 메시지는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에 초점을 맞추었고, 그는 추종자들에게 왕국의 도래를 준비하기 위해 회개할 것을 촉구했다.[108] 그의 윤리적 가르침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가장 큰 계명에 요약되어 있다(마태오 22:37–39).[109] 예수는 이 시대에 이미 "잃어버린" 열 지파를 포함하여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열두 제자를 선택하여 그를 통해 이루어질 이스라엘의 완전한 회복을 상징했다.[110]

복음서 기록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에 대해 믿었던 것을 보여준다.[111] 그리스도 또는 "기름부음 받은 자"(그리스어: Christos|크리스토스grc)로서 예수는 히브리어 성경에 있는 메시아 예언의 성취로 묘사된다. 복음서에서는 그의 기적적인 동정녀 탄생을 통해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제시한다.[112] 복음서는 그의 메시지를 인증하고 다가올 왕국의 전조를 보여주는 예수의 기적을 묘사한다.[113]

프라 안젤리코의 ''두 도적과 함께 있는 그리스도''


3년간의 사역 후, 예수는 메시아를 사칭하는 반란자로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예수의 죽음 약 20년 후에 기록된 바울의 글은 고린토전서 15:3–8에서 예수의 부활에 대한 가장 초기의 기록을 제공한다.[7] 복음서 기록은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제공하며, 궁극적으로 천국으로의 예수의 승천으로 이어진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승리는 기독교의 중심 신앙이 되었다.[8] 그의 추종자들에게 예수는 하느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새 언약을 시작했다.[9] 바울 서신은 예수가 구원을 가능하게 한다고 가르친다. 믿음을 통해 신자들은 예수와의 연합을 경험하고 그의 고난과 부활의 희망을 함께 나눈다.[10]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비기독교 자료는 복음서에 나오는 특정 정보를 확인해 준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기원후 95년경에 저술된 그의 ''유대 고대사''에서 예수를 언급했다. ''테스티모니움 플라비아눔''으로 알려진 이 단락은 예수의 삶에 대한 간략한 요약을 제공하지만, 원래 텍스트는 기독교적 삽입에 의해 변경되었다.[11] 예수를 언급한 최초의 로마 작가는 타키투스(기원후 56년경~120년경)로, 그는 기독교인들이 "티베리우스 통치 시대에 총독 폰티우스 빌라도에 의해 처형된 Christus|크리스투스la로부터 그들의 이름을 따왔다"고 썼다 (타키투스의 예수에 대한 기록).[12]

2. 3. 3. 1세기

예수가 승천한 후 맛디아(마티아)가 합류한 예수의 주요 제자들이었던 사도들과[108] 그 외 신자가 예수의 가르침대로 예루살렘에서 열흘 동안 마가(마르코)의 다락방에서 기도했다. 그들은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여 방언을 받고 사목하기 시작하는데, 교회력을 지키는 교파들은 이 사건을 성령강림주일(성령강림절, 성령강림대축일)로 기념한다. 이후 기독교 복음은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를 만난 사도 바울(바울로)의 전도로 급속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어느 사도보다도 더 열심히 일했다고 고린도(코린토스) 교우들에게 말할 정도로 열성적인 전도 활동을 했다.[109]

후안 페르난데스 나바레테(Juan Fernández Navarrete)의 ''성 베드로와 성 바울'' (1570년대)


로마인들에게 기독교유대교의 소종파(나자렛당)에 불과했고,[110] 기독교인들도 유대교의 신앙전통을 따랐다.[111][112] 그러나 예루살렘 붕괴 이후인 기원후 90년 바리새파의 유대교 재건 회의에서 '나자렛당 사람들', 즉 기독교 신자들을 저주하는 기도문을 발표하면서, 기독교는 나자렛 도둑, 나자렛 도당[113], 나자렛 사람 등으로 불리던 유대교 소종파로서의 성격을 잃게 되었으며, 로마 제국 내의 비유대인 사이에 전파, 세계종교로 발달하게 된다. 초기 기독교 시기는 기독교 발달에 중요한 시기였는데, 현재 사용되는 신약성서 속 기록 작성(기원후 45년~140년경), 로마의 기존 종교와의 경쟁, 그리고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한 밀라노 칙령 등 주요한 사건들이 이 기간 중에 일어났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후 수십 년은 사도들이 아직 살아 있었기 때문에 사도 시대(Apostolic Age)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에 대한 중요한 기독교 자료는 바울 서신(Pauline epistles)과 사도행전(Acts of the Apostles)이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루살렘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중심지였다.[14] 사도들은 오순절 이후 얼마 동안 예루살렘에서 살면서 가르쳤다.[10]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의로운 야고보)는 예루살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지도자였으며, 그의 친족들인 데스포스니들도 모든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할 때까지 도시가 재건될 때까지 주변 지역에서 지도자직을 맡았을 가능성이 높다.[10]

그리스도인이 된 최초의 이방인들은 유대교의 진실을 믿었지만 개종하지는 않은 경건한 사람들이었다(고넬료 참조). 이방인들이 젊은 그리스도교 운동에 합류함에 따라, 그들이 유대교로 개종하여 토라(예: 음식 규례, 남성 할례, 안식일 준수 등)를 준수해야 하는지 여부에 대한 질문은 다양한 답변을 낳았다.

바나바와 바울은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세 명의 ''교회의 기둥''[9][15] 야고보(의로운 야고보), 베드로, 요한을 만나 이방인 선교 사명의 정당성을 확인받았다. 또한 이방인 개종자들이 모세 율법[16], 특히 남성 할례[16]를 따를 의무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사도 바울의 주된 관심사는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새 언약에 포함시키는 것이었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구원에 충분하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예루살렘 공의회는 이 논쟁을 종식시키지 못했다. 야고보는 여전히 토라가 유대인 그리스도인에게 구속력이 있다고 믿었다. 갈라디아서 2:11-14는 "야고보의 사람들"이 안티오크의 베드로와 다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과의 교제를 끊도록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유대인 그리스도교와 이방인(또는 바울) 그리스도교 사이의 분열의 시작이다.

헤로데 아그리파 1세가 베드로를 죽이려고 했을 때 베드로가 예루살렘을 떠난 후 야고보는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의 주요 권위자로 등장한다.[10]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그를 예루살렘 주교라고 불렀다.[10] 2세기 교회 사학자인 헤기시푸스는 산헤드린이 서기 62년에 그를 순교시켰다고 썼다.[10]

서기 66년, 유대인들은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10] 잔혹한 포위 공격 끝에 예루살렘은 서기 70년에 함락되었다.[10] 유대 성전을 포함한 도시가 파괴되었고 대부분의 주민이 살해되거나 추방되었다.[10] 유세비우스와 살라미스의 에피파니우스가 기록한 전통에 따르면, 예루살렘 교회는 제1차 유대인 반란이 발발하자 펠라로 피신했다.[12][13] 살라미스의 에피파니우스에 따르면,[32] 최후의 만찬실은 적어도 하드리아누스가 서기 130년에 방문했을 때까지 존재했다. 흩어진 인구가 살아남았다.[10] 산헤드린은 얌니아로 이전했다.[33] 제2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은 복음서 공관[11], 특히 예수의 감람산 설교에서 발견된다.

2. 3. 4. 초기 확산

예수가 승천한 후 맛디아(마티아)가 합류한 예수의 주요 제자들이었던 사도[108]과 그 외 신자가 예수의 가르침대로 예루살렘에서 열흘 동안 마가(마르코)의 다락방에서 기도했다. 그들은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여 방언을 받고 사목하기 시작하는데, 교회력을 지키는 교파들은 이 사건을 성령강림주일(성령강림절, 성령강림대축일)로 기념한다. 이후에 기독교 복음은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를 만난 사도 바울(바울로)의 전도로 급속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어느 사도보다도 더 열심히 일했다고 고린도(코린토스) 교우들에게 말할 정도로 열성적인 전도 활동을 했다.[109]

하지만, 로마인들에게 기독교유대교의 소종파(나자렛당)에 불과했고,[110] 기독교인들도 유대교의 신앙전통을 따랐다.[111][112] 예루살렘 붕괴 이후인 기원후 90년 바리새파의 유대교 재건 회의에서 '나자렛당 사람들', 즉 기독교 신자들을 저주하는 기도문을 발표하면서, 기독교는 나자렛 도둑, 나자렛 도당[113], 나자렛 사람 등으로 불리던 유대교 소종파로서의 성격을 잃게 되었으며, 로마 제국 내의 비유대인 사이에 전파, 세계종교로 발달하게 된다.

초기 기독교 시기는 기독교 발달에 중요한 시기였는데, 현재 사용되는 신약성서 속 기록 작성(기원후 45년~140년경), 로마의 기존 종교와의 경쟁, 그리고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한 밀라노 칙령 등 주요한 사건들이 이 기간 중에 일어났다.

열두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사도로 부름을 받았지만, 사도행전 2장 1-4절의 오순절에 하나의 시작점이 놓인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 1:8, 새번역성경)고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베드로(페트로)의 활동은 사도행전 2-5장, 9장 32절-12장 19절, 갈라디아서 2장 11-14절,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에 기록되어 있다. 바울(파울로)의 활동은 사도행전 9장 1-31절, 13-28장,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 빌레몬서, 골로새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야고보서, 히브리서, 유다서, 요한1서, 요한2서, 요한3서, 요한계시록에도 다른 사도들의 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2. 3. 5. 예루살렘 교회

예수가 승천한 후 맛디아(마티아)가 합류한 예수의 주요 제자들이었던 사도[108]과 그 외 신자가 예수의 가르침대로 예루살렘에서 열흘 동안 마가(마르코)의 다락방에서 기도했다. 그들은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여 방언을 받고 사목하기 시작하는데, 교회력을 지키는 교파들은 이 사건을 성령강림주일(성령강림절, 성령강림대축일)로 기념한다. 이후에 기독교 복음은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를 만난 사도 바울(바울로)의 전도로 급속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어느 사도보다도 더 열심히 일했다고 고린도(코린토스) 교우들에게 말할 정도로 열성적인 전도 활동을 했다.[109] 로마인들에게 기독교유대교의 소종파(나자렛당)에 불과했고,[110] 기독교인들도 유대교의 신앙전통을 따랐다.[111][112] 90년 바리새파의 유대교 재건 회의에서 '나자렛당 사람들', 즉 기독교 신자들을 저주하는 기도문을 발표하면서, 기독교는 나자렛 도둑, 나자렛 도당[113], 나자렛 사람 등으로 불리던 유대교 소종파로서의 성격을 잃게 되었으며, 로마 제국 내의 비유대인 사이에 전파, 세계종교로 발달하게 된다.

열두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사도로 부름을 받았지만, 사도행전 2장 1-4절의 오순절에 하나의 시작점이 놓인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 1:8, 새번역성경)고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2. 3. 6. 이방인 기독교인

예수 승천 후 사도들과 신자들은 예루살렘 마가(마르코)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며 성령을 받았다. 교회력을 지키는 교파들은 이 사건을 성령강림주일(성령강림절, 성령강림대축일)로 기념한다. 이후 기독교 복음은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를 만난 사도 바울(바울로)의 전도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바울(바울로)은 고린도(코린토스) 교우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어느 사도보다도 더 열심히 일했다고 말할 정도로 열성적으로 전도 활동을 했다.[109]

로마인들에게 기독교유대교의 소종파(나자렛당)에 불과했고,[110] 기독교인들도 유대교의 신앙 전통을 따랐다.[111][112] 그러나, 예루살렘 붕괴 이후인 기원후 90년 바리새파의 유대교 재건 회의에서 '나자렛당 사람들', 즉 기독교 신자들을 저주하는 기도문을 발표하면서, 기독교는 나자렛 도둑, 나자렛 도당,[113] 나자렛 사람 등으로 불리던 유대교 소종파로서의 성격을 잃게 되었으며, 로마 제국 내의 비유대인 사이에 전파되어 세계 종교로 발달하게 되었다.

베드로(페트로)의 활동은 사도행전 2-5장, 9장 32절-12장 19절, 갈라디아서 2장 11-14절,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에 기록되어 있다.

바울(바울로)의 활동은 사도행전 9장 1-31절, 13-28장,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 빌레몬서, 골로새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에 기록되어 있다.

다른 사도들의 활동은 야고보서, 히브리서, 유다서, 요한1서, 요한2서, 요한3서, 요한계시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2. 3. 7. 1세기 박해

예수 승천 후, 사도들과 신자들은 예루살렘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로마인들에게 기독교유대교의 한 분파에 불과했고,[110] 기독교인들도 유대교의 신앙 전통을 따랐다.[111][112] 90년경 유대교 재건 회의에서 기독교 신자들을 저주하는 기도문이 발표되면서, 기독교유대교 분파로서의 성격을 잃고 로마 제국 내 비유대인에게 전파되기 시작했다.

로마 제국 시대에 기독교는 캘수스와 같은 반대자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캘수스는 기독교인들이 대부분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지적했다.[114] 이에 유스티누스와 같은 기독교 변증론자들은 기독교가 반사회적 종교가 아님을 설명하며 변호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기독교인들이 "인류에 대한 증오" 때문에 멸시받았다고 기록했다.[34] 이는 기독교인들이 이교도 숭배와 관련된 사회 활동과 로마 황제 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에게 더 관대했으며, 일부 반기독교 로마인들은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35]

네로 황제는 64년 로마 대화재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로마의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다. 이때 베드로와 바울로가 순교했을 가능성이 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와 티투스 황제 치하에서는 기독교인들이 대체로 무시되었으나,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새로운 박해를 승인했다.

2. 4. 초기 기독교 중심지

초기 기독교는 여러 중심지를 통해 발전했으며, 이 중심지들은 지역별 특성과 역사적 사건에 따라 각기 다른 특징을 보이며 성장했다.

  • 예루살렘: 예수의 무덤이 있는 성묘 교회가 있는 곳으로 여겨지며,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성지였으나, 로마 제국 내 기독교 박해 기간 동안 그 중요성이 쇠퇴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예루살렘을 이교 도시로 재건하고 ''아이리아 카피톨리나''로 개명하면서,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출입을 금지했고, 이후 예루살렘 주교는 이방인이 되었다.[36][37] 헬레나 황후의 성지 순례 이후 예루살렘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졌고, 니케아 공의회에서 특별한 인정을 받았다.[41]

  • 안티오크: 현재 터키의 안타키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수의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린 곳이다.[45] 사도 베드로가 처음 복음을 전파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46] 안티오크 학파는 초기 교회 학문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 알렉산드리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헬레니즘 학문의 중심지였다. 칠십인역 성경 번역이 시작된 곳이며, 알렉산드리아 본문은 초기 신약 성서 본문 유형 중 하나로 인정받는다.[48] 니케아 공의회는 이집트, 리비아, 펜타폴리스 (북아프리카)에 대한 알렉산드리아의 전통적인 권위를 확인했다.[50]

  • 아나톨리아: 현재 터키의 일부로, 요한 사도의 전통이 강했던 지역이다. 에베소는 요한 복음서가 기록된 곳으로 추정되며,[51] 사도 바울의 선교 여행도 주로 아나톨리아에서 이루어졌다. 최초의 일곱 개의 전국 공의회는 서아나톨리아 또는 콘스탄티노플의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편에서 열렸다.

  • 카이사레아: 유대 속주의 수도였으며, 사도 베드로가 최초의 이방인 개종자인 백부장 고넬료에게 세례를 베푼 곳이다. 오리게네스가 육역본을 편찬하고 신학교를 운영했던 곳이기도 하다.

  • 다마스쿠스: 시리아의 수도로, 사도 바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회심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 코린토: 사도 바울이 18개월 동안 전도한 곳으로,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가 쓰여진 배경이 된 도시이다.

  • 아테네: 그리스의 수도로, 사도 바울이 방문하여 아레오파고스에서 설교한 곳이다.

  • 퀴레네: 리비아 북동부에 위치한 북아프리카의 그리스 식민지로, 퀴레네 시몬이 예수의 십자가를 짊어진 사건과 관련이 있다.

  • 로마: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순교한 곳으로 여겨지며, 로마 제국의 권력 중심지로서 교회 권위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초기 로마 주교들은 클레멘스 1세, 텔레스포루스, 피우스 1세, 아니케투스 등이 있다.

  • 밀라노: 사도 바르나바에 의해 설립된 것으로 여겨지며, 암브로시오가 주교로 재임하면서 암브로시오 전례가 발전했다.

  • 메소포타미아파르티아 제국: 에데사(현재 샨르르파)는 시리아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의 주요 중심지였으며, 아다이(Addai)가 복음을 전파했다. 동방 교회는 메소포타미아 상류 지방에서 시작되었으며, 셀루키아-크테시폰에 총대주교좌가 설치되었다.

2. 4. 1. 동로마 제국



2세기,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을 이교 도시로 재건하고 ''아이리아 카피톨리나''로 개명했다.[36] 그는 이전 유대 성전이 있던 성전산에 주피터와 자신의 동상을 세웠다. 132년에서 136년 사이에 바르 코크바는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했고, 기독교인들은 그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다. 바르 코크바가 패배하자 하드리아누스는 유대인들이 티샤 베아브를 제외하고는 예루살렘에 출입하는 것을 금지했다. 따라서 이후 예루살렘 주교들은 처음으로 이방인("할례 받지 않은 자")이 되었다.[37]

기독교인들에게 예루살렘의 중요성은 로마 제국 내 기독교 박해 기간 동안 쇠퇴기를 맞았다.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예루살렘 기독교인들은 서기 66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시작될 무렵 펠라( 데카폴리스 (요르단 지역))로 피신했다.[38] 예루살렘 주교들은 인근 가이사랴의 대주교의 보좌주교 (종속 주교)가 되었다.[39] 로마 황후 헬레나가 성지 순례(서기 326년-328년경)를 하면서 예루살렘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졌다. 교회사가 콘스탄티노플의 소크라테스에 따르면,[40] 헬레나(예루살렘의 주교 마카리우스의 도움을 받아)는 그 자리에 세워진 비너스 사원(하드리아누스가 세운 것으로 여겨짐)을 제거한 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예루살렘은 서기 325년 니케아 공의회 제7조에서 특별한 인정을 받았다.[41] 성묘 수호단 (성지의 기독교 성지를 지키는 단체)의 전통적인 창립 연도는 313년으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발표한 밀라노 칙령(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합법화)과 일치한다. 예루살렘은 나중에 오대교구 중 하나로 지명되었지만, 이것은 로마 교회에 의해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42][43]

터키 안타키아에 있는 사도 베드로 성당은 사도 베드로가 복음을 처음 전파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로마 시대 안티오크).


안티오크(현대 안타키아, 터키)는 로마 속주 시리아의 수도였으며, 동부 지중해의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이자 주요 무역 중심지였고, 로마 제국의 세 번째로 중요한 도시였다.[44]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수의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린 곳이 안티오크였다.[45] 갈라디아서에 묘사된 안티오크 사건이 발생한 곳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베드로가 세운 초기 교회가 있었던 곳이며, 후대 전승에서는 베드로가 안티오크 주교직을 처음 맡았다고 한다.[46] 마태복음과 사도규칙이 이곳에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교부 안티오크의 이냐시오가 세 번째 주교였다. 270년에 설립된 안티오크 학파는 초기 교회 학문의 두 주요 중심지 중 하나였다. 쿠레토니아누스 복음서와 시리아 시나이티쿠스는 시리아 기독교와 관련된 초기(페시타 이전) 신약 성서 본문 유형 두 가지이다. 니케아 공의회(325년)에서 인접 지역에 대한 관할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인정받은 세 주교 중 하나였다.[47]

알렉산드리아는 나일 삼각주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건설되었다. 그곳의 유명한 도서관들은 헬레니즘 학문의 중심지였다. 구약 성서의 칠십인역 번역이 그곳에서 시작되었고, 알렉산드리아 본문은 학자들에 의해 초기 신약 본문 유형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상당한 유대인 인구가 있었으며, 알렉산드리아의 필로가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저술가일 것이다.[48] 클레멘트, 오리게네스, 아타나시우스와 같은 뛰어난 성경 학자들과 주목할 만한 교부들을 배출했으며,[49] 근처의 사막 교부들도 주목할 만하다. 이 시대 말까지 알렉산드리아, 로마, 안티오크는 인근 대주교구들에 대한 권위를 인정받았다. 니케아 공의회 제6조는 이집트, 리비아, 펜타폴리스 (북아프리카)(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 리비아, 펜타폴리스(북아프리카)를 관할하는 이집트 관구의 중심지였다)에 대한 알렉산드리아의 전통적인 권위를 확인했고, 아마도 부활절의 보편적인 날짜를 선포할 권리를 알렉산드리아에 부여했을 것이다.[50] 그러나 일부는 알렉산드리아가 그리스도교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기반의 영지주의 종파의 중심지이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요한 사도의 전통은 아나톨리아(근동, 현재 터키의 일부, 서쪽 지역은 로마 속주 아시아라 불림)에서 강했다. 요한 복음서 저자 논쟁은 전통적으로 그리고 그럴듯하게 에베소에서 기원후 90년에서 110년 사이에 일어났지만, 일부 학자들은 시리아 기원을 주장한다.[51] 여기에는 요한계시록이 포함되지만, 현대 성경 학자들은 이 책의 저자가 다른 요한, 아나톨리아 해안에서 약 48km 떨어진 그리스 섬 파트모스의 파트모스의 요한이라고 믿으며,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언급한다. 신약 성경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타르수스(아나톨리아 남중부) 출신이었고, 그의 선교 여행은 주로 아나톨리아에서 이루어졌다. 베드로전서는 아나톨리아 지역에 보내진 편지이다. 흑해의 남동쪽 해안에 있는 폰투스는 신약 성경에 세 번 언급된 그리스 식민지였다. 폰투스 주민들은 기독교로 개종한 최초의 사람들 중 일부였다. 플리니우스(110년 주지사)는 편지에서 폰투스의 기독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현존하는 안티오크의 이그나티우스의 서한 중 진품으로 여겨지는 다섯 개는 아나톨리아 도시로 보내진 것이고, 여섯 번째는 폴리카르푸스에게 보내진 것이다. 스미르나는 사도 요한을 개인적으로 알았던 것으로 알려진 감독 폴리카르푸스와 아마도 그의 제자 이레네우스의 고향이었습니다. 히에라폴리스의 파피아스 또한 요한 사도의 제자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2세기 아나톨리아는 사분설, 몽타니즘, 시노페의 마르키온, 그리고 초기 기독교 성경 정경을 기록한 사르디스의 멜리토의 고향이었습니다. 3세기 위기 이후 니코메디아는 286년 동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앙키라 공의회는 314년에 열렸습니다. 325년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에서 최초의 기독교 전국 공의회를 소집했고, 330년에는 재통합된 제국의 수도를 비잔티움(초기 기독교 중심지이자 아나톨리아에서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편에 위치, 후에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림)으로 옮겼습니다. 이 도시는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불렸으며 1453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52] 최초의 일곱 개의 전국 공의회는 서아나톨리아 또는 콘스탄티노플의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편에서 열렸습니다.

예루살렘 북서쪽 해안에 위치한 카이사레아(Caesarea Maritima)는 133년 이후에는 ''카이사레아 팔레스티나''(Caesarea Palaestina)로 불렸다. 헤로데 대왕이 기원전 25~13년경 건설했으며, 유대 속주(6~132)의 수도였고, 나중에는 ''팔레스티나 프리마''의 수도가 되었다. 베드로가 백부장 고넬료에게 세례를 베푼 곳으로, 최초의 이방인 개종으로 여겨진다. 바울은 이곳에서 피신처를 찾아 복음 전파자 빌립의 집에 머물렀고, 나중에는 2년 동안 투옥되기도 했다(57~59년으로 추정). 사도 규범(7.46)은 최초의 카이사레아 주교가 세리 삭개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드리아누스의 예루살렘 포위 공격(133년경) 이후, 카이사레아는 총대주교 관구가 되었고 예루살렘 주교는 그 산하의 보조 주교(종속 주교) 중 하나가 되었다.[53] 오리게네스(254년 사망)는 이곳에서 육역본을 편찬했으며, 유명한 도서관과 신학교를 가지고 있었다. 성 팜필루스(309년 사망)는 저명한 학자이자 사제였다. 성 그레고리우스 기적 행위자(270년 사망), 성 바실리우스 대왕(379년 사망), 성 히에로니무스(420년 사망)는 이 도서관을 방문하여 연구했는데, 이 도서관은 나중에 614년 페르시아인 또는 637년경 아랍인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54] 최초의 주요 교회사가인 카이사레아의 유세비우스는 314~339년경 주교였다. F. J. A. 호트와 아돌프 폰 하르낙은 니케아 신조가 카이사레아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다. 카이사레아 본문 유형은 많은 본문 비평가들에 의해 초기 신약 성서 본문 유형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파포스는 로마 시대 키프로스 섬의 수도이자 로마 사령관의 관할지였습니다. 서기 45년, 사도 바울과 바나바(사도행전 4:36에 따르면 "키프로스 출신"이었습니다)가 키프로스에 와서 파포스에 이르러 예수의 메시지를 전파했습니다(사도행전 13:4–13 참조). 사도행전에 따르면, 사도들은 로마인들에게 박해를 받았지만 결국 로마 사령관 세르기우스 바울루스를 설득하여 기존 종교를 버리고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바나바는 전통적으로 키프로스 정교회의 창시자로 여겨집니다.[55]

다마스쿠스시리아의 수도이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적으로 거주된 도시라고 주장한다. 신약 성경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회심하였다. 세 가지 기록 (, , )에서 그는 동행하던 사람들에게 이끌려 빛에 눈이 멀어 다마스쿠스로 갔고, 거기서 아나니아(다마스쿠스의 첫 번째 주교였을 것으로 여겨짐)라는 제자에 의해 시력을 회복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묘사되어 있다.

테살로니키는 그리스 북부의 주요 도시로, 사도 바울(Paul the Apostle)이 기독교를 설립한 곳으로 여겨지며, 따라서 사도좌가 되었습니다.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에피루스를 포함한 주변 지역은 인접한 발칸 반도 국가인 알바니아불가리아로도 확장되는 초기 기독교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바울의 서신인 ''테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서신''과 빌립보서는 기독교가 유럽과 최초로 접촉한 것으로 종종 간주됩니다.[56] 사도적 교부인 폴리카르푸스는 125년경에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니코폴리스는 로마의 에피루스 베투스(Epirus Vetus) 주에 있던 도시였으며, 오늘날에는 그리스 서부 해안 북부에 유적만 남아 있습니다. 디도서에서 바울은 그곳에 갈 의향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57] 그 도시 주민들 중에 기독교인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오리게네스(약 185~254년)는 한동안 그곳에 머물렀습니다.[58]

고대 코린토는 오늘날 그리스 남부의 현대 코린토 근처에 유적만 남아 있는 초기 기독교 중심지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은 코린토에서 18개월 동안 전도했습니다.[59] 그는 처음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머물렀고, 나중에 실라와 디모데가 합류했습니다. 그가 코린토를 떠난 후, 아볼로는 브리스길라에 의해 에베소에서 그를 대신하기 위해 파견되었습니다. 바울은 적어도 한 번 이상 코린토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약 54~55년경 에베소에서 고린도전서를 썼는데, 이 서신은 성적 부도덕, 이혼, 소송,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60] 마케도니아에서 쓰여진 고린도후서는 약 56년경에 쓰여진 네 번째 편지로, 미래 계획, 지시 사항, 연합, 그리고 사도적 권위에 대한 그의 변호에 대해 논의하고 있습니다.[61] 로마 교회의 수위권에 대한 가장 초기의 증거는 약 96년경에 코린토 교회에 쓰여진 클레멘트 1세의 서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코린토의 주교로는 아폴로, 소스테네스, 그리고 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타가 있습니다.[62]

아테네는 그리스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로, 바울이 방문한 곳입니다. 그는 아마도 바다를 통해 여행하여 마케도니아의 베뢰아에서 온 약 53년경에 아테네의 항구인 피레우스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따르면, 그가 아테네에 도착했을 때, 그는 베뢰아에 남아 있던 실라와 디모데를 즉시 불렀습니다. 그들을 기다리는 동안 바울은 아테네를 탐험하고 현지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에 회당을 방문했습니다. 아테네에는 기독교 공동체가 빠르게 설립되었지만, 처음에는 크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인 전통은 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타를 아테네 기독교 공동체의 첫 번째 주교로 규정하는 반면, 다른 전통은 히에로테오스 테스모테테를 언급합니다. 후임 주교들은 모두 아테네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나르키소스는 팔레스타인 출신이었고, 푸블리우스는 몰타 출신이었다고 여겨집니다. 아테네의 콰드라투스는 아테네를 방문하는 동안 황제 하드리아누스에게 보낸 변명서로 알려져 있으며, 초기 기독교 문헌에 기여했습니다. 아테네의 아리스티데스와 아테네의 아테나고라스도 이 기간 동안 변명서를 썼습니다. 2세기가 되자 아테네에는 상당한 기독교 공동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로마의 주교인 히기누스는 139년에 아테네 공동체에 편지를 썼습니다.

크레타의 고르티나는 로마와 동맹을 맺었고, 따라서 로마의 크레타와 키레나이카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티투스는 첫 번째 주교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도시는 828년 해적 아부 하프스에게 약탈당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케도니아에서, 그리고 트라키아의 트라키아 해 연안에 위치한 필립보에서도 전파 활동을 펼쳤다. 로마의 히폴리토스에 따르면, 사도 안드레아트라키아흑해 연안과 다뉴브 강 하류 지역에서 전파 활동을 했다. 트라키아인들 사이에서 기독교가 퍼지고 세르디카(오늘날 소피아), 필리포폴리스(오늘날 플로브디프), 그리고 두로스토룸(오늘날 실리스트라)과 같은 기독교 중심지가 등장한 것은 이러한 초기 사도들의 선교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63] 유럽 최초의 기독교 수도원인 성 아타나시우스 수도원은 세르디카 공의회 이후 344년에 성 아타나시우스에 의해 오늘날 불가리아의 치르판 근처 트라키아에 세워졌다.[64]

퀴레네와 그 주변 지역인 퀴레나이카 또는 지중해 남쪽 그리스, 현대 리비아의 북동부에 위치한 북아프리카의 "펜타폴리스"는 북아프리카의 그리스 식민지로 나중에 로마 속주가 되었다. 그리스인과 로마인 외에도, 적어도 키토스 전쟁(115~117년)까지는 상당한 유대인 인구가 있었다. 마가복음 15장 21절에 따르면, 퀴레네 시몬이 예수의 십자가를 짊어졌다. "퀴레네 사람들"은 사도행전 2장 10절, 6장 9절, 11장 20절, 13장 1절에도 언급되어 있다. 비잔틴 전설에 따르면, 첫 번째 주교는 사도행전 13:1에 언급된 루키우스였다.

2. 4. 2. 서 로마제국

사도행전에 따르면, 유대계 기독교인 부부인 프리스카와 아굴라가 약 50년경 바울이 고린토에 도착했을 때 로마에서 고린토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65] 이는 로마에서 예수에 대한 믿음이 바울 이전에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역사가들은 베드로와 바울이 64년 네로 치세 중 로마 대화재 이후 순교했다고 일관되게 주장한다.[66][67][68] 타키투스에 따르면 네로 황제는 이 화재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렸다.[69][73] 2세기 기독교 시대에, 리옹의 이레네오는 교회가 주교 없이는 온전히 존재할 수 없다는 고대 견해를 반영하여 사도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 교회의 창시자였으며 리누스를 주교로 임명했다고 기록했다.[70][71]

그러나 이레네오는 베드로나 바울이 로마 교회의 "주교"였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여러 역사가들은 베드로가 순교 전에 로마에 오래 머물렀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바울이 고린토에서 로마 교회에 로마서를 썼을 때(약 58년)[72] 로마 교회는 이미 번성하고 있었고,[73] 그는 로마의 약 50명의 사람들을 이름으로 언급했지만,[74] 그중에 베드로는 없었다(안티오크 사건에서 그와 알고 지낸 베드로). 또한 바울이 60~62년경 로마에 2년간 머물렀던 사도행전 28장에서도 로마에서 베드로에 대한 언급은 없다. 아마도 그는 바울이 로마서를 썼을 때인 58년 이전에는 로마에 오래 머물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베드로가 수도에 온 것은 60년대에 순교 직전 비교적 짧은 기간이었을 것이다.[75]

오스카 쿨만은 베드로가 교황 계승을 시작했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거부했으며,[76] 베드로가 사도들의 원래 수장이었지만 시몬 베드로의 수위권 가시적인 교회 계승의 창시자는 아니었다고 결론지었다.[76][77]

산타푸덴치아나 교회의 모자이크. 판토크라토르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으며, 410년경에 제작되었다.


로마 제국의 권력 중심지였던 로마는 곧 교회 권위의 중심지가 되었고, 10년 단위로 권력이 성장했으며, 정부의 중심지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진 7차 공의회 기간 동안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받았다.[78]

로마와 알렉산드리아는 전통적으로 자체 로마 속주 외부의 교구에 대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지만,[79] 아직 총대주교구로 불리지 않았다.[80]

초기 로마 주교들은 모두 그리스어를 사용했으며,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이름재임 기간주요 업적
클레멘스 1세약 88~97년고린토 교회에 보낸 서한의 저자
텔레스포루스약 126~136년아마도 유일한 순교자
피우스 1세약 141~154년무라토리 단편에 따르면 헤르마스의 목자의 저자의 형제
아니케투스약 155~160년폴리카르푸스를 맞이하여 부활절 날짜에 대해 논의[73]



빅토르 1세(189~198년)는 라틴어로 글을 쓴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교회 저술가였다. 그러나 그의 유일한 현존 작품은 그의 회칙으로,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발행되었을 것이다.[81]

그리스어 신약 성경 본문은 히에로니무스 이전에 일찍이 라틴어로 번역되었으며, 베투스 라티나와 서방 본문으로 분류된다.

2세기 동안 다양한 견해를 가진 기독교인과 반기독교인들이 로마에 모여들었는데, 특히 마르키온발렌티누스가 있었고, 다음 세기에는 히폴리투스와 노바티아누스와 관련된 분열이 있었다.[73]

로마 교회는 여러 박해를 겪었지만 살아남았다. 258년 황제 발레리아누스가 로마 신들에게 예배를 드리라는 명령을 거부한 결과 처형된 저명한 기독교인 중에는 카르타고의 주교인 키프리아누스가 있었다.[82] 마지막이자 가장 심각한 제국 박해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치하 303년에 있었는데, 로마와 서방 전역에서 306년 막센티우스의 즉위로 종식되었다.

2. 4. 3. 아르메니아

주어진 원본 소스에 아르메니아 관련 내용이 없으므로, 해당 섹션에는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이 부분은 이전 답변과 동일하며,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2. 4. 4. 메소포타미아와 파르티아 제국

에데사(현재 샨르르파)는 116년부터 118년, 그리고 212년부터 214년까지 로마 제국에 의해 지배되었으나, 대부분 로마 또는 파르티아 제국과 연관된 속국이었던 중요한 기독교 도시였다. 201년 이후 혹은 그 이전에, 에데사의 왕실은 기독교를 받아들였다.[98]

메소포타미아 북서부에 위치한 에데사는 사도 시대부터 시리아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의 주요 중심지였다. 기원전 132년부터 서기 216년까지 독립 왕국의 수도였던 에데사는 이후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주요 무역로에 전략적으로 위치해 안티오키아에서 이방인 선교가 시작되었을 때 접근이 용이했다. 박해로 인해 초기 기독교인들이 해외로 흩어졌을 때, 일부는 에데사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따라서 에데사 교회는 그 기원을 사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기독교는 한때 국교가 되기도 했다.

동방 교회는 파르티아 제국과 로마 제국의 완충 지대인 메소포타미아 상류 지방에서 매우 초기부터 시작되었으며, 동방 아시리아 교회로 알려져 있다. 파르티아 제국(기원전 250년 – 서기 226년)의 통치자들은 대체로 종교에 관대했다. 제2 페르시아 제국(226년-640년)의 통치자들도 처음에는 종교적 관용 정책을 따랐지만, 나중에는 기독교인들에게 속국과 같은 지위를 부여했다. 그러나 이 통치자들은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았으며, 그 결과 기독교인들은 점점 더 억압적인 조치를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서방에서 국교가 된 후(380년)에야 로마에 대한 적개심이 동방 기독교인들에게 집중되었다. 7세기 무슬림 정복 이후 칼리파는 다른 종교들을 관용했지만 개종을 금지하고 기독교인들에게 높은 세금을 부과했다.

선교사 아다이(Addai)는 2세기 중반경 메소포타미아(현대 이라크)에 복음을 전파했다. 유세비우스(Eusebius)(서기 260년-340년)가 기록하고 '아다이의 교리'(약 서기 400년)에서도 발견되는 고대 전설(에데사의 왕실 기록 보관소의 정보에서)은 에데사의 아브가르 5세(Abgar V of Edessa) 왕이 예수에게 편지를 보내 치유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에 대한 답장을 받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부활 후 사도 도마(Thomas the Apostle)가 아다이(또는 타대오)를 왕에게 보냈고, 그 결과 도시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 선교에서 그는 제자 마리(Mari)와 함께했으며, 두 사람은 '

에데사의 첫 번째 주교가 된 아다이는 마르 아가이(Mar Aggai), 그리고 팔루트(Palut)에 이어, 팔루트는 약 200년경 안티오키아의 세라피온(Serapion of Antioch)에 의해 서임되었다. 2세기에는 유명한 페시타(Peshitta), 즉 구약의 시리아어 번역본이 나왔으며, 또한 타티아누스(Tatian)의 '디아테사론(Diatessaron)'도 약 172년에 편찬되어 에데사의 주교 라불라(Rabbula)(412년-435년)가 사용을 금지할 때까지 널리 사용되었다.[99]

에데사에서는 197년에 기독교 공의회가 열렸다.[100] 201년에는 대홍수로 도시가 파괴되고 기독교 교회가 무너졌다.[101] 232년에는 사도 도마의 유물이 에데사 교회에 전해진 사건에 관한 시리아어 기록이 쓰여졌다. 로마 지배하에 에데사에서는 많은 순교자들이 고난을 당했는데, 데키우스(Decius) 치하에서는 성 샤르빌(Scharbîl)과 바르사미아(Barsamya),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 치하에서는 성 구르자(Gûrja), 샤모나(Schâmôna), 하빕(Habib) 등이 있었다. 한편, 에데사 출신의 기독교 사제들은 메소포타미아 동부와 이란(Persia)에 복음을 전파하고 사산 왕조 왕국에 최초의 교회들을 세웠다.[102] 에데사의 주교 아틸라티아(Atillâtiâ)는 니케아 공의회(First Council of Nicaea)(325년)에 참석했다.

2세기 후반 무렵, 기독교는 메디아(Media), 페르시아, 파르티아(Parthia), 박트리아(Bactria) 전역으로 동쪽으로 퍼져나갔다. 서기 280년에는 셀루키아(Seleucia)의 대도시가 "카톨리코스(Catholicos)"라는 칭호를 얻었고, 서기 424년에는 셀루키아의 교회 공의회에서 동방 전체 교회 관할권을 가진 최초의 총대주교가 선출되었다. 총대주교의 자리는 인도와 중국, 자바와 일본으로 이어지는 동서 무역로의 중요한 지점이었던 셀루키아-크테시폰(Seleucia-Ctesiphon)에 자리 잡았다. 따라서 교회 권위의 중심은 서기 216년 로마의 속국이 된 에데사(Edessa)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9개의 하위 대도시를 거느린 독립적인 총대주교구의 설립은 페르시아 정부의 더 호의적인 태도에 기여했다.

258년 에데사가 사산 제국(Sasanian Empire, 페르시아 제국)에 편입되었을 무렵, 현재 이라크에 있는 티그리스(Tigris) 강 유역에 위치한 아르빌(Arbil, Arbela)이 초기 에데사가 수행했던 역할, 즉 기독교가 페르시아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중심지의 역할을 점차 더 많이 수행하게 되었다.[103]

서기 196년경에 저술한 바르다이산(Bardaisan)은 메디아(Media), 파르티아(Parthia), 박트리아(Bactria)(현재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 전역의 기독교인들에 대해 언급하며,[104]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서기 160~230년)에 따르면, 220년까지 페르시아 제국 내에는 이미 여러 주교구가 존재했다.[103] 315년까지 셀루키아-크테시폰(Seleucia-Ctesiphon)의 주교는 "카톨리코스(Catholicos)"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103] 이때 에데사와 아르빌은 더 이상 동방 교회의 중심지가 아니었고, 교회 권위는 페르시아 제국의 중심부로 동쪽으로 이동했다.[103]

사산 제국(Sasanian Empire)의 사포르 2세(Shapur II) 치세 동안, 그는 동방 교회(Church of the East)의 총대주교(Patriarch)였던 시몬 바르 사바에(Shemon Bar Sabbae)가 이끌던 기독교 신민들에게 처음에는 적대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e the Great)의 기독교 개종은 사포르로 하여금 기독교 신민들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사산 제국과 로마 제국 사이의 전쟁은 사포르의 불신을 적개심으로 바꾸었다. 콘스탄티누스 사후, 수년 동안 로마와의 전쟁을 준비해 온 사포르 2세는 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기독교 신민들에게 이중 과세를 부과했다. 그러나 시몬은 이중 과세를 거부했다. 사포르는 시몬과 그의 성직자들에게 조로아스터교로 개종할 것을 압박하기 시작했지만, 그들은 거부했다. 이 시기에 '순교자의 순환'이 시작되어 '수천 명의 기독교인'이 처형되었다. 그 후 수년 동안 시몬의 후계자였던 샤흐도스트(Shahdost)와 바르바슈민(Barba'shmin)도 순교했다.

소조메누스(Sozomen)의 『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에는 사포르 2세 치하에서 순교한 페르시아 기독교인들에 대한 상당한 세부 정보가 담겨 있다. 소조메누스는 살해된 기독교인의 총 수를 1만 6천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한다.[106]

3. 신앙 체계

기독교는 3세기경 로마 점령기 영국에 전파되었으며, 영국 최초의 순교자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통치 시대(284–305)에 베룰라미움의 성 알반과 카를레온의 율리우스와 아론이 기록되어 있다. 길다스는 믿음이 전파된 시기를 티베리우스 통치 후반기로 추정했지만, 아리마태아의 요셉, 루키우스, 또는 파간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현재 대부분 경건한 위작으로 간주된다. 런던 주교인 레스티투투스는 314년 아를 공의회에 링컨 주교와 요크 주교와 함께 참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3. 1. 예수의 신성과 인성

요한복음 1장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선언을 통해 예수를 "말씀"(로고스)으로 표현하였는데, 이 시기 그리스 철학에서 로고스는 우주의 가장 근본적인 질서와 힘을 의미했다. 이와 같은 표현을 통해서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는 경향은 기독교 초기부터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신약 성서의 반수 이상을 차지하는 사도 바울의 사목서신 역시 예수의 부활과 신성을 강조한다. 초기 기독교의 분파 중에서는 인간 예수가 하느님의 양자가 되었다는 에비온주의처럼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따라서 요한복음 역시 부정하는) 종파도 있었으나 수적으로 소수에 속했고, 기독교가 국교로 인정받은 후에는 이단으로 지목되기도 하여 그나마 남아 있던 세력은 극소수로 줄어들었다. 그 반대로 영지주의가현설처럼 예수의 인성을 부정하는 종파들도 있었다. 이들 영지주의 및 가현설주의자들은 육체는 악하다는 이분법을 갖고 있었으므로 예수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모습을 했을 뿐이며, 예수가 완전한 사람임을 부정하였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사람으로 오셨음을 부정하는 자들은 적그리스도'라고 단죄했으며, 요한복음에서 사마리아 사람인 수가성 여인과 예수가 대화를 나눈 이야기를 언급하며, 예수가 피곤해 우물가에서 쉬었다고 했다. 누가복음에서도 예수의 탄생 이야기를 적음으로써 예수가 여자의 몸에서 잉태된 완전한 사람임을 단언한다. 칼케돈 신경, 니케아 신경, 사도신경 등에서도 예수를 완전한 인간이자, 하느님으로 묘사한다.

3. 2. 삼위일체

삼위일체 개념은 신약에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성부(하느님, 야훼), 성자(예수), 성령(보혜사)의 연관성은 신약성서의 여러 부분에 표현되어 있다.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 마태오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통해 둘 사이의 밀접한 관련을 강조하고 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도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초기 기독교 시대 기록의 대부분은 그리스도와 하느님을 '성자와 성부'로 표현하고 있다. 요한복음에는 성자 예수와 보혜사 성령이 동일하게 표현되어 있고,[115] 사도행전에도 성령을 예수의 영으로 표현함으로써 삼위일체 개념을 보여주고 있다.[116] 사도행전에는 성부 야훼(여호와)와 성령을 연관시키는 말이 언급되어 있는데,[117] 야훼가 이사야 선지자에게 한 말을 성령이 말했다고 기록함으로써 동질성을 우회적으로 증거하고 있다.[118]

'삼위'라는 표현은 초대교회 시절부터 자주 사용되었고 고대의 침례(약식인 세례 포함) 의식의 기록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테르툴리아누스(테르툴리아노, 터툴리안) 주교가 최초로 삼위일체라는 말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분 하느님이라는 삼위일체의 개념은 초기에는 비교적 불확실했으며, 니케아 공의회가 열린 4세기 초가 되면서 구체적으로 정립되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참 하느님이자 인간인 성자는 성부에게서 창조되지 않고 나신 분이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신 분이라고 선언한다.

4. 주요 인물

예수 승천 후, 맛디아(마티아)를 포함한 주요 제자들(사도들)[108]과 신자들은 예루살렘 마가(마르코)의 다락방에서 열흘 동안 기도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여 방언을 받고 사목을 시작했으며, 교회력을 지키는 교파들은 이 사건을 성령강림주일(성령강림절, 성령강림대축일)로 기념한다. 이후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를 만난 바울(바울로)의 전도로 기독교 복음이 급속히 퍼져나갔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어느 사도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고 고린도(코린토스) 교우들에게 말할 정도로 열성적으로 전도했다.[109]

100년대 중반부터 유스티누스(유스틴) 등 순교자들은 기독교 변증론자로서 기독교가 반사회적 종교가 아님을 설명하고자 했다.

사도들의 사후, 예수의 가르침을 다르게 해석하는 "이단" 세력이 발호하자, "정통" 세력이 결집되었다. 각 지역 교회의 주교들은 원로들과 구분되어 지역 교회의 대표자라는 높은 권위를 가지게 되었으며, 사도들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그 업무를 계승했다. 2세기 초 안티오키아 주교 이그나티우스(이냐시오)가 보편교회(Catholic)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후, 보편교회는 정통 교회의 고유명사가 되었다. 리옹의 주교 이레네우스(이레네오)는 교계 제도를 실질적으로 확립시킨 인물이다.

정교회 전통에 따르면, 1세기에 사도 시몬(Simon the Zealot)과 안드레(Andrew the Apostle)에 의해 조지아(Georgia)에 기독교가 처음 전파되었다. 319년 카르틀리(Kartli)(이베리아(Caucasian Iberia))의 국교가 되었으며, 카파도키아 출신 그리스 여성 성 니노(St. Nino)가 카르틀리의 기독교 개종에 공헌했다.

5. 같이 보기

참조

[1] 잡지 Jesus Visits Phoenicea https://www.calameo.[...] 2024-05-28
[2] 성경 Romans 16:5
[3] 사전 ἐκκλησία
[4] 사전 Bauer lexicon
[5] 서적 Geography of Religion: Where God Lives, where Pilgrims Walk National Geographic Society
[6] 서적 A Concise History of the Catholic Church Doubleday 2004
[7] 서적 Annals
[8] 잡지 The Church of the Apostles found on Mount Zion http://www.centuryon[...] 1990-05-01
[9] 서적 A Concise History of the Catholic Church https://books.google[...] Doubleday
[10] 서적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Oxford University Press
[11] 서적 Understanding the Bible Mayfield
[12] 서적 Studies in Rabbinic Judaism and Early Christianity https://www.academia[...] Brill
[13] 간행물 Fleeing forward: The departure of Christians from Jerusalem to Pella
[14] 서적 A Concise History of the Catholic Church https://books.google[...] Doubleday
[15] 웹사이트 St. James the Less http://www.newadvent[...]
[16] 서적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Oxford University Press
[17] 학술지 The Ideal Prepuce in Ancient Greece and Rome: Male Genital Aesthetics and Their Relation to Lipodermos, Circumcision, Foreskin Restoration, and the Kynodesme http://www.cirp.org/[...]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20-01-03
[18] 학술지 Celsus' Decircumcision Operation: Medical and Historical Implications http://www.cirp.org/[...] Elsevier 2020-01-03
[19] 학술지 Uncircumcision: A Historical Review of Preputial Restoration http://www.cirp.org/[...] Lippincott Williams & Wilkins 2020-02-13
[20] 서적 When Christians Were Jews: The First Generation https://books.google[...] Yale University Press 2018
[21] 웹사이트 Circumcision: In Apocryphal and Rabbinical Literature http://jewishencyclo[...] Kopelman Foundation 2020-01-03
[22] 서적 Approaches to Ancient Judaism, New Series: Religious and Theological Studies Scholars Press
[23] 학술지 Les lois noaẖides: Une mini-Torah pré-sinaïtique pour l'humanité et pour Israël Éditions in Press 2013-05-01
[24] 학술지 The Noachide Commandments and New Testament Ethics: with Special Reference to Acts 15 and Pauline Halakhah Peeters Publishers 1995-01-01
[25] 서적 The Acts of the Apostles: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Yale University Press
[26] 문서 peri'ah
[27] 서적 Anatomy of the New Testament Fortress Press
[28] 서적 The Early Christian World Routledge
[29] 서적 Justification by Faith: The Origin and Development of a Central Pauline Theme Brill Publishers
[30] 학술지 Echoes of Intra-Jewish Polemic in Paul's Letter to the Galatians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1993-09-01
[31] 학술지 Paul's Argument against Gentile Circumcision in Romans 2:17-29 Brill Publishers 2014-09-01
[32] 웹사이트 Epiphanius' Weights and Measures http://www.tertullia[...]
[33] 웹사이트 Academies in Palestine http://jewishencyclo[...]
[34] 서적 Annals
[35] 서적 An Introduction to Jewish-Christian Relation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02-18
[36] 웹사이트 Canon VII of the First Council of Nicaea http://www.ccel.org/[...]
[37] 웹사이트 Eusebius' History of the Church Book IV, chapter V http://www.ccel.org/[...]
[38] 백과사전 Jewish Christianity https://openlibrary.[...] Garland Publishing
[39] 웹사이트 Jerusalem (AD. 71–1099) http://www.newadvent[...]
[40] 웹사이트 The Emperor's Mother Helena having come to Jerusalem, searches for and finds the Cross of Christ, and builds a Church. http://www.ccel.org/[...]
[41] 웹사이트 First Nicaea: Canon VII http://www.ccel.org/[...]
[42] 웹사이트 Quinisext Council https://www.britanni[...] 2010-02-14
[43] 웹사이트 Quinisext Canon 36 http://www.ccel.org/[...]
[44] 서적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Oxford University Press
[45] 성경
[46] 서적 Peter in Early Christianity Wm. B. Eerdmans 2015
[47] 서적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Oxford University Press
[48] 웹사이트 Alexandria, Egypt – Ancient http://jewishencyclo[...]
[49] 웹사이트 Alexandria http://www.newadvent[...]
[50] 웹사이트 The Time of the Easter Festival http://www.ccel.org/[...]
[51] 서적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https://archive.org/[...] Anchor Bible
[52] 웹사이트 Asia Minor http://www.newadvent[...]
[53] 웹사이트 Jerusalem (A.D. 71–1099) http://www.newadvent[...]
[54] 웹사이트 Caesarea Palaestinae http://www.newadvent[...]
[55] 웹사이트 St. Barnabas http://www.newadvent[...]
[56] 웹사이트 Philippi http://www.newadvent[...]
[57] 성경
[58] 서적 Church History
[59] 서적 A New History of Early Christianity https://books.google[...] Yale University Press 2009
[60] 웹사이트 Introduction to the Epistles to the Corinthians - Study Resources https://www.bluelett[...] 2024-04-28
[61] 웹사이트 Introduction to the Epistles to the Corinthians - Study Resources https://www.bluelett[...] 2024-04-28
[62] 웹사이트 Corinth http://www.newadvent[...]
[63] 웹사이트 Early Christianity in Bulgarian Lands – Project HOP http://orthodoxhisto[...]
[64] 웹사이트 The Saint Athanasius Monastery of Chirpan, the oldest cloister in Europe http://bnr.bg/radiob[...] Bulgarian National Radio 2017-06-22
[65] 서적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Oxford University Press
[66] 서적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Oxford University Press
[67] 서적
[68] 웹사이트 St-Paul-Outside-the-Walls homepage https://www.vatican.[...]
[69] 서적 The Jews in the Time of Jesus: An Introduction Paulist Press
[70] 웹사이트 Irenaeus Against Heresies 3.3 http://www.ccel.org/[...]
[71] 웹사이트 Irenaeus Against Heresies 3.3.2 http://www.ccel.org/[...]
[72] 문서 Franzen
[73] 서적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Oxford University Press
[74] 성경
[75] 서적 Antioch and Rome: New Testament Cradles of Christianity Paulist Press
[76] 뉴스 Religion: Peter & the Rock https://web.archive.[...] Time 1953-12-07
[77] 문서
[78] 웹사이트 Schaff's Seven Ecumenical Councils: The Seventh http://www.ccel.org/[...]
[79] 웹사이트 First Council of Nicaea http://www.piar.hu/c[...]
[80] 서적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Oxford University Press
[81] 서적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Oxford University Press
[82] 서적 The Myth of Persecution HarperCollins
[83] 서적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Oxford University Press
[84] 서적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Oxford University Press
[85] 서적 The Church of the Early Fathers: External History https://archive.org/[...] Longmans, Green and Company 1887
[86] 서적 The Dictionary of Religion https://archive.org/[...] Cassell 1887
[87] 서적 Byzantine Rome and the Greek Popes: Eastern Influences on Rome and the Papacy from Gregory the Great to Zacharias, A.D. 590-752 https://books.google[...] Lexington Books
[88] 서적 The Story of Christianity HarperCollins Publishers
[89] 웹사이트 Catholic Encyclopedia: Reggio di Calabria http://www.newadvent[...]
[90] 서적 Abyssinian Christianity: The First Christian Nation BP Editing
[91] 웹사이트 Armenian History, Chapter III http://www.armenianh[...]
[92] 웹사이트 Britannica Academic https://academic.eb.[...]
[93] 저널 "The Primary History of Armenia": An Examination of the Validity of an Immemorially Transmitted Historical Tradition 1975
[94] 문서 India and The Apostle Thomas
[95] 웹사이트 Thomas the Apostole http://www.stthoma.c[...]
[96] 서적 The Apocryphal New Testament Oxford
[97] 서적 Breviary of the Mar Thoma Church in Malabar
[98] 서적 The Expansion of Christianity in the First Three Centuries Williams & Norgate
[99] 서적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Oxford University Press
[100] 서적 Historia Ecclesiastica
[101] 문서 Chronicon Edessenum
[102] 웹사이트 Christianity http://www.iranica.c[...] Encyclopædia Iranica 2019-08
[103] 웹사이트 The Church of the East http://www.oxuscom.c[...]
[104] 웹사이트 The Church Of The East http://oxuscom.com/C[...]
[105] 서적 Nestorian Missionary Enterprise T & T Clark
[106] 서적 The Ecclesiastical History of Sozomen http://www.evolpub.c[...] Evolution Publishing
[107] 성경
[108] 문서 사도행전에 따른 사도 선출 과정
[109] 문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5,8-10
[110] 성경
[111] 성경
[112] 성경
[113] 성경
[114] 서적 5시간 만에 읽는 쉽고 재미있는 교회사 작은 행복
[115] 성경
[116] 성경
[117] 성경
[118] 성경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