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페 카스파르 메초판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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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세페 카스파르 메초판티는 1774년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태어난 뛰어난 기억력과 언어 학습 능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여러 언어를 습득하여 1831년 로마로 가서 전교 성성의 일원이 되었으며, 1833년 바티칸 도서관 관장을 거쳐 1838년 추기경이 되었다. 메초판티는 70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고 전해지나, 그의 언어 능력에 대한 정확한 정도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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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페 카스파르 메초판티 | |
---|---|
기본 정보 | |
이름 | 주세페 가스파로 메초판티 |
출생 | 1774년 9월 19일 |
출생지 | 볼로냐, 교황령 |
사망 | 1849년 3월 15일 |
사망지 | 로마, 교황령 |
매장지 | 산토노프리오 |
국적 | 교황령 |
부모 | 프란체스코 메초판티, 제수알다 달올모 |
직책 | |
직함 | 추기경 |
교회 | 로마 가톨릭교회 |
서임 | 1838년 2월 12일 |
서임자 | 교황 그레고리오 16세 |
직위 | 추기경-사제 |
사제 서품 | 1797년 9월 23일 |
관구 | 학술회 장관 |
임명일 | 1845년 5월 23일 |
임기 종료 | 1849년 3월 15일 |
이전 | 루이지 람브루스키니 |
이후 | 카를로 비차르델리 |
기타 직책 | 산토노프리오 추기경-사제 (1838-49) |
정보 | |
별칭 | 언어의 기억, 살아있는 언어 사전, 언어 괴물 |
업적 | 뛰어난 기억력과 언어 능력으로 유명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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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주세페 카스파르 메초판티는 수십 개의 언어를 구사한 것으로 알려진 이탈리아의 추기경이자 저명한 언어학자이다.
볼로냐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기억력과 외국어 습득 능력을 보였다. 피아리스트가 운영하는 학교와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다양한 언어를 접했고, 규정된 나이보다 일찍 신학 과정을 마쳤다. 1797년 사제 서품을 받고 볼로냐 대학교에서 여러 언어 교수로 활동했으나, 당시 볼로냐를 지배하던 치스알피네 공화국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하여 교수직을 잠시 잃기도 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는 부상당한 외국인 병사들을 돌보며 더 많은 유럽 언어를 익혔고, 이후 교수직에 복직하여 활동을 이어갔다. 1831년에는 로마로 가서 교황 그레고리 16세의 요청으로 전교 성성(Congregatio de Propaganda Fide)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1833년 바티칸 도서관 관장으로 임명되었다. 1838년에는 추기경으로 서임되어 전교 성성의 연구 책임자를 맡았다.
메초판티는 평생에 걸쳐 놀라운 언어 습득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중국어를 단 4개월 만에 유창하게 구사하게 되었다는 일화는 그의 비범함을 잘 보여준다. 언어학 외에도 민족학, 고고학, 화폐학, 천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1849년 로마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위령비는 로마의 Chiesa di Sant'Onofrio al Gianicolo|산 오노프리오 알 지아니콜로 성당ita에 안치되어 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볼로냐의 낮은 신분 가정에서 태어난 메초판티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기억력과 음감을 보였으며, 특히 외국어 학습에 비범한 재능을 나타냈다. 그는 볼로냐의 스쿠올레 피에(it: Scuole Pie, 아이들에게 신앙과 읽기, 쓰기를 가르치는 학교)에 다니며 피아리스트와 함께 공부했고, 여러 나라에서 온 선교사들, 특히 교황령에서 온 예수회 선교사들과 교류할 기회를 가졌다. 이들과 대화하면서 그는 스웨덴어, 독일어, 스페인어 및 남아메리카 원주민 언어를 포함한 여러 새로운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를 공부했으며, 현재 사용되지 않는 사어도 습득했다.그는 사제 서품을 위한 최소 연령에 도달하기 전에 신학 연구를 마쳤다. 이 기간 동안 동양 언어 학습에도 매진했다. 1797년, 23세에 그는 사제 서품을 받았고, 볼로냐 대학교에서 아랍어, 히브리어, 아시아 언어, 그리스어 교수가 되었다. 같은 해, 메초판티는 조지아나 헤어-네일러(Georgiana Hare-Nayler)의 장남을 가르쳤다.
그러나 당시 볼로냐를 지배하던 치스알피네 공화국이 요구한 충성 서약을 거부하여 볼로냐 대학교 직위를 잃었다. 1799년과 1800년 사이에 그는 나폴레옹 전쟁 중 부상당한 많은 외국인들을 방문하여 그들을 돌보고 다른 유럽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도시를 방문하는 관광객, 여행자를 대상으로 하는 고해 신부가 되었다.
1803년, 그는 볼로냐 연구소의 부사서로 임명되었고, 곧 동양 언어와 고대 그리스어 교수로 복직했다. 1806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로부터 파리에 정착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지만, 이를 거절했다. 동양 언어 학과는 1808년 부왕 외젠 드 보아르네에 의해 폐지되었지만, 1814년 교황 비오 7세의 복귀에 따라 다시 부활했다. 메초판티는 1831년 로마로 가서 가톨릭 교회의 선교 활동을 관장하는 기구인 전교 성성(Congregatio de Propaganda Fide)의 일원이 될 때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
2. 2. 사제 서품 및 학자로서의 경력
볼로냐에서 태어난 메초판티는 낮은 신분의 가정 출신이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기억력과 음감을 지녔으며, 특히 외국어 습득에 비범한 재능을 보였다. 그는 볼로냐의 피아리스트가 운영하는 학교(Scuole Pieita)에 다니며 신앙과 읽기, 쓰기를 배웠고, 그곳에서 여러 나라에서 온 선교사들, 특히 교황령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들과 교류했다. 이들과 대화하면서 그는 스웨덴어, 독일어, 스페인어 및 다양한 남아메리카 원주민 언어와 스페인어 방언들을 빠르게 익혔으며, 학교에서는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 심지어 사어까지 습득했다.신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그는 사제가 될 수 있는 최소 연령 규정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모든 과정을 마쳤으며, 이 기간 동안 동양 언어 학습에도 매진했다. 1797년, 23세의 나이로 사제 서품을 받았고, 같은 해 볼로냐 대학교에서 아랍어, 히브리어, 아시아 언어, 그리스어 교수로 임명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조지아나 헤어-네일러의 장남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볼로냐를 지배하던 치스알피네 공화국이 요구한 충성 서약을 거부하면서 대학교 교수직을 잃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1799년과 1800년 사이,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부상당한 많은 외국인 병사들을 병원에서 돌보며 교류했고, 이 과정에서 다른 유럽 언어들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도시를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이나 여행자들을 위한 고해 신부로 활동하기도 했다.
1803년, 그는 볼로냐 연구소의 부사서로 임명되었고, 곧 동양 언어와 고대 그리스어 교수직에도 복직했다. 1806년에는 나폴레옹으로부터 파리에 정착하라는 제안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 동양 언어 학과는 1808년 부왕 외젠 드 보아르네에 의해 폐지되었지만, 1814년 교황 비오 7세가 복위하면서 다시 부활했고, 메초판티는 이 직책을 계속 맡았다. 같은 해 교황 비오 7세의 로마행 권유는 거절했으나, 1831년 교황 그레고리 16세의 제안은 받아들여 로마로 가서 가톨릭 교회의 선교 활동을 관장하는 기구인 전교 성성(혹은 복음 선교성, Congregatio de Propaganda Fidelat)의 일원이 되었다.
국제적인 도시 로마에서 그는 다양한 선교사 및 학자들과 교류하며 언어 습득의 폭을 더욱 넓혀갔다. 그가 언어 학습에서 유일하게 어려움을 겪었다고 알려진 것은 중국어였으나, 이마저도 불과 4개월 만에 유창하게 구사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전 모나코 선교사 움피에레스 주교와 전교 성성의 어학 교사는 메초판티와 중국어로 대화를 나눈 후 그의 실력을 공적으로 인정했다.
교황 그레고리 16세는 메초판티와 친분을 쌓았고, 1833년 안젤로 마이의 뒤를 이어 그를 바티칸 도서관 관장으로 임명했다. 이어 1838년2월 12일 열린 추기경 총회에서 메초판티를 산토노프리오 성당의 추기경으로 서임하고 전교 성성의 연구 책임자로 임명했다. 언어학 외에도 그의 관심사는 민족학, 고고학, 화폐학, 천문학 등 다방면에 걸쳐 있었다.
1849년, 메초판티는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위령비는 로마의 산 오노프리오 알 지아니콜로 성당(Chiesa di Sant'Onofrio al Gianicoloita)에 안치되어 있다.
2. 3. 로마에서의 활동과 추기경 서임
1831년, 메초판티는 로마로 가서 교황 그레고리 16세의 제안을 받아들여 가톨릭교회의 선교 활동을 관장하는 기구인 전교 성성(Congregatio de Propaganda Fide)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1814년 교황 비오 7세의 권유는 거절했지만, 그레고리 16세의 제안은 수락했다. 이전 1806년에는 나폴레옹의 파리 정착 제안도 거절한 바 있다.국제적인 도시인 로마에서 그는 다양한 선교사 및 학자들과 교류하며 언어 학습을 계속했다. 특히 중국어는 배우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불과 4개월 만에 유창하게 구사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전 모나코의 선교사였던 움피에레스 주교와 선교 성성의 어학 교사는 메초판티와 중국어로 대화한 후 그의 실력을 공적으로 인정했다.
1833년, 메초판티는 안젤로 마이의 뒤를 이어 바티칸 도서관 관장이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 16세는 메초판티와 친분을 쌓았으며, 1838년 2월 12일 열린 추기경 총회에서 그를 산토노프리오의 추기경으로 서임했다. 같은 해, 그는 전교 성성의 연구 책임자가 되었다.
언어 외에도 그의 관심사는 민족학, 고고학, 화폐학, 천문학 등 다양했다.
1849년, 메초판티는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위령비는 로마의 Chiesa di Sant'Onofrio al Gianicolo|산 오노프리오 알 지아니콜로 성당ita에 안치되어 있다.
3. 언어 능력
주세페 카스파르 메초판티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다중언어 구사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다양한 일화들은 그가 수십 개의 언어를 각기 다른 수준으로 구사했다고 전하지만, 그가 실제로 알고 있던 언어의 정확한 수나 능력의 범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메초판티의 언어 능력에 대한 가장 유명한 기록 중 하나는 가톨릭 성직자 찰스 윌리엄 러셀이 1858년에 쓴 전기이다. 러셀은 메초판티가 72개의 언어를 구사했으며, 이를 숙련도에 따라 분류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동시대 다른 학자들에 의해 과장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1] 일부에서는 그의 능력이 성인전처럼 신격화되었거나, '72'라는 숫자가 바벨탑 전설과 연관되어 상징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또한 당시의 언어 능력 평가 기준이 오늘날의 유창성 중심과는 달랐을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2]
메초판티 본인은 자신의 능력에 대해 묻는 이들에게 "나는 그저 제대로 제본되지 않은 사전일 뿐"이라며 겸손하게 답했다고 전해진다.[3][2]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지 고든 바이런을 비롯한 많은 동시대 인물들은 그의 비범한 언어 능력에 놀라움을 표하며 관련 증언을 남겼다. 메초판티의 문서 보관소에 남아있는 최소 56개 언어에 대한 학습 자료들은 그가 실제로 다양한 언어에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뒷받침한다.
결론적으로 메초판티의 정확한 언어 능력 수준을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당대에 보기 드문 언어 천재로 널리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그의 능력에 대한 자세한 증언과 비판적 분석은 아래 하위 섹션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3. 1. 언어 능력에 대한 증언
메초판티가 여러 언어를 어느 정도 수준으로 구사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일화가 전해진다. 그가 실제로 알고 있던 언어의 정확한 수나 능력의 범위는 명확하지 않다. 메초판티의 조카는 그가 114개의 언어를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가톨릭 성직자 찰스 윌리엄 러셀이 1858년에 쓴 메초판티 전기에 따르면, 메초판티는 총 72개의 언어를 구사했으며, 그 능력에 따라 4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이 중 30개 언어(구약 히브리어, 미쉬나 히브리어, 아랍어, 칼데아어, 콥트어, 고대 아르메니아어, 현대 아르메니아어, 페르시아어, 튀르키예어, 알바니아어, 몰타어, 고대 그리스어, 현대 그리스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웨덴어, 덴마크어, 네덜란드어, 플라망어, 영어, "일리리아어"(슬라브어와 로마어 계통 언어로, 아마도 크로아티아어와 달마티아어를 지칭), 러시아어, 폴란드어, 체코어, 헝가리어, 중국어)는 "자주 시험을 거쳤고, 드물게 뛰어난 솜씨로 구사했다"고 하며, 다른 9개 언어(시리아어, 게에즈어, 암하라어, 힌두스탄어, 구자라트어, 바스크어, 루마니아어, "캘리포니아어"(하나 또는 여러 개의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 알곤킨어)는 "유창하게 구사했지만, 시험을 충분히 거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다른 11개 언어(쿠르드어, 조지아어, 세르비아어, 불가리아어, 로마니 집시어, "페구어", 웨일스어, "앙골라어"(아마도 킴분두어), "멕시코어", "칠레어", "페루어)는 "드물게, 덜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으로, 8개 언어(싱할라어, 미얀마어, 일본어, 아일랜드어, 스코틀랜드 게일어, 치페와어, 델라웨어어, 그리고 "오세아니아"의 일부 언어(아마도 마오리어와 다른 언어들을 포함))는 "불완전하게 구사 - 몇 문장과 대화 형식을 구사"하는 것으로, 마지막 14개 언어(산스크리트어, 말레이어, "통킹어"(아마도 베트남어, 특히 당시 통킹으로 불리던 북부 방언), "코친차이나어"(아마도 베트남어, 특히 코친차이나의 남부 방언), 티베트어, 일본어 (두 번 나열됨), 아이슬란드어, "라프어", 루테니아어, 프리지아어, "레트어", 코니시어, 고전 케추아어, "빔바라어"(아마도 밤바라어))는 "책으로 공부했지만, 구사한 적은 없는" 것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기록의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러셀의 동시대 인물이었던 다중언어 구사자 토마스 와츠는 메초판티가 아는 언어의 수를 약 60개 또는 61개 정도로 추정하며 러셀의 평가가 과장되었다고 비판했다. 이는 메초판티가 아주 기본적인 지식과 약간의 어휘만 가진 언어를 제외한 수치로, 러셀도 나중에 이와 비슷한 숫자에 동의했다.[1] 일부에서는 메초판티의 능력에 대한 이야기가 특정 가톨릭 성인들의 기적 이야기처럼 성인전적인 성격을 띨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 또한 러셀이 제시한 '72개 언어'라는 숫자가 바벨탑 이야기와 연관된 종교적 의미 때문에 의도적으로 선택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언어학자들은 일반인들이 진정한 언어 능력의 의미를 오해하거나 언어 습득의 어려움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동시대 기록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한다. 메초판티 시대에는 언어 능력을 오늘날처럼 유창한 구사 능력보다는 읽기와 번역 같은 수동적 기술을 기준으로 평가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외국 귀빈을 접견하는 추기경으로서 메초판티는 정해진 문구를 주로 사용했을 수 있으며, 이것이 실제 유창함을 의미하지는 않을 수 있다.[2]
메초판티의 문서 보관소에 남아있는 자료에는 그가 학습 목적으로 수집했을 것으로 보이는 최소 56개 언어의 텍스트가 포함되어 있다. 이 자료에는 단어 목록, 병렬 텍스트, 문법 설명 등이 포함되어 있어 메초판티가 수십 개 언어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하지만, 정확한 능력의 정도와 범위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메초판티 자신은 언어 능력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나는 그저 제대로 제본되지 않은 사전일 뿐"이라며 겸손하게 답했다고 전해진다.[3][2] 그는 특별한 야망 없이 영혼을 돌보고, 대학에서 가르치며, 매일 언어를 습득하는 데 열중했다. 여러 동시대 인물들이 그의 언어 능력에 대해 증언했다.
- 영국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은 볼로냐에서 메초판티를 만난 후 "그의 언어 능력은 범상치 않다. 바벨탑이 세워졌을 때 그는 통역으로 그 자리에 있었어야 했다"라고 말했다.
- 폴란드 브로츠와프 대학의 아우구스트 빌헬름 교수는 이탈리아 여행 중 메초판티를 만나, 해외에 나가본 적 없는 그가 완벽한 독일어를 구사하는 것에 매우 놀랐다고 한다.
- 주 이탈리아 러시아 대사관의 통역관 마테오 피사니는 메초판티의 어학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 슬라브어파 화자, 동양 언어 화자 등 몇 명과 함께 그의 곁을 찾아가 그 실력에 압도당했다고 한다.
- 존 헨리 뉴먼의 친구인 아일랜드인 신부 찰스 윌리엄 러셀은 메초판티와 자주 만나, 그때마다 게일어, 영어, 그 외 그레이트브리튼 섬의 몇몇 주요 방언을 틀림없이 유창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러셀은 메초판티 사후, 실제 기록과 증언을 섞어 그의 전기를 썼는데, 이는 여러 전기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러셀에 따르면, 메초판티는 아래 표와 같이 다수의 언어를 구사했다고 한다.
구분 | 언어 목록 |
---|---|
거의 완벽하게 말하고 쓸 수 있었던 언어 | 히브리어, 아랍어, 칼데아어, 콥트 이집트어, 고대 아르메니아어, 아르메니아어, 페르시아어, 터키어, 알바니아어, 몰타어, 고대 그리스어, 그리스어, 라틴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웨덴어, 영어, 러시아어, 폴란드어, 체코어, 헝가리어, 중국어, 시리아어, 게에즈어, 암하라어, 힌디어, 구자라트어, 바스크어, 루마니아어 등. |
말하지는 못했지만, 독해가 가능했던 언어 | 산스크리트어, 말레이어, 티베트어, 아일랜드어, 사미어, 루스어, 프리지아어, 라트비아어, 콘월어, 케추아어, 밤바라어 |
3. 2. 알려진 언어 목록 (찰스 윌리엄 러셀의 전기)
가톨릭 성직자이자 메초판티의 친구였던 찰스 윌리엄 러셀은 1858년에 메초판티의 전기를 출판했다. 이 전기에는 메초판티가 구사했다고 알려진 72개의 언어 목록이 제시되어 있으며, 러셀은 이를 숙련도에 따라 다음과 같이 4가지 범주로 분류했다.분류 | 설명 | 언어 목록 (총 72개) |
---|---|---|
1 | 자주 시험을 거쳤고, 드물게 뛰어난 솜씨로 구사 | 구약 히브리어, 미쉬나 히브리어, 아랍어, 칼데아어, 콥트어, 고대 아르메니아어, 현대 아르메니아어, 페르시아어, 튀르키예어, 알바니아어, 몰타어, 고대 그리스어, 로마이어(현대 그리스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웨덴어, 덴마크어, 네덜란드어, 플라망어, 영어, "일리리아어"(크로아티아어 또는 달마티아어 추정), 러시아어, 폴란드어, 체코어, 헝가리어, 중국어 (30개) |
2 | 유창하게 구사했지만, 시험을 충분히 거치지 않음 | 시리아어, 게에즈어, 암하라어, 힌두스탄어, 구자라트어, 바스크어, 루마니아어, "캘리포니아어"(하나 또는 여러 개의 캘리포니아 원주민 언어), 알곤킨어 (9개) |
3 | 드물게, 덜 완벽하게 구사 | 쿠르드어, 조지아어, 세르비아어, 불가리아어, 로마니, "페구안", 웨일스어, "앙골어"(킴분두어 추정), "멕시코어", "칠레어", "페루어" (11개) |
4 | 불완전하게 구사 — 몇 문장과 대화 형식을 구사 | 싱할라어, 미얀마어, 일본어, 아일랜드어, 스코틀랜드 게일어, 치페와어, 델라웨어어, 그리고 "오세아니아"의 일부 언어(아마도 마오리어와 다른 언어들 포함) (8개) |
5 | 책으로 공부했지만, 구사한 적 없음 | 산스크리트어, 말레이어, "통킹어"(아마도 베트남어, 특히 당시 통킹으로 불리던 북부 방언), "코친차이나어"(아마도 베트남어, 특히 코친차이나의 남부 방언), 티베트어, 일본어 (중복 기재됨), 아이슬란드어, "라프어", 루테니아어, 프리지아어, "레트어", 코니시어, 고전 케추아어, "빔바라"(아마도 밤바라어) (14개) |
러셀에 따르면, 메초판티는 첫 번째 범주에 속하는 30개 언어를 매우 뛰어난 수준으로 구사했으며, 두 번째 범주의 9개 언어도 유창하게 구사했다고 한다. 세 번째 범주의 11개 언어는 덜 완벽하게 구사했고, 네 번째 범주의 8개 언어는 기본적인 문장과 대화 정도만 가능했으며, 마지막 14개 언어는 책을 통해 학습했지만 실제로 사용하지는 않았다고 분류했다.
그러나 러셀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다른 학자들은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동시대의 다중언어 구사자였던 토마스 와츠는 러셀의 평가가 과장되었다고 비판하며, 메초판티가 실제로 구사할 수 있었던 언어는 약 60개 또는 61개 정도라고 추정했다. 이는 메초판티가 아주 기본적인 지식만 가지고 있던 언어를 제외한 숫자로, 러셀 본인도 나중에 이와 비슷한 수치에 동의한 것으로 알려졌다.[1]
일부에서는 메초판티의 언어 능력에 대한 이야기가 성인전과 같이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특정 가톨릭 성인들이 공중부양이나 동시존재 같은 기적을 행했다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또한 러셀이 제시한 '72개'라는 숫자가 바벨탑 이야기와 관련된 종교적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선택되었을 수 있다는 추측도 있다. 언어학자들은 당시 일반인들이 진정한 언어 능력의 의미를 오해하거나 언어 습득의 어려움을 과소평가했을 수 있으므로, 동시대 기록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한다. 메초판티 시대에는 언어 능력을 오늘날처럼 유창한 구사 능력보다는 읽기와 번역 능력 위주로 평가했을 가능성이 높다. 추기경으로서 외국 귀빈들과 교류할 때 정해진 의례적인 문구를 주로 사용했을 것이며, 이것이 실제 유창성을 의미하지는 않을 수 있다.[2]
메초판티가 남긴 기록 보관소에는 최소 56개 언어에 대한 학습 자료(단어 목록, 병렬 텍스트, 문법 설명 등)가 남아 있어, 그가 수십 개 언어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그의 정확한 능력 수준과 범위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메초판티 자신은 언어 능력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나는 그저 제대로 제본되지 않은 사전일 뿐"이라며 겸손하게 답했다고 전해진다.[3][2]
러셀은 또한 메초판티가 거의 완벽하게 구사한 언어와 독해만 가능했던 언어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했는데, 그가 제시한 목록은 다음과 같다. (이는 앞서 제시된 4단계 분류와 일부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제시된 언어 수와 실제 나열된 언어 수에 차이가 있다.)
- 거의 완벽하게 말하고 쓸 수 있었던 언어: 히브리어, 아랍어, 칼데아어, 콥트 이집트어, 고대 아르메니아어, 아르메니아어, 페르시아어, 터키어, 알바니아어, 몰타어, 고대 그리스어, 그리스어, 라틴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웨덴어, 영어, 러시아어, 폴란드어, 체코어, 헝가리어, 중국어, 시리아어, 게에즈어, 암하라어, 힌디어, 구자라트어, 바스크어, 루마니아어 등. (러셀의 전기에서는 이 범주를 38개 또는 39개 언어로 언급하기도 했으나, 실제 나열된 언어는 31개이다.)
- 말하지는 못했지만, 독해가 가능했던 언어: 산스크리트어, 말레이어, 티베트어, 아일랜드어, 사미어, 루스어, 프리지아어, 라트비아어, 콘월어, 케추아어, 밤바라어. (러셀의 전기에서는 이 범주를 40개 또는 14개 등으로 다르게 언급하기도 했으나, 실제 나열된 언어는 11개이다.)
3. 3. 언어 능력에 대한 비판적 시각
다양한 일화들은 메초판티가 여러 수준으로 수십 개의 언어를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그가 실제로 알고 있던 언어의 정확한 수와 능력의 정도 및 범위는 불확실하다. 메초판티의 조카는 그가 114개 언어를 알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가톨릭 성직자 찰스 윌리엄 러셀이 1858년에 쓴 전기에는 메초판티가 72개의 언어를 구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러셀은 이 72개 언어를 숙련도에 따라 4가지 범주로 나누었다.- 30개 언어: "자주 시험을 거쳤고, 드물게 뛰어난 솜씨로 구사했다"고 주장됨.
- 9개 언어: "유창하게 구사했지만, 시험을 충분히 거치지 않았다"고 주장됨.
- 11개 언어: "드물게, 덜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으로 분류됨.
- 8개 언어: "불완전하게 구사 - 몇 문장과 대화 형식을 구사"하는 것으로 분류됨.
- 마지막 14개 언어: "책으로 공부했지만, 구사한 적은 없는" 것으로 분류됨.
그러나 학자들은 이러한 기록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러셀의 시대에도 동료 다중 언어 구사자 토마스 와츠는 메초판티가 아는 언어의 수를 약 60개 또는 61개로 추정하며 러셀의 주장이 과장되었다고 비판했다. 와츠는 메초판티가 아주 기본적인 지식과 약간의 어휘만 가진 언어를 제외한 숫자이며, 러셀도 나중에 이 점에 동의했다. 일부에서는 메초판티의 능력에 대한 보고가 특정 가톨릭 성인들의 공중부양이나 동시존재 같은 기적 이야기와 유사한 성인전적 성격을 띨 수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러셀이 제시한 '72개 언어'라는 숫자가 바벨탑 붕괴 후 생겨난 언어의 수와 같다는 점에서 종교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선택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언어학자들은 일반인들이 진정한 언어 능력이 무엇인지 오해하거나 언어 습득 및 유지의 어려움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어, 메초판티 능력에 대한 동시대 기록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한다. 메초판티 시대에는 언어 능력을 오늘날의 구두 유창성보다는 읽기와 번역 같은 수동적 기술 능력으로 평가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외국 귀빈들과 교류하는 추기경으로서 메초판티는 정해진 몇몇 문구를 주로 사용했을 수 있으며, 이것이 실제 언어 유창성을 의미하지는 않을 수 있다.
메초판티의 문서 보관소에 남아있는 자료들은 그가 학습 목적으로 수집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최소 56개 언어에 대한 텍스트(단어 목록, 병렬 텍스트, 언어 기술 등)를 포함한다. 이는 메초판티가 수십 개 언어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하지만, 그의 능력의 정확한 정도와 범위는 여전히 알 수 없다.
메초판티 자신은 언어 능력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나는 그저 제대로 제본되지 않은 사전일 뿐인데?"라고 겸손하게 답했다고 전해진다.
참조
[1]
웹사이트
The Polyglot of Bologna
https://publicdomain[...]
2012-06-26
[2]
웹사이트
Mezzofanti's Gift: The Search for the World's Most Extraordinary Language Learners by Michael Erard – review
https://www.theguard[...]
2013-07-28
[3]
웹사이트
The cardinal who won a cursing contest, allegedly
https://www.pillarca[...]
2022-10-04
[4]
웹사이트
メゾファンティが話した言語 (en)
http://how-to-lea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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