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목차

1. 개요

베네치아 공화국은 421년경 건국되어 1797년 멸망할 때까지 존속한 이탈리아의 해상 공화국이다. 초기에는 석호의 공동체에서 시작하여 7세기 말 비잔틴 제국의 약화로 자율성을 얻고, 8세기 초에는 최초의 도제를 선출하며 독립적인 공국으로 발전했다. 15세기에는 이탈리아 본토로 확장하고,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캉브레 동맹 전쟁 등을 거치며 영토를 확장했다. 17세기에는 쇠퇴기에 접어들어, 1797년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2. 초기 발전

오르소 이파토의 아들인 테오다토 이파토는 근거지를 에라클레아에서 말라모코로 옮겼다.[45] 초기 베네치아의 여러 도제는 세습을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테오다토 이파토의 치세 중 베네치아는 북부 이탈리아에 유일하게 남은 비잔티움 제국령이었으며, 프랑크 왕국 내 카롤링거 왕조 개창 등 변화하는 정치 체제는 베네치아 정치 구도를 변화시켰다. 당시 주요 파벌로는 친비잔티움 세력, 공화주의자, 친프랑크 세력, 친랑고바르드 세력이 있었다.

테오다토 이파토는 암살되었고, 그의 자리를 빼앗은 갈라 가울로 역시 1년 안에 그와 같은 운명을 맞았다. 그 후임인 도메니코 모네가리오 치하에서 베네치아는 어촌에서 무역항 및 교역 중심지로 탈바꿈했다. 조선 산업 역시 크게 발전했으며, 아드리아해 지배권 확보를 위한 초석도 이때 놓였다. 또한 이때 최초로 호민관제가 도입되어, 매년 두 명의 신임 호민관이 선출되어 도제를 감시하고 권력 남용을 방지했다.

친랑고바르드파였던 모네가리오는 764년 축출되었으며, 에라클레아 출신의 친비잔티움파인 마우리치오 갈바이오가 뒤를 이었다.[47] 갈바이오는 긴 치세(764-787) 동안 베네치아를 지역적, 국제적 번영의 도상에 올렸으며, 세습 왕조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이때 베네치아는 리알토 지역까지 확장되었다. 그의 후임은 아들인 조반니 갈바이오였으며, 조반니는 노예 무역을 두고 카롤루스 대제와 충돌하고 교회와 대립했다.

세습 왕조를 세우려던 야망은 804년 친프랑크파가 오벨레리오 델리안토네리 치하에서 권력을 잡으면서 분쇄되었다. 오벨레리오는 베네치아를 카롤링거 제국 영향권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 피피노 카를로만(피핀)의 도움을 요청하여 시민의 분노를 샀으며, 810년 피핀이 베네치아를 포위했을 때 가족과 함께 도시를 떠나야 했다. 피핀은 6개월 동안 베네치아를 포위했으나, 늪지에서 발생한 역병 등으로 인해 결국 철수해야 했다. 피핀 자신도 이 병으로 몇 개월 후 사망했다.

베네치아는 이때의 승리로 쟁취한 독립을 이후 유지했으며, 이는 후에 카롤루스 대제와 니케포루스 1세 간에 맺은 협정에서 추인되었다. 이 협정은 베네치아를 비잔티움 제국 영토로 인정하는 동시에, 펜타폴리스를 포함한 아드리아해에서의 베네치아 교역권을 인정했다.[48]

2. 1. 건국 신화와 초기 정착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사는 직접적으로 언급된 역사적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1] 전통적으로 421년 3월 25일 금요일 정오에 파도바 당국이 북부 이탈리아 지역에 무역 거점을 설립하기 위해 도시를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건국은 또한 같은 행사인 성 야고보 교회의 설립으로 기념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교회(성 자코모 디 리알토로 추정)는 적어도 11세기, 늦어도 12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1세기의 ''알티나테 연대기''(Chronicon Altinate) 또한 해당 지역의 최초 정착지인 리보 알토("높은 해안", 나중에 리알토)가 같은 교회(즉, 현재 대운하 둑에 있는 산 자코메토)의 봉헌과 관련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2][3]

전설에 따르면, 이 지역의 원래 인구는 파도바, 아퀼레이아, 트레비소, 알티노 및 콘코르디아(현대 콘코르디아 사기타리아)와 같은 인근 로마 도시와 방어되지 않은 시골에서 온 난민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2세기 중반부터 5세기 중반까지 훈족과 게르만족의 잇따른 침략을 피해 도망쳐 왔다.[4] 이는 또한 최초의 도제를 선출한 베네치아의 12개 창립 가문인 소위 "사도 가문"에 대한 문서로 더욱 뒷받침되는데, 이들은 대부분 로마 가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5][6]

600년경의 베네치아


콰디와 마르코만니는 서기 166~168년에 이 지역의 주요 로마 도시인 오피테르지움(현대 오데르초)을 파괴했다. 이탈리아 로마의 이 지역은 5세기 초에 서고트족과 452년에 알티눔(베네치아 석호의 본토 해안에 있는 도시)을 약탈한 훈족의 아틸라에 의해 다시 점령되었다. 이탈리아 반도의 북부에 대한 마지막이자 가장 지속적인 이주는 568년의 롬바르드족의 이주였으며, 이는 북동부 지역인 베네티아(현대 베네토와 프리울리)에 가장 파괴적이었다. 또한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영토는 이탈리아 중부 일부와 베네티아의 해안 석호, 즉 라벤나 총독령으로 제한되었다. 이 무렵 카시오도루스는 ''incolae lacunae''("석호 거주자"), 그들의 어업과 염전, 그리고 그들이 제방으로 섬을 강화한 방법에 대해 언급했다.[7] 오피테르지움 지역은 다양한 침략으로부터 마침내 회복되기 시작했지만, 667년 그리모알드 1세가 이끄는 롬바르드족에 의해 마지막으로 영원히 파괴되었다.

7세기 말에 비잔틴 제국의 권력이 북부 이탈리아에서 약화되면서, 석호 공동체는 롬바르드족에 대항하기 위해 상호 방어를 위해 뭉쳤으며, 베네치아 공국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공국에는 현대 프리울리에 있는 아퀼레이아 대주교와 그라도의 대주교가 포함되었으며, 베네치아 동쪽에 있는 그라도와 캐롤의 석호가 있었다. 라벤나와 공국은 해상로로만 연결되었으며, 공국의 고립된 위치로 인해 자율성이 증가했다. ''트리부니 마이오레스''(tribuni maiores)는 석호의 섬에 최초의 상설 중앙 통치 위원회를 형성했으며, 이는 전통적으로 서기 568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8]

8세기 초에 석호의 사람들은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히파투스''와 ''둑스''의 칭호를 받은 최초의 지도자 오르소 이파토(Ursus)를 선출했다. 역사적으로 Ursus는 최초의 베네치아의 도제였다. 그러나 11세기 초부터 전통에 따르면, 베네치아인들은 서기 697년에 파올로 루치오 아나페스토(Anafestus Paulicius)를 최초의 공작으로 선포했지만, 이 전통은 베네치아의 부제 요한(John the Deacon)의 연대기에서 유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도제들의 권력 기반은 에라클레아에 있었다.

처음에는 주요 정착지가 나중에 베네치아의 중심이 될 리알토 그룹의 섬이 아닌 석호의 다른 곳에 있었다. 리알토 그룹에서 증명된 몇 안 되는 초기 정착지 중 하나는 석호의 모래톱에 더 가까운, 군도의 서쪽 끝에 있는 올리볼로 섬(현재 S. 피에트로 인 카스텔로라고 불림)이었다. 고고학 발굴 결과 이 섬은 이미 5세기에 거주하고 있었다. 6세기와 7세기의 비잔틴 제국 봉인은 이 시기에 정치적으로 중요했음을 나타낸다. 또한 아마도 6세기부터의 성도 있었다. 요한 부제의 11세기 초의 ''베네툼 연대기''(Chronicon Venetum)는 774~76년에 도제 마우리치오 갈바이오(764~87)에 의해 올리볼로 교구가 설립되었으며, 775년까지 올베리오 주교가 올리볼로에 설립되었고, S. 피에트로 대성당의 창립을 오르소 파르테치파지오 주교에게, 완공을 841년으로 돌리고 있다. 리보 알토 그룹의 초기 정착지에 대한 또 다른 증거는 칸나레조의 ''세스티에레''(구역)가 될 곳에 있다. 베네치아를 형성하게 될 리보 알토 그룹 섬에 초기 정착지가 있었지만, 그 지역은 9세기가 되어서야 제대로 도시화되기 시작했다.

오르소 이파토의 아들인 테오다토 이파토는 근거지를 에라클레아에서 말라모코로 옮겼다.[45] 테오다토 이파토의 도제 계승은 세습 왕조를 세우려는 오르소 이파토의 의도에 따른 것이며, 베네치아 초기 역사 중 여러 명의 도제는 세습을 시도하였으나 결국에는 실패했다. 테오다토 이파토의 치세 중 베네치아는 북부 이탈리아에 유일하게 남은 비잔티움 제국령이 되었으며, 당시 프랑크 왕국 내에서 벌어진 카롤링거 왕조 개창 등 변화하는 정치체제는 베네치아 정치 구도를 변화시켰다. 당시 베네치아에는 확고한 친비잔티움 세력, 실질적으로 독립하고자 하는 공화주의자, 친프랑크 세력이 존재했다. 친프랑크 세력은 카롤링거 왕조의 피핀 3세를 랑고바르드족으로부터의 보호자로 여겼으며, 교황의 지지에 힘입어 주로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소수파였던 친랑고바르드 세력은 비잔티움 제국 및 프랑크 왕국과의 연합을 반대하고, 랑고바르드 왕국과의 평화 유지에 관심을 두었다.

갈라 가울로는 테오다토 이파토를 암살하고 도제 자리를 빼앗았으나, 1년 만에 같은 운명을 맞았다. 도메니코 모네가리오가 후임이 되면서 베네치아는 어촌에서 무역항 및 교역 중심지로 변화했다. 조선산업이 크게 발전하고 아드리아해 지배권 확보의 초석이 놓였다. 또한 호민관제가 도입되어 매년 두 명의 호민관이 선출되어 도제를 감시하고 권력 남용을 방지하였다.

친랑고바르드파였던 모네가리오는 764년 축출되었으며, 에라클레아 출신의 친비잔티움파인 마우리치오 갈바이오가 뒤를 이었다.[47] 마우리치오 갈바이오는 긴 치세(764-787) 동안 베네치아를 번영시켰고, 세습 왕조를 세우려 노력했다. 베네치아는 리알토 지역까지 확장되었다. 그의 아들 조반니 갈바이오가 후임이 되었으나, 카롤루스 대제와 노예 무역 문제로 충돌하고 교회와 대립하였다.

세습 왕조를 세우려던 야망은 804년 친프랑크파 오벨레리오 델리안토네리가 권력을 잡으면서 무너졌다. 오벨레리오는 베네치아를 카롤링거 제국 영향권에 편입시켰으나,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 피피노 카를로만(피핀)의 도움을 요청하여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810년 피핀의 베네치아 포위 때 가족과 함께 도시를 떠났다. 피핀은 6개월간 포위했으나 늪지대의 역병 등으로 철수했고, 피핀 자신도 병으로 사망했다.

베네치아는 이 승리로 독립을 유지했으며, 카롤루스 대제와 니케포루스 1세 간의 협정에서 추인되었다. 이 협정은 베네치아를 비잔티움 제국 영토로 인정하고, 안코나, 파노, 페사로, 리미니, 시니갈리아를 포함한 아드리아 해에서의 베네치아 교역권을 인정하였다.[48]

2. 2. 오르소 이파토와 테오다토 이파토

오르소 이파토의 후계자인 테오다토 이파토는 740년대에 본거지를 에라클레아에서 말라모코(리도)로 옮겼다.[45] 그는 오르소 이파토의 아들이었으며, 세습제를 확립하려 시도했다. 이러한 시도는 초기의 베네치아에서 자주 있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다.

테오다토 이파토의 통치 시기에 베네치아는 북 이탈리아에 남은 유일한 동로마 제국 영토가 되었고, 프랑크 왕국의 강대화는 베네치아 내의 세력 구도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세력과 동로마 제국으로부터의 사실상 독립을 목표로 하는 세력 외에, 프랑크 왕국에 접근하려는 세력이 발생했다. 이 친프랑크 세력은 주로 가톨릭 교회의 승려들의 지지를 얻어, 프랑크인인 카롤링거 왕조의 왕 피핀 3세를 옹립함으로써 랑고바르드족으로부터의 보호를 얻으려 했다. 소수파로는 랑고바르드족 왕국과 손을 잡고, 강대국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인접국 간의 평화를 중시하는 세력도 존재했다.

755년에 갈라 가울로는 테오다토 이파토를 암살하고 도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 사망하고, 도메니코 모네가리오가 뒤를 이었다. 그의 통치 시기에 베네치아는 어촌에서 항구 도시로, 상인의 도시로 변모했다. 조선 기술도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베네치아가 아드리아 해를 지배하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또한 고대 로마를 본떠 호민관이 제정되었다. 매년 두 명의 호민관이 선출되어 도제의 집정을 감시하고 권력 남용을 방지했다.

2. 3. 정치적 격변과 파벌 분열

오르소 이파토의 아들인 테오다토 이파토는 근거지를 에라클레아에서 말라모코로 옮겼다.[45] 테오다토 이파토의 도제 계승은 세습 왕조를 세우려는 오르소 이파토의 의도에 따른 것이며, 베네치아 초기 역사에서 여러 명의 도제가 세습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실패했다. 테오다토 이파토의 치세 중 베네치아는 북부 이탈리아에 유일하게 남은 비잔티움 제국령이 되었으며, 당시 프랑크 왕국 내에서 벌어진 카롤링거 왕조 개창 등 변화하는 정치체제는 베네치아 정치 구도를 변화시켰다. 베네치아의 정치 세력은 크게 친비잔티움파, 공화주의자, 친프랑크파로 나뉘었다. 친비잔티움 세력은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 유지를, 공화주의자들은 실질적인 독립을 추구했다. 친프랑크파는 카롤링거 왕조의 피핀 3세를 랑고바르드족으로부터의 보호자로 여겨 주로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소수파였던 친랑고바르드 세력은 랑고바르드 왕국과의 평화 유지에 힘썼다.

테오다토 이파토는 암살되었고, 그의 자리를 빼앗은 갈라 가울로 역시 1년 안에 같은 운명을 맞았다. 그 후임인 도메니코 모네가리오 치하에서 베네치아는 어촌에서 무역항 및 교역 중심지로 변모했다. 조선산업이 크게 발전하여 아드리아해 지배권 확보의 초석을 다졌으며, 호민관 제도가 도입되어 매년 두 명의 호민관이 선출되어 도제를 감시하고 권력 남용을 방지했다.

친랑고바르드파였던 모네가리오는 764년 축출되었으며, 에라클레아 출신의 친비잔티움파인 마우리치오 갈바이오가 뒤를 이었다.[47] 갈바이오는 긴 치세(764-787) 동안 베네치아를 지역적, 국제적 번영으로 이끌었으며, 세습 왕조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베네치아는 리알토 지역까지 확장되었다. 그의 아들 조반니 갈바이오가 뒤를 이었으며, 그는 노예 무역을 두고 카롤루스 대제와 충돌하고 교회와 대립했다.

세습 왕조의 야망은 804년 친프랑크파 오벨레리오 델리안토네리가 권력을 잡으면서 좌절되었다. 오벨레리오는 베네치아를 카롤링거 제국의 영향권에 편입시켰으나, 피피노 카를로만(피핀)의 도움을 요청하여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810년 피핀의 베네치아 포위 때 가족과 함께 도시를 떠났으며, 피핀은 6개월간 포위했으나 늪지대의 역병 등으로 철수했다. 피핀은 이 병으로 몇 달 후 사망했다.

베네치아는 이 승리로 독립을 쟁취, 유지했으며, 카롤루스 대제와 니케포루스 1세 간의 협정에서 추인되었다. 이 협정은 베네치아를 비잔티움 제국 영토로 인정하고, 펜타폴리스를 포함한 아드리아 해에서의 베네치아 교역권을 인정했다.[48]

2. 4. 초기 베네치아의 발전

오르소 이파토의 아들인 테오다토 이파토는 근거지를 에라클레아에서 말라모코로 옮겼다.[45] 초기 베네치아의 여러 도제는 세습을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테오다토 이파토의 치세 중 베네치아는 북부 이탈리아에 유일하게 남은 비잔티움 제국령이었으며, 프랑크 왕국 내 카롤링거 왕조 개창 등 변화하는 정치 체제는 베네치아 정치 구도를 변화시켰다. 당시 주요 파벌로는 친비잔티움 세력, 공화주의자, 친프랑크 세력, 친랑고바르드 세력이 있었다.

테오다토 이파토는 암살되었고, 그의 자리를 빼앗은 갈라 가울로 역시 1년 안에 그와 같은 운명을 맞았다. 그 후임인 도메니코 모네가리오 치하에서 베네치아는 어촌에서 무역항 및 교역 중심지로 탈바꿈했다. 조선 산업 역시 크게 발전했으며, 아드리아해 지배권 확보를 위한 초석도 이때 놓였다. 또한 이때 최초로 호민관제가 도입되어, 매년 두 명의 신임 호민관이 선출되어 도제를 감시하고 권력 남용을 방지했다.

친랑고바르드파였던 모네가리오는 764년 축출되었으며, 에라클레아 출신의 친비잔티움파인 마우리치오 갈바이오가 뒤를 이었다.[47] 갈바이오는 긴 치세(764-787) 동안 베네치아를 지역적, 국제적 번영의 도상에 올렸으며, 세습 왕조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이때 베네치아는 리알토 지역까지 확장되었다. 그의 후임은 아들인 조반니 갈바이오였으며, 조반니는 노예 무역을 두고 카롤루스 대제와 충돌하고 교회와 대립했다.

세습 왕조를 세우려던 야망은 804년 친프랑크파가 오벨레리오 델리안토네리 치하에서 권력을 잡으면서 분쇄되었다. 오벨레리오는 베네치아를 카롤링거 제국 영향권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 피피노 카를로만(피핀)의 도움을 요청하여 시민의 분노를 샀으며, 810년 피핀이 베네치아를 포위했을 때 가족과 함께 도시를 떠나야 했다. 피핀은 6개월 동안 베네치아를 포위했으나, 늪지에서 발생한 역병 등으로 인해 결국 철수해야 했다. 피핀 자신도 이 병으로 몇 개월 후 사망했다.

베네치아는 이때의 승리로 쟁취한 독립을 이후 유지했으며, 이는 후에 카롤루스 대제와 니케포루스 1세 간에 맺은 협정에서 추인되었다. 이 협정은 베네치아를 비잔티움 제국 영토로 인정하는 동시에, 아드리아해에서의 베네치아 교역권을 인정했다.[48]

3. 중세 초기

803년 카롤루스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 황제가 체결한 팍스 니케포리에 따라, 베네치아는 명목상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로 남았지만 실질적으로는 독립된 국가로 인정받았다.[49]

안젤로 파르테치파치오의 통치 아래 베네치아는 근대적인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하위 섹션에서 파르테치파치오 가문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다루므로, 여기서는 간략하게 언급)

피에트로 트라도니코의 통치 기간 동안 베네치아는 군사력을 키우기 시작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로타르 1세와 무역 협정을 맺었다. 이 권리는 이후 오토 1세 시대에 더욱 확대된다. 트라도니코는 슬라브족사라센 해적과의 전투를 통해 해상 지배권을 확립했다. 그의 긴 통치(837년~864년)는 성공적이었지만, 그 후 다시 파르테치파치오 가문이 권력을 잡으면서 베네치아에 세습정이 확립되는 듯했다.

11세기 서임권 투쟁에서 중립을 지킨 베네치아는 교황청과 갈등을 겪었다. 도메니코 셀보는 비잔티움 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를 도와 풀리아의 노르만족과 전쟁을 벌여 두라초까지 아드리아 해안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고, 비잔티움 제국 전역에서 베네치아 상인의 면세를 보장하는 금인칙서를 얻어냈다. 이는 베네치아가 홍해, 레반트, 이집트를 거치는 향신료비단 무역의 중개자로서 부를 축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3. 1. 파르테치파치오 가문의 통치와 베네치아의 성장

811년부터 파르테치파치오 가문의 통치기에 베네치아는 현대적인 모습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초대 안젤로 파르테치파치오는 에라클레아 출신이었지만, 리알토로 이주했다. 그는 다리, 운하, 방벽, 요새, 석조 건축물을 확충하여 도시를 해상으로 확장했다. 이것이 현대 해상 도시 베네치아의 원형이다. 그의 아들 주스티니아노 파르테치파치오는 마르코의 유해를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로 옮겨 베네치아의 수호 성인으로 삼았다.[50]

파르테치파치오 가문에서 도제가 3대 이어진 후 피에트로 트라도니코 하에서 베네치아는 군비를 확충하기 시작했다. 이는 후에 십자군과 아드리아 해의 제해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는 슬라브족과 사라센인 해적과 싸워 해상의 안전을 확보했다. 그의 통치는 836년부터 864년까지 이어졌지만, 그의 후계자는 다시 파르테치파치오 가문에서 배출되었다. 조반니 파르테치파치오 1세이다. 841년경, 동로마 제국이 크로토네에서 아랍인을 몰아내려 했을 때, 베네치아 공화국은 각각 200명을 태운 60척의 갤리선으로 구성된 함대를 동로마 제국의 원군으로 보냈지만, 이는 실패로 끝났다.[51]

피에트로 칸디아노 2세 시대에 이스트리아의 여러 도시들은 베네치아의 경제적 우위를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를 시작으로 베네치아는 달마티아 연안에서 경제 대국으로 발전한다.

3. 2. 군사력 강화와 해상 지배권 확립

811년부터 파르테치파치오 가문의 통치기에 베네치아는 현대적인 모습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초대 안젤로 파르테치파치오는 에라클레아 출신이었지만, 리알토로 이주했다. 그는 다리, 운하, 방벽, 요새, 석조 건축물을 확충하여 도시를 해상으로 확장했다. 이것이 현대 해상 도시 베네치아의 원형이다. 그의 아들 주스티니아노 파르테치파치오는 마르코의 유해를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로 옮겨 베네치아의 수호 성인으로 삼았다.[50]

피에트로 트라도니코 하에서 베네치아는 군비를 확충하기 시작했다. 이는 후에 십자군과 아드리아 해의 제해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는 슬라브족과 사라센인 해적과 싸워 해상의 안전을 확보했다. 그의 통치는 836년부터 864년까지 이어졌지만, 그의 후계자는 다시 파르테치파치오 가문에서 배출되었다. 841년경, 동로마 제국이 크로토네에서 아랍인을 몰아내려 했을 때, 베네치아 공화국은 각각 200명을 태운 60척의 갤리선으로 구성된 함대를 동로마 제국의 원군으로 보냈지만, 이는 실패로 끝났다.[51]

피에트로 칸디아노 2세 시대에 이스트리아의 여러 도시들은 베네치아의 경제적 우위를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를 시작으로 베네치아는 달마티아 연안에서 경제 대국으로 발전한다. 976년 민중의 추대를 받은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1세가 도제가 되었으나, 그의 회유책은 정치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사임했다.

991년에 즉위한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2세 이후, 베네치아의 관심은 본토보다는 아드리아 해로 향했다. 바실리우스 2세의 금인칙서로 베네치아 상인들은 면세 특권을 받았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과의 무역이 현저하게 확대되었다. 1000년에는 6척으로 구성된 원정대를 이스트리아에 파견하여 베네치아의 종주권을 인정받게 했다. 또한, 슬라브 해적을 궤멸시키는 데도 성공했다.[52] 1008년 그가 죽은 후, 아들 오토네 오르세올로가 뒤를 이었다. 그는 1017년의 원정을 통해 아드리아 해의 제해권을 확고히 했다.

11세기서임권 투쟁에서 베네치아는 중립을 유지했기 때문에 교황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도메니코 셀보는 동로마 제국의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의 원군으로 아풀리아에서 노르만족과의 전쟁에 참여하여, 그 대가로 두라초까지의 아드리아 해에서의 베네치아의 지배권 및 동로마 제국 전역에서의 면세 특권을 보장하는 금인칙서를 획득했다. 전쟁 자체는 실패로 끝났지만, 이 금인칙서로 베네치아는 명목상으로도 독립을 달성했다.

3. 3. 달마티아 지역으로의 확장

811년부터 파르테치파치오 가문의 통치 아래 베네치아는 현대적인 모습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초대 안젤로 파르테치파치오는 에라클레아 출신이었지만, 리알토로 이주하여 다리, 운하, 방벽, 요새, 석조 건축물을 확충해 도시를 해상으로 확장했다. 이것이 현대 해상 도시 베네치아의 원형이다. 그의 아들 주스티니아노 파르테치파치오는 마르코의 유해를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로 옮겨 베네치아의 수호 성인으로 삼았다.[50]

파르테치파치오 가문에서 3대에 걸쳐 도제가 배출된 후, 피에트로 트라도니코 치하에서 베네치아는 군비를 확충하기 시작했다. 이는 훗날 십자군과 아드리아 해 제해권 확보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슬라브족과 사라센인 해적에 맞서 해상 안전을 확보했다. 그의 통치는 836년부터 864년까지 이어졌으나, 후계자는 다시 파르테치파치오 가문에서 나왔다. 조반니 파르테치파치오 1세이다. 841년경, 동로마 제국이 크로토네에서 아랍인을 몰아내려 할 때 베네치아 공화국은 200명씩 탑승한 60척의 갤리선 함대를 파견했으나, 이는 실패로 끝났다.[51]

피에트로 칸디아노 2세 시대에 이스트리아의 여러 도시들이 베네치아의 경제적 우위를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하면서, 베네치아는 달마티아 연안에서 경제 대국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991년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2세 즉위 후, 베네치아는 본토보다 아드리아 해에 더 집중했다. 바실리우스 2세의 금인칙서 덕분에 베네치아 상인들은 면세 특권을 받아 동로마 제국과의 무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1000년에는 6척의 원정대를 이스트리아에 파견해 베네치아의 종주권을 인정받았고, 슬라브 해적을 궤멸시켰다.[52] 그는 "달마티아 공작"을 자칭하며 베네치아를 식민 제국으로 이끌었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바다와의 결혼 의식도 이때 시작되었다. 1008년 그가 사망한 후, 아들 오토네 오르세올로가 뒤를 이어 1017년 원정을 통해 아드리아 해 제해권을 확고히 했다.

11세기 서임권 투쟁 시기에 베네치아는 중립을 유지하여 교황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도메니코 셀보는 동로마 제국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의 요청으로 아풀리아에서 노르만족과의 전쟁에 참여하여, 두라초까지의 아드리아 해 지배권과 동로마 제국 전역에서의 면세 특권을 보장하는 금인칙서를 얻었다.

3. 4.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

811년부터 파르테치파치오 가문이 통치하면서 베네치아는 현대적인 모습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초대 안젤로 파르테치파치오는 에라클레아 출신이었지만, 리알토로 이주하여 다리, 운하, 방벽, 요새, 석조 건축물을 확충해 도시를 해상으로 확장했다. 이것이 현대 해상 도시 베네치아의 원형이다. 그의 아들 주스티니아노 파르테치파치오는 마르코의 유해를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로 옮겨 베네치아의 수호 성인으로 삼았다.[50]

파르테치파치오 가문에서 도제가 3대 이어진 후 피에트로 트라도니코 시대에 베네치아는 군비를 확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훗날 십자군과 아드리아 해 제해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는 슬라브족과 사라센인 해적에 맞서 해상 안전을 확보했다. 그의 통치는 836년부터 864년까지 이어졌지만, 그의 후계자는 다시 파르테치파치오 가문에서 나왔다. 조반니 파르테치파치오 1세이다. 841년경, 동로마 제국이 크로토네에서 아랍인을 몰아내려 할 때 베네치아 공화국은 200명씩 탑승한 60척의 갤리선 함대를 파견했으나 실패했다.[51]

피에트로 칸디아노 2세 시대에 이스트리아의 여러 도시가 베네치아의 경제적 우위를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하면서 베네치아는 달마티아 연안의 경제 대국으로 발전했다. 칸디아노 가문의 전제적인 지배에 반발하여 972년에 반란이 일어났고, 976년에 민중의 추대를 받은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1세가 도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회유책은 정치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사임하여 비탈레 칸디아노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991년에 즉위한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2세 이후 베네치아는 본토보다 아드리아 해에 관심을 쏟았다. 바실리우스 2세의 금인칙서 덕분에 베네치아 상인들은 면세 특권을 받아 동로마 제국과의 무역이 크게 확대되었는데, 이는 동로마 제국민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특권이었다. 1000년에는 6척의 원정대를 이스트리아에 파견하여 베네치아의 종주권을 인정받았고, 슬라브 해적을 궤멸시키는 데도 성공했다.[52] 그가 "달마티아 공작"을 자칭한 것처럼, 베네치아는 식민 제국으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바다와의 결혼 의식을 시작한 것도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2세이다. 1008년 그가 죽은 후 아들 오토네 오르세올로가 뒤를 이어 1017년 원정을 통해 아드리아 해 제해권을 확고히 했다. 그는 이 제해권이 동로마 제국과 프랑크 왕국 사이에 낀 베네치아가 생존하기 위한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11세기 서임권 투쟁, 즉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성직자 서임권을 놓고 다투는 가운데 베네치아는 중립을 지켜 교황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도메니코 셀보는 동로마 제국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의 원군으로 아풀리아에서 노르만족과의 전쟁에 참여하여, 그 대가로 두라초까지의 아드리아 해 지배권 및 동로마 제국 전역에서의 면세 특권을 보장하는 금인칙서를 받았다. 전쟁 자체는 실패했지만, 이 금인칙서로 베네치아는 명목상으로도 독립을 달성했다.

3. 5. 서임권 투쟁과 베네치아의 중립

11세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사이의 서임권 투쟁에서 베네치아는 중립을 지켰다. 이러한 중립 정책은 이후 교황과의 분쟁을 야기하기도 했다. 당시 도제였던 도메니코 셀보(재위 1071년~1084년)는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우스 1세를 도와 풀리아의 노르만족에 맞서 싸웠다. 그 대가로 베네치아는 두라초까지 아드리아 해안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고, 금인칙서를 통해 비잔티움 제국 전역에서 베네치아 상인에게 면세 혜택을 부여받았다. 이는 베네치아가 홍해, 레반트, 이집트를 거치는 향신료비단 무역의 중개자로서 부와 국력을 쌓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53]

전쟁의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베네치아는 참전을 통해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084년 도메니코 셀보는 노르만 정벌에 직접 참전했으나, 3,000명의 사망자와 2,500명의 포로가 발생하고 주력 함선 9척을 잃는 큰 손실을 입었다.[53]

3. 6. 노르만족과의 전쟁과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의 독립

811년부터 파르테치파치오 가문의 통치 아래 베네치아는 현대적인 모습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초대 안젤로 파르티치파치오는 에라클레아 출신이었지만, 리알토로 이주하여 다리, 운하, 방벽, 요새, 석조 건축물을 확충해 도시를 해상으로 확장했다. 이는 현대 해상 도시 베네치아의 원형이 되었다. 그의 아들 주스티니아노 파르티치파치오는 마르코의 유해를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로 옮겨 베네치아의 수호 성인으로 삼았다.[50]

파르테치파치오 가문에서 3대에 걸쳐 도제가 배출된 후, 피에트로 트라도니코 치하에서 베네치아는 군비를 확충하기 시작했다. 이는 훗날 십자군과 아드리아 해 제해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슬라브족과 사라센인 해적에 맞서 해상 안전을 확보했다. 그의 통치는 836년부터 864년까지 이어졌으나, 그의 후계자는 다시 파르테치파치오 가문에서 나왔다. 조반니 파르테치파치오 1세이다. 841년경, 동로마 제국이 크로토네에서 아랍인을 몰아내려 할 때, 베네치아 공화국은 1척당 200명이 탑승한 60척의 갤리선 함대를 동로마 제국의 원군으로 보냈지만 실패했다.[51]

피에트로 칸디아노 2세 시대에 이스트리아의 여러 도시들은 베네치아의 경제적 우위를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를 시작으로 베네치아는 달마티아 연안에서 경제 대국으로 발전했다. 칸디아노 가문의 전제적인 지배에 반발하여 972년에 반란이 일어났고, 976년 민중의 추대를 받은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1세가 도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회유책은 정치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사임하여 비탈레 칸디아노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991년 즉위한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2세 이후, 베네치아는 본토보다 아드리아 해에 더 관심을 쏟았다. 바실리우스 2세의 금인칙서 덕분에 베네치아 상인들은 면세 특권을 받아 동로마 제국과의 무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이 특권은 동로마 제국인에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1000년에는 6척의 원정대를 이스트리아에 파견하여 베네치아의 종주권을 인정받았다. 또한 슬라브 해적을 궤멸시키는 데 성공했다.[52] 그가 "달마티아 공작"을 자칭했듯, 베네치아는 식민 제국으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바다와의 결혼 의식을 시작한 것도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2세이다. 1008년 그가 죽은 후, 아들 오토네 오르세올로가 뒤를 이었다. 그는 1017년 원정을 통해 아드리아 해의 제해권을 확고히 했다. 그는 이 제해권이 동로마 제국과 프랑크 왕국 사이에 낀 베네치아가 생존하기 위한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11세기 서임권 투쟁, 즉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성직자 서임권을 놓고 다투는 가운데, 베네치아는 중립을 지켜 교황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도메니코 셀보는 동로마 제국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의 원군으로 아풀리아에서 노르만족과의 전쟁에 참여하여, 그 대가로 두라초까지의 아드리아 해 지배권 및 동로마 제국 전역에서의 면세 특권을 보장하는 금인칙서를 획득했다. 전쟁 자체는 실패했지만, 이 금인칙서로 베네치아는 명목상으로도 독립을 달성했다.

4. 중세 중기

중세 성기에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 내에서 면세 특권을 활용하여 실크로드와 향신료 무역의 중개자로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아시아 전역에서 모인 상품은 홍해악숨 왕국을 통과하는 로마-인도 통상로 또는 레반트를 거쳐 베네치아 상인의 손을 거쳐 유럽으로 전달되었다.

베네치아는 세력권인 아드리아해에서 이오니아해로 확장을 시도했으나, 1084년 도메니코 세르보가 노르만족과 벌인 전투에서 패배하여 9척의 갤리선을 잃었다.[34]

14세기 후반, 베네치아는 헝가리 왕 루이 1세와의 관계로 어려움을 겪었다. 1346년 루이 1세의 자다르 공략은 실패했으나, 1356년 고리치아 백작, 파도바 군주 카라라의 프란체스코 1세, 아퀼레이아 총대주교 니콜라우스, 신성로마제국 카를 4세, 루이 1세, 오스트리아 공작 등이 베네치아에 대항하는 동맹을 체결했다. 이들은 그라도와 무자를 점령하고 달마티아 지방의 베네치아인을 축출했다. 1358년 네르베사 전투에서 베네치아군이 대패하여 달마티아와 크로아티아를 헝가리에 양보해야 했다.

1363년 크레타에서 성 티투스의 반란이 일어났고, 베네치아는 5년 후에야 진압할 수 있었다.

4. 1. 십자군 전쟁과 베네치아의 역할

중세 중기에 베네치아는 유럽-레반트간 무역을 지배하여 부를 축적하였으며, 십자군 전쟁에 초기부터 관여했다. 제1차 십자군 당시 200여 척의 베네치아 선박이 시리아의 항구도시 공략을 도왔으며, 1123년에는 바르문디 조약을 통해 예루살렘 왕국 내에서 실질적인 자치권을 부여받았다.[54] 1110년 도제 오르델라포 팔리에로는 100척의 선단을 이끌고 보두앵 1세시돈 점령을 지원했다.[55]

그리스 나플리오의 팔라미디 요새. 베네치아는 1686년~1715년 간의 2차 점령기 동안 이를 건설하였으며, 이러한 요새들을 통하여 무역로를 보호하였다.


12세기 동안 베네치아 공화국은 베네치아 국영 병기창을 건설하고,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확립했다. 또한 베네치아는 비잔티움 제국에서 상업적 특권을 확대했으며, 1182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베네치아인을 주 대상으로 하는 반서방 폭동이 발생하기도 했다.

베네치아 선단은 제4차 십자군의 운송에 필수적인 역할을 했으나, 십자군이 운임을 지불할 수 없게 되자 도제 엔리코 단돌로는 이를 이용해 자다르(이탈리아어로 자라)를 공략하게 했다.[56] 1202년 자다르를 함락시킨 후,[57]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로 방향을 돌려 1204년 함락 및 약탈했다.[58] 베네치아는 이 때 성 마르코 성당 광장으로 가져온 네 마리의 청동제 말 조상을 포함한 약탈물로 운임을 충당했다. 이후 비잔티움 제국의 분열에 따라 베네치아는 크레타, 에우보이아 등의 섬을 포함한 에게해의 전략적 영토를 획득했다.[59] 1207년에는 낙소스 공국이 성립되었으며, 1221년 몽골 제국과 무역 협정을 맺었다.[60]

1295년 도제 피에트로 그라데니고제노바 공화국 선단을 공격하기 위해 선단을 파견했고,[61] 1350년부터 1381년까지 간헐적으로 베네치아-제노바 전쟁이 있었다. 베네치아는 1380년 키오자 전투에서 제노바에 승리하여 동지중해에서의 우월한 지위를 유지했다.

4. 2. 베네치아 국영 병기창 건설과 동지중해 제해권 확립

12세기 동안 베네치아 공화국은 현재 베네치아 국영 병기창으로 알려진 대규모 국영 조선소를 건설하였다. 강력한 신조 선단을 통하여 공화국은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확립했다. 유럽 각지에서 온 상인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베네치아에서 세계 최초의 외환업무가 시작되었다.[54] 또한 베네치아는 비잔티움 제국에서 상업적 특권을 확대하였으며 때로는 제국에 해군력을 제공하기도 했다. 1182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베네치아인을 주 대상으로 하는 반서방 폭동이 있었다.[38]

4. 3. 제4차 십자군과 콘스탄티노플 점령

중세 중기에 베네치아는 유럽-레반트간 무역을 지배하여 부를 축적하였으며, 십자군 전쟁에 초기부터 관련되어 있었다. 제1차 십자군 당시 베네치아는 시리아의 항구도시 공략을 도왔으며, 1123년에는 바르문디 조약을 통해 예루살렘 왕국 내에서 실질적인 자치권을 부여받았다.[54]

12세기 동안 베네치아는 베네치아 국영 병기창을 건설하고, 강력한 해군력을 통해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확립했다. 또한, 베네치아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베네치아인을 주 대상으로 하는 반서방 폭동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비잔티움 제국에서 상업적 특권을 확대하였다.

제4차 십자군에서 베네치아는 십자군의 운송을 담당했지만, 십자군이 운임을 지불할 수 없게 되자 도제 엔리코 단돌로자다르(이탈리아어로 자라)를 공략해주면 십자군을 운송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1183년 자다르는 베네치아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교황과 헝가리 왕 임레로부터의 보호를 받아 베네치아 단독으로 탈환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56]

1202년 자다르를 함락시킨 후[57],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로 방향을 돌려 1204년 함락 및 약탈하였다.[58] 이 과정에서 베네치아는 네 마리의 청동제 말 조상을 성 마르코 성당 광장으로 가져오는 등 약탈물로 운임을 충당하였다. 이후 비잔티움 제국의 분열에 따라 베네치아는 크레타, 에우보이아 등의 섬을 포함한 비잔티움 제국의 8분의 3을 획득하였다.[59]

4. 4. 몽골 제국과의 무역 협정

베네치아는 1221년 몽골 제국과 무역 협정을 맺었다.[60]

4. 5. 제노바 공화국과의 경쟁

두칼레 궁전 그림, 14세기 후반


중세 중기 베네치아는 유럽-레반트 간 무역을 지배하며 부를 축적했고, 아드리아해와 그 너머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베네치아는 십자군 전쟁에 초기부터 관여했다. 제1차 십자군 당시 200여 척의 베네치아 선박이 시리아 항구도시 공략을 도왔고, 1123년에는 바르문디 조약을 통해 예루살렘 왕국 내에서 실질적인 자치권을 얻었다.[54] 1110년 도제 오르델라포 팔리에로는 100척의 선단을 이끌고 보두앵 1세시돈 점령을 지원했다.[55]

12세기 동안 베네치아 공화국은 베네치아 국영 병기창을 건설했다. 강력한 신조 선단을 통해 공화국은 동지중해 제해권을 확립했다. 베네치아는 비잔티움 제국에서 상업적 특권을 확대하고 해군력을 제공하기도 했다. 1182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베네치아인을 대상으로 하는 반서방 폭동이 있었다.

베네치아 선단은 제4차 십자군 운송에 필수적이었으나, 십자군이 운임을 지불할 수 없게 되자 도제 엔리코 단돌로자다르(이탈리아어로 자라)를 공략해주면 십자군을 운송해주겠다고 제안했다.[56] 1183년 자다르는 베네치아에 반란을 일으켰고, 교황과 헝가리 왕 임레의 보호를 받았다.[57] 1202년 자다르를 함락시킨 후,[57]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로 방향을 돌렸다. 1204년 콘스탄티노플은 함락 및 약탈당했다.[58] 베네치아는 네 마리의 청동제 말 조상을 성 마르코 성당 광장으로 가져왔다. 비잔티움 제국의 분열에 따라 베네치아는 크레타, 에우보이아에게해의 전략적 영토를 획득했다.[59] 1207년 낙소스 공국이 성립되었고, 1579년 오스만 제국에 정복될 때까지 존속했다. 베네치아는 1221년 몽골 제국과 무역 협정을 맺었다.[60]

1295년 도제 피에트로 그라데니고알레산드레타제노바 공화국 선단을 공격하기 위해 68척의 선단을 파견했고, 1299년에는 100척을 추가로 파견했다.[61]

14세기 후반, 베네치아는 헝가리 왕 루이 1세 재위 시 어려움을 겪었다. 1346년 루이 1세는 자다르를 처음 공략했으나 실패했다. 1356년 베네치아에 대항하는 동맹이 체결되었다. 동맹군은 1356년 그라도 및 무자를 점령했고, 루이 1세는 달마티아 지방의 베네치아 점령지를 침략해 베네치아인을 축출했다. 1358년 1월 13일 네르베사에서 베네치아군은 대패하여 달마티아 및 크로아티아를 헝가리에 양보했다. 1350년부터 1381년까지 간헐적으로 베네치아-제노바 전쟁이 있었다. 베네치아는 초반에는 열세였으나 1380년 키오자 전투에서 제노바에 승리하여 동지중해 우월 지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코넬리아노오스트리아에, 트레비소는 카라라 가(家)에, 테네도스는 비잔티움 제국에, 트리에스테는 아퀼레이아 총대주교령에 점령되었고, 달마티아에 대한 지배력 역시 헝가리에 뺏겼다.

1363년 크레타에서 무거운 세금에 반발한 식민지 주민의 독립운동인 성 티투스의 반란이 일어났고, 베네치아는 5년 후에야 진압할 수 있었다.

5. 15세기

15세기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본토와 달마티아 연안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전성기를 맞이했다.

1450년경 동지중해의 베네치아 영토

  • 이탈리아 본토 및 달마티아 확장: 15세기 초, 베네치아는 나폴리 왕 라디슬라오 1세로부터 달마티아 도시들의 지배권을 100000두카트에 구매했다. 밀라노 공국의 확장에 대응하고 교역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자라 등지에 귀족을 파견하여 통치했다. 1408년 지기스문트와의 휴전 후, 아퀼레이아, 스플리트 등 달마티아 도시들을 점령하여 아드리아 해 지배를 확고히 했다.[62]

  • 페라라 전쟁과 이탈리아 내 영향력 확대: 1482년 페라라 전쟁에서 식스토 4세와 동맹하여 폴레시네와 로비고를 획득, 이탈리아 반도 내 영향력을 확대했다. 1480년대 후반 인노첸시오 8세 및 지기스문트와 전쟁, 프랑스 왕 샤를 8세에 대한 이탈리아 동맹 참여, 1503년 에스파냐의 나폴리 왕국 침공 지원 등으로 아풀리아 항구를 획득하여 아드리아 해와 이오니아 제도 안전을 확보했다.

  • 키프로스 획득: 키프로스 왕국 후계 분쟁 중 베네치아 귀족 코르나로가가 영향력을 키웠다. 1489년 카테리나 코르나로 여왕이 키프로스를 베네치아에 양도했다.[65]

  • 유럽 내 위상: 15세기 말 베네치아는 인구 18만 명으로 파리에 이어 유럽 제2의 도시이자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66] 영토는 약 70000km2, 인구는 210만 명에 달했다.

  • 영토 구분:

구분내용
도가지(Dogado)수도 베네치아와 그 주변 영역
해양주(Stato da Mar)이스트리아, 달마티아, 알바니아 연안, 아풀리아 항구, 이오니아 제도, 크레타, 에게해 섬, 키프로스, 서남유럽 및 근동 요새와 상업 기지
육지주(Stato di Terraferma)베네토, 프리울리, 일리리아 연안, 동 롬바르디아, 로마냐


5. 1. 이탈리아 본토로의 확장

15세기 초,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본토로 확장을 시작했고, 달마티아 연안에서도 이스트리아에서 알바니아까지 확장했다. 헝가리의 라디슬라오 1세는 분쟁에서 패배하여 나폴리로 도망쳤지만, 그 전에 이미 사실상 잃은 달마티아 제 도시의 지배권을 10만 두카트에 매각했다. 베네치아는 즉시 이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귀족들을 파견했다. 예를 들어, 자라에는 필리포 스티파노브가 부임했다. 이것은 밀라노 공국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에 의한 판도 확장에 대한 대책이었다.[62]

1408년에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와의 사이에 휴전이 성립되었지만, 베네치아는 휴전이 실효되자마자 아퀼레이아, 트로기르, 스플리트, 두라스 및 기타 달마티아 제 도시를 점령했다. 이로 인해 베네치아의 아드리아해 지배는 확고해졌다. 또한 북동쪽의 육로를 확보하는 것은 통상의 안전을 위해 필요했다.[62]

1423년부터 1457년프란체스코 포스카리 시대에 베네치아는 판도를 현저하게 넓혔다. 1425년밀라노 공국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와 개전했다. 베네치아 육군의 사령관 프란체스코 부소네가 마클로디오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서쪽 국경은 아디제강에서 아다강으로 옮겨졌다. 이로 인해 밀라노 공국과의 긴장은 높아져 1446년에 베네치아는 밀라노 공국, 피렌체 공화국, 볼로냐크레모나의 연합군과 싸웠다.[62]

미켈레토 아텐돌로가 이끄는 베네치아군이 카잘마조레에서 승리한 후,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사망했고, 밀라노에서 황금 암브로시아 공화국의 건국이 선언되었다. 그래서 베네치아는 로디피아첸차를 점령했지만, 그 이상의 진군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에 의해 저지되었다. 프란체스코 포스카리는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에게 밀라노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대신 브레시아비첸차를 할양했다. 그러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세력이 확대되자 베네치아는 다시 밀라노와의 전쟁에 돌입했다. 결국 상황은 1454년로디 조약에 의해 종식되었다. 여기에서는 베르가모와 브레시아가 베네치아 영토임이 확인되었다.[62]

이 시점에서 현재의 베네토주, 프리울리, 베르가모, 크레모나, 트렌토, 라벤나, 이스트리아, 달마티아가 베네치아 영토가 되었다. 동쪽 국경은 고리치아오스트리아의 공작령과, 남쪽은 페라라 공국과 접해 있었다. 해외 영토는 네그로폰테(현재의 에비아섬)와 에게나 등이었다.[62]

1453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에 의해 공격받았을 때, 베네치아는 원군을 보냈지만, 결국 함락되었고, 재흥한 동로마 제국은 멸망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동로마 제국 시대에 확립된 거점과 이권을 유지하려고 시도했다.[63][64]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의 후녀디 야노스와 알바니아의 스칸데르베그 등에 패배했지만, 서쪽으로의 야심을 버리지 않아 베네치아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1463년에 아르고스에 있는 베네치아 요새가 파괴되었다. 베네치아는 헝가리 왕 마차시와 동맹을 맺고 그리스 섬들을 바다에서, 동시에 불가리아를 육지에서 공격했다. 그러나 몇몇 소규모 전투에서 동맹군은 승리했지만, 결국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1470년의 오스만 제국의 대규모 반격으로 베네치아는 에게해의 요충지, 네그로폰테를 잃었다.

베네치아는 페르시아 및 다른 유럽 국가들과의 동맹을 모색했지만, 충분한 지원을 얻지 못해 아나톨리아의 할리카르나소스스미르나에 소규모 공격을 가하는 데 그쳤다. 한편, 오스만 제국은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점령하고 베네치아 본국으로 진군하기 시작하여 우디네의 거리에까지 도달했다. 페르시아와 카르만 후국으로부터의 원군도 격파되었고, 베네치아는 고립무원이 되었다.

알바니아는 스칸데르베그의 사후 그 대부분이 점령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안토니오 로레단의 지휘에 의한 슈코더르의 저항으로 오스만 제국은 철수를 강요당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다시 알바니아를 침공하여 2년 후 슈코더르는 함락되었고, 이어서 프리울리도 오스만 제국에 의해 파괴되었다. 1479년 1월 24일에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 인해 베네치아는 아르고스, 네그로폰테, 레프카다 및 슈코더르를 할양하고, 또한 배상금 1만 두카트를 지불했다. 이로부터 5년 후 메흐메트 2세의 후계자인 바야지드 2세와의 사이에서 케팔로니아섬을 포기하는 대신 자킨토스섬을 베네치아에 반환하는 합의가 이루어졌다.[65]

1482년, 베네치아는 교황 식스토 4세와 동맹하여 페라라 공국을 침공하고, 피렌체 공화국, 나폴리 왕국, 밀라노 공국 및 에르콜레 1세 데스테가 이끄는 페라라 공국의 연합군과 싸웠다. 이것이 페라라 전쟁이라고 불린다.

베네치아는 이 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결과적으로 폴레시네와 로비고를 획득하여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세력을 확고하게 했다. 1480년대 후반에, 베네치아는 교황 인노첸시오 8세와 오스트리아의 지기스문트를 상대로 싸웠다. 또한 프랑스 왕 샤를 8세에 대한 이탈리아 동맹에도 참여했다. 또한 1503년에스파냐 왕국에 의한 나폴리 왕국 침공에 가담하여 아풀리아 항구를 얻었다. 이 항구는 아드리아해와 이오니아 제도의 안전 확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키프로스 왕국에서는 후계자 쟁탈전 속에서 베네치아 귀족의 코르나로가가 영향력을 키우고 있었다. 자크 2세는 코르나로가의 딸 카테리나 코르나로를 아내로 왕위에 올랐지만, 아들을 얻은 직후 병사했다. 그 아들은 자크 3세가 되었지만 요절했고, 카테리나가 왕이 되었다. 그리고 1489년, 카테리나는 키프로스를 베네치아에 양도했다.[65]

15세기 말 시점에서 베네치아의 인구는 18만 명에 달해 파리에 이어 유럽 제2의 대도시가 되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면적은 약 70000km2에 달했고, 총 인구는 210만 명이었다.[66] 행정상, 베네치아 영토에는 3가지 구분이 존재했다.

구분설명
도가지(Dogado)수도 베네치아와 그 주변 영역
해양주(Stato da Mar)이스트리아, 달마티아, 알바니아 연안, 아풀리아 항구, 이오니아 제도, 크레타, 에게해의 제 섬, 키프로스, 서남유럽 및 근동의 요새 및 상업 기지
안정 지역(Stato di Terraferma)베네토, 프리울리, 일리리아 연안, 동 롬바르디아로마냐


5. 2. 베네토 지역 대부분 확보

15세기 초, 베네치아는 이탈리아로 영토 확장을 시작함과 동시에 달마티아 연안에서도 이스트리아에서 알바니아로 확장했다. 헝가리의 라디슬라오 1세는 분쟁에서 패배하여 나폴리로 도망쳤지만, 그 전에 이미 사실상 잃은 달마티아 제 도시의 지배권을 100000두카트에 매각했다. 베네치아는 즉시 이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귀족들을 파견했다. 예를 들어, 자라에는 필리포 스티파노브가 부임했다. 이것은 밀라노 공국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에 의한 판도 확장에 대한 대책이었다.[62]

1408년에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와의 사이에 휴전이 성립되었지만, 베네치아는 휴전이 실효되자마자 아퀼레이아, 트로기르, 스플리트, 두라스 및 기타 달마티아 제 도시를 점령했다. 이로 인해 베네치아의 아드리아해 지배는 확고해졌다. 또한 북동쪽의 육로를 확보하는 것은 통상의 안전을 위해 필요했다.[62]

1423년부터 1457년프란체스코 포스카리 시대에 베네치아는 판도를 현저하게 넓혔다. 1425년밀라노 공국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와 개전했다. 베네치아 육군의 사령관 프란체스코 부소네가 마클로디오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서쪽 국경은 아디제강에서 아다강으로 옮겨졌다. 이로 인해 밀라노 공국과의 긴장은 높아져 1446년에 베네치아는 밀라노 공국, 피렌체 공화국, 볼로냐크레모나의 연합군과 싸웠다.[62]

미켈레토 아텐돌로가 이끄는 베네치아군이 카잘마조레에서 승리한 후,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사망했고, 밀라노에서 황금 암브로시아 공화국의 건국이 선언되었다. 그래서 베네치아는 로디피아첸차를 점령했지만, 그 이상의 진군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에 의해 저지되었다. 프란체스코 포스카리는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에게 밀라노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대신 브레시아비첸차를 할양했다. 그러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세력이 확대되자 베네치아는 다시 밀라노와의 전쟁에 돌입했다. 결국 상황은 1454년로디 조약에 의해 종식되었다. 여기에서는 베르가모와 브레시아가 베네치아 영토임이 확인되었다.[62]

이 시점에서 현재의 베네토주, 프리울리, 베르가모, 크레모나, 트렌토, 라벤나, 이스트리아, 달마티아가 베네치아 영토가 되었다. 동쪽 국경은 고리치아오스트리아의 공작령과, 남쪽은 페라라 공국과 접해 있었다. 해외 영토는 네그로폰테(현재의 에비아섬)와 에게나 등이었다.[62]

5. 3. 밀라노와의 전쟁과 로디 조약

1423년부터 1457년까지 도제 프란체스코 포스카리 시대에 베네치아는 국력과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1425년에는 밀라노 공국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와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베네치아 육군 사령관 프란체스코 부소네가 마클로디오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서쪽 국경은 아디제강에서 아다강으로 이동했다.[62] 그러나 이러한 영토 확장은 베네치아 내에서 모두에게 환영받지는 못했다. 밀라노와의 긴장은 계속되었고, 1446년에는 밀라노, 피렌체 공화국, 볼로냐, 크레모나 연합군과 싸워야 했다.

미켈레토 아텐돌로가 이끄는 베네치아군이 카살마조레에서 승리한 후,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가 사망하자 밀라노에서는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베네치아는 로디피아첸차를 점령할 기회를 얻었지만,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후 스포르차와 도제는 스포르차의 밀라노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브레시아비첸차를 베네치아에 할양하는 조건으로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스포르차의 세력이 너무 커졌다고 판단한 베네치아는 다시 편을 바꾸었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은 1454년 로디 조약 체결로 해결되었으며, 베네치아는 베르가모와 브레시아의 영유권을 확인받았다.[62]

5. 4. 오스만 제국과의 갈등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에 함락된 후에도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 시절의 거점과 특권을 유지하려 했다.[63] 1454년 오스만 제국은 베네치아에 항구 사용 및 교역을 허가했다.[64]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와 알바니아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진 야욕을 버리지 않아 전쟁은 불가피했다.

1463년 아르고스의 베네치아 요새가 파괴되었다. 베네치아는 헝가리 왕 마차시와 동맹을 맺고 그리스 섬들과 불가리아를 공격했으나,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한 후 결국 철수했다. 1470년 오스만 제국의 반격으로 에게 해 요충지 네그로폰테를 상실했다.

베네치아는 페르시아 등과 동맹을 모색했으나,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해 아나톨리아의 할리카르나소스스미르나에 소규모 공격을 가하는 데 그쳤다. 반면 오스만 제국은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점령하고 우디네까지 진격했다. 페르시아와 카르만 후국의 원군도 격파되어 베네치아는 고립되었다.

안토니오 로레단의 지휘로 슈코더르가 저항하여 오스만 제국을 철수시켰으나, 2년 후 슈코더르는 함락되었고 프리울리도 파괴되었다. 1479년 1월 24일 강화 조약이 체결되어 베네치아는 아르고스, 네그로폰테, 레프카다, 슈코더르를 할양하고 배상금 1만 두카트를 지불했다. 5년 후 바야지드 2세와의 합의로 케팔로니아섬을 포기하는 대신 자킨토스섬을 돌려받았다.

5. 5. 오스만 제국과의 평화 조약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에 함락된 후에도 베네치아는 이전 비잔티움 제국 시절 누렸던 특권과 영토를 일부 유지했다.[63] 1454년 오스만 제국은 베네치아에게 항구 사용과 교역을 허가했다.[64]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의 후녀디 야노시와 알바니아의 스칸데르베그에게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불가피했다. 1463년 아르고스의 베네치아 요새가 파괴되었고, 베네치아는 헝가리의 마차시 1세와 연합하여 그리스와 불가리아를 공격했으나, 결국 후퇴해야 했다. 1470년 오스만 제국의 대규모 반격으로 베네치아는 에게 해의 주요 거점인 네그로폰테를 상실했다.

베네치아는 페르시아 등과 연합을 모색했으나, 지원 부족으로 아나톨리아의 할리카르나소스스미르나에 소규모 공격을 하는 데 그쳤다. 반면 오스만 제국은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점령하고 우디네 인근까지 진격했다. 페르시아-카라만 연합군도 패배하여 베네치아는 고립되었다.

스칸데르베그 사후 알바니아 대부분을 상실했으나, 스쿠타리의 영웅적인 항전으로 오스만 제국은 알바니아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스쿠타리는 2년 후 함락되었고, 프리울리는 재침으로 유린되었다. 1479년 1월 24일 베네치아와 오스만 제국 간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베네치아는 아르고스, 네그로폰테, 렘노스, 스쿠타리를 포기하고 연간 10000두카트의 연공금을 상납해야 했다. 5년 후 이 합의는 바예지드 2세에 의해 재확인되었으며, 자킨토스섬케팔로니아섬의 맞교환이 이루어졌다.[65]

5. 6. 페라라 전쟁과 이탈리아 내 영향력 확대

15세기 초,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본토로 확장하기 시작했으며, 달마티아 연안에서도 이스트리아에서 알바니아로 확장했다. 헝가리의 라디슬라오 1세는 나폴리로 도망쳤지만, 그 전에 이미 사실상 잃은 달마티아 제 도시의 지배권을 10만 두카트에 매각했다.[62] 베네치아는 즉시 이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귀족들을 파견했는데, 예를 들어 자라에는 필리포 스티파노브가 부임했다. 이는 밀라노 공국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에 의한 판도 확장에 대한 대책이자 북동쪽 육로 확보를 통한 통상 안전 확보를 위한 것이었다.

1408년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와의 휴전이 성립되었지만, 베네치아는 휴전이 실효되자마자 아퀼레이아, 트로기르, 스플리트, 두라스 및 기타 달마티아 제 도시를 점령하여 아드리아해 지배를 확고히 했다.[62]

1423년부터 1457년까지 프란체스코 포스카리 시대에 베네치아는 판도를 현저하게 넓혔다. 1425년 밀라노 공국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와 전쟁을 시작, 베네치아 육군 사령관 프란체스코 부소네가 마클로디오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서쪽 국경을 아디제강에서 아다강으로 옮겼다.[62] 이로 인해 1446년 베네치아는 밀라노 공국, 피렌체 공화국, 볼로냐, 크레모나 연합군과 싸웠다.

미켈레토 아텐돌로가 이끄는 베네치아군이 카잘마조레에서 승리한 후,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사망했고, 밀라노에서 황금 암브로시아 공화국 건국이 선언되었다. 베네치아는 로디피아첸차를 점령했지만,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에 의해 진군이 저지되었다. 프란체스코 포스카리는 스포르차에게 밀라노 지배권을 인정하는 대신 브레시아비첸차를 할양받았다. 그러나 스포르차의 세력이 확대되자 베네치아는 다시 밀라노와 전쟁을 벌였고, 1454년 로디 조약으로 베르가모와 브레시아의 영유를 확인받았다.[62]

1482년 베네치아는 교황 식스토 4세와 동맹하여 페라라 전쟁을 일으켜 피렌체 공화국, 나폴리 왕국, 밀라노 공국, 에르콜레 1세 데스테의 페라라 공국 연합군과 싸웠다.

베네치아는 이 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폴레시네와 로비고를 획득하여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세력을 확고하게 했다. 1480년대 후반, 베네치아는 교황 인노첸시오 8세와 오스트리아의 지기스문트를 상대로 싸웠다. 또한 프랑스 왕 샤를 8세에 대한 이탈리아 동맹에도 참여했고, 1503년 에스파냐 왕국의 나폴리 왕국 침공에 가담하여 아풀리아 항구를 얻어 아드리아해와 이오니아 제도의 안전 확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5. 7. 유럽 내 위상

15세기 초,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본토로 확장을 시작했고, 달마티아 연안에서도 이스트리아에서 알바니아로 확장했다. 헝가리의 라디슬라오 1세는 나폴리로 도망쳤지만, 그 전에 이미 사실상 잃은 달마티아 제 도시의 지배권을 10만 두카트에 매각했다. 베네치아는 즉시 이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귀족들을 파견했다. 예를 들어, 자라에는 필리포 스티파노브가 부임했다. 이것은 밀라노 공국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에 의한 판도 확장에 대한 대책이었다.[62]

1408년에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와의 사이에 휴전이 성립되었지만, 베네치아는 휴전이 실효되자마자 아퀼레이아, 트로기르, 스플리트, 두라스 및 기타 달마티아 제 도시를 점령했다. 이로 인해 베네치아의 아드리아해 지배는 확고해졌다. 또한 북동쪽의 육로를 확보하는 것은 통상의 안전을 위해 필요했다.[62]

1423년부터 1457년프란체스코 포스카리 시대에 베네치아는 판도를 현저하게 넓혔다. 1425년밀라노 공국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와 개전했다. 베네치아 육군의 사령관 프란체스코 부소네가 마클로디오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서쪽 국경은 아디제강에서 아다강으로 옮겨졌다. 이로 인해 밀라노 공국과의 긴장은 높아져 1446년에 베네치아는 밀라노 공국, 피렌체 공화국, 볼로냐크레모나의 연합군과 싸웠다.[62]

미켈레토 아텐돌로가 이끄는 베네치아군이 카잘마조레에서 승리한 후,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사망했고, 밀라노에서 황금 암브로시아 공화국의 건국이 선언되었다. 그래서 베네치아는 로디피아첸차를 점령했지만, 그 이상의 진군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에 의해 저지되었다. 프란체스코 포스카리는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에게 밀라노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대신 브레시아비첸차를 할양했다. 그러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세력이 확대되자 베네치아는 다시 밀라노와의 전쟁에 돌입했다. 결국 상황은 1454년로디 조약에 의해 종식되었다. 여기에서는 베르가모와 브레시아가 베네치아 영토임이 확인되었다.[62]

이 시점에서 현재의 베네토주, 프리울리, 베르가모, 크레모나, 트렌토, 라벤나, 이스트리아, 달마티아가 베네치아 영토가 되었다. 동쪽 국경은 고리치아오스트리아의 공작령과, 남쪽은 페라라 공국과 접해 있었다. 해외 영토는 네그로폰테(현재의 에비아섬)와 에게나 등이었다.

1453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에 의해 공격받았을 때, 베네치아는 원군을 보냈지만, 결국 함락되었고, 재흥한 동로마 제국은 멸망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동로마 제국 시대에 확립된 거점과 이권을 유지하려고 시도했다.[63]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의 후녀디 야노스와 알바니아의 스칸데르베그 등에 패배했지만, 서쪽으로의 야심을 버리지 않아 베네치아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1463년에 아르고스에 있는 베네치아 요새가 파괴되었다. 베네치아는 헝가리 왕 마차시와 동맹을 맺고 그리스 섬들을 바다에서, 동시에 불가리아를 육지에서 공격했다. 그러나 몇몇 소규모 전투에서 동맹군은 승리했지만, 결국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1470년의 오스만 제국의 대규모 반격으로 베네치아는 에게해의 요충지, 네그로폰테를 잃었다.

베네치아는 페르시아 및 다른 유럽 국가들과의 동맹을 모색했지만, 충분한 지원을 얻지 못해 아나톨리아의 할리카르나소스스미르나에 소규모 공격을 가하는 데 그쳤다. 한편, 오스만 제국은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점령하고 베네치아 본국으로 진군하기 시작하여 우디네의 거리에까지 도달했다. 페르시아와 카르만 후국으로부터의 원군도 격파되었고, 베네치아는 고립무원이 되었다.

알바니아는 스칸데르베그의 사후 그 대부분이 점령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안토니오 로레단의 지휘에 의한 슈코더르의 저항으로 오스만 제국은 철수를 강요당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다시 알바니아를 침공하여 2년 후 슈코더르는 함락되었고, 이어서 프리울리도 오스만 제국에 의해 파괴되었다. 1479년 1월 24일에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 인해 베네치아는 아르고스, 네그로폰테, 레프카다 및 슈코더르를 할양하고, 또한 배상금 1만 두카트를 지불했다. 이로부터 5년 후 메흐메트 2세의 후계자인 바야지드 2세와의 사이에서 케팔로니아섬을 포기하는 대신 자킨토스섬을 베네치아에 반환하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1482년, 베네치아는 교황 식스토 4세와 동맹하여 페라라 공국을 침공하고, 피렌체 공화국, 나폴리 왕국, 밀라노 공국 및 에르콜레 1세 데스테가 이끄는 페라라 공국의 연합군과 싸웠다. 이것이 페라라 전쟁이라고 불린다.

베네치아는 이 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결과적으로 폴레시네와 로비고를 획득하여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세력을 확고하게 했다. 1480년대 후반에, 베네치아는 교황 인노첸시오 8세와 오스트리아의 지기스문트를 상대로 싸웠다. 또한 프랑스 왕 샤를 8세에 대한 이탈리아 동맹에도 참여했다. 또한 1503년에스파냐 왕국에 의한 나폴리 왕국 침공에 가담하여 아풀리아 항구를 얻었다. 이 항구는 아드리아해와 이오니아 제도의 안전 확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키프로스 왕국에서는 후계자 쟁탈전 속에서 베네치아 귀족의 코르나로가가 영향력을 키우고 있었다. 자크 2세는 코르나로가의 딸 카테리나 코르나로를 아내로 왕위에 올랐지만, 아들을 얻은 직후 병사했다. 그 아들은 자크 3세가 되었지만 요절했고, 카테리나가 왕이 되었다. 그리고 1489년, 카테리나는 키프로스를 베네치아에 양도했다.

15세기 말 시점에서 베네치아의 인구는 18만 명에 달해 파리에 이어 유럽 제2의 대도시가 되었다.[66] 베네치아 공화국의 면적은 약 70000km2에 달했고, 총 인구는 210만 명이었다. 행정상, 베네치아 영토는 아래와 같이 3가지로 구분되었다.

구분내용
도가지(Dogado)수도 베네치아와 그 주변 영역
해양주(Stato da Mar)이스트리아, 달마티아, 알바니아 연안, 아풀리아 항구, 이오니아 제도, 크레타, 에게해의 제 섬, 키프로스, 서남유럽 및 근동의 요새 및 상업 기지
안정 지역(Stato di Terraferma)베네토, 프리울리, 일리리아 연안, 동 롬바르디아로마냐


6. 16세기: 캉브레 동맹, 레판토 해전 및 키프로스 상실

16세기 베네치아 공화국은 여러 중요한 전쟁을 겪었다. 1499년 루이 12세와 연합하여 밀라노 공국과 싸워 크레모나를 얻었지만, 같은 해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받아 레판토, 모돈, 코로니를 잃었다. 1508년에는 교황 율리오 2세가 주도한 캉브레 동맹의 공격을 받았으나, 외교적 노력과 안드레아 그리티의 활약으로 영토를 회복했다.

1537년부터 1540년까지 벌어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는 카를 5세와 연합했으나, 프레베자 해전에서 패배하고 낙소스 공국을 할양했다. 1570년에는 오스만 제국이 키프로스를 공격했고, 레판토 해전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키프로스를 잃었다.

가스파로 콘타리니는 저서에서 베네치아 공화국의 정치 체제를 군주제, 과두 정치, 민주주의가 융합된 형태로 묘사하며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마리노 사누도는 귀족 사회의 부패를 한탄했다.

이 시기 베네치아는 해상 무역과 더불어 비단, 양단, 금세공품, 갑주, 유리구슬, 안경 등 다양한 물품을 생산했다.[67] 갤리선의 노잡이는 처음에는 자유민이었으나, 점차 쇠사슬에 묶인 노예로 대체되었다. 인구는 1563년 16만 8천 명, 1581년 12만 4천 명으로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66]

6. 1. 캉브레 동맹 전쟁

1499년, 베네치아는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와 동맹하여 밀라노 공국을 공격, 크레모나를 획득하였다. 같은 해, 오스만 제국은 레판토를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공격하였다. 안토니오 그리마니는 뛰어난 상인이자 외교관이었지만, 존키오 해전에서 패배하였고, 프리울리는 다시 오스만 제국에게 약탈당했다. 베네치아는 전면전을 피하기 위해 레판토, 모돈, 코로니를 할양하였다.[67]

로마냐는 명목상 교황령이었지만, 실제로는 소 영주들이 난립하여 사실상 독립 상태였다.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로마냐를 되찾기 위해 주변 국가들과 캉브레 동맹을 결성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는 프리울리와 베네토를, 스페인은 풀리아 항구를, 프랑스는 크레모나를, 헝가리 왕국달마티아를 각각 원했다.

1509년 5월 14일, 아냐델로 전투에서 베네치아군은 대패했고,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 군대에 의해 베네토가 점령되었다. 그러나 안드레아 그리티가 1509년 7월 파도바를 탈환하고, 외교를 통해 베네치아는 멸망을 면했다. 풀리아 항구를 할양하여 스페인과 강화했고,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베네치아가 멸망하면 이탈리아가 프랑스나 오스만 제국에 점령될 것을 우려하여 신성 동맹을 결성했다. 결국 브레시아와 베로나를 프랑스에서 탈환하고, 아다 강까지 영토를 회복하였다. 초반의 패배를 극복했지만, 이 전쟁으로 베네치아의 영토 확장은 막을 내렸다.

1537년부터 1540년까지 벌어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베네치아는 카를 5세의 스페인 및 신성 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고 참전했다. 그러나 1538년 프레베자 해전에서 안드레아 도리아가 이끄는 동맹 함대는 패배했다. 1540년 베네치아는 오스만 제국과 강화 조약을 맺고, 낙소스 공국을 할양했다. 이로써 동지중해의 제해권은 오스만 제국의 차지가 되었다.

1545년까지 베네치아 갤리선의 노잡이는 자유민 신분이었고, 초기에는 베네치아인으로 구성되었으나 이후 달마티아인, 크레타인, 그리스인들이 대거 합류하였다. 그러나 갤리선이 증가하면서 충분한 노잡이를 구하기 어려워지자, 베네치아는 다른 국가들처럼 노예를 쇠사슬로 묶어 노잡이로 징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방식을 처음 도입한 베네치아의 갤리선 선장은 크리스토포로 다 카날이었다. 1563년 베네치아의 인구는 약 16만 8천 명으로 감소하였다.[41]

1570년 오스만 제국이 베네치아령 키프로스를 공격하자, 파마구스타는 13개월간 저항했지만 결국 함락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라라 무스타파 파샤는 베네치아 총독 마르코 안토니오 브라가딘의 가죽을 벗겨 처형했다. 베네치아는 스페인, 교황령과 함께 신성 동맹을 결성하고 208척의 갤리선으로 구성된 함대를 조직했다. 이 중 110척은 세바스티아노 베니에르가 지휘하는 베네치아 함선이었다. 연합함대의 총사령관은 펠리페 2세의 이복동생 돈 후안 데 오스트리아였다.

오스만 제국 함대는 신성 동맹 함대와 거의 동등한 규모였으며, 아드리아 해를 거슬러 레지나까지 북상한 후 파트라 만의 레판토에 보급을 위해 정박했다. 신성 동맹 함대는 메시나에 집결하여 10월 7일 레판토에서 오스만 제국 함대를 격파하고 117척의 갤리선을 나포했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키프로스 탈환을 원했지만, 펠리페 2세 등의 반대로 신성 동맹은 해산되었다. 결국 1573년 베네치아는 오스만 제국과 강화 조약을 맺고 키프로스를 할양했다. 1575년 베네치아의 인구는 17만 5천 명이었으나, 1581년에는 12만 4천 명으로 감소하였다.[41]

6. 2. 아냐델로 전투와 베네치아의 위기

1499년, 베네치아는 프랑스의 루이 12세와 동맹을 맺고 밀라노 공국에 대항하여 크레모나를 획득하였다.[67] 같은 해, 오스만 제국은 레판토를 공격하기 위해 육군을 이동시켰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였다. 안토니오 그리마니는 선원이라기보다는 상인이나 외교관에 가까웠는데, 1499년 총키오 전투에서 패배하였다.[67] 오스만 제국은 다시 프리울리를 약탈하였다. 베네치아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면전을 피하기 위해 레판토, 모돈, 코로니를 포기하였다.[67]

로마냐는 명목상 교황령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교황군이 통제하기 어려운 소규모 영주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1508년, 교황 율리오 2세는 로마냐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기 위해 캉브레 동맹을 결성하였다. 교황은 로마냐를, 신성 로마 제국 막시밀리안 1세는 프리울리와 베네토를, 스페인은 아풀리아의 항구들을, 프랑스는 크레모나를, 헝가리는 달마티아를 원했다.

베네치아에 대한 공격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1509년 5월 14일, 베네치아는 아냐델로 전투에서 대패하였고, 이는 베네치아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배 중 하나였다.[67] 프랑스군과 신성 로마 제국군은 베네토를 점령하였으나, 베네치아는 외교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스페인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아풀리아의 항구들을 할양하였고, 교황 율리오 2세는 프랑스나 오스만 제국과 같은 강대국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이탈리아 국가인 베네치아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의 위험성을 인지하였다.

안드레아 그리티는 1509년 7월 파도바를 탈환하고 신성 로마 제국군의 포위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스페인과 교황은 프랑스와의 동맹을 파기했고, 베네치아는 브레시아베로나를 프랑스로부터 되찾았다. 7년간의 전쟁 끝에 공화국은 아다 강까지의 영토를 회복하였다. 결과적으로 승리하였지만, 1509년의 패배는 베네치아의 확장 시대가 끝났음을 보여준다.

6. 3. 외교적 노력과 영토 회복

1499년, 베네치아는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와 동맹하여 밀라노 공국과 싸워 크레모나를 얻었다. 같은 해, 오스만 제국은 레판토를 육상과 해상 양면에서 공격했다. 안토니오 그리마니는 항해자이면서 뛰어난 상인이자 외교관이었지만, 존키오 해전에서 패배하여 프리울리는 다시 오스만 제국에게 약탈당했다. 베네치아는 전면전으로의 돌입을 피하기 위해 군사 기지였던 레판토, 모돈 및 코로니를 할양했다.[67]

로마냐는 공식적으로는 교황령이었지만, 현실에서는 소 영주가 난립하여 사실상 독립 상태였다.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로마냐의 지배를 되찾기 위해 베네치아의 세력을 꺾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주변 국가들과 캉브레 동맹을 결성했다.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는 프리울리와 베네토를, 스페인 왕국은 풀리아 항구를, 프랑스 왕국은 크레모나를, 헝가리 왕국은 달마티아를 각각 원했다.

가장 먼저 베네치아를 침공한 것은 프랑스 왕국이었다. 1509년 5월 14일, 아냐델로 전투에서 베네치아군은 완패했고, 프랑스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에 의해 베네토는 점령되었다. 그러나 안드레아 그리티가 1509년 7월에 파도바를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탈환하고, 게다가 뛰어난 외교를 펼침으로써 베네치아는 멸망을 면했다. 풀리아 항구를 할양함으로써 스페인 왕국과의 강화에 성공했으며,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베네치아가 멸망하면 이탈리아는 프랑스 왕국이나 오스만 제국에게 점령될 것이라고 우려하여 신성 동맹을 결성했다. 최종적으로 브레시아와 베로나를 프랑스에서 탈환하고, 아다 강까지의 영토를 회복했다. 초전의 완패에서 만회했지만, 이 전쟁으로 베네치아의 영토 확대는 종말을 고했다.

1537년부터 1540년까지의 대 오스만 제국 전쟁에 베네치아는 스페인 왕국 및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와 동맹하여 참전했다. 그러나 1538년프레베자 해전에서 안드레아 도리아를 제독으로 하는 동맹 함대는 패배했다. 1540년에 베네치아는 오스만 제국과 강화하고, 사누도 가문의 낙소스 공국을 할양했다. 이로 인해 동지중해의 제해권은 오스만 제국의 것이 되었다.

베네치아의 갤리선의 노잡이는 초창기에는 베네치아 시민만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달마티아인, 크레타인, 그리스인 등도 많이 참여했지만, 어쨌든 1545년까지는 자유민이 이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갤리선의 증가에 충분한 노잡이를 모으는 것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쇠사슬에 묶인 노예를 노잡이로 채용하기로 했다. 이것은 여러 외국 해군에서는 오래전부터 행해져 온 일이다. 이러한 노예에 의한 노잡이는 Cristoforo da Canal에 의해 처음으로 베네치아에 도입되었다. 1563년 시점에서 베네치아의 인구는 16만 8천 명으로 감소했다.[66]

1570년에 오스만 제국은 베네치아령 키프로스를 공격했고, 파마구스타는 13개월 동안 싸웠지만, 결국 함락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제독 라라 무스타파 파샤는 베네치아의 총독 마르코 안토니오 브라가딘의 가죽을 벗겨 죽였다. 베네치아는 스페인 왕국, 교황청과 함께 신성 동맹을 결성하고, 갤리선 208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구성했다. 이 중 110척이 세바스티아노 베니에르가 이끄는 베네치아 선이었다. 제독은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이복 동생 돈 후안 데 오스트리아였다.

오스만 제국의 함대는 신성 동맹 측과 거의 동수였고, 아드리아 해를 레지나에서 북상한 후 파트라 만의 레판토에 보급을 위해 입항했다. 신성 동맹 측은 메시나에 집결한 후 10월 7일에 레판토의 오스만 제국 함대를 격파하여 117척의 갤리선을 나포했다. 이것이 레판토 해전이다. 베네치아는 키프로스 탈환을 희망했지만, 펠리페 2세 등이 반대하여 신성 동맹은 그대로 해산되었다. 결국 1573년에 베네치아는 오스만 제국과 강화하고, 키프로스를 할양했다. 1575년 시점의 베네치아의 인구는 17만 5천 명이었지만, 1581년에는 12만 4천 명까지 감소했다.[66]

6. 4. 베네치아 정부에 대한 평가

가스파로 콘타리니의 저서 ''베네치아 공화국과 관직 De Magistratibus et Republica Venetorum''(1544)은 베네치아 공화국 정부에 대한 평가를 잘 보여준다. 콘타리니는 베네치아가 독립을 유지하고 캉브레 동맹 전쟁에서 피해 없이 종결한 것에 대해 외국인의 관점에서 놀라움을 표했다.[67] 그는 베네치아의 성공 비결이 군주제, 과두 정치, 민주주의라는 세 가지 정부 형태가 융합된 정치 체제에 있다고 주장했다. 콘타리니는 국회는 민주적인 부분, 원로원과 10인 위원회는 과두제적, 도제는 군주제를 상징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세 원칙의 조합은 베네치아 정부의 기능을 완벽에 가깝게 만들었다고 평가했다.[67]

한편, 동시대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마리노 사누도는 가난한 귀족의 증가로 인한 부패를 한탄하기도 했다.[67]

6. 5. 레판토 해전과 키프로스 상실

1570년 오스만 제국이 베네치아령 키프로스를 공격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파마구스타는 13개월 동안 저항했지만 결국 함락되었고, 오스만 제국의 제독 라라 무스타파 파샤는 베네치아 총독 마르코 안토니오 브라가딘의 가죽을 벗겨 죽였다.[67] 베네치아는 스페인 왕국, 교황령과 함께 신성 동맹을 결성하고 갤리선 208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구성했다. 이 중 110척은 세바스티아노 베니에르가 이끄는 베네치아 함선이었다. 함대 총사령관은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이복동생 돈 후안 데 오스트리아였다.

오스만 제국 함대는 신성 동맹 측과 거의 동등한 규모였으며, 아드리아 해를 레지나까지 북상한 후 파트라 만의 레판토에 보급을 위해 입항했다. 신성 동맹 함대는 메시나에 집결한 후 10월 7일에 레판토에서 오스만 제국 함대를 격파하고 갤리선 117척을 나포했다. 이것이 레판토 해전이다. 베네치아는 키프로스 탈환을 희망했지만, 펠리페 2세 등이 반대하여 신성 동맹은 해산되었다. 결국 1573년 베네치아는 오스만 제국과 강화 조약을 맺고 키프로스를 할양했다.[67] 1575년 베네치아의 인구는 17만 5천 명이었으나, 1581년에는 12만 4천 명으로 감소했다.[66]

7. 17세기: 쇠퇴의 시작

17세기 베네치아는 여러 차례의 전쟁과 정치적 격변을 겪으며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1605년경, 베네치아와 교황청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교황 바오로 5세는 성직자들의 면책 특권을 주장하며 베네치아의 교회 관련 법률에 반대했다. 베네치아가 이를 거부하자 교황은 베네치아를 파문했지만, 베네치아는 파올로 사르피의 주장에 따라 성무를 계속했다. 이 갈등은 프랑스의 중재로 해결되었고, 베네치아는 시민 평등의 원칙을 재확인했다.

1613년부터 1617년까지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치렀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원하는 우스코치 해적들의 활동이 전쟁의 원인이었다. 베네치아는 우스코치를 토벌하고 오스트리아 대공을 공격했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1617년 화의를 통해 우스코치 문제를 해결했다.

1617년, 에스파냐의 나폴리 총독이 베네치아의 아드리아 해 지배권을 빼앗으려 시도했다. 베네치아에서는 에스파냐 대사의 음모로 인한 폭동과 반란 소문이 퍼졌다. 1622년에는 베네치아 의원이자 전 영국 대사였던 안토니오 포스카리니가 에스파냐 간첩 혐의로 처형되었으나, 나중에 무고함이 밝혀져 명예가 회복되었다.

1628년 베네치아는 만토바 계승 전쟁에 참전하여 프랑스 왕국과 동맹을 맺고 합스부르크 왕가에 맞섰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630년에는 흑사병이 유행하여 베네치아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했다. 흑사병이 끝난 후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이 건설되었다.

1638년 베네치아 함대는 바르바리 해적을 격퇴했지만, 1645년부터 오스만 제국과의 크레타 전쟁이 시작되어 25년간 지속되었다. 베네치아는 다르다넬스 해협 봉쇄 등 해상에서는 우위를 보였으나, 1669년 크레타섬을 오스만 제국에 빼앗겼다.

1684년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 러시아 제국과 동맹을 맺고 오스만 제국에 맞서 모레아 전쟁을 벌였다. 프란체스코 모로시니의 활약으로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점령하고 아테네를 공격하는 등 성과를 거두었으나,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에서는 큰 이득을 얻지 못했다. 1687년 아테네 공격 중에는 베네치아의 포격으로 파르테논 신전이 파괴되기도 했다.

1700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앞두고 베네치아는 중립을 유지했다.

7. 1. 교황청과의 갈등

1605년 교황 바오로 5세는 성직자가 일반 법정에서 기소되지 않는 특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네치아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고, 교황에 대한 반발로 교회에 부동산 양도를 금지하고 무허가 교회 신축을 금지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반한 성직자 두 명을 투옥했다. 바오로 5세는 이러한 결정이 교회법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며 철회를 요구했다. 베네치아는 이 요구를 따르지 않았고, 바오로 5세는 베네치아에 교황령 금지를 결정했다.

베네치아는 교황령 금지에 개의치 않고 성직자들에게 통상적인 직무를 수행할 것을 요청했다. 1606년 당시 신학과 교회법 관련 시뇨리아 고문이었던 세르비테 교단 교회법 학자 파올로 사르피는 이 결정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이 사건은 프랑스의 중재로 화해했고, 교황령 금지는 1년 후 해제되었다. 베네치아는 법의 지배가 모든 시민에게 미치며, 어떠한 예외도 없음을 확인했다.

7. 2. 우스코치 문제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1605년 교황 바오로 5세는 성직자는 일반 법정에서 기소되지 않는 특권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네치아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의견이 다수였고, 교황에 대한 반발로 교회에 부동산 양도를 금지하고 무허가 교회 신축을 금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를 위반한 두 명의 성직자를 투옥했다. 바오로 5세는 이러한 결정이 교회법에 저촉된다고 주장하며 철회를 요구했다. 베네치아는 이 요구를 따르지 않았고, 바오로 5세는 베네치아에 교황령 금지를 결정했다.

베네치아는 교황령 금지를 개의치 않고 성직자들에게 통상적인 직무를 수행할 것을 요청했다. 세르비테 교단의 교회법 학자 파올로 사르피는 1606년 당시 신학 및 교회법에 관해 시뇨리아의 고문이었으며, 이 베네치아의 결정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이 사건은 프랑스 왕국의 중재로 화해에 이르렀고, 교황령 금지는 1년 후에 해제되었다. 베네치아는 법의 지배가 모든 시민에게 미치며, 어떠한 예외도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했다.

1613년부터 1617년까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베네치아 정부의 기록에 따르면, 그 전쟁의 원인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우스코치에게 아드리아 해안을 공격하게 한 것이었다. 우스코치(Uscocchiit)는 주로 보스니아나 달마티아의 오스만 제국령에서 온 기독교 난민이었으며, 오스트리아에 징집되어 국경 경비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들은 세냐에 거주하며 아드리아 해에서 해적 행위를 했고, 베네치아의 골칫거리였다.

베네치아는 1613년에 우스코치 토벌을 실시했고, 1613년에 오스트리아 대공을 격파했다. 또한 오스트리아에 군대를 파견하는 한편, 사보이아 공국에 자금을 지원하고, 스페인 왕국의 군대를 롬바르디아에서 발이 묶이게 했다. 이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로부터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1617년의 강화 조약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에게 우스코치를 내륙으로 이주시키도록 합의시켰다.

1617년, 스페인 왕국의 나폴리 총독은 아드리아 해의 지배권을 베네치아로부터 빼앗기 위해 함대를 파견했다. 이에 뒤이어, 폭동과 반란의 소문이 베네치아 전역에 퍼졌고,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위해 모인 각국 용병대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났다. 이것은 스페인 대사 베드마르의 음모였다. 이 사실을 위그노 선장에게서 알게 된 십인 위원회는 즉시 3명의 용의자를 체포했고, 의회는 스페인 대사의 즉시 소환을 결정, 스페인 왕국과의 긴장은 1622년에 최고조에 달했다.

안토니오 포스카리니는 베네치아 의회의 의원이자 주잉글랜드 대사였지만, 대사 재임 중의 내통, 그리고 귀국 후 스페인 왕국의 스파이로 활동한 혐의로 고발당했다. 전자에 대해서는 무죄가 되었지만, 후자에 대해 유죄가 되어 1622년 피아체타의 교수대에 매달렸다. 그러나 몇 달 후 십인 위원회는 그가 무죄였으며, 음모의 희생자였음을 깨달았다. 그의 명예는 회복되었다. 이 사건은 유럽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7. 3. 만토바 계승 전쟁과 흑사병

1628년부터 베네치아는 프랑스 왕국과 동맹하여 합스부르크 왕가 및 사보이아 공국과 싸웠다. 베네치아군은 신성 로마 제국의 공격을 받고 있던 만토바를 구원하러 갔지만 격파당했다. 전쟁은 1631년 프랑스의 사실상 승리로 종결되었지만, 베네치아는 이에 기여하지 못했다.

전쟁의 영향으로 1629년부터 1630년까지 베네치아에서 흑사병이 유행하여 16개월 동안 5만 명이 사망했다. 이는 전체 인구의 약 3분의 1이었다. 흑사병 유행이 끝난 것을 감사하는 의미로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이 건설되었다.

7. 4. 크레타 전쟁

1638년, 베네치아 해군이 크레타를 순찰하는 동안, 알제튀니스를 거점으로 하는 바르바리 해적이 16척의 갤리선을 이끌고 아드리아 해에 침입했다. 해군이 돌아왔을 때쯤에는 해적은 발로나에 거점을 재건하고 있었다. 베네치아의 사령관 마리노 카펠로는 해적을 공격하여 거점을 포격하고 적선을 나포했다. 이로 인해 3600명의 노예가 해방되었다. 이에 대해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주재 베네치아 대사 알비제 콘타리니를 투옥했다. 이 때는 외교적 노력으로 전쟁은 회피되었다.[1]

그러나 6년 후 오스만 제국은 크레타 최대의 항구 칸디아를 공격하여 교전했고, 크레타 전쟁은 25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17세기의 베네치아에서 가장 큰 현안이었다. 1645년에 전쟁은 베네치아 본토로 번졌다. 오스만 제국은 달마티아를 공격했지만, 아드리아 해에서의 우위를 활용한 베네치아가 이를 막았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22일, 크레타의 요새 카니아(현재의 하니아)가 함락되었다.[1] 1647년 8월부터 9월에 걸쳐, 오스만 제국은 시베니크를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다음 해, 베네치아는 크리사를 비롯한 몇몇 요새를 탈환했다.[1]

베네치아의 기본 방침은 다르다넬스 해협을 봉쇄하여 크레타의 오스만 군에게 보급을 차단하는 것이었고, 실제로 1655년 6월 21일의 전투와 다르다넬스 해협 해전에서 승리했지만, 크레타에서의 전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1657년 7월 17일부터 19일까지 3일간 이어진 전투에서는, 라자로 모체니고가 부러진 돛대 밑에 깔려 사망했다.[1]

프랑스-스페인 전쟁이 1659년에 종결되자, 베네치아에 대한 기독교 국가들의 지원이 증가했다. 1666년에 카니아 탈환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1669년에는, 칸디아를 포위하는 오스만 군에게 프랑스 왕국의 원군이 육지에서, 모체니고의 부대가 바다에서 공격을 가했지만, 이 역시 실패했다. 프랑스군은 철수했고, 칸디아에는 3600명의 수비병만 남게 되었다. 프란체스코 모로시니는 1669년 9월 6일에 항복했다. 크레타는 몇몇 소규모 거점을 제외하고 할양되었다. 티노스와 키티라 같은 섬들과 달마티아는 베네치아가 계속 보유했다.[1]

7. 5. 모레아 전쟁과 카를로비츠 조약

1683년 투르크가 제2차 빈 포위에 실패하자, 1684년 베네치아는 이를 틈타 오스트리아와 대 오스만 동맹을 결성하였으며, 나중에는 러시아 제국도 합류하였다. 모레아 전쟁 초반 프란체스코 모로시니는 레우카스섬을 점령하고 그리스 항구들의 재점령에 나섰다. 1685년 6월 코로네섬에 상륙한 후, 8월에는 파트라스, 레판토, 코린토스를 점령하여 펠로폰네소스반도를 확보하였다. 1687년 9월 아테네 공격 중 베네치아 대포가 파르테논 신전을 파괴하였다. 달마티아에서도 베네치아 점령지가 크게 늘었으나, 1688년 네그로폰테 탈환은 실패하였다. 이후 대함대가 파견되어 1695년 미틸레네에서, 1697년 6월 6일 안드로스섬에서, 1698년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승리하였으나, 모로시니의 후임자들은 의미있는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1699년 체결된 카를로비츠 조약은 지난 2세기 동안 투르크에게 빼앗긴 지중해 기지를 회복하지 못한 베네치아보다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에 유리한 결과를 가져왔다.[1]

8. 18세기: 쇠퇴와 멸망

18세기에 베네치아 공화국은 쇠퇴와 멸망의 길을 걸었다. 1714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으로 시작된 쇠퇴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침공으로 1797년 공화국이 멸망하면서 막을 내렸다.

1714년 겨울, 투르크는 베네치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베네치아의 주요 영토였던 펠로폰네소스(모레아)는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했다. 투르크는 티노스와 아이기아섬을 점령하고 코린토스 지협을 넘어 코린토스를 점령했다. 베네치아 함대 지휘관 다니엘 돌핀은 전력 보존을 우선시하여 늦게 출전했고, 그 사이 나우플리아, 모도네, 코로네, 말바지아가 함락되었다. 레우카스, 스피나롱가, 수다의 기지들은 포기되었고, 코르푸는 간신히 방어에 성공했다. 1718년 파사로비치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는 넓은 영토를 얻었지만, 베네치아는 모레아를 잃었다.

토스카나 대공국리보르노, 교황령 안코나, 합스부르크의 트리에스테 등 새로운 항구 도시들의 성장과 마그레브 해안 해적의 활동은 베네치아의 무역에 타격을 주었다. 1779년 카를로 콘타리니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모두가 통제를 잃었다"라고 외치며 개혁을 요구했지만, 도제 파올로 레니에르는 반대했다.

1784년~1786년, 안젤로 에모가 이끄는 함대가 튀니지를 공격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1792년 베네치아 상선은 309척으로 감소했다.[42]

1789년 루도비코 마닌이 도제로 선출되었지만, 1796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베네치아 국경을 넘었다. 1797년 레오벤 조약으로 베네치아는 영토를 잃었고, 나폴레옹은 베네치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1797년 5월 12일, 베네치아 공화국 대평의회는 임시 정부에 권력을 이양하기로 결의했고, 5월 16일 베네치아 임시 정부가 설립되었다.

1797년 10월 18일, 캄포포르미오 조약으로 베네치아와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는 오스트리아에 귀속되었고, 베네치아 공화국은 공식적으로 소멸했다.

8. 1. 경제적 쇠퇴

1714년 12월, 오스만 제국은 오스만-베네치아 전쟁을 일으켰다. 오스만 군대는 티노스와 아이기나를 점령하고, 코린토스 지협을 넘어 코린토스를 함락시켰다. 다니엘 돌핀이 이끄는 베네치아 함대는 모레아를 구원하기보다는 전력을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 때문에 출항이 늦어졌다. 함대가 모레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나프플리오, 모돈, 코로니, 말바지아가 함락된 뒤였다. 이오니아 제도의 레프카스섬과 크레타의 스피날론가, 수다는 칸디아 함락 후에도 베네치아령으로 남아 있었지만, 이 전쟁에서 포기해야 했다. 오스만 제국은 코르푸에도 상륙했으나, 베네치아 방위군이 간신히 격퇴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은 오스트리아와도 전쟁을 벌였는데(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 1716년 8월 3일 페테르바르다인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에 대패했고, 1717년 베오그라드 포위전에서도 크게 패했다. 이를 계기로 베네치아 해군은 1717년과 1718년에 에게해와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진격했지만, 뚜렷한 전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1718년 7월 21일 파사로비츠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는 영토를 크게 넓혔고, 베네치아는 알바니아와 달마티아에서 약간의 영토를 얻었지만 모레아를 상실했다. 이 전쟁은 베네치아가 오스만 제국과 벌인 마지막 전쟁이었다.

300px

토스카나 대공국티레니아해에 건설한 리보르노 항구는 북해 방면과의 무역으로 발전했다. 아드리아해에 면한 교황령의 안코나1719년 자유항이 된 합스부르크가의 트리에스테 때문에, 아드리아해는 더 이상 '베네치아의 바다'라고 불릴 수 없게 되었다. 제노바 공화국 역시 베네치아의 오랜 경쟁 상대였다. 이러한 여러 도시들로 인해 베네치아의 통상은 18세기에 쇠퇴했다. 베로나를 비롯한 본토 동쪽 도시들조차 생필품을 제노바와 리보르노에서 수입했다. 마그레브 연안 해적들의 활동도 베네치아 상인들의 자유로운 항해를 방해했다.

카를로 콘타리니와 조르조 피사니는 소수 유력 귀족에 의한 과두제를 폐지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도제 파올로 레니에르는 이로 인해 혼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반대했다. 일부 세력은 이 제안을 정권 전복 음모라고 주장하며 카를로 콘타리니를 카타로 요새에, 조르조 피사니를 베로나의 산 펠리체 성에 각각 유폐했다.

1784년부터 1786년까지 튀니지 해적들은 몰타의 성 요한 기사단에게 입은 피해에 대한 보상을 베네치아에 요구했다. 이는 명백한 트집이었으나, 외교적 해결은 실패로 돌아갔다. 안젤로 에모가 이끄는 베네치아 함대는 튀니스를 봉쇄하고, 1784년 11월과 1785년 5월에 수스, 1785년 8월에 스팍스, 같은 해 9월에 라 콜레타, 1786년에 비제르트를 포격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성과는 없었고, 의회는 에모와 함대를 코르푸로 소환했다. 에모 사후 튀니스와의 강화가 성립되었다. 1792년까지 베네치아 상선은 309척으로 감소했다.[42]

8. 2. 정치적 혼란과 개혁 시도

1714년 12월, 오스만 제국은 베네치아 공화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오스만 제국은 티노스와 아이기나를 점령하고, 코린토스 지협을 넘어 코린토스를 점령했다. 다니엘 돌핀이 이끄는 베네치아 함대는 모레아를 구원하기보다는 전력을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어 출범이 늦어졌다. 함대가 모레아에 도착했을 때, 나프플리오, 모돈, 코로니 및 말바지아는 함락된 상태였다. 이오니아 제도의 레프카스섬과 크레타의 스피날론가 및 수다는 칸디아 함락 후에도 베네치아령이었지만, 이때 포기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더 나아가 코르푸에 상륙했지만, 방위대가 간신히 격퇴했다.[68]

오스만 제국은 오스트리아와도 전쟁을 시작했고, 발칸 반도에서 교전했지만, 1716년 8월 3일 페테르바르다인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에 패배했고, 다음 1717년의 베오그라드 포위전에서도 대패했다. 이를 계기로 베네치아 해군은 1717년과 1718년에 에게해 및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침공했지만, 뚜렷한 전과를 거두지 못했다. 1718년 7월 21일의 파사로비츠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는 영토를 크게 확대했고, 베네치아는 알바니아와 달마티아에서 약간의 영토를 확장했지만 모레아를 잃었다. 이것이 베네치아가 오스만 제국과 벌인 마지막 전쟁이었다.[68]

300px

토스카나 대공국티레니아해에 건설한 리보르노 항구는 북해 방면과의 무역으로 발전했다. 아드리아해에 면한 교황령의 안코나1719년에 자유항이 된 합스부르크가의 트리에스테 때문에, 아드리아해는 더 이상 베네치아의 바다라고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제노바 공화국은 예전부터 베네치아의 경쟁 상대였다. 이러한 여러 도시로 인해 베네치아의 통상은 18세기에 쇠퇴했다. 베로나를 비롯한 본토 동쪽의 도시조차 생활 필수품을 제노바와 리보르노에서 수입했다. 마그레브 연안의 해적으로 인해 베네치아 상인은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게 되었다.[68]

카를로 콘타리니와 조르조 피사니는 소수의 유력 귀족에 의한 과두제를 폐지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일어날 혼란을 두려워한 도제 파올로 레니에르는 반대했다. 게다가 일부 세력이 이 제안을 정권 전복의 음모라고 주장하면서, 카를로 콘타리니는 카타로의 요새에, 조르조 피사니는 베로나의 산 펠리체의 성에 각각 유폐되었다.[68]

1784년부터 1786년에 걸쳐, 튀니지의 해적은 몰타의 성 요한 기사단에 의해 받은 피해에 대한 보상을 베네치아에 요구했다. 물론, 성 요한 기사단은 베네치아의 관할이 아니므로, 이는 트집이었다. 그러나 외교에 의한 해결은 실패했다. 안젤로 에모가 이끄는 베네치아 함대는 튀니스를 봉쇄하고, 1784년 11월과 1785년 5월에 수스, 1785년 8월에 스팍스, 같은 해 9월에 라 콜레타, 1786년에 비제르트를 포격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의회는 에모와 함대를 코르푸로 소환했다. 에모가 죽은 후, 튀니스와의 강화가 성립되었다. 1792년까지, 베네치아의 상선은 309척까지 감소했다.[42]

8. 3. 베네치아 최후의 해상 작전

1714년 12월, 오스만-베네치아 전쟁이 발발했다. 오스만 제국은 티노스와 아이기나를 점령하고, 코린토스 지협을 넘어 코린토스를 점령했다. 다니엘 돌핀이 이끄는 베네치아 함대는 모레아를 구원하기보다는 전력을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어 출범이 늦어졌다. 함대가 모레아에 도착했을 때, 나프플리오, 모돈, 코로니 및 말바지아는 함락된 상태였다. 이오니아 제도의 레프카스섬과 크레타의 스피날론가 및 수다는 칸디아 함락 후에도 베네치아령이었지만, 이때 포기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더 나아가 코르푸에 상륙했지만, 방위대가 간신히 격퇴했다.

오스만 제국은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와도 전쟁을 시작했고, 발칸 반도에서 교전했지만, 1716년 8월 3일, 페테르바르다인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에 패배했고, 다음 1717년의 베오그라드 포위전에서도 대패했다. 이를 계기로 베네치아 해군은 1717년과 1718년에 에게해 및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침공했지만, 뚜렷한 전과를 거두지 못했다. 1718년 7월 21일의 파사로비츠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는 영토를 현저하게 확대했고, 베네치아는 알바니아와 달마티아에서 약간의 영토를 확장했지만 모레아를 잃었다. 이것이 베네치아가 오스만 제국과 벌인 마지막 전쟁이었다.

1784년부터 1786년에 걸쳐, 튀니스의 해적은 몰타의 성 요한 기사단에 의해 받은 피해에 대한 보상을 베네치아에 요구했다. 물론, 성 요한 기사단은 베네치아의 관할이 아니므로, 이는 트집이었다. 그러나 외교에 의한 해결은 실패했다. 안젤로 에모가 이끄는 베네치아 함대는 튀니스를 봉쇄하고, 1784년 11월과 1785년 5월에 수스, 1785년 8월에 스팍스, 같은 해 9월에 라 콜레타, 1786년에 비제르트를 포격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의회는 에모와 함대를 코르푸로 소환했다. 에모가 죽은 후, 튀니스와의 강화가 성립되었다. 1792년까지, 베네치아의 상선은 309척까지 감소했다.[42]

8. 4. 나폴레옹의 침공과 공화국의 멸망

1789년 루도비코 마닌이 도제로 선출되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선거 비용이 치솟았는데, 귀족 피에트로 그라데니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69]

프랑스군에 항복하기 1년 전, 1796년의 베네치아 공화국


1796년 베네치아 공화국은 더 이상 자력으로 방어할 수 없었다. 당시 베네치아가 보유하고 있던 함대는 갤리선 4척과 갈레아스 7척뿐이었다.[43] 육군 또한 주로 크로아티아 용병으로 구성된 소규모 여단만 있었다.

같은 해 봄, 프랑스 공화국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피에몬테 주를 공략하고 패주하는 오스트리아군을 몬테노테 (몬테노테 전투)에서 로디 (로디 전투)로 추격했다 (이탈리아 전역 (1796-1797년) 참조).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을 추격하며 중립을 지키던 베네치아 국경을 넘었다. 연말까지 아디제 강까지의 베네치아 영토가 점령되었고, 비첸차, 카도레 지방 및 프리울리는 오스트리아가 지배했다. 이듬해인 1797년,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와 휴전을 모색하여 알프스 너머 오스트리아 영토 확보를 인정하게 되었다. 1797년 4월 18일에 조인된 레오벤 조약은 대부분의 조항이 비밀에 부쳐졌지만,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를 오스트리아 영토로 하는 조건으로 휴전이 성립되었다.

휴전 협정은 시가지와 석호에만 한정된 베네치아 공화국의 존속을 상정했지만, 이는 교황령 희생에 대한 보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브레시아베르가모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반기를 들었고, 다른 지역에서는 반 프랑스 운동이 확산되었다. 나폴레옹은 4월 9일 베네치아에 전쟁을 언급하며 위협했다. 4월 25일, 그는 그라츠에서 베네치아 대표에게 "이단 심문도 원로원도 필요없다. 나는 베네치아에게 아틸라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도메니코 피자마노(Domenico Pizzamano)는 강제로 입항하려는 프랑스 함대에 리도 요새에서 포격을 가했다. 5월 1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베네치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프랑스군은 베네치아 시 경계까지 다가왔고, 프랑스에 의해 "혁명화"된 베네토 지방의 도시에서는 임시 정부가 설립되었다. 5월 12일, 베네치아 공화국 대평의회는 임시 정부에 권력을 이양하기로 결의했다. 투표 총수는 512명으로 정족수에 미달했으며, 반대 10표, 기권 5표였다. 5월 16일, 베네치아 임시 정부가 설립되었다.

1797년 10월 18일, 우디네 교외의 캄포포르미오에서 프랑스-오스트리아 간의 정식 강화 조약이 조인되었다 (나폴레옹은 체류하고 있던 도제 마닌의 저택에서 서명했다고 한다). 이 캄포포르미오 조약에 의해 베네치아와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는 오스트리아가 영유하게 되었고, 베네치아 공화국은 공식적으로 소멸했다.

8. 5. 레오벤 조약과 캄포포르미오 조약

1796년 베네치아 공화국은 더 이상 자체적인 방어가 불가능했다. 여전히 13척의 함대는 가지고 있었으나 이 중 출항할 수 있는 것은 소수였고 육군은 주로 크로아티아인 용병으로 구성된 수 개의 여단만으로 구성되었다.[43] 1796년 봄 피에몬테가 함락되었고 오스트리아는 몬테노테에서 로디까지 연패했다. 나폴레옹 휘하의 군대는 적을 쫓아 중립을 선언한 베네치아의 국경을 넘었다. 연말에 프랑스군은 아디제까지의 베네치아 영토를 점거중이었으며 비첸차, 카도레, 프리울리는 오스트리아가 점유했다. 다음 해 나폴레옹은 알프스 너머의 오스트리아 영유지를 목표로 했다. 현재도 내용 전체가 밝혀지지 않은 레오벤 조약에 따르면, 오스트리아는 평화의 대가로 베네치아 소유의 이스트라반도달마티아를 소유하게 되었다. (1797년 4월 18일)

화의 성립으로 베네치아는 살아남을 것으로 보였으나, 영토는 베네치아 시와 석호로 한정되었으며 교황령은 포기해야 했다. 동시기에 브레시아베르가모는 베네치아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며 다른 곳에서는 반프랑스 운동이 시작되었다. 나폴레옹은 4월 9일 전쟁을 시작하여 베네치아를 위협하였으며, 4월 25일에는 그라츠에서 베네치아 대표에게 "이단 심문도 원로원도 많다. 나는 베네치아에게 아틸라가 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도메니코 피자마노(Domenico Pizzamano)는 강제로 입항하려는 프랑스 함대에 리도 요새에서 포격을 가했다. 5월 1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베네치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프랑스군은 베네치아 시의 끝까지 다가왔다. 프랑스에 의해 "혁명화"된 베네토 지방의 도시에서는 임시 정부가 설립되었다. 5월 12일, 베네치아 공화국 대평의회는 임시 정부에 권력을 이양하기로 결의했다. 투표 총수는 512명이었고 정족수에 미달했으며, 반대 10, 기권 5였다. 5월 16일, 베네치아 임시 정부가 설립되었다.

1797년 10월 18일, 우디네 교외의 캄포포르미오에서 프랑스-오스트리아 간의 정식 강화 조약이 조인되었다 (나폴레옹은 체류하고 있던 도제 마닌의 저택에서 서명했다고 한다). 이 캄포포르미오 조약에 의해 베네치아와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는 오스트리아가 영유하게 되었고, 베네치아 공화국은 공식적으로 소멸했다.

8. 6. 베네치아 공화국의 종말

1789년 루도비코 마닌이 도제로 선출되었는데, 선거 비용은 18세기에 계속 증가하여 이때 최고조에 달했다. 귀족 피에트로 그라데니고는 "프리울리 출신 도제가 선출되었다. 공화국은 죽었다."라고 평했다.[69]

1796년 베네치아 공화국은 더 이상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었다. 해군은 13척의 함선을 보유했지만, 그중 출항 가능한 것은 소수였고,[43] 육군은 주로 크로아티아인 용병으로 구성된 몇 개의 여단뿐이었다. 같은 해 봄, 피에몬테가 함락되었고 오스트리아는 로디까지 연패했다. 나폴레옹 휘하의 군대는 적을 쫓아 중립을 선언한 베네치아의 국경을 넘었다. 연말에 프랑스군은 아디제까지의 베네치아 영토를 점거했으며 비첸차, 카도레, 프리울리는 오스트리아가 점유했다.

1797년 레오벤 조약에 따르면, 오스트리아는 평화의 대가로 베네치아 소유의 이스트라달마티아를 소유하게 되었다. (1797년 4월 18일) 이로써 베네치아는 영토가 베네치아 시와 석호로 한정되었고 교황령은 포기해야 했다. 같은 시기에 브레시아베르가모는 베네치아에 반란을 일으켰고, 다른 곳에서는 반프랑스 운동이 일어났다. 나폴레옹은 4월 9일 전쟁을 시작하며 베네치아를 위협했고, 4월 25일에는 그라츠에서 베네치아 대표에게 "나는 조사위원회도, 원로원도 필요 없다. 나는 베네치아에게 아틸라가 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도메니코 피자마노(Domenico Pizzamano)는 프랑스 선박이 리도 요새로부터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발포했다. 5월 1일 나폴레옹은 전쟁을 선포했고, 프랑스군은 석호 가장자리에 위치했다. 베네토의 도시들마저 프랑스에 의해 “혁명화”되어 임시 정부들이 세워졌다. 5월 12일 베네치아 국회는 “잠정적으로 논의 중인 대표성 있는 정부”에 대한 권한 이양을 승인했으나, 정족수는 충족되지 않았다. 512명이 찬성, 10명 반대, 5명 기권이었다. 5월 16일 임시 정부가 국회 홀에 모였다.

레오벤 조약캄포포르미오 조약에서 더욱 가혹하게 바뀌어, 베네치아 및 속령은 오스트리아에 귀속되었다. 1797년 10월 18일, 파사리아노에 있는 마지막 도제의 저택에서 합의서가 서명되었다.

참조

[1] 서적 Imperciocchè nascendi i principati
[2] 서적
[3] 서적 International Dictionary of Historic Places: Southern Europe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2011-03-24
[4] 서적 Le origini di Venezia Istituto geografico De Agostini
[5] 서적 L'Origine e discendenza delle famiglie patrizie
[6] 서적 Il Campidoglio veneto
[7] 간행물 Variae Epistulae https://www.gutenber[...]
[8] 서적 An Encyclopedia of World History, Ancient, Medieval, and Modern, Chronologically Arranged https://books.google[...] Harrap 2021-04-08
[9] 간행물 XCIII Zacharias (741–752). Le Liber pontificalis; texte, introduction et commentaire par L. Duchesne (Volume 1) https://archive.org/[...]
[10] 웹사이트 CATHOLIC ENCYCLOPEDIA: Pope St. Zachary http://www.newadvent[...] 2019-12-24
[11] 간행물 St. Zachary, Pope and Confessor. The Lives of the Saints, Volume 3 http://www.bartleby.[...]
[12] 서적 An Encyclopedia of World History, Ancient, Medieval and Modern, Chronologically Arranged: A Revised and Modernized Version of Ploetz's "Epitome" https://books.google[...] Houghton Mifflin 2021-04-08
[13] 학술지 From the Myth to the Margins: The Patriarch's Piazza at San Pietro di Castello in Venice https://www.jstor.or[...]
[14] 서적 Slavery, Slave Trade. Scribner
[15] 간행물 Il pactum Lotharii del 840
[16] 웹사이트 Pacta Veneta. A chronology in four steps. PAX TIBI MARCE Venice: government, law, jurisprudence Venezia: istituzioni, diritto, giurisprudenza https://web.archive.[...] 2019-12-24
[17] 간행물 Capitularia regum Francorum, II https://archive.org/[...] Hanovre
[18] 간행물 Dirhams for slaves. Investigating the Slavic slave trade in the tenth century. https://www.academia[...]
[19] 서적 Castration and Culture in the Middle Ages https://www.jstor.or[...] Boydell & Brewer
[20] 웹사이트 CANDIANO, Pietro in "Dizionario Biografico" http://www.treccani.[...] 2017-09-15
[21] 웹사이트 ORSEOLO, Pietro II in "Dizionario Biografico" http://www.treccani.[...] 2017-09-15
[22] 서적 The World of Venice https://books.google[...] Pantheon Books 2021-04-08
[23] 웹사이트 Siege of Zara http://www.britannic[...]
[24] 서적 The Fourth Crusade: And the Sack of Constantinople Random House 2021-04-08
[25] 웹사이트 Cydonia http://www.themodern[...] 2008-01-23
[26] 서적 The enemy within: a history of espionage Osprey Publishing
[27] 간행물 llustrations de Opusculum sanctorum peregrinationum ad spulcrum… http://gallica.bnf.f[...]
[28] 서적 The Renaissance and the Reformation https://books.google[...] Harper & brothers 2021-03-31
[29] 웹사이트 Map of Linea Mocenigo in enlarged Venetian Dalmatia http://vps.arcipelag[...]
[30] 서적 The Two Cultures Canto
[31] 서적 Naval wars in the Levant, 1559-1853. https://catalog.hath[...]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21-04-08
[32] Harvnb
[33] Harvnb
[34] Harvnb
[35] 서적 ヴェネツィアの市場 清文堂出版
[36] 기타 Harvnb Norwich 1982
[37] 기타 Harvnb Norwich 1982
[38] 논문 The Fourth Crusade and the Sack of Constantinople
[39] 웹사이트 Kydonia http://letmespeaktot[...] 2008-01-23
[40] 기타 Harvnb Norwich 1982
[41] 기타 Harvnb Norwich 1982
[42] 기타 Harvnb Norwich 1982
[43] 기타 Harvnb Norwich 1982
[44] 서적 A History of Venice Alfred B. Knopf 1982
[45] 기타 Norwich
[46] 기타 Norwich
[47] 기타 Norwich
[48] 기타 Langer
[49] 기타 Norwich
[50] 기타 Norwich
[51] 기타 Norwich
[52] 기타 Norwich
[53] 기타 Norwich
[54] 기타 Norwich
[55] 기타 Norwich
[56] 웹인용 World of Venice (James Morris), pp.42-43 http://www.sjsu.edu/[...] 2013-04-15
[57] 웹사이트 Encyclopedia Britannica Online, Siege of Zara http://www.britannic[...]
[58] 논문 The Fourth Crusade and the Sack of Constantinople
[59] 웹사이트 Cydonia http://www.themodern[...] 2008-01-23
[60] 서적 The enemy within: a history of espionage Osprey Publishing 2006
[61] 기타 Norwich
[62] 기타 Norwich
[63] 서적 The Renaissance and the Reformation Harper 1960
[64] 기타 Lucas
[65] 문서 Cyprus became officially a territory of the Republic of Venice in 1489, after the abdication of the Cornaro and a treaty with the Egyptian sultan.
[66] 기타 Norwich
[67] 기타 Henry S. Lucas
[68] 기타 Norwich
[69] 서적 The Two Cultures 199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