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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베르파크툰크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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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이베르 파크툰크와는 파키스탄의 주로, 파슈툰족의 땅을 의미한다.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북서 변경주로 불렸으나, 2010년 카이베르 파크툰크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간다라 문명의 중심지였으며, 다양한 민족과 언어가 공존한다. 수니파 이슬람교가 다수를 차지하며, 파슈토어가 가장 널리 사용된다. 주 의회와 행정부로 구성되며, 농업과 임업이 주요 산업이다. 관광 산업의 잠재력도 높으며, 크리켓과 스쿼시 등 스포츠도 활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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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베르파크툰크와주 - [지명]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일반 정보
스와트 강
스와트 강
카이버 문
카이버 문
마하바트 칸 모스크
마하바트 칸 모스크
칼람 계곡
칼람 계곡
바레인
바레인
사이풀물루크 호수
사이풀물루크 호수
카간 계곡
카간 계곡
공식 명칭카이베르파크툰크와주
유형
별칭프론티어, 프론티어 주, 사르하드
표어해당 없음
위치카이베르파크툰크와주의 파키스탄 내 위치
상징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주의 깃발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주의 깃발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주의 문장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주의 문장
행정
수도 및 최대 도시페샤와르
정부 형태자치주, 연방 정부의 통제를 받음
통치 기구카이베르파크툰크와 주 정부
주지사하지 글람 알리
주수상알리 아민 간다푸르
수석 비서관나딤 아슬람 차우드리
입법부주의회
고등 법원페샤와르 고등 법원
행정 구역7개
하위 행정 구역반누 구
데라 이스마일 칸 구
하자라 구
코하트 구
말라칸드 구
마르단 구
페샤와르 구
디비전7
디스트릭트38
테실105
유니온 카운슬986
역사
설립 (북서변경주)1901년 11월 9일
주 지위 획득1935년
파키스탄 가입1947년 7월 / 8월
서파키스탄 통합1955년
복원1970년 7월 1일
이름 변경2010년
FATA 합병2018년 5월
지리
면적101,741 제곱킬로미터
면적 순위4위
인구 통계
총 인구 (2023년)40,641,120명
인구 순위3위
인구 밀도402 명/제곱킬로미터
도시 인구 비율15.01% (6,086,705명)
농촌 인구 비율84.99% (34,554,415명)
HDI (2019년)0.529 (낮음)
문해율 (2020년)56.1%
언어
공용어영어
우르두어
지방 공용어파슈토어
기타 사용 언어힌드코어
코와르어
인더스 코히스탄어
사라이키어
경제
명목 GDP (2022년)380억 달러 (3위)
PPP GDP (2022년)1,520억 달러 (3위)
기타 정보
시간대PKT
UTC 오프셋+05:00
국가 번호9291
ISO 3166-2PK-KP
국가 의회 의석수65
지방 의회 의석수145
웹사이트공식 웹사이트
주요 스포츠 팀페샤와르 잘미
페샤와르 팬서스
카이베르파크툰크와 크리켓 팀

2. 명칭

'''카이베르 파크툰크와'''는 "카이베르가 있는 파슈툰족의 땅"을 의미하며,[13] '파크툰크와'는 "파슈툰족의 땅"을 의미한다.[14] 일부 학자들은 "파슈툰 문화와 사회"를 지칭하기도 한다.[15]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간다라''', '''아프가니아''', '''파슈투니스탄''', '''파탄니스탄''', '''사르하드''', '''아바세인''', '''카이베르'''[16][17] 또는 '''하자라-파크툰크와'''와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거나 제안되었다.[18][19]

영국령 인도 제국 통치 시기에는 이 지역이 영국령 인도 제국의 북서쪽에 위치해 있다는 이유로 "북서 변경주(North West Frontier Province)" (약칭 NWFP)라고 불렸다.[20]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에서는 "'''하이발 파흐툰크와 주'''"라고 표기하고 있다.

2. 1. 명칭 변경 논란

'''카이베르 파크툰크와'''는 "카이베르가 있는 파슈툰족의 땅"을 의미하며,[13] '파크툰크와'는 "파슈툰족의 땅"을 의미한다.[14]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파슈툰 문화와 사회"를 지칭하기도 한다.[15]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간다라''', '''아프가니아''', '''파슈투니stan''', '''파탄이stan''', '''사르하드''', '''아바세인''', '''카이베르'''[16][17] 또는 '''하자라-파크툰크와'''와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거나 제안되었다.[18][19]

영국 통치 시기에는 이 지역이 영국령 인도 제국의 북서쪽에 위치해 있다는 이유로 "북서 변경주(North West Frontier Province)" (약칭 NWFP)라고 불렸다.[20] 파키스탄 건국 이후에도 이 이름이 계속 사용되었지만, 파슈툰족 정당인 국민 아와미당은 "파크툰크와"로 변경할 것을 요구했다.[21] 펀자브족, 신드족, 발루치족은 자신의 민족 이름을 딴 주가 있지만 파슈툰족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22]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 (N)은 집권당 파키스탄 인민당과 ANP를 지지하여 헌법 개정을 통해 이 지역의 이름을 변경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파슈툰족의 정체성만을 담고 있지 않은 다른 이름을 원했다. 하자라 지역의 힌드코어를 사용하는 하자레왈족과 같은 다른 소수 민족이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카이베르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연결하는 주요 카이베르 고개의 이름이기 때문에 '카이베르'라는 단어가 이름에 추가되었다고 주장했다.[22]

1933년 무슬림 연맹의 창립 지도자들은 ''아프가니아''(Afghania)라는 이름을 제안했다.[24] 파키스탄이라는 이름을 지은 차우두리 라흐마트 알리는 "지금 아니면 영원히"라는 팸플릿에서 "북서 변경주"라는 명칭은 의미가 없고 부당하다고 주장했다.[24]

20세기 말,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대통령은 칸 압둘 가파르 칸과 협의하여 명칭을 "파슈툰istan"으로 변경하는 데 동의했지만, 파슈툰istan이라는 용어가 논란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가파르 칸은 파크툰크와를 제안했지만, 지아울하크는 다른 대안을 제시하도록 요청했다.[25]

1997년, 주의 헌법 의회에서 파크툰크와라는 명칭이 다수결로 승인되었다.[26] 그러나,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 (N) (PML (N)) 의원들은 ANP의 요구를 거부하고 나와즈 샤리프 총리에게 다른 명칭을 제안할 것을 요청했다.[26] PML (N) 의원들은 사르하드가 좋은 이름이지만, 변경이 필요하다면 카이베르 또는 아바신으로 이름을 지어야 한다고 언급했다.[26] 사르다르 메흐타브 아흐메드 칸 주지사는 국민투표를 요구했지만, ANP는 거부하고 연방 및 주 정부에서 탈퇴했다.[26]

2008년 5월, 파키스탄 인민당(PPP)은 북서 변경주의 이름을 파크툰크와로 변경할 것을 제안했다.[28][29] 그러나 무슬림 연맹 나와즈는 하자라 지역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민족적 근거"를 들어 명칭 변경에 반대했다.[30]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대통령은 2008년 9월 26일 유엔 총회에서 처음으로 ''파크툰크와''라는 이름을 언급했다.[31] 파슈툰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아와미 국립당은 주의 이름을 "파크툰크와"로 변경할 것을 요구했다.[32]

2010년 4월 15일, 파키스탄 상원은 파키스탄 헌법 제18차 개정안에서 이름을 ''카이베르 파크툰크와''로 변경하는 것을 확정했다.[33] 하자라 지역 주민들은 주 이름 변경에 강력하게 반대하며 시위를 벌였다. 아보타바드는 이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4월 10일, 카이베르 파크툰크와 경찰은 비무장 시위대에 발포하여 7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34] 이는 국민 민족당이 이끄는 카이베르 파크툰크와 연립 정부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35]

전 ''더 네이션'' 편집장 아리프 니자미는 "이것은 파키스탄의 매우 불안정한 정치 체제로 인해 판도라의 상자를 연 셈"이라고 말했다.[37]

'''간다라'''라는 이름은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 (N)에 의해 이 지역의 중립적인 이름으로 제안되었다.[17][38][39] 간다라는 현재의 지역을 중심으로 한 고대 인도-아리아인[40] 문명이었다.[41][42][43] 간다라 지역의 핵심은 페샤와르 계곡과 스와트 계곡이었지만, "대(大)간다라"의 문화적 영향력은 인더스강을 넘어 포토하르 고원의 탁실라 지역과 아프가니스탄의 카불 계곡 서쪽, 그리고 카라코람 산맥까지 북쪽으로 확장되었다.[44][45][46]

리그베다에서 언급되었으며,[47][48] 두 번째 도시화의 16개의 마하 자나파다 중 하나였다.[41][42][43] 이 지역은 인도-그리스 왕국 시대의 그레코-불교와 인도-스키타이, 인도-파르티아, 쿠샨 제국을 포함한 후기 왕조 시대의 간다라 불교의 주요 중심지였다. 간다라는 또한 불교가 중앙 아시아와 동아시아로 전파되는 중심지였다.[49]

간다리어는 카로슈티 문자로 쓰인 인도-아리아어로 이 지역의 공용어 역할을 했다.[50] 고전적인 헬레니즘 양식의 영향을 받은 독특한 간다라 미술로 유명한 간다라는 기원후 1세기부터 5세기까지 쿠샨 제국 시대에 번성했으며, 쿠샨 제국의 수도는 페샤와르 (''푸루샤푸라'')였다.

3. 역사

카이베르파크툰크와주의 역사는 깊고 다채롭다. 인더스 문명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문명과 제국, 민족들이 이 지역을 거쳐 가거나 지배했다.

### 이슬람 세력의 등장

힌두 샤히는 870년까지 간다라를 통치했으며, 간다라 오디야나 (현대 스와트)의 사람들인 우디/오디 부족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67][68] 첫 번째 왕 칼라르는 수도를 훈드의 현대 마을인 우다반다푸라로 옮겼다.[70][71][72][73] 전성기에는 왕국이 자야팔라 치하의 카불 계곡, 간다라, 서부 펀자브에 걸쳐 있었다.[74] 자야팔라는 가즈나비 왕조의 통합에서 위험을 감지하고 세부크티긴과 그의 아들 마흐무드의 통치 기간 동안 그들의 수도 가즈니를 침공했는데, 이는 무슬림 가즈나비와 힌두 샤히 간의 투쟁을 시작했다.[75] 그러나 세부크 티긴은 그를 격파했고, 그는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자야팔라는 지불을 이행하지 못하고 다시 전장으로 나섰으나, 카불 계곡과 인더스 강 사이의 전체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76]

1001년, 술탄 마흐무드가 권력을 잡고 힌두쿠시 북쪽의 카라한 왕조에 몰두한 직후, 자이팔은 다시 한번 가즈니를 공격했으나, 현재 페샤와르 근처에서 강력한 가즈나비 군대에 의해 또 다른 패배를 겪었다. 페샤와르 전투 이후, 그는 백성들이 샤히 왕조에 재앙과 굴욕을 가져온 것을 후회하여 죽었다.[75][76]

자야팔라의 뒤를 그의 아들 아난다팔라가 이었고,[75] 그는 다른 후대 샤히야 왕조와 함께 진격하는 가즈나비에 맞서 여러 차례 실패한 작전에 참여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힌두 통치자들은 카슈미르 시왈리크 언덕으로 망명했다.[76] 페샤와르 전투 이후, 가즈니의 마흐무드는 파크툰크와주의 남부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다. 그는 또한 1024년과 1025년에 파슈툰족을 침략했다.[66] 그의 후손들은 1179년 구르 왕조의 무함마드가 페샤와르를 점령하고 확장되는 구르 제국의 일부로 만들 때까지 통치했다.

고리 왕조의 침략 이후, 델리 술탄국은 노예 왕조(1206–1290), 할지 왕조 (1290–1320), 투글루크 왕조 (1320–1414), 사이드 왕조 (1414–1451), 로디 왕조 (1451–1526) 순으로 통치했다.[77]

한편, 파슈툰족이 정치적 요인으로 등장했다. 14세기 말에 그들은 코하트 남쪽의 현재 인구 통계에 확고히 자리 잡았으며, 1451년 바흘롤 로디가 델리 왕좌에 오른 것은 그들에게 북인도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부여했다. 카불잘랄라바드 계곡에서 온 유수프자이 부족은 15세기부터 페샤와르 계곡으로 이주하기 시작했으며,[80] 비타니 연합의 스와티족과 인더스강 건너 하자라 지역의 딜라자크 파슈툰 부족을 몰아냈다.[80]

### 무굴 제국과 두라니 제국

무굴 제국의 창시자인 바부르는 1505년 카이베르 고개를 통해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지역을 침략하여 이 지역에 대한 무굴의 종주권을 부분적으로 확립했다. 무굴 제국은 이 지역을 제국의 방어에 취약한 지점으로 여겼으며,[78] 우즈베크 ''샤이바니 왕조''의 위협에 맞서 페샤와르와 카불을 지키기로 결심했다.[78]

바부르는 카불로 후퇴해야 했지만, 1526년 7월 다시 돌아와 로디 왕조를 격파하고 다울라트 칸 로디로부터 페샤와르를 점령했다.[79] 그러나 이 지역은 무굴 제국에 완전히 복속된 것으로 간주된 적은 없었다.[80]

바부르의 아들 후마윤 통치 시기에는 파슈툰족 황제 셰르 샤 수리가 부상하면서 무굴의 직접 통치가 잠시 위협받았다. 셰르 샤 수리는 아프가니스탄의 카불과 방글라데시치타공을 연결하는 그랜드 트렁크 로드 건설을 시작했다. 이후 지역 통치자들은 다시 무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유수프자이 부족은 1667년 유수프자이 반란을 일으켜 무굴에 대항하여 봉기했고,[78] 페샤와르와 아토크에서 무굴 군대와 격전을 벌였다.[78] 아프리디 부족은 1670년대 아프리디 반란을 일으켜 아우랑제브의 통치에 저항했다.[78] 아프리디족은 1672년 카이베르 고개에서 무굴 군대를 학살하고 수익성 있는 무역로를 차단했다.[81] 1673년 겨울, 아우랑제브 황제 자신이 이끄는 무굴군이 이 지역 전체를 다시 장악했고,[78] 반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부족 지도자들에게 다양한 포상을 약속했다.[78]

"파슈토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코라 카타크 출신의 전사 시인 쿠샬 칸 카타크는 무굴에 대항한 반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반란을 일으킨 파슈툰 전사들을 찬양하는 시로 유명해졌다.[78]

1738년 11월 18일, 페샤와르는 나데르 샤의 무굴 제국 침공 동안 아프샤르 왕조 군대에 의해 무굴 총독 나와브 나시르 칸으로부터 점령되었다.[82][83]

페샤와르 발라 히사르 요새. 이 요새는 두라니 제국의 왕실 거처로 사용되었다.


이 지역은 ''로야 지르가'' 이후 두라니 제국의 창시자인 아흐마드 샤 두라니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85] 1749년, 무굴 제국의 통치자는 신드 주, 펀자브 지역, 인더스강 너머 지역을 아흐마드 샤에게 할양하도록 설득당했는데, 이는 두라니의 공격으로부터 수도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86] 아흐마드 샤는 무굴 제국의 잔존 세력을 침공하여 카슈미르와 펀자브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 1757년, 그는 델리를 점령하고 마투라를 약탈했지만,[87] 무굴 왕조가 펀자브, 신드, 카슈미르에 대한 아흐마드 샤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한, 명목상 도시를 통치하도록 허용했다. 그는 둘째 아들 티무르 샤에게 자신의 이익을 지키도록 남겨둔 채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갔다.

1758년 페샤와르 전투 이후 힌두교도 마라타 연맹의 짧은 침략으로 두라니의 통치가 중단되었는데, 마라타는 11개월 동안 이 지역을 통치하다가 1759년 초 두라니의 통치가 재건되었다.[88]

티무르 샤의 통치하에 카불을 여름 수도로, 페샤와르를 겨울 수도로 사용하는 무굴의 관행이 부활했다.[80][89] 페샤와르의 발라 히사르 요새는 두라니 왕들의 거처 역할을 했다.

마흐무드 샤 두라니가 왕이 되었고, 이복 형제인 샤 슈자 두라니로부터 페샤와르를 빼앗으려 했다.[90] 샤 슈자는 1803년 스스로 왕으로 선포되었고, 마흐무드 샤가 발라 히사르 요새에 갇혔다가 탈출하기 전까지 페샤와르를 재점령했다.[90] 1809년, 영국은 페샤와르에 있는 샤 슈자의 궁정에 사절을 보냈고, 이는 영국과 아프간 간의 첫 외교 회동을 의미했다.[90] 마흐무드 샤는 ''바라크자이'' 파슈툰족과 동맹을 맺고 1809년 군대를 모아 이복 형제인 샤 슈자로부터 페샤와르를 점령하여 1818년까지 통치했다.[90]

### 시크 제국과 영국 식민지 시대

란지트 싱은 1818년 페샤와르를 침공하여 두라니 제국으로부터 빼앗았다. 라호르에 기반을 둔 시크 제국은 페샤와르 지역에 즉시 직접적인 통제권을 확보하지 못하고, 란지트 싱이 이 지역의 통치자로 지명한 카탁의 제한다드 칸에게 명목상의 조공을 지불했다.

란지트 싱이 이 지역을 떠난 후, 카탁의 통치는 약화되었고 야르 무하마드 칸이 권력을 잡았다. 1823년, 란지트 싱은 페샤와르를 재탈환하기 위해 돌아왔고, 노셰라에서 아짐 칸의 군대와 마주했다. 노셰라 전투에서 시크교도의 승리 이후, 란지트 싱은 페샤와르를 재점령했다. 란지트 싱은 카탁의 제한다드 칸을 다시 임명하는 대신, 야르 무하마드 칸을 다시 이 지역을 통치하도록 선택했다.

하리 싱 날와의 군대가 진격하면서 시크 제국은 카이베르 파크툰크와 지역의 하부 지역을 합병했다. 1835년, 도스트 무하마드 칸이 페샤와르를 재점령하려 했지만, 그의 군대가 달 칼사와 전투를 벌이기를 거부하면서 실패했다. 도스트 무하마드 칸의 아들인 무하마드 아크바르 칸은 1837년 자므루드 전투에서 시크교도 군대와 교전했으며, 여기서 저명한 시크 지휘관 하리 싱이 사망했다.

시크교도 통치 기간 동안, 파올로 아비타빌레라는 이탈리아인이 1838년 페샤와르의 행정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그곳에서 공포 통치를 펼친 것으로 기억된다. 1630년 보석상 시장에 건설된 도시의 유명한 마하바트 칸 사원은 시크교도에 의해 심하게 훼손되었으며, 시크교도는 페샤와르 점령 기간 동안 발라 히사르 요새를 재건하기도 했다.

카이베르 고개의 식민지 시대 석판화, 1848년 제임스 래트레이 제작.


영국 동인도 회사는 1849년 제2차 앵글로-시크 전쟁에서 시크교도를 격파하고 이 지역의 작은 부분을 펀자브 주에 편입시켰다. 페샤와르는 1857년 세포이 항쟁 당시 영국에 대한 소규모 반란의 장소였지만, 이 지역의 현지 파슈툰 부족들은 일반적으로 시크교도를 혐오했기 때문에 영국을 중립적으로 지원했다.[91] 이는 영국에 반란을 일으킨 영국령 인도의 다른 지역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의 일부에 대한 영국의 통제는 와지리스타의 와지르 부족민들과 파키스탄이 건국될 때까지 모든 외세 점령에 저항한 다른 파슈툰 부족들에 의해 끊임없이 도전받았다. 19세기 말까지 카이베르 파크툰크와 지역의 공식적인 경계선은 아직 정의되지 않았으며, 이 지역은 여전히 아프가니스탄 왕국이 주장하고 있었다. 1893년에야 영국은 제2차 앵글로-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아프간 왕 압두르 라흐만 칸이 합의한 조약에 따라 아프가니스탄과의 경계선을 확정했다.[92] 이 지역 경계 내의 여러 군주국은 영국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한다는 조건하에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의 전시 노력으로 영국령 인도에서 유럽 전선으로 자원을 재할당해야 했고, 일부 아프가니스탄 부족민들은 1917년에 듀랜드 라인을 넘어 영국의 전초 기지를 공격하여 영토를 획득하고 국경의 정당성을 약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듀랜드 라인의 유효성은 제3차 앵글로-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종식시킨 라왈핀디 조약 서명과 함께 1919년 아프간 정부에 의해 재확인되었다.[93] 이 전쟁에서 와지리 부족민들은 영국의 지배에 저항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왕 아마눌라의 군대와 동맹을 맺었다. 와지르족과 다른 부족들은 국경의 불안정을 틈타 아프가니스탄이 영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한 후에도 1920년까지 영국 점령에 저항했다.

듀랜드 라인을 따라 부족민을 진압하려는 영국의 작전과 세 차례의 앵글로-아프간 전쟁으로 인해 아프가니스탄과 카이베르 파크툰크와의 인구 밀집 지역 간의 이동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두 지역은 1878년 제2차 앵글로-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시작된 이후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때까지 서로 대체로 고립되었으며, 아프간 국경에서의 분쟁은 대부분 사라졌다. 동시에 영국은 이 지역에서 대규모 공공 사업을 계속했고, 그레이트 인디언 반도 철도를 이 지역까지 연장하여 현대의 카이베르 파크툰크와 지역을 동쪽의 인도 평야와 연결했다. 아토크 다리, 이슬라미아 칼리지 대학교, 카이베르 철도, 페샤와르, 코하트, 마르단, 노셰라에 주둔지를 설립하는 등 다른 프로젝트들은 이 지역에서 영국의 지배를 더욱 공고히 했다.

1901년 영국은 펀자브 주의 북서부 지역을 분할하여 2010년에 "카이베르 파크툰크와"로 개명된 북서 변경 지방(NWFP)을 만들었다.[94] 이 기간 동안 북서 변경 지방은 "힌두교도에 대한 반복적인 만행의 장소"였다.[95] 독립 기간 동안에는 인도 국민 회의가 주도하는 정부가 이 지방에 있었으며, 바차 칸을 포함한 세속적인 파슈툰 지도자들이 이끌었다. 이들은 파키스탄 대신 인도에 합류하는 것을 선호했다. 세속적인 파슈툰 지도부는 또한 인도로 합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파키스탄보다는 독립적인 파슈툰 민족 국가의 대의를 옹호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96]

1947년 6월, 미르잘리 칸, 바차 칸 및 기타 쿠다이 키드마트가르는 반누 결의안을 선포하여 파슈툰족에게 파키스탄이라는 새로운 국가에 합류하는 대신 영국령 인도의 모든 파슈툰 다수 지역으로 구성된 독립적인 파슈투니스탄 국가를 가질 수 있는 선택권을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 라지는 이 결의안의 요구를 거부했는데, 이는 이 지역에서 철수하려면 영국의 통제하에 있는 지역이 인도 또는 파키스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며 제3의 선택지는 없었기 때문이다.[97][98] 1947년까지 파슈툰 민족주의자들은 통합 인도를 옹호했으며, 아프가니스탄과의 연합을 옹호하는 두드러진 목소리는 없었다.[99][100]

바차 칸의 세속적인 입장은 친국민 회의 (및 친인도 통일)인 자미아트 우레마 힌드 (JUH)의 울라마와 바차 칸의 쿠다이 키드마트가르 사이에 균열을 만들었다.

바차 칸과 마하트마 간디


이 지역에는 다른 긴장도 있었는데, 특히 파슈툰 부족민들이 제국 정부에 대항하는 동요와 관련된 긴장이 있었다. 예를 들어, 1936년 영국령 인도 법원은 소녀의 가족이 유괴 및 강제 개종 사건을 제기한 후 반누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힌두교 소녀의 결혼에 반대하는 판결을 내렸다.[101] 이 판결은 소녀가 미성년자였고, 성년이 된 후에 개종과 결혼에 대한 결정을 내리도록 요청받았으며, 그때까지 제3자와 함께 살도록 요청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했다.[101] 소녀의 가족이 소송을 제기한 후 법원은 가족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고, 그 후 반누 여단에 대한 공격을 주도한 현지 무슬림들을 분노하게 했다.[101]

이러한 논란은 이 지방의 무슬림 인구 사이에 반힌두교 감정을 불러일으켰다.[102] 1947년까지 이 지방의 대부분의 울라마는 무슬림 연맹의 파키스탄 구상을 지지하기 시작했다.[103]

1947년 인도 분할 직전, 영국은 NWFP에서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유권자들이 인도 또는 파키스탄에 합류할지를 선택하도록 했다. 투표는 1947년 7월 6일에 시작되었고, 국민투표 결과는 1947년 7월 20일에 공개되었다. 공식 결과에 따르면, 572,798명의 등록 유권자가 있었고, 그 중 289,244명(99.02%)이 파키스탄 지지표를 던졌고, 2,874명(0.98%)이 인도를 지지했다. 무슬림 연맹은 전체 유권자의 절반 이상이 파키스탄과의 합병을 지지했기 때문에 결과를 유효하다고 선언했다.[104]

당시 주 총리 닥터 칸 사히브는 그의 형제 바차 칸 및 쿠다이 키드마트가르와 함께 국민투표를 보이콧했는데, 이는 NWFP가 독립하거나 아프가니스탄에 합류하는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105][106] 그들의 보이콧 호소는 효과가 있었는데, 추정에 따르면 국민투표의 총 투표율은 1946년 선거의 총 투표율보다 15% 낮았지만,[107] 전체 유권자의 절반 이상이 파키스탄과의 합병을 지지했다.[104]

바차 칸은 1947년 파키스탄이라는 새로운 국가에 충성을 맹세했고, 그 후 파키스탄 내에서 NWFP의 자율성을 높이는 것을 지지하기 위해 독립 파슈투니스탄과 통합 인도의 목표를 포기했다.[91] 그는 강력한 중앙 집권 통치에 반대하여 여러 차례 체포되었다.[108] 그는 나중에 "파슈투니스탄은 결코 현실이 아니었다"라고 주장했다. 파슈투니스탄이라는 아이디어는 파슈툰족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았고 그들에게 고통만 초래했다. 그는 또한 "아프가니스탄의 역대 정부는 그들의 정치적 목표를 위해 그 아이디어를 악용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109]

### 파키스탄 독립 이후

1947년 파키스탄 건국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유엔 회원국 중 카불이 파키스탄 측의 듀랜드 라인에 있는 파슈툰 영토에 대한 주장을 제기했기 때문에 파키스탄의 유엔 가입에 반대표를 던진 유일한 국가였다.[111] 1949년 아프가니스탄의 로야 지르가는 듀랜드 라인의 무효를 선언했다. 이는 파키스탄과의 국경 긴장으로 이어졌다.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이 지역에 관한 영국의 조약을 파키스탄이 승계하는 것을 주기적으로 거부했다.[111]

1950년대 동안 아프가니스탄은 분리주의 운동인 파슈투니스탄 운동을 지원했으며, 이 운동은 북서 변경주 부족들 사이에서 실질적인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아프가니스탄이 듀랜드 라인을 인정하지 않고, 이후 파슈투니스탄 운동을 지원한 것이 파키스탄 독립 이후 두 국가 간의 긴장의 주요 원인으로 언급되었다.[115]

아프가니스탄 전쟁 (1978년-1989년) 이후, 카이베르파크툰크와는 테러와의 전쟁의 주요 초점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2010년, 이 주의 이름은 "카이베르파크툰크와"로 변경되었다. 이 이름 변경으로 인해 하자라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항의가 발생했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주를 요구하기 시작했다.[117]

1947년 국민투표를 통해 주민들은 인도 또는 파키스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바차 칸과 쿠다이 키드마트가르는 국민투표를 보이콧했는데, 이는 북서 변경주(NWFP)가 독립하거나 아프가니스탄에 합류하는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105][106]

바차 칸은 1947년 파키스탄에 충성을 맹세했고, 그 후 파키스탄 내에서 북서 변경주(NWFP)의 자율성을 높이는 것을 지지했다.[91] 그는 강력한 중앙 집권 통치에 반대하여 여러 차례 체포되었다.[108] 그는 나중에 "파슈투니스탄은 결코 현실이 아니었다"라고 주장했다.[109]

아프가니스탄 전쟁 (1978년-1989년)에서는, Восстание в лагере Бадабер|바다베르 봉기ru가 일어났다.

와지리스탄 분쟁이 시작되었고, 2007년에는 First Battle of Swat|제1차 스와트 전투영어(10월 25일 - 12월 8일), 2009년에는 Second Battle of Swat|제2차 스와트 전투영어(5월 16일 - 7월 15일) 등이 일어났다.

2010년4월 15일에, 북서 변경주에서 카이베르 파크툰크와 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18년5월 31일, 연방 직할 부족 지역(FATA)과 Provincially Administered Tribal Areas|주 직할 부족 지역영어(PATA)을 편입했다.[197][198]

2024년11월, 수니파 주민이 다수를 차지하는 크람 지역에서 시아파 주민과의 종파 대립이 심화되었다. 며칠 동안 총격전이 벌어져 82명이 사망하고 156명이 부상당했다. 같은 달 24일, 정부 당국이 개입하여 7일간의 휴전을 선언했다.[199]

3. 1. 고대

인더스 문명 시대(기원전 3300년~기원전 1700년)에 힌두쿠시 산맥을 통과하는 카이베르 고개는 상인들의 무역로로 이용되었다.[54] 기원전 1500년부터 인도-이란인들이 카이베르 고개를 통해 중앙아시아에서 이 지역으로 들어왔다.[55][91]

오늘날 카이베르파크툰크와주 지역에 기반을 둔 간다라 지역은 리그베다(기원전 1500년~1200년경)[56][48]와 조로아스터교의 아베스타에 ''Vaēkərəta''로 언급되며, 아후라 마즈다가 창조한 지구상에서 여섯 번째로 아름다운 곳으로 묘사된다. 간다라는 베다 시대의 16개 마하자나파다 중 하나였으며,[41][57][58] 베다와 후기 힌두교의 중심지였다. 간다라는 리그 베다, 라마야나, 마하바라타를 포함한 베다 서사시에 자주 언급되었으며, 간다리의 고향이었다.[59]

카이베르파크툰크와주에서 발견된 시바파르바티의 고대 조각상


기원전 327년 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니케아로 진격했고, 탁실라의 왕 옴피스와 다른 추장들이 그에게 합류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군대 일부를 카불강 계곡으로 보내고, 자신은 경보병과 함께 바자우르와 스와트로 진격했다.[60] 크라테로스는 아리가이온을 요새화하고 재건하도록 명령받았는데, 그곳 주민들은 그곳을 불태우고 버렸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스파시안족을 격파하고 4만 명의 포로와 23만 마리의 소를 빼앗은 후, 고라이오스(판코라)를 건너 아사케노이의 영토로 진입하여 마사가를 포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오라와 바지라는 곧 함락되었다. 바지라 사람들은 아오르노스 바위로 도망쳤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엠볼리마(아마도 암)를 기지로 삼아 그곳에서 바위를 공격했고, 격렬한 저항 끝에 점령했다. 한편, 페우케라오티스(페샤와르에서 북서쪽으로 약 27.36km 떨어진 하슈트나가르)가 항복했고, 마케도니아인 니카노르가 인더스강 서쪽 지역의 사트라프(총독)로 임명되었다.[61]

마우리아 제국찬드라굽타 마우리아난다 제국을 몰아내면서 시작되었다. 얼마 후 알렉산드로스의 장군 셀레우코스는 카이베르 고개를 통해 다시 한번 아대륙을 침략하려 했다. 셀레우코스는 패배했고, 아리아, 아라코시아, 간다라, 게드로시아 지역은 결혼 동맹과 500마리의 코끼리를 대가로 마우리아 제국에 양도되었다. 그리스인들의 패배로 이 땅은 다시 힌두교 통치하에 들어갔다.[62] 찬드라굽타의 아들 빈두사라는 제국을 더욱 확장했다. 아쇼카는 찬드라굽타의 손자였으며, 불교로 개종하여 간다라와 현대의 하자라인 파클리에서 불교를 공식 국교로 지정했다. 이는 샤흐바즈가르히와 만세라의 암석 비문으로 증명된다.[61]

아쇼카의 죽음 이후 마우리아 제국은 분열되었다.

인도-그리스메난드로스 1세(재위: 기원전 155년~기원전 130년)는 간다라에서 그리스-박트리아를 몰아내고 힌두쿠시 너머까지 진출했으며, 승리 직후 왕이 되었다. 그의 제국은 마지막 독립 그리스 왕 스트라토 2세가 서기 10년경 사라질 때까지 분열된 채로 존속했다. 기원전 125년경, 그리스-박트리아 왕 헬리오클레스(유크라티데스의 아들)는 월지의 박트리아 침공을 피해 간다라로 이주하여 인도-그리스를 젤룸강 동쪽으로 밀어냈다. 마지막으로 알려진 인도-그리스 통치자는 간다라의 바자우르 지역 출신인 테오다마스로, 서기 1세기의 인장에 언급되어 있으며, 카로슈티 비문 "수 테오다마사"("수"는 쿠샨 제국의 왕실 칭호 "쇼"("" 또는 "왕")를 그리스어로 음역한 것이다)가 새겨져 있다. 특히 간다라 지역에서 헬레니즘과 남아시아의 신화, 예술, 종교적 요소가 융합된 것은 이 시기에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지역 그리스 통치자들은 변방에서 여전히 미약하고 불안정한 권력을 행사했지만, 그리스-인도 통치자의 마지막 잔재는 옛 중국인들에게 월지(Yeuh-Chi)로 알려진 사람들에 의해 멸망했다.

부네르 부조 중 하나로 스키타이 병사들이 춤추는 모습. 클리블랜드 미술관.


인도-스키타이인은 기원전 2세기 중반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 중앙아시아에서 남아시아로 이주한 사카족(스키타이인)의 후손이다. 그들은 인도-그리스인을 몰아내고 간다라에서 마투라까지 이르는 왕국을 통치했다. 최초의 인도-스키타이 왕 마우에스는 인도-그리스 영토를 정복하여 사카족의 패권을 확립했다.[64] 사카 통치자들의 세력은 4세기에 굽타 제국찬드라굽타 2세에게 패배한 이후 쇠퇴했다.[65]

인도-파르티아인들이 건설한 고대 불교 수도원 탁트이바히 (유네스코 세계유산)
인도-파르티아 왕국은 초대 통치자 곤도파르의 이름을 딴 곤도파르 왕조가 통치했다. 그들의 역사 대부분 동안 곤도파르 왕조의 주요 왕들은 탁실라 (현재 파키스탄 펀자브주)를 거주지로 삼았지만, 존재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수도는 카불페샤와르 사이를 오갔다. 이들 왕들은 전통적으로 인도-파르티아인으로 불리는데, 그들의 주화가 종종 아르사케스 왕조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지만, 그들은 아마도 파르티아 동쪽에 살았던 더 넓은 이란계 부족에 속했을 것이며, "영광의 소유자"를 의미하는 ''곤도파르''라는 칭호를 사용한 모든 왕들이 실제로 관련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페샤와르의 카니슈카 불탑은 한때 신성한 불교 유물을 카니슈카 사리함에 보관했다.


월지 유목민들은 사카족을 중앙아시아 고지대에서 몰아냈고, 그들 스스로는 유목 민족인 흉노에 의해 남쪽으로 밀려났다. 쿠샨으로 알려진 한 집단이 선두를 차지했고, 그 수장인 카드피세스 1세는 카불 계곡까지 남쪽으로 뻗어 있는 광대한 영토를 점령했다. 그의 아들 카드피세스 2세는 북서 인도를 정복했으며, 그는 자신의 장군들을 통해 통치했다. 그의 직계 후계자들은 전설적인 힌두 왕들인 카니슈카, 후비슈카, 바수슈카 또는 바수데바였는데, 이들 중 첫 번째 왕은 바라나시만큼 동쪽으로, 말와만큼 남쪽으로 뻗어 있는 영토를 다스렸으며, 박트리아와 카불 계곡도 포함했다.[66] 그들의 연대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지만, 그들이 기원 초기에 통치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시대에 간다라와 우디아나에서 발견된 훌륭한 조각상과 부조가 기인할 수 있다. 후비슈카의 후계자인 바수슈카 치하에서 쿠샨 왕국의 영토는 축소되었다.[66]

3. 2. 이슬람 세력의 등장

힌두 샤히의 "전쟁 군주"인 스팔라파티의 동전에 있는 기마병. 머리 장식은 터번으로 해석되었다.


투르크 샤히는 870년까지 간다라를 통치했으며, 이때 힌두 샤히에 의해 전복되었다. 힌두 샤히는 간다라 오디야나 (현대 스와트)의 사람들인 우디/오디 부족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지며,[67][68] 브라만 또는 크샤트리야라고도 불린다.[69]

첫 번째 왕 칼라르는 수도를 훈드의 현대 마을인 우다반다푸라로 옮겼다.[70][71][72][73] 전성기에 왕국은 자야팔라 치하의 카불 계곡, 간다라, 서부 펀자브에 걸쳐 있었다.[74] 자야팔라는 가즈나비 왕조의 통합에서 위험을 감지하고 세부크티긴과 그의 아들 마흐무드의 통치 기간 동안 그들의 수도 가즈니를 침공했는데, 이는 무슬림 가즈나비와 힌두 샤히 간의 투쟁을 시작했다.[75] 그러나 세부크 티긴은 그를 격파했고, 그는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75] 자야팔라는 지불을 이행하지 못하고 다시 전장으로 나섰으나,[75] 카불 계곡과 인더스 강 사이의 전체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76]

1001년, 술탄 마흐무드가 권력을 잡고 힌두쿠시 북쪽의 카라한 왕조에 몰두한 직후, 자이팔은 다시 한번 가즈니를 공격했으나, 현재 페샤와르 근처에서 강력한 가즈나비 군대에 의해 또 다른 패배를 겪었다. 페샤와르 전투 이후, 그는 백성들이 샤히 왕조에 재앙과 굴욕을 가져온 것을 후회하여 죽었다.[75][76]

자야팔라의 뒤를 그의 아들 아난다팔라가 이었고,[75] 그는 다른 후대 샤히야 왕조와 함께 진격하는 가즈나비에 맞서 여러 차례 실패한 작전에 참여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힌두 통치자들은 카슈미르 시왈리크 언덕으로 망명했다.[76] 페샤와르 전투 이후, 가즈니의 마흐무드는 파크툰크와주의 남부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다. 그는 또한 1024년과 1025년에 파슈툰족을 침략했다.[66] 그의 후손들은 1179년 구르 왕조의 무함마드가 페샤와르를 점령하고 확장되는 구르 제국의 일부로 만들 때까지 통치했다.

고리 왕조의 침략 이후, 델리 술탄국은 노예 왕조(1206–1290), 할지 왕조 (1290–1320), 투글루크 왕조 (1320–1414), 사이드 왕조 (1414–1451), 로디 왕조 (1451–1526) 순으로 통치했다.[77]

한편, 파슈툰족이 정치적 요인으로 등장했다. 14세기 말에 그들은 코하트 남쪽의 현재 인구 통계에 확고히 자리 잡았으며, 1451년 바흘롤 로디가 델리 왕좌에 오른 것은 그들에게 북인도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부여했다. 카불잘랄라바드 계곡에서 온 유수프자이 부족은 15세기부터 페샤와르 계곡으로 이주하기 시작했으며,[80] 비타니 연합의 스와티족과 인더스강 건너 하자라 지역의 딜라자크 파슈툰 부족을 몰아냈다.[80]

3. 3. 무굴 제국과 두라니 제국

무굴 제국의 창시자인 바부르는 1505년 카이베르 고개를 통해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지역을 침략하여 이 지역에 대한 무굴의 종주권을 부분적으로 확립했다. 무굴 제국은 이 지역을 제국의 방어에 취약한 지점으로 여겼으며,[78] 우즈베크 ''샤이바니 왕조''의 위협에 맞서 페샤와르와 카불을 지키기로 결심했다.[78]

바부르는 카불로 후퇴해야 했지만, 1526년 7월 다시 돌아와 로디 왕조를 격파하고 다울라트 칸 로디로부터 페샤와르를 점령했다.[79] 그러나 이 지역은 무굴 제국에 완전히 복속된 것으로 간주된 적은 없었다.[80]

바부르의 아들 후마윤 통치 시기에는 파슈툰족 황제 셰르 샤 수리가 부상하면서 무굴의 직접 통치가 잠시 위협받았다. 셰르 샤 수리는 아프가니스탄의 카불과 방글라데시치타공을 연결하는 그랜드 트렁크 로드 건설을 시작했다. 이후 지역 통치자들은 다시 무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유수프자이 부족은 1667년 유수프자이 반란을 일으켜 무굴에 대항하여 봉기했고,[78] 페샤와르와 아토크에서 무굴 군대와 격전을 벌였다.[78] 아프리디 부족은 1670년대 아프리디 반란을 일으켜 아우랑제브의 통치에 저항했다.[78] 아프리디족은 1672년 카이베르 고개에서 무굴 군대를 학살하고 수익성 있는 무역로를 차단했다.[81] 1673년 겨울, 아우랑제브 황제 자신이 이끄는 무굴군이 이 지역 전체를 다시 장악했고,[78] 반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부족 지도자들에게 다양한 포상을 약속했다.[78]

"파슈토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코라 카타크 출신의 전사 시인 쿠샬 칸 카타크는 무굴에 대항한 반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반란을 일으킨 파슈툰 전사들을 찬양하는 시로 유명해졌다.[78]

1738년 11월 18일, 페샤와르는 나데르 샤의 무굴 제국 침공 동안 아프샤르 왕조 군대에 의해 무굴 총독 나와브 나시르 칸으로부터 점령되었다.[82][83]

이 지역은 ''로야 지르가'' 이후 두라니 제국의 창시자인 아흐마드 샤 두라니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85] 1749년, 무굴 제국의 통치자는 신드 주, 펀자브 지역, 인더스강 너머 지역을 아흐마드 샤에게 할양하도록 설득당했는데, 이는 두라니의 공격으로부터 수도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86] 아흐마드 샤는 무굴 제국의 잔존 세력을 침공하여 카슈미르와 펀자브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 1757년, 그는 델리를 점령하고 마투라를 약탈했지만,[87] 무굴 왕조가 펀자브, 신드, 카슈미르에 대한 아흐마드 샤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한, 명목상 도시를 통치하도록 허용했다. 그는 둘째 아들 티무르 샤에게 자신의 이익을 지키도록 남겨둔 채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갔다.

1758년 페샤와르 전투 이후 힌두교도 마라타 연맹의 짧은 침략으로 두라니의 통치가 중단되었는데, 마라타는 11개월 동안 이 지역을 통치하다가 1759년 초 두라니의 통치가 재건되었다.[88]

티무르 샤의 통치하에 카불을 여름 수도로, 페샤와르를 겨울 수도로 사용하는 무굴의 관행이 부활했다.[80][89] 페샤와르의 발라 히사르 요새는 두라니 왕들의 거처 역할을 했다.

마흐무드 샤 두라니가 왕이 되었고, 이복 형제인 샤 슈자 두라니로부터 페샤와르를 빼앗으려 했다.[90] 샤 슈자는 1803년 스스로 왕으로 선포되었고, 마흐무드 샤가 발라 히사르 요새에 갇혔다가 탈출하기 전까지 페샤와르를 재점령했다.[90] 1809년, 영국은 페샤와르에 있는 샤 슈자의 궁정에 사절을 보냈고, 이는 영국과 아프간 간의 첫 외교 회동을 의미했다.[90] 마흐무드 샤는 ''바라크자이'' 파슈툰족과 동맹을 맺고 1809년 군대를 모아 이복 형제인 샤 슈자로부터 페샤와르를 점령하여 1818년까지 통치했다.[90]

3. 4. 시크 제국과 영국 식민지 시대

란지트 싱은 1818년 페샤와르를 침공하여 두라니 제국으로부터 빼앗았다. 라호르에 기반을 둔 시크 제국은 페샤와르 지역에 즉시 직접적인 통제권을 확보하지 못하고, 란지트 싱이 이 지역의 통치자로 지명한 카탁의 제한다드 칸에게 명목상의 조공을 지불했다.

란지트 싱이 이 지역을 떠난 후, 카탁의 통치는 약화되었고 야르 무하마드 칸이 권력을 잡았다. 1823년, 란지트 싱은 페샤와르를 재탈환하기 위해 돌아왔고, 노셰라에서 아짐 칸의 군대와 마주했다. 노셰라 전투에서 시크교도의 승리 이후, 란지트 싱은 페샤와르를 재점령했다. 란지트 싱은 카탁의 제한다드 칸을 다시 임명하는 대신, 야르 무하마드 칸을 다시 이 지역을 통치하도록 선택했다.

하리 싱 날와의 군대가 진격하면서 시크 제국은 카이베르 파크툰크와 지역의 하부 지역을 합병했다. 1835년, 도스트 무하마드 칸이 페샤와르를 재점령하려 했지만, 그의 군대가 달 칼사와 전투를 벌이기를 거부하면서 실패했다. 도스트 무하마드 칸의 아들인 무하마드 아크바르 칸은 1837년 자므루드 전투에서 시크교도 군대와 교전했으며, 여기서 저명한 시크 지휘관 하리 싱이 사망했다.

시크교도 통치 기간 동안, 파올로 아비타빌레라는 이탈리아인이 1838년 페샤와르의 행정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그곳에서 공포 통치를 펼친 것으로 기억된다. 1630년 보석상 시장에 건설된 도시의 유명한 마하바트 칸 사원은 시크교도에 의해 심하게 훼손되었으며, 시크교도는 페샤와르 점령 기간 동안 발라 히사르 요새를 재건하기도 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1849년 제2차 앵글로-시크 전쟁에서 시크교도를 격파하고 이 지역의 작은 부분을 펀자브 주에 편입시켰다. 페샤와르는 1857년 세포이 항쟁 당시 영국에 대한 소규모 반란의 장소였지만, 이 지역의 현지 파슈툰 부족들은 일반적으로 시크교도를 혐오했기 때문에 영국을 중립적으로 지원했다.[91] 이는 영국에 반란을 일으킨 영국령 인도의 다른 지역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의 일부에 대한 영국의 통제는 와지리스타의 와지르 부족민들과 파키스탄이 건국될 때까지 모든 외세 점령에 저항한 다른 파슈툰 부족들에 의해 끊임없이 도전받았다. 19세기 말까지 카이베르 파크툰크와 지역의 공식적인 경계선은 아직 정의되지 않았으며, 이 지역은 여전히 아프가니스탄 왕국이 주장하고 있었다. 1893년에야 영국은 제2차 앵글로-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아프간 왕 압두르 라흐만 칸이 합의한 조약에 따라 아프가니스탄과의 경계선을 확정했다.[92] 이 지역 경계 내의 여러 군주국은 영국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한다는 조건하에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의 전시 노력으로 영국령 인도에서 유럽 전선으로 자원을 재할당해야 했고, 일부 아프가니스탄 부족민들은 1917년에 듀랜드 라인을 넘어 영국의 전초 기지를 공격하여 영토를 획득하고 국경의 정당성을 약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듀랜드 라인의 유효성은 제3차 앵글로-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종식시킨 라왈핀디 조약 서명과 함께 1919년 아프간 정부에 의해 재확인되었다.[93] 이 전쟁에서 와지리 부족민들은 영국의 지배에 저항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왕 아마눌라의 군대와 동맹을 맺었다. 와지르족과 다른 부족들은 국경의 불안정을 틈타 아프가니스탄이 영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한 후에도 1920년까지 영국 점령에 저항했다.

듀랜드 라인을 따라 부족민을 진압하려는 영국의 작전과 세 차례의 앵글로-아프간 전쟁으로 인해 아프가니스탄과 카이베르 파크툰크와의 인구 밀집 지역 간의 이동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두 지역은 1878년 제2차 앵글로-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시작된 이후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때까지 서로 대체로 고립되었으며, 아프간 국경에서의 분쟁은 대부분 사라졌다. 동시에 영국은 이 지역에서 대규모 공공 사업을 계속했고, 그레이트 인디언 반도 철도를 이 지역까지 연장하여 현대의 카이베르 파크툰크와 지역을 동쪽의 인도 평야와 연결했다. 아토크 다리, 이슬라미아 칼리지 대학교, 카이베르 철도, 페샤와르, 코하트, 마르단, 노셰라에 주둔지를 설립하는 등 다른 프로젝트들은 이 지역에서 영국의 지배를 더욱 공고히 했다.

1901년 영국은 펀자브 주의 북서부 지역을 분할하여 2010년에 "카이베르 파크툰크와"로 개명된 북서 변경 지방(NWFP)을 만들었다.[94] 이 기간 동안 북서 변경 지방은 "힌두교도에 대한 반복적인 만행의 장소"였다.[95] 독립 기간 동안에는 인도 국민 회의가 주도하는 정부가 이 지방에 있었으며, 바차 칸을 포함한 세속적인 파슈툰 지도자들이 이끌었다. 이들은 파키스탄 대신 인도에 합류하는 것을 선호했다. 세속적인 파슈툰 지도부는 또한 인도로 합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파키스탄보다는 독립적인 파슈툰 민족 국가의 대의를 옹호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96]

1947년 6월, 미르잘리 칸, 바차 칸 및 기타 쿠다이 키드마트가르는 반누 결의안을 선포하여 파슈툰족에게 파키스탄이라는 새로운 국가에 합류하는 대신 영국령 인도의 모든 파슈툰 다수 지역으로 구성된 독립적인 파슈투니스탄 국가를 가질 수 있는 선택권을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 라지는 이 결의안의 요구를 거부했는데, 이는 이 지역에서 철수하려면 영국의 통제하에 있는 지역이 인도 또는 파키스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며 제3의 선택지는 없었기 때문이다.[97][98] 1947년까지 파슈툰 민족주의자들은 통합 인도를 옹호했으며, 아프가니스탄과의 연합을 옹호하는 두드러진 목소리는 없었다.[99][100]

바차 칸의 세속적인 입장은 친국민 회의 (및 친인도 통일)인 자미아트 우레마 힌드 (JUH)의 울라마와 바차 칸의 쿠다이 키드마트가르 사이에 균열을 만들었다.

이 지역에는 다른 긴장도 있었는데, 특히 파슈툰 부족민들이 제국 정부에 대항하는 동요와 관련된 긴장이 있었다. 예를 들어, 1936년 영국령 인도 법원은 소녀의 가족이 유괴 및 강제 개종 사건을 제기한 후 반누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힌두교 소녀의 결혼에 반대하는 판결을 내렸다.[101] 이 판결은 소녀가 미성년자였고, 성년이 된 후에 개종과 결혼에 대한 결정을 내리도록 요청받았으며, 그때까지 제3자와 함께 살도록 요청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했다.[101] 소녀의 가족이 소송을 제기한 후 법원은 가족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고, 그 후 반누 여단에 대한 공격을 주도한 현지 무슬림들을 분노하게 했다.[101]

이러한 논란은 이 지방의 무슬림 인구 사이에 반힌두교 감정을 불러일으켰다.[102] 1947년까지 이 지방의 대부분의 울라마는 무슬림 연맹의 파키스탄 구상을 지지하기 시작했다.[103]

1947년 인도 분할 직전, 영국은 NWFP에서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유권자들이 인도 또는 파키스탄에 합류할지를 선택하도록 했다. 투표는 1947년 7월 6일에 시작되었고, 국민투표 결과는 1947년 7월 20일에 공개되었다. 공식 결과에 따르면, 572,798명의 등록 유권자가 있었고, 그 중 289,244명(99.02%)이 파키스탄 지지표를 던졌고, 2,874명(0.98%)이 인도를 지지했다. 무슬림 연맹은 전체 유권자의 절반 이상이 파키스탄과의 합병을 지지했기 때문에 결과를 유효하다고 선언했다.[104]

당시 주 총리 닥터 칸 사히브는 그의 형제 바차 칸 및 쿠다이 키드마트가르와 함께 국민투표를 보이콧했는데, 이는 NWFP가 독립하거나 아프가니스탄에 합류하는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105][106] 그들의 보이콧 호소는 효과가 있었는데, 추정에 따르면 국민투표의 총 투표율은 1946년 선거의 총 투표율보다 15% 낮았지만,[107] 전체 유권자의 절반 이상이 파키스탄과의 합병을 지지했다.[104]

바차 칸은 1947년 파키스탄이라는 새로운 국가에 충성을 맹세했고, 그 후 파키스탄 내에서 NWFP의 자율성을 높이는 것을 지지하기 위해 독립 파슈투니스탄과 통합 인도의 목표를 포기했다.[91] 그는 강력한 중앙 집권 통치에 반대하여 여러 차례 체포되었다.[108] 그는 나중에 "파슈투니스탄은 결코 현실이 아니었다"라고 주장했다. 파슈투니스탄이라는 아이디어는 파슈툰족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았고 그들에게 고통만 초래했다. 그는 또한 "아프가니스탄의 역대 정부는 그들의 정치적 목표를 위해 그 아이디어를 악용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109]

3. 5. 파키스탄 독립 이후

차우두리 라흐마트 알리 칸은 그의 팸플릿 "지금 아니면 영원히"에서 "북서 변경주"라는 명칭이 의미상 무의미하고 사회적으로 부당하다고 주장했다.[24] 20세기 말,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대통령은 칸 압둘 가파르 칸과 협의하여 명칭을 "파슈툰istan"으로 변경하는 데 동의했지만, 파슈툰istan이라는 용어가 논란이 되었다.[25] 가파르 칸은 파크툰크와를 제안했지만, 지아울하크는 다른 대안을 제시하도록 요청했다.[25]

1997년, 주의 헌법 의회에서 파크툰크와라는 명칭이 다수결로 승인되었다.[26] 그러나,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 (N) 의원들은 나와즈 샤리프 총리에게 또 다른 "논란의 여지가 없는" 명칭을 제안할 것을 요청했다.[26]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 (N) 의원들은 사르하드가 이 주의 좋은 이름이지만, 변경이 필요하다면 카이베르 또는 아바신으로 이름을 지어야 한다고 언급했다.[26]

2008년 5월, 파키스탄 인민당(PPP)은 북서 변경주의 이름을 파크툰크와로 변경할 것을 제안했다.[28][29] 그러나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 (N)은 이 지역의 힌드코어를 사용하는 하자라 지역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민족적 근거"를 들어 명칭 변경에 반대했다.[30]

파슈툰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아와미 국립당은 주의 이름을 "파크툰크와"로 변경할 것을 요구했다.[32]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 (N)은 하자라 지역에 거주하며 힌드코어를 사용하는 하자레왈을 포함하여 주에는 다른 소수 민족이 살고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카이베르 고개의 이름인 ''카이베르''라는 단어가 이름에 추가되었다.[22]

2010년 초, 파키스탄 상원은 파키스탄 헌법 제18차 개정안에서 이름을 ''카이베르 파크툰크와''로 변경하는 것을 확정했다.[33] 간다라는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 (N)에 의해 이 지역의 중립적인 이름으로 제안되었다.[17][38][39]

1947년 국민투표를 통해 주민들은 인도 또는 파키스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바차 칸과 쿠다이 키드마트가르는 국민투표를 보이콧했는데, 이는 북서 변경주(NWFP)가 독립하거나 아프가니스탄에 합류하는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105][106]

바차 칸은 1947년 파키스탄에 충성을 맹세했고, 그 후 파키스탄 내에서 북서 변경주(NWFP)의 자율성을 높이는 것을 지지했다.[91] 그는 강력한 중앙 집권 통치에 반대하여 여러 차례 체포되었다.[108] 그는 나중에 "파슈투니스탄은 결코 현실이 아니었다"라고 주장했다.[109]

아프가니스탄 전쟁 (1978년-1989년)에서는, Восстание в лагере Бадабер|바다베르 봉기ru가 일어났다.

와지리스탄 분쟁이 시작되었고, 2007년에는 First Battle of Swat|제1차 스와트 전투영어(10월 25일 - 12월 8일), 2009년에는 Second Battle of Swat|제2차 스와트 전투영어(5월 16일 - 7월 15일) 등이 일어났다.

2010년4월 15일에, 북서 변경주에서 카이베르 파크툰크와 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18년5월 31일, 연방 직할 부족 지역(FATA)과 Provincially Administered Tribal Areas|주 직할 부족 지역영어(PATA)을 편입했다.[197][198]

2024년11월, 수니파 주민이 다수를 차지하는 크람 지역에서 시아파 주민과의 종파 대립이 심화되었다. 며칠 동안 총격전이 벌어져 82명이 사망하고 156명이 부상당했다. 같은 달 24일, 정부 당국이 개입하여 7일간의 휴전을 선언했다.[199]

4. 지리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주는 주로 이란 고원에 위치하며, 유라시아판힌두쿠시산맥 경사면이 남아시아로 접근하는 인더스강의 언덕으로 이어지는 지점에 해당한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과거에 지진 활동이 발생했다.[118] 카이베르 고개는 이 지역을 아프가니스탄과 연결하며, 애보타바드의 서클 바코테에 있는 코할라 다리는 동쪽의 젤룸강을 건너는 주요 지점이다.

야간의 바자우르 구를 국제 우주 정거장에서 바라본 모습; 왼쪽의 힌두쿠시산맥과 오른쪽의 불 켜진 도시들.


지리적으로 이 지역은 힌두쿠시산맥에서 페샤와르 분지 경계까지 이어지는 북부 구역과 페샤와르에서 데라자트 분지까지 뻗어 있는 남부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북부 구역은 겨울에 춥고 눈이 많이 오며 강수량이 많고 여름은 쾌적하다. 단, 페샤와르 분지는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고 강수량이 적다. 남부 구역은 건조하며 여름은 덥고 겨울은 비교적 춥고 강수량이 적다.[119]

술레이만산맥에서 인더스강까지 동쪽으로 뻗어 있는 점토와 사암 언덕의 지맥인 셰이크 바딘 언덕은 데라 이스마일 칸 구를 라키 마르와트 구의 "마르와트" 평야에서 분리한다. 이 산맥의 가장 높은 봉우리는 석회암 셰이크 바딘 산으로, 셰이크 바딘 국립공원에 의해 보호된다. 인더스강 근처, 셰이크 바딘 언덕의 종착점은 "카피르 코트" 언덕으로 알려진 석회암 언덕의 지맥이며, 이곳에 고대 힌두 사원 단지인 카피르 코트가 위치해 있다.[120]

이 지역을 가로지르는 주요 강은 카불강, 스와트강, 치트랄강, 쿠나르강, 시란강, 판즈코라강, 바라강, 쿠람강, 도르강, 하루강, 고말강, 조브강이다.

눈 덮인 봉우리와 아름다운 푸른 계곡은 관광 산업의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121] 파키스탄에는 약 29개의 국립공원이 있으며, 카이베르 파크툰크와 주에는 그중 7개가 있다.

이름사진위치면적 (헥타르)주요 야생 동물
아유비아 국립공원
아보타바드 구3,122인도표범, , 노란목담비, 아시아사향고양이, 가면사향고양이, 붉은털원숭이, 붉은날다람쥐, 코클라스꿩, 칼리지꿩
치트랄 골 국립공원
로어 치트랄 구7,750마코르, 우랄양, 설표, 페르시아표범, 히말라야스라소니, 히말라야불곰, 추카르메추라기, 설산메추라기, 히말라야설계, 히말라야검은곰
브로길 계곡 국립공원
어퍼 치트랄 구134,744시베리아아이벡스, 히말라야사향노루, 히말라야불곰, 긴꼬리마멋
셰이크 바딘 국립공원데라 이스마일 칸 구15,540페르시아표범, 인도늑대, 벵갈여우, 우랄양, 마코르, 추카르메추라기, 인도멧돼지, 검은프랭콜린, 회색프랭콜린
사이풀 물루크 국립공원
만세라 구12,026히말라야검은곰, 노란목담비, 가면사향고양이, 히말라야고랄, 히말라야사향노루, 시베리아아이벡스, 히말라야담비, 응원꿩
룰루사르-두디팟사르 국립공원
만세라 구75,058페르시아표범, 노란목담비, 히말라야검은곰, 시베리아아이벡스, 히말라야고랄, 히말라야담비, 서부트라고판



파키스탄 북서부에 위치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북동쪽으로는 길기트-발티스탄, 동쪽으로는 아자드 카슈미르, 남쪽으로는 신드주, 남동쪽으로는 펀자브 주이슬라마바드 수도권과 접한다.

이란 고원에 위치하며 힌두쿠시 산맥이 남아시아로 경사지는 지형이다. 따라서 카이베르 고개아프가니스탄으로 통하며, 옛날부터 남아시아 세계와 중앙 유라시아 세계를 잇는 문명의 교차점이 되어 왔다.

남부는 건조한 암산이 많고, 여름에는 매우 고온이 된다. 한편, 북부는 삼림 지대가 형성되어 있으며, 여름에는 지내기 좋고, 겨울에는 적설량이 많다. 농업이 주요 산업이다. 특히 스와트 계곡은 스위스와 같은 자연미로 많은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스와트 계곡의 바리코트는 고대 국가 우디아나가 있었던 지역으로, 에메랄드 광산에서 채굴되는 광물 자원이 분쟁 광물이 되고 있다.

4. 1. 기후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주의 기후는 지역 크기에 비해 매우 다양하며, 파키스탄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기후 유형을 포함한다. 데라 이스마일 칸은 남아시아에서 가장 더운 곳 중 하나이며, 북쪽 산악 지역은 여름에는 온화하고 겨울에는 혹독하게 춥다. 공기는 일반적으로 매우 건조하며, 따라서 일교차와 연교차가 상당히 크다.[122] 강수량 또한 넓게 변동한다.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주의 넓은 지역은 전형적으로 건조하지만, 이 주는 또한 동부 가장자리 지역, 특히 6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의 몬순 기간에 파키스탄에서 가장 습한 지역을 포함한다.

가브랄, 스와트 계곡


상치트랄 구와 하치트랄 구는 몬순의 영향을 완전히 받지 않는데, 이는 비교적 서쪽에 위치하고 낭가파르바트 산괴의 차폐 효과 때문이다. 여러 면에서 중앙아시아남아시아보다 기후와 관련하여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123] 겨울은 일반적으로 계곡에서도 춥고, 겨울철에 내리는 많은 은 고갯길을 막아 이 지역을 고립시킨다. 그러나 계곡에서는 구름의 양이 적기 때문에 여름 기온이 산의 바람이 부는 쪽보다 더 높을 수 있다. 치트랄은 이 기간 동안 자주 40°C에 이를 수 있다.[124]

대부분의 강수량은 겨울과 봄에 뇌우나 눈으로 내리기 때문에, 가장 낮은 고도의 기후는 쾨펜 기후 구분에서 지중해성 기후 (''Csa''), 대륙성 지중해성 기후 (''Dsa'') 또는 반건조 기후 (''BSk'')로 분류된다. 여름은 치트랄 구 북부에서 매우 건조하며, 드로시 주변의 남부에서만 약간의 비가 내린다. 5000m 이상의 고도에서는 대형 카라코람 및 힌두쿠시 빙하를 공급하는 눈의 3분의 1이 몬순에서 오는데, 이는 이 고도가 몬순의 습기로부터 보호받기에 너무 높기 때문이다.[123]

낭가파르바트 산의 남쪽 측면과 상 디르 지구 및 하 디르 지구에서는 아라비아 해에서 오는 습한 바람이 이 지역에 침투할 수 있기 때문에 강우량이 북쪽보다 훨씬 많다. 이러한 바람이 산비탈과 충돌하면 겨울 저기압으로 인해 많은 강수가 발생한다. 비록 짧지만 몬순의 영향력은 일반적으로 강력하다. 그 결과,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주의 남쪽 비탈면은 파키스탄에서 가장 습한 지역이다. 연간 강수량은 가장 보호된 지역에서는 약 500mm에서 애버타바드와 만세라 지구의 일부 지역에서는 최대 1750mm에 이른다.

이 지역의 기후는 낮은 고도에서는 습윤 아열대 기후 (서부의 ''Cfa''; 동부의 ''Cwa'')로 분류되며, 남쪽 경사면의 높은 고도에서는 습윤 대륙성 기후 (''Dfb'')로 분류된다.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주의 중앙 지역의 강수량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매우 뚜렷하게 변화한다. 디르에서는 전선 구름대가 자주 발생하여 3월이 가장 습한 달로 유지되는 반면, 하자라에서는 강수량의 절반 이상이 몬순에서 발생한다.[127] 이는 주 남부 지역까지 확장되는 이중 강수 체제를 특징으로 하는 독특한 상황을 만들어낸다.[127]

시베리아 고기압에서 오는 찬 공기가 카라코람 산맥과 히말라야 산맥을 통과하면서 냉각 능력을 잃기 때문에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주의 중앙 지역의 겨울은 치트랄보다 다소 온화하다. 은 높은 고도에서 매우 자주 내리지만 주요 도시와 농업 계곡에서는 지면에 오래 남아있지 않다. 겨울을 제외하고,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주의 중앙 지역의 온도는 치트랄만큼 덥지 않다.

히말라야 산맥과 카라코람 산맥의 산기슭에서 멀어질수록 기후는 산기슭의 습한 아열대 기후에서 신드, 발루치스탄, 남부 펀자브의 전형적인 건조 기후로 변한다. 중앙 카이베르 파크툰크와와 마찬가지로 강수량의 계절성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매우 가파른 경사를 보이지만, 이 지역 전체는 몬순 강우량을 거의 받지 않는다. 고도가 높은 곳에서도 연간 강수량은 400mm 미만이며, 일부 지역에서는 200mm에 불과하다.

남부 카이베르 파크툰크와의 기온은 극도로 높다. 주의 최남단 지역인 데라 이스마일 칸은 기온이 50°C까지 치솟는 세계에서 가장 더운 곳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129] 더 서늘한 달에는 밤에는 추울 수 있고 서리가 자주 내린다. 눈은 매우 드물며, 낮 기온은 풍부한 햇살과 함께 쾌적하게 따뜻하다. 건조 지대이지만 봄철에는 많은 비가 내려 토사 재해나 수해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한다.[200]

5. 행정 구역

(2023년) [139]인구
(2017년)인구
(1998년)면적 (km2)수도페샤와르10,035,1717,403,8173,923,5889,134페샤와르말라칸드9,959,3997,514,6944,262,70031,162사이두 샤리프하자라6,188,7365,325,1213,505,58117,064아보타바드마르단4,639,4983,997,6772,486,9043,175마르단코하트3,752,4362,218,9711,307,96912,377코하트데라 이스마일 칸3,188,7792,019,0171,091,21118,854데라 이스마일 칸반누3,092,0782,044,0741,165,6929,975반누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주의 36개 현 목록은 다음과 같다.



6. 인구

2023년 파키스탄 인구 조사 당시 카이베르파크툰크와주의 인구는 4,090만 명이었다. 인구의 85% 이상이 농촌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139]

카이베르파크툰크와주의 주요 민족, 언어, 종교는 다음과 같다.

카이베르 파크툰크와 주의 인구 통계
구분내용
민족파슈툰족이 가장 큰 민족 집단이며, 그 외에도 힌드코족, 코히스탄족, 치트랄족, 칼라쉬족, 사라이키족 등 다양한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언어파슈토어가 가장 널리 사용되는 언어 (주 인구의 81%가 모국어).[145] 우르두어는 국어이자 공용어이며, 힌드코어, 사라이키어, 코히스타니어 등도 사용된다.
종교주민 대다수는 수니파 이슬람 (일부 시아파 이슬람). 치트랄 지역에는 이스마일파, 남부 치트랄의 칼라쉬족은 고유 다신교 신앙. 기독교, 힌두교, 시크교를 믿는 소수 주민도 존재.


6. 1. 민족

파슈툰족은 수세기 동안 이 지역에 거주해 온 최대 민족 집단이다.[140] 이 지역 인구의 최대 3분의 1이 비파슈툰족으로 추정되며,[141] 주로 북부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주목할 만한 소수 민족으로는 하자라 지역의 힌드코족, 파키스탄 코히스탄의 코히스탄족, 치트랄 구의 치트랄족과 칼라쉬족이 있다. 데라 이스마일 칸 구의 남부 지역은 사라이키족이 다수를 차지한다.[142] 약 150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난민도 이 지역에 남아 있으며,[143] 이들의 대부분은 파슈툰족이며, 그 다음으로 타지크족, 하자라족, 구자르, 그리고 다른 소규모 집단이 있다. 이들은 20년 넘게 이 지역에 거주해 왔지만, 아프가니스탄 시민으로 등록되어 있다.[144]

카이베르 파크툰크와의 파슈툰족은 파슈툰왈리라고 불리는 부족 행동 강령을 준수하며, 여기에는 '낭'(명예), '바달'(복수), '멜마스티야'(환대), '나나와타'(피난처의 권리)라고 불리는 네 가지 중요한 가치 요소가 있다.[5] 주민의 대부분은 파슈툰족이다. 그 외, 치트랄족, 다르드족, 라지푸트, 카슈미르인, 사라이키족 등이 있다.

6. 2. 언어

2023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카이베르파크툰크와주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언어는 파슈토어로, 주 인구의 81%가 모국어로 사용하며 주 전체에서 사용된다.[145] 우르두어는 국어이자 공용어로서 민족 간 의사소통을 위한 공통어 역할을 하며, 때로는 파슈토어와 함께 다른 민족 언어를 사용하는 공동체 내에서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언어로 사용된다.[5]

상당수의 사용자를 가진 다른 언어로는 힌드코어 (9.39%), 사라이키어 (3.17%), 코히스타니어 (2.45%)가 있다.[145] 힌드코어는 주로 북동부의 하자라 구역에서 사용되며, 사라이키어 사용자는 주의 최남단인 데라 이스마일 칸 구에서 발견된다.[6] 코히스타니어는 인더스 코히스타니어, 바테리, 칠리소, 가와리, 고와로, 토르왈리, 만키얄리를 포함하여 주 북부에서 사용되는 여러 언어를 포괄하는 용어이다.[146][147] 약 100만 명의 인구가 "기타" 범주를 선택했는데, 이는 주로 북서부 산악 지역인 치트랄코와르어를 지칭한다.[145][6]

2011년 주 정부는 파슈토어, 사라이키어, 힌드코어, 코와르어 및 코히스타니어를 해당 지역의 학교에서 필수 과목으로 도입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승인했다.[148]

카이베르 파크툰크와 주의 언어 (1881–2023)
모국어1881[138]1891[137]1901[136]1911[135]1921[134]1931[133]1951[131]2017[149]2023[150]
인구비율인구비율인구비율인구비율인구비율인구비율인구비율인구비율인구비율
대(大)펀자브어1,050,06153.69%1,226,64853.76%876,60442.75%916,36541.71%1,000,25544.43%1,102,90545.48%1,008,43424.54%4,820,33613.58%5,203,01212.74%
파슈토어870,81644.53%1,023,02144.84%1,088,60653.08%1,221,85955.61%1,202,32653.41%1,279,47152.75%2,875,75170.01%28,363,36379.89%32,919,59280.57%
우르두어17,6450.9%15,6860.69%15,5980.76%16,9950.77%8,8140.39%19,2210.79%50,4091.23%298,3190.84%259,9250.64%
영어4,5540.23%5,2040.23%4,6010.22%5,7200.26%9,7620.43%7,8520.32%1250%
페르시아어4,0280.21%3,9620.17%2,8510.14%3,4540.16%2,3520.1%6,0300.25%4,4220.11%
카슈미르어3,7360.19%2,2180.1%8210.04%5330.02%3430.02%1,7960.07%46,0840.13%6,4710.02%
발루치어2,5100.13%5540.02%920%40%27,8460.08%30,6360.08%
네팔어1,0200.05%2,6550.12%5,1790.24%4,1490.18%5,1400.21%
도그리어6240.03%3360.01%6740.03%460%
신디어2040.01%1010%1960.01%70%230%32,1340.09%10,0190.02%
벵골어2020.01%1060%2170.01%9000.02%
발티어380%


6. 3. 종교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주민의 압도적 다수는 수니파 이슬람을 따르며, 쿠람, 코하트, 헝구, 오라크자이, 데라 이스마일 칸, 마르단 및 중앙-남부 KPK 전역의 많은 다른 지역에 상당한 수의 시아파 무슬림이 있다. 12이맘파 시아파 외에도 치트랄 지역에는 이스마일파가 있다.[151] 남부 치트랄의 칼라쉬족은 여전히 다신교의 고대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는 애니미즘과 혼합되어 이 지역의 산악 북동부에서 한때 지배적인 신앙이었다.[151] 페샤와르 및 기타 도시 중심지에 주로 거주하는, 로마 가톨릭교 기독교 종파인 기독교, 힌두교 및 시크교를 따르는 소수의 주민들이 있다.[152][153]

카이베르 파크툰크와의 종교 (1881–2023)
종교
집단
1881[138]1891[137]1901[136]1911[135]1921[134]1931[133]1941[132]1951[154]1998[155]2017[156]2023[157][158]
인구%인구%인구%인구%인구%인구%인구%인구%인구%인구%인구%
이슬람교
1,787,34191.40%2,088,01591.51%1,890,47992.19%2,039,99492.85%2,062,78691.62%2,227,30391.84%2,788,79791.80%5,858,08099.89%20,808,48099.47%35,428,85799.80%40,486,15399.62%
힌두교
154,0817.88%166,9847.32%129,3066.31%119,9425.46%149,8816.66%142,9775.89%180,3215.94%2,4320.04%7,0110.03%6,3730.02%6,1020.02%
시크교
9,2050.47%21,1100.92%25,7331.26%30,3451.38%28,0401.25%42,5101.75%57,9391.91%4,0500.01%
기독교
4,7250.24%5,4370.24%5,1190.25%6,5850.30%10,6100.47%12,2130.50%10,8890.36%3,8230.06%38,9740.19%50,0180.14%134,8840.33%
자이나교
1060.01%1080.00%370.00%40.00%30.00%00.00%10.00%
조로아스터교
520.00%480.00%460.00%490.00%200.00%600.00%240.00%360.00%
불교
00.00%00.00%00.00%00.00%00.00%20.00%250.00%
유대교
40.00%40.00%140.00%00.00%110.00%710.00%
아흐마디야
48,7030.23%7,2040.02%9510.00%
기타50.00%20.00%00.00%00.00%00.00%00.00%00.00%2150.00%16,8080.08%9,5120.03%8,9440.02%


7. 정치

1933년 전인도 무슬림 연맹의 창립 지도자들은 북서 변경주(NWFP)의 이름을 '아프가니아'로 제안했다. 차우두리 라흐마트 알리는 그의 팸플릿 "지금 아니면 영원히"에서 명칭 변경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20세기 말,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대통령은 칸 압둘 가파르 칸과 협의하여 명칭을 "파슈툰istan"으로 변경하는 데 동의했으나, 파슈툰istan이라는 용어가 논란이 되었다. 가파르 칸은 파크툰크와를 제안했지만, 지아울하크는 다른 대안을 요청했다.[25]

파크툰크와라는 명칭은 1997년 주의회에서 다수결로 승인되었다.[26] 그러나,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 (N) (PML (N)) 의원들은 나와즈 샤리프 총리에게 다른 명칭을 제안할 것을 요청했다.[26] PML (N) 의원들은 카이베르 또는 아바신으로 이름을 지어야 한다고 언급했다.[26] 주지사는 국민투표를 요구했지만, 아와미 국립당(ANP)은 거부하고 연방 및 주 정부에서 탈퇴했다.[26]

2008년 파키스탄 인민당(PPP)은 북서 변경주의 이름을 파크툰크와로 변경할 것을 제안했다.[28][29] 그러나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 (N)은 힌드코어를 사용하는 하자라 지역의 반대를 이유로 명칭 변경에 반대했다.[30]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대통령은 2008년 유엔 총회에서 처음으로 ''파크툰크와''라는 이름을 언급했다.[31] 아와미 국립당은 주의 이름을 "파크툰크와"로 변경할 것을 요구했다.[32]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 (N)은 파슈툰의 정체성만을 담고 있지 않은 다른 이름으로 변경하려 했다. 카이베르 고개의 이름인 ''카이베르''라는 단어가 이름에 추가되었다.[22] 2010년 파키스탄 상원은 파키스탄 헌법 제18차 개정안에서 이름을 ''카이베르 파크툰크와''로 변경하는 것을 확정했다.[33]

주의회는 145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단원제 입법부다. 역사적으로 이 주는 아와미 국립당(ANP)의 거점이었으며, ANP는 친러시아, 친공산주의, 좌익 및 민족주의 정당이었다.[159][160] 1970년대 이후, 파키스탄 인민당(PPP) 또한 이 주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159]

2002년 파키스탄 총선 이후, 보수 이슬람 성향의 무타히다 마즐리스-에-아말(MMA)이 이끄는 주 정부가 선출되었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자마아테-에-이슬라미 파키스탄(JeI)이 이끄는 이슬람 연합의 선거 승리에 기여했으며, JeI의 사회 정책은 주를 반미주의의 온상으로 만들었다.[165] MMA의 선거 승리는 유도 민주주의 맥락에서 이루어졌는데, 파키스탄 인민당과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 (N)(PML(N))과 같은 주류 정당은 선거 참여가 금지되었기 때문이다.[161]

샤리아 시행을 포함한 광범위한 사회적 제한 정책이 집행되었지만, MMA 정부는 이 법을 완전히 시행하지 못했다.[165] 페샤와르에서 활발한 언더그라운드 음악계가 형성되었다.[162] 이슬람주의 정부는 여성에게 ''히잡'' 착용을 강요하려 했으며,[163] 교육 기관에서 남녀 분리를 시행하려 했다.[163] 이 연합은 또한 남성 의사가 여성에게 초음파 검사를 수행하는 것을 금지하려 했으며,[163] 영화관을 폐쇄하려 했다.[163] 2005년, 이 연합은 여성의 모습이 담긴 모든 공공 광고를 제거했다.[164]

2008년 파키스탄 총선에서 종교 연합은 지배력을 잃었고, 아와미 국립당에 의해 권력에서 밀려났다.[165] ANP 정부는 주요 이슬람주의 사회 프로그램을 폐지하기 위한 주도권을 잡았다.[166] ANP의 좌익 프로그램에 대한 대중의 불만은 시민 행정에 통합되었으며, 2012년에는 주의 정치적 경향이 좌익에서 급격히 멀어졌다.[159] 2013년, 임란 칸이 이끄는 PTI가 JeI와 연합하여 소수 정부를 구성하면서, 주의 정치는 포퓰리즘민족주의로 전환되었으며, 현재 이 주는 PTI의 거점으로 기능하며 파키스탄에서 더 우익 성향이 강한 지역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167] 2018년 선거 이후, PTI는 의석 점유율을 늘리고 과반수 정부를 구성했다.

아보타바드 구 및 하자라 사단과 같은 비 파슈툰 지역에서는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 (N)(PML(N))이 상당한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다.[167]

카이베르파크툰크와주의 행정부는 수석 장관이 이끌며, 이 수석 장관은 주의회에서 선출된다.[168] 연방 정부를 대표하는 주지사는 파키스탄 총리의 조언을 받아 파키스탄 대통령이 임명한다.[169]

주 내각은 수석 장관에 의해 임명되며, 수석 장관은 주지사로부터 취임 선서를 받는다.[170] 수석 서기는 수석 장관을 보좌한다.[151][171]

페샤와르 고등법원은 주의 최고 법원이다.

8. 경제

카이베르파크툰크와는 파키스탄에서 세 번째로 큰 주 경제를 가지고 있다. 카이베르파크툰크와의 파키스탄 GDP 점유율은 역사적으로 10.5%를 차지했지만, 이 주는 파키스탄 전체 인구의 11.9%를 차지한다. 카이베르파크툰크와가 지배하는 경제 분야는 임업으로, 그 점유율은 34.9%에서 81%까지 다양하며 평균 61.56%를 기록했다.[172] 현재 카이베르파크툰크와는 파키스탄 GDP의 10%,[173] 파키스탄 광업 생산량의 20%를 차지하며,[174] 1972년 이후 경제 규모가 3.6배 성장했다.[175]

카이베르 파크툰크와의 우세: 임업


농업은 여전히 중요하며 주요 현금 작물로는 밀, 옥수수, 담배(스와비), 쌀, 사탕무, 과일 등이 이 주에서 재배된다.

페샤와르에 대한 일부 제조업 및 첨단 기술 투자는 많은 지역 주민의 일자리 전망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이 주의 무역은 거의 모든 제품을 포함한다. 이 주의 바자르는 파키스탄 전역에서 유명하다. 산업 지역 설립으로 실업률이 감소했다.

이 주 전역의 작업장은 소형 무기 및 무기 제조를 지원한다. 이 주는 파키스탄 대리석 생산량의 최소 78%를 차지한다.[176]

9. 사회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주는 2010년 이전까지 북서 변경주(NWFP)로 불렸다. 1933년 전인도 무슬림 연맹의 창립 지도자들은 '아프가니아'라는 이름을 제안했는데, 이는 '파키스탄'의 첫 글자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24] 차우두리 라흐마트 알리는 그의 팸플릿 "지금 아니면 영원히"에서 명칭 변경의 필요성을 설명했다.[24]

20세기 말,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대통령은 칸 압둘 가파르 칸과 협의하여 명칭을 '파슈툰istan'으로 변경하는 데 동의했으나, 파슈툰istan이라는 용어가 논란이 되자 가파르 칸은 파크툰크와를 제안했다.[25]

1997년 주의회에서 파크툰크와라는 명칭이 승인되었으나,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 (N) 의원들은 반대했다.[26] 주지사는 국민투표를 요구했으나, 아와미 국립당(ANP)은 거부하고 연립 정부에서 탈퇴했다.[26]

2008년 파키스탄 인민당(PPP)은 파크툰크와로의 명칭 변경을 제안했으나,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 (N)은 힌드코어를 사용하는 하자라 지역의 반대를 이유로 반대했다.[30] 같은 해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대통령은 유엔 총회에서 처음으로 '파크툰크와'라는 이름을 언급했다.[31]

아와미 국립당은 파슈툰인의 정체성을 반영하여 '파크툰크와'로의 명칭 변경을 요구했다.[32]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 (N)은 카이베르 고개의 이름을 따서 '카이베르'를 추가하는 방안을 제시했다.[22]

2010년 파키스탄 상원은 파키스탄 헌법 제18차 개정안을 통해 '카이베르 파크툰크와'로 명칭 변경을 확정했다.[33] 아보타바드를 중심으로 하자라 지역 주민들의 반대 시위가 있었고, 카이베르 파크툰크와 경찰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했다.[34]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은 1948년 파키스탄의 유엔 가입에 대한 아프가니스탄의 반대 이후 긴장 관계를 유지해 왔다.[110] 아프가니스탄은 듀랜드 라인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1949년 무효를 선언했고, 1950년대에는 파슈투니스탄 운동을 지원했다.[111][115]

아프가니스탄-소련 전쟁 이후, 카이베르파크툰크와는 테러와의 전쟁의 주요 지역이 되었으며, 기반 시설 부족 문제를 겪었다.[116] 2010년 주 이름 변경에 대한 하자라 지역 주민들의 항의 시위가 있었고, 2011년 시위에서 사상자가 발생했다.[117] 아와미 국립당은 파슈토어로 '파슈툰의 땅'을 의미하는 '카이베르 파크툰크와'로의 개명을 추진했다.[178]

2010년 파키스탄 상원은 이 지역의 공식 명칭을 '카이베르 파크툰크와'로 확정했다.[180] 2008년 파키스탄 총선 이후 아와미 국립당은 파키스탄 인민당과 연립 주 정부를 구성했다.[182] 2013년 파키스탄 총선에서는 파키스탄 테리크-에-인사프가 다수당이 되어 자마아트-에-이슬라미 파키스탄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고 있다.[184]

카이베르파크툰크와주에서 활동하는 주요 비정부 기구(NGO)는 다음과 같다:[185][186]



크리켓은 카이베르파크툰크와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며, 사히드 아프리디, 유니스 칸 등 세계적인 선수들을 배출했다. 또한, 스쿼시 선수 자항기르 칸, 잔셰르 칸의 출신지이기도 하다.[187]

9. 1. 교육

페샤와르 대학교


이슬라미아 칼리지 대학교


치트랄 대학교


굴람 이샤크 칸 공학 기술 연구소


카이베르파크툰크와는 전통적으로 문해율이 매우 낮았지만, 최근 들어 변화하고 있다. 2017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카이베르파크툰크와(FATA 포함)의 문해율은 51.66%이다. 농촌 지역의 문해율은 48.44%인 반면, 도시 지역은 66.86%이다. 카이베르파크툰크와는 성별 문해율 격차가 매우 크다. 남성은 66.67%인 반면, 여성 문해율은 34.58%로 남성 문해율의 절반을 약간 넘는다. 이러한 격차는 파슈토어가 주로 사용되는 농촌 지역에서 특히 두드러지는데, 전통적인 성별 규범이 여성 교육을 제한해왔기 때문이다. 2021년 현재, 카이베르파크툰크와(KP)는 파키스탄에서 가장 높은 문해율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190][191]

연도문해율
197215.5%
198116.7%
199835.41%
201751.66%
202055.1%

[188][189][190][191]

1998년 정부가 추정한 카이베르파크툰크와의 교육 시장 차트는 다음과 같다.[192][193]

자격도시농촌총계등록률(%)
초등학교 미만413,7823,252,2783,666,060100.00
초등학교741,0354,646,1115,387,14679.33
중학교613,1882,911,5633,524,75148.97
고등학교647,9192,573,7983,221,71729.11
전문대272,761728,6281,001,38910.95
BA, BSc ... 학위20,35942,77363,1325.31
MA, MSc ... 학위18,23735,98953,2264.95
디플로마, 자격증 ...82,037165,195247,2321.92
기타 자격19,76675,22694,9920.53
2,994,08414,749,56117,743,645



카이베르 파크툰크와주(KPK)에는 9개의 국립 의과대학이 있다.



그 외 주요 대학교는 다음과 같다.

9. 2. 관광

카이베르파크툰크와주에는 파키스탄 전체 국립공원 29개 중 7개가 있다.

이름사진위치지정일면적 (헥타르)주요 야생 동물
아유비아 국립공원아보타바드 구1984년3,122인도표범, , 노란목담비, 아시아사향고양이, 가면사향고양이, 붉은털원숭이, 붉은날다람쥐, 코클라스꿩, 칼리지꿩
치트랄 골 국립공원로어 치트랄 구1984년7,750마코르, 우랄양, 설표, 페르시아표범, 히말라야스라소니, 히말라야불곰, 추카르메추라기, 설산메추라기, 히말라야설계, 히말라야검은곰
브로길 계곡 국립공원어퍼 치트랄 구134,744시베리아아이벡스, 히말라야사향노루, 히말라야불곰, 긴꼬리마멋
셰이크 바딘 국립공원데라 이스마일 칸 구1999년15,540페르시아표범, 인도늑대, 벵갈여우, 우랄양, 마코르, 추카르메추라기, 인도멧돼지, 검은프랭콜린, 회색프랭콜린
사이풀 물루크 국립공원만세라 구2003년12,026히말라야검은곰, 노란목담비, 가면사향고양이, 히말라야고랄, 히말라야사향노루, 시베리아아이벡스, 히말라야담비, 응원꿩
룰루사르-두디팟사르 국립공원만세라 구2003년75,058페르시아표범, 노란목담비, 히말라야검은곰, 시베리아아이벡스, 히말라야고랄, 히말라야담비, 서부트라고판



카이베르파크툰크와주의 관광지로는 아보타바드, 반누, 바타그램, 다가르, 차르사다, 치트랄, 데라이스마일칸, 디르, 잠루드, 항구, 하리푸르, 하벨리안, 훈트, 칼람, 코하트, 쿨라치, 라탐베르, 란디코탈, 말라칸드, 만세라, 마르단, 마스투즈, 밍고라, 노우셰라, 페샤와르, 사이두 샤리프, 상글라, 스와비, 스와트, 탕크, 티메르가라 등이 있다.

9. 3. 스포츠

크리켓은 카이베르파크툰크와주에서 주로 행해지는 스포츠이다. 이곳은 사히드 아프리디, 유니스 칸, 쿠쉬딜 샤, 파카르 자만, 나심 샤, 우마르 굴과 같은 세계적인 수준의 스포츠 선수들을 배출했다. 크리켓 선수 배출 외에도, 카이베르 파크툰크와주는 하심 칸, 카마르 자만, 자항기르 칸, 잔셰르 칸과 같은 세계적인 수준의 스쿼시 선수들의 발상지이기도 하다.[187]

참조

[1] 웹사이트 Subnational HDI – Global Data Lab https://globaldatala[...] 2022-03-02
[2] 웹사이트 Announcement of Results of 7th Population and Housing Census-2023 (Khyber Pakhtunkhwa province) https://www.pbs.gov.[...] 2023-08-05
[3] 웹사이트 GDP of Khyber Pukhtunkhwa's Districts https://kpbos.gov.pk[...] 2023-05-15
[4] 웹사이트 Report for Selected Countries and Subjects https://www.imf.org/[...]
[5] 서적 South Asian Folklore: An Encyclopedia : Afghanistan, Bangladesh, India, Nepal, Pakistan, Sri Lanka Taylor & Francis 2003
[6] 웹사이트 Ethno-linguistic provinces https://tribune.com.[...] 2011-06-25
[7] 웹사이트 A province by any other name https://foreignpolic[...] 2010-04-14
[8] 서적 The Grandeur of Gandhara: The Ancient Buddhist Civilization of the Swat, Peshawar, Kabul, and Indus Valleys Algora Publishing 2011
[9] 웹사이트 NA approves merger of Fata, Pata with KP https://www.thenews.[...] 2023-05-09
[10] 뉴스 KP Assembly approves landmark bill merging Fata with province https://www.dawn.com[...] 2018-05-27
[11] 뉴스 President signs Fata-KP merger bill into law https://web.archive.[...] 2018-06-01
[12] 뉴스 President signs amendment bill, merging FATA with KP https://www.geo.tv/l[...]
[13] 서적 Background Notes: South Asia, May, 2011 https://books.google[...] InfoStrategist.co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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