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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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조는 조선의 제7대 왕으로, 본명은 이유(李瑈)이며, 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뛰어난 무예 실력과 문학적 재능을 겸비했으며, 수양대군 시절부터 정사에 참여하여 능력을 인정받았다. 문종 사후 어린 조카 단종이 즉위하자, 그는 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단종을 폐위시킨 후 왕위에 올랐다. 세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육조직계제를 실시하고 경국대전 편찬을 시작하는 등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을 추진했다. 또한 불교를 장려하고 서적 간행을 지원하는 등 문화 발전에 기여했으나, 단종 복위 시도와 사육신 사건을 통해 왕위 찬탈의 정당성에 대한 비판을 받기도 한다. 만년에는 질병으로 고통받았으며, 차남 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승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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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조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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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세조 |
한자 표기 | 世祖 |
휘 | 이유 (李瑈) |
자 | 수지 (粹之) |
출생일 | 1417년 11월 7일 |
출생 장소 | 한성 세종의 저택 |
사망일 | 1468년 9월 23일 |
사망 장소 | 수강궁 정전, 한성 |
매장 장소 | 광릉, 남양주시, 대한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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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유교 (성리학) → 불교 |
호칭 | |
묘호 | 세조 (世祖) |
시호 | 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 (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 |
명나라 시호 | 혜장 (惠莊) |
존호 | 승천체도열문영무 (承天體道烈文英武) |
왕조 및 가문 | |
왕조 | 이씨 |
가문 | 전주 이씨 |
아버지 | 세종 |
어머니 | 소헌왕후 |
배우자 | 정희왕후 (1428년 결혼) |
자녀 | 예종 외 다수 |
즉위 정보 | |
왕위 계승 | 조선 제7대 국왕 |
재위 기간 | 1455년 8월 3일 – 1468년 10월 1일 |
즉위식 | 경복궁 근정전, 한성 |
선대 국왕 | 단종 |
후대 국왕 | 예종 |
퇴위 정보 | |
상왕 재위 기간 | 1468년 10월 1일 – 1468년 10월 2일 |
퇴위 전 국왕 | 단종 |
후대 국왕 | 고종 |
관직 정보 | |
영의정 재임 기간 | 1453년 11월 19일 – 1455년 8월 3일 |
선대 영의정 | 황보인 |
후대 영의정 | 정인지 |
재임 시 군주 | 단종 |
기타 정보 | |
군호 | [[파일:Dot-black.png|7x7픽셀]] 수양대군(首陽大君, 1445년-1455년) [[파일:Dot-black.png|7x7픽셀]] 진양대군(晉陽大君, 1433년-1445년) [[파일:Dot-black.png|7x7픽셀]] 함평대군(咸平大君, 1433년) [[파일:Dot-black.png|7x7픽셀]] 진평대군(晉平大君, 1428년-1433년) |
능호 | 광릉 |
전호 | 영창전(永昌殿) |
2. 생애
1417년(태종 17년) 11월 7일, 태종의 셋째 왕자인 아버지 충녕대군(세종)과 경숙옹주 심씨(소헌왕후)의 차남이자 네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1] 궁궐 밖에서 양육되었으며 세종이 즉위한 뒤에도 한동안 궁밖 민가에서 자랐다. 당시 유아 사망률이 높았고, 큰할아버지인 정종과 할아버지인 태종의 승하가 잇따랐기 때문에 아이가 자라기에는 환경이 좋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세조는 어릴 때 민간에서 자랐으므로 모든 어려움과 사실과 거짓을 자세히 일찍부터 겪어 알고 있었다고 세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세조는 다섯 살의 나이에 《효경(孝經)》을 외워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이러한 영특함은 자라면서 형제들 중 단연 뛰어나 아버지 세종과 형인 문종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는 뛰어난 궁술, 기마술, 무예 실력을 보였으며 탁월한 군사 지휘관이었지만, 전장에 나선 적은 없었다.[1] 또한 음악적 재능도 뛰어나 아버지의 기쁨을 사기도 했는데, 세종은 그가 마음만 먹으면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1] 1428년 '''수양대군'''이라는 작위를 받았다.[1]
정몽주의 제자 권우의 문하에서 수학한 세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유교 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세자(뒤의 문종)을 성균관에 입학시키고, 이어 다른 대군들도 성균관에 입학시켜 성리학을 배우게 하였다. 세종은 왕업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왕자들의 교육에도 상당히 관심을 갖고 신경을 썼다. 이러한 세종의 특별 배려 속에 왕자들과 함께 수학하였으나 그 가운데에서도 다재다능하여 일찍 배운 것을 습득하고 응용하였다.
1417년, 충녕대군(훗날 세종)과 그의 정비 청송 심씨(훗날 소헌왕후) 사이에서 넷째 아이이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428년, 그는 '''수양대군'''이라는 작위를 받았다.[1]
1433년 12월 12일 조선을 방문했다가 명나라로 돌아가는 사신 맹날가래(孟捏加來)·최진(崔眞) 등을 세종을 대신하여 전송하였다. 1434년 18세 때 그는 세종을 따라 왕방산(王方山)에서 강무하게 되었는데 그는 하루아침에 사슴과 노루 수 십 마리를 쏘아서 털에 묻은 피가 바람에 날려 겉옷이 다 붉게 물들었다. 늙은 무사 이영기(李英奇) 등이 보고 감격하여 “오늘 뜻밖에 다시 태조의 신무(神武)를 뵙는 듯합니다.” 하였다. 박시백 화백의 《조선왕조실록》(휴머니스트)에 의하면, 수양대군은 박식하지만 병약했던 형 문종과는 달리 무예 실력도 출중했다. 승마와 격구, 활쏘기 재주가 뛰어났고, 사냥을 즐겼다.[1]
그는 일찍부터 무인의 기질이 뛰어났다. 사람들이 궁마(弓馬)에 대한 일을 이야기하려 하면 그는 마음속으로 이를 좋아하였고 자신도 그렇게 하려고 마음먹기도 하여 항상 활과 화살을 가지고 다녔다. 또 당시 수렵 중 가장 재미있고 호쾌한 것으로 꼽히던 매사냥을 좋아하여 자신이 직접 매를 사육시켜 사냥을 다니곤 하였다. 자칫 궁중 생활로 약해질지도 모르는 체력을 승마를 통하여 다져나갔다. 세조는 사냥과 궁술, 마술 등을 익혀 상당한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고, 이는 훗날 무인 선발과 그가 중심이 되어 편찬하는 <역대병요(歷代兵要)> 찬집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1435년(세종 17) 4월 1일 명나라 사신이 한성에 왔으나, 병으로 접견이 어려운 세종 대신, 4월 27일까지 그가 명나라 사신단을 접대했다. 1436년(세종 18) 2월 세종이 세조가 문학을 좋아한다고 하여 친히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내려 주었다. 이 때 세조가 고금의 서사(書史)를 다 보았고, 더욱 성리학에 정통하였는데 매양 말하기를, '천하의 서적을 다 읽지 않고서는 나는 다시 활을 잡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그의 형인 세자는 일찍이 수양의 활에다 쓰기를, '철석 같은 그 활이여, 벼락인양 그 살이로다. 버티임은 보겠으나 풀어짐을 못 보겠네.'라는 시를 친히 적어주기도 하였다. 그는 뛰어난 궁술, 기마술, 무예 실력을 보였으며 탁월한 군사 지휘관이었지만, 정작 전장에 나선 적은 없었다. 또한 음악적 재능도 뛰어나 아버지의 기쁨을 사기도 했는데, 세종은 그가 마음만 먹으면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1]
1428년(세종 10년) 6월 16일, '''진평대군'''(晉平大君)에 봉작되었다. 그해 10월 13일 당시 군기감 부정(軍器監副正)으로 재직중이던 윤번(尹璠)의 딸 낙랑부대부인 윤씨(정희왕후)와 결혼식을 올렸다.
1429년(세종 11년) 2월 세종이 평강(平康)에 친히 나가 무예를 강무(講武)할 때, 그는 그간 익혔던 궁술을 발휘한 적이 있었다. 이 때가 그의 나이 불과 열 셋이었다. 몰이꾼들이 몰아오는 사슴을 향해 화살 7발을 쏘았는데 이것이 모두 사슴 목을 관통하였으니 보는 이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1431년 여름 피부병인 창진에 걸렸으나, 그해 9월 23일 의원 양홍달(楊弘達), 조청(曹聽), 노중례(盧重禮) 등의 진료로 병이 나았다. 세종대왕은 이들 의원에게 옷을 선물로 하사했다.
처음에는 진평대군이었으나 후에 봉작이 바뀌어 1433년(세종 15년) 6월 27일 '''함평대군'''(咸平大君)이 되었는데, 함평(咸平)은 함흥(咸興)의 별칭이었다. 그런데 그의 작호를 전라도 함평현(咸平縣)과 혼동될까 우려된다는 이유로, 그해 7월 1일 '''진양대군'''(晉陽大君)으로 개봉되었다.
1445년(세종 27년) 다시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개봉되었다.
부왕 세종의 병환과 그의 재능을 알아본 세종의 특별 지시로 그는 정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1439년(세종 21년) 7월 종친(宗親)들을 관리하는 종부시 제조(宗簿寺提調)가 되었다. 이후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면서 전제상정소 도제조(田制詳定所都提調)가 되어 농지를 실제 농민에게 부여하는 토지제도의 분배 재개혁을 주관하였으며, 세종 재위기간 중 치평요람(治平要覽)· 역대병요(歷代兵要)·의주상정(儀註詳定) 등의 서적의 편찬과 찬술을 감독하였으며 중국의 운회(韻會)를 훈민정음(한글)로 번역하였다. 또한 명나라와 천축국에서 불서들을 구하여 불서들을 훈민정음으로 번역, 보급하기도 했다.
1440년(세종 22년)에 세종이 규표(圭表 : 천문관측기계의 하나)를 바로 잡을 때의 세조와 안평대군 및 다른 유신들에게 명하여 삼각산 보현봉(普賢峯)에 올라 해지는 곳을 관측하게 하였다. 돌길이 위험하고 또 불측한 벼랑이 내려다 보였으므로 안평대군 이하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눈이 어지럽고 다리가 떨려서 전진하지 못하였으나 세조만은 유난히 걸음이 나는 듯하여 순식간에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니 보는 이가 모두 탄복하여 '따를 수 없다' 하였다. 늘 소매 넓은 옷을 입었으므로 궁중 사람들이 모두 웃으니 세종이 이르기를, "너와 같은 용력있는 사람은 의복이 이만큼이나 넓고 커야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1441년 6월 세종의 명으로 《치평요람(治平要覽)》의 간행, 인쇄를 감독하였다. 1443년 10월 말에는 토지의 측정에 참여하였다. 1443년(세종 25년) 11월 전제 상정소(田制詳定所)가 설치되자 도제조(都提調)가 되었다가 1444년 전제소 제조(田制所提調)에 임명되었고, 1445년(세종 27년) 진양대군에서 고쳐져서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개봉되었다.
세종이 병들고 세자였던 문종이 대리청정을 하자, 그는 동생인 안평대군과 함께 신하들에게 세종과 문종의 교지를 전하기도 하였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형제는 당시 조정 중신들이 왕권에 공공연히 도전하는 것을 보고 탐탁치 않게 여기며 후일을 기약했다고 한다. 그러나 둘째 아들 수양과 셋째 아들 안평에게 야심이 있다는 것을 간파한 부왕 세종은 수양과 안평을 궐 근처에서 떨어져 있게 했다.
세종 자신의 생각도 통념적인 종법대로 적자로서 왕위를 계승시켜 왕위 계승의 올바른 길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수양의 야심을 경계하면서도 수양이 왕위에 오르리라는 생각은 불가능하리라 확신했고, 세조의 형인 문종도 모든 면에 있어 군주로서의 능력을 십분 가지고 있었다. 수양의 역할이란 그저 왕실을 보위하는데 기여하는 것으로 끝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종은 체력, 건강이 좋지 않았다. 세종 자신도 소갈증과 눈병, 고혈압을 비롯한 질환에 시달려 건강이 좋지 않고, 좀 이른 시기이기는 하지만 문종에게 섭정을 하게 하여 왕위계승을 둘러싼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다. 이에 부왕 세종은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신주원, 이개 등 집현전 학사들에게 어린 원손을 보필하라는 당부를 여러번 거듭하였다.
세조는 왕위에 대한 야심을 숨기고 학문과 서적 간행에 힘쓰며 인맥을 형성했다. 그는 명나라와 인도에서 불서를 수입하여 탐독하고, 매사냥과 활쏘기를 즐겼다. 집현전 학사들의 마음을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지만, 신숙주와 정인지 등을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세조는 대군 시절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여 도제조(都提調)로서 토지제도 개혁을 맡았고, 〈치평요람 治平要覽〉·〈역대병요 歷代兵要〉·〈의주상정 儀註詳定〉 등의 책을 찬술했으며, 중국의 〈운회 韻會〉를 한글로 번역했다.
집현전 내 수양대군의 지지세력으로, 세조는 즉위 후 그를 당태종의 위징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는 보통의 왕자로 남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문종이 병약했고, 후사(단종)도 나이가 어렸다. 세종 자신도 병중인데다가, 문종은 부왕보다도 더 병약하여 요절할 우려도 있었다. 세종은 일찍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하여 왕위계승을 둘러싼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다. 세종은 또, 자신이 죽고 세자 역시 오래 못갈 것을 예상하고 집현전의 학사들에게 어린 세손의 보필을 부탁하였다. 그는 이를 기회로 여기게 되었다.
1450년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그 뒤를 이었다. 1452년 4월 관습 도감 도제조(慣習都監都提調)에 임명되었다.[2] 그가 관습도감 도제조가 되자 사간원에서 종친에게 실직을 주는 것이 옳지 않다고 탄핵했으나 문종이 듣지 않았다.
1452년 문종은 병약하여 즉위한 지 2년여 만에 승하하고 12살의 어린 조카 단종이 즉위하였다.[2] 그런데 어린 단종이 즉위하고 김종서나 황보인 등이 황표정사를 시행하자 불만이 강하게 나오고 있었고 종친들은 저마다 영향력을 강화하려 하였다. 분경(청탁 등의 목적으로 종친을 방문하는 일)을 금지하려 하자 수양대군 등이 강력항의 하여 김종서 등 신하들은 시행하지 못했다.
세종의 죽음(1450년) 이후 수양의 병약한 형인 이향(후에 문종으로 추존됨)이 왕위에 올랐으나 2년 만에 죽었고, 왕위는 그의 12살 된 아들 이홍위(추존명 단종)에게 승계되었다.[2] 새 국왕은 너무 어렸기에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고, 정부는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 장군이 장악했다. 김종서와 그의 세력이 왕족에 대항하여 신하들의 권력을 확장할 기회를 이용하면서, 그와 수양대군 사이의 긴장은 크게 고조되었고, 수양대군 자신뿐 아니라 그의 동생인 안평대군 또한 나라를 장악할 기회를 노렸다.[3]
수양대군은 명나라의 지지를 얻기 위해 1452년 사신이 되었다. 그는 또한 유명한 전략가 한명회를 포함한 신뢰할 수 있는 동맹들을 주위에 두었는데, 한명회는 그에게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할 것을 조언했다. 1453년 수양대군은 김종서와 그의 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쿠데타 이후 그는 자신의 동생 안평대군을 체포하여 먼저 유배를 보낸 뒤 사형을 선고했다.[3]
단종이 즉위하자 왕족의 대표로서 자신을 단종을 최측근에서 모실 수 있는 보호자라고 말하였고, 무신 세력을 양성하여 왕위를 찬탈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2] 그러던 중, 안평대군 계열이 먼저 손을 쓰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자 1453년에 계유정난을 일으켰는데, 이때 그는 지나치게 비대해진 신권을 억압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종친과 사대가가 모두 지지한 것은 아니다. 이후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 등을 역임하며 권력 기반을 다지게 된다.
1453년 10월 수양대군은 한명회·권람 등과 공모하여 홍윤성·홍달손 등의 병력을 동원함으로 문종의 고명(誥命)을 받아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절재 김종서(섭정)·정분 등을 죽이고 10월 10일 아우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켜,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겸한 뒤 스스로 영의정부사 겸 섭정이 되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3] 이어 1454년 3월 논공행상을 정하여 정난공신을 책정하고 자신은 분충장의광국보조정책정난공신(奮忠杖義匡國輔祚定策靖難功臣) 1등관에 서훈하였다.
그 뒤 안평대군의 양가[7]의 재산을 적몰하고, 성녕대군 부인 성씨 등을 폐출시킨 뒤 안평대군의 가족, 측근들을 노비로 삼았다. 이후 안평대군의 처형을 유도하여 탄핵, 그해 10월 19일 강화도 배소에서 사사한 뒤, 실권을 장악했다. 3월말에는 스스로 중외 병마 도통사가 되어 병권을 장악하였고, 이어 동생 금성대군과, 단종의 보호자로 세종의 후궁이며 단종을 양육했던 혜빈 양씨 등이 그의 집권에 반발하였으나, 훈신들의 추대로 1455년 음력 6월에는 결국 단종을 강제적으로 왕위에서 밀어냄으로써 조선의 새 왕으로 등극하였다.
바로 혜빈 양씨와 금성대군이 서로 결탁하여 전횡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탄핵한 뒤 가산을 몰수시키고 혜빈 양씨는 충청도 청풍으로, 금성대군은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보냈다. 또한 영풍군은 예안(禮安)으로 유배 된 후 6월 27일에는 임실(任實)로 이배 되었다가 청풍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시킨다. 한남군은 윤6월 11일에 금산(錦山)에 유배보냈다가 아산(牙山)에 이배되었으며 세조 2년인 1456년 음력 6월 27일에는 함양(咸陽)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같은 해 1455년 12월 17일(음력 11월 9일) 혜빈 양씨를 교수형에 처한다.
세조는 즉위 초 왕권 강화를 목표로 중앙집권을 추진, 육조직계제를 실시하고 세종대의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했다.[8] 오가작통법을 실시하여 세금 징수를 용이하게 하였고, 면리제를 통해 지방 통제를 강화했다. 또한 호패법을 다시 복원하였다. 국방력 신장을 위해 군제를 확정하고, 각 역로를 개정하여 찰방(察訪)을 신설했으며, 예문관의 장서를 간행했고, 각 도의 거진(巨鎭)을 설치했다.
각지의 수령은 국왕이 직접 임명하되, 백성들에게 수령을 탄핵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8도의 관찰사가 일부 작은 현의 현감, 현령을 임명할 수 있었으나 현령과 현감은 왕이 직접 임명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의정부서사제에서 왕이 직접 육조판서들의 서류를 결재하고 정무를 주관하는 6조 직계제로의 개정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예조참판 하위지가 이를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세조는 하위지의 재주와 신념을 아껴 그에게 여러번 교서를 내려 불렀으나, 하위지는 단종에 대한 충심으로 세조의 녹(祿)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받지 않았다고 한다.[8] 세조는 하위지를 처형하려 했으며, 사관은 이를 두고 정변 후임을 알지 못하고 하위지가 어리석은 의견을 개진했다고 평했다.
하위지는 즉위 초 세조가 역대병요와 병서 편찬을 도운 사람들을 승진시키려 한 것을 반대하였다. 단종 즉위 초, 수양대군이 앞장서서 《역대병요》 편찬에 참여했던 집현전 학사의 품계를 승진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서적의 편찬 사업은 집현전 본래의 업무이므로 품계를 올려야 할 이유가 없음을 들어 단종에게 상소를 올려 자신의 품계를 올리는 것에 반대하였다.
한명회를 시켜서 행정기관의 개편을 추진하고 향소부곡 제도를 폐지한다. 한명회는 오가작통법과 면리제를 창안하여 세조에게 건의한다. 오가작통법은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으나 면리제는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계속 유지된다.
1455년 수양대군은 단종을 폐위시키고 조선의 새로운 통치자로 즉위했다.(오늘날 묘호 "세조"로 알려져 있다).[2]
세조는 태종의 유지를 이어 왕권을 강화하고 의정부의 권력을 약화시켜 관리들을 직접 왕의 통제하에 두었다. 또한 태종이 도입한 행정 체제를 더욱 발전시켜 정부가 정확한 인구 수를 파악하고 군대를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도록 했다.
세조는 경국대전을 편찬했는데, 이는 왕조 행정의 초석이 되었고 한국 최초의 성문 헌법의 형태를 제공했다.
1456년 2월 성삼문 등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세조의 측근인 정창손의 사위 김질의 밀고로 일망타진되었다.[9] 김질은 장인 정창손의 설득에 넘어가 사육신의 정변 기도를 폭로했다. 1456년 6월 성삼문 등이 단종의 복위를 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한 후 강원도 영월로 유배보내고, 집현전을 폐지하였다. 세조는 사육신을 직접 국문하였다. 하위지 등은 세조의 용서 제안을 거절했고, 박팽년은 세조에게 신(臣)이라 말하기를 거부하고, 거(巨)자로 썼으며, 세조 즉위 이후에 받은 월급은 받지 않고 창고에 쌓아두었다. 세조는 사육신과 관련자들을 비롯한 그 남성 일족 6백여 명을 처형하고, 유배보냈으며 사육신 가문의 여성들은 공신의 노비와 관비로 충군하였으며, 4촌 이상의 친척들은 노비로 삼거나 외지로 유배를 보내는 등 대숙청을 감행했다.[9]
1457년 9월, 세조의 넷째 동생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등이 또다시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세조는 금성대군과 관련자들을 모두 처형하였다. 또한 사육신과 관계된 여인과 재산을 공신의 노비로 분배하여 멸문시켰다.[9] 이 사건으로 인해 세조의 의심은 더욱 커졌고, 결국 단종에게 죽음을 내리게 되었다. 단종은 17세의 나이로 사약을 받았다.[9]
사육신의 단종복위 거사에 참여했던 성균관사예 김질은 실패의 두려움 또는 장인 정창손의 회유로 세조에게 반역을 고변하였다. 세조는 성삼문 등 주모자 6인을 국문하였다. 세조는 사육신 본인과 자녀, 부친, 형제 및 집안 직계 남성 6백여 명을 처형하고, 집안 여성, 4촌 이상은 노비로 보내거나 변방으로 유배보냈다.
세조는 박팽년의 재주를 아껴 회유하려 했으나, 박팽년은 거절했다.[28] 박팽년은 세조를 상감(上監)이라 부르지 않고 진사(進賜)라 불렀으며, 자신은 상왕(단종)의 신하라고 주장했다.[28] 박팽년은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성삼문·하위지·유성원·이개·김문기·성승·박정·권자신·송석동·윤영손·이휘와 자신의 아비 박중림을 공모자로 지목했다. 박팽년은 고문으로 옥중에서 사망했고, 다른 모의자들도 능지처사(凌遲處死) 당하였다. 그의 아버지도 능지처사되고, 동생과 아들들도 모두 처형되었다.
하위지 역시 김질의 고변으로 국문을 받게 되었다.[8] 세조는 하위지의 재주를 높이 사 회유했지만, 하위지는 거절했다.[8] 하위지는 국문장에서 세조에게 반역죄로 처벌하라고 말했다.[8] 하위지는 성삼문 등이 당한 작형(灼形)은 당하지 않았으나,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다.[8] 하위지의 두 아들도 연좌되어 사형을 받았다.[8] 하위지의 작은 아들 박은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어머니에게 효를 다할 것을 다짐하고 죽음을 맞이했다.[8] 하위지의 어린 조카들인 하포, 하원은 사형을 면하고 유배되었다.
단종복위운동 당시 나이가 어렸던 남효온은 성장한 뒤 사육신의 행적을 기록한 《추강집》의 사육신전(死六臣傳)을 남겼다.[28] 사육신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혔으며, 1691년(숙종 17)에 관작이 회복되었다.[28]
사육신과 집현전 학사들의 대대적 숙청과 함께 생육신 등의 문사들 조차 그에게 등을 돌리고 낙향, 시골과 야산에 은거하였다. 사육신 등을 처형한 뒤 문사들을 억압, 탄압한다는 비판에 직면하자 그는 정몽주의 후손들과 문도들을 발굴해서 등용한다. 이때 김숙자와 김종직 역시 등용되는데, 이들의 정계 진출 이후 향촌에 은거하던 사림파가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처음에 어떤 대신이 김종직(金宗直)을 천거하자 세조는 친히 만나보고는 면전에서 '완고하여 쓸모 없는 선비다. 등용할 것 없다.[10]'고 하였다. 그러나 훈구파의 발호를 두려워한 그는 훈구파를 숙청하지 못하는 대신, 김종직을 청요직에 기용한다.
김종직은 세조에 의해 등용되었으면서도 후일 조의제문을 지어 세조의 반정을 조롱했고, 김종직의 제자들과 그의 학파는 세조의 반정을 찬탈로 규정하고 조롱하였으며, 이는 훗날 김일손이 무오사화 때 처형당한 원인이 되었다.[11] 세조 즉위 중반에는 사림의 세력은 미약하였으나 손자인 성종대에 사림은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하여 하나의 정파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세조는 신하들의 권력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폈다. 세조는 관제 개편과 신하들의 기강 확립을 통해 중앙 집권제를 확립했으며, 호패법을 다시 복원하였다. 국방력 신장에도 힘써서, 각 읍의 군사를 5위에 분속토록 하여 군제(軍制)를 확정, 각 역로를 개정하여 찰방(察訪)을 신설, 예문관의 장서를 간행했고, 각 도의 거진(巨鎭 : 중간 규모의 군진)을 설치했다.
1457년에는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의 편찬을 시작하는 등 법전 편찬과 서적 편찬 등의 사업을 벌였으며, 원구제(圜丘祭)를 실시하는 등의 문화 사업을 펼쳐 사회를 새롭게 바꾸어 나갔다.
1459년 신숙주(申淑舟)를 파견하여 여진족을 타이르게 했고, 경고를 듣지 않자 토포사를 보냈다. 또한, 이 해에 아버지 세종대왕과 장남 의경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월인석보》를 간행하였다.
이듬해 《경국대전》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1461년에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신설하여 불경을 간행했으며, 불교를 숭상하여 《원각경》(圓覺經)을 편찬하게 하고 원각사(圓覺寺)를 창건했다. 또한 과전(科田)을 폐지하고 직전제(職田制)를 실시토록 하였다. 규형(窺衡)·인지의(印地儀)를 친히 제작하여 토지 측량을 용이하게 하였다.
한편 그가 며느리인 귀인 권씨(貴人 權氏)와 소훈 윤씨(昭訓 尹氏)를 범하려 했다는 추문이 돌았다. 권귀인과 윤소훈은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의 후궁들이었다.[12][13] 김일손은 이 사실을 그대로 사초에 실었다가 사화의 원인이 되었고 김일손 자신도 희생되었다.[12][13]김일손은 귀인권씨의 조카이자 양자 허반(許磐)에게서 들은 것을 사초에 기록하였는데[12] 연산군은 사초 기사 중 권귀인은 바로 덕종의 후궁이온데 세조께서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는 구절과 '세조는 소훈 윤씨(昭訓 尹氏)에게 많은 전민과 가사를 내렸고 항상 어가가 따랐다'는 사초의 내용을 구실삼았다.[12][13]
젊은 조카로부터 왕위를 빼앗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조는 한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통치자이자 행정가 중 한 명으로 입증되었다. 먼저 그는 태종의 유지를 이어 왕권을 강화하고 의정부의 권력을 약화시켜 관리들을 직접 왕의 통제하에 두었다. 또한 태종이 도입한 행정 체제를 더욱 발전시켜 정부가 정확한 인구 수를 파악하고 군대를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도록 했다 (이로 인해 이시애의 난이 발생했지만, 그는 이를 진압
2. 1. 탄생과 성장
1417년(태종 17년) 11월 7일, 태종의 셋째 왕자인 아버지 충녕대군(세종)과 경숙옹주 심씨(소헌왕후)의 차남이자 네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1] 궁궐 밖에서 양육되었으며 세종이 즉위한 뒤에도 한동안 궁밖 민가에서 자랐다. 당시 유아 사망률이 높았고, 큰할아버지인 정종과 할아버지인 태종의 승하가 잇따랐기 때문에 아이가 자라기에는 환경이 좋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세조는 어릴 때 민간에서 자랐으므로 모든 어려움과 사실과 거짓을 자세히 일찍부터 겪어 알고 있었다고 세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세조는 다섯 살의 나이에 《효경(孝經)》을 외워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이러한 영특함은 자라면서 형제들 중 단연 뛰어나 아버지 세종과 형인 문종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는 뛰어난 궁술, 기마술, 무예 실력을 보였으며 탁월한 군사 지휘관이었지만, 전장에 나선 적은 없었다.[1] 또한 음악적 재능도 뛰어나 아버지의 기쁨을 사기도 했는데, 세종은 그가 마음만 먹으면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1] 1428년 '''수양대군'''이라는 작위를 받았다.[1]
2. 2. 대군 시절
1428년(세종 10년) 6월 16일, '''진평대군'''(晉平大君)에 봉작되었다. 그해 10월 13일 당시 군기감 부정(軍器監副正)으로 재직중이던 윤번(尹璠)의 딸 낙랑부대부인 윤씨(정희왕후)와 결혼식을 올렸다.1429년(세종 11년) 2월 세종이 평강(平康)에 친히 나가 무예를 강무(講武)할 때, 그는 그간 익혔던 궁술을 발휘한 적이 있었다. 이 때가 그의 나이 불과 열 셋이었다. 몰이꾼들이 몰아오는 사슴을 향해 화살 7발을 쏘았는데 이것이 모두 사슴 목을 관통하였으니 보는 이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1431년 여름 피부병인 창진에 걸렸으나, 그해 9월 23일 의원 양홍달(楊弘達), 조청(曹聽), 노중례(盧重禮) 등의 진료로 병이 나았다. 세종대왕은 이들 의원에게 옷을 선물로 하사했다.
처음에는 진평대군이었으나 후에 봉작이 바뀌어 1433년(세종 15년) 6월 27일 '''함평대군'''(咸平大君)이 되었는데, 함평(咸平)은 함흥(咸興)의 별칭이었다. 그런데 그의 작호를 전라도 함평현(咸平縣)과 혼동될까 우려된다는 이유로, 그해 7월 1일 '''진양대군'''(晉陽大君)으로 개봉되었다.
1445년(세종 27년) 다시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개봉되었다.
정몽주의 제자 권우의 문하에서 수학한 세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유교 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세자(뒤의 문종)을 성균관에 입학시키고, 이어 다른 대군들도 성균관에 입학시켜 성리학을 배우게 하였다. 세종은 왕업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왕자들의 교육에도 상당히 관심을 갖고 신경을 썼다. 이러한 세종의 특별 배려 속에 왕자들과 함께 수학하였으나 그 가운데에서도 다재다능하여 일찍 배운 것을 습득하고 응용하였다.
1417년, 충녕대군(훗날 세종)과 그의 정비 청송 심씨(훗날 소헌왕후) 사이에서 넷째 아이이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428년, 그는 '''수양대군'''이라는 작위를 받았다.[1]
1433년 12월 12일 조선을 방문했다가 명나라로 돌아가는 사신 맹날가래(孟捏加來)·최진(崔眞) 등을 세종을 대신하여 전송하였다. 1434년 18세 때 그는 세종을 따라 왕방산(王方山)에서 강무하게 되었는데 그는 하루아침에 사슴과 노루 수 십 마리를 쏘아서 털에 묻은 피가 바람에 날려 겉옷이 다 붉게 물들었다. 늙은 무사 이영기(李英奇) 등이 보고 감격하여 “오늘 뜻밖에 다시 태조의 신무(神武)를 뵙는 듯합니다.” 하였다. 박시백 화백의 《조선왕조실록》(휴머니스트)에 의하면, 수양대군은 박식하지만 병약했던 형 문종과는 달리 무예 실력도 출중했다. 승마와 격구, 활쏘기 재주가 뛰어났고, 사냥을 즐겼다.[1]
그는 일찍부터 무인의 기질이 뛰어났다. 사람들이 궁마(弓馬)에 대한 일을 이야기하려 하면 그는 마음속으로 이를 좋아하였고 자신도 그렇게 하려고 마음먹기도 하여 항상 활과 화살을 가지고 다녔다. 또 당시 수렵 중 가장 재미있고 호쾌한 것으로 꼽히던 매사냥을 좋아하여 자신이 직접 매를 사육시켜 사냥을 다니곤 하였다. 자칫 궁중 생활로 약해질지도 모르는 체력을 승마를 통하여 다져나갔다. 세조는 사냥과 궁술, 마술 등을 익혀 상당한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고, 이는 훗날 무인 선발과 그가 중심이 되어 편찬하는 <역대병요(歷代兵要)> 찬집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1435년(세종 17) 4월 1일 명나라 사신이 한성에 왔으나, 병으로 접견이 어려운 세종 대신, 4월 27일까지 그가 명나라 사신단을 접대했다. 1436년(세종 18) 2월 세종이 세조가 문학을 좋아한다고 하여 친히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내려 주었다. 이 때 세조가 고금의 서사(書史)를 다 보았고, 더욱 성리학에 정통하였는데 매양 말하기를, '천하의 서적을 다 읽지 않고서는 나는 다시 활을 잡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그의 형인 세자는 일찍이 수양의 활에다 쓰기를, '철석 같은 그 활이여, 벼락인양 그 살이로다. 버티임은 보겠으나 풀어짐을 못 보겠네.'라는 시를 친히 적어주기도 하였다. 그는 뛰어난 궁술, 기마술, 무예 실력을 보였으며 탁월한 군사 지휘관이었지만, 정작 전장에 나선 적은 없었다. 또한 음악적 재능도 뛰어나 아버지의 기쁨을 사기도 했는데, 세종은 그가 마음만 먹으면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1]
부왕 세종의 병환과 그의 재능을 알아본 세종의 특별 지시로 그는 정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1439년(세종 21년) 7월 종친(宗親)들을 관리하는 종부시 제조(宗簿寺提調)가 되었다. 이후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면서 전제상정소 도제조(田制詳定所都提調)가 되어 농지를 실제 농민에게 부여하는 토지제도의 분배 재개혁을 주관하였으며, 세종 재위기간 중 치평요람(治平要覽)· 역대병요(歷代兵要)·의주상정(儀註詳定) 등의 서적의 편찬과 찬술을 감독하였으며 중국의 운회(韻會)를 훈민정음(한글)로 번역하였다. 또한 명나라와 천축국에서 불서들을 구하여 불서들을 훈민정음으로 번역, 보급하기도 했다.
1440년(세종 22년)에 세종이 규표(圭表 : 천문관측기계의 하나)를 바로 잡을 때의 세조와 안평대군 및 다른 유신들에게 명하여 삼각산 보현봉(普賢峯)에 올라 해지는 곳을 관측하게 하였다. 돌길이 위험하고 또 불측한 벼랑이 내려다 보였으므로 안평대군 이하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눈이 어지럽고 다리가 떨려서 전진하지 못하였으나 세조만은 유난히 걸음이 나는 듯하여 순식간에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니 보는 이가 모두 탄복하여 '따를 수 없다' 하였다. 늘 소매 넓은 옷을 입었으므로 궁중 사람들이 모두 웃으니 세종이 이르기를, "너와 같은 용력있는 사람은 의복이 이만큼이나 넓고 커야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1441년 6월 세종의 명으로 《치평요람(治平要覽)》의 간행, 인쇄를 감독하였다. 1443년 10월 말에는 토지의 측정에 참여하였다. 1443년(세종 25년) 11월 전제 상정소(田制詳定所)가 설치되자 도제조(都提調)가 되었다가 1444년 전제소 제조(田制所提調)에 임명되었고, 1445년(세종 27년) 진양대군에서 고쳐져서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개봉되었다.
세종이 병들고 세자였던 문종이 대리청정을 하자, 그는 동생인 안평대군과 함께 신하들에게 세종과 문종의 교지를 전하기도 하였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형제는 당시 조정 중신들이 왕권에 공공연히 도전하는 것을 보고 탐탁치 않게 여기며 후일을 기약했다고 한다. 그러나 둘째 아들 수양과 셋째 아들 안평에게 야심이 있다는 것을 간파한 부왕 세종은 수양과 안평을 궐 근처에서 떨어져 있게 했다.
세종 자신의 생각도 통념적인 종법대로 적자로서 왕위를 계승시켜 왕위 계승의 올바른 길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수양의 야심을 경계하면서도 수양이 왕위에 오르리라는 생각은 불가능하리라 확신했고, 세조의 형인 문종도 모든 면에 있어 군주로서의 능력을 십분 가지고 있었다. 수양의 역할이란 그저 왕실을 보위하는데 기여하는 것으로 끝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종은 체력, 건강이 좋지 않았다. 세종 자신도 소갈증과 눈병, 고혈압을 비롯한 질환에 시달려 건강이 좋지 않고, 좀 이른 시기이기는 하지만 문종에게 섭정을 하게 하여 왕위계승을 둘러싼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다. 이에 부왕 세종은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신주원, 이개 등 집현전 학사들에게 어린 원손을 보필하라는 당부를 여러번 거듭하였다.
2. 2. 1. 교육과 소년기
정몽주의 제자 권우의 문하에서 수학한 세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유교 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세자(뒤의 문종)을 성균관에 입학시키고, 이어 다른 대군들도 성균관에 입학시켜 성리학을 배우게 하였다. 세종은 왕업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왕자들의 교육에도 상당히 관심을 갖고 신경을 썼다. 이러한 세종의 특별 배려 속에 왕자들과 함께 수학하였으나 그 가운데에서도 다재다능하여 일찍 배운 것을 습득하고 응용하였다.1417년, 충녕대군(훗날 세종)과 그의 정비 청송 심씨(훗날 소헌왕후) 사이에서 넷째 아이이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428년, 그는 '''수양대군'''이라는 작위를 받았다.[1]
1433년 12월 12일 조선을 방문했다가 명나라로 돌아가는 사신 맹날가래(孟捏加來)·최진(崔眞) 등을 세종을 대신하여 전송하였다. 1434년 18세 때 그는 세종을 따라 왕방산(王方山)에서 강무하게 되었는데 그는 하루아침에 사슴과 노루 수 십 마리를 쏘아서 털에 묻은 피가 바람에 날려 겉옷이 다 붉게 물들었다. 늙은 무사 이영기(李英奇) 등이 보고 감격하여 “오늘 뜻밖에 다시 태조의 신무(神武)를 뵙는 듯합니다.” 하였다. 박시백 화백의 《조선왕조실록》(휴머니스트)에 의하면, 수양대군은 박식하지만 병약했던 형 문종과는 달리 무예 실력도 출중했다. 승마와 격구, 활쏘기 재주가 뛰어났고, 사냥을 즐겼다.[1]
그는 일찍부터 무인의 기질이 뛰어났다. 사람들이 궁마(弓馬)에 대한 일을 이야기하려 하면 그는 마음속으로 이를 좋아하였고 자신도 그렇게 하려고 마음먹기도 하여 항상 활과 화살을 가지고 다녔다. 또 당시 수렵 중 가장 재미있고 호쾌한 것으로 꼽히던 매사냥을 좋아하여 자신이 직접 매를 사육시켜 사냥을 다니곤 하였다. 자칫 궁중 생활로 약해질지도 모르는 체력을 승마를 통하여 다져나갔다. 세조는 사냥과 궁술, 마술 등을 익혀 상당한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고, 이는 훗날 무인 선발과 그가 중심이 되어 편찬하는 <역대병요(歷代兵要)> 찬집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1435년(세종 17) 4월 1일 명나라 사신이 한성에 왔으나, 병으로 접견이 어려운 세종 대신, 4월 27일까지 그가 명나라 사신단을 접대했다. 1436년(세종 18) 2월 세종이 세조가 문학을 좋아한다고 하여 친히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내려 주었다. 이 때 세조가 고금의 서사(書史)를 다 보았고, 더욱 성리학에 정통하였는데 매양 말하기를, '천하의 서적을 다 읽지 않고서는 나는 다시 활을 잡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그의 형인 세자는 일찍이 수양의 활에다 쓰기를, '철석 같은 그 활이여, 벼락인양 그 살이로다. 버티임은 보겠으나 풀어짐을 못 보겠네.'라는 시를 친히 적어주기도 하였다. 그는 뛰어난 궁술, 기마술, 무예 실력을 보였으며 탁월한 군사 지휘관이었지만, 정작 전장에 나선 적은 없었다. 또한 음악적 재능도 뛰어나 아버지의 기쁨을 사기도 했는데, 세종은 그가 마음만 먹으면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1]
2. 2. 2. 정치 활동 초기와 전제 개혁
부왕 세종의 병환과 그의 재능을 알아본 세종의 특별 지시로 그는 정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1439년(세종 21년) 7월 종친(宗親)들을 관리하는 종부시 제조(宗簿寺提調)가 되었다. 이후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면서 전제상정소 도제조(田制詳定所都提調)가 되어 농지를 실제 농민에게 부여하는 토지제도의 분배 재개혁을 주관하였으며, 세종 재위기간 중 치평요람(治平要覽)· 역대병요(歷代兵要)·의주상정(儀註詳定) 등의 서적의 편찬과 찬술을 감독하였으며 중국의 운회(韻會)를 훈민정음(한글)로 번역하였다. 또한 명나라와 천축국에서 불서들을 구하여 불서들을 훈민정음으로 번역, 보급하기도 했다.1440년(세종 22년)에 세종이 규표(圭表 : 천문관측기계의 하나)를 바로 잡을 때의 세조와 안평대군 및 다른 유신들에게 명하여 삼각산 보현봉(普賢峯)에 올라 해지는 곳을 관측하게 하였다. 돌길이 위험하고 또 불측한 벼랑이 내려다 보였으므로 안평대군 이하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눈이 어지럽고 다리가 떨려서 전진하지 못하였으나 세조만은 유난히 걸음이 나는 듯하여 순식간에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니 보는 이가 모두 탄복하여 '따를 수 없다' 하였다. 늘 소매 넓은 옷을 입었으므로 궁중 사람들이 모두 웃으니 세종이 이르기를, "너와 같은 용력있는 사람은 의복이 이만큼이나 넓고 커야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1441년 6월 세종의 명으로 《치평요람(治平要覽)》의 간행, 인쇄를 감독하였다. 1443년 10월 말에는 토지의 측정에 참여하였다. 1443년(세종 25년) 11월 전제 상정소(田制詳定所)가 설치되자 도제조(都提調)가 되었다가 1444년 전제소 제조(田制所提調)에 임명되었고, 1445년(세종 27년) 진양대군에서 고쳐져서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개봉되었다.
2. 2. 3. 문종의 대리청정
세종이 병들고 세자였던 문종이 대리청정을 하자, 그는 동생인 안평대군과 함께 신하들에게 세종과 문종의 교지를 전하기도 하였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형제는 당시 조정 중신들이 왕권에 공공연히 도전하는 것을 보고 탐탁치 않게 여기며 후일을 기약했다고 한다. 그러나 둘째 아들 수양과 셋째 아들 안평에게 야심이 있다는 것을 간파한 부왕 세종은 수양과 안평을 궐 근처에서 떨어져 있게 했다.세종 자신의 생각도 통념적인 종법대로 적자로서 왕위를 계승시켜 왕위 계승의 올바른 길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수양의 야심을 경계하면서도 수양이 왕위에 오르리라는 생각은 불가능하리라 확신했고, 세조의 형인 문종도 모든 면에 있어 군주로서의 능력을 십분 가지고 있었다. 수양의 역할이란 그저 왕실을 보위하는데 기여하는 것으로 끝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종은 체력, 건강이 좋지 않았다. 세종 자신도 소갈증과 눈병, 고혈압을 비롯한 질환에 시달려 건강이 좋지 않고, 좀 이른 시기이기는 하지만 문종에게 섭정을 하게 하여 왕위계승을 둘러싼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다. 이에 부왕 세종은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신주원, 이개 등 집현전 학사들에게 어린 원손을 보필하라는 당부를 여러번 거듭하였다.
2. 3. 저작 활동
세조는 왕위에 대한 야심을 숨기고 학문과 서적 간행에 힘쓰며 인맥을 형성했다. 그는 명나라와 인도에서 불서를 수입하여 탐독하고, 매사냥과 활쏘기를 즐겼다. 집현전 학사들의 마음을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지만, 신숙주와 정인지 등을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세조는 대군 시절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여 도제조(都提調)로서 토지제도 개혁을 맡았고, 〈치평요람 治平要覽〉·〈역대병요 歷代兵要〉·〈의주상정 儀註詳定〉 등의 책을 찬술했으며, 중국의 〈운회 韻會〉를 한글로 번역했다.
2. 4. 집권 과정
1450년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그 뒤를 이었다. 1452년 4월 수양대군은 관습 도감 도제조(慣習都監都提調)에 임명되었다.[2] 그가 관습도감 도제조가 되자 사간원에서 종친에게 실직을 주는 것이 옳지 않다고 탄핵했으나 문종이 듣지 않았다.1452년 문종은 병약하여 즉위한 지 2년여 만에 승하하고 12살의 어린 조카 단종이 즉위하였다.[2] 그런데 어린 단종이 즉위하고 김종서나 황보인 등이 황표정사를 시행하자 불만이 강하게 나오고 있었고 종친들은 저마다 영향력을 강화하려 하였다. 분경(청탁 등의 목적으로 종친을 방문하는 일)을 금지하려 하자 수양대군 등이 강력항의 하여 김종서 등 신하들은 시행하지 못했다. 새 국왕은 너무 어렸기에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고, 정부는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 장군이 장악했다. 김종서와 그의 세력이 왕족에 대항하여 신하들의 권력을 확장할 기회를 이용하면서, 그와 수양대군 사이의 긴장은 크게 고조되었고, 수양대군 자신뿐 아니라 그의 동생인 안평대군 또한 나라를 장악할 기회를 노렸다.[3]
단종이 즉위하자 왕족의 대표로서 자신을 단종을 최측근에서 모실 수 있는 보호자라고 말하였고, 무신 세력을 양성하여 왕위를 찬탈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2] 그러던 중, 안평대군 계열이 먼저 손을 쓰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자 1453년에 계유정난을 일으켰는데, 이때 그는 지나치게 비대해진 신권을 억압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종친과 사대가가 모두 지지한 것은 아니다. 이후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 등을 역임하며 권력 기반을 다지게 된다.
1453년 10월 수양대군은 한명회·권람 등과 공모하여 홍윤성·홍달손 등의 병력을 동원함으로 문종의 고명(誥命)을 받아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절재 김종서(섭정)·정분 등을 죽이고 10월 10일 아우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켜,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겸한 뒤 스스로 영의정부사 겸 섭정이 되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3] 이어 1454년 3월 논공행상을 정하여 정난공신을 책정하고 자신은 분충장의광국보조정책정난공신(奮忠杖義匡國輔祚定策靖難功臣) 1등관에 서훈하였다.
그 뒤 안평대군의 양가[7]의 재산을 적몰하고, 성녕대군 부인 성씨 등을 폐출시킨 뒤 안평대군의 가족, 측근들을 노비로 삼았다. 이후 안평대군의 처형을 유도하여 탄핵, 그해 10월 19일 강화도 배소에서 사사한 뒤, 실권을 장악했다. 3월말에는 스스로 중외 병마 도통사가 되어 병권을 장악하였고, 이어 동생 금성대군과, 단종의 보호자로 세종의 후궁이며 단종을 양육했던 혜빈 양씨 등이 그의 집권에 반발하였으나, 훈신들의 추대로 1455년 음력 6월에는 결국 단종을 강제적으로 왕위에서 밀어냄으로써 조선의 새 왕으로 등극하였다.
바로 혜빈 양씨와 금성대군이 서로 결탁하여 전횡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탄핵한 뒤 가산을 몰수시키고 혜빈 양씨는 충청도 청풍으로, 금성대군은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보냈다. 또한 영풍군은 예안(禮安)으로 유배 된 후 6월 27일에는 임실(任實)로 이배 되었다가 청풍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시킨다. 한남군은 윤6월 11일에 금산(錦山)에 유배보냈다가 아산(牙山)에 이배되었으며 세조 2년인 1456년 음력 6월 27일에는 함양(咸陽)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같은 해 1455년 12월 17일(음력 11월 9일) 혜빈 양씨를 교수형에 처한다.
2. 4. 1. 왕족, 훈신들의 위기 의식
그는 보통의 왕자로 남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문종이 병약했고, 후사(단종)도 나이가 어렸다. 세종 자신도 병중인데다가, 문종은 부왕보다도 더 병약하여 요절할 우려도 있었다. 세종은 일찍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하여 왕위계승을 둘러싼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다. 세종은 또, 자신이 죽고 세자 역시 오래 못갈 것을 예상하고 집현전의 학사들에게 어린 세손의 보필을 부탁하였다. 그는 이를 기회로 여기게 되었다.1450년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그 뒤를 이었다. 1452년 4월 관습 도감 도제조(慣習都監都提調)에 임명되었다. 그가 관습도감 도제조가 되자 사간원에서 종친에게 실직을 주는 것이 옳지 않다고 탄핵했으나 문종이 듣지 않았다.
1452년 문종은 병약하여 즉위한 지 2년여 만에 승하하고 12살의 어린 조카 단종이 즉위하였다. 그런데 어린 단종이 즉위하고 김종서나 황보인 등이 황표정사를 시행하자 불만이 강하게 나오고 있었고 종친들은 저마다 영향력을 강화하려 하였다. 분경(청탁 등의 목적으로 종친을 방문하는 일)을 금지하려 하자 수양대군 등이 강력항의 하여 김종서 등 신하들은 시행하지 못했다.
세종의 죽음(1450년) 이후 수양의 병약한 형인 이향(후에 문종으로 추존됨)이 왕위에 올랐으나 2년 만에 죽었고, 왕위는 그의 12살 된 아들 이홍위(추존명 단종)에게 승계되었다.[2] 새 국왕은 너무 어렸기에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고, 정부는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 장군이 장악했다. 김종서와 그의 세력이 왕족에 대항하여 신하들의 권력을 확장할 기회를 이용하면서, 그와 수양대군 사이의 긴장은 크게 고조되었고, 수양대군 자신뿐 아니라 그의 동생인 안평대군 또한 나라를 장악할 기회를 노렸다.[3]
수양대군은 명나라의 지지를 얻기 위해 1452년 사신이 되었다. 그는 또한 유명한 전략가 한명회를 포함한 신뢰할 수 있는 동맹들을 주위에 두었는데, 한명회는 그에게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할 것을 조언했다. 1453년 수양대군은 김종서와 그의 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쿠데타 이후 그는 자신의 동생 안평대군을 체포하여 먼저 유배를 보낸 뒤 사형을 선고했다.[3]
2. 4. 2. 정변 기도와 권력 장악
단종이 즉위하자 왕족의 대표로서 자신을 단종을 최측근에서 모실 수 있는 보호자라고 말하였고, 무신 세력을 양성하여 왕위를 찬탈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2] 그러던 중, 안평대군 계열이 먼저 손을 쓰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자 1453년에 계유정난을 일으켰는데, 이때 그는 지나치게 비대해진 신권을 억압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종친과 사대가가 모두 지지한 것은 아니다. 이후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 등을 역임하며 권력 기반을 다지게 된다.1453년 10월 수양대군은 한명회·권람 등과 공모하여 홍윤성·홍달손 등의 병력을 동원함으로 문종의 고명(誥命)을 받아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절재 김종서(섭정)·정분 등을 죽이고 10월 10일 아우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켜,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겸한 뒤 스스로 영의정부사 겸 섭정이 되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3] 이어 1454년(단종 3년) 3월 논공행상을 정하여 정난공신을 책정하고 자신은 분충장의광국보조정책정난공신(奮忠杖義匡國輔祚定策靖難功臣) 1등관에 서훈하였다.
그 뒤 안평대군의 양가[7]의 재산을 적몰하고, 성녕대군 부인 성씨 등을 폐출시킨 뒤 안평대군의 가족, 측근들을 노비로 삼았다. 이후 안평대군의 처형을 유도하여 탄핵, 그해 10월 19일 강화도 배소에서 사사한 뒤, 실권을 장악했다. 3월말에는 스스로 중외 병마 도통사가 되어 병권을 장악하였고, 이어 동생 금성대군과, 단종의 보호자로 세종의 후궁이며 단종을 양육했던 혜빈 양씨 등이 그의 집권에 반발하였으나, 훈신들의 추대로 1455년 음력 6월에는 결국 단종을 강제적으로 왕위에서 밀어냄으로써 조선의 새 왕으로 등극하였다.
바로 혜빈 양씨와 금성대군이 서로 결탁하여 전횡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탄핵한 뒤 가산을 몰수시키고 혜빈 양씨는 충청도 청풍으로, 금성대군은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보냈다. 또한 영풍군은 예안(禮安)으로 유배 된 후 6월 27일에는 임실(任實)로 이배 되었다가 청풍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시킨다. 한남군은 윤6월 11일에 금산(錦山)에 유배보냈다가 아산(牙山)에 이배되었으며 세조 2년인 1456년 음력 6월 27일에는 함양(咸陽)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같은 해 1455년 12월 17일(음력 11월 9일) 혜빈 양씨를 교수형에 처한다.
2. 5. 즉위 이후
## 즉위 이후### 즉위 초반
세조는 즉위 초 왕권 강화를 목표로 중앙집권을 추진, 육조직계제를 실시하고 세종대의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했다.[8] 오가작통법을 실시하여 세금 징수를 용이하게 하였고, 면리제를 통해 지방 통제를 강화했다. 또한 호패법을 다시 복원하였다. 국방력 신장을 위해 군제를 확정하고, 각 역로를 개정하여 찰방(察訪)을 신설했으며, 예문관의 장서를 간행했고, 각 도의 거진(巨鎭)을 설치했다.
각지의 수령은 국왕이 직접 임명하되, 백성들에게 수령을 탄핵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8도의 관찰사가 일부 작은 현의 현감, 현령을 임명할 수 있었으나 현령과 현감은 왕이 직접 임명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의정부서사제에서 왕이 직접 육조판서들의 서류를 결재하고 정무를 주관하는 6조 직계제로의 개정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예조참판 하위지가 이를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세조는 하위지의 재주와 신념을 아껴 그에게 여러번 교서를 내려 불렀으나, 하위지는 단종에 대한 충심으로 세조의 녹(祿)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받지 않았다고 한다.[8] 세조는 하위지를 처형하려 했으며, 사관은 이를 두고 정변 후임을 알지 못하고 하위지가 어리석은 의견을 개진했다고 평했다.
하위지는 즉위 초 세조가 역대병요와 병서 편찬을 도운 사람들을 승진시키려 한 것을 반대하였다. 단종 즉위 초, 수양대군이 앞장서서 《역대병요》 편찬에 참여했던 집현전 학사의 품계를 승진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서적의 편찬 사업은 집현전 본래의 업무이므로 품계를 올려야 할 이유가 없음을 들어 단종에게 상소를 올려 자신의 품계를 올리는 것에 반대하였다.
한명회를 시켜서 행정기관의 개편을 추진하고 향소부곡 제도를 폐지한다. 한명회는 오가작통법과 면리제를 창안하여 세조에게 건의한다. 오가작통법은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으나 면리제는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계속 유지된다.
1455년 수양대군은 단종을 폐위시키고 조선의 새로운 통치자로 즉위했다.(오늘날 묘호 "세조"로 알려져 있다).[2]
세조는 태종의 유지를 이어 왕권을 강화하고 의정부의 권력을 약화시켜 관리들을 직접 왕의 통제하에 두었다. 또한 태종이 도입한 행정 체제를 더욱 발전시켜 정부가 정확한 인구 수를 파악하고 군대를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도록 했다.
세조는 경국대전을 편찬했는데, 이는 왕조 행정의 초석이 되었고 한국 최초의 성문 헌법의 형태를 제공했다.
### 두 번의 단종 복위 사건과 대숙청
1456년 2월 성삼문 등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세조의 측근인 정창손의 사위 김질의 밀고로 일망타진되었다.[9] 김질은 장인 정창손의 설득에 넘어가 사육신의 정변 기도를 폭로했다. 1456년 6월 성삼문 등이 단종의 복위를 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한 후 강원도 영월로 유배보내고, 집현전을 폐지하였다. 세조는 사육신을 직접 국문하였다. 하위지 등은 세조의 용서 제안을 거절했고, 박팽년은 세조에게 신(臣)이라 말하기를 거부하고, 거(巨)자로 썼으며, 세조 즉위 이후에 받은 월급은 받지 않고 창고에 쌓아두었다. 세조는 사육신과 관련자들을 비롯한 그 남성 일족 6백여 명을 처형하고, 유배보냈으며 사육신 가문의 여성들은 공신의 노비와 관비로 충군하였으며, 4촌 이상의 친척들은 노비로 삼거나 외지로 유배를 보내는 등 대숙청을 감행했다.[9]
1457년 9월, 세조의 넷째 동생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등이 또다시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세조는 금성대군과 관련자들을 모두 처형하였다. 또한 사육신과 관계된 여인과 재산을 공신의 노비로 분배하여 멸문시켰다.[9] 이 사건으로 인해 세조의 의심은 더욱 커졌고, 결국 단종에게 죽음을 내리게 되었다. 단종은 17세의 나이로 사약을 받았다.[9]
사육신의 단종복위 거사에 참여했던 성균관사예 김질은 실패의 두려움 또는 장인 정창손의 회유로 세조에게 반역을 고변하였다. 세조는 성삼문 등 주모자 6인을 국문하였다. 세조는 사육신 본인과 자녀, 부친, 형제 및 집안 직계 남성 6백여 명을 처형하고, 집안 여성, 4촌 이상은 노비로 보내거나 변방으로 유배보냈다.
세조는 박팽년의 재주를 아껴 회유하려 했으나, 박팽년은 거절했다.[28] 박팽년은 세조를 상감(上監)이라 부르지 않고 진사(進賜)라 불렀으며, 자신은 상왕(단종)의 신하라고 주장했다.[28] 박팽년은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성삼문·하위지·유성원·이개·김문기·성승·박정·권자신·송석동·윤영손·이휘와 자신의 아비 박중림을 공모자로 지목했다. 박팽년은 고문으로 옥중에서 사망했고, 다른 모의자들도 능지처사(凌遲處死) 당하였다. 그의 아버지도 능지처사되고, 동생과 아들들도 모두 처형되었다.
하위지 역시 김질의 고변으로 국문을 받게 되었다.[8] 세조는 하위지의 재주를 높이 사 회유했지만, 하위지는 거절했다.[8] 하위지는 국문장에서 세조에게 반역죄로 처벌하라고 말했다.[8] 하위지는 성삼문 등이 당한 작형(灼形)은 당하지 않았으나,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다.[8] 하위지의 두 아들도 연좌되어 사형을 받았다.[8] 하위지의 작은 아들 박은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어머니에게 효를 다할 것을 다짐하고 죽음을 맞이했다.[8] 하위지의 어린 조카들인 하포, 하원은 사형을 면하고 유배되었다.
단종복위운동 당시 나이가 어렸던 남효온은 성장한 뒤 사육신의 행적을 기록한 《추강집》의 사육신전(死六臣傳)을 남겼다.[28] 사육신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혔으며, 1691년(숙종 17)에 관작이 회복되었다.[28]
### 사림파의 등용
사육신과 집현전 학사들의 대대적 숙청과 함께 생육신 등의 문사들 조차 그에게 등을 돌리고 낙향, 시골과 야산에 은거하였다. 사육신 등을 처형한 뒤 문사들을 억압, 탄압한다는 비판에 직면하자 그는 정몽주의 후손들과 문도들을 발굴해서 등용한다. 이때 김숙자와 김종직 역시 등용되는데, 이들의 정계 진출 이후 향촌에 은거하던 사림파가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처음에 어떤 대신이 김종직(金宗直)을 천거하자 세조는 친히 만나보고는 면전에서 '완고하여 쓸모 없는 선비다. 등용할 것 없다.[10]'고 하였다. 그러나 훈구파의 발호를 두려워한 그는 훈구파를 숙청하지 못하는 대신, 김종직을 청요직에 기용한다.
김종직은 세조에 의해 등용되었으면서도 후일 조의제문을 지어 세조의 반정을 조롱했고, 김종직의 제자들과 그의 학파는 세조의 반정을 찬탈로 규정하고 조롱하였으며, 이는 훗날 김일손이 무오사화 때 처형당한 원인이 되었다.[11] 세조 즉위 중반에는 사림의 세력은 미약하였으나 손자인 성종대에 사림은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하여 하나의 정파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 내정과 외치
세조는 신하들의 권력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폈다. 세조는 관제 개편과 신하들의 기강 확립을 통해 중앙 집권제를 확립했으며, 호패법을 다시 복원하였다. 국방력 신장에도 힘써서, 각 읍의 군사를 5위에 분속토록 하여 군제(軍制)를 확정, 각 역로를 개정하여 찰방(察訪)을 신설, 예문관의 장서를 간행했고, 각 도의 거진(巨鎭 : 중간 규모의 군진)을 설치했다.
1457년에는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의 편찬을 시작하는 등 법전 편찬과 서적 편찬 등의 사업을 벌였으며, 원구제(圜丘祭)를 실시하는 등의 문화 사업을 펼쳐 사회를 새롭게 바꾸어 나갔다.
1459년 신숙주(申淑舟)를 파견하여 여진족을 타이르게 했고, 경고를 듣지 않자 토포사를 보냈다. 또한, 이 해에 아버지 세종대왕과 장남 의경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월인석보》를 간행하였다.
이듬해 《경국대전》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1461년에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신설하여 불경을 간행했으며, 불교를 숭상하여 《원각경》(圓覺經)을 편찬하게 하고 원각사(圓覺寺)를 창건했다. 또한 과전(科田)을 폐지하고 직전제(職田制)를 실시토록 하였다. 규형(窺衡)·인지의(印地儀)를 친히 제작하여 토지 측량을 용이하게 하였다.
한편 그가 며느리인 귀인 권씨(貴人 權氏)와 소훈 윤씨(昭訓 尹氏)를 범하려 했다는 추문이 돌았다. 권귀인과 윤소훈은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의 후궁들이었다.[12][13] 김일손은 이 사실을 그대로 사초에 실었다가 사화의 원인이 되었고 김일손 자신도 희생되었다.[12][13]김일손은 귀인권씨의 조카이자 양자 허반(許磐)에게서 들은 것을 사초에 기록하였는데[12] 연산군은 사초 기사 중 권귀인은 바로 덕종의 후궁이온데 세조께서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는 구절과 '세조는 소훈 윤씨(昭訓 尹氏)에게 많은 전민과 가사를 내렸고 항상 어가가 따랐다'는 사초의 내용을 구실삼았다.[12][13]
젊은 조카로부터 왕위를 빼앗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조는 한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통치자이자 행정가 중 한 명으로 입증되었다. 먼저 그는 태종의 유지를 이어 왕권을 강화하고 의정부의 권력을 약화시켜 관리들을 직접 왕의 통제하에 두었다. 또한 태종이 도입한 행정 체제를 더욱 발전시켜 정부가 정확한 인구 수를 파악하고 군대를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도록 했다 (이로 인해 이시애의 난이 발생했지만, 그는 이를 진압했다). 태종과 마찬가지로 세조는 강경한 대외 정책을 펼쳤으며, 1460년과 1467년에 북쪽 변경의 여진족을 공격했다. 또한 토지 제도를 개정하여 국내 경제를 개선하고 역사, 경제, 농업, 종교 서적의 출판을 장려했다.
세조 자신도 자신의 관심 분야를 바탕으로 여러 권의 책을 편찬했다. 그중 하나는 석보상절로, 붓다의 전기이다.[4] 다른 것으로는 ''월인석보''와 ''역대병요''가 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으로는 종묘 제례악의 제정과 같이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조선이 이룬 문화적 발전을 들 수 있다.[1] 그의 아버지인 세종대왕은 항상 중국 음악이 아닌 한국 음악을 조상 제사에 사용하고자 했지만, 보수적인 궁중 관리들은 중국 음악이 한국 음악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하여 세종의 노력을 막았다. 그러나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아버지가 작곡한 제례악을 수정하여 왕실 조상 제사에 사용했는데, 이는 현재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1]
가장 중요한 것은, 그는 경국대전을 편찬했는데, 이는 왕조 행정의 초석이 되었고 한국 최초의 성문 헌법의 형태를 제공했다.
### 서적 간행 지원
세종 사후 세조 때 다시 활판 인쇄술이 활기를 띠고 서적의 보급이 재확산되는데, 활자를 주조, 보급하여 활판 인쇄와 서적 출간을 장려하기도 했다. 그의 출판 사업 중에는 <법화경> <금강경> 등 대장경을 인쇄하여 유포함으로써 불교 발전에 이바지한 업적도 특기할 만하다.[14]
또한 역사 관련 서적을 편찬, 재간행, 중수하고 이를 반포하여 사대부와 일반 백성들에게도 필독을 권고하여 국가의식,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다. 〈국조보감〉의 편수, 〈동국통감〉의 편찬, 〈경제육전〉의 정비 등의 일련의 편수·편찬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밖에도 〈오륜록〉·〈역학계몽도해〉·〈주역구결〉·〈대명률강해〉·〈금강경언해〉·〈동국지도〉·〈해동성씨록〉 등의 편찬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1461년(세조 7년)에는 자신의 친필로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을 간행하였다.[15] 주자소에서 세조의 친필과 강희안의 필적을 바탕으로 을해자(乙亥字)와 한글활자로 인출한 책으로, 훈민정음 창제 무렵의 국어의 특징과 조선 초기 활자사 연구에 있어서 귀중한 판본이다.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은 후일 보물 제1520호로 지정된다.[15] 불교 경전과 불교 관련 서적들이 시중에 대량으로 유포, 확산되었으며, 훈민정음으로 된 책들 중에는 불경, 불서들이 대량으로 시중에 유통되었다.
세조 자신도 자신의 관심 분야를 바탕으로 여러 권의 책을 편찬했다. 그중 하나는 석보상절로, 붓다의 전기이다.[4] 다른 것으로는 ''월인석보''와 ''역대병요''가 있다.
### 말년
1455년 수양대군은 무력한 왕을 폐위시키고 자신을 조선의 새로운 통치자로 선포했으며, 오늘날 묘호 "세조"로 알려져 있다.[2]
그의 동생 금성대군과 사육신 여섯 명의 학자들, 성삼문, 박팽년, 이개 등이 그를 권좌에서 몰아내고 조카를 다시 왕위에 앉히려는 음모를 꾸미자, 수양대군은 전임 왕의 지위를 "상왕(上王)"에서 "노산군"으로 강등시킨 후 독살을 명했다.
젊은 조카로부터 왕위를 빼앗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조는 한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통치자이자 행정가 중 한 명으로 입증되었다. 먼저 그는 태종의 유지를 이어 왕권을 강화하고 의정부의 권력을 약화시켜 관리들을 직접 왕의 통제하에 두었다. 또한 태종이 도입한 행정 체제를 더욱 발전시켜 정부가 정확한 인구 수를 파악하고 군대를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도록 했다 (이로 인해 이시애의 난이 발생했지만, 그는 이를 진압했다). 태종과 마찬가지로 세조는 강경한 대외 정책을 펼쳤으며, 1460년과 1467년에 북쪽 변경의 여진족을 공격했다. 또한 토지 제도를 개정하여 국내 경제를 개선하고 역사, 경제, 농업, 종교 서적의 출판을 장려했다.
세조 자신도 자신의 관심 분야를 바탕으로 여러 권의 책을 편찬했다. 그중 하나는 석보상절로, 붓다의 전기이다.[4] 다른 것으로는 ''월인석보''와 ''역대병요''가 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으로는 종묘 제례악의 제정과 같이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조선이 이룬 문화적 발전을 들 수 있다.[1] 그의 아버지인 세종대왕은 항상 중국 음악이 아닌 한국 음악을 조상 제사에 사용하고자 했지만, 보수적인 궁중 관리들은 중국 음악이 한국 음악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하여 세종의 노력을 막았다. 그러나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아버지가 작곡한 제례악을 수정하여 왕실 조상 제사에 사용했는데, 이는 현재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1]
가장 중요한 것은, 그는 경국대전을 편찬했는데, 이는 왕조 행정의 초석이 되었고 한국 최초의 성문 헌법의 형태를 제공했다.
왕위에 오르자 산더미 같은 상소를 작성하거나, 왕궁 광장에 앉아 소송을 제기하는 반대 세력을 고문이나 극형 등으로 모조리 제거하고,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여 다시 육조직계제를 부활시켜 왕권을 자신의 손에 집중시켰다. 명나라에서 1457년 1월 16일 (음력)에 당시 상황이었던 명 영종이 명 경태제로부터 황위를 탈환하는 탈문의 변이 일어나자, 조카이자 상왕이었던 단종을 같은 해 6월 (음력)에 노산군으로 강등시킨 뒤, 같은 해 11월 11일(10월 24일 (음력))에 유배지에서 독살로 사형을 집행했다.
만년에는 자신의 신체 피부가 점차 나병(현재의 한센병)에 걸리게 되었고, 1468년 9월 7일에 차남인 해양대군(후의 조선 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으나, 다음 날 52세(만 나이)로 붕어하였다.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관제 개혁, 법제 및 군제 강화에 힘썼으며, 조선 왕조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또한 1457년부터 신숙주 등에게 명하여 이성계를 시작으로 역대 국왕의 치적 중 모범이 되는 사실을 수록한 편년체 역사서인 "국조보감"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 불교에 귀의

말년의 세조는 심한 악몽에 시달렸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악몽과 악몽으로 인한 불면증을 계기로, 세조는 불교에 귀의할 결심을 한다. 시중에는 그의 아들 의경세자가 낮잠을 자다가 가위눌림으로 죽은 것도, 현덕왕후의 원혼이 죽인 것이라는 낭설이 떠돌기도 했다. 세조는 오래 악몽에 시달렸고 병세가 악화되었다. 그의 불교 귀의는 유교 성리학을 국교로 하는 조선의 국가 이념, 개국 이념과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의 불교 귀의에 항의하여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 학자들과, 훈구 유학자들은 연명 상소와 사퇴 등으로 항의의사를 표시하기도 했으나, 세조의 만류로 무마되었다. 그러나 조선건국 당시 금지한 불교 금지령을 완화시켜 양반 사대부들 중에도 불자가 나타나기도 했다.
세조는 훈신 중 김수온(金守溫)의 형인 승려 신미(信眉, 본명은 김수성(金守省))를 왕사(王師)로 받들어 궁궐로 초빙했다. 유학자들은 연명상소와 사퇴를 선언했지만, 세조는 이를 묵살했다. 신미는 세종대왕 당시 세종대왕의 명으로 궁궐 내에 내원당(內願堂)의 건축과 법요(法要)를 주관했으며, 세종대왕의 명으로 복천사(福泉寺)의 중수를 맡아보았다. 문종 즉위 후에 신미는 선종의 지도자인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에 임명되기도 했다. 신미는 평창 오대산 상원사의 중건에도 관여하였다.
세조는 여러 불당의 중수와 창건을 지원하였다. 훈구파 공신들과 사림파 신진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궁내에 불당을 지었고, 원각사와 신륵사 등을 지원하였다. 또한 수종사(水鍾寺) 등의 중건을 지원하기도 했다.[14] 강원도의 월정사, 상원사 등에도 적극 시주, 후원하였고 파주 보광사, 남양주의 수종사와 양평 용문사, 합천의 해인사 등도 그가 후원하는 사찰들이었다.
그가 지원하던 사찰 중에는 경기도 양주 송촌리 용진의 운길산 수종사(水鍾寺)도 있었다. 그런데 수종사는 세조가 죽인 자신의 동생 금성대군 유가 시주해 세운 곳이기도 하다.[14] 세조는 수종사를 다시 중건하고 대대적으로 지원하였다.
또한 세조는 유점사를 왕실의 복을 비는 원당으로 정하였으며, 조선의 왕 중에서는 유일하게 직접 금강산에 와서 장안사, 표훈사, 정양사 등을 들러보며 매년 쌀 100섬과 소금 50섬을 금강산의 사찰들에 (시주로) 지급하도록 지시한다.[23] 이를 '세헌'이라고 하는데 뒤에는 200여섬으로까지 늘어나게 된다. 그런가 하면 반역죄로 처형당한 사람의 토지와 노비, 삼림 등을 금강산 사찰들에 나눠주기도 했다.[23]
한편 그의 사후 금강산에 있는 표훈사에 그의 영정이 봉안되기도 했다.[23] 합천 해인사에도 그의 영정이 봉안되었는데[14], 해인사의 영정은 1458년 7월 28일 윤사로, 조석문 등을 해인사 행향사(行香使)로 임명해 해인사에 파견할 때, 윤사로와 조석문의 건의로 해인사의 무명 승려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 해인사 영정은 2000년대까지도 전하고 있다.
왕자시절부터 불교에 심취했던 그는 불교는 왕실의 안녕과 미래를 보장하는 종교적인 신앙으로서 필요했다. 세조는 불교가 가지고 있는 호국성에 근거한 국가·민족 의식의 고양을 통해 국방력과 집권체제의 강화를 도모하고자 원각사(圓覺寺)를 세우고 〈월인석보 月印釋譜〉를 간행하였다. 1461년에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해 많은 불경을 국역하도록 명하기도 했다.
2. 5. 1. 즉위 초반
세조는 즉위 초 왕권 강화를 목표로 중앙집권을 추진, 육조직계제를 실시하고 세종대의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했다.[8] 오가작통법을 실시하여 세금 징수를 용이하게 하였고, 면리제를 통해 지방 통제를 강화했다. 또한 호패법을 다시 복원하였다. 국방력 신장을 위해 군제를 확정하고, 각 역로를 개정하여 찰방(察訪)을 신설했으며, 예문관의 장서를 간행했고, 각 도의 거진(巨鎭)을 설치했다.각지의 수령은 국왕이 직접 임명하되, 백성들에게 수령을 탄핵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8도의 관찰사가 일부 작은 현의 현감, 현령을 임명할 수 있었으나 현령과 현감은 왕이 직접 임명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의정부서사제에서 왕이 직접 육조판서들의 서류를 결재하고 정무를 주관하는 6조 직계제로의 개정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예조참판 하위지가 이를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세조는 하위지의 재주와 신념을 아껴 그에게 여러번 교서를 내려 불렀으나, 하위지는 단종에 대한 충심으로 세조의 녹(祿)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받지 않았다고 한다.[8] 세조는 하위지를 처형하려 했으며, 사관은 이를 두고 정변 후임을 알지 못하고 하위지가 어리석은 의견을 개진했다고 평했다.
하위지는 즉위 초 세조가 역대병요와 병서 편찬을 도운 사람들을 승진시키려 한 것을 반대하였다. 단종 즉위 초, 수양대군이 앞장서서 《역대병요》 편찬에 참여했던 집현전 학사의 품계를 승진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서적의 편찬 사업은 집현전 본래의 업무이므로 품계를 올려야 할 이유가 없음을 들어 단종에게 상소를 올려 자신의 품계를 올리는 것에 반대하였다.
한명회를 시켜서 행정기관의 개편을 추진하고 향소부곡 제도를 폐지한다. 한명회는 오가작통법과 면리제를 창안하여 세조에게 건의한다. 오가작통법은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으나 면리제는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계속 유지된다.
1455년 수양대군은 단종을 폐위시키고 조선의 새로운 통치자로 즉위했다.(오늘날 묘호 "세조"로 알려져 있다).[2]
세조는 태종의 유지를 이어 왕권을 강화하고 의정부의 권력을 약화시켜 관리들을 직접 왕의 통제하에 두었다. 또한 태종이 도입한 행정 체제를 더욱 발전시켜 정부가 정확한 인구 수를 파악하고 군대를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도록 했다.
세조는 경국대전을 편찬했는데, 이는 왕조 행정의 초석이 되었고 한국 최초의 성문 헌법의 형태를 제공했다.
2. 5. 2. 두 번의 단종 복위 사건과 대숙청
1456년 2월 성삼문 등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세조의 측근인 정창손의 사위 김질의 밀고로 일망타진되었다.[9] 김질은 장인 정창손의 설득에 넘어가 사육신의 정변 기도를 폭로했다. 1456년 6월 성삼문 등이 단종의 복위를 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한 후 강원도 영월로 유배보내고, 집현전을 폐지하였다. 세조는 사육신을 직접 국문하였다. 하위지 등은 세조의 용서 제안을 거절했고, 박팽년은 세조에게 신(臣)이라 말하기를 거부하고, 거(巨)자로 썼으며, 세조 즉위 이후에 받은 월급은 받지 않고 창고에 쌓아두었다. 세조는 사육신과 관련자들을 비롯한 그 남성 일족 6백여 명을 처형하고, 유배보냈으며 사육신 가문의 여성들은 공신의 노비와 관비로 충군하였으며, 4촌 이상의 친척들은 노비로 삼거나 외지로 유배를 보내는 등 대숙청을 감행했다.[9]1457년 9월, 세조의 넷째 동생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등이 또다시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세조는 금성대군과 관련자들을 모두 처형하였다. 또한 사육신과 관계된 여인과 재산을 공신의 노비로 분배하여 멸문시켰다.[9] 이 사건으로 인해 세조의 의심은 더욱 커졌고, 결국 단종에게 죽음을 내리게 되었다. 단종은 17세의 나이로 사약을 받았다.[9]
사육신의 단종복위 거사에 참여했던 성균관사예 김질은 실패의 두려움 또는 장인 정창손의 회유로 세조에게 반역을 고변하였다. 세조는 성삼문 등 주모자 6인을 국문하였다. 세조는 사육신 본인과 자녀, 부친, 형제 및 집안 직계 남성 6백여 명을 처형하고, 집안 여성, 4촌 이상은 노비로 보내거나 변방으로 유배보냈다.
세조는 박팽년의 재주를 아껴 회유하려 했으나, 박팽년은 거절했다.[28] 박팽년은 세조를 상감(上監)이라 부르지 않고 진사(進賜)라 불렀으며, 자신은 상왕(단종)의 신하라고 주장했다.[28] 박팽년은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성삼문·하위지·유성원·이개·김문기·성승·박정·권자신·송석동·윤영손·이휘와 자신의 아비 박중림을 공모자로 지목했다. 박팽년은 고문으로 옥중에서 사망했고, 다른 모의자들도 능지처사(凌遲處死) 당하였다. 그의 아버지도 능지처사되고, 동생과 아들들도 모두 처형되었다.
하위지 역시 김질의 고변으로 국문을 받게 되었다.[8] 세조는 하위지의 재주를 높이 사 회유했지만, 하위지는 거절했다.[8] 하위지는 국문장에서 세조에게 반역죄로 처벌하라고 말했다.[8] 하위지는 성삼문 등이 당한 작형(灼形)은 당하지 않았으나,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다.[8] 하위지의 두 아들도 연좌되어 사형을 받았다.[8] 하위지의 작은 아들 박은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어머니에게 효를 다할 것을 다짐하고 죽음을 맞이했다.[8] 하위지의 어린 조카들인 하포, 하원은 사형을 면하고 유배되었다.
단종복위운동 당시 나이가 어렸던 남효온은 성장한 뒤 사육신의 행적을 기록한 《추강집》의 사육신전(死六臣傳)을 남겼다.[28] 사육신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혔으며, 1691년(숙종 17)에 관작이 회복되었다.[28]
2. 5. 3. 사림파의 등용
사육신과 집현전 학사들의 대대적 숙청과 함께 생육신 등의 문사들 조차 그에게 등을 돌리고 낙향, 시골과 야산에 은거하였다. 사육신 등을 처형한 뒤 문사들을 억압, 탄압한다는 비판에 직면하자 그는 정몽주의 후손들과 문도들을 발굴해서 등용한다. 이때 김숙자와 김종직 역시 등용되는데, 이들의 정계 진출 이후 향촌에 은거하던 사림파가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처음에 어떤 대신이 김종직(金宗直)을 천거하자 세조는 친히 만나보고는 면전에서 '완고하여 쓸모 없는 선비다. 등용할 것 없다.[10]'고 하였다. 그러나 훈구파의 발호를 두려워한 그는 훈구파를 숙청하지 못하는 대신, 김종직을 청요직에 기용한다.김종직은 세조에 의해 등용되었으면서도 후일 조의제문을 지어 세조의 반정을 조롱했고, 김종직의 제자들과 그의 학파는 세조의 반정을 찬탈로 규정하고 조롱하였으며, 이는 훗날 김일손이 무오사화 때 처형당한 원인이 되었다.[11] 세조 즉위 중반에는 사림의 세력은 미약하였으나 손자인 성종대에 사림은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하여 하나의 정파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2. 5. 4. 내정과 외치
세조는 신하들의 권력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폈다. 세조는 관제 개편과 신하들의 기강 확립을 통해 중앙 집권제를 확립했으며, 호패법을 다시 복원하였다. 국방력 신장에도 힘써서, 각 읍의 군사를 5위에 분속토록 하여 군제(軍制)를 확정, 각 역로를 개정하여 찰방(察訪)을 신설, 예문관의 장서를 간행했고, 각 도의 거진(巨鎭 : 중간 규모의 군진)을 설치했다.1457년에는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의 편찬을 시작하는 등 법전 편찬과 서적 편찬 등의 사업을 벌였으며, 원구제(圜丘祭)를 실시하는 등의 문화 사업을 펼쳐 사회를 새롭게 바꾸어 나갔다.
1459년 신숙주(申淑舟)를 파견하여 여진족을 타이르게 했고, 경고를 듣지 않자 토포사를 보냈다. 또한, 이 해에 아버지 세종대왕과 장남 의경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월인석보》를 간행하였다.
이듬해 《경국대전》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1461년에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신설하여 불경을 간행했으며, 불교를 숭상하여 《원각경》(圓覺經)을 편찬하게 하고 원각사(圓覺寺)를 창건했다. 또한 과전(科田)을 폐지하고 직전제(職田制)를 실시토록 하였다. 규형(窺衡)·인지의(印地儀)를 친히 제작하여 토지 측량을 용이하게 하였다.
한편 그가 며느리인 귀인 권씨(貴人 權氏)와 소훈 윤씨(昭訓 尹氏)를 범하려 했다는 추문이 돌았다. 권귀인과 윤소훈은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의 후궁들이었다.[12][13] 김일손은 이 사실을 그대로 사초에 실었다가 사화의 원인이 되었고 김일손 자신도 희생되었다.[12][13]김일손은 귀인권씨의 조카이자 양자 허반(許磐)에게서 들은 것을 사초에 기록하였는데[12] 연산군은 사초 기사 중 권귀인은 바로 덕종의 후궁이온데 세조께서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는 구절과 '세조는 소훈 윤씨(昭訓 尹氏)에게 많은 전민과 가사를 내렸고 항상 어가가 따랐다'는 사초의 내용을 구실삼았다.[12][13]
젊은 조카로부터 왕위를 빼앗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조는 한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통치자이자 행정가 중 한 명으로 입증되었다. 먼저 그는 태종의 유지를 이어 왕권을 강화하고 의정부의 권력을 약화시켜 관리들을 직접 왕의 통제하에 두었다. 또한 태종이 도입한 행정 체제를 더욱 발전시켜 정부가 정확한 인구 수를 파악하고 군대를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도록 했다 (이로 인해 이시애의 난이 발생했지만, 그는 이를 진압했다). 태종과 마찬가지로 세조는 강경한 대외 정책을 펼쳤으며, 1460년과 1467년에 북쪽 변경의 여진족을 공격했다. 또한 토지 제도를 개정하여 국내 경제를 개선하고 역사, 경제, 농업, 종교 서적의 출판을 장려했다.
세조 자신도 자신의 관심 분야를 바탕으로 여러 권의 책을 편찬했다. 그중 하나는 석보상절로, 붓다의 전기이다.[4] 다른 것으로는 ''월인석보''와 ''역대병요''가 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으로는 종묘 제례악의 제정과 같이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조선이 이룬 문화적 발전을 들 수 있다.[1] 그의 아버지인 세종대왕은 항상 중국 음악이 아닌 한국 음악을 조상 제사에 사용하고자 했지만, 보수적인 궁중 관리들은 중국 음악이 한국 음악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하여 세종의 노력을 막았다. 그러나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아버지가 작곡한 제례악을 수정하여 왕실 조상 제사에 사용했는데, 이는 현재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1]
가장 중요한 것은, 그는 경국대전을 편찬했는데, 이는 왕조 행정의 초석이 되었고 한국 최초의 성문 헌법의 형태를 제공했다.
2. 5. 5. 서적 간행 지원
세종 사후 세조 때 다시 활판 인쇄술이 활기를 띠고 서적의 보급이 재확산되는데, 활자를 주조, 보급하여 활판 인쇄와 서적 출간을 장려하기도 했다. 그의 출판 사업 중에는 <법화경> <금강경> 등 대장경을 인쇄하여 유포함으로써 불교 발전에 이바지한 업적도 특기할 만하다.[14]또한 역사 관련 서적을 편찬, 재간행, 중수하고 이를 반포하여 사대부와 일반 백성들에게도 필독을 권고하여 국가의식,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다. 〈국조보감〉의 편수, 〈동국통감〉의 편찬, 〈경제육전〉의 정비 등의 일련의 편수·편찬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밖에도 〈오륜록〉·〈역학계몽도해〉·〈주역구결〉·〈대명률강해〉·〈금강경언해〉·〈동국지도〉·〈해동성씨록〉 등의 편찬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1461년(세조 7년)에는 자신의 친필로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을 간행하였다.[15] 주자소에서 세조의 친필과 강희안의 필적을 바탕으로 을해자(乙亥字)와 한글활자로 인출한 책으로, 훈민정음 창제 무렵의 국어의 특징과 조선 초기 활자사 연구에 있어서 귀중한 판본이다.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은 후일 보물 제1520호로 지정된다.[15] 불교 경전과 불교 관련 서적들이 시중에 대량으로 유포, 확산되었으며, 훈민정음으로 된 책들 중에는 불경, 불서들이 대량으로 시중에 유통되었다.
세조 자신도 자신의 관심 분야를 바탕으로 여러 권의 책을 편찬했다. 그중 하나는 석보상절로, 붓다의 전기이다.[4] 다른 것으로는 ''월인석보''와 ''역대병요''가 있다.
2. 5. 6. 말년
1455년 수양대군은 무력한 왕을 폐위시키고 자신을 조선의 새로운 통치자로 선포했으며, 오늘날 묘호 "세조"로 알려져 있다.[2]그의 동생 금성대군과 사육신 여섯 명의 학자들, 성삼문, 박팽년, 이개 등이 그를 권좌에서 몰아내고 조카를 다시 왕위에 앉히려는 음모를 꾸미자, 수양대군은 전임 왕의 지위를 "상왕(上王)"에서 "노산군"으로 강등시킨 후 독살을 명했다.
젊은 조카로부터 왕위를 빼앗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조는 한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통치자이자 행정가 중 한 명으로 입증되었다. 먼저 그는 태종의 유지를 이어 왕권을 강화하고 의정부의 권력을 약화시켜 관리들을 직접 왕의 통제하에 두었다. 또한 태종이 도입한 행정 체제를 더욱 발전시켜 정부가 정확한 인구 수를 파악하고 군대를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도록 했다 (이로 인해 이시애의 난이 발생했지만, 그는 이를 진압했다). 태종과 마찬가지로 세조는 강경한 대외 정책을 펼쳤으며, 1460년과 1467년에 북쪽 변경의 여진족을 공격했다. 또한 토지 제도를 개정하여 국내 경제를 개선하고 역사, 경제, 농업, 종교 서적의 출판을 장려했다.
세조 자신도 자신의 관심 분야를 바탕으로 여러 권의 책을 편찬했다. 그중 하나는 석보상절로, 붓다의 전기이다.[4] 다른 것으로는 ''월인석보''와 ''역대병요''가 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으로는 종묘 제례악의 제정과 같이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조선이 이룬 문화적 발전을 들 수 있다.[1] 그의 아버지인 세종대왕은 항상 중국 음악이 아닌 한국 음악을 조상 제사에 사용하고자 했지만, 보수적인 궁중 관리들은 중국 음악이 한국 음악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하여 세종의 노력을 막았다. 그러나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아버지가 작곡한 제례악을 수정하여 왕실 조상 제사에 사용했는데, 이는 현재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1]
가장 중요한 것은, 그는 경국대전을 편찬했는데, 이는 왕조 행정의 초석이 되었고 한국 최초의 성문 헌법의 형태를 제공했다.
왕위에 오르자 산더미 같은 상소를 작성하거나, 왕궁 광장에 앉아 소송을 제기하는 반대 세력을 고문이나 극형 등으로 모조리 제거하고,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여 다시 육조직계제를 부활시켜 왕권을 자신의 손에 집중시켰다. 명나라에서 1457년 1월 16일 (음력)에 당시 상황이었던 명 영종이 명 경태제로부터 황위를 탈환하는 탈문의 변이 일어나자, 조카이자 상왕이었던 단종을 같은 해 6월 (음력)에 노산군으로 강등시킨 뒤, 같은 해 11월 11일(10월 24일 (음력))에 유배지에서 독살로 사형을 집행했다.
만년에는 자신의 신체 피부가 점차 나병(현재의 한센병)에 걸리게 되었고, 1468년 9월 7일에 차남인 해양대군(후의 조선 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으나, 다음 날 52세(만 나이)로 붕어하였다.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관제 개혁, 법제 및 군제 강화에 힘썼으며, 조선 왕조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또한 1457년부터 신숙주 등에게 명하여 이성계를 시작으로 역대 국왕의 치적 중 모범이 되는 사실을 수록한 편년체 역사서인 "국조보감"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2. 5. 7. 불교에 귀의
말년의 세조는 심한 악몽에 시달렸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악몽과 악몽으로 인한 불면증을 계기로, 세조는 불교에 귀의할 결심을 한다. 시중에는 그의 아들 의경세자가 낮잠을 자다가 가위눌림으로 죽은 것도, 현덕왕후의 원혼이 죽인 것이라는 낭설이 떠돌기도 했다. 세조는 오래 악몽에 시달렸고 병세가 악화되었다. 그의 불교 귀의는 유교 성리학을 국교로 하는 조선의 국가 이념, 개국 이념과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의 불교 귀의에 항의하여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 학자들과, 훈구 유학자들은 연명 상소와 사퇴 등으로 항의의사를 표시하기도 했으나, 세조의 만류로 무마되었다. 그러나 조선건국 당시 금지한 불교 금지령을 완화시켜 양반 사대부들 중에도 불자가 나타나기도 했다.
세조는 훈신 중 김수온(金守溫)의 형인 승려 신미(信眉, 본명은 김수성(金守省))를 왕사(王師)로 받들어 궁궐로 초빙했다. 유학자들은 연명상소와 사퇴를 선언했지만, 세조는 이를 묵살했다. 신미는 세종대왕 당시 세종대왕의 명으로 궁궐 내에 내원당(內願堂)의 건축과 법요(法要)를 주관했으며, 세종대왕의 명으로 복천사(福泉寺)의 중수를 맡아보았다. 문종 즉위 후에 신미는 선종의 지도자인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에 임명되기도 했다. 신미는 평창 오대산 상원사의 중건에도 관여하였다.
세조는 여러 불당의 중수와 창건을 지원하였다. 훈구파 공신들과 사림파 신진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궁내에 불당을 지었고, 원각사와 신륵사 등을 지원하였다. 또한 수종사(水鍾寺) 등의 중건을 지원하기도 했다.[14] 강원도의 월정사, 상원사 등에도 적극 시주, 후원하였고 파주 보광사, 남양주의 수종사와 양평 용문사, 합천의 해인사 등도 그가 후원하는 사찰들이었다.
그가 지원하던 사찰 중에는 경기도 양주 송촌리 용진의 운길산 수종사(水鍾寺)도 있었다. 그런데 수종사는 세조가 죽인 자신의 동생 금성대군 유가 시주해 세운 곳이기도 하다.[14] 세조는 수종사를 다시 중건하고 대대적으로 지원하였다.
또한 세조는 유점사를 왕실의 복을 비는 원당으로 정하였으며, 조선의 왕 중에서는 유일하게 직접 금강산에 와서 장안사, 표훈사, 정양사 등을 들러보며 매년 쌀 100섬과 소금 50섬을 금강산의 사찰들에 (시주로) 지급하도록 지시한다.[23] 이를 '세헌'이라고 하는데 뒤에는 200여섬으로까지 늘어나게 된다. 그런가 하면 반역죄로 처형당한 사람의 토지와 노비, 삼림 등을 금강산 사찰들에 나눠주기도 했다.[23]
한편 그의 사후 금강산에 있는 표훈사에 그의 영정이 봉안되기도 했다.[23] 합천 해인사에도 그의 영정이 봉안되었는데[14], 해인사의 영정은 1458년 7월 28일 윤사로, 조석문 등을 해인사 행향사(行香使)로 임명해 해인사에 파견할 때, 윤사로와 조석문의 건의로 해인사의 무명 승려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 해인사 영정은 2000년대까지도 전하고 있다.
왕자시절부터 불교에 심취했던 그는 불교는 왕실의 안녕과 미래를 보장하는 종교적인 신앙으로서 필요했다. 세조는 불교가 가지고 있는 호국성에 근거한 국가·민족 의식의 고양을 통해 국방력과 집권체제의 강화를 도모하고자 원각사(圓覺寺)를 세우고 〈월인석보 月印釋譜〉를 간행하였다. 1461년에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해 많은 불경을 국역하도록 명하기도 했다.
2. 6. 최후
나병을 앓던 그는 거듭된 악몽과 불면증에 시달렸고, 정신병적인 망상도 심해졌다.[24] 1467년 5월에 함경도 회령에서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그해 7월 조카 귀성군 준과 강순을 파견하여 평정케 하고, 8월 12일 진압한다. 이어 강순을 파견하여 함길도 너머 건주위(建州衛) 여진족을 토벌하였다. 한편 훈구 공신들의 발호를 우려하던 그는 만년에 김종직 등을 중용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성종대에 가서 본격적으로 정치세력화된다.말년에는 조카 단종을 내쫓다 못해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하여 불교에 귀의했다고도 한다.[24] 왕위를 찬탈한 행위가 유교의 시각으로는 결코 용납되지 않는 만큼, 세조의 불교 융성 정책은 유교적 입지가 약했던 세조 나름의 성리학자 견제수단이었다는 견해도 있다.[25] 그는 자신의 병을 일반적인 역창이나 종기 정도로 여겼지만 그의 병은 피부가 썩어들어가는 나병이었다. 악몽과 불면증, 신경쇠약 등으로 병세는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1468년 세조는 자신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음을 깨닫고, 한명회 및 신숙주, 구치관 등을 불러 그들에게 왕세자를 잘 보필해줄 것을 부탁했다. 음력 9월 7일에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음 날인 8일에 승하하였다. 바로 9월 10일 명나라에 고부사신 황중(黃中)·김계박(金繼朴) 등을 파견하여, 그해 12월 29일 혜장이라는 시호를 받아왔다. 당시 나이 향년 52세였다.
세조는 1468년에 죽었고, 왕위는 그의 병약한 둘째 아들 이황(예종)에게 승계되었다. 그의 능은 광릉(光陵)으로 알려져 있으며,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해 있다.
3. 사후
3. 1. 능묘
능은 경기도 양주시의 광릉(光陵)이다. 후에 정희왕후가 안장될 때 동원이강형의 봉분으로 조성되었다.3. 2. 묘호 및 시호
묘호는 '''세조'''(世祖)이며 빈청에서 세조의 묘호로 신종(神宗), 예종(睿宗), 성종(聖宗)을 추천했으나, 예종이 '나라를 중흥한 공'을 들어 세조를 제안하였고 이대로 정해졌다. 이는 세종과 문종의 치세를 부정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당시 예종은 승천체도라는 시호를 뺀 사실을 신하들에게 추궁했고 공신인 좌의정 박원형은 뜻이 헛된거 같다고 했지만 예종은 듣지 않았다. 존호는 '''승천체도열문영무'''(承天體道烈文英武)이고, 시호는 '''혜장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惠莊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이다.사후 일부 무속인들에 의해 무속의 신으로 숭배되기도 하였다.[26] 그 밖에 여러 사찰에도 봉안되었다. 그를 모신 대표적인 신당으로는 1970년대까지 서울시 마포구 신수동에 있던 복개당이 있다.[26] 이 당제는 조선시대에는 제관이 열 명이 넘을 정도로 규모가 컸으나 일제 시대에 제관이 5~6명으로 줄었다.[26] 1978년 노인정 공사로 철거되었다.[26] 복개당에 보관되오던 영정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에 있다.
3. 3. 평가와 비판
3. 3. 1. 긍정적 평가
글씨에 뛰어났다는 평이 있다.왕권을 강화했고 국방을 튼튼히 했으며,[14] 비록 그의 집권을 죽음으로써 막으려 했던 이른바 사육신 문제로 그들의 아지트였던 집현전은 폐지했으나, 법전이라든지 역사서 같은 공익적 편찬 사업을 주도하는 등, 학문을 발전시킨 공적이 높이 평가되기도 한다.[14] 그밖에 호불(護佛)의 군주였다는 평도 있다.[14]
세조의 치세 동안 신권이 감히 넘보지 못할 정도로 왕권은 조선 역사상 최고로 강화되었다. 그러나 세조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아닌 강압적인 철권 통치로 나라를 다스렸으며, 새로운 인재들을 과감히 발탁하기 보다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측근을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3. 3. 2. 부정적 평가
계유정난을 명목으로 조카 단종을 축출하고 상왕이 된 자신의 조카의 작위를 노산군으로 격하시킨 뒤 다시 그를 죽여서 큰 도덕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29] 이는 그에 의해 등용된 사림파에 의해 오랫동안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근래에는 세조가 문종의 사망 이전부터 왕권을 탈취하려 했으며 그 결과 자신의 형인 문종을 독살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29] 문종의 의관 전순의(全循義)를 시켜 문종의 병을 고의로 악화시켜 빨리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왕이 사망할 경우 큰 벌을 받는게 일반적이었으나 의관 전순의는 작은 형벌에 그쳤다가 다시 복귀받았으며 수양이 왕이 된 이후에 일개 의관 신분으로 일등공신으로까지 책봉을 받는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혹을 주고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가지 정황들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자신이 악몽을 꾸었다는 이유로 형수인 현덕왕후 권씨(단종의 어머니. 단종을 낳은지 3일만에 2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남)의 능을 파헤치고 부관참시하는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또한 자신의 정통성이 약하다보니 지나치게 공신에 의존하는 정치를 펼쳐 공신들의 무법천지가 이루어지게 된다. 남의 재산을 빼앗고 온갖 횡포를 일삼아도 처벌받는 공신은 없었고 세조가 죽을 때까지 공신 견제에 실패한다. 또 자신을 조금이라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세력은 양정이나 남용신처럼 무조건 가차없이 죽여 버리기도 하였다. 홍윤성의 경우 자신의 숙부를 살해하였으므로 세조는 기회를 봐서 그를 처벌하려 하였으나, 공신들의 강한 반대에 부딛쳐 홍윤성의 노비들을 잡아다가 곤장을 치고 투옥시키는 것으로 무마시킨다.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큰 기여를 한 공신들을 대부분 토사구팽하여 죽인 할아버지 조선 태종에 반해, 세조는 공신들을 내치지 않았으며 내칠 수도 없었다. 오히려 우대하여 결국 훈구파 세력을 형성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국방과 관련해서 치적도 있지만 실책도 많다. 대표적으로 의흥 삼군부를 오위 도총부로 개편하면서 갑사를 오위 중 하나인 의흥위로 몰아버리면서 부사관에 해당하는 군 계층을 사실상 없애버린 것, 지나치게 궁시 위주로 고과를 편성해서 백병전을 취약하게 만든 것, 보법으로 정군 1명당 보인이 3명으로 편성된 것을 보인 2명으로 줄어들게 해서 보인들이 대거 이탈하게 만들고 조호를 지급하는 기준을 호 기준에서 인정 기준으로 바꿔서 군인층 붕괴를 유발한 것, 총통위를 없애버린 것 등이 있다. 이러한 세조의 실책은 조선군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4. 가족 관계
세조는 세종과 소헌왕후의 둘째 아들로, 1417년 태어났다. 태종은 세조의 조부, 원경왕후는 조모이며, 외조부는 심온, 외조모는 안씨이다.
정실 왕비는 정희왕후 윤씨이며,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시행하였고, 조선 최초의 대왕대비이다. 정희왕후와의 사이에서 덕종, 예종 등을 낳았다.
후궁으로는 근빈 박씨,[31] 폐소용 박씨,[32] 숙원 신씨 등이 있다. 근빈 박씨는 덕원군과 창원군을 낳았고, 폐소용 박씨는 아지[33]를 낳았다. 숙원 신씨는 신숙주의 딸이며 자녀는 없다.
세조의 친형제로는 문종,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과 정소공주, 정의공주 등이 있다.
관계 | 이름 | 본관 | 생몰년 | 비고 |
---|---|---|---|---|
부 | 세종 | 전주 | 1397년 - 1450년 | 조선 제4대 국왕 |
모 | 소헌왕후 | 청송 | 1395년 - 1446년 | |
왕비 | 정희왕후 | 파평 | 1418년 - 1483년 | 조선 최초 대왕대비, 수렴청정 실시 |
빈 | 근빈 박씨 | 미상 | 1425년 - 미상 | |
소용 | 폐소용 박씨 | 미상 | 미상 - 1465년 | 교수형에 처해짐[32] |
숙원 | 숙원 신씨 | 고령 | 미상 | |
장남 | 덕종 | 1438년 - 1457년 | 소혜왕후 한씨 소생, 성종의 생부 | |
차남 | 덕원군 | 1449년 - 1498년 | 근빈 박씨 소생 | |
3남 | 예종 | 1450년 - 1469년 | 정희왕후 소생, 조선 제8대 국왕 | |
4남 | 창원군 | 1458년 - 1484년 | 근빈 박씨 소생 | |
5남 | 아지 | 1459년 - 1463년 | 폐소용 박씨 소생 |
5. 기타
안평대군과 이현로(李賢老)의 집에 있던 글과 작품들이 많았는데, 세조는 이들을 숙청한 후에 괴상한 글과 작품이라는 이유로 모두 불태워 버렸다.[30] 안평대군은 당시 조선 최고의 명필이었다.
고모인 정선공주의 손자 남이와, 동생 임영대군의 아들인 귀성군 준을 총애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세력 확장을 경계한 예종에 의해 예종 즉위 후 남이와 귀성군은 숙청되었다.
단종의 죽음을 소재로 한 《단종애사》를 지은 소설가 춘원 이광수는 다시 그의 일대기를 소재로 한 《세조대왕》이라는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6. 세조가 등장한 작품
1974년 KBS 드라마 《충의》에서 배우 백일섭이 세조 역을 맡았다.
1980년 KBS 드라마 《파천무》에서 배우 김흥기가 세조 역을 맡았다.
1984년부터 1985년까지 MBC 드라마 《설중매》에서 배우 남성우가 세조 역을 연기했다.
1990년 KBS 드라마 《파천무》에서는 배우 유동근이 세조를 연기했다.
1994년 KBS 드라마 《한명회》에서는 서인석이 세조 역을 맡았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 배우 임동진이 세조 역을 연기했다.
2007년부터 2008년까지 SBS 드라마 《왕과 나》에서는 김병세가 세조 역을 맡았다.
2008년 KBS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서준영이 세조 역을 연기했다.
2011년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는 김영철이 세조 역을 맡았다.
2011년부터 2012년까지 JTBC 드라마 《인수대비》에서 배우 김영호가 세조를 연기했다.
2016년 KBS 드라마 《장영실》에서는 고영빈이 세조 역을 맡았다.
2018년 TV조선 드라마 《대군-사랑을 그리다》에서는 주상욱이 세조 역을 연기했다.
1963년 영화 《단종애사》에서는 이예춘이 세조 역을 연기했다.
1970년 영화 《세조대왕》에서는 신영균이 세조 역을 맡았다.
1988년 영화 《칠삭둥이의 설중매》에서는 강신성일이 세조를 연기했다.
2013년 영화 《관상》에서는 이정재가 세조 역을 맡았다.
2019년 영화 《광대들 : 풍문조작단》에서는 박희순이 세조를 연기했다.
1997년 연극 《태》에서 배우 김재건이 세조 역을 맡았다.
2005년 연극 《길》에서는 부재호가 세조 역을 연기했다.
2007년 연극 《태》에서 배우 김재건이 세조 역을 맡았다.
2008년 연극 《길》에서는 이지수가 세조 역을 연기했다.
2012년 연극 《전하의 봄》에서는 강진휘가 세조 역을 맡았다.
1983년 MBC TV 드라마 《추동궁의 왕》에서는 김을음이 세조를 연기했다.
2007년 KBS2 TV 드라마 《사육신》에서는 최봉식이 세조를 연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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