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온 안토네스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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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온 안토네스쿠는 루마니아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루마니아의 콘두커터(지도자)로 활동했다. 그는 군사 학교를 졸업하고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발칸 전쟁에 참전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콘스탄틴 프레잔 장군의 참모장으로 활약했다. 안토네스쿠는 반유대주의와 파시즘에 경도되었으며, 철위대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1940년 카롤 2세의 퇴위 이후 권력을 장악하고 호리아 시마가 이끄는 철위대와 협력하여 국가레지오네리주를 선포했다. 안토네스쿠는 추축국 외교를 추진하여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고, 동부 전선에서 루마니아의 전투를 지휘했다. 그는 유대인과 로마니족에 대한 탄압과 학살에 책임이 있으며, 이아시 포그롬과 트란스니스트리아 강제 이송과 같은 사건을 주도했다. 안토네스쿠는 1944년 8월 쿠데타로 축출되었고, 1946년 전쟁 범죄, 평화에 대한 범죄, 반역 혐의로 재판을 받은 후 처형되었다. 그는 루마니아 공산주의 정권 시기에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1989년 혁명 이후 그의 유산에 대한 논쟁이 다시 불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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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온 안토네스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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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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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온 안토네스쿠 |
존칭 접두사 | 원수 |
별칭 | '붉은 개' (Câinele Roșu) |
출생일 | 1882년 6월 14일 |
출생지 | 루마니아 왕국, 아르제슈 주, 피테슈티 |
사망일 | 1946년 6월 1일 |
사망지 | 루마니아 왕국, 일포브 주, 지라바 |
사망 원인 | 총살형 |
배우자 | 마리아 안토네스쿠 (1927년–1946년) |
직업 | 군인 |
소속 | 루마니아군 |
복무 기간 | 1904년–1944년 |
계급 | 루마니아 원수 |
지휘 | 루마니아군 총사령관 |
참전 전투 | 1907년 농민 반란 제2차 발칸 전쟁 남부 도브루자 공세 제1차 세계 대전 몰다비아 방어 머러셰슈티 전투 헝가리-루마니아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레기오나리 반란 동부 전선 바르바로사 작전 뮌헨 작전 오데사 포위전 야시-키시네프 작전 |
수훈 | 군사 미덕 메달 미하이 용감 공훈장 조종사/관측자 배지 철십자 훈장 철십자 기사십자장 핀란드 백장미 훈장 크림 방패장 |
로마자 표기 | Ion Victor Antonescu |
정치 경력 | |
직책 | 콘두커토르 (루마니아 지도자) |
임기 시작 | 1940년 9월 6일 |
임기 종료 | 1944년 8월 23일 |
선임자 | '직책 신설' |
후임자 | '직책 폐지' |
직책 | 루마니아 총리 |
임기 시작 | 1940년 9월 5일 |
임기 종료 | 1944년 8월 23일 |
국왕 | 카롤 2세 미하이 1세 |
부총리 | 호리아 시마 (1940년–1941년) 미하이 안토네스쿠 (1941년–1944년) |
선임 총리 | 이온 기구르투 |
후임 총리 | 콘스탄틴 서너테스쿠 |
추가 정부 직책 | |
직책 | 국방부 장관 |
임기 시작 | 1941년 9월 22일 |
임기 종료 | 1942년 1월 23일 |
총리 | '본인' |
선임자 | 이오시프 이아코비치 |
후임자 | 콘스탄틴 판타지 |
임기 시작 | 1940년 9월 4일 |
임기 종료 | 1941년 1월 27일 |
총리 | '본인' |
선임자 | 콘스탄틴 니콜레스쿠 |
후임자 | 이오시프 이아코비치 |
임기 시작 | 1937년 12월 28일 |
임기 종료 | 1938년 3월 31일 |
총리 | 옥타비안 고가 미론 크리스테아 |
후임자 | 게오르게 아르제샤누 |
직책 | 문화종교부 장관 |
직위 | '(대행)' |
임기 시작 | 1941년 11월 11일 |
임기 종료 | 1941년 12월 5일 |
총리 | '본인' |
선임자 | 라도 R. 로세티 |
후임자 | 이온 페트로비치 |
직책 | 외무부 장관 |
직위 | '(대행)' |
임기 시작 | 1941년 1월 27일 |
임기 종료 | 1941년 6월 29일 |
총리 | '본인' |
선임자 | 미하일 R. 스투르자 |
후임자 | 미하이 안토네스쿠 |
직책 | 항공해운부 장관 |
직위 | '(대행)' |
임기 시작 | 1938년 2월 10일 |
임기 종료 | 1938년 3월 30일 |
총리 | 미론 크리스테아 |
선임자 | 라도 이리메스쿠 |
군사 경력 | |
직책 | 루마니아 총참모장 |
임기 시작 | 1933년 12월 1일 |
임기 종료 | 1934년 12월 11일 |
국왕 | 카롤 2세 |
후임자 | 니콜라에 삼소노비치 |
사법 판결 | |
유죄 판결 | 전쟁 범죄 평화에 대한 범죄 인도에 반한 죄 반역죄 |
재판 | 루마니아 인민 재판소 |
형벌 | 사형 |
범죄 상태 | 사형 집행됨 |
피해자 | 루마니아 유대인 우크라이나 유대인 로마인 |
기타 정보 | |
소속 정당 | '무소속' (철위대와 동맹 (1940년–1941년)) |
2. 생애
피테슈티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다. 1907년 루마니아 농민 봉기 진압과 제2차 발칸 전쟁에 참여하여 군 경력을 시작했으며, 특히 발칸 전쟁에서의 공로로 미하이 용감공 훈장을 받았다.[3]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참모 장교로서 활약했고, 전후 헝가리-루마니아 전쟁에도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전간기에는 파리와 런던 주재 무관을 지냈으며, 귀국 후 기병학교장, 참모대학교 교장 등을 거쳐 1933년 루마니아 왕립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어 군 현대화를 추진했다. 1937년부터는 여러 내각에서 국방장관을 역임했으나, 극우 민족주의 단체인 철위대와의 관계로 인해 카롤 2세 국왕과 대립하며 투옥되기도 했다.
1940년,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영토 할양 문제로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자 석방되어 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즉시 카롤 2세를 퇴위시키고 그의 아들 미하이 1세를 왕위에 앉혔으며, 국민투표를 통해 스스로 '국가지도자'(Conducător|콘두커토르ro)의 지위에 올라 추축국과의 동맹 외교를 본격화했다. 초기에는 철위대의 지지를 기반으로 권력을 공고히 했으나, 그들의 과격한 행동과 독자 노선을 우려하여 점차 거리를 두었다. 1941년 1월, 철위대가 일으킨 반란(레지오네어 반란과 부쿠레슈티 유대인 학살)을 아돌프 히틀러의 지지 하에 군대를 동원해 진압하고 철위대를 숙청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독소전쟁에 추축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베사라비아 등 과거 영토 회복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루마니아군은 독일군을 지원하여 오데사, 스탈린그라드, 카프카스 등 주요 전투에 참여했으나, 장비 부족과 전략적 한계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특히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참패는 루마니아군에 큰 손실을 안겼고, 독일과의 관계에도 균열을 가져왔다. 또한 안토네스쿠 정권은 나치 독일의 요구에 협력하여 홀로코스트에 적극 가담했다. 그의 통치 하에 수십만 명의 유대인과 로마인이 트란스니스트리아 등의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거나 학살당했다.[12]
전세가 연합국에게 유리하게 기울자, 1944년 8월 23일 미하이 1세 국왕이 주도한 쿠데타로 실각하고 체포되었다. 이후 소련군에게 넘겨져 모스크바로 이송되었다가 전후 루마니아로 송환되었다. 1946년 루마니아 공산당 정권 하의 인민재판에서 전쟁범죄, 평화에 대한 죄, 반역 등의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부쿠레슈티 교외 질라바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
2006년 루마니아에서 명예 회복 판결이 내려졌으나,[200] 그의 반유대주의 정책과 홀로코스트 가담, 추축국 협력 등의 행적으로 인해 국내외적으로 여전히 논란이 많은 인물이며, 특히 루마니아와 유대인 사회에서는 금기시되는 경향이 있다.
2. 1. 어린 시절과 경력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 북서쪽[1](또는 북쪽[601])에 위치한 피테치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군인을 배출했으며[601] 루마니아 정교회를 신봉하는 중상류층[1](또는 중산층[601])이었다. 그는 어머니 리타 바란가(Lița Baranga)와 각별한 관계였으며, 어머니는 안토네스쿠가 처형된 후에도 살아남았다.[2][602] 군 장교였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뒤를 잇기를 원해 크라이오바의 군사학교(보병 및 기병학교)에 입학시켰다.[3][601] 어린 시절, 아버지가 유대교에서 정교회로 개종한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 어머니와 이혼한 사건은 어린 안토네스쿠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는 계모를 평생 싫어했다.[4]군사학교 재학 시절, 훗날 루마니아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는 빌헬름 필데르만과 잠시 같은 반 친구였다는 기록이 있다.[5][603] 이 인연 덕분에 안토네스쿠는 훗날 홀로코스트가 벌어졌을 때 필데르만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왔다고 전해진다.[603] 1904년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소위(Second Lieutenant)[3](일부 기록에는 중위[601])로 임관하여 타르고비체의 기병 부대에서 2년간 복무했다.[3][601] 그는 열정적이고 목표 의식이 강한 군인이었으나, 승진이 더딘 것에 불만을 품기도 했다.[6]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강인한 면모를 보였으며,[6] 강직하고 때로는 무자비한 지휘관이라는 평판과 함께 붉은 머리카락 때문에 "붉은 개"(Câinele Roşu|커이넬레 로슈ro)라는 별명을 얻었다.[6][604] 또한 상관에게 거리낌 없이 질문하고, 자신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명령에는 항의하는 것으로도 알려졌다.[6]
1907년 루마니아 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그는 코불루이 주(Covurlui County)에서 기병 부대를 지휘하며 진압 작전에 참여했다.[3][6][601] 그의 역할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는 그가 반란 진압 과정에서 특히 폭력적이었다고 주장하는 반면,[6][7][605] 다른 이들은 그의 참여가 일반 장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거나[6][604] 오히려 외교적 수완을 발휘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3] 역사가 데니스 데레턴트는 안토네스쿠가 진압 작전을 직접 입안했다고 보았다.[601] 농민 봉기 진압 외에도 그의 부대는 갈라치 항구에서 일어난 사회주의자들의 봉기도 진압했다.[7][605] 이러한 공로로 카롤 1세 국왕으로부터 훈장을 받거나[601] 칭찬을 받았으며, 왕세자(페르디난드 1세)가 직접 파견되어 전체 수비대 앞에서 그를 축하하기도 했다.[3]
1908년 중위로 승진했고,[3] 1911년에는 대위로 진급하여[601] 카롤 1세 국립 방위 대학교(Carol I National Defence University)의 고등 전쟁 학교에 입학, 1913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3][601] 1913년 불가리아와의 제2차 발칸 전쟁이 발발하자 도브루자에 주둔한 제1기병사단의 참모로 복무했다.[3] 이 전쟁에서 소수의 병력으로 도로 요충지를 성공적으로 방어한 공로를 인정받아 3등 미하이 용감공 훈장(Ordinul Mihai Viteazul)을 수훈했다.
2. 2. 제1차 세계 대전

1913년 제2차 발칸 전쟁에서는 소수의 병력으로 도로 요충지를 지켜낸 공로를 인정받아 3등 미하이 용감공 훈장(Ordinul Mihai Viteazul)을 수훈했다.[3]
1916년 루마니아 왕국이 연합국 편에 서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안토네스쿠는 콘스탄틴 프레잔 장군 휘하의 참모장으로 복무했다.[601] 1916년 8월, 루마니아군은 카르파티아산맥을 넘어 오스트리아-헝가리로 진군했으나, 동맹국의 즉각적인 반격에 직면했다. 8월 24일 투르투차이아 전투에서 루마니아군은 불가리아와 독일 제국 연합군에게 큰 패배를 당했다. 동맹군이 카르파티아산맥을 넘어 왈라키아로 진군하자, 안토네스쿠는 수도 부쿠레슈티 방어 작전을 입안했다.[601] 그러나 전황은 루마니아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어, 결국 몰다비아를 제외한 영토 대부분이 점령당했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안토네스쿠는 점차 중요한 전략적 결정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의 야심도 커져갔다.[605] 프레잔이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자 그의 참모장이었던 안토네스쿠는 소령으로 진급했으며, 몰다비아 방어 작전의 총책임자가 되어 1917년 7월부터 8월까지 이어진 머러세치 전투의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이 전투는 알렉산드루 아베레스쿠 총사령관의 지휘 아래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이 이끄는 독일군에 맞서 싸운 중요한 방어전이었다.[606] 전쟁 기간 동안 안토네스쿠는 프레잔의 최측근으로서 그의 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607]
1917년 가을 10월 혁명으로 러시아 임시 정부가 무너지고 소비에트 러시아가 들어서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새로운 러시아 정부는 독일 제국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에서 이탈했고, 루마니아의 가장 큰 동맹이었던 러시아군이 철수했다. 이로 인해 루마니아는 동부 전선에서 홀로 동맹국에 맞서게 되었고, 결국 항복하여 부쿠레슈티 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1918년 말, 국왕 페르디난드 1세가 조약 서명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루마니아는 조약 파기를 선언했다. 이 시기 안토네스쿠는 기병 연대를 이끌면서, 동맹국과의 단독 강화를 "가장 합당한 해결책"으로 추진하기도 했다.[607] 전쟁 후 루마니아는 트란실바니아를 합병했다.
전쟁이 끝난 후, 당시 루마니아 총리였던 이온 게오르게 두카(Ion Gheorghe Ducaro)는 안토네스쿠를 주목하며 "매우 지적이며 유능하고 활동적인 인물로, 그의 국가에 대한 봉사와 개인 됨됨이 모두 신뢰할 만하다"고 평가했다.[607] 한편, 1918년 황태자 카롤(훗날 카롤 2세)이 지지 람브리노와 사랑에 빠져 군무를 이탈하는 탈영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일로 안토네스쿠는 미래의 국왕이 될 카롤을 경멸하게 되었다.[604]
2. 3. 외교 경력 및 참모총장 시절

중령 시절 안토네스쿠는 1919년 파리 강화 회의를 통해 트란실바니아를 루마니아 영토로 편입시키는 데 기여하며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루마니아의 민족주의적 열망을 담은 《기원과 과거, 희생, 그리고 권리》라는 소책자를 출간했는데, 이 책에서 유고슬라비아 왕국과의 전쟁 가능성까지 언급하며 바나트 전역과 티모츠 계곡을 포함하는 대루마니아 정책을 주장했다.[608]
1920년 3월, 안토네스쿠는 프랑스 주재 무관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함께 파견된 슈추 대령은 그를 "군사 전문가일지는 모르나 자만심이 강하고 배타주의자이며 외국인 혐오 성향이 심하다"고 평가했으며, 프랑스 군사 사찰관 빅토르 페틴 장군도 이에 동의했다.[607] 그럼에도 루마니아 정부는 1922년 안토네스쿠를 파리 주재 무관으로 유임시켰고, 프랑스 정부 역시 그의 유임에 사의를 표했다.[609] 이 시기 그는 트란실바니아 시비우 지역의 군사 교육을 담당했으나, 지역 사령관들 사이에서는 그의 교육 방식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610] 1923년부터는 영국과 벨기에 주재 무관을 겸임했다.[611] 무관으로 활동하며 루마니아 외교관 니콜라에 티툴레스쿠와 협력하여 프랑스로부터 의 차관을 도입, 프랑스제 무기를 구매했으며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개인적인 친분을 쌓았다.[610] 한편, 안토네스쿠는 루마니아 출신 보수주의 문필가 마테 비베스코를 통해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학과 19세기 프랑스 국가주의 군인 조르주 블랑제( Georges Boulanger프랑스어 )를 접하게 되었는데, 르 봉의 사상은 이후 여러 파시즘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611] 1923년에는 자신과 정치적 성향이 비슷한 변호사 미하이 안토네스쿠와도 친분을 맺었다.[612]
1926년 루마니아로 귀환한 안토네스쿠는 시비우에서의 군사 교육 총괄을 계속했으며, 1928년 가을부터는 빈틸러 브러티아누 내각에서 국방부 산하 보안사령관을 역임했다.[610] 그는 프랑스 체류 시절 알게 된 마리아 니쿨레스쿠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두 번의 이혼 경력이 있었고 두 번째 남편은 유대계 프랑스인이었다.[613]
1930년 루마니아 왕국에서는 카롤 2세가 자신의 아들 미하이 1세를 밀어내고 왕위에 오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카롤 2세는 1925년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하고 망명 생활을 시작했으나,[614] 1930년 귀국하여 왕위를 주장했고, 미성년자였던 아들 미하이 1세는 퇴위하여 왕세자가 되었다.[615]
안토네스쿠는 1933년 루마니아 왕립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 그는 점차 반유대주의와 파시즘에 경도되었으며, 극우 민족주의 단체인 철위대의 지도자 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와 가까워져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보안 부대의 정보를 코드레아누에게 제공하기도 했다.[610] 국방 장관 파울 안겔레스쿠의 요청에 따라 루마니아군 현대화 사업을 추진했으나,[610] 이 과정에서 카롤 2세 국왕과 그 측근들의 비호 아래 군 자금을 횡령했다는 의혹을 받았다.[604][616] 안토네스쿠는 카롤 2세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이용되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보안국과 서로를 감시하거나 내무부 장관 아르망 컬리네스쿠를 밀착 감시하라는 비공식 명령을 받았다.[617] 그는 국왕의 정치적 계산 속에서 루마니아 내 주요 민주주의 세력인 자유당, 전국농민당과 접촉을 유지하는 한편, 극우 세력인 옥타비아 고가의 국가기독당 및 철위대와도 관계를 맺었다.[604][618] 1936년에는 군부와 철위대에 의한 쿠데타 준비 사실을 인지했으나 이를 방관하거나 오히려 반기는 태도를 보였다.[617]
1937년 말 총선 이후 카롤 2세는 코드레아누의 부상을 견제하기 위해 옥타비아 고가를 총리로 임명하여 극우 내각을 출범시켰다. 이 내각에서 안토네스쿠는 처음에는 통신 부문을 제안받았으나 국방장관직을 요구하여 결국 임명되었다.[21] 국방장관으로서 그의 외교 노선에 대해서는 영국-프랑스와의 전통적 동맹을 지지했다는 평가와 나치 독일과의 협력에 더 기울었다는 평가가 엇갈린다.[6] 그는 반공주의자로서 프랑스와 소련의 관계 개선을 경계했으며,[22] 특히 헝가리의 트란실바니아 영유권 주장에 대응하여 서부 국경 방어 준비를 지시했다.[23] 내부적으로는 철위대와 국가기독당 민병대(런치에리) 간의 충돌이 격화되자 계엄령을 확대하는 조치를 취했다.[24]
고가 내각은 고가와 코드레아누 사이의 잠정적 화해 분위기 속에서 카롤 2세가 1938년 루마니아 헌법을 통해 왕정 독재를 선포하면서 막을 내렸다. 안토네스쿠는 이 무렵 코드레아누와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카롤 2세의 요청으로 코드레아누에게 국왕과의 협력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하기도 했다.[29] 이후 카롤 2세의 지시로 컬리네스쿠 내무장관이 코드레아누를 체포하자, 미론 크리스테아 총리 내각에서도 국방장관직을 유지하던 안토네스쿠는 이에 항의하며 1938년 3월 30일 사임했다. (그는 2월 2일부터 사임 시까지 공군 및 해군 장관직도 겸임했다.)[30][31] 그는 코드레아누의 재판에 변호인 측 증인으로 출석하여 그의 무죄를 주장했으며,[30] 코드레아누가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자 배심원 앞에서 그의 손을 잡으며 결백을 보증하기도 했다.[30] 이 일로 안토네스쿠는 국왕에 의해 프레데알에 잠시 구금되었다가, 동부 베사라비아 지역의 제3군 사령관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키시너우에 투옥된 철위대원들에게 동정심을 표했다는 이유로 곧 해임되었다.[32] 카롤 2세는 안토네스쿠의 아내를 중혼죄로 기소하려 했으나, 미하이 안토네스쿠 변호사의 도움으로 무혐의가 입증되었다.[33] 코드레아누는 1938년 11월, 카롤 2세의 명령에 따라 구금 중 헌병에게 비밀리에 살해되었다.[34]
2. 4. 국방장관 시절과 코드레아누 재판

1937년 루마니아 총선 결과 어떤 정당도 확실한 우위를 점하지 못하자, 국왕 카롤 2세는 극우 성향의 국가기독당 소속 옥타비안 고가를 루마니아 총리로 임명하여 파시즘 내각을 구성했다. 이 내각은 유대인에 대한 인종차별 정책을 우선적으로 시행했으며, 이는 철위대 지도자 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의 영향력을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고가 총리는 코드레아누를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아르만드 컬리네스쿠를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했으며, 이온 안토네스쿠는 국방장관직을 맡게 되었다.[619]
간전기 동안 루마니아는 전통적인 동맹국인 프랑스, 영국, 소협상 동맹 국가들과의 관계를 유지할지, 아니면 고가 정부와 이념적으로 유사한 나치 독일 및 방공 협정 국가들과 새로운 외교 관계를 맺을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안토네스쿠는 이념적으로 아돌프 히틀러와 유사한 면이 있었지만, 프랑스 및 영국과의 전통적인 외교 관계 속에서 경력을 쌓아왔다.[604] 그는 헝가리와 소련의 보복주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기존의 동맹 관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프랑스-소비에트 상호협력조약이 체결되자 반공주의 성향의 안토네스쿠는 이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620] 헝가리가 트란실바니아 반환을 요구하자, 안토네스쿠는 참모진에게 서쪽 국경 방어 작전 계획 수립을 지시했다.[621] 한편, 철위대와 국가기독당의 준군사조직인 런치에리(Lăncieri|창병대ro)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하자, 안토네스쿠는 이미 수도에 내려진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622]
국가기독당의 고가와 철위대의 코드레아누가 연립한 고가 내각은 카롤 2세가 1938년 헌법을 통해 친정을 선포하면서 막을 내렸다. 1938년 고가 총리가 사망한 후, 안토네스쿠는 고가의 미망인 베투리아 고가와 친분을 유지하는 한편,[623] 코드레아누와 더욱 가까워져 그를 자신의 "절친한 친구"라고 불렀다.[624] 카롤 2세의 지시로 안토네스쿠는 코드레아누에게 근위대장직을 제안하기도 했으나, 코드레아누는 이것이 정치적 분쟁을 야기할 것을 우려하여 거절했다.[625]
얼마 지나지 않아 내무부 장관 컬리네스쿠는 코드레아누를 반역 혐의로 체포했다. 안토네스쿠는 이에 항의하는 서한을 보낸 뒤[626] 국방장관직을 사임했다. 그는 코드레아누의 친구로서 법정에 출두하여 그를 변호하기도 했다.[627] 카롤 2세는 루마니아 제3군에 명령하여 코드레아누를 베사라비아 지역 프레데알에 수감시켰으나, 나중에 안토네스쿠의 탄원으로 키시너우로 이감되었다.[628] 강력한 정적인 코드레아누가 제거되자 카롤 2세는 안토네스쿠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국왕은 안토네스쿠의 아내가 전 남편과 완전히 이혼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중혼 혐의를 씌우려 했으나 실패했다.[629] 결국 1938년 11월 30일, 카롤 2세의 명령으로 코드레아누는 처형되었다.[630]
2. 5. 권력 장악
소비에트 연방에 베사라비아와 북부 부코비나를 할양하는 것에 반대하여 카롤 2세 국왕과 대립하다 투옥되었던 안토네스쿠는, 추축국의 압력으로 루마니아가 남부 도브루자를 불가리아에, 북부 트란실바니아를 헝가리에 할양하게 된 1940년 8월에 석방되었다.영토 상실로 인한 정치적 위기 속에서 안토네스쿠는 1940년 9월 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즉시 카롤 2세를 퇴위시키고 그의 아들 미하이 1세를 국왕으로 즉위시켰다. 이후 국민투표를 통해 스스로 '국가지도자'(Conducător|콘두커토르ro)의 지위에 올랐다.

1940년 9월 14일, 안토네스쿠는 파시스트 철위대와 연합하여 루마니아를 공식적으로 '국가레지오네리주'로 선포했다. 이 체제 하에서 철위대는 루마니아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인 정당이 되었다. 안토네스쿠는 총리직과 함께 최고지도자(Conducător|콘두커토르ro) 지위를 유지했으며, 철위대의 명예 사령관으로도 임명되었다.[6][63][64][65] 그는 카롤 2세 정권 하에서 투옥되었던 철위대 대원들의 석방을 명령했다.[66] 10월 6일에는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철위대의 대규모 집회를 주재하기도 했다.[67] 그러나 안토네스쿠는 국민농민당(PNȚ)과 국민자유당(PNL)의 비공식적 존재를 용인하며 그들의 정치적 지지를 일부 유지하려 했다.[68]
권력을 장악한 안토네스쿠는 카롤 시대에 체결된 모든 조약과 외교 협정을 폐기하고 루마니아를 독일의 영향권 아래 두었다. 이전의 발칸 동맹국이었던 유고슬라비아 왕국과의 관계는 약화되었다.[69] 독일군은 루마니아의 석유 산업을 보호하고[70] 루마니아군에게 전격전 전술을 교육한다는 명분으로 루마니아에 단계적으로 진주했다.[71] 1940년 11월 23일, 안토네스쿠는 베를린에서 루마니아가 삼국 동맹 조약에 가입하는 문서에 서명했으며,[6][72] 이틀 후에는 나치가 주도하는 반 코민테른 조약에도 가입했다.[73] 이러한 조치들을 통해 안토네스쿠 정권은 추축국과의 동맹을 공식화하고 권력 기반을 다져나갔다.
2. 6. 호리아 시마와의 협력 및 갈등


1940년 총리 취임 후 안토네스쿠는 철위대의 지지를 기반으로 권력을 잡았으나, 점차 그들의 과도한 테러 행위를 우려하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는 철위대와의 연립 정부 운영 중에도 추가적인 혼란 발생 시 그들에 대항할 계획을 세웠으며, 이는 히틀러의 승인이 필요한 사안이었다.[6][64][94][95] 루마니아가 삼국 동맹에 가입하는 의식 중 이에 대한 모호한 신호가 오갔다.[6][96]
결정적인 전환점은 히틀러가 안토네스쿠와 철위대 지도자 호리아 시마를 모두 논의를 위해 초청했을 때 마련되었다. 안토네스쿠는 초청에 응했지만, 시마는 루마니아에 남아 쿠데타를 계획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6][97] 히틀러는 시마의 당을 탄압하는 데 명확한 지지를 표명하지는 않았으나, 안토네스쿠가 이를 간접적인 승인으로 해석할 만한 발언을 했다.[98] 1941년 1월 14일 독일-루마니아 정상 회담에서 히틀러는 안토네스쿠에게 그 해 말 소련 침공 계획(바르바로사 작전)을 알리고 루마니아의 참여를 요청했다.[99] 이때 히틀러는 시마가 이념적으로 자신과 더 가깝더라도, 안토네스쿠가 루마니아의 안정을 보장하고 추축국에 협력할 더 유능한 지도자라고 판단했다.
안토네스쿠와 시마 사이의 갈등은 1941년 1월 폭력 사태로 번졌다. 철위대는 공공 기관에 대한 일련의 공격과 함께 유대인 학살을 선동했는데, 이는 "레지오네어 반란"으로 알려지게 되었다.[6][100] 반란은 부쿠레슈티 주재 독일 요원 도링 중령의 의문스러운 암살 이후 발생했으며, 철위대는 이를 빌미로 안토네스쿠가 반독일 비밀 의제를 가지고 있다고 비난했다.[101] 이에 안토네스쿠는 철위대가 장악한 모든 "루마니아화" 사무실을 폐쇄하고 내무부 장관 콘스탄틴 페트로비체스쿠를 축출했다.[102] 또한 여러 충돌 이후 철위대에 동조적인 모든 경찰 사령관의 사임을 요구했다.[103] 이틀간 지속된 광범위한 폭력 속에서 철위대원들은 부쿠레슈티에서 약 120명의 유대인을 살해했다.[6][104] 안토네스쿠는 콘스탄틴 스너테스쿠 장군의 지휘 아래 군대를 투입하여 반란 진압에 나섰다.[6]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신임 대사 만프레트 프리허 폰 킬링거를 포함한 독일 고위 관리들은 안토네스쿠의 철위대 제거를 도왔으나, 일부 하급 관리들은 시마의 부하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105] 요제프 괴벨스는 이러한 결정이 "프리메이슨"에게 유리하다고 믿으며 안토네스쿠 지지에 대해 특히 불만을 표했다.[106]
철위대 숙청 이후, 히틀러는 안토네스쿠의 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시마와 다른 철위대원들에게 정치 망명을 허용하며 여지를 남겨두었다.[107] 이들은 부헨발트와 다하우 등 강제 수용소에서 특별 대우를 받으며 구금되었다.[108] 동시에 안토네스쿠는 시마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했던 철위대의 한 분파, 즉 코드레아누의 아버지 이온 젤레아 코드레아누가 이끄는 코드레아니스트들의 협력을 공개적으로 얻으려 했다.[109] 안토네스쿠는 다시 국민농민당(PNȚ)과 국민자유당(PNL)의 지원을 구해 국가 내각을 구성하려 했지만, 의회 제도를 거부했기 때문에 두 정당 모두 그를 거부했다.[110]
이후 안토네스쿠는 독일로 가서 1941년 6월부터 1944년 8월까지 히틀러를 여덟 차례 더 만났다.[111] 이러한 긴밀한 접촉은 두 독재자 사이의 관계를 공고히 했으며, 히틀러는 안토네스쿠를 루마니아에서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자[6][112] 군사 문제에 대해 상담할 수 있는 유일한 외국인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전해진다.[113] 미국의 역사가 게르하르트 바인베르크는 히틀러가 안토네스쿠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무솔리니를 제외하고 다른 어떤 외국 지도자도 히틀러로부터 그토록 일관되게 호의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언급했다.[114] 히틀러는 안토네스쿠의 "비전의 폭"과 "진정한 개성"을 칭찬하기도 했다.[115] 두 사람은 서로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했기 때문에, 회담은 안토네스쿠가 프랑스어로 말하면 히틀러의 통역관 파울 슈미트가 독일어로 번역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116]
2. 7. 제2차 세계 대전
1940년 카롤 2세를 퇴위시키고 총리가 된 안토네스쿠는 국민투표를 통해 국가 지도자(Conducător) 지위에 올라 추축국과의 외교를 추진했다.[12] 초기에는 파시스트 운동인 철위대의 지지를 받았으나, 그들의 극단적인 테러 행위를 우려하여 점차 거리를 두었다. 1941년 1월, 철위대는 자신들이 나치 독일의 지지를 받는다고 믿고 반란을 일으켰지만, 아돌프 히틀러는 루마니아의 안정과 석유 공급을 중시하여 안토네스쿠를 지지했고 반란은 신속하게 진압되었다.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안토네스쿠는 루마니아를 추축국 편에 서서 참전시켰다. 이는 소비에트 연방에 빼앗긴 베사라비아와 북부코비나를 되찾으려는 목적과 함께, 나치 독일과의 동맹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는 루마니아가 홀로코스트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결과를 낳았다. 독일 측의 요구에 따라 루마니아 내 유대인 약 4만 명을 트란스니스트리아의 강제 수용소로 이송하는 데 협력했으며,[12] 안토네스쿠 정권 하에서 점령지를 포함하여 약 27만 명의 루마니아 및 우크라이나계 유대인이 학살되거나 강제 수용소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사망했다. 또한 약 2만 5천 명의 로마인도 추방되어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12]
동부 전선에서 루마니아군은 독일군의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나, 무기와 장비가 열악하고 훈련도 부족하여 전쟁 초기부터 독일 지휘관들의 우려를 샀다.[140] 안토네스쿠는 흑해 연안의 주요 항구 도시인 오데사 공격에서 독일의 지원을 거부하고 루마니아군 단독으로 두 달간의 포위 공격을 강행했다.[93][141] 이 전투에서 장비가 부족했던 루마니아 제4군은 약 10만 명의 사상자를 내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142] 오데사 함락은 부쿠레슈티에서 개선 행진으로 축하받으며 안토네스쿠의 인기를 일시적으로 높였지만,[93] 점령 직후 루마니아군 사령부 폭탄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안토네스쿠가 직접 명령한 유대인 대학살이 자행되었다.[93][143] 오데사는 이후 루마니아가 점령한 트란스니스트리아의 행정 수도가 되었다.[93][144] 안토네스쿠는 전쟁에서 승리하면 제2차 빈 중재로 잃은 북트란실바니아를 되찾기 위해 헝가리를, 크라이오바 조약으로 할양한 남도브루자를 되찾기 위해 불가리아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특히 헝가리 공격 계획은 루마니아가 독일의 더 중요한 동맹국임을 증명하여 전후 영토 조정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146] 이를 위해 독립국 크로아티아, 슬로바키아와 함께 헝가리에 대항하는 크로아티아-루마니아-슬로바키아 우호 선언을 체결하기도 했다.[147]

소련이 모스크바 전투에서 추축군의 공세를 저지하자, 독일은 루마니아에 더 많은 병력 파견을 요구했다.[148]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OKW) 총장 빌헬름 카이텔 원수가 직접 부쿠레슈티를 방문하여 카프카스 유전지대 점령을 목표로 한 청색 작전(카프카스 전투) 계획을 설명하자, 안토네스쿠는 독일의 요구를 초과하는 약 50만 명의 병력과 30개 사단을 추가로 파병하기로 결정했다.[148][149][150] 이에 히틀러는 안토네스쿠에게 고급 승용차를 선물하며 만족감을 표했다.[148] 1941년 12월, 일본 제국의 진주만 공격 이후 루마니아는 삼국 동맹 조약에 따라 미국에도 선전포고했으며, 이미 소련의 요청을 받은 영국도 루마니아에 선전포고했다.[151][152] 이는 불과 며칠 전 "나는 [소련]에 맞서 [독일] 제국과 동맹이며, 영국과 독일 간의 분쟁에는 중립적이다. 나는 일본에 맞서 미국 편이다"라고 했던 안토네스쿠 자신의 발언과 배치되는 것이었다.[152]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은 1942년 6월부터 1943년 2월까지 이어진 스탈린그라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추축군은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으며,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루마니아군은 약 15만 명(사망, 부상, 포로 포함)의 병력을 잃었고, 루마니아 사단의 절반 이상이 궤멸되었다.[148][153] 특히 소련군에게 포위되어 전멸하거나 항복한 루마니아 2개 군단의 손실은 1943년 초 독일-루마니아 관계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다.[154] 루마니아 정부 내에서도 추축국 편에서 계속 싸우는 것에 대한 회의론이 퍼지기 시작했다. 독일의 계속된 장비 및 지원 약속 위반, 소련의 공세 준비 경고 무시, 후퇴하는 루마니아군에 대한 독일군의 경멸적인 대우, 그리고 자신들의 실책을 동맹국에게 전가하는 독일의 태도는 양국 관계를 악화시켰다.[154] 이 시기 안토네스쿠는 건강 문제로 잠시 공개 석상에서 물러났는데, 이를 두고 정신 쇠약, 식중독, 심지어 젊은 시절 앓았던 매독의 재발 등 다양한 소문이 돌았다.[155] 그는 소화기 질환을 앓고 있었으며, 1943년 이후에는 히틀러의 영양사였던 마를렌 폰 엑스너가 제공하는 식단으로 치료받기도 했다.[156] 복귀 후 안토네스쿠는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손실 책임을 독일 감독관 아르투어 하우페에게 돌렸고, 히틀러는 그를 교체하는 데 동의했다.[157]

군사적 손실과 더불어 루마니아는 심각한 경제 문제에 직면했다. 루마니아의 석유는 1941년 6월부터 1944년 8월까지 독일에게 유일한 천연 석유 공급원이었기에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했지만,[146] 독일은 루마니아산 수출품, 특히 석유에 대한 대금 지불을 계속 미뤘다.[159] 독일의 환율 조작과 수출 대금 미지급은 루마니아 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다.[160] 안토네스쿠는 독일의 석유 증산 요구를 거부하며 밀린 대금 지급을 요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146] 설상가상으로 1942년부터 미국 육군 항공대와 영국 공군이 플로에슈티 유전 지대를 폭격(제2차 세계 대전 중 루마니아 폭격, 타이드 웨이브 작전)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162] 전쟁 기간 동안 루마니아의 총 인명 손실은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약 55만 4천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163] 한편, 루마니아군의 전투력 강화를 위해 1942년 말부터 마레샬(자주포) 자주포 개발이 시작되었는데, 안토네스쿠 원수는 이 프로젝트에 직접 관여했으며, 이 자주포는 나중에 독일의 헤처 구축전차 개발에 영향을 미쳤다.[164][165][166]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안토네스쿠는 독일의 패전 가능성을 인지하고, 부총리 겸 외무장관인 미하이 안토네스쿠에게 연합국과의 접촉을 허가했다.[148][167] 1943년 초부터 루마니아 외교관들은 포르투갈, 스위스 등 중립국에서 영국 및 미국 측과 휴전 가능성을 타진했지만,[168] 연합국은 소련과의 휴전 없이는 서방과의 단독 휴전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안토네스쿠는 이를 거부했다.[168] 동시에 그는 국민농민당(PNȚ)과 국민자유당(PNL)이 별도로 연합국과 접촉하는 것을 묵인했다.[148][169] 이 협상들은 스웨덴과 이집트 등지에서 소련 대표(니콜라이 노비코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를 포함한 연합국 외교관들과 진행되었으나, 연합국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면서 난항을 겪었다.[170] 이탈리아의 항복 이후 루마니아 영토가 전쟁터가 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커졌다.[171] 이러한 국내외적 위기는 안토네스쿠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움직임을 가속화시켰고, 야당, 젊은 국왕 미하이 1세, 외교관, 군부 내 일부 세력이 비밀리에 협력하기 시작했다.[148][172] 미하이 1세와 안토네스쿠 사이의 갈등은 1943년 초 국왕이 국영 라디오 신년 연설을 통해 추축국의 전쟁 노력과 거리를 두는 듯한 발언을 하면서 표면화되었다.[173]
2. 8. 몰락
1942년 6월부터 1943년 2월까지 이어진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추축국의 큰 패배로 끝났고, 이는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전투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루마니아군은 약 15만 명(사망, 부상 또는 포로)의 병력을 잃었으며, 루마니아 사단의 절반 이상이 궤멸되었다.[148][153] 특히 소련군에게 섬멸되거나 포로로 잡힌 루마니아군 2개 사단의 손실은 1943년 겨울 독일-루마니아 관계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고, 루마니아 정부 내 많은 이들이 처음으로 추축국 편에서 싸우는 것의 현명함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154]1943년까지 계속된 동부 전선에서의 막대한 손실, 베르마흐트가 루마니아 동맹군을 경멸적으로 대하는 것에 대한 분노, 루마니아 내 삶의 질 저하 등으로 인해 전쟁은 루마니아 국민들에게 인기를 잃었고, 이는 결국 '콘두카토르' 안토네스쿠의 입지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역사가 게르하르트 바인베르그는 "장비와 지원에 대한 독일의 끊임없는 약속 위반, 소련의 공세 준비에 대한 경고 무시, 독일 장교와 병사들에 의한 후퇴하는 루마니아 부대에 대한 불친절한 대우, 그리고 자신의 잘못된 계산과 재앙을 동맹국에게 돌리는 독일의 일반적인 경향은 독일-루마니아 관계에 진정한 위기를 초래했다"고 평가했다.[154] 이 시기 안토네스쿠는 건강 문제로 잠시 공개 석상에서 물러났는데, 이는 정신 붕괴, 식중독, 혹은 과거 앓았던 매독 증상 등 다양한 추측을 낳았다.[155]
군사적 손실과 더불어 루마니아는 심각한 경제 문제에 직면했다. 루마니아의 석유는 나치 독일에게 매우 중요했지만,[146] 독일은 루마니아 수출품, 특히 석유 대금 지불을 대부분 체납했다.[159] 또한 나치의 환율 통제는 루마니아 경제에 부담을 주었다.[160] 안토네스쿠는 독일의 석유 생산량 증대 요구를 거부하며 밀린 대금을 받으려 했지만 어려움을 겪었다.[146] 설상가상으로 1942년부터 미국 육군 항공대와 영국 공군이 프라호바 주의 유전을 폭격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제2차 세계 대전 중 루마니아 폭격, 타이드 웨이브 작전 참조).[162]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안토네스쿠는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부총리이자 외무장관인 미하이 안토네스쿠에게 연합국과의 접촉을 허가했다.[148][167] 1943년 초, 루마니아 외교관들은 포르투갈과 스위스에서 영국 및 미국 외교관들과 접촉하여 서방 연합국과의 단독 휴전 가능성을 타진했다.[168] 그러나 연합국은 소련과의 휴전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었고, 안토네스쿠는 이를 거부했다.[168] 동시에 그는 국민농민당과 국민자유당이 중립국에서 연합군과 별도의 협상을 진행하는 것을 허용했다.[148][169] 이 협상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국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면서 난항을 겪었으며, 루마니아 사절들은 스웨덴과 이집트 등지에서 소련 대표 니콜라이 노비코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를 포함한 연합국 외교관들과 만났다.[170] 안토네스쿠는 이탈리아 전역처럼 루마니아 영토가 전쟁터가 될 가능성을 우려했으며,[171] 이는 안토네스쿠 정권 전복을 위한 반대파(국민농민당, 국민자유당, 미하이 1세 국왕, 외교관, 군인 등)의 움직임을 촉발했다.[148][172] 미하이 국왕과 안토네스쿠 사이의 갈등은 1943년 초, 국왕이 국영 라디오 신년사를 통해 추축국의 전쟁 노력과 거리를 두면서 표면화되었다.[173]
1944년 3월, 소련 적군은 남부 부그 강과 드네스트르 강 전선을 돌파하여 베사라비아로 진격했다. 이는 영국의 헨리 메이트랜드 윌슨 원수가 안토네스쿠에게 최후통첩을 전달한 직후였다.[148] 안토네스쿠는 독일을 방문하여 히틀러와 회담한 후, 남은 추축국과 함께 계속 싸우기로 결정했다. 그는 나중에 이 결정이 히틀러가 추축국 승리 시 트란실바니아 북부를 루마니아에 돌려주겠다는 약속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148] 귀국 후 그는 이아시와 키시너우 사이의 북부 전선을 안정시키기 위한 반격을 지휘했다.[148]
그러나 안토네스쿠가 윌슨의 최후통첩을 거부하면서 루마니아의 전쟁 이탈 가능성은 희박해졌다.[148] 그는 여전히 서방 연합국과의 단독 강화를 모색하면서도[148][175] 소련과의 접촉을 유지했다.[176] 한편, 주요 반대 정파들은 루마니아 공산당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수적으로는 미미했지만 소련 지도자 요셉 스탈린의 지지를 받는 유일한 정당이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가졌다.[177] 공산당 측에서는 루크레치우 퍼트러슈카누와 에밀 보드너라슈가 논의에 참여했으며,[148][178] 구 루마니아 사회민주당도 이 논의에 합류했다.[179]
1944년 봄, 소련군이 루마니아 국경에 접근하면서 부쿠레슈티는 대규모 연합군 폭격을 받았다.[180] 여름 말에는 제2차 야시-키시너우 공세가 시작되어 소련군이 몰도바 지역으로 진격했다.[181] 안토네스쿠는 루마니아 영토 깊숙한 곳의 포크샤니-너몰로아사-브러일라 선에서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다.[148] 8월 5일, 그는 켄트르진에서 히틀러를 마지막으로 만났다.[182]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소련이 루마니아의 완전한 복종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러 차례 밝힌 후,[183] 안토네스쿠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1944년 8월 23일 왕궁 쿠데타를 실행하여 그를 축출하기로 결정했다.[148][184]
8월 23일, 미하이 1세 국왕은 안토네스쿠를 왕궁으로 불러 루마니아를 추축 동맹에서 탈퇴시킬 것을 요구했다.[148][185] 안토네스쿠가 이를 거부하자 즉시 근위병에게 체포되었고 총리직에서 해임되었다. 콘스탄틴 스너네스쿠 장군이 이끄는 국가 연합 정부가 수립되었다.[148][186]
새로운 루마니아 정부는 연합국과의 평화를 선언하고 국민들에게 소련군을 환영하라고 촉구했다.[148] 8월 25일, 부쿠레슈티가 독일군의 보복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후 루마니아는 나치 독일에 선전포고했다.[187] 이 쿠데타는 발칸반도에서 독일의 지배력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했지만,[188] 일방적인 조치였기 때문에 9월 12일 정전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소련은 루마니아를 여전히 적국으로 간주하고 루마니아 군인들을 계속 포로로 잡았다.[148][189]
체포된 이온 안토네스쿠는 루마니아 공산당 민병대의 감시 아래 부쿠레슈티의 한 가옥에 잠시 머물렀다가[148][191] 소련 점령군에게 넘겨져 모스크바로 이송되었다. 미하이 안토네스쿠, 게오르게 알렉시아누, 콘스탄틴 판타지, 콘스탄틴 바실리우, 미르체아 엘레프테레스쿠 등 다른 고위 관리들도 함께 이송되었다.[148][192] 그들은 모스크바 근교의 저택에 구금되어 스메르시의 감시를 받았다.[148][193] 1945년 5월 독일 항복 직후 루뱐카 감옥으로 옮겨져 심문을 받았다. 안토네스쿠는 이 기간 중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148][192] 심문 내용은 주로 독일-루마니아 동맹, 소련과의 전쟁, 경제적 문제, 홀로코스트 가담 등에 관한 것이었다.[148] 1946년 봄, 안토네스쿠는 부쿠레슈티로 송환되어 질라바 감옥에 수감되었다.[195]
2. 9. 재판과 처형
1946년 5월, 이온 안토네스쿠는 전쟁범죄, 평화에 대한 범죄, 반역 혐의로 기소되어 일련의 인민재판 중 첫 번째 재판에 회부되었다.[148][196] 이 인민재판은 원래 국민농민당(PNȚ)이 제안했으며,[148] 연합군 점령하 독일에서 열린 뉘른베르크 재판과 유사한 방식으로 구상되었다.[148][197] 재판의 법적 근거는 1944년 쿠데타에 참여했고 당시 사법부 장관이었던 루마니아 공산당(PCR) 소속 루크레치우 패트러슈카누가 마련했다.[198] 그러나 재판 절차는 PCR과 소련에 유리하게 진행되어 정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고,[148][199] 소급 적용되는 법률에 근거했다는 점에서 법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200] 이러한 인민재판은 1945년부터 시작되어 오데사 학살 계획 및 실행에 직접 관여한 군 지휘관들(이오시프 이아코비치, 니콜라에 마키치, 콘스탄틴 트레스티오레아누 등)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바 있다.[201]안토네스쿠의 변호는 재판 시작 하루 전에야 선임된 국선 변호인 콘스탄틴 파라시키베스쿠-벌러체아누와 티투스 스토이카가 맡았다.[202] 검찰팀은 바실레 스토이칸이 이끌었고, 재판부는 알렉산드루 보이티노비치가 주재했는데, 양측 모두 PCR 지지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203] 재판 과정에서 안토네스쿠의 대외 정책이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루마니아가 처한 지정학적 위치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주장은 일관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48][204] 기소 내용과 증거 자료에서 대량 학살 관련 내용은 23%에 불과했지만(소련 침공 혐의보다 비중이 낮았음),[205] 재판에는 트란스니스트리아로의 강제 이주를 포함한 전쟁 범죄에 대한 안토네스쿠의 자백과 자기 변명이 포함되었다.[148][206] 그는 오데사 학살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음을 인정했으나, 사망자 중 일부만이 자신의 직접적인 책임이라고 주장했다.[207] 재판 중 주목할 만한 장면은 국민농민당(PNȚ) 지도자 율리우 마니우의 증언이었다. 다른 고발자들의 공격적인 태도와 달리 마니우는 "우리(마니우와 안토네스쿠)는 정치적 적대자였지 식인종은 아니었다"고 진술했다.[148] 마니우는 증언을 마친 후 법정을 떠나 안토네스쿠에게 다가가 악수를 나누기도 했다.[148][208]

이온 안토네스쿠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판결 이후 두 차례의 항소가 제기되었다. 항소 이유로는 복원 및 수정된 1923년 헌법이 인민재판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평화 시에는 사형을 금지한다는 점, 그리고 휴전 협정과는 달리 연합국 위원회 내의 단일 세력(소련)만이 재판을 감독했다는 점 등이 제시되었다.[200] 그러나 모든 항소는 인민재판 완료에 대한 법적 기한(6일)을 준수하여 기각되었다.[209] 미하이 국왕은 안토네스쿠의 변호사와 어머니로부터 관용을 베풀어 달라는 청원을 받았다. 국왕은 루마니아 전범들을 해외로 이송하여 실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사건을 재평가하도록 연합군에 요청하는 방안을 고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210] 하지만 소련의 지원을 받는 페트루 그로자 행정부의 압력으로 결국 사형 집행을 승인하는 법령을 발표했다.[211]
이온 안토네스쿠는 동료 피고인인 미하이 안토네스쿠, 게오르게 알렉시아누, 콘스탄틴 Z. 바실리우와 함께 1946년 6월 1일, 질라바 형무소 외곽의 '복숭아 나무 계곡'(Valea Piersicilorro)이라 불리는 곳에서 군 총살대에 의해 처형되었다.[148][215] 안토네스쿠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일반 병사들이 사령관에게 발포하기를 거부하여 총살대가 대부분 유대인 경찰로 구성되었다는 소문이 퍼졌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212] 안토네스쿠 자신이 사격을 명령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처형 장면을 담은 영상은 이를 반증한다.[213] 그는 눈가리개를 거부했으며, 사격 명령이 내려지자 모자를 들어 경례했다.[214] 그의 마지막 유언은 아내에게 보낸 편지로, 수녀원에 들어갈 것을 권유하며 후세가 자신의 행동을 재평가할 것이라는 믿음을 표현하고 루마니아인들이 "배은망덕하다"고 비난했다.[216]
3. 이념
이온 안토네스쿠의 이념은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며, 주로 강경한 민족주의, 극단적인 반유대주의 및 반집시주의, 그리고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의 정치적 행보는 이러한 이념적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으며, 루마니아의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안토네스쿠는 대루마니아의 부활을 강력히 추구하며 영토 확장을 꾀하는 팽창주의적 민족주의를 핵심 이념으로 삼았다. 이는 북트란실바니아 문제에 대한 강경한 입장과 제2차 세계 대전 중 동부 전선 참전 결정 등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또한, 인종차별주의, 특히 반유대주의는 그의 정치 사상과 정책의 중심축을 이루었다. 그는 유대인을 국가 발전의 저해 요소로 간주하고, 이는 정권 차원의 박해와 홀로코스트로 이어지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 로마니족(집시) 역시 그의 인종차별 정책의 대상이 되었다.
안토네스쿠 정권의 성격을 파시즘으로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학계의 논쟁이 존재한다. 일각에서는 그를 철위대와 같은 파시스트 운동과는 구별되는 보수적 군사 독재자로 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철위대의 이념을 상당 부분 수용하고 파시즘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파시스트 또는 준파시스트 정권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그가 권위주의적 통치를 통해 강력한 국가 권력을 구축하고 민주주의적 가치를 부정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복합적인 이념들은 안토네스쿠 시대 루마니아의 정책 방향과 역사적 경로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3. 1. 민족주의와 팽창주의

안토네스쿠의 정책은 상당 부분 민족주의에 기반했다. 그는 루마니아 민족이 거주하는 땅을 통합하여 대루마니아를 부흥시키는 것을 확고히 믿었으며, 헝가리가 북트란실바니아를 병합한 것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루마니아와 헝가리는 추축국으로서 기술적으로는 동맹이었지만, 이 문제로 양국 관계는 항상 긴장 상태였고 심각한 외교적 마찰이 잦았다.[217] 안토네스쿠는 제2차 비엔나 중재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루마니아 민족 공동체 대표들, 특히 트란실바니아 그리스 정교회 성직자들과 계속 접촉했다.[218]
안토네스쿠의 민족주의 정책은 발칸 전역 이후 다른 측면에서도 나타났다. 루마니아는 군사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지만, 상당한 루마니아계 공동체가 거주하는 동부 보이보디나(서부 바나트)와 티목 계곡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 독일이 보이보디나를 헝가리에 할양하려던 초기 계획은 안토네스쿠와 헝가리 섭정 호르티 미클로시 사이의 긴장을 전쟁 직전까지 고조시켰다고 전해진다.[219] 결국 독일은 해당 지역에 대한 점령을 무기한 연장했다.[220] 루마니아 당국은 아로마니아인 공동체를 위한 자치권을 가진 독립적인 마케도니아 구상을 발표했고,[221] 안토네스쿠가 승인한 티목 계곡 관련 공식 각서에서는 티목에서 "…살로니카"까지 이어지는 "루마니아" 지역을 언급하기도 했다.[222] 또한 안토네스쿠는 추축국 점령 하 그리스의 아로마니아인 파시스트들과도 접촉하며, 친루마니아 정책으로 다른 아로마니아인 세력과 갈등을 빚던 로마 군단의 알키비아데스 디아만디와 니콜라 마투시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223]
안토네스쿠는 히틀러가 북트란실바니아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바꿀 의향이 있다고 믿었고, 베사라비아 회복 이후 동부 전선에 참전하는 대가로 히틀러의 동의를 얻었다고 주장했다.[148][224] 그러나 히틀러와 안토네스쿠 간 대화 기록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지 않는다.[112][148] 다른 설에 따르면 히틀러는 안토네스쿠에게 베사라비아의 정치적 지위는 궁극적으로 독일의 결정에 달려있다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148] 안토네스쿠 자신은 히틀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반공주의적 동기를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저는 문명, 유럽, 그리고 제 나라의 위대한 적, 즉 러시아 볼셰비즘에 맞서 동쪽에서 끝까지 작전을 수행할 것임을 확인합니다 [...] 저는 이 군사 협력을 새로운 영토로 확장하지 않도록 누구에게도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225] 그의 이념은 일반적인 기독교, 특히 루마니아 정교회적 특성과 국가적 감정을 혼합한 형태였다. 영국의 역사가 아놀드 D. 하비는 이러한 이념이 나치 이념, 특히 그 반종교적 요소와는 잘 맞지 않아 보이지만, "히틀러는 안토네스쿠 정권의 호전적인 기독교적 방향에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것 같다"고 지적했다.[115]
히틀러가 안토네스쿠의 의사와 무관하게 트란스니스트리아 이관을 트란실바니아 영토 상실에 대한 보상으로 여겨 문제를 종결시켰다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다.[226] 베를린 주재 루마니아 대표였던 라울 보시에 따르면, 일부 독일 및 헝가리 관리들은 트란실바니아 전체를 헝가리에 넘기는 대가로 루마니아가 트란스니스트리아뿐만 아니라 포돌리아, 갈리치아, 포쿠티야까지 영구적으로 통치하도록 권고했다고 한다 (이 경우 트란실바니아의 루마니아계 다수 민족은 새로운 주로 이주해야 했다).[227] 미국의 정치학자 찰스 킹은 "루마니아 정부가 일반적으로 [트란스니스트리아를] 대루마니아와 소련 전선 사이의 일시적인 완충 지대로 간주했기 때문에 점령 영토를 병합하려는 시도는 전혀 없었다"고 평가했다.[228] 안토네스쿠는 1946년 재판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 점령이 독일의 ''동방으로의 진출''과 동쪽의 ''폴크스도이체'' 공동체 사이에 루마니아가 갇히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으며, 루마니아의 이익을 위해 해당 지역을 착취했다는 혐의는 부인했다.[229]
그러나 루마니아 역사가 루시안 보이아는 안토네스쿠가 동쪽으로 팽창주의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으며, 바르바로사 작전을 슬라브 민족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암묵적으로 이해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230] 다른 연구자들도 비슷한 결론을 내렸다.[231] 또 다른 루마니아 역사가 오트마르 트라슈카는 안토네스쿠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해당 지역을 병합하려 하지 않았을 수 있지만, 안토네스쿠 자신의 발언은 승리 시 병합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지적한다.[232] 남부 부그 강까지 영토를 병합하려는 초기 계획(1941년 6월 보시에게 언급한 것으로 알려짐)[233] 외에도, 안토네스쿠는 장관들에게 해당 지역의 식민지화 계획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234] 그는 루마니아 농민들의 영양실조 문제를 명분으로 삼으며 "나는 이 인구를 데려가 트란스니스트리아로 이끌고, 필요한 모든 땅을 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고 한다.[232] 안토네스쿠에게 우호적인 일부 민족주의자들은 트란스니스트리아로의 루마니아 통치 확장을 영구적인 조치로 받아들이며 환영했다.[235]
3. 2. 반유대주의와 반집시주의
안토네스쿠의 정치 사상과 정책에서 인종차별주의, 특히 반유대주의는 핵심적인 요소였다. 이는 그의 민족국가적 이상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으며, "통합 민족주의"와 "루마니아주의"를 강조하는 발언에서도 드러났다.[236] 그는 다른 극우 루마니아 인사들처럼 자유민주주의 배후에 유대인이 있다고 보았고, 유대 프리메이슨의 존재를 믿었다.[237] 초기에는 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의 "잔혹한 조치"를 비판하면서도 "유대인의 침입"을 막기 위한 "루마니아 계급의 조직"을 대안으로 제시했다.[14] 그를 만났던 정치인 아우렐리우 바이스는 안토네스쿠가 "핵심적으로" 반유대주의자였지만 공개적으로는 자제했다고 회상했다.[238]철위대와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도 반유대주의는 중요한 변수였다. 역사가 미하일 이오네스쿠에 따르면, 안토네스쿠는 철위대의 반유대주의 원칙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았으나, 호리아 시마의 혁명적 방식 대신 "질서 정연한 방식"으로 반유대주의 정책이 시행되기를 원했다.[6] 레지오네어 반란 당시, 안토네스쿠가 철위대의 폭력 행위를 의도적으로 방관하여 스스로를 "구원자"로 부각시키려 했다는 분석도 있다.[6] 1941년 4월에는 장관들에게 "폭도"를 이용해 유대인 문제를 처리하고 "학살 후 질서를 회복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238]
아돌프 히틀러와의 동맹 및 바르바로사 작전 참여는 안토네스쿠의 반유대주의를 더욱 극단으로 몰고 갔다. 그는 히틀러와의 회담에서 소련과의 전쟁이 "유대-볼셰비즘" 세력을 "절멸"하기 위한 이념 전쟁, 즉 어떠한 자비도 없는 "절멸 전쟁"임을 인지했다.[99] 안토네스쿠는 이 전쟁을 축 진영의 아리아인(북유럽 독일인과 라틴 루마니아인)과 소련 진영의 유대인이 지휘하는 슬라브족 및 아시아인 간의 "인종 전쟁"으로 받아들였다.[119] 그는 유대인뿐 아니라 슬라브족과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도 강하게 드러냈다.[120] 안토네스쿠는 히틀러에게 루마니아인이 라틴 민족으로서 모든 슬라브족과 유대인에 대한 타고난 증오심을 가지고 있으며, 러시아를 강국으로서 "영원히"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120] 그는 루마니아가 독일을 위한 "반슬라브 완충 지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20]
안토네스쿠 정권 하에서 반유대주의는 구체적인 정책과 폭력으로 나타났다. 1941년 6월 18일, 그는 루마니아군이 베사라비아와 부코비나에 진입할 때 유대인을 "청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99] 그는 소련과의 전쟁을 "유대-볼셰비즘"에 맞선 "성전"이자 "십자군"으로 선포했다.[123] 정권의 선전은 공산주의가 유대인에 의해 발명되었고 모든 소련 지도자가 유대인이라는 안토네스쿠의 믿음을 퍼뜨리며 유대인을 악마화했다.[124] 1941년 6월 말, 안토네스쿠의 승인 아래 이아시에서 대규모 유대인 학살, 즉 이아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어 수천 명이 살해되었다.[93][127]
안토네스쿠는 서구의 자유주의적 가치를 거부하고, 민주주의가 유대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여 루마니아의 "국가적 사상"을 약화시킨다고 비난했다.[129] 그는 "강인하고", "남성적이며", 민족적, 종교적으로 "순수한" 루마니아를 위한 "새로운 인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129] 그의 극심한 반유대주의와 성차별주의는 베사라비아와 북부 부코비나에서 유대인 여성과 소녀에 대한 강간을 묵인하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그는 유대인 여성을 단지 재산의 일부로 간주했기 때문이다.[130]
트란스니스트리아 점령 이후, 이곳은 루마니아 홀로코스트의 주요 무대가 되었다. 베사라비아, 부코비나, 우크라이나 유대인들이 대량으로 추방되었고, 나중에는 루마니아 본토(레가트, 남부 부코비나, 남부 트란실바니아)의 유대인과 로마니족도 이곳으로 보내졌다. 1941년 10월 오데사 점령 후 발생한 1941년 오데사 대학살 역시 안토네스쿠의 명령에 따른 유대인 학살이었다.[93][143] 그는 오데사 전투의 격렬함조차 유대인 정치위원들의 탓으로 돌렸다.[137] 안토네스쿠는 루마니아의 모든 유대인을 트란스니스트리아로 추방하여 살해하려 했으나, 독일 측의 반대로(주로 관료적 이유와 독일의 절멸 수용소 이용 계획 때문) 실행하지 못했다.[138][139]
안토네스쿠는 유대인 볼셰비즘 음모론을 굳게 믿었으며,[93][241] 1940년 베사라비아 철수 당시 유대인들이 루마니아 군인을 공격했다는 거짓 주장을 퍼뜨렸다.[93][242] 그는 유대인을 "사탄",[244] 질병이나 독으로 묘사하며[247] 절멸의 대상으로 삼았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에도 그는 소련의 승리가 유대인을 루마니아에 부과하고 민족을 파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248]
안토네스쿠의 인종차별 정책은 로마니족(집시)에게도 향했다. 그의 반집시주의는 로마니족, 특히 유목민들이 범죄 성향을 가졌다는 편견에 기반했다.[249] 철위대가 로마니족을 겨냥한 인종차별적 구호를 내세웠지만, "집시 문제" 해결을 공식 정책으로 삼고 구체적인 조치를 시행한 것은 안토네스쿠의 독재 하에서였다.[251] 1941년, 그는 부쿠레슈티 로마니 공동체를 범죄의 온상으로 지목하고 해결책 마련을 지시했다.[252] 처음에는 이들을 버러간 평원으로 추방하는 것을 고려했다.[253] 1942년에는 루마니아 중앙 통계 연구소에 로마니 인구 통계 보고서 작성을 의뢰했는데, 이 보고서는 과학적 인종차별주의에 입각하여 로마니-루마니아 혼혈의 위험성을 경고했다.[254] 이는 로마니족의 사회적 배제, 추방, 강제 불임 수술 등을 주장하던 우생학 기반의 유사과학적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낳았다.[255] 보고서 작성자 중 한 명인 인구 통계학자 사빈 마누일라는 로마니족의 존재를 주요 인종 문제로 간주했다.[256] 이러한 배경 속에서 로마니족 역시 트란스니스트리아로 강제 추방되는 비극을 겪었다.
3. 3. 파시즘과의 관계
이온 안토네스쿠 정권의 성격을 파시스트 정권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보다 넓은 의미의 우익 권위주의 정권으로 분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존재한다. 이는 파시즘 자체의 정의와 범위에 대한 더 큰 논쟁의 일부이기도 하다.[258]일부 학자들은 안토네스쿠를 파시스트와는 구별되는 인물로 본다. 이스라엘 역사가 지브 스턴헬은 안토네스쿠를 피에르-에티엔 플랑댕, 프란시스코 프랑코, 미클로시 호르티, 프랑수아 드 라 로크, 필리프 페탱,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등과 함께 "보수주의자"로 분류하며, 이들이 파시스트 운동과 동일시되려는 선전에 동조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258] 독일 역사가 하겐 슐체 역시 비슷한 시각에서 호르티, 프랑코, 안토네스쿠를 살라자르(포르투갈)나 유제프 필수츠키(폴란드)와 같이 "순수한 군사 독재 또는 민간 정치인이 운영하는 권위주의 정부"의 지도자로 보며, 이들을 파시스트 국가 지도자와는 다른 범주로 구분한다.[259] 슐체에 따르면, 이러한 정권들은 "보수적인 기득권층"에 기반하여 전통적인 국가 통제를 강화함으로써 사회 안정을 추구했으며, 이는 극좌와 극우 양측의 혁명적 시도를 차단하는 역할을 했다.[259] 영국 정치 이론가 로저 그리핀은 안토네스쿠를 "보수적인 자치독재자"로 칭하며, 철위대를 그에게 종속된 파시스트 운동으로 간주한다.[260] 다른 학자들 역시 1941년 이후 안토네스쿠의 통치를 파시스트 독재가 아닌 군사 독재로 규정하며,[261] "보수적"이라는 용어를 선호하기도 한다.[95][262] 안토네스쿠 자신은 스스로를 "운명에 의해 독재자가 된 자"라고 묘사했으며, 자신의 정책을 "군국주의적"[26] 또는 "국가-전체주의적"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263]

반면, 안토네스쿠 정권에서 파시즘적 요소를 강조하거나, 파시즘과 보수주의가 결합된 형태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루트리지 출판사의 ''파시즘과 극우에 대한 동반자''(2002)는 안토네스쿠를 정의하기 위해 "준파시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그가 스스로 파시즘을 구현하기보다는 철위대라는 파시즘 운동을 정권에 통합했다고 설명한다.[64] 그리핀 역시 안토네스쿠와 카롤 2세 모두에게 "준파시즘"이라는 용어를 적용한다.[264] 미국 역사가 로버트 팩스턴은 살라자르와 마찬가지로 안토네스쿠가 "대중 동원의 기술 일부를 모방한 후" 경쟁 관계에 있던 파시스트 운동(철위대)을 분쇄했다고 지적한다.[265] 정치학자 존 글레드힐과 찰스 킹은 철위대를 루마니아의 "토착 파시스트 운동"으로 보면서, 안토네스쿠가 "철위대의 이데올로기 대부분을 채택"했으며 그가 이끈 정권은 "공공연하게 파시스트적"이었다고 주장한다.[266] 다른 연구자들 역시 안토네스쿠 독재의 파시스트적 특징을 언급한다.[15][267]
안토네스쿠 통치의 복합적인 성격에 대한 논의도 있다. 영국 역사가 데니스 델레탕트는 안토네스쿠가 일부 파시스트적 외양을 채택했다는 점과 그의 정권에 대한 평가가 양분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대중 정당이나 이데올로기의 부재"는 나치즘이나 이탈리아 파시즘과는 다르다고 본다.[26][268] 영국 사회학자 마이클 만은 안토네스쿠와 프랑코 같은 권위주의 정권이 '전통적'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파시즘에서 파생된 조합주의를 통해 새로운 우익 이데올로기를 형성했다고 분석한다.[269] 루마니아 출신 사상사 줄리아나 게란 필론은 루마니아의 "군사 파시스트 정권"이 철위대의 "신비주의적 민족주의"를 계승했지만, 안토네스쿠의 "국가 이데올로기는 훨씬 더 전통적으로 군국주의적이고 보수적이었다"고 평가하며 독특한 시각을 제시한다.[270]
안토네스쿠의 정책은 상당 부분 민족주의에 기반했다. 그는 대루마니아의 부활, 즉 루마니아 민족이 거주하는 영토의 통합을 강력히 추구했으며, 헝가리가 북트란실바니아를 병합한 것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추축국 체제 하에서 루마니아와 헝가리는 기술적으로 동맹 관계였지만, 양국 관계는 항상 긴장 상태였고 외교적 마찰이 잦았다.[217] 안토네스쿠는 제2차 비엔나 중재의 영향을 직접 받은 루마니아 민족 공동체 대표들, 특히 트란실바니아 그리스 정교회 성직자들과 접촉을 유지했다.[218] 그의 민족주의는 발칸 전역 이후에도 나타나, 루마니아는 군사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루마니아인 공동체가 상당수 거주하는 동부 보이보디나(서부 바나트)와 티목 계곡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 보이보디나를 헝가리에 할양하려던 독일의 초기 계획은 안토네스쿠와 호르티 미클로시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켜 양국 간 전쟁 가능성까지 제기되었고, 결국 독일은 해당 지역 점령을 연장했다.[219][220] 루마니아는 아로마니아인 공동체를 위한 자치권을 가진 독립 마케도니아 구상을 발표했고,[221] 티목 계곡에 관한 공식 각서에서는 티목에서 "살로니카"까지 이어지는 "루마니아" 지역을 언급하기도 했다.[222] 안토네스쿠는 축의 세력이 점령한 그리스의 아로마니아인 파시스트들과도 접촉하며, 친루마니아 정책으로 다른 아로마니아인 세력과 갈등을 빚던 로마 군단의 알키비아데스 디아만디와 니콜라 마투시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223]
안토네스쿠는 히틀러가 북트란실바니아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바꿀 것이라 믿었고, 베사라비아 회복 이후 동부 전선 참전을 정당화하기 위해 히틀러의 동의를 얻었다고 주장했다.[148][224] 그러나 히틀러와의 대화 기록은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지 않는다.[112][148] 히틀러가 안토네스쿠에게 베사라비아의 최종 지위는 독일의 결정에 달려있다는 편지를 보냈다는 설도 있다.[148] 안토네스쿠 자신은 히틀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반공주의적 동기를 강조하며 "문명, 유럽, 그리고 내 조국의 위대한 적인 러시아 볼셰비즘에 맞서 동쪽에서 끝까지 작전을 수행할 것"이며 "이 군사 협력을 새로운 영토로 확장하지 않도록 누구에게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225] 그의 이념은 일반적인 기독교, 특히 루마니아 정교회적 특성과 민족주의적 감정을 혼합한 형태였다. 영국의 역사가 아놀드 D. 하비는 이러한 이념이 나치 이념의 반종교적 요소와는 잘 맞지 않아 보이지만, "히틀러는 안토네스쿠 정권의 호전적인 기독교적 방향에 전혀 동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지적했다.[115]
한편, 히틀러가 트란스니스트리아 영토 제공을 트란실바니아 문제에 대한 보상으로 간주하여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다.[226] 베를린 주재 루마니아 대표 라울 보시에 따르면, 일부 독일 및 헝가리 관리들은 트란스니스트리아뿐 아니라 포돌리아, 갈리치아, 포쿠티야까지 루마니아 영토로 영구 확장하는 대신, 트란실바니아 전체를 헝가리에 넘기고 루마니아 민족 다수를 새 영토로 이주시키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227] 미국 정치학자 찰스 킹은 "루마니아 정부가 일반적으로 [트란스니스트리아를] 대루마니아와 소련 전선 사이의 일시적인 완충 지대로 간주했기 때문에 점령 영토를 병합하려는 시도는 전혀 없었다"고 평가한다.[228] 1946년 재판에서 안토네스쿠는 트란스니스트리아 점령이 독일의 ''동방으로의 진출''과 동쪽의 ''폴크스도이체'' 공동체 사이에 루마니아가 끼이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으며, 해당 지역을 착취했다는 혐의를 부인했다.[229]
그러나 루마니아 역사가 루시안 보이아는 안토네스쿠가 동쪽으로의 팽창주의적 목표를 가졌으며, 바르바로사 작전을 슬라브 민족 억제 수단으로 암묵적으로 이해했을 것이라고 본다.[230] 다른 연구자들도 비슷한 결론을 내린다.[231]
4. 통치 방식
1940년 9월, 카롤 2세 국왕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미하이 1세를 명목상의 국왕으로 옹립한 이온 안토네스쿠는 스스로를 국가 지도자를 의미하는 '콘두커터어'(Conducător|콘두커터르ro)로 선포하며 독재 권력을 장악했다.[6][54][55] 초기에는 극우 파시스트 운동인 철위대와 연립 정부(국가레지오네리주)를 구성했으나,[6][60] 1941년 1월 레지오네어 반란을 군대를 동원해 진압하고 철위대를 숙청하면서 군사 독재 체제를 공고히 했다.[6][100][105]
안토네스쿠의 통치는 강력한 권위주의와 군국주의적 성격을 특징으로 하며, 나치 독일과의 긴밀한 동맹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루마니아를 추축국의 일원으로 참전시켰고, 특히 소련 침공(바르바로사 작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72][122] 또한, 그의 정권 하에서 강력한 반유대주의 정책이 시행되어 수많은 유대인이 학살되거나 트란스니스트리아 등으로 강제 추방되었다.[77][78][93]
안토네스쿠 정권의 성격에 대해서는 파시즘 정권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권위주의적 군사 독재로 보아야 할지에 대해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258][259][261][265][266] (자세한 내용은 #권력 기반 및 행정 참조) 그의 통치는 엄격한 사회 통제와 언론 탄압, 그리고 지도자에 대한 인격 숭배를 동반했다. (자세한 내용은 #선전 및 통제 참조)
4. 1. 권력 기반 및 행정
안토네스쿠는 자신의 통치가 루마니아를 "재생"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국가 이익을 통치의 정당성으로 내세웠다.[271][272][273] 그는 정치적 다원주의를 "겁쟁이 짓"(poltroneriero)이라 비판하며,[6] 애국적이고 영웅적이며 군사적인 유형의 교육을 강조했다.[26] 이러한 배경 속에서 그는 일종의 "구세주"로 인식되기도 했다.[271][272] 이러한 기조에 따라 1941년 2월 모든 정치 세력을 공식적으로 불법화하고, 대부분의 공적인 정치 표현에 대해 강제 노역형을 부과하는 법을 제정했다.[274] 일부 역사가들은 그가 나치 독일과의 동맹을 명분으로 권력을 독점함으로써 루마니아를 히틀러의 "괴뢰 국가"[64] 또는 독일의 "위성 정부"로 만들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276] 그러나 루마니아가 동맹 기간 동안 주권을 유지했으며, 안토네스쿠는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면서도 히틀러를 따랐다는 반론도 존재한다.[277]
안토네스쿠는 미하이 국왕에게는 미미한 역할을 부여했지만, 카롤 2세와 소원했던 헬레네 왕비의 귀국을 직접 주선하는 등 왕정의 위신을 세우려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278] 그의 통치는 국가 부흥 전선 체제에서 물려받은 관료제와 군사 구조에 크게 의존했다.[272][279] 그는 계층적 임명 방식을 선호했으며,[282] 주요 지지 기반은 과거 국가 기독교당 출신 인사들로 구성되었고, 이 때문에 옥타비안 고가의 후계자로 여겨지기도 했다.[281] 명목상의 의회("루마니아 국민의 일반적 국민투표 의회")를 유지하기는 했으나 실제 소집은 거의 없었고,[282] 1941년에는 지방 정부와 군의 행정 참여를 배제하고 자신이 직접 임명한 현(縣) 지사들을 통해 통치하는 중앙집권적 파시즘 구조를 도입했다.[282] 점령지인 트란스니스트리아(총독 게오르게 알렉시아누), 부코비나(총독 코르넬리우 칼로테스쿠), 베사라비아(총독 게오르게 보이쿨레스쿠)에도 유사한 총독제를 실시하여 민간 행정을 장악했다.[283][284] 안토네스쿠는 엄격한 명령 계통을 중시했으며, 군에 대한 그의 직접 지시는 민간 행정 체계를 압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스템은 고질적인 정치 부패와 행정적 혼란을 야기했다.[285]
한편, 히틀러의 ''폴크스도이체''(Volksdeutschede) 정책에 따라, 안토네스쿠는 루마니아의 독일인, 특히 트란실바니아 색슨인과 바나트 슈바벤인 집단에 대한 통제권을 점진적으로 나치 독일에 넘겨주었다. 나치 활동가 안드레아스 슈미트가 ''폴크스도이체 미텔슈텔레''(VoMi|포미de)[286]와 협력하면서 이러한 경향이 시작되었고, 루마니아 내 독일계 소수민족은 사실상 자치권을 누리게 되었다.[287] 이는 트란스니스트리아에 거주하던 약 13만 명의 흑해 독일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288] 많은 젊은 독일계 남성들이 일찍부터 ''친위대''에 자원했으며, 1943년 안토네스쿠와 히틀러 간의 협정에 따라 징집 연령의 독일계 남성들은 자동으로 독일 국방군(Wehrmacht)에 편입되었다.[287]
정권은 시민 생활의 세세한 부분까지 통제하려 시도했다. 경범죄에도 가혹한 처벌을 부과했으며,[289] 루마니아의 사형 제도를 전례 없이 확대 적용했다.[290] 심지어 나이트클럽 프로그램, 치마 길이, 여성의 자전거 사용, 남성의 외투 착용 등 개인의 생활 방식까지 규제하려 했다.[6][26] 안토네스쿠의 아내 마리아는 국가가 승인한 자선 단체 활동을 통해 철위대의 영향력에 대응하려 했다.[291] 젠더 연구 학자인 마리아 부쿠르(Maria Bucur)는 이 시기 여성이 전쟁 노력에 일부 참여했지만 여전히 주변적인 역할에 머물렀으며,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는 성차별주의적이었다고 평가한다.[292]
행정 기구의 일부로서 공식 언론과 선전 부서가 운영되었다. 이는 카롤 2세 시대의 인격 숭배를 안토네스쿠에게로 옮겨오는 역할을 했다. ''우니베르술''(Universul), ''팀풀''(Timpul) 등의 주요 언론과 카밀 페트레스쿠, 니키포르 크라이니크, 스텔리안 포페스쿠, 팜필 셰이카루와 같은 언론인들이 선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272][296][297] 선전 내용은 주로 반유대주의와 반공주의에 초점을 맞추었으며,[299] 특히 점령지에서는 군대가 유대인을 경멸적으로 지칭하는 '지다니'(jidaniro)라는 표현을 공공연히 사용했다.[300] 소련과의 전쟁(바르바로사 작전)은 종교 전쟁 또는 십자군 전쟁으로 포장되었다.[301][302] 또한, 철위대의 역사를 재해석하여 호리아 시마의 역할을 축소하고 안토네스쿠가 코드레아누의 진정한 계승자인 것처럼 묘사하는 "코드레니스트" 선전도 이루어졌다.[304]
4. 2. 선전 및 통제
안토네스쿠는 자신의 통치가 국가 이익에 의해 정당화된다고 보았으며,[272][273] 정치적 다원주의를 "겁쟁이 짓"(poltroneriero)이라고 비판했다.[6] 그는 루마니아를 "재생"시키고자 했으며, 이전의 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나 카롤 2세처럼 "전체주의적 모델"이자 "구세주"로 여겨지기도 했다.[271][272] 그는 "애국적이고 영웅적이며 군사적인 유형의 교육"을 강조했다.[26]
이에 따라 1941년 2월, 모든 정치 세력을 공식적으로 불법화하고 대부분의 공공 정치 표현에 대한 처벌로 강제 노역을 도입했다.[274] 루마니아 의회는 "루마니아 국민의 일반적 국민투표 의회"(Adunarea Obștească Plebiscitară a Națiunii Românero)라는 이름의 상징적인 기구로 대체되었고, 단 두 차례만 소집되었다.[282] 그는 국가 부흥 전선에서 물려받은 관료제를 활용했으며,[272][279] 1941년에는 지방 정부와 루마니아 군의 참여 정부를 해체하고 자신이 임명한 현감이 이끄는 파시즘적 구조로 대체했다.[282] 점령지인 트란스니스트리아(총독 게오르게 알렉시아누), 부코비나(총독 코르넬리우 칼로테스쿠), 베사라비아(총독 게오르게 보이쿨레스쿠)에도 유사한 민간 행정 기구가 설치되었다.[283][284] 안토네스쿠는 엄격한 명령 계통에 의존했으며, 군대에 대한 그의 직접 명령은 민간 행정 체계를 넘어서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시스템은 고질적인 정치 부패와 행정적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285]
일부 역사가들은 안토네스쿠가 독일과의 동맹을 명분으로 권력을 독점하여 루마니아가 사실상 히틀러의 괴뢰 국가[64] 또는 독일의 "위성 정부"가 되었다고 평가한다.[276] 그러나 역사가 데니스 델레탕트는 루마니아가 동맹 기간 동안 주권을 유지했으며, 안토네스쿠는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면서도 히틀러를 따랐다고 주장하며, 루마니아를 "독일의 주요 동맹국"으로 평가한다.[277][149] 한편, 안토네스쿠 정권은 히틀러의 폴크스도이체 정책에 따라 루마니아의 독일인(트란실바니아 색슨인, 바나트 슈바벤인)에 대한 통제권을 점차 상실하는 것을 용인했다. 트란실바니아 색슨 나치 활동가 안드레아스 슈미트는 ''폴크스도이체 미텔슈텔레''[286]와 협력하여 루마니아 내 독일인 공동체의 사실상 자치를 이끌어냈으며,[287] 이는 트란스니스트리아의 흑해 독일인들에게도 적용되었다.[288] 많은 젊은 루마니아계 독일인 남성들은 1940년대 초부터 친위대(''Waffen-SS'')에 자원했으며, 1943년 안토네스쿠와 히틀러 간의 협정에 따라 징집 가능한 연령의 독일계 소수 민족 남성들은 자동으로 독일 국방군(Wehrmacht)에 배속되었다.[287]
안토네스쿠 정권은 공공 생활의 세세한 부분까지 규제하려 했다. 경범죄에 대해 가혹한 처벌을 부과했으며,[289] 루마니아의 사형 집행은 전례 없이 확대되었다.[290] 나이트클럽 운영 시간, 여성의 치마 길이, 자전거 이용 등에 대한 기준을 직접 설정했고,[6] 모든 남성에게 공공장소에서 코트를 입도록 강요하기도 했다.[26] 그의 아내 마리아 안토네스쿠는 국가가 승인한 자선 단체 활동을 후원했는데, 이는 철위대의 사업과 경쟁하려는 의도도 있었다.[291] 젠더 연구 학자 마리아 부쿠르에 따르면, 이 시기 여성들은 이전보다 전쟁 노력에 더 많이 참여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주변적인 역할에 머물렀으며,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성차별주의적이었다.[292]
정권은 공식적인 언론 및 선전 부서를 운영하며 이전 카롤 2세 시대의 인격 숭배를 안토네스쿠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데 주력했다.[272] ''우니베르술''(Universulro), ''팀풀''(Timpulro)과 같은 신문과 카밀 페트레스쿠의 잡지 ''로마니아''(Româniaro)가 이러한 선전 활동에 적극적으로 동원되었다.[272] 이 외에도 ''포룬카 브레미이''(Porunca Vremiiro),[293] 니키포르 크라이니크의 ''스팜어 피아트러''(Sfarmă-Piatrăro),[294] 그리고 정부가 직접 설립한 약 10개의 신문과 정기 간행물들이 선전에 활용되었다.[295] 니키포르 크라이니크, 카밀 페트레스쿠, 스텔리안 포페스쿠[272][296], ''쿠렌툴''(Curentulro) 편집장 팜필 셰이카루[297] 등이 대표적인 선전 협력 언론인이었다. 반면, 안토네스쿠는 카롤 2세의 고문이었던 파시즘 경제학자 미하일 마노일레스쿠의 지지는 의도적으로 외면했다.[298]
안토네스쿠 시대의 선전은 강력한 반유대주의적 논조를 특징으로 했다.[299] 특히 점령지에서 이전 소련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루마니아 군대의 선전 활동에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졌으며, 정권은 "유대인"을 경멸적으로 지칭하는 ''지다니''(jidaniro)라는 표현을 선호했다.[300] 반공산주의 선전 역시 종교적인 색채를 띠며, 바르바로사 작전을 종교 전쟁이나 십자군 전쟁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았다.[301][302] 다른 적대국에 대한 선전은 다소 다른 양상을 보였는데, 안토네스쿠 자신은 ''포룬카 브레미이''와 같은 친나치 성향 신문의 노골적인 반영국 선전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을 표하기도 했다.[303] 또한, 1941년 이후에는 철위대의 역사를 재해석하여 호리아 시마의 역할을 축소하고 그를 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와 근본적으로 다른 인물로 묘사하려는 "코드레니스트" 선전이 이루어졌다.[304]
5. 홀로코스트 가담
안토네스쿠의 통치 이념에서 인종차별주의, 특히 반유대주의는 핵심적인 요소였다. 이는 그의 민족국가적 이상과 맞물려 "통합 민족주의"와 "루마니아주의" 강조로 나타났으며,[236] 자유민주주의 배후에 유대인이 있다는 믿음과 유대 프리메이슨 음모론으로 이어졌다.[237] 그는 철위대의 폭력적인 방식보다는 "질서 정연한" 반유대주의 정책을 선호했지만,[6] 필요하다면 "폭도"를 동원한 학살 후 질서를 회복하겠다는 생각도 내비쳤다.[238] 나치 독일과의 동맹 이후, 그는 종교적 반유대주의를 넘어 인종적 반유대주의를 채택하고 독일의 "유대인 문제" 해결 방식에 동조한 것으로 평가받는다.[93][240]
안토네스쿠는 유대인이 공산주의와 소련의 지지자라는 "유대-볼셰비즘" 음모론을 신봉했으며,[93][241] 1940년 베사라비아 철수 시 유대인이 루마니아군을 공격했다는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93][242] 그는 "사탄은 유대인"이라며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고,[244] 동부 점령지에서 유대인의 민족 청소를 계획하며[93][245] 유대인을 질병이나 독에 비유했다.[247]
이러한 반유대주의 사상은 루마니아의 홀로코스트로 이어졌다. 안토네스쿠 정권은 이아시 포그롬을 선동하거나 묵인했으며,[93][241][242] 오데사 학살과 같이 그의 직접적인 명령에 따른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93][143] 또한, 점령지 베사라비아, 북부 부코비나, 트란스니스트리아에서 독일 아인자츠그루펜과 협력하거나 독자적으로 유대인 학살 및 강제 이주를 실행했다.[93][321][333][334] 안토네스쿠는 "우리 역사상 유대인들을 제거하기에 더 적절한 시기는 없었고, 필요하다면 기관총을 사용해야 한다"[326]거나, 트란스니스트리아 유대인 처리 문제에 대해 "그들을 지하 묘지에 넣으세요! 그들을 흑해에 던져 버리세요! [...] 모두 죽을 수도 있습니다"[343] 와 같은 발언을 통해 학살에 대한 그의 직접적인 책임을 드러냈다.
박해는 로마인에게도 가해졌다. 반집시주의적 편견을 바탕으로[249] 1942년 여름, 구왕국 로마인들을 트란스니스트리아로 강제 추방하도록 명령했는데, 이는 로마인 홀로코스트인 ''포라지모스''에 해당한다.[93][346] 추방된 로마인들은 비인간적인 환경 속에서 기아와 질병에 시달렸다.[354]
결론적으로 안토네스쿠 정권은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나치 독일에 버금가는 규모의 유대인 학살 책임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371] 공식 추산에 따르면 루마니아 당국에 의해 최소 28만 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으며,[374][375] 약 1만 1천 명 이상의 로마인이 강제 이주 과정에서 사망했다.[382]
5. 1. 이아시 포그롬

이온 안토네스쿠는 국민군단 국가(National Legionary State)를 출범시킨 지 3주 후, 이탈리아 신문 ''La Stampa''와의 인터뷰에서 "유대인 문제" 해결이 자신의 시급한 과제이며, 몰도바 도시에 있는 많은 유대인들의 존재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305] 안토네스쿠의 유대인 인구에 대한 범죄는 새로운 인종차별 법으로 시작되었다. 도시 유대인의 재산이 몰수되었고, 유대인들은 광범위한 직업을 수행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접근할 수 없는 군 복무 대신 국가를 위한 사회 봉사( muncă de interes obștesc|문커 데 인테레스 옵슈테스크ro )를 제공하도록 강요받았다.[306] 루마니아-유대인 혼혈 결혼이 금지되었고, 특히 플로이에슈티와 같은 전략 지역의 많은 유대인들이 수용소에 수감되었다.[307] 모든 계층의 유대인 전문가 추방 또한 국민군단 국가 시대에 이루어졌고, 레지오네르 반란 이후 강화되었다.[308] 레지오네르 반란 이후 잠시 중단된 후, "루마니아화" 위원회는 국가 중앙의 감독하에 업무를 재개했고, 그 범위는 확대되었다.[309]
루마니아의 홀로코스트의 서곡으로, 그리고 안토네스쿠의 "유대 볼셰비즘"에 대한 견해와 관련하여 자주 논의되는 이아시 포그롬은 바르바로사 작전 시작 며칠 후에 발생했으며, 부쿠레슈티 당국에 의해 부분적으로 선동되고, 부분적으로 용인되었다.[93][241][242] 학살이 있기 전 한동안 당국은 소규모 지역에서 강제 추방으로 인해 수가 증가한 이아시의 유대인들이 블랙아웃을 통해 소련 폭격기가 표적을 찾는 것을 적극적으로 돕고, 당국에 반대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선전을 퍼뜨렸으며, 안토네스쿠 자신은 그러한 이유로 전체 유대인 공동체를 도시에서 추방하라고 명령했다.[93][311] 이러한 주장은 지역 반유대주의자들에게 호소했고, 그들의 살인적인 난동은 관리들의 공모로 이루어져 유대인 남녀노소 수천 명의 사망으로 이어졌다.[93][312]
포그롬 이후, 수천 명의 생존자들은 소위 "죽음의 열차"에 실렸다. 극심한 여름 더위 속에서 과밀하고 밀폐된 루마니아 철도 가축 수송차들은 시골을 돌아다녔고, 정기적으로 시체를 내리기 위해 정차했다.[93][313] 최소 4,000명이 초기 학살과 그 후의 수송 중에 사망했다.[314] 이아시 학살 및 관련 살인 사건에 대한 다양한 추정치는 살해된 유대인 수를 8,000명,[315] 10,000명,[316] 12,000명 또는 14,000명으로 나타낸다.[93][317] 독일 XXX 군단 부대가 살인을 돕기도 했는데, 이는 나중에 당국이 자신들과 안토네스쿠로부터 책임을 전가할 수 있도록 했지만, 안토네스쿠는 자신이 발표한 특별 명령으로 인해 연루되었다.[93][318] 특별 정보국과 그 국장 Eugen Cristescu의 공모 가능성도 제기되었다.[319] 이후 은폐 시도에는 중앙 당국이 외국 외교관에게 제공한 누락 설명과 공식 기록의 재작성이 포함되었다.[320]
5. 2. 트란스니스트리아 강제 이주

베사라비아와 북부 부코비나에 진지를 구축하자마자 루마니아군은 베르마흐트와 친위대가 조직한 ''아인자츠그루펜''과 협력하여 베사라비아 및 우크라이나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했다.[93][321] 이 과정에서 1만 명[322]에서 2만 명[323]의 유대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학자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은 이러한 학살을 ''라이히스코미사리아트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등지에서 현지 주민들이 저지른 유사한 잔혹 행위와 비교한다(라트비아의 홀로코스트, 리투아니아의 홀로코스트, 우크라이나의 홀로코스트 참조).[324] 이후 전투 부대가 드니스터를 넘어 진격하면서, 루마니아 지역 행정부는 다수의 유대인들을 전투 지역으로 강제 추방하여 독일군이 몰살시키도록 의도했다.[93][325] 안토네스쿠 자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베사라비아와 [북부] 부코비나에서 유대인들을 국경 너머로 추방하는 것에 찬성합니다. [...]. 그들에게 여기서 할 일은 없고, 우리가 역사에서 야만인으로 보이는 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 우리 역사상 유대인들을 제거하기에 더 적절한 시기는 없었고, 필요하다면 기관총을 사용해야 합니다."[326] 그는 또한 자신의 목표가 "루마니아 인종의 정화 정책이며, 나는 이 역사적인 국가 목표 달성에 있어 어떤 장애물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오늘 제시되는 상황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 우리는 역사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마지막 기회를 놓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그렇게 한다면 후세는 저를 비난할 것입니다."[327] 그는 키시너우에서 발생한 유대인 학살에 대해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는데, 가해자들을 자신의 정권 명성을 "더럽힌" "개자식들"이라고 비난했다.[328] 안토네스쿠는 유대인에 대한 "전쟁"을 소련과의 전쟁만큼 중요하게 여겼으며, 베사라비아와 트란스니스트리아의 장교들에게 유대인 관련 조치에 대한 정기적인 보고를 요구했다.[329] 1941년 8월 말 티히나에서 안토네스쿠는 자신과 베사라비아 및 부코비나 총독, 그리고 트란스니스트리아 총독 지명자가 참석한 비밀 회의를 소집하여 해당 지역 유대인 문제 처리 계획을 논의했다.[329]
굶주림과 탈진으로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으며,[93][330] 지역 독일군은 선택적인 총격을 가했다.[331] 생존자들은 강 건너편으로 다시 보내졌고, 독일 지휘관들은 루마니아 측의 처리 방식에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93][332] 이후 루마니아 당국은 유대인 거주구 또는 수용소를 설치했다.[93][333] 트란스니스트리아 합병 후, 베사라비아에서 유대인들의 체계적인 강제 추방이 이루어졌고, 구왕국(특히 몰도바 본토)에서도 추가로 유대인들이 이송되었다.[93][334] 안토네스쿠가 이오안 토포르 장군에게 내린 임무에 따라,[335] 이 결정에는 특정 할당량이 포함되었고, 대부분 도보로 이루어진 이송 과정에서 무작위 살인이 빈번하게 발생했다.[93][336] 안토네스쿠의 팽창주의 야망과 관련하여, 상황이 허락되었다면 생존자들의 최종 목적지는 남부 부크보다 더 동쪽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337] 1941년 10월 11일, 유대인 공동체 연합의 수장인 빌헬름 필더먼은 안토네스쿠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강제 추방 중단을 요청하며 "이것은 죽음입니다. 그들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음입니다."[338]라고 호소했다. 안토네스쿠는 필더만에게 긴 답장을 보내, 베사라비아의 전체 유대인 공동체가 소련 점령 기간 동안 소련과 협력했다는 주장을 근거로 자신의 정책이 정당한 보복 행위라고 강변했다.[338] 1941년 11월 11일, 안토네스쿠는 필더만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해방된 영토"에는 어떤 유대인도 살 수 없다고 못 박았으며, ''레가트''(구왕국)의 유대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 우리는 우리의 너무 관대한 과거를 유대인들이 이용하고 외국인, 특히 유대인들이 우리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용이하게 했기 때문에 루마니아의 권리를 옹호하기로 결정했습니다...우리는 이 상황에 종지부를 찍을 결심입니다. 우리는 수십만 명의 유대인 때문에 우리 민족의 존재를 위태롭게 할 여유가 없으며, 제대로 이해되지 않은 인도주의적 민주주의 원칙을 구할 수도 없습니다."[338]
강제 추방된 사람들의 남은 재산은 국유화되거나 몰수되었고, 일부는 약탈 대상으로 남겨졌다.[339] 자체 유대인 인구가 억류되고 몰살당하면서,[93][340] 트란스니스트리아는 짧은 시간 안에 악명을 떨쳤으며, 특히 5개의 주요 강제 수용소인 페초라, 아흐메체트카, 보그다노프카, 도마노프카 및 오보도프카로 악명이 높았다.[93][341] 루마니아 헌병과 중앙 당국의 동의하에 행동한 현지 우크라이나 보조 경찰이 운영하는 트란스니스트리아 지역은 대량 학살 현장이 되었으며, 특히 관리자들이 수용소에서 주변 지역으로 티푸스가 확산될 것을 우려한 후에 더욱 심화되었다.[93][342] 1941년 12월 16일 내각 회의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 유대인의 운명을 논의하면서 안토네스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유대인 문제가 베를린에서 논의되고 있습니다. 독일인들은 유럽의 유대인들을 러시아로 데려와 특정 지역에 정착시키려고 하지만, 이 계획이 실행되기까지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베를린의 결정을 기다려야 합니까? 우리에게 관심 있는 결정을 기다려야 합니까?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야 합니까? 그들을 지하 묘지에 넣으세요! 그들을 흑해에 던져 버리세요! 제가 볼 때 100명이 죽든 1,000명이 죽든 모두 죽을 수도 있습니다."[343]
1941년 12월 21일부터 24일, 그리고 28일부터 31일 사이에 루마니아 헌병과 우크라이나 보조 경찰은 보그다노프카 수용소에서 약 7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했다. 이 학살은 트란스니스트리아 유대인들 사이에 발생한 티푸스 전염병에 대한 안토네스쿠의 대응 방식이었다. 열악한 생활 환경으로 인해 유대인 사이에서 전염병이 발생했던 것이다.[344] 마지막 유대인 강제 추방은 1942년 6월에 주로 북부 부코비나의 체르니우치 지역에서 이루어졌다.[93][345]

또한 1942년 여름, 이온 안토네스쿠는 구왕국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로 루마니아 로마인의 강제 추방을 명령하여 ''포라지모스''(로마인 홀로코스트)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이들은 수용소를 거쳐 남부 부크 근처의 비인간적인 환경에 재정착되었다.[93][346] 그곳에는 이노첸티스트 교회 소속 양심적 병역 거부자 2,000명도 함께 보내졌는데, 이들은 천년왕국주의 종파였다.[347] 안토네스쿠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이 헌병 사령관들에게 특별 명령을 내리며 이 작전을 직접 감독했음을 인정했다.[348] 이론적으로 로마인에 대한 조치는 최근 범죄 기록이 있거나 유목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만 해당되었지만, 실제로는 정주 공동체 구성원 중 일부를 모호한 "바람직하지 않은" 인물로 규정하는 등 임의적인 예외가 즉시 적용되었다.[349] 중앙 당국은 현지에서 적용되는 기준의 차이를 인지하고 강제 추방 부족 또는 과잉 집행을 방지하거나 제재하기 위해 개입하기도 했다.[350] 안토네스쿠와 콘스탄틴 바실리우는 트란스니스트리아가 자체 인구를 부양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추방 결정을 강행했다.[351] 대부분의 재산이 몰수되었고,[352] 로마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약간의 휴대 수하물만 가지고 혹독한 겨울을 보내야 했다.[353] 기아와 질병은 범죄적 과실로 인해 만연했으며, 로마인의 생존은 정부의 간헐적인 지원, 지역 주민들의 자선, 절도, 지하 경제 활동 등에 크게 의존했다.[354] 루마니아로 돌아온 탈주자들은 현지 당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앙 당국에 의해 다시 송환되었다.[355]
일반적으로 안토네스쿠 정권 하의 루마니아는 반유대주의적 멸절 정책에서 나치 독일 다음으로 책임이 큰 국가로 평가받는다.[371] 역사학자 데니스 델레탕트와 아드리안 치오로이아누는 1946년 안토네스쿠 재판의 절차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쟁 범죄 책임은 서방 연합국 관할권에서도 유죄 판결과 사형 선고를 받기에 충분했을 것이라고 본다.[372] 루마니아가 조직한 학살의 잔혹성은 한나 아렌트가 1963년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특별히 언급하기도 했다.[373] 2003년 비젤 위원회가 발표한 루마니아 공식 추산에 따르면, 안토네스쿠 통치하 루마니아 당국에 의해 28만 명에서 38만 명의 유대인이 사망했다.[374][375] 트란스니스트리아 강제 이송으로 루마니아 본토에서 15만 명에서 17만 명의 유대인이 추방되었고, 그중 9만 명에서 12만 명은 돌아오지 못했다.[148][376] 루마니아 출신 이스라엘 역사학자 장 안셀은 다른 지역에서의 트란스니스트리아 강제 이송으로 약 14만 5천 명이 사망했으며, 현지 트란스니스트리아 유대인 사망자 수는 28만 명에 달할 수 있다고 추정한다.[377] 후자에 대한 보다 보수적인 추산은 13만 명에서 18만 명의 희생자를 언급한다.[378] 다른 전체 추산은 루마니아의 행동으로 인해 고의적으로 살해된 유대인이 20만 명[379]에서 30만 명[380]이 넘는다고 본다. 역사학자 앤서니 폴론스키와 조안나 B. 미흘리크는 "이러한 학살 중 어느 것도 독일인에 의해 자행된 것은 아니지만, [독일인은] 분명히 이러한 행동을 조장했고, 어떤 경우에는 이를 조정했을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381] 로마인 강제 이송은 약 2만 5천 명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그중 최소 1만 1천 명이 트란스니스트리아에서 사망했다.[382]
구왕국의 유대인 인구(30만~40만 명)는 홀로코스트에서 거의 온전히 생존했다.[383] 루시안 보이아는 이 사실을 안토네스쿠 통치의 "완전히 어둡지만은 않은" 측면으로 보지만, 그를 유대인 구원자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평가한다.[384] 데니스 델레탕트는 이를 안토네스쿠 시대의 "중대한 역설"로 보며, "[안토네스쿠의] 통치하에 다른 추축국 유럽 국가보다 더 많은 유대인이 생존했다"고 지적한다.[149] 미국의 역사학자 윌리엄 O. 올드슨은 안토네스쿠의 정책을 "폭력, 불일치, 무의미함"으로 특징짓지만,[385] 구 루마니아 왕국의 동화된 유대인 공동체에게는 이러한 특성이 "행운"으로 작용한 반면, 외국인으로 간주된 유대인들은 더 큰 위험에 노출되었다고 주장한다.[386] 안토네스쿠의 인종 청소 정책에 대해 폴론스키와 미흘리크는 "[그것은] 원치 않는 소수 민족을 추방하려는 욕망과 승인된 조건 하에서 소규모의 집단 학살 프로젝트 사이의 미묘한 경계에 대해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고 평가한다.[381] 미국의 군사 역사가 게르하르트 L. 와인버그는 안토네스쿠 정권이 "1940년 소련에 할양된 지역에서 1941년 해당 지역을 탈환했을 때, 그리고 [...] 트란스니스트리아에서 많은 수의 유대인을 학살했다"고 언급하면서도, "이온 안토네스쿠 원수 정부는 유대인들을 [루마니아에서] 약탈하고 박해하는 것을 선호했으며, 살해하기 위해 독일인들에게 넘기지는 않았다"고 논평했다.[359]
동부 전선에서의 상황 변화와 함께, 1943년 이후 정책 변화의 주요 동기 중 하나는 유대인 생존을 이용한 금전적 기회였다는 지적이 있다.[387] 부유한 유대인들은 공동체 활동과 강제 이송을 피하기 위해 금전적으로 착취당했으며,[388] 일부 전문가들의 노동력은 공공 부문과 군대에까지 동원되었다.[388] 처음부터 정권은 임업, 화학 등 특정 분야 전문가인 일부 유대인들을 강제 이송에서 제외했으며, 일부는 고향 지역의 반유대주의적 시위에도 불구하고 귀환이 허용되기도 했다.[389] 경제적 착취는 1941년 말~1942년 초 중앙 유대인 사무소(Central Jewish Office (Romania)) 설립과 함께 제도화되었다. 라두 레카(Radu Lecca) 위원이 감독하고 유대 지식인 난도르 깅골드(Nandor Gingold)와 헨릭 슈트라이트만(Henric Streitman)이 공식적으로 이끌었던 이 사무소는 자금을 모았고, 그 일부는 마리아 안토네스쿠(Maria Antonescu)의 자선 단체로 흘러 들어갔다.[390] 소수의 루마니아 유대인들이 1941년 초 독자적으로 팔레스타인으로 떠났지만, 시온주의 계획에 대한 영국의 반대(알리야 베트)로 인해 그들의 이동은 위험했다(MV ''스트루마''호 난파 사건이 대표적이다).[391] 개인적인 차원에서 안토네스쿠는 범죄를 조장하는 모습과 유대인 공동체 지도자 빌헬름 필더만의 간청에 굴복하는 모습을 번갈아 보였다.[392] 한 예로, 그는 노란 배지 착용을 강요하는 자신의 1942년 결정을 번복했지만,[393] 이는 구왕국을 제외한 모든 지역과 이론적으로 추축국 통제 하 유럽의 다른 지역에 있는 모든 루마니아 유대인들에게는 계속 적용되었다.[394] 이러한 모순적인 태도에는 유럽 전역의 대량 학살 책임자들을 기소하겠다는 연합국의 약속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있다.[395] 전쟁 후반기에 안토네스쿠는 자신의 정권이 저지른 모든 범죄의 책임을 전가하려 했으며,[396] 유대인들이 "자신들에게 파멸을 가져왔다"고 비난했다.[397]
정권은 강제 이송되지 않은 루마니아 유대인과 미국 자선 단체가 트란스니스트리아 수용소에 인도주의적 지원을 보내는 것을 허용했는데, 이는 1942년 말부터 시행된 조치였다.[93][398] 유대인 강제 이송은 같은 해 10월에 완전히 중단되었다. 역사가들은 이러한 정책 재평가의 주요 원인으로 동부 전선에서 독일의 전세 변화를 꼽으며, 안토네스쿠가 유대인 인구를 서방 연합국과의 협상 카드로 사용하려 했을 가능성을 언급한다.[93][399] 그러나 약 2,000명의 고아를 포함하여 트란스니스트리아에서 더 선택적인 유대인 귀환을 허용하는 데는 1년 이상이 걸렸다.[93][400] 1944년 트란스니스트리아 철수 후, 안토네스쿠 자신은 베사라비아에 새로운 수용소 건설을 옹호했다.[401] 내각과의 대화에서 그는 생존한 유대인들이 루마니아 군인보다 더 잘 지내고 있다며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402]
로마인에 적용된 정책 역시 모순적이었다. 안토네스쿠는 범죄자로 간주하는 로마인들의 강제 이송을 명령했지만, 버러간 평원의 로마니 노동자들의 삶 개선에는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403] 루마니아 역사학자 비오렐 아힘에 따르면, "집시 문제"의 존재를 주장했음에도 안토네스쿠 정권은 "그것을 우선순위로 여기지 않았다."[404] 1943년까지 안토네스쿠는 강제 이송된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점차 허용했다. 처음에 콘스탄틴 바실리우는 군인들의 가족이 선택적으로 강제 이송에 대해 항소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405] 루마니아 당국은 새로 온 인구가 현지 독일인(흑해 독일인)보다 많아질 것을 우려한 ''라이히스코미사리아트 우크라이나'' 나치 관리들의 반대에도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406] 1944년 1월, 중앙 당국은 현지 당국에 체포된 도망자들을 돌려보내지 말고,[407] 그들에게 음식과 의류를 제공하며,[408] 행동 규범을 준수하지 않는 로마인들에게는 체벌을 가하도록 지시했다.[408] 루마니아 관리들이 트란스니스트리아를 포기하자, 그 집단의 대부분 생존자들은 1944년 여름에 스스로 돌아왔다.[409]
5. 3. 오데사 학살
1941년 오데사에서 벌어진 학살은 루마니아군과 헌병대가 자행한 집단 처벌 행위로, 최소 1만 5천 명[356]에서 최대 5만 명[148][359]이 넘는 모든 연령대의 유대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이온 안토네스쿠가 직접 내린 명령에 따른 조치였다.[93][143]
학살의 직접적인 계기는 오데사에 위치한 루마니아군 사령부 건물에서 발생한 폭발 사건으로, 이 사건으로 요안 글로조예아누(Ioan Glogojeanu) 장군을 포함한 루마니아 장교와 병사 67명이 사망했다.[93][143] 안토네스쿠는 이 폭발을 테러 행위로 단정하고, 후퇴하던 소련군이 건물에 지뢰를 설치했을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았다.[93][360] 그는 이전부터 오데사 포위 공격 당시 루마니아 제4군이 입은 막대한 손실의 책임을 유대인, 특히 "유대인 정치장교"에게 돌리고 있었다.[361] 그러나 안토네스쿠 자신이 명령한 조사와 독일 측의 평가는 모두 루마니아 군인들의 준비 부족이 손실의 주된 원인임을 지적했다.[362]
폭발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안토네스쿠는 유대인 학살을 명령했다. 현지 지휘관들이 최초 처형을 주도했지만, 안토네스쿠는 사망한 장교 한 명당 유대인 200명, 사망한 병사 한 명당 100명이라는 구체적인 할당량을 제시하며 학살 규모를 키웠다.[363] 사실 폭발 사건 이전에도 오데사의 유대인들은 임시 게토에 몰려 폭력과 선택적 살해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364]
학살은 전쟁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단일 유대인 학살 중 하나로 여겨지며,[359] 대량 총살, 교수형, 화형, 그리고 건물을 통째로 폭파하는 방식 등으로 자행되었다.[93][365] 안토네스쿠는 이러한 루마니아군의 범죄 행위를 "학살이 아닌 보복"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93]
학살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인근 슬로비드카(Slobidka)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어 비인간적인 환경에 놓였다.[364] 트란스니스트리아 총독 게오르게 알렉시아누(Gheorghe Alexianu)가 안토네스쿠에게 해결책을 요청하자, 안토네스쿠는 세바스토폴 공방전에서 소련군의 저항 역시 유대인들의 소행이라며 오데사 지역에서 유대인을 완전히 제거하라고 명령했다.[366] 그는 알렉시아누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그들을 오데사 지하묘지에 넣든, 흑해에 던져 버리든, 어쨌든 오데사에서 꺼내. 나는 알고 싶지 않아. 백 명이 죽든, 천 명이 죽든, 모두가 죽든 상관없어, 하지만 단 한 명의 루마니아 관리나 장교도 죽게 하고 싶지 않아."[367] 안토네스쿠는 점령된 오데사에 유대인이 존재하는 것 자체를 "범죄"로 규정하며, "나는 나의 활동을 그러한 예측 부족으로 더럽히고 싶지 않다"고 덧붙였다.[368]
그 결과, 약 3만 5천 명에서 4만 명의 유대인들이 오데사 지역에서 추가로 추방되어 트란스니스트리아의 다른 지역으로 보내졌다.[369]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유대인들은 베레지프카(Berezivka) 등 흑해 독일인 거주 지역으로 의도적으로 몰려가 현지 독일계 민병대(Selbstschutz)에게 학살당했다.[370]
학살 이후 오데사는 트란스니스트리아의 행정 수도가 되었다.[93][144] 일각에서는 루마니아 행정부가 오데사의 도시 이름을 '안토네스쿠'로 바꾸려 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145]
5. 4. 최종 해결 방안과의 관계
이온 안토네스쿠와 그의 정권은 1941년부터 나치 독일의 직접 통제하에 있는 지역에 적용된 최종 해결 방안 문제에 대해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초기 단계에서, 구 왕국 유대인들에 대한 국가보안본부(RSHA)의 직접 통제를 부과하려는 독일의 시도는 미하이 안토네스쿠로부터 일부 반대를 불러일으켰지만, 양측은 소련 유대인들에 대한 공동 정책에는 합의했다.[410] 1940년대 초 안토네스쿠의 여러 발언에서 그는 승리 시 유대인의 존재를 제거하려는 추축국의 목표를 긍정적으로 언급했다.[411] 일부 루마니아인들의 유대인에 대한 무분별한 폭력 행위는 오히려 독일 관리들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그들은 보다 체계적인 절멸 방식을 요구하기도 했다.[412] 트란스니스트리아 점령 이전에 추방했던 유대인들을 다시 몰아내라는 독일의 결정에 직면했을 때, 안토네스쿠는 "동부 유대인"에 대한 히틀러의 결정에 따랐다고 주장하며 항의했다.[413] 1941년 8월, 최종 해결 방안의 보편적 적용을 준비하면서 히틀러는 "유대인 문제에 관해서는, 오늘날 어쨌든 안토네스쿠와 같은 인물이 우리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과감하게 진행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유대인들과 끝까지 가기 전까지는 쉬지 않고 게으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언급했다.[414]1942년 여름, 루마니아 주재 독일 대표들은 남은 유대인 인구를 폴란드 점령지의 절멸 수용소로 추방하는 것에 대한 안토네스쿠의 승인을 얻어냈다.[93][415] 이 계획에는 홀로코스트의 주요 설계자 중 한 명인 아돌프 아이히만과 그의 부관 구스타프 리히터가 독일 측에서 관여했고,[416] 루마니아 측에서는 안토네스쿠에게 직접 보고하는 유대인 문제 담당관 라두 레카가 대표로 나섰다.[417] 리히터는 레카에게 절멸 정책을 효율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중앙 유대인 사무소 설립을 지시했다.[418] 이 계획에 따르면, 루마니아 경제에 유용하다고 판단된 약 17,000명의 유대인만이 추방에서 면제될 예정이었다.[93][419] 1942년 가을, 루마니아 철도를 통한 수송 계획이 발표되었지만, 루마니아 정부는 결국 이 조치를 무기한 연기하기로 결정했다.[93][420] 안토네스쿠의 이러한 결정 변경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궁정 인사들의 반대, 추방이 진행될 경우 전후 전쟁 범죄 및 반인도적 범죄로 기소될 것이라는 스위스 대사를 통해 전달된 미국의 경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히틀러가 제2차 빈 중재를 파기하고 북부 트란실바니아를 루마니아에 반환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결정적이었다.[424] 안토네스쿠는 구 왕국 유대인 추방을 트란실바니아 반환과 맞바꾸려 했으나, 독일 대사 만프레트 폰 킬링거 남작으로부터 만족스러운 약속을 얻지 못하자 추방을 보류했다.[424] 클레스하임 성에서 열린 히틀러와의 회담에서 안토네스쿠와 히틀러 모두 폴란드로 추방된 유대인들이 맞이할 운명을 인지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421] 결국 독일 당국은 루마니아와 관련된 최종 해결 방안 적용 계획을 완전히 포기했다.[422]
미국의 역사학자 윌리엄 O. 올드슨에 따르면, 전쟁 말기 루마니아는 "공산주의자임이 입증될 수 없는 유대인들에 대한 모든 극단적인 조치"를 거부했다.[425] 나치 독일 관찰자들을 자극했던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 이주 계획은 연합국의 시선을 이전 정권의 죄책감에서 돌리려는 희망과 함께, 구출된 각 개인에 대한 금전적 대가를 기대하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426] 독일의 명령에 대한 복종을 꺼리고 극적인 변화를 불편해하는 루마니아 민족주의의 모순적인 측면도 이러한 정책 변화의 배경으로 설명되기도 한다.[427] 팔레스타인 이민 문제를 고려하면서 안토네스쿠는 유대인 지도자들의 간청에 응하기도 했고, 헝가리의 홀로코스트를 피해 도망치는 여러 북부 트란실바니아 유대인들에게 루마니아를 통과하는 안전한 통행을 허용했다.[428] 그는 남쪽으로 도망친 특정 북부 트란실바니아 루마니아인 공동체들에게도 같은 조치를 취했다.[429] 이러한 안토네스쿠의 소위 '관용'에 대해 나치 독일 이데올로그들은 반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4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토네스쿠는 불법 이민에 대한 관용과 극단적인 조치를 번갈아 취했다. 1944년 초, 그는 불법 이민자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이는 루마니아 국경 경찰에 의해 실제로 시행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431] (때때로 국경 경찰은 유대인 난민을 독일 당국에 넘기기도 했다).[432] 안토네스쿠 정권은 유럽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루마니아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절멸을 사실상 묵인했으며,[433] 독일의 조치가 루마니아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보일 경우에만 공식적으로 추방에 반대했다.[434]
6. 안토네스쿠에 대한 저항
이온 안토네스쿠의 독재 정권과 추축국과의 동맹, 그리고 전쟁 수행 방식은 루마니아 사회 내 다양한 계층으로부터 저항을 마주했다. 이러한 저항은 공개적인 비판에서부터 비밀스러운 구명 활동, 지하 조직 활동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전통적인 정치 지도자들, 특히 국민농민당의 이울리우 마니우와 국민자유당의 디누 브러티아누는 안토네스쿠의 전쟁 확장 정책과 반유대주의 조치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302][437][456] 왕실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헬레네 왕비는 유대인 추방을 막기 위해 노력했으며[93][448], 미하이 국왕은 점차 안토네스쿠와 거리를 두며 결국 정권 붕괴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173][148]
군 내부에서도 동부 전선으로의 과도한 병력 파견에 대한 반대 의견이 존재했으며[148][152][445], 일부 군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박해받는 유대인들을 보호하기도 했다.[446] 종교계 인사들, 지식인, 외교관, 그리고 평범한 시민들 역시 홀로코스트와 인종차별 정책에 반대하며 구명 활동에 나서거나 비판 성명을 발표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에 참여했다.[451][452][458][460][482][483]
한편, 루마니아 공산당과 같은 극좌 세력이나 레지오네르 반란 이후 탄압받던 철위대 잔당들은 지하에서 활동하며 정권에 저항했으나, 이들은 강력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464][466][264][471] 이처럼 안토네스쿠 정권에 대한 저항은 다양한 주체들에 의해 여러 방식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는 정권의 완전한 통제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6. 1. 정치적 반대


전시 상황과 대루마니아 실현이라는 목표는 루마니아 주류 정치 세력, 즉 자유민주주의와 반파시즘 지지자들이 안토네스쿠 통치에 대해 신중하고 때로는 모호한 태도를 보이게 만들었다. 루마니아 자유주의자들은 1930년대 내내 정부가 히틀러와 가까워지는 것을 비판했지만, 1940년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 침공 이후 소련에 맞서기 위해 독일의 지원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여겼다.[266] 안토네스쿠 정권의 대루마니아 어젠다 역시 광범위한 묵인의 이유로 작용했다.[435] 이러한 경향은 1941년 1월 말, 국민자유당(PNL)의 디누 브러티아누가 당 동료들에게 새로운 "장군 정부"가 "현재 위기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이라며 안토네스쿠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모든 지원"을 제공할 것을 촉구한 데서도 나타난다.[273]
그러나 안토네스쿠와 국민농민당(PNȚ) 사이의 갈등은 1941년 봄, 안토네스쿠가 발칸 전역을 지원하고 루마니아가 보이보디나 일부 영유권을 주장하자 이울리우 마니우가 항의 서한을 보내면서 시작되었다. 안토네스쿠는 이를 일축했다.[436] 마니우와 브러티아누는 안토네스쿠가 드니스터 너머로 전쟁을 계속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 비판 성명을 발표했다.[302][437] 두 사람이 서명한 한 편지에서는 베사라비아와 북부 부코비나 탈환은 "국가 전체의 영혼에 의해 정당화되었지만, 루마니아 국민은 우리 국경 너머의 투쟁을 계속하는 것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438] 마니우는 연합국의 승리 가능성을 언급하며 안토네스쿠가 대루마니아(북부 트란실바니아 포함) 목표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비난했고, 루마니아가 추축국 편에 계속 참여하는 것이 "충분히 문제가 된다"고 강조했다.[302]
안토네스쿠는 공개적으로 반대 지도자들을 불복종으로 질책하고 이를 방해 행위와 동일시했으며, 특별 정보국을 통해 그들의 활동을 감시했다.[439][440] 그러나 초기에는 브러티아누에게 보낸 공문에서 사임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으나, 브러티아누는 이를 주저하며 거절했다.[441] 독일은 이러한 상황에 불만을 표했고, 히틀러는 안토네스쿠에게 마니우를 제거하라고 조언했지만, 안토네스쿠는 PNȚ 지도자가 농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는 이유로 거부했다.[440] 안토네스쿠는 마니우와 연합군 사이의 접촉을 어느 정도 용인했지만, 1943년에는 루마니아에 파견된 비밀 영국 특사들을 체포하여 ''오토노머스 작전''을 중단시키기도 했다.[442]
안토네스쿠의 인종차별 법과 홀로코스트 참여는 루마니아 사회의 다양한 개인과 단체로부터 상당한 반대에 부딪혔다. 헬레네 왕비는 유대인 추방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한 대표적인 인물이다.[93][448] 체르너우치 시장 트라얀 포포비치[449]와 오데사 시장 게르만 펀테아[450]도 유대인 추방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헬레네 왕비, 미하이 1세 국왕, 트란실바니아 정교회 대주교 니콜라에 벌란, 사도대사 안드레아 카술로, 스위스 대사 르네 드 벡 등의 호소는 안토네스쿠가 루마니아에서 최종 해결책을 완전히 실행하는 것을 막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451] 카술로와 벌란은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을 포함하여 특정 유대인들의 구명을 위해 함께 노력했으며, 카술로는 추방에 대해 공개적으로 항의했다.[452] 미국 공사 프랭클린 맷 건터는 루마니아의 유대인 정책을 본국에 알리려 했고,[453] 터키 외교관들은 루마니아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으로 안전하게 이동시키려 시도했으나 미국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454]
디누 브러티아누는 반유대주의 조치를 비난하여 안토네스쿠로부터 "런던의 유대인" 동맹이라는 비난을 받았다.[455] 브러티아누는 마니우, 이온 미할라케와 함께 유대인의 격리, 박해, 추방을 비난하는 성명서에 서명했고, 이에 안토네스쿠는 그들을 단속하겠다고 위협했다.[456] 그러나 두 정당은 인종 문제에 대해 때때로 모호한 태도를 보이거나 자체적으로 반유대주의 메시지를 내기도 했다.[457] 브러티아누는 로마인들의 추방에도 반대하며 이를 "수 세기의 역사를 되돌리는 것"이라고 비판했고,[458] 이는 다른 민간 동료들의 지지를 받았다.[459] 간호사 비오리카 아가리치와 같은 일반 루마니아인들도 유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460] 유대인 공동체 내부에서는 최고 랍비 알렉산드루 샤프란, 활동가 미슈 벤베니스티, 빌헬름 필더만 등이 안토네스쿠의 결정에 반대하는 공개 시위에 참여했으며, 때때로 A. L. 지수도 합류했다.[461] 필더만은 1943년 모힐리우-포딜스키로 추방되었으나 결국 돌아올 수 있었다.[462]
안토네스쿠와 왕실의 관계는 그가 왕실의 일 처리 방식에 대해 조언하기 시작하면서 급격히 악화되었다.[443] 미하이 1세 국왕은 1943년 첫날 국영 라디오 신년사를 통해 추축국의 전쟁 노력과 결별하는 듯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안토네스쿠와의 갈등을 드러냈다.[173] 결국 미하이 국왕은 1944년 8월 23일 쿠데타를 주도하여 안토네스쿠를 체포하고 정권 붕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48][185][186]
군 내부에서도 안토네스쿠 정책에 대한 반대가 있었다. 장교단과 참모총장 사이에서는 드니스터 너머로 전쟁을 계속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이 갈렸지만, 다수는 북부 트란실바니아를 되찾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동의했을 가능성이 있다.[444] 루마니아 참모총장 요시프 야코비치는 루마니아군의 동부 전선 대규모 이동에 반대하여 강등되었고, 일리에 슈테플레아로 교체되었다 (1942년 1월).[148][152] 슈테플레아 역시 유사한 우려를 표명했고, 안토네스쿠는 결국 스탈린그라드 전투 직전에 본국 군대를 유지하는 데 동의했다.[445] 일부 군인들은 박해받는 유대인들을 보호하기도 했다.[446] 전반적으로 안토네스쿠는 군대 내 정치화된 세력에 대한 통제에 어려움을 겪었다.[447]
안토네스쿠 치하 루마니아의 조직적인 저항 운동은 상대적으로 소규모이고 주변적이었다. 유대인들의 탈출을 도왔던 시온주의 지하조직[463] 외에도, 극좌 세력과 철위대 잔당이 존재했다. 소규모 루마니아 공산당(PCR)은 몰로토프-리벤트롭 조약으로 인해 활동이 위축되었으나,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다시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실제 무장 저항을 조직하지는 못하고 다른 소규모 좌파 집단과의 연계에 그쳤다.[464] 안토네스쿠는 "유대 볼셰비즘"이라는 명목하에 공산주의자들을 감시하고 체포했으며,[465] 유대인 공산주의자들은 트란스니스트리아로, 다른 이들은 카란세베슈나 터르구지우 수용소로 보내졌다.[466] 약 2,000명의 루마니아 유대인이 정치범으로 강제 이주되었고,[467] 약 2,000명의 공산주의 혐의자들이 구금되었다.[468] 파르티잔 활동가들은 사형에 처해졌고,[469] 1944년 3월에는 리브니차의 공산주의자 수감자들이 학살당했다.[470]
정치 스펙트럼의 반대편에는 레지오네르 반란 이후 탄압받은 철위대 잔당들이 있었다. 안토네스쿠는 이들을 "[레지오네르] 녹색 셔츠를 입은 공산주의자들"이라고 여겼다.[282] 많은 레지오네르들이 살해되거나 투옥되었지만,[471] 수천 명 규모로 추정되는 철위대 지하조직이 지역적으로 형성되었다.[264] 안토네스쿠 정권 하의 양측 정치범 중 일부는 동부 전선 부대에 합류하여 사면받을 기회를 얻기도 했다.[472]
탄압받고 분열되었지만, 루마니아 공산당은 소련의 승리를 발판 삼아 주류 야당으로 편입될 기회를 엿보았다. 이 과정에서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즈를 중심으로 한 "수감자 파벌"이 등장하여 기존 지도부 및 "모스크바 파벌"과 경쟁했으며, 명목상 지도자였던 슈테판 포리슈 세력을 제거했다.[473][474] 공산당 지도부는 주류 정당들과 협상을 시작했지만 여전히 정통성 위기에 직면했다.[475] 한편, 소련과 "모스크바 파벌"은 루마니아 전쟁 포로들을 대상으로 선전 활동을 벌여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 사단을 창설하는 데 성공했다.[476]
6. 2. 시민 사회의 저항
안토네스쿠 정권의 독재와 전쟁 수행, 특히 홀로코스트 참여와 인종차별 정책은 루마니아 사회 곳곳에서 저항에 부딪혔다. 이러한 저항은 정치 지도자, 왕실, 군부, 종교계, 지식인, 외교관, 일반 시민 등 다양한 계층에서 나타났다.전통적인 정당 지도자였던 국민농민당의 이율리우 마니우와 국민자유당의 디누 브러티아누는 안토네스쿠의 정책에 꾸준히 반대 목소리를 냈다. 이들은 특히 루마니아군이 드네스트르강을 넘어 소련 영토 깊숙이 진격하는 것에 대해 반복적으로 비판했으며, 이는 루마니아의 국익을 벗어난 무리한 전쟁 확장이라고 주장했다.[302][437][438] 또한, 이들은 정권의 반유대주의 조치와 유대인 박해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455][456] 안토네스쿠는 이러한 반대 지도자들을 공개적으로 질책하고 특별 정보국을 통해 감시했지만,[439][440] 마니우가 농민들 사이에서 누리는 높은 인기를 고려하여 그를 제거하라는 히틀러의 조언을 따르지는 않았다.[440]
왕실에서도 저항의 움직임이 있었다. 헬레네 왕비는 유대인 추방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했으며, 그녀의 노력은 트란실바니아 정교회 대주교 니콜라에 벌란, 교황청 사절 안드레아 카술로, 스위스 대사 르네 드 벡 등과 함께 루마니아에서 최종 해결책의 완전한 실행을 막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93][448][451] 미하이 국왕 역시 1943년 신년 라디오 연설을 통해 추축국과의 결별을 시사하며 안토네스쿠 정권에 대한 불만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173] 이러한 왕실의 움직임은 안토네스쿠와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443]
군 내부에서도 반대의 목소리가 존재했다. 참모총장이었던 요시프 야코비치 장군과 그의 후임 일리에 슈테플레아 장군은 동부 전선으로의 과도한 병력 파견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148][152][445] 또한 일부 군인들은 개인적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박해받는 유대인들을 보호하기도 했다.[446]
종교계 역시 저항에 동참했다. 앞서 언급된 니콜라에 벌란 대주교와 안드레아 카술로 사절 외에도, 유대인 공동체의 최고 랍비 알렉산드루 샤프란과 활동가 미슈 벤베니스티, 빌헬름 필더만 등은 안토네스쿠의 반유대 정책에 공개적으로 항의했다.[461] 필더만은 이로 인해 모힐리우-포딜스키로 추방되기도 했으나 결국 돌아올 수 있었다.[462] 한편, 안토네스쿠 정권은 복음주의 및 복원주의 교파들(오순절 교회, 침례교회 등)을 금지하고 신자들을 투옥하는 등 탄압했다.[485][486] 또한 종교적 신념에 따른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노켄티스트,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여호와의 증인 등)도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487]
지식인과 문화계에서도 저항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문학 이론가 우겐 로비네스쿠와 그의 영향을 받은 시비우 문학 서클, 그리고 이온 카라이온, 게오 둠이트레스쿠 등 젊은 아방가르드 작가들은 정권의 문화 정책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478] 좌파 성향의 작가 투도르 아르게지, 빅토르 에프티미우, 자하리아 스탄쿠 등은 정치범으로 투옥되기도 했다.[479] 문학사가 조르제 컬리네스쿠는 유대인 작가들의 기여를 포함한 루마니아 문학사를 출간하여 정권에 도전했으며,[480] 작곡가 조르제 에네스쿠는 박해받는 음악가들을 위해 직접 안토네스쿠에게 탄원하기도 했다.[459] 철학자 앨리스 보이네스쿠는 자신의 일기에 반유대주의 조치와 학살에 대한 분노를 기록했다.[484] 또한, 여러 분야의 지식인들은 1942년과 1944년에 각각 트란스니스트리아 학살을 비판하고 정책 수정을 촉구하거나 소련과의 즉각적인 평화를 요구하는 집단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482][483]
시민 사회와 국제 사회에서도 저항과 구명 활동이 이어졌다. 체르너우치 시장 트라얀 포포비치와 오데사 시장 게르만 펀테아는 유대인 추방 명령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449][450] 스위스 대사 르네 드 벡, 미국 공사 프랭클린 맷 건터, 터키 외교관들은 루마니아 내 유대인들의 상황을 알리고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451][453][454] 간호사 비오리카 아가리치와 같은 평범한 시민들도 위험을 무릅쓰고 유대인들의 생명을 구하는 데 기여했다.[460] 디누 브러티아누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로마인들의 추방에도 반대하며 이들의 권리를 옹호했다.[458]
6. 3. 지하 저항 운동
안토네스쿠 치하 루마니아에서 조직적인 저항 운동은 비교적 소규모였고 주변적인 활동에 그쳤다. 유대인들이 루마니아를 통과하거나 탈출하는 것을 도왔던 시온주의 지하조직[463] 외에도, 안토네스쿠 정권은 서로 다른 성향의 정치 운동 세력과 마주했다.
그중 하나는 극좌 및 좌익 세력으로, 특히 루마니아 공산당이 중심이었다. 루마니아 공산당은 페르디난드 1세 통치 시기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른 국가 정책으로 이미 금지된 소규모 정당이었으며, 독소 불가침 조약 체결 이후 사실상 활동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 작전인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면서 다시 활동을 재개했지만, 실제 무장 저항 운동을 조직할 역량은 부족했고, 다른 소규모 좌파 그룹들의 활동을 조정하는 수준에 머물렀다.[464] 소련 침공 직전, 안토네스쿠는 "유대 볼셰비키즘"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당국에 "모든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철저히 감시하라고 명령했다.[465]
공산주의 혐의로 체포된 이들 중 유대인들은 트란스니스트리아의 바프니아르카나 리브니차 같은 지역으로 보내졌고, 다른 이들은 카란세베슈나 터르구지우와 같은 일반 수용 시설에 수감되었다.[466] 약 2,000명의 루마니아 유대인이 정치범죄 혐의로 강제 이주되었는데, 이 중에는 강제 노역을 피하려던 사람들도 포함되었다.[467] 한 추산에 따르면, 공산주의 혐의로 구금된 사람은 약 2,000명에 달하며, 이 중 약 1,200명이 루마니아 본토에 투옥되었다.[468] 다양한 파르티잔 활동가들에게는 사형이 집행되었고,[469] 리브니차에 수감된 대다수의 공산주의자들은 1944년 3월 학살당했다.[470]
정치 스펙트럼의 다른 한편에서는 레지오네르 반란과 철위대의 몰락 이후 정권에 반대했던 많은 레지오네르들이 있었다. 안토네스쿠는 이들을 "[레지오네르] 녹색 셔츠를 입은 공산주의자들"이라고 여겼으며,[282] 이들 중 다수가 살해되거나 투옥되었다.[471]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위대 지하조직은 지역적으로 형성되었으며, 그 규모는 수천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64] 안토네스쿠 정권 하의 양측 정치범 중 일부는 동부 전선 부대에 합류하여 처벌을 면할 기회를 얻기도 했다.[472]
탄압받고 분열되었으며 약화되었지만, 루마니아 공산당은 소련의 승리를 발판 삼아 주류 야당으로 편입되려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즈를 중심으로 한 "수감자 파벌"이 등장하여, 기존의 공식 지도부와 전쟁 전 소련으로 망명했던 소위 "모스크바파" 공산주의자들 모두에게 반대했다.[473] 1944년 이후 루마니아 공산당 내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수감자 파벌"은 명목상 당 지도자였던 슈테판 포리슈 주변의 세력을 제거했는데, 포리슈는 납치된 후 결국 살해되었다.[474] 이러한 내부 갈등 속에서 루마니아 공산당 지도부는 더 큰 정당들과 협상을 시작했지만 여전히 정통성 위기에 직면했다.[475] 한편, 소련과 "모스크바파" 공산주의자들은 루마니아 전쟁 포로들을 대상으로 선전 활동을 벌여 전향을 유도했고, 이를 통해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 사단을 창설하는 데 성공했다.[476]
6. 4. 문화계의 저항
이온 안토네스쿠 정권이 시행한 조치들은 루마니아 문화계에 상반된 영향을 미쳤다. 일부 문학사학자들은 안토네스쿠 정권이 문화적 모더니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루마니아 문화 엘리트 다수가 그의 정책에 동조적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477]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문화계 인사들과 그룹들은 정권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문학계에서는 원로 문학 이론가 우겐 로비네스쿠의 고전적 자유주의와 세계주의, "로비네스쿠파"로 불린 시비우 문학 서클, 그리고 젊은 아방가르드 작가들(이온 카라이온, 게오 둠이트레스쿠, 디미트리에 스텔라루, 콘스탄트 토네가루)의 반문화적 움직임이 있었다.[478] 저명한 좌익 성향의 작가 투도르 아르게지, 빅토르 에프티미우, 자하리아 스탄쿠 등은 안토네스쿠 시대에 정치범으로 수감되기도 했다.[479] 작가 조르제 컬리네스쿠는 공식적인 지침에 반하여, 1941년 유대인의 문화적 기여를 강조한 루마니아 문학 종합 연구서를 출판하는 위험을 감수했다.[480] 작곡가 조르제 에네스쿠는 루마니아 음악가들의 안전을 위해 안토네스쿠에게 직접 탄원하기도 했다.[459]
여러 지식인과 예술가들도 연대 활동을 벌였다.[481] 1942년 8월에는 다수의 지식인들이 트란스니스트리아에서의 학살을 비판하고 정책 변경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미하이 국왕에게 전달했다.[482] 1944년 4월에는 소련과의 즉각적인 평화 협상을 요구하는 또 다른 문서가 발표되었다.[483]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철학자이자 미술 평론가인 앨리스 보이네스쿠가 자신의 일기에 반유대주의 조치와 학살에 대한 분노를 기록하기도 했다.[484]
정치적 탄압은 종교계로도 확산되었다. 안토네스쿠 정권은 특히 복음주의 또는 복원주의 기독교 교파를 박해했는데, 이들은 이미 국민 레기오네리 정권 하에서 금지된 바 있었다.[485] 그의 명령으로 오순절 연합과 침례교 연합 소속 신자 수천 명이 투옥된 것으로 알려졌다.[486] 박해는 종교적 신념에 따른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에게도 집중되었다. 이노켄티스트 운동 외에도 오순절 연합,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연합회, 여호와의 증인 협회 등이 탄압 대상에 포함되었다.[487] 안토네스쿠는 군 복무를 거부하는 "종파"에 대해 사형까지 고려했으며, 결국 이들을 추방하기로 결정했다고 회고했다.[488] 1940년 9월 9일, 문화예술부는 정권이 인정하고 보호하는 종교 목록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루마니아 정교회, 그리스 가톨릭 교회, 로마 가톨릭 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우크라이나 정교회, 칼빈교회, 루터교회, 유니테리언 교회, 이슬람교가 포함되었다. 이 목록에 없는 모든 종교는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517]
7. 유산
이온 안토네스쿠의 통치가 끝난 후 루마니아는 잠시 민주주의 체제로 복귀하는 듯했으나, 곧 루마니아 공산주의 체제가 수립되는 과정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안토네스쿠 재판은 협력주의 청산을 명분으로 한 정치적 숙청의 일부로 이용되었으며,[489] 그의 재판 결과는 이후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다.[148][490]
공산주의 정권 하에서 안토네스쿠에 대한 평가는 시대적 상황과 정치적 필요에 따라 변화했다. 초기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적 계급 투쟁 관점에서 그의 시대를 해석하며 홀로코스트와 같은 부정적인 측면을 축소하거나 왜곡하는 경향이 강했다.[500][506] 그러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시대에 국가 공산주의 노선이 강화되면서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안토네스쿠를 재평가하고 일부 복권하려는 모순적인 움직임도 나타났다.[508][509] 이 시기 일부 지식인들은 노골적인 홀로코스트 부정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511]
1989년 루마니아 혁명 이후 안토네스쿠에 대한 평가는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며 격렬한 사회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일부에서는 그를 강력한 지도자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여론이 형성되기도 했으며,[523][524] 극우 및 민족주의 세력은 그의 복권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6][148][529] 이러한 움직임은 루마니아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역사 인식의 균열과 정치적 갈등을 반영하는 것이었다.[514]
안토네스쿠 정권의 홀로코스트 책임 문제는 그의 유산을 둘러싼 핵심 쟁점 중 하나이다. 공산주의 시대에는 이 문제가 축소되거나 왜곡되었으나, 혁명 이후 국제적인 압력과 내부적인 성찰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공론화되었다. 2003년 설립된 위젤 위원회의 활동과 최종 보고서 발표는 루마니아 정부가 공식적으로 홀로코스트 책임을 인정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6][148][563] 이후 안토네스쿠를 공개적으로 옹호하는 행위는 법적으로 금지되었고,[6][148][564] 관련된 기념물들이 철거되는 등 과거사 청산 노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공식적인 책임 인정과 법적 조치에도 불구하고, 안토네스쿠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루마니아 사회에서 민감한 문제로 남아있다. 일부 여론 조사에서는 여전히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존재하며,[565]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일부 지역에 남아있는 등[589] 그의 유산은 현재까지도 지속적인 논쟁과 재해석의 대상이 되고 있다.
7. 1. 공산주의 정권 시기 평가
안토네스쿠 몰락 이후 루마니아는 잠시 1923년 루마니아 헌법에 따른 민주주의 체제로 복귀하고 연합국 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곧 루마니아 공산주의 장악의 초기 단계가 시작되었다. 이는 1947년 12월 30일 미하이 국왕의 강제 퇴위와 공산주의 정권 수립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안토네스쿠 재판은 협력주의 혐의로 루마니아 인민재판소 등이 주도한 여러 정치적 숙청 절차 중 하나였다.[489] 루마니아 공산당과 그 동맹 세력들은 조작된 1946년 루마니아 총선 전후와 안토네스쿠 처형 이후 몇 년간 그의 재판 결과를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는 도구로 악용했다.[148][490] 대표적인 예로, 저명한 반공산주의 지도자 율리우 마니우는 재판 중 안토네스쿠와 악수했다는 이유만으로 파시스트이자 안토네스쿠 동조자로 몰려 탄압받았다.[148] 또한, 안토네스쿠가 승인했던 루마니아 독일인의 나치 독일군 입대는 독일계 주민 추방의 구실로 사용되었고,[287][491] 소련 점령군은 이를 빌미로 특정 루마니아 시민을 체포하거나 베사라비아와 북부 부코비나에서 온 전쟁 난민들의 귀환을 막고, 이들을 소련 내부로 강제 이주시키기도 했다.[492] 루마니아의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관계가 악화되고 소련의 압력이 거세지면서, 페트루 그로자의 공산당 내각은 사도좌 대사 안드레아 카술로가 안토네스쿠와 대화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그를 협력자이자 ''페르소나 논 그라타''(기피 인물)로 지정했으며,[493] 이를 이용해 루마니아와 연합된 그리스 가톨릭 교회 성직자들에게 루마니아 정교회와의 통합을 강요했다.[218]그러나 루마니아 출신 홀로코스트 역사가 라두 이오아니드는 홀로코스트에 가담한 루마니아인 중 극소수만이 기소되었고, 안토네스쿠 재판 이후 사형된 사람은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 원인으로 행정 및 사법 기관 내의 민족주의적 저항, 너무 많은 사람을 적으로 돌리는 것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두려움, 시온주의 생존자들의 이민, 일부 공산주의자들의 자유주의 유대인 지도자들에 대한 적대감 등을 꼽았다.[494] 다른 연구자들도 유대인들이 새로운 정권 및 다수 인구와의 갈등에 직면했다고 설명한다.[495] 그럼에도 홀로코스트 관련 범죄에 대한 재판이 간헐적으로 열렸는데, 마리아 안토네스쿠의 재판이 그중 하나이다. 그녀는 1944년 9월 체포되어 소련에 구금되었다가 1950년 다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중앙 유대인 사무소와의 협력을 통한 경제 범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496] 5년 후 내부 추방되었고 1964년 사망했다.[497] 1950년 이후에는 유죄 판결을 받은 많은 전쟁 범죄자들이 "사회적 공동 생활에 적합하다"는 이유로 석방되었으며, 일부 용의자는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498]
초기 공산주의 정권에서 점차 영향력을 잃어간 루크레치우 퍼트러슈카누는 그의 마르크스주의 저술에서 홀로코스트를 간헐적으로 언급했다.[499] 하지만 소비에트 역사학의 영향을 받은 공식적인 역사 담론은 루마니아의 전시 상황을 오로지 마르크스-레닌주의적 계급 투쟁 관점에서만 해석했다.[500] 이러한 상황에서 안토네스쿠 시대의 학살을 기록하고 폭로하려는 노력은 주로 루마니아 유대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1945년 유대인 기자 마리우스 미르쿠와 마이어 루드리히가 증언을 모으기 시작했고,[501] 1946년에서 1948년 사이에는 유대인 공동체 지도자 마타티아스 카프가 홀로코스트 전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방대한 저서 "카르테아 네아그러"(검은 책)를 출판했다.[502] 안토네스쿠 기소 과정에서 부차적으로 다루어졌던 로마니아인 집시 강제 추방 문제는 공식 담론에서 거의 무시되었다.[503]
공산주의 정권은 미하이 1세의 쿠데타에서 루마니아 공산당(PCR)의 역할을 과장하며 8월 23일을 국경일로 기념했다.[148][504]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즈 파벌이 당내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후 민족주의 담론을 수용하면서, 자신들이 안토네스쿠 타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는 그들 대부분이 그 기간 동안 투옥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505] 스탈린주의 원칙에 따른 검열은 전쟁 중 루마니아의 반유대주의와 홀로코스트 같은 부정적인 측면을 배제하고 동부 전선 참전 사실을 은폐하는 역사 수정주의를 낳았다.[506][507]
1960년대 중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집권하고 국가 공산주의 노선을 채택하면서 모순적인 경향이 나타났다. 8월 23일을 공산 정권 수립일로 기념하면서도, 안토네스쿠와 그의 정권에 대한 점진적인 정치적 복권 시도가 이루어진 것이다.[508] 역사가들은 민족주의 원칙의 부활과 소련과의 거리두기가 이러한 복권 시도에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509] 점차 권위주의적으로 변모한 차우셰스쿠 정권은 과거의 개인 통치 방식을 부활시키며 비공식적으로 "콘두커터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도 했다.[510] 1970년대 초 "7월 테제"로 새로운 정책 노선이 확립된 이후, 차우셰스쿠는 민족주의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인 홀로코스트 부정주의 지식인 집단을 용인했다. 이들은 우젠 바르부와 코르넬리우 바딤 투도르의 잡지 "섭터머나"와 "루체아펄", 시인 아드리안 포우네스쿠와 그의 잡지 "플러커러", 소설가 이온 런크런잔 등을 중심으로 활동했다.[511] 정권은 또한 망명 중이던 거물 요시프 콘스탄틴 드러간과 관계를 맺었다. 그는 과거 아이언 가드 회원이지만 안토네스쿠 복권과 원시론의 국가 공산주의적 해석을 지지하는 인물이었다.[512] 반대로, 많은 반체제 인사들과 루마니아 디아스포라는 점차 공식적인 안토네스쿠 신화에 맞서는 존재로서 미하이 1세의 이미지를 받아들였다.[513] 루치안 보이아는 이를 "두 가지 상반되는 신화 간의 극적인 대립이 오늘날 루마니아 사회를 분열시키는 근본적인 균열을 역사적, 신화적 용어로 옮겨놓은 것"이라고 분석했다.[514]
루마니아 홀로코스트 관련 주제는 공산주의 시대 내내 왜곡되었다. 차우셰스쿠 자신은 강제 추방 생존자 수(약 5만 명)를 전체 희생자 수로 언급하면서 희생자의 민족적 배경을 밝히지 않고, 대부분을 "공산주의자와 반파시스트"로 묘사했다.[515] 정권은 또한 독일군과 현지 화살십자당이 최종 해결을 시행한 북트란실바니아의 홀로코스트에만 초점을 맞추었다.[516] 블라디미르 티스머네아누는 안토네스쿠가 "준성스러운 후광"을 지니고 있으며, 많은 루마니아인들이 이를 훼손하려는 시도를 국가적 존엄성에 대한 모욕으로 여긴다고 지적했다. 그는 "포스트 공산주의 사회에서 박해에 대한 환상은 좌절한 개인들의 광범위한 계층에게 엄청난 만족감을 제공한다"고 덧붙이며, 이러한 민족주의적 견해가 차우셰스쿠 정권 시절의 선전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분석했다.[517]
이미 접근이 제한되었던 학살 관련 초기 기록들은 공공 도서관에서 완전히 제거되었다.[518] 헝가리의 홀로코스트를 다룬 정치적 문헌은 있었지만, 차우셰스쿠 시대 전체를 통틀어 루마니아의 홀로코스트 가담을 전적으로 다룬 저작은 단 한 편뿐이었다.[519] 야시 유대인 학살에 초점을 맞춘 이 작품마저도 루마니아 당국의 책임을 회피하고 사망자 수를 크게 축소했다.[520] 서문에서 공식 역사가 니콜라에 미네이는 루마니아가 유대인 사망에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521] 다른 공식 문헌들은 더욱 노골적으로 안토네스쿠 정권이 반유대주의적이지 않았으며, 살해된 유대인들은 모두 독일이나 불가피한 상황의 희생자였다고 주장하며 홀로코스트 자체를 부인하는 경향을 보였다.[522]
7. 2. 1989년 혁명 이후의 논쟁
1989년 루마니아 혁명 이후 이온 안토네스쿠에 대한 루마니아인들의 이미지는 여러 차례 변화했다.[523] 1990년대에 실시된 여론 조사에 따르면, 그는 일부 대중에게 호감을 얻었다.[523] 역사가 루치안 보이아는 이러한 경향이 15세기 왈라키아의 군주 블라드 3세를 지지하는 유사한 경향과 비슷하며, "권위주의적 해결책"에 대한 선호도를 나타내고 "차우셰스쿠 시대에 주로 자리 잡은 신화 체계"를 반영한다고 주장한다.[524] 또한 당시에는 1944년 쿠데타를 루마니아의 공산화 시작으로만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고,[148][525] 일부 여론은 "유대 볼셰비즘"이라는 개념을 부활시켜 유대인들이 루마니아에 공산주의를 가져왔다고 비난했다.[526] 영국의 역사학자 토니 주트는 이러한 반응을 전 동구권 여러 국가의 증가하는 반러시아 정서와 홀로코스트 부정과 연결시키고, 이들을 집합적으로 "반공산주의의 잘못된 기억"이라고 불렀다.[527] 루마니아 출신 정치학자 블라디미르 티스머네아누는 1989년 이후 대중들 사이에서 안토네스쿠의 "가짜 신성한" 이미지와 이 현상을 "박해에 대한 환상"이라고 언급했다.[528] 그는 안토네스쿠가 "준성스러운 후광"을 가지고 있으며 많은 루마니아인들이 이를 축소하려는 시도를 그들의 국가적 존엄성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한다고 말하며, 이러한 민족주의적 견해가 차우셰스쿠 정권 당시의 선전에 기반한다고 보았다.[517]전시 독재자의 이미지는 1989년 이후 시대의 많은 정치인들에게 호소력을 가졌으며, 그의 복권을 요구하는 산발적인 요청이 최고 권력층에서 제기되었다.[6][148][529] 극우 단체들은 루마니아 정교회에 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와 함께 그의 시성을 요구했고,[530] 일부 신파시스트 단체들은 시마가 일탈적인 존재였던 코드레아누주의의 유산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며 안토네스쿠를 변호하는 입장이 되었다.[531] 이 과정에서 특별한 사례는 대루마니아당 주변에 모인 세력들로, 이들은 흔히 외국인 혐오 또는 신파시스트 메시지와 차우셰스쿠의 국가 공산주의 유산을 결합한 것으로 묘사된다.[532] 당 대표이자 전 ''섭터머나'' 기고가인 코르넬리우 바딤 투도르가 설립한 ''România Mare'' 잡지는 안토네스쿠와 차우셰스쿠를 동일시하여 둘 다 "루마니아 국민의 사도"로 묘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533] 1996년 대선에서 대통령직에 입후보했던 바딤 투도르는 새로운 안토네스쿠가 되겠다고 서약했다.[534] 보이아는 이러한 극단의 만남을 "특별한 역설"이라고 말한다.[535] 과거 철위대 회원이자 안토네스쿠 복권과 원시론의 국가 공산주의적 버전을 지지하게 된 요시프 콘스탄틴 드러간 또한 루마니아에서 활동을 공개적으로 재개했는데, 종종 바딤 투도르의 그룹과 협력하여,[536] 안토네스쿠의 복권을 위한 운동을 담당하는 세 개의 조직, 즉 미디어 매체 유로파 노바(Europa Nova),[537] 이온 안토네스쿠 재단(Ion Antonescu Foundation), 이온 안토네스쿠 연맹(Ion Antonescu League)을 설립했다.[538] 그의 동료 라두 테오도루(Radu Theodoru)는 유대인들을 "장기적인 유해 요소"라고 비난하고 실제로는 루마니아인이 공산주의 홀로코스트의 희생자였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프로젝트를 지지했다.[539] 이온 코자와 폴 고마는 특히 조작된 증거에 의존하고 유대인들에게 범죄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는 급진적인 주장을 했다.[540] 이온 크리스토이우가 편집한 여러 저널들은 안토네스쿠의 복권을 반복적으로 주장했고, 외국인 혐오적인 주장도 했다.[541] ''Ziua'', ''România Liberă''[542], ''Adevărul''[543]과 같은 다양한 성향의 전국 일간지에서도 비슷한 견해가 산발적으로 나타났다.
다양한 연구자들은 안토네스쿠를 무죄로 만들려는 전반적인 경향이 집권당인 구국전선(FSN)과 그 후신인 사회민주당(PSD)에 의해 지지되었다고 주장하는데,[544] 이들은 등장하는 친권위주의 로비를 보완하면서 공통의 적대자인 미하이 1세 국왕과 그의 지지자들을 반역자로 묘사했다.[545] 홀로코스트에서 안토네스쿠의 역할을 부정하려는 유사한 시도는 기독교 민주 국민농민당과 국민자유당(PNL)과 같은 주요 야당에서도 이루어졌으며, 후자의 당수인 라두 컴페아누는 전시 지도자를 유대인들을 방어하려고 했던 "위대한 루마니아인"으로 공개적으로 묘사했다.[546] 여당과 야당 모두 전시 지도자의 복권을 고려했고, 1991년 5월 의회는 그의 추모를 위해 묵념을 지켰다.[547] 안토네스쿠의 복권에 대한 정부의 관용적인 태도는 국제적인 우려와 항의를 불러일으켰다.[148][548] FSN이 지지한 루마니아 대통령 이온 일리에스쿠는 안토네스쿠의 복권 시도에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그가 유대인들에게 저지른 범죄"를 인정했지만,[549][546] 그의 후임이자 민주 협약(Romanian Democratic Convention) 대표인 에밀 콘스탄티네스쿠는 1997년 루마니아 관리들의 집단적 책임을 인정한 최초의 루마니아 고위 인사가 되었다.[549][546] 그러나 같은 기간 동안, 소린 모이세스쿠(Sorin Moisescu) 검찰총장은 폐지된 특별 항소 절차를 따라 안토네스쿠와 다른 1946년 피고인들에게 내려진 판결을 뒤집으려고 했지만, 결국 철회했다.[550]
어느 정도까지는 이러한 친 안토네스쿠 정서는 1989년 이후 역사학에서도 나타났다. 2004년 이 현상을 되돌아보면서 마리아 부쿠르(Maria Bucur)는 다음과 같이 썼다. "안토네스쿠의 역겨운 이미지는 극우 극단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선전 캠페인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적 논쟁과 정치적 경쟁으로 인해 확산된 만연한 신화이며, 대중은 이에 무관심하거나 문제 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다."[551] 혁명 이후 안토네스쿠에 관한 기록 보관소 자료, 루마니아 국립 기록 보관소의 자료를 포함하여 연구자들이 더 많이 이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소련 관리들이 압수하거나 편집한 문서는 러시아에 보관되어 대부분 접근할 수 없었다.[552] 새로 개방된 기록 보관소의 더 많은 증거와 마주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식 기관에 고용된 일부 역사가들을 포함한 여러 역사가들은 루마니아의 홀로코스트를 부정하고 사망자 수를 독일 부대에만 돌렸다.[553] 동시에 일부는 트란실바니아 북부 학살에만 초점을 맞추었다.[554] 안토네스쿠의 이미지를 영웅으로 묘사하고 그의 정치에 대해 변호하는 글을 쓴 루마니아 저자로는 역사가 게오르게 부자투(Gheorghe Buzatu),[555] 미하이 펠린(Mihai Pelin),[556] 그리고 연구원 알렉스 미하이 스토에네스쿠(Alex Mihai Stoenescu)가 있다.[557] 래리 L. 와츠(Larry L. Watts)는 미국에서 비슷하게 논란이 되는 단행본을 출판했다.[558] 홀로코스트의 독특성을 부정하고 안토네스쿠의 공모를 축소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디누 C. 지우레스쿠는 자국의 참여를 공개적으로 인정한 최초의 탈공산주의 시대 루마니아 역사가로 인정받았고,[559] 그의 동료인 세르반 파파코스테아와 안드레이 피피디는 안토네스쿠를 무죄로 만들려는 시도에 대한 초기 비판가로 주목받았다.[560] 트란스니스트리아 및 기타 지역의 범죄 문제는 1999년 소린 미투(Sorin Mitu)가 편집한 국가 승인 대체 교과서를 통해 루마니아 교육 과정에 처음 포함되었다.[561]
2003년, 자신이 이 문제에 대해 취했던 모호한 입장이 논란을 불러일으킨 기간 이후,[562] 콘스탄티네스쿠의 후임인 이온 일리에스쿠는 위젤 위원회를 설립했다. 이 위원회는 루마니아의 홀로코스트를 연구하는 국제적인 전문 역사가 그룹이었으며, 나중에 엘리 위젤 국립 연구소가 그 뒤를 이었다. 위원회가 작성한 ''최종 보고서''는 이온 안토네스쿠의 홀로코스트 참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6][148][563] 그 후로 안토네스쿠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 표현은 불법이 되었다.[6][148][564] 안토네스쿠의 스메르시 심문 기록은 러시아 기록 보관소에서 회수되어 2006년에 공개되었다.[148] 새로운 비난과 폭로에도 불구하고, 안토네스쿠는 여전히 인기 있는 인물이었다. 국영 방송국 TVR 1이 실시한 2006년 ''마리 로므니'' 여론 조사 결과, 시청자들은 안토네스쿠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루마니아인 6위로 지명했다.[565] 투표의 결승전 단계에는 가장 인기 있는 10명의 인물에 대한 텔레비전 프로필이 포함되었으며, 역사학자 아드리안 치오로이아누는 안토네스쿠에게 할당된 부분을 이용하여 그를 폭로하고 비난하여, 유권자들이 독재자를 위대한 루마니아인으로 보지 않도록 이유를 제시했다.[565] 이러한 접근 방식은 ''지우아'' 신문이 치오로이아누를 비판한 후 상당한 논란을 야기했고, 치오로이아누는 진실을 말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을 변호했다.[565]
같은 해 12월 5일, 부쿠레슈티 항소법원은 1940년의 객관적인 상황이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예방 전쟁을 정당화한다는 이유로, 안토네스쿠의 특정 평화에 대한 범죄 유죄 판결을 뒤집었다.[375][566][567] (알렉시아누, 콘스탄틴 판타지, 콘스탄틴 바실리우, 시마, 그리고 여러 철십자당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였다.)[566] 이러한 조치는 베사라비아에서 소비에트 연방 해체 이후 형성된 독립 국가인 몰도바와 소련의 후계 국가인 러시아에서 공식적인 항의를 불러일으켰고, 홀로코스트 역사가들의 비판을 받았다.[375][567][568] 항소법원의 결정은 2008년 5월 루마니아 대법원에 의해 뒤집혔다.[566] 같은 해, 마리아 안토네스쿠의 상속인들은 부부가 소유한 프레데알의 빌라에 대한 청구를 제기했지만, 브라쇼브 법원은 전범의 재산을 몰수하는 법률을 인용하여 그들의 요청을 기각했다.[569]
7. 3. 비젤 위원회와 그 이후
2003년, 이온 일리에스쿠 대통령은 루마니아의 홀로코스트를 연구하기 위한 국제적인 전문가 그룹인 위젤 위원회를 설립했다.[562] 이 조치는 일리에스쿠 자신이 이 문제에 대해 취했던 모호한 입장이 논란을 일으킨 이후의 일이었다.[562] 위원회의 활동은 이후 루마니아 홀로코스트 연구를 위한 엘리 위젤 국립 연구소로 이어졌다.[6][148][563] 위원회가 작성한 ''최종 보고서''는 이온 안토네스쿠가 홀로코스트에 관여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6][148][563] 이 보고서 발표 이후, 루마니아에서는 안토네스쿠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나 옹호를 법적으로 금지했다.[6][148][564]또한, 안토네스쿠가 소련의 스메르시에게 심문받았던 기록이 러시아 기록 보관소에서 회수되어 2006년에 공개되기도 했다.[148] 이러한 공식적인 책임 인정과 새로운 자료 공개에도 불구하고, 안토네스쿠는 루마니아 사회 일부에서 여전히 논쟁적인 인물로 남아있다. 2006년 국영 방송국 TVR 1이 실시한 ''마리 로므니''(위대한 루마니아인) 여론 조사에서 시청자들은 안토네스쿠를 6번째로 위대한 루마니아인으로 선정했다.[565] 이 프로그램의 결선 방송에서 안토네스쿠 부분을 담당했던 역사학자 아드리안 치오로이아누는 그를 비판하며 시청자들이 그를 위대한 인물로 보지 않도록 설득하려 했고, 이는 ''지우아'' 신문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는 등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다.[565]
법적 차원에서도 논란이 이어졌다. 2006년 12월, 부쿠레슈티 항소법원은 1940년의 국제 정세가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예방 전쟁을 정당화했다는 이유로 안토네스쿠의 평화에 대한 범죄 유죄 판결 일부를 무효화했다.[375][566][567] 이 판결은 몰도바와 러시아의 공식적인 항의를 받았으며 홀로코스트 연구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375][567][568] 그러나 2008년 5월, 루마니아 대법원은 이 항소법원의 결정을 최종적으로 뒤집었다.[566] 같은 해, 마리아 안토네스쿠의 상속인들이 부부가 소유했던 프레데알의 빌라에 대한 소유권 반환 소송을 제기했으나, 브라쇼브 법원은 전범의 재산을 몰수하도록 규정한 법률을 근거로 이를 기각했다.[569]
위젤 위원회의 보고서 발표와 법적 조치 이후, 1990년대에 요시프 콘스탄틴 드러간[564][582]이나 클루지-나포카 시장 게오르게 후나르[583] 등 민족주의 성향의 인사들이 주도하여 세웠던 안토네스쿠의 동상들은 철거되거나 대중의 시야에서 제거되었다.[6][148][564][587] 안토네스쿠 부부가 건립에 기여했던 부쿠레슈티의 성 콘스탄틴과 헬레나 교회에 있던 그의 흉상은 오랜 논쟁 끝에 금속 상자 안에 봉인되는 방식으로 처리되었다.[6][148][564]
하지만 안토네스쿠에 대한 논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축구 훌리건들이 리그 I의 2005-2006 시즌 경기 중 안토네스쿠의 초상화와 인종차별적 구호를 내걸어 UEFA의 제재를 받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인종차별은 경기를 망친다'' 캠페인 관련).[588] 또한 2019년 기준으로, 콘스탄차, 르므니쿠 스러트, 베케트 등 루마니아 내 9개 거리는 여전히 안토네스쿠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어, 그에 대한 평가가 루마니아 사회에서 여전히 민감한 문제임을 보여준다.[589]
7. 4. 문화적 유산 및 기념물
안토네스쿠와 그의 정권은 루마니아 문화, 미술, 문학에 영향을 미쳤으나, 엄격한 문화 지침과 전시 상황으로 인해 그 영향은 다른 시기보다 제한적이었다.[570] 전쟁 중 대규모 영웅 기념비 건설은 드물었고, 주로 길가의 삼폭화(troițe)가 세워졌다.[570] 1942년 영웅 숭배 조직이 부쿠레슈티 유대인 묘지를 몰수하여 기념물 건립을 계획했으나 무산되었다.[571] 안토네스쿠 부부는 정교회 기부를 선호하여 라호바의 마르게아누 교회, 덤어로이아의 교회, 문치의 성 콘스탄틴과 헬레나 교회 등의 건립주가 되었다. 특히 성 콘스탄틴과 헬레나 교회에는 안토네스쿠 부부의 벽화가 남아있다.[564] 고향 알제슈 주의 홍수 피해 후, 안토네스쿠는 코르베니에 우크라이나 포로 등을 동원하여 모범 마을 '안토네슈티'를 건설하고 알제슈 강의 수력 개발을 지시했다.[572] 그는 작가 이온 알렉산드루 브러테스쿠-보이네슈티 등 예술 및 문학계 인사들과 교류하기도 했다.[573]그의 1946년 재판은 조르제 커리네스쿠가 ''나치우나''지에 기고한 글에서 다루어졌다.[202] 1940년대 정치 유머에서는 그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루마니아 원수" 칭호를 풍자하며 "자칭 원수"라고 불렀다.[574] 전쟁 중 소련의 선전물, 특히 뮤지컬, 인형극[575], 신문 만화[576] 등에서는 안토네스쿠를 다른 추축국 지도자들과 함께 악당이자 비굴한 인물로 묘사했다.
차우셰스쿠 시대에는 안토네스쿠에 대한 모호한 평가가 나타나기도 했다. 마린 프레다의 1975년 소설 ''델리룰''은 안토네스쿠를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노력한 복잡한 인물로 그렸으나,[577] 그의 반유대주의 정책은 언급하지 않아 논란이 되었고[578] 소련 잡지 ''리테라투르나야 가제타''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579] 반면, 민족주의 작가 우젠 바르부는 1975년 소설 ''익명''에서 안토네스쿠를 풍자적으로 묘사했다.[580]
1989년 혁명 이후 1990년대에는 부쿠레슈티 등 여러 도시에 안토네스쿠 기념비가 세워지고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겨나는 등 명예 회복 움직임이 있었다.[6][581] 이러한 움직임에는 사업가 요시프 콘스탄틴 드러간[564][582], 민족주의 성향의 클루지-나포카 시장 게오르게 후나르[583], 군 장성 출신 미르체아 켈라루[564] 등이 관여했다. 1993년에는 영화감독이자 사회민주당 정치인 세르지우 니콜라에스쿠가 안토네스쿠를 옹호하는 영화 ''오글린다''를 제작했으며[584] (이온 시미니에가 안토네스쿠 역을 맡음), 1994년 국립 군사 박물관에서 기념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585] 같은 해, 국영 기업이 배포한 다큐멘터리 영화 ''데스티눌 마레샬룰리''("원수의 운명")[586] 역시 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엘리 위젤 위원회의 조사 결과 발표 이후, 안토네스쿠에 대한 공개적인 찬양은 금지되었고, 그의 동상들은 철거되거나 공공장소에서 치워졌다.[6][148][564][587] 성 콘스탄틴과 헬레나 교회의 안토네스쿠 흉상은 논란 끝에 금속 상자 안에 봉인되었다.[6][148][564] 2005-2006 시즌에는 축구 훌리건들이 리그 I 경기 중 안토네스쿠의 초상화와 인종차별적 구호를 내걸어 UEFA의 제재를 받기도 했다 (''인종차별은 경기를 망친다'' 참조).[588] 2019년 기준으로 콘스탄차, 르므니쿠 스러트, 베케트 등 루마니아 내 9개 거리가 여전히 안토네스쿠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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