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고타이 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오고타이 칸은 칭기즈 칸의 셋째 아들이자 몽골 제국의 제2대 황제이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1229년 쿠릴타이에서 대칸으로 즉위했으며, 몽골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내정을 정비하는 데 힘썼다. 금나라를 정복하고 남송을 공격하는 한편, 서방 원정군을 파견하여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등 동유럽 지역을 침략했다. 또한, 수도 카라코룸을 건설하고 유교, 불교 등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포용하는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과도한 음주로 건강을 해쳐 1241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제국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오고타이 칸국의 칸 - 귀위크 칸
귀위크 칸은 몽골 제국의 3대 대칸으로, 쿠릴타이를 통해 즉위하여 유럽 원정에 참여하고 교황에게 서신을 보냈지만, 과음으로 급사하여 몽골 제국의 유럽 진출을 늦추었다. - 오고타이 칸국의 칸 - 카이두 칸
카이두 칸은 오고타이 칸의 손자이자 칭기즈 칸의 증손으로, 오고타이 가문의 부흥을 목표로 쿠빌라이 칸과 대립하며 중앙아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한 인물이다. - 칭기즈 칸의 황자 - 차가타이 칸
차가타이 칸은 칭기즈 칸의 둘째 아들로, 엄격하고 호전적인 성격으로 정복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며, 오고타이 칸의 즉위를 지지하고 중앙아시아를 다스려 차가타이 한국의 기틀을 다졌다. - 칭기즈 칸의 황자 - 주치 칸
주치 칸은 칭기즈 칸의 장남으로 몽골 제국 초기에 활약하며 서방 원정에 참여하여 중앙아시아 북부를 정복했으나, 동생과의 불화로 어려움을 겪었고, 1225년경 사망 후 그의 영토는 아들 바투에게 상속되어 킵차크 한국의 기반이 되었다. - 1186년 출생 - 송자
송자는 남송 시대의 관리이자 법의학자로, 억울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검시 지침서인 《세원집록》을 저술하여 후대 법의학 발전에 기여했다. - 1186년 출생 - 콘스탄틴 프세볼로도비치
콘스탄틴 프세볼로도비치는 프세볼로트 3세의 아들이자 13세기 초 루스의 공후로, 노브고로드 공작을 거쳐 리피차 강 전투 승리 후 블라디미르 대공이 되어 짧은 통치 기간 동안 문화적 발전에 기여했다.
오고타이 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칭호 | 카안 |
전체 이름 | Ögedei Khagan (Ögedei Qa'an) |
사후 칭호 | 영문황제 (英文皇帝, Yīngwén Huángdì) |
묘호 | 태종 (太宗, Tàizōng) |
통치 | |
작위 | 몽골 제국 제2대 카안 |
재위 기간 | 1229년 9월 13일 ~ 1241년 12월 11일 |
대관식 | 1229년 9월 13일 |
이전 통치자 | 칭기즈 칸/툴루이 (섭정) |
다음 통치자 | 퇴레게네 (섭정)/구유크 칸 |
개인 정보 | |
출생 | 기원후 1186년경 |
출생지 | 하마그 몽골 |
사망 | 1241년 12월 11일 (54~55세) |
사망지 | 몽골 제국 |
매장지 | 불명, 추정 부르한 할둔 |
종교 | 텡그리 신앙 |
가족 관계 | |
왕가 | 보르지긴 가문 |
아버지 | 칭기즈 칸 |
어머니 | 보르테 |
배우자 | 보라크친 카툰 퇴레게네 카툰 모게 카툰 알쿠이 카툰 키르기스탄 카툰 쿠줄데르 카툰 주자이 카툰 자친 카툰 에르케네 카툰 |
자녀 | 구유크 고단 코추 카라차르 카시 카단 멜리그 |
2. 이름
오고타이의 이름의 정확한 어원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벨러 켐프시는 2010년/2011년에 오고타이의 이름이 위구르를 의미하는 *oygur|*오이구르ug에서 유래했으며, *oygur-DAi → *oygudai → ögüdei → ögödei 순서로 변화했다고 주장했다.[45] 반면, 이고르 드 라케빌츠는 13세기와 14세기 문헌들을 근거로 오고타이 이름의 정확한 당대 표기는 ögödei|외괴데이mn 또는 öködei|외쾨데이mn이며, ögedei는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46]
다양한 문헌에서 오고타이의 이름은 여러 가지로 표기된다. 『원조비사』에는 우게다이(斡歌歹), 화가다이(和歌台), 알가다(斡歌歹) 등으로 기록되었고, 다른 한자 문헌에는 월고알(月古歹), 알가알(斡歌歹), 월활알(月闊歹) 등으로 나타난다. 또한 우고다이(倭闊岱), 악각덕의(諤格德衣), 외게데이, 우구우데이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존호는 무이켄가한(木亦堅合罕)이다.
이름 표기에 혼란이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몽골어의 '모음 조화' 규칙 때문이다. 몽골어 모음에는 남성 모음(a, o)과 여성 모음(u, e)이 있으며, 한 단어는 원칙적으로 같은 성의 모음으로만 구성된다(i는 중성 모음으로 양쪽과 공존 가능). 그런데 몽골어에는 'u'와 'o'의 중간 발음이 존재하며, 오고타이의 이름이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정확한 표기가 어렵고 다양한 표기가 나타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우'로 시작하면 모음 조화에 따라 '우게데이'가 자연스럽지만, '오고데이'는 남성 모음 'o'와 여성 모음 'e'가 섞여 있어 몽골어 원칙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
문헌에 따른 구체적인 표기는 다음과 같다.
오고타이는 몽골 황제로서 '카안(قاآن|카안fa, Qā'ān)'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최초의 인물로 여겨진다. 이는 그의 아들 구유크가 1246년 11월 초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게 보낸 친서에서 확인된다. 바티칸에 현존하는 이 서한에서 구유크는 조부 칭기즈 칸을 Chingiz khān|칭기즈 칸mn으로, 자신을 khān|칸mn으로 칭한 반면, 아버지 오고타이는 قاآن|카안fa으로 칭했다. 이러한 표기는 13세기 주바이니의 『세계 정복자사』나 14세기 초 라시드 앗딘의 『집사』 등 몽골 제국 시대 페르시아어 자료에서도 나타나며, 화북의 한어, 위구르 문자, 쿠빌라이 치세 이후의 파스파 문자 몽골어 비문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오고타이 이후 몽골 제국의 대칸 위에 오른 인물들은 모두 '카안'으로 불렸다. 오고타이 치세에 화북의 전진교나 불교 사찰 등에 세워진 비문에는 '오고타이 황제' 외에도 '합한(合罕) 황제' 또는 '하한(合罕) 황제'(카안 황제)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아버지 칭기즈 칸이 '성길사(成吉思) 황제'로, 아들 구유크가 '곡유(谷由) 황제'로 이름이 음차된 것과 대조적이다.
3. 생애
오고타이는 칭기즈 칸과 그의 정실 부인 보르테 사이의 셋째 아들이다. 이름의 정확한 어원은 불분명하지만, 위구르를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45][46] 젊은 시절 아버지의 군사 활동에 참여하여 할할지드 모래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기도 했으나 보로쿨라에게 구출되었고[1], 1204년에는 패배한 메르키트 부족장의 아내였던 퇴레게네를 아내로 맞이했다.
1206년 아버지가 칭기즈 칸으로 즉위한 후 여러 부족의 병력을 받아 에밀 강과 호보크 강 유역을 분봉지로 삼았으며, 이는 훗날 오고타이 칸국의 기반이 되었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금나라 원정(1211년~)과 호라즘 제국 원정에 참여하여 군사적 공적을 세웠다.[3][4][5] 온화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조율하는 성품 덕분에 형 주치, 차가타이 대신 아버지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1227년 칭기즈 칸이 사망하고 동생 툴루이가 잠시 섭정을 맡은 후, 1229년 9월 13일 케룰렌강 유역에서 열린 쿠릴타이에서 형 차가타이와 동생 툴루이의 지지를 받아 몽골 제국의 제2대 대칸으로 즉위했다.[6]
대칸으로서 오고타이는 아버지의 정복 사업을 계승하여 제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초르마칸을 파견하여 페르시아와 코카서스 지역을 정복했으며[7], 1234년에는 남송과 협력하여 금나라를 멸망시켰다(몽골의 금나라 정복). 또한 만주의 동하를 정벌하고[8] 고려에 대한 침공을 재개했다(고려-몽골 전쟁).[9] 1235년 쿠릴타이에서는 남송 공격과 킵차크 초원 및 동유럽을 향한 대규모 서방 원정을 결정했다. 바투가 이끈 서방 원정군은 볼가 불가리아, 킵차크, 키예프 루스 등을 정복하고 폴란드와 헝가리까지 진출하며 유럽을 위협했으나[10], 오고타이의 사망으로 중단되었다. 남송[11]과 인도 북부 침공[12]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티베트와 카슈미르 지역은 그의 통치 시기에 몽골의 영향력 아래 들어갔다.[13]
내정 면에서는 야율초재, 마흐무드 얄라바치, 친카이 등 다양한 출신의 인재를 등용하여 행정 체계를 정비했다.[14] 중국 북부 지역에 행정 구역을 설치하고[15] 중서성을 두었으며, 전국적인 역참(얌) 제도를 확립하여 제국 내 교통 및 통신망을 정비했다.[17] 또한 수도 카라코룸을 건설하고 지폐(교초) 발행, 세금 제도 정비[18], 법령 정비[16] 등 국가 체제를 다졌다.
오고타이는 관대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만년에는 과도한 음주로 건강을 해쳤다. 1241년 12월 11일 사냥 중 행궁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사후 황후 퇴레게네 카툰이 섭정을 하며 정치적 혼란이 있었고, 결국 아들 구유크가 후계자가 되었으나 제국 분열의 조짐은 심화되었다.
3. 1. 생애 초반
오고타이는 칭기즈 칸과 그의 정실 부인 보르테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아들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아버지의 군사 활동에 참여했으며, 17세 때 할할지드 모래 전투에서 자무카에게 패배했을 당시 심각한 부상을 입고 전장에서 길을 잃었으나 아버지의 양아들인 보로쿨라에게 구출되기도 했다.[1] 1204년에는 아버지가 정복한 메르키트 부족장의 아내였던 퇴레게네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이는 당시 초원 유목 문화에서는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1206년 아버지가 칭기즈 칸으로 즉위한 후, 오고타이는 잘라이르, 베수드, 술두스, 콩가탄 부족의 병력을 기반으로 에밀 강과 호보크 강 유역 일대를 분봉지로 받았다. 이는 훗날 오고타이 울루스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1211년부터 시작된 금나라 원정에 참여했으며[2], 이후 호라즘 제국 원정에서도 활약했다. 특히 오트라르와 우르겐치 함락에 기여했고[3][4], 가즈니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5] 서방 원정에서 중요한 공적을 세웠다.
칭기즈 칸은 첫째 아들 주치의 출생에 대한 논란과 둘째 아들 차가타이의 엄격하고 강한 성격 때문에 이들을 후계자로 삼는 것을 주저했다. 대신 온화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조율하는 성품을 지닌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1227년 칭기즈 칸이 사망하자, 몽골의 전통적인 막내 아들 상속 관습에 따라 막내아들인 툴루이를 지지하는 세력도 있었으나, 툴루이 본인이 아버지의 뜻을 존중하여 후계 자리를 사양했다. 결국 1229년 9월 13일에 열린 쿠릴타이에서 오고타이는 형 차가타이와 동생 툴루이의 지지를 받아 몽골 제국의 제2대 대칸으로 즉위했다. 이때부터 몽골 제국의 군주를 "'''카간'''"(хаан|카간mon)으로 칭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3. 1. 1. 어린 시절
1186년 또는 1185년 음력 9월 15일(11월 7일) 카마크 몽골 보르지긴 오복의 키야트 부족장이던 칭기즈 칸과 그의 아내 보르테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에게는 형 주치, 차가타이와 동생 툴루이 및 여동생들이 있었다. 보르테가 메르키트 부족에게 납치되었다가 풀려난 지 9개월 만에 태어난 형 주치에 대해, 둘째 형 차가타이는 그의 혈통에 의문을 제기하며 갈등을 빚었다. 오고타이는 칭기즈 칸의 아들이 확실한 것으로 인정되었으며, 형들의 싸움에 직접 끼어들기보다는 때때로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어려서부터 아버지 칭기즈 칸의 정복 전쟁 대부분에 참여했다. 오고타이는 체력이 강하지는 않았으나, 성격이 온화하면서도 꾸준하고, 관대하며, 지적인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고집이 세고 낭비벽이 있으며,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도 동시에 존재했다.
아버지 칭기즈 칸은 잘라이르 부족장 중 한 사람인 일루게이를 오고타이의 가정교사로 임명했다. 또한 요나라 황족 출신 측근인 야율초재에게 오고타이를 보좌하게 했다. 오고타이는 야율초재가 설명하는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 귀 기울였고 그를 깊이 신뢰했다. 야율초재가 근거 없는 모함으로 체포되었을 때 오고타이는 그를 풀어주려 했으나, 야율초재는 명확한 해명 없이 풀려나는 것은 원칙에 어긋난다며 거절하기도 했다. 오고타이는 야율초재를 스승처럼 대하며 그의 조언을 대부분 받아들였다.
오고타이가 17세였을 때, 아버지 테무진(칭기즈 칸)은 할할지드 모래 전투에서 자무카 군대에게 크게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 오고타이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전장에서 길을 잃었으나, 아버지의 양아들이자 동료였던 보로쿨라에게 구출되었다.[1] 1204년, 아버지가 패배시킨 메르키트 족장의 아내였던 퇴레게네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이는 당시 초원 문화에서 드문 일은 아니었다.
1206년 테무진이 칭기즈 칸으로 선포된 후, 오고타이는 잘라이르, 베수드, 술두스, 콩가탄 부족의 밍간(천호)을 분봉지로 받아 에밀 강과 호보크 강 유역을 다스리게 되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잘라이르의 일루게이가 그의 스승 역할을 계속했다.

오고타이는 형제들과 함께 1211년 11월 금나라를 상대로 처음 독립적인 원정을 수행했다. 1213년에는 허베이 성 남부와 산시 성 북부를 공략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의 군대는 오르도스에서 금나라 수비대를 몰아냈고, 서하, 금나라, 남송의 경계 지점까지 진군했다.[2]
호라즘 제국 원정 동안 오고타이는 형 차가타이와 함께 오트라르를 5개월간 포위 공격한 끝에 함락시키고 주민들을 학살했으며(1219년~1220년), 이후 우르겐치에서 주치와 합류했다.[3] 우르겐치 포위전에서는 주치와 차가타이가 군사 전략을 두고 다투자, 칭기즈 칸은 오고타이에게 지휘를 맡겼다.[4] 그는 1221년에 도시를 점령했다. 이후 동남부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오고타이는 가즈니를 평정하기도 했다.[5]
칭기즈 칸은 주치의 출생 의혹과 차가타이의 격한 성격 때문에 두 아들을 후계자로 부적합하다고 여겼다. 반면 오고타이는 온화하고 일족의 화목을 잘 이끄는 성격이었기에 아버지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3. 1. 2. 청년기
오고타이는 테무진과 보르테의 셋째 아들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여 과음하는 습관이 있었고, 스스로도 이를 인정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즐겨 마시던 술은 아이락(암말의 젖을 발효시킨 우유)이 아니라 포도주였다. 건강하고 강인했기에 젊어서는 과음에도 건강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의 형 차가타이는 오고타이의 과음을 자주 질책했고, 훗날 오고타이의 중요한 조언자가 되는 거란족 출신 야율초재 역시 술을 줄이라고 수시로 충고했다. 당시의 기록들은 그가 술과 여색을 즐겼다고 종종 묘사하며, 그를 싫어하는 이들은 술주정뱅이로 묘사하기도 했다.원사, 몽골비사, 집사 등 여러 역사 기록에서는 공통적으로 오고타이가 칭기즈 칸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지적인 인물이었다고 평가한다. 또한 그는 성격이 온화하여 일족 간의 화합을 잘 이끌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아버지 칭기즈 칸의 측근이었던 야율초재나 위구르족 출신 친친카이(田鎭海)와 젊은 시절부터 가깝게 지냈으며, 훗날 대칸이 된 후 이들을 중요한 직책에 등용했다. 특히 야율초재는 오고타이가 가장 신임했던 인물로, 중국식 행정 체계를 도입하여 제국을 통치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오고타이는 아버지의 군사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7세 때 아버지가 자무카 군대에게 크게 패배했던 할할지드 전투에 참여했다가 심각한 부상을 입고 전장에서 길을 잃었으나, 아버지의 양아들이자 동료였던 보로클에게 구출되었다.[1] 1202년에는 토그릴 칸의 케레이트와의 전투에도 참가했다.
1204년 아버지 칭기즈 칸을 따라 나이만족 정벌에 나섰다. 이때 칭기즈 칸은 사로잡은 나이만족 여성 퇴레게네의 총명함을 알아보고 오고타이에게 아내로 주었다. 당시 초원 문화에서는 이러한 혼인이 드물지 않았다.
1206년 아버지 칭기즈 칸이 전 몽골 제국의 대칸으로 선포된 후, 오고타이는 잘라이르, 베수드, 술두스, 콩가탄 부족 등과 함께 에밀 강과 호보크 강 유역의 영토를 분봉지로 받았다. 이는 훗날 오고타이 울루스의 기반이 되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잘라이르 부족의 일루게이가 그의 스승이 되었다.
1211년 11월, 오고타이는 형제들과 함께 금나라를 상대로 처음으로 독립적인 군대를 이끌고 원정에 나섰다. 1213년에는 허베이를 거쳐 남쪽으로 진격했고, 산시성 북부 일대를 점령했다. 또한 오르도스에서 금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서하, 금나라, 송나라의 국경 지점까지 진군했다.[2] 1213년 7월부터 1214년 10월까지는 형 주치, 차가타이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태행산(太行山) 동서로 나뉘어 금나라를 공격했다. 그는 타타르 족과도 수시로 교전하여 이들을 정벌하고 복속시키는 데 기여했다.
호라즘 제국 원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219년부터 1220년까지 5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형 차가타이와 함께 오트라르 주민들을 학살했다.[3] 이후 우르겐치 포위전에 합류했는데, 당시 우르겐치 공격을 지휘하던 형 주치와 차가타이가 군사 전략 문제로 갈등을 빚자, 칭기즈 칸은 오고타이에게 포위 공격의 총지휘를 맡겼다.[4] 오고타이는 1221년 우르겐치를 함락시켰다. 또한 동남부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가즈니를 평정하기도 했다.[5]
칭기즈 칸은 첫째 아들 주치의 출생을 둘러싼 의혹과 둘째 아들 차가타이의 지나치게 엄격하고 격한 성격 때문에 이들을 후계자로 여기지 않았다. 대신 온화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조율하는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오고타이는 몽골 통일 전쟁과 금나라 원정, 서역 원정 등에서 공을 세웠으며, 특히 호라즘 정벌에서의 공적으로 나이만 부족의 옛 영토를 하사받아 오고타이 울루스의 기초를 다졌다.
3. 1. 3. 호라즘 정복 활동
칭기즈 칸의 서아시아 원정 당시 오고타이는 몽골인과 타타르인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호라즘 제국 원정에 참여했다.1219년부터 1220년 초까지 오고타이는 형 차가타이와 함께 호라즘의 오트라르 지역을 공략했다. 주변 지역을 포위했으나 5개월간 정복하지 못했고, 5개월 만에 오트라르를 점령한 뒤 지역 주민들을 학살하고 도시를 파괴한 후 주치가 주둔한 곳으로 돌아갔다.[3]
1220년 4월부터는 호라즘의 수도 우르겐치 공략에 참여했다. 이때 주치와 차가타이는 군사 전략을 놓고 서로 갈등했는데[4], 이로 인해 아버지 칭기즈 칸은 1220년 가을, 오고타이를 우르겐치 원정군의 책임자로 임명했다.[4] 오고타이는 차가타이와 우익군 3천호를 이끌고 우르겐치 성을 공략하여 1221년에 도시를 점령했다. 우르겐치 공략 과정에서 투항한 이슬람 상인 야라와치(牙刺洼赤)와 그의 아들 마수우드베이(馬思忽惕別乞占) 부자는 오고타이의 측근이 되었다. 몽골군이 퇴각하면서 마수우드베이는 호라즘의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훗날 오고타이가 칸으로 즉위한 후에는 투르키스탄의 다루가치로 임명되었다.
호라즘 정복 이후 동남부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오고타이는 가즈니를 평정하기도 했다.[5]
호라즘 정복에서의 전공을 인정받아 1224년 칭기즈 칸은 오고타이에게 나이만 부 영지와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 일대 및 몽골고원 서부를 영지로 하사했다. 이 영지는 훗날 오고타이 울루스 또는 우구데이 울루스로 불리며 오고타이 칸국의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오고타이는 이 영지에 거의 가지 않았고, 실질적으로 오고타이 울루스를 통치한 것은 그의 손자 카이두였다.
오고타이가 이끌었던 부대에는 타타르인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후일 유럽인들이 몽골과 타타르를 같은 민족으로 혼동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3. 2. 몽골 제국의 대칸
아버지 칭기즈 칸을 따라 몽골 통일과 금나라 원정, 대서정(大西征)에 참여했으며, 특히 호라즘 제국 정벌에서 공을 세워 나이만 부족의 옛 영지를 받았다(오고타이 칸국). 형 주치와 차가타이가 있었으나, 주치는 출생 의혹을 둘러싼 차가타이와의 불화, 차가타이는 지나치게 엄격한 성격 때문에 후계자에서 제외되었다. 온화하고 화합을 중시하는 성품을 지닌 오고타이가 아버지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되었다.[6]
1227년 칭기즈 칸이 사망한 후, 동생 툴루이가 잠시 섭정을 맡았다. 몽골의 전통적인 막내 아들 상속 관습과 툴루이 개인의 능력 및 신망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툴루이 본인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한다며 사양했다. 결국 1229년9월 13일, 케룰렌강 유역 코데에 아랄에서 열린 쿠릴타이에서 차가타이와 툴루이의 지지 아래 제2대 대칸으로 즉위하였다.[6] 이때부터 '카안'(Qa'an)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오고타이 칸은 아버지의 정복 사업을 이어받아 적극적인 영토 확장을 추진했다. 1234년 동생 툴루이 등의 활약에 힘입어 금나라를 완전히 멸망시켰고(몽골의 금나라 정복), 페르시아 지역을 장악했으며, 고려에 대한 침공을 재개했다(고려-몽골 전쟁). 1235년에는 수도 카라코룸 건설을 시작하고, 이곳에서 열린 쿠릴타이를 통해 남송 공격과 킵차크 초원 및 동유럽을 향한 대규모 서방 원정을 결정했다. 바투를 총사령관으로 한 서방 원정군은 볼가 불가르, 킵차크, 루스 공국들, 폴란드, 헝가리 등 동유럽 대부분을 정복하며 제국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내정 면에서는 야율초재, 친카이, 마흐무드 얄라바치 등 아버지 시대의 유능한 인재들을 중용하여 국가 체제를 정비했다. 전국적인 역참(얌) 제도를 도입하여 제국 내의 소통과 정보 전달 속도를 높였고, 수도 카라코룸을 건설하여 제국의 중심지로 삼았다. 또한 중서성을 설치하여 행정 체계를 갖추고, 교초(지폐)를 발행하는 등 경제 정책도 시행했다.
그러나 계속된 대외 원정과 수도 건설로 인한 재정 부담, 급격히 팽창한 영토 관리의 어려움, 몽골 왕족 내부의 분열 조짐 등 여러 문제점도 나타났다. 특히 장남 구유크와 조카 바투 사이의 갈등은 심각한 내부 분열 요인이 되었다. 만년에는 과도한 음주로 건강을 해쳤으며, 1241년12월 11일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사후 후계자 자리를 둘러싸고 혼란이 발생했으며, 결국 황후 퇴레게네 카툰의 정치적 영향력 아래 장남 구유크가 제3대 카안으로 선출되었다.
3. 2. 1. 대칸 즉위
1219년 호라즘 제국 침공 전에 칭기즈 칸의 황후 예수이는 후계자를 미리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맏아들 주치와 둘째 아들 차가타이 사이에 심한 다툼이 있었고, 결국 논의 끝에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삼기로 합의했으며 칭기즈 칸도 이를 받아들였다. 주치는 출생에 대한 의혹이 있었고, 차가타이는 성격이 너무 격하다는 이유로 칭기즈 칸은 두 아들이 후계자로 부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반면 오고타이는 성격이 온화하고 형제 및 부족 간의 화합을 잘 이끌었기에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1227년 8월 18일, 칭기즈 칸이 서하 원정 중 사망하자, 그의 막내아들인 툴루이가 1229년까지 2년간 감국(섭정)으로서 몽골 제국을 다스렸다. 칭기즈 칸은 죽기 전에 몽골의 부족장들을 모아 오고타이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지시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그러나 몽골의 전통적인 막내 아들 상속 관습에 따라 툴루이를 후계자로 지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툴루이는 칭기즈 칸의 막내아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뛰어난 장수였고 주변의 신망도 두터웠다.
1229년 봄, 케룰렌강 가에서 후계자를 정하기 위한 쿠릴타이가 열렸으나, 많은 귀족들이 툴루이를 지지하면서 결론을 내지 못했다. 같은 해 여름에 다시 쿠릴타이가 열렸고, 40일간의 긴 토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툴루이 지지 세력이 우세했다. 토론 막바지에는 차가타이와 칭기즈 칸의 동생인 테무게 옷치킨만이 오고타이를 지지했다. 일찍 사망한 주치를 대신해 참석한 그의 아들 바투는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툴루이는 몽골 귀족들의 추대를 거절하며, 아버지 칭기즈 칸이 후계자로 지명한 인물은 오고타이라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결국 1229년 9월 13일, 케룰렌강 근처 코데에 아랄(현재의 아바르긴 바르가스)에서 열린 쿠릴타이에서 오고타이는 형 차가타이와 동생 툴루이의 지지 아래 몽골 제국의 제2대 대칸으로 즉위했다.[6] 즉위 직후 오고타이는 '칸' 대신 '카안'(хаан)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일부 기록에는 합간황제(哈罕皇帝/合罕皇帝) 또는 무이겐 카안(木亦堅合罕)이라는 존호로도 나타난다.
3. 2. 2. 즉위 직후
즉위 후 카라코룸에 성곽과 궁궐 건설을 시작하며 이곳으로 수도를 옮길 것을 결심했다. 위구르 출신 친친카이와 거란족 출신 야율초재를 재상으로 임명하고, 동투르키스탄 출신 인사들과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들을 조정에 등용하여 세력을 형성했다. 또한 마흐무드 아라와치와 그의 아들 마우스트베크를 비롯한 호라즘 출신 인사들도 기용했다.
즉위 직후, 오고타이는 부하라 출신 장군 코르마간에게 군사 3만 명을 주어 호라즘을 다시 공격하게 했다. 코르마간의 군대는 1231년 시르케부트(무간)에서 마지막 호라즘 군주 잘랄 알 딘을 물리치고, 호라즘의 옛 영토였던 현재의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공격했다. 또한 즉위 직후부터 1235년까지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웠다. 1230년 7월에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금나라 서부 지역을 공략했으며, 이때 동생 툴루이와 조카 몽케 등도 함께 참전했다. 그 외에도 남송(南宋)과 인도 방면 공략 계획을 세웠고, 1231년부터는 고려(高麗) 정벌을 선언했다. 동시에 중국 하북 지역에 관원을 파견하여 가구 수를 파악하게 하고, 야율초재에게는 서역 지역의 농가 호수를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1232년 9월 혹은 10월 9일, 그의 동생 툴루이가 몽골고원에서 독이 든 술을 마시고 사망했다. 《몽골비사》에 따르면, 1232년 5월 오고타이 칸이 갑자기 병에 걸려 6월에는 사경을 헤맸다. 병마로부터 오고타이를 구하기 위한 몽골 전통 의식이 열렸는데, 며칠 뒤 무당은 오고타이의 병이 금나라 정벌 시 죽은 중국인들의 원혼과 중국 땅과 물의 정령 때문이라고 예언했다. 무당은 금, 은, 가축이나 인신 공양으로는 병을 낫게 할 수 없으며, 오고타이의 가족 중 한 명이 제물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오고타이가 죽으면 몽골인들은 아비 잃은 자식이 되고 중국인들은 기뻐할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툴루이가 자원하여 나섰고, 북쪽으로 가는 길에 독배를 마시고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한편으로는 툴루이가 오고타이의 측근들과 황후 퇴레게네 카툰 등의 음모로 암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오고타이 칸은 한때 툴루이의 아내였던 소르칵타니 베키를 자신의 아들 귀위크와 결혼시키려 했으나, 소르칵타니 베키는 아들들이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49]
3. 2. 3. 조세 정비와 제도 개편
야율초재는 1229년 하북의 주민들에게는 호(戶) 수를 기준으로, 서역 사람들에게는 정(丁)을 기준으로 조세를 부과하도록 건의하여 시행되었다.[14] 1230년 음력 11월에는 황하 강 이북의 화북 지역 통치를 위해 허베이, 산시, 산둥성, 연경 등에 10개의 로(路)를 정비하고, 십로정수과세사(十路征收课税使)를 파견하여 세금을 징수할 것을 제안했다. 이때 저명한 유사(儒士)들을 조세 관료로 채용할 것을 함께 건의하여 오고타이 칸의 승인을 받았다. 야율초재는 중국 화북 지역을 목초지로 만들기보다는 농업을 유지시켜 농작물 생산량에 따라 세금을 거두는 것이 안정적인 국고 수입 확보에 더 효과적이라고 오고타이 칸을 설득했다.이와 달리 호라즘 출신 마흐무드 야라바치는 정부가 은으로 지불받는 조건으로 세금 징수인에게 징세 업무를 위임하는 세금 징수 청부제(tax farming)를 장려했다. 야율초재는 정부 관리가 직접 세금을 징수하고 정부 발행 통화로 납부하는 전통적인 중국식 제도를 권장했다. 당시 몽골 귀족의 자본으로 활동하던 무슬림 상인(오르토그)들은 세금 납부에 필요한 은을 높은 이자율로 대출해주었으며, 오고타이 칸 역시 이러한 오르토그 상인 조합에 적극적으로 투자했다.[14] 그러나 이러한 세금 청부제는 강압적인 징수로 이어져 많은 사람들이 집을 떠나 피난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후 세금 징수는 연간 은 납부액을 두 배로 늘리겠다고 약속한 압드 알 라흐만에게 넘어갔다.[15]
오고타이 칸은 1230년 1월부터 모든 도로와 역참에 통행세를 징수하게 했으며, 술의 도수를 시험하여 술값의 30분의 1에 해당하는 주류세를 부과하도록 했다. 또한 사회적 부조를 위해 부유한 자들의 양 100마리당 1마리를 거두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하고, 각 가축 무리에서 양과 암말을 한 마리씩 징발하여 황실용 가축 무리를 구성하도록 명령했다.[18]
행정 제도 면에서는 1230년 8월 중서성(中書省)을 설치하여 행정 업무를 총괄하게 했다. 1231년 음력 8월에는 운중(현 산시성 다퉁시)에 십로정수과세사를 파견하여 세금을 징수했다. 같은 해 야율초재를 중서령(中書令)으로, 몽골인 녠허 중산(粘合重山)을 좌승상으로, 위구르인 진해(鎭海)를 우승상으로 임명하여 중서성을 이끌게 했다. 오고타이 칸의 행정부는 크게 세 세력으로 구성되었다:
- 경교(景敎)를 믿는 동부 튀르크인 및 위구르인 서기들 (친카이, 케레이트족 등)
- 이슬람 세력 (호라즘 출신 마흐무드 야라바치, 마수드 베그)
- 중국 북부의 유교 세력 (거란인 야율초재, 여진인 녠허 중산)
오고타이 칸은 국정 사무 부서를 폐지하고 야율초재의 제안에 따라 몽골이 통치하는 중국 지역을 10개의 로(路)로 나누었다. 제국 전체적으로는 베쉬발리크와 옌징(연경) 행정 구역으로 나누었으며, 카라코룸의 중앙 정부는 만주, 몽골, 시베리아를 직접 관리했다. 이후 아무다리야 행정 구역이 추가되었다. 투르키스탄은 마흐무드 야라바치가, 중국 북부는 야율초재(1229-1240)가 관리했으며, 시기 후투그는 중국 지역의 수석 재판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란 지역은 처음에는 카라 키타이 출신 친테무르가 관리했으나, 이후 위구르인 코르구즈가 정직함을 인정받아 임명되었다.
칭기즈 칸 시대부터 내려오던 대자사(Yassa)의 유효함을 재확인하고 자신의 명령을 추가했으며, 쿠릴타이 기간 동안 복장 및 행동 규범을 법제화했다. 1234년에는 제국 전역에 걸쳐 우편 및 통신을 위한 역참(몽골어: Örtöö) 제도를 정비했다. 약 약 40.23km마다 역참을 설치하여 사절들이 말을 갈아타고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도록 했으며, 역참에 소속된 가구는 다른 세금은 면제받는 대신 물품을 공급하는 쿠브추리(qubchuri) 세를 납부해야 했다.[17] 오고타이 칸은 형 차가타이와 조카 바투에게 각자의 영지 내에서 역참을 별도로 관리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귀족들이 임의로 파이자(牌子, 소지자에게 징발 권한을 부여하는 증표)나 자르리크(jarlig, 명령서)를 발행하는 것을 금지했다.
1236년 1월에는 지폐인 교초(交鈔)를 발행했는데, 이는 금나라의 제도를 계승하여 구리 부족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비단 보유고를 기반으로 지폐를 발행하고 구 화폐를 폐기하는 부서의 설립을 명령하기도 했다.
오고타이 칸은 황자들의 교육을 위해 기독교 서기 카다크와 도교 사제 리즈창을 스승으로 임명하고 학교와 학원을 설립했다. 한편, 야율초재는 오고타이 칸이 이란, 중국 서부, 중국 북부, 호라즘 등지에 광범위하게 분봉(토지 분배)을 하는 것이 제국의 분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16] 이에 오고타이 칸은 몽골 귀족들이 분봉지에 감독관을 임명할 수는 있지만, 중앙 정부가 별도의 관리를 파견하여 세금을 징수하도록 조치했다.
3. 2. 4. 금나라 원정
1230년 말, 금나라가 몽골 장군 도코르체르비에게 예상치 못한 패배를 안기자, 오고타이 칸은 직접 원정에 나섰다. 1230년 7월 오고타이는 금나라의 서북부 지역을 공략하여 경조를 점령했다. 이듬해인 1231년 2월, 오고타이는 툴루이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가 산시성을 장악하고 금나라 군대를 몰아내 펑샹(봉상)을 함락했다. 또한 낙양, 하중(河中) 등 여러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1231년 봄에는 금나라의 양주성을 공략했다. 당시 금나라는 상원절이라 등불을 켜고 연회를 벌이고 있었는데, 오고타이는 사전에 보낸 첩자를 통해 이 정보를 입수했다. 오고타이는 상원절 저녁 기습 공격을 지시했고, 남송의 조범(趙范), 조규(趙葵) 군대를 동원하여 금나라 장군 이전을 격파했다. 양주성 태수 이전 등은 도망치다 죽었다.
오고타이는 남송에 사절을 보내 금나라를 치는 데 협조할 것을 요청했으나, 남송은 즉답을 피했다. 십팔사략에 따르면, 그 이전인 1231년 5월 오고타이가 남송에 사자를 보내 길을 빌려달라고 요청했을 때, 송나라가 몽골 사자를 죽였다고 한다.
1231년 8월에는 금나라 남경에서 금나라 장군 무선(武仙)의 군대와 교전하여, 참정 완안사열(完顏思烈)의 지원군까지 격파했다. 1231년 12월, 오고타이는 툴루이에게 기병 6만을 주어 군사를 나누어 화주(和州)와 흥원(興元)으로 진격하게 했다. 툴루이 군대는 양양(襄陽)을 거쳐 당주(唐州), 등주(鄧州), 양적(陽翟) 등지에서 금나라 군대와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다. 같은 달 오고타이도 직접 군사를 이끌고 금나라의 하중 지역을 점령했다.
북쪽에서 여름을 보낸 후, 몽골군은 다시 허난성에서 금나라를 공격하여 남중국 영토를 지나 금나라의 배후를 공격했다. 1232년에는 툴루이의 활약으로 금나라의 명장 완안진화상이 이끄는 금군 주력을 삼봉산 전투에서 괴멸시켰다. 금나라 황제는 수도 카이펑으로 피신했으나 곧 몽골군에게 포위되었다. 오고타이는 이후 장군들에게 최종 정복을 맡기고 전선에서 물러났다.
1234년 2월, 몽골군은 여러 도시를 점령한 후 남송의 뒤늦은 지원을 받아 차이저우를 함락시키며 마침내 금나라를 멸망시켰다(제2차 대금 전쟁). 그러나 금나라 멸망 후, 송나라 총독이 몽골 사신을 살해하고, 송나라 군대가 몽골이 점령한 옛 금나라 수도 카이펑, 뤄양, 장안을 탈환하려 시도하면서 몽골과 남송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한편, 금나라와의 전쟁 외에도 오고타이는 1233년 푸셴 완누가 세운 동하를 격파하여 남부 만주를 평정했다. 또한 이 지역 북부의 수타타르족을 복속시키고 1237년에 일어난 그들의 반란을 진압했다.
3. 2. 5. 조지아, 아르메니아 원정
호라즘 제국을 멸망시킨 후, 칭기즈 칸은 서하를 공격할 여유를 얻었으나, 1226년 호라즘 왕조의 마지막 군주 잘랄 앗딘 밍부르누가 제국 재건을 위해 페르시아로 돌아왔다. 1227년 그를 상대로 파견된 몽골군은 다메간에서 패배하기도 했으나, 이스파한 인근에서 다시 승리했다.오고타이 칸은 초르마칸에게 페르시아 원정을 명했고, 초르마칸은 3만에서 5만 명의 몽골 군대를 이끌고 1230년 부하라를 출발했다. 그는 아무다리야 강을 건너 호라산 지역을 점령하고, 카스피해와 알보르즈 산맥 사이의 타바리스탄 지역으로 진입했다. 레이에서 겨울을 보낸 초르마칸은 1231년 남쪽으로 이동하여 곰과 하마단을 빠르게 점령했다. 파르스와 케르만 지역의 통치자들은 몽골에 항복하고 공물을 바치기로 했다. 한편, 동쪽에서는 다이르 바가투르가 카불, 가즈니, 자불리스탄을 점령했다. 이로써 페르시아 전역이 몽골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잘랄 앗딘은 트란스캅카스 지역에 고립되었다.
1232년 초르마칸 휘하의 몽골군은 코카서스로 방향을 돌렸다. 간자크 공성전에서는 투석기와 공성 망치를 동원했으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235년 마침내 간자크의 성벽이 무너졌고, 에르빌 주민들은 오고타이 칸의 궁정에 매년 조공을 바치기로 약속한 후에야 몽골군은 철수했다. 1236년 초르마칸이 이끄는 군대는 코카서스를 완전히 정복했다고 선언했다.

초르마칸은 몽케 칸의 군대가 북부 코카서스에서 활동하던 1238년까지 기다렸다가[7] 본격적인 남부 코카서스 공략에 나섰다. 그는 아르메니아를 정복하고 트빌리시를 점령했다. 같은 해 귀유크 칸이 이끄는 군대는 로레를 점령했는데, 로레의 통치자 샤한샤는 몽골군이 도착하기 전에 가족과 함께 도망쳤다. 호하나베르드에서는 도시 통치자 하산 자랄이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몽골에 항복했다. 이후 서방 원정군의 다른 부대는 아바크 공이 통치하는 가이안을 공격했다. 몽골 사령관 톡타는 직접 공격 대신 도시 주변에 벽을 쌓는 전술을 사용했고, 결국 아바크는 항복했다. 1240년까지 초르마칸은 트란스캅카스 정복을 완료하고 조지아 귀족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이 원정 과정에서 귀유크와 바투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귀유크는 바투 형제들의 지휘 능력, 특히 바투의 역량을 불신했다.[50] 이를 알게 된 오고타이 칸은 귀유크와 몽케를 소환하고 그들의 지휘권을 카단과 부첵에게 넘겼다. 바투는 티서강과 다뉴브강 강변에서 이들을 위한 이별 연회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귀유크는 전쟁 중 바투의 소극적인 태도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51]
3. 2. 6. 고려 재원정
1224년, 몽골 제국의 사신 저고여가 고려 국경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빌미로 고려는 몽골에 보내던 조공을 중단했다.[8] 이는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는 주요 명분이 되었다.오고타이 칸은 1231년에 사신 피살에 대한 복수와 고려 정복을 명목으로 사리타이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고려 침공을 명령했다. 몽골군의 압박에 고려 왕은 일시적으로 항복하고 수도 개경에 다루가치라는 이름의 몽골 감시관 72명을 두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몽골군 주력이 여름을 나기 위해 북쪽으로 철수하자, 당시 무신정권의 집권자였던 최우는 수도를 개성에서 강화도로 옮기고 항전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후 고려를 재차 공격하던 사리타이는 처인성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1234년 몽골 제국의 쿠릴타이에서 오고타이 칸은 몽골 사신을 살해한 고려인, 남송, 킵차크인 등을 정복할 계획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또한 1235년 수도 카라코룸에서 열린 쿠릴타이에서도 고려 침략 계획이 재확인되었다. 오고타이 칸은 단구(Danqū)를 새로운 침략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고려에서 투항한 장군 홍복원을 활용하여 40개 성의 통치를 맡기는 등 침략 준비를 진행했다.
몽골의 계속되는 침략과 압박 속에 1238년 고려 조정은 강화를 요청했다. 이에 오고타이 칸은 고려 국왕(고종)이 직접 몽골로 와서 자신을 알현할 것을 요구했다. 고려 왕은 직접 가는 대신, 1241년 자신의 친척인 영녕공 준(永寧公 綧)과 귀족 자제 10여 명을 몽골에 인질로 보내는 조건으로 전쟁을 일시적으로 중단시켰다.[9]
3. 2. 7. 중국 북부 지역 통치
요나라 출신으로 칭기즈 칸과 오고타이의 참모였던 야율초재(耶律楚材)는 정복지에 대한 몽골의 기존 정책을 바꿀 것을 건의했다. 그는 정복지를 파괴하고 황폐화시키는 대신, 그곳의 인력과 자원을 활용하는 것이 더 이롭다고 주장했다. 오고타이는 이러한 야율초재의 현실적인 건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이에 따라 오고타이는 정복지의 모든 주민을 살해하고 도시와 성곽, 시장 등을 파괴하는 몽골의 전통적인 정복 방식을 버렸다. 대신 정복지와 식민지, 속국 지역의 인력, 학문, 자원, 기술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새로운 정책을 펼쳤다. 야율초재의 제안 덕분에 화북 지방(華北地方)의 귀중한 문화재와 자원, 그리고 많은 인구가 보존될 수 있었다.
이러한 정책 변화는 몽골에게도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몽골군은 중국으로부터 마차, 화살, 화포 등을 얻고 관련 기술을 습득하여 군사력을 한층 강화할 수 있었다. 또한, 몽골의 젊은이들은 중국 화북지방의 유학자나 사상가들로부터 제자백가의 다양한 사상과 철학, 문학 등을 배울 기회를 얻었다.
오고타이 칸은 정복지에 총독격인 다루가치와 관료들을 직접 파견하여 통치했으며, 이들로부터 직접 보고를 받았다. 또한, 탐마치라는 특수 부대를 편성하여 각 정복지에 주둔시켰다. 탐마치는 해당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고 행정 관료들의 세금 징수를 돕는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중국 화북 지역 통치를 위해 아들 코단을 대리인으로 임명했다. 코단은 감숙 성에 서량부(西凉府)를 설치하고 소규모 정부 조직을 꾸려 이 지역을 관리했다. 오고타이는 중국 북부 지방에 역참(잠치)을 설치하고, 지방관인 다루가치 및 서량부 소속 관원들을 중국식 직책으로 임명하여 파견하는 등 현지화된 통치 방식을 도입했다.
3. 2. 8. 내정 활동

오고타이 칸은 내정 면에서 아버지 칭기즈 칸의 측근이었던 위구르인 상인 친친카이(田鎭海)와 마흐무드 아라와치, 거란족 출신의 야율초재 등을 중용하였다. 그의 조정은 다양한 배경의 인물들로 구성되었는데,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구분 | 주요 인물 | 출신 배경 |
---|---|---|
기독교 세력 | 친친카이 | 위구르 서기, 동부 튀르크인, 케레이트 |
이슬람 세력 | 마흐무드 얄라바치, 마수드 베그 | 화레즘 출신 무슬림 관료 |
유교 세력 | 야율초재, 녠허 중산 | 거란인, 여진인, 중국 북부 출신 유교 관료 |
오고타이는 정복지에 직접 총독격인 다루가치를 임명하여 파견하거나 현지인을 임명하여 다스렸고, 교통로를 건설하여 수도 카라코룸과 연결함으로써 제국 내 교통망과 통신망을 정비했다. 1234년 제국 전역에 우편 역참 제도인 얌(驛站)을 도입하고 교통 요충지에 역참과 여관을 설치하여 신속한 정보 전달과 교통을 가능하게 했다.[17] 얌을 관리하는 가구는 다른 세금이 면제되었으나, 물품 공급을 위한 쿠브추리 세를 납부해야 했다. 오고타이는 차가타이와 바투에게 각자의 얌을 별도로 관리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18] 또한 오르홍강 기슭에 수도 카라코룸을 건설하고(1235년 천도), 농경지와 도시 지역 관할을 위해 중서성의 기능을 강화했다.
1230년, 야율초재의 건의를 받아들여 북중국 지역 한인(漢人)들의 호수(戶數)와 인구를 조사하고, 이를 바탕으로 법령을 제정하고 세금을 징수하도록 지시했다. 1231년에는 한지세법(漢地稅法)을 반포했으며, 1234년 금나라 정벌 후에는 일시적으로 세금을 감면해주기도 했다. 조사된 호수는 총 110만 호에 달했으나, 오고타이는 북중국 대부분을 왕족, 부마, 공신들에게 봉토로 분배했다. 야율초재는 이러한 조치가 국가 재정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반대하였으나 오고타이는 듣지 않았다. 결국 막대한 세금과 재화가 중간에서 왕족과 공신들에게 돌아가면서 몽골 중앙 조정은 재정난을 겪게 되었다. 야율초재는 오고타이에게 이란, 서부 및 중국 북부, 호라즘 등지에 대한 대규모 분봉이 제국 해체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16] 이에 오고타이는 몽골 귀족들이 분봉에 감독관을 임명할 수는 있지만, 궁정에서 다른 관리를 임명하고 세금을 징수할 것이라고 명했다. 1234년 1월에는 각지의 호적을 정리하여 등록하게 하고, 현지 부족장과 지방관을 통해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
세금 징수 방식에 대해서는 마흐무드 얄라바치와 야율초재 사이에 이견이 있었다. 얄라바치는 정부가 은으로 세금을 받는 조건으로 세금 징수를 위임하는 방식을 주장했고, 야율초재는 정부 관리가 직접 세금을 징수하고 정부 발행 화폐로 납부하게 하는 전통적인 중국 방식을 권장했다. 당시 오르토그라 불리는 무슬림 상인들은 몽골 귀족의 자본을 바탕으로 세금 납부에 필요한 은을 높은 이자로 빌려주었는데, 오고타이는 이러한 오르토그 기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기도 했다.[14] 그러나 오고타이는 지나치게 높은 이자율은 금지했다. 이러한 방식은 이익을 남기기도 했지만, 많은 백성들이 과도한 세금 징수와 강압적인 징수원들을 피해 집을 떠나는 문제를 낳았다. 나중에 야율초재의 일부 업무는 마무드 얄라바치에게 넘어갔고, 세금 징수는 연간 은 납부액을 두 배로 늘리겠다고 약속한 압드 알 라흐만에게 맡겨졌다.[15]
화폐 제도에서는 금나라의 제도를 계승하여 지폐인 교초(交鈔)를 발행(1236년)하여 구리, 금, 은의 부족에 대응했다. 또한 비단 준비금을 기반으로 지폐를 발행하고 오래된 지폐를 파기하는 부서를 설립하도록 명령했다.
오고타이는 문화와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233년 음력 6월, 공자의 51세손 공원배(孔元措)를 찾아 연성공(衍聖公)에 봉했으며, 같은 해 겨울 연경에 공자묘를 짓고 서역 천문학자들에게 명하여 혼천의를 세우게 했다. 1237년에는 중서령 야율초재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 제도를 시행하기로 결정하고, 9월 15일 조령을 내려 단사관 수부타이와 산서동로과세소장 유중(劉中)에게 각 로(路)에서 과거 시험을 주관하여 유학자들을 선발하도록 했다. 1238년 화북 지방 각지에서 시행된 과거 시험(무술년의 선시)에서는 양환(楊奐) 등 4,030명이 선발되었다. 이러한 대규모 인재 채용은 이후 원 인종 때인 1313년에야 다시 이루어진다. 또한 기독교 서기 카다크와 도교 사제 리즈창에게 황자들을 가르치도록 하고, 학교와 학원을 설립했다.
법령 정비에도 힘써 아버지 칭기즈 칸의 명령과 조례(대자사)의 유효성을 확인하고 자신의 명령을 추가하여 쿠릴타이의 중요한 의제로 삼았다. 쿠릴타이 기간 동안 복장 및 행동 규칙을 성문화했으며, 귀족들이 함부로 파이자(牌子, 소지자에게 물품과 서비스를 요구할 권한을 주는 증표)나 자르리크(몽골 제국 황제의 명령서)를 발행하는 것을 금지했다. 또한 부유한 자들의 양 100마리 중 1마리를 거두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각 무리에서 양 한 마리와 암말 한 마리를 황실 식탁을 위해 보내도록 하는 구휼 정책도 시행했다.[18]
행정적으로는 국정 사무 부서를 폐지하고 야율초재의 제안에 따라 몽골이 통치하는 중국 지역을 10개의 노선(路)으로 나누었다. 제국을 베쉬발리크와 연경(옌징) 행정 구역으로 나누었으며, 카라코룸의 본부는 만주, 몽골, 시베리아를 직접 관리했다. 통치 후반기에는 아무다리야 행정 구역이 설치되었다. 투르키스탄은 마무드 얄라바치가, 중국 북부는 1229년부터 1240년까지 야율초재가 관리했으며, 시기 후투그를 중국의 수석 판사로 임명했다. 이란 지역에는 처음에는 카라 키타이 출신 친테무르를 임명했다가, 후에 정직한 행정가로 입증된 위구르족 코르구즈를 임명했다.
종교적으로는 텡그리즘과 샤머니즘을 따랐지만, 신하들과 지방관, 피지배층의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용적인 정책을 유지하여 간섭하지 않았다.
그러나 잇따른 대외 원정과 새로운 수도 건설로 인한 재정 악화, 급격히 확장된 영토 간의 소통 부족, 장남 귀위크와 바투의 대립 등으로 제국 분열의 조짐이 나타나기도 했다. 오고타이 칸은 귀위크를 꾸짖었으나, 귀위크는 마음속으로 복종하지 않았다.
3. 2. 9. 카라코룸 도시 건설
1235년부터 1238년까지 오고타이 칸은 중국인 건축가들과 금나라, 송나라의 목수 및 장인들을 동원하여 몽골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에 성곽과 도시를 건설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중앙 몽골을 오가는 연례 유목 경로의 기착지에도 일련의 궁전과 누각을 건설했다.1235년에 카라코룸의 새 궁전이 처음 완공되자, 오고타이 칸은 직접 '투멘 암갈란트 오논'(Түмэн амгалант ордон, 평화의 궁전) 또는 '투멘 바야스갈란 오논'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중국식 이름인 만안궁(萬安宮)으로도 불렸다. 이 왕궁은 북중국 장인들이 건설했으며, 중심 건물의 높이는 1.5m였다. 오고타이 칸은 친척들에게도 근처에 궁궐을 짓도록 명했다.
카라코룸 도시 건설은 1235년에 완료되었으며, 4개의 문이 달린 흙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도시 내부는 오고타이 칸의 호의를 얻기 위해 경쟁하던 이슬람과 북중국 장인들에게 서로 다른 구역이 할당되었다. 개인 아파트가 부속되어 있었고, 정문 앞에는 동아시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글자가 새겨진 거대한 석거북이 세워졌다. 또한 많은 물새가 모이는 호수도 조성되었다.

오고타이 칸은 중국에서 데려온 장인들과 중근동의 기술자들을 카라코룸에 정착시켰으며, 몽골과 정복지의 주요 도시에도 무슬림과 중동아시아의 기술자, 수학자, 중국 북부의 건축가들을 분산시켜 거주하게 했다.
도시 안에는 불교 5층 석탑과 사원, 무슬림 사원, 도교 사원, 기독교 교회당 등 다양한 종교의 예배당 건설을 승인하고 자금을 지원했다. 중국인 구역에는 야율초재가 중국식 달력을 만들고 관리하던 유교 사원도 있었다. 야율초재는 오고타이 칸의 명으로 중국식 달력을 입수하여 각 대도시에 보급하기도 했다.
3. 2. 10. 남송 원정과 실패
1235년, 오고타이 칸은 수도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남송 정벌을 공식적으로 결정했다. 이는 킵차크 초원과 동유럽으로 향하는 서방 원정과 함께 계획된 대규모 군사 작전 중 하나였다.같은 해 2월 11일, 남송 정벌이 선포되었고, 총사령관으로는 오고타이 칸이 총애하던 셋째 아들 쿠츄(曲出)가 임명되었다. 쿠츄는 중앙군을 이끌고 산시성을 통해 남하했으며, 장군 호사호(胡士虎)가 지원 부대를 이끌고 합류했다. 동시에 다른 아들 코단은 서로군(西路軍)을 이끌고 산시 성과 쓰촨 성 방면으로 진격했다.
몽골군은 초기 전선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1236년 코단과 왕세현의 군대는 대산관(大散關)을 점령했으며, 같은 해 9월 코단은 남송의 이주(利州)를 점령하고 양평성(陽平城)에서 남송 조우문(趙友聞)의 군대를 격파한 뒤 청두에 입성했다.
1235년부터 1245년까지 이어진 일련의 공격을 통해 몽골군은 남송 영토 깊숙이 침투하여 청두, 샹양, 양쯔강 유역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남송의 지리적 특성과 기후, 그리고 많은 수의 남송 군대에 부딪혀 정복을 완료하지는 못했다.
결정적으로, 1236년 10월 혹은 11월경, 남송 원정의 총사령관이자 오고타이 칸의 유력한 후계자였던 쿠츄가 덕안부(德安府, 현재의 후베이성 안륙현(安陸県))에서 전투 중 사망했다. 오고타이 칸이 총애하여 후계자로 삼으려 했던 쿠츄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남송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으며, 이후 몽골 제국의 후계 구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3. 2. 11. 인도 원정 실패 및 티베트 공략
오고타이 칸은 가즈니에 다이르 바가투르를, 쿤두즈에 멩게투 노얀을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1241년 겨울, 몽골군은 인더스 계곡을 침략하여 당시 델리 술탄국의 통치하에 있던 라호르를 포위했다. 그러나 총독 다이르 바가투르가 1241년 12월 30일 도시를 공격하던 중 사망하였고, 몽골군은 도시를 약탈하고 주민들을 학살한 뒤 델리 술탄국에서 철수했다.[12] 이는 사실상 원정의 실패로 평가된다.한편, 1235년 이후 또 다른 몽골군은 카슈미르를 침략하여 수년간 다루가치를 주둔시켰다. 이로 인해 카슈미르는 몽골의 속국이 되었다.[13] 비슷한 시기에 카슈미르의 불교 승려 오토치와 그의 형제 나모가 오고타이의 궁정에 방문하기도 했다. 오고타이 칸 시대에는 티베트에 대한 공략도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2. 12. 서방 원정군 파견
칭기즈 칸 사후, 호라즘 왕조의 마지막 군주 잘랄 앗딘 밍부르누가 페르시아에서 재기를 시도했으나 1227년 다메간에서 몽골군에게 패배했다. 이후 이스파한 인근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었지만 세력을 확장하지는 못했다.오고타이는 1230년 초르마칸에게 3만에서 5만 명의 군대를 주어 페르시아 원정을 명했다. 초르마칸은 부하라를 출발하여 아무다리야 강을 건너 저항 없이 호라산 지역으로 진입했다. 그는 일부 병력을 다이르 바가투르에게 맡겨 서부 아프가니스탄을 공략하게 하고, 자신은 주력군을 이끌고 1230년 가을 카스피해와 알보르즈 산맥 사이의 타바리스탄 지역(현재의 마잔다란)으로 진군했다. 레이에서 겨울을 보낸 초르마칸은 군대를 보내 페르시아 북부 지역을 평정했다. 1231년에는 남쪽으로 진군하여 곰과 하마단을 빠르게 점령했으며, 파르스와 케르만 지역의 통치자들은 몽골에 항복하고 공물을 바쳤다. 동쪽에서는 다이르 바가투르가 카불, 가즈니, 자불리스탄을 점령했다. 이로써 페르시아 전역이 몽골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잘랄 앗딘은 자캅카스로 밀려나 고립되었다.
1235년, 오고타이는 수도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남송 방면과 함께 서방 대원정을 결정했다. 이 서방 원정은 킵차크 초원, 루스, 동유럽 지역을 목표로 했다.

서방 원정군의 총사령관은 조치 가문의 바투 칸이 맡았고, 칭기즈 칸 시대의 명장 수부타이가 숙장(宿將, 경험 많은 장수)으로 참여했다. 또한 오고타이의 장남 구유크, 톨루이 가문의 몽케 등 여러 왕가의 주요 왕족들도 원정군에 합류했다.
1236년부터 시작된 원정으로 몽골군은 서쪽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볼가 불가리아, 알라니아, 쿠만, 키예프 루스 대부분을 정복했으며, 헝가리를 일시적으로 점령하기도 했다. 또한 폴란드,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라틴 제국, 오스트리아 등 동유럽과 발칸반도의 여러 나라를 침공했다. 몽골의 루스 침공 과정 중 콜롬나 포위전에서는 오고타이의 이복동생 쿨겐이 전사하기도 했다. 정복 과정에서 볼가 불가르, 킵차크, 알란 부족, 코카서스 북부 지역, 루스 제후국들, 폴란드 왕국, 헝가리 왕국 등이 몽골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그러나 원정 도중 오고타이의 아들 구유크와 차가타이의 손자 부리가 총사령관 바투를 조롱하면서 몽골 지휘부 내부에 심각한 분열이 발생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오고타이는 구유크를 엄하게 꾸짖으며 "네가 네 군대의 모든 사람들의 사기를 꺾었다... 네가 너의 부하들에게 얼마나 못되게 굴었기에 러시아인들이 항복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질책했다. 그럼에도 오고타이는 구유크에게 유럽 정복을 계속하도록 명령했고, 구유크와 오고타이의 다른 아들 카단, 멜리크는 각각 트란실바니아와 폴란드를 공격했다.
오고타이 칸은 대서양까지 진출하여 유럽 전역을 정복할 계획을 세웠으나, 1241년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서방 원정은 1242년 초 동유럽에서 중단되었다. 대부분의 역사가는 몽골 기록에 따라, 오고타이의 죽음으로 후계자를 선출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총사령관 바투가 쿠릴타이에 참석하기 위해 군대를 철수시켰기 때문에 원정이 중단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바투는 결국 몽골 본토로 돌아가지 않았고, 새로운 칸은 1246년에야 선출되었다. 일부에서는 유럽의 견고한 성들이 몽골군에게 전략적인 어려움을 주었기 때문에 진격을 멈춘 것이라는 다른 견해도 있다.[10]
3. 2. 13. 생애 후반
오고타이 칸은 아버지 칭기즈 칸의 업적을 계승하여 적극적인 영토 확장을 추진했다. 1232년에는 동생 톨루이의 활약으로 금나라의 명장 완안진화상이 이끄는 군대를 격파하고, 1234년 마침내 금나라를 완전히 멸망시켰다(제2차 대금 전쟁).
1235년, 새로운 수도 카라코룸 건설을 시작하고 그곳에서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대규모 정복 계획을 결의했다. 이 계획에는 남송 공격, 킵차크 초원에서 루스·동유럽에 이르는 서방 원정, 고려 침략, 카슈미르 원정 등이 포함되었다. 같은 해 몽골 군대는 카슈미르를 침공했고, 카슈미르의 티베트 불교 지도자 오토치와 그의 동생 나모가 오고타이 조정에 귀순했다.
남송 원정(몽골-송 전쟁)은 셋째 아들 쿠추를 총사령관으로, 차남 코덴을 서로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진행했으나, 황태자 쿠추가 전투 중 사망하면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240년에는 코덴에게 다시 군사를 주어 티베트를 공격하게 했다. 한편, 남송에 파견한 사절 셀무스 등이 살해당하면서 양국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1236년부터 시작된 서방 원정은 조카 바투가 총사령관, 명장 수부타이가 부사령관을 맡았다. 장남 구유크, 톨루이 가문의 몽케 등 주요 왕족들이 참여한 이 원정은 볼가 불가르, 킵차크, 알란인, 코카서스 북부, 루스 공국들, 폴란드 왕국, 헝가리 왕국 등 동유럽 대부분을 정복하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1241년에는 인도 원정을 추진하여 다이르와 멩게투를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몽골군은 인더스강을 건너 델리 술탄령의 라호르를 점령했으나, 사령관 다이르가 전사하고 오고타이 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혼란 속에서 학살과 방화를 저지르고 철수했다. 같은 해 가을, 고려의 고종에게 왕자 파견을 명하여 조카 중 한 명이 카라코룸으로 보내졌고, 10월에는 마흐무드 아라와치에게 한인 관리 등용을 지시했다.
내정 면에서는 아버지 시대의 공신인 위구르인 친카이, 마흐무드 야라바치, 거란 출신 야율초재 등을 중용했다. 전국적인 역참 제도를 정비하여 제국 내 소통을 강화하고, 오르혼 강 유역에 수도 카라코룸을 건설했으며, 농경지와 도시 관리를 위해 중서성을 설치했다. 화폐 제도는 금나라의 교초(지폐) 발행 제도를 계승하여 구리 부족 문제에 대응했다.
오고타이 칸은 스스로 자신의 업적과 과오를 평가하기도 했다. 금나라 정복, 역참 설치, 행정 구역 정비 및 탐마치 군대 파견, 우물 건설을 4가지 공으로, 과도한 음주, 숙부 옷치긴 집안 여성과의 관계, 형제간 사적인 영역 설정, 공신 타카르 살해를 4가지 과오로 꼽았다.
만년에 오고타이는 주색에 빠져 건강이 악화되었다. 원사에 따르면 매일 밤새 술을 마셨고, 야율초재의 간언도 듣지 않았다. 비만으로 말을 타기 어려워졌고 알코올 중독으로 병에 자주 걸렸다. 통치 후반기에는 황후 퇴레게네 카툰의 국정 개입으로 정치가 혼란스러워졌으며, 야율초재는 그녀의 영향력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전해진다. 퇴레게네는 아들 구유크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오고타이는 이를 거부했다.
후계자로는 가장 유력했던 셋째 아들 쿠추가 일찍 사망하자, 오고타이는 쿠추의 장남 시레문이나 조카 몽케를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즉위 시 다른 왕가로부터 오고타이 후손에게 황위를 계승시키겠다는 서약을 받기도 했다.
1241년 2월 큰 병을 앓아 죄수를 사면하기도 했던 오고타이는, 그해 음력 11월 8일(양력 12월 11일) 새벽, 사냥을 나갔다가 머물던 행궁에서 잠을 자던 중 갑자기 사망했다. 향년 56세였다. 집사와 원사 등은 과도한 음주로 인한 알코올 중독과 건강 악화를 사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라시드 알딘은 그가 만성 질환을 앓던 중 의사의 금주령에도 불구하고 아랍 상인 압둘 라흐만과 밤새 술을 마신 뒤 사망했다고 전한다. 이 외에도 퇴레게네 카툰이나 그녀의 사주를 받은 이들에 의한 독살설, 낙마 사고설, 심병으로 인한 사망설 등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오고타이 칸의 시신은 칭기즈 칸, 보르테와 마찬가지로 기련곡에 매장되었다. 그의 사후, 황후 퇴레게네 카툰의 정치적 공작으로 장남 구유크가 제3대 카안으로 선출되었다.
3. 3. 사후
1241년 오고타이 칸이 사망하자, 몽골 제국의 서방 원정은 중단되고 유럽 깊숙이 진출했던 몽골군은 본국으로 퇴각하였다. 당시 몽골군의 일부는 달마티아, 이탈리아의 프리울리 근처, 알바니아 국경 앞까지 도달한 상태였다.오고타이 칸의 사망 원인으로는 알코올 중독과 장기 부전증이 지목된다.[57] 사망 전날 밤 음주 연회에 함께 있었던 이바카 베키와 징기스 칸의 딸 알알탄이 독살 혐의를 받기도 했다.[57] 이바카 베키는 존경받는 자라이르 부족 인물들의 변호 덕분에 풀려났으나[58], 알알탄은 혐의를 벗지 못하고 처형당했다.[59] (일설에는 처형된 인물이 칭기즈 칸의 서녀 일알탄이라는 주장도 있다.) 다른 기록인 타리크-이 자항구샤이에서는 오고타이 칸이 병든 자신을 위해 풀어준 늑대를 사냥개가 쫓아가 죽인 직후 사망했다고 전하는데, 이는 압드-우르-라만과 늦은 밤 술을 마시다 사망했다는 일반적인 설명과는 차이가 있다.
오고타이 칸은 생전에 아들 쿠추가 1236년 사망하자 손자 시레문을 후계자로 지명했다.[27] 십팔사략에는 시레문을 후계자로 지정하는 유언을 남겼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조카인 툴루이 가문의 몽케 역시 잠재적 후계자로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고타이 칸 사후, 황후 퇴레게네는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아들 귀위크를 다음 칸으로 옹립하려 했다.
킵차크 한국의 바투는 귀위크와의 갈등으로 인해 그의 즉위를 강력히 반대하며 쿠릴타이 참석을 거부, 칸 선출을 지연시켰다. 이 혼란기에 오고타이의 동생 테무게 옷치킨이 1241년과 1246년 두 차례 수도 카라코룸 점령을 시도했으나 퇴레게네 카툰의 반발로 실패했다. 결국 퇴레게네가 5년간 섭정을 한 후, 1246년 귀위크가 칸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바투는 귀위크를 형식적으로만 인정했고, 귀위크는 바투와 대결하러 가는 도중에 사망했다. 이후 몽골 제국의 칸위 계승은 오고타이 가문에서 툴루이 가문으로 넘어가게 된다.
오고타이 칸에 대한 사후 평가는 다양하다. 원사, 원조비사, 집사 등에서는 그를 성격이 관대하고 온화하며 지적인 인물로 묘사한다. 중화민국의 역사가 크샤오민(柯劭忞)은 신원사에서 "너그럽고 어질며 동정심이 많아 임금의 도량이 있었다(寬平仁恕 有人君之量)"고 평가했다. 십팔사략에서는 사물을 잘 헤아리고 행동에 과도함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반면, 허세가 강하고 정력적이며 인내심이 강했지만, 술과 여색을 탐닉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특히 젊어서부터 과음하는 습관은 여러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지적되는 부분이다.
1266년 10월, 조카인 쿠빌라이 칸이 원나라의 황실 사당을 건립하면서 오고타이 칸에게 '''태종(太宗)'''이라는 묘호와 영문황제(英文皇帝)라는 시호를 추존했다.[28] 1271년 쿠빌라이 칸이 원나라를 공식적으로 건국했을 때, 오고타이 칸은 태종(太宗)으로 공식 역사 기록에 포함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1998년에 도입된 몽골 국립항공의 보잉 737-800 (등록번호 EL-CSG) 항공기에 '오고타이 칸'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4. 가족 관계
오고타이는 아버지 칭기즈 칸처럼 많은 부인과 60명의 첩을 두었다고 전해진다.[29] 주요 황후와 황비, 그리고 자녀는 다음과 같다.
'''황후'''
- 보락친 카툰(孛剌合眞皇后): 정궁(正宮). 오고타이의 첫 번째 부인.
- * 카시(合失): 아들. 장남 또는 5남이라는 설이 있다. 1234년 사망.
- ** 카이두(海都): 손자. 오고타이 울루스의 칸.
- 퇴레게네 카툰(脫列哥那): 나이만 부족 출신. 소자황후(昭慈皇后)라고도 불린다. 1241년 오고타이 사후 몽골 제국의 섭정을 맡았다. 1246년 사망.
- * 귀위크(貴由): 아들. 몽골 제국의 3대 카간. 장남 또는 차남이라는 설이 있다. (1206년경 ~ 1248년)
- * 쾨추(闊出): 아들. 3남.[30][31] 오고타이 생전에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나, 남송 원정 중인 1236년 2월에 사망했다.
- * 카라차르(哈剌察兒): 아들. 4남. 퇴레게네 카툰 소생이라는 설과 생모 미상이라는 설이 있다.
- * 카시(合失): 아들. 5남. 퇴레게네 카툰 소생이라는 설과 보락친 카툰 소생이라는 설이 있다. 1234년 사망.
- 모게 카툰(木哥): 앙회이(昻恢) 황후라고도 불린다. 본래 칭기즈 칸의 첩이었으나 오고타이가 수계하였다. 자녀가 없어 툴루이의 아들 몽케를 양자로 삼았다. 1242년 사망.
- 홀첩니 카툰(忽帖尼): 걸리길사씨(乞里吉思氏) 출신. 칭기즈 가문 출신이라는 기록도 있다.[32]
- * 코덴(闊端): 아들. 차남 또는 3남이라는 설이 있다. (1206년 ~ 1251년)[33]
- 쾨르게네(闊里桀): 칭기즈 칸으로부터 수계한 부인.
'''황비 및 첩'''
- 토랍기나(土拉起那): 메르키트족 답역사올(答亦思兀)의 처였다.
- 홀란(忽兰): 본래 칭기즈 칸의 첩이었으나 오고타이가 수계하였다.
- 목가(木哥): 본래 칭기즈 칸의 첩이었으나 오고타이가 수계하였다. (황후 모게 카툰과 동일 인물인지 불확실)
- 알퀴(알퀴)
- 에르게네 카툰(業里吉納, 업리길납):[39][40]
- * 카단(合丹): 아들. 6남.[34]
- * 멜리크(滅里): 아들. 7남.[35]
- 쿠투니 카툰
- 주치아이 카툰
- 자이친 카툰
- 제진
'''생모 미상'''
'''아들 순서에 대한 기록'''
오고타이 칸의 아들에 대해서는 《집사》와 《원사》 등 사료에 따라 기록이 조금씩 다르다. 《원사》 「종실세계표」에는 7명의 아들이 기록되어 있다.
5. 평가
오고타이 칸은 스스로를 천재라 여기지 않았고, 아버지 칭기스 칸에게 물려받은 뛰어난 장군들뿐만 아니라 자신이 유능하다고 판단한 인물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활용할 줄 아는 겸손함을 지녔다. 그는 황제였지만 독재자는 아니었다.[19] 당시 모든 몽골인들처럼 어린 시절부터 전사로 성장하고 교육받았으며, 칭기스 칸의 아들로서 세계 제국 건설이라는 아버지의 계획에 참여했다. 그의 군사적 경험은 장군들의 조언을 경청하고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아버지처럼 실용적인 인물이었으며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했다. 그의 굳건하고 신뢰할 수 있는 성품은 칭기스 칸이 두 형 대신 그를 후계자로 선택하게 만든 중요한 자질이었다.
오고타이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가장 총애받는 아들이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특유의 성격으로 어떤 논쟁에서든 회의적인 사람들을 설득하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알려졌다. 그는 체격이 크고, 쾌활하며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이었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데 관심이 많아 보였다. 지적이고 차분한 성격을 지녔으며, 그의 카리스마는 몽골 제국을 아버지가 설정한 방향으로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오고타이는 실용적인 인물이었지만, 통치 기간 동안 몇 가지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군사 지휘관이나 조직가로서 아버지와 동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가장 유능하다고 판단한 인물들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20]
오고타이는 알코올 중독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형 차가타이가 그의 음주 습관을 감시하도록 관리를 두었지만, 오고타이는 이를 피해서 술을 마셨다. 하루에 마시는 술잔의 수를 줄이겠다고 약속한 뒤, 자신을 위해 두 배 크기의 술잔을 만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241년 12월 11일 새벽, 압드-우르-라흐만과 늦은 밤까지 술을 마신 후 사망하자, 사람들은 톨루이의 미망인의 여동생과 압드-우르-라흐만을 비난했다. 하지만 몽골 귀족들은 칸 자신의 자제력 부족이 죽음의 원인임을 알고 있었다.
1232년 동생 톨루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오고타이에게 큰 충격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톨루이는 병든 오고타이를 살리기 위해 주술 의식에서 독이 든 술을 마시고 목숨을 희생했다고 한다.[21] 반면, 다른 기록에서는 오고타이가 알코올 중독자인 톨루이에게 약물을 투여한 샤먼들의 도움을 받아 그의 죽음을 조작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패멀라 카일 크로슬리에 따르면, 오고타이 사후 원나라 시대 초상화는 그를 다부진 체격에 붉은 수염과 갈색 눈을 가진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22] 쉬팅과 같은 동시대 중국 작가들은 대부분의 몽골인들이 수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오고타이의 수염이 특이하다고 기록했다.[23]
페르시아 연대기 작가 주바이니에 따르면, 오고타이 칸은 7세 이상의 오이라트 소녀 4,000명을 강간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이 소녀들은 오고타이 칸의 하렘에 보내지거나 몽골 제국 전역의 대상 숙소에서 매춘부로 일하도록 보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조치는 오고타이 칸의 누이 체체이겐이 사망한 후, 이전에 그녀가 통치했던 오이라트와 그 영토를 오고타이 칸의 통제하에 두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앤 F. 브로드브리지는 이 "악명 높은 오이라트 소녀 집단 강간 의혹"을 오고타이 칸이 삼촌 템게 오치긴의 승인 없이 그의 영토에서 소녀들을 징발한 사건과 연결 짓는다. 그러나 브로드브리지는 "모든 증거가 은폐되었기 때문에 이는 추측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24] 《원사》나 《몽골비사》는 오고타이 칸이 "좌익"과 "삼촌 오치긴의 영지"에서 여성들을 강제로 징발했다고 언급하지만 강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몽골비사》에서 오고타이 칸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나의 두 번째 잘못은, 원칙 없는 여자의 말을 듣고 삼촌 오치긴의 영지에서 소녀들을 데려온 것은 분명 실수였다"고 후회하는 발언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드 라체빌츠는 네 가지 선행과 네 가지 실수를 나열한 이 단락 전체가 후대의 평가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25]
강간을 주장하는 유일한 기록은 주바이니(1226-1283)가 1252년에 저술한 《타리크-이 자항구샤이》의 제32장이다.[26] 이 장에서 주바이니는 오고타이 칸을 칭찬하며 그의 "자비, 용서, 정의, 관대함"을 보여주는 50개의 상세한 일화를 제시한 후, 그의 "폭력, 가혹함, 분노, 위압감"을 보여주는 단 하나의 일화로 강간 사건을 제시하며 장을 마무리한다. 부족의 이름은 주바이니의 두 개의 필사본에서 불분명하지만, D 필사본과 라시드 알 딘은 이를 오이라트라고 언급한다. 브로드브리지와 드 라체빌츠는 이러한 오이라트와의 동일시가 사실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24][25]
6. 관련 작품
참조
[1]
서적
Secret history of the Mongols
[2]
서적
Imperial Chinese Military History
[3]
서적
The History of the Mongol Conquests
[4]
서적
Magill's Guide to Military History: Jap-Pel
[5]
서적
The encyclopedia of military history
[6]
서적
The Mongol Empire
[7]
문서
Mongol Empire: Chormaquan and the Mongol Conquest of the Middle East
[8]
서적
Genghis Khan
[9]
서적
Mongol hiigeed Eurasiin diplomat shashtir
[10]
웹사이트
Deep ditches and well-built walls: a reappraisal of the Mongol withdrawal from Europe in 1242
https://prism.ucalga[...]
2012
[11]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ume 6, Alien Regimes and Border States
[12]
서적
Islamic culture
Islamic Culture Board
[13]
서적
Culture and Conquest in Mongol Eurasia
[14]
논문
The role of the ortoq in the Mongol Empire in forming business partnerships
[15]
서적
The Mongols
[16]
서적
Chinese History
Asiapac Editorial
[17]
서적
Medieval Islamic Civilization
[18]
간행물
Mongolia Society – Occasional Papers
[19]
서적
The Mongols
[20]
서적
The Secret history of the Mongols
[21]
서적
The Uralic and Altaic Series
[22]
서적
Hammer and Anvil: Nomad Rulers at the Forge of the Modern World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2019-02-28
[23]
논문
A New Kind of Northerner: Initial Song Perceptions of the Mongols
https://www.jstor.or[...]
2012
[24]
서적
Women and the Making of the Mongol Empi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8
[25]
서적
The Secret History of the Mongols, A Mongolian Chronicle of the Thirteenth Century, Translated with a Historical and Philological Commentary, Volume One
Brill's Inner Asian Library
[26]
서적
The History of the World Conqueror by Ala-ad-din Ata-Malik JUVAINI, Translated from the text of Mirza Muhammad Qazvini
Harvard University Press
1958
[27]
서적
The Rise and Fall of the Second Largest Empire in History: How Genghis Khan's Mongols Almost Conquered the World
https://books.google[...]
Fair Winds Press
2010-02-01
[28]
웹사이트
History of Yuan
http://chinesenotes.[...]
[29]
서적
The successors of Genghis Khan
Columbia University Press
1971
[30]
문서
His son, Shiremün was appointed heir by Ögedei.
[31]
문서
during the campaign in Song China
[32]
논문
元太宗收继元太祖后妃考——以乞里吉忽帖尼皇后与阔里桀担皇后为中心
2020-06-25
[33]
문서
The first Buddhist Mongol prince
[34]
문서
He is one of the 3 noble princes who participated in the European expedition
[35]
문서
History of the New Yuan Dynasty
[36]
문서
Brother of Borte
[37]
서적
《新元史‧卷四‧本紀第四‧太宗》
[38]
서적
元史
[39]
문서
カダアン・オグルの生母
[40]
문서
メリクの生母
[41]
서적
元史
[42]
서적
集史
[43]
서적
八思巴字蒙古語文獻匯編
[44]
서적
The Story of the Mongols Whom We Call the Tartars
Branden Publishing Company
1996
[45]
저널
Ethnonyms and etymology: The case of Oyrat and beyond
https://www.academia[...]
2010-11
[46]
서적
The Secret History of the Mongols, Volume 3 (Supplement): A Mongolian Epic Chronicle of the Thir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브릴 출판사
2013
[47]
서적
元史
[48]
서적
元史
[49]
서적
Kublai Khan
Bantam Press
2007
[50]
서적
구육(정종)과 그의 시대
[51]
서적
구육(정종)과 그의 시대
[52]
백과사전
고려 왕실과 원나라
[53]
서적
The secret history of the mongol queens : how the daughters of Genghis Khan rescued his empire
2011
[54]
뉴스
把少女當成性奴──窩闊台打擊「成吉思汗的女兒們」的殘忍手段
https://www.thenewsl[...]
The News Lens
2018-02-27
[55]
서적
Inner Eurasia from Prehistory to the Mongol Empire
Blackwell
1998
[56]
서적
Genghis Khan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Crown
2004
[57]
서적
Women and the Making of the Mongol Empi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8
[58]
서적
Women and the Making of the Mongol Empi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8
[59]
서적
Women and the Making of the Mongol Empi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