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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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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포츠와 정치는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국가의 위상 제고, 이념 전파, 정치적 항의 등 다양한 방식으로 상호 작용한다. 국제 스포츠 대회는 국가의 이미지를 높이고 국민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데 활용되며, 냉전 시대에는 체제 경쟁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또한, 스포츠는 정치적 차별과 배제의 수단으로 작용하거나, 스포츠 외교를 통해 국가 간 관계 개선에 기여하기도 한다. 주요 종목별 사례를 통해 스포츠와 정치의 복잡한 관계를 살펴볼 수 있으며, 올림픽과 같은 국제적 행사에서 정치적 사건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국가별 사례를 통해서도 스포츠가 정치적, 외교적 수단으로 활용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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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와 정치
스포츠와 정치
주요 내용스포츠를 이용하여 외교적, 사회적, 정치적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

2. 스포츠와 정치의 상호작용

스포츠와 정치는 역사적으로 서로 깊은 영향을 주고받으며 복잡한 관계를 맺어왔다. IOC는 헌장을 통해 '어떠한 국가 또는 개인에 대해서도 인종, 종교, 정치상의 이유로 차별하지 않는다'는 무차별의 원칙을 내세우며 스포츠의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이 원칙이 시험받는 경우가 많았으며, 정치적 이유로 특정 국가의 참가가 제한되거나, 분단된 국가가 스포츠를 통해 화합을 모색하는 등 다양한 양상이 나타났다. 이처럼 스포츠는 이상적으로는 정치와 분리되어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국가 위상 제고, 이념 대립, 외교 관계 등 다양한 정치적 맥락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2. 1. 스포츠의 정치적 이용

스포츠는 때때로 국가 지도자나 특정 정치 세력에 의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IOC와 같은 국제 스포츠 기구는 정치적 중립과 무차별 원칙을 내세우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스포츠가 국가 위상 제고, 이념 전파, 정치적 항의 등 다양한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는 사례가 빈번하게 나타났다.

2. 1. 1. 국가 위상 제고

IOC는 헌장을 통해 '어떠한 국가 또는 개인에 대해서도 인종, 종교, 정치상의 이유로서 차별대우하지 않는다'는 무차별의 원칙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스포츠가 정치적 목적에 따라 이용되거나 갈등의 장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에서 인도네시아타이완이스라엘 선수단의 참가를 거부하자 IOC는 '정치적 차별'을 이유로 인도네시아의 가맹권을 정지시켰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인종차별 정책으로 인해 1964년 도쿄 올림픽 참가가 불허되었다. 반면, 서독동독은 1956년 동계 올림픽부터 1964년 도쿄 올림픽까지 단일팀을 구성하여 참가하며 이 원칙을 지키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했다. 이들은 서독 국기 중앙에 올림픽 마크를 넣고, 국가(國歌) 대신 베토벤의 제9교향곡 합창 테마를 사용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정권이 아리아 민족의 우월성을 선전하고 나치즘 이데올로기를 확산하는 데 스포츠를 노골적으로 이용한 대표적인 사례이다.[50] 당시 독일은 올림픽을 통해 독일인의 정신력을 강화하고 청년들의 단결심을 고취시키려 했으며, 스포츠를 "약자, 유대인, 기타 부적격자를 걸러내는 방법"으로 간주했다.[51] 이 때문에 많은 유대인과 집시가 스포츠 행사 참여에서 배제되었다. 독일은 메달 집계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수 제시 오언스가 육상 4개 종목(100m, 200m, 4x100m 계주, 멀리뛰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나치의 인종 우월주의 선전을 무색하게 만들었다.[52] 히틀러가 오언스의 승리를 인정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는 대회 첫날 독일 우승자들과만 악수한 뒤 경기장을 떠났고, 이후 올림픽 위원회 측의 권고에 따라 모든 메달리스트를 축하하거나 아무도 축하하지 않는 방식 중 후자를 택했다고 알려져 있다.[53] 오언스는 나중에 아디다스를 창립한 아디 다슬러를 만나 새 신발을 제공받기도 했다.[54]

1936년 하계 올림픽 멀리뛰기에서 우승한 후 시상대에 오른 제시 오언스. 왼쪽부터 시상대, 타지마 나오토, 오언스, 루츠 롱.


1962년 아시안 게임에서 중화 타이베이와 이스라엘의 참가를 거부하여 IOC로부터 출전 정지를 당했던 인도네시아는 이에 반발하여 1964년 도쿄 올림픽 참가를 거부했다. 당시 대통령 수카르노는 "국제 올림픽 게임은 노골적으로 제국주의적 도구임이 증명되었다… 스포츠는 정치와 관련이 있다"고 선언하며, 중화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 당시 우호 관계에 있던 국가들을 초청하여 GANEFO(신흥국 경기 대회)라는 별도의 국제 대회를 창설했다. GANEFO는 이후 수하르토 집권 후 와해되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는 미국 내 시민권 운동이 한창이던 시기에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수들이 인종 차별 문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올림픽 무대를 활용했다.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는 메달 시상대에서 검은 장갑을 끼고 주먹을 들어 올리는 유명한 '블랙 파워' 경례를 하여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같은 대회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체조 선수 베라 차슬라프스카는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과 편파 판정에 항의하는 의미로, 소련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방식으로 저항의 뜻을 표했다. 그녀는 귀국 후 국민적 영웅으로 환영받았지만, 친소련 정부로부터 불이익을 당했다.

1972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뮌헨 학살이 발생했다.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 검은 9월단이 올림픽 선수촌에 침입하여 이스라엘 올림픽 선수단을 공격했고, 이 사건으로 이스라엘 선수 11명이 사망했다.

1980년 레이크플래시드 동계 올림픽에서는 냉전 시대의 정치적 긴장감이 스포츠 경기에 투영되었다. 미국 남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이 준결승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소련 대표팀을 꺾은 사건은 단순한 스포츠 경기를 넘어선 정치적 의미를 가졌다. 당시 소련팀은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며 최근 NHL 올스타팀까지 꺾은 강팀이었으나,[56] 평균 연령 21세의 대학 선수 중심 아마추어 팀이었던 미국팀에게 패배했다.[57] 이 승리는 미국 국민들에게 큰 자긍심을 안겨주었고, 반대로 소련에게는 충격과 당혹감을 주었다.

국제 정치 상황은 올림픽 보이콧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하여 미국을 비롯한 많은 서방 국가들이 1980년 모스크바 하계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 하계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북한 역시 스포츠를 국가 위상 제고와 체제 선전의 도구로 활용해왔다. 1966년 FIFA 월드컵에서 북한 축구 대표팀이 강호 이탈리아를 꺾은 사건은 북한 정권에게 중요한 선전 소재가 되었다.[101] 김정일은 스포츠에서의 성공이 국가의 힘을 보여주고 이념을 선전하며 국제적 명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고 보았다.[102] 북한은 이 승리를 국내외적으로 체제의 우수성을 과시하는 데 이용했다. 이후 북한 축구는 2010년 FIFA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는 등 간헐적인 성과를 보였으나, 2006년 FIFA 월드컵 예선전에서는 이란과의 경기 후 평양에서 발생한 관중 난동으로 인해 태국에서 무관중 홈 경기를 치르는 징계를 받기도 했다.[103]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와 개최는 남북 관계 및 북한의 국제적 고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81년 서울이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되자, 북한은 남한의 국제적 위상 강화와 심화되는 남북 간 경제 격차가 부각될 것을 우려했다.[104] 이에 북한은 IOC에 올림픽을 서울과 평양에서 분산 개최할 것을 요구하며 협상을 시도했다. IOC는 일부 종목의 분산 개최 등 양보안을 제시했으나 북한은 이를 거부했고,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는 북한이 국제 사회에 긍정적으로 참여할 기회를 스스로 잃어버린 결과로 평가된다.[105]

당시 북한의 주요 우방국이었던 중국소련이 서울 올림픽 참가를 결정하면서 북한의 외교적 고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쿠바피델 카스트로만이 북한의 입장을 지지했을 뿐, 북한 경제에 필수적이었던 중국 및 소련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105] 이는 1990년대 북한이 대외 원조 감소와 경제난 속에서 더욱 고립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는 남북한의 발전 격차를 더욱 명확하게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협상 실패 후, 북한은 올림픽 개최를 방해하고 국제 사회에 불안감을 조성하기 위해 테러 행위를 저질렀다. 1987년, 북한 공작원에 의해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이 발생하여 탑승객 115명 전원이 사망했다.[104] 그러나 이 사건은 북한의 의도와 달리 국제 사회로부터 강력한 비난을 받으며 북한의 이미지만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2. 1. 2. 이념 전파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가 인정한 스포츠인 체스는 정치적 문제와 깊은 연관을 맺어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는 스포츠가 특정 이념을 전파하거나 정치적 선전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당시 세계 체스 챔피언이었던 알렉산더 알레킨[21]나치 독일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특히 냉전 시대에는 스포츠가 첨예한 이념 대결의 장이 되었다. 1972년 세계 체스 선수권 대회에서는 미국의 바비 피셔가 소련의 보리스 스파스키를 꺾었는데, 이는 단순한 개인 간의 승부를 넘어 미국이 소련의 오랜 체스 지배를 잠시나마 무너뜨린 상징적인 사건으로 여겨졌다.[22] 또한 1978년 세계 체스 선수권 대회에서는 소련의 아나톨리 카르포프가 당시 소련에서 망명빅토르 코르치노이를 상대로 힘겹게 승리하며 체제 간의 긴장감을 드러냈다.

이처럼 정치적 갈등은 국제 스포츠 행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는데, 여러 국가들이 이스라엘에서 개최된 1976년 체스 올림피아드 참가를 보이콧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2. 1. 3. 정치적 항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헌장은 제1장 기본원칙에서 '어떠한 국가 또는 개인에 대해서도 인종, 종교, 정치상의 이유로서 차별대우하지는 않는다'는 무차별의 원칙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원칙이 항상 지켜진 것은 아니다. 1962년 자카르타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안 게임에서 주최국 인도네시아는 정치적인 이유로 타이완이스라엘 선수단의 참가를 거부했고, 이로 인해 IOC로부터 가맹권 정지 처분을 받았다. 또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인종차별 정책 때문에 1964년 도쿄 올림픽 참가를 허락받지 못했다.

스포츠는 특정 국가의 정책이나 국제적 사건에 대한 정치적 항의의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대회 보이콧이 있다.

때로는 스포츠 행사가 특정 정치 체제를 선전하거나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목적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북한의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인 아리랑 축제가 그 예이다. 2000년대 초부터 시작된 이 행사는 세계에서 가장 큰 경기장인 5·1 경기장에서 열리며, 약 1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행사 참여는 의무적이며, 수만 명의 학생과 주민들이 동원되어 체조, 무용, 카드 섹션 등을 통해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고 통일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전달한다.[107] 공연 중에는 "외세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더 분단되어야 합니까?"와 같은 구호가 외쳐지기도 한다.[107] 아리랑 축제는 2014년과 2015년에는 취소된 바 있다.

2. 2. 정치의 스포츠 개입

IOC는 헌장을 통해 올림픽 대회 운영의 기본 원칙을 명시하고 있다. 특히 제1장의 기본원칙에서는 '어떠한 국가 또는 개인에 대해서도 인종, 종교, 정치상의 이유로서 차별대우하지는 않는다'는 무차별의 원칙을 강조한다. 이는 스포츠 영역에서 정치적 개입을 배제하고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중요한 기준이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이 원칙이 시험받는 경우가 발생했다. 예를 들어, 특정 국가가 정치적인 이유로 다른 국가 선수단의 참가를 거부하거나, 특정 국가의 인종차별 정책이 문제가 되어 국제 대회 참가가 제한되는 사례가 있었다. 이러한 경우 IOC는 정치적 또는 인종적 차별을 이유로 해당 국가의 가맹 자격을 정지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도 한다. 반면,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국가들이 올림픽 정신 아래 '통일 팀'을 구성하여 참가하는 등, 스포츠를 통해 정치적 장벽을 넘어서려는 노력이 나타나기도 했다.

2. 2. 1. 차별과 배제

IOC는 헌장 제1장의 기본원칙에서 '올림픽대회는 4년마다 개최되고', 이 대회에서는 '어떠한 국가 또는 개인에 대해서도 인종, 종교, 정치상의 이유로서 차별대우하지는 않는다'는 무차별의 원칙을 명시하고 있다. 이 원칙이 지켜진 긍정적인 사례로는 1956년 코르티나담페초 동계 올림픽부터 1964년 도쿄 올림픽까지 '통일 팀'으로 참가한 서독동독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서독 국기 중앙에 올림픽 마크를 넣고, 국가 대신 베토벤의 '제9교향곡' 합창 테마를 사용했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로 특정 국가나 집단이 스포츠 대회에서 차별받거나 배제되는 사례는 꾸준히 발생해왔다.

인권 문제 역시 스포츠계의 주요 쟁점으로 부상하며 보이콧이나 대회 취소로 이어지기도 한다.

  • 2011년 바레인 봉기 당시, 국제 인권 단체 Avaaz.org는 바레인의 상황을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에 비유하며 스포츠 보이콧을 촉구했다.[36] 다른 인권 시위대 역시 남아공 스포츠 보이콧 사례를 들며 2011년 바레인 그랑프리 보이콧을 주장했다.[37][38] 결국 안전 문제로 바레인 인터내셔널 서킷에서 열릴 예정이던 GP2 아시아 시리즈 2라운드(2월 17일~19일)와 F1 바레인 그랑프리(3월 13일)가 취소되었다.[39][40] 마찬가지로, 2012년 바레인 그랑프리는 버니 에클스톤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행사를 앞두고 매주 시위와 폭력을 겪었다.

  • 2021년 포뮬러 원(F1)이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그랑프리를 개최한다고 발표하자, 많은 인권 단체들은 이것이 사우디 아라비아의 인권 문제를 희석시키려는 '스포츠워싱' 사례라고 비판했다. 국제앰네스티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인권 문제를 지적했고,[41] 휴먼 라이츠 워치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인권 침해로부터 관심을 돌리려는 냉소적인 전략의 일부"라고 비난했다. F1 측은 인권 존중 약속을 파트너와 개최국에 명확히 했으며, F1이 개최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위해 노력한다고 밝혔다.[41] 45개 인권 단체는 루이스 해밀턴에게 예멘 내전 개입, 여성 인권 운동가 구금, 언론인 자말 카쇼기 살해 등을 이유로 그랑프리 보이콧을 촉구하기도 했다.[42] 해밀턴 자신도 사우디에서의 경기에 불편함을 표했다.[43] 2022년 사우디 아라비아 그랑프리 이후, 사우디 정부는 인권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해밀턴을 초청하기도 했다.[44]

  • 2022년 사우디 아라비아 그랑프리는 사우디 주도의 예멘 전쟁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 예선 연습 주행 중 예멘후티 반군이 서킷에서 약 약 16.09km 떨어진 사우디 아람코 석유 저장 시설에 미사일 공격을 가해 폭발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대회의 안전성에 대한 심각한 우려가 제기되었으나, 논의 끝에 경기는 강행되었다.[45] 또한 대회 2주 전 사우디 정권이 81명을 대량 처형하는 등 지속적인 인권 탄압 문제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46]


스포츠계 내부에서도 차별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지만, 이 역시 논란을 낳기도 한다. 2020년 흑인 생명 운동이 확산되자 F1은 인종차별 반대와 다양성 증진을 위한 "We Race As One" 캠페인을 시작했다. 일부 선수들은 연대의 의미로 경기 전 무릎을 꿇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47] 그러나 바레인, 사우디 아라비아, 카타르, 러시아, 중국, 아제르바이잔 등 인권 기록이 좋지 않은 국가에서 여전히 경기를 개최하는 것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48] 2022년 F1이 무릎 꿇기 제스처를 공식적으로 폐지하기로 결정하자 일부 선수들은 이에 반발하기도 했다.[49]

2. 2. 2. 스포츠 외교

스포츠는 때때로 국가 간의 외교 관계를 개선하거나 긴장을 완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IOC는 헌장 제1장의 기본원칙에서 '어떠한 국가 또는 개인에 대해서도 인종, 종교, 정치상의 이유로서 차별대우하지 않는다'는 무차별의 원칙을 명시하고 있다. 이 원칙에 따라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에서 타이완이스라엘 선수단을 거부한 인도네시아는 IOC 가맹권이 정지되었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인종차별 정책으로 인해 1964년 도쿄 올림픽 참가가 불허되었다.[59] 반면, 1956년 코르티나담페초 동계 올림픽부터 1964년 도쿄 올림픽까지 서독동독이 국기 중앙에 올림픽 마크를 넣고, 국가 대신 베토벤제9교향곡 합창 테마를 사용하며 '통일 팀'으로 참가한 것은 이 원칙을 지킨 긍정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가장 대표적인 스포츠 외교 사례 중 하나는 핑퐁 외교이다. 1970년대 냉전 시기, 미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관계 개선을 모색하고 있었다. 1971년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 기간 중 중국 탁구팀이 미국 선수단을 자국으로 초청하면서 교류가 시작되었고, 1971년 4월 10일 미국 탁구 선수단과 기자들이 1949년 이후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한 미국 대표단이 되었다.[59] 이 사건은 양국 관계에 훈풍을 불어넣었고, 결국 1972년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역사적인 중국 방문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2007년에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 도서관 및 박물관에서 1971년 당시 선수들이 참여하는 핑퐁 외교 기념행사가 열리기도 했다.[60]

스포츠는 때로 국가 간의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제약을 받기도 한다. 2008년 이스라엘의 테니스 선수들(샤하르 페어, 치피 옵질러, 앤디 람, 요니 에를리히)은 카타르 도하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열리는 ATP 및 WTA 토너먼트 참가를 계획했으나, 이들 국가는 이스라엘 여권 소지자의 입국을 금지하고 있었다.[61] 특히 2009년 가자 전쟁 이후 샤하르 페어는 두바이 입국 비자를 거부당했는데, 주최 측은 지역 정세의 민감성을 이유로 들었다. 이에 WTA 최고 경영자 래리 스콧은 두바이 측에 제재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62]

반대로 스포츠를 통해 갈등 관계에 있는 국가 간의 화해와 평화를 모색하는 움직임도 있다. 2010년 US 오픈 테니스 대회에서 인도의 로한 보파나와 파키스탄의 아이삼울하크 쿠레시는 남자 복식조를 이루어 결승까지 진출하며 큰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스스로를 "인도-파크 익스프레스"라 칭하고 "전쟁을 멈추고 테니스를 시작하자"라는 문구가 적힌 옷을 입는 등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노력했다. 결승전에는 양국의 유엔 대사를 포함한 많은 팬들이 함께 앉아 응원했으며, 이는 양국 관계 개선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기대를 모았다. 인도의 스포츠 장관 마노하르 싱 길은 "보파나와 쿠레시가 함께 뛸 수 있다면, 왜 인도와 파키스탄은 함께할 수 없는가?"라고 질문하며 스포츠가 가진 평화의 가능성을 강조했다. 쿠레시는 결승전 후 연설에서 파키스탄 국민에 대한 오해를 풀고 싶다는 바람과 함께 종교의 자유를 존중하는 미국의 가치를 언급하며 그라운드 제로 모스크 건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도 했다.[63][64]

남한북한 역시 스포츠를 통해 관계 개선을 시도해왔다. 2000 시드니 올림픽, 2004 아테네 올림픽, 2006 토리노 동계 올림픽 개회식에서는 남북 선수단이 한반도기를 들고 공동으로 입장하여 전 세계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2000년대에는 남북 간 스포츠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져 '통일 경기'가 개최되기도 했다.[107] 그러나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선수 선발 원칙에 대한 이견으로 공동 입장이 무산되었고, 이후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스포츠 교류 역시 영향을 받았다.[107]

3. 주요 종목별 사례

다양한 종목의 스포츠 선수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사례는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복싱 선수 출신으로는 매니 파퀴아오가 2010년 필리핀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고,[108] 비탈리 클리치코는 2012년 우크라이나 민주 개혁 동맹 대표로 우크라이나 국회에 진출했다.[109]

체스계에서는 전 아르메니아 대통령 세르지 사르키샨이 아르메니아 체스 연맹 회장을 겸임했으며,[110] 올림픽 챔피언 유리크 바르다냔은 사르키샨의 고문을 지냈다.[111] 전 세계 체스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는 고국 러시아에서 야권 운동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캐나다에서는 아이스하키 선수 레드 켈리가 토론토 메이플 리프스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국회의원을 겸임했다.

인도에서는 특히 크리켓 선수들의 정계 진출이 두드러진다. 나브조트 싱 시두, 모하메드 아즈하루딘, 키르티 아자드 등이 국회의원으로 활동했으며, 사친 텐둘카르는 현역 선수 시절인 2012년 라지야 사바 의원으로 임명되었다.[112] 올림픽 사격 은메달리스트 라지야바르단 싱 라토르는 BJP에 입당했다.[113] 또한 전 축구 선수 아베르타노 푸르타도는 고아 주의회 의원(MLA)으로, 전 하키 선수 파르가트 싱은 시로마니 아칼리 달 소속으로 MLA에 당선된 사례가 있다.

케냐에서는 2012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자인 마라톤 선수 웨슬리 코리르가 2013년 케냐 국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114]

아르헨티나에서는 전 오프쇼어 파워보트 레이서 다니엘 시올리가 부통령(2003-2007)을 거쳐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주지사를 역임했으며, 윈드서퍼이자 올림픽 메달리스트인 카를로스 에스피놀라는 고향 코리엔테스의 시장을 지냈다.

파키스탄에서는 월드컵 우승 크리켓 팀 주장이었던 임란 칸이 정당 파키스탄 정의 운동(PTI)을 창당하여 정치 활동을 펼쳤다.

포뮬러 원(F1) 드라이버 중에서는 일본야마모토 사콘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일본 중의원 의원을 지냈고, 아르헨티나의 카를로스 레우테만은 산타페 주지사정의당 소속 상원의원을 역임했다.

3. 1. 축구

유럽 축구는 역사적으로 각 유럽 국가에 고유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차이점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유럽 전체를 하나로 묶는 유대감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3] 또한 유럽의 축구 경기장은 피난처이자 테러 공격 및 정치적 봉기의 장소 역할을 해왔다. 브누아에 따르면,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유럽 축구는 큰 변화를 겪었다.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축구의 인기가 급상승했고, 이는 축구의 정치화로 이어졌다. 따라서 브누아는 축구가 이 기간 동안 그리고 이후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요 특징을 갖추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1) 유럽 국가의 외교 정책이 축구에서 분명히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국제 관계의 행위자; 2) 국가를 드러내기 위해 축구를 사용한 정치 선전의 원천; 3) 구성원을 진정시키는 도구.[4] 결과적으로 이러한 모든 요인들이 축구와 그 경기장이 정치적 표현의 수단, 최근 집단 기억의 기반, 그리고 고도로 정치화된 게임으로 등장하는 데 기여했다.

많은 클럽이 고정된 정치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일부 클럽은 뚜렷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YouGov 통계에 따르면, 잉글랜드 클럽 선덜랜드 AFC의 지지자들은 주로 정치적 좌파 성향을 보이며,[5] 경기 중 종종 "붉은 깃발"을 부른다.[6] 선덜랜드 팬들은 일반적으로 좌파로 여겨지지만,[5] 훌리건 조직 시번 캐주얼스는 극우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7]

가장 크고 오래된 축구 라이벌리 중 하나는 스코틀랜드 클럽 셀틱레인저스올드 펌 라이벌리이다. 두 클럽 간의 경쟁은 단순한 스포츠 라이벌리를 넘어선 뿌리를 가지고 있다.[8] 이는 스코틀랜드만큼이나 북아일랜드와도 관련이 있으며, 이는 두 클럽의 깃발, 문화적 상징 및 문장에서 볼 수 있다.[9] 여기에는 때로는 종교 (가톨릭과 개신교), 북아일랜드 관련 정치 (로열리스트와 공화주의), 국가 정체성(영국 또는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인), 사회 이념 (보수주의와 사회주의)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복잡한 분쟁이 스며들어 있다.[10] 레인저스와 셀틱 지지자의 대다수는 종파주의에 관여하지 않지만, 소수의 행동이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경향이 있는 심각한 사건이 발생한다.[11][9] 올드 펌 라이벌리는 더비 데이의 많은 폭행을 부추겼으며, 과거에는 올드 펌 경기 직후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망 사건도 있었다.[12] 글래스고의 종파적 활동을 감시하는 활동가 단체는 올드 펌 주말에 폭력적인 공격이 평소 수준보다 9배 증가한다고 보고했다.[13] 가정 폭력의 증가 또한 올드 펌 경기에 기인할 수 있다.[14]

3. 2. 야구

미국 대통령 캘빈 쿨리지(왼쪽)와 워싱턴 세너터스 투수 월터 존슨(오른쪽)이 악수하고 있다.


미국에서 야구는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이 야구 경기에 참여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으며, 이는 정치와 야구의 상징적인 연결을 보여준다.

스포츠 경기의 결과가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미국 국립 과학원 회보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선거 전에 홈 팀이 승리하면 현직 후보의 득표율이 1.5% 증가할 수 있으며, 패배는 반대의 효과를 가져온다. 이 연구는 1946년부터 2008년까지의 NCAA 풋볼 경기를 분석했지만, 다른 연구에서는 야구농구 같은 다른 스포츠에서도 유사한 결과가 확인되었다. 연구자들은 승리가 유권자들에게 사회에 대한 긍정적인 감정을 유발하여 현직 후보에게 투표하게 만들고, 패배는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하여 도전자에게 투표하게 만든다고 결론지었다.[95]

야구계 인사들의 정치 참여 또한 활발하다. 야구 선수 노조 위원장이었던 돈 페르는 조지 W. 부시, 앨 고어, 빌 브래들리, 존 매케인 등 여러 대통령 예비 선거 후보에게 기부했다. 신시내티 레즈의 구단주였던 칼 린드너는 공화당에 140만달러, 미국 민주당에 100만달러를 기부했다.[97] 또한, 전 MLB 투수였던 짐 버닝상원의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한편, 미국 국무부는 2002년부터 스포츠 교환 프로그램인 ''스포츠 유나이티드''를 운영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7세에서 17세 사이의 어린이들 간의 교류를 촉진하고, 외국 학생들을 초청하여 미국 프로 선수들과 관계를 맺고 미국 문화를 경험하게 한다. 또한 미국 선수들이 해외로 나가 다른 문화를 배우고 현지 청소년들이 겪는 어려움을 이해하도록 장려한다. ''스포츠 유나이티드''는 약 70개국에서 15개 종목에 걸쳐 진행되었다.[99] 이는 스포츠를 통한 국제 관계 개선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3. 3. 농구

(빈 문자열)

3. 4. 복싱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막스 슈멜링은 나치당에 의해 독일의 운명과 아리아인 우월성을 나타내는 영웅적인 상징으로 여겨졌다. 복싱 경기는 종종 정치적으로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 민족주의적 상징과 이미지를 동반했다. 슈멜링은 1936년 조 루이스에게 프로 경력 첫 패배를 안겼는데, 이 패배에 대한 미국 내 반응은 상당했다. 랭스턴 휴즈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7번가를 걸어가다가 어른들이 아이처럼 울고, 여성들이 머리를 감싸 쥐고 길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조가 KO를 당했다는 소식이 그날 밤 전국에 퍼지자 사람들이 울었습니다."[15]

반면, 슈멜링은 독일에 돌아가 큰 환영을 받았다. 히틀러는 슈멜링의 아내에게 꽃과 함께 "우리 독일 최고의 복서인 당신 남편의 멋진 승리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슈멜링은 이에 대해 "이 순간 나는 독일에, 특히 총통께 모든 동포들의 생각이 이 시합에서 나와 함께 했다는 것을 보고해야 합니다. 총통과 그의 충실한 국민들이 나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생각은 내가 이 싸움에서 성공할 수 있는 힘을 주었고, 독일의 색깔을 위해 이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용기와 인내를 주었습니다."라고 화답했다.[16]

이후 두 사람의 재대결이 뉴욕에서 열리게 되었다. 경기를 앞두고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루이스에게 "조, 우리는 독일을 이길 당신 같은 근육이 필요합니다."라며 지지를 표했다. 한편, 슈멜링이 머물던 호텔 앞에서는 미국 시위대가 시위를 벌였는데, 이는 나치당 선전 담당자가 흑인은 슈멜링을 이길 수 없으며, 슈멜링이 승리할 경우 상금으로 독일 탱크를 건조할 것이라고 발언했기 때문이었다.[17] 재대결에서 루이스는 1라운드 KO승을 거두었고,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반나치 여론의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루이스는 훗날 경기 전의 압박감에 대해 "나는 슈멜링을 확실하게 이겨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에게는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고, 온 나라가 나를 믿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16] 전쟁이 끝난 후 두 선수는 다시 만나 개인적인 우정을 쌓았다.[18][19]

수십 년 후, 카시우스 클레이로 태어났으나 후에 무하마드 알리로 더 잘 알려진 복서는 린든 B. 존슨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시민권 운동과 더불어 베트남 전쟁 징집을 징병 거부하며 큰 파장을 일으켰다.

챔피언이 된 후, 클레이는 이슬람교로 개종했으며 이는 그의 복싱 경력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또한 노예였던 조상에게 주어진 이름이라며 '카시우스 클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무하마드 알리'라는 새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67년 4월 28일, 알리는 꾸란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종교적 이유를 들어 베트남 전쟁 참전을 거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베트콩과 싸울 이유가 없어... 베트콩은 나를 흑인이라고 부른 적이 없어."

이러한 그의 행동은 그를 시민권 운동뿐만 아니라 반 베트남 전쟁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그러나 알리는 징병 기피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아 5년 징역형과 1만달러의 벌금형을 선고받았고, 챔피언 자격도 박탈당했다. 그는 1970년 소송을 통해 법정 투쟁을 벌인 끝에야 복서 자격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후 알리는 1974년 '정글의 포효'라 불리는 경기에서 조지 포먼을, 1975년 '마닐라의 스릴러'에서는 조 프레이저를 꺾으며 역사적인 복싱 경기를 이어갔다.[20]

3. 5. 체스

체스국제 올림픽 위원회가 인정한 스포츠로서, 정치적 문제와 연관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세계 챔피언 알렉산더 알레킨[21]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나치 독일과 협력한 바 있다.

냉전 시대의 첨예한 정치 상황은 체스 경기에서도 드러났다. 특히 미국의 바비 피셔와 소련의 보리스 스파스키가 맞붙은 1972년 세계 체스 선수권 대회는 큰 주목을 받았다. 이 대회에서 피셔가 스파스키를 꺾으며, 오랫동안 이어져 온 소련의 체스계 지배에 제동을 걸었다.[22] 또한, 이스라엘에서 개최된 1976년 체스 올림피아드는 여러 국가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보이콧하기도 했다. 이후 소련의 아나톨리 카르포프가 당시 망명 상태였던 빅토르 코르치노이를 근소한 차이로 이긴 1978년 세계 체스 선수권 대회 역시 냉전의 긴장감을 반영하는 사례로 꼽힌다.

3. 6. 크리켓

1969년, 메릴본 크리켓 클럽(Marylebone Cricket Club)은 남아프리카 공화국(South Africa)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정권을 의식하여, 남아공 태생의 유색인 선수 바실 디올리베이라(Basil D'Oliveira)를 잉글랜드 크리켓 팀의 남아공 투어 명단에서 제외했다. 디올리베이라는 자국 대표팀에서 뛸 수 없어 잉글랜드 대표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이전 해 디 애시스(The Ashes)에서의 활약으로 선발이 유력했으나 탈락했다.[23] 크리켓 팬들은 이를 인종차별 정권에 대한 굴복으로 여겼다. 이후 다른 선수의 사퇴로 디올리베이라가 결국 선발되자, 남아공 정부는 투어 자체를 취소하며 강하게 반발했다.[23]

크리켓은 인도(India)와 파키스탄(Pakistan) 간의 스포츠 외교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긴장이 고조되자, 1987년 파키스탄 대통령 지아 울 하크(Zia ul-Haq) 장군은 인도 자이푸르에서 열린 양국 간 테스트 경기에 참석하여 긴장 완화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15년간 중단되었던 양국 간의 크리켓 투어는 반세기 동안 이어진 적대감을 해소하려는 외교적 노력의 일환으로 2004년에 재개되었다. 이 시기 양국은 비자 규정을 완화하여 수천 명의 팬들이 국경을 넘어 경기를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24] 2005년에는 파키스탄의 페르베즈 무샤라프(Pervez Musharraf) 장군이 크리켓 경기 관람을 명목으로 인도를 방문했으나, 이는 곧 카슈미르 분쟁 해결을 촉구하는 정상회담의 성격을 띠었다.[25]

그러나 양국의 크리켓 교류에는 종종 종교적, 정치적 갈등이 표출되기도 했다. 카라치에서는 파키스탄 팬이 경기장에 난입해 인도 주장을 공격하거나 인도 선수들에게 돌을 던지는 사건이 있었고, 2000년에는 극우 힌두교도들이 파키스탄 팀의 방문에 항의하며 뉴델리의 크리켓 경기장을 훼손하기도 했다.[26] 카르길 분쟁 등 정치적 긴장이 고조될 때마다 양국 간 크리켓 교류를 중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1] 2011년, 26/11 뭄바이 테러 이후 악화되었던 양국 관계 속에서 2011년 크리켓 월드컵(2011 Cricket World Cup) 준결승 경기가 열렸고, 인도의 만모한 싱(Manmohan Singh) 총리와 파키스탄의 유수프 레자 길라니(Yousaf Raza Gillani) 총리가 함께 경기를 관람하며 관계 개선의 의지를 보였다. 경기 후, 양국 간 정기적인 시리즈 재개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영국에서는 보수당(Conservative party) 의원 노먼 테빗(Norman Tebbit)이 카리브해 및 남아시아 출신 이민자들이 영국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지 평가하기 위해, 그들이 출신 국가 팀보다 잉글랜드와 웨일스 크리켓 팀을 더 응원하는지 확인하는 이른바 '크리켓 테스트(cricket test)'를 제안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2008년, 잉글랜드 및 웨일스 크리켓 위원회(England and Wales Cricket Board)는 2008년 짐바브웨 대통령 선거와 관련된 정치적 상황에 대응하여 짐바브웨 크리켓 팀(Zimbabwe cricket team)의 2009년 잉글랜드 투어를 취소하고 양국 간 모든 크리켓 교류를 중단했다.[27] 영국의 잭 스트로(Jack Straw)와 테사 조웰(Tessa Jowell) 하원 의원은 국제 크리켓 평의회(International Cricket Council, ICC)에 짐바브웨의 국제 크리켓 대회 참가를 금지시켜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28]

중국양안 관계(Cross-Strait relations)를 염두에 두고 크리켓 외교를 활용했다. 2007년 크리켓 월드컵(2007 Cricket World Cup)을 앞두고 앤티가는 비비안 리처즈 경기장(Sir Vivian Richards Stadium) 건설을 위해 5500만달러의 보조금을 받았고, 자메이카는 새로운 그린필드 스타디움(Greenfield Stadium (Trelawny)) 건설을 위해 3000만달러를 받았다. 세인트루시아 또한 중국으로부터 크리켓 경기장과 축구 경기장을 받았다. 중국은 서인도 제도 크리켓 시설에 1.32억달러를 지출했는데, 이는 크리켓 보급을 위한 ICC의 10년 예산 7000만달러를 훨씬 웃도는 금액이다. 이러한 지원은 카리브해와 라틴 아메리카에 집중된 대만(Taiwan)의 수교국들을 자국 편으로 돌리기 위한 전략으로 해석되었으며, 실제로 그레나다도미니카가 대만과의 단교를 선언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또한 "대만을 인정하는 나머지 24개 국가 중 4개국이 카리브해에 있고, 이 중 2개국이 크리켓을 한다."는 점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그레나다에 기존에 있던 대만 지원 경기장이 허리케인으로 파괴되자 중국이 즉시 새 경기장을 건설해주기도 했다. 이에 대만은 그레나다를 상대로 대출금 반환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7년, 세인트루시아는 다시 중국과 단교하고 대만과의 관계를 복원했다.

고립된 대만 역시 월드컵을 계기로 외교적 입지 강화를 시도했다. 대만은 세인트키츠 네비스에 2100만달러를,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에 크리켓 경기장 건설을 위해 1200만달러를 기부했다. 중국의 공격적인 외교 정책은 결과적으로 카리브해 섬 지역에 경제적 혜택을 가져다주었으며, 일각에서는 중국이 대만 고립이라는 목표 이상으로 카리브해 지역에서 외교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29]

파키스탄 크리켓 팀 내에서는 종교적 색채가 강화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했다. 유명 선수였던 사이드 안와르(Saeed Anwar)가 개인적인 비극 이후 이슬람 근본주의(Islamic fundamentalism)에 심취한 것을 계기로 팀 내 이슬람화(Islamisation) 경향이 뚜렷해졌다는 평가가 있다.[30] 이는 유수프 유하나(Yousuf Youhana)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데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31] 2003년 크리켓 월드컵(2003 Cricket World Cup) 이후 선수들이 공개적으로 기도를 하거나 수염을 기르는 등 종교적 신념을 드러내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단, 소아이브 아크타르(Shoaib Akhtar)나 팀 내 유일한 힌두교도였던 다니쉬 카네리아(Danish Kaneria) 등은 예외로 간주되기도 했다).[32] 심지어 경기 후 인터뷰를 '비스밀라 우르 레흐만 라힘'과 같은 이슬람 관용구로 시작하는 경우도 있었다.[30] 2007년 ICC 월드 투웬티20 결승에서 라이벌 인도에게 패배한 후 당시 주장 소아이브 말리크(Shoaib Malik)가 "전 세계 무슬림들에게 사과한다"고 발언하여, 스포츠 경기에 종교적 의미를 과도하게 부여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해당 경기에서 무슬림인 인도 선수 이르판 파탄(Irfan Pathan)이 경기 최우수 선수(Man of the Match)로 선정되었다.[33] 이러한 팀 내 종교적 영향력 강화가 오히려 경기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지적과 함께, 파키스탄 사회 전반의 이슬람화 경향과 연결짓는 분석도 제기되었다.[34] 일각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지아 울 하크 장군의 군사 정부 시절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며, 젊은 세대의 관심이 국가 정체성이나 다원주의보다 초국가적인 이슬람 정체성이나 보수적 의례로 옮겨가는 현상과 관련이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35]

3. 7. 포뮬러 원 (F1)

바레인 봉기가 진행 중이던 시기, Avaaz.org는 바레인의 상황을 남아프리카 공화국아파르트헤이트에 비유하며 스포츠 보이콧을 촉구했다.[36] 다른 인권 운동가들 역시 2011년 바레인 그랑프리 보이콧을 요구하며 남아프리카 공화국 스포츠 보이콧 사례를 언급했다.[37][38] 결국 2011년 2월 17일, 바레인 인터내셔널 서킷에서 열릴 예정이던 GP2 아시아 시리즈 2라운드가 시위로 인한 안전 문제로 취소되었고,[39] 같은 해 3월 13일로 예정되었던 2011년 바레인 그랑프리 역시 같은 이유로 취소되었다.[40] 2012년 바레인 그랑프리 역시 대회를 앞두고 매주 시위와 폭력이 발생했지만, 당시 F1의 실권자였던 버니 에클스톤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며 대회를 강행했다.

2021년, 포뮬러 원(F1)은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그랑프리를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이 결정은 국제 앰네스티, 휴먼 라이츠 워치 등 다수의 인권 단체로부터 사우디 아라비아의 열악한 인권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 없이 국가 이미지를 세탁하려는 스포츠 워싱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휴먼 라이츠 워치는 F1 개최가 "사우디 아라비아의 인권 침해로부터 관심을 돌리려는 냉소적인 전략의 일부"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F1 측은 "모든 파트너 및 개최국에 인권 존중을 명확히 하고 있으며, F1이 개최되는 모든 곳에서 긍정적인 힘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명했다.[41] 2021년 2월, 45개 인권 단체는 루이스 해밀턴에게 예멘 내전 개입, 여성 인권 운동가 구금, 언론인 자말 카쇼기 살해 등을 이유로 사우디 아라비아 그랑프리 보이콧을 촉구했다.[42] 해밀턴 본인도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경주하는 것에 불편함을 표했다.[43] 2022년 경기 이후, 사우디 아라비아 정부는 여러 차례 자국을 비판한 해밀턴을 인권 문제 논의를 명분으로 초청하기도 했다.[44]

2022년 사우디 아라비아 그랑프리는 사우디가 주도하는 예멘 전쟁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예멘후티 반군이 연습 주행 세션 도중 서킷에서 약 약 16.09km 떨어진 아람코 석유 저장 시설에 미사일 공격을 가해 폭발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루이스 해밀턴을 비롯한 드라이버들은 대회의 안전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지만, 몇 시간의 논의 끝에 F1과 사우디 당국은 경기를 강행하기로 결정했다.[45] 미사일 공격 외에도 사우디 아라비아의 심각한 인권 침해 문제는 계속해서 논란이 되었다. 특히 대회 2주 전 81명을 집단 처형하는 등 권위주의 정권의 지속적인 인권 탄압은 국제적인 비판을 받았다.[46]

한편, 2020년 흑인 생명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자 F1은 '우리는 하나로 경주한다'(eng)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 캠페인은 지속 가능성, 다양성 및 포용성, 지역 사회 기여라는 세 가지 목표를 내세웠으며, 2020 시즌 동안 일부 드라이버들은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의미로 경기 전 무릎을 꿇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47] 하지만 이 캠페인은 팬들 사이에서 엇갈린 반응을 얻었다. 특히 바레인, 사우디 아라비아, 카타르, 러시아, 중국, 아제르바이잔 등 인권 기록이 좋지 않은 국가에서 여전히 경기를 개최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캠페인이 위선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48] F1은 2022년부터 경기 전 무릎 꿇기 퍼포먼스를 공식적으로 폐지하기로 결정했고, 이 결정은 일부 드라이버들의 비판을 받았다.[49]

3. 8. 탁구

1970년대 미국중화인민공화국의 관계 개선 정책의 일환으로 양국 간 탁구 선수 교류가 이루어졌는데, 이를 핑퐁 외교라고 부른다. 이 교류는 1972년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중국 방문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핑퐁 외교는 1971년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했던 중국 탁구팀이 미국 선수들을 중국으로 초청하면서 시작되었다. 중국 측은 미국 선수단의 여행 비용 전액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따라 1971년 4월 10일, 미국 탁구 선수들과 기자들로 구성된 일행이 중국을 방문했으며, 이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처음으로 중국 수도를 방문한 미국 공식 대표단이었다.[59]

이 역사적인 사건으로부터 36년이 지난 후, 리처드 닉슨 대통령 도서관 및 박물관에서는 3일간의 "핑퐁 외교"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에는 1971년 당시 교류에 참여했던 미국과 중국 팀의 일부 선수들이 참석하여 그 의미를 되새겼다.[60]

3. 9. 테니스

2008년, 이스라엘 프로 테니스 선수인 샤하르 페어, 치피 옵질러, 앤디 람, 요니 에를리히는 아랍 도시인 도하두바이에서 각각 ATP와 WTA 토너먼트에 출전할 예정이었으나, 해당 국가들은 이스라엘 여권 소지자의 입국을 금지하고 있었다.[61] 다음 해인 2009년, 샤하르 페어는 가자 전쟁 이후 두바이 입국 비자를 거부당했다. 대회 주최 측은 "스포츠를 정치화하고 싶지 않지만, 최근 지역의 사건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며, 참가 선수나 팬들을 소외시키거나 위험에 빠뜨릴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WTA 최고 경영자 래리 스콧은 두바이에 대한 제재 가능성을 언급하며 대응했다. 샤하르 페어는 이후 뉴질랜드에서 열린 토너먼트에서도 항의를 받기도 했다.[62]

2010년 US 오픈 테니스 토너먼트에서는 인도의 로한 보파나와 파키스탄의 아이삼울하크 쿠레시가 남자 복식 결승에 진출하며 양국의 정치 지도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결승전에서는 각국의 유엔 대사를 포함한 양국 지지자들이 함께 관중석에 앉아 응원하는 모습이 연출되었다. 파키스탄의 데이비스 컵 코치 라시드 말리크는 "그들의 성공은 양국 모두에게 큰 격려가 되었으며, 국민들에게 평화롭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인도의 스포츠 장관 마노하르 싱 길은 "보파나와 쿠레시가 함께 경기를 할 수 있다면, 왜 인도와 파키스탄은 함께할 수 없는가?"라고 질문하며 스포츠를 통한 화합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두 선수는 모나코에 본부를 둔 단체 ''평화와 스포츠''가 주최하는 캠페인에도 참여하여 "Stop War Start Tennis|전쟁을 멈추고 테니스를 시작하자eng"라는 슬로건이 적힌 스웨트셔츠를 입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Indo-Pak Express|인도-파크 익스프레스eng"라고 칭하며 활동했다. 이러한 협력은 양국 관계 개선의 상징적인 사례로 여겨졌다. 쿠레시는 "큰 무대에서 우리가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 전 세계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다. 나와 로한이 잘 지낼 수 있다면 인도인과 파키스탄인이 서로 잘 지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관중석에는 모두가 섞여 있다. 누가 파키스탄인이고 누가 인도인인지 알 수 없다. 그것이 스포츠의 아름다움이다. 우리 조합이 있기 전에는 어떤 스포츠에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의 목표를 위해 싸우는 것, 그 일원이 된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라고 말했다.[63]

US 오픈 결승전에서 패배한 후, 쿠레시는 관중들에게 파키스탄 국민에 대한 오해를 해소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모든 파키스탄인을 대신하여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내가 여기 올 때마다 파키스탄 국민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있다. 그들은 매우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이다. 우리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라고 말했다. 또한 논란이 되었던 "그라운드 제로 모스크" 문제에 대해 언급하며 "무슬림으로서, 미국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국가로 만드는 것은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이다. 만약 모스크가 건설된다면, 그것은 전 세계의 모든 무슬림 공동체에 대한 거대한 몸짓이 될 것이며, 정말 감사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결승전에는 인도와 파키스탄 팬들이 경기장을 가득 메웠고, 양국의 유엔 대사도 다시 한번 나란히 앉아 경기를 관람했다. 파키스탄 대사 압둘라 후세인 하룬은 "그들은 인도인과 파키스탄인이 함께할 때 우리가 불을 지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국민 대 국민의 관계에서 정치인들이 따라야 할 모범을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64]

4. 올림픽과 정치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는 헌장을 통해 인종, 종교, 정치적 이유로 인한 차별을 금지하는 무차별 원칙을 명시하고 있지만, 올림픽의 역사는 정치적 사건과 긴밀하게 얽혀 진행되어 왔다. 올림픽은 때로는 국가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도구로 사용되거나(1936년 베를린 올림픽), 냉전과 같은 이념 대립의 장이 되어 상호 보이콧 사태를 낳기도 했다(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또한, 선수들이 인권 문제나 정치적 상황에 대한 항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무대가 되기도 했으며(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비극적인 테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1972년 뮌헨 올림픽).

1962년 아시안 게임 당시 중화 타이베이이스라엘 선수단 입국 거부로 IOC로부터 출전 정지 징계를 받은 인도네시아는 이에 반발하여 1964년 도쿄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당시 수카르노 대통령은 "국제 올림픽 게임은 노골적으로 제국주의적 도구임이 증명되었다… 스포츠는 정치와 관련이 있다"고 선언하며, 중화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과 함께 독자적인 GANEFO(Games of the New Emerging Forces)를 창설하기도 했다.

한편, 2010년대에는 올림픽 정식 종목에서 레슬링이 제외될 위기에 처하자, 전통적인 정치적 라이벌 관계였던 이란, 러시아, 미국이 종목 유지를 위해 협력하는 이례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미국 뉴욕에서는 세 나라 선수들이 함께 레슬링 퇴출 반대 캠페인을 벌였다.[58]

4. 1. 올림픽의 정치적 성격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는 5장 60조로 구성된 헌장을 가지고 있으며, 이 중 제1장의 기본원칙은 올림픽의 중요한 정신을 담고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올림픽 대회는 4년마다 개최되며, '어떠한 국가 또는 개인에 대해서도 인종, 종교, 정치상의 이유로서 차별대우하지 않는다'는 무차별의 원칙을 명시하고 있다.

이 원칙은 실제 사례를 통해 적용되었다. 1962년 자카르타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안 게임에서 주최국 인도네시아타이완이스라엘 선수단의 참가를 거부하자, IOC는 이를 '정치적 차별'로 간주하여 인도네시아의 가맹권을 정지시켰다. 또한,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인종차별 정책을 이유로 참가 자격을 박탈당했다.

반면, 무차별과 화합의 원칙을 실현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서독동독은 정치적 분단 상황에도 불구하고 1956년 코르티나담페초 동계 올림픽부터 1964년 도쿄 올림픽까지 '단일팀'으로 참가했다. 이들은 서독 국기 중앙에 올림픽 마크를 그려 넣은 깃발을 사용하고, 국가 대신 베토벤의 '제9교향곡'(합창)을 사용하며 정치적 갈등을 넘어서려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IOC가 인정한 스포츠인 체스 역시 정치적 문제와 깊은 연관을 맺어왔다. 세계 챔피언이었던 알렉산더 알레킨[21]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협력한 행적으로 비판받았다. 냉전 시대의 정치적 긴장은 체스 경기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미국의 바비 피셔가 소련의 보리스 스파스키를 꺾고 소련의 오랜 체스 독주를 깬 1972년 세계 체스 선수권 대회[22]와, 소련의 아나톨리 카르포프가 당시 소련에서 망명빅토르 코르치노이를 상대로 힘겹게 승리한 1978년 세계 체스 선수권 대회는 단순한 스포츠 경기를 넘어선 정치적 대결의 장이었다. 또한, 이스라엘에서 개최된 1976년 체스 올림피아드는 여러 국가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보이콧하는 사태를 겪기도 했다.

4. 2. 올림픽과 이념 대립

IOC는 헌장 제1장의 기본원칙에서 '어떠한 국가 또는 개인에 대해서도 인종, 종교, 정치상의 이유로서 차별대우하지 않는다'는 무차별의 원칙을 명시하고 있다. 실제로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에서 중화 타이베이이스라엘 선수단 입국을 거부한 인도네시아는 IOC로부터 가맹권 정지를 당했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아파르트헤이트 정책으로 인해 1964년 도쿄 올림픽 참가가 금지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은 종종 정치적, 이념적 대립의 장이 되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정권이 아리아 민족주의의 우월성을 선전하고 독일인의 정신 단련과 단결심 고취를 위한 도구로 활용한 대표적인 사례이다.[50] 나치는 스포츠를 "약자, 유대인, 기타 부적격자를 걸러내는 방법"으로 여겼고,[51] 많은 유대인과 로마니가 대회 참가를 금지당했다. 독일은 종합 메달 1위를 차지했지만, 아프리카계를 열등하다고 묘사했던 나치의 선전은 미국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육상 선수 제시 오언스100미터, 200미터, 4 × 100m 계주, 멀리뛰기에서 4개의 금메달을 획득하며 무색해졌다.[52] 히틀러가 오언스의 승리를 인정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히틀러는 대회 첫날 독일 우승자들과만 악수한 뒤 경기장을 떠났고, 이후 IOC 위원의 권고에 따라 모든 메달리스트 또는 누구와도 악수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설이 있다.[53] 제시 오언스 본인은 히틀러가 자신에게 손을 흔들었고 자신도 답례했다고 회고했다.[55]

한편, 이념 대립 속에서도 협력의 사례가 있었다. 1956년 코르티나담페초 동계 올림픽부터 1964년 도쿄 올림픽까지 서독동독은 '독일 단일팀'으로 참가했다. 이들은 서독 국기 중앙에 올림픽 오륜 마크를 넣은 깃발을 사용하고, 국가(國歌) 대신 베토벤의 '제9교향곡' 합창 테마를 사용했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인도네시아1962년 아시안 게임 당시 중화 타이베이이스라엘 선수단 입국 거부로 IOC로부터 받은 출전 정지 징계에 반발하여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 함께 올림픽 보이콧을 결정했다. 당시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대통령은 "국제 올림픽 게임은 노골적으로 제국주의적 도구임이 증명되었다… 스포츠는 정치와 관련이 있다"고 선언하며, 중화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과 함께 독자적인 GANEFO(Games of the New Emerging Forces)를 창설했다. GANEFO는 수하르토 집권 이후 와해되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는 미국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수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가 메달 시상대에서 검은 장갑을 낀 주먹을 들어 올리는 '블랙 파워' 경례를 통해 자국 내 인권 문제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촉구했다. 같은 대회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체조 선수 베라 차슬라프스카는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과 편파 판정에 항의하는 의미로 소련 국가가 연주될 때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그녀는 귀국 후 영웅으로 환영받았지만, 친소련 정부에 의해 활동이 제약되었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는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 검은 9월단이 선수촌에 침입하여 이스라엘 선수단을 인질로 잡고 결국 11명을 살해하는 참사가 발생하여 올림픽이 정치적 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냉전 시대에 올림픽은 미국소련 간 체제 경쟁의 장(場)이 되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 소련은 국가 주도로 선수를 육성하며 명목상으로만 다른 직업을 갖게 하는 방식으로 아마추어 규정을 교묘히 회피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는 학생이거나 진정한 아마추어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던 서방 국가들에 비해 소련에게 큰 이점을 제공했다는 지적이 있다.[82][83] 실제로 소련은 1968년 이후 1984년 동계 올림픽에서 동독에 이어 2위를 한 것을 제외하고는 소련의 해체 직전까지 하계 올림픽 메달 순위에서 거의 1위를 독점했다. 아마추어 규정은 1980년대 후반에 완화되기 시작하여 1990년대에 이르러 사실상 폐지되었다.[84][85]

1980년 레이크플래시드 동계 올림픽 아이스하키 준결승에서 대학 선수 위주로 구성된 미국 팀이 당시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던 소련 팀을 꺾은 사건은 '빙판 위의 기적'으로 불리며 단순한 스포츠 경기를 넘어 냉전 시대 미국의 국가적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56][57]

같은 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하여 미국을 비롯한 많은 서방 국가들이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4년 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는 동구권 국가들이 대규모 보이콧을 단행하여 올림픽이 반쪽짜리 대회로 치러졌다.

2010년대에는 올림픽 정식 종목에서 레슬링이 제외될 위기에 처하자, 전통적인 정치적 라이벌 관계였던 이란, 러시아, 미국이 종목 유지를 위해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미국 뉴욕에서는 세 나라 선수들이 함께 레슬링 퇴출 반대 캠페인을 벌였다.[58]

4. 3. 올림픽과 대한민국

IOC는 올림픽 헌장을 통해 '어떠한 국가 또는 개인에 대해서도 인종, 종교, 정치상의 이유로서 차별대우하지 않는다'는 무차별 원칙을 명시하고 있다. 과거 인도네시아가 정치적 이유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인종차별 문제로 올림픽 참가가 제한된 사례가 있다. 반면, 서독동독이 1956년부터 1964년까지 단일팀을 구성한 것은 이 원칙에 부합하는 긍정적 사례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은 여전히 정치적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특히 대한민국과 관련된 남북 관계는 올림픽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쳐왔다.

1988 서울 올림픽 유치 및 개최는 북한의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1981년 대한민국의 서울이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자, 북한은 초기에는 큰 문제로 여기지 않았으나 점차 남한의 올림픽 개최가 남북 간 심화되는 경제적 격차를 부각시킬 것을 우려하게 되었다.[104] 이에 북한은 IOC를 설득하여 올림픽을 서울과 평양에 분산 개최하려 시도했다. IOC는 협상 과정에서 일부 양보안을 제시했으나, 북한은 이를 거부하며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105]

당시 북한의 주요 동맹국은 중국, 소련, 쿠바였다.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쿠바는 북한을 지지했지만, 소련과 중국은 서울 올림픽 참가를 결정했다. 이 결정은 북한 경제 시스템에 필수적이었던 양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105] 북한은 역사적으로 대외 원조 의존도가 높았으며, 특히 소련과 중국의 원조가 중요했기에 관계 악화는 큰 타격이었다. 이는 1990년대 북한의 고립 심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서울 올림픽의 성공은 남북 간 격차를 더욱 명확히 드러냈다.

협상 실패 후, 북한은 올림픽을 방해하고 국제 사회에 불안감을 조성할 목적으로 테러 행위를 감행했다.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을 일으켜 한국 민간 항공기를 폭파하고 탑승객 115명을 희생시켰다.[104] 그러나 이 사건은 북한의 의도와 달리 국제적 고립만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냉전 종식 이후 남북 관계 개선의 분위기 속에서, 북한과 대한민국은 2000 시드니 올림픽, 2004 아테네 올림픽, 2006 토리노 올림픽 개막식에 공동으로 입장하며 화해 분위기를 조성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공동 입장을 추진했으나 선수단 구성 원칙에 대한 이견으로 무산되었다. 2008년 이후 남북 간 긴장은 다시 고조되는 경향을 보였다.[107] 2000년대에는 남북 간 스포츠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이는 '통일 경기'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107]

5. 국가별 사례

노르웨이는 1956년 헝가리 혁명에 대한 소련의 개입을 이유로, 소련이 초청된 1957년 밴디 세계 선수권 대회 참가를 거부했다. 또한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항의하며 1969년 밴디 세계 선수권 대회 개최권을 스웨덴에 넘기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전년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을 이유로, 러시아가 주최한 2015년 밴디 세계 선수권 대회 참가를 거부했다.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크림반도를 자국 영토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5. 1. 대한민국

2000년대에는 많은 남북 스포츠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이는 통일 경기라고 불렸다.[107] 북한과 대한민국은 2000 시드니 올림픽, 2004 아테네 올림픽, 그리고 2006 토리노 동계 올림픽 개회식에서 한반도기를 들고 함께 입장하며 스포츠를 통한 화합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선수 선발 원칙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공동 입장이 무산되었고, 이후 남북 간 긴장이 다시 고조되는 모습을 보였다.[107]

5.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은 국제 사회와의 관계, 특히 대한민국과의 관계 형성에 스포츠를 활용해 왔다.

1966년 FIFA 월드컵에서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은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이탈리아를 꺾는 이변을 일으켰다.[101] 당시 지도자 김정일은 성공적인 스포츠가 국가의 힘을 키우고, 이념을 선전하며, 국가에 큰 영예를 가져다주고 국제적 명성을 높인다고 믿었다.[102] 이 승리는 북한 정권이 체제의 우수성을 내외에 과시하는 중요한 선전 도구로 활용되었다. 이후 북한 축구는 큰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2010년 FIFA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기도 했다. 한편, 2006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는 이란과의 경기 후 평양에서 관중 소요 사태가 발생하여, 다음 홈 경기를 태국에서 무관중으로 치르는 징계를 받기도 했다.[103]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와 개최는 북한에게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1981년 서울이 개최지로 선정되자, 북한은 처음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으나 점차 남북 간의 심화되는 경제 격차가 올림픽을 통해 부각될 것을 우려하기 시작했다.[104] 이에 북한은 IOC에 올림픽을 서울과 평양에서 공동 개최할 것을 요구하며 협상을 시도했다. IOC는 일부 종목의 평양 개최 등 양보안을 제시했으나 북한은 이를 거부했다. 결과적으로 북한은 올림픽을 통해 국제 사회에 긍정적 이미지를 보여줄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105]

당시 북한의 주요 동맹국이었던 중국소련은 북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 올림픽 참가를 결정했다. 쿠바만이 피델 카스트로의 주도로 북한을 지지하며 불참했다. 주요 동맹국의 올림픽 참가는 북한의 외교적 고립을 심화시켰고, 특히 대외 원조에 크게 의존하던 북한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105] 이는 1990년대 북한의 경제난과 고립 심화의 한 원인이 되었다.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는 남북한의 격차를 더욱 명확하게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협상이 결렬되자 북한은 올림픽 개최를 방해하고 국제 사회에 불안감을 조성하기 위해 테러 행위를 감행했다. 1987년 11월 29일, 북한 공작원에 의해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이 발생하여 탑승객 115명 전원이 사망했다.[104] 그러나 이 사건은 북한의 의도와 달리 국제적인 비난을 초래하며 북한의 이미지를 더욱 실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서울 올림픽에 대한 맞대응으로 북한은 1989년 평양에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했다. 역대 최대 규모인 177개국이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행사는 올림픽의 대안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북한이 기대했던 국제적 관심을 끄는 데 실패했다.[104] 또한, 행사에 소요된 막대한 비용(약 40억달러)은 북한의 재정난을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북한 지도부는 스포츠가 국제 관계뿐 아니라 내부 통치에도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북한의 통치 이념인 주체사상은 스포츠를 통해 강화되었다.[102] 정권은 스포츠 지원을 통해 주민들의 건강을 증진시키고, 이를 통해 혁명 과업 수행에 더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학교 교육 과정에 체육 활동이 의무화되었으며, 주요 스포츠 경기는 체제 선전 목적으로 북한 전역에 방송되었다. 이처럼 스포츠는 북한에서 집권 세력의 권력을 유지하고 주민을 동원하는 중요한 수단인 동시에, 제한적이나마 국제 사회와 교류하는 통로 역할을 해왔다.

5. 3. 미국



NASCAR 팬들은 일반적으로 미국의 미디어에서 "거의 백인, 보수적인 레이싱 팬"이자 "백인, 중년, 노동자 계층의 남부 남성"으로 묘사되며, 21세기 초 선거 운동에서 주요 공략 대상이 되었다.[90] 조 기브스는 NASCAR 팀 소유주로서 2008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연설하기도 했다.[90] NASCAR 관련 인사들의 정치 자금 기부금 중 약 90%가 공화당 후보에게 전달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텍사스 주지사 릭 페리(공화당)는 2010년 선거 운동을 위해 2000년 NASCAR 윈스턴 컵 시리즈 챔피언 바비 라본테의 경주차를 후원했다.[91] 라본테는 "rickperry.org" 로고를 부착하는 대가로 22.5만달러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92] 2년 뒤에는 릭 산토럼(공화당)이 토니 레인스의 경주차를 후원했다.[93] 2000년 당시 공화당 예비 선거 후보였던 루디 줄리아니도 데이토나 인터내셔널 스피드웨이에 모습을 드러냈다.[94]

선거 연구에 따르면, 스포츠 경기 결과가 선거 전체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국 국립 과학원 회보에 발표된 연구는 선거 직전 홈 팀이 승리할 경우 현직 후보의 득표율이 1.5% 증가할 수 있으며, 패배는 반대의 효과를 가져온다고 분석했다. 이 연구는 1946년부터 2008년까지의 NCAA 미식축구 경기를 대상으로 했다. 또한, 관중 동원력이 높은 대학일수록 결과에 미치는 영향이 커져 최대 3%까지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예상 밖의 결과(이변)가 발생했을 때 그 효과는 더욱 증폭된다고 밝혔다. 다른 연구들 역시 야구농구 같은 다른 스포츠에서도 유사한 결과를 확인했다. 연구진은 승리가 유권자들에게 사회에 대한 긍정적인 감정을 유발하여 현직 후보에게 투표하게 만들고, 패배는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하여 도전자에게 투표하게 만든다고 결론지었다. 특정 경기 결과가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향방을 결정했을 수도 있다는 추측까지 제기되었다.[95]

2010년 미국 선거에서는 최소 5명의 전직 운동선수가 공화당 후보로 정치에 도전했다.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출신 크리스 더들리는 오리건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으며, 전 필라델피아 이글스 선수 존 러니언은 뉴저지주 제3선거구에서 현직 민주당 의원 존 애들러에게 도전하도록 설득되기도 했다. 필라델피아 76ers와 댈러스 매버릭스에서 활동했던 숀 브래들리는 유타주 의회 의석에, 클리블랜드 브라운스 출신 키스 피미언은 버지니아주 하원 의석에, 전 워싱턴 레드스킨스 선수 클린트 디디에는 워싱턴주 상원 공화당 후보 지명에 도전했다.[96] 이들 중 존 러니언만이 선거에서 승리했다.

야구 선수 노조(MLBPA) 대표였던 돈 페르는 조지 W. 부시(공화당), 앨 고어(민주당), 빌 브래들리(민주당), 존 매케인(공화당) 등 여러 대통령 예비 선거 후보에게 기부했다. 신시내티 레즈 구단주였던 칼 린드너는 공화당에 140만달러, 민주당에 100만달러를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97]

MLB 투수 짐 버닝(공화당)은 상원의원을 역임했으며, NFL 쿼터백 히스 슐러(민주당), 시애틀 시호크스 리시버 스티브 라겐트(공화당), 오클라호마 수너스 쿼터백 J.C. 와츠(공화당) 등도 하원의원을 지냈다.

전 버팔로 빌스 쿼터백 잭 켐프(공화당)는 9선 하원의원을 지내며 하원 공화당 총회 의장을 맡았고, 조지 H. W. 부시 행정부에서 주택도시개발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1996년에는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다.

뉴욕 닉스에서 농구 선수로 활동했던 빌 브래들리(민주당)는 뉴저지주를 대표하여 미국 상원에서 3선을 역임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칼 루이스뉴저지주에서 주 상원의원 출마를 시도했으나, 후보 자격 문제로 좌절되었다.[98]

2002년, 미국 국무부는 7세에서 17세 사이 청소년들의 교류를 장려하기 위해 '스포츠 유나이티드' (SportsUnited)라는 스포츠 교류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은 외국의 학생들이 미국을 방문하여 또래 미국 학생들 및 프로 선수들과 관계를 맺고 미국 문화를 접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한 미국 선수들이 해외로 나가 다른 문화를 배우고 해당 국가 청소년들이 겪는 어려움을 이해하도록 장려한다. '스포츠 유나이티드'는 약 70개국에서 15개 종목에 걸쳐 진행되었다.[99]

2016년 샌프란시스코 49ers의 쿼터백 콜린 캐퍼닉은 경찰의 폭력에 항의하는 의미로 국가 연주 중 앉아 있었으며, 이는 미국 전역에서 국가 연주 중 시위에 대한 광범위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100]

5. 4. 중국

1950년대 중국 국가체육운동위원회는 허룽의 지휘 아래 소련동유럽 국가들과 스포츠 교류를 시작했다.[65] 문화 대혁명 초기에 중단되었던 스포츠 경쟁은 1970년 중국 국가대표팀이 다시 경쟁을 시작하며 재개되었다.[65] 1966년 이후 중국 팀이 참가한 첫 주요 국제 행사는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였는데, 이는 미국 선수 글렌 코웬과 중국 선수 좡쩌둥 간의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미국과의 핑퐁 외교로 이어졌다.[65][66] 이 사건은 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으로 이어지는 길을 열었으며, 냉랭했던 중국-미국 관계 개선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1970년대 초, 국가체육운동위원회는 스포츠 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임무를 맡았고,[65] 1974년에는 주로 제3세계 국가들을 대상으로 80개국, 3,200명의 선수로 구성된 172개 그룹 규모의 교류를 진행했다.[65]

중국은 양안 관계를 고려하여 크리켓을 활용한 외교 활동에도 참여했다. 2007년 크리켓 월드컵 준비 기간 동안 앤티가는 비비안 리처즈 경기장 건설을 위해 5500만달러의 보조금을 받았고, 자메이카는 새로운 그린필드 스타디움 건설을 위해 3000만달러를 지원받았다. 세인트루시아 역시 중국으로부터 크리켓 및 축구 경기장을 지원받았다. 중국은 수년간 서인도 제도의 크리켓 시설 건설에 총 1.32억달러를 지출했는데, 이는 국제 크리켓 평의회의 10년 예산 7000만달러를 훨씬 웃도는 규모이다. 이러한 대규모 지원의 배경에는,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는 국가 대부분이 카리브해와 라틴 아메리카에 위치한다는 지정학적 요인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있다. 실제로 중국의 외교적 노력은 그레나다도미니카가 대만 인정을 철회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2007년, 세인트루시아는 중국과 단교하고 다시 대만과의 관계를 복원했다. 중국의 이러한 움직임은 대만을 국제 사회에서 고립시키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해석되며, 일부 분석가들은 중국이 전략적 목표 달성에 필요한 것 이상의 자금을 지출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29]

2019년에는 중국 내 스포츠의 정치화가 국제적인 문제로 비화되었다. 2019-2020년 홍콩 시위에 대해 NBA의 휴스턴 로키츠 단장 대릴 모리를 비롯한 일부 인사들이 시위대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하자, 중국 정부와 일부 민족주의자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중국 관영 매체 CCTV는 모리가 발언을 철회할 때까지 중국 내 NBA 경기 중계를 중단했으며, 중국농구협회는 휴스턴 로키츠와의 관계를 중단했다.[67][68] 브루클린 네츠의 구단주 조셉 차이는 NBA에 모리의 해고를 요구하는 로비를 벌이기도 했다.[69]

같은 해 12월, 독일 축구선수 메수트 외질이 중국 내 위구르족의 처우를 비판하는 글을 온라인에 게시하자,[70] 중국 관영 방송사 CCTV와 PP 스포츠는 다음 날 예정되었던 아스널맨체스터 시티의 프리미어리그 경기 중계를 취소했다. 또한 외질의 모습은 중국 내 인터넷 서비스와 게임 ''eFootball PES 2020''의 중국 버전에서 삭제되었다.[71] 이는 중국의 인권 문제에 대한 외부 비판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강경한 태도를 보여주는 사례로 지적된다.

2020년 9월,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는 중국 스트리밍 서비스 PPTV와의 6.5억달러 규모 중계 계약을 중단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PPTV의 중계권료 지불 실패였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영국 정부가 정치적 박해를 피해 망명하는 홍콩인들에게 영국 해외 시민 여권 발급을 확대한 것에 대한 중국 측의 보복 조치일 가능성을 제기했다.[68]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2022 베이징 동계 올림픽 반대 시위


2022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을 앞두고도 여러 논란이 발생했다. 중국 공안부가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진 스팸어플 허위 정보 네트워크가 2021년 12월부터 올림픽 관련 메시지를 집중적으로 유포하기 시작했으며,[72] 중국 정부가 펑솨이 스캔들과 IOC의 연루 의혹에 대한 자국 입장을 홍보하기 위해 수십 개의 가짜 트위터 계정을 동원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73] 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 중 2020-2022년 중국-인도 국경 분쟁에 참전했던 중국 군인이 포함되자 인접국 인도가 강력히 반발하기도 했다.[74] 또한 신장 지역의 인권 문제 등을 이유로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등 여러 국가가 외교적 보이콧을 선언했다. 개막식에서는 중국의 56개 민족을 대표하는 공연자들이 각 민족의 전통 의상을 입고 등장했는데, 이 중 조선족 대표가 ''한복''을 입은 모습이 대한민국 내에서 문화적 전유라는 비판을 받으며 논란이 되었다.[75] 이는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과 동북공정 등 역사·문화 왜곡 논란과 맞물려 양국 간의 민감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5. 5. 남아프리카 공화국

아파르트헤이트 시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대한 스포츠 보이콧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사회를 개방하고 국제적인 고립에서 벗어나도록 압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1964년 하계 올림픽 참가가 금지되었으며, 많은 국제 스포츠 기구들이 남아프리카 공화국 관련 단체의 회원 자격을 박탈하거나 정지시켰다. 이러한 국제적인 아파르트헤이트 스포츠 보이콧은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세계 여론의 문제의식을 높이고, 수많은 사람들을 이 혐오스러운 시스템에 맞서 행동하도록 이끄는 강력한 수단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보이콧은 일부 경우 실제 정책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백인 중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탁구 협회에 대항하여 설립된 남아프리카 공화국 탁구 협회(SATTB)는 국제 탁구 연맹으로부터 기존 협회를 대체하는 인정을 받았다. SATTB 팀은 1957년 스톡홀름에서 열린 세계 선수권 대회에 참가할 자격을 얻었으나,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는 팀 구성원들의 여권 발급을 즉시 거부했다. 당시 정부는 흑인 선수가 국제 대회에 참가하려면 반드시 백인 스포츠 단체를 거쳐야 한다는 규정을 내세웠다.

1980년에 시작된 유엔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의 스포츠 교류 등록" 제도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과의 스포츠 교류 내역과 남아프리카 공화국 내 스포츠 행사에 참여한 선수 명단을 기록하는 것으로,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하의 스포츠계와의 협력을 억제하는 효과적인 수단임이 증명되었다.[76][77]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대부분의 국제 스포츠 기구에서도 퇴출되었다. 특히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는 1988년 6월 21일, 아파르트헤이트 스포츠의 완전한 고립을 목표로 "스포츠 내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선언문을 채택하기까지 했다.[78][79]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이후,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1995년 럭비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우승을 차지한 것은 국제 스포츠계로 복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26] 또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열린 2010년 FIFA 월드컵 역시 인종 차별 극복이라는 과제와 관련하여 비슷한 논의를 불러일으켰으며,[80] 이는 특히 유진 테레블랑쉬의 사망 이후 더욱 주목받았다.[81]

5. 6. 소련

소련 올림픽 팀은 아마추어 규정을 교묘하게 회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모든 소련 선수들은 명목상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전업으로 훈련에 매진했다. 이는 학생이거나 진정한 아마추어였던 미국 등 서방 국가 선수들에 비해 소련에게 상당한 이점을 제공했다는 평가가 많다.[82][83] 실제로 소련은 1968년 이후 올림픽 메달 순위에서 거의 항상 1위를 차지했으며, 소련의 해체 전까지 1984년 동계 올림픽에서 같은 동구권 국가인 동독에 이어 2위를 한 것이 유일한 예외였다. 아마추어 규정은 1980년대 후반에 완화되기 시작하여 1990년대에 이르러 거의 폐지되었다.[84][85]

소련은 스포츠 분야에서 도핑 문제로 국제적인 비판을 받기도 했다. 영국의 언론인 앤드루 제닝스는 한 KGB 대령의 증언을 인용하여, KGB 요원들이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의 도핑 방지 담당관인 척하며 도핑 테스트 과정을 방해했고, 이를 통해 소련 선수들이 적발을 피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87][86] 특히 1980년 하계 올림픽과 관련하여 1989년 호주의 한 연구는 "모스크바 올림픽 메달리스트 중, 특히 금메달리스트 중 약물을 복용하지 않은 선수는 거의 없으며, 대개 여러 종류의 약물을 복용했다. 모스크바 올림픽은 화학자들의 올림픽이라고 불리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라고 지적했다.[87]

2016년에 공개된 문서를 통해, 소련이 1984년 하계 올림픽을 대비하여 육상 종목에서 국가 차원의 도핑 시스템을 계획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문서는 소련의 올림픽 보이콧 결정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기존의 스테로이드 프로그램을 상세히 기술하고 추가적인 개선 방안을 제안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88] 이 문서는 소련 육상 연맹 회장에게 전달되었으며, 체육 문화 연구소의 세르게이 포르투갈로프 박사가 작성했다. 포르투갈로프는 이후 2016년 하계 올림픽을 앞두고 러시아의 도핑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지목되었다.[88]

소련은 올림픽 개회식의 기수(旗手, flag bearer) 선발에도 특별한 기준을 적용했다. 기수는 매력적이고 신체적으로 강하며 뛰어난 운동선수의 표본으로 여겨져야 했다. 또한, 개회식에서 멜빵 없이 한 손으로 깃발을 들고 행진해야 했는데, 1960년대에는 깃발 무게가 16kg에 달했고 갑작스러운 바람이 불면 부담이 커져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 때문에 하계 올림픽 개회식의 소련 기수는 주로 다음 날 경기가 없는 헤비급 역도 선수나 레슬링 선수 중에서 선발되었다.[89]

소련 당국은 기수가 해당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것으로 기대했다. 이로 인해 1952년과 1956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기수로 선발된 야코프 쿠첸코와 알렉세이 메드베데프가 정작 본선 경기에는 출전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당국이 이들이 금메달을 딸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두 선수 모두 세계 정상급 헤비급 역도 선수였으며, 쿠첸코는 1950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2위를 했고 메드베데프는 1956년과 1957년에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경력이 있었다.[89]

한편, 스포츠는 냉전 시대 정치적 갈등의 장이 되기도 했다. 노르웨이는 1956년 헝가리 혁명에 대한 소련의 개입을 이유로 소련이 초청된 1957년 밴디 세계 선수권 대회 참가를 거부했다. 또한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항의하며 1969년 밴디 세계 선수권 대회 개최권을 스웨덴에 넘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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