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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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중 관계는 고대부터 시작되어, 삼국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조선은 명나라와 청나라에 사대 관계를 유지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중국의 독립 운동을 지원받았다. 1948년 대한민국은 중화민국을 승인했으나, 한국 전쟁으로 인해 중화인민공화국과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다가 1992년 수교했다. 이후 경제 교류가 확대되었지만, THAAD 배치 문제 등으로 갈등을 겪기도 했다. 최근에는 북한과의 관계가 한중 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양국은 경제적 협력과 함께 정치적 현안에 대한 입장을 조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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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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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삼국 시대 이전
조선사 시작부터 중조(中朝, 중국과 조선) 사이에는 깊은 관계가 있었다. 70만 년 전,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1] 처음으로 조선에 통일적인 세력을 형성한 것은 신을 믿는 부족과 곰을 숭상하는 부족의 두 부족이었다고 하며, 이들이 연합하여 단군을 받들어 단군조선을 건국했다고 한다.[2] 그러나 단군이라는 왕이 실존했다거나 단군이 세웠다는 왕국단군조선이 존재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고, 단군이 실존 인물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연구자들은 말한다.[3]
주의 무왕이 기자를 조선후(朝鮮侯)에 봉하고, 기자가 은의 유민을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기자조선을 건국했다. 기원전 3세기 말, 부여는 현재의 지린성 창춘시를 중심으로 랴오닝성, 헤이룽장성 일대를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부여는 서쪽으로 기원전 3세기 말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는 오환과, 그 이후인 기원전 1세기부터 5세기까지는 선비와 접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한반도 남서부에 있던 마한의 동쪽에 터를 잡고 진한 사람들과 더불어 섞여 살았다.[127]
기원전 194년 연의 장군이었던 위만이 기자조선을 멸망시키고 위만조선을 세웠으나,[4] 한나라에 멸망당하고(기원전 108년) 한사군(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이 설치된다.[4] 기원전 128년 전한이 창해군을 설치한다.[4] 진번군과 임둔군은 기원전 82년에 폐지되었고,[4] 기원전 75년 현도군을 서쪽으로 옮겨,[4] 한반도에는 평양 부근의 낙랑군만 남았으나 평양 사람들 반발이 심하여 평양의 민(民)들을 수장으로 세우기도 하였다. 기원전 37년 고구려가 성립한다.[4] 고구려는 한사군을 멸망시킨다.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 정권으로 볼 것인지, 조선의 역사에 포함시킬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다(고구려#역사 논쟁:고구려의 역사 귀속을 둘러싼 문제).
2. 1. 고조선과 한나라
70만 년 전,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1] 처음으로 조선에 통일적인 세력을 형성한 것은 신을 믿는 부족과 곰을 숭상하는 부족의 두 부족이었다고 하며, 이들이 연합하여 단군을 받들어 단군조선을 건국했다고 한다.[2] 그러나 단군이라는 왕이 실존했다거나 단군이 세웠다는 왕국단군조선이 존재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고, 단군이 실존 인물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연구자들은 말한다.[3]주의 무왕이 기자를 조선후(朝鮮侯)에 봉하고, 기자가 은의 유민을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기자조선을 건국했다. 기원전 3세기 말, 부여는 현재의 지린성 창춘시를 중심으로 랴오닝성, 헤이룽장성 일대를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부여는 서쪽으로 기원전 3세기 말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는 오환과, 그 이후인 기원전 1세기부터 5세기까지는 선비와 접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한반도 남서부에 있던 마한의 동쪽에 터를 잡고 진한 사람들과 더불어 섞여 살았다.[127]
기원전 194년 연의 장군이었던 위만이 기자조선을 멸망시키고 위만조선을 세웠으나,[4] 한나라에 멸망당하고(기원전 108년) 한사군(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이 설치된다.[4] 기원전 128년 전한이 창해군을 설치한다.[4] 진번군과 임둔군은 기원전 82년에 폐지되었고,[4] 기원전 75년 현도군을 서쪽으로 옮겨,[4] 한반도에는 평양 부근의 낙랑군만 남았으나 평양 사람들 반발이 심하여 평양의 민(民)들을 수장으로 세우기도 하였다. 기원전 37년 고구려가 성립한다.[4] 고구려는 한사군을 멸망시킨다.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 정권으로 볼 것인지, 조선의 역사에 포함시킬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다(고구려#역사 논쟁:고구려의 역사 귀속을 둘러싼 문제).
2. 2. 삼한 시대
조선사 시작부터 중조(中朝, 중국과 조선) 사이에는 깊은 관계가 있었다. 70만 년 전,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1]。 처음으로 조선에 통일적인 세력을 형성한 것은 신을 믿는 부족과 곰을 숭상하는 부족의 두 부족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양자가 연합하여 단군을 받들어 단군조선을 건국했다고 한다[2]。 단군이라는 영광의 왕이 실존했다거나 단군이 세웠다고 하는 왕국단군조선이 존재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고, 단군이 실존 인물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연구자들은 말한다[3]。주의 무왕이 기자를 조선후(朝鮮侯)에 봉하고, 기자가 은의 유민을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건국한 것이 기자조선이다. 연의 장군이었던 위만이 위만조선을 세우지만, 한나라에 멸망당하고 한사군이 설치된다.
기원전 3세기 말, 부여는 현재의 지린성 창춘시를 중심으로 랴오닝성, 헤이룽장성 일대를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부여는 서쪽으로 기원전 3세기 말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는 오환과, 그 이후인 기원전 1세기부터 5세기까지는 선비(鮮卑)과 접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한반도 남서부에 있던 마한의 동쪽에 터를 잡고 진한 사람들과 더불어 섞여 살았다.[127] 고조선은 멸망하고 (기원전 108년) 한나라는 북쪽 지역에 낙랑군
기원전 194년 위만이 기자조선을 멸망시키고, 위만조선을 세운다[4]。 기원전 128년 전한이 창해군을 설치한다[4]。 기원전 108년 전한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을 설치한다[4]。 기원전 82년 진번군과 임둔군을 폐지한다[4]。 기원전 75년 현도군을 서쪽으로 옮기고, 한반도에는 낙랑군만 남는다[4]。 기원전 37년 고구려가 성립한다[4]。
3. 삼국 시대
372년 전진의 황제 부견(苻堅)으로부터 승려 순도(順道)가 고구려에 와서 불상과 경문을 전함으로써[128]최초로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374년에는 아도(阿道)가 전진에서 건너와[129] 불도를 고구려에 전하였다. 소수림왕은 375년에 초문사(肖門寺)를 창건하고 순도를 머물게 하고,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여 아도를 머물게 하여[130] 불교의 수용 및 보급 정책을 취하여, 전진(前秦)과 평화적 관계를 수립하고, 호국사상으로 삼았다.(→전진, 고구려) 384년에는 동진에서 백제에 불교가 전래되었다.[4] 중국에서 비롯한 유교 사상은 이미 삼국시대에 오경사상(五經思想)을 중심으로 하여 정치이념이 되기도 하였다. (→한국의 유교)
요동 공손씨가 조선을 지배하고 대방군을 설치하지만, 그 후 낙랑군과 대방군은 위에서 서진으로 계승된다.[4] 204년 공손씨가 대방군을 설치하고,[4] 238년 위가 공손씨를 멸망시키고 대방군을 지배한다.[4] 313년 고구려가 낙랑군을 멸망시키고, 대방군도 멸망한다.[4] 또한, 한반도 동남부의 진한은 진나라의 유민이다.
삼한의 마한, 변한, 진한 내에서는 여러 소국들이 분립했는데, 각 소국에는 수장이 있었고, 큰 수장을 신지라고 불렀으며, 그 다음을 읍차라고 불렀다. 신지는 "신하된 자"를 의미하며, 중국 황제에 대한 신하를 뜻하는 것으로, 이를 소국의 수장 입장에서 표현한 것이다.
12년 왕망이 고구려왕 추를 살해하고([4]) (유리명왕#중국사서의 기록), 고구려를 하구려로 한다.[4] 32년 고구려가 후한에 입조하여 왕을 칭한다.[4] 167년 현도태수 공손욱이 고구려를 토벌한다.[4] 244년 위의 관구검이 고구려의 도읍인 환도성(현재의 집안시)을 점령한다.[4] 294년 선비모용부의 어른인 모용외가 고구려를 공격한다.[4] 342년 전연의 모용황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환도성을 점령한다.[4] 377년 고구려와 신라가 전진에 입조한다.[4] 436년 북연 천왕 풍홍이 고구려로 망명하지만 이듬해 살해된다.[4]
백제는 양을 비롯한 중국 남조의 각국과 활발하게 문화를 교류했다. 양나라에는 사신을 보내어 불교 등의 경서와 모시박사·공장·화사를 청하는 등 문화수용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458년 백제의 개로왕이 남조 송으로부터 진동대장군의 작위를 받는다.[4] 472년 백제의 개로왕이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출병을 요청하지만, 출병을 얻지 못한다.[4]
신라의 교역은 주로 상업이나 외교 활동과 관계가 있었다. 676년의 삼국 통일 후 평화가 계속되며 생산이 늘었고,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당나라는 신라의 주 교역 상대였다. 신라는 당나라에 비단, 마포, 금, 은, 인삼, 약재, 말, 모피, 공예를 수출했고, 비단, 약재, 공예, 서적을 수입했다.
수의 수 문제 치세, 한반도를 둘러싸고 수와 고구려의 관계가 긴장되었을 때, 국제적인 정치가 배구는 수 문제에게 한반도 영유의 필요성을 설파했다.[6]
고구려는 수의 공격은 격퇴했지만, 당과 신라가 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598년 제1차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이 있었다. 612년 제2차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613년 제3차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614년 제4차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이 있었다. 624년 고구려에 도교가 공전된다. 644년 제1차 당나라의 고구려 출병이 있었다. 648년 신라가 당에 구원을 요청한다. 650년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폐지하고 당의 연호를 사용한다. 660년 당과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다. (나당 동맹) 661년 제2차 당나라의 고구려 출병이 있었다.
3. 1. 고구려, 백제, 신라와 중국 왕조들과의 관계
372년 전진의 황제 부견(苻堅)으로부터 승려 순도(順道)가 고구려에 와서 불상과 경문을 전함으로써[128]최초로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374년에는 아도(阿道)가 전진에서 건너와[129] 불도를 고구려에 전하였다. 소수림왕은 375년에 초문사(肖門寺)를 창건하고 순도를 머물게 하고,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여 아도를 머물게 하여[130] 불교의 수용 및 보급 정책을 취하여, 전진(前秦)과 평화적 관계를 수립하고, 호국사상으로 삼았다.(→전진, 고구려) 384년에는 동진에서 백제에 불교가 전래되었다.[4] 중국에서 비롯한 유교 사상은 이미 삼국시대에 오경사상(五經思想)을 중심으로 하여 정치이념이 되기도 하였다. (→한국의 유교)요동 공손씨가 조선을 지배하고 대방군을 설치하지만, 그 후 낙랑군과 대방군은 위에서 서진으로 계승된다.[4] 204년 공손씨가 대방군을 설치하고,[4] 238년 위가 공손씨를 멸망시키고 대방군을 지배한다.[4] 313년 고구려가 낙랑군을 멸망시키고, 대방군도 멸망한다.[4] 또한, 한반도 동남부의 진한은 진나라의 유민이다.
삼한의 마한, 변한, 진한 내에서는 여러 소국들이 분립했는데, 각 소국에는 수장이 있었고, 큰 수장을 신지라고 불렀으며, 그 다음을 읍차라고 불렀다. 신지는 "신하된 자"를 의미하며, 중국 황제에 대한 신하를 뜻하는 것으로, 이를 소국의 수장 입장에서 표현한 것이다.
12년 왕망이 고구려왕 추를 살해하고([4]) (유리명왕#중국사서의 기록), 고구려를 하구려로 한다.[4] 32년 고구려가 후한에 입조하여 왕을 칭한다.[4] 167년 현도태수 공손욱이 고구려를 토벌한다.[4] 244년 위의 관구검이 고구려의 도읍인 환도성(현재의 집안시)을 점령한다.[4] 294년 선비모용부의 어른인 모용외가 고구려를 공격한다.[4] 342년 전연의 모용황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환도성을 점령한다.[4] 377년 고구려와 신라가 전진에 입조한다.[4] 436년 북연 천왕 풍홍이 고구려로 망명하지만 이듬해 살해된다.[4]
백제는 양을 비롯한 중국 남조의 각국과 활발하게 문화를 교류했다. 양나라에는 사신을 보내어 불교 등의 경서와 모시박사·공장·화사를 청하는 등 문화수용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458년 백제의 개로왕이 남조 송으로부터 진동대장군의 작위를 받는다.[4] 472년 백제의 개로왕이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출병을 요청하지만, 출병을 얻지 못한다.[4]
신라의 교역은 주로 상업이나 외교 활동과 관계가 있었다. 676년의 삼국 통일 후 평화가 계속되며 생산이 늘었고,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당나라는 신라의 주 교역 상대였다. 신라는 당나라에 비단, 마포, 금, 은, 인삼, 약재, 말, 모피, 공예를 수출했고, 비단, 약재, 공예, 서적을 수입했다.
수의 수 문제 치세, 한반도를 둘러싸고 수와 고구려의 관계가 긴장되었을 때, 국제적인 정치가 배구는 수 문제에게 한반도 영유의 필요성을 설파했다.[6]
고구려는 수의 공격은 격퇴했지만, 당과 신라가 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598년 제1차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이 있었다. 612년 제2차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613년 제3차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614년 제4차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이 있었다. 624년 고구려에 도교가 공전된다. 644년 제1차 당나라의 고구려 출병이 있었다. 648년 신라가 당에 구원을 요청한다. 650년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폐지하고 당의 연호를 사용한다. 660년 당과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다. (나당 동맹) 661년 제2차 당나라의 고구려 출병이 있었다.
4. 고려 시대
고려는 13세기에 몽골 제국(원)의 침략을 받아 지배하에 들어갔다. 역대 고려 국왕의 세자(세습받을 태자)는 몽골 귀족이나 황족의 데릴사위가 되어 원나라 궁정에서 생활했으며, 아버지의 사후 고려 국왕으로 임명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고려 국왕의 어머니는 모두 몽골인이 되었고, 4대 고려 국왕은 원 황제의 사위가 되었다. 원나라는 고려를 복속시킨 후 정동등처행중서성(정동행성)을 설치하여 한반도 전역에 걸친 행정·정치·군사를 집행하는 기관으로 삼았다. 또한 원나라는 한반도 북서부에 동녕부를, 북동부에 쌍성총관부를,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지배했다.
- 1232년 몽골의 고려 침략 시작. 강화도로 천도.
- 1258년 쌍성총관부.
- 1259년 고려 태자(후의 원종)가 쿠빌라이에게 항복하여 몽골 제국(원)의 종속국화.
- 1259년 몽골에 복속, 태자가 몽골로 감[4]。
- 1260년 충렬왕은 대칸으로 즉위한 쿠빌라이의 사위가 됨.
- 1363년 목면 전래.
- 1270년 몽골이 고려로부터 자비령 이북을 빼앗아 동녕부를 설치[4]。 고려의 완전 식민지화.
- 1273년 삼별초의 난을 원나라의 힘으로 진압. 탐라총관부(~1290).
- 1274년 문영의 역(원코, 중국 명칭: 제1차 원일 전쟁, 한국 명칭: 제1차 일본 원정 제1차 일본 원정)
- 1278년 변발·호복령.
- 1281년 홍안의 역(원코, 중국 명칭: 제2차 원일 전쟁, 한국 명칭: 제2차 일본 원정 제2차 일본 원정)
- 1287년 원나라 정동행성이 상설되어 원나라 영토화.
- 1289년 하다단의 침략으로 도읍을 강화도로 옮김.
- 1290년 동녕부를 고려에 반환[4]。
- 1290년~1291년 하다단의 침입[4]。
- 1302년 충렬왕 원나라 방문, 원나라 왕실과의 통혼[4]。
- 1325년 충선왕 원나라에서 객사[4]。
고려는 400년 동안 "기회주의[7]", "항상 강자에게 굴복하는 식이었다[8]", "사실상 몽골 제국의 국내 한 봉건 영주"가 되었다[9]. 고지마 쓰요시는 "원나라 시대에 한국의 고려 왕조는 몽골 제국의 속국"이라고 평했다[10].
원나라가 쇠퇴하자 독립하여 북방 영토를 회복했다.
4. 1.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
고려는 송나라와 정치적으로 우호 관계를 맺어 북방 이민족을 견제하고, 빈번한 교역으로 문물을 교환하였다.[4] 고려는 송나라로부터 비단, 자기, 약재, 악기, 향료, 문방구 등을 수입하였고, 특히 자기와 서적은 고려의 청자와 목판인쇄술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다. 고려의 수출품은 금, 은, 구리, 인삼, 잣, 모피 등의 원산품과 능라, 저마포, 백지, 금은동기, 부채, 금은장도, 종이, 붓, 먹 등 가공품이었다.[4] 하지만 북방 이민족들의 정복왕조가 중국을 지배하면서 고려와 송나라의 무역은 단절되었다.933년 고려는 후당의 책봉을 받았으며, 963년에는 송에 복속되었다.[4] 993년 거란의 침입으로 고려는 요나라에 복속되기도 하였으나, 강동 6주를 얻었다. 1010년 거란이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점령하기도 하였고, 1018년에는 거란이 다시 고려를 침입했지만 귀주대첩에서 대패하였다. 1016년 고려는 다시 송의 연호를 사용하였으나,[4] 1022년에는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였다.[4] 1033년부터 1044년까지 거란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건설하였다.[4] 1107년 고려의 윤관이 여진을 침략하여 동북 9성을 쌓았지만, 다음 해에 여진에게 돌려주고 철수하였다. 이후 1126년 고려는 금나라에 복속되었다.[4]

4. 2. 고려와 요, 금나라의 관계
고려는 송과 정치적으로 우호 관계를 맺어 북방 이민족을 견제하고, 빈번한 교역으로 문물을 교환했다. 고려는 송에서 능견, 자기, 약재, 악기, 향료, 문방구 등을 수입하고, 금, 은, 구리, 인삼, 송자, 모피, 능라, 저마포, 백지, 금은동기, 부채, 금은장도, 종이, 붓, 먹 등을 수출했다. 특히 자기와 서적은 고려의 청자와 목판인쇄술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북방 이민족의 정복 왕조가 중국을 지배하면서 고려와 송의 무역은 단절되었다.9세기 말 신라가 쇠퇴하고 10세기 초에 당이 멸망한 후, 발해도 멸망하고 고려가 신라를 대체한다. 고려는 발해 유민을 많이 받아들였다. 고려는 오대와 송에 복속되었지만, 요나라의 공격을 받아 요에 복속된다. 발해가 멸망한 후, 고려는 여진을 침략하여 영토를 북쪽으로 넓혔으나, 여진이 금나라를 건국하고 요를 멸망시키자 금에 복속한다.
- 926년: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키고, 동단국을 설치했다.[4]
- 933년: 고려가 후당의 책봉을 받았다.
- 963년: 고려가 송에 복속되었다.[4]
- 993년: 거란(요)의 고려 침입. 고려는 요에 복속하지만, 강동 6주를 얻었다.
- 1010년: 거란이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점령했다.
- 1016년: 고려가 다시 송의 연호를 사용했다.[4]
- 1018년: 거란이 다시 고려를 침입했지만 귀주대첩에서 대패했다.
- 1022년: 고려가 거란의 연호를 사용했다.[4]
- 1033년~1044년: 거란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건설했다.[4]
- 1107년: 고려의 윤관이 여진을 침략하여 동북 9성을 쌓았지만, 다음 해에 여진에게 돌려주고 철수했다.
- 1126년: 고려가 금나라에 복속되었다.[4]
4. 3. 몽골(원)의 침입과 고려의 대응
고려는 13세기에 몽골 제국(원)의 침략을 받아 지배하에 들어갔다.[9] 고려 국왕의 세자는 몽골 귀족이나 황족의 데릴사위가 되어 원나라 궁정에서 생활했으며, 아버지 사후 고려 국왕으로 임명되는 것이 관례였다.[4] 고려 국왕의 어머니는 모두 몽골인이 되었고, 4대 고려 국왕은 원 황제의 사위가 되었다. 원나라는 고려를 복속시킨 후 정동등처행중서성(정동행성)을 설치하여 한반도 전역에 걸친 행정·정치·군사를 집행하는 기관으로 삼았다.[9] 또한 원나라는 한반도 북서부에 동녕부를, 북동부에 쌍성총관부를,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지배했다.[9]1232년 몽골의 고려 침략이 시작되자 고려는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1259년 고려 태자(후의 원종)가 쿠빌라이에게 항복하여 몽골 제국(원)의 종속국이 되었다.[4] 1270년 몽골은 고려로부터 자비령 이북을 빼앗아 동녕부를 설치했고, 1273년 삼별초의 난을 원나라의 힘으로 진압한 후 탐라총관부를 설치했다(~1290).[4] 1290년 동녕부는 고려에 반환되었다.[4]
고려는 400년 동안 "기회주의[7]", "항상 강자에게 굴복하는 식이었다[8]"는 평가를 받으며, "사실상 몽골 제국의 국내 한 봉건 영주"가 되었다.[9] 고지마 쓰요시는 "원나라 시대에 한국의 고려 왕조는 몽골 제국의 속국"이라고 평했다.[10]
원나라가 쇠퇴하자 고려는 독립하여 북방 영토를 회복했다.
5. 조선 시대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명나라에 대해 사대 정책을 취했다.[131] 태조 이성계는 즉위 이전부터 친명정책을 표방하였으며, 개국 후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 왕조 승인을 요청하고 '조선'이라는 국호를 추천받아 사용하였다.[131] 1401년(태종 1)에 이르러서야 명나라로부터 “조선국왕”의 금인(金印)을 받아 정식으로 왕에 책봉되었다.[131] 조선은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고 정기적인 사신을 보내는 등 형식적으로는 제후국이었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완전히 독립된 국가였다.[131] 조선의 왕들은 "조", "종" 등 황제들이 쓰는 칭호를 사용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16세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왜란(1592-1596)과 정유재란(1597-1598)이 발발했지만, 명나라의 구원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조선은 국토를 회복했다.[19] 명나라는 책봉 관계에 있는 조선을 보전하기 위해 원군을 파견하여 일본군과 싸웠다.[19] 그러나, 명나라 원군은 조선을 돕기보다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쳤다(1616).[4]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명나라의 원병 요청을 받고 군대를 보냈으나 패전하였고, 강홍립은 후금에 항복하여 조선이 부득이하게 원병을 보낸 사실을 알렸다.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 정권은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을 펼쳤고, 이는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으로 이어졌다.[131] 정묘호란 이후 조선은 후금과 형제의 의를 맺었으나, 후금이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군신(君臣) 관계를 요구하자 이를 거절하여 병자호란이 발발했다.[131] 인조는 삼전도의 맹약(1637)을 통해 청나라에 복속되었고, 왕자가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졌으며,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게 되었다.[4]
병자호란 이후에도 조선은 청나라에 대한 반감이 심하여 북벌 계획이 논의될 정도였으나, 청나라가 중국 대륙을 지배하게 되자 표면적으로는 사대 정책을 취했다.[131] 그러나 청나라에 대한 멸시와 적개심은 여전했고, 조선은 스스로를 명나라의 뒤를 잇는 소중화로 여겼다.[19] 대보단을 설치하고 명나라 황제를 모셨으며(1705), 사적으로는 숭정이나 영력 등 명나라의 연호를 계속 사용했다.[19][4]
18세기에는 박제가의 『북학의』(1778), 박지원의 『열하일기』(1780) 등 청나라의 문물을 배우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4] 한편, 청나라를 통해 기독교(서학)가 유입되었으나(1643), 여러 차례 탄압을 받아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4][19]
19세기 말, 임오군란(1882)이 일어나자 명성황후는 청나라에 원조를 요청했고, 청나라는 이를 핑계로 군대를 파견하여 흥선대원군을 톈진으로 납치하고 군란을 진압했다.[132] 이후 민씨 정권은 청나라에 의존하게 되었고, 청나라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여 경제적 침투를 강화했다.[132] 갑신정변(1884) 또한 청군의 개입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5. 1. 조선의 대명, 대청 외교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명나라에 대해 사대 정책을 취했다.[131] 태조 이성계는 즉위 이전부터 친명정책을 표방하였으며, 개국 후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 왕조 승인을 요청하고 '조선'이라는 국호를 추천받아 사용하였다.[131] 1401년(태종 1)에 이르러서야 명나라로부터 “조선국왕”의 금인(金印)을 받아 정식으로 왕에 책봉되었다.[131] 조선은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고 정기적인 사신을 보내는 등 형식적으로는 제후국이었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완전히 독립된 국가였다.[131] 조선의 왕들은 "조", "종" 등 황제들이 쓰는 칭호를 사용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131]16세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왜란(1592-1596)과 정유재란(1597-1598)이 발발했지만, 명나라의 구원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조선은 국토를 회복했다.[19] 명나라는 책봉 관계에 있는 조선을 보전하기 위해 원군을 파견하여 일본군과 싸웠다.[19] 그러나, 명나라 원군은 조선을 돕기보다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쳤다(1616).[4]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명나라의 원병 요청을 받고 군대를 보냈으나 패전하였고, 강홍립은 후금에 항복하여 조선이 부득이하게 원병을 보낸 사실을 알렸다.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 정권은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을 펼쳤고, 이는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으로 이어졌다.[131] 정묘호란 이후 조선은 후금과 형제의 의를 맺었으나, 후금이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군신(君臣) 관계를 요구하자 이를 거절하여 병자호란이 발발했다.[131] 인조는 삼전도의 맹약(1637)을 통해 청나라에 복속되었고, 왕자가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졌으며,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게 되었다.[4]
병자호란 이후에도 조선은 청나라에 대한 반감이 심하여 북벌 계획이 논의될 정도였으나, 청나라가 중국 대륙을 지배하게 되자 표면적으로는 사대 정책을 취했다.[131] 그러나 청나라에 대한 멸시와 적개심은 여전했고, 조선은 스스로를 명나라의 뒤를 잇는 소중화로 여겼다.[19] 대보단을 설치하고 명나라 황제를 모셨으며(1705), 사적으로는 숭정이나 영력 등 명나라의 연호를 계속 사용했다.[19][4]
18세기에는 박제가의 『북학의』(1778), 박지원의 『열하일기』(1780) 등 청나라의 문물을 배우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4] 한편, 청나라를 통해 기독교(서학)가 유입되었으나(1643), 여러 차례 탄압을 받아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4][19]
19세기 말, 임오군란(1882)이 일어나자 명성황후는 청나라에 원조를 요청했고, 청나라는 이를 핑계로 군대를 파견하여 흥선대원군을 톈진으로 납치하고 군란을 진압했다.[132] 이후 민씨 정권은 청나라에 의존하게 되었고, 청나라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여 경제적 침투를 강화했다.[132] 갑신정변(1884) 또한 청군의 개입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5. 2.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는 원병을 보냈으나,이는 조선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19] 당시 명나라는 내부 갈등으로 혼란스러웠고, 누루하치가 세운 후금이 만주 지방에서 명나라의 변경을 위협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명나라의 요청으로 군대를 보냈으나 패배하였고, 강홍립은 후금에 항복하여 조선이 어쩔 수 없이 원병을 보낸 사실을 설명했다.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이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을 펴자, 후금은 1627년 조선을 침략하여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이후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의를 맺었다.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였으나, 조선이 이를 거절하자 1636년 병자호란을 일으켰다.[131]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하고, 이후 조선은 청나라의 책봉을 받는 조공국이 되었다.[19]
조선은 명나라에 대한 "숭명반청" 사상이 강하여 청나라를 오랑캐로 멸시했고, 명이 멸망한 후에도 숭정이나 영력 등의 명나라 연호를 사용하며 대보단을 설치하여 명나라 황제를 모셨다.[19] 17세기 중반에는 나선 정벌에 참전하기도 했다. 18세기에는 박제가의 『북학의』,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 청나라의 문물을 배우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널리 퍼지지는 못했다. 한편, 청나라를 통해 기독교(서학)가 유입되었으나, 여러 차례 탄압을 받아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4]
5. 3. 청일전쟁과 대한제국
조선은 병자호란에서 대패한 이후에도 청나라를 사대하는 문제에 대해 반대가 심하여 국론(國論)이 일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하고 중국 대륙을 지배하게 되자 표면상으로는 사대 정책을 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에 대한 멸시와 적개심은 깊어, 군신 간에 여러 차례의 북벌계획(北伐計劃)이 논의되었을 정도였다. 한편, 무역을 통해 청나라와 서양 문물이 한국에 전래되어 실학사상을 일으키게 되었다.[131]16세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국토의 대부분을 정복당했지만, 명의 구원과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국토를 회복했다. 당시 조선은 명의 조공국이었으며, 조선 국왕(이씨)은 명의 황제로부터 임명을 받아야 했다.[19]。조선에서는 "숭명반청" 사상이 강해, 스스로를 명의 뒤를 잇는 소중화로 여기고, 청을 오랑캐, 야만인으로 멸시했다. 명이 멸망하고 청에 책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적으로는 숭정이나 영력 등의 명의 연호를 계속 사용했으며, 대보단을 만들어 명의 황제를 모셨다.
임오군란 (1882년)이 일어나자 청나라는 명성황후의 요청으로 조선에 개입하였다. 흥선대원군을 톈진(天津)으로 납치하고 민씨 정권을 부활시켰다. 청군은 왕십리와 이태원 일대를 공격하여 군란을 진압했다.[132] 민씨 정권은 정권 유지를 위해 청나라에 의존하였고,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여 청나라 상인의 통상 특권을 규정하고 경제적 침투에 나섰다.[132]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후,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킨다.
19세기 말, 일본, 청, 러시아가 한반도를 둘러싸고 대립했다.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조선은 중국과의 오랜 책봉 체제에서 벗어났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로 즉위했다.[131] 원구단을 세워 제천 의식을 거행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공식적으로 청과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1907년 일본 제국과 청나라 사이에 맺어진 간도 협약으로 간도가 공식적으로 청나라로 편입되었다.
- 1592년~1596년: 임진왜란
- 1597년~1598년: 정유재란
- 1600년: 명군, 조선에서 철수[4]。
- 1616년: 광해군의 명·금 중립 외교.
- 1619년: 사르후 전투.
- 1620년: 후금의 병사, 조선에 들어옴[4]。
- 1627년: 정묘호란.
- 1630년: 유흥치(:ko:유흥치)의 난, 명 장수를 죽이고 가도(:ko:가도 (철산군))에 근거[4]。
- 1636년: 병자호란.
- 1637년: 삼전도의 맹약. 명을 대신하여 청에 복속. 대청 황제 공덕비. 왕자, 청의 인질이 됨. 청의 연호 사용.
- 1641년: 청 공격의 책략 발각, 청, 조선을 질책[4]。
- 1643년: 기독교 전파[4]。
- 1653년: 처음으로 서양 달력 사용[4]。
- 1654년, 1658년: 나선 정벌(:ko:나선정벌).
- 1705년: 대보단을 설치하고, 명의 신종을 모심[4]。
- 1712년: 백두산에 정계비를 건립.
- 1716년: 사당을 남원에 세워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 전사한 명 장수를 제사[4]。
- 1778년: 박제가가 중국에 감. 『북학의』.
- 1780년: 박지원이 중국에 감. 『열하일기』.
-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조선으로 천주교 서적을 가져옴[4]。
- 1791년: 신해사옥.
- 1794년: 청인 선교사 주문모가 서울에 들어옴[4]。
- 1801년: 신유사옥.
- 1815년: 을해박해.
- 1827년: 충청도·전라도에서 가톨릭 탄압.
- 1839년: 기해박해, 프랑스 신부 등을 살해.
- 1866년: 병인박해.
- 1882년: 임오군란, 한성부 주둔 청국군이 흥선대원군을 붙잡아 청국으로 연행. 10월, 청국과 조선은 허베이성 톈진에서 중조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했다.
- 1884년: 갑신정변, 청군의 개입으로 개화파의 쿠데타는 실패로 끝난다.
- 1885년: 톈진 조약 (1885년 4월), 일본과 청은 조선에 출병할 경우 상호 통지. 흥선대원군이 위안스카이와 함께 귀국[4]。 청선 전신 협약[4]。
-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대원군파와 민비파의 대립이 깊어짐. 조선은 청일 전쟁의 전장이 됨. 갑오개혁(~1896년).
-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청이 패배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조선이 독립국임을 일본이 확인한다. 조선에서 청에 대한 공・헌상・전례 등은 폐지된다.
- 1896년: 조선 고유의 연호, 건양을 제정.
- 1897년: 조선은 청의 책봉 체제에서 이탈하여, 조선국에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고치고, 왕은 황제를 칭한다. 10월 12일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
- 1909년: 간도 협약, 조선과 청의 국경이 정해짐.
- 1910년: 한일 병합, 일본에 병합.
- 1931년: 만보산 사건, 조선인 차별 사건.
6. 일제강점기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건국한 중화민국은 여러 군벌들의 혼란 속에서도 한국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였다. 특히 장제스는 상하이 시에 거점을 두고 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중국 공산당 측에서도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 운동가 및 단체를 지원하였다. 화북의 조선의용대는 중국 공산당과 동맹이었다. 한국과 중국은 일본 제국이라는 공공의 적을 상대하기 위하여 서로 긴밀히 협력하였다.
6. 1. 한국 독립운동과 중국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건국한 중화민국은 여러 군벌들의 혼란 속에서도 한국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였다. 특히 장제스는 상하이 시에 거점을 두고 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중국 공산당 측에서도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 운동가 및 단체를 지원하였다. 화북의 조선의용대는 중국 공산당과 동맹이었다. 한국과 중국은 일본 제국이라는 공공의 적을 상대하기 위하여 서로 긴밀히 협력하였다.7.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수교 이전
1948년 대한민국은 중화민국을 승인하고 서로 수교하였다.[20] 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과 수교하지 않고 있다가 국공 내전 이후에 건국된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였다.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관계는 한국 전쟁으로 인해 적대적 관계가 되었으며, 이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을 1992년까지 승인하지 않았고 중화민국과의 관계를 유지하였다.[20] 제2차 세계 대전 후,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이 분할 점령하여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생겨났다.[20]
1950년 10월 중국 공산당의 중국 인민 지원군이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20]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한국 전쟁 휴전 협정이 조인되어 현재의 군사 분계선이 설치되었다. 1958년 10월 북한에 주둔하던 중국 인민 지원군이 철수했다.[4]
1987년 11월 29일 발생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은 북한의 국가 차원에서 실행한 테러 행위였으며, 이는 소련이나 중국과 같은 구 "동구권"의 유력 국가 (강대국)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었다. 그 위에 "한반도 유사시에는 중소의 지원을 요구한다"는 이기적인 태도에 소련과 중국은 북한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중국은 서울 올림픽 참가를 정식 결정했다. 당초 보이콧을 시사했던 서울 올림픽에 북한 외 동구권 국가가 참가를 표명한 것도 이 일련의 흐름이 원인이었다.
8.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수교 이후
1948년 대한민국은 중화민국을 승인하고 서로 수교하였다. 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과 수교하지 않고 있다가 국공 내전 이후에 건국된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였다.[20]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관계는 한국 전쟁으로 인해 적대적 관계가 되었으며, 이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을 1992년까지 승인하지 않았고 중화민국과의 관계를 유지하였다.[20] 한국 전쟁에는 건국된 지 얼마 안 된 중화인민공화국도 참전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한국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경제 발전에 따른 자신감과 중국의 상대적인 정체 속에서 명실상부 중국의 속국이 아닌 독립국으로서 중국과 접촉할 수 있었다[20]。
1989년 5월에 소비에트 연방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중소 관계가 정상화되었고, 1989년 12월에 냉전의 종식이 선언되자, 1992년 8월 24일에 대한민국은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할 것을 발표하여 현재에 이르렀다.[33] 세지마 류조이토추 상사 회장은 전후에 경제 협력을 통해 동양의 평화를 실현하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기에 1986년에 중국의 덩샤오핑 라인의 인물을 소개했다. 그것이 당시 한국 대통령이었던 노태우와 덩샤오핑을 연결하여 국교 정상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33]。 한국은 타이완과 단교하고 중국과 국교를 수립, 노태우가 한국의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방중, 중국은 첸치천이 방북하여 김일성과 의견을 조율했다[34]。
국교 수립 이후 경제 교류가 확대되면서 중국은 한국 최대의 무역 상대국이 되었고, 한국 국채 최대 보유국이 되었지만[38], 한편으로는 이어도 영토 문제가 있다.
2016년7월 8일, 대한민국 국방부와 주한 미군이 THAAD 미사일을 주한 미군에 배치하기로 최종 결정했다고 발표한 것에 대해[49], 중국 정부는 "강렬한 불만과 단호한 반대"를 표명했고[50], 중국에서 한한령이라고 불리는 반한 정책이 발발하면서 한중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었다[51]。 2017년10월, 한국 정부는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미국의 미사일 방어 (MD) 시스템에 참여하지 않는다", "THAAD 미사일을 추가 배치하지 않는다", "한미 동맹을 한미일 삼각 동맹으로 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삼불(3NO)"을 중국 정부에 서약했다[52]。
8. 1. 수교와 관계 발전
1948년 대한민국은 중화민국을 승인하고 서로 수교하였다. 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과 수교하지 않고 있다가 국공 내전 이후에 건국된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였다.[20]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관계는 한국 전쟁으로 인해 적대적 관계가 되었으며, 이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을 1992년까지 승인하지 않았고 중화민국과의 관계를 유지하였다.[20] 한국 전쟁에는 건국된 지 얼마 안 된 중화인민공화국도 참전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한국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경제 발전에 따른 자신감과 중국의 상대적인 정체 속에서 명실상부 중국의 속국이 아닌 독립국으로서 중국과 접촉할 수 있었다[20]。1989년 5월에 소비에트 연방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중소 관계가 정상화되었고, 1989년 12월에 냉전의 종식이 선언되자, 1992년 8월 24일에 대한민국은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할 것을 발표하여 현재에 이르렀다.[33] 세지마 류조이토추 상사 회장은 전후에 경제 협력을 통해 동양의 평화를 실현하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기에 1986년에 중국의 덩샤오핑 라인의 인물을 소개했다. 그것이 당시 한국 대통령이었던 노태우와 덩샤오핑을 연결하여 국교 정상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33]。 한국은 타이완과 단교하고 중국과 국교를 수립, 노태우가 한국의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방중, 중국은 첸치천이 방북하여 김일성과 의견을 조율했다[34]。
국교 수립 이후 경제 교류가 확대되면서 중국은 한국 최대의 무역 상대국이 되었고, 한국 국채 최대 보유국이 되었지만[38], 한편으로는 이어도 영토 문제가 있다.
2016년7월 8일, 대한민국 국방부와 주한 미군이 THAAD 미사일을 주한 미군에 배치하기로 최종 결정했다고 발표한 것에 대해[49], 중국 정부는 "강렬한 불만과 단호한 반대"를 표명했고[50], 중국에서 한한령이라고 불리는 반한 정책이 발발하면서 한중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었다[51]。 2017년10월, 한국 정부는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미국의 미사일 방어 (MD) 시스템에 참여하지 않는다", "THAAD 미사일을 추가 배치하지 않는다", "한미 동맹을 한미일 삼각 동맹으로 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삼불(3NO)"을 중국 정부에 서약했다[52]。
8. 2. 갈등과 현안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양국 관계는 경제적으로는 긴밀해졌지만, 여러 갈등과 현안이 존재한다.[38]한국 전쟁 당시 중국 인민 지원군의 참전으로 인해 한동안 적대적 관계였으나,[20] 1992년 국교 정상화 이후 경제 교류가 확대되면서 중국은 한국의 최대 무역 상대국이자 한국 국채 최대 보유국이 되었다.[38] 그러나 이어도 영유권 문제,[38] 조선족 문제 등은 여전히 갈등 요소로 남아있다. 특히 2016년 주한미군의 THAAD 배치 결정 이후, 중국은 이른바 한한령으로 불리는 반한 정책을 펼치며 양국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었다.[49][50][51] 2017년 한국 정부는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이른바 "삼불(3NO)"을 중국 정부에 서약했지만,[52] 이는 국가 주권과 군사 주권 침해라는 비판을 받았다.[52][53][93]
중국은 중화 사상에 기반하여 한국을 '소국'으로 간주하고 고압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지적도 있다.[54] 일례로, 2017년 중국은 THAAD 배치와 관련하여 한국에 "소국이 대국에 대항해도 되는가? 배치되면 단교 수준의 고통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라고 위협했다.[54] 또한, 일본에 배치된 AN/TPY-2 레이더는 묵인하면서 한국의 THAAD 배치에만 강력하게 반대하는 이중 잣대를 보이고 있다.[55]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한국은 사실 중국의 일부였다"고 발언했다고 밝혀 논란이 되기도 했다.[59][60][61][62]
한편, 북한과의 관계도 한중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장성택 숙청 이후 중국-북한 관계가 정체되고 북한의 대중 무역 의존도가 심화되면서, 잦은 핵실험과 북한군 탈북 병사의 범죄 등으로 중국 내 반북 감정이 고조되기도 했다.[39][40][41][42][43] 시진핑 정부는 남북 등거리 외교를 펼치며 한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나,[46][47] 모란봉악단 공연 중단과 핵실험 등으로 다시 냉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2018년 김정은의 방중 이후, 중조 관계는 점차 개선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98][99]
8. 3. 최근 동향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양국 간 경제 교류는 급속도로 확대되어 중국은 한국의 최대 무역 상대국이자 한국 국채 최대 보유국이 되었다.[38] 그러나 이어도 영토 문제와 같은 갈등 요소도 존재한다.2016년 7월 8일, 주한 미군의 THAAD 미사일 배치 결정에 대해 중국 정부는 "강렬한 불만과 단호한 반대"를 표명했으며,[49][50][56] 한한령으로 불리는 반한 정책을 시행하여 양국 관계가 냉각되었다.[51][57] 2017년 10월, 한국 정부는 미국의 미사일 방어 (MD) 시스템에 참여하지 않고, THAAD 미사일을 추가 배치하지 않으며, 한미 동맹을 한미일 삼각 동맹으로 발전시키지 않겠다는 "삼불(3NO)"을 중국 정부에 서약했다.[52] 이에 대해 조선일보는 "국가의 주권은 물론, 장래 군사 주권 침해까지 인정한 국가적 치욕"이라며 비판했다.[52][53][93]
중국의 고압적인 태도는 중화 사상에 기반한 "대국 (중국)은 소국 (한국)을 엿봐도 되지만, 소국은 대국을 엿봐서는 안 된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지적이 있다.[54] 2017년 중국은 한국에 "소국이 대국에 대항해도 되는가? 배치되면 단교 수준의 고통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라고 위협했다.[54]
2017년 4월 6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시진핑 중화인민공화국 국가 주석이 "한국이 중국의 일부였다"고 발언했다고 밝혔다.[59][60][61][62] 동아일보는 한사군과 원 간섭기를 언급하며, 한국이 중국에 완전 종속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반박했다.[64]
2017년 12월 13일, 문재인 대통령은 중국 방문 중 베이징 대학 강연에서 "한국도 작은 나라이지만, 그 꿈 (중국의 꿈)을 함께 합니다"라고 발언하며, 중국을 "큰 봉우리"로, 한국을 "작은 나라"로 표현했다.[92] 조선일보는 중국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낮추는 발언을 했다고 비판했다.[53][93]
한편, 2013년 장성택 숙청 이후 중조 관계가 정체되면서 북한의 대중 무역 의존도가 심화되었고, 잦은 핵실험과 북한군 탈북 병사의 범죄로 인해 중국 내 반북 감정이 고조되었다.[39][40][41][42][43]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는 한중 관계를 강화하는 남북 등거리 외교를 펼쳤다.[46][47] 2018년 3월 25일, 김정은은 최고 지도자 취임 후 첫 외유로 중국을 방문하여 시진핑과 정상 회담을 가졌고, 이후 양국 관계는 점차 개선되는 추세를 보였다.[98][99] 2019년 6월 20일에는 시진핑이 중국 지도자로서는 14년 만에 북한을 방문했다.[123] 2020년 1월 31일부터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북한 측이 중조 국경을 폐쇄하여 양국 간 무역량이 급감했다.[124] 2021년 3월 23일에는 김정은과 시진핑이 구두 친서를 교환했다.[125][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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