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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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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세 후기는 14세기와 15세기에 걸쳐 기독교 유럽에서 일어난 일련의 변화와 사건들을 포괄한다. 이 시기에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성장, 이베리아 반도의 레콩키스타 완료, 오스만 제국의 발흥이 두드러졌다. 교황권은 아비뇽 유수와 서방 교회의 분열로 쇠퇴했고, 흑사병의 창궐은 사회·경제적 변화를 초래했다. 백년 전쟁과 장미 전쟁은 국가의 형성과 왕권 강화를 가져왔으며, 이베리아 반도의 통일과 신항로 개척은 세계적인 변화의 시작을 알렸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등장과 인쇄술의 발명은 문화적 혁신을 이끌었고, 종교 개혁의 전조가 나타났다. 기술적으로는 화약과 총포의 발달, 나침반의 개량 등이 이루어졌다.

2. 역사

레오나르도 브루니는 그의 저서 『피렌체 인민사』(1442)에서 삼분법적 시대 구분을 사용한 최초의 역사가였다.[5] 플라비오 비온도는 『로마 제국 쇠퇴 이후의 역사 연대기』(1439–1453)에서 유사한 틀을 사용했다. 삼분법적 시대 구분은 독일 역사가 크리스토프 켈라리우스가 『고대, 중세, 신시대』(1683)를 출판한 이후 표준이 되었다.

14, 15세기를 연구하는 18세기 역사가들에게 중심 주제는 고대 학습의 재발견과 개인적 정신의 출현을 특징으로 하는 르네상스였다.[6] 이러한 재발견의 핵심은 이탈리아에 있는데, 그곳에서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의 말처럼 "인간은 정신적 개인이 되었고 스스로를 그렇게 인식했다."[7] 이 명제는 나중에 이의가 제기되었고, 12세기가 더 큰 문화적 성취를 이룬 시대였다고 주장되었다.[8]

경제 및 인구 통계 방법이 역사 연구에 적용되면서, 중세 후기는 점차 경기 침체와 위기의 시기로 여겨졌다. 벨기에 역사가 앙리 피렌제1차 세계 대전 전후에 초기, 고, 후기 중세 시대를 세분화했다.[9] 그러나 중세 후기에 대한 비관적인 견해를 대중화하는 데 주로 책임이 있었던 사람은 그의 네덜란드 동료인 요한 호이징가였으며, 그의 저서 『중세의 가을』(1919)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10] 이탈리아보다는 프랑스와 저지대 국가에 연구의 초점을 맞춘 호이징가에게 부활이 아닌 절망과 쇠퇴가 주요 주제였다.[11][12]

이 시대에 대한 현대 역사학은 혁신과 위기의 두 극단 사이에서 합의에 도달했다. 이제 조건이 알프스 북쪽과 남쪽에서 크게 달랐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되며, 이탈리아 역사학에서는 "중세 후기"라는 용어가 완전히 회피되는 경우가 많다.[13] "르네상스"라는 용어는 특정 지적, 문화적 또는 예술적 발전을 설명하는 데 여전히 유용하지만, 유럽 전체의 역사적 시대를 정의하는 특징으로는 간주되지 않는다.[14] 14세기 초부터 16세기까지(때로는 포함하기도 함)의 기간은 인구 및 경제적 쇠퇴와 회복, 서구 대이교와 종교 개혁의 도래와 함께 교황청의 쇠퇴, 그에 따른 국가의 출현, 유럽의 영향력이 나머지 세계로 확대되는 경향으로 특징지어진다.[14]

기독교 유럽의 경계는 14세기와 15세기에 여전히 정의되고 있었다. 모스크바 대공국몽골 제국을 격퇴하기 시작했고, 이베리아 반도 왕국들이 반도의 레콩키스타를 완료하고 외부로 시선을 돌리는 동안, 발칸 반도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떨어졌다.[15] 한편, 대륙의 나머지 국가들은 거의 끊임없는 국제적 또는 내부적 갈등에 휩싸였다.[15]

이러한 상황은 점차 중앙 권력의 통합과 국가의 출현으로 이어졌다.[16] 전쟁의 재정적 요구는 더 높은 수준의 과세를 필요로 했고, 그 결과 잉글랜드 의회를 비롯한 대표 기구의 출현으로 이어졌다.[17]

1328년 카페 왕조가 단절되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발루아 왕조의 필리프 6세에 대항하여 자신의 카페 왕조 상속권을 주장하고, 이를 구실로 백년 전쟁을 시작했다. 전쟁 초기에는 영국군이 우세하여 에드워드 흑태자가 이끌었던 궁병대는 프랑스 기사군을 크레시 전투(1346), 푸아티에 전투(1356)에서 격파하였다. 플랑드르의 도시 칼레가 함락된 것도 이 때이다. 그동안 프랑스는 거듭되는 전란과 흑사병의 맹위로 극히 피폐되었으며, 태자 샤를은 파리의 에티엔 마르셀의 난과 자크리의 난을 진압한 후, 1360년 영국과 브레티니 조약을 맺었다. 즉위 후 샤를 5세는 군제개혁과 왕실재정의 강화에 노력하고, 아키텐 귀족의 반항으로 동요하는 영국에 대하여 공세로 나가, 그의 치세 동안에 거의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1]

1380년 샤를 5세가 죽은 후 왕제, 제후의 섭정 정치하에서 국정은 다시 문란해지고, 샤를 6세의 정신병이 악화된 데다, 왕족 제후의 대립이 아르마냐크파부르고뉴파의 항쟁으로 발전하여 국내는 완전히 분열되었다. 영국 왕 헨리 5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1415년 노르망디 상륙, 아쟁쿠르 전투에서 아르마냑 군을 격파하고, 1420년 트루아 조약에 의해 광왕 샤를로부터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획득하였다. 1422년 헨리 5세, 샤를 6세가 잇달아 죽자, 헨리 6세는 소위 영·프 복합 왕국의 왕호를 칭하고, 샤를 7세는 르와르 이남에 위축되어 전혀 위세를 떨치지 못했다. 1429년 잔 다르크가 출현하여, 포위된 오를레앙을 해방시킨 이래, 프랑스 군은 마침내 공세로 나아가, 1435년 부르고뉴 공작과의 화약이 성립되고, 다음 해 파리를 탈환하여 칼레를 제외한 전 프랑스 영토에서 영국군을 격퇴하였다.[2] 이 전쟁으로 프랑스에서는 상비군의 창설, 왕실 재정의 확립, 제후 세력의 억압 등으로 왕권이 강화되었으며, 영국에서도 이 전쟁 직후에 일어난 장미 전쟁 때 겨우 절대주의 왕권이 성장하여 두 나라는 모두 중앙집권적 국가로서의 단서가 열리게 되었다.[3]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를 잃은 것에 대한 불만이 영국 국내에서 커지면서, 1453년 전쟁이 끝나자 랭커스터 왕가와 요크 왕가가 왕위를 두고 다투는 장미 전쟁(1455년~1485년)이 발발했다.[192] 이 전쟁은 요크 왕가가 시작한 강력하고 중앙 집권화된 왕권을 이어받은 튜더 왕가의 헨리 8세가 즉위하면서 끝났다.[193]

동로마 제국은 오랫동안 동지중해의 정치와 문화를 지배했다.[51] 그러나 14세기 무렵에는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으로 거의 붕괴되었고, 콘스탄티노플과 그리스의 몇몇 영토에 집중되어 있었다.[52]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으로 비잔틴 제국은 영원히 멸망했다.[53]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은 14세기에 쇠퇴했고, 세르비아의 부상은 1330년 벨바즈드 전투에서 세르비아가 불가리아를 상대로 승리하면서 두드러졌다.[54] 1346년에는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두샨이 황제로 선포되었다.[55] 그러나 세르비아의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라자르 흐르벨랴노비치가 이끄는 세르비아군은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 군대에 패배했고, 이 전투에서 대부분의 세르비아 귀족이 사망했으며, 국토 남부는 오스만 제국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었다. 남부 불가리아의 상당 부분은 1371년 마리차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 영토가 되었다.[56] 불가리아의 북부 잔존 세력은 결국 1396년에 정복되었고, 세르비아는 1459년, 보스니아는 1463년에 멸망했으며, 알바니아는 스칸데르베그 사망 후 몇 년 뒤인 1479년에 마침내 복속되었다. 당시 헝가리 영토였던 벨그라드는 1521년 벨그라드 공방전에서 오스만 제국에 함락된 마지막 대규모 발칸 도시였다. 중세 시대 말에 발칸 반도 전체가 오스만 제국에 병합되거나,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 되었다.[56]

오스만 제국과 유럽
마차시 코르비누스 헝가리 왕의 흑군 원정



15세기 말, 오스만 제국은 동남 유럽 전역으로 진격하여 결국 비잔틴 제국을 정복하고 발칸 국가에 대한 지배권을 확장했다. 헝가리는 동방의 라틴 기독교 세계의 마지막 보루였으며, 2세기 동안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싸웠다. 1444년 바르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다 젊은 왕 울라슬로 1세가 사망한 후, 왕국은 백작 야노시 후냐디의 손에 넘어갔고, 그는 헝가리의 섭정-총독이 되었다(1446–1453). 후냐디는 15세기의 가장 중요한 군사 인물 중 한 명으로 여겨졌으며, 교황 피우스 2세는 그에게 오스만 제국의 중앙 및 서유럽 진격을 저지할 유일한 희망이라며 "아틀레타 크리스티", 즉 그리스도의 챔피언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후냐디는 1456년 베오그라드 공방전에서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는 수십 년 동안 그 제국에 대한 가장 큰 승리였다. 이 전투는 무슬림에 대한 진정한 십자군이 되었는데, 프란체스코회 수사인 성 요한 드 카피스트라노가 이탈리아에서 와서 성전을 설교하여 농민들의 사기를 북돋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그것이 만들어낸 효과는 승리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된 주요 요인 중 하나였다. 그러나 헝가리 영주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파노니아는 무방비 상태가 되었고 혼란에 빠졌다. 중세 시대에는 매우 드문 일로, 후냐디의 아들 마차시는 헝가리 왕으로 헝가리 귀족에 의해 선출되었다. 귀족 가문 출신(왕족이 아닌)이 왕위에 오른 것은 처음이었다.

헝가리의 마차시 코르비누스 왕(1458–1490)은 이 시대의 가장 저명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서쪽으로의 원정을 지휘하여, 교황이 후스파 개신교도에 대항하여 도움을 요청한 것에 대한 응답으로 보헤미아를 정복했다. 또한,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의 정치적 적대 행위를 해결하기 위해, 그의 서부 영토를 침공했다. 마차시는 용병 병사들로 구성된 헝가리 흑군을 조직했는데, 이는 당시 가장 큰 군대로 여겨졌다. 이 강력한 도구를 사용하여 헝가리 왕은 터키 군대에 대항하여 전쟁을 이끌었고,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오스만 제국을 막았다. 마차시의 죽음 이후, 그리고 흑군의 종말과 함께, 오스만 제국은 강성해졌고, 중앙 유럽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의 군대는 헝가리 군대를 전멸시켰고, 러요시 2세는 탈출을 시도하다가 체슬레 개울에서 익사했다. 헝가리 군대의 지도자 팔 토모리도 이 전투에서 사망했다. 이 전투는 중세 시대의 마지막 전투 중 하나로 여겨진다.

카스티야 왕국코르도바(1236년), 세비야(1248년)를 점령하여 이슬람 세력을 압박하고 아프리카 침입을 계획했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귀족의 힘이 강해지고 농업은 쇠퇴했으며, 강력한 무력과 경제력을 가진 대교단이 생겨나 훗날 스페인 국가의 불균형을 초래했다.[63]

아라곤 왕국카탈루냐를 합병하고 발레아레스 제도를 점령(1229년-1235년)하며 지중해로 진출했다. 북아프리카 정복을 계획하고 십자군을 자처하여 시칠리아를 점령했으나(1282년-1285년), 국내 귀족과 도시는 이에 반대하여 코르테스(국왕 봉신 회의) 이름으로 1283년 왕권 제한을 결의했다(아라곤의 마그나 카르타). 이후 국왕은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를 교환하고 제노바, 피사와 오랫동안 싸웠으나, 14세기 중반 코르테스를 누르고 15세기 초 시칠리아를 합병하여 서지중해를 제패했다.

포르투갈 왕국은 1294년 잉글랜드와 통상 조약을 체결하여 경제 발전에 힘썼고, 카스티야를 격파하여 1385년 독립을 확고히 했다. 15세기에는 항해왕자 엔히케의 주도로 아프리카 해안을 탐험했고,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로 가는 해상 항로를 발견했다.[65]

알주바로타 전투 (1385년) 포르투갈과 카스티야 사이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결혼(1469년)과 아라곤의 후안 2세의 사망(1479년)으로 스페인이 탄생했다.[63] 1492년 그라나다를 점령하여 레콩키스타를 완료했다.[64] 스페인 군주들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인도 서쪽 해상 항로 탐험을 지원했고, 이는 1492년 아메리카 대륙 발견으로 이어졌다.[66]

14세기 중반 흑사병으로 인구가 급감하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졌다. 영주들은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농민의 부담을 줄이려 했고, 농민들은 반란이나 도망 등으로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려 했다.[236] 이러한 상황은 14, 15세기에 장원제의 동요를 가져왔다. 부역의 금납화가 진행되고 영주 직영지가 해체되면서 15세기에는 독립 자영 농민층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장원제와 봉건 영주제 붕괴의 위기 속에서 봉건 영주들이 부역 부활, 중세(重稅) 부과 등 봉건 반동을 강화하자, 프랑스의 자크리의 난(1358), 영국의 와트 타일러의 난(1381)과 같은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238]

1300년에서 1350년경, 중세 온난기는 소빙하기로 변화하였다.[230] 추워진 기후는 농업 위기를 초래했으며, 그 첫 번째는 대기근으로 알려져 있다.[231] 그러나 이 기근으로 인한 인구 감소는 전염병, 특히 흑사병만큼 심각하지 않았다.[232] 이 유행병으로 인한 사망률은 3분의 1에서 60%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233] 1420년경, 반복되는 역병과 기근으로 유럽 인구는 한 세기 전의 3분의 1 이하로 감소했을 것이다.[234] 자연 재해의 영향은 무력 충돌, 특히 백년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에서 더욱 심해졌다.[235]

유럽 인구가 크게 줄면서 생존자들에게 토지가 더 풍부해졌고, 노동력은 더 비싸졌다.[236] 1351년 영국 노동자 법과 같이 지주들이 임금을 강제로 삭감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237] 이러한 노력은 농민들 사이에 원망을 불러일으켜 1358년 프랑스의 자크리의 난과 1381년 영국의 농민 반란과 같은 반란으로 이어졌다.[238] 장기적으로는 서유럽에서 농노제가 사실상 종식되었다.[239] 반면, 동유럽에서는 지주들이 농민들을 더욱 억압적인 속박으로 강요했다.[240]

흑사병으로 인한 격변은 유대인과 같은 특정 소수 집단을 특히 취약하게 만들었는데, 이들은 재앙의 원인으로 자주 비난받았다.[241] 반유대주의 포그롬이 유럽 전역에서 자행되었으며, 1349년 2월에는 스트라스부르에서 2,000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다.[242] 국가 또한 유대인에 대한 차별에 책임이 있었다. 군주들은 백성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1290년 영국에서, 1306년 프랑스에서, 1492년 스페인에서, 1497년 포르투갈에서 유대인을 추방했다.[243]

유대인들이 박해를 받는 동안, 중세 후기에 권한이 강화된 또 다른 집단은 여성이었다. 이 시기의 커다란 사회적 변화는 상업, 학문, 종교 분야에서 여성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244] 그러나 동시에, 마녀사냥에 대한 믿음이 증가하면서 여성들은 비난과 박해에 취약해지기도 했다.[244]

14세기 중반까지 유럽은 꾸준히 증가하는 도시화를 경험했다.[245] 도시 또한 흑사병으로 황폐화되었지만, 학습, 상업, 정부의 중심지로서 도시의 역할은 지속적인 성장을 보장했다.[246] 1500년경에는 베네치아, 밀라노, 나폴리, 파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각각 10만 명 이상의 인구가 있었을 것이다.[247] 22개의 다른 도시들은 4만 명 이상이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이탈리아와 이베리아 반도에 있었지만,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 저지대 국가, 그리고 영국 런던에도 있었다.[247]

2. 1. 교황권의 쇠퇴와 아비뇽 유수

13세기 초반부터 십자군의 성과에 대한 기대가 어긋나면서 사람들의 신앙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또한 교황이 프랑스의 앙주 가와 같은 세속 군주에게 예속되기 시작하면서, 교황의 지위가 세속 군주에 의해 좌우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숙정이 실시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직 매매는 세속 권력의 개입으로 인해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단순히 교회 내부의 부패뿐만 아니라, 봉건 사회가 해체되고 유럽에서 근대적인 중앙 집권 국가가 형성되는 과정과도 관련이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로마 교회에는 아나니 사건, 교황의 아비뇽 유수, 교회의 대분열과 같은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동시에 위클리프를 비롯한 일련의 교회 비판이 종교개혁의 선구적인 운동으로서 전개되기 시작했다. 한편, 콘스탄츠, 바젤 등에서는 개혁을 위한 종교회의를 통해 로마 교회를 재건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프랑스 왕은 교황에 대한 우위를 강화하여, 마침내 1309년에 교황청아비뇽으로 옮기게 하였다.[220] 교황이 1377년에 로마로 돌아오자, 아비뇽과 로마에서 서로 다른 교황을 선출하게 되어 교회 분열 (1378년-1417년)로 이어졌다.[263] 이 대분열은 유럽을 정치적인 노선에 따라 나누었다. 프랑스와 동맹국인 스코틀랜드, 스페인 왕국은 아비뇽의 교황을 지지한 반면, 프랑스의 적대국인 잉글랜드는 포르투갈, 스칸디나비아, 독일의 대부분의 제후들과 함께 로마의 교황을 지지했다.[264]

콘스탄츠 공의회 (1414년–1418년)에서 교황은 일단 로마의 교황으로 통일되었다.[265] 비록 이 통일이 또 다른 백년 전쟁을 종식시키고 교황이 이전보다 더 큰 물질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교회 분열은 회복 불가능한 손해를 입혔다.[266] 교회의 내분은 교회의 보편적인 지배에 대한 주장을 훼손하고, 인민과 지배자들 사이에 반교권주의를 조장하여 개혁 운동의 길을 열었다.[267]

2. 2. 서방 교회의 대분열

프랑스 왕은 교황에 대한 우위를 강화하여 1309년에 교황청아비뇽으로 옮기게 되었다[262]。교황이 1377년에 로마로 돌아오자 아비뇽과 로마에서 서로 다른 교황을 선출하게 되어 교회 분열 (1378년-1417년)이 발생했다[263]。이 대분열은 유럽을 정치적인 선으로 나누어, 프랑스와 동맹국인 스코틀랜드, 스페인 왕국은 아비뇽의 교황을 지지했고, 프랑스의 적대국인 잉글랜드는 포르투갈, 스칸디나비아, 독일의 대부분의 제후들과 함께 로마의 교황을 지지했다[264]

콘스탄츠 공의회 (1414년–1418년)에서 교황은 로마의 교황으로 단일화되었다[265]。이 통일이 또 다른 백년 전쟁을 종식시키고 교황이 이전보다 더 큰 물질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교회 분열은 회복 불가능한 손해였다[266]。교회의 내분은 교회의 보편적인 지배에 대한 주장을 훼손하고, 인민과 지배자들 사이에 반교권주의를 조장하여 개혁 운동의 길을 열었다[267]

2. 3. 흑사병의 창궐

14세기 중반 흑사병으로 인구가 급감하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졌다. 영주들은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농민의 부담을 줄이려 했고, 농민들은 반란이나 도망 등으로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려 했다.[236] 이러한 상황은 14, 15세기에 장원제의 동요를 가져왔다. 부역의 금납화가 진행되고 영주 직영지가 해체되면서 15세기에는 독립 자영 농민층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장원제와 봉건 영주제 붕괴의 위기 속에서 봉건 영주들이 부역 부활, 중세(重稅) 부과 등 봉건 반동을 강화하자, 프랑스의 자크리의 난(1358), 영국의 와트 타일러의 난(1381)과 같은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238]

1300년에서 1350년경, 중세 온난기는 소빙하기로 변화하였다.[230] 추워진 기후는 농업 위기를 초래했으며, 그 첫 번째는 대기근으로 알려져 있다.[231] 그러나 이 기근으로 인한 인구 감소는 전염병, 특히 흑사병만큼 심각하지 않았다.[232] 이 유행병으로 인한 사망률은 3분의 1에서 60%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233] 1420년경, 반복되는 역병과 기근으로 유럽 인구는 한 세기 전의 3분의 1 이하로 감소했을 것이다.[234] 자연 재해의 영향은 무력 충돌, 특히 백년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에서 더욱 심해졌다.[235]

유럽 인구가 크게 줄면서 생존자들에게 토지가 더 풍부해졌고, 노동력은 더 비싸졌다.[236] 1351년 영국 노동자 법과 같이 지주들이 임금을 강제로 삭감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237] 이러한 노력은 농민들 사이에 원망을 불러일으켜 1358년 프랑스의 자크리의 난과 1381년 영국의 농민 반란과 같은 반란으로 이어졌다.[238] 장기적으로는 서유럽에서 농노제가 사실상 종식되었다.[239] 반면, 동유럽에서는 지주들이 농민들을 더욱 억압적인 속박으로 강요했다.[240]

흑사병으로 인한 격변은 유대인과 같은 특정 소수 집단을 특히 취약하게 만들었는데, 이들은 재앙의 원인으로 자주 비난받았다.[241] 반유대주의 포그롬이 유럽 전역에서 자행되었으며, 1349년 2월에는 스트라스부르에서 2,000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다.[242] 국가 또한 유대인에 대한 차별에 책임이 있었다. 군주들은 백성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1290년 영국에서, 1306년 프랑스에서, 1492년 스페인에서, 1497년 포르투갈에서 유대인을 추방했다.[243]

유대인들이 박해를 받는 동안, 중세 후기에 권한이 강화된 또 다른 집단은 여성이었다. 이 시기의 커다란 사회적 변화는 상업, 학문, 종교 분야에서 여성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244] 그러나 동시에, 마녀사냥에 대한 믿음이 증가하면서 여성들은 비난과 박해에 취약해지기도 했다.[244]

14세기 중반까지 유럽은 꾸준히 증가하는 도시화를 경험했다.[245] 도시 또한 흑사병으로 황폐화되었지만, 학습, 상업, 정부의 중심지로서 도시의 역할은 지속적인 성장을 보장했다.[246] 1500년경에는 베네치아, 밀라노, 나폴리, 파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각각 10만 명 이상의 인구가 있었을 것이다.[247] 22개의 다른 도시들은 4만 명 이상이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이탈리아와 이베리아 반도에 있었지만,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 저지대 국가, 그리고 영국 런던에도 있었다.[247]

2. 4. 백년전쟁

1328년 카페 왕조가 단절되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발루아 왕조의 필리프 6세에 대항하여 자신의 카페 왕조 상속권을 주장하고, 이를 구실로 전쟁을 시작했다. 전쟁 초기에는 영국군이 우세하여 에드워드 흑태자가 이끌었던 궁병대는 프랑스 기사군을 크레시 전투(1346), 푸아티에 전투(1356)에서 격파하였다. 플랑드르의 도시 칼레가 함락된 것도 이 때이다. 그동안 프랑스는 거듭되는 전란과 흑사병의 맹위로 극히 피폐되었으며, 태자 샤를은 파리의 에티엔 마르셀의 난과 자크리의 난을 진압한 후, 겨우 1360년 영국과 브레티니 조약을 맺었다. 즉위 후 샤를 5세는 군제개혁과 왕실재정의 강화에 노력하고, 아키텐 귀족의 반항으로 동요하는 영국에 대하여 공세로 나가, 그의 치세 동안에 거의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1]

1380년 샤를 5세가 죽은 후 왕제, 제후의 섭정 정치하에서 국정은 다시 문란해지고, 더욱이 샤를 6세의 정신병이 악화된 데다, 왕족 제후의 대립이 아르마냐크파부르고뉴파의 항쟁으로 발전하여 국내는 완전히 분열되었다. 영국 왕 헨리 5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1415년 노르망디 상륙, 아쟁쿠르 전투에서 아르마냑 군을 격파하고, 1420년 트루아 조약에 의해 광왕 샤를로부터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획득하였다. 그 후 1422년 헨리 5세, 샤를 6세가 잇달아 죽자, 헨리 6세는 소위 영·프 복합 왕국의 왕호를 칭하고, 한편 샤를 7세는 르와르 이남에 위축되어 전혀 위세를 떨치지 못했다. 그러던 중 1429년 잔 다르크가 출현하여, 포위된 오를레앙을 해방시킨 이래, 프랑스 군은 마침내 공세로 나아가, 1435년 부르고뉴 공작과의 화약이 성립되고, 다음 해 파리를 탈환하여 칼레를 제외한 전 프랑스 영토에서 영국군을 격퇴하였다.[2] 이 전쟁으로 프랑스에서는 상비군의 창설, 왕실 재정의 확립, 제후 세력의 억압 등으로 왕권이 강화되었으며, 영국에서도 이 전쟁 직후에 일어난 장미 전쟁 때 겨우 절대주의 왕권이 성장하여 두 나라는 모두 중앙집권적 국가로서의 단서가 열리게 되었다.[3]

2. 5. 장미전쟁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를 잃은 것에 대한 불만이 영국 국내에서 커지면서, 1453년 전쟁이 끝나자 랭커스터 왕가와 요크 왕가가 왕위를 두고 다투는 장미 전쟁(1455년~1485년)이 발발했다.[192]

이 전쟁은 요크 왕가가 시작한 강력하고 중앙 집권화된 왕권을 이어받은 튜더 왕가의 헨리 8세가 즉위하면서 끝났다.[193]

2. 6. 오스만 제국의 발흥과 동유럽의 위기

동로마 제국은 오랫동안 동지중해의 정치와 문화를 지배했다.[51] 그러나 14세기 무렵에는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으로 거의 붕괴되었고, 콘스탄티노플과 그리스의 몇몇 영토에 집중되어 있었다.[52]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으로 비잔틴 제국은 영원히 멸망했다.[53]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은 14세기에 쇠퇴했고, 세르비아의 부상은 1330년 벨바즈드 전투에서 세르비아가 불가리아를 상대로 승리하면서 두드러졌다.[54] 1346년에는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두샨이 황제로 선포되었다.[55] 그러나 세르비아의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라자르 흐르벨랴노비치가 이끄는 세르비아군은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 군대에 패배했고, 이 전투에서 대부분의 세르비아 귀족이 사망했으며, 국토 남부는 오스만 제국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남부 불가리아의 상당 부분은 1371년 마리차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 영토가 되었다.[56] 불가리아의 북부 잔존 세력은 결국 1396년에 정복되었고, 세르비아는 1459년, 보스니아는 1463년에 멸망했으며, 알바니아는 스칸데르베그 사망 후 몇 년 뒤인 1479년에 마침내 복속되었다. 당시 헝가리 영토였던 벨그라드는 1521년 벨그라드 공방전에서 오스만 제국에 함락된 마지막 대규모 발칸 도시였다. 중세 시대 말에 발칸 반도 전체가 오스만 제국에 병합되거나,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 되었다.[56]

2. 7. 이베리아 반도의 통일과 신항로 개척

카스티야 왕국코르도바(1236년), 세비야(1248년)를 점령하여 이슬람 세력을 압박하고 아프리카 침입을 계획했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귀족의 힘이 강해지고 농업은 쇠퇴했으며, 강력한 무력과 경제력을 가진 대교단이 생겨나 훗날 스페인 국가의 불균형을 초래했다.[63]

아라곤 왕국카탈루냐를 합병하고 발레아레스 제도를 점령(1229년-1235년)하며 지중해로 진출했다. 북아프리카 정복을 계획하고 십자군을 자처하여 시칠리아를 점령했으나(1282년-1285년), 국내 귀족과 도시는 이에 반대하여 코르테스(국왕 봉신 회의) 이름으로 1283년 왕권 제한을 결의했다(아라곤의 마그나 카르타). 이후 국왕은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를 교환하고 제노바, 피사와 오랫동안 싸웠으나, 14세기 중반 코르테스를 누르고 15세기 초 시칠리아를 합병하여 서지중해를 제패했다.

포르투갈 왕국은 1294년 잉글랜드와 통상 조약을 체결하여 경제 발전에 힘썼고, 카스티야를 격파하여 1385년 독립을 확고히 했다. 15세기에는 항해왕자 엔히케의 주도로 아프리카 해안을 탐험했고,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로 가는 해상 항로를 발견했다.[65]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결혼(1469년)과 아라곤의 후안 2세의 사망(1479년)으로 스페인이 탄생했다.[63] 1492년 그라나다를 점령하여 레콩키스타를 완료했다.[64] 스페인 군주들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인도 서쪽 해상 항로 탐험을 지원했고, 이는 1492년 아메리카 대륙 발견으로 이어졌다.[66]

3. 각국의 발전

기독교 유럽의 경계는 14세기와 15세기에 여전히 변화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대공국몽골 제국을 격퇴하기 시작했고, 이베리아 반도 왕국들이 반도의 레콩키스타를 완료하고 외부로 시선을 돌리는 동안, 발칸 반도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놓였다.[15] 한편, 대륙의 나머지 국가들은 거의 끊임없는 국제적 또는 내부적 갈등에 휩싸였다.[15]

이러한 상황은 점차 중앙 권력의 통합과 국가의 출현으로 이어졌다.[16] 전쟁의 재정적 요구는 더 높은 수준의 과세를 필요로 했고, 그 결과 잉글랜드 의회를 비롯한 대표 기구의 출현으로 이어졌다.[17] 세속 권력의 성장은 서구 대이교와 종교 개혁의 도래와 함께 교황청의 쇠퇴로 더욱 촉진되었다.[18]

1319년부터 1365년까지 스웨덴노르웨이의 연합이 실패한 이후, 1397년에 범 스칸디나비아적인 칼마르 동맹이 수립되었다.[19] 스웨덴은 처음부터 덴마크가 지배하는 동맹의 일원이었다.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는 1520년 스톡홀름 피바다에서 많은 스웨덴 귀족을 살해하여 스웨덴을 굴복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더 심한 적대 행위를 불러일으켰고, 스웨덴은 1523년에 완전히 분리되었다.[20] 반면에 노르웨이는 동맹의 일원이 되었고 1814년까지 덴마크와 연합 상태로 남았다.

아이슬란드는 상대적인 고립으로 흑사병의 영향을 받은 마지막 스칸디나비아 국가였다.[21] 한편, 그린란드의 노르드 식민지는 15세기의 극한 기상 조건으로 인해 멸망했다.[22] 이러한 조건은 소빙하기의 영향이었을 수 있다.[23]

헝가리 왕국은 14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다.[40] 앙주 왕가의 왕인 카로이 1세 (1308–42)와 그의 아들 러요시 대왕 (1342–82)의 통치는 성공적이었다.[41] 헝가리는 유럽의 주요 금과 은 공급국으로서 부유해졌다.[42] 러요시 대왕은 리투아니아에서 남부 이탈리아까지, 폴란드에서 북부 그리스까지 성공적인 원정을 이끌었다. 그는 14세기에 막대한 군대를 보유하여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었다. 한편, 폴란드는 리투아니아 대공국과의 연방으로 인해 이 지역에 거대한 실체를 형성하면서 동쪽으로 시선을 돌렸다.[43] 연방 결성과 리투아니아의 개종은 유럽에서 이교의 종말을 알리는 사건이었다.[44]

슬로바키아의 베코프 성 유적


러요시는 1382년 사망 후 아들을 상속자로 남기지 않았다. 대신 그는 어린 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트 공작을 상속자로 지명했다. 헝가리 귀족들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결과 내전이 일어났다. 지기스문트는 결국 헝가리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얻었고 부다와 비셰그라드에 궁정을 설치했다. 보헤미아 왕위와 신성 로마 제국을 상속받은 지기스문트는 헝가리에서 정치를 계속했지만, 후스파오스만 제국과 싸우느라 바빴다.

헝가리의 마차시 코르비누스 왕은 헝가리의 흑군을 이끌며 모라바오스트리아를 정복하고 오스만 제국과 싸웠다. 이탈리아 다음으로 헝가리는 르네상스가 나타난 최초의 유럽 국가였다.[45] 그러나 헝가리의 러요시 2세가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 의해 사망하면서 왕국의 영광은 16세기 초에 끝났다.

비잔틴 제국은 오랫동안 동지중해의 정치와 문화를 지배했다.[51] 그러나 14세기 무렵에는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으로 거의 붕괴되었고, 콘스탄티노플과 그리스의 몇몇 영토에 집중되어 있었다.[52]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으로 비잔틴 제국은 영원히 멸망했다.[53]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은 14세기에 쇠퇴했고, 세르비아의 부상은 1330년 벨바즈드 전투에서 세르비아가 불가리아를 상대로 승리하면서 두드러졌다.[54] 1346년에는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두샨이 황제로 선포되었다.[55] 그러나 세르비아의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라자르 흐르벨랴노비치가 이끄는 세르비아군은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 군대에 패배했고, 이 전투에서 대부분의 세르비아 귀족이 사망했으며, 국토 남부는 오스만 제국의 점령 하에 놓였다. 또한 남부 불가리아의 상당 부분은 1371년 마리차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 영토가 되었다.[56] 불가리아의 북부 잔존 세력은 결국 1396년에 정복되었고, 세르비아는 1459년, 보스니아는 1463년에 멸망했으며, 알바니아는 스칸데르베그 사망 후 몇 년 뒤인 1479년에 마침내 복속되었다. 당시 헝가리 영토였던 벨그라드는 1521년 벨그라드 공방전에서 오스만 제국에 함락된 마지막 대규모 발칸 도시였다. 중세 시대 말에 발칸 반도 전체가 오스만 제국에 병합되거나,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 되었다.[56]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1469년 결혼과 아라곤의 후안 2세의 1479년 사망으로 오늘날의 스페인이 탄생했다.[63] 1492년 그라나다무어인으로부터 점령되어 레콩키스타가 완료되었다.[64] 포르투갈은 15세기 동안, 특히 항해왕자 엔히케 치하에서 아프리카 해안을 점차 탐험했고, 1498년 바스코 다 가마는 인도로 가는 해상 항로를 발견했다.[65] 스페인 군주들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인도 서쪽 해상 항로 탐험을 지원하여 포르투갈의 도전에 대응했고, 이는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이어졌다.[66]

3. 1. 프랑스

부빈에서의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승리


필리프 2세는 영국 왕 으로부터 프랑스 국내의 봉지(封地)를 몰수하고, 노르망디, 브레타뉴, 앙주를 왕령에 추가했으며, 부빈 싸움(1214)에서 존과 독일 황제 오토 4세에게 승리했다. 알비조아 십자군 때는 남프랑스의 툴루즈를 지배 아래 넣었다. 프랑스에서는 “봉주(封主) 없는 토지 없다.”, 국왕은 “일체의 봉주에 우선되는 무조건적 봉주”라는 봉건법적 원칙이 관철되어 집권적 봉건 왕정이 형성되었다. 이를 유지한 관료제는 필리프 2세부터 루이 9세의 치세에 걸쳐 정비되었다. 중앙에는 최고 법정 파루루먼 및 회계원이 있고, 시민 계급 출신의 법조가가 활약했다. 지방 행정은 국왕이 임명하는 유급 관료인 바이이(Baillis), 세네샬(Snchal) 및 하급 관리인 프레보(Prvot, 청부제 관리)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었다. 왕권의 확대는 교황과의 충돌을 초래했다. 필리프 4세는 보니파시오 8세와 승려 과세권(僧侶課稅權)을 둘러싸고 대립하여 3부회를 소집하였으며(1302), 다음해 교황을 아나니에서 습격하여 분사시켰다. 그의 통치에서는 법조가적 정치 고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집권 체제는 정점에 달했다.

이후 프랑스는 영국과 치열한 백년전쟁을 치렀고, 프랑스에서는 절대왕정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1328년 카페 왕조를 계승한 프랑스의 발루아 왕가는 처음에는 자국 내에서 소외되었는데, 이는 먼저 백년 전쟁의 잉글랜드 침략군에 의해서였고, 나중에는 강력한 부르고뉴 공국에 의해서였다.[31] 군사 지도자로서 잔 다르크의 등장은 프랑스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쟁의 흐름을 바꾸었고, 이 주도권은 루이 11세에 의해 더욱 확대되었다.[32]

한편, 용담공 샤를은 자신의 영토를 통합하려는 시도에서 특히 1291년에 형성된 스위스 구 연방으로부터 저항에 직면했다.[33] 샤를이 1477년 낭시 전투에서 부르고뉴 전쟁 중 사망하자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에 의해 회수되었다.[34] 동시에 부르고뉴 백국과 부유한 부르고뉴 네덜란드는 합스부르크의 지배하에 신성 로마 제국으로 들어가 앞으로 수 세기 동안 갈등을 야기했다.[35]

3. 2. 영국

앙게랑 드 몽스트렐레의 15세기 미니어처, 아쟁쿠르 전투


1286년 스코틀랜드의 알렉산더 3세가 사망하면서 스코틀랜드는 왕위 계승 위기에 빠졌고,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가 중재에 나섰다.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했고, 이것이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으로 이어졌다.[24] 잉글랜드는 결국 패배했고, 스코틀랜드는 스튜어트 왕가 아래에서 더 강력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25]

1337년부터 잉글랜드는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를 주된 관심사로 삼았다.[26] 헨리 5세는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승리하여 잠시 두 왕국의 통일을 위한 길을 열었지만, 그의 아들 헨리 6세는 곧 이전의 모든 성과를 잃었다.[27] 프랑스 상실은 국내 불만을 야기했다. 1453년 전쟁이 끝난 직후, 랭커스터 왕가와 요크 왕가의 경쟁 왕조가 관련된 장미 전쟁 (c. 1455–1485)의 왕위 다툼이 시작되었다.[28]

전쟁은 튜더 왕가의 헨리 7세가 즉위하면서 끝났으며, 그는 요크 왕조 왕들이 시작한 강력하고 중앙 집권적인 군주국 건설을 계속했다.[29] 잉글랜드가 다른 곳에 관심을 쏟는 동안, 아일랜드의 히버노-노르만 영주들은 점차 아일랜드 사회에 동화되어 갔고, 섬은 잉글랜드의 종주권 아래 사실상 독립적인 발전을 허용받았다.[30]

3. 3. 독일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황제 정책 속에서 독일의 분권적 경향은 이미 준비되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성속 제후(聖俗諸侯)를 위한 2칙령에서 많은 특권을 승인한 것은 영방국가 형성의 첫걸음이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 단절 후 대공위 시대와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고 황제의 지위도 선거후(選擧侯) 등의 이해에 좌우되어 권위를 잃었으며, 반대로 영방군주·제후에 의한 영방 내의 권력 집중이 진행되었다. 룩셈부르크가의 카를 4세가 내린 금인칙서는 선거왕제(選擧王制)를 법정화하여 제국의 안정과 통일을 기도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독일의 영방국가 체제를 확실하게 굳혔다.[19]

보헤미아는 14세기에 번성했고, 1356년 금인칙서에 따라 보헤미아 왕은 선제후들 중에서 으뜸이 되었지만, 후스 전쟁으로 인해 국가는 위기에 빠졌다.[36] 신성 로마 제국은 1438년 합스부르크 왕가로 넘어가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 때까지 그들의 지배하에 있었다.[37] 그러나 합스부르크 군주국이 광대한 영토를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 자체는 분열된 상태로 남아 있었으며, 실제 권력과 영향력은 개별 공국에 많이 있었다.[38] 또한, 한자동맹과 푸거 가문과 같은 금융 기관들은 경제적, 정치적 측면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39]

3. 4. 이탈리아

12, 13세기 도시 귀족에 의한 도시공화제가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상공 시민층이 동직 조합을 결성하여 정치적 발언권을 강화하고 도시 귀족과의 대립을 심화시켰다. 이로 인해 도시에서는 여러 당파와 이해관계가 없는 외부의 봉건귀족이 포데스타(Podesta)로서 군사·사법권을 위임받았다. 이 시기 귀족적 시민 상호간의 당파 싸움은 황제당·봉건 귀족층에 대항하는 교황당·신흥 부상층(富商層)이라는 정치적 대립을 형성했다.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2세 아래서 이 당쟁은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그의 사후 프랑스는 앙주가의 샤를이 시칠리아 왕국을 지배했는데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으로 패퇴, 아라곤 왕가가 이와 대치했다. 이 혼란의 과정에서 대부분의 도시는 세습적 시뇨리아가 지배하게 되었다.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 등 세 도시는 공화정(共和政)을 계속 유지했으나 최후까지 변하지 않았던 곳은 베네치아뿐이었다.

아비뇽에는 1309년부터 1376년까지 교황청이 있었다.[220] 1378년에 교황이 로마로 돌아가면서 교황령은 알렉산데르 6세의 사실상 타락한 교황권 시기에 주요 세속 권력으로 발전했다.[221] 피렌체는 금융업을 통해 이탈리아 도시 국가 중에서 뛰어난 존재가 되었고, 메디치 가문은 예술을 후원함으로써 르네상스의 중요한 후원자가 되었다.[222] 밀라노베네치아와 같은 북이탈리아의 다른 도시 국가들도 영토를 넓히고 권력을 강화했다.[223] 14세기 초 시칠리아 만종 전쟁(영어)으로 남부 이탈리아는 아라곤 왕가의 시칠리아 왕국과 앙주 왕가의 나폴리 왕국으로 분단되었다.[224] 1442년, 두 왕국은 아라곤 왕가의 지배 아래 사실상 통합되었다.[225]

3. 5. 러시아

킵차크 한국의 지배 아래 13세기 러시아는 퇴보를 거듭했다. 그러나 14세기 중반, 이반 1세모스크바 대공국이 발전하기 시작했고, 이반 3세 때인 1480년에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함과 동시에 국내 통일을 추진했다.[209][210] 모스크바 대공국은 쿨리코보 전투에서 킵차크 칸국을 격파하는 등 점차 힘을 키웠다.[210]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한 동로마 제국의 후계자이자 그리스 정교의 옹호자를 자처한 이반 3세의 사업은 손자인 이반 4세에게 계승되었다. 이반 4세는 국내 귀족 세력을 탄압하고 왕권을 강화했으며, 이반 3세 때부터 사용된 차르 칭호가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반 4세는 카잔 한국, 아스트라한 칸국을 병합하고 예르마크를 통해 시베리아 정복을 시작했다.[212][213]

4. 사회와 경제

1300년에서 1350년경, 중세 온난기에서 소빙하기로 기후 변화가 일어났다.[67] 이로 인해 1315~1317년 대기근과 같은 농업 위기가 발생했지만,[68] 흑사병과 같은 이후의 전염병만큼 심각한 인구 감소를 초래하지는 않았다.[69] 14세기 중반, 유럽은 도시화가 꾸준히 증가했으며,[84] 흑사병으로 도시 역시 황폐화되었지만, 학습, 상업, 정부의 중심지로서 도시의 역할은 지속적인 성장을 보장했다.[85]

14세기 중반 흑사병으로 인구가 크게 줄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졌다. 1351년 영국 노동자 법과 같이 임금을 억제하려는 시도는 농민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75] 이는 1358년 프랑스의 자크리의 난과 1381년 영국의 농민 반란으로 이어졌다.[76] 결과적으로 서유럽에서는 농노제가 사실상 종식되었지만,[77] 동유럽에서는 지주들이 농민들을 더욱 억압했다.[78] 흑사병은 유대인과 같은 소수 집단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었고, 반유대주의 포그롬이 유럽 전역에서 발생했다.[79]

13세기 후반과 14세기 전반, 이탈리아와 신성 로마 제국 일부에서는 '상업 혁명'이라 불리는 변화가 일어났다.[289] 주식회사보험 발행, 환어음과 같은 새로운 금융 기법이 등장했고, 복식 부기와 같은 새로운 회계 형태가 사용되었다.[290] 도시에서는 길드의 권한이 확대되었고,[291] 독일의 푸거 가문,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 등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292]

지중해에서 오스만 제국의 세력 확장은 서유럽 국가들의 무역을 방해했고, 포르투갈스페인인도와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했다.[284] 제노바베네치아 상인들이 플랑드르와 직접 해상 경로를 열면서 샹파뉴의 중요성은 감소했고,[286] 잉글랜드의 양모 수출 변화는 저지대 국가의 천 제조업에 타격을 주었다.[287] 발트해북해에서는 한자 동맹이 14세기에 정점에 달했지만, 15세기에는 쇠퇴하기 시작했다.[288]

14세기의 인구 위기로 인한 '''절대적인''' 감소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쇠퇴가 인구 감소보다 컸는지에 대한 역사 논쟁이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293] 르네상스 예술품이 엄청난 융성의 결과라는 정통적인 학설이 있었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르네상스 불황"이 있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294] 그러나 통계상의 증거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에는 매우 불완전하다.[295]

4. 1. 농촌 사회의 변화

14세기 중반 흑사병으로 인구가 크게 줄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졌다. 영주들은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농민들의 부담을 줄여주었고, 농민들은 반란이나 도망 등으로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높였다.[15] 14, 15세기에는 장원제가 흔들렸고, 부역 대신 돈을 내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영주 직영지가 해체되면서 15세기에는 독립적인 자영 농민층이 나타났다.[15]

이러한 장원제와 봉건 영주제의 붕괴 위기 속에서, 봉건 영주들이 부역을 부활시키고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는 등 봉건 반동을 강화하자, 프랑스의 자크리의 난(1358), 영국의 와트 타일러의 난(1381)과 같은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15]

1300년에서 1350년경 중세 온난기가 끝나고 소빙하기가 시작되면서[67] 추운 기후로 인해 농업 위기가 발생했고, 1315~1317년 대기근이 발생했다.[68] 그러나 이 기근으로 인한 인구 감소는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만큼 심각하지는 않았다.[69]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률은 3분의 1에서 60%에 달했다.[70] 1420년경에는 반복되는 역병과 기근으로 유럽 인구가 100년 전보다 3분의 1 이하로 줄었다.[71] 이러한 자연재해는 백년 전쟁과 같은 전쟁으로 인해 더욱 심해졌다.[72]

유럽 인구가 크게 줄면서 생존자들에게는 토지가 더 풍부해졌고, 노동력의 가치는 더 비싸졌다.[74] 1351년 영국 노동자 법과 같이 지주들이 임금을 강제로 낮추려는 시도는 실패했다.[75] 이러한 노력은 농민들의 원한을 샀고, 결국 1358년 프랑스의 자크리의 난, 1381년 영국의 농민 반란과 같은 반란으로 이어졌다.[76] 그 결과 서유럽에서는 농노제가 사실상 끝났다.[77] 반면, 동유럽의 지주들은 이 상황을 이용하여 농민들을 더욱 억압적인 속박으로 몰아넣었다.[78]

흑사병으로 인한 혼란은 유대인들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었다.[79] 이들은 재앙의 원인으로 자주 비난받았고, 반유대주의 포그롬이 유럽 전역에서 벌어졌다. 1349년 2월에는 스트라스부르에서 2,000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다.[80] 국가 또한 유대인 차별에 책임이 있었는데, 군주들은 백성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1290년 영국, 1306년 프랑스, 1492년 스페인, 1497년 포르투갈에서 유대인을 추방했다.[81]

4. 2. 도시의 발전과 상공업의 성장

12, 13세기 도시 귀족에 의한 도시공화제가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상공 시민층은 동직 조합을 결성하여 정치적 발언권을 강화하고 도시 귀족과의 대립을 심화시켰다. 이에 따라 도시에서는 여러 당파와 이해관계가 없는 외부의 봉건귀족이 포데스타(Podesta)로서 군사·사법권을 위임받았다. 이 시기 귀족과 시민 상호 간의 당파 싸움은 황제당·봉건 귀족층에 대항하는 교황당·신흥 부상층(富商層)이라는 정치적 대립으로 나타났다.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2세 치하에서 이 당쟁은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그의 사후 프랑스는 앙주가의 샤를이 시칠리아 왕국을 지배했으나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으로 패퇴, 아라곤 왕가가 대치하게 된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대부분의 도시는 세습적 시뇨리아가 지배하게 되었다.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 등 세 도시는 공화정을 계속 유지했으나, 최후까지 변하지 않았던 곳은 베네치아뿐이었다.

지중해에서 증대되는 오스만 제국의 우세는 서쪽의 기독교 국가들에게 무역의 장애를 발생시켰고, 이들은 새로운 무역로를 찾기 시작했다.[284] 포르투갈과 스페인 탐험가들은 인도로 향하는 아프리카 남부나 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하는 대서양을 횡단하는 새로운 통상로를 발견했다.[285] 제노바베네치아 상인들이 플랑드르와 직접 해상 경로를 열면서 샹파뉴는 중요성이 떨어지게 되었다.[286]

동시에 잉글랜드의 양모 수출은 깎은 양털에서 가공한 천으로 전환되어 저지 지역의 천 제조업에 타격을 주었다.[287] 발트해북해에서는 한자 동맹이 14세기에 정점에 달했지만, 15세기에는 쇠퇴하기 시작했다.[288]

13세기 후반과 14세기 전반에는 주로 이탈리아와 신성 로마 제국 일부에서 역사학자들이 "상업 혁명"이라고 명명한 움직임이 있었다.[289] 이 시대의 혁신으로는 상사의 새로운 형태나 보험 발행이 있었고, 이들은 모두 상업 투기의 위험을 줄이는 데 기여했다. 또한 고리대금업에 대한 기독교도를 위한 교회법을 회피하는 환어음 등의 신용 거래 형태나 귀금속 운반의 위험을 제거하는 새로운 형태의 회계(특히 복식 부기)는 더 큰 감시와 정확성을 요구했다.[290]

금융이 확대되면서 무역권은 대형 상인들에 의해 꼼꼼하게 지켜졌다. 잉글랜드의 양모 섬유처럼 특정 무역에서 독점을 전국 규모의 특별한 회사가 보장받게 되면서, 도시에서는 길드의 권한이 확대되었다.[291] 이러한 발전으로 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독일의 푸거 가문이나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 잉글랜드의 서퍽 공작과 같은 가문이나 프랑스의 자크 쾨르와 같은 개인은 국왕의 전쟁에 금융 지원을 제공하고, 그 과정에서 큰 정치적 권세를 얻게 된다.[292]

14세기의 인구 위기가 '''절대적인''' 조건으로 극적인 감소를 초래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쇠퇴가 인구 감소보다 컸는가에 대한 활발한 역사 논쟁이 있다.[293] 오래된 정통적인 학설은 르네상스의 예술품이 엄청난 융성의 결과라고 했지만, 최근 연구는 소위 "르네상스 불황"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제안한다.[294] 이 사례에 대해 납득할 만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통계상의 증거는 명확한 결론을 얻기에는 매우 불완전하다.[295]

4. 3. 화폐 경제의 발달

13세기 후반과 14세기 전반, 이탈리아와 신성 로마 제국 일부에서 '상업 혁명'이라 불리는 움직임이 있었다.[289] 이 시기에는 주식회사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상사가 등장하고 보험 발행이 이루어져 상업 투자의 위험을 줄였다. 또한, 환어음과 같은 새로운 신용 거래 형태가 나타나 귀금속 운반의 위험을 없애고 기독교도의 고리대금업에 대한 교회법을 회피했다. 특히 복식 부기와 같은 새로운 회계 형태는 더욱 정확한 감시를 가능하게 했다.[290]

금융이 확대되면서 무역권은 대형 상인들에 의해 꼼꼼하게 지켜졌다. 도시에서는 길드의 권한이 확대되었고, 잉글랜드의 양모 섬유처럼 특정 무역에서 독점을 전국 규모의 특별한 회사가 보장받기도 했다.[291] 이러한 발전을 통해 독일의 푸거 가문,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 잉글랜드의 서퍽 공작, 프랑스의 자크 쾨르와 같은 가문이나 개인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국왕에게 전쟁 자금을 지원하며 큰 정치적 권세를 얻었다.[292]

지중해에서 오스만 제국의 지배력이 커지면서 서쪽의 기독교 국가들은 무역에 어려움을 겪었고, 새로운 무역로를 찾기 시작했다.[284] 포르투갈스페인 탐험가들은 인도로 향하는 아프리카 남부 항로나 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하는 대서양 횡단 항로를 발견했다.[285] 제노바베네치아 상인들이 플랑드르와 직접 해상 경로를 열면서 샹파뉴의 중요성은 감소했다.[286]

동시에 잉글랜드의 양모 수출이 깎은 양털에서 가공한 천으로 전환되면서 저지 지역의 천 제조업에 타격을 주었다.[287] 발트해북해에서는 한자 동맹이 14세기에 정점에 달했지만, 15세기에는 쇠퇴하기 시작했다.[288]

14세기의 인구 위기로 인한 '''절대적인''' 감소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쇠퇴가 인구 감소보다 컸는지에 대한 역사 논쟁이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293] 르네상스 예술품이 엄청난 융성의 결과라는 정통적인 학설이 있었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르네상스 불황"이 있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294] 그러나 통계상의 증거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에는 매우 불완전하다.[295]

5. 문화

중세 후기의 문화는 르네상스와 같은 혁신과 여러 위기 상황들이 공존했던 시기였다. 14세기와 15세기를 연구한 18세기 역사가들은 고대 지식의 재발견과 개인 정신의 출현을 특징으로 하는 르네상스를 중심으로 연구했다.[6]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이탈리아에서 "인간은 정신적 개인이 되었고 스스로를 그렇게 인식했다"고 주장했다.[7] 그러나 12세기가 더 큰 문화적 성취를 이룬 시대였다는 반론도 제기되었다.[8]

경제 및 인구 통계 방법이 역사 연구에 적용되면서, 중세 후기는 점차 경기 침체와 위기의 시기로 여겨졌다. 앙리 피렌은 중세를 초기, 고, 후기로 세분화했다.[9] 요한 호이징가는 『중세의 가을』을 통해 중세 후기에 대한 비관적인 견해를 대중화했다.[10] 그는 프랑스와 저지대 국가를 중심으로 연구하며 절망과 쇠퇴를 주요 주제로 삼았다.[11][12]

현대 역사학은 혁신과 위기 사이에서 합의에 도달했다. 알프스 북쪽과 남쪽의 상황이 크게 달랐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되며, 이탈리아 역사학에서는 "중세 후기"라는 용어가 완전히 회피되는 경우가 많다.[13] "르네상스"라는 용어는 특정 지적, 문화적, 예술적 발전을 설명하는 데 여전히 유용하지만, 유럽 전체 역사 시대를 정의하는 특징으로는 간주되지 않는다.[14] 14세기 초부터 16세기까지의 기간은 인구 및 경제적 쇠퇴와 회복, 서구 종교의 종말과 그에 따른 국가의 출현, 유럽의 영향력이 나머지 세계로 확대되는 경향으로 특징지어진다.[14]

중세 후기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전은 자국어의 부상이었다.[157] 8세기부터 잉글랜드에서, 11세기부터 프랑스에서 자국어가 사용되었으며, 가장 인기 있는 장르는 무훈시, 음유 시인의 가사 및 로망스였다.[158] 이탈리아는 자국어로 된 문학을 발전시키는 데 늦었지만,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발전은 여기서 이루어졌다.[159] 단테 알리기에리의 14세기 초에 쓰여진 ''신곡''은 중세적 세계관과 고전적 이상을 융합했다.[160]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이탈리아어를 장려했다.[161] 단테와 보카치오는 이탈리아어뿐만 아니라 라틴어로도 글을 썼고, 페트라르카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칸치오네레''는 자국어를 장려했으며, 그 내용은 최초의 현대 서정시로 여겨진다).[162] 이 세 명의 시인은 토스카나 방언을 현대 이탈리아어의 기준으로 확립했다.[163] 새로운 문학 스타일은 프랑스에서는 외스타슈 데샹과 기욤 드 마쇼에게 영향을 미쳤다.[164] 잉글랜드에서 제프리 초서는 ''캔터베리 이야기''를 통해 중세 영어를 문학 언어로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165] 자국어 문학의 확산은 보헤미아와 발트해, 슬라브, 비잔틴 세계까지 이르렀다.[166]

14세기 중세 필사본에서 한 음악가가 비엘을 연주하고 있다.


음악은 세속 문화와 영적 문화 모두에서 중요한 부분이었으며, 대학교에서는 자유 학예의 ''사학''의 일부를 구성했다.[167] 13세기 초부터 지배적인 종교 음악 형식은 모테트였다.[168] 1330년대부터는 다성 음악 스타일이 등장했다.[169] 다성 음악은 프로방스트루바두르의 세속 음악에서 흔했다. 이들 중 많은 수가 13세기 알비 십자군의 희생자가 되었지만, 그들의 영향은 아비뇽의 교황 궁정에까지 이르렀다.[170] ''아르스 노바''의 주요 대표자는 작곡가 필리프 드 비트리기욤 드 마쇼였다.[171] 이탈리아에서는 트레첸토 음악이라고 불렸으며, 주요 작곡가로는 조반니 다 카시아, 야코포 다 볼로냐, 프란체스코 란디니가 있었다.[172] 14세기 전반의 동방 정교회 음악의 저명한 개혁가로는 요안니스 쿠쿠젤리스가 있었다.

영국 제도에서는 중세 시대에 약 127개의 다양한 마을에서 연극이 제작되었다. 이러한 자국어 미스터리 연극은 많은 수의 연극으로 구성된 사이클로 쓰여졌다. 요크 (48편), 체스터 (24편), 웨이크필드 (32편), 알 수 없음 (42편)이 그것이다. 이 시기에는 프랑스독일에서 더 많은 수의 연극이 남아 있으며, 중세 후기에는 거의 모든 유럽 국가에서 어떤 형태의 종교극이 공연되었다. 이러한 연극 중 다수는 코미디, 악마, 악당, 광대를 포함했다.[173]

교훈극은 1400년경에 독특한 극의 형태로 등장하여 1550년까지 번성했는데, 그 예로는 ''인내의 성''이 있다. 또 다른 유명한 교훈극으로는 ''에브리맨''이 있다.

중세 후기 말에는 전문 배우들이 잉글랜드유럽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잉글랜드의 리처드 3세와 잉글랜드의 헨리 7세 모두 소규모의 전문 배우단을 유지했다. 또한 마머스극은 크리스마스 시즌 동안 공연되었고, 궁정 가면극도 중요했다. 이러한 가면극은 특히 헨리 8세의 통치 기간 동안 인기가 있었다.[174]

중세 드라마의 종말은 가톨릭 교회의 약화, 종교 개혁, 그리고 많은 국가에서 종교극 금지와 같은 여러 요인으로 인해 일어났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58년에 모든 종교극을 금지했고, 1580년대까지 거대한 사이클극은 중단되었다. 이와 유사하게, 1539년에는 네덜란드, 1547년에는 교황령, 1548년에는 파리에서 종교극이 금지되었다.[174]

5. 1. 르네상스의 시작

14세기에는 스콜라 철학의 지배적인 학문 경향에 르네상스 인문주의 운동이 도전했다. 이는 주로 고전 언어를 부활시키려는 시도였지만,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서방으로 피난해야 했던 비잔틴 제국 학자들의 영향으로 과학, 예술, 문학 분야에서도 혁신이 일어났다.[136]

과학 분야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전 권위에 고대 이후 처음으로 이의가 제기되었다. 예술 분야에서 인문주의는 르네상스의 형태로 나타났다. 15세기 르네상스는 주로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에 국한된 매우 지역적인 현상이었지만, 예술적 발전은 특히 네덜란드에서 더 북쪽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177]

르네상스 미술의 전조는 이미 14세기 초 조토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토는 고대 이후 3차원 현실을 표현하고 등장인물에게 진정한 인간적 감정을 부여하려는 시도를 한 최초의 화가였다.[146] 그러나 가장 중요한 발전은 15세기 피렌체에서 이루어졌다. 상인 계층의 부는 예술에 대한 광범위한 후원을 가능하게 했으며, 후원자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메디치 가문이었다.[147]

이 시대에는 원근법의 원리(이것은 마사초의 작품에서 발견되었고, 나중에 브루넬레스키에 의해 설명되었다)와 같은 몇 가지 중요한 기술적 혁신이 있었다.[148] 더 큰 현실감은 또한 도나텔로와 같은 예술가들이 옹호한 해부학의 과학적 연구를 통해 달성되었다.[149] 이것은 특히 고전 모델 연구에서 영감을 받은 그의 조각에서 잘 나타난다.[150] 운동의 중심이 로마로 옮겨감에 따라, 이 시대는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 같은 성기 르네상스의 거장들에 의해 절정에 달했다.[151]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사상은 알프스를 넘어 북유럽으로 전파되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저지대 국가에서도 중요한 예술적 혁신이 이루어졌다.[152] 얀 반 에이크는 – 이전에는 생각했던 것과 달리 – 유화의 발명가는 아니었지만, 새로운 매체를 옹호했으며 이를 사용하여 매우 사실적이고 세밀한 작품을 창조했다.[153] 두 문화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에게서 배웠지만, 네덜란드의 회화는 이탈리아의 이상적인 구도보다 질감과 표면에 더 집중했다.[154]

북유럽 국가에서는 고딕 건축이 여전히 규범으로 남아 있었고, 고딕 양식의 대성당은 더욱 정교해졌다.[155] 반면에 이탈리아에서는 건축이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고, 여기에서도 고전적인 이상에 영감을 받았다. 이 시대의 최고 작품은 피렌체의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으로, 조토의 종탑, 기베르티의 세례당 문, 브루넬레스키의 전례 없는 규모의 대성당 이 있다.[156]

5. 2. 인쇄술의 발명

요하네스 구텐베르크활자인쇄 기술은 종교 개혁뿐만 아니라 점차 평등주의 사회로 발전하는 지식의 보급을 가능하게 했다.[303] --

6. 종교

14세기와 15세기에 기독교 유럽의 경계는 재편되고 있었다. 모스크바 대공국몽골 제국을 격퇴하기 시작했고, 이베리아 반도 왕국들이 레콩키스타를 완료하고 외부로 시선을 돌리는 동안, 발칸 반도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놓였다.[15] 이러한 상황은 중앙 권력의 통합과 국가의 출현으로 이어졌다.[16] 전쟁으로 인한 재정적 요구는 더 높은 수준의 과세를 필요로 했고, 그 결과 잉글랜드 의회를 비롯한 대표 기구가 등장했다.[17] 세속 권력의 성장은 서구 대이교와 종교 개혁으로 교황청의 권위가 약화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18]

비잔틴 제국은 오랫동안 동지중해의 정치와 문화를 지배했지만,[51] 14세기 무렵에는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으로 전락하여 콘스탄티노플과 그리스의 몇몇 영토에 국한되었다.[52]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으로 비잔틴 제국은 멸망했다.[53]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은 14세기에 쇠퇴했고, 세르비아는 1330년 벨바즈드 전투에서 불가리아를 상대로 승리하면서 성장했다.[54] 1346년에는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두샨이 황제로 선포되었다.[55] 그러나 세르비아의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고,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라자르 흐르벨랴노비치가 이끄는 세르비아군이 오스만 군대에 패배하면서 대부분의 세르비아 귀족이 사망하고 국토 남부가 오스만 제국의 점령 하에 놓였다. 1371년 마리차 전투에서 남부 불가리아의 상당 부분이 오스만 제국 영토가 되었다.[56] 불가리아의 북부 잔존 세력은 1396년에 정복되었고, 세르비아는 1459년, 보스니아는 1463년에 멸망했으며, 알바니아는 스칸데르베그 사망 후 1479년에 복속되었다. 벨그라드는 1521년 벨그라드 공방전에서 오스만 제국에 함락된 마지막 대규모 발칸 도시였다. 중세 시대 말에 발칸 반도 전체가 오스만 제국에 병합되거나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 되었다.[56]

14세기에는 스콜라 철학에 르네상스 인문주의 운동이 도전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서방으로 피난해야 했던 비잔틴 제국 학자들의 영향으로 과학, 예술, 문학 분야에서도 혁신이 일어났다.[136] 예술 분야에서 인문주의는 르네상스의 형태로 나타났다.

오스만 제국과 유럽



15세기 말, 오스만 제국은 동남 유럽 전역으로 진격하여 비잔틴 제국을 정복하고 발칸 국가에 대한 지배권을 확장했다. 헝가리는 2세기 동안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싸웠다. 1444년 바르나 전투에서 울라슬로 1세가 사망한 후, 왕국은 야노시 후냐디의 손에 넘어갔다. 후냐디는 1456년 베오그라드 공방전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승리했는데, 이는 수십 년 동안 그 제국에 대한 가장 큰 승리였다. 이 전투는 프란체스코회 수사인 성 요한 드 카피스트라노가 이탈리아에서 와서 성전을 설교하여 농민들의 사기를 북돋았기 때문에 무슬림에 대한 진정한 십자군이 되었다.

헝가리의 마차시 코르비누스 왕(1458–1490)은 서쪽으로 원정을 지휘하여 보헤미아를 정복하고,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 싸웠다. 마차시는 용병 병사들로 구성된 헝가리 흑군을 조직했는데, 이는 당시 가장 큰 군대로 여겨졌다. 마차시의 죽음 이후, 오스만 제국은 강성해졌고, 중앙 유럽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의 군대는 헝가리 군대를 전멸시켰고, 러요시 2세는 탈출을 시도하다가 익사했다.

프랑스 왕은 교황에 대한 우위를 강화하여 1309년에 교황청아비뇽으로 옮기게 되었다.[262] 교황이 1377년에 로마로 돌아오자 아비뇽과 로마에서 서로 다른 교황을 선출하게 되어 교회 분열(1378년-1417년)로 발전했다.[263] 이 대분열은 유럽을 정치적인 선으로 나누어 프랑스와 동맹국인 스코틀랜드, 스페인 왕국은 아비뇽의 교황을 지원하는 한편, 프랑스의 적대국인 잉글랜드는 포르투갈, 스칸디나비아, 독일의 대부분의 제후들과 함께 로마의 교황을 지지했다.[264]

콘스탄츠 공의회(1414년–1418년)에서 교황은 일단 로마의 교황으로 통일되었다.[265] 교황이 이전보다 더 큰 물질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교회 분열은 회복 불가능한 손해였다.[266] 교회의 내분은 교회의 보편적인 지배에 대한 주장을 훼손하고, 인민과 지배자들 사이에 반교권주의를 조장하여 개혁 운동의 길을 열었다.[267]

루카스 크라나흐의 작품, 마르틴 루터. 종교 개혁은 국민국가의 출현에 필수적인 사건이었다.


마르틴 루터종교 개혁은 서방 교회의 통일을 끝냈다.[339] 독일의 수도사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의 교회에서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며 종교 개혁을 시작했다.[276] 행동의 배경에는 1514년 레오 10세가 새로운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을 위한 면죄부를 갱신한 것에 대한 분노가 있었다.[277] 루터는 1521년 보름스 제국 의회에서 이단의 생각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다.[278] 이를 거부하자, 카를 5세에 의해 제국 내에서의 활동이 금지되었다.[279] 프리드리히 3세의 보호를 받아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할 수 있게 되었다.[280]

많은 세속 통치자들에게 종교 개혁은 자신의 부와 권세를 확대할 수 있는 기회였다.[281] 가톨릭 교회는 가톨릭 또는 반종교 개혁이라고 불리는 개혁 운동의 요구를 받았다.[282] 유럽은 북쪽의 프로테스탄트와 남쪽의 가톨릭으로 분열되어 16세기와 17세기의 종교 전쟁으로 이어졌다.[283]

6. 1. 종교 개혁의 전조

13세기 초부터 십자군 원정에 대한 실망으로 신앙심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교황이 프랑스 앙주 가 등 세속 군주에게 예속되면서 교황의 지위가 세속 군주에 의해 좌우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성직 매매는 숙정(Mastery) 실시에도 불구하고 속권의 개입으로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교회 내부의 부패뿐만 아니라 봉건 사회의 해체와 함께 진행되던 유럽의 근세적 중앙 집권 국가 형성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반영한 것이었다.[5]

이로 인해 로마 교회에는 아나니 사건, 교황의 아비뇽 유수, 교회의 대분열 등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동시에 위클리프를 비롯한 일련의 교회 비판이 종교개혁의 선구적 운동으로서 전개되기 시작했고, 콘스탄츠, 바젤 등에서는 개혁을 위한 종교회의를 통해 로마 교회의 재건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5]

가톨릭 교회는 중세 후기에 이단 운동과 오랫동안 싸웠지만, 내부로부터의 개혁 요구에 직면하기 시작했다.[268] 그 시작은 잉글랜드의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 존 위클리프였다.[269] 위클리프는 성경이 종교 문제에 관한 유일한 권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성변화, 금욕, 면죄부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제시했다.[270] 잉글랜드 귀족 중에는 존 오브 곤트와 같은 유력한 지지자도 있었지만, 위클리프의 운동은 지속되지 못했다. 위클리프 자신은 별다른 탄압 없이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지지 세력인 롤라드파는 결국 잉글랜드에서 탄압받았다.[271]

리처드 2세가 보헤미아의 앤과 결혼하면서 양국 간 교류가 시작되었고, 이를 통해 롤라드의 사상이 유럽 대륙, 특히 보헤미아 지역에 전파되었다.[272] 체코의 성직자 얀 후스는 존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는데, 그의 지지 세력인 후스파는 롤라드파보다 더 큰 정치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273] 후스는 보헤미아에서 큰 지지를 얻었고, 1414년 자신의 주장을 변호하기 위해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하라는 요청을 받았다.[274] 1415년 후스가 이단으로 몰려 화형에 처해지자, 체코에서는 민중 소요가 발생했다.[274] 이어진 후스 전쟁은 내분으로 이어져 체코의 종교적, 국가적 독립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국내 가톨릭 교회와 독일인의 세력은 약화되었다.[275]

7. 기술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마인츠에서 시작된 유럽의 인쇄술 확산, 15세기


13세기 주된 사상은 토마스주의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과 기독교 신학을 조화시킨 것이었다.[138] 1277년 정죄는 이단으로 해석될 수 있는 사상에 제한을 가했고,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도 영향을 미쳤다.[139] 이에 대한 대안으로 윌리엄 오컴은 이성의 세계와 신앙의 세계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단순한 이론이 더 복잡한 이론보다 선호되고 관찰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한 추측은 피해야 한다는 오컴의 면도날 원리를 도입했다.[140]

이러한 새로운 접근은 과학적 사변을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의 교리적 제약에서 해방시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열었다. 특히 운동 이론 분야에서 장 뷔리당, 니콜 오렘, 옥스퍼드 계산자 등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에 도전하며 큰 진전을 이루었다.[141] 뷔리당은 투사체의 운동 원인으로 ''임페투스'' 이론을 개발했는데, 이는 현대 관성 개념의 중요한 단계였다.[142] 이들의 연구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적 세계관을 예고했다.[143]

이 시대의 화약, 인쇄기, 나침반 등은 정치적, 사회적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은 종교 개혁과 지식 보급을 가능하게 했다. 십자 자포, 항해용 아스트롤라베 등 조선술 발전과 함께 나침반대양 항해와 식민주의 초기 단계를 가능하게 했다.[144] 안경괘종시계 등은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145]

7. 1. 화약과 총포의 발달

화약이 유럽에 전해진 것은 1220년대 몽골인의 유럽 침입을 통해서였다. 이후 1330년에 독일의 벨트루트 슈발츠가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화약을 제조하였다.[251] 백년 전쟁 초기에는 영국군이 이미 20문의 대포를 사용하였고,[252] 1360년대에는 소총의 선구(先驅)인 수포(手砲)가 생겼으며, 1424년에는 화승총이 발명되었다.

화약·총포의 사용은 전술의 대전환을 가져왔고 기사의 몰락, 제국(諸國)의 집권화, 식민지 진출 등을 촉진하였다. 스페인멕시코 정복, 포르투갈인의 인도 진출 등은 총포 사용이 효과를 올린 사례이다.[251]

7. 2. 나침반의 개량과 항해술의 발전

중국에서는 물에 자침(磁針)을 띄워 방향을 알아내는 방법이 이미 11세기경부터 알려져 있었다. 이것이 아라비아인에 의해 나침반의 전신이 되어 지중해·인도양 항해에 사용되었다. 13세기 이탈리아 아마루피의 후라비오 조야는 이를 개량, 실용화했다. 나침반의 개량은 해도(海圖)·지도 등 항해 기술의 발전과 함께 훗날 지리상의 발견에 크게 공헌했다.[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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