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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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술의 역사는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를 포괄하며, 인간의 창의성과 문화적 변화를 반영한다. 선사 미술은 동굴 벽화와 조각상 등으로 대표되며, 고대 미술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그리스, 로마 등 문명의 발달과 함께 건축, 조각, 회화 등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아시아 미술은 중앙아시아, 인도, 중국, 한국, 일본 등 각 지역의 독특한 문화적 특징을 반영하며,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 미술은 고유한 조형 언어와 사회적 의미를 담고 있다. 중세 미술은 기독교의 영향 아래 비잔틴 미술, 로마네스크, 고딕 양식으로 발전했으며,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며 고대 미술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함께 인본주의적 가치를 추구했다. 바로크, 로코코 시대를 지나 신고전주의가 등장했고, 19세기에는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등 다양한 미술 사조가 나타났다. 20세기에는 표현주의,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 팝 아트 등 혁신적인 스타일이 등장하며 현대 미술의 다양성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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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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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학문 분야 | 인문학, 예술사 |
연구 대상 | 인간의 창조적 활동 및 그 결과물인 예술품 |
주요 연구 방법 | 미술 작품 분석, 시대 배경 연구, 사회문화적 맥락 분석 |
관련 학문 | 미학, 고고학, 인류학, 역사학, 문화 연구 |
역사 | |
기원 | 18세기 독일 |
주요 발전 단계 | 요한 요아힘 빙켈만의 고대 그리스 미술 연구 헤겔의 미학 이론 미술 비평의 발전 박물관학의 발전 |
주요 연구 분야 | |
시대별 미술사 | 고대 미술 중세 미술 르네상스 미술 바로크 미술 근대 미술 현대 미술 |
지역별 미술사 | 서양 미술사 동양 미술사 한국 미술사 아프리카 미술사 아메리카 미술사 |
미술 사조 연구 | 인상주의 표현주의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
미술가 연구 | 특정 미술가의 생애와 작품 세계 분석 미술가 개인의 창작 기법 및 사상 연구 |
미술 이론 연구 | 미술 비평 이론 미학 이론 문화 이론 |
미술사 방법론 | |
형식주의 | 미술 작품의 형태적 요소 분석 (색채, 구도, 질감 등) |
도상해석학 | 미술 작품에 나타난 상징과 의미 해석 |
사회사적 미술사 | 미술 작품과 사회문화적 배경의 관계 분석 |
정신분석학적 미술사 | 미술 작품을 통해 미술가의 심리 상태 분석 |
페미니즘 미술사 | 미술 작품 속 젠더 문제 분석 및 여성 미술가 연구 |
관련 용어 | |
미술 | 미술 |
예술 | 예술 |
미술 비평 | 미술 비평 |
미학 | 미학 |
박물관학 | 박물관학 |
큐레이터 | 큐레이터 |
2. 선사 미술
선사 미술은 문자를 사용하기 이전 시대의 미술을 포괄하며, 가장 초기의 인간 유물 중 일부를 포함한다. 최초의 미술 작품 중에는 중석기 시대 아프리카의 장식 유물이 있다.[1][2][3] 남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용기는 최대 10만 년 전 페인트를 보관하는 데 사용되었을 수 있다.[4]
유럽에서는 과장된 가슴과 배를 가진 비너스 상으로 알려진 작은 선사 시대 조각상이 만들어졌다. 호레 펠스 비너스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가 대표적이며,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발견되었다. 이 조각상들은 대부분 머리가 작고 엉덩이가 넓으며 다리가 뾰족하고, 팔과 발이 없거나 얼굴이 없는 작은 머리를 가지고 있다. 호레 펠스 비너스는 슈바벤 융라의 동굴 및 빙하기 예술에서 발견된, 기원전 43,000년에서 35,000년 사이에 제작된 가장 오래된 비정지형 인간 미술 작품 중 하나이다.[5][6][7]
구석기 시대 동굴 벽화는 유럽 대륙에서 동물을 묘사한 대형 미술 작품으로, 프랑스 도르도뉴 지역의 라스코 동굴 벽화가 유명하다. 우크라이나, 이탈리아, 영국에도 동굴 벽화가 있지만, 대부분은 프랑스와 스페인에 있다. 이 예술의 목적은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는 종교 의식의 일부였다는 것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론이다.
2. 1. 구석기 시대 미술
선사 미술은 문자를 사용하기 이전 시대의 미술을 포괄하며, 가장 초기의 인간 유물 중 일부를 포함한다. 최초의 미술 작품 중에는 중석기 시대 아프리카의 장식 유물이 있다.[1][2][3] 남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용기는 최대 10만 년 전 페인트를 보관하는 데 사용되었을 수 있다.[4]유럽에서는 과장된 가슴과 배를 가진 비너스 상으로 알려진 작은 선사 시대 조각상이 만들어졌다. 호레 펠스 비너스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가 대표적이며,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발견되었다. 이 조각상들은 대부분 머리가 작고 엉덩이가 넓으며 다리가 뾰족하고, 팔과 발이 없거나 얼굴이 없는 작은 머리를 가지고 있다. 호레 펠스 비너스는 슈바벤 융라의 동굴 및 빙하기 예술에서 발견된, 기원전 43,000년에서 35,000년 사이에 제작된 가장 오래된 비정지형 인간 미술 작품 중 하나이다.[5][6][7]
구석기 시대 동굴 벽화는 유럽 대륙에서 동물을 묘사한 대형 미술 작품으로, 프랑스 도르도뉴 지역의 라스코 동굴 벽화가 유명하다. 우크라이나, 이탈리아, 영국에도 동굴 벽화가 있지만, 대부분은 프랑스와 스페인에 있다. 이 예술의 목적은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는 종교 의식의 일부였다는 것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론이다.
}}; {{c./사자 인간de 기원전 41,000년~35,000년; 호렌슈타인-슈타델 동굴, 슈바벤 융라, 독일
2. 2. 신석기 시대 미술
선사 미술은 문자가 없던 시대에 화가와 조각가들이 만든 다양한 미술을 포함하며, 가장 초기의 인간 유물 중 일부가 여기에 속한다.[1][2][3] 최초의 미술 작품 중에는 중석기 시대 아프리카의 장식 유물이 있다.[1][2][3] 남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이 시기의 용기는 최대 1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페인트를 보관하는 데 사용되었을 수 있다.[4]}}; {{c./사자 인간de 기원전 41,000년~35,000년; 호렌슈타인-슈타델 동굴, 슈바벤 융라, 독일
전 세계, 특히 유럽에서는 과장된 가슴과 배를 가진 비너스 상으로 알려진 작은 선사 시대 조각상이 만들어졌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발견된 호레 펠스 비너스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가 가장 유명하다. 이 조각상들은 대부분 머리가 작고 엉덩이가 넓으며 다리가 뾰족하게 가늘어지고, 팔과 발이 없는 경우가 많으며, 머리는 대개 작고 얼굴이 없다. 슈바벤 융라 유네스코 세계 유산인 동굴 및 빙하기 예술에서는 조각된 동물 및 인간형 조각상 형태의 가장 오래된 비정지형 인간 미술 작품과 가장 오래된 악기가 발견되었으며, 이 유물들은 기원전 43,000년에서 35,000년 사이에 제작되었다.[5][6][7]
가장 잘 알려진 선사 미술 작품은 유럽 대륙에서 동물을 묘사한 대형 구석기 시대 동굴 벽화이며, 특히 프랑스 도르도뉴 지역의 라스코 동굴 벽화가 유명하다. 수백 개의 장식된 동굴이 알려져 있으며, 이는 후기 구석기 시대( 기원전 38,000년~12,000년)에 걸쳐 있다. 우크라이나, 이탈리아, 영국에도 예가 있지만, 대부분은 프랑스와 스페인에 있다. 이 예술의 목적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이 제안되었으며,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은 사냥의 성공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종교 의식의 일부였다는 것이다.
3. 고대 미술
고대 근동은 서쪽의 터키와 지중해 연안에서 동쪽의 이란과 아라비아 반도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는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문명이 등장하고 번성하고 사라졌다. 주요 지역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는 기원전 4천년기에 최초의 도시와 문자 형태가 출현한 곳이다.[8][9] 고대 메소포타미아는 현재의 이라크, 시리아, 터키 일부를 포함하며,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일부를 형성하여 초기 농업과 영구적인 마을 정착과 같은 중요한 신석기 시대 발전이 처음 나타났다.[8][9]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삼각주에 위치한 이 지역에서는 수메르, 아카드,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등 수많은 문명이 번성했다.[8][9] 메소포타미아 건축은 벽돌, 인방, 원뿔 모자이크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며, 계단식 피라미드 형태의 거대한 사원인 지구라트가 대표적인 예이다.[8][9]
수메르인들은 왕 길가메시가 통치하는 최초의 도시 국가 (우루크), 신, 사람, 의례의 계층 구조에 기반한 최초의 조직화된 종교, 최초의 알려진 문자인 쐐기 문자, 최초의 관개 시스템, 최초의 바퀴 달린 차량 등 여러 가지를 처음으로 선보이며 서양 문명의 기초를 세웠다.[8][9] 원통형 인장도 여기서 나타났으며, 작은 비문과 삽화가 새겨져 있었다.[8][9] 아카드 제국은 이곳에서 발전한 또 다른 문명으로 세계 최초의 대제국이었다.[8][9]
기원전 1천년 초, 아카드인 이후 등장한 아시리아 제국은 페르시아 만에서 지중해까지 뻗어 있는 중동 전체를 지배했다.[8][9] 아시리아 미술은 궁정 생활, 종교적 관행, 사냥, 서사적인 전투 장면을 묘사한 상세한 석조 부조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이 부조는 처음에 밝은 색으로 칠해져 궁전에 배치되었다.[8][9]
이후 바빌로니아인들이 아시리아 제국을 정복했다.[8][9] 기원전 6세기, 바빌론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으며, 방문객들은 생생한 푸른색 유약을 바른 벽돌과 용, 황소, 사자를 묘사한 부조로 덮인 인상적인 이슈타르 문에 의해 맞이받았다.[8][9] 이 문은 전쟁과 사랑의 여신인 이슈타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8][9]
기원전 6세기 중반, 바빌로니아 제국은 키루스 2세가 통치한 아케메네스 제국에게 멸망했다.[8][9] 이 제국은 이집트에서 인더스 계곡까지 중동과 중앙 아시아에 걸쳐 있었으며, 제국의 미술은 제국의 부와 권력을 기념하며 제국 전역의 요소들을 통합한다.[8][9] 페르세폴리스(이란)는 제국의 수도였으며, 종교적 이미지와 제국의 사람들을 보여주는 인상적인 조각상으로 가득하다.[8][9] 여기에는 손님을 맞이하는 큰 강당이 있는 궁전의 유적도 있다.[8][9]
메소포타미아와 이란 외에도, 아나톨리아(현재의 터키)에서는 히타이트 제국이 등장했다.[8][9]
고대 남아라비아는 방향족 생산과 무역에서 중요했으며, 이 지역에 있던 왕국들에게 부를 가져다주었다.[8][9] 기원전 4000년경 이전에는 아라비아의 기후가 오늘날보다 더 습했고, 남서부에는 시바와 같은 여러 왕국이 나타났다.[8][9] 남아라비아의 인물상은 일반적으로 사각형 모양을 기반으로 하지만 세부적인 묘사가 돋보인다.[8][9]
3. 1. 메소포타미아 미술
고대 근동은 서쪽의 터키와 지중해 연안에서 동쪽의 이란과 아라비아 반도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는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문명이 등장하고 번성하고 사라졌다. 주요 지역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는 기원전 4천년기에 최초의 도시와 문자 형태가 출현한 곳이다.[8][9] 고대 메소포타미아는 현재의 이라크, 시리아, 터키 일부를 포함하며,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일부를 형성하여 초기 농업과 영구적인 마을 정착과 같은 중요한 신석기 시대 발전이 처음 나타났다.[8][9]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삼각주에 위치한 이 지역에서는 수메르, 아카드,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등 수많은 문명이 번성했다.[8][9] 메소포타미아 건축은 벽돌, 인방, 원뿔 모자이크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며, 계단식 피라미드 형태의 거대한 사원인 지구라트가 대표적인 예이다.[8][9]수메르인들은 왕 길가메시가 통치하는 최초의 도시 국가 (우루크), 신, 사람, 의례의 계층 구조에 기반한 최초의 조직화된 종교, 최초의 알려진 문자인 쐐기 문자, 최초의 관개 시스템, 최초의 바퀴 달린 차량 등 여러 가지를 처음으로 선보이며 서양 문명의 기초를 세웠다.[8][9] 원통형 인장도 여기서 나타났으며, 작은 비문과 삽화가 새겨져 있었다.[8][9] 아카드 제국은 이곳에서 발전한 또 다른 문명으로 세계 최초의 대제국이었다.[8][9]
기원전 1천년 초, 아카드인 이후 등장한 아시리아 제국은 페르시아 만에서 지중해까지 뻗어 있는 중동 전체를 지배했다.[8][9] 아시리아 미술은 궁정 생활, 종교적 관행, 사냥, 서사적인 전투 장면을 묘사한 상세한 석조 부조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이 부조는 처음에 밝은 색으로 칠해져 궁전에 배치되었다.[8][9]
이후 바빌로니아인들이 아시리아 제국을 정복했다.[8][9] 기원전 6세기, 바빌론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으며, 방문객들은 생생한 푸른색 유약을 바른 벽돌과 용, 황소, 사자를 묘사한 부조로 덮인 인상적인 이슈타르 문에 의해 맞이받았다.[8][9] 이 문은 전쟁과 사랑의 여신인 이슈타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8][9]
기원전 6세기 중반, 바빌로니아 제국은 키루스 2세가 통치한 아케메네스 제국에게 멸망했다.[8][9] 이 제국은 이집트에서 인더스 계곡까지 중동과 중앙 아시아에 걸쳐 있었으며, 제국의 미술은 제국의 부와 권력을 기념하며 제국 전역의 요소들을 통합한다.[8][9] 페르세폴리스(이란)는 제국의 수도였으며, 종교적 이미지와 제국의 사람들을 보여주는 인상적인 조각상으로 가득하다.[8][9] 여기에는 손님을 맞이하는 큰 강당이 있는 궁전의 유적도 있다.[8][9]
메소포타미아와 이란 외에도, 아나톨리아(현재의 터키)에서는 히타이트 제국이 등장했다.[8][9]
고대 남아라비아는 방향족 생산과 무역에서 중요했으며, 이 지역에 있던 왕국들에게 부를 가져다주었다.[8][9] 기원전 4000년경 이전에는 아라비아의 기후가 오늘날보다 더 습했고, 남서부에는 시바와 같은 여러 왕국이 나타났다.[8][9] 남아라비아의 인물상은 일반적으로 사각형 모양을 기반으로 하지만 세부적인 묘사가 돋보인다.[8][9]
3. 2. 이집트 미술
최초의 위대한 문명 중 하나인 이집트에서는 전문 예술가와 장인이 제작한 정교하고 복잡한 예술 작품이 등장했다. 이집트 미술은 종교적이고 상징적이었으며, 고도로 중앙집권적인 권력 구조와 계층 구조를 가진 문화 특성상 많은 예술 작품이 파라오를 기리기 위해 제작되었다. 여기에는 거대한 기념물도 포함된다. 이집트 예술과 문화는 불멸의 종교적 개념을 강조했으며, 후기 이집트 미술에는 콥트 미술과 비잔틴 미술이 포함된다.건축은 거대한 석조 블록, 상인방 및 견고한 기둥으로 지어진 기념비적 구조가 특징이다. 장례 기념물에는 직사각형 형태의 무덤인 마스타바, 사카라의 계단식 피라미드 또는 기자의 매끄러운 면의 피라미드가 포함되었으며, 지하 무덤인 지하 묘지(왕가의 계곡)가 있다. 다른 훌륭한 건물로는 스핑크스와 오벨리스크의 길이 앞에 있는 기념비적 단지인 사원이 있었다. 사원은 탑과 사다리꼴 벽을 헤파이로스 및 홀 및 신사와 함께 사용했으며, 카르나크, 룩소르, 필레 및 에드푸의 사원이 좋은 예이다. 또 다른 유형의 사원은 아부 심벨과 데어 엘-바하리에서 발견되는 지하 묘지 형태의 암석 사원이다.
이집트 시대의 회화는 중첩된 평면의 병치를 사용했다. 이미지는 계층적으로 표현되었는데, 예를 들어 파라오는 그의 곁에 묘사된 일반 백성이나 적보다 크게 그려졌다. 이집트인들은 머리와 사지의 윤곽을 옆모습으로 그렸고, 몸통, 손, 눈은 정면에서 그렸다. 응용 미술은 이집트에서 개발되었으며, 특히 목공예와 금세공이 발달했다. 흑단과 상아로 상감 세공된 시다르 가구와 같은 훌륭한 예가 있으며, 이는 이집트 박물관의 무덤에서 볼 수 있다. 다른 예로는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견된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들이 있다.

3. 3. 그리스 미술
조화로운 비례와 미적 감각에 중점을 둔 고대 그리스와 로마 미술은 모든 서양 미술의 기초이자 영감이 되었으며, 19세기까지 대부분의 유럽 예술가들이 열망하는 기준이 되었다.[15] 로마 제국 황제 아우구스투스 시대(기원전 1세기 ~ 서기 1세기)에 글을 쓴 라틴 시인 호라티우스는 비록 전장에서 정복당했지만, "사로잡힌 그리스는 야만적인 정복자를 이기고, 예술을 시골 로마에 가져왔다"라고 언급했다. 그리스 미술은 인간의 형상을 표현하고 인간과 의인화된 신들을 주요 주제로 삼았다. 그리스인들의 예술 작품은 신전과 공공 건물을 장식하고, 전투 승리와 뛰어난 인물을 기념하며, 죽은 자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또한 신들에게 바치는 제물로도 사용되었다.미술은 일반적으로 기하학 시대, 아르카익 시대, 고전 시대, 헬레니즘 시대의 네 가지 양식으로 구분된다.[15] 고전 그리스 시대(기원전 5~4세기)에는 현실주의와 이상주의가 섬세하게 균형을 이루었다. 반면에, 초기 기하학 시대(기원전 9~8세기)와 아르카익 시대(기원전 7~6세기)의 작품은 원시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 예술가들은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즉, 자연주의적인 표현이 반드시 그들의 목표는 아니었다. 그리스 미술 예술가들은 이집트의 예술적 기반을 바탕으로 조각, 회화, 건축, 도자 기술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들이 완벽하게 다듬은 기술에는 조각 및 주조 조각, 프레스코 회화, 웅장한 건물 건축 방법 등이 포함된다.
로마 미술 애호가들은 고대 그리스 원본, 그리스 미술의 로마 복제품, 또는 다양한 그리스 양식으로 제작된 신작 회화와 조각품을 수집하여, 그렇지 않으면 사라질 뻔한 예술 작품들을 후세에 보존했다. 벽화와 패널화, 조각품과 모자이크는 공공 장소와 개인 주택을 장식했다. 그리스 이미지는 또한 로마 보석, 금, 은, 청동, 테라코타로 만든 용기, 심지어 무기와 상업용 추에도 나타났다. 르네상스 초기에 재발견된 고대 그리스 미술은 로마 제국을 통해 전파되어 19세기까지 서양 미술의 기반이 되었다.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에서 고전 시대가 시작된 이래, 고전적인 건축 방식은 서양의 건축, 나아가 문명 자체에 대한 이해 속에 깊이 자리 잡았다. 기원전 850년경부터 서기 300년경까지 고대 그리스 문화는 그리스 본토, 펠로폰네소스 반도, 에게해 섬에서 번성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5개가 그리스에 있었다. 즉,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올림피아의 제우스 상,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로스 영묘, 로도스 거상, 알렉산드리아 등대이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건축은 신전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이 지역 전역에서 많이 발견되며, 파르테논 신전은 이의 대표적인 예이다. 나중에, 18세기 후반과 19세기 동안 신고전주의 건축 건축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가장 잘 알려진 신전은 파르테논 신전과 에레크테이온으로, 둘 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 있다. 또 다른 중요한 유형의 고대 그리스 건물은 극장이었다. 신전과 극장 모두 복잡한 혼합 착시와 균형 잡힌 비율을 사용했다.
고대 건물의 고고학적 유물을 살펴보면, 회색 황토색의 석회암과 콘크리트로 인식하고 고대 건물이 단색이라고 추측하기 쉽다. 그러나 고대 세계의 많은 건축물은 다색으로 칠해졌다. 가장 상징적인 고대 건물 중 하나인 파르테논 신전(기원전 447~432년)은 아테네에 있으며, 생생한 빨간색, 파란색, 녹색으로 세부 사항이 칠해져 있었다. 고대 신전 외에도 중세 대성당은 결코 완전히 하얗지 않았다. 대부분은 주두와 기둥에 색상 하이라이트가 있었다.[16] 이러한 건물과 예술 작품에 색상을 칠하는 관행은 르네상스 초기에 중단되었다. 이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를 포함한 다른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중세 시대 동안의 방치와 지속적인 부식으로 인해 처음에는 다채로웠음에도 불구하고 하얗게 변한 고대 그리스-로마 유적에서 영감을 얻은 색상 팔레트를 장려했기 때문이다. 고대 세계에서 사용된 안료는 섬세하고 특히 풍화에 취약했다. 필요한 관리가 없으면 비, 눈, 먼지 및 기타 요인에 노출된 색상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라졌고, 이러한 방식으로 고대 건물과 예술 작품은 오늘날과 르네상스 시대처럼 하얗게 변했다.[17]
3. 4. 로마 미술
로마 제국은 서양 미술에 지속적이고 강력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 영향은 중세 시대와 근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로마 미술은 때로는 그리스의 선례에서 파생된 것으로 간주되지만, 에트루리아 미술에서 물려받은 특징 등 자체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로마 조각은 그리스의 선례보다 덜 이상화되어 매우 사실적이다. 로마 건축은 콘크리트를 사용했으며, 원형 아치와 돔과 같은 특징을 발명했다. 금속 공예, 보석 세공, 상아 조각, 로마 유리의 사치품은 현대적 관점에서 로마 미술의 작은 형태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로마의 유리 불기 기술 개발로 카메오 유리가 가능해졌다. 또한, 돌 조각 입방체나 유색 유리 조각으로 만드는 모자이크를 통해 내구성이 있는 그림 예술을 제작했다. 부유한 로마인의 일부 빌라에는 프레스코로 벽을 덮어 놓았다. 남아 있는 로마 벽화의 상당 부분은 나폴리만 주변, 특히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유적에서 발견된다.
로마인들은 헬레니즘 그리스의 모든 측면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22] 건축에서 다른 예술 매체와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고전 언어를 채택하여 새로운 상황과 용도에 맞게 적용했다. 로마인들은 고전 건축에 자체적인 혁신을 가져왔다. 그들은 그리스인들보다 훨씬 자유로운 방식으로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 양식을 사용하여 도리아식의 자체 버전을 만들고 코린트식을 훨씬 더 자주 사용했다. 또한 레퍼토리에 두 가지 새로운 양식, 즉 투스칸식과 복합 양식을 추가했다. 기타 중요한 혁신으로는 아치와 돔이 있다. 아치를 사용하여 로마 수도교와 기념적인 개선문을 건설했다. 로마 황제들은 정복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개선문을 통해 자국과 정복지에서 이를 기념했는데, 좋은 예가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다. 서기 30년에서 기원전 15년 사이에 건축가이자 토목 및 군사 기술자인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 폴리오는 ''건축론''(De Architectura)을 출판했다.[22]
중세 시대 이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로 고대 로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시대 동안, 고대 이후 처음으로 예술이 설득력 있게 생동감 있게 되었다. 르네상스는 예술과 건축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학에 대한 관심도 불러일으켰다.
4. 아시아 미술
동양 문명은 광범위하게 아시아를 포함하며, 복잡한 예술 제작 전통을 포함한다. 동양 미술사를 접근하는 한 가지 방식은 인도 미술, 중국 미술, 일본 미술에 초점을 맞춰 국가별로 분야를 나눈다. 대륙의 크기 때문에 예술의 맥락에서 동아시아와 남아시아의 구별이 명확하게 나타날 수 있다. 아시아 대부분의 지역에서 도자기는 흔한 예술 형태였다. 도자기는 종종 기하학적 패턴이나 동물, 사람 또는 식물의 추상적인 표현으로 장식된다. 다른 매우 널리 퍼진 예술 형태는 조각과 회화였으며, 현재도 그렇다.
== 중앙아시아 미술 ==
중앙아시아 미술은 현대의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그리고 현대 몽골, 중국, 러시아의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인 중앙아시아에서 발전했다.[30][31] 고대 및 중세 중앙아시아의 예술은 다양한 민족, 종교, 생활 방식을 가진 이 광대한 지역의 풍부한 역사를 반영한다. 이 지역의 예술적 유물은 중앙아시아 사회의 다문화적 성격을 보여주는 놀라운 영향력의 조합을 보여준다. 실크로드 미술의 전파, 스키타이 미술, 그리스-불교 미술, 세린디아 미술과 더 최근의 페르시아 미술 문화는 이 복잡한 역사의 일부이다. 중앙아시아는 항상 문화 교류의 교차로였으며, 중국에서 지중해까지 뻗어 있는 복잡한 무역로 시스템인 소위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다. 이미 청동기 시대 (기원전 3천년기 및 2천년기)에 성장하는 정착지는 중앙아시아를 인더스 계곡, 메소포타미아 및 이집트와 연결하는 광범위한 무역 네트워크의 일부를 형성했다.
== 인도 미술 ==
초기 불교도들은 인도에서 붓다와 관련된 상징을 발전시켰다. 불교 미술의 주요 유물은 북인도의 쿠샨 제국 미술, 간다라 미술의 그레코-불교 미술, 굽타 미술과 함께 마우리아 제국 이후 시기에 시작된다. 간다라 미술보다 먼저 등장하여 남인도에 기반을 둔 안드라 학파가 있었다. 산치, 바르후트, 아마라바티와 같은 주요 유적지에서 조각품이 상당수 발견되었으며, 일부는 ''현장 보존''되어 있고, 나머지는 인도 또는 전 세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탑은 추기 방향을 향한 4개의 화려하게 조각된 토라나 또는 장식용 문으로 둘러싸인 의식용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것들은 돌로 만들어졌지만, 나무로 개발된 형태를 분명히 채택했다. 그것들과 탑 자체의 벽은 주로 붓다의 삶을 묘사하는 부조로 매우 화려하게 장식될 수 있다. 점차 실물 크기의 인물이 조각되었고, 처음에는 깊은 부조였지만, 나중에는 독립적으로 조각되었다. 마투라 미술은 불교뿐만 아니라 힌두교와 자이나교 미술에도 적용된 이 발전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였다. 암석을 깎아 만든 ''차이티야'' 기도실과 수도원 ''비하라''의 외관과 내부는 다른 곳의 유사한 독립 구조보다 더 잘 보존되었으며, 오랫동안 주로 나무로 만들어졌다. 아잔타 석굴, 카를라 석굴, 바자 석굴 등의 동굴에는 초기 조각품이 들어 있으며, 이는 붓다와 보살의 상징적인 형상과 같은 후기 작품보다 수가 적은 경우가 많으며, 이들은 적어도 서기 100년 전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 중국 미술 ==
중국 미술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전통 예술 중 하나이며, 서양 미술과는 다르게 전통 내에서 연속성과 의식을 유지해 왔다.[14] 르네상스 이후 서양에서 장식 미술로 분류된 매체들은 중국 미술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특히 중국 도자기가 그러했다.
중국 청동기 시대인 상 왕조( 기원전 1600–1050년)와 주 왕조 동안 궁정에서는 무당(아마도 왕 자신)이 중재와 영적 세계와의 소통을 수행했다. 상 왕조의 최고 신은 상제였지만, 귀족 가문은 조상의 영혼과 접촉하기 위해 청동 의례용 용기에 음식과 음료를 담아 연회를 열었다.[14] 이러한 청동 용기는 와인, 물, 곡물, 고기 등 다양한 목적에 맞게 제작되었으며, 일부에는 문자가 새겨져 있어 문자의 발전을 보여준다. 허난성의 황허강 유역에 있는 얼리터우, 안양, 정저우 등 유적지에서 발견된 매우 높은 품질과 복잡성을 가진 용기들은 상 왕조의 권위를 공고히 하기 위한 종교 의식에 사용되었다.[14] 기원전 1050년경 상 왕조가 멸망하고 주나라( 기원전 1050–156년)가 건국된 후에도 이러한 용기는 종교 의식에 계속 사용되었지만, 주로 음료보다는 음식을 위해 사용되었다. 상 왕조 궁정은 과도한 음주로 비난받았고, 주나라는 천("하늘")을 주요 영적 힘으로 장려하며 종교 의식에서 술을 제한하고 음식에 더 집중했다.[14] 의례용 청동기의 사용은 전한 시대 초기(기원전 206년–서기 220년)까지 계속되었다. 가장 일반적인 모티프 중 하나는 "도철"로, 코, 눈, 눈썹, 턱, 뺨, 뿔이 새겨진 패턴으로 둘러싸인 양식화된 얼굴이다.
쓰촨성 광한 근처의 삼성퇴에서 발견된 청동기는 고대 중국의 다른 어떤 곳과도 다르고 안양의 동시대 상 왕조 예술과도 매우 다른 신비로운 희생 종교 시스템의 증거이다. 1986년 이후 삼성퇴에서 발굴된 유적에서 청동, 옥, 금 유물이 담긴 네 개의 구덩이가 발견되었다. 추상적인 코끼리 머리로 장식된 받침대 위에 서 있는 인간 형상의 거대한 청동 조각상과 50개가 넘는 청동 머리가 발견되었는데, 일부는 머리 장식을 하고 세 개는 앞면에 금박이 덮여 있었다.
주 왕조(기원전 1050–221년)는 중국 역사상 다른 어떤 왕조보다 더 오래 통치했다. 그 마지막 시기인 전국 시대는 폭력으로 특징지어졌으며, 이 시기에 유교, 도교, 법가 등 여러 철학적 운동이 나타났다. 전국 시대는 진 시황에 의해 종식되었고,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했다. 그는 병마용으로 지켜지는 거대한 무덤을 만들도록 명했으며, 북쪽에서 약탈 부족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의 전신을 세웠다. 황제의 죽음 이후, 그의 왕조인 진나라(기원전 221–206년)는 단 3년 동안 지속되었다. 진시황의 뒤를 이어 한나라(기원전 202년 – 서기 220년)가 등장했고, 그동안 실크로드가 크게 발전하여 중국에 새로운 문화적 영향을 가져왔다.[14]
동아시아에서 회화는 서예의 실천에서 파생되었으며, 초상화와 풍경화는 비단 천에 그려졌다. 대부분의 그림은 풍경이나 초상화를 묘사한다. 중국 궁궐과 가옥, 그리고 그 거주자들을 장식한 상품의 범위와 품질은 눈부셨다. 재료는 중국 전역과 훨씬 더 멀리서 왔는데, 금과 은, 진주 조개, 상아와 코뿔소 뿔, 나무와 옻칠, 옥과 활석, 비단과 종이였다.
== 한국 미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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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미술은 별도의 문서 (한국의 미술)에서 다루고 있다.
== 삼국 시대 미술 ==
== 통일신라 시대 미술 ==
== 고려 시대 미술 ==
== 조선 시대 미술 ==
조선시대 미술은 별도의 문서 (한국의 미술)에서 다루고 있다.
4. 1. 중앙아시아 미술
중앙아시아 미술은 현대의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그리고 현대 몽골, 중국, 러시아의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인 중앙아시아에서 발전했다.[30][31] 고대 및 중세 중앙아시아의 예술은 다양한 민족, 종교, 생활 방식을 가진 이 광대한 지역의 풍부한 역사를 반영한다. 이 지역의 예술적 유물은 중앙아시아 사회의 다문화적 성격을 보여주는 놀라운 영향력의 조합을 보여준다. 실크로드 미술의 전파, 스키타이 미술, 그리스-불교 미술, 세린디아 미술과 더 최근의 페르시아 미술 문화는 이 복잡한 역사의 일부이다. 중앙아시아는 항상 문화 교류의 교차로였으며, 중국에서 지중해까지 뻗어 있는 복잡한 무역로 시스템인 소위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다. 이미 청동기 시대 (기원전 3천년기 및 2천년기)에 성장하는 정착지는 중앙아시아를 인더스 계곡, 메소포타미아 및 이집트와 연결하는 광범위한 무역 네트워크의 일부를 형성했다.4. 2. 인도 미술
초기 불교도들은 인도에서 붓다와 관련된 상징을 발전시켰다. 불교 미술의 주요 유물은 북인도의 쿠샨 제국 미술, 간다라 미술의 그레코-불교 미술, 굽타 미술과 함께 마우리아 제국 이후 시기에 시작된다. 간다라 미술보다 먼저 등장하여 남인도에 기반을 둔 안드라 학파가 있었다. 산치, 바르후트, 아마라바티와 같은 주요 유적지에서 조각품이 상당수 발견되었으며, 일부는 ''현장 보존''되어 있고, 나머지는 인도 또는 전 세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탑은 추기 방향을 향한 4개의 화려하게 조각된 토라나 또는 장식용 문으로 둘러싸인 의식용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것들은 돌로 만들어졌지만, 나무로 개발된 형태를 분명히 채택했다. 그것들과 탑 자체의 벽은 주로 붓다의 삶을 묘사하는 부조로 매우 화려하게 장식될 수 있다. 점차 실물 크기의 인물이 조각되었고, 처음에는 깊은 부조였지만, 나중에는 독립적으로 조각되었다. 마투라 미술은 불교뿐만 아니라 힌두교와 자이나교 미술에도 적용된 이 발전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였다. 암석을 깎아 만든 ''차이티야'' 기도실과 수도원 ''비하라''의 외관과 내부는 다른 곳의 유사한 독립 구조보다 더 잘 보존되었으며, 오랫동안 주로 나무로 만들어졌다. 아잔타 석굴, 카를라 석굴, 바자 석굴 등의 동굴에는 초기 조각품이 들어 있으며, 이는 붓다와 보살의 상징적인 형상과 같은 후기 작품보다 수가 적은 경우가 많으며, 이들은 적어도 서기 100년 전에는 발견되지 않는다.4. 3. 중국 미술
중국 미술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전통 예술 중 하나이며, 서양 미술과는 다르게 전통 내에서 연속성과 의식을 유지해 왔다.[14] 르네상스 이후 서양에서 장식 미술로 분류된 매체들은 중국 미술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특히 중국 도자기가 그러했다.중국 청동기 시대인 상 왕조( 기원전 1600–1050년)와 주 왕조 동안 궁정에서는 무당(아마도 왕 자신)이 중재와 영적 세계와의 소통을 수행했다. 상 왕조의 최고 신은 상제였지만, 귀족 가문은 조상의 영혼과 접촉하기 위해 청동 의례용 용기에 음식과 음료를 담아 연회를 열었다.[14] 이러한 청동 용기는 와인, 물, 곡물, 고기 등 다양한 목적에 맞게 제작되었으며, 일부에는 문자가 새겨져 있어 문자의 발전을 보여준다. 허난성의 황허강 유역에 있는 얼리터우, 안양, 정저우 등 유적지에서 발견된 매우 높은 품질과 복잡성을 가진 용기들은 상 왕조의 권위를 공고히 하기 위한 종교 의식에 사용되었다.[14] 기원전 1050년경 상 왕조가 멸망하고 주나라( 기원전 1050–156년)가 건국된 후에도 이러한 용기는 종교 의식에 계속 사용되었지만, 주로 음료보다는 음식을 위해 사용되었다. 상 왕조 궁정은 과도한 음주로 비난받았고, 주나라는 천("하늘")을 주요 영적 힘으로 장려하며 종교 의식에서 술을 제한하고 음식에 더 집중했다.[14] 의례용 청동기의 사용은 전한 시대 초기(기원전 206년–서기 220년)까지 계속되었다. 가장 일반적인 모티프 중 하나는 "도철"로, 코, 눈, 눈썹, 턱, 뺨, 뿔이 새겨진 패턴으로 둘러싸인 양식화된 얼굴이다.
쓰촨성 광한 근처의 삼성퇴에서 발견된 청동기는 고대 중국의 다른 어떤 곳과도 다르고 안양의 동시대 상 왕조 예술과도 매우 다른 신비로운 희생 종교 시스템의 증거이다. 1986년 이후 삼성퇴에서 발굴된 유적에서 청동, 옥, 금 유물이 담긴 네 개의 구덩이가 발견되었다. 추상적인 코끼리 머리로 장식된 받침대 위에 서 있는 인간 형상의 거대한 청동 조각상과 50개가 넘는 청동 머리가 발견되었는데, 일부는 머리 장식을 하고 세 개는 앞면에 금박이 덮여 있었다.
주 왕조(기원전 1050–221년)는 중국 역사상 다른 어떤 왕조보다 더 오래 통치했다. 그 마지막 시기인 전국 시대는 폭력으로 특징지어졌으며, 이 시기에 유교, 도교, 법가 등 여러 철학적 운동이 나타났다. 전국 시대는 진 시황에 의해 종식되었고,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했다. 그는 병마용으로 지켜지는 거대한 무덤을 만들도록 명했으며, 북쪽에서 약탈 부족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의 전신을 세웠다. 황제의 죽음 이후, 그의 왕조인 진나라(기원전 221–206년)는 단 3년 동안 지속되었다. 진시황의 뒤를 이어 한나라(기원전 202년 – 서기 220년)가 등장했고, 그동안 실크로드가 크게 발전하여 중국에 새로운 문화적 영향을 가져왔다.[14]
동아시아에서 회화는 서예의 실천에서 파생되었으며, 초상화와 풍경화는 비단 천에 그려졌다. 대부분의 그림은 풍경이나 초상화를 묘사한다. 중국 궁궐과 가옥, 그리고 그 거주자들을 장식한 상품의 범위와 품질은 눈부셨다. 재료는 중국 전역과 훨씬 더 멀리서 왔는데, 금과 은, 진주 조개, 상아와 코뿔소 뿔, 나무와 옻칠, 옥과 활석, 비단과 종이였다.
4. 4. 한국 미술
한국의 미술 문서를 참조하라.한국의 미술 문서를 참조하라.
한국의 미술 문서를 참조하라.
조선시대 미술은 별도의 문서 (한국의 미술)에서 다루고 있다.
4. 4. 1. 삼국 시대 미술
4. 4. 2. 통일신라 시대 미술
4. 4. 3. 고려 시대 미술
4. 4. 4. 조선 시대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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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프리카 미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미술은 조각, 특히 베냉 사람들의 청동 주조, 이보 우쿠, 이페 왕국의 조각, 제네-제노와 이페의 테라코타, 노크 문화와 민속 미술을 포함한다. 유럽 중세 시대와 함께 11세기에는 그레이트 짐바브웨에 웅장한 건축, 금 조각, 정교한 보석을 만드는 국가가 세워졌다. 인상적인 조각은 현재 나이지리아에 해당하는 요루바 사람들이 청동으로 주조했다. 같은 시기에 시작된 나이지리아 남부의 베냉 왕국에서는 우아한 제단 상아, 청동 머리, 청동 판, 궁전 건축물이 만들어졌다. 베냉 왕국은 1897년 영국에 의해 멸망했고, 현재 나이지리아에는 문화 예술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높은 문화 밀도로 특징지어진다. 주목할 만한 곳으로는 말리의 도곤족, 나이지리아의 에도족, 요루바족, 이보족, 노크 문명, 중앙 아프리카의 쿠바 왕국과 루바족, 가나의 아샨티족, 남아프리카의 줄루족, 적도 기니(85%), 카메룬, 가봉의 팡족, 차드의 사오 문명 사람들, 가봉 동부, 콩고 공화국 및 카메룬의 크웰레족이 있다.
다양한 형태의 아프리카 미술은 세계에서 가장 활기차고 반응이 빠른 예술 전통의 구성 요소이며, 아프리카 사람들의 삶에 필수적이다. 특정 목적으로 제작된 예술 작품은 외관과 효능을 모두 향상시키는 물리적 변형을 통해 지속적인 중요성을 드러낼 수 있다. 많은 전통 아프리카 미술 형태는 정령 세계로의 통로로 만들어졌으며, 아름다움과 효능을 향상시키기 위해 재료를 추가하면서 외관이 변화한다. 작품이 더 많이 사용되고 축복을 받을수록, 희생 물질이 축적되고 원래의 디테일이 마모되면서 더욱 추상적으로 변한다. 오늘날 아프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 행사장은 요하네스버그 비엔날레이다.
6. 오세아니아 미술
오세아니아 미술은 미크로네시아, 폴리네시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멜라네시아를 포함한다. 이 지역의 고대 미술 작품은 거의 남아있지 않은데, 이는 예술가들이 나무, 깃털과 같이 썩기 쉬운 재료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고, 이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오세아니아의 예술 문화에 대한 이해는 18세기에 제임스 쿡 선장과 같은 서구인들의 기록에서 시작된다. 20세기 초 프랑스 예술가 폴 고갱은 타히티에서 현지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현대 미술을 만들었는데, 이는 현재까지 타히티 시각 문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 미술은 추상 현대 미술처럼 보이지만, 지역 문화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
오세아니아의 미술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마지막 위대한 미술 전통이다. 최소 5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미술 전통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20세기 후반까지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미술의 재료는 대부분의 미술 형태의 역사를 결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가장 내구성이 강한 형태는 대륙 전역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암각화와 암벽화이다. 아넘랜드 절벽에서 5만 년 전에 그림이 그려졌다는 증거가 발견되는데, 이는 알타미라 동굴과 라스코의 유럽 구석기 시대 암벽화보다 앞선 것이다.
7. 유럽 미술
로마 제국이 300년경 쇠퇴하면서, 이후 중세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는 약 1천 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르네상스가 1400년경 시작될 때까지 이어졌다. 초기 기독교 미술은 이 시기의 초기 단계를 특징지으며, 그 뒤를 이어 비잔틴 미술, 앵글로-색슨 미술, 바이킹 미술, 오토 미술, 로마네스크 미술, 고딕 미술이 나타났으며, 이슬람 미술은 지중해 동부를 지배했다. 중세 미술은 로마 제국과 비잔티움의 예술적 유산과 북유럽의 "야만족" 예술 문화가 혼합되어 성장했다.
중세 시대의 비잔틴 미술과 고딕 미술에서는 교회의 지배로 인해 많은 양의 종교 미술이 제작되었다. 그림에는 금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으며, 인물들은 단순화된 형태로 표현되었다.
비잔틴 미술은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의 기독교 그리스 미술 작품과, 그 제국으로부터 문화적 유산을 물려받은 국가 및 국가들로 구성된다. 비잔틴 제국은 로마의 쇠퇴로부터 시작되어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까지 지속되었지만,[37] 비잔틴 시대의 시작일은 미술사에서 더 명확하며, 아직까지 부정확하다. 동유럽과 중부 유럽의 많은 동방 정교회 국가들과 동부 지중해의 이슬람 국가들이 그 제국의 문화와 예술의 많은 측면들을 수세기 동안 보존했다.
현존하는 비잔틴 미술은 대부분 종교적이며, 특정 시기를 제외하고는 전통적인 모델을 따르는 고도로 관습화된 양식을 보인다. 이는 주의 깊게 통제된 교회 신학을 예술적 용어로 번역하는 것이다. 프레스코, 채색 필사본 및 나무 패널에 그림을 그리고 (특히 초기에는) 모자이크가 주요 매체였으며, 형상적인 조각은 작은 상아 조각을 제외하고는 매우 드물게 나타났다. 필사본 그림은 더 큰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전적인 사실주의 전통을 끝까지 보존했다.[38] 비잔틴 미술은 서유럽에서 매우 명성이 높았고, 중세 시대가 거의 끝날 때까지 중세 미술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는 특히 이탈리아에서 그러했는데, 비잔틴 양식은 12세기까지 수정된 형태로 지속되었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에 형성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유입되는 영향은 비잔틴 양식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동방 정교회의 확산과 함께, 비잔틴 형태와 양식은 정교회 세계와 그 너머로 퍼져나갔다.[39] 비잔틴 건축, 특히 종교 건물에서의 영향은 이집트와 아라비아에서 러시아와 루마니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잔틴 건축은 돔의 사용으로 유명하다. 또한 대리석 기둥, 격자 천장과 화려한 장식을 특징으로 했으며, 금색 배경을 사용한 모자이크를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비잔틴 건축가들이 사용한 건축 자재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매우 좋아했던 대리석이 더 이상 아니었다. 비잔틴인들은 주로 돌과 벽돌을 사용했으며, 창문에는 얇은 설화 석고 시트를 사용했다. 모자이크는 벽돌 벽과 프레스코가 견디지 못하는 다른 모든 표면을 덮는 데 사용되었다. 초기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의 좋은 예로는 테살로니키 (그리스)의 하기오스 데메트리오스, 산타폴리나레 누오보 성당과 산 비탈레 성당 (둘 다 라벤나, 이탈리아에 있음) 및 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가 있다. 그리스-로마 신전과 비잔틴 교회는 외부와 내부의 측면에서 실질적으로 다르다. 고대에는 신전의 외부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신전의 내부에는 신전이 세워진 신의 조각상이 있었고, 사제만이 접근할 수 있었다. 고대의 신전 의식은 외부에서 거행되었고, 숭배자들이 보았던 것은 기둥으로 구성된 신전의 정면이었으며, 엔타블러처와 두 개의 박공이 있었다. 대조적으로, 기독교 전례는 교회의 내부에서 거행되었고, 따라서 외부는 일반적으로 장식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었다.[40]
바이킹 미술은 스칸디나비아와 바이킹 정착지의 장식 예술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용어이다.
로마네스크는 로마 제국 이후 등장한 최초의 범유럽 양식으로, 10세기 중반부터 13세기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에는 복잡한 구조적 계획을 가진 기념비적인 석조 구조물이 부활했다.
로마네스크 건축 교회는 통일된 부피 전체에 통합된 견고한 관절과 기하학적 명료성이 특징이다. 건축은 절제되었지만, 수도와 현관의 장식 조각과 프레스코 내부로 생기를 얻었다. 기하학적이고 잎이 많은 무늬가 점차 3차원적인 인물 조각으로 이어진다.
독일 힐데스하임의 성 미카엘 교회 (1001–1030)는 일부에서 원시 로마네스크 교회로 여겨진다.[48]
11세기 중반부터 13세기 초까지 로마네스크 회화는 대담하고 선형적인 윤곽선과 기하학, 특히 의복 처리에서 정의되는 2차원적이었다. 화가들은 대칭성과 정면성을 강조했다. 사실상 모든 서부 교회는 칠해졌지만, 아마도 벽화가 몇 명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신 순회 예술가들이 이 작업을 대부분 수행했다. 기본 윤곽은 젖은 플라스터 위에 흙색으로 그려졌다. 백색, 적색, 황토색, 하늘색이 지배적인 제한된 팔레트가 최대 시각 효과를 위해 사용되었으며, 빽빽한 채색은 띠의 배경을 형성했는데, 이는 하늘과 땅을 구별하려는 시도로 고전 미술 후기에 기원한 관행이다.
11세기 후반과 12세기 동안, 서부 수도원의 전성기, 유럽은 전례 없는 경제, 사회, 정치적 변화를 경험하여 수도원을 포함한 토지 소유주들 사이에서 부의 증가로 이어졌다. 책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고, 경제적 부는 풍부하게 채색된 필사본의 생산을 장려했다.
이 시대의 뛰어난 유물 중 하나는 70m 길이의 바이에 태피스트리이다. 이 작품은 노르만 잉글랜드 정복으로 이어지는 사건들을 묘사하며,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과 웨섹스 백작, 훗날 잉글랜드 왕 해롤드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고,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절정에 달한다. 11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복한 노르만족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달하지만, 현재는 잉글랜드에서 제작된 것으로 합의되었으며, 디자이너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여성에 의해 제작되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프랑스에 소장되어 있다.
르네상스라는 용어는 유럽에서 고대에 대한 새로운 관심의 '부활'을 설명한다. 고대 이후 처음으로 미술은 설득력 있게 실물과 같아졌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가들은 고대와 더불어 자연을 연구하고, 인체, 동물, 식물, 공간, 원근법, 빛의 질을 이해했다. 가장 일반적인 주제는 종교적 주제였지만, 신화적 이야기의 묘사도 제작되었다. 또한 획일적인 르네상스 양식은 없었다. 각 예술가는 이전 시대의 예술가와 동시대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 언어를 개발했다.
초기 르네상스는 예술가들이 비잔틴 미술의 경계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때의 창의적이고 지적인 활동의 시기였다. 현재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15세기 초에 시작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고전 문학, 철학 및 미술에 대한 관심의 급증, 상업의 성장, 새로운 대륙의 발견, 그리고 새로운 발명품들로 특징지어진다. 고대 로마의 미술과 문학에 대한 관심이 부활했으며, 고대 그리스와 라틴 텍스트 연구는 인본주의로 알려지게 된 개인주의와 이성의 개념을 촉발했다. 인본주의자들은 현재의 삶을 고려하고 개인적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예술가들의 접근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피렌체, 로마, 베네치아와 같은 이탈리아와 매우 연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유럽의 나머지 지역도 르네상스에 참여했다.[51] 북부 르네상스는 15세기 초부터 알프스 산맥 북쪽 유럽에서 발생했으며, '국제 고딕'으로 알려진 북부와 남부 간의 예술적 상호 교류의 시기에 이어졌다. 북부 르네상스와 이탈리아 르네상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북부 예술가들은 이탈리아인들처럼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가치를 부활시키려 하지 않은 반면, 남부에서는 이탈리아 예술가들과 후원자들이 자연과 인간 사회에 대한 실증적 연구와 북부 예술가들이 새로 개발된 유화 매체로 얻을 수 있는 깊은 색상에 감탄했다. 종교 개혁은 초상화나 풍경화와 같은 세속적인 그림에 대한 북부의 관심을 증가시켰다. 두 명의 주요 북부 예술가로는, 기괴한 생물체로 가득 찬 초현실적인 그림으로 유명한 히에로니무스 보스와 판화라는 새로운 미술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린 알브레히트 뒤러가 있다.
고(高) 르네상스는 15세기 후반과 16세기 초에 일어났으며, 로마에서 교황 권력이 안정되면서 여러 교황들이 도시의 옛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미술과 건축을 의뢰했다는 사실의 영향을 받았다.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는 교황들을 위해 거대하고 웅장한 프로젝트를 제작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 부분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아마도 시스티나 성당 천장일 것이다.
[[파일:Pieter Bruegel the Elder - The Tower of Babel (Vienna) - Google Art Project - edited.jpg|''바벨탑''; 피터르 브뤼헐] 제작; 1563; 유화 패널; 1.14 x 1.55 m; 쿤스트히스토리스 박물관 (빈, 오스트리아)[52]
매너리즘은 조화의 고(高) 르네상스 이상과 미술에 대한 합리적인 접근 방식을 벗어나 과장된 형태, 길쭉한 비례, 더욱 생생한 색상을 받아들였다. 이는 1510년에서 1520년 사이에 무엇보다 독창성을 중시하는 예술가들 사이에서 이탈리아에서 발전했다. 이 운동의 이름은 이탈리아어 ''maniera''(스타일 또는 방식)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는 모든 예술이 이제 준수해야 하는 고(高) 르네상스 시대에 달성된 탁월함의 기준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실제로 이는 양식화와 미술 '보여주기'로 이어졌으며, 때로는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 예로는 라파엘로의 제자 줄리오 로마노가 있다. 매너리즘은 또한 르네상스 이후와 바로크 시대 이전을 일반적으로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17세기는 망원경이나 현미경과 같은 과학적 발견과 발전, 그리고 가톨릭 반종교개혁과 개신교의 대립으로 인한 종교적 격변의 시기였다. 종교 개혁 이후 가톨릭 교회는 반종교개혁을 통해 예술이 열정적인 종교적 주제로 시청자에게 영감을 주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매너리즘의 뒤를 이어 유럽 전역의 종교적 긴장의 결과로 발전한 바로크 미술은 16세기 말에 등장했다. 바로크라는 명칭은 '찌그러진 진주'를 뜻하는 포르투갈어 단어 '바로코'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감정, 역동성, 드라마를 강력한 색채, 사실주의, 강렬한 명암 대비와 결합한 예술을 묘사한다. 1545년에서 1563년 사이 트렌트 공의회에서는 종교 예술이 경건함, 사실주의, 정확성을 장려하고, 시청자의 관심과 공감을 끌어내어 가톨릭 교회를 찬양하고 그 이미지를 강화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다음 세기에 바로크 미술의 급진적인 새로운 양식은 르네상스 시기의 모델을 수용하고 발전시켰으며, 종교 예술과 새로운 종류의 세속 예술, 특히 풍경화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바로크와 그 후기 변형인 로코코는 1580년경부터 1750년경까지 유럽, 라틴 아메리카, 그 외 지역에서 2세기 이상 예술과 건축을 지배한 최초의 진정한 글로벌 스타일이었다. 1580년대와 1590년대 볼로냐와 로마의 회화 작업실, 그리고 17세기 20년대와 30년대 로마의 조각 및 건축 아틀리에에서 탄생한 바로크는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플랑드르,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스칸디나비아, 러시아는 물론 뮌헨 (독일)에서 빌뉴스 (리투아니아)에 이르는 중부 및 동부 유럽 중심지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포르투갈 제국, 스페인 제국, 프랑스 식민 제국과 네덜란드 무역 네트워크는 이 두 스타일을 리마, 모잠비크, 고아, 필리핀과 같은 아메리카와 식민 아프리카, 아시아로 확산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회화와 조각과 마찬가지로 바로크 성당과 궁전 역시 환영과 드라마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극적인 명암 효과를 자주 사용하며, 건축, 회화, 조각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호화롭고 화려하게 장식된 내부를 가지고 있다. 바로크 건축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곡선, 솔로몬 기둥, 타원을 통해 표현된 역동성의 존재였다. 프랑스에서 바로크는 1643년에서 1715년 사이의 루이 14세 통치와 동의어인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파리, 베르사유, 프랑스의 다른 지역에서 베르사유 궁전, 메종 성, 보르비콩트 성, 루브르 박물관 회랑 또는 앵발리드의 돔과 같은 여러 기념비적인 건물들이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건물 자체 외에도 건물이 배치된 공간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로크 건축물은 로마의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와 같이 작은 규모이든, 도시를 압도하도록 설계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의 새로운 정면과 같은 거대한 규모이든 시청자의 관심을 사로잡고 주변 환경을 지배하려고 한다.
응용 미술도 이 시대에 번성했다. 바로크 가구는 그들을 장식하도록 의도된 방만큼 과장될 수 있었고, 그들의 모티프와 기술은 건축가의 전반적인 장식 계획과 조화를 이루도록 신중하게 조정되었다. 가장 유명한 가구 제작자 중 한 명은 앙드레 샤를 불로, 상감세공 기법으로 유명하며, 거북 등껍질과 황동 시트를 함께 붙여서 디자인을 만들었다. 그의 작품은 금박을 입힌 청동 장식으로도 장식되었다.
복잡한 고블랭 태피스트리는 고대 고전에서 영감을 받은 장면을 특징으로 했으며, 사보네리 공방은 루브르를 위한 크고 상세한 카펫을 제작했다. 검정색이나 노란색 배경의 이 카펫에는 중앙 모티프 또는 메달리온이 있었다. 중국 도자기, 델프트웨어, 생고뱅 (프랑스)에서 제작된 거울은 프랑스의 모든 왕자 궁전과 귀족 저택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루이 14세의 통치 기간 동안 큰 거울이 벽난로 선반 위에 놓였고, 이러한 추세는 바로크 시대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파리에서 시작된 로코코는 자연적인 모티프, 부드러운 색상, 곡선, 비대칭, 사랑, 자연, 유쾌한 오락을 포함한 주제로 특징지어진다.[54] 섬세함, 경쾌함, 젊음, 관능이 그 이상이었다.
베르사유 궁전의 루이 14세 궁정의 웅장한 바로크 양식에 대한 반발로 프랑스에서 시작된 로코코 운동은 특히 강력한 퐁파두르 부인(1721–1764), 새로운 왕 루이 15세(1710–1774)의 정부와 연관되었다.[54] 이 때문에 이 양식은 '퐁파두르'로도 알려졌다. 이 운동의 이름은 프랑스어 '로카유'에서 유래되었으며, 조약돌을 의미하며, 동굴의 내부를 장식하는 돌과 조개 껍데기를 가리키는데, 비슷한 조개 껍데기 형태가 로코코 디자인의 일반적인 특징이 되었기 때문이다.[54] 디자인과 장식 예술 양식으로
7. 1. 중세 미술
로마 제국이 300년경 쇠퇴하면서, 이후 중세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는 약 1천 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르네상스가 1400년경 시작될 때까지 이어졌다. 초기 기독교 미술은 이 시기의 초기 단계를 특징지으며, 그 뒤를 이어 비잔틴 미술, 앵글로-색슨 미술, 바이킹 미술, 오토 미술, 로마네스크 미술, 고딕 미술이 나타났으며, 이슬람 미술은 지중해 동부를 지배했다. 중세 미술은 로마 제국과 비잔티움의 예술적 유산과 북유럽의 "야만족" 예술 문화가 혼합되어 성장했다.중세 시대의 비잔틴 미술과 고딕 미술에서는 교회의 지배로 인해 많은 양의 종교 미술이 제작되었다. 그림에는 금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으며, 인물들은 단순화된 형태로 표현되었다.
7. 1. 1. 비잔틴 미술
비잔틴 미술은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의 기독교 그리스 미술 작품과, 그 제국으로부터 문화적 유산을 물려받은 국가 및 국가들로 구성된다. 비잔틴 제국은 로마의 쇠퇴로부터 시작되어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까지 지속되었지만,[37] 비잔틴 시대의 시작일은 미술사에서 더 명확하며, 아직까지 부정확하다. 동유럽과 중부 유럽의 많은 동방 정교회 국가들과 동부 지중해의 이슬람 국가들이 그 제국의 문화와 예술의 많은 측면들을 수세기 동안 보존했다.현존하는 비잔틴 미술은 대부분 종교적이며, 특정 시기를 제외하고는 전통적인 모델을 따르는 고도로 관습화된 양식을 보인다. 이는 주의 깊게 통제된 교회 신학을 예술적 용어로 번역하는 것이다. 프레스코, 채색 필사본 및 나무 패널에 그림을 그리고 (특히 초기에는) 모자이크가 주요 매체였으며, 형상적인 조각은 작은 상아 조각을 제외하고는 매우 드물게 나타났다. 필사본 그림은 더 큰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전적인 사실주의 전통을 끝까지 보존했다.[38] 비잔틴 미술은 서유럽에서 매우 명성이 높았고, 중세 시대가 거의 끝날 때까지 중세 미술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는 특히 이탈리아에서 그러했는데, 비잔틴 양식은 12세기까지 수정된 형태로 지속되었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에 형성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유입되는 영향은 비잔틴 양식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동방 정교회의 확산과 함께, 비잔틴 형태와 양식은 정교회 세계와 그 너머로 퍼져나갔다.[39] 비잔틴 건축, 특히 종교 건물에서의 영향은 이집트와 아라비아에서 러시아와 루마니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잔틴 건축은 돔의 사용으로 유명하다. 또한 대리석 기둥, 격자 천장과 화려한 장식을 특징으로 했으며, 금색 배경을 사용한 모자이크를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비잔틴 건축가들이 사용한 건축 자재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매우 좋아했던 대리석이 더 이상 아니었다. 비잔틴인들은 주로 돌과 벽돌을 사용했으며, 창문에는 얇은 설화 석고 시트를 사용했다. 모자이크는 벽돌 벽과 프레스코가 견디지 못하는 다른 모든 표면을 덮는 데 사용되었다. 초기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의 좋은 예로는 테살로니키 (그리스)의 하기오스 데메트리오스, 산타폴리나레 누오보 성당과 산 비탈레 성당 (둘 다 라벤나, 이탈리아에 있음) 및 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가 있다. 그리스-로마 신전과 비잔틴 교회는 외부와 내부의 측면에서 실질적으로 다르다. 고대에는 신전의 외부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신전의 내부에는 신전이 세워진 신의 조각상이 있었고, 사제만이 접근할 수 있었다. 고대의 신전 의식은 외부에서 거행되었고, 숭배자들이 보았던 것은 기둥으로 구성된 신전의 정면이었으며, 엔타블러처와 두 개의 박공이 있었다. 대조적으로, 기독교 전례는 교회의 내부에서 거행되었고, 따라서 외부는 일반적으로 장식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었다.[40]
7. 1. 2. 앵글로색슨 미술
7. 1. 3. 바이킹 미술
바이킹 미술은 스칸디나비아와 바이킹 정착지의 장식 예술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용어이다.7. 1. 4. 로마네스크 미술
로마네스크는 로마 제국 이후 등장한 최초의 범유럽 양식으로, 10세기 중반부터 13세기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에는 복잡한 구조적 계획을 가진 기념비적인 석조 구조물이 부활했다.로마네스크 건축 교회는 통일된 부피 전체에 통합된 견고한 관절과 기하학적 명료성이 특징이다. 건축은 절제되었지만, 수도와 현관의 장식 조각과 프레스코 내부로 생기를 얻었다. 기하학적이고 잎이 많은 무늬가 점차 3차원적인 인물 조각으로 이어진다.
독일 힐데스하임의 성 미카엘 교회 (1001–1030)는 일부에서 원시 로마네스크 교회로 여겨진다.[48]
11세기 중반부터 13세기 초까지 로마네스크 회화는 대담하고 선형적인 윤곽선과 기하학, 특히 의복 처리에서 정의되는 2차원적이었다. 화가들은 대칭성과 정면성을 강조했다. 사실상 모든 서부 교회는 칠해졌지만, 아마도 벽화가 몇 명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신 순회 예술가들이 이 작업을 대부분 수행했다. 기본 윤곽은 젖은 플라스터 위에 흙색으로 그려졌다. 백색, 적색, 황토색, 하늘색이 지배적인 제한된 팔레트가 최대 시각 효과를 위해 사용되었으며, 빽빽한 채색은 띠의 배경을 형성했는데, 이는 하늘과 땅을 구별하려는 시도로 고전 미술 후기에 기원한 관행이다.
11세기 후반과 12세기 동안, 서부 수도원의 전성기, 유럽은 전례 없는 경제, 사회, 정치적 변화를 경험하여 수도원을 포함한 토지 소유주들 사이에서 부의 증가로 이어졌다. 책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고, 경제적 부는 풍부하게 채색된 필사본의 생산을 장려했다.
이 시대의 뛰어난 유물 중 하나는 70m 길이의 바이에 태피스트리이다. 이 작품은 노르만 잉글랜드 정복으로 이어지는 사건들을 묘사하며,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과 웨섹스 백작, 훗날 잉글랜드 왕 해롤드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고,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절정에 달한다. 11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복한 노르만족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달하지만, 현재는 잉글랜드에서 제작된 것으로 합의되었으며, 디자이너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여성에 의해 제작되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프랑스에 소장되어 있다.
7. 2. 르네상스 미술
르네상스라는 용어는 유럽에서 고대에 대한 새로운 관심의 '부활'을 설명한다. 고대 이후 처음으로 미술은 설득력 있게 실물과 같아졌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가들은 고대와 더불어 자연을 연구하고, 인체, 동물, 식물, 공간, 원근법, 빛의 질을 이해했다. 가장 일반적인 주제는 종교적 주제였지만, 신화적 이야기의 묘사도 제작되었다. 또한 획일적인 르네상스 양식은 없었다. 각 예술가는 이전 시대의 예술가와 동시대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 언어를 개발했다.초기 르네상스는 예술가들이 비잔틴 미술의 경계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때의 창의적이고 지적인 활동의 시기였다. 현재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15세기 초에 시작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고전 문학, 철학 및 미술에 대한 관심의 급증, 상업의 성장, 새로운 대륙의 발견, 그리고 새로운 발명품들로 특징지어진다. 고대 로마의 미술과 문학에 대한 관심이 부활했으며, 고대 그리스와 라틴 텍스트 연구는 인본주의로 알려지게 된 개인주의와 이성의 개념을 촉발했다. 인본주의자들은 현재의 삶을 고려하고 개인적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예술가들의 접근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피렌체, 로마, 베네치아와 같은 이탈리아와 매우 연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유럽의 나머지 지역도 르네상스에 참여했다.[51] 북부 르네상스는 15세기 초부터 알프스 산맥 북쪽 유럽에서 발생했으며, '국제 고딕'으로 알려진 북부와 남부 간의 예술적 상호 교류의 시기에 이어졌다. 북부 르네상스와 이탈리아 르네상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북부 예술가들은 이탈리아인들처럼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가치를 부활시키려 하지 않은 반면, 남부에서는 이탈리아 예술가들과 후원자들이 자연과 인간 사회에 대한 실증적 연구와 북부 예술가들이 새로 개발된 유화 매체로 얻을 수 있는 깊은 색상에 감탄했다. 종교 개혁은 초상화나 풍경화와 같은 세속적인 그림에 대한 북부의 관심을 증가시켰다. 두 명의 주요 북부 예술가로는, 기괴한 생물체로 가득 찬 초현실적인 그림으로 유명한 히에로니무스 보스와 판화라는 새로운 미술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린 알브레히트 뒤러가 있다.
고(高) 르네상스는 15세기 후반과 16세기 초에 일어났으며, 로마에서 교황 권력이 안정되면서 여러 교황들이 도시의 옛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미술과 건축을 의뢰했다는 사실의 영향을 받았다.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는 교황들을 위해 거대하고 웅장한 프로젝트를 제작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 부분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아마도 시스티나 성당 천장일 것이다.
[[파일:Pieter Bruegel the Elder - The Tower of Babel (Vienna) - Google Art Project - edited.jpg|''바벨탑''; 피터르 브뤼헐] 제작; 1563; 유화 패널; 1.14 x 1.55 m; 쿤스트히스토리스 박물관 (빈, 오스트리아)[52]
매너리즘은 조화의 고(高) 르네상스 이상과 미술에 대한 합리적인 접근 방식을 벗어나 과장된 형태, 길쭉한 비례, 더욱 생생한 색상을 받아들였다. 이는 1510년에서 1520년 사이에 무엇보다 독창성을 중시하는 예술가들 사이에서 이탈리아에서 발전했다. 이 운동의 이름은 이탈리아어 ''maniera''(스타일 또는 방식)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는 모든 예술이 이제 준수해야 하는 고(高) 르네상스 시대에 달성된 탁월함의 기준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실제로 이는 양식화와 미술 '보여주기'로 이어졌으며, 때로는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 예로는 라파엘로의 제자 줄리오 로마노가 있다. 매너리즘은 또한 르네상스 이후와 바로크 시대 이전을 일반적으로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7. 3. 바로크 미술
17세기는 망원경이나 현미경과 같은 과학적 발견과 발전, 그리고 가톨릭 반종교개혁과 개신교의 대립으로 인한 종교적 격변의 시기였다. 종교 개혁 이후 가톨릭 교회는 반종교개혁을 통해 예술이 열정적인 종교적 주제로 시청자에게 영감을 주어야 한다고 선언했다.매너리즘의 뒤를 이어 유럽 전역의 종교적 긴장의 결과로 발전한 바로크 미술은 16세기 말에 등장했다. 바로크라는 명칭은 '찌그러진 진주'를 뜻하는 포르투갈어 단어 '바로코'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감정, 역동성, 드라마를 강력한 색채, 사실주의, 강렬한 명암 대비와 결합한 예술을 묘사한다. 1545년에서 1563년 사이 트렌트 공의회에서는 종교 예술이 경건함, 사실주의, 정확성을 장려하고, 시청자의 관심과 공감을 끌어내어 가톨릭 교회를 찬양하고 그 이미지를 강화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다음 세기에 바로크 미술의 급진적인 새로운 양식은 르네상스 시기의 모델을 수용하고 발전시켰으며, 종교 예술과 새로운 종류의 세속 예술, 특히 풍경화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바로크와 그 후기 변형인 로코코는 1580년경부터 1750년경까지 유럽, 라틴 아메리카, 그 외 지역에서 2세기 이상 예술과 건축을 지배한 최초의 진정한 글로벌 스타일이었다. 1580년대와 1590년대 볼로냐와 로마의 회화 작업실, 그리고 17세기 20년대와 30년대 로마의 조각 및 건축 아틀리에에서 탄생한 바로크는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플랑드르,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스칸디나비아, 러시아는 물론 뮌헨 (독일)에서 빌뉴스 (리투아니아)에 이르는 중부 및 동부 유럽 중심지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포르투갈 제국, 스페인 제국, 프랑스 식민 제국과 네덜란드 무역 네트워크는 이 두 스타일을 리마, 모잠비크, 고아, 필리핀과 같은 아메리카와 식민 아프리카, 아시아로 확산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회화와 조각과 마찬가지로 바로크 성당과 궁전 역시 환영과 드라마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극적인 명암 효과를 자주 사용하며, 건축, 회화, 조각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호화롭고 화려하게 장식된 내부를 가지고 있다. 바로크 건축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곡선, 솔로몬 기둥, 타원을 통해 표현된 역동성의 존재였다. 프랑스에서 바로크는 1643년에서 1715년 사이의 루이 14세 통치와 동의어인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파리, 베르사유, 프랑스의 다른 지역에서 베르사유 궁전, 메종 성, 보르비콩트 성, 루브르 박물관 회랑 또는 앵발리드의 돔과 같은 여러 기념비적인 건물들이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건물 자체 외에도 건물이 배치된 공간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로크 건축물은 로마의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와 같이 작은 규모이든, 도시를 압도하도록 설계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의 새로운 정면과 같은 거대한 규모이든 시청자의 관심을 사로잡고 주변 환경을 지배하려고 한다.
응용 미술도 이 시대에 번성했다. 바로크 가구는 그들을 장식하도록 의도된 방만큼 과장될 수 있었고, 그들의 모티프와 기술은 건축가의 전반적인 장식 계획과 조화를 이루도록 신중하게 조정되었다. 가장 유명한 가구 제작자 중 한 명은 앙드레 샤를 불로, 상감세공 기법으로 유명하며, 거북 등껍질과 황동 시트를 함께 붙여서 디자인을 만들었다. 그의 작품은 금박을 입힌 청동 장식으로도 장식되었다.
복잡한 고블랭 태피스트리는 고대 고전에서 영감을 받은 장면을 특징으로 했으며, 사보네리 공방은 루브르를 위한 크고 상세한 카펫을 제작했다. 검정색이나 노란색 배경의 이 카펫에는 중앙 모티프 또는 메달리온이 있었다. 중국 도자기, 델프트웨어, 생고뱅 (프랑스)에서 제작된 거울은 프랑스의 모든 왕자 궁전과 귀족 저택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루이 14세의 통치 기간 동안 큰 거울이 벽난로 선반 위에 놓였고, 이러한 추세는 바로크 시대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7. 4. 로코코 미술
파리에서 시작된 로코코는 자연적인 모티프, 부드러운 색상, 곡선, 비대칭, 사랑, 자연, 유쾌한 오락을 포함한 주제로 특징지어진다.[54] 섬세함, 경쾌함, 젊음, 관능이 그 이상이었다.
베르사유 궁전의 루이 14세 궁정의 웅장한 바로크 양식에 대한 반발로 프랑스에서 시작된 로코코 운동은 특히 강력한 퐁파두르 부인(1721–1764), 새로운 왕 루이 15세(1710–1774)의 정부와 연관되었다.[54] 이 때문에 이 양식은 '퐁파두르'로도 알려졌다. 이 운동의 이름은 프랑스어 '로카유'에서 유래되었으며, 조약돌을 의미하며, 동굴의 내부를 장식하는 돌과 조개 껍데기를 가리키는데, 비슷한 조개 껍데기 형태가 로코코 디자인의 일반적인 특징이 되었기 때문이다.[54] 디자인과 장식 예술 양식으로 시작되었으며, 우아하고 흐르는 듯한 모양으로 특징지어졌다. 건축이 뒤따랐고, 그 다음에는 회화와 조각이 뒤따랐다. 로코코라는 용어가 가장 자주 연관되는 프랑스 화가는 장-앙투안 와토이며, 그의 전원적인 장면, 즉 ''사뷔트 갈랑트''가 18세기 초를 지배했다.
비에스 교회와 같은 몇몇 중요한 바이에른 교회가 이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로코코는 세속적인 건물, 주로 교육받은 엘리트들이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아이디어를 논의하기 위해 만나는 훌륭한 궁전과 살롱과 가장 자주 연관된다.[54] 파리에서 그 인기는 새로운 유형의 사교 모임인 살롱의 출현과 일치했으며, 그 장소는 종종 로코코 양식으로 장식되었다. 가장 특징적으로 우아하고 세련된 예로는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18세기 호텔(hôtel particulier) 중 하나인 오텔 드 수비즈의 살롱 오발 드 라 프랭세스가 있다.
로코코는 좁고 섬세한 프레임과 더 섬세하고 종종 비대칭적인 장식(종종 시누아즈리 요소 포함)을 선호하면서 엘리트 가구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다.[54] 극동의 물건(주로 중국산)에 대한 취향은 가구에 중국식으로 칠하고 래커를 칠한 패널을 사용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 운동은 카르투슈, 아라베스크 및 조개 껍데기 작업뿐만 아니라 벽 패널 및 벽난로 디자인이 특징인 장식 책 덕분에 유럽 전역과 오스만 제국 및 중국까지 빠르게 퍼졌다.[54] 가장 인기 있는 책은 쥐스트-오렐르 메소니에 (1695–1750), 자크-프랑수아 블롱델 (1705–1774), 피에르-에드메 바벨 (1720–1775) 및 프랑수아 드 퀴빌리에 (1695–1768)가 제작했다.

7. 5. 신고전주의 미술
1748년부터 시작된 고대 로마 도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발굴은 고대 예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56]
고대 그리스 미술과 로마 미술에서 영감을 받은 신고전주의는 니콜라 푸생의 고전 역사화, 안톤 라파엘 멩스와 요한 요아킴 빙켈만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아 로마에서 시작되었지만, 곧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56] 18세기 중반, 로마는 그랜드 투어의 주요 장소가 되었고, 귀족 여행객들은 고전적 비전을 찾아 로마로 향했다.[56] 이들은 자신의 시골 저택에서 재현할 고전적 비전을 찾았고, 특히 영국과 프랑스에서 이 스타일을 유럽 전역으로 확산시켰다.[56] 신고전주의 회화는 고전 조각상이나 부조처럼 포즈를 취한 인물들로 채워지는 경향이 있었고, 고고학적 세부 사항으로 가득 찬 장소에 배치되었다.[56] 이 스타일은 로마 미술보다 그리스 미술을 선호했다.[56]
1789년 프랑스 혁명 직전, 신고전주의는 프랑스에서 애국심을 표현하고자 했다.[56] 이 시기에는 정치와 예술이 밀접하게 얽혀 있었으며, 예술은 진지해야 한다고 믿었고, 회화보다 드로잉을 중요하게 여겼다.[56] 매끄러운 윤곽과 눈에 띄는 붓 자국이 없는 그림이 궁극적인 목표였다.[56] 회화와 조각 모두 침착함과 절제를 발휘했으며, 자기 희생과 민족주의와 같은 숭고한 개념을 표현하는 영웅적인 주제에 집중했다.[56]
이 운동은 낭만주의의 길을 열었고, 혁명의 이상주의가 사라지고 19세기 초 나폴레옹 시대가 끝나면서 나타났다. 그러나 신고전주의는 낭만주의의 반대라기보다는, 어떤 면에서는 그 초기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57][58][59]
8. 현대 미술
많은 미술사학자들은 현대 미술의 기원을 18세기 말로 보지만, 19세기 중반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미술사학자 H. 하버드 아르나손(H. Harvard Arnason)은 "백 년 동안 점진적인 변형이 일어났다"라고 말했다. 계몽주의 시대, 미국과 프랑스의 혁명과 민주주의, 산업 혁명과 같은 사건들은 서구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사람, 상품, 아이디어, 정보가 전례 없는 속도로 국가와 대륙 간을 오갈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변화는 예술에도 반영되었다. 1830년대 사진의 발명은 특히 회화를 포함한 예술의 특정 측면을 더욱 변화시켰다. 19세기 초가 되자, 예술가들이 교회와 군주제를 섬기는 장인으로 여겨졌던 고딕 시대에서, 개인 예술가의 아이디어와 비전이 높이 평가받고, 문해력이 높아지고 부유하며 도시화된 중상류층 인구(특히 파리와 런던)의 후원을 받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개념으로의 길고 점진적인 패러다임 전환이 완료되었다. 18세기 말에는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사이의 양분화가 시작되었고, 이는 현대 미술의 거의 모든 새로운 운동에서 계속 이어졌다. "파도처럼 번져나가는 이러한 '이즘'들은 국가, 민족, 연대기적 경계를 무시하며, 오랫동안 어느 곳에서도 지배적이지 못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패턴으로 서로 경쟁하거나 합쳐진다."
현대 미술은 오리엔탈리즘의 이국적인 호기심, 자포니즘의 더 깊은 영향,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예술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국제적인 영향과 교류를 추구해 왔다. 반대로 현대 미술은 서유럽을 넘어 점차 확장되었다. 19세기 말까지 러시아와 미국에서 예술은 유럽 주요 국가들과 경쟁할 정도로 발전했다. 많은 주요 운동들이 라틴 아메리카, 호주, 아시아에서도 나타났으며, 지리적, 국적적 요소는 매 10년마다 점점 더 무의미해졌다. 20세기에는 전 세계에서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예술가들이 등장했다. 예를 들어 후지타 쓰구하루(Foujita, 일본), 아르쉴 고르키(Arshile Gorky, 아르메니아),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와 프리다 칼로(Frida Kahlo, 멕시코), 윌프레도 람(Wifredo Lam, 쿠바),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노르웨이), 로베르토 마타(Roberto Matta, 칠레), 마크 로스코(Mark Rothko,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페르난도 보테로 앙굴로(Fernando Botero Angulo, 콜롬비아),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âncuși)와 빅토르 브라너(Victor Brauner, 루마니아).
20세기 미술의 역사는 끊임없는 가능성과 새로운 기준을 찾는 여정의 서사이며, 각 기준은 다음 기준에 의해 차례로 무너졌다. 야수파, 표현주의, 입체주의, 추상 미술, 다다이즘, 초현실주의의 미술 운동은 새로운 창의적 스타일과 표현 방식을 더욱 탐구하도록 이끌었다. 이 시기 동안 증가하는 세계적 상호 작용은 파블로 피카소가 이베리아 조각, 아프리카 조각 및 원시주의의 영향을 받는 등 서양 미술에 다른 문화의 동등한 영향을 가져왔다. 자포니즘과 일본의 목판화 (이는 서양 르네상스 드로잉 기법의 영향을 받았다)는 인상주의와 이후의 예술적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폴 고갱이 오세아니아 미술에 보인 관심과 20세기 초 파리에서 새롭게 발견된 아프리카의 페티쉬 조각상 및 비유럽 문화의 기타 작품에 대한 식자층 사이의 갑작스러운 인기는 피카소, 앙리 마티스 및 그의 동료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20세기 후반에는 팝 아트와 추상 표현주의가 두각을 나타냈다.
8. 1. 인상주의
인상주의는 사실주의, 바르비종파, 외광파 화가들인 외젠 부댕, 카미유 코로, 샤를-프랑수아 도비니, 요한 바르톨트 용킨트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에서 등장했다. 1850년대 후반부터, 인상주의 화가들 중 몇몇은 파리에서 학생으로서, 특히 자유 아카데미 스위스와 샤를 글레이르의 아틀리에에서 친분을 쌓았다. 그들의 진보적인 작품은 명망 있는 국립 미술 학교 살롱의 보수적인 심사위원들에게 자주 거부당했는데, 이는 많은 예술가들이 명성을 쌓기 위해 의존했던 곳이었으며,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대중적으로 알려졌지만 조롱을 받던 낙선 살롱에 포함되었다. 1874년, 그들은 아카데미에서 독립하여 화가, 조각가, 판화가들의 협동 조합인 소시에테 아노니메 데 아티스트 페인트르, 쉴프테르, 그라뵈르(Société Anonyme Coopérative des Artistes Peintres, Sculpteurs, Graveurs)를 결성하고, 1886년 8번째이자 마지막 전시회가 열릴 때까지 1886년까지 파리에서 여러 인상주의 전시회를 열었다. 이 운동의 주요 인물로는 프레데리크 바지유, 귀스타브 카유보트, 메리 커샛, 폴 세잔, 에드가르 드가, 아르망 기요맹, 에두아르 마네, 클로드 모네, 베르트 모리조, 카미유 피사로,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알프레드 시슬레가 있었다. 인상주의는 주로 화가들의 운동이었지만, 드가와 르누아르는 조각품도 제작했으며, 오귀스트 로댕과 메다르도 로소와 같은 다른 예술가들도 때때로 인상주의와 연결된다. 1885년까지 인상주의는 어느 정도 두각을 나타냈지만, 이미 젊은 세대는 인상주의의 한계를 넘어섰다. 러시아 인상주의 미술관의 예술가, 호주, 미국 인상주의 및 라틴 아메리카는 곧 인상주의 양식을 채택했다. 원래 인상주의 화가들 중 몇몇은 1910년대와 1920년대에도 중요한 작품을 계속 제작했다.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용된 많은 기법들은 전통적인 방법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림은 젖은 물감 위에 젖은 물감을 칠하여(마른 물감 위에 젖은 물감으로 칠하는 것과 반대) 몇 시간 또는 며칠 만에 완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유약을 바르고 색을 혼합하는 대신, 순수한 색을 두껍고 불투명한 임파스토 붓으로 나란히 칠했으며, 멀리서 보면 보는 사람의 눈에서 혼합되었다. 검은색은 매우 드물게 사용되거나 전혀 사용되지 않았고, 윤곽선은 대상, 윤곽선 및 모양을 형성하는 미묘한 색상의 붓질로 대체되었다. 미술사학자 H. W. 얀슨은 "실제 공간의 환상을 더하는 대신, 실제 칠해진 표면의 통일성을 강화한다"고 말했다. 인상주의 그림은 일반적으로 풍경, 초상화, 정물, 가정 장면, 일상적인 여가와 밤 문화를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한다. 구도는 종종 특이한 원근법을 기반으로 하며, 즉흥적이고 솔직하게 나타났다. 그림에는 훈계적, 상징적, 은유적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았으며, 아카데미가 매우 높이 평가했던 성경적, 신화적, 역사적 주제나 상징주의자들이 탐구한 어둡고 심리적인 관심사를 거의 다루지 않았다. 빛, 그림자, 대기의 뉘앙스, 표면에서 반사되는 색상의 뉘앙스를 조사했으며, 때로는 이러한 요소의 시간적 변화를 강조했다. 그림 자체가 그림의 주제였다. 이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었으며, 수십 년 동안 떠돌아다니던 아이디어였지만 인상주의에서 새로운 높이와 일관성을 얻었을 것이다.
8. 2. 후기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는 여러 세대의 예술가들에게 적용되는 용어이다. 폴 세잔, 폴 고갱, 조르주 쇠라, 빈센트 반 고흐는 각자 인상주의 단계를 거쳐 독창적인 스타일로 발전했다. 이들의 작품은 전위 예술에 영향을 미쳤다. 세잔은 입체파에 영향을 주었고, 반 고흐는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작업했다. 쇠라와 고갱은 협력적으로 작업했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도 이 시대의 중요한 예술가이다.후기 인상주의자들은 인상주의적 주제를 묘사했지만, 종합주의는 상징주의, 정신주의, 우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었다. 부자연스러운 색상, 패턴, 평면, 특이한 원근법과 극단으로 밀어붙인 시점은 모더니즘을 추상으로 이끌었다.

'''신인상주의'''는 과학적인 색채 이론을 바탕으로 빛과 색을 탐구했다. 주요 예술가는 조르주 쇠라와 폴 시냐크였다. 앙리 에드몽 크로스, 막시밀리앵 뤼스, 알베르 뒤부아-필레, 카미유 피사로, 빈센트 반 고흐도 이 스타일에 참여했다. 야수파에 영향을 미쳤고, 표현주의, 입체주의, 초기 추상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종합주의'''는 에밀 베르나르가 고안했으며, 폴 고갱 등이 발전시켰다. 클루아존 에나멜 또는 스테인드 글라스와 유사하며, 검은색 또는 어두운 색으로 윤곽이 잡힌 평평하고 대담한 색상을 사용했다. 폴 세뤼지에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종합주의는 어두운 윤곽선과 클루아존의 특징에 덜 강조점을 두었다. 쿠노 아미에, 루이 앙케탱, 샤를 필리제, 야코프 메이어 데 한, 샤를 라발, 아르망 세갱 등이 있다. 야수파와 표현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비파'''는 종합주의, 신인상주의, 상징주의, 아르누보의 요소를 차용했다. 라 레뷰 블랑슈는 나비파와 상징주의 콘텐츠를 출판했다. 에두아르 뷔야르, 피에르 보나르는 나비파의 전형이지만, 1940년대까지 작품을 제작했다. 모리스 드니, 막심 데토마, 메이어 데 한, 앙리-가브리엘 이벨스, 조르주 라콤브, 아리스티드 마이욜, 폴 랑송, 케르-자비에 루셀, 아르망 세갱, 폴 세뤼지에, 펠릭스 발로통, 얀 베르카데 등이 있다.
8. 3. 상징주의
상징주의는 19세기 3분기에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등장하여 1870년대에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이후 덜하지만 미국으로도 확산되었다. 낭만주의에서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고 진화했지만, 샤를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1857년) 출판은 상징주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 문학, 연극, 음악에서 국제적인 표현을 가졌으며, 건축, 응용 미술, 장식 미술에서 상징주의는 아르누보와 밀접하게 병행하며 중복되었다.상징주의는 종종 후기 인상주의, 나비파, 퇴폐 운동, 세기말, 아르누보, 뮌헨 분리파, 빈 분리파, 표현주의, 심지어 상징주의 전에 형성되어 영향을 미친 라파엘 전파와 같은 다른 동시대 미술 운동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졌다. 제임스 맥닐 휘슬러, 외젠 카리에르, 페르디난트 호들러, 페르낭 크노프, 조반니 세간티니, 뤼시앙 레비-뒤르메, 장 델빌, 제임스 앙소르와 같은 다양한 예술가들이 상징주의와 다양한 정도로 연관되었다. 미술사학자 로버트 L. 드레보이는 "상징주의는 학교라기보다는 한 시대의 분위기였다."라고 썼다.
상징주의 미술의 주제, 테마, 의미는 종종 베일에 가려지고 모호하지만, 최상의 경우 심리적 또는 감정적 수준에서 깊이 공감할 수 있다. 주제는 종종 은유 또는 우화로 제시되어, 주제를 직접적으로 정의하거나 다루지 않고, 시청자에게 매우 주관적이고 개인적이며 내성적인 감정과 아이디어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는 "사물을 묘사하지 말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효과를 묘사하라"라고 썼고,[69] "사물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시의 즐거움의 4분의 3을 없애는 것인데, 이는 조금씩 이해되도록 만들어졌다." 영국 화가 조지 프레데릭 와츠는 "나는 사물이 아닌 아이디어를 그린다."라고 말했다.
상징주의는 야수파, 입체주의, 미래주의의 시작과 함께 빠르게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무렵에는 대부분 사라졌지만, 형이상학파에서 지속적인 발전과 관련성을 찾았고, 이는 다시 초현실주의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8. 4. 야수파
야수파는 후기 인상주의에서 시작되어 20세기의 첫 번째 주요 미술 사조로 발전했다.[72] 1895년, 앙리 마티스가 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귀스타브 모로의 아틀리에에 들어가면서 조르주 루오, 샤를 카무앵, 앙리 망갱, 알베르 마르케를 만났다. 마르케는 "1898년 무렵 마티스와 나는 나중에 야수파라고 불리게 된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었다."라고 회상했다.[72] 1902–03년이 되자, 조르주 브라크, 앙드레 드랭, 라울 뒤피, 오통 프리에즈, 장 메탱제 등 여러 예술가들이 그룹에 합류했다.당시 파리에서는 쇠라 (1900, 1905), 반 고흐 (1901, 1905), 툴루즈-로트렉 (1902), 고갱 (1906), 세잔 (1907)의 회고전이 열려 영향을 주었다. 마티스와 드랭은 아프리카 조각품을 수집하기도 했다. 1904년 여름, 마티스는 생트로페에서 신인상주의 화가인 폴 시냐크와 앙리-에드몽 크로스와 함께 그림을 그렸고, 1905년에는 카무앵, 망갱, 마르케가 뒤를 이었다.[72]
이 화가들은 독립 미술가 협회와 가을 살롱 (1903–1908)에 정기적으로 전시했다. 1905년 루이 복셀(길 블라스의 미술 평론가)은 이들의 작품을 보고 "야수들 틈에 있는 도나텔로!"라고 평했다.[72] 이 운동은 대중에게 하나의 실체로 인식되지 않았지만, 일단 이름이 붙자 그 이름이 굳어졌다. 1906–1907년경 열렬한 관객을 확보했고, 미국에서 러시아까지 수집가들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야수파는 입체주의가 등장하면서 1908년경에 대부분 해체되었고,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다른 스타일을 탐구했다. 마티스와 뒤피만이 1950년대까지 야수파를 탐구했다.[72]
야수파는 풍경, 야외 사생, 실내, 인물, 정물을 그렸다. 그들은 두껍고, 부자연스럽고, 종종 대조적인, 생생한 색상으로 붓질을 거칠게 했으며, 때로는 튜브에서 바로 짜낸 색을 사용했다. 고갱은 평면적이고 순수한 색상으로 패턴의 표현적 가치를 탐구하는 데 관심을 보였고, 원시주의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이는 야수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마티스는 색채가 디자인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고 오랫동안 설명했다.[72] 야수파는 그림에서 디자인의 기본적인 토대로서의 드로잉과 선에서 색채로의 전환의 정점이었고, 추상화 직전의 대상을 묘사했다.[72]

8. 5. 표현주의
표현주의(Expressionism)는 회화, 조각, 판화, 시, 문학, 연극, 영화, 건축 분야에서 나타난 국제적인 예술 운동이었다. 일부에서는 제2 빈 악파와 이 시대의 다른 음악을 이 운동과 연관짓기도 한다. 대부분의 미술사학자들은 표현주의의 시작을 1905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다리파의 창립으로 보지만, 로비스 코린트, 제임스 앙소르, 케테 콜비츠, 파울라 모더존-베커, 에드바르트 뭉크, 에밀 놀데, 크리스티안 롤프스 등 여러 예술가들이 1885년에서 1905년 사이 표현주의 정신에 부합하는 영향력 있는 작품들을 제작했다. 이 예술가들 중 다수는 나중에 다양한 표현주의 그룹들과 함께 전시하고 교류했다.
표현주의 회화는 느슨하고, 즉흥적이며, 자주 두꺼운 임파스토 붓 터치를 특징으로 한다. 이는 종종 대상이 실제 보이는 모습이 아닌, 예술가가 대상에 대해 느낀 감정을 전달하며, 현실적인 묘사나 예술 이론보다 직관과 본능적인 감정을 중시했다. 표현주의는 종종 불안감이나 기쁨으로 가득 찼으며, 중립적인 대상에 디자인과 색채를 집중하는 야수주의와 달리, 현대 사회와 사회 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참여를 보였다. 목판화는 표현주의에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표현주의는 때때로 상징주의, 야수주의, 입체주의, 미래주의, 추상, 다다이즘과 같은 다른 양식과 운동과 중첩되거나 통합되기도 한다. 다양한 시기와 장소에서 여러 표현주의 그룹과 분파가 나타났다.
다리파(Die Brücke: 1905-1913)는 "모든 혁명적이고 급증하는 요소"를 연결하고자 했다. 이 단체는 4명의 건축 학생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에리히 헤켈, 카를 슈미트-로틀루프, 프리츠 블레이에 의해 창립되었다. 드레스덴에서 함께 작업실을 공유하며, 그들은 그림, 조각, 판화를 제작하고 전시회를 조직했으며, 여름에는 독립적으로 작업하기 위해 흩어졌다. 그들의 첫 전시회는 1905년에 열렸고, 이후 에밀 놀데와 막스 페히슈타인이 1906년에, 오토 뮐러가 1910년에 합류했다. 그들의 영향으로는 고딕 미술, 원시주의, 아르누보, 그리고 파리의 발전, 특히 반 고흐와 야수주의가 있었다. 이 그룹은 1911년 베를린으로 옮겨갔고, 1913년에 해산되었다.
청기사파(Der Blaue Reiter: 1911–1914)는 바실리 칸딘스키와 프란츠 마르크가 창립한 비교적 비공식적인 그룹으로, 파리와 유럽의 예술 작품을 전시회를 조직했다. 이 그룹은 1892년 뮌헨 분리파(사실주의 및 인상주의), 1901년 팔랑스(후기 인상주의), 1909년 신 미술가 협회, 1911년 청기사파 등 뮌헨 미술 아카데미에서 분리된 일련의 진보적인 그룹 중 하나였다. 이 후 두 그룹과 관련된 예술가로는 부르유크 형제, 하인리히 캄펜동크, 알렉세이 폰 야블렌스키, 파울 클레, 아우구스트 마케, 가브리엘레 뮌터, 마리안네 폰 베레프킨 등이 있었다. 영향력 있는 에세이 모음집인 앨범 ''청기사파'', 칸딘스키의 비객관 미술에 대한 아이디어를 담은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가 1912년에 출판되었다. 청기사파는 마케와 마르크가 모두 사망한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함께 해산되었다.
오스카 코코슈카, 에곤 실레, 리하르트 게르스틀과 같은 다른 예술가들이 오스트리아에서 등장했다. 프랑스 예술가 조르주 루오와 샤임 수틴은 이 운동과 유사성을 보였다. 조각가로는 에른스트 바를라흐, 빌헬름 렘브루크, 게르하르트 마르크스, 빌헬름 바우어가 있다. 표현주의와 관련된 건축가로는 막스 베르크, 헤르만 빈스터린, 요한 프리드리히 횔거, 미셸 드 클레르크, 에리히 멘델존, 한스 푈치히, 한스 샤로운, 루돌프 슈타이너, 브루노 타우트가 있다.
데어 슈투름(The Storm 1910–1932)은 헤르바르트 발덴이 창립한 잡지로, 표현주의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었으며, 1912년 베를린에 관련 갤러리가 개관되었고, 1918년에는 극단과 학교가 개교했다. 표현주의적인 영화로 간주되는 작품들로는, 일부는 고전으로 여겨지는 작품들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로베르트 비네, 1920), ''노스페라투'' (F. W. 무르나우, 1922), ''메트로폴리스'' (프리츠 랑, 1927) 등이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많은 예술가들이 아방가르드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이는 1920년대 초 야수주의자들의 작품, 피카소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신고전주의 시대 작품, 조르조 데 키리코의 후기 작품에서 나타난다. 이 경향은 독일에서 '''신즉물주의(ca. 1919–1933)'''라고 불렸으며, 다른 곳에서는 이 작품들의 향수적인 성격과는 대조적으로 환멸과 무자비한 사회 비판이 특징이었다. 신즉물주의 예술가들은 주로 표현주의와 다다이즘 환경에서 등장했는데, 여기에는 오토 딕스, 크리스티안 샤트, 루돌프 슐리터, 게오르크 숄츠, 잔 마멘 등이 포함되었다. 막스 베크만과 게오르그 그로스도 한동안 신즉물주의와 연관되었다.
본질적으로 표현주의는 아니지만, '''바우하우스(Staatliches Bauhaus: 1919–1933)'''는 공예, 장식 미술 및 순수 미술을 융합한 영향력 있는 독일의 학교였다. 바이마르에서 데사우, 베를린으로 이동하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초점이 바뀌고 진화했다. 교장으로는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 (1919–1928), 하네스 마이어 (1928–1930),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 (1930–1933)가 있었다. 다양한 시기에 요제프 알베르스, 테오 반 되스버르흐, 리오넬 파이닝거, 요하네스 이텐, 파울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엘 리시츠키, 게르하르트 마르크스, 러슬로 모호이-너지, 오스카 슐레머 등이 교수로 참여했다. 바우하우스 건축가들은 단순화된 형태, 장식의 부재, 디자인과 기능의 통합, 그리고 대량 생산이 개인적인 예술적 비전과 양립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특징인 국제 양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치당이 권력을 잡으면서 현대 미술은 "퇴폐 미술"로 낙인 찍혔고, 바우하우스는 1933년에 폐쇄되어 몇 년 동안 독일에서 모더니즘이 억압되었다.
8. 6. 입체주의
입체주의는 원근법을 거부하고, 여러 시점으로 대상을 분산하여 표현함으로써 형태를 중시하는 새로운 공간 구성을 만들어냈다. 파블로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 등 입체주의 예술가들은 이베리아 조각, 아프리카 미술, 오세아니아 미술의 조각상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 조각상들은 루브르 박물관과 트로카데로 민족학 박물관에 전시되었고 벼룩시장과 경매장에서도 판매되었다.비평가이자 시인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1913년에 '피카소는 외과의가 시체를 해부하는 방식과 같이 대상을 연구한다'라고 썼다. 5년 전,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는 친구이자 동료이자 경쟁자로서, 원근법적 사실주의를 예술적 부검 형태로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는 객체의 안과 주변을 분석적으로 제시하는 혁신적인 회화 스타일이었다.
8. 7. 다다이즘
8. 8. 초현실주의
초현실주의는 다다의 한 유파로 등장하여, 1924년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으로 공식적으로 시작을 알렸다. 처음에는 파리의 시인과 작가들의 문학 그룹이었으나, 곧 화가, 조각가, 사진 작가, 영화 제작자를 포함하는 국제적인 운동으로 발전했다. 1929년에는 ''제2차 초현실주의 선언''이 발표되었다. 초현실주의는 응용 미술이나 장식 미술, 건축, 음악에서는 큰 표현을 보이지 않았지만, 몇몇 예외적인 사례들(예: 체스 세트, 가구, 라스 포자스)을 확인할 수 있다.메타물리즘 (c. 1910–1921)은 조르조 데 키리코를 중심으로 한 작고 짧게 지속된 형이상 회화로 초현실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초현실주의자들은 큐비즘과 다다에서 최근 개발된 여러 혁신적인 기술과 함께 콜라주, 오브제 트루베, 아상블라주, 우연성, 레이오그래프(포토그램), 모래 그림, 물감 흘리기와 뿌리기, 데칼코마니, 프로타주, 퓌마주, 라클라주 등 새로운 기술들을 탐구했다.
초현실주의 미술에는 두 가지 기본적인 접근 방식이 두드러진다. 자동기술법은 초기 몇 년 동안 지배적이었으며, 앙드레 마송과 호안 미로와 같은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다. 조르조 데 키리코의 작품에 영향을 받은 다른 예술가들은 살바도르 달리와 르네 마그리트를 포함하여, 여과되지 않은 생각과 부조리한 병치를 표현하기 위해 보다 전통적인 방법과 매체를 사용했다. 주요 예술가로는 장 아르프, 한스 벨머, 빅토르 브라우너, 루이스 부뉘엘, 조셉 코넬, 오스카 도밍게스, 막스 에른스트, 윌프레도 람, 이브 탕기, 만 레이, 알베르토 자코메티, 메레트 오펜하임, 로베르토 마타 등이 있다. 초현실주의와 비공식적으로 연관된 다른 중요한 예술가로는 마르셀 뒤샹, 파블로 피카소, 프리다 칼로가 있다.
초현실주의 아이디어와 이론은 일련의 저널, ''라 레볼뤼시옹 쉬르레알리스트'' (1924–1929), ''르 쉬르레알리슴 오 세르비스 드 라 레볼뤼시옹'' (1930–1933), ''미노토르'' (1933–1939), ''VVV'' (1942–1944)에서 논의되었다. 앙드레 마송과 호안 미로가 제작한 자동적인 그림뿐만 아니라 로베르토 마타와 아르실 고르키와 같은 초현실주의 후발 주자들은 1940년대 후반의 추상표현주의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브르통과 다른 창립 멤버들이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세계를 이끌었다고 믿었던 서구 문화의 전통적인 정치적, 종교적, 부르주아적 가치에 대한 다다의 불경함과 경멸을 어느 정도 공유하면서, 초현실주의자들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잠재의식에 관해 열어놓은 가능성을 탐구했다. "순수한 정신적 자동주의, 즉 언어, 문자 또는 다른 어떤 방법을 통해 정신의 실제 기능을 표현하려는 의도. 어떤 이성적 통제 없이, 어떤 미적 또는 도덕적 선입견 없이, 생각에 의한 명령." 초현실주의는 정치적, 종교적, 도덕적 또는 합리적인 원칙에 의해 걸러지지 않고 검열되지 않은 순수한 생각을 표현하고자 했다.
8. 9. 추상 표현주의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유럽이 전쟁의 상처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는 동안, 미국은 정치, 경제, 문화적 강대국으로 부상했다.[74] 1940년대와 1950년대에 걸쳐 추상표현주의는 국제적인 영향을 미친 최초의 미국 미술 운동으로 떠올랐으며, 그 결과 미술계의 중심은 유럽에서 뉴욕으로 이동했다.[74] 추상표현주의자들은 비슷한 관점을 가졌지만 서로 다른 접근 방식을 가진 느슨하게 연결된 소규모 예술가 그룹이었다.[74] 이들은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아 자발성,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고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 미술의 특징이었던 미국 생활의 주제를 포기했다.[74] 이 운동의 가장 유명한 대표자 중 한 명은 잭슨 폴록으로, 그는 땅에 거대한 캔버스를 놓고 페인트를 붓고, 튕기고,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다.[74] 다른 예술가로는 빌렘 데 쿠닝, 프란츠 클라인, 로버트 마더웰, 바넷 뉴먼, 마크 로스코, 클리포드 스틸 등이 있다.[74]8. 10. 팝 아트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비주의와 대중 매체의 급증은 런던과 뉴욕에서 팝 아트의 발전을 이끌었다.[74] 1956년 런던 전시회에서 리처드 해밀턴이 제작한 미국의 잡지로 만든 콜라주에 '팝(Pop)'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74] 팝 아트는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발이었고, 팝 문화의 아이디어를 해석했다.[74] 소비주의를 기념하고 논평하면서, 팝 아티스트들은 광고, 미디어, 쇼핑을 기반으로 한 다채로운 이미지를 제작하여 영화 스타, 만화, 국기, 포장 및 음식과 같이 모든 사람이 관련될 수 있는 것들을 특징으로 했다.[74]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바르셀로나의 머리''(1991–1992)는 팝 아트의 대표적인 예시이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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