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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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그리스는 청동기 시대부터 시작되어 헬레니즘 시대를 거쳐 로마에 정복되기까지의 그리스 역사를 포괄하며, 현대 그리스, 키프로스, 터키의 에게 해 연안 등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번성했다. 이 시기에는 미케네 문명, 그리스 암흑기, 고전기 등 다양한 시대를 거치며, 폴리스(도시 국가)를 중심으로 독특한 정치, 사회, 문화적 특징을 발전시켰다.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중심으로 정치 체제가 발전했으며, 철학, 문학, 과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고대 그리스의 문화유산은 서구 문화의 기반이 되었으며, 현대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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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그리스 -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이후부터 로마에 의한 합병까지의 시기로, 그리스인들의 시야 확장과 새로운 헬레니즘 도시로의 이주, 도시 국가들의 연합 노력, 마케도니아와 후계 왕국들의 패권 다툼, 그리고 로마의 개입과 지배로 특징지어진다. - 고대 그리스 - 고대 그리스어
고대 그리스어는 기원전 1200년경 인도유럽어족에서 분기되어 기원전 8세기부터 그리스 문자로 기록된 언어로, 도리아어, 아이올리아어, 이오니아어, 아티카어 등 여러 방언으로 나뉘며, 현대 그리스어의 기원이자 그리스 문학과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교육 및 학술 분야에서 활용된다.
| 고대 그리스 | |
|---|---|
| 개요 | |
| 위치 | 지중해 연안, 발칸 반도 남부 |
| 존속 기간 | 기원전 12세기 ~ 기원후 600년경 |
| 정치 | |
| 정치 체제 | 다양한 정치 체제 (왕정, 귀족정, 민주정) |
| 주요 도시 국가 |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 코린토스 미케네 |
| 역사 | |
| 주요 시대 | 미케네 문명 (기원전 1600년경 ~ 기원전 1100년경) 그리스 암흑 시대 (기원전 1100년경 ~ 기원전 800년경) 아르카이크 시대 (기원전 800년경 ~ 기원전 500년경) 고전 시대 (기원전 500년경 ~ 기원전 323년) 헬레니즘 시대 (기원전 323년 ~ 기원전 31년) 로마 그리스 (기원전 146년 ~ 기원후 330년) |
| 문화 | |
| 주요 문화 요소 | 그리스 신화 그리스 철학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스 연극 올림픽 |
| 언어 | |
| 사용 언어 | 고대 그리스어 |
| 종교 | |
| 주요 종교 | 고대 그리스 종교 |
| 관련 항목 | |
| 관련 항목 | 그리스사 헬레니즘 서양 문명 |
| 참고 자료 | |
| 참고 자료 | 캐롤 G. 토마스, "고대 그리스로부터의 길" 모라 엘린, 모라 맥기니스, "그리스: 주요 자료 문화 가이드" 존 E. 핀들링, 킴벌리 D. 펠, "근대 올림픽 운동 백과사전" 웨인 C. 톰슨, 마크 H. 멀린, "서유럽, 1983" |
2. 시대 구분
고대 그리스의 시대 구분은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연대 기준은 없지만, 다양한 기준에 따라 여러 시기로 나눌 수 있다.
- 그리스 암흑기(기원전 1100년경 ~ 750년경): 미케네 문명 멸망 이후 폴리스 성립 이전 시기로, 도기에 기하학적 문양이 사용되었다.
- 그리스 상고기(기원전 750년경 ~ 480년경): 예술가들이 경직되고 신성한 자세의 입상 조각 작품을 만들었으며, '상고기 미소'가 특징이다. 아테나이의 마지막 참주 정권이 전복되고 아테나이 민주주의가 시작된 기원전 510년을 상고기의 종식 연대로 보기도 한다.
- 그리스 고전기(기원전 500년경 ~ 323년): 파르테논 신전과 같이 모범적인 예술 양식이 나타난 시기이다.
-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기원전 323년 ~ 146년):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부터 로마 공화정의 그리스 정복 시기까지로, 그리스 문화와 패권이 중동까지 확장되었다.
지중해 지역의 고전 시대는 일반적으로 기원전 8세기(호메로스의 가장 초기 기록된 시가의 시대)에 시작하여 서기 6세기에 끝난 것으로 여겨진다.[5]
그리스의 고전 시대는 그리스 암흑기 (기원전 1100년경 ~ 기원전 800년경)에 앞서며, 고고학적으로 도자기 디자인의 원형 기하학과 기하학 양식으로 특징지어진다. 암흑기 이후 기원전 8세기경에 시작된 아르카이크 시대는 그리스 문화와 사회의 초기 발전을 보여주었으며,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략부터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까지 고전 시대[6]로 이어졌다.[7]
고전 시대는 "고전적" 양식, 즉 후대 관찰자들, 특히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에서 모범적인 것으로 간주된 양식을 특징으로 한다. 정치적으로 고전 시대는 5세기 동안 아테네와 델로스 동맹이 지배했지만, 기원전 4세기 초 스파르타의 패권에 밀려나기 전에 테베와 보이오티아 동맹,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케도니아가 이끄는 코린토스 동맹으로 권력이 이동했다. 이 시대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부상에 의해 형성되었다.
고전 시대 이후에는 헬레니즘 시대(기원전 323년~146년)가 이어졌는데, 이 기간 동안 알렉산드로스의 죽음부터 로마의 정복까지 그리스 문화와 권력이 근동과 중동으로 확장되었다. 로마 시대 그리스는 일반적으로 기원전 146년 코린토스인들에 대한 로마의 승리인 코린토스 전투부터 콘스탄티누스가 로마 제국의 수도로 비잔티움을 건설한 서기 330년까지로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후기 고대는 서기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까지의 기독교화 시대를 가리키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529년 아테네 아카데미아를 폐쇄한 것으로 끝맺는다.[8]
2. 1. 선사 시대
청동기 시대 중기(대략 기원전 2000년경)[118]부터 발칸반도에서 나중에 그리스인을 이루게 될 부족들이 몇 차례에 걸쳐 남쪽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원시 그리스어는 이 시기 이주민들이 오기 직전에 쓰인 언어로, 기원전 3000년대 후반 또는 늦어도 기원전 17세기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원시 그리스의 청동기 문명은 보통 '헬라딕(helladic)' 문명이라고 칭하며, 흔히 말하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이전 단계이다.미케네 문명은 이 시기에 흥성하였으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기록되어 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미케네 문명은 기원전 1150년 갑자기 몰락하였는데, 도시는 약탈당하고 인구가 크게 줄었다. 청동기 시대의 붕괴는 그리스 본토에 침입한 마지막 그리스인 집단인 도리스인의 출현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났다. 두 사건이 인과적으로 연결된다는 견해가 다수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청동기 시대가 종식되면서 그리스는 "암흑기"에 접어든다.
그리스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인류는 할키디키 반도(Χαλκιδική χερσόνησος|할키디키 헤르소니소스el) 페트랄로나에서 발견된 페트랄로나인(Petralona man)이며, 이들은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와 네안데르탈인(Neanderthal)의 형질적 특징을 함께 가지고 있으며, 약 20만 년에서 40만 년 전으로 추정된다. 그들이 활동했던 이 시대가 그리스의 전기 구석기 시대로 추정되며, 그리스에서 인류의 활동이 시작된 것은 이 시대와 거의 일치한다고 생각된다. 또한 15만 년 전이 되면 생활의 흔적이 증가하며, 이 시대가 중기 구석기 시대로 여겨진다.

그 후, 약 6만 년 전 중기 구석기 시대가 되면 화석 인류를 대신하여 구석기인의 활동이 확인된다. 동부 지중해 세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무스티에 문화(Mousterian culture)의 특징이 보이며, 이피루스(Epirus), 테살리아(Thessaly), 엘리스(Elis), 아르골리스(Argolis), 크레타 섬(Crete) 등에서 석편이 발견되었으며, 특히 아르골리스에 있는 프랑크티 동굴에서는 르발루아 기법의 석편이 발견되었다. 5만 년 전경에 최종 빙하기에 돌입하여 해수면은 하강하고, 이 시대에 신인의 시대로 이행하였다. 그 후, 3만 년 전이 되면 후기 구석기 시대에 들어선다. 이 시대는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유적의 수는 많지 않지만, 프랑크티 동굴이나 세오페트라 동굴 등에서 수렵 채집민에 의한 활동을 시사하는 문화층의 퇴적이 보인다. 또한 이 시대에는 사냥 방법도 조직적인 것으로 변화하고, 더 나아가 석기 가공 기술도 발전하여, 동굴 벽화나 여성 조각상도 이 시대에 보인다.
중석기 시대에 이르면 온난화가 진행되어 해안선도 상승하였다. 그동안의 수렵 생활에서 축적 생활로의 전환이 보이며, 프랑크티 동굴에서도 흑요석이나 물고기 뼈가 발견되었고, 또한 스포라데스 제도(Sporades)의 유우라 섬(Euboea)의 키클롭스 동굴에서도 물고기 뼈나 낚싯바늘 등이 발견되어, 이러한 유물로부터 당시 그리스에 살았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해양으로 진출하고 있었던 것을 상상할 수 있으며, 이 시대가 그리스의 중요한 분기점이었다고 생각된다.
| 구분 | 연대 |
|---|---|
| 초기 | 기원전 7000년~기원전 5800년 |
| 중기 | 기원전 5800년~기원전 5300년 |
| 후기 | 기원전 5300년~기원전 4500년 |
| 말기 | 기원전 4500년~기원전 3200년 |
기원전 7000년이 되면 그리스는 신석기 시대에 들어서며, 이 시대는 토기의 양식과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에 의한 측정에 따라 초기, 중기, 후기, 말기의 네 단계로 구분된다. 과거에는 무토기 시대가 있으며 농경도 자주적으로 발생했다는 설이 제기되었지만, 1980년대에 의문이 제기되었고, 그리스의 신석기 시대는 토기 등의 문화를 포함하여 서아시아에서 전파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대에 이르면 보리, 밀(아인콜른, 듀럼밀)을 기본 곡물로 렌틸콩 등이 재배되기 시작했고, 염소, 양, 돼지, 소, 개 등의 가축도 사육하게 되었다. 초기 농경 문화는 북쪽 발칸 반도 북부의 내륙 지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풍부한 물과 비옥한 토양이 존재하는 그리스 북부가 선진 지역이었고, 테살리아와 마케도니아 평야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 남부에서는 마을의 수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키클라데스 제도(Cyclades)로 신석기 문화가 이후 도입되지만, 이것은 이전의 이삭 두 줄짜리 보리에서 이삭 여섯 줄짜리 보리로의 전환으로부터 이루어졌다는 것이 상상된다.
초기 신석기 시대에 들어서면 토기에 다양한 슬립(유약)이 시행된 것이 보인다. 초기 신석기 시대에는 사발 모양의 것이 많지만, 중석기 시대에 이르면 다양한 형태가 나타나고, 지역에 따른 차이도 보이게 된다. 특히 세스크로 문화(Sesklo culture)(테살리아의 중기 신석기 시대 문화)에서는 흰색의 그릇면에 빨간색으로 지그재그 무늬를 그린 것이나 "신석기 와르니쉬"라고 불리는 독특한 광택을 가진 담갈색 바탕에 간소한 패턴을 그린 것이 동시대의 펠로폰네소스 반도(Peloponnese)에 존재하고 있으며, 이 시대의 제토 기술이 높은 수준에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또한 토우도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에게 해에서는 "사리아고스의 풍만한 여성"이라고 불리는 대리석 제품도 제작되었다.
후기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디미니(Dimini)의 아크로폴리스(Acropolis)에서는 그 후에 찾아올 미케네 시대를 예상하는 독특한 구조를 구성하고 있으며, 성벽이 축조되었고, 이것은 메가론(Megaron) 형식의 선구라고 생각된다. 오자키(Ozaki), 아르기사(Argissa), 아라피(Araphis) 등에서는 해자의 존재도 확인되고 있으며, 후기 신석기 시대부터 말기 신석기 시대에 등장한 구리 제품, 무기의 존재로부터 마을 간의 전투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이 야금 기술은 불가리아(Bulgaria) 지방에서 전래된 것으로 생각되며, 에게 해산 조개를 이용한 팔찌가 폴란드(Poland)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으로부터, 이 시대의 교역의 광범위함을 상상할 수 있다.
말기 신석기 시대에 이르면 마구라를 활용하지 않고 다시 동굴로의 회귀가 보인다. 델로스(Delos)의 알레포트뤼파 동굴(Alepotrypa cave)이나 나크소스 섬(Naxos)의 자스 동굴(Zas cave) 등에서는 후기 신석기 시대의 구리제 단검도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초기 청동기 시대로의 발전이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지만, 위 유적의 문화로부터 후기 신석기 시대와 초기 청동기 시대와의 관계도 있으므로, 향후의 조사, 연구가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2. 2. 고대
청동기 시대 이후 기원전 1100년경부터 기원전 8세기까지는 그리스 암흑기라고 불리는데, 이 시기에는 1차 문헌 사료가 전혀 남아있지 않고, 고고학 유적과 유물만 남아있다.[119] 헤로도토스의 역사, 파우사니아스의 '그리스 서술', 디오도로스 시켈리오테스(디오도루스 시쿨루스)의 역사집, 히에로니무스의 크로니콘(Chronicon) 등 2차, 3차 사료는 이 시기의 짧은 연대기와 왕의 목록을 담고 있지만, 확실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암흑기라고 불린다.지중해 지역의 고전 시대는 일반적으로 기원전 8세기(호메로스의 가장 초기 기록된 시가의 시대)에 시작하여 서기 6세기에 끝난 것으로 여겨진다.[5]
그리스의 고전 시대는 그리스 암흑기 (기원전 1100년경 ~ 기원전 800년경)에 앞서며, 고고학적으로 도자기 디자인의 원형 기하학과 기하학 양식으로 특징지어진다. 암흑기 이후 기원전 8세기경에 시작된 아르카이크 시대는 그리스 문화와 사회의 초기 발전을 보여주며,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략부터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까지 고전 시대[6]로 이어진다.[7] 고전 시대는 "고전적" 양식, 즉 후대 관찰자들, 특히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에서 모범적인 것으로 간주된 양식을 특징으로 한다. 정치적으로 고전 시대는 5세기 동안 아테네와 델로스 동맹이 지배했지만, 기원전 4세기 초 스파르타의 패권에 밀려나기 전에 테베와 보이오티아 동맹,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케도니아가 이끄는 코린토스 동맹으로 권력이 이동했다. 이 시대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부상에 의해 형성되었다.
고전 시대 이후에는 헬레니즘 시대(기원전 323년~146년)가 이어졌는데, 이 기간 동안 알렉산드로스의 죽음부터 로마의 정복까지 그리스 문화와 권력이 근동과 중동으로 확장되었다. 로마 시대 그리스는 일반적으로 기원전 146년 코린토스인들에 대한 로마의 승리인 코린토스 전투부터 콘스탄티누스가 로마 제국의 수도로 비잔티움을 건설한 서기 330년까지로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후기 고대는 서기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까지의 기독교화 시대를 가리키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529년 아테네 아카데미아를 폐쇄한 것으로 끝맺는다.[8]

기원전 800년부터 기원전 500년까지 지속된 아르카이크 시대는 그리스 암흑기부터 시작된 정치적, 사회적 발전의 정점을 보여주는 시기로, 폴리스(시민국가)가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조직 단위가 되었다.[15] 미케네 문명 붕괴 후 그리스에 강력한 국가가 없었고, 많은 정착지가 산악 지형으로 인해 이웃과 분리되어 있던 그리스의 지리적 특성은 작고 독립적인 시민국가의 발전을 촉진했다.[16] 이 시대에는 여러 그리스 국가에서 참주가 권력을 장악했는데, 가장 유명한 예로 기원전 657년부터 코린토스에서 나타났다.[17] 또한 이 시기에는 지중해 주변에 그리스 식민지가 건설되었는데, 에우보이아인들은 기원전 800년경에는 동쪽의 알미나에, 기원전 775년경에는 서쪽의 이스키아에 정착했다.[18] 이 시대에 특히 근동 지역의 비그리스인들과의 교류 증가는 예술과 건축의 발전, 주화의 채택, 그리스 알파벳의 발전에 영감을 주었다.[19]
아테네는 아르카이크 시대에 걸쳐 민주주의 체제를 발전시켰다. 이미 7세기에 모든 시민 남성이 민회에 참석할 권리가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20] 기원전 636년경 킬론이 주도한 쿠데타 실패 이후, 드라콘이 기원전 621년 법전을 제정하도록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빈민과 엘리트 사이의 정치적 긴장을 완화하지 못했고, 기원전 594년 솔론이 부유층과 빈민층의 권력 균형을 시도하는 또 다른 개혁을 실시할 권한을 얻었다.[21] 6세기 중반, 피시스트라토스가 참주로 자리 잡았고, 기원전 527년 사망 후 그의 아들 히피아스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6세기 말 그는 폐위되었고, 클레이스테네스가 더 많은 민주화 개혁을 실시했다.[22]
스파르타에서는 8세기와 7세기에 걸쳐 두 명의 왕, 장로회, 그리고 다섯 명의 에포로이로 구성된 정치 체제가 발전했다. 스파르타 전통에 따르면 이 헌법은 전설적인 입법자 리쿠르구스에 의해 제정되었다.[23] 제1차와 제2차 메세니아 전쟁을 거치면서 스파르타는 이웃 지역인 메세니아를 정복하고 인구를 농노로 만들었다.[24]
6세기에 그리스 시민국가들은 이전의 개별 통치자들이 다른 도시의 엘리트들과의 개인적인 관계에 의존했던 것과는 달리, 서로 간에 공식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25] 아르카이크 시대 말엽, 스파르타는 코린토스, 엘리스, 메가라 등의 도시들과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맺으면서[26] 메세니아를 고립시키고 펠로폰네소스의 또 다른 강국인 아르고스에 대항하는 스파르타의 입지를 강화했다.[27] 6세기의 다른 동맹으로는 펠로폰네소스의 엘리스와 헤라이아 사이의 동맹, 그리고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지 시바리스, 그 동맹국들, 그리고 세르다이오이 사이의 동맹이 있었다.[28]

기원전 499년, 페르시아 지배하에 있던 이오니아 도시 국가들은 페르시아가 지원하는 폭정 통치자들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29]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에서 파병된 지원군의 도움을 받은 이오니아 반군은 사르디스까지 진격하여 도시를 불태웠지만, 페르시아의 반격에 밀려 후퇴했다.[30] 반란은 기원전 494년 반란을 일으킨 이오니아인들이 패배할 때까지 계속되었다.[30] 다리우스는 아테네가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한 것을 잊지 않았고, 기원전 490년 보복을 위해 함대를 집결시켰다.[31] 아테네인들은 플라타이아이 동맹군의 지원을 받았지만, 수적으로 압도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물리쳤고, 페르시아 함대는 퇴각했다.[32]
10년 후,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가 그리스를 두 번째로 침략했다.[33] 그리스 북부와 중부의 도시 국가들은 저항 없이 페르시아군에 항복했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포함한 31개의 그리스 도시 국가 동맹은 페르시아 침략자들에 저항하기로 결정했다.[33] 동시에, 그리스 시칠리아는 카르타고군의 침략을 받았다.[33] 기원전 480년, 침략의 첫 번째 주요 전투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벌어졌다. 300명의 스파르타인들이 이끄는 소규모 그리스 후위 부대가 그리스 중심부를 지키는 중요한 고갯길을 여러 날 동안 방어했다. 동시에 시라쿠사의 참주 겔론은 히메라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의 침략을 물리쳤다.[34]
페르시아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주로 아테네 해군의 공격으로 바다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고,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육지에서 패배했다.[35] 페르시아에 대한 동맹은 계속되었는데, 처음에는 스파르타의 파우사니아스가 이끌었지만, 기원전 477년부터 아테네가 이끌었다.[36] 기원전 460년까지 페르시아는 에게 해에서 쫓겨났다.[37] 이 장기간의 전투 동안, 델로스 동맹은 그리스 국가들의 방어 동맹에서 아테네 제국으로 점차 변모해갔다. 아테네의 해군력이 증가하면서 다른 동맹국들을 위협했기 때문이다.[38] 아테네는 기원전 454년 이집트에서의 참패와 기원전 450년 키프로스에서 페르시아와의 전투 중 키몬의 사망 이후 기원전 450년 페르시아에 대한 전투를 끝냈다.[39]
아테네의 페르시아 제국에 대한 전투가 줄어들면서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갈등이 커졌다. 델로스 동맹의 재정 지원을 받아 아테네의 권력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의심한 스파르타는 델로스 동맹의 주저하는 회원들에게 아테네의 지배에 반항하도록 도왔다. 이러한 긴장은 기원전 462년 아테네가 헬로트 반란을 진압하는 데 스파르타를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지만 스파르타인들이 이를 거부하면서 악화되었다.[40] 450년대에 아테네는 보이오티아를 장악하고 에기나와 코린트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39] 그러나 아테네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고, 기원전 447년 다시 보이오티아를 잃었다.[39]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기원전 446/5년 겨울에 30년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갈등을 종식시켰다.[39]
조약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관계는 430년대에 다시 악화되었고,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되었다.[41] 아르키다모스 전쟁 즉 전쟁의 첫 번째 단계에서는 스파르타가 아티카를 매년 무익하게 침략하는 일련의 사건이 발생한 반면, 아테네는 그리스 북서부에서 코린트 제국과 성공적으로 싸웠고, 아테네의 주요 정치가 페리클레스를 죽인 아테네 역병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제국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42] 필로스 전투와 스팍테리아 전투에서 클레온이 이끄는 아테네의 승리 이후 전세가 역전되었고,[42] 스파르타는 평화를 요청했지만 아테네는 제안을 거부했다. 아테네는 델리온 전투에서 보이오티아를 장악하지 못했고, 기원전 424년 브라시다스가 그리스 북부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스파르타의 입지가 스팍테리아 이후 개선되었다.[43] 양측에서 전쟁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던 클레온과 브라시다스가 사망한 후, 아테네 장군 니키아스가 기원전 421년 니키아스 평화를 협상했다.[44]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기원전 418년 아테네와 아르고스의 연합군이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스파르타에게 패배했다.[45] 기원전 415년 아테네는 시칠리아를 지배하기 위한 야심찬 시칠리아 원정을 시작했다.[46] 이 원정은 시라쿠사 항구에서 재앙으로 끝났고, 거의 모든 군대가 사망하고 배가 파괴되었다.[47] 시라쿠사에서 아테네가 패배한 직후, 아테네의 이오니아 동맹국들이 델로스 동맹에 반란을 일으켰고, 페르시아는 스파르타 편에서 다시 한번 그리스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48] 처음에 아테네의 입지는 기원전 410년 키지코스 해전과 기원전 406년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면서 비교적 강세를 유지했다.[49] 그러나 기원전 405년 스파르타의 리산드로스는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아테네를 패배시키고 아테네 항구를 봉쇄하기 시작했다.[50] 기근에 시달린 아테네는 평화를 요청하여 함대를 항복하고 스파르타가 이끄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가입하기로 합의했다.[51] 아테네가 항복한 후,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30인 독재 정권을 설치했는데,[50] 이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권력을 잡은 여러 스파르타 후원 과두정 중 하나였다.[52] 스파르타의 우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불과 1년 만에 30인 독재 정권은 타도되었다.[53]
4세기 전반기에는 주요 그리스 국가들이 본토를 지배하려고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그 결과 약화된 그리스는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 치하의 마케도니아에 의해 결국 메워진 권력 공백을 남겼다.[54] 펠로폰네소스 전쟁 직후 스파르타는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려고 시도했고, 아르고스, 아테네, 코린트, 테베가 스파르타에 맞서 연합했다.[55] 어떤 그리스 국가도 페르시아에 도전할 수 있을 정도로 우세를 차지하는 것을 막기 위해 페르시아 왕은 처음에는 스파르타에 맞선 동맹에 참여했지만, 나중에는 안탈키다스 평화 조약 ("왕의 평화")을 강요하여 페르시아가 아나톨리아 그리스인들을 장악하게 했다.[56]

기원전 371년, 테베가 스파르타를 레욱트라 전투에서 물리치고 스파르타 왕 클레옴브로토스 1세를 죽이고 라코니아를 침략하면서 주도권을 잡았다. 기원전 369년 스파르타에 대한 테베의 추가적인 성공으로 메세니아가 독립을 얻었다. 스파르타는 메세니아의 비옥한 땅과 농노 노동력을 잃은 것에서 회복하지 못했다.[57] 테베의 부상하는 권력으로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연합했고, 기원전 362년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테베에게 패배했다. 만티네이아 이후 어떤 주요 그리스 국가도 지배할 수 없었다. 테베가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그들의 장군 에파미논다스가 사망했고, 이후 수십 년 동안 이웃들과 전쟁에 휘말렸다. 한편 아테네는 기원전 377년에 결성된 두 번째 해군 동맹이 350년대 중반에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58]
만티네이아 전투 이후 그리스의 권력 공백은 필리포스 2세 치하의 마케도니아에 의해 메워졌다. 기원전 338년 그는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그리스 동맹을 물리치고 코린토스 동맹을 결성했다. 필리포스는 동맹을 이끌고 페르시아를 침략할 계획이었지만 기원전 336년 살해되었다.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아버지의 야망을 실현하게 되었다.[59] 마케도니아의 서쪽과 북쪽 적들과 필리포스의 죽음 이후 코린토스 동맹에서 이탈한 그리스 국가들에 대한 원정 이후 알렉산더는 기원전 334년 페르시아에 대한 원정을 시작했다.[60] 그는 기원전 333년 이수스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를 물리치고 기원전 331년 가우가멜라 전투 이후 자신을 아시아의 왕으로 선포했다.[61] 기원전 329년부터 그는 박트리아와 인도로 원정을 이끌었다.[62] 아라비아와 북아프리카를 침략하려는 추가 계획은 기원전 323년 그의 죽음으로 중단되었다.[63]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부터 이집트의 마지막 마케도니아 지배자 클레오파트라 사망까지의 시대는 헬레니즘 시대로 알려져 있다. 이 시대 초기에 마케도니아와 근동의 전통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왕정이 발전했다. 초기 헬레니즘 왕들은 이전에 알렉산드로스의 장군들이었으며, 그의 사망 후 권력을 장악했지만 기존의 왕족과는 관련이 없었고 자신들이 통치하는 영토에 대한 역사적 권리가 부족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수십 년 동안 가장 중요한 통치자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의 안티고노스 1세와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 그리고 시리아와 옛 페르시아 제국을 통치한 셀레우코스 1세였다. 소규모 헬레니즘 왕국으로는 아나톨리아의 아탈로스 왕조와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이 있었다.

그 외:
- 그리스 식민 도시
- 카르타고
- 로마 공화정
주황색 지역은 기원전 281년 이후 종종 분쟁 지역이었다. 아탈로스 왕조가 이 지역 일부를 점령했다. 인도-그리스 왕국은 표시되지 않았다.]]
헬레니즘 시대 초기에 헬레니즘 왕국의 정확한 국경은 확정되지 않았다. 안티고노스는 다른 후계 왕국들을 공격하여 영토 확장을 시도했으나, 다른 왕국들이 연합하여 그를 공격했고, 기원전 301년 입소스 전투에서 사망했다.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포로 생활을 여러 해 보냈고, 그의 아들 안티고노스 2세는 기원전 276년경에야 마케도니아 왕위를 되찾았다. 한편, 셀레우코스 왕국은 인도의 왕 찬드라굽타에게 전쟁 코끼리를 받는 대가로 동쪽 영토를 양보했고, 나중에는 파르티아에게 페르시아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3세기 중반까지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들의 왕국은 대체로 안정되었지만, 국경 지역을 둘러싼 분쟁은 계속되었다.
헬레니즘 문화의 중요한 중심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알렉산드리아[64][65]와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키아[66][67]였다.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은 그리스 도시 국가들에게 여러 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스인들의 시야를 크게 넓혔고, 젊고 야심찬 그리스인들이 동쪽의 새로운 그리스 제국으로 이주하는 현상을 가져왔다.[68] 많은 그리스인들이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및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이후 건설된 다른 많은 새로운 헬레니즘 도시들로 이주했으며,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까지 이주하여 그리스-박트리아 왕국과 인도-그리스 왕국은 기원전 1세기 말까지 존속했다.
그리스 내 도시 국가들은 아카이아 동맹(코린토스와 아르고스 포함)[69][70]과 아이톨리아 동맹(스파르타와 아테네 포함)의 두 동맹으로 형성되었다. 로마 정복까지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이 동맹들은 전쟁을 벌였고, 종종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후계 국가인 디아도코이 사이의 갈등에 참여했다.
안티고노스 왕조는 3세기 후반 로마 공화정과 전쟁에 휘말렸다.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은 결정적이지 않았지만 로마는 전형적인 방식으로 마케도니아와 싸워 기원전 149년까지 완전히 로마 공화국에 흡수될 때까지 계속 싸웠다. 동쪽에서는 거대한 셀레우코스 제국이 점차 붕괴되었지만, 기원전 64년까지 잔존 세력이 존속했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기원전 30년 로마에 정복될 때까지 이집트에서 계속되었다. 아이톨리아 동맹은 그리스에 대한 로마의 개입을 경계하여 로마-셀레우코스 전쟁에서 셀레우코스 왕조 편에 섰다. 로마가 승리하자 동맹은 공화국에 효과적으로 흡수되었다. 아카이아 동맹은 아이톨리아 동맹과 마케도니아보다 오래 존속했지만, 기원전 146년 로마에 의해 정복되어 그리스의 독립이 종식되었다. 아카이아 전쟁
그리스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인류는 할키디키 반도 페트랄로나에서 발견된 페트랄로나인이며, 이들은 호모 에렉투스와 네안데르탈인의 형질적 특징을 함께 가지고 있으며, 약 20만 년에서 40만 년 전으로 추정된다. 그들이 활동했던 이 시대가 그리스의 전기 구석기 시대로 추정되며, 그리스에서 인류의 활동이 시작된 것은 이 시대와 거의 일치한다고 생각된다. 또한 15만 년 전이 되면 생활의 흔적이 증가하며, 이 시대가 중기 구석기 시대로 여겨진다.
그 후, 약 6만 년 전 중기 구석기 시대가 되면 화석 인류를 대신하여 구석기인의 활동이 확인된다. 동부 지중해 세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무스티에 문화의 특징이 보이며, 이피루스, 테살리아, 엘리스, 아르골리스, 크레타 등에서 석편이 발견되었으며, 특히 아르골리스에 있는 프랑크티 동굴에서는 르발루아 기법의 석편이 발견되었다. 5만 년 전경에 최종 빙하기에 돌입하여 해수면은 하강하고, 이 시대에 신인의 시대로 이행하였다. 그 후, 3만 년 전이 되면 후기 구석기 시대에 들어선다. 이 시대는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유적의 수는 많지 않지만, 프랑크티 동굴이나 세오페트라 동굴 등에서 수렵 채집민에 의한 활동을 시사하는 문화층의 퇴적이 보인다. 또한 이 시대에는 사냥 방법도 조직적인 것으로 변화하고, 더 나아가 석기 가공 기술도 발전하여, 동굴 벽화나 여성 조각상도 이 시대에 보인다.
중석기 시대에 이르면 온난화가 진행되어 해안선도 상승하였다. 그동안의 수렵 생활에서 축적 생활로의 전환이 보이며, 프랑크티 동굴에서도 흑요석이나 물고기 뼈가 발견되었다.
2. 3. 중근세

기원전 146년 그리스 반도는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1] 마케도니아는 로마 속주가 되었고, 남부 그리스는 마케도니아 속주 장관의 감시를 받았다.[1] 그러나 일부 그리스 폴리스는 부분적으로 독립을 얻었으며 세금도 내지 않았다.[1] 에게 해 제도는 기원전 133년에 로마 영토로 복속되었다.[1] 기원전 88년에 아테나이와 다른 그리스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로마의 술라 장군이 그리스를 황폐화하였다.[1] 로마의 내전으로 그리스 땅은 더욱 파괴되었으며,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가 그리스 반도를 속주로 삼으면서 형편이 나아졌다.[1]
로마 문화는 오랫동안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리스는 로마 제국의 중요한 동부 속주였다.[1] 그리스어는 동방과 이탈리아에서 링구아 프랑카로 쓰였으며, 갈레노스 등 수많은 그리스 지식인들이 로마에서 활동하였다.[1]
2. 4. 근현대
그리스는 지중해성 기후에 속하여 여름은 덥고 건조하나 겨울은 다소 따뜻하고 비가 내린다. 여름에는 전혀 비가 내리지 않는 환경 때문에 항상 물 부족이 골칫거리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후 덕택에 그리스 일대는 포도와 올리브가 가장 중요한 농산품이었으며 소규모의 목축을 수반한 다각적인 농업경영이 지중해 일대의 농업 특색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리스에는 산이 많고 평야가 적어 각 골짜기나 평지가 하나의 지리적 단위를 이룬다. 이러한 지리 조건이 그리스에서 폴리스라는 작은 도시 국가가 들어선 주된 요인이다. 이러한 지형으로 말미암아 그리스 사람들은 바다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렇듯 자연 환경이 유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일찍이 해외무역에 종사하였다. 포도주, 올리브와 공산품은 매우 중요한 물자였다.3. 고대 그리스 세계
고대 그리스의 세계는 현대 그리스뿐만 아니라 그리스인들이 정착하여 헬레니즘을 비롯한 그리스 문화가 퍼진 지역을 포괄한다. 여기에는 키프로스, 당시에 이오니아로 알려진 터키의 에게해 연안, 마그나 그라이키아(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남부), 현재의 알바니아, 불가리아, 이집트, 리비아, 프랑스 남부, 에스파냐 남부, 카탈루냐, 사카르트벨로,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의 그리스 정착지 등이 포함된다.
그리스인들은 스스로를 헬라스 사람(Ἕλληνες, '헬레네스')이라고 부르고, 이민족인 '오랑캐'(βάρβαροι)와 구별하였으며, 헬레네스가 사는 곳을 본토와 식민지를 통틀어 헬라스(Ελλάς)라고 칭하였다.[1] 폴리스(도시 국가)들은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을 중심으로 근린 동맹(Amphictyony)을 맺고, 기타 정치적 군사적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2]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에서 기원전 776년부터 4년마다 모든 폴리스가 참여하는 체전을 열고 그 기간 동안은 서로 전쟁을 금지하였다.[3] 이렇듯 그리스 사람들이 동족 의식을 가지고 부분적으로 결합을 이루었으나, 폴리스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성이 강하여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려는 의지가 없었고 필요시 여러 폴리스들 간에 동맹을 맺는 형식을 취하였다.[4] 이러한 도시 국가 체제는 당시 세계의 다른 여러 지역에서 거대한 제국 또는 왕국이 형성되었던 것과는 다른 그리스만의 독특한 특징이다.[5]
4. 정치와 사회

도리스인의 남하로 미케네 문명이 파괴된 후, 일부 그리스인들은 에게 해 섬과 소아시아로 이주했다. 이들이 정착한 이오니아 지역은 미케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의 영향을 받아 폴리스가 가장 먼저 성립된 곳이다.
기원전 8세기, 그리스는 암흑 시대를 벗어나 페니키아 문자를 받아들여 그리스 문자를 만들었다. 기원전 9세기경부터 문자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미케네 사회 붕괴 후 그리스 본토에는 소왕국들이 나타났고, 촌락 공동체가 생활 단위였다. 그리스의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각 공동체는 고립되어 독자적인 취락을 이루었다. 왕정이었으나 왕의 권력은 약했고, 토지는 개인 소유(클레로스, κλήρος)였기 때문에 경제적 독립성이 강했다. 여러 촌락이 모여 도시를 형성하고 주변 촌락들을 통합하여 폴리스를 이루었다는 '집주설'이 일반적이다. 폴리스 성립 시기는 기원전 800년 전후로 추정되지만, 예외도 존재한다.
폴리스의 중심 도시는 해안에서 멀지 않은 평지에 위치했으며, 정치, 군사, 종교의 중심지였다. 도시 안에는 아크로폴리스(ἀκρόπολις)와 아고라(αγορά)가 있었다. 아크로폴리스는 도시의 수호신을 모시는 신전이 있는 언덕이었고, 아고라는 시장이자 정치, 사회 활동의 중심지였다.
렐란토스 전쟁(기원전 710년경 ~ 650년경)은 칼키스와 에레트리아 간의 전쟁으로, 고대 그리스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장기전이었다. 명목상 칼키스의 승리였으나, 두 도시 모두 쇠퇴하였다.
폴리스 성립 초기에는 귀족, 수공업자, 상인들이 도시로 모여들었고, 농민들은 촌락에 남아 있었다. 폴리스는 종교적, 경제적 유대로 결합된 시민 공동체였지만, 노예와 외국인은 완전한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기원전 8세기, 왕정은 쇠퇴하고 귀족들이 정치 권력을 장악했다. 귀족들은 많은 토지와 가축을 소유하고, 혈통과 가계를 중시했으며, 중무장 보병으로 폴리스 방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평민은 대부분 자영 농민이었으며, 헤시오도스의 작품을 통해 자유로운 시민 공동체의 성격과 자영 농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기원전 6세기에는 아테나이, 스파르타, 코린토스, 테바이 등 여러 도시들이 성장했다. 각 폴리스는 주변 지역을 장악했으며, 아테나이와 코린토스는 해운, 상업 강국으로 부상했다.
4. 1. 정치 구조
고대 그리스는 수백 개의 독립적인 폴리스(πόλεις)로 구성되었다. 이는 부족 사회나 넓은 영토를 지배하는 왕국 중심의 다른 동시대 사회들과는 다른 특징이었다. 그리스의 지리적 특성(언덕, 산, 강으로 나뉨)은 고대 그리스가 단편적인 성격을 가지는 데 영향을 주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고, 동일한 국가 종교, 문화, 언어를 공유했다. 헤로도토스는 부족별로 폴리스를 분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위 관계는 그리스 정치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폴리스의 독립성은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통일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그리스 제2차 페르시아 침공 당시 일부 폴리스가 동맹을 맺었지만, 대다수는 중립을 지켰고, 페르시아 패배 후 동맹은 빠르게 분열되었다.[77]고대 그리스 정치 체제의 주요 특징은 단편적인 성격과 도시 중심의 집중이었다. 지중해 전역에 세워진 그리스 식민지들은 특정 그리스 폴리스를 '모국'으로 여겼지만, 건설 도시와는 완전히 독립적이었다.
작은 폴리스는 더 큰 이웃의 지배를 받을 수 있었지만, 정복이나 직접 통치는 드물었다. 폴리스는 동맹에 가입했고, 동맹은 끊임없이 변화했다. 고전 시대 후반에는 동맹이 더 적고 커졌으며,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와 같은 도시가 지배했다. 폴리스는 전쟁의 위협이나 평화 조약의 일부로 동맹에 가입하기도 했다. 마케도니아의 필립 2세가 고대 그리스 중심지를 정복한 후, 그는 영토를 합병하거나 새로운 주로 통합하지 않고, 대부분의 폴리스가 코린트 동맹에 가입하도록 강요했다.
4. 2. 사회 구조
고대 그리스의 사회 구조는 폴리스(πόλις)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폴리스는 단순한 도시를 넘어 정치, 사회, 경제, 종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독립적인 도시 국가였다.폴리스의 성립기원전 8세기경, 그리스 암흑기가 끝나고 미케네 문명 붕괴 이후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모여 폴리스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각 폴리스는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서로 고립되어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폴리스는 왕정이었으나 왕의 권력은 약했고, 토지는 공동 소유가 아닌 개인 소유(클레로스, κλήρος)였기 때문에 경제적 독립성이 강했다. 여러 촌락이 모여 도시를 형성하고 주변 촌락들을 통합하여 폴리스를 이루었다는 '집주설'이 일반적이다.
폴리스의 중심 도시에는 아크로폴리스(ἀκρόπολις)와 아고라(αγορά)가 있었다. 아크로폴리스는 도시의 수호신을 모시는 신전이 있는 언덕이었고, 아고라는 시장이자 정치, 사회 활동의 중심지였다.
렐란토스 전쟁(기원전 710년경 ~ 650년경)은 칼키스와 에레트리아 두 폴리스 간의 전쟁으로, 고대 그리스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장기전이었다. 이 전쟁으로 두 도시 모두 쇠퇴하였다.
폴리스 성립 초기에는 귀족과 수공업자, 상인들이 도시로 모여들었고, 농민들은 촌락에 남아 있었다. 폴리스는 종교적, 경제적 유대로 결합된 시민 공동체였지만, 노예와 외국인은 완전한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귀족 정치기원전 8세기, 왕정은 쇠퇴하고 귀족들이 정치 권력을 장악했다. 귀족들은 많은 토지와 가축을 소유하고, 혈통과 가계를 중시했으며, 중무장 보병으로 폴리스 방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평민은 대부분 자영 농민이었으며, 헤시오도스의 작품을 통해 자유로운 시민 공동체의 성격과 자영 농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스파르타


스파르타는 정복을 통해 성장한 폴리스였다. 도리스인의 지배를 받아들인 원주민은 페리오이코이가 되었고, 저항한 자들은 헤일로타이라는 노예 신분이 되었다.
기원전 8세기 중후반, 스파르타는 메세니아 전쟁을 통해 메세니아를 정복하고 주민들을 농노(헤일로타이)로 삼았다. 이는 고대 그리스에서 유례없는 일이었다. 헤일로타이의 반란 위험 때문에 스파르타는 군국주의 체제를 유지했다.[120] 뤼쿠르고스(Λυκοῦργος)의 개혁으로 알려진 스파르타의 사회 개혁은 기원전 650년에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스파르타에는 두 명의 왕이 있었으나 실권은 없었고, 장로회가 국정의 중요 안건을 마련하고 민회가 승인하는 형태였다. 집정관(Ἔφορος)은 왕을 포함한 관직자들을 감시하고 스파르타의 생활 방식을 감독했다.
스파르타의 정치 구조는 왕정과 귀족정의 영향을 받았지만, 성년 남자 시민 전원이 중장보병 의무를 지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정적인 성격도 있었다. 그러나 완전한 시민권을 가진 시민은 전체 주민의 5%~10%에 불과했다. 스파르타 시민은 엄격한 심사(아고게)를 거쳐 전사로 양성되었고, 개인적인 사생활은 거의 없었다.
아테네아테네의 귀족 정치는 집정관(άρχων, 아르콘grc)과 아레이오파고스(Ἀρειόπαγος) 회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집정관은 처음 3명에서 9명으로 늘어났고, 임기가 끝나면 아레이오파고스 회의의 의원이 되었다. 아레이오파고스 회의는 부유한 귀족 출신으로 구성된 귀족 지배의 핵심 기관이었다. 민회도 있었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없었다.
기원전 7세기 초, 상인 계급이 성장하면서 귀족 정권은 위협을 받았다. 기원전 621년, 드라콘은 엄격한 법을 제정했지만 분쟁을 해결하지 못했다. 기원전 594년, 솔론은 부채를 탕감하고 노예가 된 자유민을 해방하는 등 사회, 경제적 개혁을 단행했다. 또한 시민을 재산에 따라 4계층으로 나누고 정치 참여 비중을 다르게 했으며, 400인회를 만들어 민회에 제출할 안건을 만들게 했다. 솔론의 개혁은 귀족 지배를 유지하면서 하층 시민에게도 정치 참여 기회를 열어주었다.
6세기 후반, 페이시스트라토스와 그의 아들들은 참주로서 아테나이를 지배했다. '참주'는 그리스어 '튀란노스'(τ?ραννο?, "적법하지 않은 통치자")에서 유래한 말로, 원래는 멸칭이 아니었다.[121][122]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살라미스 전쟁의 지도자로, 기원전 561년에 평민층의 지지를 받아 참주가 되었다. 그는 귀족을 추방하고 토지를 빈농에게 분배하는 등 과감한 정책을 펼쳤다. 기원전 510년, 클레이스테네스의 선동으로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도와 참주를 전복시켰다. 이후 클레이스테네스는 모든 시민이 정치적 권력을 공유하는 민주주의 개혁을 제안했고, 아테네는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123]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솔론의 재산 기준 참정권 부여, 클레이스테네스의 재산 기준 폐지와 도편추방제(Ostracism) 실시, 페리클레스의 시민 의회 지위 강화와 수당 지급 등을 통해 발전했다.
노예 제도

고대 그리스에서 노예는 권력이나 지위가 없었다. 기원전 600년경에는 채권 노예 제도가 퍼져 있었고, 기원전 5세기에는 일부 도시 국가에서 노예가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고전 아테네 인구의 40~80%는 노예였다.[80] 스파르타를 제외한 지역의 노예들은 조직화가 어려워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드물었다.[81]
가정에서는 노예를 가사 노동자와 농노로 소유했고, 주인은 노예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해방 노예는 시민이 되지 못하고 메티크 인구에 포함되었다.
도시 국가는 법적으로 노예를 소유했다. 공공 노예는 가정 노예보다 자립성이 컸고, 아테네에서는 위조 주화를 감시하거나 신을 섬기는 일, 경찰 역할 등을 했다.
스파르타에는 ''헬로트''라는 특수한 유형의 노예가 있었다. 헬로트는 메세니아인들이 메세니아 전쟁 중에 노예가 된 사람들로, 주인에게 혹독한 대우를 받았고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다. 기원전 370/69년, 에파미논다스가 메세니아를 해방시키면서 헬로트 제도는 종식되었다.[82]
4. 3. 법과 제도
고대 그리스는 수백 개의 독립적인 폴리스(πόλεις)로 구성되었다. 이는 부족 사회이거나 넓은 영토를 지배하는 왕국이었던 대부분의 다른 동시대 사회들과는 달랐다. 그리스의 지리는 언덕, 산, 강으로 나뉘어져 고대 그리스가 단편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에 영향을 주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고, 동일한 국가 종교, 문화, 언어를 공유했다. 헤로도토스는 부족별로 폴리스를 분류할 수 있었지만, 이러한 관계가 그리스 정치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77]폴리스의 독립은 철저하게 지켜졌으며, 통일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스 제2차 페르시아 침공 당시 일부 폴리스가 동맹을 맺었을 때도 대다수는 중립을 지켰고, 페르시아 패배 후 동맹국들은 빠르게 내분으로 돌아갔다.[77]
고대 그리스 정치 체제의 주요 특징은 단편적인 성격과 도시 중심에 대한 집중이었다. 지중해 전역에 세운 식민지들은 특정 그리스 폴리스를 '모국'으로 여겼지만 건설 도시와는 완전히 독립적이었다.
작은 폴리스는 더 큰 이웃의 지배를 받을 수 있었지만, 정복이나 직접 통치는 매우 드물었다. 대신 폴리스는 동맹에 가입했고, 동맹은 끊임없이 변화했다. 고전 시대 후반에는 동맹이 더 적고 커졌으며,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가 지배했고, 종종 폴리스는 전쟁의 위협 아래 가입하도록 강요받았다. 마케도니아의 필립 2세가 고대 그리스의 중심지를 정복한 후에도 영토를 합병하거나 새로운 주로 통합하지 않고, 대부분의 폴리스가 코린트 동맹에 가입하도록 강요했다.
5. 문화
기원전 8세기 이후, 신전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건축물이 다시 건설되기 시작하면서, 소위 폴리스(도시 국가)가 형성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지중해와 흑해로 식민지를 건설했는데, 이 시기를 식민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초기 식민 활동은 무역을 목적으로 하였지만, 점차 각지에 폴리스를 형성하여 시칠리아, 남이탈리아, 아프리카 북부, 흑해 연안 등에 식민 도시를 건설했다. 이 식민 활동으로 그리스인들은 지중해 전역에서 활발한 무역 활동을 하였고, 문화적으로 공통된 정체성을 형성했다.
헤시오도스의 『일과 날』과 『신통기』에서 그리스인 정신의 각성이 그려졌으며, 아르킬로코스, 사포, 테오그니스, 핀다로스, 피타고라스와 크세노파네스, 탈레스 등이 활약했다. 오리엔트의 영향을 받은 미술에서는 엄격 양식이라고 불리는 양식이 확립되었고, 아테네에서는 흑상식과 적상식이라고 불리는 도자기 생산도 시작되었다.[114]
고전기에 들어서면 아테네가 이 시대의 대표적인 무대가 된다. 이 고전기는 후세의 유럽인에게 영향을 주어, 르네상스 시대에는 이 고전기에 매료되어, 그 뛰어난 미술품과 인간 중심의 사상을 “모범”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 시대, 그리스인으로서의 출현과 함께 서양 문명이 시작되었다고 여겨지며, 그리스인이 만들어낸 수많은 가치관이 그대로 후세에 전해져 서양 문명의 중핵을 이루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 미술은 고대부터 현재까지 많은 국가의 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조각과 건축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서구에서는 로마 제국의 미술이 대부분 그리스 양식을 바탕으로 발전했다. 동쪽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으로 그리스, 중앙아시아, 인도 문화 간 수 세기의 교류가 시작되어 그리스 불교 미술이 탄생했고, 그 영향은 일본까지 미쳤다.
그리스 건축은 로마 시대를 거치면서 간접적이긴 하지만 유럽 건축물에 큰 영향을 주었다. 현존하는 건축물이나 조각상들은 흰색 일색이지만, 과거에는 선명한 채색이 되어 있었다.[115][116]
고대 그리스에서는 종교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아테네에서는 1년의 3분의 1이 종교 의식에 할애되었고, 생활 곳곳까지 그 영향이 미쳤다. 특히 델포이의 신탁은 기원전 8세기에는 각 폴리스가 인정하는 국제적인 성역이 되었고, 델피에서의 신탁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라고 인식되었다.[1]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 의식은 동물 희생이었으며, 가장 일반적으로 양과 염소를 희생했다.[6] 희생에는 공개 기도가 수반되었고,[7] 기도와 찬송가 자체가 고대 그리스 종교 생활의 주요 부분이었다.[8]
5. 1. 철학
고대 그리스 철학 문서 참고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철학은 세계의 근원을 신화가 아닌 방식으로 설명한 탈레스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하였다. 탈레스의 제자인 아낙시만드로스는 세계의 근원을 아페이론이라고 설명하였고, 아낙시메네스는 세계의 근원을 공기라고 설명하였다.
마그나 그라이키아에서 나타난 엘레아 학파는 세계의 근원을 하나의 물질로 설명하는 것을 부정하고, 언어적 추론을 통하여 세계의 근원을 설명하였다. 엘레아 학파의 창시자인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는 하나이며, 부동이며, 존재는 비존재로부터 생성될 수 없으므로 생성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불완전한 감각을 부정하고 존재는 오로지 이성으로만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아테네에서는 민주주의가 발달하여 수사학이 발달하였으며, 이러한 수사학을 가르치는 교사인 소피스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며 진리의 상대주의를 주장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상대주의에 맞서, 장인이 장인으로서의 훌륭함(아레테)을 수행하려면 그 기능 또는 기술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듯이, 인간으로서의 훌륭함(아레테), 즉 덕을 수행하려면 그것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방대한 대화편을 통하여 자신의 철학을 전개하였으며, 화이트헤드가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할 만큼 이후의 서양 철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감각으로 인식되는 세계는 이데아의 그림자이며, 이데아는 이성으로만 인식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상기설을 통하여 인간의 진리 인식은 선험적이라고 하였다.

고대 그리스 철학은 이성과 탐구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었다. 여러 면에서 현대 철학뿐만 아니라 현대 과학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 철학자들로부터 중세 이슬람 철학자들과 이슬람 과학자들, 그리고 유럽의 르네상스와 계몽 시대를 거쳐 현대의 세속 과학까지 이어지는 명확하고 끊임없는 영향의 맥락이 존재한다.
그리스 최초의 철학자들은 전소크라테스 철학자들이었는데, 그들은 세계에 대한 자연주의적이고 비신화적인 묘사를 제공하려고 시도했다. 그 뒤를 이어 소크라테스가 등장했는데, 그는 황금기 아테네를 중심으로 활동한 최초의 철학자 중 한 명으로, 자신의 저술이 아닌 간접적인 기록을 통해서만 알려져 있지만, 그의 사상은 서양 철학의 기초를 마련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국가』를 저술하고 관념과 구체적인 세계 사이에 급진적인 차이를 설정했으며,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과 윤리에 대해 광범위하게 저술하여 오늘날까지 서양 철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스에서 시작된 후기 헬레니즘 철학은 안티스테네스(견유주의), 키티온의 제논(스토아학파) 그리고 플로티누스(신플라톤주의)와 같은 이름들로 정의된다.
5. 2. 문학과 연극
가장 초기 그리스 문학은 시였으며, 개인적인 소비보다는 공연을 위해 작곡되었다.[93] 가장 초기의 알려진 그리스 시인은 호메로스이지만, 그는 이미 존재하던 구전시 전통의 일부였을 것이다.[94] 호메로스의 시는 그리스인들이 문자를 발달시킨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발전했지만, 구전으로 작곡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작품을 필히 서면으로 작곡한 최초의 시인은 기원전 7세기 중반의 서정시인 아르킬로코스이다.[95] 비극은 아르카이크 시대 말기에 기존의 후기 아르카이크 시대 장르의 요소들을 차용하여 발전했다.[96] 고전 시대 초기에 희극이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이 장르와 관련된 가장 이른 시기는 기원전 486년이며, 당시 아테나이의 디오뉴시아 축제에서 희극 경연이 공식 행사가 되었지만, 보존된 최초의 고대 희극은 기원전 425년에 공연된 아리스토파네스의 ''아카르네스''이다.[97]

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 산문도 아르카이크 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그리스 철학, 역사 및 의학 문학의 가장 초기 저술가들은 모두 기원전 6세기에 해당한다.[98] 산문은 처음에 전소크라테스 철학자인 아낙시만드로스와 아낙시메네스가 채택한 글쓰기 스타일로 등장했지만, 최초의 그리스 철학자로 여겨지는 밀레토스의 탈레스는 아무것도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99] 장르로서의 산문은 고전 시대에 성숙기에 도달했고,[98] 주요 그리스 산문 장르인 철학, 역사, 수사학 및 대화는 이 시기에 발전했다.[100]
헬레니즘 시대에는 고전 시대에 아테나이에 있었던 그리스 세계의 문학 중심지가 알렉산드리아로 이동했다. 동시에 안티고니드 왕조와 아탈로스 왕조와 같은 다른 헬레니즘 왕들은 학문과 문학의 후원자였으며, 각각 펠라와 페르가몬을 문화 중심지로 만들었다.[101] 헬레니즘 왕들,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의 이러한 문화적 후원 덕분에 많은 고대 그리스 문학이 보존될 수 있었다.[102] 무세이온의 일부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그리스어로 알려진 모든 저자의 사본을 수집한다는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보존된 비기술적인 헬레니즘 문학의 거의 대부분은 시이며,[102] 헬레니즘 시는 매우 지적인 경향이 있었고,[103] 서로 다른 장르와 전통을 융합하고 선형적 서술을 피했다.[104] 헬레니즘 시대에는 문학 소비 방식에도 변화가 있었는데, 아르카이크 시대와 고전 시대에는 문학이 일반적으로 공개 공연에서 경험되었지만, 헬레니즘 시대에는 사적으로 읽히는 경우가 더 많았다.[105] 동시에 헬레니즘 시인들은 대중적 소비가 아닌 사적 소비를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106]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로 로마가 그리스 문학의 주요 중심지가 되기 시작했으며, 스트라보와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와 같은 중요한 그리스 작가들이 로마에 왔다.[107] 로마 통치하에 그리스 문학에서 가장 큰 혁신을 가져온 시기는 기원후 80년경부터 기원후 230년경까지의 "긴 2세기"였다.[108] 이러한 혁신은 특히 산문에서 두드러졌는데, 소설의 발전과 과시적 연설의 중요성이 부활한 것이 이 시대에 해당한다.[108]
5. 3. 과학과 기술
고대 그리스 수학은 수학 분야에 많은 중요한 발전에 기여했는데, 여기에는 기하학의 기본 원칙, 형식적 수학적 증명의 개념, 그리고 정수론, 수리 해석, 응용 수학 분야의 발견, 그리고 적분법 확립에 근접한 접근 방식 등이 포함된다. 피타고라스,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를 포함한 여러 그리스 수학자들의 발견은 오늘날에도 수학 교육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그리스인들은 수학의 한 분야로 간주했던 천문학을 매우 정교한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행성의 겉보기 운동을 설명하기 위한 최초의 기하학적 3차원 모델은 기원전 4세기에 크니도스의 에우독소스와 키지쿠스의 칼리푸스에 의해 개발되었다. 그들의 동시대인인 헤라클레이데스 폰티쿠스는 지구가 자전한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기원전 3세기에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는 최초로 태양 중심설을 제안했다. 아르키메데스는 그의 논문 모래알 계산가에서 "항성과 태양은 움직이지 않고, 지구는 원의 둘레를 따라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아리스타르코스의 가설을 다시 제기한다.[109] 아리스타르코스의 생각은 단편적인 설명만 남아있다.[109] 에라토스테네스는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생성된 그림자의 각도를 사용하여 지구의 둘레를 매우 정확하게 측정했다.[110] 기원전 2세기에 니케아의 히파르코스는 세차 운동의 최초 측정과 최초의 항성 목록 편찬 등 여러 가지 기여를 했는데, 이 목록에서 그는 현대의 겉보기 등급 시스템을 제안했다.

행성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장치인 안티키테라 기계는 기원전 약 80년경의 것으로, 최초의 천문학적 컴퓨터의 조상이었다. 이 기계는 그리스 섬 안티키테라의 고대 난파선에서, 키테라와 크레타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이 장치는 이전에는 16세기에 발명된 것으로 여겨졌던 미분 기어를 사용했고, 부품의 소형화와 복잡성이 18세기에 만들어진 시계와 비교될 만큼 유명해졌다. 원본 기계는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의 청동 제품 컬렉션에 전시되어 있으며, 복제품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의학 분야에서도 중요한 발견을 했다. 히포크라테스는 고전 시대의 의사였으며, 의학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그는 그의 지속적인 기여를 인정받아 "의학의 아버지"[111][112]로 불린다. 이 지적 학교는 고대 그리스의 의학에 혁명을 일으켜 전통적으로 관련되어 있던 다른 분야(특히 신통력과 철학)와 구별되는 학문으로서 의학을 확립하여 의학을 하나의 직업으로 만들었다.[113][114]
5. 4. 종교
고대 그리스에서는 종교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아테네에서는 1년의 3분의 1이 종교 의식에 할애되었고, 생활 곳곳까지 그 영향이 미쳤다. 특히 미케네 후기에는 이미 기능하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델포이의 신탁은 기원전 8세기에는 각 폴리스가 인정하는 국제적인 성역이 되었고, 델피에서의 신탁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라고 인식되었다. 더 나아가 델피에 각 폴리스가 사람을 파견하여 각 폴리스의 교류 장소로도 기능했다.[1]고대 그리스에서는 개인뿐만 아니라 폴리스 단위까지 눈에 보이는 형태의 신에 대한 제사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이를 통해 가족이나 폴리스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이해관계를 명확히 하고, 다양한 집단이 함께 나아가는 것을 명확히 했다고 생각된다.[2]
크세노폰에 따르면 종교 의식이 가장 많았던 곳은 아테네였으며, 아리스토파네스도 신전과 신상의 많음과 일 년 내내 행해지는 종교 의식에 놀랐다.[3]
서로 다른 도시와 부족의 그리스인들은 비슷한 신들을 숭배했지만, 종교적 관습은 균일하지 않았고 신들은 장소에 따라 다르게 여겨졌다. 그리스인들은 다신교였으며 많은 신들을 숭배했지만, 기원전 6세기 초부터 올림포스 12신의 판테온이 발전하기 시작했다.[4] 그리스 종교는 아르카이크 시대부터 적어도 그리스의 근동 이웃들의 관습의 영향을 받았고, 헬레니즘 시대에는 이러한 영향이 양방향으로 나타났다.[5]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 의식은 동물 희생이었으며, 가장 일반적으로 양과 염소를 희생했다.[6] 희생에는 공개 기도가 수반되었고,[7] 기도와 찬송가 자체가 고대 그리스 종교 생활의 주요 부분이었다.[8]
5. 5. 예술과 건축
고대 그리스 미술은 고대부터 현재까지 많은 국가의 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조각과 건축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서구에서는 로마 제국의 미술이 대부분 그리스 양식을 바탕으로 발전했다. 동쪽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으로 그리스, 중앙아시아, 인도 문화 간 수 세기의 교류가 시작되어 그리스 불교 미술이 탄생했고, 그 영향은 일본까지 미쳤다. 유럽의 르네상스 이후에는 인본주의적 미학과 그리스 미술의 높은 기술 수준이 여러 세대의 유럽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19세기까지도 그리스에서 유래한 고전주의 전통이 서구 세계의 예술을 지배했다.

고전기에 들어서면 아테네가 이 시대의 대표적인 무대가 된다. 이 고전기는 후세의 유럽인에게 영향을 주어, 르네상스 시대에는 이 고전기에 매료되어, 그 뛰어난 미술품과 인간 중심의 사상을 “모범”으로 삼아 이 시대를 “고전기”라고 했다. 그리고 이 시대, 그리스인으로서의 출현과 함께 서양 문명이 시작되었다고 여겨지며, 그리스인이 만들어낸 수많은 가치관이 그대로 후세에 전해져 서양 문명의 중핵을 이루게 되었다.
오리엔트의 영향을 받은 미술에서는 엄격 양식이라고 불리는 양식이 확립되었고, 아테네에서는 흑상식과 적상식이라고 불리는 도자기 생산도 시작되었다.[114]
그리스 건축은 로마 시대를 거치면서 간접적이긴 하지만 유럽 건축물에 큰 영향을 주었다. 미케네 시대에는 키클롭스식 성벽처럼 웅장한 건축물이 많았으며, 크레타 미노아 유적이나 산토리니 섬에는 현재에도 주거 유적이 남아 있다. 그리고 미케네의 메가론은 고전 시대 신전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고전 시대, 헬레니즘 시대에는 옛부터 존재했던 도시들이 고대부터 이어진 흐름을 이어받아 조직적으로 발전해 왔다. 반면 소아시아에서는 계획적으로 건설되었는데, 이 계획은 그리드 시스템(グリディロン)이라고 불린다.[118]
현존하는 건축물이나 조각상들은 흰색 일색이지만, 과거에는 선명한 채색이 되어 있었다.[115][116] 훼손되어 색이 바랜 것도 있지만, 1930년경 대영박물관의 후원자 초대 듀빈 남작 조지프 듀빈(미술 수집가·화상)의 지시로 대영박물관 직원들에 의해 색이 벗겨진 것도 많다. 최근에 이 사실이 공표되었고, 조사를 통해 일부 유물에서 색소의 흔적이 밝혀져 CG 등을 통해 재현하는 시도도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日立 세계·ふしぎ 발견!」에서는 파르테논 신전에 프로젝션 맵핑으로 채색을 했다.[117]
6. 유산
고대 그리스 문명은 언어, 정치, 교육 제도, 철학, 과학, 예술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 문명은 로마 제국의 지배적인 문화(Leitkultur)가 되어 토착 이탈리아 전통을 변방으로 몰아넣었다. 호라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1]
:''Graecia capta ferum victorem cepit et artis / intulit agresti Latio'' (''Epistulae'' 2.1.156f.)
:사로잡힌 그리스는 야만적인 정복자를 사로잡고 그리스 예술을 시골 라티움에 심었다.
로마 제국을 통해 그리스 문화는 일반적으로 서구 문화의 기초가 되었다.[1] 비잔티움 제국은 라틴어의 중개 없이 고전 그리스-헬레니즘 문화를 직접 계승했고, 중세 비잔티움 전통에서 고전 그리스 학문의 보존은 슬라브족에, 나중에는 이슬람 황금기와 서유럽 르네상스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1] 고전 그리스 학문의 현대적인 부흥은 18세기와 19세기 유럽과 아메리카의 신고전주의 운동에서 일어났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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