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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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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 도심은 오랜 역사를 지닌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조선 시대에는 한양으로 불리며 수도로서의 역할을 했고, 유교적 도시 계획에 따라 종묘, 사직단, 육조거리 등이 배치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시가로 불리며 식민 통치의 중심지가 되었고, 대한제국 시기에는 황성으로 불리며 도시 구조가 현대화되었다. 1970~80년대에는 대규모 재개발을 통해 업무 지구로 변화했고, 1990년대 이후 문화 유산 보존과 관광 산업이 발전하면서 서울의 중요한 랜드마크가 되었다. 오늘날 서울 도심은 종로구와 중구를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 유산, 금융, 법률, 언론, 상업 시설이 밀집되어 있으며, 정치, 시위, 교육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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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 [지명]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명칭서울 도심, 서울 시내
로마자 표기Seoul dosim, Seoul sinae
주요 특징도심 및 중심업무지구
최신 행정 계획서울도심 기본계획 (2023년)
지리 정보
면적17.9 km2
좌표37.5722099, 126.9768146
인구 정보
인구 (2015년 기준)106162 명
이미지
서울 도심의 경관, 2023
서울 도심의 경관, 2023
서울 도심 사진
인왕산에서 촬영한 서울 도심 사진, 2015
기타
관련 정보한성부 도성 안 지역에서 유래한 서울의 역사적 도심이자 중심업무지구

2. 역사와 위상

서울은 조선 시대에는 한성부로 불렸으며, 서울 성곽으로 둘러싸인 성곽 도시였다. 한성부는 성 안쪽인 '성중' 또는 '도성 안'과 성 밖 10리 지역인 성저십리로 나뉘었다.[3]

서울은 계획된 수도이자 유교적 지리관이 구현된 도시였다. 유교 경전인 ''주례''의 '좌조우사 면조후시' 원칙에 따라 종묘사직단경복궁 좌우에, 조선의 6조 내각은 광화문 앞에 배치되었다. 세종대로(구 ''육조거리'')를 따라 위치한 정부서울청사와 종로 일대 대기업 본사들은 이러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1]

대한제국 시대 서울은 황성(皇城)이라 불렸으며, 전차전등 가로등 도입 등으로 현대화가 시작되었다. 고종은 덕수궁으로 주요 궁궐 기능을 이전하고 현대식 철도 교통을 도입했다.[6]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일본은 왕궁을 공원과 동물원으로 재건하고 도시 도로를 현대화하는 등 식민지 지배를 강화했다.[4]

일제강점기에 서울 도심은 종로구중구로 분할되었는데, 이는 민족 차별 정책의 일환이었다.[3] 조선총독부는 조선총독부 청사 건설을 통해 도심 공간을 재편하려 했다.[4]

대한민국 시대, 서울 도심은 한국 전쟁 중에도 경복궁, 종묘 등 주요 유적은 보존되었으나, 명동 등은 큰 피해를 입었다.[10] 1970~80년대 경제 성장을 통해 도심 재개발이 이루어졌고, 1986년 아시안 게임1988년 하계 올림픽을 계기로 랜드마크 건물들이 건설되었다.[12] 1990년대 이후에는 문화경관 보존과 관광 산업 육성이 중요해졌으며, 청계천 복원은 21세기 서울 도심의 상징적인 사업이 되었다.[17]

2. 1. 조선 시대

조선 시대 한양은 행정 구역 및 통치 기구인 한성부로 불렸다. 서울 성곽으로 둘러싸인 성곽 도시였으며, 이는 런던 성벽으로 둘러싸인 런던디움과 유사했다. 한성부는 성곽 안 지역인 '성중'(城中) 또는 '도성 안'과, 성곽 밖 10리 지역인 성저십리로 나뉘었다.[3]

서울은 계획된 수도이자 유교적 지리관이 구현된 조선의 수도였다. 한성부 도심 지역의 도시 경관은 유교의 문화 확산으로 조성되었다. 유교 경전인 ''주례''는 '左祖右社 面朝後市'(좌조우사 면조후시) 원칙을 제시했는데, 이는 주요 궁궐을 중심으로 유교 왕실 사당(祖)은 왼쪽, 사직단(社)은 오른쪽, 내각 건물(朝)은 앞, 시장(市)은 뒤에 배치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종묘사직단경복궁의 좌우에, 조선의 6조 내각은 광화문 앞에 배치되었다. 6조 관청은 광화문 바깥 양쪽에 지어졌으며, 그 길은 육조거리|육조거리한국어라 불렸다. 그러나 경복궁이 북악산 바로 앞에 세워져 시장을 뒤에 배치할 수 없었기에, 조선은 ''시전|시전한국어''을 경복궁 동남쪽(앞쪽)인 ''운종가''(현재의 종로)를 따라 건설하여 ''주례''의 지침에서 벗어났다.[5]

이러한 초기 도시 계획은 ''육조거리|육조거리한국어'' 남쪽 끝에서 ''운종가'' 동쪽 끝(원각사지 십층 석탑 근처)에 이르기까지 종각을 중심으로 동서 축을 이루는 상업 지역을 만들었다. 이러한 전통적인 도시 경관은 임진왜란, 정묘호란, 일제강점기,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도 오늘날 서울에 이어지고 있다. 세종대로(구 ''육조거리'')를 따라 위치한 정부서울청사와 종로 일대 대기업 본사들이 그 예시이다.[1]

대한제국 시대 서울은 황성(皇城)이라 불렸다. 황성 도심 지역의 구조적 현대화는 대한제국 초기 전차(1899년)와 전등 가로등(1900년) 도입 등으로 시작되었다. 고종은 경복궁에서 덕수궁으로 주요 궁궐 기능을 이전하고 현대식 철도 교통을 도입했다.[6] 이는 경복궁, 덕수궁, 서울역을 연결하는 도로 확장을 이끌어 북-남 축 형태의 새로운 도시 경관을 창출했다.[7]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일본 식민지 관리들은 도시 경관 재건을 추진했다. 이는 대한제국 왕실 정부를 종속시키고 식민지 정부 권위를 증진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왕궁을 공원과 동물원으로 재건하고 도시 도로를 현대화하는 것이 그 예시이다.[4]

1928년, 경성부(京城府)는 시청 앞마당을 오늘날 서울광장이 있는 지리적 도시 중심(都心)으로 지정했다.


서울 도심 지역은 조선 왕조와 대한제국을 거치며 약 600년간 단일 통합 도시권을 유지했지만, 조선총독부일제강점기 경성 도심 지역을 1943년 종로구중구로 분할했다.

일본 식민 정부의 서울 도심 분할은 민족 분포에 영향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초기 일본인들은 청계천 남쪽("남촌")에, 영향력 있는 한국인들은 "북촌"에 주로 거주했다.[3] 이후 지리적 분리가 완화되었음에도, 이러한 고정 관념은 경성부가 청계천을 경계로 서울 도심 지역을 종로구와 중구로 나누도록 했다. 명동, 소공동 등 경성의 영향력 있는 경제 기관 대부분은 청계천 남쪽에 새로 건설되었다. 조선은행, 경성우체국이 그 예시이다.[6] 반면, 한국인들은 청계천 북쪽 북촌에서 상대적으로 빈곤하게 살았다. 1910~1930년대 만들어진 북촌 한옥마을의 ''한옥'' 마을은 이러한 민족적 격차를 보여준다.[8]

그러나 식민 정부의 경성 재건은 일본인들의 이익에 의해서만 추진된 것은 아니다. 식민 정부는 조선의 지리적 문화 경관을 현대 일본의 영향력 아래 동화시키기를 원했다. 경성 일본인들이 '혼마치'(현재 충무로)를 중심으로 도시 재건을 요구하는 동안, 식민 정부는 의도적으로 혼마치 외부의 상징적인 한국 공간을 현대화된 일본식 건축으로 흡수하려 했다. 조선총독부 청사 건설(1912~1926년)은 전통적인 통합 도심 공간을 경복궁에서 육조거리를 중심으로 한 정부 청사로 재편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4]

2. 1. 1. 한성부의 도심

조선의 수도 한성부는 유교의 도성 축조 원리에 따라 한양 지역에 터 잡아 지어진 전근대의 계획도시였다.

옛 유교경전 주례 고공기(考工記)의 도성 축조원리인 도성제에 따른 '좌조우사 면조후시(左祖右社 面朝後市)'의 원칙은 조선의 한성부 건설에서 비교적 잘 준수된 것으로 평가된다. 법궁인 경복궁에서 남쪽으로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좌측에는 종묘 제도(祖)에 따른 종묘가, 우측에는 사직 제도(社)에 따른 사직단이, 그리고 앞쪽에는 조정(朝)에 해당하는 육조가 놓인 육조거리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5] 다만 경복궁의 뒷편은 오늘날 청와대 부지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당시에도 북악산에 밀접하게 닿아 있었으므로 '후시'(後市) 즉 법궁의 뒷편(後)에 시장(市)을 둔다는 원칙은 지켜질 수가 없었다. 이에 따라 조선은 궁궐의 뒷쪽이 아니라 앞쪽에 해당하는, 육조거리 남쪽의 보신각 근처에 운종가를 따라 공식 허가된 시장인 시전을 두었는데, 이는 정치의 중심인 경복궁 및 육조거리의 남측과 이어지며 조선의 도심부에 해당하는 정치 및 경제의 중심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5]

운종가 및 광통교시전 행랑이 종각을 중심으로 맞물린 丁(정)자 형태의 상업지역이 육조거리의 관청가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탄생한 한성부 한양도성 내의 도성 안 지역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두 차례의 큰 전란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구조가 바뀌지 않았다.[1] 이 도심부 구조의 견고한 내성은 옛 한성부 성내 지역의 도심부가 궁궐의 왕정이 아닌 사대부 관료와 상업 계층을 중심으로 성장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고도 할 수 있다. 궁궐은 도성 안 지역의 상징적인 중심일 뿐, 실제의 중심은 시장(市)과 관청(朝) 이었던 것이다.[4] 이는 동시대 청나라수도(도성) 북경의 자금성이 차지하던 도성 내 중심적 위상과는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으로, 이에는 한양의 지반이 단단하여 전근대 공학으로는 옛 물길을 바꾸고 장방형의 도로를 정비하기 어려웠던 점, 조선은 유교에 기반을 둔 통치이념에도 불구하고 풍수지리 사상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던 점 등이 원인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4]

2. 1. 2. 한성부의 도시화

18세기 후반 상업 발달과 함께 한성부의 도시화는 도성성저십리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당시에는 '사대문 안'이라는 표현보다는 '도성 안'을 의미하는 '성중'(城中) 또는 '성내'(城內)라는 표현이 널리 사용되었다.[3] 돈의문(서대문)·소의문(서소문)·숭례문(남대문) 밖의 '삼문 밖'(三門外) 지역과 흥인지문(동대문) 밖의 '동대문리'(東大門里) 지역은 일찍부터 도시화가 진행되어 한성부 오부 아래의 방(坊)에 편제되었다. 이에 해당하는 지역으로는 돈의문 주변의 반석방(盤石坊)·반송방(盤松坊), 흥인지문 주변의 숭인방(崇信坊)·인창방(仁昌坊) 등 4곳이 있었다.[1]

2. 1. 3. 한성부 도성 안 지역의 위상

조선 한성부는 정치, 외교, 군사적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에는 경제, 문화적으로도 다른 도시들을 압도하는 중심이 되었다. 예를 들어, 일본 에도 막부 시대 오사카는 수도 에도 인구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며 경제 도시로 기능했지만, 18세기 조선 개성 인구는 27,769명으로, 수도 한양(189,153명)의 20% 남짓이었다. 이는 일본의 중앙집권적 지방행정체제가 늦게 갖춰져 수도 중심성이 약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수도 중심성은 중앙집권적 지방행정체제를 갖춘 동시대 중국보다도 높았다. 18세기 이후 조선의 도시화 수준이 중국, 일본보다 낮아, 국내 도시 위계에서 수도 한양의 상대적 위상이 더 높았기 때문이다. 조선의 낮은 도시화율은 지방 양반들이 지방 도시(邑)에 거주하지 않은 점, 중앙집권적 지방행정체제가 지방 양반의 조세 저항으로 도시화 정체를 유발한 점, 유교 이념으로 상공업이 억제된 점, 육상 운송 개선이 어렵고 중앙 정부가 민란을 우려해 열악한 도로 사정을 방치한 점 등이 원인으로 거론된다.

조선의 유일한 도시화 지역이자 고도화된 상업도시로서 한성부의 높은 위상은, 조선 후기 한양과 그 밖의 지역을 서울(京|서울 경한국어)과 시골(鄕|시골 향한국어)로 구분하는 인식으로 이어졌다. 다산 정약용은 1810년 유배지에서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러한 문화적 간극을 드러냈다.

2. 2. 대한제국 시대

대한제국 시기 서울은 황성(皇城|황제의 도시한국어)으로 불렸다. 대한제국이 정치적 자율성을 유지했던 초기(1898년~1904년)에 황성의 도심 구조 현대화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 전차(1899년)와 전등 가로등(1900년)이 서울 도심 경관에 처음 도입되었다. 초대 황제 고종은 주요 궁궐 기능을 경복궁에서 덕수궁으로 옮기고 현대식 철도 교통을 도입했다.[6] 이는 경복궁, 덕수궁, 서울역을 연결하는 도로의 전략적 확장을 이끌어, 북-남 축 형태의 또 다른 중요한 도시 경관을 서울 도심에 만들었다.[7]

그러나 1905년 조약 체결로 대한제국이 실질적 자율성을 잃으면서, 일본 식민지 관리들은 도시 경관 재건을 추진했다. 이 초기 식민지 시대 공간 재편은 대한제국 왕실 정부를 종속시키고 식민지 정부 권위를 높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시기 주목할 만한 강력한 개혁에는 왕궁을 공원과 동물원으로 재건하고 도시 도로를 현대화하는 것이 포함된다.[4]

2. 3. 일제 시대

일제는 한성부를 경성부로 재편하고, 도성 안 지역을 경성시가(京城市街) 또는 경성 도심부라고 불렀다. 1940년대 식민통치 말기, 경성의 도심부는 청계천을 기준으로 종로구중구로 분할되었는데, 이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 짓는 민족차별 정책의 일환이었다.[3]

일제강점기 초기,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청계천 남쪽, 즉 한국인들이 "남촌"(南村)이라고 부르던 지역에 거주했다. 반면, 영향력 있는 한국인들은 주로 "북촌"(北村)에 거주했다.[3]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인과 한국인 간의 지리적 분리가 완화되었지만, 이러한 구분은 경성부가 청계천을 경계로 도심 지역을 종로구와 중구로 나누는 데 영향을 주었다.

명동소공동 등 경성의 주요 경제 기관 대부분은 청계천 남쪽에 새로 건설되었다. 조선은행과 경성우체국이 대표적인 예이다.[6] 반면, 한국인들은 청계천 북쪽의 북촌에서 상대적으로 빈곤하게 살았다. 1910년대에서 1930년대에 걸쳐 만들어진 북촌 한옥마을의 ''한옥'' 마을은 이러한 민족적 격차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이다.[8]

조선총독부는 경성부 내 일본인 거류민의 요구를 넘어, 조선의 주요 정치, 문화적 경관을 흡수하기 위해 경복궁육조거리 사이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건설했다. 1912년부터 1926년까지 건설된 이 건물은 전통적인 도심 공간을 경복궁에서 육조거리를 중심으로 한 정부 청사로 재편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4]

2. 4. 대한민국 시대

오늘날 종로1가 사거리 동남쪽에 있는 종각은 조선 시대 운종가와 광통교가 만나는 상업 중심지였다.


19세기 말 김정호의 '경조오부도'는 한성부 도시화가 도성성저십리까지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도성 안에는 종각 중심의 '丁자형' 도심 구조가 남아있었다.


1913년 일본제국 철도원이 서양 관광객을 위해 만든 경성부 지도. 서대문, 서소문, 남대문 밖 '삼문 밖' 지역과 동대문 밖 지역은 도시화가 상당히 진행되었지만, 숙정문(북대문) 일대는 지도에 표기되지 않았고 주변 시가도 발달하지 않았다.


1945년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서울 도심은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일제강점기에 종로구와 중구로 나뉘었지만, 600년 역사의 도심은 '도성 안'이라는 통합된 공간 인식을 필요로 했다.

한국 전쟁 당시 미국 육군은 이 지역을 '서울 도심'(Downtown Seoul)이라 불렀다.[9] 경복궁, 종묘 등 주요 역사 유적은 전쟁 중에도 보존되었으나, 명동 등 일부 지역은 큰 피해를 입고 현대적인 격자형 도시 블록으로 재개발되었다.[10]

전후 서울 도심 재개발은 더디게 진행되었으나, 1960년대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 방문을 계기로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개발도상국이어서 재개발 자원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12]

1970년대와 80년대, 대한민국은 경제 성장을 통해 도시 재개발 투자를 유치했고, 1986년 아시안 게임1988년 하계 올림픽 준비 과정에서 서울 도심에 랜드마크 건물들이 건설되었다.[12]

1980년대 도심 재개발은 상주인구를 줄이고 업무지구로 재편하는 데 성공했지만, 21세기를 앞두고 문화경관 보존과 관광 산업 육성이라는 새로운 개발 압력을 받았다.[12] 1994년 '정도 600년 기념사업', 1995년 종묘, 1997년 창덕궁의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지정은 서울 도심 개발 방향 전환점이 되었다.

남산 경관 복원을 위한 주변 건물 철거, 경복궁 앞 조선총독부 청사 해체는 1990년대 서울 도심 문화 경관 재발견을 위한 상징적 프로젝트였다.[12]

청계천 복원은 전통문화와 생태적 도시경관 재발견에 영향을 준 21세기 서울의 랜드마크 사업이었다. 이명박 당시 서울 시장은 친환경 이미지를 위해 청계천 복원을 추진, 고가도로 철거 후 청계천은 관광 명소가 되고 대기 질도 개선되었다.[17]

2. 4. 1. 1950년대~1960년대

1950년 육군 지도국(Army Map Service)에서 제작한 '''서울 도심''' 지도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은 경성 도심 지역을 종로구와 중구로 나누었지만, 600년 된 도심의 공간적 통합은 여전히 두 행정 구역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용어인 ''도성 안''을 필요로 했다. 한국 전쟁 당시, 한반도 해방 5년 후 김일성에 의해 시작된 비극적인 내전으로 인해, 한국에 파견된 미국 육군은 이 지역을 '''''서울 도심''''', 즉 다운타운 서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9]

서울 도심은 한국전쟁 중 가혹한 폭격을 견뎌냈기 때문에 경복궁종묘와 같은 귀중한 역사적 유적지를 문화 유산으로 보존할 수 있었다. 명동과 같이 일부 지역은 큰 피해를 입어 현대적인 격자형 도시 블록으로 재개발되기도 했다.[10] 1950년대 주일 한국 대표였던 김용주(金龍周)는 자신이 연합군 최고사령부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에게 서울 도심의 주요 지역을 폭격하지 말라고 조언했다고 주장한다.[11]

전후 서울 도심 재개발은 더디게 진행되었으나, 1960년대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 한국인들은 서울의 전통적인 심장이 외국의 TV 화면에 낡은 구시가지로 비춰지자 분개했고, 이러한 대중의 불만은 서울 도심의 재개발을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1960년대 한국은 여전히 신흥 개발도상국이었기 때문에, 서울 도심 재개발 프로그램은 충분한 자원을 확보할 수 없었다.[12]

2. 4. 2. 1970년대~1980년대

1970년대와 80년대에 대한민국은 경제 성장을 통해 도시 재개발을 위한 자본 투자를 유치할 수 있게 되었다. 1986년 아시안 게임1988년 하계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코리아나 호텔(1971년 태평로에 건설), 대우그룹 본사 (1977년 퇴계로에 건설, 현재 '서울스퀘어'), 교보생명 본사 (1980년 세종로에 건설) 등 랜드마크 건물들이 서울 도심에 건설되었다.[12]

이 시기 도시 재생의 주요 목표는 서울 도심을 주거와 상업 지역이 혼합된 형태에서 중심 업무 지구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서울 도심의 인구를 줄이는 것이 중요했는데, 경기고등학교휘문고등학교와 같은 명문 고등학교들을 강남구로 이전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업이었다. 정부는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을 통해 고등학교 입시를 폐지하고 추첨 제도를 도입하여 강남 지역으로의 이주를 유도했다.[13][14] 휘문고등학교종로구에 남긴 부지는 1986년 현대그룹 본사 건물로 개발되는 등, 학교 이전으로 생긴 공간은 고층 오피스 빌딩으로 채워졌다.[7]

1970년대와 80년대 서울 도심 재개발은 인구 감소에 성공하였다. 1985년 종로구 주민은 265,342명에서 2005년 154,043명으로 약 42% 감소했고, 중구 역시 같은 기간 208,085명에서 126,679명으로 줄었다.[9] 70년대 시작된 도심 재개발 정책은 90년대까지 이어졌으며, SK서린빌딩종로타워(각각 1999년 완공)가 이 시기 도심에 지어진 대표적인 건축물이다.[10]

정부 주도의 재개발로 서울 도심의 기능이 강남과 여의도로 분산되기도 했지만, 서울 도심은 여전히 서울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서울 도심은 전통적인 엘리트 간의 교류 장소였기 때문에 경제 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다.[15] 중구 명동과 종로구 종로동은 오늘날에도 서울의 중심 지역이다.[16]

서울 도심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요한 시위 장소이기도 했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 당시 이한열 추모식,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 촉구 시위 등이 서울광장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2023년 대통령 집무실이 청와대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실로 이전되었지만, 서울 도심은 여전히 중요한 사회적 시위가 발생하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2. 4. 3. 1990년대~2000년대

1980년대 도심 재개발은 상주인구를 줄이고 업무지구로 재편하는 데 성공했지만, 21세기를 앞두고 문화경관 보존과 관광 산업 육성이라는 새로운 개발 압력을 받게 되었다.[12] 1994년 '정도 600년 기념사업', 1995년 종묘, 1997년 창덕궁의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지정은 서울 도심 개발 방향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 시기에 건설된 주요 오피스 빌딩으로는 SK그룹의 SK서린빌딩한국어 (1999년 건설)과 삼성그룹종로타워 (1999년 건설) 등이 있다.[12]

남산의 경관을 복원하기 위해 주변의 무질서한 건물들을 철거하고, 경복궁 앞의 조선총독부 청사를 해체하여 문화 경관을 복원한 것은 1990년대에 서울 도심의 문화적 경관을 재발견하기 위해 시행된 두 가지 상징적인 프로젝트이다.[12]

청계천 복원은 전통문화와 생태 측면의 도시경관 재발견에 큰 영향을 끼친 21세기 서울의 랜드마크 사업이었다. 서울 시장 이명박은 친환경 정신으로 자신만의 업적을 추구하고자 도심 내에 이러한 전통적인 하천을 복원하는 사업을 추진하였다. 고가도로가 철거되고 수로가 다시 열린 후, 청계천은 유명한 관광 명소가 되었으며, 인근의 대기 질도 개선되었다.[17]

3. 의미와 범위

서울 도심이라는 명칭은 행정구역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되어온 지명이 도시계획을 통해 정착된 것이므로, 그 범위는 다소 유동적이다. 그러나 1970~80년대의 '도심 재개발사업' 대상지 범위, 2000년대 이후 여러 도심부 행정계획 등에서 볼 때, '서울 도심'은 기본적으로 한양도성종로구중구의 도심부를 가리킨다.

행정계획상 '서울 도심'의 경계는 옛 식민 통치기의 경성 도심부 상업지구, 1960~80년대 서울 도심부 고도제한지구 등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도심 계획들은 서울 도심을 주거와 상업지구가 혼재된 구시가를 철거하고 균질한 중심업무지구로 재개발하는 동시에, 전통적인 문화경관을 보전하는 복합적인 목표를 달성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서울 전체의 마스터플랜인 도시기본계획의 일부였고, 서울 도심만을 특정하는 행정계획은 아니었다.[10]

2010년부터는 서울 도심 관리를 위한 별도의 조례가 서울특별시의회에 의해 제정되었으며, 2024년 3월 기준 '서울특별시 서울도심 정비 및 관리에 관한 조례'라는 명칭으로 개정되어 서울도심의 경계 및 진흥책을 규정하고 있다.[19]

도시계획 및 조례에 따른 서울 도심의 구체적 범위는 법정동 또는 행정동 단위 경계와는 무관하게 도로망을 중심으로 하는 독특한 구조이다.

3. 1. 지명으로서의 의미와 용례

'서울 도심'은 법령으로 정해진 행정구역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지명이 도시계획을 통해 정착된 것이다.[18] 1970~80년대의 '도심 재개발사업' 대상지와 2000년대부터 이어진 여러 도심부 행정계획상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서울 도심'은 기본적으로 한양도성종로구중구의 도심부를 의미한다.[18]

하지만 일반인들은 '서울 도심'을 '서울시 내부'를 강조하는 의미로 잘못 사용하기도 한다. 이는 '도심' 개념을 '업무지구'와 혼동하거나,[18] '도심' 개념을 '도시'와 혼동하기 때문이다.[20]

'수도'와 '수도권'의 관계처럼, '서울 도심권'은 '서울 도심'을 둘러싼 지역을 의미한다. 1997년부터 서울특별시 전체를 아우르는 '서울도시기본계획'은 서울의 25개 자치구를 5개의 생활권으로 나누는데, '서울 도심권' 또는 '도심 생활권'은 종로구, 중구, 용산구 (도심 3구)를 의미한다.[24]

3. 2. 도시계획상의 경계와 범위

2000년대부터 '서울 도심'만을 특정하는 도시계획(행정계획)이 도입되었다. 최초의 도시계획은 2000년 시행된 '서울 도심부 관리 기본계획'이며,[21] 이는 2004년 '청계천 복원에 따른 도심부 발전계획',[22] 2007년 '도심재창조 종합계획',[23] 2015년 '역사도심 기본계획',[2] 2023년 '서울도심 기본계획'[1] 등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2015년 이전까지의 도시계획들은 '서울 도심부' 또는 '4대문안'이라는 이름 아래, 다산로(동측), 통일로(서측), 퇴계로(남측), 율곡로(북측) 등 4개의 주요 도로로 둘러싸인 상업지구 및 각 도로 주변의 경계 지역 일부를 포함하는 형태로 범위를 구획하였다.[2] 이는 조선 시대부터 동서축을 중심으로 발달해온 상업지역을 기준으로, 도성 밖이라도 상업적 개발 수준이 높은 동대문·서대문·남대문 바로 바깥 지역까지 포함하고, 도성 안이라도 도시화가 미진한 지역은 배제하는 방식이었다.

2015년 '한양도성 역사도심' 기본계획에서는 상업적 개발 정도와 무관하게 도성 안 지역 전부를 포함하도록 범위를 확장했는데,[23] 이는 서울 도심의 역사문화적 성격을 강조한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23]

3. 3. 도심 생활권

'서울 도심권' 또는 '도심 생활권'은 종로구, 중구, 용산구의 세 자치구(도심 3구)를 일컫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24]

4. 자연지리

2015년 기준 서울 도심의 행정계획상 면적은 17.9km2로 서울특별시 전체 면적의 약 2.9%에 해당한다.

도성 안 지역의 옛 물길 모습

4. 1. 지형과 지질

서울 도심은 중생대 흑운모 화강암이 주를 이루며, 낙산, 인왕산, 남산, 북악산 등 내사산에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다. 내사산에서 도성을 거쳐 중심부로 향할수록 지세가 낮아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내사산에서 유래하는 작은 물길들이 청계천으로 모여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물길이 예로부터 형성되었다.

토양이 물을 흡수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침투율은 청계천 이북 지역이 낮고, 이남 지역이 높은 차이를 보인다. 이로 인해 청계천 이북의 종로 일대에는 물길이 곧게 형성된 반면, 이남의 중구 일대에는 구불구불한 실개천이 형성되고 토질이 상대적으로 질퍽해졌다. '진고개'라는 옛 명칭은 땅이 질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옛 물길들은 도성 안 지역의 하부 행정구역을 이루는 자연경계로 기능했다. 그러나 근대적 도시화 사업, 특히 공중위생 개선을 위해 일제강점기에 옛 물길 대부분을 지표 아래로 옮기는 하수개수 사업이 추진되었다. 재정 문제로 수계 구조를 완전히 바꾸지는 못하고, 물길을 따라 지하에 상하수도관을 짓고 땅으로 덮은 뒤 그 위에 도로를 내는 방식으로 복개사업이 진행되었다.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서울 도심의 도로망이 옛 물길 구조와 결합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4. 2. 기후

서울 도심의 기온, 강수량 등 기상정보는 종로구 송월동에 위치한 '서울 기상관측소'에서 관측되며, 서울 전체를 대표한다.[52] 이 관측소는 1932년에 설치되어 1933년부터 운영을 시작했으며, 서울 전체를 대표하는 기상관측소로 계속 운영되고 있다. 옛 기상청 터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2020년에 국립기상박물관으로 재편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서울 전체를 대표하는 관측소로서 정보를 생산하고 있다.

서울 도심은 비교적 사계절이 뚜렷하며, 내사산 일대의 녹지 영향으로 강남, 여의도 등 한강 이남 지역에 비해 열섬 현상이 덜하다. 2020년 기준 서울 도심의 연평균 기온은 12.8°C, 연평균 강수량은 1,417mm이다.

최고 기온 (℃)평균 기온 (℃)최저 기온 (℃)강수량 (mm)평균 강수 일수평균 적설 일수습도 (%)일조 시간
1월14.4°C-2°C-22.5°C16.86.17.156.2169.6
2월18.7°C0.7°C-19.6°C28.25.85.154.6170.8
3월25.1°C6.1°C-14.1°C36.97.02.854.6198.2
4월29.8°C12.6°C-4.3°C72.98.40.254.8206.3
5월34.4°C18.2°C2.4°C103.68.60.059.7223.0
6월37.2°C22.7°C8.8°C129.59.90.065.7189.1
7월38.4°C25.3°C12.9°C414.416.30.076.2123.6
8월39.6°C26.1°C13.5°C348.214.70.073.5156.1
9월35.1°C21.7°C3.2°C141.59.10.066.4179.7
10월30.1°C15°C-5.1°C52.26.10.061.8206.5
11월25.9°C7.5°C-11.9°C51.18.82.360.4157.3
12월17.7°C0.2°C-23.1°C22.67.86.457.8162.9
연간39.6°C12.8°C-23.1°C1417.9108.623.961.82143.1

[53][54]

5. 인구와 주거

북촌한옥마을의 옛 한옥에서 서울 도심 업무지구의 마천루들을 바라본 모습


서울 도심은 법정동행정동 경계와 무관하게 설정된 도시계획상의 구역이므로, 그 내부의 정확한 인구는 기존의 행정동별 인구 통계만으로는 수집되지 않는다.[21] 따라서 관련 도시계획들에서는 서울 도심 내의 인구변화를 다룰 때 그 범위 내의 주요 행정동을 기준으로 하는 일종의 추정치를 검토하고 있다. 퇴계로율곡로 사이의 상업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2015년 이전까지의 옛 도심부 범역은 대개 종로구 교남동, 사직동, 종로1·2·3·4가동, 종로5·6가동 및 중구 광희동, 명동, 소공동, 을지로3·4·5가동, 회현동의 9개 행정동을 기준으로 인구가 추산되며,[21] 도성 안 일대를 아우르는 형태로 확장된 2015년 이후의 서울 도심 범역에는 위 도심부 범역에 종로구 가회동, 삼청동, 이화동, 청운효자동중구 장충동, 필동 등 6개의 행정동을 추가한 총 15개의 행정동을 아우르는 범위를 기준으로 인구가 추산된다.[2]

위와 같은 기준에 따르면, 도성 안 일대를 기준으로 하는 넓은 범위의 서울 도심에 거주하는 상주인구는 1985년 인구총조사 기준 203,093명에서 2015년 인구총조사 기준 106,162명으로 급격히 하락한 뒤 정체된 추세를 보이고 있다.[2] 2015년 기준 서울 도심의 인구밀도는 제곱킬로미터 당 5,931명으로 서울 평균(16,365명/km²)에 비해서도 낮을 뿐만 아니라 뉴욕 맨해튼(18,529명/km²), 도쿄 도심3구(11,275명/km²) 등 해외 대도시의 도심부에 비해서도 낮은 편이다. 특히 종로구·중구 일대는 일자리 총 숫자를 그 지역 내에 거주하는 취업자로 나눈 직주비가 4.93에 달하여 강남 업무지구(2.42), 뉴욕 맨해튼(1.41)에 비해 매우 높은 수준이다. 1970년대부터 계속된 도심재개발 정책은 서울 도심의 상주인구를 억제하는 대신 주간인구를 늘렸는데,[13] 이에 따른 도심 상주인구의 공동화 현상이 지금까지도 여파를 남기고 있다.[2]

이처럼 인구밀도가 낮고 산업경제가 주된 역할을 하는 종로구·중구 일대 도심부의 지리적 성격은 상주인구 대비 주간활동인구의 비율이 서울 전체에서 가장 높은 모습으로 나타난다.[19] 2010년대에 들어 서울 도심 내 상주인구의 공동화는 중단되었으나, 높은 주택가격으로 인해 미국, 유럽 또는 일본과 같은 도심회귀 현상까지는 발생하지 않고 있다.[17] 이는 상주인구의 전입과 출입 모두가 정체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19]

서울 도심의 인구변화 (1985 ~ 2015; 통계청 인구총조사 기준)[19]
연도서울 도심종로구중구
1985203,093265,342208,085
1995121,718190,116135,082
200598,169154,043126,679
2015106,162161,521128,478



도심의 주거환경은 종합적으로는 양호하나, 개발제한으로 인해 주거용 건물 자체의 노후화가 심각하다는 특징이 있다. 2023년 머니투데이 및 성신여대, 케이스탯, 충북대 등이 공동으로 산출한 지역별 사회안전지수에 의하면, 서울 내 25개 자치구 중 종로구와 중구는 종합점수를 기준으로 각각 2위와 6위를 기록하였는데, 이는 의료 및 문화시설 등 기반시설이 잘 갖춰져 있기 때문으로 평가된다.[23] 그러나 주택 자체의 노후화는 심각한 수준으로, 2018년 주택산업연구원의 조사에 의하면 용산구를 포함한 도심권 전체로 시야를 넓혀 살펴볼 때 종로구·중구·용산구의 도심 3구는 서울 전체에서 준공 30년을 넘은 노후 주택의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 기록된 바 있다.[24] 2021년 서울연구원의 주거실태조사에 따르면, 도심권의 일반적인 가구가 지니는 주거형태 구성은 단독주택 33.4%, 아파트 33.7%, 그 밖의 연립·다세대주택 등이 32.9%로 서울 평균에 비해 단독주택 비중이 가장 높고, 아파트 비중이 가장 낮았다.[25]

6. 교육

서울 도심은 구한말부터 한국 근대 교육의 산실로서, 유서 깊은 교육기관들이 위치한 곳이었다. 서울교동초등학교(1894년 관립교동소학교로 설립), 경신중·고등학교(1885년 언더우드학당으로 설립) 등은 개교 이래 지금까지도 도심 내에서 같은 장소를 지키고 있다.[22] 1974년 고교 평준화 정책 시행 이전까지 도심권은 '5대 공립, 5대 사립'이라 불린 경기, 서울, 경복, 용산, 경동고등학교(공립) 및 중앙, 양정, 배재, 휘문, 보성고등학교(사립) 등 명문 남자고등학교들과 이화, 숙명, 진명, 정신 등 명문 여자고등학교들이 밀집한 지역이었다.[13]경성제국대학 캠퍼스를 이은 서울대학교와 옛 성균관 터를 이은 성균관대학교 등 명문 대학교들 역시 1970년대까지는 오늘날의 대학로 부근에 모여 있었다.[23] 종로학원 등 오랜 역사를 지닌 사설 입시학원들이 대치동이 아니라 서울 도심에 밀집해있던 것은 이러한 역사를 반영한다.[24]

마로니에공원의 조감도


1970년대 박정희 정부는 도심 내 교육기관 및 학원들의 강남 이전을 통해 도심 재개발 및 강남 개발을 추진했다. 이는 주거 및 교통난을 야기하고 권위주의 군사정권에 위협적인 학생운동 집단을 형성했던 도심 내 교육기관 밀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13] 1975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및 법과대학은 관악캠퍼스로 이전했고, 1976년부터 경기, 휘문, 정신여자고등학교 등 도심 내 고등학교들이 강남 지역으로 이전했다.[14] 오늘날 경복, 용산, 경동, 이화여자고등학교 등은 도심에 남은 드문 사례이다.[22] 대성학원(종로 도렴동), 종로학원(종로 인사동) 등 대형 입시학원들은 각각 노량진과 도성 밖 중림동으로 이전했다.[25]

현대에 들어 도심부의 정체된 인구는 전통 있는 사립 교육기관마저 도심 바깥으로 이전하는 현상을 초래하고 있다. 계성여자고등학교는 2016년에 계성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꾸어 성북구 길음뉴타운으로 이전하였으며(1944년 중구 명동성당 앞에서 개교), 풍문여자고등학교는 2017년에 풍문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꾸어 강남구 보금자리지구로 이전했다(1945년 종로구 인사동에서 개교).[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 도심의 종로구·중구 일대는 여전히 상주인구에서 학생이 차지하는 비중이 서울에서 수위를 다투는 수준이다. 2017년 서울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종로구와 중구는 인구대비 초·중등학교 학생의 비율이 각각 12.2%와 11.4%로, 서울 25개 자치구 중 2위와 4위를 기록했다. (1위 노원구(12.6%), 3위 양천구(12.0%), 서울 평균 9.2%)[27]

7. 정치와 시위

조선 시대부터 정치 중심지였던 서울 도심은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상징하는 거의 대부분의 시위가 개최된 장소이다. 종묘광장, 탑골공원, 서울광장, 광화문광장, 서울역광장과 이를 잇는 종로, 세종대로, 대학로 일대에서 주요 시위가 열렸다.[13] 대표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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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도 범국민적 주목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시위들이 도심 일대에서 집회와 행진을 벌이고 있다.[26]

1996년 열린 제15대 총선에서 종로 선거구는 이명박(신한국당), 노무현(민주당) 등 훗날 대통령에 오른 당대의 거인들이 맞붙은 장소였다.


'정치 1번지'로 불리는 종로 선거구는 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온 정치 중심지로서의 상징성을 이어오고 있다.[27] 대한민국 대표적인 경합 지역(스윙 스테이트)으로서, 윤보선, 노무현, 이명박 등 3명의 대통령을 배출한 지역구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28] 2024년까지도 단독 선거구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며 서울 도심 내 민심을 상징하는 정치 1번지로서의 역사성을 이어오고 있다.[29]

서울 도심에는 대한민국에 대해 전통적으로 큰 영향력을 보여온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영국 등 강대국 및 경제력이 강한 서유럽 지역 국가의 외교공관이 밀집해 있다.[30] 이는 구한말부터 형성되어 온 전통적인 외교지구인 광화문, 정동세종대로 일대에 이들 공관이 집중된 결과이다.[31]

8. 경제와 산업

1904년 무렵 윌러드 디커맨 스트레이트가 촬영한 경성시가(京城市街)의 경관.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로 뻗은 옛 서울 도심의 경관이 나타나 있다.


조선 고종은 1895년에 한성부의 도로 정비를 개시하고,[1] 1896년에는 종로구 인사동서울의 중심점 표지석을 세웠다.[2] 대한제국으로 칭제건원을 마친 후 고종은 한성(漢城)을 '황성'(皇城)이라 이름을 바꾸어 불렀으며, 기존의 도성 안 도심부 구조에 중요한 변화를 추가했다.

본래 한성부 도성 안의 도로망은 종로로부터 다른 도로들이 뻗어나가는 모습으로,[3] 동서축을 중심으로 하는 도로망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4] 고종을미사변아관파천을 겪으며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주된 궁궐의 기능을 옮겼다.[5] 이를 계기로 경운궁을 중심으로 하는 도로망을 정비하고, 전차를 도입하여 경복궁, 경운궁과 남대문을 잇는 남북축의 교통망 구조를 만들었다.[6] 오늘날 경복궁 광화문으로부터 세종대로를 거쳐 서울역까지 이어지는 교통의 흐름은 대한제국기에 그 씨앗이 처음 뿌려졌다.[7]

대한제국 시대에 서울의 이름은 황성(皇城|황제의 도시중국어)이었다. 황성의 도심 지역 구조 현대화는 대한제국이 정치적 자율성을 유지했던 초기에 시작되었다. 예를 들어, 1898년부터 1904년까지 전차 (1899년)와 전등 가로등 (1900년)이 서울 도심의 경관에 처음 도입되었다. 또한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은 주요 궁궐의 기능을 경복궁에서 덕수궁으로 이전하고 현대식 철도 교통을 도입했다.[6] 이러한 개혁은 경복궁, 덕수궁서울역을 연결하는 도로의 전략적 확장을 이끌어 북-남 축의 형태로 서울 도심에 또 다른 중요한 도시 경관을 창출했다.[7]

그러나 대한제국이 1905년 조약을 체결한 후 실질적인 자율성을 상실하면서, 일본 식민지 관리들은 도시 경관 재건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 초기 식민지 시대의 공간 재편은 대한제국 왕실 정부를 종속시키고 식민지 정부의 권위를 증진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시기의 주목할 만한 개혁 중 일부는 왕궁을 공원과 동물원으로 재건하고 도시 도로를 현대화하는 것을 포함한다.[8]

서울 도심은 강남(GBD) 및 여의도(YBD)와 함께 서울의 3대 업무지구 중 하나이며, 가장 오래된 역사문화적 중심성을 지니고 있다.[33] 서울의 이 세 주요 상업 지구 중 도심 지역은 가장 다양한 산업 구성을 보이며,[34] 금융, 법률 및 미디어 산업에서 비교적 강력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25]

2021년, 서울 도심 지역의 두 주요 행정 구역인 중구와 종로구의 지역 내 총생산(GRDP)은 각각 61조과 35조으로, 서울시 25개 자치구 중 2위와 5위를 기록했다. 또한, 이 두 구의 1인당 GRDP는 각각 4억 8천만 원과 2억 3천만 원으로, 서울에서 가장 높다.[35]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4월 기준, 종로구 근로자의 평균 소득(426만)은 전국 1위를 기록했으며, 그 뒤를 영등포구 (415만), 중구 (404만), 서초구 (392만), 강남구 (390만)가 이었다.[36]

귀금속과 보석류를 유통 및 가공하는 주얼리·장신구 공예산업과 인쇄소는 서울 도심 내 종로 지역과 중구 을지로 부근에 집중된 대표적인 도시형 제조업이다.[9]

8. 1. 기업 본사

보신각 맞은 편의 옛 화신백화점 터에 1999년 지어진 종로타워삼성, SK 등 주요 대기업 그룹들의 사옥으로 활용되어 왔다.


서울 도심은 본래 가장 많은 대규모 기업 본사가 집적된 공간이었으나, 2000년대 이후 강남 업무지구의 성장으로 그 집중도는 약화되고 있다. 이는 도심부의 지리적 특성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의 산업구조 변화로부터 영향을 받은 현상이다.[25] 1990년대까지 서울 도심은 대한민국 제일의 업무지구로서 매출액 기준 상위 3000대 기업 본사의 약 25.2%(519개), 상위 500대 기업 본사의 46.7%(193개)가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에는 교통혼잡과 높은 임대료, 좁은 업무공간을 견디지 못한 기업들이 강남 업무지구로 본사를 대거 이동하면서 그 비중은 각각 15.5%(313개)와 32.9%(125개)로 줄어들었다.[25] 2000년대 강남 업무지구의 성장과 서울 도심의 상대적 정체는 한국 경제성장을 견인한 IT 산업의 벤처기업(스타트업)들이 강남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성장한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26] 서울 도심은 2020년대에도 소프트웨어 개발 등 IT 산업 입지로는 집적도가 매우 낮다.[27]

오늘날 서울 도심은 기업 본사 집적지로서 1990년대와 같은 압도적인 제일의 위상을 유지하지는 못하고 있으나, 2010년대에도 여전히 대기업 본사가 서울 3대 업무지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2014년 매출액 기준 상위 100대 기업 중 34곳,[28] 2016년 기준 자산총액 10조 원 이상 대기업 집단 28곳 중 17곳,[29] 2023년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 선정 세계 2000대 기업 중 대한민국 소재 52곳 및 서울 소재 34곳 중 15곳이 서울 도심의 종로구·중구에 본사를 두고 있다.[30] 서울 도심의 대기업 집단을 상징하는 건축물로는 SK그룹SK서린빌딩,[31] 한화그룹의 한화빌딩 등이 있다.[32]

8. 2. 서비스업

종로 주변에는 고도제한으로 인해 비슷한 높이를 지니는 업무용 고층빌딩이 길가에 빼곡하게 들어선 모습을 볼 수 있다.


중심업무지구로서의 서울 도심은 '서울 CBD'(Seoul Central Business District) 또는 '서울 도심권' 등으로 불리며 강남(GBD), 여의도(YBD)를 비롯한 서울의 3대 업무지구 중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문화적 중심성을 지니고 있다.[33] 전통적으로 행정기관, 대기업 본사, 대형 금융기관이 밀집해 있으며,[34] 수도 서울의 중심지라는 상징성으로 인해 외국계 대기업, 특히 외국계 금융기업의 주요 입지로도 기능하고 있다.[40]

중구 남대문 앞 세종대로 구간에는 구한말 한성상업회의소의 역사를 잇는 대한상공회의소가 위치하고 있다.


서울 도심은 문화재 사이의 좁은 부지에서 강력한 규제 하에 재개발을 통해 성장하여, 높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는 거대 기업집단의 본사와 금융, 법률, 언론 등의 고부가가치 산업이 주로 발달했다. 2023년 기준 서울 도심의 평당 명목 임대료는 10만원을 돌파하여 서울 내 업무지구 중 가장 높다.[25]

서울 도심 내 근로자는 전국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2023년 종로구 근로자의 월평균 소득은 426만원, 중구는 404만원으로 전국 1, 3위를 기록했다. 영등포구(415만원), 서초구(392만원), 강남구(390만원)가 그 뒤를 이었다.[36] 2021년 기준 종로구중구의 총 지역 내 GDP(GRDP)는 각각 35조원과 61조원으로, 서울 25개 자치구 중 5위와 2위를 차지했다. 강남구(77조원), 영등포구(44조원), 서초구(38조원) 순이다.[35]

서울 도심은 1990년대까지 대한민국 제일의 업무지구였으나, 2000년대 이후 교통혼잡, 높은 임대료, 좁은 업무공간 등의 문제로 많은 기업들이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대규모 기업 본사 집중도는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0년대 이후에도 대기업 본사는 여전히 서울 3대 업무지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2014년 매출액 기준 상위 100대 기업 중 34곳,[34] 2016년 기준 자산총액 10조원 이상 대기업 집단 28곳 중 17곳,[41] 2023년 포브스 선정 세계 2000대 기업 중 대한민국 소재 52곳 및 서울 소재 34곳 중 15곳이 서울 도심에 본사를 두고 있다.[41] SK그룹SK서린빌딩, 한화그룹의 한화빌딩 등이 대표적이다.

8. 2. 1. 금융

한국은행은 서울 도심의 금융 지구를 구성하는 소공동에 위치해 있다.


서울 도심은 여의도가 개발되기 전까지 한국의 월스트리트라고 불렸던 곳이다. 현재 한국은행이 자리한 중구 소공동은 인접한 명동의 증권시장과 함께 금융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37] 1922년 명동에 설립된 경성주식현물시장은 1970년대에 증권거래소가 여의도로 이전하기 전까지 명동 및 소공동 일대를 한국의 유일한 금융가로 만들었으며, 일제강점기에 옛 조선은행 주변에 모여 있었던 주요 대형은행들의 본사는 오늘날에도 한국은행 주변에 밀집해 있다.[37]

1990년 증권거래소 이전이 완료될 때까지도 서울 도심의 금융중심지 위상은 계속 이어졌는데, 이는 국내 증권사들이 당시 개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업무지구로서 여의도의 기능에 상당 기간 의구심을 품었기 때문이다. 여의도가 명동 및 소공동을 제치고 대한민국 제일의 금융가로서 위상을 가지며 한국의 월스트리트로 불리게 된 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였다.[38]

오늘날에도 금융 지구 기능은 여의도뿐만 아니라 서울 도심에도 분산되어 있다. 여의도의 금융산업이 국내 증권사 및 자산운용사에 집중된 반면, 서울 도심에는 은행, 보험, 신용카드업과 외국계 증권사 등이 고르게 분포하고 있으며, 금융위원회, 예금보험공사, 한국은행 등 주요 금융 규제기관 또한 도심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39]

서울연구원의 2022년 조사에 따르면, 서울 내 전체 금융기관 중 40%가 여의도에 있지만, 그 구성은 국내 증권사, 자산운용사 및 투자자문사에 집중되어 있다. 반면 서울 내 은행 13개 업체 중 8개, 53개 보험사 중 29개, 8개 신용카드사 중 7개 업체가 서울 도심에 있다. 한국에 진출한 89개 외국계 금융기업 중 79개 업체가 서울 도심에 위치하고 있다.[39]

외국계 금융기관의 도심 선호는 매우 두드러진 현상으로, 이는 특정 산업군에 치우치지 않은 종합적인 중심업무지구인 동시에 역사문화 중심지라는 서울 도심의 독특한 성격에 대한 외국계 기업의 선호가 반영된 것으로 평가된다.[40] 2010년경부터는 미래에셋, 대신증권 등 국내 증권사 일부가 여의도를 떠나 명동 등 옛 도심으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그 배경에는 서울 도심에 대기업, 은행, 보험사 등 증권사 고객이 몰려 있을 뿐만 아니라 서울 도심의 업무용 빌딩 공급이 개발규제로 인해 크게 제한되어 도심에 투자하는 것이 여의도에 비해 사업성이 좋다는 평가가 있다.[41]

8. 2. 2. 법률

대한민국의 4대 대형로펌인 김앤장 법률사무소, 법무법인 광장, 법무법인 태평양, 법무법인 세종은 모두 서울 도심에서 창립되었으며 현재도 도심에 본사를 두고 있다.[42] 이는 대법원 및 옛 서울지방법원(현재의 서울중앙지방법원)과 그에 대응되는 대검찰청, 서울지방검찰청(현재의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이 1995년까지 서울 도심 내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43] 1970~80년대에 시작된 대형로펌들은 이러한 역사를 반영하여 모두 서울 도심에서 창립되었으며, 특히 도심 내에서도 광화문 주변에 집중되어 있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43]

1990년대에 대법원과 서울지방법원이 서초구로 이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형로펌들은 서울 도심에 남았다. 주요 대형로펌들의 수익구조가 일상적인 소규모 소송이 아니라 대기업 및 외국계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법률자문과 대관업무로 바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송무에 특화된 로펌 및 법률사무소들은 여전히 법원 근처에 몰려 있지만,[42] 대형로펌들은 자문 및 대관업무 수행에 있어 행정부, 언론사 및 다양한 대기업과 외국계 기업이 고르게 밀집해 있는 서울 도심의 환경이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42] 4대 대형로펌 중 유일하게 1990년대에 강남 지역으로 자리를 옮겼던 법무법인 태평양이 2020년에 종로구 공평동으로 복귀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44]

8. 2. 3. 언론

서울 도심에는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같은 대형 신문사들이 세종대로에 자리 잡고 있으며, 유일한 국영 뉴스 통신사인 연합뉴스광화문 근처에 위치하는 등 대중 매체 산업이 발달했다.[45] 한국기자협회의 2020년 조사에 따르면, 30년 이상 역사를 가진 대한민국 대중 매체 27개 중 18개가 종로구중구에 위치해 있었다.[46]

서울 도심은 1970년대 후반까지 서울의 유일한 도심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신문 및 뉴스 통신의 핵심 지역이 되었다. 수도로서의 중앙 지위는 현대식 고층 건물인 '프레스 센터'(한국프레스센터)로 상징된다. 서울 시청 뒤 세종대로에 위치한 이 건물은 1985년에 건설되었으며, 여전히 한국의 언론인과 기자들의 허브 역할을 하고 있으며,[47] 서울 외신기자클럽도 포함되어 있다.[48]

하지만 대한민국 방송사들은 서울 도심 내에 본사를 두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는 높은 임대료 때문이다. 1980년대에 설립된 방송사들은 1970년대에 새롭게 개발된 여의도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가 마포구를 디지털 미디어 시티 (DMC)로 재개발을 추진하면서 많은 방송사들이 여의도에서 DMC로 이전했다. 또한, 3대 신문사 중 하나인 중앙일보는 자사의 방송사인 JTBC의 성장을 가속화하기 위해 2020년에 DMC로 이전을 선택했다.[46]

8. 3. 제조업

을지로 인쇄골목의 경관. 소규모 업체가 밀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귀금속과 보석류를 유통 및 가공하는 주얼리·장신구 공예산업과 인쇄소는 서울 도심 내 종로 지역과 중구 을지로 부근에 집중된 대표적인 도시형 제조업이다.[9]

귀금속·보석 산업은 조선 시대 시전에 공급할 귀금속을 다듬는 공인들이 모여 살았던 예지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1960년대까지 명동에서 번성하다 1970년대부터 봉익동으로 이동, 1990년대에 집적화가 이루어졌다. 2000년대 중반 전 세계 최대 규모로 성장했지만, 2010년대 중반 이후 어려움을 겪자 서울시는 이 일대를 '종로 귀금속 특정개발진흥지구'로 지정했다.

중구 지역의 인쇄업은 조선 시대 인쇄를 담당하던 관청인 주자소 터가 주자동에 있었던 것에서 초기 역사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현대적인 을지로 주변의 도시형 인쇄산업 밀집은 1960년대 말부터 나타났다.[10] 1960년대까지 충무로 영화산업을 뒷받침하는 전단지 인쇄소로서 충무로 장교동 일대에 인쇄산업지구가 형성되었다.[11] 1980년대 시 정부의 장교동 재개발로 인쇄업체들이 인현동으로 이동하며 을지로 인현동 인쇄골목이 형성되었다.[12]

2000년대 대규모 인쇄업체들은 파주출판도시로 이전했고, 남은 영세 업체들은 분업화된 생산 공정을 유지하며 도심 내 지리적 근접성과 집적 이익을 추구하며 재개발에 저항해 왔다.[13] 2013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서울 도심 내 중구 을지로동, 광희동, 필동에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인쇄업체들이 있으나, 업체 당 평균 종사자 수는 매우 적었다.[14] 오늘날 이곳 일대는 '중구 인쇄 특정개발진흥지구'로 지정되어 있다.[15]

1970년대부터 종로4가 예지동 일대에는 시계 관련 점포가 모여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말 쿼츠시계 등장과 2004년 재개발 지역 지정으로 예지동 시계골목은 쇠락했다.[16]

8. 3. 1. 귀금속·보석

종로3가 사거리에서 바라본 종로귀금속거리의 모습. 사진 가운데 놓인 고층건물은 옛 단성사를 쇼핑센터로 재개발한 '단성골드주얼리센터'다.


귀금속과 보석류를 유통 및 가공하는 주얼리·장신구 공예산업은 서울 도심 내 종로 지역에 집중된 대표적인 도시형 제조업이다.[1] 종로 지역 귀금속·보석 산업은 조선 시대부터 시전에 공급할 귀금속을 다듬는 공인이 모여 살았던 예지동에서 그 역사를 찾을 수 있다.[2]

일제강점기에는 종로, 충무로남대문시장 일대를 중심으로 성장하였고, 1960년대에는 '정금사'를 중심으로 명동 일대에서 번성하였다.[3] 1970년대부터 광장시장 인근의 봉익동 일대로 제조 부문이 옮겨가기 시작했다.[4]

1990년대부터 봉익동묘동을 중심으로 종로2·3·4가 일대에 제조 및 유통업이 더욱 집중되었는데, 이는 티파니 등 해외 유명 주얼리 브랜드 업체들이 국내시장에서 성장하자 경쟁력이 약한 소규모 금은방들이 집적의 이익을 얻기 위해 종로 일대에 모여들었기 때문이다.[5]

2000년대 중반까지 종로 봉익동, 묘동 일대는 귀금속·보석 제조 및 유통업체 약 3천 개가 모여들어 단일 귀금속 상권으로는 전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할 정도로 번영하였다.[6] 그러나 2010년대 중반부터 신혼부부 감소와 해외 명품 브랜드 중심의 소비 경향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6]

2010년 서울특별시청은 이 일대를 '종로 귀금속 특정개발진흥지구'로 지정하여 귀금속·보석 및 시계 등 제조·유통·수리업종에 대해 진흥정책을 실시하고 있다.[7] 오늘날 종로구 봉익동 일대의 귀금속·보석 산업은 서순라길 등으로 영역을 넓혀 유통·산업 지구로서의 위상을 이어가고 있다.[8]

8. 3. 2. 인쇄

중구 을지로 부근에는 인쇄소가 집중되어 있으며, 이는 도시형 제조 산업군의 하나이다. 을지로 인쇄산업지구는 영세 업체들이 생산 공정을 분업화하여 도시 블록 전체가 하나의 인쇄촌을 이루고 있다. 1980년대부터 서울시의 재개발 압력에도 불구하고, 이들 영세 인쇄업체들은 지리적 근접성과 집적 이익을 위해 재개발에 저항해 오고 있다.

9. 시장과 상권



서울 도심의 종로구·중구 일대는 강남, 마포, 영등포 등 다른 상권에 비해 사업체 교체 비중이 낮고 오랜 기간 운영된 점포가 많다.[7] 이는 조선 시대 종로·칠패·이현 등 '도성 3대 시장'과 일제강점기 '명동'에서 유래한 것이다.

서울 도심 상권은 종각을 중심으로 옛 도성시전 행랑에서 시작되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종로(종루)·칠패·이현의 도성 3대 시장 체제가 구축되었다.[5]

일제강점기 일본인 거주 지역인 남촌(진고개)이 번성하면서 서울 상권 중심은 명동, 충무로로 이동했다.[6]

종로 시장은 조선인을 중심으로 명동 상권의 백화점들과 경쟁했다. 1931년 조선인 최초의 근대적 백화점인 동아백화점이 세워졌으나, 이듬해 박흥식의 화신상회에 인수되어 화신백화점이 되었다. 1935년 화재 후 화신백화점은 더 높은 현대식 건물로 신축되어 1937년 조선 최대 백화점이 되었다. 박흥식의 친일 행적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이 일본인의 명동 상권에 맞서 종로에서 성공한 것은 조선인들에게 자부심을 주었다.[6]

9. 1. 도성 3대 시장과 명동

서울 도심의 상권은 종각을 중심으로 옛 도성시전 행랑에서 시작되었다. 17세기 중반 남대문 바깥에 '칠패' 시장이, 18세기 중반에는 동대문 주변에 '이현' 시장이 생겨 종로, 칠패, 이현의 도성 3대 시장이 만들어졌다.[5]

일제강점기 일본인 거주 지역인 남촌(진고개)이 발전하면서, 서울 상권 중심은 명동, 충무로로 옮겨갔다.[6] 1906년 충무로에 미쓰코시백화점 경성출장소가 생겼고, 1929년에는 신세계백화점 본점 자리에 한국 최초의 근대 백화점인 미쓰코시백화점 경성지점이 세워졌다. 같은 해 죠지야백화점이 롯데백화점 영플라자 자리에, 이후 히라타백화점(1926년), 미나카이백화점(1932년) 등이 들어서며 명동 상권이 번성했다.[6]

9. 2. 해방 후 상권별 현대화

1904년 조지 로즈가 촬영한 옛 남대문시장의 모습


한국전쟁 이후 남대문시장동대문시장은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고, 화신백화점도 큰 피해를 입었다.[6] 하지만 상인들은 다시 상권을 재건하며 현대적인 변화를 겪었다.[6]

2014년 남대문시장 중앙로의 모습. 의류 뿐만 아니라 그릇, 안경 등 잡화를 취급하는 상점의 비중이 상당함을 관찰할 수 있다.


남대문시장은 원래 의류, 수산물, 청과 등을 파는 종합시장이었으나, 도심 재개발 시기부터 품목이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었다.[6] 1975년 정부는 남대문시장의 수산 부문을 노량진으로, 청과 부문을 용산으로 이전시켰다.[6] 패션산업 중심지로서 동대문시장이 발달하면서 남대문시장에서 의류 비중은 줄고, 1970년대 말부터 주방용품, 포목 등 잡화와 장신구 등 액세서리가 들어섰다.[6]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하계 올림픽 등 국제행사로 관광객이 늘면서 품목 전문화가 가속화되었다.[6] 1982년에는 입점업체 중 60%가량이 의류를 다뤘으나, 2013년에는 약 36%로 줄고 잡화(약 16%)와 액세서리(약 30%)가 그 자리를 채웠다.[6]

2020년대 광장시장 음식점 거리의 모습


동대문시장은 예지동에서 시작해 의류산업 핵심지가 되면서 종로5·6가까지 넓어졌다.[6] 원래의 예지동 주변 시장은 광장시장, 종로5가는 동대문시장, 종로6가는 동대문종합시장으로 분화되었으나, 상권이 청계천 평화시장 등으로 넓어지며 일대 전체가 동대문시장으로 불리게 되었다.[6] 1980년대에 동대문시장은 동대문역 부근의 원단 공급, 창신동 일대의 제조공장, 광희동 일대의 유통망이 결합하여 대한민국 최대의 패션산업 중심지로 성장했다.[6] 1990년대에는 두산타워밀리오레, 2000년대에는 굿모닝시티 등 고층 상업건물들이 들어섰다.[6] 2014년 옛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지어진 동대문디자인플라자는 개장 초기 논란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흑자를 내며, 동대문 패션산업을 뒷받침하는 세계적인 전시장으로 역할을 확대하고 있다.[6]

한국전쟁으로 종로명동의 백화점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6] 국토 전반의 산업경제가 축소되어 백화점 재건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6] 전후 백화점들은 경영난으로 점포 임대 수준에 그쳤다가, 1970년대 초 고도성장기에 들어서야 직영 체제를 갖추고 성장했다.[6] 해방 후 70년대까지 일제 시대 백화점들은 다양하게 재편되었다.[6] 종로 화신백화점은 소유권 분쟁으로 화신, 신신, 종로백화점 등으로 나뉘었다.[6] 명동의 일본계 백화점 중 일부는 적산 불하 대상이었다.[6] 미쓰코시백화점은 1963년에 신세계백화점으로 재편되었다.[6] 죠지야백화점은 1954년에 미도파백화점으로 재편되었다.[6]

1970년대 고도성장기에 명동에서 소공동에 이르는 현대적인 도심 백화점 상권이 형성되었다.[6] 신세계(옛 미쓰코시), 미도파(옛 죠지야), 화신은 1970년대 초까지 서울의 3대 백화점이었으며, 1970년 코스모스 백화점과 1979년 롯데백화점이 경쟁에 가세했다.[6] 경쟁에서 밀려난 화신백화점은 1986년에 부도를 겪었다.[6] 코스모스백화점은 2009년 쇼핑몰 '눈스퀘어'로 재탄생했다.[6] 미도파백화점은 2002년에 롯데백화점에 인수되어 롯데영플라자로 재단장했다.[6] 롯데백화점과 신세계백화점은 2005년 전후로 대규모 재단장과 신축공사를 진행하는 등, 도심 백화점 상권의 양대 산맥으로서 경쟁을 이어오고 있다.[6]

10. 문화

서울 도심은 '미술 1번지'라 불리는 종로구를 품고 있으며, 종묘, 창덕궁 등 풍성한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다.[1] 종로구·중구·용산구의 도심권은 서울에서 가장 많은 공연장과 전시장이 밀집해 있는 문화예술의 중심지이다. 2015년 서울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서울특별시 전체 문화유산의 약 53.1%(173개소), 공연시설의 약 48.6%(245개소), 전시시설의 약 51.4%(332개소)가 도심권에 밀집되어 있다. 다만 공연시설 객석 수를 기준으로 하면 도심권은 약 32%만을 점유하는데, 이는 대학로를 중심으로 소규모 시설이 밀집되어 있기 때문이다.[15]

1978년 세종로에 지어진 세종문화회관은 전시장, 공연장으로 쓰이며, 전통 한옥 개념을 현대적으로 변용한 현대 한국건축의 성공 사례이다.

10. 1. 문화유산과 공공박물관

서울 도심은 대한민국 최초의 국보 숭례문과 대한민국 최초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종묘, 그리고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 조선의 옛 5대 궁궐을 포함하여 다양한 문화유산이 밀집해 있는 곳이다.[1]

종묘석굴암·불국사 및 해인사 장경판전과 더불어 1995년 대한민국 최초로 지정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서울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도심권으로 범위를 넓혀 볼 때 2019년 기준으로 서울 내 국가지정문화유산 1,266건 중 737건, 서울특별시지정문화유산 608건 중 219건이 서울 도심권에 위치하고 있다.[22] 박물관에 소장된 보물 등을 제외하고 독자적으로 공간을 점유하는 형태의 문화재만을 헤아릴 경우에도 2015년 기준 서울 전체 326곳의 문화유산 중 173곳이 도심권에 위치하고 있다.[15]

도심 내 문화유산의 높은 밀도는 자연스럽게 이를 관리·전시하는 박물관이 밀집한 박물관 클러스터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2020년 기준으로 서울 내 박물관·미술관이 가장 많은 자치구 상위 3곳은 종로구(54개), 중구(18개), 용산구(12개)의 도심 3구다.[25] 도심 내 박물관 클러스터의 역사는 대한제국 순종 치세에 을사조약 이후 창경궁 일부를 철거하고 그 부지에 세운 제실박물관과, 한일병합 이후 일제가 경복궁 일부를 철거하고 그 부지에 세운 조선총독부박물관의 두 박물관으로부터 기원한다. 1909년 대중에 공개된 제실박물관은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이왕가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꾼 뒤 같은 창경궁 자리에서 계속 운영되었다가,[26] 1938년 덕수궁으로 자리를 옮겨 해방 전까지는 이왕가미술관, 해방 후에는 덕수궁미술관으로 운영되었다.[27] 한편 1915년 개관한 조선총독부박물관은 해방 후 그대로 '국립박물관'이 되었는데, 이는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신이다.[28] 두 박물관의 소장품은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되었으며 대한민국 박물관들의 뿌리가 되었다.[26]

10. 2. 미술

서울 도심의 미술 시장은 조선 후기 청계천 광통교 주변에서 형성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790년 문인 강이천의 한경사에 따르면, 당시 광통교 주변에는 상업화된 미술 시장이 이미 존재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명동을 중심으로 고미술품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시기 미술 시장은 주로 한국의 고전 동양화와 고미술을 중심으로 발달했으며, 서양화 등 당시 최신 미술 조류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해방 이후 고미술품 시장은 명동에서 종로구 인사동 등으로 확장되었다.

1970년대부터 인사동에 현대 미술품을 다루는 화랑들이 들어서면서 '화랑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1970년 문을 연 '현대화랑'을 필두로 여러 화랑들이 인사동에 자리를 잡았다. 인사동 중심의 화랑가는 점차 삼청동, 평창동 등으로 확장되었다. 오늘날 인사동의 화랑들은 주로 고미술을, 삼청동의 화랑들은 주로 현대미술을 취급하는 경향을 보인다.

2020년대에도 종로구는 '미술 1번지'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비롯하여 아트선재센터, 가나아트센터, 갤러리현대(옛 현대화랑), 국제갤러리 등 국내 주요 미술관과 화랑들이 인사동, 삼청동, 평창동 일대에 밀집해 있다.

10. 3. 공연

서울 도심의 현대 공연예술문화는 중구 일대의 국립극장종로구 대학로 일대의 소극장들을 두 축으로 한다.[25] 한국 최초의 근대적 공연장은 1902년 경희궁 부근에 대한제국 황실이 세운 협률사이며, 원각사로 재편되었으나 191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25] 그 역사는 1995년 정동에 지어진 공공극장인 정동극장으로 계승되고 있다.[26] 정동극장은 2020년대에도 세실극장 등 경영위기를 겪는 중구 일대의 소극장들을 공공극장으로 인수하며 문화 저변을 넓히고 있다.[27]

1935년 일제강점기에는 중구 태평로 일대에 1,800석 규모의 대강당을 지닌 근대적 공공극장 부민관이 세워졌다.[25] 해방 후 1950년 부민관은 대한민국 최초의 국립극장이 되었으나 한국전쟁을 거치며 국회의사당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서울 수복 후 국립극장은 명동의 명치좌로 터를 옮겨 1960년대까지 명동 국립극장으로 운영되었다.[25] 1967년 정부는 장충동 남산 기슭에 국립극장 신축을 추진하여 1973년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국립극장으로 자리잡았다.[25]

대학로는 1970년대 서울대학교관악구로 이전된 후 종로구 부지에 세워진 문화지구이다. 중구 일대의 국립·공공극장에 비해 역사가 늦지만, 20세기 후반 한국 대학문화가 꽃피운 장소로서 높은 지리적 상징성을 지닌다.[28] 대학로아르코예술극장 건립,[29] '차 없는 거리' 조성 등 1980년대부터 문화지구로서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공연예술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30] 오늘날 대학로는 세계에서 공연장 밀집도가 가장 높은 지역으로서 공연예술 관련 산업체들이 고도로 집적되어 있다.[31] 그러나 문화지구로서 대학로의 성공은 임대료 상승을 일으켜 영세 소극단에 위기를 초래하기도 한다.[32]

10. 4. 영화

충무로라는 지명은 대한민국 영화산업 그 자체를 뜻하는 대명사처럼 쓰이고 있다.


1935년 일본인이 충무로에 세운 영화관 약초극장은 해방 후 수도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62년 스카라극장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다.


1999년 종묘대제 어가행렬이 피카디리극장 앞 종로3가를 지나는 모습


충무로는 대한민국 영화산업을 상징하는 지명으로, 서울 도심 내 영화산업의 역사를 보여준다. 한국 영화산업은 시작부터 서울 도심과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1903년 최초의 영화상영은 동대문종합시장 자리의 옛 한성전기회사 기계창에서 이루어졌고,[1] 1907년 조선인들이 세운 단성사 영화관은 종로3가에 있었다.[2]

1950년대 후반부터 충무로는 한국 영화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영화제작사가 시나리오를 완성하면 지방 영화관 경영주들이 충무로에서 투자 여부를 결정했다. 서울 영화제작사는 서울 지역 배급권을, 지방 경영주들은 지역별 배급권을 나눠 가지며 투자 위험을 분산했는데, 이를 '충무로 시스템'이라 불렀다. 1970년대 스크린쿼터 제도 실시는 한국 영화산업의 양적 팽창을 가져왔다.[3] 충무로의 전성기는 한국영화의 첫 전성기였고, 인접한 을지로의 인쇄산업 부흥으로도 이어졌다.[4] 그러나 1980년대 가정용 TV 보급으로 충무로 영화산업은 쇠퇴하였다.[5]

1990년대 초 영화제작사들은 '영화관 1번지'였던 종로 일대로 이전했다.[6] 1960년대 도심 재개발로 종로3가-을지로3가-충무로는 단성사, 피카디리극장, 서울극장 등이 밀집된 '골든 트라이앵글'을 이루었다.[7] 1998년 영화 ''접속''에서 주인공들이 피카디리극장 앞에서 만나는 장면은 당시 피카디리극장의 상징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종로 일대 영화관들은 멀티플렉스 영화관과의 경쟁에서 밀려났다.[8]

2000년대 영화제작 비용 증가와 자본집적 고도화로[9] 영화제작사들은 대기업 및 금융기관과의 접점을 늘리기 시작했다.[10] 이는 충무로의 지리적 집적성 의미를 낮췄다. 1990년대 초까지 영화제작사들은 충무로 인근에 사무실을 두는 것이 관례였으나, 2000년대에는 강남 지역에 사무실을 두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그럼에도 충무로는 여전히 상징적 지명으로 남아있는데, 기업화된 영화투자사와 제작사는 지리적 집적 이익을 누리지만, 예술인력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11] 특히 촬영, 미술 등 영화창작 인력은 '충무로식 도제시스템'에 의한 현장 양성에 영향을 받고 있어,[12] 충무로는 상징적 지명으로서 대한민국 영화산업을 나타내고 있다.[13]

10. 5. 음식

한성부 도성 안 지역은 조선의 수도 한양의 중심부이자 유일하게 10만 명이 넘는 도시화 지역으로서 외식업이 번창하였으므로 다방면에 걸친 식문화의 발전을 이루었다.

종로구 청진동에는 1960년대부터 '넥타이부대'라 불리는 서울 도심의 화이트칼라를 대상으로 하는 해장국 문화가 번성했다.


'무교동 낙지볶음', '청진동 해장국', '신당동 떡볶이', '장충동 족발', '오장동 냉면' 등 유명한 한국 현대 음식문화의 상당수는 서울 도심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이처럼 도심 내 동(洞) 단위의 지명이 특정한 요리와 맞물리며 탄생한 상당수의 음식문화들은 고도성장이 가속화되며 대한민국 유일의 중심업무지구로서 서울 도심의 고밀화가 진행되던 1960년대에서 70년대 사이에 형성된 것이다.

각각의 도심 음식문화들은 도심의 다양한 사회지리적 측면에서 영향을 받아 성장했다. 예를 들어 무교동 낙지요리와 청진동 해장국은 서울 도심의 업무지구로서의 성격에 영향을 받아 등장한 요리문화로서 그곳에 근무하던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회식문화 속에서 성장한 반면, 신당동 떡볶이는 명문고교들의 강남 이전이 아직 완료되지 않아 도심 내 학생인구의 규모가 크던 이행기에 10대 청소년들의 학생문화로서 성장하였다. 한편으로 장충동 족발과 오장동 냉면은 한국 전쟁 후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생계를 위해 도심 일대에 새로 삶의 터전을 꾸리고 음식장사를 시작한 것에서 유래했다.

10. 6. 종교

서울 도심에는 종묘, 정동제일교회, 새문안교회, 명동성당, 조계사, 서울주교좌성당 등 여러 주요 종교 시설들이 밀집해 있다.

이러한 도심 내 종교 시설들은 시위대가 몸을 숨기는 소도와 같은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하여, 시위 및 집회 문화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11. 관광

1920년대에 일본여행협회(日本旅行協会, Japan Tourist Bureau)가 영어로 발간한 경성부의 여행책자. 경복궁 근정전(Kinsei-den), 창덕궁 후원(Royal Garden), 남대문(Nandai-mon) 등 오늘날에도 유명한 도심 관광명소들의 옛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근대적 관광업이 한국에 처음 등장한 것은 구한말의 일로, 조선의 수도 경성은 한국 관광의 중심지로서 내외국인들을 널리 끌어들였다. 그 중에서도 관광명소로서 문화유산과 근대적 상업지구가 모두 갖춰진 경성시가는 많은 관광객이 유람하는 행선지가 되었다.[3] 조선총독부는 근대적으로 번영한 경성의 모습을 지방 거주민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자 했으므로, 1910년대부터는 경성을 향하는 단체관광이 조직되기 시작했다.[3] 1929년 조선총독부가 식민통치의 성과를 대내외에 선전하기 위해 개최한 조선박람회는 경성 관광을 더욱 활성화했다. 총독부는 박람회 개최를 지원하려는 목적으로 1920년대에 철도를 보강하고 버스 임시노선을 증편하는 등 대중교통망에 대한 투자를 늘렸으며,[4] 1930년대 무렵에는 조선총독부 청사, 조선신궁, 장충단공원, 파고다공원, 미쓰코시백화점, 창덕궁 후원 등을 버스로 유람하는 경성 단체관광이 대중화되었다.[5] 관광명소와 이를 잇는 교통망을 중심으로 간략화된 경성의 근대적 모습은 관광객들이 서울을 이해하는 심상지리 및 경관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5]

롯데백화점 명동본점, 영플라자, 롯데호텔 서울 등이 밀집한 소공동 롯데타운의 2015년 야경


해방 후 한국전쟁과 연이은 혼란은 1950년대 한국의 관광산업을 침체시켰다.[6] 당시 관광업은 외화를 벌어들이는 부문으로써 1960년대까지 정부로부터 전방위적인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국제관광공사가 독점 운영하던 국영호텔들은 적자를 거듭했다. 1970년대부터 정부는 여러 재벌들에게 영빈관 등 기존의 국영호텔을 불하하고, 새로운 호텔 건립에 있어서는 외국인 직접투자를 적극 허용함으로써 관광업에 대한 민간투자를 늘리고 경쟁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변경하였다.[7] 이러한 정책 변화는 도심 경관을 현대화하려는 도심 재개발 정책과 맞물려 있었으므로, 이 시기에 서울 도심의 현대적 경관을 형성하는 국제주의 양식의 고층 특급호텔들이 여럿 건설되어 오늘날까지도 도심 관광산업의 주요한 골격을 형성하게 된다. 대표적인 사례는 1979년 소공동에 건립된 38층 높이의 롯데호텔 서울로, 이 호텔은 삼일빌딩을 제치고 상당 기간 동안 대한민국의 최고 마천루가 되었다.[7]

서울 도심의 풍성한 문화자원은 오늘날에도 수많은 내·외국인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지리적 중추로 기능하고 있다. 닐슨코리아의 조사에 따르면 2017년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이 찾은 장소 상위 10곳 중 서울 도심에 위치한 명소는 7곳으로, 명동이 1위를 기록했으며, N서울타워(2위), 경복궁·창덕궁·덕수궁·창경궁(3위), 동대문시장(6위), 인사동·삼청동(7위), 동대문디자인플라자(8위), 남대문시장(10위) 등이 그 뒤를 이었다.[8] 2020년대부터는 종로 광장시장이 외국인 관광객에게 큰 인기를 얻으며 서울 도심 내 관광산업 성장에 새로운 거점으로 떠올랐고, 주변 종각역, 익선동 등 상권이 서울 도심 내 외국인 관광수요를 함께 견인하고 있다.[9] 외국인 관광객의 서울 내 행선지는 국적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2023년 서울관광재단의 조사에 의하면, 미국인은 주로 서울 도심 내의 익선동, 북촌한옥마을, 광화문광장을 찾았고, 일본인은 동대문 동묘시장과 남산공원을, 중국인은 청와대와 동대문 경동시장을 찾았다.[10] 서울 도심은 대한민국 전체의 관광산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있으며, 한국관광공사서울관광재단은 모두 도심 청계천로 일대에 거점을 두고 하이커그라운드(HiKR GROUND),[11] 서울관광플라자 등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홍보공간을 운영하고 있다.[12]

12. 명소

서울 도심의 주요 명소는 다음과 같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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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https://lib.seoul.go[...] Seoul Metropolitan Government 2023
[3] 간행물 Blurring Boundaries: Mixed Residence, Extraterritoriality, and Citizenship in Seoul, 1876-1910 https://www.jstor.or[...]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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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적 https://lib.seoul.go[...] Seoul Historiography Institute 2021-11-30
[6] 서적 https://lib.seoul.go[...] Seoul Historiography Institute 2015-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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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서적 https://lib.seoul.go[...] Seoul Historiography Institute 2016-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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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웹인용 순위값 - 구역별조회 서울(108) https://data.kma.go.[...] 기상청 202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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