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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후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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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전후 시대는 세계사에서 서기 500년경부터 1450년경까지를 아우르는 시대로, 레오나르도 브루니가 '중세' 개념을 발전시킨 르네상스 시대의 역사학자들이 사용했다. 이 시기는 유럽 중심주의적 용어인 '중세'나 '암흑 시대' 대신 '전근대', '후고대', '후고전 시대'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시대는 문명의 확장과 성장, 보편 종교의 확산, 교역과 소통의 증진, 기후 변화의 영향, 몽골 제국의 등장, 봉건제의 발달 등 다양한 특징을 보인다. 유럽에서는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초기 중세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은 존속하며 법적 구조에 영향을 미쳤다. 아시아에서는 이슬람교의 확산과 아랍 칼리프 국가의 건립, 중국 왕조의 흥망성쇠, 몽골 제국의 등장이 주요 사건이었으며,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메소아메리카와 안데스 문명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이 시기에는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기후 변화가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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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후 시대

2. 지역별 시대 구분

고전후 시대의 지역별 시대 구분은 다음과 같다.


  • 동아시아: 6세기 수나라의 중국 통일부터 8세기 중엽 안사의 난까지, 당나라를 중심으로 주변 국가들에 큰 영향을 미치며 정치적, 문화적 통일된 문화권이 형성되었다.
  • 서유럽: 4세기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8세기 카롤링거 왕조가 성립되어 봉건제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로마 교황과 세속 군주의 유대가 강화되었다.
  • 동로마 제국: 7세기 초 둔전병과 군관구 제도로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8세기 초 우상숭배 문제로 로마 교회와 대립하며 그리스적 국가 특색을 강화했다.
  • 이슬람 세계: 7세기 이슬람교 성립 후, 무함마드와 칼리프들이 1세기 만에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 인도: 7세기 초 바르다나 왕조가 북인도를 통일했으나 곧 분열되었고, 남인도에서는 촐라 왕조가 강성했다.
  • 동남아시아: 인도 문화의 영향으로 진랍이 대두되었으나 분열되었고, 수마트라에서는 스리비자야 왕국이 해상 무역으로 강대해졌다.
  • 중앙아시아: 6세기 중엽 돌궐이 융성하여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동로마 제국과 교역하였다.
  • 오세아니아: 폴리네시아인과 미크로네시아인들이 태평양으로 이주하여 남태평양을 탐험하고 여러 섬에 정착했다. 통가 투이 제국은 해양 족장 사회를 이루었다.
  • 아메리카: 메소아메리카안데스 문명의 발전이 구세계와는 다른 시간대로 진행되었다.

2. 1. 유럽

4세기부터 6세기에 걸쳐 서유럽에서는 북유럽의 게르만족슬라브족의 민족 이동이 일어나 로마 제국의 국경이 무너지고,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였다. 서유럽 일대에는 게르만 부족국가가 들어서면서 유럽 봉건사회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지중해를 ‘우리의 바다’라 부르던 로마는 3세기 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쇠퇴하였다. 인구 감소, 경제 침체, 대토지 소유자의 독점으로 자영농민과 중산층이 몰락하였다. 로마군은 게르만 용병으로 채워져 무력화되었고, 475년 서고트족이 동로마 국경을 침입하면서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서고트족은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동로마군을 격파하고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했으며, 서로마군을 격퇴하고 이탈리아 반도로 남하했다. 410년 로마가 함락되고 게르만 부족들이 로마 영토를 유린하였다.

게르만 민족 이동의 결과, 서유럽에는 서고트 왕국(에스파냐), 동고트·롬바르드 왕국(이탈리아), 반달 왕국(아프리카 북안), 부르군트 왕국(남프랑스), 앵글로색슨 왕국(영국) 등 여러 나라가 건국되었다.

동유럽에서는 슬라브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어 동로마 제국 영토를 위협하였으나, 6세기 초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를 막았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로마 제국의 재건을 꿈꾸며 이탈리아, 에스파냐, 북아프리카 등 옛 로마 영토를 탈환하고,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하여 법제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으로 동로마는 쇠퇴했고, 영토는 동부 지중해 연안으로 축소되었다. 하지만 제국은 15세기까지 존속하며 서유럽과 중동아시아 사이에서 문화적 중개 역할을 담당하고, 그리스와 동방 문화를 융화, 계승하여 비잔틴 문화를 이룩하였다.

7세기 초, 동로마 제국은 둔전병과 군관구 제도를 통해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7세기 말 사라센군의 침입을 막아냈다. 8세기 초에는 우상숭배 문제로 로마 교회와 대립하면서, 제국은 종교적, 정치적으로 그리스적 국가로서의 특색을 강화했다.

서유럽에서는 카를 마르텔이 사라센 제국을 격퇴하면서 궁재의 힘이 강해졌고, 8세기에는 피핀에 의해 카롤링거 왕조가 성립되었다. 프랑크 왕국은 로마 교황과의 유대를 강화했고, 교황 또한 그리스 교회와 대항하기 위해 세속 군주와의 유대를 원했다. 이를 통해 프랑크 왕국에서는 봉건제의 기반이 성립되고, 중세 시대 교황과 군주의 제휴 관계가 시작되었다.

2. 1. 1. 서유럽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서구 문명은 재건되어 초기 중세 시대(500–1000년)로 접어들었다. 이 시기에는 인구 감소, 도시화 퇴조, 야만족의 침략 증가와 같은 후기 고대의 경향이 계속되었다.[78]

7세기부터 11세기까지 초기 무슬림 정복아랍인, 헝가리인, 노르드인들은 기독교 왕국들에게 위협이 되었고, 수 세기 동안 수천 명의 사람들을 죽였다.[78] 그러나 이들은 새로운 무역 네트워크를 만들기도 했다.[78] 서유럽에서는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가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통해 문화와 과학의 부흥을 일으키려 시도했다.[78] 800년, 샤를마뉴는 고대 로마를 부활시키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을 건국했다.[78]

1300년의 중세 경작 그림. 중세 시대 유럽인들의 대부분은 농노라고 불리는 토지 없는 농민이었으며, 군사적 보호를 대가로 노동력을 제공했다. 흑사병 이후, 노동력 부족으로 인해 농노들은 노동에 대한 임금을 요구했다.


이 시기 후반에는 봉건 제도의 창설로 군사 및 농업 조직이 더욱 발전했다. 북유럽서유럽에서 지속적인 도시화가 이루어졌다.[78] 이후의 발전은 장원제와 봉건제에 의해 특징지어졌으며, 번성하는 고전 중세 시대로 진화했다.[78] 1000년 이후 로마의 붕괴에서 나타난 기독교 왕국들은 문화적, 사회적 특성에서 극적으로 변화했다.[78]

Bobolice Castle, in 폴란드 보블리체. 중세 유럽의 성은 봉건제 권력의 중심지였다.


고전 중세 시대 (c. 1000–1300년) 동안에는 기독교 중심의 예술과 건축이 번성했고, 십자군은 이슬람의 지배로부터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일어났다.[78] 새롭게 부상하는 국가의 영향력은 국제적인 기독교 세계의 이상과 모든 서방 왕국에 존재하는 가톨릭 교회에 의해 완화되었다.[78] 기사도와 궁정 풍습의 규범은 적절한 행동의 규칙을 정하는 반면, 스콜라 철학 철학자들은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려 시도했다.[78] 봉건 시대는 흑사병의 대격변과 그 여파로 극적으로 변모할 것이다.[78]

2. 1. 2. 동유럽

동로마 제국은 비잔틴 제국으로 불리며 존속했고, 현대 유럽 국가의 법적 구조에 영감을 준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만들었다.[79] 9–10세기에 비잔틴 동방 정교회불가리아 제1제국키예프 루스를 기독교화했는데, 이는 현대 불가리아북마케도니아의 문화적, 정치적 조상이며,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조상이기도 하다.[79] 비잔티움마케도니아 르네상스 시대에 이 지역의 주요 세력 및 무역 중심지로 번성하다가 중세 말에 이탈리아 도시 국가와 이슬람 오스만 제국에 가려졌다.[79]

2. 1. 3. 스칸디나비아

바이킹 시대는 8세기 말부터 11세기 중반까지 스칸디나비아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노르드인들은 탐험, 무역, 정복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그들은 뛰어난 항해술과 조선술을 바탕으로 롱쉽을 이용하여 유럽 전역과 북대서양, 심지어 북아메리카까지 진출했다.

바이킹의 활동은 유럽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잉글랜드, 프랑스, 아일랜드 등지에 정착지를 건설하고, 노르망디 공국과 같은 강력한 국가를 세우기도 했다. 또한, 동쪽으로는 동유럽과 비잔티움 제국까지 진출하여 무역로를 개척하고 키예프 루스 건국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스칸디나비아는 10세기부터 12세기에 걸쳐 기독교화되었다. 덴마크의 하랄 블로탄 왕은 965년경 기독교로 개종하고 덴마크를 기독교 국가로 선포했다. 노르웨이올라프 1세올라프 2세의 노력으로 기독교화가 진행되었으며, 스웨덴은 12세기에 이르러 기독교가 완전히 정착되었다.

1397년,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은 칼마르 동맹을 결성하여 하나의 연합 왕국을 이루었다. 이 동맹은 마르그레테 1세 여왕의 주도로 성립되었으며, 1523년 스웨덴이 탈퇴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칼마르 동맹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한자 동맹과 같은 외부 세력에 대항하고, 지역 내 평화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2. 2. 아시아

샤푸르 1세 사후, 한때 부진했던 사산 왕조는 4세기 샤푸르 2세 시대에 다시 군사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쿠샨 제국을 페르시아의 한 주로 편입시키고, 로마 제국에게서 아르메니아를 되찾았다. 파르티아 왕국 시절부터 아르메니아를 둘러싼 로마와의 전쟁은 콘스탄티누스 1세의 그리스도교 개종 이후 더욱 심해졌고, 샤푸르 2세는 이에 맞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다. 샤푸르 2세 사후 왕위 계승 분쟁과 조로아스터교 사제 계급의 성장으로 왕권이 약화되었고, 5세기에는 에프탈의 침입과 마즈다교의 봉기로 혼란이 가중되었다. 호스로 1세는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고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그의 손자 호스로 2세동로마 제국을 공격하여 이집트를 정복하고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으나, 헤라클레이오스의 반격으로 패배하고 암살당했다. 마지막 황제 야즈데게르드 3세는 642년 네하반드 전투에서 이슬람 세력에 패배하여 651년 사망함으로써 제국은 멸망했다.[23]

쿠샨 왕조 붕괴 후 중앙아시아의 투하리스탄에 등장한 에프탈은 5세기 말~6세기 초 사산 왕조의 동부 이란, 간다라, 가즈니를 정복하고, 굽타 왕조를 쇠퇴시켰으며, 소그디아나를 제압하고 톈산 남북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인도, 중국, 페르시아, 남러시아를 연결하는 무역로를 장악했다. 그러나 563~567년 돌궐과 사산 왕조의 협공으로 멸망하고, 이후 , 아라비아 등의 지배를 받았다.[23]

4세기 초, 찬드라굽타 1세가 굽타 왕조를 건국하여 북인도를 재통일하고 인도 고전 문화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산스크리트 문학이 발전하고 칼리다사가 등장했으며, 「마하바라타」, 「라마야나」가 현재 형태로 정리되었다. 브라만교가 부흥하고 힌두교가 민중에 확산되었으며, 십진법과 제로(0)의 발견 등 수학이 발달했다. 불교 미술에서는 굽타 불상과 아잔타 벽화가 정점을 이루었다. 그러나 6세기 에프탈의 침입으로 굽타 왕조는 쇠퇴했다.[23]

인도 동해안에서 해로를 통해 동남아시아로 전파된 인도 문화는 이 지역 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베트남 북부를 제외한 동남아시아는 인도 문화권에 속했으며, 1~2세기부터 여러 민족이 국가 활동을 시작했다. 크메르족부남참족참파는 남해 산물 수송로와 2대 선진 문명의 중간 지대라는 이점을 활용하여 중개 무역으로 번영했다.[23]

2세기 중엽부터 3세기에 몽골에 세력을 편 선비를 교체하여 초원(草原)을 지배한 것은 유연이다. 그 수장(首長)은 후의 투르크계·몽골계 민족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는 가한(可汗)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5세기 초에 통치권을 확립했다. 이 유연에 맞서서 북몽골에는 일찍이 정령(丁零), 후에는 철륵(鐵勒)이라고 불리는 고(古)터키계 민족 투르크의 하나인 고차(高車)가 일어났다.

고차는 5세기 말에는 유연과 에프탈의 영역 사이에 끼인 준가리아 방면에 이동하여 세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얼마 후 에프탈의 동진에 의해 괴멸됐다. 6세기 중엽이 되자 유연의 밑에 있던 투르크(철륵:鐵勒)의 한 부족이 알타이 산기슭에서 봉기, 여러 부(部)를 통합하여 독립한 후 유연을 쓰러뜨리고(556), 에프탈의 주권을 빼앗았다(565년?).

583년에는 동으로는 싱안링 산맥(興安嶺)에서 서로는 아랄해(海)에 이르는 공전의 대제국을 형성하여, 멀리 동로마까지 통상(通商)했다. 이것이 중국 사서(史書)에서 말하는 돌궐(突厥)이다.

실크로드는 한나라에서 시작되어 로마 제국과 그 사이 또는 근처의 모든 지역을 연결했다. 이때 중앙아시아는 말, 양모, 을 중국으로 수출했고, 중국은 그 대가로 비단을 수출했다. 로마인들은 중국 상품을 거래하여 그 대가로 와인을 제공했다. 실크로드는 철기 시대부터 고전 이후 시대까지 무역에서 종종 쇠퇴와 부활을 반복했다. 이러한 쇠퇴 이후, 1세기에 한나라 장군 반초에 의해 중앙 아시아에서 다시 열렸다.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도 취약했다. 이슬람의 부상은 실크로드를 변화시켰는데, 이슬람 통치자들은 일반적으로 실크로드를 기독교 유럽에 폐쇄하여 유럽이 수세기 동안 아시아와 단절되었다. 구체적으로 실크로드에 영향을 미친 정치적 발전으로는 투르크족의 등장,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 제국의 정치적 움직임, 아랍인의 부상 등이 있다.

중앙 아시아의 불교 승려들, 실크로드는 상품뿐만 아니라 아이디어의 교환을 가능하게 했다. 중앙 아시아의 불교 승려 (아마도 소그디아인)가 승려를 가르치고 있다.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투르판 근처에서 9세기에 제작되었다.


마르코 폴로가 칸발리크(베이징)가 실크로드에서 하는 역할을 묘사함


실크로드는 13세기 몽골 제국 치하에서 다시 번성했는데, 몽골 제국은 정복을 통해 팍스 로마나에 필적하는 중앙 아시아의 안정을 가져왔다. 한 이슬람 역사가에 따르면 중앙 아시아는 평화롭고 안전하게 횡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유럽, 동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 간의 무역과 소통은 거의 노력 없이 이루어졌다. 수공예품 생산, 예술, 학문이 번성했고, 부유한 상인들은 국제적인 도시를 누렸다. 이븐 바투타, 라반 바르 사우마, 마르코 폴로와 같은 저명한 여행가들은 북아프리카와 유라시아를 자유롭게 여행했고, 그들의 경험을 기록한 사람들은 미래의 모험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실크로드는 아프로-유라시아 전역에 종교를 전파하는 데에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에서 온 이슬람 가르침이 동아시아에 전해졌다. 불교는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중앙 아시아로 퍼져나갔다. 불교 전파의 중요한 발전 중 하나는 간다라 미술이 고대 탁실라페샤와르 도시에서 조각된 것으로, 기원후 1세기 중반으로 추정된다.

기마 전사들이 적을 추격하고 있다. 라시드 앗딘의 자미 알타와리흐 삽화. 타브리즈(?), 14세기 1분기.


마르코 폴로는 당시 툴루이 내전과 몽골 군대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13세기와 14세기에 존재했던 몽골 제국은 역사상 가장 넓은 연속된 육상 제국이었다. 중앙 아시아의 초원에서 시작된 몽골 제국은 결국 중앙 유럽에서 동해까지 뻗어 나갔으며, 북쪽으로는 시베리아, 동쪽과 남쪽으로는 인도 아대륙, 인도차이나, 이란 고원, 서쪽으로는 레반트와 아라비아까지 확장되었다.

몽골 제국은 1206년 모든 몽골의 지배자로 선포된 칭기즈 칸의 지도 아래 몽골 고토에서 유목 부족들의 통일로 등장했다. 제국은 그의 통치하에서, 그리고 그의 후손들에 의해 급격하게 성장하여 모든 방향으로 침략을 보냈다. 광대한 대륙 횡단 제국은 강제적인 ''몽골 평화''로 동양서양을 연결하여 유라시아 전역에서 무역, 기술, 상품 및 이념이 전파되고 교환될 수 있도록 했다.

제국은 칭기즈 칸의 손자들 사이에서 계승 전쟁으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칭기즈 칸의 왕위 계승이 그의 아들인 초기 상속자 오고타이를 따라야 하는지, 아니면 툴루이, 차가타이, 또는 조치와 같은 다른 아들 중 한 명을 따라야 하는지를 두고 다툼이 벌어졌다. 몽케 칸이 사망한 후, 경쟁적인 ''쿠릴타이'' 의회는 동시에 서로 다른 후계자, 즉 형제 아릭 부케와 쿠빌라이 칸을 선출했고, 그들은 툴루이 내전에서 서로 싸웠을 뿐만 아니라 칭기즈 칸의 다른 아들들의 후손들로부터 도전도 받았다. 쿠빌라이는 권력을 성공적으로 잡았지만, 쿠빌라이가 차가타이와 오고타이 가문의 통제권을 되찾으려 했으나 실패하면서 내전이 벌어졌다.

몽골 페르시아의 일 칸국이 프랑스에 보낸 서한, 1305년. 중국식 도장은 중국 밖에서 칸과 그의 사절의 공식적인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1260년의 아인잘루트 전투는 몽골 정복의 절정기를 보여주었으며, 몽골의 진격이 직접적인 전투에서 격퇴된 최초의 사례였다. 몽골은 레반트에 여러 차례 더 침략을 시작하여, 1299년 와디 알-하자나르 전투에서의 결정적인 승리 이후 잠시 점령하고 가자까지 습격했지만, 다양한 지정학적 요인으로 인해 철수했다.

쿠빌라이가 1294년에 사망할 무렵, 몽골 제국은 네 개의 별도 칸국 또는 제국으로 분열되었다. 각각은 자체적인 개별적 관심사와 목표를 추구했다. 즉, 북서부의 금장 한국, 서부의 차가타이 한국, 남서부의 일 칸국, 그리고 현대 베이징을 기반으로 한 원나라였다. 1304년, 세 개의 서부 칸국은 잠시 원나라의 명목상의 종주권을 받아들였지만, 이후 한족 명나라에 의해 1368년에 전복되었다. 칭기즈 칸의 후손 통치자들은 몽골 고토로 돌아가 북원에서 통치를 계속했다. 모든 원래의 몽골 칸국은 1500년까지 붕괴되었지만, 더 작은 후계 국가들은 1700년대까지 독립을 유지했다. 차가타이 칸의 후손들은 근세 초에 인도의 대부분을 통치한 무굴 제국을 세웠다.

굽타 제국 멸망 후, 북인도는 7세기 초 하르샤 바르다나 왕이 통일할 때까지 분열되었다. 현장대당서역기에서 하르샤 왕국의 번영을 기록했고, 하르샤 왕은 당나라와 사절을 교환했다. 그러나 하르샤 왕 사후 왕실 혼란으로 북인도는 다시 소왕국 난립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시기 북인도 각지에서는 '라지푸트 시대'라 불리는 라지푸트족 소왕국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서로 전쟁을 벌였고, 이슬람 세력의 침입에도 단결하지 못했다. 남인도에서는 촐라 제국이 스리비자야까지 진출하며 강력한 세력을 떨쳤다. 한편, 불교팔라 제국의 보호를 받아 일시적으로 번성했지만, 12세기 말 인도에서 거의 사라졌다.

13세기까지 인도 아대륙에는 20~40개의 다양한 국가가 존재했으며, 이들은 다양한 문화, 언어, 문자 체계,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이 시기 초반에는 불교가 우세했고, 팔라 제국은 날란다 마하비하라와 같은 불교 기관을 후원했다. 차투랑가 게임이 발명되어 체스로 발전했다. 남인도에서는 힌두교 왕국 촐라 왕조가 해외 제국으로 성장하여 힌두교 확산에 기여했다. 아프가니스탄 역사, 티베트 역사, 미얀마 역사 등 주변 지역도 대인도의 영향을 받았다. 1206년부터 튀르크족 침략으로 북인도델리 술탄국이 건국되어 16세기까지 지배했다. 불교는 쇠퇴했지만 힌두교는 살아남았다. 극남부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이슬람 국가에 정복되지 않았다. 16세기 초 무굴 제국포르투갈령 인도가 등장했다.

8세기부터 동남아시아는 남아시아와 동아시아 간 무역으로 이익을 얻었고, 말라카 해협을 통한 부의 흐름으로 여러 왕국이 등장했다. 동남아시아는 인도와 중국 등 외부 영향을 받았지만, 고유한 정체성을 확립했다. 북베트남(다이비엣)은 중국에 의해 정복되었으나, 10세기 정해군과 다이비엣으로 독립했다. 남베트남은 참파 왕국이 통치했지만, 15세기 베트남에 병합되었다.

힌두교, 불교, 중국과 남아시아 간 해상 무역 확산은 크메르 제국과 스리비자야 등 동남아시아 최초 주요 제국의 기반을 마련했다. 12세기 크메르 제국앙코르 톰은 수자원 관리 덕분에 전근대 세계 최대 도시 중 하나였고, 자야바르만 2세는 100개 이상의 병원을 건설했다. 파간 제국은 코끼리를 군사력으로 사용했고, 쉐지곤 파고다 건설과 다신교 관용으로 상좌부 불교가 번성했다. 스리비자야는 순다 해협과 말라카 해협을 통제하며 해상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고 보로부두르를 건설했다. 인도네시아 선원들은 인도양을 건너 마다가스카르를 식민지화했을 가능성이 있다. 인도 문화는 필리핀으로 퍼져나가 인도화된 왕국이 생겨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적, 정치적 조건 변화와 전쟁으로 동남아시아 전통 제국은 약화되었다. 몽골 침략은 직접적인 합병은 없었지만, 전쟁으로 새로운 국가 부상의 길을 열었다. 14세기 크메르 제국은 수자원 관리 기술을 잃었고, 스리비자야는 마자파히트에 점령되었다. 이슬람 선교사와 상인들이 도착하여 인도네시아에서 이슬람화가 이루어졌다.

6세기 중엽, 메콩강 중류 지역의 크메르(캄보디아)인 국가 진랍은 7세기 부남을 멸망시켰으나, 왕위 계승권 내분으로 '육진랍'과 '수진랍'으로 분열되었다. 800년경 자야바르만 2세가 남부 통일 운동을 일으켜 크메르 제국을 건설했다. 미얀마에서는 이라와디강 하류에 몬(Mon)인, 상류와 중류에 퓨(Pyu)인이 살았고, 7세기에는 퓨인 국가가 번영했다. 수마트라에는 스리비자야 왕국이 해상무역으로 강성해졌다.

무함마드알라의 계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알라에 대한 절대적 귀의를 가르쳤다. 그는 한때 메카에서 메디나로 피신하였는데, 아라비아 부족 전체를 통일하여 이슬람 세계 건설의 기초를 닦았다. 무함마드의 사후, 역대 칼리프는 이슬람 세계의 확립과 발전에 노력하여, 1세기 만에 동으로는 중앙아시아·인도로부터, 서로는 북아프리카·이베리아 반도에 걸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정복사업은 계속되었으나 제3대 오스만 시대부터 교단 내부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굽타 왕조 멸망 후 북인도에서는 분열시대가 계속되었으나, 7세기 초 바르다나 왕조가 성립되어 일시적으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왕실 문란으로 통일은 급속히 무너졌고, 이후 이슬람교도에 의해 통일될 때까지 약 5세기 반 동안 소왕국 난립 시대가 계속되었다. 남인도에서는 드라비다계 여러 왕국이 분립했는데, 그 중 타밀 지방의 촐라 왕조가 부강하여 동남아시아의 스리비자야까지 진출하였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인도 문화 수용이 진행되어 캄보디아를 중심으로 진랍이 대두되었으나 분열했고, 수마트라에서도 스리비자야 왕국이 해상 무역으로 강대해졌다.

7세기 초 아라비아 메카에서 알라의 신앙을 설교하여 박해받은 무함마드는 622년 메디나로 피난(헤지라)하였다. 이는 낡은 부족 조직에서 분리된 새로운 종교적 공동체 성립을 의미하며, 이슬람교 발전의 출발점이 되었다. 무함마드는 630년 메카를 회복하고, 2년 후 사망할 무렵 아라비아 거의 전토를 지배했다. 사후 장로 아부 바크르가 칼리프(후계자)로 선발되었고, 제4대 알리까지를 정통 칼리프 시대라 한다. 이 시대에 아라비아인의 대정복이 시작되어, 제2대 칼리프 우마르는 시리아, 이라크, 이집트를 병합하고 642년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타도하여 이슬람 제국의 기초를 구축했다. 정복 사업은 계속되었으나, 제3대 우스만 시대부터 교단 내부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이는 무함마드 일족과 메카 상업 귀족을 대표하는 우마이야 가와의 대립이었다. 알리가 제4대 칼리프에 취임하자, 시리아 총독 우마이야 가의 무아위야는 반대 세력이 되어 알리 암살 후 다마스쿠스에 도읍을 두고 옴미아드 왕조를 세웠다. 옴미아드 왕조는 칼리프 세습제를 취하고 전제군주화되었다. 이 시대에 정복은 확대되어 에스파냐, 중앙아시아·북부 인도까지 사라센 제국의 최대 영토를 형성했다. 그러나 시아파가 옴미아드 왕조의 아랍 지상주의에 불만을 가진 이란계 이슬람교도의 지지를 받아 칼리프에 대항하며 제국 분열 경향이 나타났다.

이란계 이슬람교도들은 옴미아드 왕조 지배에 더욱 불만을 가져, 747년 호라산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정세를 이용하여 옴미아드 왕조를 타도한 것은 마호메트 백부 아바스의 5대손 아부 알아바스로, 750년 이라크 쿠파에서 칼리프 지위에 올라 아바스 왕조를 창건했다. 동생 알만수르(재위 754-775년)가 칼리프를 계승하여 반란을 진정시키고 기초를 확립, 티그리스강 근처 바그다드를 수도로 정했다. 아바스 왕조는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아 칼리프 지위가 전제군주화되었다. 칼리프는 신의 예언자 후계자가 아닌 알라의 직접적 대리자이며 ‘지상에서의 알라의 그림자’로 불렸다. 8세기 후반 알마흐디(재위 775-785년)와 아들 하룬 알라시드 시대가 최성기로, 바그다드는 동서 교통 중심이 되어 번영했고 국제적 이슬람 문화가 발달했다. 그러나 아바스 왕조 성립과 함께 이슬람 제국 분열이 시작되어, 우마이야 왕조 멸망 후 압둘 라흐만이 에스파냐 코르도바에서 후옴미아드 왕조를 재흥시켰다. 929년 압둘 라흐만 3세는 칼리프를 자칭하여 동서 칼리프가 양립했다.

11세기 중반 중앙아시아 투르크계 셀주크 튀르크의 등장으로 아랍 지배는 종말을 맞았다. 이들은 페르시아, 이라크(1055년 바그다드 점령), 시리아, 팔레스타인, 헤자즈를 정복했다. 서유럽 기독교인들의 침략이 이어졌고, 중동 분열로 잉글랜드 왕국, 프랑스 왕국, 신성 로마 제국 중심의 유럽 연합군이 진입했다. 1099년 제1차 십자군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세웠으나, 1187년 살라딘이 탈환했다. 작은 십자군 봉토는 1291년까지 존속했다. 13세기 초 몽골 제국 군대가 바그다드를 약탈하고 이집트 국경까지 진격하며 몽골 정복이 이루어졌다. 1335년 몽골 퇴각 후 혼란으로 셀주크 투르크가 몰락했고, 1401년 투르크-몽골 전통의 티무르 약탈이 있었다. 그 무렵 오스만인도 등장했다.

2. 2. 1. 한국사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한반도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정립되어 서로 항쟁을 벌였다. 삼국은 각각 불교를 수용하고, 중앙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갖추며 발전하였다. 7세기에는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을 이루었으나, 고구려 유민들이 발해를 건국하여 남북국 시대를 이루었다.

남북국 시대의 신라는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불교 문화를 융성시켰다. 골품제라는 신분제도가 있었으나, 6두품 출신 지식인들은 신라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며 새로운 사회를 추구하였다. 발해는 고구려의 문화를 계승하며 성장하였고, 해동성국이라 불릴 정도로 발전하였다.

9세기 말, 신라에서는 지방 호족 세력이 성장하며 후삼국 시대가 열렸다. 견훤후백제를,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하였고, 이후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고려는 문벌 귀족 사회였으며, 과거 제도를 통해 관리를 선발하였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등 지배층 내부의 갈등이 있었고, 무신정변 이후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고려는 거란, 여진, 몽골 등 북방 민족의 침입을 받았으나, 끈질기게 저항하며 국력을 유지하였다. 특히 몽골과의 전쟁에서 삼별초는 끝까지 항쟁하며 고려인의 자주정신을 보여주었다.

몽골의 간섭을 받던 시기, 권문세족이 성장하여 사회 모순이 심화되었다. 공민왕은 반원 자주 정책을 추진하며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권문세족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진사대부 세력이 성장하였고, 이들은 이성계를 중심으로 조선을 건국하였다.

2. 2. 2. 중국사

5세기 초, 선비족북위가 화북을 통일하면서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남조에서는 한족 왕조인 (420~478), 제(479~501), (502~557), (557~589)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북조에서는 이민족 왕조인 북위(386~534)가 동위(534~550)와 서위(535~557)로 분열된 후, 북제(550~577)와 북주(557~581)로 이어졌다. 이 시기에는 52명의 황제가 즉위했다가 폐위되었으며, 이 중 20명도 채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

삼국 시대부터 수나라의 통일까지 약 370년간은 전란이 끊이지 않았던 혼란기였지만, 이 시기에 강남 지역은 개발이 진전되었고, 북조에서는 균전제, 조용조 등의 제도가 정비되어 이후 , 제국의 번영을 위한 기반이 마련되었다. 후한 멸망 후부터 수나라 통일까지의 시기를 통틀어 위진남북조 시대라고 하며, 문화사에서는 강남의 건업(建業)에 도읍한 6개의 왕조인 , 동진, , 제, , 을 따서 육조 시대라고 부른다.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 시대 (581–1279)에 중국은 세계 최대의 경제 규모와 가장 기술적으로 진보된 사회였다.[100] 4대 발명품인 화약, 목판 인쇄술, 나침반 등이 개량되었다. 중국은 황실 정부가 집중된 중앙 권력을 보여주면서 당시 봉건주의와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에 중국은 대외 관계에 큰 관심을 보였다. 7세기부터 10세기까지 당나라는 국가 경제의 핵심이었던 상품의 서방 판매를 위해 실크로드를 확보하는 데 집중했다. 한때 중국은 유목민 이웃인 돌궐을 문명에 통합함으로써 국경을 성공적으로 확보했다. 당나라는 중앙 아시아로 확장되었고 동부 이란과 같이 먼 나라들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서쪽으로의 확장은 탈라스 전투와 수백만 명의 사망자를 낸 치명적인 안사의 난으로 끝났다. 당나라 붕괴와 그에 따른 내전 이후, 송나라는 해외 무역을 전문으로 했고 평화롭게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했으며 중국의 인구는 남쪽에 집중되었다. 중국 상선은 인도네시아, 인도, 아라비아에 도달했다. 동남아시아의 경제는 송나라와의 무역으로 번성했다.

강해도는 대명혼일도에서 영감을 받아 동아시아의 세계 지리에 대한 지식을 보여준다.


송나라의 경제는 상품 생산에 기계를 사용하고 에너지원으로 석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1~12세기 송나라의 발전은 초기 중국의 산업화로 간주되었다.[101] 경제적 발전은 군사 문제의 대가를 치렀고 송나라는 북쪽으로부터의 침략에 취약해졌다. 중국은 송나라의 북부 영토가 여진족에게 정복되면서 분열되었다. 1200년경에는 현대의 투르케스탄에서 동해까지 뻗어 있는 다섯 개의 중국 왕국이 있었으며, 여기에는 서요, 서하, 금, 남송, 대리국이 포함되었다.[102] 이들 국가들은 서로 경쟁했기 때문에 1279년 이전에 모두 부상하는 몽골 제국에 의해 병합되었다. 70년 간의 몽골의 중국 정복 이후, 몽골인들은 원나라를 선포하고 고려를 병합했으며, 일본 정복에는 실패했다. 몽골 정복자들은 또한 중국을 마르코 폴로와 같은 유럽 여행자에게 접근 가능하게 만들었다.[103] 몽골 시대는 역병과 기근으로 인해 수명이 짧았다.[104] 1368년 홍건적의 난 이후, 계승한 명나라는 번영의 시대를 열었고, 짧은 해외 원정을 거친 후 수 세기 동안 세계 문제에서 고립되었다.[105]

2. 2. 3. 일본사

이 절에서는 일본사에 대해 다룬다.

2. 2. 4. 서아시아

무함마드알라의 계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알라에 대한 절대적 귀의를 가르쳤다.[81] 그는 한때 메카에서 메디나로 피신하였는데, 아라비아 부족 전체를 통일하여 이슬람 세계 건설의 기초를 닦았다.[81] 무함마드의 사후, 역대 칼리프는 이슬람 세계의 확립과 발전에 노력하여, 1세기 만에 동으로는 중앙아시아·인도로부터, 서로는 북아프리카·이베리아 반도에 걸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81] 정복사업은 계속되었으나 제3대 오스만 시대부터 교단 내부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굽타 왕조 멸망 후 북인도에서는 분열시대가 계속되었으나, 7세기 초 바르다나 왕조가 성립되어 일시적으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왕실 문란으로 통일은 급속히 무너졌고, 이후 이슬람교도에 의해 통일될 때까지 약 5세기 반 동안 소왕국 난립 시대가 계속되었다. 남인도에서는 드라비다계 여러 왕국이 분립했는데, 그 중 타밀 지방의 촐라 왕조가 부강하여 동남아시아의 스리비자야까지 진출하였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인도 문화 수용이 진행되어 캄보디아를 중심으로 진랍이 대두되었으나 분열했고, 수마트라에서도 스리비자야 왕국이 해상 무역으로 강대해졌다.

7세기 초 아라비아 메카에서 알라의 신앙을 설교하여 박해받은 무함마드는 622년 메디나로 피난(헤지라)하였다. 이는 낡은 부족 조직에서 분리된 새로운 종교적 공동체 성립을 의미하며, 이슬람교 발전의 출발점이 되었다. 무함마드는 630년 메카를 회복하고, 2년 후 사망할 무렵 아라비아 거의 전토를 지배했다. 사후 장로 아부 바크르가 칼리프(후계자)로 선발되었고, 제4대 알리까지를 정통 칼리프 시대라 한다. 이 시대에 아라비아인의 대정복이 시작되어, 제2대 칼리프 우마르는 시리아, 이라크, 이집트를 병합하고 642년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타도하여 이슬람 제국의 기초를 구축했다. 정복 사업은 계속되었으나, 제3대 우스만 시대부터 교단 내부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이는 무함마드 일족과 메카 상업 귀족을 대표하는 우마이야 가와의 대립이었다. 알리가 제4대 칼리프에 취임하자, 시리아 총독 우마이야 가의 무아위야는 반대 세력이 되어 알리 암살 후 다마스쿠스에 도읍을 두고 옴미아드 왕조를 세웠다. 옴미아드 왕조는 칼리프 세습제를 취하고 전제군주화되었다. 이 시대에 정복은 확대되어 에스파냐, 중앙아시아·북부 인도까지 사라센 제국의 최대 영토를 형성했다. 그러나 시아파가 옴미아드 왕조의 아랍 지상주의에 불만을 가진 이란계 이슬람교도의 지지를 받아 칼리프에 대항하며 제국 분열 경향이 나타났다.

이란계 이슬람교도들은 옴미아드 왕조 지배에 더욱 불만을 가져, 747년 호라산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정세를 이용하여 옴미아드 왕조를 타도한 것은 마호메트 백부 아바스의 5대손 아부 알아바스로, 750년 이라크 쿠파에서 칼리프 지위에 올라 아바스 왕조를 창건했다. 동생 알만수르(재위 754-775년)가 칼리프를 계승하여 반란을 진정시키고 기초를 확립, 티그리스강 근처 바그다드를 수도로 정했다. 아바스 왕조는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아 칼리프 지위가 전제군주화되었다. 칼리프는 신의 예언자 후계자가 아닌 알라의 직접적 대리자이며 ‘지상에서의 알라의 그림자’로 불렸다. 8세기 후반 알마흐디(재위 775-785년)와 아들 하룬 알라시드 시대가 최성기로, 바그다드는 동서 교통 중심이 되어 번영했고 국제적 이슬람 문화가 발달했다. 그러나 아바스 왕조 성립과 함께 이슬람 제국 분열이 시작되어, 우마이야 왕조 멸망 후 압둘 라흐만이 에스파냐 코르도바에서 후옴미아드 왕조를 재흥시켰다. 929년 압둘 라흐만 3세는 칼리프를 자칭하여 동서 칼리프가 양립했다.

11세기 중반 중앙아시아 투르크계 셀주크 튀르크의 등장으로 아랍 지배는 종말을 맞았다.[83] 이들은 페르시아, 이라크(1055년 바그다드 점령), 시리아, 팔레스타인, 헤자즈를 정복했다.[83] 서유럽 기독교인들의 침략이 이어졌고, 중동 분열로 잉글랜드 왕국, 프랑스 왕국, 신성 로마 제국 중심의 유럽 연합군이 진입했다.[83] 1099년 제1차 십자군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세웠으나, 1187년 살라딘이 탈환했다.[83] 작은 십자군 봉토는 1291년까지 존속했다.[83] 13세기 초 몽골 제국 군대가 바그다드를 약탈하고 이집트 국경까지 진격하며 몽골 정복이 이루어졌다.[83] 1335년 몽골 퇴각 후 혼란으로 셀주크 투르크가 몰락했고, 1401년 투르크-몽골 전통의 티무르 약탈이 있었다. 그 무렵 오스만인도 등장했다.[83]

2. 2. 5. 중앙아시아

2세기 중엽부터 3세기에 몽골에 세력을 편 선비를 교체하여 초원(草原)을 지배한 것은 유연이다. 그 수장(首長)은 후의 투르크계·몽골계 민족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는 가한(可汗)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5세기 초에 통치권을 확립했다. 이 유연에 맞서서 북몽골에는 일찍이 정령(丁零), 후에는 철륵(鐵勒)이라고 불리는 고(古)터키계 민족 투르크의 하나인 고차(高車)가 일어났다.[23]

고차는 5세기 말에는 유연과 에프탈의 영역 사이에 끼인 준가리아 방면에 이동하여 세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얼마 후 에프탈의 동진에 의해 괴멸됐다. 6세기 중엽이 되자 유연의 밑에 있던 투르크(철륵:鐵勒)의 한 부족이 알타이 산기슭에서 봉기, 여러 부(部)를 통합하여 독립한 후 유연을 쓰러뜨리고(556), 에프탈의 주권을 빼앗았다(565년?).[23]

583년에는 동으로는 싱안링 산맥(興安嶺)에서 서로는 아랄해(海)에 이르는 공전의 대제국을 형성하여, 멀리 동로마까지 통상(通商)했다. 이것이 중국 사서(史書)에서 말하는 돌궐(突厥)이다.[23]

파키스탄의 바부사르 고개, 실크로드의 일부


실크로드는 한나라에서 시작되어 로마 제국과 그 사이 또는 근처의 모든 지역을 연결했다. 이때 중앙아시아는 말, 양모, 을 중국으로 수출했고, 중국은 그 대가로 비단을 수출했다. 로마인들은 중국 상품을 거래하여 그 대가로 와인을 제공했다.[51] 실크로드는 철기 시대부터 고전 이후 시대까지 무역에서 종종 쇠퇴와 부활을 반복했다. 이러한 쇠퇴 이후, 1세기에 한나라 장군 반초에 의해 중앙 아시아에서 다시 열렸다.[51]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도 취약했다. 이슬람의 부상은 실크로드를 변화시켰는데, 이슬람 통치자들은 일반적으로 실크로드를 기독교 유럽에 폐쇄하여 유럽이 수세기 동안 아시아와 단절되었다. 구체적으로 실크로드에 영향을 미친 정치적 발전으로는 투르크족의 등장,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 제국의 정치적 움직임, 아랍인의 부상 등이 있다.[51]

실크로드는 13세기 몽골 제국 치하에서 다시 번성했는데, 몽골 제국은 정복을 통해 팍스 로마나에 필적하는 중앙 아시아의 안정을 가져왔다.[51] 한 이슬람 역사가에 따르면 중앙 아시아는 평화롭고 안전하게 횡단할 수 있었다고 한다.[51]

이처럼 유럽, 동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 간의 무역과 소통은 거의 노력 없이 이루어졌다. 수공예품 생산, 예술, 학문이 번성했고, 부유한 상인들은 국제적인 도시를 누렸다. 이븐 바투타, 라반 바르 사우마, 마르코 폴로와 같은 저명한 여행가들은 북아프리카와 유라시아를 자유롭게 여행했고, 그들의 경험을 기록한 사람들은 미래의 모험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34] 실크로드는 아프로-유라시아 전역에 종교를 전파하는 데에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에서 온 이슬람 가르침이 동아시아에 전해졌다. 불교는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중앙 아시아로 퍼져나갔다. 불교 전파의 중요한 발전 중 하나는 간다라 미술이 고대 탁실라페샤와르 도시에서 조각된 것으로, 기원후 1세기 중반으로 추정된다.[34]

13세기와 14세기에 존재했던 몽골 제국은 역사상 가장 넓은 연속된 육상 제국이었다.[40] 중앙 아시아의 초원에서 시작된 몽골 제국은 결국 중앙 유럽에서 동해까지 뻗어 나갔으며, 북쪽으로는 시베리아, 동쪽과 남쪽으로는 인도 아대륙, 인도차이나, 이란 고원, 서쪽으로는 레반트와 아라비아까지 확장되었다.[40]

몽골 제국은 1206년 모든 몽골의 지배자로 선포된 칭기즈 칸의 지도 아래 몽골 고토에서 유목 부족들의 통일로 등장했다. 제국은 그의 통치하에서, 그리고 그의 후손들에 의해 급격하게 성장하여 모든 방향으로 침략을 보냈다.[41][42][43][44][45][46] 광대한 대륙 횡단 제국은 강제적인 ''몽골 평화''로 동양서양을 연결하여 유라시아 전역에서 무역, 기술, 상품 및 이념이 전파되고 교환될 수 있도록 했다.[47]

제국은 칭기즈 칸의 손자들 사이에서 계승 전쟁으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칭기즈 칸의 왕위 계승이 그의 아들인 초기 상속자 오고타이를 따라야 하는지, 아니면 툴루이, 차가타이, 또는 조치와 같은 다른 아들 중 한 명을 따라야 하는지를 두고 다툼이 벌어졌다. 몽케 칸이 사망한 후, 경쟁적인 ''쿠릴타이'' 의회는 동시에 서로 다른 후계자, 즉 형제 아릭 부케와 쿠빌라이 칸을 선출했고, 그들은 툴루이 내전에서 서로 싸웠을 뿐만 아니라 칭기즈 칸의 다른 아들들의 후손들로부터 도전도 받았다.[48] 쿠빌라이는 권력을 성공적으로 잡았지만, 쿠빌라이가 차가타이와 오고타이 가문의 통제권을 되찾으려 했으나 실패하면서 내전이 벌어졌다.[49]

1260년의 아인잘루트 전투는 몽골 정복의 절정기를 보여주었으며, 몽골의 진격이 직접적인 전투에서 격퇴된 최초의 사례였다.[49] 몽골은 레반트에 여러 차례 더 침략을 시작하여, 1299년 와디 알-하자나르 전투에서의 결정적인 승리 이후 잠시 점령하고 가자까지 습격했지만, 다양한 지정학적 요인으로 인해 철수했다.

쿠빌라이가 1294년에 사망할 무렵, 몽골 제국은 네 개의 별도 칸국 또는 제국으로 분열되었다. 각각은 자체적인 개별적 관심사와 목표를 추구했다. 즉, 북서부의 금장 한국, 서부의 차가타이 한국, 남서부의 일 칸국, 그리고 현대 베이징을 기반으로 한 원나라였다.[50] 1304년, 세 개의 서부 칸국은 잠시 원나라의 명목상의 종주권을 받아들였지만,[50] 이후 한족 명나라에 의해 1368년에 전복되었다.[11] 칭기즈 칸의 후손 통치자들은 몽골 고토로 돌아가 북원에서 통치를 계속했다.[11] 모든 원래의 몽골 칸국은 1500년까지 붕괴되었지만, 더 작은 후계 국가들은 1700년대까지 독립을 유지했다. 차가타이 칸의 후손들은 근세 초에 인도의 대부분을 통치한 무굴 제국을 세웠다.[11]

2. 2. 6. 남아시아

굽타 제국이 멸망한 후, 북인도는 일시적으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7세기 초 하르샤 바르다나 왕이 등장하여 북인도를 다시 통일하였다. 현장은 자신의 여행기인 대당서역기에서 하르샤 왕국의 번영에 대해 자세히 기록했다.[23] 하르샤 왕은 당나라에 사절을 보냈고, 당나라는 왕현책을 파견하여 답례하였다. 그러나 하르샤 왕 사후 왕실이 혼란에 빠지면서 북인도의 통일은 빠르게 무너졌다.

하르샤 왕국이 멸망한 후부터 이슬람 세력이 북인도를 통일할 때까지 약 550년 동안, 인도에는 여러 소왕국이 난립하는 시대가 이어졌다. 이 시기 북인도 각지에서는 라지푸트족의 소왕국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기 때문에 '라지푸트 시대'라고도 불린다. 이들 소왕국은 서로 전쟁을 반복했고, 10세기 말부터 시작된 이슬람 세력의 침입에도 단결하지 못했다.

남인도에서는 드라비다계 여러 왕국이 분립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남쪽 끝 타밀 지방에서 번성했던 촐라 제국이 특히 강력했다. 촐라 왕조의 원정군은 동남아시아의 스리비자야까지 진출했다고 한다. 한편, 인도 민중에게서 멀어졌던 불교는 벵골의 팔라 제국의 보호를 받아 일시적으로 번성했지만, 12세기 말에는 인도에서 거의 사라졌다.

13세기까지 인도 아대륙에는 20개에서 40개에 이르는 다양한 국가가 존재했으며, 이들 국가는 다양한 문화, 언어, 문자 체계,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85] 이 시기 초반에는 불교가 이 지역 전반에 걸쳐 우세했으며, 인도-갠지스 평원에 위치한 단명한 팔라 제국은 불교 기관을 후원했다. 그러한 기관 중 하나는 오늘날 비하르에 위치한 불교 날란다 마하비하라로, 분열된 남아시아를 세계 지적 무대에 올린 학문의 중심지였다. 또 다른 업적은 나중에 유럽으로 수출되어 체스가 된 ''차투랑가'' 게임의 발명이었다.[86]

남인도에서는 힌두교 왕국 촐라 왕조가 오늘날의 스리랑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를 해외 영토로 지배하는 해외 제국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이러한 지역의 역사적 문화로 힌두교의 확산을 가속화했다.[87] 이 시기에는 아프가니스탄 역사, 티베트 역사, 미얀마 역사와 같은 주변 지역이 대인도의 영향을 받았다.[88]

1206년부터 현대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에서 온 일련의 튀르크족 침략으로 북인도의 광대한 지역이 정복되었고, 16세기까지 지배력을 유지한 델리 술탄국이 건국되었다.[89] 인도 아대륙의 불교 쇠퇴로 남아시아의 불교는 많은 지역에서 사라졌지만 힌두교는 살아남아 힌두-이슬람 관계에 의해 정복된 지역에서 스스로를 강화했다. 극남부에서는 비자야나가라 제국이 이 기간 동안 어떤 무슬림 국가에게도 정복되지 않았다. 16세기 초에는 새로운 이슬람 제국인 무굴 제국의 부상과 포르투갈령 인도에 의한 유럽 무역 기지의 설립이 있었다.[89]

2. 2. 7. 동남아시아

9세기에 건설된 보로부두르는 세계에서 가장 큰 불교 사원이다.


8세기부터 동남아시아는 남아시아와 동아시아 간의 무역으로 이익을 얻었으며,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는 부의 흐름으로 인해 이 지역에 많은 왕국들이 등장했다. 동남아시아는 인도와 중국 문명을 포함한 수많은 외부의 영향을 받았지만, 현지 문화는 고유한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90]

6세기 중엽 메콩강 중류 지역에 일어난 크메르(캄보디아)인의 나라 진랍(眞臘)은 7세기에 들어서자 부남(扶南)을 멸망시켰으나, 왕가에는 상속자가 없어 계승권을 둘러싼 내분이 일어나 두 개의 진랍으로 갈라졌다. 북쪽의 ‘육진랍(陸眞臘)’은 이란 계통의 문화를 가지고 중앙 집권화되어 있었고, 남쪽의 ‘수진랍(水眞臘)’은 약체였다. 800년경 자야바르만 2세에 의해 남부의 통일운동이 일어나 크메르 제국이 건설되었다.

미얀마에서는 이라와디강 하류 델타에 몬(Mon)인, 상류와 중류 지대에 퓨(Pyu)인이 살고 있었고 7세기에는 퓨인의 국가가 번영했다. 한편 수마트라에는 스리비자야 왕국이 일어나 해상무역으로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북베트남(다이비엣)은 수 세기 동안 중국에 의해 정복되었으나, 10세기에 오대 십국 시대분열되면서 정해군과 후계 다이비엣에서 독립을 획득했다. 남베트남은 힌두교 참파 왕국에 의해 통치되었지만, 15세기에 베트남에 의해 병합되었다.[90]

바욘의 톤레사프 전투 부조 세부. 참파는 크메르 제국의 주요 라이벌이었다. 동남아시아 전투는 종종 강에서 벌어졌다.


힌두교, 불교, 중국과 남아시아 간의 해상 무역의 확산은 캄보디아의 크메르 제국과 인도네시아의 스리비자야를 포함한 동남아시아 최초의 주요 제국의 기반을 마련했다. 12세기에 크메르 제국이 절정에 달했을 때 앙코르 톰은 수자원 관리 덕분에 전근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다. 자야바르만 2세 왕은 자신의 왕국 전역에 100개 이상의 병원을 건설했다.[91] 인근에는 오늘날의 버마에 파간 제국이 등장했으며, 코끼리를 군사력으로 사용했다. 불교 쉐지곤 파고다의 건설과 고대 다신교 신자들에 대한 관용은 상좌부 불교가 이 지역에서 최고가 되도록 도왔다. 인도네시아에서 7세기부터 14세기까지 스리비자야는 해양 도시 국가와 무역에 집중한 해양 통치 국가였다. 순다 해협과 말라카 해협의 중요한 요충지를 통제하면서 일본에서 아라비아에 이르기까지 무역으로 부를 축적했다.

금, 상아, 도자기는 모두 주요 상품으로 항구 도시를 통해 이동했다. 제국은 또한 보로부두르와 같은 경이로운 건축물들을 건설했다. 이 기간 동안 인도네시아 선원들은 인도양을 건넜고, 그들이 마다가스카르를 식민지화했을 수 있다는 증거가 있다.[92] 인도 문화는 필리핀으로 퍼져나갔고, 아마도 인도네시아 무역을 통해 제도에서 최초로 기록된 문자의 사용과 인도화된 왕국이 생겨났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곳의 변화하는 경제적, 정치적 조건과 전쟁으로 인해 동남아시아의 전통적인 제국은 약화되었다. 몽골의 침략이 직접적으로 동남아시아를 합병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의 황폐화는 새로운 국가의 부상을 위한 길을 열었다. 14세기에 크메르 제국은 끊임없는 전쟁으로 뿌리뽑히면서, 진보된 수자원 관리 시스템의 기능과 기술적 지식을 잃었다. 스리비자야는 마자파히트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슬람 선교사와 상인들이 도착하여 결국 인도네시아에서 이슬람화가 이루어졌다.

2. 3. 아프리카

고전후 시대 아프리카이슬람교와 아랍 제국의 영향으로 문화와 정치에 큰 변화를 겪었다. 특히 북아프리카, 수단, 동해안 지역에서 이슬람의 영향이 두드러졌지만, 지역별로 개종 정도는 달랐고 하층 계급은 기존의 신념을 거의 바꾸지 않았다.[74]

무슬림의 이주와 정복 이전, 아프리카 대륙에는 다양한 규모와 복잡성을 가진 여러 사회가 존재했다. 이들은 왕이나 장로 회의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대부분 정령 숭배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아프리카는 문화적으로 북아프리카사하라 사막으로 구성된 사하라 아프리카와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로 나뉘었다.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는 서아프리카를 포함하여 중앙 아프리카 북쪽의 모든 지역을 포괄하는 수단 지역으로 더 세분화되었다. 수단 남쪽 지역은 주로 반투어를 사용하는 반투족이 거주했다.

1100년 이후, 기독교 유럽과 이슬람 세계는 금을 얻기 위해 아프리카에 의존했다.[75]

2. 3. 1. 북아프리카

고전후 시대 북아프리카이슬람교와 아랍 제국의 도입으로 문화적, 정치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74] 이슬람의 영향은 북부, 수단, 동해안에서 두드러졌으나, 지역마다 개종 정도는 달랐으며 하층 계급은 거의 신념을 바꾸지 않았다.[74]

무슬림 이주와 정복 이전, 북아프리카에는 다양한 규모와 복잡성을 가진 사회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왕이나 장로 회의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대부분 정령 숭배적인 종교를 믿었다.

1100년 이후 기독교 유럽과 이슬람 세계는 금을 얻기 위해 아프리카에 의존하게 되었다.[75]

2. 3. 2.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고전후 시대 동안 아프리카는 이슬람교와 아랍 제국의 도입으로 문화적, 정치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이는 특히 북부, 수단, 동해안에서 두드러졌다. 그러나 이러한 개종은 지역마다 완전하거나 균일하지 않았으며, 하층 계급은 거의 신념을 바꾸지 않았다.[74] 1100년 이후 기독교 유럽과 이슬람 세계는 금을 얻기 위해 아프리카에 의존하게 되었다.

약 650년 이후 악숨 왕국누비아의 고대 왕국을 넘어 도시화가 처음으로 확장되었다. 아프리카 문명은 종교에 따라 다음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75][76]

  • 아프리카의 뿔에 위치한 기독교 문명
  • 나이저강 유역과 스와힐리 해안에 형성된 이슬람 문명
  • 전통 사회는 전통 아프리카 종교를 따름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는 서아프리카와 북아프리카 간의 상업을 연결하는 사하라 사막 횡단 무역이라는 두 개의 크고 분리된 무역 네트워크의 일부였다. 무역으로 인한 막대한 이익으로 인해 가나 제국, 말리 제국, 송가이 제국 등 아프리카 토착 이슬람 제국이 등장했다. 14세기에 말리의 만사 무사는 당시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을 것이다.[77] 말리 내에서 팀북투시는 과학의 국제적인 중심지였으며, 특히 상코레 마드라사에서 이슬람 세계 전역에 잘 알려져 있었다. 동아프리카는 인도양 무역 네트워크의 일부였으며, 여기에는 몸바사와 같은 아랍이 통치하는 동아프리카 해안의 이슬람 도시와 금, 구리, 상아를 중동, 남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시장으로 수출한 그레이트 짐바브웨와 같은 전통 도시가 포함되었다.

제네 테라코타 기마상 (13-15세기), 말리 제국

2. 4. 아메리카

아메리카 대륙의 고전후 시대는 아프리카-유라시아와는 다른 시간대로 간주될 수 있다. 메소아메리카와 안데스 문명의 발전이 구세계의 발전과 매우 다르며, 발전 속도 또한 다르기 때문에, 전통적인 의미의 고전후 시대는 서유럽의 중세 시대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야 시작된다.

따라서 이 문서에서는 약 400년부터 1400년까지의 우드랜드 시대와 고전기가 논의된다. 유럽과의 접촉 직전에 일어난 아메리카 발전의 기술적인 고전후 시대는 후고전기를 참조할 수 있다.

북아메리카,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는 대륙으로서 통일된 무역이나 의사소통이 거의 없었다. 농업의 발전은 무역을 통해 간접적으로 메소아메리카에서 북쪽으로 확산되었으나, 주요 문화권들은 여전히 서로 독립적으로 발전했다.

카리브해의 역사

타이노 신의 나무 조각상 (제미). 도미니카 공화국, 15~16세기.


수많은 섬들로 이루어진 카리브해구석기 시대부터 카누를 이용한 끊임없는 해상 이동의 무대가 되었으며, 최초의 주민들은 기원전 5000년경에 이 지역에 도달했다.[132]

수천 년의 인구 이동 이후, 카리브해의 다양한 민족들은 고전후 시대로 진입하여 수많은 영구 정착지와 더욱 복잡한 사회 조직에서 주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었다. 이는 농업 기술의 향상과 마을의 상당한 성장으로 인한 결과였으며, 이 마을들은 다양한 카시케가 이끄는 훌륭한 의식 및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조개, 면화, 금, 색깔 있는 돌, 희귀한 깃털과 같은 상품들은 소앤틸리스 제도에서 대앤틸리스 제도에 이르기까지 섬에서 섬으로 대량으로 수출되었다.[133]

기원후 650년경과 800년경, 현재 베네수엘라의 카리브해 해안에서 새로운 이주 물결이 일어나 여러 민족들이 주요 문화적, 사회 정치적, 의례적 재구성을 시작했으며, 이는 최초의 족장 사회의 형성과 사회 계층의 출현으로 이어졌다.[134] 이 시기는 또한 카리브해의 주요 섬에서 고대 살라드족이 축출되고, 새로 도착한 타이노족이 그들을 대체하면서 특징지어진다. 타이노족은 경작지와 전쟁 포로를 얻기 위해 다른 아라와크어족 집단과 치열하게 경쟁했다. 증거는 거의 없지만, 일부 학자들은 타이노족이 마야 문명으로부터 미약한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바테이''의 관습은 종교적 성격을 띠었던 최초의 중앙아메리카 공놀이에서 유래했을 수 있다.[135]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492년 바하마에 상륙했을 때, 그와 그의 선원들은 처음에는 지역 타이노족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지만, 곧 스페인 식민지 개척자들에게 노예가 되었고, 이 지역을 근세 시대로 접어들게 했다.

2. 4. 1. 북아메리카

아메리카 대륙의 고전후 시대는 아프리카-유라시아와는 다른 시간대로 간주될 수 있다. 메소아메리카와 안데스 문명의 발전이 구세계의 발전과 매우 다르며, 발전 속도 또한 다르기 때문에, 전통적인 의미의 고전후 시대는 서유럽의 중세 시대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야 시작된다.[117][118]

따라서 이 문서에서는 약 400년부터 1400년까지의 우드랜드 시대와 고전기가 논의된다.[119]

대륙으로서 북아메리카에는 통일된 무역이나 의사소통이 거의 없었다. 농업의 발전은 무역을 통해 간접적으로 메소아메리카에서 북쪽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주요 문화권들은 여전히 서로 독립적으로 발전했다.

2. 4. 2. 중앙아메리카

테오티우아칸은 고전후 시대가 시작될 무렵 정점에 달했던 도시로, 서기 500년에는 125,000명 이상의 주민이 거주하여 당시 세계에서 6번째로 큰 도시였다.[136] 이 도시 주민들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피라미드인 태양 피라미드를 건설했으며, 이는 천문학적 현상에 맞춰 방향이 설정되었다. 6세기와 7세기에 도시는 갑작스럽게 쇠퇴했는데, 이는 아마도 535-536년의 극심한 기상 이변으로 인한 심각한 환경 피해 때문일 수 있다.[137] 도시의 상당 부분이 불에 탄 흔적은 내란의 결과일 가능성을 시사한다.[137] 이 도시의 유산은 이 지역의 모든 미래 문명에 영감을 주었다.[140]

톨텍 아틀란티데스 조각상 툴라 유적지. 톨텍 문명은 이후 아즈텍에 영감을 주었다.


마야 문명의 고전 시대는 유카탄 반도와 오늘날의 과테말라에 수십 개의 도시 국가로 흩어져 있었다.[141] 이 도시들 중 가장 중요한 곳은 치첸 이트사였으며, 60개에서 80개에 이르는 도시 국가와 이 지역의 지배적인 경제적 영향력을 놓고 경쟁했다.[142] 티칼칼라크물과 같은 다른 마야 도시들도 권력과 위세를 놓고 갈등을 벌였으며, 6세기에 티칼-칼라크물 전쟁으로 절정에 달했다.[143]

마야인들은 천문학, 수학, 글쓰기에 능통한 상위 계급의 사제들을 가지고 있었다. 영의 개념을 개발했으며, 구세계 사회보다 앞선 365일 달력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144] 900년 이후, 많은 마야 도시들이 가뭄과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한 생태적 재앙으로 갑자기 쇠퇴했다. 고전 마야 도시에는 식량 저장 시설이 부족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145]

톨텍 제국톨텍 문화에서 발생했으며, 현명하고 자비로운 지도자로 기억되었다. 세 아카틀 토필친이라는 한 사제-왕은 인신 제사에 반대했다.[146] 947년에 그가 죽은 후, 토필친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 종교적 성격의 내전이 발발했다.[146] 그러나 현대 역사가들은 톨텍의 영향력의 정도에 대해 회의적이며, 톨텍에 대해 알려진 정보의 대부분은 나중에 아즈텍이 영감을 얻기 위해 만들어낸 신화라고 믿는다.[147]

아즈텍의 피 흘리기, 사제들이 심장 제사를 행하다, ''투델라 코덱스'', 16세기.


1300년대에, 아즈텍이라고 불리는 소규모의 폭력적이고 종교적인 급진주의자들이 이 지역에서 소규모 약탈을 시작했다. 결국 그들은 톨텍 문명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이 정당한 계승자라고 주장했다.[148] 그들은 수가 증가하고 넓은 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정복의 근본적인 요소는 테러리즘을 사용하는 것이었는데, 아즈텍 지도자와 사제들은 정복 (군사)#복속된 사람들을 겸손과 강압의 수단으로 인신 제사를 명령했다. 메소아메리카 지역의 대부분은 결국 아즈텍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유카탄 반도에서 대부분의 마야인들은 아즈텍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했지만, 그들의 전통적인 문명은 쇠퇴했다. 아즈텍의 발전은 친파, 관개, 계단식 농업의 사용을 적용하여 경작을 확장시켰으며, 주요 작물로는 옥수수, 고구마, 아보카도가 있었다.

1430년에 테노치티틀란시는 다른 강력한 나와틀어를 사용하는 도시인 테스코코와 틀라코판과 동맹을 맺어 아즈텍 제국, 즉 삼국 동맹으로 알려진 제국을 만들었다. 제국이라고 불리지만, 아즈텍 제국은 테노치티틀란을 중심으로 조공을 징수하는 시스템으로 기능했다. 16세기 초에는 아즈텍과 틀락스칼라와 같은 경쟁 국가 사이에서 "꽃 전쟁"이 50년 이상 지속되었다.[149]

2. 4. 3. 남아메리카

피킬락타는 5세기에서 8세기까지 번성했던 남아메리카 안데스 문명인 와리 제국의 행정 도시 중심지였다.


남아메리카 문명은 기원전 2500년부터 이미 복잡한 문화를 보유했던 안데스 산맥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165] 안데스 지역 동쪽의 사회는 일반적으로 반(半) 유목적이었다. 아마존강 유역에서 발견된 바에 따르면 이 지역은 접촉 이전 인구가 500만 명에 달했으며 복잡한 사회를 이루었을 가능성이 있다.[150] 대륙 전역에 걸쳐 콜롬비아에서 아르헨티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농경 민족들이 서기 500년부터 유럽과의 접촉까지 여러 단계를 거쳐 꾸준히 발전했다.

전근대에는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메소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서부 등에서도 문명화가 일어나 문명화된 지역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세계사학자 피터 N. 스턴스에 따르면, 후고전기에는 세계적으로 공통된 정치적 수법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완만한 국가 등의 형성이 일어났지만, 공통적인 정치 시스템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다.[165]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메소아메리카에서 아즈텍 제국, 남아메리카에서는 안데스 문명 하에 와리 제국과 잉카 제국이 번성했다.

2. 5. 오세아니아

아프리카-유라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의 발전과는 별개로, 오세아니아 지역은 외부 세계와 독립적으로 계속 발전했다. 호주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사회는 약 기원전 50,000년경 아프리카에서 이 지역에 도착한 이후 고전 후 시대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 외부와의 접촉에 대한 유일한 증거는 인도네시아 기원의 어부들과의 만남이었다.[107]

폴리네시아인과 미크로네시아인은 대만과 동남아시아에서 기원하여 기원전 3000년에서 1500년 사이에 태평양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108] 4세기 이후, 미크로네시아인과 폴리네시아인들은 남태평양을 탐험하기 시작했으며, 이전에 사람이 살지 않던 난 마돌, 무아 등을 포함한 지역에 도시를 건설했다.[109] 약 서기 1200년경, 통가 투이 제국은 남태평양 섬 전역에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확대하여, 학자들은 무역 네트워크를 사용하여 왕의 수도를 중심으로 권력을 집중시킨 해양 족장으로 묘사했다.[110] 아웃리거 카누를 탄 폴리네시아인들은 발견하여 지구상의 마지막 무인도를 식민지화했다.[108] 하와이, 뉴질랜드, 이스터 섬은 마지막으로 도달한 곳 중 하나였으며, 정착민들은 깨끗한 땅을 발견했다. 구전 전통에 따르면 항해가 Ui-te-Rangiora가 남극해에서 빙산을 발견했다고 한다.[111] 폴리네시아 정착민들은 탐험하고 정착하면서 무작위로 행동하지 않고 바람과 물의 흐름에 대한 지식을 사용하여 목적지에 도달했다.

할레 오 케아웨, 미국 하와이 주에 복원된 헤이아우로, 신성한 사원과 제물 제단으로 사용되었다. 조각상은 전통 신을 나타낸다.


정착된 섬에서 일부 폴리네시아 집단은 서로 구별되었으며, 중요한 예로는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이 있다. 다른 섬 시스템은 서로 접촉을 유지했으며, 하와이와 타히티를 포함하여 현무암, 진주 조개 등의 물품이 장거리 무역에 포함되었다.[110] 생태학적으로, 폴리네시아인들은 제한된 환경 내에서 스스로를 유지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일부 정착지는 모아와 같은 종을 사냥하고 폴리네시아 쥐를 도입하여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부 토착 식물과 동물 종의 대량 멸종을 초래했다.[108] 이스터 섬 정착민들은 서식지를 완전히 생태적으로 파괴했으며, 아마도 이스터 섬 조각상 건설로 인해 인구가 급감했을 것이다.[112][113][114][115] 다른 식민지화 집단은 채텀 제도의 모리오리족과 같이 특정 섬의 생태에 적응했다.

3. 세계사적 경향

고전후 시대는 세계사적 관점에서 볼 때, 특히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에 발전된 개념이다.[4] 이 용어는 "중세", "암흑 시대" (중세주의 참조)와 같은 용어에 대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고전후"라는 용어를 적용하는 것은 유럽 중심주의적일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166] 학술 출판물에서는 250년부터 800년까지 서부 유라시아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고전후"와 "후기 고대"라는 용어를 동의어로 사용하기도 한다.[5][6]

고전후 시대는 대략 서기 500년부터 1450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7][4] 시작 및 종료 날짜는 지역에 따라 다를 수 있으며, 이전 고전 시대의 끝에서 시작한다. 한나라 (서기 220년 종료), 서로마 제국 (서기 476년), 굽타 제국 (서기 543년), 그리고 사산 제국 (서기 651년)이 고전 시대의 종말로 여겨진다.[8]

세계사학자들은 역사를 5~6개의 주요 시대로 구분하는데, 고전후 시대는 그중 하나이다.[4]

# 초기 문명

# 고전 사회

# 고전후 시대

# 근세

# 긴 19세기

# 현대 또는 근대 시대[4] (때로는 19세기와 현대가 합쳐지기도 한다.[4])

"고전후"는 서유럽의 중세 시대와 동의어이지만, "고전후"라는 용어는 서유럽 역사를 "고전", "중세", "근대"로 나누는 전통적인 3분 시대 구분에 반드시 속하는 것은 아니다.

고전후 시대에는 문명이 새로운 지리적 영역으로 확장되고 성장했으며, 3대 세계 또는 선교 종교가 부상 및/또는 확산되고, 무역과 무역 네트워크가 급격히 확장되는 시기였다. 학문적 초점은 유라시아에 머물러 있지만, 이러한 세계적 추세가 다른 지역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려는 노력이 증가하고 있다. 지리적 구역을 설명하면서, 역사학자들은 아프로-유라시아, 아메리카, 오세아니아의 세 개의 자급자족적인 대륙 지역을 식별했다.

3. 1. 문명의 확장과 성장



아프리카-유라시아 전역에서 통신과 무역이 크게 증가하였다. 실크로드는 무역을 통해 문화와 사상을 지속적으로 확산시켰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전역에서 통신이 확산되었다. 서유럽, 비잔티움, 초기 러시아, 이슬람 제국, 그리고 극동 문명 사이에 무역 네트워크가 구축되었다.[23] 아프리카에서는 낙타가 일찍 도입되면서 새롭고 결국에는 대규모의 사하라 사막 횡단 무역이 가능해졌고, 이로 인해 사하라 사막 이남 서아프리카가 유라시아와 연결되었다. 이슬람 제국은 많은 그리스, 로마, 인도의 발전을 받아들여 이슬람 영향권 전체로 퍼뜨렸고, 이러한 발전이 유럽, 북아프리카, 서아프리카, 중앙아시아에 도달하도록 했다. 이슬람 해상 무역은 인도양지중해를 포함한 이 지역들을 연결하는 데 기여했으며, 후자 지역에서 비잔티움을 대체했다. 중동으로의 기독교 십자군 원정(뿐만 아니라 무슬림 스페인시칠리아)은 이슬람 과학, 기술, 상품을 서유럽으로 가져왔다. 동아시아로의 서방 무역은 마르코 폴로에 의해 개척되었다. 중요한 점은 중국이 무역과 정복을 통해 일본, 한국, 베트남과 같은 지역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앙 아시아에서 몽골 제국의 성장은 안전한 무역을 확립하여 상품, 문화, 사상, 질병이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사이에서 확산될 수 있도록 했다.

아메리카 대륙에는 자체적인 무역 네트워크가 있었지만, 여기서는 무역이 범위와 규모 면에서 제한적이었다. 마야 네트워크는 중앙 아메리카 전역으로 확산되었지만,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의 복잡한 사회와 직접적인 연결이 부족했고, 이 지역들은 서로 분리된 채로 남아 있었다.

오세아니아에서는 폴리네시아의 일부 섬들이 서로 무역을 했다.[24] 예를 들어, 아웃리거 카누를 이용해 하와이와 타히티 사이 2,300마일이 넘는 장거리 통신이 중단되기 전 수세기 동안 유지되었다. 한편, 멜라네시아에서는 본토 파푸아뉴기니와 그 해안에 있는 트로브리안드 제도 사이의 교류 증거가 있는데, 이는 대부분 흑요석을 위한 것이었다. 인구는 1200년까지 서쪽으로 이동했고, 그 이후 네트워크는 훨씬 더 작은 경제로 해체되었다.

3. 2. 보편 종교의 확산

الإسلام|이슬람ar교는 7세기 전반 무함마드알라의 계시를 받아 시작되었으며, 사람들에게 알라에 대한 절대적 귀의(歸依)를 가르쳤다.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메디나로 피신하였다가 아라비아 부족들을 통합하여 이슬람 세계 건설의 기초를 닦았다. 무함마드 사후, 역대 칼리프는 이슬람 세계의 확립과 발전에 노력하여, 1세기 동안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인도,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이베리아 반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169]

굽타 왕조 멸망 후 분열되었던 북인도는 7세기 초 하르샤 바르다나 왕에 의해 통일되었으나, 왕실 문란으로 곧 분열되었다. 이후 약 5세기 반 동안 소왕국 난립 시대가 계속되었으며, 남인도에서는 촐라 왕조가 부강했다. 이 왕조의 원정군은 동남아시아의 스리비자야까지 진출하였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인도 문화의 수용(受容)이 진행되었고, 캄보디아를 중심으로 진랍이 대두되었으나, 얼마 후에 분열했다. 또한 수마트라에서도 스리비자야 왕국이 일어나 해상 무역으로 강대해졌다.

3. 3. 교역과 소통의 증진



중국-송 시대의 태피스트리
중국-송 시대의 태피스트리, 중국 비단은 먼 거리를 거쳐 서쪽으로 운반되었다


고전후 시대에는 아프리카-유라시아 전역에서 통신과 무역이 크게 증가했다. 실크로드는 무역을 통해 문화와 사상을 지속적으로 확산시켰으며,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전역에서 통신이 확산되었다. 서유럽, 비잔티움, 초기 러시아, 이슬람 제국, 그리고 극동 문명 사이에 무역 네트워크가 구축되었다.[23] 아프리카에서는 낙타가 일찍 도입되면서 새롭고 결국에는 대규모의 사하라 사막 횡단 무역이 가능해졌고, 이로 인해 사하라 사막 이남 서아프리카가 유라시아와 연결되었다. 이슬람 제국은 많은 그리스, 로마, 인도의 발전을 받아들여 이슬람 영향권 전체로 퍼뜨렸고, 이러한 발전이 유럽, 북아프리카, 서아프리카, 중앙아시아에 도달하도록 했다. 이슬람 해상 무역은 인도양지중해를 포함한 이 지역들을 연결하는 데 기여했으며, 후자 지역에서 비잔티움을 대체했다. 중동으로의 기독교 십자군 원정(뿐만 아니라 무슬림 스페인과 시칠리아)은 이슬람 과학, 기술, 상품을 서유럽으로 가져왔다. 동아시아로의 서방 무역은 마르코 폴로에 의해 개척되었다. 중요하게는 중국이 무역과 정복을 통해 일본, 한국, 베트남과 같은 지역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중앙 아시아에서 몽골 제국의 성장은 안전한 무역을 확립하여 상품, 문화, 사상, 질병이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사이에서 확산될 수 있도록 했다.

실크로드는 세계적인 소통과 상호 작용에 큰 역할을 한 유라시아의 무역로였다. 실크로드는 문화 교류를 자극했고, 새로운 언어 학습을 장려했으며, 비단, 금, 향신료 등 많은 상품의 무역을 낳았으며, 종교와 질병을 퍼뜨리기도 했다. 이 주요 무역로는 중국의 한나라에서 시작되어 로마 제국과 그 사이 또는 근처의 모든 지역을 연결했다. 이때 중앙 아시아는 말, 양모, 을 중국으로 수출했고, 중국은 그 대가로 비단을 수출했다. 로마인들은 중국 상품을 거래하여 그 대가로 와인을 제공했다.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도 취약했다. 이슬람의 부상은 실크로드를 변화시켰는데, 이슬람 통치자들은 일반적으로 실크로드를 기독교 유럽에 폐쇄하여 유럽이 수세기 동안 아시아와 단절되었다. 구체적으로 실크로드에 영향을 미친 정치적 발전으로는 투르크족의 등장, 비잔틴 제국과 사산 제국의 정치적 움직임, 아랍인의 부상 등이 있다.[51]

실크로드는 13세기 몽골 제국 치하에서 다시 번성했는데, 몽골 제국은 정복을 통해 팍스 로마나에 필적하는 중앙 아시아의 안정을 가져왔다. 한 이슬람 역사가에 따르면 중앙 아시아는 평화롭고 안전하게 횡단할 수 있었다고 한다.

> "(중앙 아시아는)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 머리에 금쟁반을 이고 가도 아무에게도 폭력을 당하지 않을 정도로 평화를 누렸다."

이처럼 유럽, 동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 간의 무역과 소통은 거의 노력 없이 이루어졌다. 이븐 바투타, 라반 바르 사우마, 마르코 폴로와 같은 저명한 여행가들은 북아프리카와 유라시아를 자유롭게 여행했고, 그들의 경험을 기록한 사람들은 미래의 모험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실크로드는 아프로-유라시아 전역에 종교를 전파하는 데에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에서 온 이슬람 가르침이 동아시아에 전해졌다. 불교는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중앙 아시아로 퍼져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세기 이후 실크로드는 정기적인 사용에서 사라졌다. 이는 주로 유럽인들이 개척한 해상 여행의 증가로 인해,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서 인도양으로 항해하여 상품을 거래할 수 있게 된 결과였다.

아메리카 대륙에는 자체적인 무역 네트워크가 있었지만, 여기서는 무역이 범위와 규모 면에서 제한적이었다. 마야 네트워크는 중앙 아메리카 전역으로 확산되었지만,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의 복잡한 사회와 직접적인 연결이 부족했고, 이 지역들은 서로 분리된 채로 남아 있었다.

오세아니아에서는 폴리네시아의 일부 섬들이 서로 무역을 했다.[24] 예를 들어, 아웃리거 카누를 이용해 하와이와 타히티 사이 2,300마일이 넘는 장거리 통신이 중단되기 전 수세기 동안 유지되었다. 한편, 멜라네시아에서는 본토 파푸아뉴기니와 그 해안에 있는 트로브리안드 제도 사이의 교류 증거가 있는데, 이는 대부분 흑요석을 위한 것이었다. 인구는 1200년까지 서쪽으로 이동했고, 그 이후 네트워크는 훨씬 더 작은 경제로 해체되었다.

3. 4. 기후 변화와 그 영향

이 시대에는 세계 여러 지역이 지구 규모의 기후 변동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기온이나 강수량의 직접적인 영향은 지역마다 달랐다.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에 따르면, 이 시기의 기후 변동은 동시에 일어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11세기경에는 기온이 비교적 높았고, 17세기경에는 비교적 기온이 낮아졌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기후 변동의 규모나 그러한 기후 변동이 전 지구적인 경향이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171]

전 근대의 장기간에 걸친 기후 변화 경향은 Late Antique Little Ice Age|고대 말기 소빙기영어, 중세 온난기, 소빙기로 설명할 수 있다. Extreme weather events of 535–536|535년부터 536년에 걸친 이상 기상영어인도네시아의 크라카타우 분화 또는 엘살바도르의 이로팡고 호 칼데라 분화로 인해 발생했다고 여겨진다. 당시에는 기온이 비교적 낮았지만, 황 가스 배출로 인해 세계적으로 기온이 더욱 하강하여 이주나 작물 흉작이 빈번했다.[172] 기록에 따르면 그 후 적어도 1세기 동안 세계적으로 평균 기온이 낮았다.

950년경부터 1250년경까지 북반구에서 일어난 중세 온난기에는 많은 지역에서 여름 기온이 비교적 높았다. 이 시기에 기온이 높아진 것이 노르만인그린란드에 정착할 수 있었던 한 요인으로 추정된다.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도 북미의 많은 문화에 악영향을 준 가뭄이나 중국의 기온 상승 등 온난화의 증거가 남아 있다.[173]

1250년 이후, 그린란드에서는 빙하가 확대되고, 열염 순환에 영향을 주어 북대서양이 한랭화되었다. 14세기에는 유럽에서 사용되던 경작기가 사용 불가능해졌고, 중국에서는 감귤류 재배의 북쪽 한계선이 남하했다. 특히 유럽에서는 소빙기가 문화적으로도 큰 영향을 주었다.[174] 이 소빙기는 근세산업 혁명까지 계속 이어진다.[175] 소빙기의 요인 자체는 불명확하며, 원인 가설로 태양의 흑점, 지구의 공전, 화산 활동, 해양 순환, 인구 감소 등이 제시되고 있다.[176]

3. 5. 몽골 제국



13세기와 14세기에 존재했던 몽골 제국은 역사상 가장 넓은 연속된 육상 제국이었다.[40] 중앙 아시아의 초원에서 시작된 몽골 제국은 결국 중앙 유럽에서 동해까지 뻗어 나갔으며, 북쪽으로는 시베리아, 동쪽과 남쪽으로는 인도 아대륙, 인도차이나, 이란 고원, 서쪽으로는 레반트와 아라비아까지 확장되었다.

몽골 제국은 1206년 모든 몽골의 지배자로 선포된 칭기즈 칸의 지도 아래 몽골 고토에서 유목 부족들의 통일로 등장했다. 제국은 그의 통치하에서, 그리고 그의 후손들에 의해 급격하게 성장하여 모든 방향으로 침략을 보냈다.[41][42][43][44][45][46] 광대한 대륙 횡단 제국은 강제적인 ''몽골 평화''로 동양서양을 연결하여 유라시아 전역에서 무역, 기술, 상품 및 이념이 전파되고 교환될 수 있도록 했다.[47]

제국은 칭기즈 칸의 손자들 사이에서 계승 전쟁으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칭기즈 칸의 왕위 계승이 그의 아들인 초기 상속자 오고타이를 따라야 하는지, 아니면 툴루이, 차가타이, 또는 조치와 같은 다른 아들 중 한 명을 따라야 하는지를 두고 다툼이 벌어졌다. 몽케 칸이 사망한 후, 경쟁적인 ''쿠릴타이'' 의회는 동시에 서로 다른 후계자, 즉 형제 아릭 부케와 쿠빌라이 칸을 선출했고, 그들은 툴루이 내전에서 서로 싸웠을 뿐만 아니라 칭기즈 칸의 다른 아들들의 후손들로부터 도전도 받았다.[48] 쿠빌라이는 권력을 성공적으로 잡았지만, 쿠빌라이가 차가타이와 오고타이 가문의 통제권을 되찾으려 했으나 실패하면서 내전이 벌어졌다.[49]

1260년의 아인잘루트 전투는 몽골 정복의 절정기를 보여주었으며, 몽골의 진격이 직접적인 전투에서 격퇴된 최초의 사례였다.[49] 몽골은 레반트에 여러 차례 더 침략을 시작하여, 1299년 와디 알-하자나르 전투에서의 결정적인 승리 이후 잠시 점령하고 가자까지 습격했지만, 다양한 지정학적 요인으로 인해 철수했다.

쿠빌라이가 1294년에 사망할 무렵, 몽골 제국은 네 개의 별도 칸국 또는 제국으로 분열되었다. 각각은 자체적인 개별적 관심사와 목표를 추구했다. 즉, 북서부의 금장 한국, 서부의 차가타이 한국, 남서부의 일 칸국, 그리고 현대 베이징을 기반으로 한 원나라였다. 1304년, 세 개의 서부 칸국은 잠시 원나라의 명목상의 종주권을 받아들였지만,[50] 이후 한족 명나라에 의해 1368년에 전복되었다. 칭기즈 칸의 후손 통치자들은 몽골 고토로 돌아가 북원에서 통치를 계속했다. 모든 원래의 몽골 칸국은 1500년까지 붕괴되었지만, 더 작은 후계 국가들은 1700년대까지 독립을 유지했다. 차가타이 칸의 후손들은 근세 초에 인도의 대부분을 통치한 무굴 제국을 세웠다.

3. 6. 봉건제

세계사의 맥락에서 '봉건제'라는 용어는 중앙 권력이 무너지고 무사 귀족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모든 농업 사회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 봉건 사회는 국가가 지원하는 전문 상비군이 있는 관료제보다는 군사 엘리트와의 개인적인 관계에 의존하는 것이 특징이다.[35] 따라서 봉건제라는 명칭은 중세 유럽, 이슬람의 이끄타 시스템, 인도 봉건제, 헤이안 시대 일본을 포함한 유라시아의 많은 지역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35] 일부 세계사학자들은 권력이 분산되어 가신과 영주 사이에 일련의 의무가 있는 사회를 봉건 사회라고 부를 수 있다고 일반화한다.

8세기 이후 봉건제는 유럽 전역에서 더욱 일반화되었다. 로마 제국의 정부를 계승한 비잔티움조차 위기 시 군사 서비스에 사용할 수 있는 군인과 선박의 수를 늘리기 위해 군사적 의무를 테마로 이양하기로 결정했다.[35] 유럽 봉건제와 이슬람의 이끄타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었는데, 둘 다 군주나 술탄이 수여한 칭호를 가진 기마 전사 계급이 있었다.[35] 이러한 유사성 때문에 사회 구조가 종교적 격변 속에서도 보존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예를 들어, 이슬람 델리 술탄국이 인도의 대규모 지역을 정복한 후 더 높은 세금을 부과했지만 다른 면에서는 현지 봉건 구조를 그대로 유지했다.[35]

마흐무드 가즈니가 인도의 코끼리를 조공으로 받는 모습. 이슬람 정복자들은 종종 기존의 봉건 제도를 유지했는데, 종교적 차이에 관계없이 현지 귀족들은 지즈야를 지불하는 한 그들의 지위를 유지했다.


이 시대에 유라시아 대부분이 봉건제 및 유사한 시스템을 채택했지만, 중국은 특히 1000년 이후 고전 후기 시대의 상당 기간 동안 중앙 집권적 관료제를 사용했다.[36] 중국을 다른 지역과 구별하는 주요 요인은 지역 지도자들이 현재 위치에 따라 스스로를 식별하기를 꺼렸다는 점이다. 대신, 그들은 일반적으로 분열의 시대에 국가를 통일하려는 야망을 드러냈다.[36]

광범위한 일반화를 넘어, "봉건제"라는 용어의 유용성은 현대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봉건제의 일상적인 기능이 세계 지역에 따라 크게 다른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35] 봉건 유럽과 고전 후기 일본 사이의 비교는 특히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20세기 내내 역사가들은 중세 유럽과 고전 후기 일본을 자주 비교했다.[37] 최근에는 대략 1400년까지 일본이 분산된 군사력과 보다 중앙 집권적인 형태의 제국 (정부) 및 수도원 (종교) 권력을 균형 있게 유지했다고 주장되었다. 센고쿠 시대에 이르러서야 사적 군사 지도자들이 지배하는 완전히 분산된 권력이 등장했다.[38] 또 다른 역사가들은 봉건제라는 용어가 중세 유럽 내부 또는 외부의 사회를 유용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며, 이 용어를 완전히 거부한다.[39]

4. 연표

시대지역주요 사건
400년 ~ 476년유럽고대 말기
400년 ~ 500년동유럽훈족, 사르마티아인
400년 ~ 585년중국육조 시대
400년 ~ 622년중동사산 제국
400년 ~ 632년중앙아시아스키타이족, 에프탈
400년 ~ 650년북아메리카Classic
400년 ~ 700년북유럽게르만족 철기 시대
400년 ~ 710년일본야마토 시대, 고훈 시대, 아스카 시대
400년 ~ 711년이베리아 반도서고트 왕국
400년 ~ 935년한국신라, 삼국 시대, 남북국 시대
400년 ~ 1200년인도인도 중왕국
400년 ~ 1500년중앙아메리카메소아메리카, Classic, Early Postclassic, Late Postclassic
400년 ~ 1500년남아메리카Classic
475년 ~ 751년중부유럽프랑크 왕국
476년 ~ 700년유럽게르만족의 대이동
476년 ~ 1000년유럽중세 초기
500년 ~ 700년동유럽게르만족의 대이동
500년 ~ 927년브리튼 제도앵글로색슨 잉글랜드, 앵글로색슨 칠왕국
568년 ~ 774년아펜니노 반도롬바르드 왕국
568년 ~ 850년발칸 반도비잔티움 제국
585년 ~ 618년중국수나라
618년 ~ 907년중국당나라
622년 ~ 750년중동이슬람의 초기 정복 전쟁
632년 ~ 800년중앙아시아이슬람의 초기 정복 전쟁
650년 ~ 1000년북아메리카Woodland period
650년 ~ 1500년북아메리카Precolombian
700년 ~ 864년동유럽루스 카간국
700년 ~ 950년유럽봉건제, 장원
700년 ~ 1100년북유럽바이킹 시대, 노르드인
710년 ~ 794년일본나라 시대
711년 ~ 756년이베리아 반도이슬람의 초기 정복 전쟁
711년 ~ 1500년이베리아 반도알안달루스
751년 ~ 843년중부유럽카롤링거 제국
756년 ~ 1031년이베리아 반도후우마이야 왕조
774년 ~ 962년아펜니노 반도카롤링거 제국
794년 ~ 1185년일본헤이안 시대
800년 ~ 1000년중앙아시아사만 제국
843년 ~ 987년중부유럽동프랑크
850년 ~ 950년발칸 반도불가리아 제1제국
864년 ~ 1237년동유럽키예프 루스
907년 ~ 960년중국오대십국시대
918년 ~ 1392년한국고려
927년 ~ 1500년브리튼 제도잉글랜드 왕국
950년 ~ 1100년유럽도시화
950년 ~ 1185년발칸 반도비잔티움 제국
960년 ~ 1275년중국송나라
962년 ~ 1500년아펜니노 반도이탈리아 왕국
987년 ~ 1500년중부유럽신성 로마 제국
1000년 ~ 1200년중앙아시아화레즘 샤 왕조
1000년 ~ 1300년유럽중세 성기
1000년 ~ 1500년북아메리카미시시피 문화
1031년 ~ 1500년이베리아 반도레콩키스타
1050년 ~ 1171년중동파티마 왕조
1100년 ~ 1240년유럽십자군
1100년 ~ 1400년북유럽Christianization, 북방 십자군
1171년 ~ 1250년중동아이유브 술탄국
1185년 ~ 1333년일본가마쿠라 막부
1185년 ~ 1389년발칸 반도불가리아 제2제국
1200년 ~ 1250년중앙아시아몽골 제국
1200년 ~ 1500년인도델리 술탄조
1237년 ~ 1240년동유럽몽골
1240년 ~ 1250년유럽몽골
1240년 ~ 1283년동유럽사라이
1250년 ~ 1400년유럽중세 후기의 위기
1250년 ~ 1500년중앙아시아차가타이 칸국, 킵차크 칸국
1250년 ~ 1500년중동맘루크
1275년 ~ 1368년중국원나라
1283년 ~ 1400년동유럽리투아니아 대공국
1300년 ~ 1450년유럽중세 말기
1333년 ~ 1336년일본겐무 신정
1336년 ~ 1500년일본무로마치 막부
1368년 ~ 1500년중국명나라
1389년 ~ 1500년발칸 반도오스만 제국
1392년 ~ 1500년한국조선
1400년 ~ 1500년동유럽모스크바 대공국
1400년 ~ 1500년북유럽칼마르 동맹



:::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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