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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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역사는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기를 거치며 발전해 왔다. 선사 시대에는 마들렌 문화가 발달했고, 신석기 시대에는 농경 문화가 다뉴브 강 유역을 중심으로 퍼졌다. 청동기 시대를 거쳐 켈트족이 프랑스 대부분을 차지하며 전성기를 맞았고, 로마 시대에는 갈리아 지역이 로마에 정복되어 로마화되었다. 중세 시대에는 프랑크 왕국이 건국되었고, 카롤링거 왕조 시대를 거쳐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었다. 이후 카페 왕조가 프랑스를 통치하며 왕권을 강화했고,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다. 백년 전쟁, 이탈리아 전쟁을 겪으며 프랑스는 근대 시대로 접어들었고, 절대 왕정 시대를 거치며 루이 14세는 중앙 집권 국가를 건설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를 거치며 프랑스는 공화정과 제정을 오갔고, 19세기에는 왕정 복고, 7월 혁명, 제2공화국, 제2제정을 겪었다. 제3공화국 시기에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의 점령을 겪었다. 현대 프랑스는 제4공화국을 거쳐 제5공화국을 수립했고, 유럽 연합의 발전에 기여하며 국제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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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역사 | |
|---|---|
| 개요 | |
| 고대 | |
| 선사 시대 | 프랑스의 선사 시대 |
| 그리스 식민지 | 기원전 600년 – 기원전 49년 |
| 켈트 갈리아 | 기원전 50년까지 |
| 로마 갈리아 | 기원전 50년 – 서기 486년 |
| 중세 | |
| 메로빙거 왕조 | 481년–751년 |
| 카롤링거 왕조 | 751년–987년 |
| 서프랑크 왕국 | 843년–987년 |
| 프랑스 왕국 | 987년–1792년 |
| 카페 왕조 | 987년–1328년 |
| 발루아 왕조 | 1328년–1498년 |
| 초기 근대 | |
| 발루아-오를레앙 왕조 | 1498년–1515년 |
| 발루아-앙굴렘 왕조 | 1515년–1589년 |
| 부르봉 왕조 | 1589년–1792년 |
| 19세기 | |
| 프랑스 혁명 | 1789년–1799년 |
| 프랑스 왕국 | 1791년–1792년 |
| 프랑스 제1공화국 | 1792년–1804년 |
| 프랑스 제1제국 | 1804년–1814년 |
| 왕정 복고 | 1814년–1830년 |
| 7월 왕정 | 1830년–1848년 |
| 프랑스 제2공화국 | 1848년–1852년 |
| 프랑스 제2제국 | 1852년–1870년 |
| 프랑스 제3공화국 | 1870년–1940년 |
| 벨 에포크 | 1871년–1914년 |
| 20세기 | |
| 프랑스 제3공화국 | 1870년–1940년 |
| 전간기 | 1919년–1939년 |
| 레자네 폴 | 1920년–1929년 |
| 자유 프랑스/비시 프랑스 | 1940년–1944년 |
| 프랑스 공화국 임시 정부 | 1944년–1946년 |
| 프랑스 제4공화국 | 1946년–1958년 |
| 프랑스 제5공화국 | 1958년–현재 |
| 주제 | |
| 외교 | 프랑스 외교 관계사 |
| 경제 | 프랑스 경제사 |
| 의료 | 프랑스 의료사 |
| 법 | 프랑스 법제사 |
| LGBTQ | 프랑스의 LGBTQ 역사 |
| 의학 | 프랑스 의학사 |
| 군사 | 프랑스 군사사 |
| 군주 | 프랑스 군주 목록 |
| 왕비 | 프랑스 왕비 목록 |
| 정치 | 프랑스 정치사 |
| 종교 | 프랑스 종교사 |
| 기독교 | 프랑스 기독교사 |
| 이슬람 | 프랑스 이슬람사 |
| 유대교 | 프랑스 유대교사 |
| 세금 | 프랑스 세금 역사 |
| 영토 | 프랑스의 영토 변화 |
2. 선사 시대

쉴락과 레지냥-라-세브에서 발견된 석기들은 프랑스에 최소 160만 년 전부터 인류의 조상이 존재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1] 네안데르탈인은 기원전 400,000년경부터 유럽에 존재했지만,[2] 약 40,000년 전에 멸종했는데, 아마도 추운 날씨 동안 현생 인류와의 경쟁에서 밀려났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초기의 현생 인류는 기원전 43,000년경 상부 구석기 시대에 유럽에 진입했다.[3]
구리 시대와 초기 청동기 시대에 프랑스 영토는 종형배 문화가 지배적이었으며, 그 뒤를 아모리칸 툼룰루스 문화, 론 문화, 툼룰루스 문화, 골호 문화 및 대서양 청동기 시대 문화 등이 따랐다. 철기 시대에는 할슈타트 문화가 발전했고, 그 뒤를 라텐 문화가 따랐다. 프랑스 역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철기 시대에 나타난다.
한편 기원전 10세기 이래 켈트인이 거주한 서구 지역을 로마인들은 갈리아라 불렀는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에 의하면 기원전 1세기 무렵의 갈리아는 인적 결합체로서의 전사단인 몇 십 개의 키비타스(civitas)라고 하는 정치상의 단위로 나뉘어 있었다. 부족 내부에는 기사 및 성직자 등의 지배층과 무장 능력을 지닌 일반 자유민 외에 노예가 있었으며, 목축과 원시적인 쟁기를 사용하는 농경이 이루어졌다.
2. 1. 구석기 시대
구석기 시대에는 기원전 2만 년경 크로마뇽인이 거주했다. 1940년 9월 현지에 사는 아이들이 라스코 동굴을 우연히 발견했는데, 이 동굴 벽화는 크로마뇽인의 유적으로 유명하다. 크로마뇽인은 하플로그룹 I2a (Y염색체)에 속했다.[148] 이 시대에는 셸 아슐 문화나 무스티에 문화와 같은 흔적도 발굴되었으며, 특히 구석기 후기의 유물과 유적은 프랑스 남서부 도르도뉴주의 베제르 강 유역에 집중되어 있다. 서남 프랑스에 발달한 마들렌 문화의 동굴 벽화에는 동물들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 이 지역 주민들이 수렵과 어로 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다.2. 2. 신석기 시대

프랑스 서남부에는 마들렌 문화가 발달하였는데, 동굴 벽화 속 동물 그림이 매우 사실적인 것으로 보아 이 지역 주민들이 수렵과 어로 등 경제 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한랭기를 거쳐 신석기 시대가 되자 농경문화가 다뉴브강 유역을 중심으로 널리 퍼졌다. 이 유적은 오리엔트 농경문화를 단순히 모방한 것이 아니라 독특한 특색을 지닌 신석기 문화에서 생겨난 것이다. 토기의 형태와 문양이 다양하고 다른 지역과 문화 교류가 이루어진 흔적도 보인다. 특히 스위스와 그 주변의 호상주거(湖上住居), 스칸디나비아로부터 영국 및 스페인을 비롯한 대서양 연안 지방과 프랑스 각지에서는 고인돌, 선돌, 화석(cromlech), 스톤헨지 등 세련된 거석 기념물이 만들어졌다.
신석기 시대에는 농경과 함께 브르타뉴 등에서 거석 기념물 건조가 기원전 2000년경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카르나크 열석은 그 규모가 웅장하기로 유명하다. 농경과 거석 문화를 가져온 것은 하플로그룹 G2a (Y염색체)로 추정된다.[149][150] 이 시대에는 이베리아인계나 리구리아인계 민족도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2. 3. 청동기 및 철기 시대
프랑스에는 신석기 시대 농경문화가 다뉴브강 유역을 중심으로 널리 퍼졌는데, 이는 오리엔트 농경문화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독특한 특색을 지닌 신석기 문화에서 생겨난 것이다. 토기의 형태와 문양이 다양하고 다른 지역과의 문화 교류 흔적이 보인다. 특히 스위스와 그 주변의 호상주거(湖上住居), 스칸디나비아로부터 영국 및 스페인을 위시한 대서양 연안 지방과 함께 프랑스 각지에서는 고인돌, 선돌, 화석(cromlech), 스톤헨지 등 세련된 거석 기념물이 만들어졌다.청동기 시대에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부족들이 다뉴브강 주변이나 알프스 방면에서 프랑스에 침입하였으며 기원전 9세기 무렵부터 특히 켈트인의 내왕이 활발하였다. 기원전 5세기~기원전 3세기에 켈트인은 발달된 철기 문화를 기반으로 프랑스 전 지역 대부분을 차지함으로써 전성기를 맞았다.
청동기 시대가 되면서, 종형 비커 문화 등이 일어났고, 기원전 900년경에는 켈트족이 도달했다고 여겨진다[151]. 그들은 현재 프랑스인의 다수를 차지하는 하플로그룹 R1b (Y염색체)에 속했다.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이행하면서, 킴메르인에 의해 가져온 철 야금술로 인해 할슈타트 문화가 번성했고, 또한 켈트족은 프랑스 이외에도 소아시아에서 북부 이탈리아, 영국과 아일랜드 등에 분포하여 라텐 문화라고 불리는 문화도 융성했다.
3. 고대

기원전 600년경, 고대 그리스인들에 의해 서지중해에 식민 도시 마살리아와 니카이아가 건설되어 그리스 문화가 전파되었다.[4][5] 아나톨리아 반도·발칸 반도에서 프랑스, 영국에 이르는 지역의 원주민을 고대 그리스인들은 켈토이, 갈라타이라고 불렀고, 고대 로마인들은 갈리(갈리아인)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땅은 갈리아(갈리인의 땅)라고 불렸다. 그들은 현대에는 켈트인이라고도 불린다.[6]
갈리아인들은 많은 부족으로 나뉘어 살았고 통일 국가를 만들지 않았다. 각 부족은 전사를 겸한 귀족들이 집회를 통해 행정관을 선출하고 농민을 지배했다.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51년까지 로마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을 감행했고, 그 기록을 「갈리아 전기」라는 저서에 남겼다.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가장 고전했던 상대는 아르베르니족의 베르킨게토릭스가 이끄는 갈리아 여러 부족의 연합군이었다.[7] 하지만 베르킨게토릭스도 기원전 52년 로마군에 알레시아에서 포위되어 항복했다.[8]
로마의 갈리아 원정 이후, 몇몇 로마풍 도시가 세워지고 로마화가 진행되었다.[7] 기원전 1세기 말,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알프스 이남의 갈리아가 "이탈리아"에 편입되었고, 곧 거의 현재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지역이 갈리아에 대응하게 되었다. 알프스 이북의 갈리아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아키타니아,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갈리아 벨기카, 라인 군정 지구의 5개 지방으로 나뉘어, 각 지역의 실정을 감안한 행정 조직을 수립했다.[9]
갈리아인들은 로마 지배에 대한 저항은 산발적이었고, 갈리아 귀족층은 오히려 로마 문화를 적극 수용하고 로마에 동조하는 경향이 강했다. 로마 식민 도시 건설과 군사 목적의 도로망 정비로 로마화된 갈리아에서는 갈로-로마 문화가 번성했다. 특히 아를과 님과 같은 지역에는 로마의 원형 극장과 수도교 등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1세기 중반, 갈리아 도시 리옹 출신의 클라우디우스가 로마 황제가 되었다. 그는 갈리아 귀족층의 로마 원로원 진입에 반발하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로마가 이민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발전했다는 것을 주장했고, 정복 이래 갈리아 귀족층의 로마에 대한 충성을 칭송했다. 속주민에 대한 로마 시민권 수여도 이 무렵부터 확대되었다. 로마군에 참가한 갈리아인 병사들은 퇴역 후 로마 시민권을 얻어 귀향하여, 종군 중 급여 등으로 토지를 취득하여 로마에 충실한 상층 시민을 형성해 갔다. 갈리아 여러 속주의 하부 단위는 키비타스라고 불렸지만, 로마는 질서 유지와 징세 의무를 다하는 한 상당한 자유를 인정했다.
3세기에 들어 로마 지배가 동요(3세기의 위기)하게 되자 갈리아에서도 치안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3세기 중반, 라인 국경에서 게르만족 여러 부족의 침입이 잇따르자, 이에 대처한 하 게르마니아 총독 포스투무스가 260년에 황제를 칭하며 갈리아 제국이 형성되었다. 갈리아 제국은 단기간에 붕괴했지만, 3세기 후반 내란과 외부 침입으로 갈리아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를 거쳐, 로마 제국의 구조 개혁이 이루어지자 갈리아 속주는 세분화되어 트리어에 거점을 둔 갈리아 도지사가 이를 관할했다. 방위를 담당하는 변방군은 수 개 주마다 두스 (지방군 사령관) 아래에 배치되었다.
5세기에 들어 로마 내 내란과 라인 국경으로부터의 침입이 더욱 진전되어, 418년 서고트족이 갈리아 남서부에 정식으로 거주를 인정받았고, 부르군트족, 알란족 등이 잇달아 갈리아에 정착했다. 451년 아틸라 왕이 이끄는 훈족이 침입하여, 서로마 제국의 장군 아에티우스가 서고트 왕 테오도리크 1세와 함께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격퇴했지만, 이 무렵까지 갈리아에서 로마의 지배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서고트 왕국, 부르군트 왕국, 프랑크 왕국 등이 세력을 신장시키면서, 5세기 중반 무렵까지 갈리아에서 로마의 지배는 사실상 종언을 맞이했다.
3. 1. 갈리아 시대
현대 프랑스 지역에는 고대에 갈리아인들이 살고 있었다. 로마 공화정 초기에 이들은 로마를 침공하여 약탈하기도 하였다. 이후 로마가 강해져 알프스 산맥 지역의 갈리아인들을 복속시킨 후 로마 문명과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정복당하기 전 갈리아 지역은 이미 로마를 본떠 기초적인 국가 체계가 잡혀 있었으나, 로마의 속주로 편입된 이후로는 독자적인 문화를 잃고 로마화의 길을 걸었다.
기원전 600년, 이오니아 그리스인들은 지중해 해안에 마실리아 (현재 마르세유) 식민지를 건설했는데, 이는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4][5] 이와 동시에, 일부 켈트족 부족들이 프랑스 영토의 동부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에 도착했지만, 이 점령은 기원전 5세기와 3세기 사이에 프랑스의 나머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6]

오늘날의 프랑스, 벨기에, 독일 북서부, 이탈리아 북부를 아우르는 갈리아는 많은 켈트 부족과 벨가이 부족이 거주했으며, 로마인들은 이들을 갈리아인이라고 불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따르면 이들은 대략 우아즈와 가론 사이에서 갈리아어를 사용했다. 하부 가론 강 유역에서는 아키타니아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바스크어와 관련이 있거나 (혹은 직접적인 조상) 인도유럽어족 이전 언어였다. 반면 스트라보와 같은 다른 저술가에 따르면 루테티아 북쪽에서는 벨기에어가 사용되었다. 켈트족은 루테티아 파리지오룸(파리)와 부르도(보르도)와 같은 도시를 건설했고, 아키타니아인들은 툴루즈(툴루즈)를 건설했다.

로마 정착지보다 훨씬 전에 그리스 항해사들이 프로방스가 될 지역에 정착했다.[7] 포키아인들은 마르세유(마르세유)와 니스(니스)와 같은 중요한 도시를 건설하여[8] 이웃 켈트족과 리구리아인들과의 갈등을 초래했다. 켈트족은 종종 아키타니아인과 게르만족과 싸웠으며, 브렌누스가 이끄는 갈리아 전사대는 알리아 전투 이후 기원전 393년 또는 388년에 로마를 침략했다.
그러나 갈리아의 부족 사회는 중앙 집권적인 로마 국가를 따라 빠르게 변화하지 못했다. 갈리아 부족 연합은 기원전 3세기에 센티눔과 텔라몬과 같은 전투에서 로마인들에게 패했다. 기원전 3세기 초, 일부 벨가이 (게르마니 시스레나니)는 리보몽쉬르앙크르와 고르네쉬르아론드 근처의 아르모리카니(갈리아인)과의 전투 후 갈리아 북부 솜 강 주변 영토를 정복했다.
카르타고 사령관 한니발 바르카가 로마와 싸웠을 때, 그는 칸나에에서 그와 함께 싸운 여러 갈리아 용병을 모집했다. 이러한 갈리아의 참여로 인해 프로방스는 기원전 122년에 로마 공화국에 합병되었다. 이후 갈리아 총독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체를 정복했다. 베르킨게토릭스가 이끄는 갈리아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갈리아인들은 로마의 맹공에 굴복했다. 갈리아인들은 처음에는 게르고비아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결국 기원전 52년 알레시아에서 패배했다. 로마인들은 루그두눔(리옹), 나르보넨시스(나르본)과 같은 도시를 건설했다.
기원전 600년경, 고대 그리스인들에 의해 서지중해에 식민 도시 마살리아(마르세유)와 니카이아(니스)가 건설되어 그리스 문화가 전파되었다. 아나톨리아 반도·발칸 반도에서 프랑스, 영국에 이르는 지역의 원주민을 고대 그리스인들은 켈토이, 갈라타이라고 불렀고, 고대 로마인들은 갈리(갈리아인)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땅은 갈리아(갈리인의 땅)라고 불렸다. 그들은 현대에는 켈트인이라고도 불린다.
갈리아인들은 많은 부족으로 나뉘어 살았고 통일 국가를 만들지 않았다. 각 부족은 전사를 겸한 귀족들이 집회를 통해 행정관을 선출하고 농민을 지배했다.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51년까지 로마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을 감행했고, 그 기록을 「갈리아 전기」라는 저서에 남겼다.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가장 고전했던 상대는 아르베르니족의 베르킨게토릭스가 이끄는 갈리아 여러 부족의 연합군이었다. 하지만 베르킨게토릭스도 기원전 52년 로마군에 알레시아에서 포위되어 항복했다.
3. 2. 로마 시대
아우구스투스는 갈리아를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아퀴타니아,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갈리아 벨기카의 네 지역으로 나누었다.[9] 골은 현재의 프랑스보다 컸으며, 특히 갈리아 벨기카는 지금의 프랑스 영토를 많이 벗어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정복 이후, 현대 프랑스 지역 전체가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었다. 간헐적으로 갈리아인들의 독립운동이 일어났지만, 제국 붕괴까지 대체로 갈리아 지역은 로마 제국에 충성하였다.
골족의 동화는 빨랐다. 클라우디우스는 골족의 중요 인물들에게 로마 제국 원로원 진출을 허가했다. 갈리아는 여러 개의 속주로 나뉘었고, 로마인들은 통제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는 지역 정체성을 막기 위해 인구를 이동시켰다. 많은 켈트족이 아키타니아로 이동하거나 노예가 되어 갈리아 밖으로 이주되었다. 로마 제국 아래에서 갈리아는 골어가 속 라틴어로 대체되는 등 강력한 문화적 진화를 겪었다. 골어와 라틴어의 유사성이 이러한 전환을 도왔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갈리아는 수세기 동안 로마의 통제하에 있었고, 켈트 문화는 점차 갈로-로마 문화로 대체되었다.[9]
갈리아인들은 시간이 지나며 제국에 더 잘 통합되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와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는 갈리아 출신 장군이며, 클라우디우스와 카라칼라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또한 갈리아 가문 출신이었다. 260년 발레리아누스가 페르시아인에게 포로로 잡힌 후 10년 동안 포스투무스는 이베리아반도와 브리타니아를 포함하는 단명한 갈리아 제국을 세웠다. 이때 프랑크족과 알레마니족 등 게르만 부족들이 갈리아로 들어왔다. 갈리아 제국은 274년 아우렐리아누스의 샬롱 전투에서의 승리로 종말을 맞이했다.
4세기에 아르모리카에서 켈트족의 이주가 일어났다. 코난 메리아도크의 지휘를 받은 그들은 브리튼에서 왔으며, 현재 사멸된 브리튼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브르타뉴어, 콘월어, 웨일스어로 발전했다.
418년 아키타니아 속주는 반달족에 대항하여 지원을 해준 대가로 고트족에게 넘겨졌다. 같은 고트족은 410년에 로마를 약탈했고 툴루즈에 수도를 세웠다.
로마 제국은 포에데라티 조약이 체결된 모든 야만인 신규 이주민을 제국 내에 통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와 같은 장군들은 로마의 통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들 부족을 서로 대립시켜야 했다. 그는 먼저 훈족을 부르군트족에 대항하여 사용했는데, 이 용병들은 보름스를 파괴하고 군터 왕을 죽이고 부르군트족을 서쪽으로 밀어냈다. 부르군트족은 443년 아에티우스에 의해 리옹 근처로 재정착했다. 아틸라에 의해 통합된 훈족은 더 큰 위협이 되었고, 아에티우스는 서고트족을 훈족에 대항하여 사용했다. 이 갈등은 451년 샬롱 전투에서 절정에 달했으며, 로마인과 고트족은 아틸라를 격파했다.
로마 제국은 붕괴 직전에 있었다. 아키타니아는 서고트족에게 완전히 넘어가 남부 갈리아의 상당 부분과 이베리아반도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부르군트족은 자신들의 왕국을 주장했고, 북부 갈리아는 사실상 프랑크족에게 버려졌다. 게르만 민족 외에도 바스코네스는 피레네 산맥에서 바스코니아 공작령으로 들어왔고, 브르타뉴인은 아르모리카에 돔노니아, 코르누아이유, 브로에렉의 세 왕국을 형성했다.[9]
4. 중세
4세기 후반부터 게르만족이 갈리아 지역으로 대규모 이동을 시작하면서, 프랑크족 역시 이 지역에 정착하여 프랑크 왕국을 세웠다. 486년 살리 프랑크족의 지도자 클로비스 1세가 수아송에서 시아그리우스를 격파하고 북부 및 중부 갈리아 대부분을 통합했다. 496년에는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기독교 신민들의 지지를 얻었으며, 507년 부예 전투에서 서고트족의 알라릭 2세를 격파하고 아키텐과 툴루즈를 병합했다.[152][153]
클로비스 1세는 파리를 수도로 삼고 메로빙거 왕조를 세웠으나, 511년 그의 사후 왕국은 프랑크족의 상속 전통에 따라 네 개로 분열되었다. 7세기 후반, 클로타르 2세는 분열된 왕국을 통합하려 노력하였으나, 분할 상속 관습으로 인해 왕국은 불안정했고, 궁재의 권한은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카롤링거 가문 출신의 궁재 피핀 2세는 각국의 궁재직을 독점하며 세력을 키웠다. 8세기 초, 그의 아들 카를 마르텔은 732년 투르 전투에서 우마이야 왕조 군대를 격파하여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로 명성을 얻었다.[10]
751년, 카를 마르텔의 아들 피핀 3세가 왕위에 올라 카롤링거 왕조를 열었다. 피핀 3세는 교황에게 라벤나 지방을 기증하여(피핀의 기증) 교황령의 기원이 되었으며, 프랑크 왕국과 로마 교회의 결속을 강화했다.
피핀 3세의 아들 샤를마뉴 시대에 카롤링거 왕조의 권력은 절정에 달했다. 샤를마뉴는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쳤다. 800년, 교황 레오 3세는 그의 업적과 교황청에 대한 지원을 인정하여 샤를마뉴를 로마 황제로 임명했다.
샤를마뉴는 아헨에 궁정을 두고 알쿠인과 같은 학자들을 초빙하여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등 문화 발전에도 힘썼다. 그러나 샤를마뉴 사후,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제국은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이후 884년에서 887년까지 잠시 재통일되기도 했지만, 결국 프랑크 왕국은 서부(미래의 프랑스 왕국), 동부(미래의 독일), 그리고 중부(로타링기아, 훗날 서프랑크와 동프랑크에 분할)로 나뉘게 되었다.
카롤루스 대제 사후, 프랑크 왕국은 내분에 휩싸였다. 후계자들 간의 다툼이 일어나 혼란을 겪다가, 843년 베르됭 조약에 의해 왕국은 동프랑크 왕국(오늘날 독일 동부), 서프랑크 왕국(오늘날 프랑스), 중프랑크 왕국(오늘날 독일 서부, 이탈리아 북부, 네덜란드) 등으로 셋으로 갈라졌다. 로타르 1세 사후(855년), 로타링기아를 통치하던 그의 아들 로타르 2세도 죽자(869년), 870년 메르센 조약에 의해 로타링기아는 동프랑크, 서프랑크 왕국에 분할되어 편입되었다.
987년 위그 카페가 왕으로 즉위하면서(재위 987~996) 카페 왕조가 시작되었다. 카페 왕조 초기, 왕권은 파리 주변에만 미칠 정도로 약했다.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911)으로 스칸디나비아 바이킹 족장 롤로에게 하사된 노르망디 공국은, 1066년 노르망디 공작 기욤이 영국을 정복하고 왕이 되면서(재위 1066~87) 프랑스 왕실에게는 다루기 어려운 지역이 되었다.
루이 7세(재위 1137~80)와 이혼(1152)한 엘레오노르는 헨리 플랜태저넷과 재혼(1152)하였다. 1154년 노르망디 공작이 영국 왕 헨리 2세로 즉위하면서, 프랑스 서부를 다스리게 된 그는 프랑스 왕실보다 더 큰 힘과 영토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헨리 2세의 후손들 사이에서 프랑스 영토 분할 문제로 논쟁이 벌어지고, 존 왕(재위 1199~1216)과 필리프 2세(재위 1180~1223)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결국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의 프랑스 내 영토 대부분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였다. 부빈 전투(1214)에서 프랑스가 대승을 거둔 후, 영국 왕실은 프랑스 남서부 기옌에 대해서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필리프 2세 시대에 왕권은 비약적으로 강화되었다.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기도 했던 필리프 2세는 영국 왕 리처드 1세와 존과의 다툼에서 승리하여 플랜태저넷 왕가의 영토였던 노르망디와 앙주를 빼앗았다. 또한 알비 십자군을 통해 프랑스 남부까지 왕권을 확장했다.

루이 9세 (1226–70년 재위)는 제7차 십자군과 제8차 십자군에 참여했지만, 두 십자군 모두 프랑스에 큰 손실을 가져왔다. 루이 9세는 튀니스에서 사망했다.
플랜태저넷 왕가와 카페 왕조 사이의 갈등은 백년 전쟁(1337년~1453년) 동안 절정에 달했다. 플랜태저넷 왕가는 발루아 왕가로부터 프랑스 왕위를 주장했다. 이 시기에는 프랑스 흑사병이 발생했고, 여러 차례의 내전이 벌어졌다. 1420년 트루아 조약에 의해 잉글랜드의 헨리 5세가 샤를 6세의 상속자가 되었으나, 헨리 5세가 샤를 6세보다 먼저 사망하면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이중 군주국을 통합한 것은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헨리 6세였다.
백년 전쟁 동안 프랑스 국민들이 겪었던 어려움은 프랑스 민족주의를 일깨웠다. 잔 다르크(1412–1431)는 이러한 프랑스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백년 전쟁은 일련의 봉건적 투쟁이라기보다는 프랑스-영국 전쟁으로 더 많이 기억된다. 이 전쟁 동안 프랑스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발전했다.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이 바우제 전투(1421)에서 승리했지만, 푸아티에 전투(1356)와 아쟁쿠르 전투(1415)에서의 패배는 프랑스 귀족들에게 조직적인 군대 없이 갑옷을 입은 기사만으로는 버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프랑스의 샤를 7세(재위 1422–1461)는 최초의 프랑스 상비군인 질서 정연한 부대를 창설했고, 파테 전투(1429)와 포르미니 전투(1450)에서 플랜태저넷 왕가를 격파했다. 카스티용 전투(1453)는 이 전쟁의 마지막 교전이었고, 칼레와 채널 제도는 플랜태저넷 왕가의 지배하에 남았다.
샤를 8세(재위 1483년 ~ 1498년)는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1495년 2월 22일 나폴리에 입성했고, 5월 12일 나폴리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밀라노, 오스트리아, 베네치아,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프랑스의 약진에 위협을 느껴 반 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 결국 동맹군은 포르노보 전투에서 프랑스를 격파하여 샤를 8세는 프랑스로 퇴각했다. (→샤를 8세)
그 후에도 루이 12세, 프랑수아 1세, 앙리 2세에 걸쳐 이탈리아를 두고 합스부르크 왕가와 11차례에 걸친 전쟁이 있었다. 프랑수아 1세는 기독교 세계의 숙적이라 여겨져왔던 오스만 제국의 솔리만 1세와 군사적 동맹을 맺으면서 전쟁에 임했으나, 프랑스는 결국 1559년에 카토 캄브레시스 조약을 맺으며 이탈리아의 패권을 포기하게 된다.
4. 1. 프랑크 왕국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게르만족이 갈리아 지역으로 대규모 이동을 시작하면서, 프랑크족 역시 이 지역에 정착하여 프랑크 왕국을 세웠다. 프랑크족은 살리 프랑크족과 리푸아리 프랑크족 등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486년 살리 프랑크족의 지도자 클로비스 1세가 수아송에서 시아그리우스를 격파하고 북부 및 중부 갈리아 대부분을 통합했다. 이후 톨비악 전투에서 알라마니족을 격파하는 등 다른 게르만 부족들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496년에는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기독교 신민들의 지지를 얻었으며, 507년 부예 전투에서 서고트족의 알라릭 2세를 격파하고 아키텐과 툴루즈를 병합했다.클로비스 1세는 파리를 수도로 삼고 메로빙거 왕조를 세웠으나, 511년 그의 사후 왕국은 프랑크족의 상속 전통에 따라 네 개로 분열되었다. 이 시기 왕의 수석 고문이었던 궁재가 실질적인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메로빙거 왕들은 허수아비로 전락했다.[10]
7세기 후반, 클로타르 2세는 분열된 왕국을 통합하려 노력하였으나, 분할 상속 관습으로 인해 왕국은 불안정했고, 궁재의 권한은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카롤링거 가문 출신의 궁재 피핀 2세는 각국의 궁재직을 독점하며 세력을 키웠다. 8세기 초, 그의 아들 카를 마르텔은 732년 투르 전투에서 우마이야 왕조 군대를 격파하여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로 명성을 얻었다.[10]
751년, 카를 마르텔의 아들 피핀 3세가 왕위에 올라 카롤링거 왕조를 열었다. 피핀 3세는 교황에게 라벤나 지방을 기증하여(피핀의 기증) 교황령의 기원이 되었으며, 프랑크 왕국과 로마 교회의 결속을 강화했다.
피핀 3세의 아들 샤를마뉴 시대에 카롤링거 왕조의 권력은 절정에 달했다. 샤를마뉴는 롬바르드족 정복(774), 바이에른 합병(788), 아바르족 격파(796), 알-안달루스와의 국경 확장(801), 로어 작센 정복(804) 등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쳤다. 800년, 교황 레오 3세는 그의 업적과 교황청에 대한 지원을 인정하여 샤를마뉴를 로마 황제로 임명했다.
샤를마뉴는 아헨에 궁정을 두고 알쿠인과 같은 학자들을 초빙하여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등 문화 발전에도 힘썼다. 그러나 샤를마뉴 사후, 그의 아들 경건왕 루이가 제국을 통일적으로 유지하려 했으나,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제국은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이후 884년에서 887년까지 잠시 재통일되기도 했지만, 결국 프랑크 왕국은 서부(미래의 프랑스 왕국), 동부(미래의 독일), 그리고 중부(로타링기아, 훗날 서프랑크와 동프랑크에 분할)로 나뉘게 되었다.
4. 1. 1. 메로빙거 왕조
481년 클로비스 1세가 메로빙거 왕조를 개창하면서 프랑크 왕국이 수립되었다.[152] 클로비스 1세는 아타나시우스파로 개종하여 다른 게르만족의 여러 부족들을 정복하고, 갈리아 중부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왕국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152]클로비스 1세는 470년부터 10년간 킬데리크 1세가 진행하던 파리 포위전을 이어받아 성 제네비에브와 합의를 맺고 파리를 지배하게 되었고, 프랑크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메로빙거 왕조 프랑크 왕국을 건국했다.[152] 그는 랭스의 주교 레미기우스와 아내 클로틸다 등의 권유에 따라 아타나시우스파로 개종하여 가톨릭을 수용했다.[152][153]
507년, 클로비스 1세는 서고트 왕국을 격파하고 보르도, 툴루즈 지역 등을 획득하였다.[153] 클로비스 1세와 그의 아들 클로테르 1세의 치세에는 파리에 많은 교회와 수도원이 건설되었으며, 523년부터는 부르군트 왕국에 대한 침공이 시작되었다.[153]
메로빙거 왕조에서는 왕국을 가문의 재산으로 간주하여 분할 상속하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에, 왕국이 통일을 유지한 기간은 짧았다.[153] 클로비스 1세에게는 4명의 자녀가 있었기 때문에 국토는 4개로 분할되었다.
6세기 후반에는 아우스트라시아, 네우스트리아, 부르군트의 3개국으로 나뉘어 각각 왕을 칭했고, 각지에서는 지방 호족이 영향력을 강화했다.[153] 7세기 후반, 클로타르 2세는 이 삼국에 궁재를 설치하고 삼국 통일을 시도했다.[153]
이러한 분할 상속으로 인해 왕국이 불안정해지자, 궁재의 권한이 강화되었고, 특히 카롤링거 가문이 대두하게 되었다.[153] 피핀 2세는 삼국의 다툼을 이용하여 각국의 궁재직을 독점했다.[153] 8세기 초반의 궁재 카를 마르텔은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우마이야 왕조를 격파하고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로서 명성을 높였다.
4. 1. 2. 카롤링거 왕조
카를 마르텔의 아들 피핀 3세 (소 피핀)는 메로빙거 왕조의 혈통을 잇는 인물을 수도원에서 찾아내 프리드리히 3세로 즉위시키고, 다시 귀족 회의의 합의하에 그 왕위를 폐지했다. 또한 로마 교황의 지지에도 힘입어 751년에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왕국을 창시했다.[152][153]이에 대한 답례로 북 이탈리아의 라벤나 지방을 교황에게 기증했는데(피핀의 기증), 이는 교황령의 기원이 되었다.[152] 이 기증은 당시 세습 등으로 부패의 원인이 되기도 했던 지방 호족에 대한 은대지 제도와는 달리, 교회에 대한 토지 기증은 성직자 독신 제도로 인해 부패의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프랑크 왕국과 로마 교회의 결속을 더욱 강화해갔다.[152]
피핀 3세의 아들인 샤를마뉴 (카롤루스 대제)는 작센인 토벌, 이베리아 반도 원정, 아바르 격퇴, 롬바르드 왕국 토벌 등으로 명성을 드높여 800년에 로마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로마 황제의 관을 받았다.[152][153]

샤를마뉴는 아헨 궁정에 브리타니아 출신의 학자 알쿠인을 초청하여 고대 라틴어 문헌의 진흥 (카롤링거 르네상스)을 추진하는 등 문화적인 서유럽 세계의 통일에도 기여했다.[154] 또한 샤를마뉴가 궁정에서 사용했던 카롤링거 소문자체는 현재 알파벳 소문자의 원형이 되었다.[154] 아헨에서의 학술적 성과는 프랑스 각지의 교회·수도원에도 영향을 미쳤다.
카롤링거 왕조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지만, 그 통치 기구는 메로빙거 왕조와 마찬가지로 취약했다. 궁정은 아헨에 위치했지만, 군사 및 행정은 전국의 주교구 조직이 담당했다. 이에 더해, 각지의 지방 유력자들이 "백작"이라는 지방 행정관으로 임명되는 은대지 제도를 설정한 이후, 원래 주어질 토지는 일대 한정이었으나, 그들은 그 직책으로 얻은 토지를 세습하고 독립하려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802년, 샤를마뉴에 의해 이러한 지방 백작을 감독하는 "순찰사"라는 직책이 조직되었지만, 그의 사후 제도는 형해화되고, 순찰사는 파견된 지방에 그대로 정착하여 그 지역의 제후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155]
카롤링거 왕조 시대를 소재로 한 서사시로 롤랑의 노래가 있다. "롤랑의 노래"는 샤를마뉴의 이베리아 원정에서 피레네 산맥에서의 이슬람 공격에 창작을 더한 것으로, 프랑스 문학사의 초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샤를마뉴가 814년에 사망하자, 루트비히 1세가 왕위에 올랐다. 루트비히 1세는 817년에 제국 정비령을 발표하고 그의 장남인 로타르 1세에게 왕국의 본토를, 차남인 피핀 1세에게 아키텐을, 삼남인 루트비히 2세에게 바이에른을 주어 다음 세대의 분할 통치를 준비했다.
4. 1. 3. 프랑크 왕국의 분열
카롤루스 대제 사후, 프랑크 왕국은 내분에 휩싸였다. 후계자들 간의 다툼이 일어나 혼란을 겪다가, 843년 베르됭 조약에 의해 왕국은 동프랑크 왕국(오늘날 독일 동부), 서프랑크 왕국(오늘날 프랑스), 중프랑크 왕국(오늘날 독일 서부, 이탈리아 북부, 네덜란드) 등으로 셋으로 갈라졌다. 로타르 1세 사후(855년), 로타링기아를 통치하던 그의 아들 로타르 2세도 죽자(869년), 870년 메르센 조약에 의해 로타링기아는 동프랑크, 서프랑크 왕국에 분할되어 편입되었다.4. 2. 중세 프랑스
카롤루스 마르텔의 아들인 피핀은 국내 반발 세력을 진압하고 약화된 메로빙거 왕조를 무너뜨린 후 카롤링거 왕조를 세웠다. 피핀은 왕조 개창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교황에게 보답하고자 이탈리아 북부 라벤나 지역을 롬바르드족으로부터 탈취하여 로마 교황에게 기증하였다.피핀의 아들 카롤루스 대제는 프랑크 왕국의 전성 시대를 열었다. 그는 유럽 대부분 지역을 정복하여 크리스트교를 전파하고 중앙 집권 정부를 강화했다. 800년에는 외적의 괴롭힘을 받던 로마 교황 레오 3세를 도와준 일을 빌미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대관식을 가졌다. 카롤루스 대제 시기에는 학문과 교육을 진흥시켜 수도원 학교를 건립하고, 프랑크 왕국의 수도 아헨에 왕립학교를 건립하여 유럽 여러 지역의 학자들을 교사로 초빙하였다. 그리하여 카롤루스 대제 시기에는 고전 자료들을 편찬하고 해석하여 학문 연구가 크게 발전되었다. 이를 흔히 '카롤링거 르네상스'라 부른다.
카롤링거 왕조가 이후 두 가문 사이에서 권력 투쟁을 거쳐, 위그 카페가 왕으로 즉위(재위 987~996)하였다. 그는 프랑스의 공작이며 파리의 백작이었고,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의 분파까지 포함하는 카페 왕조를 창설하였고, 그 왕조는 8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프랑스를 통치하였다.
911년,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에 의하여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바이킹족의 족장 롤로에게 센 강 하류의 노르망디 공국을 하사하였다. 1066년에 롤로의 후손 노르망디 공작 기욤이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왕이 되면서(재위 1066~87) 프랑스 왕실에게는 다루기 곤란한 지역이 되었다. 비록 프랑스 내에서는 노르망디 공작이 프랑스 왕의 신하이지만, 프랑스 외부에서는 동등한 왕이기 때문이었다.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루이 7세(재위 1137~80)와 이혼(1152)한 프랑스의 전 왕비인 엘레오노르는, 노르망디 공작 헨리 플랜태저넷과 재혼(1152)하였다. 엘레오노르는 아키텐 공작이 다스리던 프랑스 서남부 지역을 물려받은 인물이었다. 1154년에 노르망디 공작이 영국 왕으로 즉위하였는데, 그가 헨리 2세였다. 헨리는 자신의 어머니인 마틸다를 통해 노르망디 공국을 물려받았고, 아버지에게는 앙주 지방을 물려받은 인물이었다. 엘레오노르와 그녀의 네 아들 중 세 명이 이끈 1173-1174년의 반란군이 패한 이후에, 헨리는 엘레오노르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봉신을 브르타뉴 공작으로 임명했으며, 그 결과 프랑스 서부를 다스리게 된 그는 프랑스 왕실보다 더 큰 힘과 더 넓은 영토를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헨리의 후손들 사이에서 그의 프랑스 영토를 분할하는 문제로 논쟁이 벌어지고, 존 왕(재위 1199~1216)과 필리프 2세(재위 1180~1223) 사이에 긴 분쟁이 그 논쟁과 얽히면서, 결국 프랑스 왕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가 프랑스 내에서 차지했던 영토의 대부분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였다. 부빈 전투(1214)에서 프랑스가 대승을 거둔 이후에, 영국 왕실은 프랑스 남서부의 기옌에 대해서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중세 시대에 매우 분권화된 국가였다. 국왕의 권위는 행정적인 것보다 종교적인 성격이 더 강했다. 11세기 프랑스는 노르망디, 플랑드르, 랑그독과 같은 지역이 명칭만 왕국과 다를 뿐, 모든 면에서 지역적인 권위를 누리면서 왕의 권위가 약화되고 제후의 권력이 절정에 달하는 시기를 맞았다. 카페 왕조는 로베르 가문의 후손으로, 한때 강력한 제후였으며, 약하고 불운한 카롤링거 왕조 왕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카페 왕가는 국왕으로서 샤를마뉴 대관을 소유했고, 파리 백작으로서 일 드 프랑스로 알려진 개인 봉토를 소유했다.
왕의 일부 봉신들은 충분히 강력해져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자들이 되었다. 노르만족, 플랜태저넷 가문, 뤼지냥 가문, 오트빌 가문, 라뉠피드 가문, 그리고 툴루즈 백작 가문은 프랑스 외부에서 자신들을 위한 영토를 성공적으로 개척했다. 프랑스 역사에서 이러한 정복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복왕 윌리엄에 의한 노르만 정복이었다.[13]
프랑스 귀족의 중요한 부분은 십자군에 참여했고, 프랑스 기사들은 십자군 국가를 건설하고 통치했다. 프랑스는 또한 이베리아 레콩키스타에 참여하여 무슬림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재기독교화했다. 이베리아 레콩키스타는 정복한 스페인 또는 포르투갈 기독교인들에 의해 약탈된 이전 무슬림 정착지를 재정착시키기 위해 프랑스 기사들과 정착민들을 활용했다.[14][15]
4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게르만족의 민족 대이동과 함께 게르만 민족의 한 분파인 프랑크족이 갈리아에 정착했다. 프랑크족은 수렵과 목축을 주로 하며, 몇 년 정도 정착한 후 이주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프랑크족은 갈리아 정복 이전의 켈트족과 마찬가지로 살리족과 리푸아리족과 같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부족마다 왕과 전사를 거느렸다.[152] 또한 그들은 "살리카 법전"과 "리푸아리 법전" 등 라틴어로 쓰인 부족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152] 이러한 프랑크족에 관한 기록은 4세기에 쓰인 사서 "황제전" 속에 수록된 로마군의 진군가가 최초이며, 260년대에 로마군이 프랑크족에게 승리한 내용을 노래했다.
470년에는 프랑크족의 킬데리크 1세가 파리를 포위했다. 이 포위전은 10년 동안 이어졌고, 481년 킬데리크 1세가 사망하자, 15세의 젊은 나이로 부족의 왕이 된 클로비스 1세는 이 포위전을 거쳐 성 제네비에브와 합의를 맺고 파리를 지배하게 된다. 그 후 프랑크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메로빙거 왕조프랑크 왕국을 건국했다. 구 로마 제국령인 갈리아의 현지 주민들이 가톨릭을 신봉하고 있었고, 로마화가 빨랐던 부르군드 왕과 서고트 왕과 같은 다른 게르만 민족들이 아리우스파를 받아들인 것에 비해 로마화가 늦었고, 랭스의 주교 레미기우스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아내 클로틸드 등의 권유에 따라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클로비스는 3000명 정도의 종사들과 함께 정통파인 아타나시우스파로 개종하여 가톨릭을 수용했다.[152][153]
507년, 클로비스는 오랫동안 전쟁을 벌여온 알라리크 2세가 이끄는 서고트 왕국을 격파하고 보르도, 툴루즈 지역 등을 획득한다. 클로비스와 그의 아들 클로타르 1세의 치세에는 정치적 영향력 외에도 종교적 영향력도 증대되어, 파리에는 많은 교회와 수도원이 건설되었다. 또한 이 시대에는 클로비스 시대부터 대립 관계에 있던 부르군트 왕국에 대한 침공이 523년부터 시작된다.
메로빙거 왕조에서는 왕국을 가문의 재산으로 간주하여, 당주가 사망한 후 그 토지를 분할 상속하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에, 왕국이 통일을 유지한 기간은 극히 짧았다. 클로비스에게는 4명의 자녀가 있었기 때문에 국토는 4개로 분할되었다.
6세기 후반에는 아우스트라시아, 네우스트리아, 부르군드의 3개국으로 나뉘어 각각 왕을 칭했다.[153] 또한 각지에서는 지방 호족이 영향력을 강화했다.[153]
7세기 후반에 네스트리아를 다스렸던 클로타르 2세는 이 삼국에 궁재를 설치하고, 이 궁재를 통해 삼국의 통일을 시도했다.[153]
이러한 분할 상속으로 인해 불안정해지는 왕국과, 그것들을 연락하고 통솔하는 권한을 가진 궁재가 힘을 키우면서, 특히 카롤링거 가문이 대두하게 된다. 특히 카롤링거 가문의 피핀 2세는 삼국의 다툼을 이용하여 각국의 궁재직을 독점했다.[153] 8세기 초반의 궁재 카를 마르텔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유럽 진출을 꾀하던 이슬람 세력(우마이야 왕조)을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격파하고,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로서 그 명성을 높였다. 그러나 마르텔은 메로빙거 왕가의 공백을 틈타 궁재로서 방자하게 행동하여 유력 귀족들의 반감을 샀다.
당시 성상 숭배 금지령 등으로 동로마 제국 황제와의 대립이 깊어지던 로마 교황은 새로운 정치적 보호자를 필요로 했다. 이러한 가운데, 이슬람 세력의 침입을 격퇴한 프랑크 왕국에 교황은 주목하고, 프랑크 왕국의 실권을 장악한 카롤링거 가문과의 접근을 시도했다. 카를 마르텔의 아들 피핀 3세 (소 피핀)는 메로빙거 왕조의 혈통을 잇는 인물을 수도원에서 찾아내 프리드리히 3세로 즉위시키고, 다시 귀족 회의의 합의하에 그 왕위를 폐지하고, 또한 로마 교황의 지지에도 힘입어 751년에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왕국을 창시했다. 이에 대한 답례로 북 이탈리아의 라벤나 지방을 교황에게 기증한 것 (피핀의 기증)은 교황령의 기원이 되었다. 이 기증은 당시 세습 등으로 부패의 원인이 되기도 했던 지방 호족에 대한 은대지 제도와는 달리, 교회에 대한 토지 기증은 성직자 독신 제도로 인해 부패의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프랑크 왕국과 로마 교회의 결속을 더욱 강화해갔다.
게다가 그의 아들인 샤를마뉴 (카롤루스 대제)는 작센인 토벌, 이베리아 반도 원정, 아바르 격퇴, 롬바르드 왕국 토벌 등 그 명성을 드높여 800년에 로마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로마 황제의 관을 받았다.
샤를마뉴는 아헨 궁정에 브리타니아 출신의 학자 알퀸을 초청하여 고대 라틴어 문헌의 진흥 (카롤링거 르네상스)을 추진하는 등 문화적인 서유럽 세계의 통일에도 기여했다.[154] 또한 샤를마뉴가 궁정에서 사용했던 카롤링거 소문자체는 현재 알파벳 소문자의 원형이 되었다.[154] 아헨에서의 학술적 성과는 프랑스 각지의 교회·수도원에도 영향을 미쳤다.
카롤링거 왕조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지만, 그 통치 기구는 메로빙거 왕조와 마찬가지로 취약했다. 궁정은 아헨에 위치했지만, 군사 및 행정은 전국의 주교구 조직이 담당했으며, 이에 더해, 각지의 지방 유력자들이 "백작"이라는 지방 행정관으로 임명되는 은대지 제도를 설정한 이후, 원래 주어질 토지는 일대 한정이었으나, 그들은 그 직책으로 얻은 토지를 세습하고 독립하려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802년, 샤를마뉴에 의해 이러한 지방 백작을 감독하는 "순찰사"라는 직책이 조직되지만, 그의 사후 제도는 형해화되고, 순찰사는 파견된 지방에 그대로 정착하여 그 지역의 제후가 되는 자도 있었다.[155]
카롤링거 왕조 시대를 소재로 한 서사시로 롤랑의 노래가 있다. "롤랑의 노래"는 샤를마뉴의 이베리아 원정에서의 피레네 산맥에서의 이슬람 공격에 창작을 더한 것으로, 프랑스 문학사의 초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샤를마뉴가 814년에 사망하자, 루트비히 1세가 왕위에 올랐다. 루트비히 1세는 817년에 제국 정비령을 발표하고 그의 장남인 로타르 1세에게 왕국의 본토를, 차남인 피핀 1세에게 아키텐을, 삼남인 루트비히 2세에게 바이에른을 주어 다음 세대의 분할 통치를 준비했다.
987년에 서 프랑크 왕국의 루이 5세가 사망하고, 카롤링거 왕가가 단절된다. 같은 해, 파리 백작이었던 로베르 가문의 위그 카페가 카페 왕조를 창시했다. 노르만족 토벌에 활약한 위그 카페였지만, 그 왕권은 동프랑크 왕국(독일 왕국) 등과 비교해도 취약하여 파리 주변에만 그 왕권이 미쳤다. 카페뿐만 아니라, 로베르 2세, 앙리 1세, 필리프 1세 등 초기 4대는 이러한 좁은 영토 때문에 주변의 대 제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데 급급하여 세력 확대나 행정 개혁은 난항을 겪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과감한 세력 확장은 보이지 않았지만 각 왕들이 여성 문제 등의 소동을 겪으면서도 오래 살아 왕위 계승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에 각 통치 기간이 길어질수록 왕가는 안정되기 시작했다. 5대 루이 6세는 방탕하고 식도락가였지만, 그런 오명과는 달리, 세력을 강화하고 있던 노르망디 공작을 견제하고 정략 결혼을 통해 영토를 확대하는 등 왕조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루이 7세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이혼 소동은 영국과의 관계 악화를 초래하여 결과적으로 백년 전쟁의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서기 1000년, 성경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이 나타나지 않자 교회에 대한 실망과 불신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교회의 지배력은 해마다 쇠퇴의 길을 걸었다. 그러한 배경에서 1096년, 로마 교황 우르바노 2세에 의해 제1차 십자군 원정이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제창되었다. 프랑스에서는 툴루즈 백작과 플랑드르 백작 등이 참가했다. 1147년의 제2차 십자군 원정에서는 에데사 백국 함락 보고를 받고, 루이 7세가 로마 교황 에우제니오 3세에게 십자군 칙서를 요청하여 십자군이 조직되어 원정이 이루어졌다. 루이 7세는 예루살렘 순례를 달성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3세와의 내부 항쟁과 무리한 공세가 이어져, 결과적으로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1180년에 왕위에 오른 필리프 2세는 필리프 오귀스트라고 불렸으며, 이 시대에 왕권은 비약적으로 강화되었다.
1189년의 제3차 십자군 원정에서는 필리프 2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 영국 왕 리처드 1세 등과 함께 참가했다. 이 원정에서는 예루살렘 탈환은 실패했지만, 강화 조약을 통해 순례의 안전이 확보되었다.
1199년, 필리프 2세는 사생활 문제 등으로 인해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파문과 성무 정지를 명령받았다.
13세기경부터 점차 왕권 강화가 진행되었고, 영국 왕 리처드 1세와 존과 다툰 필리프 2세는 플랜태저넷 왕가 (잉글랜드 왕가)의 영토였던 노르망디와 앙주를 빼앗았다. 또한, 이 무렵 프랑스 남부에서 퍼져 있던 알비 조파가 이단으로 규정되어 알비 십자군이 조직되었다. 이 이단 척결 투쟁은 프랑스 왕 루이 9세 시대에 완료되었고, 결과적으로 프랑스 남부까지 프랑스 왕권이 신장되었다. 이처럼, 전반적으로 13세기의 프랑스 왕권 강화는 로마 교황과의 연대를 전제로 진행된 것이었다. 그러나, 제6차 십자군 · 제7차 십자군을 수행한 것은 프랑스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 또한 이 원정을 통해 루이 9세는 원정지인 튀니스에서 사망했다.
11세기부터 프랑스에 국한되지 않고 서유럽은, 피레네 산맥과 라인란트에서의 철 생산이 활발해진 경위로, 13세기에는 농촌 등에 철제 농기구가 공급되었다.[156] 특히 중량 유륜 쟁기는 알프스 이북 등의 습하고 무거운 토양의 토지를 깊게 갈 수 있었기 때문에 보급되었으며, 또한 이 기술을 받아, 춘경지, 추경지와 휴경지의 3가지 경작 환경을 로테이션하는 삼포식 농업도 보급되었다.[156][157][158] 이러한 기술의 변화는 농업의 생산력을 높이고, 잉여 생산물의 화폐화를 통해 농민의 장원에 대한 화폐 지대의 도입을 촉진했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 개간 운동을 전개하여, 신촌락(빌뇌브)이 잇따라 등장했다.[158] 신촌락에서는, 영주가 농민을 유치하기 위해 특허장의 배포와, 연공의 면제, 벌금의 감액 등이 이루어졌다.

4. 3. 카페 왕조의 발전과 십자군
위그 카페가 왕으로 즉위하면서(재위 987~996) 카페 왕조가 시작되었다. 카페 왕조는 1792년 루이 16세가 처형될 때까지 800년 이상 프랑스를 통치했다.[172] 카페 왕조 초기, 왕권은 파리 주변에만 미칠 정도로 약했다. 로베르 2세, 앙리 1세, 필리프 1세 등 초기 왕들은 좁은 영토 때문에 주변 대 제후들과 세력 확장에 어려움을 겪었다.[50] 그러나 여성 문제 등 여러 문제을 겪으면서도 왕위 계승 문제를 해결하여 왕가는 점차 안정되었다.[56]루이 6세는 노르망디 공작을 견제하고 정략 결혼을 통해 영토를 확대하는 등 왕조 발전에 기여했다.[50] 그러나 루이 7세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이혼은 영국과의 관계를 악화시켜 백년전쟁의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50]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911)으로 스칸디나비아 바이킹 족장 롤로에게 하사된 노르망디 공국은, 1066년 노르망디 공작 기욤이 영국을 정복하고 왕이 되면서(재위 1066~87) 프랑스 왕실에게는 다루기 어려운 지역이 되었다.[13] 노르망디 공작은 프랑스 내에서는 왕의 신하였지만, 프랑스 외부에서는 동등한 왕이었기 때문이다.
루이 7세(재위 1137~80)와 이혼(1152)한 엘레오노르는 헨리 플랜태저넷과 재혼(1152)하였다. 1154년 노르망디 공작이 영국 왕 헨리 2세로 즉위하면서, 프랑스 서부를 다스리게 된 그는 프랑스 왕실보다 더 큰 힘과 영토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헨리 2세의 후손들 사이에서 프랑스 영토 분할 문제로 논쟁이 벌어지고, 존 왕(재위 1199~1216)과 필리프 2세(재위 1180~1223)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결국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의 프랑스 내 영토 대부분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였다. 부빈 전투(1214)에서 프랑스가 대승을 거둔 후, 영국 왕실은 프랑스 남서부 기옌에 대해서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필리프 2세 시대에 왕권은 비약적으로 강화되었다.[37]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기도 했던 필리프 2세는[104] 영국 왕 리처드 1세와 존과의 다툼에서 승리하여 플랜태저넷 왕가의 영토였던 노르망디와 앙주를 빼앗았다.[142] 또한 알비 십자군을 통해 프랑스 남부까지 왕권을 확장했다.[142]
루이 9세 (1226–70년 재위)는 제7차 십자군과 제8차 십자군에 참여했지만, 두 십자군 모두 프랑스에 큰 손실을 가져왔다.[142] 루이 9세는 튀니스에서 사망했다.[104]
4. 4. 백년 전쟁
샤를 4세가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그의 사촌 형제인 발루아 가의 필리프 6세(재위:1328년~1350년)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의 왕비 이사벨라(샤를 4세의 누이)의 아들인 에드워드 3세(재위:1327년~1377년)는 자신이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하며, 양국 간에 심각한 대립을 빚었다. 에드워드 3세는 영국과 프랑스를 하나로 한 거대한 왕국을 세울 야심을 품고 있었다.필리프 6세 입장에서도 자신의 신하 중에 자신을 능가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신하는 타국의 왕이기도 했다. 필리프 6세는 영국 왕이 프랑스 국왕의 신하로서 가지고 있는 봉토를 몰수하여 프랑스 국왕의 위신을 높이고자 했다. 영토 문제와 왕위 계승권 문제로 인한 두 왕가의 갈등은 대화로 해결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백년 전쟁 제1기(1337-1360) 동안 프랑스는 영국군에 밀려 패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제2기(1369-1396) 초반에는 불리한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1415년에 영국의 헨리 5세가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대파하면서 전세는 다시 기울었다. 프랑스 왕실 내부적으로 아르마냐크 파와 부르고뉴 파로 나뉘자, 헨리 5세는 1420년 트루아 조약을 맺고 7년간 파리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프랑스 왕실의 영역은 루아르 강 이남으로 제한되었다.
1429년 잔 다르크의 등장으로 프랑스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잔 다르크는 영국군에 포위당한 오를레앙을 구하고, 역대 프랑스 왕들이 즉위식을 거행한 랭스에서 샤를 7세의 대관식을 치르게 하라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샤를 7세의 지원을 받은 잔 다르크는 프랑스 군을 이끌고 오를레앙을 구원했고, 샤를 7세는 랭스가 탈환된 후인 1429년에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잔 다르크는 부르고뉴 군에 붙잡혀 영국군에 포로로 팔렸으며, 1431년 루앙에서 종교재판을 받고 마녀로 화형당했다.
1435년 부르고뉴 공작과 프랑스 왕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져 내부 분란이 종식되었고, 1436년에는 프랑스가 파리를 되찾았으며, 1450년에는 노르망디를 회복하였다. 1558년 영국군은 프랑스 내 마지막 근거지였던 칼레를 떠나야 했다.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이전에는 별개의 독립 국가였던 부르고뉴 공국과 브르타뉴를 합병하고 강력한 왕국으로 성장했다.
백년 전쟁으로 프랑스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특히 1348년 흑사병이 이탈리아로부터 프랑스에 상륙하면서 피해는 더욱 심각해졌다.
플랜태저넷 왕가와 카페 왕조 사이의 갈등은 백년 전쟁(1337년~1453년) 동안 절정에 달했다. 플랜태저넷 왕가는 발루아 왕가로부터 프랑스 왕위를 주장했다. 이 시기에는 프랑스 흑사병이 발생했고, 여러 차례의 내전이 벌어졌다. 1420년 트루아 조약에 의해 잉글랜드의 헨리 5세가 샤를 6세의 상속자가 되었으나, 헨리 5세가 샤를 6세보다 먼저 사망하면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이중 군주국을 통합한 것은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헨리 6세였다.
백년 전쟁 동안 프랑스 국민들이 겪었던 어려움은 프랑스 민족주의를 일깨웠다. 잔 다르크(1412–1431)는 이러한 프랑스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백년 전쟁은 일련의 봉건적 투쟁이라기보다는 프랑스-영국 전쟁으로 더 많이 기억된다. 이 전쟁 동안 프랑스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발전했다.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이 바우제 전투(1421)에서 승리했지만, 푸아티에 전투(1356)와 아쟁쿠르 전투(1415)에서의 패배는 프랑스 귀족들에게 조직적인 군대 없이 갑옷을 입은 기사만으로는 버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프랑스의 샤를 7세(재위 1422–1461)는 최초의 프랑스 상비군인 질서 정연한 부대를 창설했고, 파테 전투(1429)와 포르미니 전투(1450)에서 플랜태저넷 왕가를 격파했다. 카스티용 전투(1453)는 이 전쟁의 마지막 교전이었고, 칼레와 채널 제도는 플랜태저넷 왕가의 지배하에 남았다.
4. 5. 이탈리아 전쟁
샤를 8세(재위 1483년 ~ 1498년)는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1495년 2월 22일 나폴리에 입성했고, 5월 12일 나폴리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밀라노, 오스트리아, 베네치아,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프랑스의 약진에 위협을 느껴 반 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 결국 동맹군은 포르노보 전투에서 프랑스를 격파하여 샤를 8세는 프랑스로 퇴각했다. (→샤를 8세)그 후에도 루이 12세, 프랑수아 1세, 앙리 2세에 걸쳐 이탈리아를 두고 합스부르크 왕가와 11차례에 걸친 전쟁이 있었다. 프랑수아 1세는 기독교 세계의 숙적이라 여겨져왔던 오스만 제국의 솔리만 1세와 군사적 동맹을 맺으면서 전쟁에 임했으나, 프랑스는 결국 1559년에 카토 캄브레시스 조약을 맺으며 이탈리아의 패권을 포기하게 된다.
5. 근세
14세기 프랑스 왕과 교황의 관계는 대립으로 치달았다.[21] 재정난을 타개하려던 필리프 4세는 국내 성직자에게 과세를 시도하면서 교황과의 대립을 심화시켰다.[21] 1302년 삼부회를 개최하여 지지를 얻었고, 1303년 아나니 사건으로 보니파시오 8세를 압박했다.[21] 이후 클레멘스 5세를 옹립, 1309년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이전(아비뇽 유수)시켜 왕권의 우위를 과시했다.[21] 이는 훗날 종교 개혁보다 앞서 프랑스 교회가 교황으로부터 사실상 독립(갈리카니즘)하는 결과를 낳았다.[21]
프랑스 왕위는 살리카법에 따라 카페 가문 남계 자손만 계승 가능했다. 이후 발루아 왕가, 부르봉 왕가로 이어졌지만, 이들도 카페 왕조의 방계이다.
1589년 위그노 전쟁 중 나바르 왕 앙리가 앙리 4세로 즉위하며 부르봉 왕조가 성립되었다.[26] 앙리 4세는 1593년 가톨릭으로 개종, 1598년 낭트 칙령으로 종교적 관용을 베풀어 위그노 전쟁을 종식시켰다.[26]
앙리 4세는 대귀족과 도시의 복종을 강요하고, 리슐리외를 등용해 중상주의 정책으로 산업 진흥과 재정 재건에 힘썼다.[26] 1610년 가톨릭 광신도에게 암살되었다.[26]
루이 13세는 마리 드 메디시스와 리슐리외의 보좌 아래 왕권을 강화했다.[21] 1615년부터 삼부회는 개최되지 않았고, 관료제와 상비군이 정비되었다.[21] 30년 전쟁에서 국익을 우선하여 신교를 지원, 부르봉 왕가의 세력을 확장했다.[21]
1643년 루이 13세 사망 후 루이 14세가 즉위, 쥘 마자랭이 보좌했다.[21]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알자스와 로렌 일부를 획득하고, 같은 해 프롱드의 난이 일어났지만 1653년 진압되었다.[21]
루이 14세는 절대군주제 확립을 위해 관료제와 상비군을 정비했다. 장바티스트 콜베르를 중용, 중상주의 정책으로 국부를 축적하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등 대외 팽창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베르사유 궁전 건설과 낭트 칙령 폐지로 국력이 소모되어, 말년에는 재정난에 시달렸다.
16세기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에 여러 식민지를 건설했다.[30] 17세기 초 사무엘 드 샹플랭의 항해로 누벨 프랑스 등 정착지가 건설되었고,[31] 1699년 루이지애나 건설로 영토가 확장되었다. 아프리카에서는 1626년 세네갈 진출, 1659년 생 루이 건설, 마다가스카르에서는 1642년 포르 도팽 건설로 식민지 확장이 시작되었다.
18세기 프랑스 철학자(Philosophes)들은 프랑스 계몽주의를 주도하며 유럽에 영향을 미쳤다.[37] 드니 디드로의 ''백과전서(Encyclopédie)''(1751–72)는 학문 혁명에 기여했다.[38] 볼테르와 몽테스키외가 운동을 이끌었으며,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1748)과 장 자크 루소의 ''학문과 예술의 도덕적 영향에 대한 논고''(1750) 발표로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다.[39] 볼테르는 계몽주의 지도자였고, 앙투안 라부아지에는 질량 보존의 법칙 확립, 산소와 수소를 발견했다.[39]
5. 1. 앙시앵 레짐
1484년 프랑스의 인구는 1,300만 명이었고 1700년에는 2,000만 명으로, 당시 유럽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였다. 정치 권력은 널리 분산되어 있었으며, 법원("파르망")은 강력했다. 국왕은 약 10,000명의 관리만 두고 있었는데, 이는 매우 적은 숫자였으며, 열악한 도로 시스템으로 인해 내부 통신은 매우 느렸다.[21] 삼부회는 국왕에게 청원할 수 있었지만 법을 통과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권한이 없었다.가톨릭 교회는 재산의 약 40%를 통제했다. 국왕은 주교를 임명했지만, 일반적으로 지역 수도원 및 교회 기관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귀족 가문과 협상해야 했다.[21] 귀족은 재산 측면에서 두 번째였지만 통일성은 없었다. 각 귀족은 자신의 영지, 지역 연계망 및 군대를 소유했다.[21]
도시는 준독립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주로 주요 상인과 길드에 의해 통제되었다. 농민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했으며, 많은 경우 당국이 존중해야 하는 확립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17세기에 농민은 시장 경제와 연관되어 있었고, 농업 성장에 필요한 자본 투자의 많은 부분을 제공했으며, 종종 마을에서 마을로(또는 도시로) 이동했다.[22]
프랑스 대부분의 농민이 지역 방언을 사용했지만, 공식 언어는 파리에서 등장했고 프랑스어는 유럽 귀족의 선호 언어가 되었으며 외교 및 국제 관계의 공용어가 되었다.

1477년 용담공 샤를의 죽음으로 프랑스와 합스부르크는 그의 풍요로운 부르고뉴 영토를 분할하는 긴 과정을 시작했으며, 이는 수많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1532년 브르타뉴는 프랑스 왕국에 병합되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 전쟁 (1494–1559)에 참여했다. 프랑수아 1세는 파비아 전투에서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 프랑스 군주는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 바르바르 오스만 제독은 1543년 니스(Nice)를 점령하여 프랑수아 1세에게 넘겨주었다.
16세기 동안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는 유럽에서 지배적인 세력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많은 영토가 프랑스를 둘러쌌다. 스페인 테르시오는 프랑스 기사들을 상대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558년 1월 7일, 기즈 공작 프랑수아는 영국으로부터 칼레를 점령했다.
경제 역사가들은 1475년부터 1630년까지의 시기를 "아름다운 16세기"라고 부르는데, 이는 국가 전반에 걸쳐 평화, 번영, 낙관주의가 회복되고 인구가 꾸준히 증가했기 때문이다. 1559년, 앙리 2세는 두 개의 조약(''카토-캉브레지 조약''): 하나는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와, 다른 하나는 스페인 펠리페 2세와 각각 서명했다. 이것은 프랑스, 잉글랜드, 스페인 간의 오랜 갈등을 종식시켰다.
14세기에 들어서자 프랑스 왕과 교황의 관계는 대립으로 치달았다. 재정난을 타개하려던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국내 성직자에게 과세를 시도하면서 로마 교황과의 대립을 심화시켰다. 1302년, 필리프는 삼부회를 개최하여 국내의 여러 신분으로부터 지지를 얻었다. 1303년에 아나니 사건을 일으켜 로마 교황 보니파시오 8세를 압박하여 분사하게 만들었다. 그 후, 프랑스인 교황인 클레멘스 5세를 옹립한 다음, 1309년에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이전(아비뇽 유수)시켜, 프랑스 왕권의 교황에 대한 우위를 과시했다. 이로 인해, 훗날 종교 개혁 시대보다 앞서, 프랑스 교회는 가톨릭의 틀 안에 있으면서도 로마 교황으로부터 사실상의 독립을 이루었다 (갈리카니즘).
프랑스 왕위 계승자는 살리카법에 따라 남계의 카페 가문의 자손만이 계승권을 허용받았다. 이후, 프랑스 왕가는 발루아 왕가, 부르봉 왕가로 이어지지만, 이들 가계도 카페 왕조의 방계이다.
1589년, 부르봉 왕조가 성립되었다. 앙리 4세는 1593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1598년에는 낭트 칙령을 발표하여 개인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고 30년 이상 지속된 위그노 전쟁을 종식시켰다.
이후 앙리 4세는 리슐리외를 임명하여 중상주의 정책에 따른 산업 진흥과 재정 재건 등에 힘썼다. 1610년 광신적인 가톨릭 신자의 흉탄에 쓰러져 사망했다.
다음 왕 루이 13세는 왕권 강화를 추진했다. 1615년부터 삼부회도 개최되지 않았고, 관료제와 상비군의 정비는 더욱 진전되었다. 1618년부터 중부 유럽에서 일어난 30년 전쟁에서는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여 신교 측을 지원하며 부르봉가의 세력 확대를 꾀했다.
1643년 루이 13세가 사망하면서 당시 5세였던 루이 14세가 즉위했지만, 재상 쥘 마자랭이 보좌했다. 1648년에는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알자스 지방과 로렌의 3개 도시를 영토로 편입했다. 같은 해에 프롱드의 난이 일어났지만, 1653년까지 진압되었다.
1774년, 루이 15세가 사망하자 왕위는 루이 16세에게 넘어갔다. 이 시대는 앙시앵 레짐이라고 불리는 사회 체제가 성립되어 있었으며, 제1신분인 성직자, 제2신분인 귀족, 그리고 제3신분인 평민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인구의 약 90%가 제3신분이었다. 대다수의 제3신분이 세금 부담으로 고통받는 가운데, 소수의 제1신분과 제2신분은 광대한 토지나 중요한 요직, 면세 등의 특권을 누렸다. 파리에서는 많은 카페가 영업을 시작했고, 카페나 개인적인 살롱에서 부상하고 있던 부르주아지와 자유주의 귀족들이 신문을 들고 사회 비판을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왕권이 미치지 않는 "공공 공간"에서 탄생한 공론(여론)은 당시 고조되고 있던 계몽주의에 의해 이론적으로 무장되었고, 훗날 프랑스 혁명을 옹호하는 여러 이론을 길러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왕 루이 16세는 자크 튀르고와 자크 네케르를 기용하고, 특권 신분에도 세금을 부과하는 등, 왕권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개혁을 목표로 했지만, 자유주의 옹호자와 절대 왕정 옹호자 사이에서 곤경에 처해 절대 왕정은 한계에 다다르게 되었다. 특히 튀르고는 경제적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많이 도입했다. 그러나 이러한 급진적인 규제 철폐는 당시 발생한 흉작과 겹쳐, 1775년에 가격 폭등과 물품 부족을 일으켰고, 파리, 노르망디, 일 드 프랑스 지역에서 폭동을 유발했다.
5. 2. 종교 개혁과 위그노 전쟁
16세기 후반, 프랑스의 개신교 신자인 위그노와 로마 가톨릭 세력 간의 갈등이 심해져 위그노 전쟁이 일어났다. 36년간 크고 작은 전쟁이 계속되었다. 위그노 세력의 지도자인 부르봉 왕조의 앙리 4세가 왕위에 올라 종교 갈등을 해결하고자 개신교에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낭트 칙령을 발표하여 위그노 전쟁은 끝이 났다. 앙리 4세는 국내 산업을 발전시키고 해외 진출을 추진하여 프랑스 왕권 강화, 즉 절대 왕정의 기반을 다졌다.[26]
종교 개혁은 프랑스에서 장 칼뱅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가톨릭 교회의 권위와 의식에 문제를 제기했다.[24] 프랑스 국왕 앙리 2세는 샤토브리앙 칙령에 따라 개신교도들을 심하게 박해했다.[25] 기즈 공작 프랑수아가 이끄는 가톨릭의 반격으로 1562년 바시에서 위그노 학살이 일어나 프랑스 종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 동안 잉글랜드, 독일, 스페인 군대가 프로테스탄트 ("위그노")와 가톨릭 양측에 개입했다.
앙리 2세는 1559년 마상 시합에서 사망했고, 그의 세 아들이 차례로 왕위를 이었지만 모두 미성년자이거나 무능력했다. 권력 공백기에 앙리 2세의 부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종교 전쟁 초기에 핵심 인물이 되었다. 그녀는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의 배후로 자주 지목되는데, 이 사건으로 파리와 프랑스 지방에서 수천 명의 위그노가 살해되었다.

종교 전쟁은 세 앙리 전쟁으로 절정에 달했는데, 앙리 3세의 경호원들이 1588년 12월 스페인의 지원을 받는 가톨릭 동맹의 지도자 기즈 공작 앙리 1세를 암살했다. 복수로 1589년 한 사제가 앙리 3세를 암살했다. 이로 인해 위그노였던 앙리 4세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고, 종교 및 왕위 계승 전쟁으로 고통받는 국가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는 1598년 낭트 칙령을 발표하여 개신교도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사실상 내전을 종식시켰다.[26] 앙리 4세는 1610년 프랑수아 라바야크에 의해 암살되었다.
1620년 위그노들이 '프랑스 개혁 교회 공화국'을 위한 헌법을 선포하자, 리슐리외 추기경은 이를 막기 위해 국가의 모든 권력을 동원했다. 루이 13세 치하에서 종교 분쟁이 재개되었고, 리슐리외는 개신교도에게 군대와 요새를 무장 해제하도록 강요했다. 이 분쟁은 라 로셸 포위전에서 종식되었으며, 이 전투에서 개신교도와 그들의 영국 지지자들이 패배했다. 그 후 알레 평화 조약은 종교의 자유를 확인했지만, 개신교 군사 방어 시설을 해체했다.[27]
박해에 직면한 위그노들은 유럽과 아메리카 전역으로 널리 흩어졌다.[28]
프랑수아 1세가 새로운 사상에 민감했기 때문에, 종교 개혁은 빠른 단계부터 프랑스에 뿌리를 내렸다. 종교 개혁 시대에 프랑스에서 배출된 장 칼뱅은 1533년에 "기독교 강요"를 저술하여 교회의 부패를 비판했다. 칼뱅은 예정설을 주장했고, 이에 호응하는 일파는 칼뱅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1539년, 프랑수아 1세는 빌레르-코트레 칙령을 발표하여, 이후 프랑스의 모든 공문서에서 프랑스어가 사용되게 되었다.
16세기 후반, 스위스 제네바에서 높아지고 있던 칼뱅파의 영향이 프랑스 국내에도 미치게 되었고, 위그노 (칼뱅파)와의 갈등이 깊어져, 30년 이상에 걸친 내전인 위그노 전쟁이 발발했다. 1580년, 미셸 드 몽테뉴가 "수상록"을 출판했다. "수상록"은 17세기부터 시작되는 계몽 시대에 영향을 주었다.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에서 볼 수 있듯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 세력의 대립은 첨예해져, 1589년에는 앙리 3세가 파리에서 암살되어, 발루아 왕조는 단절되었다.
- -1589년, 위그노 전쟁에서 칼뱅파 측의 수령이었던 나바르 왕 앙리가 프랑스 왕 앙리 4세로 즉위하면서 부르봉 왕조가 성립되었다. 앙리는 칼뱅파의 입장을 고수하는 것으로 정세가 혼란스러워질 것을 우려하여 1593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 후 1598년에는 종교적 관용을 규정한 낭트 칙령을 발표하여 개인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고 30년 이상 지속된 위그노 전쟁을 종식시켰다.
이후 앙리 4세는 종교 전쟁 시기에 강한 자율성을 가진 대귀족이나 구교 동맹의 거점이 된 여러 도시의 복종을 강요하는 정책에 힘썼고, 경제 분야에서는 리슐리외를 임명하여 중상주의 정책에 따른 산업 진흥과 재정 재건 등에 힘썼다. 1610년 광신적인 가톨릭 신자의 흉탄에 쓰러져 사망했다.
5. 3. 30년 전쟁과 절대 왕정
루이 13세의 총신 리슐리외 추기경은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프랑스는 개신교 국가인 스웨덴, 신성 로마 제국의 개신교 제후국 등이 가톨릭 교회를 대표하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전쟁을 선포하자, 뒤에서 개신교 세력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1635년부터는 신성 로마 제국과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했고, 1648년에는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항복을, 1659년에는 피레네 조약으로 스페인의 항복을 받아냈다.[29]루이 14세는 즉위 후 강력한 절대군주제 확립을 위해 관료제와 상비군 체제를 정비했다. 장바티스트 콜베르를 중용하여 중상주의 경제 정책을 실시, 국내 산업 발전과 해외 무역 장려를 통해 국부를 축적했다.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여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등 대외 팽창 정책을 추진,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베르사유 궁전 건설에 막대한 비용을 투입하고, 낭트 칙령 폐지로 위그노들이 영국과 네덜란드로 이주하면서 국력이 소모되었다. 루이 14세 말년에는 국력이 약화되어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루이 14세는 1643년부터 1715년까지 프랑스를 통치하며 중앙 집권 국가 건설, 봉건 잔재 제거, 귀족 세력 약화를 통해 절대 군주제를 확립했다.[32] 1682년에는 왕실을 베르사유 궁전으로 옮기고 귀족들을 베르사유에 거주하게 하며 통제했다.
1685년 퐁텐블로 칙령으로 개신교를 탄압하여 많은 이들이 국외로 이탈했고, 1693년과 1710년에는 기근으로 2백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33]

1701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레오폴트 1세는 필리프 5세의 즉위에 반대했다.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공화국이 레오폴트 1세 편에 서면서 프랑스는 여러 전투에서 패배했다. 1704년 블레넘 전투는 프랑스의 첫 주요 육상 전투 패배였다. 라미예 전투(1706)와 말플라케 전투(1709)는 동맹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클로드 루이 엑토르 드 빌라르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드넹 전투(1712)에서 잃었던 영토를 회복했다.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필리프 5세는 스페인 왕으로 인정받았지만 프랑스 왕위 계승권은 포기해야 했다.
루이 14세는 장바티스트 륄리를 후원하여 프랑스 오페라를 설립했다. 잦은 전쟁으로 프랑스는 재정난을 겪었지만, 동쪽으로 약간의 영토를 얻었다.
1589년 앙리 4세 즉위로 부르봉 왕조가 시작되었다. 앙리 4세는 1593년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1598년 낭트 칙령을 발표하여 위그노 전쟁을 종식시켰다. 이후 리슐리외를 등용하여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 산업 진흥과 재정 재건에 힘썼으나 1610년 사망했다.
루이 13세는 마리 드 메디시스와 리슐리외의 보좌를 받아 왕권을 강화했다. 30년 전쟁에서는 국익을 우선하여 신교를 지원, 부르봉 왕가의 세력을 확장했다.
1643년 루이 13세 사후 루이 14세가 즉위, 쥘 마자랭이 보좌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알자스와 로렌 일부를 획득하고, 같은 해 프롱드의 난이 일어났지만 1653년 진압되었다.
1630~40년대 르네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제시했고, 리슐리외는 아카데미 프랑세즈를 설립했다. 1650년대 블레즈 파스칼은 팡세를 저술하고 수학적 발견을 했다.

1661년 루이 14세의 친정이 시작되자, 장바티스트 콜베르는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네덜란드 계승 전쟁 등 잦은 영토 확장 전쟁을 일으켰다. 대동맹 전쟁에서 루이 14세는 고립되었고, 스페인 계승 전쟁에서는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스페인 부르봉 왕가 왕위를 인정받았지만 북미 영토 일부를 상실했다.
영국은 입헌 군주제 확립, 잉글랜드 은행 설립, 길드 해체 등으로 경제적 기반을 갖춰 프랑스보다 유리했다. 베르사유 궁전 건축과 운영은 프랑스 재정에 부담을 줬다. 1682년 수도를 베르사유로 옮긴 루이 14세는 왕권신수설을 신봉, 1685년 낭트 칙령을 폐지(퐁텐블로 칙령)하여 칼뱅파가 국외로 유출되었다.
5. 4. 프랑스 식민 제국
16세기 동안 프랑스 국왕은 북아메리카 영토를 주장하기 시작하여 여러 식민지를 건설했다.[30] 자크 카르티에는 16세기 동안 아메리카 영토 깊숙이 탐험한 위대한 탐험가 중 한 명이었다.17세기 초, 1608년 사무엘 드 샹플랭의 항해로 신세계에 프랑스인들의 첫 성공적인 정착이 이루어졌다.[31] 가장 큰 정착지는 누벨 프랑스였다. 1699년에는 루이지애나가 건설되면서 북아메리카의 프랑스 영토에 대한 주장이 더욱 확장되었다.
아프리카에 대한 프랑스의 존재는 1626년 세네갈에서 시작되었지만, 공식적인 식민지와 무역 기지는 1659년 생 루이 건설과 함께 시작되었다. 마다가스카르의 첫 번째 프랑스 정착은 1642년 포르 도팽이 건설되면서 시작되었다.
5. 5. 계몽주의 시대
18세기 프랑스에서는 철학자(Philosophes)들이 프랑스 계몽주의를 주도하며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37] 드니 디드로는 72,000개 항목으로 구성된 ''백과전서(Encyclopédie)''(1751–72)의 편집장으로, 이는 학문 혁명을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38]
18세기 초 볼테르와 몽테스키외가 이 운동을 이끌었으며, 1750년경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1748)과 장 자크 루소의 ''학문과 예술의 도덕적 영향에 대한 논고''(1750) 발표로 철학자들의 영향력은 절정에 달했다. 볼테르는 프랑스 계몽주의의 지도자이자 유럽 전역에 큰 영향을 미친 작가였다.[39]
앙투안 라부아지에 등 프랑스 화학자들은 낡은 도량형 단위를 일관된 과학적 체계로 대체하고자 노력했으며, 라부아지에는 질량 보존의 법칙을 확립하고 산소와 수소를 발견했다.
당시 파리에서는 많은 카페가 문을 열었고, 카페나 개인 살롱에서 부르주아지와 자유주의 귀족들이 신문을 보며 사회 비판을 하는 일이 많아졌다. 왕권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이러한 "공공 공간"에서 형성된 여론은 계몽주의를 통해 이론적으로 뒷받침되어, 훗날 프랑스 혁명을 옹호하는 다양한 이론을 낳았다.
6. 근대

프랑스 혁명은 1789년 삼부회로 시작하여 1799년 11월 브뤼메르 18일 쿠데타와 프랑스 통령 정부 수립으로 끝난 프랑스의 정치적, 사회적 변혁기였다. 그 사상은 자유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로 여겨지며 그 가치와 제도는 현대 프랑스 정치 담론의 중심에 남아 있다.
그 원인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여겨지며, 이는 ''앙시앵 레짐''이 관리할 수 없었다. 1789년 5월에 재정 위기와 광범위한 사회적 고통으로 인해 1789년 삼부회가 소집되었고, 이는 6월에 국민 의회로 전환되었다. 7월 14일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은 의회에 의해 일련의 급진적인 조치로 이어졌는데, 그 중에는 프랑스 봉건제 폐지, 프랑스 가톨릭 교회에 대한 국가 통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 있었다.
그 다음 3년은 경제 공황에 의해 악화된 정치적 통제권을 위한 투쟁이 지배했다. 1792년 4월에 발발한 프랑스 혁명 전쟁 이후의 군사적 패배는 1792년 8월 10일 봉기를 초래했다. 군주제 폐지 선언에 따라 9월에 군주제가 폐지되고 프랑스 제1 공화국으로 대체되었으며, 루이 16세 처형은 1793년 1월에 이루어졌다.
1793년 6월의 또 다른 1793년 5월 31일 - 6월 2일 봉기 이후, 헌법이 중단되었고 실질적인 정치 권력은 국민 공회에서 공안 위원회로 넘어갔다. 약 16,000명이 공포 정치 기간 동안 처형되었으며, 이는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1794년 7월에 끝났다. 외부의 위협과 내부의 반대에 의해 약화된 공화국은 1795년에 프랑스 총재 정부로 대체되었다. 4년 후인 179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군사 쿠데타로 프랑스 통령 정부가 권력을 장악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혁명 시대의 종말로 여겨진다.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한 자코뱅파 정권은, 강력한 권한을 가진 공안 위원회를 설치하여 혁명 방어를 위한 징병제와 망명 금지법, 혁명력을 도입하고, 이성 숭배의 종교인 "이성의 축제"를 창시하는 등 급진적인 정책을 내세우는 한편, 반혁명파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왕당파의 당통 등을 처형하며 공포 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외부 세력의 배제 등이 안정되고, 대외 세력으로부터의 위협이 사라지자, 소토지 소유 농민과 경제적 자유를 요구하는 시민층이 보수화되어 독재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고, 1794년에는 테르미도르 9일의 쿠데타가 발생하여 로베스피에르는 실각하고, 그와 그의 일파는 처형되었다. 자코뱅파가 몰락하자 온건 공화파가 유력해졌고, 1795년에는 제한 선거제를 부활시킨 1795년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국민 공회와 혁명 재판소는 해산되었고, 총재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사회 불안은 계속되어, 1796년 5월에는 사유 재산 폐지를 주장하며, 정부 전복을 획책하던 바뵈프가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는 사건 등이 일어났다. 1799년,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에 의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통령 정부를 수립하고 독재권을 장악했다.
- -|]]|thumb|오른쪽|200 px|1812년 영토. 남색: 프랑스 영토, 연보라: 위성국]]
1801년, 혁명 이후 프랑스와 대립 관계에 있던 로마 교황과 화해하고, 이듬해 1802년에는 영국과 강화 조약을 맺는 "콩코르다"와 "아미앵 조약"을 실현하여 대외적인 위협을 없앴다. 1804년 3월에는 사유 재산의 불가침과 법 앞의 평등, 계약의 자유, 국가의 세속화 등, 근대 국가에 필수적인 규범을 기록한 프랑스 민법전을 공포했다. 5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종신 집정관이라는 지위를 거쳐, 국민 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나폴레옹 1세로서 황제에 즉위했다.
나폴레옹은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하여 1814년에 퇴위했다. 전후 처리를 위해 빈 회의가 열렸다. 빈 회의는, 유럽을 1792년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리는 정통주의가 주요 내용으로, 프랑스에 부르봉가가 왕으로 복위하게 되었다. 1815년, 엘바 섬에서 탈출하여 파리로 돌아온 나폴레옹 1세가 복위했다. 하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완패했다. 나폴레옹 1세는 다시 퇴위하고, 대서양의 영국령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폐되었다.
1848년 2월 혁명으로, 라마르틴이 수반이 되고, 기계공 알베르, 사회주의자 루이 블랑 등이 입각한 임시 정부가 성립한다. 임시 정부는 정치범 사형 폐지, 신체형 폐지, 노예제 폐지, 표현의 자유화 등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잇따라 결정했다. 또한 사회주의자들이 입각한 배경에서 사회 정책 분야에서도 노동 하청제가 금지되고, 노동 시간도 파리에서 11시간에서 10시간으로, 지방에서도 12시간에서 11시간으로 단축되었다. 선거 제도에서도 제한 선거에서 보통 선거로 바뀌어 21세 이상의 모든 남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이러한 가운데, 새롭게 제정된 제2 공화국 헌법에 근거하여 1848년 12월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 속에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1851년 12월 2일, 루이 나폴레옹은 경찰과 군의 일부 협력을 얻어 쿠데타를 일으켰다. 5일에는 32개 현에 계엄령이 발령되고, 수 주에 걸친 탄압의 결과, 약 2만 6천 명이 체포, 1만 명 가까이가 알제리나 남아메리카 기니 등 프랑스 식민지로 유배되었으며, 공화파, 왕당파를 불문하고 많은 신문사가 간행을 중단했다. 이러한 쿠데타에도 불구하고, 시민은 거듭된 정치적 동요에 질린 나머지, 대부분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공화파였던 소설가 빅토르 위고와 같은 예술가는 망명을 강요당했다.
1852년 11월, 제정 부활을 묻는 국민 투표가 실시되어 9할이 넘는 찬성표를 얻어 쿠데타 1주년이 되는 12월 2일, 제정이 선언되고, 루이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3세"라고 칭하게 되었다.

또한 나폴레옹 3세는 1853년 6월 29일 조르주 오스만을 센 현 지사로 임명하여 대규모 파리 시 개조 계획을 추진했다. 당시 파리는 중세 이래의 흔적을 남겨, 어떤 곳에서는 거지와 부랑자가 넘쳐났고, 치안 문제와 위생 문제로 인해 범죄와 역병의 온상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낡은 집은 가차 없이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대로와 고층 건축물 등이 세워졌다. 이러한 파리 대개조뿐만 아니라 나폴레옹 3세는 생시몽주의의 영향으로 전국적인 철도 정비와 금융 개혁을 실행했으며, 농업 및 공업 분야에서도 국가적인 지도가 이루어져 프랑스는 급속한 근대화를 추진했다. 1860년에는 니스와 사부아를 주민 투표를 거쳐 사르데냐 왕국으로부터 병합했다.

1870년 5월에는 자유주의적인 개혁의 인정 여부를 묻는 국민 투표에서 8할 이상의 지지를 얻어 국민으로부터의 신임을 얻었다.
게다가 여론을 자신의 권력 정당화의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에 비스마르크에 의한 엠스 전보 사건으로 반독일 여론이 고조되자 대독일 개전이 불가피하다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그리하여 1870년 7월 19일부터 스페인 왕위 계승을 둘러싼 보불 전쟁이 발발했지만, 만반의 준비를 갖춘 독일을 상대로 급조된 빈약한 장비로 맞설 수밖에 없었던 프랑스는 패배를 거듭했고, 8월에는 독일군이 라인강을 넘어 프랑스로 진입했으며, 9월의 세당 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는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고, 9월 2일에는 10만 명의 병사들과 함께 항복했다. 이 항복 소식을 들은 파리 시민들은 4일 의회로 몰려가 공화정이 선포되었고, 제2제정은 붕괴되었으며 즉시 '임시 국방 정부'가 조직되었다. 실각한 나폴레옹 3세는 이후 런던으로 망명했다.
6. 1. 프랑스 혁명
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는 구제도(앙시앵 레짐)의 모순으로 사회 계층 간 갈등이 심화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와 귀족은 면세 특권을 누렸지만, 평민들은 무거운 세금 부담을 졌다. 부르봉 왕조의 사치스러운 생활과 미국 독립 전쟁 지원으로 재정은 파탄 직전에 이르렀고, 루소, 몽테스키외, 볼테르 등 계몽사상가들의 영향과 미국 독립 혁명 소식은 시민들을 자극했다.[1]
장 피에르 루이 로렌트 휴엘, 수채화, 37,8 x 50,5 cm, 1789년 작.
1789년 루이 16세는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해 삼부회를 소집했지만, 신분 간 대립으로 파행을 겪었다. 제3신분 대표들은 테니스 코트의 서약을 통해 국민의회를 구성했고, 국왕의 탄압에 맞서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었다.[1]
국민의회는 봉건제 폐지와 프랑스 인권선언을 통해 혁명 이념을 천명하고, 1791년 입헌 군주제와 제한선거를 골자로 하는 헌법을 제정했다. 1792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간섭으로 전쟁이 발발하고, 파리 시민들이 왕궁을 습격하여 왕권이 정지되었다. 같은 해 9월에는 국민공회가 소집되었다.[1]

국민공회는 자코뱅 당 주도로 공화정을 선포하고, 1793년 루이 16세를 처형했다. 로베스피에르는 공포 정치를 통해 반혁명 세력을 탄압하고 급진적 개혁을 단행했지만,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처형되었다.[1]
1795년 총재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무능과 부패로 국민들의 불만이 커졌고,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통령 정부를 세우면서 프랑스 혁명은 막을 내렸다.[1]
프랑스 혁명은 1789년 삼부회 소집부터 1799년 브뤼메르 18일 쿠데타까지 이어진 정치적, 사회적 변혁기였다. 그 사상은 자유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로 여겨지며, 현대 프랑스 정치의 중심에 남아있다.[1]
프랑스 혁명의 원인은 사회, 정치, 경제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1789년 5월, 재정 위기와 사회적 고통으로 1789년 삼부회가 소집되었고, 6월에 국민 의회로 전환되었다.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 이후, 의회는 프랑스 봉건제 폐지, 프랑스 가톨릭 교회에 대한 국가 통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등 급진적인 조치를 취했다.[1]
이후 3년간 정치적 통제권을 위한 투쟁이 이어졌다. 1792년 4월 프랑스 혁명 전쟁 발발과 군사적 패배는 1792년 8월 10일 봉기를 초래했다. 군주제는 폐지되고 프랑스 제1 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루이 16세는 1793년 1월에 처형되었다.[1]
1793년 6월, 1793년 5월 31일 - 6월 2일 봉기 이후 헌법이 중단되고 국민 공회에서 공안 위원회로 권력이 넘어갔다. 공포 정치 기간 동안 약 16,000명이 처형되었으며, 이는 1794년 7월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끝났다. 1795년 프랑스 총재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179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로 프랑스 통령 정부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혁명 시대는 종결되었다.[1]
6. 2. 나폴레옹 시대
1799년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일으켜 총재정부를 무너뜨리고 통령정부를 수립하였다. 나폴레옹은 철저한 중앙 집권 정책을 추진하고 언론과 사상을 통제하여 독재 권력을 확립하였다. 그는 대내적으로 프랑스 은행을 설립하고, 나폴레옹 법전을 편찬하여 혁명의 성과를 정착시켰으며, 대외적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을 격파하고 영국과 타협하여 정권을 안정시켰다. 1804년 국민투표에 의해 나폴레옹 1세로 즉위하여 황제가 되면서 프랑스 제1제정이 시작되었다.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하자,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은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나폴레옹에 대항하였다. 나폴레옹은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 넬슨 제독에게 대패하였으나, 육전에서는 오스트리아를 무너뜨리고 신성 로마 제국을 멸망시켰으며, 프로이센과 러시아 제국을 굴복시켜 유럽 대륙을 제패하였다.
유럽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폴레옹이었지만, 오직 영국만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1806년 영국과 유럽 대륙 간의 무역을 금지하는 대륙봉쇄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대륙봉쇄령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몰락의 단서를 제공하게 된다.
1812년 대륙 봉쇄령을 어기고 영국과 비밀리에 무역을 했던 러시아 제국을 응징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대원정에 나섰지만, 러시아의 혹독한 추위 등으로 참패하였다. 뒤이어 대프랑스 동맹군과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전함으로써 제1제정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나폴레옹은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고, 유배 생활 중 다음 해에 엘바 섬에서 탈출하여 재기를 꾀했으나,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다시 크게 패하여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된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각지에서는 프랑스 혁명 이념인 자유주의가 전파되고 크게 영향받아 민족주의 의식이 각성되게 된다.
6. 3. 왕정 복고와 7월 혁명
1814년, 나폴레옹 1세가 실각하면서 프랑스 제1제정이 몰락하고, 유럽에는 빈체제가 성립되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 혁명으로 멸망했던 부르봉 왕가가 복귀하여 루이 18세가 국왕으로 즉위했다. 프랑스는 혁명 이전과 같은 궁정 정치를 하게 되었지만, 루이 18세는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며 노동자와 농민 등 하층민에 대한 온건 정책을 통해 국내 안정을 추구했다. 또한 프랑스 혁명 시절의 자유주의 사상도 제한적이나마 인정했다.루이 16세의 동생인 루이 18세는 빈 회의에서 여러 국가의 승인을 받아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했다.[56] 국왕의 귀환과 함께 망명했던 귀족들도 속속 프랑스로 귀국했다.[56]
일반적으로 보수 반동 체제로 여겨지는 빈 체제이지만, 과거의 앙시앵 레짐으로 완전히 회귀한 것은 아니었다.[58][59] 부르봉 왕정복고 하에서는 제한 선거에 의한 입헌 군주제가 채택되었고, 1814년 헌장을 통해 법 앞의 평등, 소유권의 불가침, 출판 및 언론의 자유 등이 인정되었다.[60] 그러나 국민주권은 부정되었으며, 가톨릭 교회가 국교로 정해졌고, 행정권, 사법권, 입법권 등의 삼권은 국왕이 보유하는 등 앙시앵 레짐의 잔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58][59]
1824년 루이 18세가 사망하자 그의 동생인 샤를 10세가 즉위하여 반동 정치를 추진했다.[58] 샤를 10세는 혁명 중에 매각된 망명 귀족의 토지 보상을 목적으로 하는 10억 프랑 법을 제정하고 랭스 대성당에서의 대관식을 부활시키는 등 반동적인 정책을 폈다.[58] 국왕에 대한 반발이 강해지는 가운데, 알제 침공으로 관심을 대외 관계로 돌리려 했지만, 높아지는 자유주의 운동에 대한 억압을 시도했다.
1830년 7월, 7월 칙령을 통해 선거권을 더욱 제한하고 전 망명 귀족과 대토지 소유자의 표 가중치를 상대적으로 크게 하자, 국민들은 봉기하여 샤를 10세를 국외로 쫓아냈다. 7월 27일부터 29일에 걸쳐 일어난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는 실각하고 영국으로 망명했다.[61][59][62] 혁명의 중심은 입헌 군주파였기 때문에 공화정으로 이행하지 않고, 자유주의에 이해를 보인 오를레앙가의 루이 필리프가 국왕으로 선출되었다.[61]

알제리 침략 결과, 1834년 프랑스령 알제리가 병합되었고 1962년 독립할 때까지 점령이 이어졌다.
6. 4. 7월 왕정과 2월 혁명
1814년, 나폴레옹 1세가 실각하면서 프랑스 제1제정이 몰락하고, 유럽에는 빈체제가 들어섰다. 프랑스 혁명으로 멸망했던 부르봉 왕가가 복귀하여 루이 18세가 국왕으로 즉위했다. 루이 18세는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며 온건 정책을 폈고, 프랑스 혁명 시절의 자유주의 사상도 어느 정도 인정했다.그러나 루이 18세 사후 샤를 10세가 즉위하면서 선거권 제한, 로마 가톨릭 복권 등 반동적인 정책을 펴자, 1830년 7월 혁명이 일어나 샤를 10세는 국외로 추방되었다.
이후 자유주의 사상에 입각한 루이 필리프 1세가 1830년에 즉위하여 입헌 군주제를 실시했지만, 일부 부르주아(자본가) 계층에게만 선거권을 주는 특권 정치를 펼쳤다. 1830년 헌장에서는 왕권신수설 언급과 '신민'이라는 문구가 삭제되었고, 자유와 평등에 관한 기술은 유지되었다.[1]
새 의회는 왕정 수립에 찬성했던 가담파가 다수였으나, 점차 라파예트, 아돌프 티에르, 자크 라피트 등의 진보당과 프랑수아 피에르 기욤 기조의 저항당으로 분열되어 대립했다.[1] 야당에는 앙리 다르투아를 옹립하는 정통 왕조파, 루이 나폴레옹을 옹립하는 보나파르트파, 도시 노동자층을 지지 기반으로 하는 공화파 등이 있었다.[1]
1831년, 저항당의 Casimir Pierre Perier|카지미르 피에르 페리에영어가 수상에 취임했지만, 좌우 양쪽으로부터 공격받았고, 콜레라에 걸려 병사했다.[1] 이후 저항당의 브로이 공, 기조, 진보당의 티에르에 의한 연립 내각이 성립되었다.[1] 이 내각은 리옹 비단 직물 노동자들의 폭동(1831년 11월), 정통 왕당파의 습격 음모(1832년 2월), 공화파의 반란(1834년) 등 국내 소요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무기 휴대 금지법을 제정하고 국민군을 부르주아 자제만으로 구성하게 했다.[1]
나폴레옹 몰락 후 평화 회복으로 은행가와 대 상인은 자본을 축적했고, 이는 산업 생산에 집중되어 제철업과 섬유 공업 등이 발전했다.[1] 산업 혁명 발흥과 함께 형성된 중소 부르주아와 노동자들은 기근과 실업자 증가를 겪으면서, '개혁 연회'라는 연회 형식으로 선거법 개정 운동 및 의회 개혁 운동을 전개했다.[2] 1848년 2월 22일, 정부의 개혁 연회 억압 등으로 인해 2월 혁명이 일어나 루이 필리프는 퇴위했다.[2] 이 2월 혁명은 유럽 전체로 파급되어 1848년 혁명으로 총칭되는 변동을 일으켰다.[2]
6. 5. 제2공화정과 제2제정
2월 혁명 이후, 1848년 제2공화정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루이 나폴레옹[173]은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는 1852년 국민투표로 황제로 즉위하여 '''나폴레옹 3세'''라 칭하면서 제2제정을 열었다.나폴레옹 3세는 보불전쟁에서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고, 이후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왕정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불만이 팽배했던 당시 프랑스 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나폴레옹 3세 즉위 당시 프랑스 시민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으며, 프랑스가 다시 유럽의 지배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나폴레옹 3세는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전임 왕들의 폐단을 정리하고 내정개혁을 단행했으며, 대외 팽창을 통해 프랑스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다. 그러나 1871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고, 나폴레옹 3세는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겪었다.
패전 후 프랑스는 알자스-로렌을 독일 제국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독일은 프랑스에 의 배상금을 요구했으나, 프랑스는 단 몇 개월 만에 이를 갚아냈다. 이는 전 유럽과 독일, 비스마르크 수상을 놀라게 했으며, 프랑스와 독일의 감정을 극도로 악화시켜 제1차 세계 대전의 간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6. 6. 파리 코뮌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면서 파리는 혼란에 휩싸였다. '야만인의 나라'라고 무시했던 프로이센에게 점령당한 수치심으로 인해 파리 시민들의 소요는 극에 달했다.[1]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일반 시민들이 무장 봉기하여 1871년 파리를 장악하고, 3월 18일 사회주의적 자치 정부를 수립했는데, 이것이 바로 '최초의 사회주의 자치정부'로 불리는 파리 코뮌이다.[1]
파리 코뮌은 1871년 5월 28일 정규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후 제3공화정이 수립되었다.[2] 그러나, 파리코뮌 봉기는 마르크스나 레닌 등 사회주의 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념의 탄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되고 있다.[2]

파리 코뮌은 종종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불리지만, 20세기 러시아 혁명과 같은 사회주의 조직에 의한 주도적인 혁명이 아니었다.[3] 역사적 경위에서 비롯된 파리의 정치적 공백 속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난 운동이었으며, 이를 구성하는 사람들도 의사, 변호사, 저널리스트와 같은 소 부르주아부터, 블랑키파(Blanquists)나 프루동파(Proudhonists) 노동자 등 다양한 계급과 사상이 혼재되어 있었다.[3] 파리 코뮌은 국방 정부의 패배주의적 정책에 대한 애국심을 원동력으로 삼아 사회주의적 공화국 수립에 헌신했다.[3] 또한 코뮌은 징병제와 상비군을 폐지하고, 무장한 민중에 의해 국방이 이루어졌다.[3] 그 과정에서 공화력이 재도입되었고, 정교 분리를 표결했으며, 초등 교육의 세속화, 의무화, 무상화를 추진했다.[3]
코뮌의 봉기에 대해 테르는 코뮌 측과의 모든 타협을 거부하고, 비스마르크의 양해 하에 군대를 재건하여 철저한 탄압을 가했다.[3] 이러한 탄압은 5월 21일부터 28일까지 이어진 "피의 일주일"을 통해 일련의 반란이 진압되었고, 코뮌 측은 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냈다.[3]
6. 7. 제3공화국
프랑스는 1870년 보불전쟁에서 패배하여 제2제정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를 내쫓고, 1871년 아돌프 티에르를 대통령으로 하는 제3공화국을 수립했다.[1] 같은 해 파리 코뮌을 진압하고 해군을 강화했다.[1]1875년 헌법적 법률이 제3공화국의 헌법이 되었다.[14]
1876년 선거에서 공화파가 승리하여 공화파 내각이 성립되었다.[15] 1877년 5월 16일,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 대통령은 공화파 쥘 시몽 총리를 해임하고 왕당파 알베르 드 브로이를 다시 총리로 임명했다.[15] 브로이 내각이 불신임을 받자 마크마옹은 상원의 동의를 얻어 하원을 해산했다.[15] 그러나 10월 선거에서 다시 공화파가 승리하여 공화파 쥘 뒤포르 내각이 성립되었고, 마크마옹도 사실상 의원내각제를 인정했다.[15] 1879년 총선에서 공화파가 승리하자 마크마옹은 사임하고, 공화파 쥘 그레비가 후임 대통령이 되었다.[16]
마크마옹의 사임으로 왕정 복고 가능성은 크게 위축되었고, 대통령의 강권은 해체되었으며 의회주의에 기반한 정치적 결정권이 의회에 위임되었다.[16] 대통령 직위도 명예직으로 축소되었다.[17]
1880년대에는 온건 공화파와 조르주 클레망소를 중심으로 한 급진파로 나뉘었다.[18] 쥘 페리로 대표되는 온건 공화파 정권에서는 초등 교육의 세속화, 의무화, 무상화가 실현되었고, 여자 교육 기관이 정비되었으며, 이혼 합법화, 직업 조합 결성 자유가 인정되었다.[19] 집회와 출판의 자유, 시·읍·면장 선거제, 파리 코뮌 참가자 사면, 술집 개업 자유 등도 인정되었다.[20]
1880년대 후반부터 1890년대에 걸쳐 조르주 부르망제 사건과 드레퓌스 사건이 제3공화국에 큰 정치적 위기를 가져왔다.[21]
1886년 육군 장관 조르주 부르망제는 군대의 공화주의화와 민영화를 꾀하고 대독 복수주의를 자극하여 국민의 인기를 얻었다.[22] 정부는 그를 지방으로 좌천시켰지만 오히려 국민의 반감을 샀다.[22] 1888년 부르망제는 각지 보궐 선거에 입후보하여 당선된 후 사퇴하는 방식을 반복했다.[23] 1889년 1월 파리 보궐 선거에서 승리하며 절정에 달했지만 쿠데타를 망설여 인기가 떨어졌다.[24] 정부는 부르망제를 국가 안녕에 대한 죄로 기소했지만 벨기에로 망명하여 1891년 권총 자살했다.[25]
페르디낭 드 레셉스의 파나마 운하 건설 사업 실패와 관련된 파나마 운하 스캔들도 정치적 위기로 작용했다.[26] 1888년 파나마 회사는 프랑스 언론과 의원을 매수하여 복권부 사채 발행 승인을 얻었다.[27] 1889년 2월 파나마 회사는 파산했고, 85만 명의 소액 주주에게 피해를 입혔다.[28] 역대 내각은 이 사건을 은폐했고, 공화파 의원은 뇌물을 부르망제파 탄압 자금으로 사용했다.[28] 1892년 은폐가 폭로되었고, 당시 내각은 붕괴되었으며 조르주 클레망소 등 급진파 정치인도 정계에서 쫓겨났다.[29]
1894년 러불 동맹이 체결되었다. 프랑스 육군 포병 부대 첩보 문서가 발견되어 프랑스 장교단 내 스파이 활동이 발각되었다.[31] 유대인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군사 기밀을 넘겼다는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유배형을 받았다.[32] 1896년 조르주 피카르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확신하고 페르디낭 발젠 에스테라지가 진범임을 밝혔다.[33] 그러나 피카르는 튀니지로 좌천되었고, 후임 위베르 앙리는 드레퓌스 유죄를 나타내는 위조 문서를 만들었다.[33] 1898년 1월 에스테라지는 군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영국으로 갔다.[34] 에밀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했고, 프랑스 여론은 드레퓌스파와 반 드레퓌스파로 나뉘었다.[34] 졸라는 명예 훼손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영국으로 도망쳤다.[35] 8월 앙리 위조 문서가 폭로되었고, 앙리는 옥중에서 자살했다.[36] 1899년 발데크-루소 내각이 탄생하여 드레퓌스 재심이 이루어졌다.[36] 재심에서 군부의 증거 은폐 및 위증이 밝혀졌지만 다시 유죄 판결이 내려졌고,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며 여론이 진정되었다.[37] 온건 공화파는 권위가 실추되었고, 이후 급진 공화파 정권이 수립되었다.[37]
제3공화정 8대 대통령 레이몽 푸앵카레 재임 중 1914년 8월, 독일 제국이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1] 프랑스는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을 격파하며 전쟁은 장기화되었고, 1917년 미국 참전으로 독일군을 격파, 1919년 베르사유 조약 체결로 전쟁에서 승리했다.[1]
전후 프랑스는 패전국 독일에 베르사유 조약으로 가혹하게 대했는데, 이는 전쟁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1] 이 조약은 훗날 제2차 세계 대전의 불씨가 되었다.[1]
1929년 세계 대공황 발생으로 프랑스도 불황을 겪었고, 식민지와의 블록 경제 체제로 대공황을 극복하고자 했다.[1]
1930년대 독일에서 히틀러가 총통이 되면서 국제연맹 탈퇴, 재군비 선언, 라인란트 비무장 지대 점령,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합병 등에도 프랑스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1]
6. 8.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이틀 뒤인 9월 3일 영국과 함께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군에 참전하였다. 1940년 5월 11일, 아돌프 히틀러는 프랑스에 대한 전격 공격을 개시하여 베네룩스를 침공했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가 점령당하고 프랑스와의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6월 4일에는 됭케르크 전선에서 패배하여 됭케르크 철수 작전이 벌어졌다. 6월 14일에는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했고, 앙리 페탱은 6월 22일 독일에 항복했다. 프랑스 북부는 독일이 직접 통치했고, 남부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 앙리 페탱이 통치하는 괴뢰정부 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비시 정부는 보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개인독재에 기반했다.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드골은 영국에 망명 정부를 세워 비시 정부에 저항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들이 프랑스 정권을 장악하여 현재의 프랑스 정부를 구성했다.
1943년 7월 10일 미국과 영국군이 시칠리아섬에 상륙하고, 9월 3일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프랑스 탈환 계획이 수립되었다.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통해 노르망디를 되찾았다. 용기병 작전으로 코트다쥐르를 시작으로 연합군은 공세를 펼쳤고, 1944년 8월 25일 파리가 해방되면서 완전히 수복되었다. 자유 프랑스 정부는 파리로 귀환하여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를 설립하였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이 항복하면서 유럽에서의 전쟁은 끝이 났다.


7. 현대
1945년 이후 프랑스는 모네 플랜과 미국의 마셜 플랜 지원으로 경제를 재건하고 '영광의 30년'이라 불리는 호황기를 맞았다.[129] 1911년 4,070만 명에서 1936년 4,150만 명으로 안정세를 유지하던 인구는, 1945년 이후 베이비붐과 북아프리카 등 옛 프랑스 식민지로부터의 꾸준한 이민으로 1946년 4,100만 명에서 1966년 5,000만 명, 1990년에는 6,000만 명으로 증가했다.[59] 농업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여 1945년 노동력의 35%에서 2000년에는 5% 미만으로 줄었다.[60]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으로서 국제 연맹의 상임 이사국이 되었고, 알자스-로렌을 되찾았으며, 구 독일 제국 식민지와 구 오스만 제국 영토 일부를 위임 통치령으로 획득했다. 시리아 아랍 왕국을 점령하여 프랑스 위임 통치령 시리아를 성립시켰다.
1960년대 후반, 세계적인 통화 위기와 1968년 사회적 격변으로 경제 성장이 둔화되기 시작했다.[129] 1968년 5월, 파리 교외 낭테르의 파리 대학 분교 문학부가 폐쇄되면서 5월 혁명이 시작되었다.[129] 학생 시위는 드골 정권을 뒤흔드는 전국 규모의 파업으로 발전했고, 결국 드골 정권이 무너졌다.[129]
1973년 석유 파동으로 에너지 비용이 증가하면서 경제적 불안정이 심화되었다.[130]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정부(1974~1981)는 레몽 바르 총리의 엄격한 경제 정책("바르 계획")을 통해 경제 회복을 시도했지만, 경제적 어려움은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임기까지 계속되었다.[130][131][132] 1980년대 초 경기 침체 이후, 국가 주도 경제는 포기되고, 1990년대 초 경제 불황 이후 성장이 재개되었다.[132][133]
소련의 해체와 냉전 종식 이후, 프랑스는 핵 능력을 줄이고 징병제를 폐지했다.[135] 1990년 걸프 전쟁에 참여했고, 유럽 연합(EU) 발전에 기여하며 마스트리흐트 조약을 비준하고 유로화를 도입했다.[135] 에어버스, 갈릴레오 위치 결정 시스템, 유로군단 등 유럽 공동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자크 시라크는 높은 실업률 해결을 공약으로 내걸고 집권했으며, 경제는 강화되었다.[133] 프랑스는 NATO의 유고슬라비아 폭격에 참여하고, 국제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135] 2002년 파리에 국제 대테러 정보 센터인 얼라이언스 기지(Alliance Base)가 설립되었다.[135] 프랑스는 2003년 이라크 침공을 강력하게 거부했다.
자크 시라크는 2002년에 재선되었으며,[136] 이라크 침공에 대한 강력한 반대자가 되었다.[137] 니콜라 사르코지는 2007년에 취임하여 2011년 리비아 군사 개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138][139]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는 사르코지에게 타격을 주었고, 그는 201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프랑수아 올랑드에게 패배했다.[133] 올랑드는 유럽 국가 부채 위기 해결 방안으로 성장 정책을 옹호했다.[140]
알제리 전쟁 이후, 수십만 명의 무슬림들이 프랑스에 정착했으며, 특히 대도시에서 높은 실업률에 시달렸다.[141] 2005년, 프랑스 도시의 아랍계 이민자 거주 지역에서 폭동이 발생했다.[142][143] 이는 프랑스 내 인종차별과 경찰 폭력 문제를 반영한다는 주장도 있다.[144]
2015년, 프랑스의 세속적 가치와 무슬림 보수주의 사이의 갈등이 지속되었다.[145] 에어 프랑스 8969편 납치 사건(1994), 툴루즈 및 몽토방 총격 사건(2012) 등이 발생했다.[145] 2015년 1월, ''샤를리 에브도''와 유대인 식료품점이 공격받았고, 세계 지도자들은 언론의 자유를 지지하기 위해 파리에 모였다.[145] 2015년 11월 파리 테러, 2016년 니스 트럭 테러 등 테러 공격이 이어졌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에마뉘엘 마크롱이 승리했고,[146] 2022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다.[147] 높은 실업률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139]
7. 1. 제4공화국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샤를 드 골은 임시 정부 총리였으나 전쟁 후 정당 간 협상 실패로 하야했다. 이후 제4공화국이 출범했으나, 정치적, 경제적으로 불안정했다.[174] 8년간의 인도차이나 전쟁과 알제리 문제로 내전 위기까지 겪었다.[174]1944~1945년, 레지스탕스가 정국을 주도했지만 여러 파벌로 나뉘어 있었다. 드 골과 자유 프랑스 세력은 사회주의자, 기독교 민주당(MRP), 급진당 잔여 세력과 연합했다. 공산주의자들은 프랑스 내부 레지스탕스를 장악했지만, 소련의 지시로 정부와 협력했다. 르노 자동차, 주요 신문사 등 독일 협력 세력은 국유화되었고, 새로운 사회 보장 제도가 마련되었다. 노동 조합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기독교 민주당 파벌로 분열되었다.[98] 드 골은 모든 세력을 통제하지 못하고 1946년 사임했다.[99]
1946년 10월 13일, 새 헌법으로 제4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제4공화국은 연립 정부 형태의 의회 정부였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통제권을 되찾으려 했으나, 1954년 베트민에게 패배했다. 이후 알제리 분쟁이 발생했고, 유럽인 정착민 100만 명이 넘는 알제리 통제권 유지를 둘러싼 논쟁[100]으로 쿠데타와 내전 위기를 겪었다.[101] 드 골은 전쟁 종식을 위한 조치로 국가를 통합했고, 1962년 에비앙 협정으로 알제리가 독립했다.
1951년 6월 선거에서 우파가 다시 등장했고, 1954년 6월까지 중도 우파 연립 정부가 통치했다.[102]
전쟁 피해로 경제는 심각했고, 프랑스는 자력 회복이 어려웠다. 연합군의 폭격으로 교통 시스템이 파괴되었고, 독일군은 항만 시설을 파괴했다. 에너지 공급은 부족했고, 원자재 수입은 차단되어 공장들이 문을 닫았다. 독일은 산업 도구를 빼앗아 갔다. 미국의 긴급 원조 논의는 지연되었다. 수백만 명의 전쟁 포로와 강제 노동자들이 귀국했지만, 일자리와 식량은 부족했다. 독일 배상금 20%를 프랑스에 지불할 계획이었지만, 독일은 더 심각한 상황이라 지불 여력이 없었다.[103]
1946년 1월 드골 퇴임 후, 미국의 원조 관련 외교 교착이 해소되었다. 미군은 1944년부터 1946년까지 식량을 수송했고, 1945년부터 1947년까지 미국 재무부 대출과 현금 지원, 마셜 플랜 원조가 1951년까지 계속되었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전쟁 지원을 위해 1951년부터 1955년까지 추가 원조를 받았다. 저금리 대출 외에 보조금도 있었다. 1931년부터 지급이 중단된 제1차 세계 대전 부채는 1946년 블룸-번스 협정에서 재협상되었다. 미국은 1차 세계 대전 부채 28억달러를 탕감하고, 프랑스에 6.5억달러의 신규 대출을 제공했다. 프랑스 협상가 장 모네는 5개년 경제 회복 및 개발 계획을 제시했다.[104] 마셜 플랜은 프랑스에 23억달러를 무상 제공했다. 1946년부터 1953년까지 프랑스에 대한 미국의 보조금 및 신용 대출 총액은 49억달러였다.[105]
마셜 플랜은 국제 무역 장려, 관세 인하, 장벽 완화, 프랑스 경영 현대화를 목표로 했다. 미국 산업 시찰도 진행되었다. 프랑스 사절단은 미국의 공장, 농장, 상점,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들은 미국 노동자들의 번영과 차량 가격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106] 일부 프랑스 기업은 미국화에 저항했지만, 화학, 석유, 전자, 계측 등 수익성 높은 기업들은 미국 투자를 유치하고 시장을 확대했다.[107] 미국은 할리우드 영화 기회를 요구했고, 프랑스 영화 산업은 활력을 되찾았다.[108]
1945년 프랑스 경제는 암울했지만, 자원은 존재했고, 1950년대에 정상 성장을 회복했다.[109] 프랑스는 생산 전략, 인구 증가, 기술 및 정치 혁신으로 국제적 지위를 되찾았다. 상황은 회사마다 달랐다. 일부는 파괴, 손상, 국유화, 징발되었지만, 대부분은 전쟁 전보다 효율적으로 일했다. 미국의 압력에도 프랑스 산업 관리자 훈련 조직과 내용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이는 기존 기관의 소극적 태도와 이해 집단 간 갈등 때문이었다.[110]
모네 플랜은 경제 정책 틀을 제공했고, 마셜 플랜의 지원을 받았다. 국가 통제보다는 온건한 케인즈주의 자유 무역에서 영감을 받았다. 프랑스 경제는 서유럽 다른 국가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생산적이었다.[111]
피에르 멘데스 프랑스는 1954년부터 1955년까지 8개월간 급진당 출신 총리로, 사회당과 공산당의 지지를 받았다. 그의 최우선 과제는 디엔비엔푸 전투 패배 이후 인도차이나 전쟁 종식이었다.[112] 미국은 전쟁 비용 대부분을 지불했지만, 프랑스 내 지지는 붕괴되었다. 1954년 2월, 프랑스 국민 중 7%만이 호찌민과 베트민 운동으로부터 인도차이나를 지키기 위한 싸움을 계속하길 원했다.[113] 1954년 제네바 회담에서 피에르 프랑스는 베트민에게 북위 17도선 이북 베트남 통제권을 부여하고, 프랑스 군대 철수를 허용하는 협약을 맺었다.[114] 이로 인해 남베트남은 고립되었고, 미국이 지원하게 된다.[115] 피에르 프랑스는 하비브 부르기바와 1956년까지 튀니지 독립 합의에 도달했고, 모로코 민족주의자들과 프랑스 철수 논의를 시작했다.[116]
알제리에는 유럽인 거주자가 100만 명 이상 있었기에, 프랑스는 알제리 독립 전쟁이 정치, 사회적 위기로 번지기 전까지 독립을 허용하지 않았다. 알제리는 1962년 독립했고, 피에 누아르와 프랑스 지지 알제리인 모두 프랑스로 대규모 이민했다.[117][118][119]
7. 2. 제5공화국
1958년 6월, 샤를 드 골은 국민의회에서 절대 다수의 신임을 얻어 12년 만에 총리직에 복귀했다.[121] 이후 드골은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는 새로운 헌법을 발의하여 국민 투표에서 통과시켰고, 1959년 1월 제5공화국의 대통령에 취임했다.[121]드골은 대통령이 된 후 알제리 문제를 해결하고 프랑스를 세계에서 네 번째 핵 보유국으로 만들었다.[125] 또한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수립하는 등 미국-소련의 냉전 상황에서 '프랑스의 영광'을 회복하고 국제 사회에서 프랑스의 발언권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1958년 5월, 프랑스령 알제리에서 프랑스군 점령과 아랍 민족주의 반란에 대한 불안정한 제4공화국은 붕괴했다. 국민 의회는 1958년 5월 위기 동안 드골을 다시 권력으로 불러들였다. 그는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한 제5공화국을 창설했고, 이 자리에서 선출되었다.[121] 그는 식민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그의 복귀를 지지했던 피에드-누아(알제리에 정착한 프랑스인)와 군대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종식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면서 프랑스를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1962년 알제리에 독립을 부여했고, 점차 다른 프랑스 식민지에도 독립을 부여했다.[121]
드골은 프랑스의 본질에 필수적인 "웅대함"을 선포하며, 그의 "웅대함의 정치"를 시작했다.[122][123] 그는 세계 문제에 있어서 프랑스의 완전한 자율성을 요구했는데, 이는 NATO, 유럽 공동체 또는 다른 누구에 의해서도 주요 결정이 강요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드골은 "국가 독립" 정책을 추구했다. 그는 영국이 프랑스 문제에 너무 큰 발언권을 얻을 것을 우려하여 영국의 유럽 경제 공동체 가입을 거부했다.[124] 그는 공식적으로 NATO를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이 NATO에 너무 많은 통제권을 가지고 있다고 우려하여 군사 통합 지휘에서 탈퇴했다. 그는 프랑스를 4번째 핵 강국으로 만든 독립적인 핵 개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프랑스는 이후 소련에 대한 공격이 양측 모두의 완전한 파멸을 가져올 것이라는 상호확증파괴 교리를 채택했다.[125]

그는 "앵글로색슨" (미국과 영국)과 소련의 세력 균형을 맞추기 위해 우호적인 프랑스-독일 관계를 회복시켰다. 드골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126] 그는 미국의 경제력, 특히 그의 재무 장관이 미국의 달러에 대해 "과도한 특권"이라고 부른 것에 분노했다.[127]
1968년 5월에는 학생과 노동자들의 광범위한 시위 속에서 권력을 잃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군대의 지원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그의 당은 급진주의를 비난하며, 1968년 선거에서 의회 내 과반수를 늘리며 승리했다.[128]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골은 더 많은 분권을 제안한 국민 투표에서 패배한 후 1969년에 사임했다.
7. 3. 현대 프랑스
1968년 5월, 파리 교외 낭테르의 파리 대학 분교 문학부가 폐쇄되면서 5월 혁명이 시작되었다.[129] 1967년 11월부터 학생과 대학 당국 간의 갈등이 있었고, 1968년 3월 22일 학생 그룹이 학내 집회를 열면서 경찰과 유혈 충돌이 발생했다.[129] 이에 반발한 학생들이 5월 2일 분교를 점거했고, 이는 분교 폐쇄로 이어졌다.[129]소르본 본교에서 조사가 열렸지만, 본교 당국은 다시 경찰을 불렀고, 학생 약 600명이 체포되고 본교도 폐쇄되었다.[129] '프랑스 학생 전국동맹(UNEF)'도 지원을 강화했고, 5월 11일 카르티에라탱 거리에서 학생 시위대와 경찰 간의 유혈사태가 벌어졌다.[129] 이 시위는 드골 정권을 뒤흔드는 전국 규모의 파업으로 발전했고, 결국 드골 정권이 무너졌다.[129]
1945년 이후, 프랑스는 모네 플랜과 미국의 마셜 플랜 지원으로 경제를 재건하고 '영광의 30년'이라 불리는 호황기를 맞았다.[129] 그러나 1960년대 후반, 세계적인 통화 위기와 1968년 사회적 격변으로 경제 성장이 둔화되기 시작했다.[129] 1973년 석유 파동으로 에너지 비용이 증가하면서 경제적 불안정이 심화되었다.[130] 지스카르 데스탱 정부(1974~1981)는 레몽 바르 총리의 엄격한 경제 정책("바르 계획")을 통해 경제 회복을 시도했지만, 경제적 어려움은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임기까지 계속되었다.[130][131][132] 1980년대 초 경기 침체 이후, 국가 주도 경제는 포기되고, 1990년대 초 경제 불황 이후 성장이 재개되었다.[132][133]
소련의 해체와 냉전 종식 이후, 프랑스는 핵 능력을 줄이고 징병제를 폐지했다.[135] 1990년 걸프 전쟁에 참여했고, 유럽 연합(EU) 발전에 기여하며 마스트리흐트 조약을 비준하고 유로화를 도입했다.[135] 에어버스, 갈릴레오 위치 결정 시스템, 유로군단 등 유럽 공동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자크 시라크는 높은 실업률 해결을 공약으로 내걸고 집권했으며, 경제는 강화되었다.[133] 프랑스는 NATO의 유고슬라비아 폭격에 참여하고, 국제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135] 2002년 파리에 국제 대테러 정보 센터인 얼라이언스 기지(Alliance Base)가 설립되었다.[135] 프랑스는 2003년 이라크 침공을 강력하게 거부했다.

알제리 전쟁 이후, 수십만 명의 무슬림들이 프랑스에 정착했으며, 특히 대도시에서 높은 실업률에 시달렸다.[141] 2005년, 프랑스 도시의 아랍계 이민자 거주 지역에서 폭동이 발생했다.[142][143] 이는 프랑스 내 인종차별과 경찰 폭력 문제를 반영한다는 주장도 있다.[144]
2015년, 프랑스의 세속적 가치와 무슬림 보수주의 사이의 갈등이 지속되었다.[145] 에어 프랑스 8969편 납치 사건(1994), 툴루즈 및 몽토방 총격 사건(2012) 등이 발생했다.[145] 2015년 1월, ''샤를리 에브도''와 유대인 식료품점이 공격받았고, 세계 지도자들은 언론의 자유를 지지하기 위해 파리에 모였다.[145] 2015년 11월 파리 테러, 2016년 니스 트럭 테러 등 테러 공격이 이어졌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에마뉘엘 마크롱이 승리했고,[146] 2022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다.[147] 높은 실업률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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オランド仏大統領、再選目指さず 現職として異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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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프랑스 정치는 작은 정당들이 여러곳에서 난립해 6개월마다 한번씩 정부가 교체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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