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근대사 연표는 1840년부터 1945년까지 동아시아 지역에서 일어난 주요 사건들을 다룬다. 이 시기에는 서구 열강의 침략, 청나라와 일본의 개항, 조선의 근대화 시도와 좌절,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제국주의화,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청일 전쟁, 러일 전쟁, 대한제국의 국권 상실, 신해혁명, 일제 식민 통치, 3.1 운동, 다양한 독립 운동의 전개, 중국의 항일 전쟁, 일본의 패망과 광복 등의 사건이 발생했다. 특히 일본은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며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했고, 조선은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되어 식민 지배를 받았다.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한국은 광복을 맞이했지만, 미•소에 의해 분단되었다.
2. 동아시아의 개항과 서구 열강의 침략 (1840-1860)
19세기 중반, 산업 혁명을 거치며 군사력과 경제력을 키운 서구 열강은 동아시아로 눈을 돌려 본격적인 팽창 정책을 추진했다. 이들의 침략은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국제 질서를 뒤흔들었고, 각국은 문호 개방 압력과 함께 불평등한 조약 체결을 강요받는 상황에 놓였다.
청나라는 1840년 발발한 제1차 아편 전쟁에서 영국에게 패배하며 1842년 난징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청나라가 서구 열강과 맺은 최초의 불평등 조약으로, 홍콩 할양 및 주요 항구 개방 등 굴욕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홍수전이 이끈 태평천국의 난(1851-1864)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는 와중에, 1856년 영국과 프랑스는 제2차 아편 전쟁을 일으켜 청나라를 다시 침략했다. 결국 청나라는 텐진 조약(1858)과 베이징 조약(1860)을 통해 외국 공사의 베이징 주재 허용, 기독교 포교의 자유 확대, 추가 영토 할양 등 더 많은 이권을 넘겨주고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당했다.
일본은 1854년 미국 페리 제독 함대의 무력시위에 굴복하여 가나가와 조약을 체결하며 200년 넘게 유지해 온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문호를 개방했다. 이후 미일 수호 통상 조약(1858) 등 추가적인 불평등 조약을 맺으며 영사재판권 인정, 관세 자주권 상실 등의 불리한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 연이은 개항과 불평등 조약 체결은 에도 막부의 권위를 크게 떨어뜨렸고, 존왕양이 운동과 같은 반(反)막부 움직임을 촉발했다. 1860년 무렵에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사무라이 계층의 갈등이 심화되며 내전의 기운마저 감돌았으나, 한편으로는 서구 문물을 배우기 위해 미국에 공식 사절단을 파견하는 등 변화에 대응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조선은 1848년경부터 서양 선박인 이양선이 연안에 자주 출몰하면서 외부 세계의 변화를 감지하기 시작했다. 내부적으로는 철종 즉위(1849) 이후 안동 김씨 중심의 세도정치가 심화되었고, 삼정의 문란으로 대표되는 사회 모순으로 인해 민중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1860년 최제우는 동학을 창시하여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바탕으로 사회 개혁과 외세 배척을 주장하며 새로운 시대를 모색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결론적으로 1840년부터 1860년까지의 시기는 동아시아 3국 모두 서구 열강의 본격적인 침략과 개항 압력에 직면하여 기존 질서가 붕괴되고, 내부적인 혼란 속에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격동의 시작점이었다.
1848년부터 1860년까지 동아시아 각국은 내우외환으로 큰 혼란을 겪었다. 조선에서는 1848년 이양선이 경상도, 전라도, 황해도, 함경도 등 5도 연안에 출현하여 조정과 백성들을 긴장시켰다.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고 강화도령으로 불리던 철종이 왕위에 올랐다. 철종의 즉위로 1851년부터는 외척인 안동 김씨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는 세도정치가 극에 달했다. 이 시기 삼정의 문란이 심화되면서 농민들의 고통은 가중되었고, 사회 전반의 모순이 깊어졌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1860년 최제우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을 바탕으로 동학을 창시하여, 기존의 신분 질서에 도전하고 새로운 사회 개혁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청나라에서는 1850년 도광제가 붕어하고 함풍제가 즉위하였다. 이듬해인 1851년,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홍수전이 광시성에서 봉기하여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했다. 이 난은 14년 동안 지속되며 청 왕조의 통치 기반을 크게 뒤흔들었다. 청 정부는 증국번에게 향용인 상군을 조직하게 하여(1852년) 난을 진압하려 했으나, 전쟁은 장기화되었다. 내부 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1856년 영국과 프랑스가 애로호 사건을 빌미로 제2차 아편 전쟁을 일으켰다. 청나라는 이 전쟁에서 패배하여 1858년 러시아와 아이훈 조약을 체결하여 흑룡강 이북 지역을 할양했고,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와는 텐진 조약을 맺어 외국 공사의 베이징 주재 허용, 기독교 포교의 자유 인정, 배상금 지불 등 불평등한 요구를 수용해야 했다. 1860년에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고 황제의 여름 별궁인 이화원과 원명원을 약탈하고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결국 청나라는 굴욕적인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여 텐진 조약의 내용을 비준하고 구룡반도 일부를 영국에 추가로 할양하는 등 더 많은 이권을 서구 열강에 넘겨주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에도 막부의 권위가 점차 약화되고 있었다. 1854년, 미국 페리 제독이 이끄는 함대의 압력에 굴복하여 가나가와 조약을 체결하고 시모다와 하코다테 두 항구를 개항하였다. 이는 200여 년간 유지해 온 쇄국정책을 포기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인 1855년에는 러시아와 시모다 조약을 체결하여 국교를 수립하고 국경 문제를 협의했다. 1858년에는 미국과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여 영사재판권을 인정하고 관세 자주권을 상실하는 등 불평등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연이은 개항과 불평등 조약 체결은 막부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존왕양이 운동과 같은 반막부 운동을 격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860년에 이르러서는 정치적 혼란이 심화되며 사무라이 계층 내부의 갈등과 반막부 움직임이 본격화되어 내전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한편, 막부는 서구 열강과의 관계를 관리하고 선진 문물을 배우기 위해 1860년 미국에 첫 공식 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3. 동아시아 각국의 근대화 노력과 좌절 (1861-1893)
19세기 후반, 서구 열강의 거센 압력에 직면한 동아시아의 청나라, 조선, 일본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근대화를 모색하며 국가의 생존과 부국강병을 꾀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순탄치 않았으며, 내부적인 한계와 외부 세력의 간섭 속에서 좌절을 겪기도 했다.
청나라에서는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서양 무기의 우수성을 절감하고, 1861년 함풍제 사후 서태후가 신유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뒤 이홍장 등 개혁파 관료 주도로 양무운동을 시작했다.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여 군사력 강화와 공업 육성을 목표로 했으나, '중체서용'의 틀을 벗어나지 못해 근본적인 제도 개혁에는 이르지 못했다. 보수 세력의 반발과 관료 사회의 부패 역시 개혁의 발목을 잡았으며, 이는 1884년 베트남의 종주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중불전쟁에서의 패배로 이어지며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조선은 1863년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의 섭정 아래 서원 철폐 등 일부 개혁이 이루어졌으나, 대외적으로는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겪으며 척화비를 세우는 등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고수했다. 1873년 고종의 친정 이후 개화 정책이 모색되었으나, 1875년 일본의 운요호 사건 도발로 이듬해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며 강제로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이후 통리기무아문 설치(1880), 일본에 신사유람단, 청에 영선사 파견(1881) 등 개화 정책을 추진했지만, 구식 군대의 불만이 폭발한 임오군란(1882)과 청나라의 간섭 심화, 그리고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1884)이 청군의 개입으로 실패하면서 자주적인 근대화는 큰 난관에 부딪혔다. 또한, 1885년 영국의 거문도 불법 점령과 1889년 함경도방곡령에 대한 일본의 철회 압력 등 열강의 간섭과 경제적 침탈도 심화되었다.
일본은 1861년 러시아의 쓰시마 점령 시도 등 외세의 위협 속에서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며 가장 빠르고 급진적인 근대화의 길을 걸었다. 판적봉환(1871)에 이은 폐번치현(1871), 징병제(1872), 지세 개정(1873) 등을 통해 중앙집권적 국민 국가의 토대를 마련했다. 비록 조선 침략을 주장한 정한론(1873) 대두, 사무라이 계층의 불만으로 일어난 세이난 전쟁(1877)과 자유민권운동에 대한 탄압(1880년대)이 있었지만, 정부는 이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며 개혁을 밀어붙였다. 1885년 내각제도를 도입하고 1889년에는 천황 중심의 일본제국 헌법을 제정하여 입헌군주제의 외형을 갖추었다. 이러한 성공적인 근대화를 바탕으로 일본은 점차 제국주의적 팽창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이는 이후 동아시아 정세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3. 1. 청나라의 양무운동과 한계 (1861-1894)
1861년, 함풍제가 붕어하고 어린 동치제가 즉위하자 서태후가 신유정변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였다. 서태후는 이홍장, 증국번 등 한인 관료들과 함께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루려는 양무운동 (1861년 ~ 1894년)을 추진하였다. 이는 태평천국의 난 (1851년 ~ 1864년)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서양 무기의 우수성을 절감한 것이 주요 배경이 되었다. 양무운동 시기에는 군수 공업을 중심으로 서양식 공장을 설립하고 신식 군대를 양성하는 등 근대화를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양무운동은 '중체서용(中體西用, 중국의 전통적인 체제는 유지하면서 서양의 기술만 이용함)'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근본적인 정치, 사회 제도의 개혁 없이 기술 도입에만 치중했으며, 보수적인 관료들의 반발과 부정부패 등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1874년 동치제가 붕어하고 광서제가 즉위한 이후에도 양무운동은 지속되었으나, 내부적인 문제점들은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양무운동의 한계는 대외 전쟁에서의 패배로 명확히 드러났다. 1884년 베트남을 둘러싸고 벌어진 중불전쟁에서의 패배는 양무운동의 성과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결정적으로 1894년, 조선에서 발생한 동학 농민 운동을 계기로 발발한 청일전쟁에서 일본에게 참패하면서 양무운동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이 패배는 청나라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실추시켰으며, 이후 더 근본적인 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계기가 되었다.
3. 2. 조선의 개화 시도와 좌절 (1861-1893)
1861년 청나라에서 양무운동이 시작될 무렵, 조선에서는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간행하였다. 1862년에는 진주민란을 필두로 전국적인 농민 항쟁이 일어나자,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해 삼정이정청이 설치되기도 하였다(임술농민봉기).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대원군의 차남인 고종이 즉위하였고, 이후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통해 개혁을 추진하였다. 1865년에는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자 경복궁 중건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서구 열강의 통상 요구가 거세졌다.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에서 통상을 요구하다 격침되었고,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병인박해를 빌미로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공하는 병인양요가 발발하였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개화 정책 추진의 가능성이 열렸다. 그러나 정한론을 앞세운 일본은 1875년 군함 운요호를 파견하여 강화도와 영종도에서 무력 시위를 벌이는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의 문호 개방을 압박하였다. 결국 조선은 1876년 일본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조약으로 부산 외 2개 항구가 개항되었고, 영사 재판권과 해안측량권 등을 일본에 넘겨주게 되었다.
개항 이후 개화 정책을 총괄하기 위해 1880년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었고, 1881년에는 일본의 발전상을 시찰하기 위한 신사유람단과 청나라의 근대 무기 기술을 배우기 위한 영선사가 각각 파견되었다. 1882년에는 서구 열강과는 최초로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구식 군대에 대한 차별 대우와 민씨 정권의 부정부패에 반발한 군인들이 임오군란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진압되었으나,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의 내정 간섭이 심화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일본과는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여 배상금을 지불하고 일본 공사관 경비 병력의 주둔을 허용하게 되었다.
1883년에는 근대적 신문인 한성순보가 창간되어 개화 사상을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1884년,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급진 개화파는 청나라의 간섭을 배제하고 자주적인 근대 국가를 건설하고자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이들은 문벌 폐지, 인민 평등권 확립, 재정 일원화 등을 포함한 개혁 정강을 발표하였으나, 청나라 군대의 신속한 개입과 보수 세력의 반격, 민중의 지지 부족 등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정변의 결과 조선은 일본과 한성조약을 체결하여 또다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청과 일본 사이에는 텐진 조약이 체결되어 이후 조선에서 양국 군대의 충돌 가능성을 높였다.
갑신정변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근대 문물 수용 노력은 계속되어, 1885년에는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이후 제중원으로 개칭)이 설립되었고,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가 근대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을 세웠다. 그러나 같은 해 영국 해군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한다는 명분으로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열강의 각축 속에서 조선이 처한 위태로운 상황을 드러냈다. 1886년에는 스크랜턴 부인이 한국 최초의 근대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설립하였다.
경제적으로는 개항 이후 일본 상인들의 곡물 유출이 심화되어 물가 상승과 식량 부족 문제를 겪었다. 이에 1889년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 등 지방관들이 방곡령을 내려 곡물 유출을 금지하려 했으나, 강화도 조약의 관련 규정을 내세운 일본의 강력한 항의와 압력으로 철회되고 오히려 배상금을 요구받는 등 자주적인 경제 정책 추진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처럼 1860년대부터 1890년대 초까지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치와 개화파의 갑신정변 등 근대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여러 노력을 기울였으나, 청나라, 일본, 러시아, 영국 등 열강의 끊임없는 간섭과 침탈, 그리고 임오군란과 같은 내부적인 갈등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 자주적인 근대화 시도는 외세의 간섭과 내부 갈등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3. 3.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제국주의화 (1868-1893)
1868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은 중앙집권적인 근대 국가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869년, 보신 전쟁이 함관전투를 끝으로 막부 세력의 패배로 종결되면서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메이지 정부는 국가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여러 개혁을 단행했다. 1871년에는 판적봉환에 이어 폐번치현을 실시하여 기존의 번(藩)을 폐지하고 중앙 정부가 직접 통치하는 현(県)을 설치함으로써 봉건제를 해체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했다. 같은 해, 서구 문물과 제도를 배우기 위해 이와쿠라 사절단을 미국과 유럽에 파견했다. 1872년에는 징병제를 도입하여 근대적인 군대를 창설하고, 신기관을 설치하여 국가 신토를 강화하려 했다. 1873년에는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고 안정적인 세수 확보를 위해 지세 개정을 단행했다.
그러나 급격한 근대화 과정에서 내부 갈등도 적지 않았다. 1873년에는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이 대두되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고, 대신 대만 출병을 강행하여 제국주의적 팽창의 첫발을 내디뎠다. 1874년에는 사가의 난, 1877년에는 사이고 다카모리가 주도한 세이난 전쟁 등 무사 계층의 불만이 폭발하기도 했으나, 정부는 이를 모두 진압하며 권력을 공고히 했다. 1875년에는 러시아와 쿠릴-사할린 교환조약을 체결하여 국경을 확정했다. 1878년에는 군 통수 기구인 대본영을 설치하고, 근위대 병사들이 일으킨 죽교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한편, 서구 사상의 유입과 함께 자유민권운동이 일어나 1881년에는 헌법 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부는 치치부 사건(1884), 오사카 사건(1885) 등 민권 운동을 탄압하고 1887년에는 보안조례를 공포하여 활동을 억압했다. 1885년에는 내각제도를 발족하여 근대적인 행정 체계를 갖추었다. 1886년에는 영국 상선 노르만톤호 사건이 발생하여 일본 내 불평등 조약 개정 여론이 높아지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889년, 천황 주권을 강조하는 일본제국 헌법이 제정되었다.
헌법 제정 이후, 1890년에는 교육칙어를 발표하여 천황 중심의 국가주의 교육을 강화하고, 첫 총선거를 실시하여 형식적인 입헌 정치를 시작했다. 1891년에는 일본을 방문 중이던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 2세가 습격당하는 오츠 사건이 발생하여 국제적인 긴장을 유발하기도 했다. 이 시기 일본은 꾸준히 군사력을 증강하며 부국강병을 추진했고, 이는 이후 본격적인 제국주의 침략으로 이어지게 된다.
4.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과 동아시아의 위기 (1894-1911)
1894년 조선에서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이를 빌미로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1895)을 통해 랴오둥반도와 타이완 등을 할양받으며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다. 그러나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간섭(1895)으로 랴오둥반도를 반환해야 했고, 이는 열강 간의 경쟁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타이완을 점령하여 식민 통치를 시작했고, 청나라는 전쟁 패배 이후 열강들에게 영토 조차를 허용하며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해갔다.
조선에서는 청일전쟁 중 갑오개혁이 추진되었으나, 일본의 영향력 확대 속에 1895년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단발령이 강행되자, 이에 반발한 을미의병이 전국적으로 봉기했다. 1896년 고종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했고, 이는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이권 침탈을 더욱 가속화했다. 한편으로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 창립 등 자주독립을 위한 움직임도 나타났다. 1897년 고종은 환궁하여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하며 자주독립 국가임을 천명했으나, 1898년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통해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 보수 세력의 탄압으로 강제 해산되었다. 같은 해 중국에서는 무술변법이 무술정변으로 좌절되었고, 1901년에는 외국 세력 배척을 내세운 의화단의 난이 8개국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1902년영국과 일본이 러시아 견제를 위해 영일동맹을 체결하면서 동아시아의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결국 1904년 대한제국과 만주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러일 전쟁이 발발했다. 일본은 전쟁 개시와 함께 대한제국에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하여 군사적 요충지를 확보하고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 영국과 제2차 영일 동맹을 맺고, 러시아와는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국제적으로 승인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이에 을사의병이 봉기하는 등 전국적인 저항이 일어났다. 1907년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으나 실패했고, 일본은 이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이어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통해 내정권을 장악하고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해산된 군인들이 합류하면서 정미의병은 더욱 격렬해졌고, 국채보상운동과 신민회 결성 등 다양한 형태의 국권 회복 운동이 전개되었다.
1908년 미국에서는 장인환, 전명운 의사가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하는 의거가 있었다. 1909년에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여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렸다. 그러나 일제는 대대적인 남한 대토벌 작전을 벌여 의병 운동을 잔혹하게 탄압했다. 결국 1910년 일본은 한일합방을 강행하여 대한제국의 주권을 완전히 빼앗고 식민 통치를 시작했다.
한편, 1911년 중국에서는 쑨원 등이 이끈 신해혁명이 성공하여 청나라 왕조가 무너지고 이듬해 중화민국이 수립되었다. 이는 동아시아 역사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지만, 대한제국의 국권 상실이라는 비극 속에서 동아시아는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과 민족적 위기라는 격동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105인 사건(1911) 등 일제의 탄압이 이어졌다.
4. 1. 청일 전쟁과 일본의 패권 장악 (1894-1895)
1894년, 조선에서는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하였고, 이를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같은 해 조선에서는 갑오개혁이 추진되었으며, 개화파 지도자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암살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일본에서는 이 전쟁을 계기로 본격적인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으며, 국내적으로는 의회가 구성되었다.
1895년,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함께 랴오둥반도, 타이완, 펑후 제도 등을 넘겨받았다. 그러나 랴오둥반도 할양에 대해서는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강력한 개입,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인해 일본은 이를 다시 청나라에 반환해야 했다. 하지만 일본은 타이완을 점령하여 식민 통치를 시작함으로써 제국주의적 팽창을 본격화했다. 한편, 청나라는 이 전쟁의 패배와 열강의 간섭 속에서 이후 러시아, 프랑스, 독일, 영국 등에게 영토 조차를 허용하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일본의 영향력이 급격히 커지는 상황에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더하여 단발령 강제 시행 등에 반발하여 전국 각지에서 을미의병이 봉기하며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4. 2. 열강의 이권 침탈과 조선의 위기 (1895-1904)
청일전쟁의 결과로 1895년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은 청나라의 약화를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할양받았으나,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간섭으로 이를 다시 청나라에 반환해야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구 열강들은 청나라 영토의 조차를 요구하며 본격적인 이권 침탈에 나섰다. 일본은 조약에 따라 대만을 점령하고 식민 통치를 시작했다.
같은 해 조선에서는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주도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발생했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성을 여실히 보여준 만행이었으며, 이후 김홍집 내각은 단발령을 강행하여 백성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을미의병이 봉기하여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1896년,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이는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는 결과를 낳았지만, 한편으로는 서재필 등이 중심이 되어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자주독립과 민권 신장을 위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897년, 고종은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환궁한 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했다. 이는 청나라와의 전통적인 종속 관계를 청산하고 완전한 자주독립 국가임을 국내외에 선언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1898년,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이권 침탈을 규탄하고 국정 개혁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보수 세력의 반발과 고종의 견제를 받아 결국 강제 해산되고 말았다. 같은 해 청나라에서는 캉유웨이, 량치차오 등이 주도한 무술변법이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의 무술정변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1899년, 대한제국은 국가의 기본 통치 규범인 대한국 국제를 반포하여 황제 중심의 전제군주제를 법적으로 확립하고자 했다. 또한 한국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개통되어 근대 문물의 도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1901년, 청나라에서는 외국 세력 배척을 내세운 의화단의 난이 발생했으나, 열강 8개국 연합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대한제국에서는 과도한 세금 징수에 반발한 이재수의 난이 일어나는 등 사회적 불안이 계속되었다.
1902년,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위협을 느낀 영국과 일본은 상호 협력을 위한 영일동맹을 체결했다. 이는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특히 일본의 한반도 침략 야욕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1904년, 결국 대한제국과 만주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러일 전쟁이 발발했다. 일본은 전쟁 개시와 동시에 대한제국에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하여 군사 전략상 필요한 지역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다. 또한 군수물자 수송을 목적으로 경부선 철도를 완공했다. 일본군은 랴오둥반도에 상륙하여 여순을 함락시키는 등 전쟁 초기부터 우세를 점하며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했다.
러일전쟁 중 랴오둥반도에 상륙하는 일본군
4. 3. 러일 전쟁과 대한제국의 국권 상실 (1904-1910)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전쟁 수행을 명분으로 대한제국과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여 국내 주요 시설과 영토를 군용지로 사용하고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전쟁 중 여순을 함락시키며 승기를 잡았다. 같은 해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선이 완공되었다.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미국과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영국과는 제2차 영일 동맹을 맺어 대한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려 했다.러시아와는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여 만주에서의 영향력을 배제시켰다. 이러한 국제적 환경 속에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이에 저항하여 전국 각지에서 최익현, 민종식 등을 중심으로 을사의병이 봉기하였다. 한편 일본 내에서는 포츠머스 조약의 내용에 불만을 품은 군중들이 히비야 방화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1907년, 고종은 을사늑약의 무효를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와 열강들의 외면으로 헤이그 특사 파견은 실패로 돌아갔고, 일본은 이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이어 일본은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내정권을 장악하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해산된 군인들은 정미의병에 합류하여 13도 창의군을 결성하는 등 항일 투쟁을 더욱 격렬하게 전개하였다. 국내에서는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안창호, 양기탁 등을 중심으로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신민회가 조직되었다. 또한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전신인 협성신학교가 개교했다.
1908년 청나라에서는 광서제가 사망하고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가 즉위했으며, 입헌 군주제를 표방한 흠정헌법대강이 반포되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장인환과 전명운 의사가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을 옹호하던 친일 미국인 외교 고문 스티븐스를 저격하여 처단하였다. 일본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적기사건이 발생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역에서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처단하였다. 이 의거는 일제의 침략에 대한 한국 민족의 강력한 저항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일제는 의병 활동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대대적인 남한 대토벌 작전을 전개하여 수많은 의병과 민간인을 학살하고 의병 운동에 큰 타격을 입혔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한일합방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공포하여 대한제국의 국권을 완전히 강탈하고 식민지로 삼았다. 이로써 1897년 선포된 대한제국은 13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일본 내에서는 천황 암살을 모의했다는 명목으로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을 대거 검거하고 처형한 대역 사건과 도라노몬 사건이 발생하여 사회 통제가 강화되었다.
4. 4. 중국의 신해혁명과 중화민국 수립 (1911)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였다. 이 혁명의 결과로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건국되었다. 그러나 1916년 원세개가 사망한 이후, 각 지역의 군벌들이 난립하여 서로 세력 다툼을 벌이는 혼란스러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5. 일제 식민 통치와 민족 독립 운동 (1910-1945)
1910년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은 국권을 상실하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초기에는 헌병경찰제를 통한 무단 통치를 시행하며 한국인의 저항을 억압했다. 이에 맞서 국내외에서 의병 활동과 애국계몽운동의 맥을 잇는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 등 많은 민족 운동가들이 탄압받았고, 1912년에는 임병찬 등이 복벽주의를 내세운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했다. 1914년에는 하와이에서 박용만이 국민군단을, 연해주에서는 이상설, 이동휘 등이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하는 등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 노력이 이어졌다. 1915년에는 박상진, 김좌진 등이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여 국내외에서 활동했으며, 박은식은 한국통사를 저술하여 민족의 역사를 기록하고 독립 의지를 고취했다. 일제는 1918년까지 토지조사사업을 완료하여 식민 통치의 경제적 기반을 강화하고 농민들의 토지를 수탈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종결 후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제기되면서 독립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고, 이는 1919년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맞물려 거족적인 3.1 운동으로 폭발했다.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을 시작으로 서울에서 촉발된 만세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일제의 무력 탄압에도 굴하지 않는 한국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렸다. 3.1 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같은 해 김원봉 등이 조직한 의열단은 일제 요인 암살과 식민 통치 기관 파괴 등 적극적인 투쟁을 벌였다.
1920년대에는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무장 독립 투쟁이 활발히 전개되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일제의 보복으로 간도 참변과 같은 비극을 겪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민족 언론이 창간되었고, 농민과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암태도 소작쟁의, 원산 총파업)과 학생 운동(6·10 만세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사회주의 사상의 확산과 함께 조선공산당이 창당되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이 연대한 신간회가 결성되어 민족 운동의 역량을 결집하고자 했다. 한편, 관동대지진 당시 관동 대학살로 수많은 무고한 조선인이 희생되는 참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이듬해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면서 침략 전쟁을 본격화하자, 독립운동 역시 더욱 치열해졌다. 김구가 이끈 한인애국단 소속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침체되었던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중국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국내에서는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등 민족 문화 수호 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일제는 조선어학회 사건 등을 통해 이를 탄압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고 신사참배, 창씨개명, 국민 징용령, 여자정신근로령 등을 강요하며 민족 말살 정책과 인적·물적 자원 수탈을 극단으로 밀어붙였다.
이러한 탄압 속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충칭으로 이동하여 항전을 계속했고, 1940년 한국 광복군을 창설했다.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의 일부는 한국 광복군에 합류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고자 노력했다. 국내에서는 여운형 등이 건국 동맹을 결성하여 해방에 대비했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연합국 정상들은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을 약속했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하면서 한국은 35년간의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했다. 그러나 광복의 기쁨도 잠시, 미국과 소련 군대가 38선을 경계로 한반도에 진주하면서 군정이 시작되었고, 이는 이후 민족 분단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1919년은 일제강점기 하에서 민족의 독립 의지가 크게 분출된 해였다. 도쿄의 한국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2.8 독립 선언이 발표되어 독립 의지를 국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 고종 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민족적 슬픔과 분노를 촉발하며 3.1 운동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는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학생, 시민, 농민 등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거족적인 독립 운동으로 발전했다. 3.1 운동은 일제의 무력 탄압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는 한국 민족의 독립 의지를 보여주었으며, 이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하고 체계적인 항일 투쟁을 이끄는 중심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김원봉 등을 중심으로 의열단이 조직되어 일제의 주요 인사 암살 및 식민 통치 기관 파괴 등 적극적인 무장 투쟁을 전개하며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5. 3. 다양한 독립 운동의 전개 (1920-1945)
1920년대에는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무장 독립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은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했으며, 이어 김좌진 장군 등이 지휘한 북로군정서 군대는 청산리 전투에서 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러한 승리는 독립 의지를 크게 높였으나, 일제의 대대적인 보복 작전인 간도 참변으로 이어져 많은 동포가 희생되었다. 국내에서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어 민족 언론 활동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독립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지속되었다. 1922년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자치론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비판했다. 1923년에는 전라남도신안군 암태도에서 소작인들이 지주의 착취에 맞서 싸운 암태도 농민항쟁이 일어났으며, 같은 해 일본 관동대지진 당시에는 관동 대학살로 수많은 조선인이 무고하게 학살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상하이에서는 독립운동 노선의 통일을 위해 국민대표회의가 열렸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920년대 중반부터는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독립운동도 활발해졌다. 1924년 조선청년총동맹과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되었고, 1925년에는 조선공산당이 비밀리에 창당되었다. 1926년 순종의 장례일을 기회로 6·10 만세운동이 일어나 학생들을 중심으로 민족 독립 의지를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1927년에는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힘을 합쳐 항일운동 단체인 신간회를 결성하여 전국적인 조직으로 발전했다. 1928년에는 원산에서 노동자들이 대규모 총파업을 벌인 원산 총파업이 있었고, 조선어 연구회(현 한글 학회)의 제안으로 가갸날(훗날 한글날)이 제정되어 민족 문화 수호 운동의 일환이 되었다. 1929년에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확산되며 학생들의 항일 의식을 보여주었고, 만주에서는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3부를 통합하려는 노력 끝에 국민부가 조직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 만주사변(1931)을 일으킨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 소속의 이봉창 의사는 1932년 도쿄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투척하였고, 윤봉길 의사는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의 전승 기념식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의 주요 인사들을 처단하는 의거를 일으켰다.
이 의거는 중국 국민당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국내에서는 조선어학회가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여 민족어 연구와 보급에 힘썼다. 그러나 일제는 1934년 조선 농지령을 공포하여 식민지 경제 수탈을 강화하고,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민족 말살 정책을 노골화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독립운동은 계속되었다. 1935년 중국 난징에서는 다양한 독립운동 세력이 연합하여 민족혁명당을 결성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하여 민족의 자긍심을 높였으나,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했고 동아일보는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정간 처분을 당했다. 1938년에는 중국한커우에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어 중국군과 함께 항일 무장 투쟁에 나섰다. 일제는 1939년 국민 징용령을 공포하여 한국인 노동력을 강제로 동원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에 들어 일제는 태평양 전쟁(1941)을 일으키며 전쟁을 확대했고, 한국인에 대한 탄압과 수탈은 극에 달했다. 1940년 창씨개명 정책이 시행되어 한국식 성명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요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충칭에서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여 연합군과 함께 싸울 준비를 했다. 1941년 임시정부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생하여 한글 연구 학자들이 대거 투옥되는 등 민족 문화 말살 시도가 이어졌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는 미국, 영국, 중국 정상이 전후 한국의 독립을 약속했다. 1944년에는 여자정신근로령이 시행되어 많은 여성이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으며, 국내에서는 여운형을 중심으로 비밀결사 조직인 건국동맹이 결성되어 해방에 대비했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한국은 광복을 맞이했으나, 곧바로 미국과 소련 군대가 한반도에 진주하면서 군정기가 시작되었다. 해방 직후 여운형 등은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기도 했다.
5. 4. 중국의 항일 전쟁과 국공 합작 (1931-1945)
1931년 일본이 일으킨 만주사변은 중국 침략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듬해인 1932년, 일본은 만주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세우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다시 황제 자리에 앉혔다. 또한 같은 해 상하이에서 상하이 사변을 일으켜 중국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강화했다. 1933년에는 탕구협정을 체결하여, 중국 국민정부로 하여금 만주국을 사실상 인정하도록 강요했다.
이러한 일본의 침략 속에서도 중국 내부는 국민당과 중국공산당 간의 내전 상태에 있었다. 1934년, 중국공산당은 국민당의 압박을 피해 대장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항일 공동 대응의 필요성이 커졌다. 1936년, 장쉐량 등이 시안에서 장제스를 감금한 서안사변이 발생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내전을 중단하고 일본에 맞서기 위한 제2차 국공합작이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1937년 7월, 베이징 근교에서 발생한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중일전쟁을 전면적으로 개시했다. 전쟁 초기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중국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으며, 특히 그해 12월 수도 난징을 점령한 후에는 난징대학살이라는 참혹한 학살을 자행하여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중국은 소련과 중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공식화된 제2차 국공 합작을 바탕으로 전 민족적인 항일 전쟁에 나섰다.
1938년 일본군은 산둥 지역을 점령하고, 대아장회전과 같은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는 등 전쟁은 장기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941년에는 일본이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홍콩을 점령하는 등 전선이 확대되었다.
1942년 장제스는 인도의 독립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하며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국제 사회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전쟁 말기인 1944년, 일본군은 대규모 공세인 이치고 작전을 펼쳐 후난, 허난, 광시 등 중국 남부의 광대한 지역을 점령하기도 했으나, 전세를 뒤집지는 못했다.
1945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모습. 이는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마침내 1945년, 연합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하면서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고, 이로써 8년간 이어진 중일전쟁은 중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일본의 패망으로 한국은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직후 여운형 등을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어 활동하였고, 이후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으나 국제적인 승인을 받지는 못했다. 한편, 전후 처리 과정에서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하게 되었다. 이는 이후 한반도 분단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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