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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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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

유럽의 역사는 기원전 8세기부터 서기 5세기까지의 고대 시대를 시작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번영과 쇠퇴를 거쳤다. 중세 시대에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봉건 제도가 등장하고, 샤를마뉴의 신성 로마 제국 건립, 동로마 제국의 존속, 십자군 전쟁, 흑사병 등의 사건이 발생했다. 근세에는 르네상스, 종교 개혁, 대항해 시대를 거치며 절대 왕정이 번성했고, 영국과 프랑스에서 시민 혁명이 일어났다. 근대에는 산업 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통해 급격한 사회, 정치, 경제적 변화가 있었으며, 제국주의 시대와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었다. 20세기 후반에는 냉전 종식과 함께 유럽 통합이 이루어졌으며, 21세기에는 경제 위기, 지정학적 갈등, 브렉시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다양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2. 고대

유럽 역사는 고대, 중세, 근대라는 3구분법으로 나뉘며, 이는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자들이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을 이상으로 삼고 그 사이 시대를 암흑 시대로 여긴 것에서 비롯되었다. 현대에는 중세를 암흑 시대로 보지 않지만, 고대, 중세, 근세, 근대의 4구분법이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고대에는 도시 국가와 헬레니즘 세계를 구축한 고대 그리스지중해에서 강대한 대제국을 실현한 로마 제국이 중요했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중세 유럽에서는 프랑크 왕국을 비롯한 여러 중세 국가들이 등장하여 봉건제 사회를 이루었다.

2. 1. 고대 그리스

고대 그리스는 서구 문명의 기반을 마련한 중요한 문명이다. 민주주의, 철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는 현생 인류가 출현하기 전에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이주했다. 약 180만 년 전에 조지아에 살았던 호모 에렉투스 게오르기쿠스(''Homo erectus georgicus'')는 유럽에서 발견된 가장 초기의 인류이다.[2] 해부학적 현대 인류의 가장 초기의 출현은 기원전 45,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를 초기 유럽 현대 인류라고 한다.

쇼베 동굴 벽화, 오리냐크 문화, 프랑스, 기원전 30,000년경


레반트(아흐마리안)와 헝가리에서 시작된 오리냐크 문화는 기원전 35,000년경 유럽 대부분으로 확장되었다. 마지막 네안데르탈인은 이베리아 반도 남부로 후퇴했다. 기원전 29,000년경, 유럽 서부 지역에 그라베티안이 등장했다. 기원전 16,000년경에는 마들렌 문화가 출현하여 솔루트레 문화 지역과 그라베티안을 대체했다.

기원전 12,500년경, 뷔름 빙하기가 끝나고, 마들렌 문화는 기원전 10,000년경까지 지속되었다. 이후 아질리안, 소베테리안, 타르데노이안, 링비 문화 등 다양한 문화로 발전했다.

선형토기 문화 정착지, 독일, 기원전 4700년경


기원전 8천 년기 발칸 반도에서 영구적인 정착의 증거가 나타났다. 신석기는 기원전 6천 년기에 중앙유럽, 기원전 5천 년기와 4천 년기에는 북유럽 일부 지역에 도달했다. 현대 유럽의 토착 인구는 메소석기 서유럽 수렵 채집인, 크로마뇽인 인구의 파생, 초기 유럽 농부, 야mnaya 서부 스텝 유목민의 세 가지 계통에서 유래되었다.[3] 인도유럽어족의 이주는 기원전 4200년경 흑해와 발칸 반도 주변 지역을 통해 남동 유럽에서 시작되어 3000년 동안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바르나 문화 유물, 불가리아, 기원전 4500년경


기원전 5천 년기에 바르나 문화가 발전했고, 기원전 4700년 – 4200년 사이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 시대 도시로 여겨지는 솔니차타 마을이 번성했다.[4][5]

후기 신석기 유럽, 기원전 5000-3500년경


고대 그리스에서는 폴리스라는 도시 국가들이 발전했다. 이들은 각자 독자적인 정치 체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대표적인 폴리스로는 아테네스파르타가 있다. 아테네는 민주주의를 발전시켰고, 스파르타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 지역을 지배했다.

2. 1. 1. 페르시아 전쟁

기원전 6세기 후반,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는 인더스강에 이르는 광대한 오리엔트 지역을 정복하고 소아시아 반도 전체를 지배하며, 연안의 그리스 폴리스들과 에게해의 섬들까지 예속시켰다. 이에 이오니아의 폴리스들이 반발하여 이오니아 반란을 일으켰고, 페르시아의 사트라프(태수)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제1차 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페르시아는 그리스 본토를 침공할 의도는 없었고, 트라키아 방면을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1]

이오니아아테네 등 본토의 지원을 받아 저항을 계속했고, 2년 후 페르시아는 다시 군대를 파견하여 에게 해를 건너 본토에 상륙, 제2차 전쟁이 일어났다(기원전 490년). 아티카 해안의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 중장보병은 스파르타의 원군 없이 페르시아 군을 격퇴했다. 이 전투는 페르시아의 기병과 궁병에 맞서 잘 통제된 밀집 보병대의 백병전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었다.[1]

페르시아는 대규모 원정을 다시 계획했지만, 사트라프의 반란과 왕위 교체 등으로 10년간 실행하지 못했다. 그동안 아테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노력으로 대함대를 건조하는 등 전쟁 준비를 했다.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 1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제3차 전쟁을 일으켰다. 페르시아 군은 육로로 북쪽에서 그리스를 침입했고,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스파르타 군은 전멸했다. 아테네도 점령당하고 아크로폴리스도 불탔다. 그러나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 함대가 1천 척에 이르는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하면서 전쟁의 흐름이 바뀌었다. 이후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은 완패했고, 그리스 연합군은 승리했다.[1]

이는 마치 한국사에서 고구려가 살수대첩에서 수나라 대군을 물리치고, 조선임진왜란에서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일본 수군을 격파하여 나라를 지켜낸 것과 유사한, 외세의 침략을 극복한 역사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2. 1. 2. 델로스 동맹

기원전 478년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후, 아테네는 델로스 섬을 중심으로 여러 폴리스들과 동맹을 결성했다. 이것이 델로스 동맹이다. 동맹의 금고는 원래 델로스 섬에 보관되었으나, 기원전 454년 페리클레스가 금고를 아테네로 옮기면서 사실상 아테네 제국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델로스 동맹은 페르시아의 재침략을 막고, 에게 해에서 페르시아의 영향력을 몰아내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초기에는 각 폴리스들이 함선과 병력을 제공하였으나, 점차 아테네의 주도권이 강화되면서 동맹은 아테네의 해상 제국으로 변모해갔다.

기원전 431년, 아테네 중심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기원전 404년 아테네의 항복으로 끝났고, 델로스 동맹은 해체되었다.

2. 1. 3. 폴리스의 쇠퇴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 431년에 아테네 중심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에 발발했다. 초기에는 아테네가 우세했지만, 페스트의 유행과 지도자 페리클레스의 사망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아테네는 강화 기회를 놓치고 기원전 404년 스파르타에 항복했다.

이후 폴리스 세계는 혼란에 빠졌고, 테베레우크트라 전투에서 승리하며 패권을 차지하기도 했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는 등 외세의 개입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분열은 폴리스 시민 사회의 붕괴와 용병의 증가를 초래했다. 페르시아는 폴리스 간의 전쟁을 조장하고, '안탈키다스 평화조약'을 통해 소아시아 연안의 그리스 폴리스들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었다.

2. 2.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드로스 대왕페르시아 정복 이후, 헬레니즘 시대가 시작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34년 소아시아를 침공, 그라니코스 전투와 이수스 전투에서 승리하며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를 격파했다. 이후 페니키아 해안과 이집트를 점령하고, 기원전 331년에는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했다.[17] 같은 해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를 다시 격파하고 페르세폴리스 궁전을 불태우며 전쟁을 종결지었다.[17]

왼쪽


알렉산드로스는 박트리아에서 다리우스 3세가 암살된 후에도 정복을 계속하여, 기원전 327년 인더스강 유역까지 진출했다.[17] 그러나 병사들의 반대로 회군하여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급사했다.[17]

모자이크로 표현된 알렉산드로스 대왕다리우스 3세의 전투


알렉산드로스 사후, 그의 제국은 후계자들 간의 분쟁(디아도코이 전쟁)으로 분열되었다.[17] 결국 안티고노스의 마케도니아, 셀레우코스의 시리아,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집트 세 왕국으로 나뉘었다.[17] 이들은 기원전 200년경까지 항쟁을 지속하다 로마에 의해 차례로 정복되었다.[17]

그리스 미술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미술


헬레니즘 시대는 그리스 문화가 동방으로 확산되어 간다라 미술과 같은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22]

2. 3. 고대 로마

고대 로마는 이탈리아반도의 도시 국가에서 출발하여 지중해 세계를 제패한 거대한 제국으로 발전했다. 로마는 처음에는 왕정이었으나, 기원전 6세기 말 귀족들이 왕을 추방하고 공화정을 수립하였다. 공화정 초기에는 귀족들이 권력을 독점하였으나, 평민들의 지속적인 투쟁으로 점차 평민의 권리가 확대되었다.

로마는 주변 국가들과의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성장했다.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꺾고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으며, 그리스를 정복하여 헬레니즘 문화를 흡수했다. 그러나 잦은 전쟁은 로마 사회에 여러 문제를 야기했다. 전쟁 노예의 유입과 토지 겸병으로 인해 자영농이 몰락하고 빈부 격차가 심화되었으며, 이는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시도와 공화정 말기의 혼란으로 이어졌다.

기원전 1세기 말, 아우구스투스제정을 수립하면서 로마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팍스 로마나 시대에 제국은 번영을 누렸지만, 3세기 이후 내란과 이민족의 침입으로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결국 제국은 서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으로 분열되었고, 476년 서로마 제국게르만족에게 멸망당했다.

2. 3. 1. 로마 공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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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세기 말, 로마 귀족들은 왕을 에트루리아로 쫓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하였다. 귀족 지배는 평민의 투쟁으로 위기를 겪었지만, 원로원의 지도 아래 타협하여 귀족 지배를 강화하였다.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 로마는 아펜니노산맥의 아에퀴인, 볼스키인의 평지 진출과 에트루리아의 강한 세력에 맞서 방어전을 펼쳤다. 5세기 말 공세로 전환했으나, 갈리아인에게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갈리아인의 침입과 신분 투쟁을 수습하고, 기원전 4세기 후반 라티움 도시들을 굴복시켰다. 로마는 삼니움, 에트루리아, 남이탈리아로 세력을 확장하며 라티움 도시들과 공동 출병하고, 정복 지역에 '라틴인 식민시'를 건설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으로 시칠리아섬을 얻어 최초의 해외 영토를 확보하면서 로마의 국정이 변화했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때문에 위기에 직면했던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는 본격적으로 지중해 진출을 시작했다. 마케도니아를 격파하고 그리스를 보호하며 동지중해를 석권했지만, 로마 내부에는 문제가 쌓였다. 전쟁 노예 유입과 토지 겸병으로 대농장 경영이 진행되어 자유 농민이 격감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지배층 간의 의견 대립이 발생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사회 문제에 효과적이었으나, 정치적으로는 내란을 유발했다.[22]

2. 3. 2. 로마 제정

키케로가 로마 원로원에서 카틸리나의 공화국 전복 음모를 규탄하는 모습


그리스 학문은 이탈리아에서 밖으로 팽창하면서 로마가 태동할 때 동화되었으며, 로마는 적들이 단결할 수 없는 점을 이용하였다. 로마의 부상에 대한 유일한 도전은 페니키아 식민지 카르타고에서 왔으며, 세 차례의 포에니 전쟁에서의 패배는 로마 패권의 시작을 알렸다. 처음에는 왕에 의해 통치되었고, 그 다음에는 원로원 공화국(로마 공화국)으로 통치되던 로마는 기원전 1세기 말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권위주의적 후계자 아래 제국이 되었다.

로마 제국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여 그 해안에 있는 모든 국가를 통제했다. 북쪽 경계는 라인강과 도나우강으로 표시되었다. 황제 트라야누스 (서기 2세기) 치하에서 제국은 최대 확장에 도달하여 약 5900000km2의 육지를 통제했는데, 여기에는 이탈리아, 갈리아, 달마티아, 아키타니아, 브리타니아, 바이티카, 히스파니아,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모이시아, 다키아, 판노니아, 이집트, 소아시아, 카파도키아, 아르메니아, 코카서스, 북아프리카, 레반트,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일부가 포함되었다. 로마의 평화 시대에 로마 문명과 피지배 지역의 효율적인 중앙 집권 정부는 3세기에 끝나는데, 이때 일련의 내전이 로마의 경제적, 사회적 강점을 약화시켰다.

이탈리아 로마의 콜로세움


4세기에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 1세는 제국을 로마에 수도를 둔 서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현재 이스탄불)에 수도를 둔 동로마 제국으로 분할하여 쇠퇴 과정을 늦출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일반적으로 "동방 정교 문명"의 중심지로 여겨진다.[23][24]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한 반면, 콘스탄티누스는 313년에 밀라노 칙령으로 국가 주도의 기독교인 박해의 공식적인 종식을 선언했고, 이는 약 380년에 교회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는 기반을 마련했다.

로마 제국은 북유럽에서 침략해 온 군대에 의해 반복적으로 공격을 받았고, 476년에 마침내 로마는 멸망했다.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게르만족 왕 오도아케르에게 항복했다.

트라야누스 황제 치하, 서기 117년 로마 제국의 최대 영토

2. 3. 3. 분열



4세기,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 1세는 제국을 로마를 수도로 한 서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또는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 이스탄불)을 수도로 한 동로마 제국으로 분할하여 쇠퇴 과정을 늦출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일반적으로 "동방 정교 문명"의 중심지로 여겨진다.[23][24]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한 반면, 콘스탄티누스는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통해 국가 주도의 기독교인 박해를 공식적으로 종식시켰고, 이는 약 380년에 교회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는 기반을 마련했다.

로마 제국은 북유럽에서 침략해 온 군대에 의해 반복적으로 공격받았고, 476년에 마침내 로마는 멸망했다.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만족 왕 오도아케르에게 항복했다.

3. 중세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게르만족의 이동과 프랑크 왕국의 성립, 봉건제의 발전, 기독교의 확산, 십자군 전쟁, 중세 도시의 발달과 흑사병의 유행 등이 있었다.

초기 중세 시대는 대략 500년부터 1000년까지 5세기 동안이다.[35]

초기 중세 시대의 유럽


유럽 동부와 남동부에서는 아바르 카간국(567년~822년 이후), 대불가리아(632~668년), 하자르 카간국(약 650~969년), 다뉴브 불가리아(아스파루흐가 680년에 건국)가 비잔틴 제국의 패권에 끊임없이 대항했다.

7세기부터 비잔틴 역사는 이슬람의 부상과 칼리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무슬림 아랍인은 라시둔 칼리프 아부 바크르 치하에서 로마 영토를 침략하여 로마 시리아와 로마 메소포타미아를 점령했다. 비잔틴 제국과 인접한 사산조는 비잔틴-사산 전쟁으로 크게 약화되었다. 제2대 칼리프 우마르 치하에서 무슬림은 사산 페르시아 제국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 팔레스타인, 로마 이집트, 소아시아와 로마 북아프리카의 일부를 정복했다. 7세기 중반, 페르시아의 이슬람 정복 이후 이슬람은 코카서스 지역으로 침투했으며, 이 지역의 일부는 후에 영구적으로 러시아의 일부가 되었다.[36] 우마이야 칼리프는 지중해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그 후 무슬림 세력은 키프로스, 몰타, 크레테, 시칠리아 및 남부 이탈리아의 일부를 점령했다.[37]

히스파니아에 대한 무슬림 정복은 711년, 베르베르족 장군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이끄는 무어족이 기독교 서고트 왕국인 히스파니아를 침략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4월 30일 지브롤터에 상륙하여 북쪽으로 진격했다. 타리크의 군대는 다음 해에 무사 이븐 누사이르의 군대와 합류했다. 8년 간의 군사 작전 동안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은 무슬림 통치하에 들어갔다. 단, 북서부(아스투리아스)와 바스크 지역 일부는 제외되었다. 711년, 서고트 히스파니아는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인한 내부 위기에 휩싸였다. 무슬림은 히스파노-서고트 사회 내부의 위기를 이용하여 정복했다. 이 영토는 알안달루스로 불리며 우마이야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2차 공방전 (717)은 테르벨의 개입으로 실패했고, 우마이야 왕조를 약화시켰다. 722년 돈 펠라요는 300명의 아스투르 병사로 군대를 구성하여 무누자의 무슬림 군대와 맞섰다. 코바동가 전투에서 아스투리아스족은 아랍-무어족을 격파했다. 기독교의 승리는 레콩키스타의 시작과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설립을 알렸으며, 초대 군주는 돈 펠라요였다. 정복자들은 유럽에서의 확장을 계속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 북동쪽으로 이동하려 했지만, 732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크의 지도자 샤를 마르텔에게 패배했다. 우마이야 왕조는 750년 아바스 왕조에 의해 전복되었고,[38] 756년에는 우마이야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에 독립적인 아미르국을 설립했다.[39]

고대, 중세, 근대라는 3구분법은 유럽 역사를 분석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은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를 이상으로 삼고, 르네상스는 그 고대 문명의 부활이며, 그 사이의 중세를 암흑 시대로 여겼다. 오늘날에는 중세를 "암흑 시대"로 간주하는 역사학자는 없지만, 당시에는 "고대", "중세", "근대"로 구분했다.

르네상스 이후에도 이 3구분법은 계속 사용되었고, 최근까지 유럽의 시대 구분은 이 3구분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역사학의 연구가 진전되면서, 중세와 근대 사이에 "근세"를 끼워 넣는 제안이 이루어졌다. 현재는 고대, 중세, 근세, 근대의 4구분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고대, 중세, 근세, 근대의 경계는 대략 다음과 같다.

3. 1. 고대 후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3세기 말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인구 감소, 경제 경직, 대토지 소유 집중으로 자유 농민과 중간층이 몰락했다. 로마군은 게르만 용병으로 채워져 무력화되었고, 475년 서고트족이 동로마 국경을 침입하면서 대규모 민족 이동이 시작되었다. 서고트족은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동로마군을 격파하고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했으며, 서로마군을 격퇴하고 이탈리아 반도로 남하하여 410년 로마를 함락시켰다. 이후 게르만 부족들이 로마 영토를 유린하며 서고트 왕국(에스파냐), 동고트·롬바르드 왕국(이탈리아), 반달 왕국(아프리카 북안), 부르군트 왕국(남프랑스), 앵글로색슨 왕국(영국) 등을 건국했다.

민족 대이동


동유럽에서는 슬라브족의 이동이 시작되어 동로마 제국을 위협했으나, 6세기 초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를 막았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로마 제국의 재건을 꿈꾸며 이탈리아, 에스파냐, 북아프리카 등 옛 영토를 탈환하고,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하여 법제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동로마 제국은 이후 영토가 축소되었지만 15세기까지 존속하며 서유럽과 중동아시아 사이에서 문화적 중개 역할을 담당하고, 그리스와 동방의 전통을 융화하여 비잔틴 문화를 이룩했다.[35]

3. 2. 중세 초기



카롤루스에게 황제관을 씌워주는 레오 3세


4세기 이래 각지에 이동한 게르만족은 앵글로색슨족이나 서고트족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프랑크 왕국이나 동로마 제국의 치하에 흡수되었다. 프랑크 왕국에서는 카를 마르텔이 사라센 제국을 격퇴하여 궁재(宮宰)의 힘이 강대해졌으나, 8세기에는 피핀에 의해서 카롤링거 왕조가 성립되었다.[35] 이 무렵 프랑크 왕국은 로마 교황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시작했고, 교황 또한 그리스 교회와 대항하기 위해 세속 군주와의 유대를 바라고 있었다. 이로써 프랑크 왕국에서는 봉건제의 기반이 성립되기 시작함과 동시에, 중세에 있어서 교황과 군주의 제휴 및 상호 이용이 전개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 번영 이후, 6세기 말부터 슬라브족의 발칸 이주와 국내 반란에 동시에 시달렸다. 그러나 7세기 초부터 이 제국은 둔전병(屯田兵)과 군관구 제도 등을 채용하고 중앙 집권을 강화해서, 7세기 말 사라센 군의 침입을 방위했다. 8세기 초에는 우상숭배 문제를 계기로 로마 교회와 대립하기 시작했고, 제국은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그리스적 국가로서의 특색을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

5~6세기까지 서유럽 외의 세계는 사산 왕조로 대표되는 이란 문명권과 동로마를 중심으로 한 지중해 문명권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7세기에 이슬람교가 성립되자, 종래의 여러 문명을 계승하면서도 이 문명권들과는 다른 독자적인 이슬람 문명을 만들어냈다. 무함마드알라의 계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알라에의 절대적 귀의를 가르쳤다. 그는 한때 메카에서 메디나로 피신하였는데, 결국 아라비아 전부족을 통일하여 이슬람 세계 건설의 기초를 닦았다. 무함마드 사후, 역대 칼리프는 이슬람 세계의 확립과 발전에 노력했고, 불과 1세기 만에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인도로부터,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이베리아 반도에 걸치는 이슬람 제국을 건설했다. 정복 사업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으나 제3대 오스만 시대 무렵부터 교단 내부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800년에 카를 대제교황 레오 3세로부터 로마 제국의 황제로 대관되면서 중세 유럽 세계의 막이 열렸다. 카를 대제는 교황에 의한 동로마 제국 황제의 간섭을 배제하고 로마 제국 이래의 통일 제국을 건설하였는데, 이것이 비잔틴 세계나 이슬람 세계와 구별되는 중세 유럽 세계라는 정치, 문화적 공동체였다. 카를 대제는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일으켜 민족 이동기의 쇠퇴했던 문화를 부흥시키고, 게르만·로마·그리스도교 등의 여러 요소를 융합시켜 오늘날까지도 내려오는 서유럽 공통의 출발점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고대 이래 교역 활동의 중심무대가 되어 온 지중해가 사라센의 수중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서유럽 세계에서는 교환경제 사회가 자연경제 사회로 후퇴하게 되었고, 카를 대제 사후에는 왕국도 분열되어 동프랑크(독일)·서프랑크(프랑스)·이탈리아 등 3국이 성립되었다. 영국에서도 색슨계의 통일 왕조가 성립되었다.

이 무렵 유럽에서는 점차 장원제가 보급됨과 아울러 지배자와의 사이에 주종 관계가 일반화하기 시작하여 봉건제가 성립되었다. 장원의 지역적 집중이 이루어짐으로써 나중에 영주권이 강화되어 왕권과 대립하게 되었고, 따라서 지방 분권화 경향을 나타냈다. 한편, 교회도 교회령을 가지게 되며, 이 무렵에는 그 권력이 세속의 영주와 다를 바 없게 됨으로써 중세의 소위 2원적 지배 체제가 성립되었다.

크라쿠프, 역사적인 폴란드의 수도


유럽 동부와 남동부에서는 새로운 지배 국가들이 형성되었다. 아바르 카간국(567년~822년 이후), 대불가리아(632~668년), 하자르 카간국(약 650~969년)과 다뉴브 불가리아(아스파루흐가 680년에 건국)는 비잔틴 제국의 패권에 끊임없이 대항했다.

7세기부터 비잔틴 역사는 이슬람의 부상과 칼리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무슬림 아랍인은 라시둔 칼리프 아부 바크르 치하에서 역사적으로 로마 영토를 침략하여 로마 시리아와 로마 메소포타미아를 점령했다. 비잔틴 제국과 인접한 사산조는 오랜 세월에 걸쳐 빈번하게 일어난 비잔틴-사산 전쟁으로 크게 약화되었으며, 그중 절정에 달했던 602–628년 비잔틴-사산 전쟁도 포함되었다. 제2대 칼리프 우마르 치하에서 무슬림은 사산 페르시아 제국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를 결정적으로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 팔레스타인, 로마 이집트, 소아시아와 로마 북아프리카의 일부를 정복했다. 7세기 중반, 페르시아의 이슬람 정복 이후 이슬람은 코카서스 지역으로 침투했으며, 이 지역의 일부는 후에 영구적으로 러시아의 일부가 되었다.[36] 침략적인 무슬림 세력에 의한 정복과 이슬람의 확산을 포함하는 이러한 추세는 우마르의 후계자와 우마이야 칼리프 치하에서 계속되었으며, 이들은 지중해 북아프리카의 나머지 지역과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그 후 수세기 동안 무슬림 세력은 키프로스, 몰타, 크레테, 시칠리아 및 남부 이탈리아의 일부를 포함한 추가적인 유럽 영토를 점령할 수 있었다.[37]

히스파니아에 대한 무슬림 정복은 711년, 베르베르족 장군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이끄는 무어족이 기독교 서고트 왕국인 히스파니아를 침략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4월 30일 지브롤터에 상륙하여 북쪽으로 진격했다. 타리크의 군대는 다음 해에 그의 아랍인 상급자인 무사 이븐 누사이르의 군대와 합류했다. 8년 간의 군사 작전 동안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은 무슬림 통치하에 들어갔다. 단, 북서부(아스투리아스)와 바스크 지역의 일부는 제외되었다. 711년, 서고트 히스파니아는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인한 심각한 내부 위기에 휩싸이면서 약화되었다. 무슬림은 히스파노-서고트 사회 내부의 위기를 이용하여 정복을 수행했다. 이 영토는 아랍어로 알안달루스로 불리며 확장되는 우마이야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2차 공방전 (717)은 테르벨의 개입 이후 실패로 끝났고, 우마이야 왕조를 약화시키고 그들의 위신을 떨어뜨렸다. 722년 돈 펠라요는 300명의 아스투르 병사로 군대를 구성하여 무누자의 무슬림 군대와 맞섰다. 코바동가 전투에서 아스투리아스족은 퇴각하기로 결정한 아랍-무어족을 격파했다. 기독교의 승리는 레콩키스타의 시작과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설립을 알렸으며, 초대 군주는 돈 펠라요였다. 정복자들은 유럽에서의 확장을 계속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 북동쪽으로 이동하려 했지만, 732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크의 지도자 샤를 마르텔에게 패배했다. 우마이야 왕조는 750년 아바스 왕조에 의해 전복되었고,[38] 756년에는 우마이야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에 독립적인 아미르국을 설립했다.[39]

3. 2. 1. 카롤링거 왕조

카롤링거 왕조는 프랑크 왕국의 주요 왕조 중 하나로, 이 왕조의 성립과 발전은 중세 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샤를마뉴 대제(카롤루스 대제)의 통치 기간 동안 카롤링거 왕조는 그 절정에 달했다.

샤를마뉴 대제는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고,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대관되면서 서유럽의 정치적, 문화적 통합을 이루었다. 그는 행정 개혁, 교육 장려, 그리고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문화 부흥을 통해 왕국의 기틀을 다졌다.

하지만 샤를마뉴 사후, 프랑크 왕국은 그의 후계자들 사이에서 분열되었다. 베르됭 조약메르센 조약을 통해 왕국은 여러 부분으로 나뉘었고, 이는 결국 현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여러 국가의 기원이 되었다. 이러한 분열은 카롤링거 왕조의 쇠퇴를 가속화시켰고, 유럽의 정치적 지형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3. 3. 중세 성기



중세 성기는 대략 1000년부터 1300년까지의 시기로, 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변화가 나타난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봉건 제도가 발전하고, 교회의 권력이 강화되었으며,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다. 또한 중세 도시가 발달하고 상업이 부흥했다.

봉건 제도는 왕이 귀족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고, 귀족들은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는 시스템이었다. 귀족들은 다시 자신의 토지를 기사들에게 나누어주고, 기사들은 귀족에게 충성하며 봉사했다. 농민들은 토지에 묶여 귀족들에게 세금과 노동력을 제공했다.

교회는 중세 유럽에서 영적인 권위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권력도 가지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교회는 토지를 소유하고 세금을 걷었으며, 독자적인 법률과 법정을 가지고 있었다. 교황은 서유럽 전체 기독교도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왕들과 귀족들도 교황의 권위에 복종했다.

11세기부터 십자군 전쟁으로 동방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상업이 발전하고, 이에 따라 중세 도시가 발달했다. 도시민들은 자유를 얻고 자치적인 코뮌을 형성하여 도시를 운영했다.

3. 3. 1. 십자군 전쟁

Crusades영어은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에 서유럽의 가톨릭 국가들이 중동의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여 벌인 종교 전쟁이다. 십자군 전쟁은 종교적 열정과 더불어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는 목적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십자군 전쟁에 대한 내용은 원문에 제시되어 있지 않다.

3. 4. 중세 후기

야코포 데 바르바리의 ''루카 파치올리 초상'', 회계학의 창시자 (카포디몬테 미술관)


14세기는 예술과 과학 분야에서 큰 진보를 이룬 시기였다. 그리스로마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시작되었고, 이는 근대 초 유럽 지적 생활에 심오한 영향을 미친 문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북부, 서부 및 중부 유럽으로 확산된 르네상스의 영향은 문학, 철학, 예술, 정치, 과학, 역사,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인문주의자들은 위대한 과거의 재발견을 문명 자체의 부활로 여겼다.[53]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정치 저서 ''군주론''은 후대의 절대주의와 현실 정치에 영향을 미쳤으며, 국가를 통치하며 르네상스 예술을 권력의 상징으로 사용한 수많은 후원자들의 역할도 중요했다.

과학 혁명은 르네상스 후반기에 시작되었으며, 1543년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저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종종 그 시작으로 인용된다.

3. 4. 1. 흑사병

흑사병(Black Death영어)은 중세 유럽 사회의 붕괴를 가속화하고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데 기여했다. 그 기원, 확산 경로, 사회, 경제, 문화적 영향이 컸다.

4. 근세

인쇄기의 발달로 새로운 사상이 유럽 전역에 퍼져나가 과학과 신학의 전통적인 교리에 대한 도전이 일어났다. 마르틴 루터를 중심으로 한 종교 개혁은 교황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했다.[56] 종교 개혁은 1517년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고,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끝난 1648년까지 수년간 지속된 유럽 종교 전쟁을 종식시켰다.[56]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 통치하의 합스부르크 영지 (녹색)


가톨릭 교회의 부패는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에 대한 격렬한 반발을 초래했다. 특히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을 종식시켜 더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려는 군주와 왕들 사이에서 많은 추종자를 얻었다. 마르틴 루터 외에도 장 칼뱅칼뱅주의를 통해 여러 국가에 영향을 미쳤고,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잉글랜드에서 가톨릭 교회와 결별하고 성공회를 설립했다. 이러한 종교적 분열은 종교뿐만 아니라 더욱 중앙집권적이고 강력해지고 있던 서유럽의 야심찬 군주들에 의해서도 촉발되고 이끌어진 일련의 전쟁을 불러왔다.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은 반종교 개혁이라고 불리는 가톨릭 교회 내의 강력한 개혁 운동으로 이어져 부패를 줄이고 가톨릭 교리를 개선하고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운동에서 등장한 가톨릭 교회의 두 가지 중요한 그룹은 예수회와 필립 네리 성인의 오라토리오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교회는 종교 개혁으로 인해 다소 약화되었고, 유럽의 일부 지역은 더 이상 그 지배를 받지 않게 되었으며, 나머지 가톨릭 국가의 왕들은 자신들의 왕국 내에서 교회 제도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유럽 여왕, 1570년 바젤의 세바스티안 뮌스터 판화


당시 많은 유럽 국가들과 달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트란실바니아 공국과 마찬가지로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대해 현저하게 관용적이었다. 오스만 제국령 헝가리에서도 어느 정도 관용이 나타났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정교회, 유대인 및 소수의 무슬림 인구로 분열되었다.

종교적 분열에도 불구하고 유럽 전역에 우편 서비스가 설립되어 인문주의적 지식인들의 상호 연결된 네트워크를 허용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회는 많은 주요 과학 저서를 금지했다. 15세기, 중세 시대 말에 프랑스, 잉글랜드, 스페인에서 권력을 집중시킨 신 군주들에 의해 강력한 주권 국가가 나타났다. 반면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의회는 권력을 키워 폴란드 국왕으로부터 입법권을 가져왔다.

고대, 중세, 근세, 근대라는 3구분법은 유럽의 역사를 분석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이 구분법의 기원은,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이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를 이상으로 삼고, 르네상스는 그 고대 문명의 부활이며, 그 사이의 중세를 고대 문명이 중단된 암흑 시대로 여겼던 데에서 시작되었다. 오늘날에는 중세를 "암흑 시대"로 간주하는 역사학자는 없지만, 당시에는 이처럼 영광스러운 그리스·로마 시대를 "고대", "암흑 시대"의 "중세", 그리고 지금(르네상스 시대)을 "근대"로 하는 3구분법이 사용되었다.

르네상스 이후에도 이 3구분법은 계속 사용되었고, 최근까지 유럽의 시대 구분은 이 3구분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역사학의 연구가 진전되면서, 중세와 근대 사이에 "근세"를 끼워 넣는 제안이 이루어졌다. 이는 널리 역사학자들에게 받아들여졌고, 현재는 고대, 중세, 근세, 근대의 4구분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고대, 중세, 근세, 근대의 경계는 대략 다음과 같다.

한편, 근대와 현대의 경계에 대해서는 1980년대까지 1914년제1차 세계 대전의 시작 이후를 현대라고 하는 구분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에는, 1989년베를린 장벽 붕괴와 그에 따른 냉전의 종결까지를 근대의 틀 안에서 파악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4. 1. 프랑스와 영국의 왕권 강화



15세기 말, 중세가 끝나갈 무렵 프랑스, 잉글랜드, 스페인에서 신 군주들이 등장하여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 강력한 주권 국가가 나타났다.[56] 반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의회는 폴란드 국왕에게서 입법권을 가져올 만큼 권력이 강해졌다.[56] 새로운 국가 권력은 잉글랜드 등 다른 국가 의회의 견제를 받았다.[56] 영토 지배자, 도시, 농민 공화국, 기사 간 협력 협정으로 새로운 형태의 국가가 등장하기도 했다.[56]

4. 2. 르네상스



14세기, 그리스로마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면서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이는 근대 초 유럽 지적 생활에 심오한 영향을 미친 문화 운동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는 약 2세기 반의 문화적 지체를 거쳐 북부, 서부 및 중부 유럽으로 확산되었으며, 문학, 철학, 예술, 정치, 과학, 역사,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인문주의자들은 위대한 과거의 재발견을 문명 자체의 르네상스, 즉 부활로 여겼다.[53]

당시 영국, 프랑스에서는 왕권이 신장되고 있었던 반면, 독일과 이탈리아는 분열 상태였다. 이탈리아는 남부의 나폴리 왕국, 중부의 교황령, 북부의 도시 국가들로 나뉘어 있었다. 특히 북부의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등은 십자군 이후 동방 무역으로 번영하며 주변 농촌까지 지배했다. 이들 도시를 중심으로 부유한 상인층을 주축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전개되었다. 이탈리아는 동방 무역을 통해 이슬람 문화와 고대 및 고전 학문·예술이 유입되었고, 고대 로마의 옛 영토로서 유적과 유물에 접할 기회가 많았다.

유럽 중세의 신 중심적인 세계관 대신, 고대 그리스·로마의 인간 중심적인 가치관이 부활하였다. 이는 피안적(彼岸的)이 아닌 차안적(此岸的)·개인주의적이며 현실주의적인 문화로, 시민 계급에 의해 창조되었다. 단테는 《신곡》을 써 르네상스의 선구자가 되었고, 페트라르카, 조반니 보카치오는 문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르네상스 예술은 조토 디 본도네에서 시작해 보티첼리를 거쳐 레오나르도, 라파엘로, 미켈란젤로가 출현하여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써서 분열된 이탈리아의 통일을 호소하였다.[53]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알프스를 넘어 북방 서구 여러 나라에 파급되고, 제각기 나라별로 독자적인 형태를 취하면서 16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것은 이탈리아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네덜란드나 남독일과 같이 도시를 기반으로 하거나 프랑스·에스파냐·영국처럼 왕권에 의한 국가 통일을 배경으로 르네상스가 싹트는 모습이었다.

북유럽 르네상스는 깊은 종교성을 띠며 전개되었는데, 특히 인문주의는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원전에 의한 성서 연구를 통해 종교 개혁 운동으로 이어졌다.

4. 2. 1. 이탈리아 르네상스

십자군 이후 동방 무역으로 이익을 거둔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등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 국가들은 주변 농촌까지 지배하며 번영하였다. 이들 도시 공화국을 중심으로 부유한 상인층을 주축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전개되었다.[53] 이탈리아는 동방 무역을 통해 이슬람 문화와 고대 및 고전 학문·예술이 유입되었고, 고대 로마의 옛 영토로서 유적과 유물에 접할 기회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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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중세의 신 중심적인 세계관 대신, 고대 그리스·로마의 인간 중심적인 가치관이 부활하였다. 이는 피안적(彼岸的)이 아닌 차안적(此岸的)·개인주의적이며 현실주의적인 문화로, 시민 계급에 의해 창조되었다. 단테는 《신곡》을 써 르네상스의 선구자가 되었고, 페트라르카, 조반니 보카치오는 문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르네상스 예술은 조토 디 본도네에서 시작해 보티첼리를 거쳐 레오나르도, 라파엘로, 미켈란젤로가 출현하여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써서 분열된 이탈리아의 통일을 호소하였다.[53]

4. 2. 2. 북유럽 르네상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알프스를 넘어 북유럽으로 확산되어 각 나라별로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했으며, 16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네덜란드나 남독일처럼 도시를 기반으로 하거나 프랑스, 에스파냐, 영국처럼 왕권에 의한 국가 통일을 배경으로 르네상스가 싹트는 양상을 보였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의 경우 15세기 초 반 에이크 형제에 의해 사실적인 풍경화와 초상화가 발전하여 플랑드르 파의 기초를 다졌고, 이들이 발명한 유화 기법은 베네치아 화가를 통해 이탈리아로 전해졌다.[53]

북유럽 르네상스는 깊은 종교성을 띠며 전개되었는데, 특히 인문주의는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원전에 의한 성서 연구를 통해 종교 개혁 운동으로 이어졌다.

4. 3. 종교 개혁

인쇄기의 발달은 새로운 사상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했으며, 이는 과학과 신학의 전통적인 교리에 대한 도전을 불러왔다. 마르틴 루터를 중심으로 한 종교 개혁은 교황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했다.[56] 종교 개혁은 1517년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고,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끝난 1648년까지 수년간 지속된 유럽 종교 전쟁을 종식시켰다.[56]

가톨릭 교회의 부패는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에 대한 격렬한 반발을 초래했다. 특히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을 종식시켜 더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려는 군주와 왕들 사이에서 많은 추종자를 얻었다. 마르틴 루터 외에도 장 칼뱅칼뱅주의를 통해 여러 국가에 영향을 미쳤고,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잉글랜드에서 가톨릭 교회와 결별하고 성공회를 설립했다. 이러한 종교적 분열은 종교에 의해, 또한 더욱 중앙집권적이고 강력해지고 있던 서유럽의 야심찬 군주들에 의해 촉발되고 이끌어진 일련의 전쟁을 불러왔다.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은 반종교 개혁이라고 불리는 가톨릭 교회 내의 강력한 개혁 운동으로 이어져 부패를 줄이고 가톨릭 교리를 개선하고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운동에서 등장한 가톨릭 교회의 두 가지 중요한 그룹은 예수회와 필립 네리 성인의 오라토리오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교회는 종교 개혁으로 인해 다소 약화되었고, 유럽의 일부 지역은 더 이상 그 지배를 받지 않게 되었으며, 나머지 가톨릭 국가의 왕들은 자신들의 왕국 내에서 교회 제도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당시 많은 유럽 국가들과 달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트란실바니아 공국과 마찬가지로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대해 현저하게 관용적이었다. 오스만 제국령 헝가리에서도 어느 정도 관용이 나타났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정교회, 유대인 및 소수의 무슬림 인구로 분열되었다.

종교적 분열에도 불구하고 유럽 전역에 우편 서비스가 설립되어 인문주의적 지식인들의 상호 연결된 네트워크를 허용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회는 많은 주요 과학 저서를 금지했다. 15세기, 중세 시대 말에 프랑스, 잉글랜드, 스페인에서 권력을 집중시킨 신 군주들에 의해 강력한 주권 국가가 나타났다. 반면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의회는 권력을 키워 폴란드 국왕으로부터 입법권을 가져왔다.

4. 3. 1. 루터의 종교 개혁

마르틴 루터는 1517년에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면서 종교 개혁을 시작했다.[56] 당시 교황 레오 10세면죄부를 판매했는데, 독일은 통일이 약했기 때문에 이러한 면죄부 판매의 주요 대상이 되었다. 루터는 이러한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여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했다.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독일에서는 농민들이 사회적 해방을 요구하며 15세기부터 농민 폭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들은 루터의 종교 개혁에서 희망을 찾았다. 1524년과 1525년에는 토마스 뮌처의 영향을 받은 서남 독일 농민들이 농민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루터에게 힘을 얻은 제후들은 이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했고, 종교 개혁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1529년 슈파이에르 국회에서 황제에게 항의한 루터파 제후들은 1530년에 동맹을 맺고 황제와 슈말칼덴 전쟁을 벌였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제후와 도시에 루터파 신앙을 인정했지만, 독일은 영방 국가 체제가 강화되면서 분열이 더욱 심해졌다.

4. 3. 2. 칼뱅의 종교 개혁

인쇄기의 발달로 새로운 사상이 유럽 전역에 퍼져나가면서 과학과 신학의 전통적인 교리에 도전했다. 동시에 독일의 마르틴 루터를 중심으로 한 종교 개혁은 교황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했고, 장 칼뱅칼뱅주의를 통해 여러 국가에 영향을 미쳤다.[56]

4. 4. 지리상의 발견

12, 13세기 유럽은 봉건사회의 완성과 더불어 팽창하기 시작했다. 십자군, 이베리아 반도의 국토 회복 운동(레콩키스타), 동독일 식민 등이 그 예시이다. 15세기 말 지리상의 발견은 이러한 팽창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십자군 이후 이슬람 상인을 통한 동방 무역의 이점을 알게 된 유럽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의 발전으로 무역로가 막히자 인도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려 했다.[56]

14, 15세기에는 동방 무역으로 번영했던 북이탈리아 도시들 대신, 레콩키스타를 통해 강력한 왕권 아래 통일 국가를 이룬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선두에 섰다. 헨리 항해왕의 지원 아래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서해안을 탐험했고,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1488년 희망봉에 도달했다. 1498년에는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 도착했다. 에스파냐는 1492년 이슬람 최후의 거점인 그라나다를 함락시켜 레콩키스타를 완성했고, 같은 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56]

4. 5. 아메리카 대륙 식민

에스파냐는 16세기 말까지 브라질을 제외한 라틴아메리카를 점령했으며, , 채굴을 목적으로 국왕 직할 지배 아래 식민지를 경영했다. 네덜란드서인도 제도, 기아나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맨해턴섬과 허드슨강 강변에 뉴네덜란드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1621년 서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무역 활동을 했다. 프랑스는 17세기에 캐나다에 진출하여 루이 14세 시대에 미시시피강 일대에 광대한 루이지애나 식민지를 건설했다. 프랑스의 식민 활동은 모피 무역과 가톨릭 포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인구가 적고 국왕의 직접 지배를 받았다. 영국의 식민 활동은 1497년 존 카보트의 북아메리카 동쪽 해안, 체사피크만 부근 탐험으로 시작되었는데, 실제 식민 활동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였다. 1606년 제임스 1세버지니아 회사(런던 회사)와 플리머스 회사에 특허장을 주어 식민과 무역에 관한 독점권을 인정했다. 1607년 제임스 하구에 버지니아 식민지가 건설되어 태평양으로 나가는 방향이 탐색되었다. 제임스 1세의 국교 강제를 피해 청교도들이 종교나 정치의 자유를 찾아 북아메리카에 이주하여 뉴잉글랜드 식민지가 건설되었고, 가톨릭 교도의 메릴랜드, 찰스 2세의 특허장에 의한 영주 식민지(領主植民地)인 캐롤라이나 식민지 등 1732년까지 13개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이들 영국 식민지는 견실한 농업을 중심으로 발달했으며 인구도 많고 건전하게 성장했다.

4. 6. 에스파냐의 번영

아라곤, 카스티야 양국이 합동하여 성립된 에스파냐 왕국은 이슬람교도 최후의 거점 그라나다를 함락시키고 국내 통일을 완성했다.(1492) 포르투갈희망봉에 도달하여 인도 항로 완성을 바라보고 있을 때, 에스파냐는 콜럼버스의 서방 항해를 통해 신대륙에 도달했다. 콜럼버스는 인도에 도달했다고 믿었으나 아메리고 베스푸치발보아의 활약으로 신대륙임이 밝혀졌다. 신대륙에는 향료는 없었지만 대신 풍부한 은이 있었고 에스파냐는 즉시 식민 활동을 전개하였다.

서인도 제도를 근거지로 하여 콩키스타도르(정복자)라 불리는 사람들이 유럽의 우수한 무기를 가지고 원주민 인디언을 정복해 갔다. 코르테스는 멕시코를 공략하여 아스텍 제국을 멸망시키고(1521), 피사로는 페루의 잉카 제국을 정복했다(1532). 중남미 연안 지역은 브라질을 제외하고 모두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원주민으로부터 공납(貢納)이나 부역(賦役)을 징수하여 광산 개발 등의 강제노동으로 몰아부쳐 인구가 급속히 감소했다. (원주민이 전멸하자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수입했다). 은산(銀山) 개발 결과, 대량의 금·은이 에스파냐로 유입됐다. 아시아 방면에서는 필리핀 군도를 점령하였으며, 마닐라시를 건설해서 동방 무역의 근거지로 했다. 에스파냐는 유럽 본토와 네덜란드, 밀라노, 나폴리 등의 영토에 더하여 1580년에는 포르투갈을 병합해서 ‘태양이 지는 일이 없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16세기 후반 펠리페 2세 시대에 최대의 번영을 이루었다.

5. 근대

R.R. Palmer와 Joel Colton은 1789년 프랑스 혁명 발발 이후 세상은 이전과 같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프랑스 혁명은 "구체제"를 "현대 사회"로 대체했으며, 이후 모든 혁명 운동의 전신이 되었다.[88]

미국 독립 혁명(1775–1783)은 유럽 열강에 대항한 식민지의 최초의 성공적인 반란으로, 공화주의 정부 형태를 수립하여 전 세계의 관심을 끌었다.[90] 프랑스 혁명(1789–1804)은 대서양 세계의 동일한 민주주의 세력의 산물이었으며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다.[91]

1789년 프랑스 혁명에서 바스티유 습격


미국 독립 전쟁에 대한 프랑스의 개입은 국가를 거의 파산시켰다. 재정 개혁의 반복적인 실패 이후, 루이 16세는 1789년 삼부회를 소집했다. 제3신분은 국민 의회를 선언했고, 파리 시민들은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국민 의회는 입헌 군주제를 창설하려 했고,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봉건제 폐지 등 법률을 통과시켰다. 국왕은 도주를 시도하다 체포되었고, 1793년 1월 21일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1792년 9월 20일 국민 공회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프랑스를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공안 위원회는 공포 정치를 시작했고,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치하에서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테르미도르 반동(1794년 7월 27일) 쿠데타로 로베스피에르는 처형되었고, 공포 정치는 종식되었다.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은 단순한 생산 기술의 혁신을 넘어, 공장제 수공업(매뉴팩처)에서 기계제 대공장(팩토리)으로의 전환을 통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확립한 변혁이었다.

와트 증기 기관. 이 증기 기관은 영국과 세계의 산업 혁명을 촉진하였다.


19세기 후반, 유럽 열강들은 산업 혁명을 통해 축적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태평양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제국주의 시대를 열었다.

1873년 공황과 뒤이은 장기 불황은 유럽 국가들이 새로운 시장과 자원 확보의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 이러한 경제적 요인과 더불어, 민족주의의 고양, 군사적 경쟁, 그리고 사회진화론과 같은 사상적 배경이 제국주의를 추동했다.

5. 1. 절대주의

절대주의 시대에는 봉건 영주들의 세력이 약해지고, 농업과 공업에서 소(小)부르주아적 생산자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국왕은 약해진 봉건 영주들이 가지고 있던 농민 수탈 권리를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여 국민적 통일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국왕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방대한 관료 기구와 국왕 직속의 상비군을 만들 필요가 있었고, 그 비용은 왕의 광대한 영토에서 나오는 수입, 중앙집권화된 지대(地代)인 지조(地租), 그리고 신흥 시민계급인 상인·공업인에게 부과한 세금으로 충당했다.[57]

절대주의는 봉건적 토지 소유에 기반을 두면서도 신흥 시민계급의 경제력에도 크게 의존했다. 왕의 영지 수입이나 지조 수입이 고정되면서 상공업자들의 부에 의존하는 정도가 더욱 커졌다. 경제 발전은 궁정을 중심으로 한 국왕의 생활을 사치스럽게 만들었고, 국왕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대외 전쟁은 국가 재정을 어렵게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왕의 권력은 봉건 세력의 간섭을 받지 않았고, 시민계급 역시 왕권을 통제할 만큼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왕권은 전국민적 이해(利害)를 대표하는 듯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57]

프랑스 혁명나폴레옹 전쟁 시기를 거치면서 유럽 군주들은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러시아파벨 1세가 암살되고, 프랑스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되었으며, 스페인의 카를로스 4세와 페르디난트 7세, 스웨덴구스타브 4세 아돌프 국왕이 폐위되었다. 나폴레옹과 그가 유럽 왕좌에 앉힌 친척들 역시 폐위되었다. 프로이센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오스트리아프란츠 2세는 간신히 왕좌를 지켰고, 영국조지 3세대영 제국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89]

5. 1. 1. 영국

1485년, 튜더 왕조의 헨리 7세가 영국을 통일하면서 절대주의가 시작되었다. 백년전쟁과 그 이후의 내란으로 봉건 귀족들이 약해지면서 왕권이 강화되었다. 헨리 7세는 정치적 통일을 이루고, 도량형을 통일하여 상업을 편리하게 했으며, 공업 노동자의 임금과 노동 시간을 규제하여 대외 무역을 장려하는 등 국가 재정을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했다.[57]

헨리 8세는 이러한 정책을 이어받아 종교개혁을 통해 로마의 영향력을 몰아내고 수도원 재산을 몰수하여 재정을 강화했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절대주의는 절정에 달했지만, 시민 계급과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제임스 1세 시대에는 왕권과 의회의 대립이 심해졌고, 찰스 1세 시대에는 이 갈등이 폭발하여 잉글랜드 내전이 일어났다.[58]

5. 1. 2. 프랑스

백년전쟁 말기 샤를 7세 시대에 프랑스의 절대주의가 시작되어 앙리 4세 시대에 그 기초가 확립되었다. 절대주의가 최성기를 이룬 것은 17세기 후반 루이 14세 시대였다. 프랑스에서는 영국과 달리 봉건적 세력의 해체가 명확하지 않았고, 농노 해방이 철저하지 못하여 독립 자영농민의 광범한 형성은 나타나지 않았다. 프랑스 농민 대부분은 현물 지대와 각종 의무 부담이 부과된 절반 소작이었으며, 자본 축적도 불충분하여 자유로운 공업 전개는 늦어지고, 도매 상인에게 지배된 길드적 수공업이 강하게 뿌리박고 있었다. 중상주의 정책에 의한 국내 산업 육성도 결국 왕립·국립 혹은 특권적 매뉴팩처를 조성하는 데 그쳤다.[57]

프랑스 귀족 세력은 뿌리가 깊어 고등법원을 중심으로 왕권에 도전하려 했으며, 특권 회복을 기도하여 반란을 일으킨 일도 있었다. 앙리 4세 이래 이러한 귀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 강화와 국내 통일을 이루려는 시책이 역대 여러 왕에 의해 실행되어, 루이 14세 친정 시대의 왕권은 비할 데 없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루이 14세의 대외 전쟁은 재정 궁핍을 초래하였고, 위그노 추방은 프랑스 경제 발전을 크게 저해했다. 루이 15세 시대에 들어오면 점차 절대주의의 결함이 표면화되었다. 루이 16세 시대에는 이미 이러한 결함은 개선할 수 없는 것이 되어 프랑스 혁명을 맞이하게 된다.[57]

미국 독립 전쟁에 대한 프랑스의 개입은 국가를 거의 파산시켰다. 재정 개혁에 대한 반복적인 실패 시도 이후, 루이 16세는 성직자, 귀족, 평민의 세 신분으로 구성된 국가 대표 기구인 1789년 삼부회를 소집해야 했다. 세 번째 신분은 다른 두 신분의 구성원들과 합세하여 스스로를 국민 의회로 선언하고, 7월에 제헌 국민 의회를 창설했다. 동시에 파리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88]

당시 의회는 입헌 군주제를 창설하려 했고, 그 후 2년 동안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봉건제 폐지, 프랑스와 로마 사이의 관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포함한 다양한 법률을 통과시켰다. 처음에는 국왕이 이러한 변화에 동의했고 국민들로부터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반왕정주의가 외국 침략의 위협과 함께 증가하면서, 국왕은 도주하여 프랑스의 적들과 합류하려 했다. 그는 체포되었고, 1793년 1월 21일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88]

1792년 9월 20일 국민 공회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프랑스를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프랑스 혁명 전쟁의 비상사태로 인해 국민 공회는 국가 행정부 역할을 할 공안 위원회를 창설했다.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치하에서 위원회는 공포 정치를 시작했고, 이 기간 동안 최대 4만 명이 파리에서 처형되었는데, 주로 귀족과 혁명 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이었고, 종종 아주 사소한 증거에 근거했다. 파리의 내부 긴장은 위원회를 더욱 급진적인 주장과 의혹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몰아갔다. 이 단계가 시작된 지 몇 달 만에, 마담 롤랑과 조르주 당통을 포함한 더 많은 저명한 혁명가들이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파벌에 의해 단두대로 보내졌다. 다른 지역에서는 반혁명 반란이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이 정권은 테르미도르 반동 (1794년 7월 27일) 쿠데타로 전복되었고, 로베스피에르는 처형되었다. 그 뒤를 이은 정권은 공포 정치를 종식시키고 로베스피에르의 더욱 극단적인 정책을 완화했다.[88]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혁명 전쟁에서 프랑스의 가장 성공적인 장군이었다. 1799년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11월 9일)에 그는 정부를 전복하고 그 자리에 그가 지배하는 통령 정부를 세웠다. 그는 교회를 복원하고, 세금을 낮게 유지하고, 권력을 파리에 집중시키고, 전장에서 영광을 얻어 프랑스에서 인기를 얻었다. 1804년 그는 스스로 황제로 즉위했다. 1805년 나폴레옹은 영국 침공을 계획했지만, 러시아 및 오스트리아와의 새로운 영국 동맹(제3차 대프랑스 동맹)으로 인해 대륙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동시에 프랑스 함대는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에 의해 격파되어 영국 침공 계획이 무산되었다. 1805년 12월 2일,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격파하여 오스트리아가 동맹에서 탈퇴하게 하고 (프레스부르크 조약 참조)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시켰다. 1806년,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10월 14일 나폴레옹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격파하고 독일을 거쳐 진격하여 1807년 6월 14일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했다. 틸지트 조약은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유럽을 분할하고 바르샤바 공국을 창설했다.[88]

베레지나 강에서 러시아로부터 퇴각하는 나폴레옹 군대


1812년 6월 12일 나폴레옹은 거의 70만 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그랑 다르메를 이끌고 러시아 원정을 감행했다. 스몰렌스크와 보로디노 전투에서 승리한 후 나폴레옹은 모스크바를 점령했지만, 퇴각하는 러시아군에 의해 불타버린 것을 발견했다. 그는 퇴각을 강요당했다. 귀환하는 동안 그의 군대는 코사크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질병과 기아에 시달렸다. 그의 병사 중 2만 명만이 이 원정에서 살아남았다. 1813년까지 나폴레옹에게 불리한 국면이 시작되었다. 1813년 10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7개국 연합군에게 패배한 후, 그는 6일 전투와 파리 점령 이후 퇴위해야 했다. 퐁텐블로 조약에 따라 그는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1815년 3월 1일 프랑스로 돌아와 (백일천하 참조) 군대를 일으켰지만, 18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프로이센 연합군에게 최종적으로 패배하여 영국의 작은 섬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되었다.[88]

5. 2. 30년 전쟁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에도 신구교 간의 갈등은 계속되었고, 17세기 초 종교적 대립은 30년 전쟁으로 이어졌다. 1618년 보헤미아 신교도들의 반란을 시작으로, 에스파냐는 구교를,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등은 신교를 지원하며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88] 이 전쟁은 종교적 갈등뿐만 아니라 합스부르크가부르봉가의 대립, 스웨덴의 북유럽 패권 추구 등 정치적, 국가적 이해관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30년 전쟁은 독일 지역을 황폐화시켰고, 인구의 3분의 1을 잃게 만들었다.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종결되었으나, 이 조약으로 독일 제후들의 영토 주권이 인정되면서 독일의 통일은 더욱 요원해졌다. 이후 독일에서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가 강국으로 성장했다. 국제적으로는 합스부르크 가의 세력이 약화되고, 프랑스와 스웨덴이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5. 3. 에스파냐의 몰락

에스파냐 번영의 주요한 기초는 신대륙에서 저렴한 은을 대량으로 얻어, 그것으로 세계 무역을 지배한 데 있었다. 그러나 획득된 돈은 귀족, 성직자, 대상인 등에 의해 낭비되었고, 은의 대가로 신대륙에 수출되는 모직물 등 공업 제품 생산에 기울인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곧 네덜란드영국에 압도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이미 16세기 후반 네덜란드가 독립 전쟁을 시작하여 1640년에는 포르투갈이 분리되었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네덜란드의 독립을 승인해야 했다. 또한 1659년의 피레네 조약, 1679년의 네이메헌 화약에 따라, 프랑스에 영토를 할양해야 했다.[88]

5. 4. 네덜란드의 성쇠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한 네덜란드는 17세기 전반에 경제적, 문화적으로 크게 번영하여 황금시대를 맞이했다. 네덜란드는 독립 전쟁 때부터 해외 발전을 꾀했으며, 특히 리스본에서 축출된 후에는 밀무역을 통해 에스파냐의 통상을 방해하고 직접 동양 무역에 진출했다. 1602년에는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아시아의 포르투갈 식민지를 차례로 점령하고 동양 무역을 지배했다.

또한 네덜란드는 북아메리카에도 진출하여 에스파냐를 대신해 세계 해상권과 무역권을 장악했다. 수도 암스테르담은 유럽 상업 및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최초의 보험 회사가 설립되고 암스테르담 은행도 개업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영국이 항해조례를 발표하면서 네덜란드는 타격을 입었다.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도 패배하여 세계 무역의 패권을 영국에 넘겨주고 점차 쇠퇴했다. 이는 네덜란드가 동양 무역의 이익에만 집중하고 국내 모직물 산업 발전을 소홀히 하여 국력의 기초를 중계 무역에 둔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88]

5. 5. 러시아의 근대화

표트르 1세의 서구화 정책으로 남자들의 수염을 깎는 모습


17세기 말까지 러시아는 서유럽 여러 나라와 별로 깊은 관계를 갖지 않은 채 여전히 동방적 존재였으며, 농노제를 기초로 하는 특이한 절대주의 국가였다. 이와 같은 러시아를 근대화하고 서유럽화하는 곤란한 사업에 착수하고 러시아로 하여금 열강의 일각을 점하게 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표트르 1세(피터 1세)였다. 그는 내정을 개혁하고 군비 확장을 실시하여 황제의 독재권을 강화하였으며, 서유럽 문화의 수입에 노력했다. 그러나 그 여러 개혁은 위로부터의 개혁이어서 사회의 진정한 근대화에는 미치지 못했고 서유럽화도 일반인에게는 관계없었으며, 농노제가 유지 강화되었다. 대외적으로는 투르크로부터 아조프해 주변을 빼앗고, 다시 서쪽으로는 스웨덴과 북방전쟁을 벌여 발트해에의 출구를 확보하고, 이곳에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여 수도로 삼았다.

표트르 1세의 사업, 특히 서유럽화의 정책은 보수파의 반항을 야기시켰고, 황제의 사후 이 항쟁은 궁정을 중심으로 정권쟁탈과 결부, 반복되어 예카테리나 2세(카자린 2세)에 이르기까지 약 40년간 계속되어 러시아를 혼란시켰다. 18세기 후반 이 혼란기 후에 즉위한 예카테리나 2세는 표트르 1세의 사업을 이어받아 계몽적 전제정치를 펴서 여러 가지 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농노제는 오히려 강화되어 농민의 대봉기 푸가초프의 난이 일어났다. 예카테리나 2세는 대외정책에도 주력하여 두 차례에 걸친 터키와의 전쟁으로 드네프르강 하구(河口) 지방과 크림반도를 병합하고 흑해(黑海) 진출의 기초를 구축했다. 또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함께 3회에 걸쳐서 폴란드를 분할하고 서쪽으로도 영토를 확대시켰다. 동쪽으로는 시베리아 전토가 이미 러시아 영토가 되어 있었으나, 다시 극동해상(海上)에 진출하고 락스맨일본에 파견하여 통상을 요구했다. 이리하여 러시아는 18세기 말 강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고 이후의 유럽 국제관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88]

5. 6. 영국의 시민 혁명

적색 - 왕당파, 녹색 - 의회파]]

영국의 시민 혁명은 청교도 혁명과 명예 혁명을 포함한다. 찰스 1세는 잦은 전쟁으로 인한 재정 문제에 직면하여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권리 청원을 받았으나, 의회를 해산하고 전제정치를 펼쳐 청교도 혁명을 야기했다.[88]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군은 왕당군을 격파하고 잉글랜드를 장악했으나, 의회 내 갈등과 국왕의 재기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크롬웰은 호국경에 취임하여 군사독재를 실시했으나, 찰스 2세가 왕정 복고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는 혁명 이전으로의 완전한 회귀는 아니었고, 청교도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 발전의 기틀이 마련되었다.[88]

제임스 2세의 가톨릭 정책에 반발한 토리당휘그당오렌지공 윌리엄을 추대했고,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를 명예 혁명이라 부르며, 권리선언 승인을 통해 입헌군주제가 확립되었다.

1689년 권리장전 문서
[88][89][90][91][92]

5. 6. 1. 권리 청원

찰스 1세는 1625년에 왕위에 오른 뒤 프랑스, 에스파냐와 잦은 전쟁을 치렀다.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강제 기부나 상납금 등에 의존하면서 국내 불만이 높아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원의원 에드워드 코크 등이 중심이 되어 국왕에게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권리 선언을 청원 형식으로 요구했다. 특별세 승인이 필요했던 찰스 1세는 마지못해 이를 재가했지만, 1629년에 의회를 해산하고 11년간 의회를 소집하지 않은 채 전제정치를 펼쳐 청교도 혁명의 원인을 제공했다.[88]

5. 6. 2. 청교도 혁명

적색 - 왕당파, 녹색 - 의회파]]

의회파는 크롬웰이 이끄는 신형 군대의 활약으로 네스비에서 왕당군을 격파하고 1646년 4월까지 잉글랜드 전역을 장악했다. 왕은 스코틀랜드군에 체포되어 영국 측에 인도되었다. 제1차 내전이 끝난 후, 의회 내부에서는 국왕과의 타협을 주장하는 장로파(Presbyterians)와 철저한 혁명을 요구하는 독립파(Independents) 간의 대립이 발생했다. 장로파는 대(大) 부르주아지와 귀족을 중심으로 입헌군주제 하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려 했다. 반면 독립파는 하층 병사와 하사관들이 급여 지연과 유족에 대한 사회 보장 부족에 불만을 품고 점차 수평파(Levellers)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하사관과 병사들은 군 간부를 통해 장로파와의 대결을 요구했다. 이 와중에 유폐되었던 국왕은 스코틀랜드와 연합하여 제2차 내전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고, 독립파는 의회에서 장로파를 추방하고 독재 체제를 구축하여 1649년 왕의 처형과 왕정 폐지를 결정했다.

크롬웰은 왕을 처형한 후 수평파 디거스(Diggers)를 탄압하고, 제5왕국파 하리돈과 연합하여 지명의회(指命議會)를 조직하고 ‘성자의 정치’를 시도했으나 곧 해산했다. 1653년 12월, 크롬웰은 《통치장전》을 수락하고 호국경에 취임했다. 그러나 1654년에 소집된 의회는 군대와 충돌하여 다음 해 1월 해산되었고, 크롬웰은 민병제를 개편하고 군정장관을 통한 군사독재를 실시했다. 그러나 유산 계급은 왕정 복귀를 원했고, 크롬웰을 왕위에 앉히고 군대를 의회의 재정적 지배하에 두는 탄원과 청원을 제출했다. 크롬웰의 즉위는 무산되었지만, 군정장관 등 군인 귀족들은 의석을 얻는 대가로 매수되었다. 크롬웰은 《통치장전》이 효력을 발휘하기 전 사망했고, 그의 아들 R. 크롬웰이 호국경이 되었으나 군대와 의회의 대립을 해결하지 못했다.

5. 6. 3. 왕정 복고

1659년 군인 귀족들은 R. 크롬웰을 폐위시키고, 프랑스에 망명해 있던 찰스 2세는 몽크 장군의 실력에 의지하여, 1680년 브레다 선언 직후 귀국하여 왕정 복고를 실현시켰다. 왕정 복고는 혁명 전의 사회질서로 완전히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국가 재산과 조세는 의회가 관장하고, 왕실비(王室費)도 의회에서 결정되었으며, 왕은 상비군 소유권, 칙령 발포권, 경찰권, 재판 간섭권을 상실하고 관리는 의회가 책임지게 되었다. 또한 영국 국교회도 과거의 독립된 권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국가와 교회가 분리되었으며 교회의 의회에 대한 의존이 강화되었다. 혁명 시대에 왕실이나 국교회가 상실했던 토지의 무상 반환, 혁명파 단죄, 국교회 재건, 국교회 기도서 부활, 가톨릭교도의 신앙 자유 등이 인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왕과 함께 왕당파 귀족이 귀국하여 의회에서 다수를 점하게 됨에 따라 보수정치로 역행하였으나, 청교도 혁명을 거치면서 영국에 도입된 자본주의를 자유롭게 발전시킬 수 있는 사회 및 정치 기구는 봉건적인 구조로 되돌아가지 않았다.[88]

5. 6. 4. 명예 혁명

제임스 2세는 1687년과 1688년 두 차례에 걸쳐 가톨릭 신앙을 공인할 목적으로 종교 관용령을 발표했으나, 신교인 비국교도와 국교도는 이에 반대하였다. 그들에게 가톨릭은 오랜 적국인 에스파냐와 프랑스의 국교였고, 가톨릭 부활은 대토지 소유자의 기득권을 위협하고 반동정치를 강화할 우려가 있었다. 토리당도 왕의 전제에 반발했으나, 1688년 6월 가톨릭 신자인 제임스 2세의 두 번째 부인 모데나의 메리가 왕자를 낳자 신교도 공주가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사라져 휘그당과 협력하여 제임스 2세를 폐위하기로 결의하였다. 양당 대표는 메리 2세의 남편인 오렌지공 윌리엄에게 정식 초청장을 보내 왕으로 추대하였다. 제임스 2세는 타협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윌리엄은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런던으로 진격했다. 왕당군은 저항하지 않았고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 사건은 유혈 사태 없이 대토지 소유자와 부르주아지의 기득권을 재확인하고 1642년 이래 시민혁명의 막을 내린 것으로, 영국인들은 이를 명예혁명이라 불렀다. 의회가 제출한 권리선언을 국왕이 승인(1689)하면서 헌정이 확인되고 정치사상 중대한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국왕의 신권설적인 절대주의와 의회의 입헌주의 간의 항쟁은 입헌주의의 승리로 종결되었고, 국가 주권은 실질적으로 의회에 귀속되었다. 이로써 민권과 ‘군림은 해도 통치하지 않는’ 왕권의 조화를 바탕으로 영국 특유의 입헌군주제가 확립되었다.[88][89][90][91][92]

5. 7. 산업 혁명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은 단순한 생산 기술의 혁신을 넘어, 공장제 수공업(매뉴팩처)에서 기계제 대공장(팩토리)으로의 전환을 통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확립한 변혁이었다. 이러한 생산상의 혁명이 영국에서 최초로 실현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작용했다.

  • 정치, 사회적 요인:
  • 영국은 봉건적 관계가 빠르게 해체되면서, 다른 국가들에 비해 상공업 발전이 유리한 조건이었다. 특히 양모 공업이 전국적으로 발전했다.
  • 시민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 발전을 저해하는 제도적 장벽이 제거되었다.
  • 경제적 요인:
  • 17, 18세기에 걸쳐 국내 산업 보호와 적극적인 무역 정책으로 중상주의적 식민지 정책이 추진되어 국내에 자본 축적이 이루어졌다.
  • 영국 본토, 아프리카, 북아메리카, 서인도 제도, 인도, 중국을 연결하는 복잡한 무역망이 조직되어 면제품 수출이 중요해졌다.
  • 산업 발전과 그 영향:
  • 면제품 생산고가 비약적으로 증가하여 19세기 초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위가 되었다.
  • 면직물 공업 발전은 철, 기계, 석탄 수요 증대와 저렴한 수송 수단의 필요성을 야기하여 산업 전반에 연쇄적인 영향을 미쳤다.
  • 영국은 19세기 초 선철 생산량, 출탄량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증기 기관, 직기 등 기계 공업 기술이 발전하여 '세계의 공장'으로 불렸다.

  • 사회 문제 발생:
  • 자본주의 생산관계 확립은 영국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 독립 생산자들은 자본에 종속된 임금 노동자로 전환되었다.
  • 자본 경쟁 심화로 임금 저하, 부녀자와 아동 노동, 신흥 공업 도시의 슬럼 형성, 장시간 노동 등의 문제가 발생하여,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사회 문제가 나타났다.

5. 8. 식민지 전쟁

북아메리카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전은 유럽에서의 대립을 반영했다. 프랑스는 캐나다, 미시시피 유역에 식민지를 넓혀 영국 식민지를 북쪽과 서쪽에서 포위하는 형세를 취했다. 영국과 프랑스 식민지 간의 최초의 싸움은 윌리엄 왕 전쟁이었다. 유럽의 스페인 계승 전쟁은 식민지에서 앤 여왕 전쟁으로,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은 조지 왕 전쟁으로, 7년 전쟁프렌치 인디언 전쟁으로 이어져, 이른바 '제2차 백년 전쟁'이 전개되었다.[88] 프랑스는 북아메리카 식민지 경영은 주로 인디언과의 모피 무역을 중심으로 했지만, 영국은 농업 중심의 식민지 경영을 펼쳐, 결국 영국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5. 9. 미국의 성립

7년 전쟁이 끝나면서 식민지와 영국 본국 사이의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 식민지 경제가 발전하면서 영국 본토의 중상주의 지배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영국은 7년 전쟁에 들어간 막대한 비용을 식민지에 부담시키려 했고, 이는 식민지 주민들에게 불만과 반감을 일으켰다. "대표 없는 곳에 과세 없다"는 생각이 퍼져나갔다.[88]

1773년 보스턴 차 사건을 계기로 영국은 보스턴 시민들에게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퀘벡법 제정은 식민지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고, 1774년 대륙회의는 영국 정부에 완화를 요청했다. 그러나 렉싱턴에서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했다. 독립운동에는 온건파와 급진파가 있었는데, 점차 급진파가 주도권을 잡고 독립선언과 국가연합으로 이어졌다. 혁명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자 보수파가 다시 주도권을 잡고 헌법 제정을 통해 연방 정부를 수립했다.[89]

미국 독립 혁명(1775~1783)은 유럽 열강에 맞선 식민지의 첫 성공적인 반란이었다. 공화주의 정부 형태를 수립하여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90]

5. 10. 프랑스 혁명

프랑스는 18세기에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비롯한 여러 전쟁에 참여했지만, 이는 국가 재정 위기를 심화시켰다. 루이 14세의 위그노 추방은 산업 발전을 저해했고, 프랑스의 부르주아적 발전은 영국에 비해 더뎠다.[88] 18세기 후반, 중농주의자들은 곡물 거래와 인클로저의 자유를 요구하며 자본주의적 발전을 추구했다. 면직물 공업이 성장하고 매뉴팩처가 등장했지만, 길드 규제는 여전히 강했다.

튀르고는 재무총감으로서 농민 해방, 길드제 폐지 등을 목표로 한 '여섯 가지 칙령'을 발표했지만, 귀족과 특권 상인의 반발에 직면했다. 한편, 리옹에서는 견직물 직공들의 파업이 발생하는 등 노동자들의 투쟁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귀족 계급은 대검귀족과 법복귀족으로 나뉘어 봉건적 특권을 누렸지만, 대부분은 궁정에 기생하며 영지 경영에는 무관심했다. 절대 왕정과 귀족들은 재정난에 시달리며 농민 착취를 강화했고, 이는 농촌을 황폐화시켰다. 계몽 사상가들은 이러한 사회 모순을 비판하며 합리적인 사회제도의 출현을 주장했다.

루이 16세는 튀르고와 네케르를 등용하여 재정 위기를 극복하려 했으나, 특권층의 저항과 미국 독립 혁명 개입으로 실패했다. 칼론과 브리엔의 개혁 시도 역시 실패했고, 결국 1788년 삼부회 소집이 결정되었다. 1789년 삼부회는 국민의회로 발전하여 입헌 군주제를 추진했지만, 국왕의 군사적 탄압 시도는 바스티유 습격을 초래했다.
루이 16세의 처형
루이 16세는 국외 도주 실패 후 1791년 헌법을 승인해야 했고, 국민공회에 의해 퇴위당하고 1793년 처형되었다.[88]

역사학자 R.R. Palmer와 Joel Colton은 프랑스 혁명이 "구체제"를 "현대 사회"로 대체했으며, 이후 모든 혁명 운동의 전신이 되었다고 평가했다.[88]

5. 10. 1. 프랑스 혁명의 배경

프랑스 혁명은 18세기 말 프랑스에서 발생한 중대한 사건으로,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구체제)의 모순, 계몽 사상의 영향, 그리고 미국 독립 혁명의 영향으로 인해 발생하였다.

  • '''앙시앵 레짐의 모순:''' 18세기 프랑스 사회는 절대 왕정과 귀족 중심의 신분제로 인해 심각한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겪고 있었다. 루이 14세 이후 계속된 전쟁으로 국가 재정은 악화되었고, 귀족들은 특권을 누리며 농민들을 착취하여 농촌 경제는 피폐해졌다.[88] 튀르고와 같은 중농주의자들은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했으나, 특권층의 반발로 개혁은 실패하였다.
  • '''계몽 사상의 영향:''' 계몽 사상가들은 이성과 합리성을 강조하며, 앙시앵 레짐의 불합리한 사회 제도를 비판하고 새로운 사회 질서를 제시하였다. 이들의 사상은 프랑스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쳐 혁명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다.[92]
  • '''미국 독립 혁명의 영향:''' 미국 독립 혁명공화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국가 건설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프랑스는 미국 독립 전쟁에 참여하여 재정난이 더욱 심화되었지만, 이는 동시에 프랑스 시민들에게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켰다.[90][91]


루이 16세는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1789년 삼부회를 소집하였으나, 이는 오히려 국민 의회의 탄생과 바스티유 습격으로 이어져 혁명의 불길을 댕기는 계기가 되었다.[89]

5. 10. 2. 혁명의 전개 과정

프랑스 혁명은 1789년에 발발하여 "구체제"를 "현대 사회"로 대체했으며, 이후의 모든 혁명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88]

1789년 삼부회가 소집되었으나, 국민 의회로 발전하며 입헌 왕정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러나 국왕은 군대를 동원하여 의회를 탄압하려 하였고, 이에 시민들은 1789년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며 봉기하였다.[91]

국민 의회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하고 봉건제를 폐지하는 등 개혁을 추진했다. 초기에는 국왕도 이러한 변화에 동의했지만, 반왕정주의가 심화되자 국왕은 국외로 도주를 시도하다 체포되었고, 1793년 1월 반역죄로 처형되었다.[91] 1792년, 국민 공회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포하였다.[91]

5. 10. 3. 혁명의 결과와 의의

프랑스 혁명은 1789년에 발발하여 유럽과 세계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 혁명은 "구체제"를 "현대 사회"로 대체하는 중대한 전환점이었으며, 이후의 모든 혁명 운동에 영감을 주었다.[88]

프랑스 혁명과 뒤이은 나폴레옹 전쟁은 유럽의 많은 군주들을 위협했다. 러시아의 차르 파벨 1세는 암살되었고,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처형되었다. 스페인, 스웨덴의 왕들도 폐위되었으며, 나폴레옹과 그의 친척들 역시 권좌에서 물러났다.[89]

미국 독립 혁명(1775-1783)은 유럽 열강에 대한 식민지의 첫 성공적인 반란이었으며, 공화주의 정부 형태를 수립하여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90] 프랑스 혁명(1789-1804)은 이러한 민주주의적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그 영향력은 더욱 컸다.[91] 프랑스 역사가 프랑수아 오라르는 프랑스 혁명이 "단순히 국가적인 혁명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고 평가했다.[92]

프랑스 혁명은 봉건제 폐지, 개인의 해방, 토지 소유의 분할, 귀족 특권 폐지, 평등 확립 등 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를 가져왔다.[92]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통해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이 널리 확산되었으며, 이는 유럽 전역의 민족주의 운동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 독립 전쟁에 대한 프랑스의 지원은 국가 재정을 파탄시켰고, 루이 16세는 1789년 삼부회를 소집하여 재정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제3신분은 국민 의회를 결성하고,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며 혁명이 시작되었다.

국민 공회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포했으며, 공안 위원회를 통해 공포 정치를 실시했다.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했지만,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실각하고 처형되었다. 이후 공포 정치는 종식되고, 보다 온건한 정책이 추진되었다.

5. 11. 나폴레옹의 등장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구지롱드파가 권력을 잡고 총재정부가 성립되었으나, 프랑스 국내의 복잡한 사정으로 안정을 이루지 못하였다. 한편 나폴레옹은 왕당파의 방데미에르 봉기를 진압하여 총재정부로부터 북이탈리아 방면의 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탈리아 군사령관이 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체결, 명성을 떨쳤다.

브뤼마르 쿠데타를 지휘하는 나폴레옹.


이집트에 원정하던 도중 총재정부의 위기가 닥치자 귀국하여 1799년 11월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로 제1통령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뤼네빌, 아미앵 조약의 체결로 평화를 회복하고, 종교협약, 나폴레옹 법전 등으로써 프랑스 국내 정치를 안정시키고, 1804년 5월 황제가 되어 12월에 대관식을 가졌다.[88]

아미앵 조약 조항을 영국과 프랑스가 다 같이 준수하지 않음으로써 나폴레옹은 1803년 5월에 영국과의 전쟁을 시작하였으며, 1805년 영국 본토 상륙을 꾀했던 프랑스 해군이 트라팔가에서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에 격파당함으로써 나폴레옹의 계획은 완전히 좌절되었다. 반면 나폴레옹은 동년 12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연합군을 아우스터리츠에서 격파하여 오스트리아 황제를 항복시켰다. 이듬해 10월 나폴레옹은 러시아와 동맹을 맺은 프로이센을 침공, 예나 회전에서 프로이센 군대에 결정적 타격을 주고, 베를린을 점령하였다. 나폴레옹은 11월 베를린에서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대륙봉쇄령을 내렸다.[89]

대륙봉쇄령으로 경제적 타격을 입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는 1811년 대륙봉쇄령을 더 이상 준수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에 무력 제재를 가하기 위해 1812년 6월 러시아에 침입하였으나 모스크바에서 패퇴하고 몰락하였다.[90]

5. 12. 빈 체제

나폴레옹 전쟁 이후 1814년 파리 조약에 따라 빈 회의가 개최되어 빈 체제가 성립되었다. 빈 체제는 2월 혁명으로 붕괴되기까지 약 30년간 전 유럽을 지배하면서 각국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민족주의적 요구를 억압하였다.

프랑스 루이 18세의 후계자인 샤를 10세의 보수 정치는 7월 혁명을 야기했다. 이 혁명은 벨기에, 이탈리아, 폴란드에도 영향을 미쳤다. 7월 혁명으로 7월 왕정이 수립되었으나, 상층 부르주아의 입장을 대변하여 민주적 개혁은 제한적이었다. 산업 부르주아지와 노동자들은 7월 왕정에 불만을 품었고, 특히 탄압받던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정권에 실망하여 민주주의적 요구와 함께 사회주의적 요구를 제기하였다.[152]

5. 13. 1848년의 유럽 혁명

나폴레옹 전쟁 이후 빈 회의를 통해 빈 체제가 성립되었다. 빈 체제는 2월 혁명 이전까지 약 30년간 유럽 전역을 지배하며 자유주의, 민주주의, 민족주의적 요구를 억압했다.[156][157]

프랑스에서는 샤를 10세의 보수 정치에 대한 반발로 7월 혁명이 일어났고, 이는 벨기에, 이탈리아, 폴란드 등 주변국에 영향을 미쳤다. 혁명으로 7월 왕정이 수립되었으나, 상층 부르주아의 이익만을 대변하여 민주적 개혁은 제한적이었다. 산업 부르주아지와 노동자들은 7월 왕정에 불만을 품었고, 특히 노동자들은 사회주의적 요구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5. 14. 발칸 문제

발칸 반도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렸다. 19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의 약화와 함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등이 독립했지만, 여전히 많은 민족들이 독립을 원하며 민족주의 운동을 펼쳤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 등 강대국들은 발칸 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고, 이는 민족주의 운동과 결합하여 더욱 복잡한 상황을 만들었다. 특히, 러시아범슬라브주의를 내세워 발칸 반도의 슬라브족 국가들을 지원하며 영향력을 키우려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2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그리스, 불가리아발칸 동맹을 결성하고 오스만 제국에 맞서 제1차 발칸 전쟁을 일으켰다. 발칸 동맹은 승리했지만, 영토 분배를 둘러싼 갈등으로 제2차 발칸 전쟁이 발발했고,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5. 15. 이탈리아 통일

제공된 소스에는 "이탈리아 통일"에 대한 내용이 없으므로, 해당 섹션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전 답변과 동일하게 출력합니다.

5. 16. 독일의 통일

1989년 11월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베를린 장벽 위에 서 있는 독일인들. 며칠 안에 장벽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냉전 종식 및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국가 경계의 변화


1980년대 폴란드에서 일어난 연대 운동은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공산주의 정부를 약화시켰다. 당시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를 시작하여 유럽 내 소련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1989년 범유럽 피크닉 이후 철의 장막베를린 장벽 붕괴가 있었고, 소련 외부의 공산주의 정부가 전복되었다. 1990년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은 동독을 흡수하여 통일을 이루었다.[172]

5. 17. 제국주의

19세기 후반, 유럽 열강들은 산업 혁명을 통해 축적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태평양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제국주의 시대를 열었다.

1873년 공황과 뒤이은 장기 불황은 유럽 국가들이 새로운 시장과 자원 확보의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 이러한 경제적 요인과 더불어, 민족주의의 고양, 군사적 경쟁, 그리고 사회진화론과 같은 사상적 배경이 제국주의를 추동했다.

열강들은 경쟁적으로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다. 영국은 인도를 비롯한 광대한 식민지를 경영하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고, 프랑스 역시 알제리를 비롯한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 외에도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 유럽 각국이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렸다.

1885년에는 사라예보에 유럽 최초의 영구적인 시 전체 전기 전차 시스템이 설치되었다.

제국주의 시대는 피지배 민족에게 가혹한 착취와 억압을 가져왔지만, 한편으로는 철도, 항만, 도로 등 사회 기반 시설이 건설되고, 근대적인 교육과 의료 시스템이 도입되는 변화도 있었다.

5. 17. 1. 영국의 제국주의

영국의 역사는 산업 혁명과 제국주의 정책을 통해 발전하였다. 브리튼의 역사의 하위 항목인 잉글랜드의 역사, 스코틀랜드의 역사, 웨일스의 역사는 영국의 식민지 확장 과정을 보여준다.

5. 17. 2. 프랑스의 제국주의

프랑스는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프랑스의 역사에서 광대한 식민 제국을 건설했다. 이 시기 프랑스의 제국주의 정책은 알제리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6. 세계 대전

19세기 유럽 열강 간의 경쟁은 민족주의 심화로 인해 고조되었고,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며 그 갈등이 폭발했다.[145] 1914년부터 1918년까지 6천 5백만 명 이상의 유럽 군인이 동원되었고, 2천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했다.[146]

제1차 세계 대전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의 동맹국(삼국 동맹)과 세르비아, 프랑스, 영국, 러시아의 삼국 협상 세력 간의 대립이었다. 1915년에는 이탈리아, 1916년에는 루마니아, 1917년에는 미국이 삼국 협상 측에 합류했다. 서부 전선에서는 베르됭, 등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었지만,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러시아 짜르 정권이 무너지고, 독일은 동부 전선에서 승리했다. 자유주의 정부 수립 8개월 후, 10월 혁명으로 블라디미르 레닌볼셰비키가 권력을 잡고 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했다. 1917년 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과 1918년 독일의 봄 공세 실패로 독일군은 병력이 고갈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오스만 제국이 항복하고 해체되었으며, 1918년 11월 11일 독일도 항복했다.[147][148]

윌리엄 오펜의 그림 ''거울의 방에서 이루어진 평화 조약 조인, 베르사유, 1919년 6월 28일''의 세부 묘사, 패전국의 대표 맞은편에서 평화 조약에 서명하는 독일 하급 관리


제1차 세계 대전은 파리 강화 회의, 1919년에서 승전국에 의해 해결되었다. 주요 결정 사항은 국제 연맹 창설, 패전국과의 평화 조약(특히 독일과의 베르사유 조약), 독일과 오스만 제국의 해외 영토를 영국과 프랑스에 "위임 통치"로 할당, 민족주의 세력을 반영한 새로운 국가 경계선 설정 등이었다.[149][150]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의 군사력을 약화시키고 전쟁에 대한 완전한 책임과 막대한 배상금을 독일에 부과했다. 이러한 독일의 굴욕감과 분노는 훗날 나치 성공의 원인이 되었으며, 간접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의 원인이 되었다.

6. 1. 제1차 세계 대전

19세기 대부분 상대적인 평화가 지속되었으나, 유럽 열강 간의 경쟁은 각 민족 집단 사이에서 고조되는 민족주의로 인해 심화되었다. 결국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이러한 경쟁은 폭발했다.[145] 1914년부터 1918년까지 6천 5백만 명 이상의 유럽 군인이 동원되었고, 2천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했다.[146]

제1차 세계 대전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로 구성된 동맹국(삼국 동맹)과 세르비아, 프랑스, 영국, 러시아로 구성된 삼국 협상 세력 간의 대립이었다. 1915년에는 이탈리아, 1916년에는 루마니아, 1917년에는 미국이 삼국 협상 측에 합류했다. 서부 전선에서는 베르됭, 과 같은 전투에서 수십만 명이 사망하는 등 어느 쪽도 영토를 확보하지 못한 채 잔혹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짜르 러시아가 붕괴되었고, 독일은 동부 전선에서 승리했다. 자유주의 정부 수립 8개월 후, 10월 혁명으로 블라디미르 레닌볼셰비키가 권력을 잡고 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했다. 1917년 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과 1918년 독일의 봄 공세 실패로 독일군은 병력이 고갈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오스만 제국이 항복하고 해체되었으며, 1918년 11월 11일 독일도 항복했다.[147][148]

제1차 세계 대전은 파리 강화 회의, 1919년에서 승전국에 의해 해결되었다. 주요 결정 사항은 국제 연맹 창설, 패전국과의 평화 조약(특히 독일과의 베르사유 조약), 독일과 오스만 제국의 해외 영토를 영국과 프랑스에 "위임 통치"로 할당, 민족주의 세력을 반영한 새로운 국가 경계선 설정 등이었다.[149][150] 여러 국가가 소수 민족 권리 조약에 서명해야 했다.[151]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의 군사력을 약화시키고 전쟁에 대한 완전한 책임과 막대한 배상금을 독일에 부과했다. 이러한 독일의 굴욕감과 분노는 훗날 나치 성공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으며, 간접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원인이 되었다.

6. 2. 러시아 혁명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이 승리하면서 자유주의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17년부터 공산주의 운동이 새롭게 떠오르는 자유주의 질서에 도전했고, 다른 곳에서는 모두 격퇴되었지만 러시아에서는 성공했다.[154]

6. 2. 1. 러시아 혁명의 배경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는 자유주의의 승리처럼 보였다. 역사학자 마틴 블링크혼은 "문화적 다원주의, 종교적 및 민족적 관용, 민족 자결, 자유 시장 경제, 대의 및 책임 정부, 자유 무역, 노동조합주의, 그리고 새로운 기구인 국제 연맹을 통한 국제 분쟁의 평화적 해결"과 같은 자유주의적 주제가 우세했다고 주장한다.[153] 그러나 1917년부터 공산주의 운동이 새롭게 떠오르는 자유주의 질서에 도전했고, 다른 곳에서는 모두 격퇴되었지만 러시아에서는 성공했다.[154]

6. 2. 2. 혁명의 전개 과정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이 승리하면서 자유주의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역사학자 마틴 블링크혼은 "문화적 다원주의, 종교적 및 민족적 관용, 민족 자결, 자유 시장 경제, 대의 및 책임 정부, 자유 무역, 노동조합주의, 그리고 새로운 기구인 국제 연맹을 통한 국제 분쟁의 평화적 해결"과 같은 자유주의적 주제가 우세했다고 주장한다.[153] 베르사유 조약(1919)에서 승전국들은 민족 자결주의에 기초하여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제국에서 창설된 새로운 국가들(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오스트리아, 유고슬라비아,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을 인정했다. 1922년 이전에는 우크라이나-소비에트 전쟁(1917–1921)과 폴란드-소비에트 전쟁(1919–1921)과 같은 몇몇 소규모 전쟁이 있었지만 평화로운 시대였다. 주요 도시들은 "광란의 20년대" 또는 "재즈 시대"라고 불리는 청년 문화를 후원했다.[152]

그러나 1917년 이래로 떠오르는 자유주의적 질서는 새로운 공산주의 운동에 의해 도전받고 있었다. 공산주의 혁명은 다른 모든 곳에서는 실패했지만 러시아에서는 성공했다.[154] 1922년 이탈리아는 파시즘으로 알려진 권위주의적 독재를 채택했다. 1930년대에 권위주의 정권은 나치 독일,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폴란드, 그리스, 발트해 연안 국가, 프랑코 치하 스페인에서 민주주의를 대체했다. 1940년까지 유럽 대륙에는 프랑스, 핀란드, 스위스, 스웨덴 등 4개의 자유 민주주의 국가만 남아 있었다.[155]

6. 3. 대공황

1929년 월가 대폭락 이후, 세계 대부분이 대공황에 빠졌고, 물가와 이윤이 하락했으며 실업률이 급증했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분야는 중공업, 수출 지향적인 농업, 광업 및 벌목업, 건설업 등이었다. 세계 무역은 3분의 2로 감소했다.[156][157]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은 독재와 권위주의 정권으로 돌아섰다. 가장 중대한 정부 변화는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잡았을 때 일어났다. 안정성을 가져오기 위해 1919년에 국제 연맹이 창설되었다. 그러나 국제 연맹은 나치 독일, 일본 제국, 소련, 그리고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의 호전성과 미국의 불참으로 인해 어떠한 주요 위기도 해결하지 못했다. 1937년에는 대부분 무시되었다.[158]

이탈리아는 1931년 에티오피아를 정복했다.[159] 스페인 내전 (1936–1939)은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반군(국민파)이 승리했다. 내전은 더 큰 분쟁으로 확대되지는 않았지만, 좌파, 공산주의 운동, 많은 자유주의자와 가톨릭교도, 보수주의자, 파시스트 간의 전 세계적인 이념 투쟁의 장이 되었다. 영국, 프랑스, 미국은 중립을 유지했다. 전 세계적으로 평화주의는 쇠퇴했고, 또 다른 세계 대전이 임박했다는 인식이 커져갔다.[160]

6. 4. 나치의 등장

1929년 월가 대폭락 이후, 세계 대부분이 대공황에 빠졌고, 물가와 이윤은 하락했으며 실업률은 급증했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분야는 중공업, 수출 지향적인 농업, 광업 및 벌목업, 건설업 등이었다. 세계 무역은 3분의 2로 감소했다.[156][157]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은 독재와 권위주의 정권으로 돌아섰다. 가장 중대한 정부 변화는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잡았을 때 일어났다.
1933년 3월 23일, 아돌프 히틀러가 국회에서 연설하는 모습
안정성을 가져오기 위해 1919년에 국제 연맹이 창설되었다. 그러나 국제 연맹은 나치 독일, 일본 제국, 소련, 그리고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의 호전성과 미국의 불참으로 인해 어떠한 주요 위기도 해결하지 못했고, 1937년에는 대부분 무시되었다.[158]

이탈리아는 1931년 에티오피아를 정복했다.[159] 스페인 내전(1936–1939)은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반군(국민파)이 승리했다. 내전은 더 큰 분쟁으로 확대되지는 않았지만, 좌파, 공산주의 운동, 많은 자유주의자와 가톨릭교도, 보수주의자, 파시스트 간의 전 세계적인 이념 투쟁의 장이 되었다. 영국, 프랑스, 미국은 중립을 유지했다. 전 세계적으로 평화주의는 쇠퇴했고, 또 다른 세계 대전이 임박했다는 인식이 커져갔다.[160]

6. 5. 제2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패전국에 대한 가혹한 배상과 영토 문제는 또 다른 분쟁의 씨앗을 뿌렸다. 특히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군사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막대한 배상금 부담과 전쟁 책임 조항으로 인해 국민들의 불만이 커졌다.[149][150][151] 이러한 굴욕감과 분노는 나치의 성공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7. 현대



서유럽은 지역 통합과 방어를 위해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 유럽 평의회 등의 조직을 통해 경제적, 정치적 통합을 시작했다. 1993년 마스트리흐트 조약으로 유럽 연합이 설립되었고, 유로화가 도입되어 유로존을 형성했다. EU는 유고슬라비아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고,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을 지원하는 문제에 대해 분열되었다. NATO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여했지만 미국의 참여 수준보다는 훨씬 낮았다.

7. 1. 냉전 종식과 유럽 통합

1980년대 폴란드에서 연대 운동이 일어나 폴란드의 공산주의 정부를 약화시켰다. 당시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를 시작하여 유럽 내 소련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1989년 범유럽 피크닉 이후 철의 장막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소련 외부의 공산주의 정부들이 무너졌다.[172] 1990년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은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을 흡수하여 통일을 이루었다. 1991년에는 소련이 해체되어 15개의 독립 국가로 분열되었다.

유럽 경제 공동체(EEC)는 더 긴밀한 통합을 추진하고 외교 및 국내 문제에 대한 협력을 강화했으며, 중립국 및 구 공산 국가로 회원국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1993년 마스트리흐트 조약에 따라 EEC를 계승하여 유럽 연합(EU)이 설립되었다. 오스트리아, 핀란드, 스웨덴 등 중립국들이 EU에 가입했고, 가입하지 않은 국가들은 유럽 경제 구역을 통해 EU의 경제 시장에 참여했다. 이들 국가는 회원국 간 국경 통제를 해제한 쉥겐 조약에도 가입했다.[172] 1999년에는 유로화가 도입되었고, 2002년에는 유로존 참가국들의 기존 통화를 대체하며 유로존이 형성되었다.

냉전 이후,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와 EU는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이전 회원국 대부분을 점진적으로 받아들였다. 2004년 EU는 10개의 새로운 회원국을 받아들였다.[173]

국가비고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소련의 일부였던 국가
체코, 헝가리, 폴란드,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구 공산 국가
몰타
키프로스분단된 섬



이후 2007년에는 불가리아루마니아가 EU에 가입했다.

러시아는 이러한 확장을 1990년에 NATO가 "동쪽으로 1인치도 확장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위반한 것으로 해석했다.[173] 러시아는 벨라루스우크라이나와의 가스 공급 분쟁, 2008년 러시아-조지아 전쟁 등을 일으켰다.

EU 내 여론은 터키의 후보 지위 획득 등 지나치게 적극적인 확대에 대한 반대로 이어졌다. 유럽 헌법 제정 조약은 프랑스네덜란드에서 거부되었고, 이후 리스본 조약아일랜드에서 거부되었으나, 2009년 아일랜드에서 두 번째 투표를 통해 통과되었다.

2007–2008년 금융 위기와 대침체는 유럽에 영향을 미쳤고, 각국 정부는 긴축 정책으로 대응했다. 그리스와 같은 일부 EU 국가들은 부채를 감당하기 어려워 사회 불안, 정부 청산, 재정 파탄을 겪었다. 2010년 5월, 독일 의회는 그리스가 엄격한 긴축 조치를 따르는 조건으로 3년 동안 224억유로를 대출하기로 합의했다.

2014년부터 우크라이나혁명과 불안 상태에 있었다. 3월 16일, 크림 반도에서 논란이 있는 국민 투표가 열렸고, 크림 반도는 ''사실상'' 분리되어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합병이 이루어졌다.

2016년 6월, 영국에서 유럽 연합 회원국 국민 투표가 열려 유권자의 52%가 EU 탈퇴에 찬성했다. 이는 브렉시트 분리 과정과 협상으로 이어져 영국과 나머지 유럽 연합 국가 모두에게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가져왔다. 영국은 2020년 1월 31일 EU를 탈퇴했다. 그해 말, 유럽은 코로나19 범유행의 영향을 받았다.

2021년, 앙겔라 메르켈이 16년간의 독일 총리직에서 물러났다.[174] 러시아는 2014년에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주요 확대로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 침공을 시작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가장 큰 재래식 군사 공격이다.[175][176][177]

7. 2. 21세기 유럽의 과제

21세기 초, 유럽은 여러 도전에 직면했다. 2007-2008년 금융 위기와 대침체는 유럽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고, 각국 정부는 긴축 정책으로 대응했다.[174] 특히 그리스와 같은 작은 EU 국가들은 부채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고, 이는 사회 불안과 반긴축 운동으로 이어졌다.[174] 2010년 독일은 그리스에 대규모 구제금융을 제공했지만, 엄격한 긴축 조치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는 혁명과 불안정한 상황이 발생했다. 논란이 된 국민 투표 이후 크림 반도가 러시아에 합병되었지만, 국제사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2016년 영국은 국민 투표를 통해 EU 탈퇴(브렉시트)를 결정했다.[174] 이는 영국과 EU 모두에게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가져왔으며, 영국은 2020년 1월 31일 EU에서 공식적으로 탈퇴했다.

2020년에는 코로나19 범유행이 유럽 전역을 강타했다. 2021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퇴임하면서, 유럽은 브렉시트로 인한 지리적, 경제적 위축, 정치적, 문화적 분열, 기술 경쟁력 약화, 미중 전략 경쟁 심화 등 여러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174]

2022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시작하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확대시켰다.[175][176][177]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군사적 공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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