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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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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음악의 역사는 인류가 음악을 언제, 어떻게, 왜 시작했는지에 대한 추정에서 시작하여, 고대,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주의, 19세기, 20세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음악 발전을 다룬다. 음악은 종교 의식, 국가 행사, 오락 등 다양한 목적과 사회적 배경 속에서 발전해왔으며,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양상과 특징을 보여준다. 특히 서양 음악은 악기, 음악 이론, 형식의 발전을 통해 고유한 역사를 형성했으며, 20세기에는 대중음악의 등장과 함께 음악 감상 방식의 혁신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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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역사
음악사 개요
연구 범위음악의 기원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문화권의 음악을 포괄
연구 방법고고학: 고대 악기 및 유물 연구
문헌학: 악보, 음악 이론서, 역사 기록 분석
민족음악학: 구전 음악 전통 연구, 문화인류학적 접근
음악의 정의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화하는, 인간의 소리 표현 양식
선사 시대 음악 (기원전 5만 년 ~ 기원전 3000년)
특징원시적인 형태의 리듬과 멜로디 사용
주술, 종교 의식, 노동요 등 실용적인 목적
구전으로 전승
악기뼈 피리, 돌, 나무, 가죽 등 자연 재료 사용
동굴 벽화를 통해 악기 형태 추정
주요 유적슬로베니아 디베예 바베 (Divje Babe)의 뼈 피리 (약 4만 년 전)
프랑스 쇼베 동굴의 악기 그림
고대 문명 음악 (기원전 3000년 ~ 기원후 500년)
메소포타미아수메르,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문명 발달
쐐기 문자로 기록된 악보 발견
리라, 하프, 오보에 등 사용
우르의 리라기원전 2500년경 제작, 왕족 의례 사용 추정
이집트피라미드 벽화, 파피루스를 통해 음악 활동 확인
하프, 플루트, 클래퍼 등 사용
종교 의식, 축제, 연회 등에서 음악 연주
그리스음악이 교육, 철학, 연극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숭배 의식에서 음악 중요
리라, 아울로스, 키타라 등 사용
음계, 선법 등 음악 이론 발달
피타고라스 음계 연구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음악 교육의 중요성 강조
로마그리스 음악의 영향, 군사적 목적의 음악 발달
트럼펫, 튜바, 오르간 등 사용
검투 경기, 축제, 군대 의식 등에서 음악 연주
중세 음악 (500년 ~ 1400년)
특징기독교 교회 음악 중심 발전
단선율 그레고리오 성가 유행
다성 음악의 시작 (9세기경)
기보법 발달 (11세기경)
세속 음악 (음유시인, 방랑 악사) 활동
주요 인물그레고리오 1세: 그레고리오 성가 정비
귀도 다레초: 4선 악보 개발
힐데가르트 폰 빙엔: 여성 작곡가, 신비주의 음악
레오팽과 노테르: 초기 다성 음악 작곡가
음악 형식미사, 모테트, 콘둑투스 등
트루바두르, 트루베르, 미네젱어의 세속 가곡
악기오르간, 류트, 피들, 젬벨, 리코더 등
르네상스 음악 (1400년 ~ 1600년)
특징인문주의 사조 영향, 인간 감정 표현 중시
다성 음악의 황금기, 성악 중심
대위법과 화성법 발전
출판 기술 발달로 음악 보급 확대
세속 음악의 성장, 마드리갈, 샹송 유행
주요 인물조스캥 데 프레: 르네상스 대표 작곡가
조반니 피에르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 교회 음악의 완성
기욤 뒤파이, 요하네스 오케겜, 오를란도 디 라소 등
음악 형식미사, 모테트, 마드리갈, 샹송, 칸초나 등
악기비올, 류트, 오르간, 리코더, 코넷, 트롬본 등
바로크 음악 (1600년 ~ 1750년)
특징장식음, 대조, 강렬한 리듬 사용
통주 저음 (베이스 라인 위에 화음 채우기) 기법 발달
오페라, 협주곡, 소나타 등 새로운 형식 등장
궁정과 교회 중심으로 음악 활동
주요 인물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바로크 음악의 집대성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오페라와 오라토리오 작곡가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오페라의 선구자
안토니오 비발디: 협주곡 작곡가
음악 형식오페라, 오라토리오, 칸타타, 협주곡, 소나타, 푸가
악기바이올린, 첼로, 오보에, 바순, 하프시코드, 오르간
고전주의 음악 (1750년 ~ 1820년)
특징균형, 명확성, 간결함 추구
소나타 형식 완성
관현악단 규모 확대
후원 제도 쇠퇴, 공공 음악회 증가
주요 인물요제프 하이든: 교향곡과 현악 사중주 아버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천재 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연결
음악 형식교향곡, 협주곡, 소나타, 현악 사중주, 오페라
악기피아노, 클라리넷, 호른, 트럼펫, 팀파니 등
낭만주의 음악 (1820년 ~ 1900년)
특징개성, 감정 표현, 상상력 중시
표제 음악 (문학, 회화 등 내용 묘사) 유행
반음계, 불협화음 등 새로운 화성 기법 사용
관현악단 규모 더욱 확대, 악기 성능 향상
민족주의 음악 등장
주요 인물프란츠 슈베르트: 가곡 왕
로베르트 슈만, 클라라 슈만: 낭만주의 음악 부부
프레데리크 쇼팽: 피아노 시인
프란츠 리스트: 피아노의 거장
펠릭스 멘델스존, 요하네스 브람스, 리하르트 바그너, 주세페 베르디,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등
음악 형식가곡, 피아노 소품, 교향시, 오페라, 발레 음악 등
악기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 호른, 트럼펫, 트롬본, 튜바, 팀파니, 하프
20세기 이후 음악 (1900년 ~ 현재)
특징다양성, 실험성, 개방성 추구
무조 음악, 12음 기법, 음렬주의, 미니멀리즘 등 새로운 기법 등장
전자 음악, 구체 음악, 우연성 음악 등 새로운 음악 시도
대중 음악과 예술 음악의 경계 모호
세계화 영향으로 다양한 문화권의 음악 교류
주요 사조인상주의, 표현주의, 신고전주의, 미니멀리즘, 전자 음악
주요 인물클로드 드뷔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아널드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베른, 벨러 버르토크,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올리비에 메시앙, 존 케이지, 필립 글래스, 스티브 라이히
음악 형식관현악곡, 실내악곡, 피아노곡, 오페라, 발레 음악, 전자 음악, 영화 음악, 뮤지컬 등
악기기존 악기 외 신디사이저, 컴퓨터, 샘플러 등 다양한 전자 악기 사용

2. 음악의 기원

음악이 역사상 언제, 어떻게, 왜 발생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대략 5만 년에서 1만 년 전 사이에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 음악은 주술이나 마술과 같은 목적을 위해 발달했으며, 당시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초기 악기로는 뼈 피리나 딱다기 등이 사용되었다.

음악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존재한다.


  • 동물의 울음소리를 모방하려는 시도에서 시작되었다는 설
  • 언어의 억양에 점차 높낮이가 뚜렷해지면서 음악이 파생되었다는 설
  • 노동을 할 때 서로 보조를 맞추기 위해 음악이 만들어졌다는 설
  • 동작에 맞추기 위해 음악이 생겨났다는 설


음악문화적 보편성으로 여겨지지만, 문화와 역사에 따라 정의는 달라진다.[1] 음악의 기원은 언어의 기원과 함께 논의되는 경우가 많으며, 두 개념의 관계는 학계에서 활발히 논쟁되는 주제이다.[2] 20세기 중후반 이전에는 두 주제 모두 학문적 관심에서 다소 벗어나 있었으나,[1][2] 이후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주요 논쟁은 음악이 언어로 이어지는 원시 언어였는지, 언어의 진화 과정에서 파생된 스팬드럴(부산물)인지, 아니면 음악과 언어 모두 공통 조상에서 유래했는지에 대한 세 가지 관점으로 나뉜다.[1][2] 스팬드럴 관점의 대표적인 지지자인 인지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 음악을 "청각 치즈케이크"라고 부르며 생물학적 적응과는 거리가 먼 기술적 산물로 보았다.[1][2] 반면, 다른 학자들은 구애 행동이나 인지적 유연성 향상 등 음악의 진화적 이점을 제시하며 핑커의 견해에 반박한다.[2]

음악의 기원에 대한 특정 이론에 대해 완전히 합의된 바는 없으며, 고고학, 인지 과학, 민족음악학, 진화 생물학, 언어학, 신경 과학, 고인류학, 철학,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연구에 기여하고 있다.[2] 주요 이론들은 다음과 같다.

  • 성 선택 이론: 음악이 정교한 구애 신호에서 발전했다는 가설이다. 이 이론은 찰스 다윈이 1871년 저서 ''인간의 유래와 성 선택''에서 처음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그러나 인간에게서 뚜렷한 성적 이형성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판받기도 한다.[1] 최근에는 다른 동물의 구애 행동에서 음악적 요소가 사용되는 사례를 근거로 다윈의 이론을 지지하고 발전시키는 학자들도 있다.[1]
  • 언어와의 공통 조상 이론: 음악과 언어가 "공유된 선구자"에서 함께 유래했다는 가설이다. 생물학자 허버트 스펜서와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 등이 초기 지지자였으며,[1] 현대에는 고고학자 스티븐 미텐 등이 이 이론을 지지한다.[1]
  • 실용적 필요 충족 이론: 음악이 구체적인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나타났다는 가설이다.
  • 카를 뷔허는 집단 노동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음악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했다.[1]
  • 카를 슈툼프는 장거리 의사소통 수단으로 음악이 발전했다고 보았다.[1]
  • 지크프리트 나델은 신성하거나 초자연적 존재와의 소통을 위해 음악이 사용되었다고 제안했다.[1][1]
  • 이 외에도 공동체의 결속 강화, 협력 증진, 포식자나 적을 위협하는 수단 등으로 음악이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1]
  • 이중 기원 이론: 음악학자 쿠르트 작스는 음악이 "언어에서 유래(logogenic)"하고 "감정 표현에서 유래(pathogenic)"하는 두 가지 기원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 세계 음악의 다양성을 고려할 때, 일부 음악은 의사소통 기능에, 다른 일부는 감정 표현 기능에 특화되어 각각 별도로 발전했을 수 있다고 보았다.[1] 작스는 가장 원초적인 음악 양식으로 억양을 붙여 말하는 것에서 시작된 '언어 기원적 양식'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감정을 분출하는 것에서 시작된 '감정 기원적 양식'을 제시했으며, 이 두 양식이 혼합되어 '선율 기원적 양식'으로 발전했다고 설명했다.[32]
  • 감정적 기원 이론: 데이비드 테이는 음악이 자궁 속 태아가 듣는 소리와 감정적으로 생성된 발성이라는 두 가지 주요 기원을 갖는다고 제안했다.[4] 이 이론은 문화권을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음악적 요소(맥박, 박자, 음표, 연속성, 공명 등)를 설명하려 시도한다.


선사 시대 음악은 문자 기록이 없는 문화에서 만들어진 모든 음악을 포함하며, 그 역사는 적어도 6백만 년 전 인간과 침팬지의 마지막 공통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1] 음악은 구석기 시대에 처음 나타난 것으로 보이나,[1] 이것이 중기 구석기 시대(30만~5만 년 전)인지 후기 구석기 시대(5만~1만 2천 년 전)인지는 불분명하다.[1]

가장 오래된 악기로 추정되는 유물은 슬로베니아 디비예 바베 동굴에서 발견된 디비예 바베 플루트로, 약 43,000년에서 82,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며 어린 동굴곰의 넙다리뼈로 만들어졌다.[1] 네안데르탈인이 사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이 유물은 실제로 악기인지, 아니면 동물의 활동으로 인해 우연히 구멍이 뚫린 뼈인지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1] 만약 악기가 맞다면, 이는 가장 오래된 악기이자 중기 구석기 시대 음악의 증거가 된다.[1]

디비예 바베 플루트를 제외하고, 악기로 널리 인정받는 가장 오래된 유물은 독일 슈바벤 율라의 기센클로스터레, 호레 펠스, 포겔허드 동굴 등에서 발견된 뼈 피리들이다.[1] 이 피리들은 오리냐크 문화(후기 구석기 시대) 시기의 것으로, 현생 인류가 사용했으며, 새의 날개뼈나 매머드 상아로 만들어졌다.[1] 이 중 기센클로스터레에서 발견된 세 개의 피리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약 43,150년에서 39,370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1] 약 36,000년 전의 것으로 보이는 뼈 피리도 독일 울름 근교 동굴에서 발견되었다.[33]

플루트와 같은 비교적 복잡한 악기 외에도, 딸랑이, 셰이커, 드럼과 같은 더 단순한 타악기가 초기 인류에 의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 이러한 악기들은 갈대, 조롱박, 가죽, 나무껍질 등 쉽게 분해되는 재료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고고학적 증거로 남기 어려웠을 수 있다.[1][1] 약 15,000년 전에 제작된 프랑스 트루아프레르 동굴의 벽화에는 무당이 음악 활을 연주하는 모습으로 해석되는 그림이 있다.[1]

선사 시대 중국에서는 기원전 60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구디'' 뼈 피리 12개가 허난성 우양 현 자후 유적에서 발견되었다.[6][1] 인도 아대륙인더스 문명(기원전 2500~2000년경) 유적에서는 간단한 딸랑이와 배 플루트가 발견되었으며, 그림 증거를 통해 초기 형태의 하프와 드럼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1] 기원전 1800년 이전의 상형 문자에는 아치형 하프의 가장 초기 묘사가 포함되어 있다.[7]

선사 시대 문화에서 음악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음식이나 자원이 부족할 때 공동체의 사기를 높이거나 결속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수 있으며,[1] 자연 세계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여겨져 자연 현상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1] 고대인들은 음악을 이용해 맹수나 해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도 했다. 거대 동물의 위협적인 소리를 모방한 소라 고둥[34] 소리로 맹수를 쫓아내고, 석장[35]으로 땅을 울려 뱀을 쫓거나, 여러 개의 [36]을 동시에 울려 맹수를 퇴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처럼 생존과 직결되었던 음악은 점차 기도, 축제, 수렵, 의식 등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활동으로 그 용도가 확장되었다.

인류는 보편적으로 음악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갓 태어난 아기조차 음악에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음악에 대한 유전적 기반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인간 외의 동물에게는 음악이라고 할 만한 행동이 거의 관찰되지 않는다. 일부 조류나 해양 포유류가 내는 소리를 "노래"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는 인간의 음악과는 다른 기원에서 발현된 유사 행동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37] 특히 영장류 중에서는 "노래하는" 종이 드물기 때문에, 인류의 음악 능력은 독자적인 진화 과정을 통해 획득된 것으로 여겨진다.[38] 인류의 높은 음악적 능력의 기원에 대해서는 성 선택설, 언어 기원설, 리듬 기원설, 노동 기원설, 신호 기원설 등 다양한 가설이 제기되었으나, 아직 명확한 유전적 증거나 데이터로 뒷받침되는 정설은 없다.[39] 최근에는 언어 인지 능력의 진화에 따른 부산물로서 음악 능력이 발달했다는 "귀무 가설"도 주목받고 있다.

3. 고대 음악

니칼 찬가(기원전 1400년경)가 새겨진 점토판 그림, 후리안 노래 중 가장 오래된 노래


고대 음악은 문자가 사용되기 시작한 문명 사회의 음악을 포괄하며, 그 기원은 선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만, 고대 음악에 관한 문헌이나 악보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주로 발굴된 악기나 회화, 조각 등을 통해 그 모습을 추정할 수밖에 없다.[8]

음악의 기원에 대해서는 언어에서 파생되었다는 설, 노동의 필요에 의해 발생했다는 설, 자연의 소리를 모방했다는 설, 주술적인 행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 등 다양한 가설이 존재한다.[32] 음악학자 쿠르트 작스는 원시 음악의 형태를 연구하여, 억양을 붙여 말하는 것에서 시작된 '언어 기원적' 양식과 감정을 자유롭게 표출하는 '감정 기원적' 양식이 혼합되어 '선율 기원적' 양식으로 발전했다고 보았다. 초기 음악은 손뼉치기나 타악기 연주와 함께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리듬은 일찍부터 발달했지만 화성은 만들기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관악기는 약 36,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뼈 피리로, 독일 울름 근교 동굴에서 발견되었으며 현생 인류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33]

고대 사회의 음악은 지역별로 매우 다양했지만, 몇 가지 공통적인 특징을 보인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단선율 음악이 주를 이루었고, 즉흥 연주가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가사가 음악의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음악은 단순히 즐거움을 위한 오락뿐만 아니라, 마법, 종교, 과학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사회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다. 특히 축제, 제례, 종교 행사 등 국가적인 행사와 결부되어 발전하면서 전문적인 음악가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그리스, 이스라엘, 인도, 중국 등 여러 고대 문명에서는 각기 독특한 악기와 음악 체계를 발전시켰으며, 실크로드 등을 통한 문명 간 교류는 음악적 아이디어와 악기의 전파를 촉진하기도 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악보는 시리아 우가리트에서 발견된 후리안 노래이며, 그중 가장 오래되고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갖춘 것은 니칼 찬가(h.6)로, 기원전 14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완전히 보존된 악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세이킬로스의 비문으로, 서기 2세기 또는 그 이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고대 음악의 유산은 이후 음악사의 발전에 중요한 기초를 마련했다.

3. 1. 동양의 고대 음악

중국 신화에 따르면, 가무는 갈천씨가 처음 시작했으며, 현악기슬은 복희가, 관악기여와가 만들었다고 전해진다.[77] 또한 음률은 황제의 신하이자 악관이었던 伶倫|영륜zho황제의 명으로 대나무를 이용해 봉황의 울음소리를 본떠 십이율을 정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가무와 악기의 발생에 관한 내용은 『여씨춘추』 - 고악(古樂)이나 『시경』 등 중국의 고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3. 1. 1. 중국

중국 신화에 따르면, 가무는 갈천씨가, 현악기슬은 복희가, 관악기여와가 발명했다고 전해진다.[77] 또한 황제의 신하이자 악관이었던 영륜(伶倫|링룬zho)은 봉황의 울음소리를 본떠 십이율을 정했다고 한다.

상나라(기원전 13세기 중반경) 시대에는 문자가 발달하여 갑골문이나 청동기 명문으로 음악에 대한 기록이 일부 남아있다.[9][10] 음악을 나타내는 갑골문자는 11개 정도이며, 일부는 악기 모양을 본뜬 것으로 보인다. 상나라 지배층은 특히 돌로 만든 타악기인 ''칭''(磬)을 선호했던 것으로 보이며, 청동으로는 링(鈴|링zho), 나오(鐃|나오zho), 종(鐘)과 같은 종을 만들어 사용했다.[9][10] 이 종들은 안에 추가 있는지 없는지, 종의 안쪽을 치는지 바깥쪽을 치는지에 따라 구분되었다.[9][10] 나무로 만든 북(''방구'')도 사용되었으며, 때로는 청동으로 만들기도 했다.[9][10] 피리 종류로는 오카리나인 순(塤|쉰zho), 가로 피리인 샤오( 簫|샤오zho)와 디지( 笛子|디즈zho), 생황인 성( 笙|성zho), 그리고 아마도 팬플루트인 파이샤오( 排簫|파이샤오zho) 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9][10] 현악기는 상나라 시대에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9][10]

주나라(기원전 1046년–256년) 시대에는 상나라의 관악기들이 계속 사용되었고, 최초의 중국 현악기인 (琴, 또는 고금)과 세(瑟) 같은 거문고 종류가 등장했다.[11] 주나라 시대에는 주요 궁정 악단이 등장했으며, 증후을묘(기원전 433년 이후) 유적에서는 매우 다양하고 정교한 악기들이 발견되었다.[11]

기념비적인 증후을 편종, 기원전 5세기경, 후베이 성


이 무덤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65개의 조율된 청동 종으로 이루어진 기념비적인 편종 세트이다. 이 편종은 5옥타브 음역을 가지며 최소 5명의 연주자가 필요했고, 현재까지도 연주가 가능하며 음악에 대한 희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11]

고대 중국 악기는 실용적인 목적과 의례적인 목적 모두에 사용되었다.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힘에 호소하기 위해 음악을 사용했고,[11] 사냥 시 새를 유인하기 위해 팬플루트를 사용했을 수 있으며,[11] 북은 제사나 군사 의식에 흔히 쓰였다.[9][10] 중국 음악은 춤, 문학, 미술과 항상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으며,[11] 많은 초기 중국 사상가들은 음악을 사회의 올바른 도덕성 및 통치와 연결시켰다.[11] 상나라와 주나라 시대에 음악은 황실 권력의 상징이었고,[11] 종교 의식뿐 아니라 조상과 영웅 숭배에도 사용되었다.[11]

공자(기원전 551년경–479년경)는 의례와 도덕성에 맞는 음악인 雅樂|야악zho("정악")을 우월하게 보았고, 그 외의 음악, 특히 지나치거나 음탕하다고 여겨지는 대중적인 음악인 俗樂|속악zho("속요/대중 음악")은 낮게 평가했다.[11] 여기에는 사실상 모든 비의례적 음악이 포함되었다.[11] 하지만 공자가 살았던 전국 시대의 관료들은 이러한 구분보다는 더 활기찬 속악을 선호하기도 했으며, 오래된 야악 전통은 정치적 수단으로만 이용하기도 했다.[11] 공자와 맹자 같은 제자들은 이러한 경향을 덕이 없는 것으로 보았고, 지도자들이 감응(感應|간잉zho)에 대해 무지한 것을 비판했다.[11] 감응은 음악이 본질적으로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는 이론으로,[11] 우주가 보이지 않는 공명하는 힘, 즉 ( 氣|치zho), 음양, 그리고 음악에 의해 지배된다고 보았다.[11] 이러한 사상에 따라 고대 중국 음악의 여러 측면은 우주론과 연결되었다. 12개의 음정을 가진 십이율 체계는 특정 무게 및 측정 단위와 일치했고, 오음계는 오행과 연결되었으며,[11] 중국 악기를 8가지 재료로 분류한 팔음(八音|바인zho)은 팔괘의 8가지 상징과 연결되었다.[11]

고대 중국 음악가의 실제 음악이나 연주 관행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11] 주나라의 오경에는 음악에 대한 해설이 포함되어 있으며, 주역춘추에도 언급이 있고, 예기에는 상당한 논의가 포함되어 있다(악기( 樂記|웨지zho) 장).[11] 악경은 유실되었지만,[11] 시경에는 서주 시대(기원전 1045년–771년)의 노래 가사 160편이 포함되어 있다.[11]

3. 1. 2. 인도

고대 인도 음악에 대한 주요 자료는 텍스트와 도상학적 자료이다. 구체적으로 산스크리트어로 된 몇몇 이론 논문이 남아 있으며, 일반 문헌에서 간략하게 언급되고 있으며, 고대 인도 음악가와 그들의 악기에 대한 많은 조각품이 존재한다. 고대 산스크리트 문학, 팔리어 문학, 프라크리트 문학은 베다에서 칼리다사의 작품, 일랑고 아디갈의 서사시 ''실라파티카람''에 이르기까지 음악적 언급을 자주 포함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인도의 실제 음악 관행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이용 가능한 정보는 당시의 음악에 대해 다소 동질적인 관점을 강요하지만, 증거에 따르면 실제로는 훨씬 더 다양했다.

기념비적인 예술 논문 ''나트야 샤스트라''는 고대 인도 음악의 가장 초기이자 주요 자료 중 하나이며, 음악 부분만으로는 굽타 제국 시대(서기 4세기부터 6세기)에 속할 가능성이 높다.

3. 1. 3.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

우르의 황소 머리 리라는 우르 왕릉에서 발견되었으며, 고대 리라 중 가장 유명하다.


일반적으로 현존하는 기록이 부족하여 페르시아 초기 음악에 대한 상세한 개요를 작성하기는 어렵다.[32] 기원전 3300년에서 3100년경 엘람의 묘사에서 나타나듯이, 아치형 하프는 페르시아 음악의 첫 번째 증거이지만, 예술적 묘사 이전에도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32] 기원전 2450년경의 엘람 황소 리라는 수사에서 발견되었으며, 기원전 2200년에서 1750년경의 박트리아-마르기아나 고고학 복합체에서는 40개 이상의 작은 옥서스 나팔이 박트리아마르기아나에서 발견되었다.[32] 옥서스 나팔은 종교 및 동물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자므시드가 나팔로 동물을 유인한다는 조로아스터교 신화는 엘람인들이 사냥에 나팔을 사용했음을 시사할 수 있다.[32] 여러 면에서 이란의 가장 초기에 알려진 음악 문화는 메소포타미아의 문화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고대 아치형 하프(기원전 3000년경) 역시 메소포타미아에 존재했으며, 악기의 희소성 때문에 하프가 어느 문화에서 기원했는지 명확히 알기 어렵다.[32] 메소포타미아의 우르에서는 훨씬 더 많은 황소 리라가 발견되었는데, 특히 우르의 황소 머리 리라가 유명하지만, 동시대 엘람의 악기와 거의 동일하다.[32] 테라코타 조각 증거에 따르면, 기원전 2세기까지 아치형 하프는 20현 수직 및 9현 수평 변형이 존재했던 각진 하프로 대체되었다.[32] 루트는 적어도 기원전 2300년경부터 메소포타미아에서 사용되었다고 전해지지만, 기원전 1300년경에 이르러서야 이란에서 나타났고 서부 이란의 지배적인 현악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용 가능한 증거는 루트의 인기가 엘리트 계층 외부에 있었음을 보여준다.[32] 쿨-에 파라의 암각 부조는 기원전 1세기에 정교한 페르시아 궁정 앙상블이 등장했음을 보여주는데, 그 중심 악기는 아치형 하프였다.[32] 이 특정 암각 부조에서 음악가들이 두드러지게 표현된 것은 그들이 종교 의식에서 필수적이었음을 암시한다.[32]

초기 시대와 마찬가지로, 아케메네스 제국(기원전 550–330년)의 음악에 대한 동시대 정보는 극히 드물다.[32] 아케메네스 음악 문화에 대한 대부분의 지식은 그리스 역사가들로부터 나온다.[32] 헤로도토스는 그의 저서 ''역사''에서 아케메네스 사제들이 의식에 아울로스 음악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기록했고, 크세노폰은 ''키루스의 교육''에서 페르시아 방문을 회상하며 궁정에 많은 여성 가수가 있었다고 전했다.[32] 아테나이오스 역시 여성 가수들을 언급하며, 그중 329명이 왕 중의 왕 다리우스 3세에게서 마케도니아 장군 파르메니온에게 빼앗겼다고 기술했다.[32] 후기 페르시아 문헌은 ''구산''(gōsān)이라 불리는 시인이자 음악가인 음유시인들이 궁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주장한다.[32]

파르티아 류트 연주자의 테라코타 조각상


파르티아 제국(기원전 247년 ~ 서기 224년) 시대에는 음악 활동과 악기에 대한 문헌 및 도상학적 묘사가 증가했다. 기원전 2세기의 파르티아 ''루타''(뿔 모양 술잔)는 고대 수도 니사에서 발견되었으며, 이 시대 음악가들을 가장 생생하게 묘사한 그림 중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 테라코타 판과 같은 그림 증거는 여성 하프 연주자를 보여주는 반면, 바빌론에서 발견된 판은 팬플루트, 현악기(하프, 류트, 리라) 및 타악기(탬버린 및 클래퍼)를 보여준다. 두라-유로포스에서 발견된 청동 조각상은 더 큰 팬플루트와 이중 아울로스를 묘사한다. 음악은 분명히 의식과 축하 행사에 사용되었으며, 하트라의 파르티아 시대 석조 프리즈는 트럼펫, 탬버린, 다양한 플루트를 연주하는 음악가들이 포함된 결혼식을 보여준다. 다른 문헌 및 도상학적 증거는 ''고산'' 음유시인의 지속적인 중요성을 나타낸다. 그러나 아케메네스 시대와 마찬가지로 그리스 작가들은 파르티아 음악에 대한 주요 정보 출처이다. 스트라보는 ''고산''이 신과 귀족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를 배웠다고 기록했고, 플루타르크는 ''고산''이 파르티아 영웅을 칭찬하고 로마 영웅을 조롱했다고 전했다. 플루타르크는 또한 ''롭트라''(대형 드럼)가 파르티아 군대가 전쟁을 준비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기록했다.[32]

서기 379년경 부조. 사산 시대 여성들이 이란 타크-에 보스탄에서 ''창''을 연주하는 모습


사산 제국 시대(226–651 CE)는 음악에 대한 풍부한 증거를 남겼다. 이러한 사산 기록의 증가는 제국, 특히 조로아스터교가 지배하는 지역에서 두드러진 음악 문화를 시사한다.[32] 많은 사산 샤한샤들은 제국의 창시자인 아르다시르 1세바흐람 5세를 포함하여 음악의 열렬한 후원자였다.[32] 호스로 2세(재위 590–628)는 가장 뛰어난 후원자였으며, 그의 통치는 페르시아 음악의 황금기로 여겨진다.[32] 호스로의 궁정 음악가로는 아자드바르-에 창기(또는 아자드), 밤샤드, 하프 연주자 나기사(나키사), 람틴, 사르카시 그리고 가장 유명했던 바르바드 등이 있었다.[32] 이 음악가들은 일반적으로 궁정 시인이자 음악가로 활동하는 음유시인이었는데, 사산 제국에서는 시와 음악의 구분이 거의 없었다.[32]

3. 2. 서양의 고대 음악

'''서양의 고대 음악'''에 관한 문헌이나 악보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주로 발굴된 악기나 회화, 조각 등을 통해 그 모습을 추정할 수밖에 없다. 기원전 3000년에서 4000년경 세계 4대 문명 발상지 중 가장 오래된 메소포타미아이집트에서 고대 음악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후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나일강 유역의 고대 오리엔트 여러 나라를 거쳐 그리스로 전해지면서 음악은 고도로 예술화되었고 체계적인 이론까지 남기게 되었다. 당시 사용된 악기로는 하프, 리라, 쌍관(雙管) 오보에, 등이 있었으며, 음악은 축제, 제례, 종교 등 국가 행사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발전했다. 이에 따라 직업적인 음악가가 등장했고, 음악은 윤리적 목적뿐 아니라 단순한 오락으로서도 발전하게 되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기원전 3500년경 수메르의 우르 제1왕조 시대에 이미 음악이 제례(祭禮)에 사용되었으며, 하프리라, 류트 같은 현악기를 비롯한 많은 악기가 존재했다. 이러한 음악 전통은 고대 바빌로니아, 카시트 왕조, 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로 계승되며 더욱 발전했다. 호른, 트럼펫, 딱다기 외에도 대표적인 현악기인 하프가 특히 아시리아에서 널리 사용되었음은 조각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음악은 기원전 1050년경을 기준으로 유목 시대와 왕정 시대로 나뉜다. 유목 시대에는 킹노르(현악기), 토프(큰북의 일종), 쇼파(양의 뿔로 만든 피리) 등의 악기가 있었다. 다윗 왕이나 솔로몬 왕의 왕정 시대에는 직업 음악가들이 등장하여 유대교 회당을 중심으로 교회 음악이 성행했다. 네베르(현악기), 아소르(관악기), 하리드(관악기) 등의 악기가 노래 반주에 사용되었다.

이집트 음악은 고왕조와 중왕조 전반기에 힉소스인의 침입 등으로 근동 아시아의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에는 피리, 하프, 복관 클라리넷, 궁형 하프 등으로 이루어진 기악 합주나 성악이 성행하고 있었다. 신왕조부터 누비아, 사이트 시대에 이르러서는 , 오보에, 트럼펫, 류트 등의 악기가 추가되면서 이집트 고유의 색채를 지닌 음악으로 변모해 갔다.

그리스 음악은 시, 무용, 연극 등 다른 예술 분야와 깊은 유대를 맺고 있었다는 점, 예배나 제전 등을 통해 국가 행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었다는 점, 그리고 음악에 관한 학문적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리스 음악의 역사는 기원전 7세기 이후 스파르타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이 시기 음악은 이집트와 크레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키타라(cithara)를 연주한 테르판드로스나 아울로스(aulos)를 연주한 사카다스, 그리고 탈레다스 같은 음악가들의 이름이 전해진다. 이후 문화의 중심지가 아티카의 아테네로 옮겨가면서 극음악이 발달했다. 디오니소스 축제의 일부였던 디튀람보스에서 비극이 발생했으며, 기원전 5세기에는 그리스 비극의 3대 시인으로 불리는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가 등장했다. 희극의 대표 작가로는 아리스토파네스가 있으며, 사포, 아나클레온, 핀다로스의 서정시 또한 음악적으로 낭송되었다.

고대 서양 음악은 일반적으로 6세기 이전의 서양 음악을 가리킨다. 남아있는 기록이 부족하여 그 실체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고대 그리스의 음악 이론과 용어는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피타고라스가 고안한 것으로 알려진 피타고라스 음률은 이후 서양 음악 음계의 기초를 이루었다.

4. 중세 음악

서양 중세 시대의 음악은 주로 , , 교회와 관련된 것이었으며, 하느님과 이질적인 인간의 감정 등을 표현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귀도 다레초 등이 있다.

페로탱의 Codex Guelf.1099에 수록된 ''Alleluia nativitas''


현대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중세 음악'을 대략 6세기부터 15세기까지 중세 시대 서유럽의 음악으로 정의한다. 악기 묘사, 음악 관련 기록 등을 통해 음악은 초기 중세 시대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800년 이전의 음악 중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플레인송 전례 음악인 그레고리오 성가가 유일하다. 이 성가의 이름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에서 유래했으며, 그가 작곡가였을 가능성도 제기되지만, 그가 현재 형태의 전례 음악을 만들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는 그의 사후 100년 이상 지나서야 등장했다. 많은 학자들은 그의 역할이 후대에 과장되었다고 본다. 대부분의 그레고리오 성가는 그레고리우스 시대와 샤를마뉴 시대 사이에 익명의 작곡가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9세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발전이 있었다. 첫째, 교회는 여러 성가 전통을 통합하고 그레고리오 전례를 중심으로 표준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둘째, 오르가눔이라 불리는 초기 다성 음악이 등장했다. 셋째, 약 500년 만에 음악 표기법(네우마 악보)이 다시 사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음높이와 리듬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현대적인 기보법이 발전하기까지는 수 세기가 더 걸렸다. 장크트갈렌 수도원이 설립되었고, 네우마 기보법으로 표기된 트로푸스, 프롤, 세쿠엔티아가 등장했다. 콘스탄티노스 5세( Κωνσταντίνος Εʹ ὁ Κοπρώνυμοςel )는 교회에 오르간을 도입했다. 레아무, 아우렐리아누스는 "음악론"을 저술했다.[45] 부활절에는 프랑스 플뢰리 수도원에서 "쿠엠 퀄리티스"(Quem quaeritis)라는 전례극이 상연되었다.[46]

11세기 초, 귀도 다레초는 《미크로로그스》(Micrologus)를 저술하여 음악 이론 발전에 기여했다.[47]

1100년 이후 여러 다성 음악 학파가 등장했다. 하나의 지속적인 선율 위에 빠르게 움직이는 성부를 쌓는 생 마르시알 학파의 오르가눔, 레오냉페로탱을 중심으로 1200년경 최초로 2개 이상의 성부를 위한 음악을 만든 노트르담 악파, 여러 음악가들이 모였던 갈리시아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지(음악은 칼릭스틴 코덱스에 보존됨), 그리고 우스터 단편과 올드 홀 필사본에 음악이 남아있는 영국 학파 등이 대표적이다. 루카스[48]는 타라고나 대성당에서 다성 음악(오르가눔)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종교 음악과 더불어 트루바두르, 트루베르, 민네징어와 같은 음유시인들의 세속 노래도 활발히 창작되었다. 후기 세속 음악의 상당수는 이들의 형식과 아이디어에서 발전했는데, 이들의 문화는 13세기 초 알비주아 십자군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13세기 후반에는 모테트, 콘두쿠투스, 디스칸투스, 클라우줄라 등 다양한 종교 음악 형식이 발전했다. 쾰른의 프랑코는 「계량 음악론」을 통해 리듬 표기법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고행자들의 음악인 ''가이슬러리더''가 두 차례(13세기 중반, 14세기 중반 흑사병 시기) 나타났는데, 민요 스타일에 참회나 종말론적 가사를 담은 것이 특징이며, 그 활동이 생생하게 기록되었고 악보가 첨부된 기록으로 잘 남아있다.

14세기 유럽 음악은 ''아르스 노바''(새로운 예술) 양식이 주도했다. 이 시기 음악은 초기 르네상스와 유사한 점도 있지만, 관례적으로 중세 음악에 포함된다. 아르스 노바 시대에는 아이소리듬과 같은 복잡한 리듬 기법이 사용되었으며, 프랑스에서는 기욤 드 마쇼 등이 활동했고, 이탈리아에서는 우아한 선율을 특징으로 하는 트레첸토 음악이 번성했다(프란체스코 란디니 등). 이 시대에는 세속 음악이 많이 남아 있으며, 발라드, 비를레, 라이, 론도와 같은 정형시 형식(formes fixes)을 사용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대부분 1~3개의 성부로 구성되며, 기악 반주가 동반되기도 했다. 기욤 드 마쇼의 미사곡 「다윗의 호케투스」(Hoquetus David)[49]와 모테트 「행복한 처녀」 등이 이 시기의 작품이다. 또한, 종글러(거리의 악사)들의 활동도 기록되기 시작했다. 중세 음악의 화성은 주로 완전 5도를 기본으로 했으며, 3도와 6도는 불협화음으로 취급되었다.

초기 기독교 음악에 영향을 준 인물로는 성 히라리오(찬가 작곡), 성 아우구스티누스(「엔나라티오네 인 플라심(시 편집)」 저술), 카시우스도루스 세나토르(485년경 - 585년경)[43](「성학 및 세속적 제학 요약」 저술)[44] 등이 있다.

5. 르네상스 음악

'''르네상스 음악'''(Renaissance music)이란 르네상스 시대의 서양 음악으로, 대략 1400년대에서 1600년대 사이의 음악을 가리킨다. 영국의 존 던스터블이 유럽 대륙에 영국 특유의 3도·6도 화음을 전파했고, 이것이 중세 후기의 아르스 노바 음악이나 트레첸토 음악과 통합되면서 르네상스 음악이 시작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르네상스라는 말은 원래 '고대문화의 부흥'을 의미하지만, 음악 분야에서는 이러한 의미가 직접적으로 적용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르네상스를 넓은 의미에서 인간의 자유로운 감정이나 개성에 눈을 뜨고 합리적 사고방식과 조화를 존중하며 명석함을 추구하는 시대 정신으로 본다면, 15세기 말에서 16세기의 음악에서 이러한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시대 음악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음역(音域)이 확대되어 새로운 음 공간이 개척되었다는 점인데, 이는 회화에서의 원근법 탐구와 비견될 만한 진보였다. 또한 악보 인쇄술의 발명, 정흑백보 기보법의 보급,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음악 이론의 탄생 등은 합리성과 표현 가능성을 추구하는 르네상스 정신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르네상스 정신은 이미 14세기 아르스 노바에서도 나타났지만, 특히 플랑드르 악파를 통해 조스캥 데 프레의 음악에서 뚜렷한 형태로 나타났다. 플랑드르 악파 작곡가들은 유럽 전역에서 활동하며 그들의 성악 폴리포니 작곡법을 르네상스 음악의 중심 양식으로 만들었다. 이 대위법적인 기법은 단순한 기교를 넘어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감정 표현과 결부되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음악에서의 르네상스는 다른 예술 분야와 달리 이탈리아가 아닌 북유럽, 특히 현재의 중부 및 북부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부르고뉴 악파 작곡가들(기욤 뒤파이, 질 뱅쇼, 앙투안 뷔노아 등)은 14세기 후반의 복잡하고 기교적인 ''ars subtilior'' 스타일에 대한 반발로, 명확하고 부르기 쉬운 멜로디와 모든 성부에서 균형 잡힌 다성 음악을 추구했다.

기욤 뒤파이 (왼쪽)와 질 뱅쇼 (오른쪽)가 1440년경의 채색 필사본인 마르탱 르 프랑의 ''Le champion des dames''에 등장한다.


15세기 중반에 이르러 저지대 국가 및 인접 지역 출신의 작곡가와 성악가들이 유럽 전역, 특히 교황 예배당과 메디치, 에스테, 스포르차 가문 등 예술 후원자들이 있는 이탈리아로 퍼져나갔다. 그들은 부드러운 다성 음악 스타일을 전파했으며, 인쇄술의 발명은 이러한 음악 스타일의 보급에 큰 영향을 미쳐 유럽 음악에서 최초의 진정한 국제적 스타일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당시 주요 종교 음악 형식으로는 미사, 모테트, 라우데가 있었고, 세속 음악 형식으로는 샹송, 프로톨라, 그리고 나중에 마드리갈이 있었다.

프랑코-플레미시 악파의 중견 작곡가로는 대위법적으로 복잡한 스타일의 음악을 작곡하고 다양한 텍스처와 카논 기법을 정교하게 사용한 요하네스 오케겜, 15세기 마지막 수십 년 동안 가장 유명한 미사 작곡가 중 한 명이었던 야코프 오브레흐트, 그리고 아마도 팔레스트리나 이전에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였으며 16세기에는 모든 형태의 예술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명성을 떨쳤던 조스캥 데 프레가 있다. 조스캥 이후 세대의 음악은 대위법의 복잡성을 더욱 탐구했는데, 아마도 가장 극단적인 표현은 니콜라 고베르의 음악에서 나타나며, 그의 대위법적 복잡성은 칸초나와 리체르카르와 같은 초기 기악 음악에 영향을 미쳤고, 궁극적으로 바로크 푸가 형식으로 절정에 달했다.

16세기에는 음악의 중심이 점차 이탈리아로 옮겨져, 여기서 르네상스 정신은 다양한 형태로 꽃피웠다. 미사, 모테토를 비롯한 각종 세속 합창곡(마드리갈 등)이 번성하였고, 동시에 오르간이나 류트 등의 기악 음악도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이 기악은 바로크 이후의 음악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독일어권에서는 코랄이 탄생했으며, 궁정 음악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무곡이 유행하기도 했다.

조반니 피에를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의 ''교황 마르첼루스 미사'' 악보 일부


16세기 중반에 이르러 국제적 스타일은 변화하기 시작했고, 여러 다양한 스타일 경향이 나타났다. 반종교개혁 트리엔트 공의회의 지시에 따라 신성 음악의 단순함을 추구하는 경향은 조반니 피에를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의 음악에서 잘 나타난다. 반면, 마드리갈에서는 복잡성과 반음계주의를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이는 루차스키와 16세기 후반 마드리갈 작곡가 카를로 제수알도아방가르드 스타일에서 극단적인 표현을 보였다. 또한 베네치아 악파는 산 마르코 대성당의 건축을 이용하여 교호창(antiphony) 대비를 만드는 웅장하고 화려한 음악을 발전시켰다. 베네치아 악파(안드레아 가브리엘리, 조반니 가브리엘리, 그리고 이 시대 말의 중요한 혁신가 중 한 명인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음악은 관현악법의 발전, 장식된 기악 파트, 통주 저음 베이스 파트 등을 포함했으며, 이는 1600년경 바로크 시대의 시작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6세기 후반에는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활발하고 독자적인 음악 전통이 발전했다.

  • '''잉글랜드''': 토마스 탤리스와 윌리엄 버드와 같은 작곡가들이 유럽 대륙과 비슷한 스타일의 신성 음악을 작곡했고, 토마스 몰리, 존 윌바, 토마스 윌키스 등 활발한 토착 마드리갈 작곡가 그룹은 이탈리아 형식을 영국인의 취향에 맞게 각색했다.
  • '''스페인''': 자체적인 기악 및 성악 스타일을 개발했으며, 토마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는 팔레스트리나와 유사한 세련된 음악을 작곡했고, 수많은 다른 작곡가들이 새로운 기타를 위해 작곡했다.
  • '''독일''': 개신교 코랄을 기반으로 다성 형식들을 발전시켰고, 베네치아 악파의 스타일을 수입했다(이는 독일 바로크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또한, 얀 피터르스존 스벨링크와 같은 네덜란드와 독일의 작곡가들은 방대한 오르간 음악을 작곡하여, 나중에 J.S. 바흐의 작품에서 절정에 달한 바로크 오르간 스타일의 기초를 확립했다.
  • '''프랑스''': 기욤 코스텔리와 클로드 르 죈과 같은 작곡가가 두각을 나타내며 세속 샹송에 사용되는 musique mesurée로 알려진 독특한 음악적 표현 스타일을 개발했다.


이 시대의 가장 혁명적인 움직임 중 하나는 1570년대와 1580년대 피렌체에서 일어난 피렌체 카메라타의 활동이었다. 빈첸초 갈릴레이(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아버지)와 줄리오 카치니 등이 주축이 된 이들은 당시 음악의 복잡성에 불만을 품고 고대 그리스 음악을 복원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들의 노력의 결과는 모노디로 알려진, 가사의 내용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단선율 노래 스타일과 그에 상응하는 무대 드라마 형식이었으며, 이는 오늘날 오페라로 알려진 장르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1600년경에 작곡된 최초의 오페라들은 르네상스의 종말과 바로크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음악 이론적으로도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1600년 이전의 음악은 선법에 기반했지만, 16세기 후반 조세포 자를리노와 프란키누스 가푸리우스 등의 이론적 발전은 점차 조성 음악의 발달로 이어졌다. 장음계단음계가 점차 오래된 교회 선법을 대체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1600년 이후 바로크 음악으로 시작되는 공통 관습 시대 음악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16세기 말에는 다양한 극음악이 시도되었는데, 이는 17세기 바로크 음악의 성립과 발전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플랑드르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음악의 영향 아래 유럽의 다른 여러 나라의 음악도 각각 독자적인 발전을 보였다. 일반적으로 르네상스 음악은 플랑드르 악파의 폴리포니에서 볼 수 있는 북방적이며 고딕적인 요소와 이탈리아의 마드리갈 등에서 볼 수 있는 남방적·라틴적 요소와의 결합을 통해 성숙했다고 평가된다.

6. 바로크 음악

'''바로크 음악'''은 17세기와 18세기, 대략 1600년경부터 1750년경까지의 유럽 음악을 가리킨다. 원래 바로크는 17, 18세기 미술 양식을 지칭하는 용어였으나, 이 시기 음악에도 같은 명칭이 사용된다. 바로크 시대는 다음과 같이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 초기 바로크: 1580년-1630년

# 중기 바로크: 1630년-1680년

# 후기 바로크: 1680년-1750년

바로크 음악의 역사적 배경으로는 정치적으로 절대주의 왕정에서 계몽주의로 이행하는 시기였으며, 경제적으로는 중상주의, 사상적으로는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 속에서 궁정, 도시, 교회를 중심으로 바로크 음악이 형성되었다.

이 시대 음악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통주저음 기법의 사용으로, 이 때문에 바로크 시대를 '통주저음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바로크 음악은 '정서론'이라는 독특한 미학관에 기반을 두었는데, 이는 음악의 궁극적인 목적이 리듬, 멜로디, 하모니, 음정 등을 통해 인간의 모든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16세기 말 피렌체카메라타에서는 감정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모노디 양식을 고안했고, 이는 최초의 오페라(오케스트라 반주가 있는 극적인 솔로 성악 음악) 탄생으로 이어졌다.

바로크 시대에는 여러 독립적인 선율이 동시에 진행되는 다성 음악과 대위법이 여전히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또한 교회 선법이 점차 장조와 단조의 조성 체계로 정리되었고, 춤곡에서 유래한 명확한 박자 개념이 확립되었다. 기악 음악이 크게 발전하여 현악기, 금관악기, 목관악기를 포함한 작은 음악 앙상블뿐만 아니라 합창단과 파이프 오르간, 하프시코드, 클라비코드 같은 건반 악기를 위한 곡들이 많이 작곡되었다. 이 시기에는 푸가, 인벤션, 소나타, 협주곡 등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음악 형식들이 정립되었다.[21] 특히 후기 바로크 양식은 다성음악의 복잡성과 화려한 장식이 두드러지는 특징을 보인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주요 작곡가로는 얀 피테르스존 스벨링크,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지롤라모 프레스코발디, 장-밥티스트 륄리, 아르칸젤로 코렐리, 프랑수아 쿠프랭, 안토니오 비발디,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 장-필리프 라모,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등이 있다.

7. 고전주의 음악

'''고전주의 음악'''(Classical Music)이란 음악에서,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 주로 오스트리아 을 중심으로 발전한 서양음악사조를 말한다.

'고전'이라는 말뜻에는 '모범적 예술, 균형적 형식,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되는 성격, 시대초월적 성격'이 포함되어 이미 질적인 가치를 함축하고 있다.[78] 고전주의 음악의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음악사학자는 아마데우스 벤트인데 하이든모차르트의 음악을 독일 문학에서의 바이마르 고전주의를 모델로 삼아 고전적이라고 명명하였다. 음악에서 '고전(Klassik)'[79]이라는 개념이 처음 나왔을 때는 시대 개념이 아니라,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과 다른 음악을 구별하는 질적 개념으로 쓰였다.[78] 이들의 교향곡이 1800년 초 음악회장의 모범적 레퍼토리로 고정되면서, 호프만(E.T.A Hoffmann)과 같은 사람들이 이를 기악음악의 절정으로 평가하였다.[78] 반할, 보케리니, 클레멘티, 케루비니, 메율 등도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과 같은 작곡 양식을 썼으므로, '고전'은 음악사에서 이들 전체를 통칭하는 시대 개념으로 쓰이게 된다.[80]

고전파 음악은 '자연스러움', '단순성', '보편성'을 강조한 결과로 얻은 것이다.[80] '자연스러움'은 파악이 어려운 변화나 이론적 딱딱함을 가지고 듣기를 강요하지 않는, 감정적으로 자연스럽게 '같이 느끼게 하는' 방식을 추구하게 된다.[80] '단순성'의 추구는 예술 음악의 출발점을 민요적인 것으로 삼게 한다.[80] '보편성'은 세상 사람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세계성을 지향한다.[80] 물론 이러한 생각은 초기에만 강력하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더 약화되어 베토벤처럼 예술가의 독창성과 작품성이 강조된다.[80]

고전파 음악의 특징으로는 주요 3화음을 중심으로 한 기능 화성법의 확립, 소나타 형식에서의 제1, 제2주제의 조성을 으뜸음딸림음과의 관계에서 파악하여 두 주제의 성격적 대비를 갖게 했다는 점, 그리고 주제를 유기적으로 전개하는 '주제노작(主題勞作)'원리의 확립, 2관편성의 오케스트라, 소나타 형식에 바탕을 둔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 등의 여러 가지 악곡형식을 낳았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고전 시대의 음악은 호모포니 음악, 즉 명확한 선율반주로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새로운 선율은 거의 목소리와 같고 노래하기 쉬운 경향이 있어 작곡가가 실제로 음악의 중심으로서 가수를 대체할 수 있게 했다. 따라서 기악 음악은 빠르게 오페라와 다른 성악 형식 (예: 오라토리오)을 대체하여 음악 청중의 선호와 훌륭한 작곡의 전형이 되었다. 그러나 오페라는 사라지지 않았다. 고전 시대에 여러 작곡가가 자국어로 일반 대중을 위한 오페라를 제작하기 시작했다(이전의 오페라는 일반적으로 이탈리아어로 제작). 강하고 더 명확한 선율을 선호하여 점차적으로 목소리가 대체됨에 따라, 대위법 또한 전형적으로 장식적인 기교가 되었으며, 종종 작품의 마지막 부분이나 하나의 악장에 사용되었다. 대신, 아르페지오와 피아노 음악의 경우 알베르티 베이스(일반적으로 왼손에서 반복되는 패턴의 반주)와 같은 단순한 패턴이 혼란스러운 추가 성부를 만들지 않고 곡의 움직임을 활기차게 하는 데 사용되었다. 현재 인기가 있는 기악 음악은 몇 가지 잘 정의된 형식에 의해 지배되었다: 소나타, 교향곡, 협주곡이지만, 이 중 어느 것도 현재의 음악 이론에서처럼 당시에는 특별히 정의되거나 가르쳐지지 않았다. 이 세 가지 모두 소나타 형식에서 파생되었으며, 이는 전체 작품의 포괄적인 형식인 동시에 단일 악장의 구조이기도 하다. 소나타 형식은 고전 시대를 거치면서 19세기 내내 기악 작곡의 주요 형식이 될 만큼 성숙해졌다.

바로크 시대와 고전파 사이에서 고전파에의 디딤돌 구실을 한 시대를 전 고전파(1720-1760경)라고 한다. 로코코 음악은 18세기의 화려한 궁정생활을 반영한 것이나 로코코 시대의 경쾌하고 우아한 양식을 '갈랑 양식'(gallant style)이라 하며 대위법적인 수법에서 화성적 수법으로의 이행을 나타내며 섬세하고 우아한 멜로디와 단순한 형식, 세속적이며 사교적인 성격을 지닌 소곡 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 양식을 전형적으로 나타낸 것이 18세기 중엽 프랑스의 클라브시니스트인 프랑수아 쿠프랭, 장 필립 라모, 다캥 등의 작품이다. 그리고 이 경향에서 18세기 후기에 북독일에서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나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 게오르그 벤다, 요한 요아힘 크반츠 등에 의하여 대표되는 자연스럽고 풍부한 감정표출을 지향한 감정과다양식이 일어났다.

또 1770년에서 1790년경 독일에서 발생한 헤르더, 괴테, 실러 등의 문학운동인 슈투름 운트 드랑(질풍노도양식)이 음악에도 영향을 미쳐 디나미크나 멜로디크, 관현악법에 두드러진 대조적 효과를 주었다. 슈바르트, 슈타미츠의 기악곡, 라이히아르트, 첼터, 츰시티크 등의 가곡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빈에서는 게오르크 크리스토프 바겐자일 등이 교향곡의 악곡구성 면에서 기초를 이룩하였다. 그리고 만하임에서는 예술을 애호했던 선제후 카를 테오도르의 궁정에서 요한 벤젤 안톤 슈타미츠, 홀츠바우어, 리히터, 카나비히 등이 활발히 활동하였다. 빠름-느림-빠름의 3악장에 미뉴에트를 쓴 4악장의 악곡 구성, 제1, 2주제의 성격적인 대비, 크레셴도, 디미누엔도, 포르테, 피아노 등의 음량변화, 관악기의 중시, 장식법 등이 고전파 음악에 대하여 많은 공적을 남기고 있다. 그 밖에 이탈리아에서는 스카를라티, 사키니 등의 쳄발로 소나타, 파리에서는 슈베르트, 고세크, 런던에서는 크리스티안 바흐 등의 전기 고전파에 활약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초기 고전 시대는 만하임 악파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여기에는 요한 슈타미츠, 프란츠 크사버 리히터, 카를 슈타미츠, 크리스티안 칸나비히와 같은 작곡가가 포함되었다. 그것은 요제프 하이든에게, 그리고 그를 통해 모든 후기 유럽 음악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고전 시대의 중심 인물이었으며, 모든 장르에서 그의 경이롭고 다양한 작품은 우리가 그 시대를 인식하는 방식을 정의한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프란츠 슈베르트는 기존 장르, 형식, 심지어 음악의 기능까지 확장하면서 낭만 시대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작곡가였다.

8. 19세기 음악

19세기 음악은 흔히 '''낭만주의 음악'''(Romantic music)으로 불려왔으나, 이는 양식사나 제도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최근 음악사학계 연구는 '19세기 = 낭만주의'라는 등식이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이 명칭은 19세기 음악사의 다양한 경향 중 '낭만주의'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오류를 범하며, 마치 19세기 전체에 걸쳐 통일된 "낭만적" 시대 정신과 보편적 시대 양식이 존재했던 것처럼 오해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19세기 음악은 역사주의 음악(Historismus), 비더마이어 음악(Biedermeier), 민족주의 음악(Nationalismus), 사실주의 음악(Realismus), 인상주의 음악 등 다양한 사조가 혼재되어 나타난다. 낭만주의는 19세기 전반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이는 19세기의 여러 현상 중 하나일 뿐이다.[81]

일반적으로 서양음악사에서 낭만주의 음악은 1815년 나폴레옹의 패전 이후부터 1910년까지의 음악을 가리킨다. 때로는 1890년부터 1910년대까지의 음악을 세기전환기 음악으로 따로 구분하기도 한다. 낭만주의 시대에 음악은 더욱 표현적이고 감정적으로 변모했으며, 문학, 미술, 철학 등 다른 예술 분야와도 깊은 연관을 맺었다. 고전주의가 중시하지 않았던 감정, 감각, 직관 등을 중시했으며, 기법적으로는 고전파의 조성과 화성을 계승하면서도 반음계와 원격조로의 전조를 자주 사용하여 더욱 풍부한 표정을 추구했다. 장대한 규모의 작품뿐만 아니라 성격적인 소품들도 많이 작곡되었다.

클라라로베르트 슈만


초기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슈만, 쇼팽, 멘델스존, 벨리니, 도니체티, 베를리오즈 등이 있다. 19세기 후반에는 오케스트라의 규모가 크게 확장되었고, 콘서트가 도시 사회의 중요한 일부로 자리 잡았다. 이 시기의 주요 작곡가로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브람스, 리스트, 차이콥스키, 베르디, 바그너 등을 들 수 있다. 1890년에서 1910년 사이에는 그리그, 드보르자크,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푸치니, 시벨리우스 등이 등장하여 중기 낭만주의 작곡가들의 업적을 바탕으로 더욱 복잡하고 긴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이 시대의 다른 주요 인물로는 생상스, 포레, 라흐마니노프, 프랑크, 드뷔시, 림스키코르사코프 등이 있다.

19세기에는 과거 음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역사주의 음악 운동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역사주의는 모든 현상을 역사의 과정으로 분석하고 그 가치를 역사 속에서 찾으려는 사상으로, 옛 음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를 통해 지난 시대 거장들의 작품을 재발견하고, 그 역사적 모델을 모방하거나 구성적으로 논의하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종교음악 분야의 성 세실리아 운동이 대표적인 예이다. 베토벤, 멘델스존, 리스트 등 많은 작곡가들이 옛 음악의 요소를 활용했으며, 특히 레거는 전통 형식과 대위법적 기법을 사용했고, 부조니는 고전적 구조를 중시하는 역사주의적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역사주의 운동은 근대적 인문학으로서 음악사학이 발전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82][83]

19세기 후반, 자유주의 운동과 민족주의 운동의 영향으로 음악에서도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특히 서유럽의 음악적 영향 아래 자신들의 민족적 양식을 확립하지 못했던 동부유럽, 러시아, 북유럽 등지에서는 1860년대 이후 민족주의 음악 또는 국민악파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낭만주의 음악 어법을 바탕으로 각 민족의 특성을 음악에 반영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민요나 민속 춤곡, 정교회 음악 요소, 기존 조성 체계에서 벗어난 다양한 음계 등을 활용했다. 또한 각 나라 언어와 관련된 박절을 사용하여 독특한 리듬을 만들어냈으며, 성악곡이나 표제 음악에서는 민족의 역사나 전설, 신화 등을 소재로 삼았다.[84][85] 러시아의 5인조, 북유럽의 그리그, 체코드보르자크 등이 대표적인 국민악파 작곡가들이다. 프랑스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국민 음악 협회가 조직되어 민족주의적인 음악을 추구했으며, 이는 이후 인상주의 음악의 토대가 되었다.

인상주의 음악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나타난 사조로,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클로드 드뷔시 등이 있다.

9. 20세기 음악

20세기에는 라디오가 전 세계적으로 보급되면서 음악 감상 방식에 큰 변화가 일어났고, 음악을 녹음하고 배포하는 새로운 기술들이 개발되었다. 음악 공연 역시 방송과 녹음을 통해 시각적인 요소가 더욱 중요해졌다.[22] 이 시기 음악은 이전 시대의 관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스타일과 형식을 자유롭게 실험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특히 20세기 중반 앰프와 전자 악기, 대표적으로 신시사이저의 등장은 클래식 음악과 대중음악 모두에 혁신을 가져왔고, 새로운 음악 형태의 발전을 이끌었다.[23]

20세기 클래식 음악의 흐름을 주도한 두 인물로는 아놀드 쇤베르크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를 꼽을 수 있다.[24] 이들 외에도 벨러 버르토크, 안톤 베베른,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올리비에 메시앙, 존 케이지, 벤자민 브리튼,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 소피아 구바이둘리나,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 브라이언 페르니호, 카이아 사리아호 등 많은 작곡가들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25]

20세기 이후 서양 클래식 음악의 흐름을 가리켜 '현대 음악'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다. 20세기 초부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까지를 후기 낭만주의의 마지막 단계로 보기도 하고, 근대 음악의 시작을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보기도 한다.[50] '근대 음악'과 '현대 음악'의 경계 역시 제2차 세계 대전이나 1950년 등으로 보는 등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며, 이 시대 음악사를 시대별로 나누는 명확한 기준은 없지만, 대체로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기준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20세기 초 (제1차 세계 대전 이전)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시벨리우스 등이 후기 낭만주의 음악을 이어가는 한편, 젊은 세대의 작곡가들은 기존의 조성, 기능 화성, 규칙적인 리듬 등 서양 음악 어법의 한계를 느끼고 다양한 실험을 시작했다. 인상주의 음악온음계, 평행 화음, 교회 선법의 부활, 비서구적 요소 등을 도입했고, 신 빈 악파는 무조 음악을 통한 표현주의로 나아갔다. 스트라빈스키는 원시적인 리듬의 가치를 재조명했으며, 버르토크는 민족 음악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았다. 또한 이 시기에는 타악기의 종류가 크게 늘어나면서 소음과 같은 비음악적 소리도 음악의 재료로 활용될 가능성이 열렸다.[51]
전간기 (제1차 세계 대전 ~ 제2차 세계 대전)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작곡가들은 더욱 급진적으로 낭만주의 음악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신즉물주의신고전주의는 형식의 부활, 과거 작품의 인용, 기계적인 리듬의 사용 등을 특징으로 하며 연주 스타일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한편, 신 빈 악파는 무조 음악을 체계화하기 위해 12음 기법을 발전시켰다. 물론 일부 작곡가들은 현대적인 어법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낭만주의의 연장선상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1930년대 나치 독일이 전위 예술을 "퇴폐 예술"로 규정하고 탄압하고, 소련에서 스탈린 체제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강요하면서 새로운 음악을 추구하는 움직임은 어려움을 겪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제2차 세계 대전은 유럽 사회와 문화에 막대한 피해를 남겼고, 많은 음악가들이 미국으로 망명하는 등 음악계는 큰 변화를 맞았다. 전후 복구와 함께 현대 음악과 전위 음악이 다시 활발해졌다. 1950년대에는 불레즈, 슈톡하우젠 등이 주도한 음렬주의(시리얼 음악), 전자 음악, 직관 음악 등이 등장했고, 케이지우연성 음악을, 셰페르구체 음악을 선보였다. 1960년대에는 라이히 등을 중심으로 미니멀리즘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러한 실험적인 음악들은 점차 대중과 멀어졌고, 일반 청중의 관심은 이해하기 쉬운 대중 음악으로 옮겨갔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현대 음악보다는 고전파나 낭만파 음악의 재연주나 녹음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1970년대 이후의 음악은 "포스트 페스티움", "신 낭만주의", "새로운 단순성"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이를 음악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립된 견해가 없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곡가로는 메시앙, 불레즈, 슈톡하우젠, 케이지, 리게티, 크세나키스 등이 있다.
대중음악의 부상20세기에는 광범위한 대중에게 어필하는 대중음악이 전례 없이 확산되었다. 이는 음악을 소비할 수 있는 도시 중산층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중음악이라는 용어는 1880년대 뉴욕에서 활동하던 음악가와 출판사 그룹인 미국의 틴 팬 앨리에서 유래했다.[27] 대중음악(popular music)은 때때로 "팝 음악(pop music)"과 혼용되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다른 개념이다. 대중음악은 다수의 취향에 맞는 다양한 음악 장르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인 반면,[28] 팝 음악은 일반적으로 대중음악 ''안의'' 특정 장르를 가리킨다.[29] 대중음악은 대체로 따라 부르기 쉬운 선율을 가지며, 벌스(절)와 코러스(후렴구)가 반복되고 중간에 분위기를 전환하는 브릿지가 삽입되는 구조를 특징으로 한다.[30]

10. 오늘날의 서양 클래식 음악

전 세계를 통하여 오늘날과 같이 음악이 보편화된 시기는 없다. 세계 각지에서 개최되고 있는 각종 음악 연주회는 말할 것도 없고 방송, 레코드, 텔레비전 등의 매스컴을 통하여 언제 어디서나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음악을 이해하고 더욱 잘 감상하려면 무엇보다도 음악사를 알아야 한다[86]. 이 밖에도 한국 음악사, 동양 음악사, 서양 음악사를 참고할 수 있다.

11. 대중 음악

세계의 여러 민족은 엘리트 문화로서의 음악(종교 음악, 궁정 음악, 고전 예능 음악 등)과 함께, 일반 대중을 위한 대중음악 및 민속 음악을 발전시켜 왔다. 음악을 크게 클래식 음악과 팝으로 나누거나, 클래식, 팝, 민속 음악으로 나누는 분류가 일반적이다[52]。 이 글에서는 주로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적으로 확산된 근대 상업 음악으로서의 팝 음악 역사를 다룬다.

11. 1. 대중음악의 정의와 특징

세계의 많은 민족은 종교 음악, 궁정 음악, 고전 예능 음악 등 엘리트 문화로서의 음악과 함께 대중음악, 민속 음악과 같이 일반 대중의 즐거움을 위한 음악을 가지고 있다. 음악 전체를 클래식(시리어스)과 팝으로 나누거나, 클래식, 팝, 민속 음악으로 나누는 방식이 널리 사용된다[52]。 이 글에서는 세 가지로 나누는 방식에 따라,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확산을 보이고 있는 근대적인 상업 음악을 팝 음악으로 정의한다.

유럽에서는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많은 노동자들이 도시로 유입되었고, 19세기 후반에는 여가 시간에 음악을 즐기게 되었다[52]。 '파라 뮤직'(응접실 음악)이라 불리는, 쉬운 반주로 연주되는 노래들이 홈 파티 등에서 중산층 여성들에 의해 피아노기타로 반주되며 불려졌다[53]뮤직홀의 노래나 술집, 카페에서 불리던 샹송 역시 인기를 끌었으며, 코믹 오페라나 오페레타 등도 이 시기에 많이 작곡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사교 댄스를 위한 음악도 자주 연주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유럽의 대중 음악은 미국의 도시로 유입되어 미국 대중 음악의 뿌리 중 하나가 되었다[52]

미국의 농촌 지역에서는 유럽의 민속 음악이 그대로 유입되었다. 초기 미국 이민은 영국, 독일, 아일랜드, 이탈리아, 폴란드, 러시아, 유대 등 다양한 민족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각자 고유한 민족 음악을 연주했다. 이러한 유럽 각국의 민요 역시 미국 대중 음악의 또 다른 뿌리가 되었다.

한편, 북미의 노예로 끌려온 흑인들은 대부분 카리브해 지역을 거쳐 왔으며, 아프리카를 떠난 지 100년 정도 된 상태였다[54]。 그들의 뿌리인 서아프리카 음악의 특징인 폴리리듬과 강렬한 리듬 감각은 카리브해 지역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백인과의 교류를 통해 혼합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바네라와 같은 카리브해 지역 특유의 매력적인 장르가 탄생했다[53]남미에서도 백인과 흑인 음악의 혼합이 일어나 삼바나 탱고 등이 생겨났다. 이러한 흑인과 백인의 혼합 음악 또한 미국 대중 음악의 중요한 뿌리가 되었다.

이처럼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음악들이 미국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서로 섞이고 변화하며 독특한 미국 음악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11. 2. 대중음악의 기원과 발전

대중음악 및 미국 음악은 세계 여러 문화권의 음악과 마찬가지로, 종교 음악, 궁정 음악, 고전 예능 음악 등 엘리트 문화로서의 음악과 함께 일반 대중의 즐거움을 위한 음악으로 나눌 수 있다. 음악 전체를 클래식(시리어스)과 팝으로 나누거나, 클래식, 팝, 민속 음악으로 나누는 분류가 널리 사용된다[52]。 여기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적으로 확산된 근대적인 상업 음악을 팝 음악으로 정의하고 그 역사를 다룬다.

미국은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이민 국가이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 17세기부터 유럽 각국에서 많은 이민자가 유입되었고, 아프리카에서는 주로 노예로 흑인들이 카리브해 지역을 거쳐 북미로 끌려왔다. 이후 중남미와 아시아계 이민자들도 늘어나면서, 미국은 각기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가 되었다.

유럽에서는 19세기 후반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도시 노동자들이 여가 시간에 음악을 즐기기 시작했다[52]。 중산층 가정에서는 쉬운 반주로 부르는 노래(파라 뮤직)가 피아노나 기타 반주로 불렸으며, 이는 현재 각국의 민요로 알려져 있다[53]。 남성들의 휴식 공간이었던 뮤직홀에서 열리는 연극의 노래나 술집, 카페에서 불리는 샹송도 인기를 끌었다. 코믹 오페라나 오페레타 등도 이 시기에 많이 작곡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사교 댄스와 이를 위한 음악도 성행했다. 이러한 유럽의 대중 음악은 그대로 미국의 도시로 유입되어 미국 대중 음악의 뿌리 중 하나가 되었다[52]

미국 농촌 지역에는 유럽 각국의 민속 음악이 이민자들에 의해 그대로 전해졌다. 초기에는 영국, 독일, 아일랜드, 이탈리아, 폴란드, 러시아 등 다양한 민족들이 자신들의 고유 음악을 연주했으며, 이 역시 미국 대중 음악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북미의 흑인 노예들은 대부분 서아프리카 출신으로, 카리브해 지역을 거치며 약 100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54]。 서아프리카 음악의 특징인 폴리리듬과 강렬한 리듬감은 유지되었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서 백인들과 함께 노동하며 음악적으로 융합되어 하바네라와 같은 카리브해 지역 특유의 장르를 만들어냈다[53]。 남미에서도 백인과 흑인 음악의 혼합으로 삼바나 탱고 같은 장르가 탄생했다. 이러한 혼합 음악 역시 미국 대중 음악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다양한 배경의 음악들이 미국 땅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미국만의 독특한 음악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유럽 음악을 그대로 연주했지만, 1750년경 동부 해안의 찬송가 문화 속에서 아마추어 작곡가들이 독자적인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흐름은 잠시 주춤했으나 남부로 퍼져나가 복음성가와 유사한, 기억하기 쉬운 반복구를 가진 찬송가를 탄생시켰다. 유명한 "어메이징 그레이스"도 1800년대 초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55]

도시에서는 유럽의 뮤직홀 문화가 민스트럴 쇼(백인이 흑인 분장을 하고 연기하는 인종차별적 희극)로 변형되어 인기를 끌었다. 순회 공연단이 미국 전역을 돌며 공연했고, 이는 가난한 백인 이민자들이 해방된 흑인 노예들에게 가졌던 불만을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스티븐 포스터는 매력적인 멜로디와 인상적인 후렴구("훅")를 가진 곡들을 만들어 후대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미국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다.[56]

농촌 지역, 특히 남동부 애팔래치아 산맥 주변에서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민요 및 무곡이 미국 음악의 기반이 되었다. 초기에는 피들(바이올린)이나 기타로 반주되었으나, 점차 흑인 음악의 영향을 받아 블루스적인 감각과 아프리카 기원의 악기인 밴조를 도입하고, 스위스의 요들이나 체코의 폴카 요소까지 받아들이며 올드 타임, 블루그래스, 힐빌리, 컨트리 등으로 발전하는 장르의 기초를 마련했다.[57]

흑인 사회에서는 18세기 후반부터 기독교가 전파되어 찬송가로 예배를 드렸다. 그들은 고유의 음악적 전통을 바탕으로 활기찬 리듬, 교창(콜 앤드 레스폰스), 외치는 듯한 창법 등을 사용하여 매우 열정적인 형태로 예배를 드렸다고 전해진다.[58] 1863년 노예 해방 이후, 백인 주도로 유럽 찬송가 풍의 화성을 붙여 악보로 판매한 흑인 영가가 유행했지만, 이는 순수한 흑인 음악과는 거리가 있었다. 반면, 흑인 고유의 리듬감과 창법을 특징으로 하는 노래는 가스펠이라는 이름으로 발전했다.[59] 또한 노예 해방 후 남부 농업 지대의 흑인들은 억압 속에서 느낀 개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노래로 블루스를 발전시켰고, 기타 반주와 함께 유럽의 화성 구조를 익혀나갔다.[60][61]

뉴욕의 악보 출판사들은 1880~90년대에 대중음악을 상품화하는 시스템을 확립했다. 이 시스템은 유행할 만한 곡을 작사가와 작곡가에게 의뢰하여 만드는 '프로듀스'와, 이를 대중에게 알리고 유행시키는 '프로모션'을 핵심으로 했다. 프로모션을 위해 인기 연예인에게 곡을 부르게 하고 대가를 지불하는 '페이올라(payola)' 방식도 사용되었다. 이러한 상업 활동 기반을 다진 악보 출판 업계를 틴 팬 앨리(Tin Pan Alley)라고 부른다. 이는 "양철 냄비 골목"이라는 뜻으로, 각 회사에서 판매원(플러거)들이 실제 연주를 곁들여 악보를 판매하며 매우 시끄럽고 활기찼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틴 팬 앨리에서 만들어진 곡들은 주로 8마디 4행, 총 32마디 형식을 표준으로 삼았다. 출판사는 악보를 팔고, 음반 회사는 오케스트라 반주로 녹음하여 한 면에 한 곡씩 담은 싱글 음반으로 발매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렇게 생산된 음악이 '대중가요(포퓰러 송)'로 불리며, 틴 팬 앨리는 미국 대중음악의 주류(메인 스트림)를 형성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대중음악은 바로 이 틴 팬 앨리와 대중가요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틴 팬 앨리 스타일의 상업주의는 미국 대중음악의 특징이 되었다.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미국에서는 특정 음악이 자연스럽게 대유행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악보 회사나 음반 회사가 기획하여 유행시키는 음악이 주류를 이루는 상황이 지속되었다[62]。 물론 의도치 않게 히트하는 곡도 있었고 기획이 실패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뉴욕의 음악 회사가 상업적으로 유통시키는 음악이 곧 미국 대중음악이라는 흐름이 이때 확립되었다. 때로는 하와이나 중남미의 이국적인 음악을 도입하여 대중의 흥미를 유지하기도 했다. 실제로 아르헨티나 탱고의 전성기는 틴 팬 앨리의 전성기와 같은 1920~30년대였다.

그 무렵, 민스트럴 쇼를 대신하여 보드빌이라는 작은 극장이 도시에 생겨났다. 보드빌은 음악 공연뿐 아니라 서커스 곡예, 유명 인사 초청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가족 단위 오락 공간이었다. 토니 파스터(:en:Tony Pastor)와 같은 인물들이 이러한 오락 공간을 미국 전역에 제공하는 데 기여했다[63]。 보드빌에서는 틴 팬 앨리가 만든 대중가요가 순회 공연을 통해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가며 주류 음악의 유행을 이끌었다.

틴 팬 앨리는 1920~3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당시 히트곡 대부분은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소수의 작곡가와 작사가 콤비가 만들어냈다. 조지 거슈윈과 아이라 거슈윈, 리처드 로저스오스카 해머스타인, 로저스와 로렌스 하트 등이 대표적이다. 보드빌의 자리를 이어받은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댄스 오케스트라 전속 가수들도 틴 팬 앨리 노래의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거슈윈과 로저스 역시 많은 유명 뮤지컬을 남겼다.[64]

20세기 초, 흑인 음악인 래그타임과 블루스가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래그타임은 싱코페이션(당김음)을 많이 사용하는 음악으로, 민스트럴 쇼의 노래에서 발전했다.[55] 1900년 전후에 활동한 흑인 피아니스트 스콧 조플린은 1899년 "메이플 리프 래그", 1902년 "엔터테이너"를 발표하며 '래그타임의 왕'으로 불렸고, 래그타임은 큰 인기를 얻었다. 어빙 벌린의 "알렉산더스 래그타임 밴드"(1911)는 래그타임 곡은 아니었지만, 래그타임의 인기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19세기 말 미국에서 가장 유명했던 음악가는 '행진곡의 왕' 존 필립 수자였다.[55] 미국 취주악은 남북 전쟁 시기에 발전하여 19세기 후반에는 박람회장이나 공원에서 연주하는 상업 밴드가 성행했다.[65] 세계적으로도 19세기 말은 취주악의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66] 수자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미국의 취주악은 아마추어에게까지 퍼져나갔고, 20세기 초에는 댄스 밴드도 크게 유행했다.[66]

1900년대에는 뉴올리언스의 해방된 흑인 노예들이 시작한 브라스 밴드가 독특한 스윙 리듬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백인 밴드들이 이를 모방하거나, 흑인 밴드들이 댄스홀에 고용되면서 재즈가 탄생했다. 재즈는 블루스와 래그타임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0년대부터 1920년대에 걸쳐 산업 구조 변화로 남부 흑인들이 북부로 대거 이주하면서 많은 재즈 뮤지션들이 시카고로 옮겨갔다. 이 시기에 천재 트럼펫 연주자 루이 암스트롱이 등장하여 모든 재즈 연주자와 편곡자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기간을 재즈 시대라고 부른다.

재즈는 점차 백인들에게도 모방되었고, 백인들로만 구성된 악단도 등장했는데, 이는 스윙 뮤직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빅 밴드 스타일이 확립되고 틴 팬 앨리도 재즈를 수용하면서 많은 음반이 인기를 얻었고, 재즈와 스윙 뮤직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주요 대중음악 장르 중 하나가 되었다.

1920년대, 음반 회사들은 '힐빌리'라는 이름으로 남부 백인 대중을 겨냥한 미국의 피들 음악과 민요 음반을 발매했다. 미국 민요에 뿌리를 둔 멜로디와 주류 음악이 다루지 않던 고독, 빈곤, 향수 등을 노래한 가사가 공감을 얻었다. 영화의 등장 이후 서부극에서 카우보이 복장으로 노래하는 가수들이 인기를 끌면서 서부 개척 시대에 대한 향수와 시골 생활에 대한 동경이 이 장르의 특징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애국심이 고조되면서 힐빌리 음악은 전성기를 맞았다. '힐빌리'는 원래 동남부 산악 지대 출신에 대한 경멸적인 표현이었기 때문에, 이후 '컨트리 앤 웨스턴'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69]

음악 전달 매체는 1877년 토머스 에디슨레코드 발명으로 큰 변화를 맞았다. 초기 레코드는 원반이 아닌 실린더 형태였으며, 녹음은 전기 방식이 아닌 큰 확성기에 소리를 불어넣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음향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악기를 다른 방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에디슨은 레코드 회사를 설립했고, 많은 가수들이 보드빌에서 유행했던 곡들을 녹음했다.

다음으로 중요한 변화는 라디오의 등장이었다. 레지널드 페센덴은 1906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세계 최초의 라디오 방송으로 평가받는 송출을 했다. 그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의 "라르고" 레코드와 자신의 바이올린 연주 및 노래("O Holy Night"), 성경 낭독을 방송했다. 이후 실험적인 방송들이 이어졌고, 최초의 정식 공공 및 상업 방송은 1920년 11월 2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의 KDKA 방송국에서 시작되었다[70]。 당시 라디오 출연은 무보수였지만, 가수들은 인지도를 높일 기회로 여겨 출연을 원했다. 라디오의 등장은 가정 내 음악 감상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빅 밴드 연주에 맞춰 집에서 춤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영화는 19세기 말에 발명되었고, 초기 무성 영화 시대에도 라이브 연주가 곁들여졌지만, 1927년 유성 영화의 등장은 영화 음악을 필수 요소로 만들었다. 미국 할리우드에서는 당시 주류였던 후기 낭만파 음악을 기반으로 한 심포닉 스코어가 영화 음악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동시에 뮤지컬 영화도 탄생하여 불황과 전쟁으로 지친 서민들에게 꿈과 위안을 선사했다.

마이크로폰의 등장은 미국 대중가요 창법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마이크를 통해 미세한 숨소리까지 전달할 수 있게 되면서, 이전의 오페라처럼 큰 성량으로 노래하는 방식 외에 청중에게 속삭이듯 노래하는 방식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창법을 크루닝 창법이라고 하며, 빙 크로스비가 그 선구자로 꼽힌다.[72][7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틴 팬 앨리는 유행을 주도하는 힘을 잃고 자발적인 유행을 따라가는 입장이 되었다.[52] 전쟁 중 빅 밴드 편성이 어려워진 재즈는 기교적인 솔로 연주 중심의 비밥으로 변화했지만, 이전과 같은 대중적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54] 이러한 상황에서 블루스에 일렉트릭 기타를 도입하고 비트를 강조하며 재즈와 가스펠 요소를 결합한 리듬 앤 블루스(R&B)가 흑인 사회에서 생겨났고, 이는 흑인뿐 아니라 백인 젊은이들에게도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 이 R&B를 기반으로 컨트리 음악과 대중음악 요소가 융합된 음악이 1950년대 중반 백인들 사이에서 등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로큰롤이다. 이후에는 줄여서 록이라고도 불렸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초기 록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록은 젊은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지만, 인기 디스크 자키와 음반 회사의 유착 관계(페이올라 스캔들)가 드러나면서 상업성에 대한 실망감이 커졌고, 1960년대 들어 급격히 침체되었다. 이 시기에는 미국 민요와 컨트리 음악에 뿌리를 둔 포크송이 유행했다. 그러나 영국의 비틀즈롤링 스톤스가 자작곡을 앞세워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면서(브리티시 인베이전), 록은 다시 활력을 되찾았다.

록 유행의 배경에는 미국 사회의 인종 갈등과 전쟁 이후 분출된 해소의 욕구가 있었다. 백인 젊은이들의 불만을 해소할 문화적 요소가 기존 백인 문화에는 부족했고, 흑인 하위문화의 가치관을 백인 젊은층이 대거 수용하는 전례 없는 현상이 록의 유행으로 나타났다. 1960년대는 세계적으로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과 반전 운동이 거셌던 시기였으며, 록의 유행은 이러한 시대정신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1960년대 후반, 록은 두 번째 전성기를 맞이하며 다양한 장르와 융합을 시도했다. 사이키델릭 록, 프로그레시브 록, 포크 록, 블루스 록, 하드 록 등이 이 시기에 등장했다. 초기에는 백인 빈곤층의 음악으로 여겨졌던 록은 점차 지적인 색채를 띠며 더 넓은 사회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핑크 플로이드, 에릭 클랩튼, 레드 제플린, 딥 퍼플 등 현재까지도 '록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그룹들이 이 시기에 활동했다.

록은 전 세계 대중음악에 영향을 미쳐, 영미권 외 국가에서도 록의 영향을 받은 장르들이 생겨났다. 프랑스에서는 기존 샹송과 구별되는 예예(Yé-yé)가 등장했고[74], 일본에서는 그룹 사운즈와 뉴 뮤직이 탄생했다.[75] 다만 대부분의 동구권 국가에서는 록을 서구의 퇴폐적인 음악으로 간주하여 탄압했기 때문에, 록의 영향력은 지하에서 이어졌다.[76]

그러나 1970년대 들어 오일 쇼크로 인한 불황, 미국 음악 산업의 집중화, 상업적 성공 가능성이 높은 가수 위주의 제작 경향 등이 맞물리면서 음악계는 다시 상업주의로 회귀했다. 디스코 음악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상업주의에 반발한 젊은이들은 펑크 록을 지지했지만, 섹스 피스톨스의 해체와 함께 펑크의 열기는 사그라들었다. 하드 록에서 파생된 헤비 메탈과 펑크 록에서 파생된 뉴 웨이브가 어느 정도 지지를 얻었지만, 음반 회사의 의도에 맞춰 상업적인 곡을 만드는 록의 경향은 '산업 록'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음악 산업 전체의 침체를 가져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80년대에는 카리스마 있는 소수의 가수를 뮤직 비디오를 활용하여 집중적으로 홍보하는 전략이 성공을 거두었다. 마이클 잭슨, 마돈나, 프린스 등이 대표적인 예이며, 이들의 성공으로 음악 산업은 다시 활기를 띠었다. 헤비 메탈 역시 MTV와 같은 음악 전문 채널의 지원을 받아 폭넓은 인기를 얻었고, CD의 등장은 음반 시장 전체의 성장을 이끌었다. 이러한 경향은 1990년대까지 이어졌다. 80년대 초반 월드 뮤직의 유행, 80년대 중반 이후 힙합의 부상 등 비백인 문화의 영향력도 커졌지만, 전반적으로 새로운 장르의 탄생보다는 기존 장르의 통합과 성숙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80년대 중반 이후 동유럽 민주화 운동과 냉전 종식으로 동구권 음악도 접할 수 있게 되면서 음악적 통합의 범위가 더욱 넓어졌다.[74]

1990년대는 CD 시장의 호황으로 시작했지만, 1995년 윈도우 95 출시 이후 인터넷과 휴대 전화가 폭발적으로 보급되면서 음악 소비 방식은 급격하게 변화했다. 음악은 인터넷, 휴대 전화와 소비자의 시간을 두고 경쟁하게 되었고, 200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CD 판매량은 급감했다.

2008년 스웨덴 기업 스포티파이 테크놀로지가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인 스포티파이를 시작했다. 이는 불법 복제 및 불법 음원 유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였다. 스포티파이는 2011년 미국 시장에 진출했고, 2019년에는 전 세계 유료 회원 수가 1억 명을 돌파하는 등 스트리밍 서비스 시대를 열었다.

2010년대 이후에는 힙합과 R&B가 음악 차트를 장악했으며, 2017년 미국에서는 록을 제치고 가장 큰 음악 장르로 부상했다.

12. 일본 음악사

일본의 음악사는 다양한 종류의 음악이 혼재되어 있어 통사적으로 정리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각 음악 간의 연결 관계와 통사로서의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선사 시대와 고대 일본 열도의 음악에 관해서는 『고사기』, 『일본서기』 등의 문헌과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조몬 시대에는 악기로 추정되는 토제품이나 토령 등이 제사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야요이 시대에는 청동제 동탁이 제사의 중심이었고 와곤과 같은 악기도 출토되었다.

5세기부터 8세기 무렵까지는 한반도중국 등지에서 음악이 활발히 수입되었다. 아스카 시대인 701년 다이호 율령에 의해 황실 음악 기관인 아가쿠료(雅楽寮)가 설립되었고, 이곳에서 가가쿠(雅楽, 아악)가 발전했다. '가가쿠'라는 명칭은 중국의 '야악'(雅樂)에서 유래했지만, 중국의 야악이 본래 유교 의례 음악을 지칭하는 것과 달리 일본의 가가쿠는 더 넓은 범위의 장르와 악기를 포괄한다. 초기 가가쿠는 일본 고유 음악인 '와가쿠'(倭楽), 한국의 삼국시대 음악인 '삼한악'(三韓楽), 당나라 음악인 '당악'(唐楽)을 주요 세 장르로 포함했으며, 이 외에도 다양한 아시아 지역의 음악 형식이 공존했다. 8세기에서 11세기에 이르는 가가쿠 악보가 상당수 현존하는 것은 당시 아시아 음악사에서 독특한 점이다.

9세기에는 가가쿠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는데, 중국계 음악인 '당악'과 한반도(삼한악) 및 발해(渤海, 복해악)계 음악인 '고마가쿠'(高麗楽)로 구분하는 방식이 정립되었다. 당악은 '좌방악'(左方)으로, 고마가쿠는 '우방악'(右方)으로 불렸다. 이 구분은 명확했지만 엄격하지는 않아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긴 헤이안 시대(794–1185) 동안 궁정은 각종 행사에서 가가쿠를 적극 후원했으며, 이 시기에 사이바라(催馬楽)나 로에이(朗詠) 같은 새로운 성악 장르가 등장했다. 가가쿠는 다양한 악기로 구성된 대규모 합주 형태로, 일본 전통 음악에서 가장 큰 편성에 속한다. 헤이안 시대 초, 한반도의 정세 변화와 견당사 파견 중지로 외래 음악 유입이 줄어들면서, 기존의 외래 음악과 일본 고유 음악이 당시 일본 사회에 맞게 재정비되어 일본식 가가쿠가 성립되었다.

가마쿠라 시대무로마치 시대에는 고대부터 이어져 온 일본 음악의 흐름을 계승한 음악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는 사루가쿠(猿楽)가 발전했으며, 이는 이후 노(能)와 교겐(狂言)으로 이어졌다. 이후 기리시탄을 통해 오라쇼(オラショ) 등 서양 음악이 일부 유입되기도 했으나, 에도 시대의 쇄국 정책 아래 일본 고유의 음악, 즉 방악(邦楽)이 독자적으로 발전했다. 서민들 사이에서는 속악(俗楽)으로 불리는 조루리(浄瑠璃), 지우타(地歌), 나가우타(長唄), 소쿄쿠(箏曲) 등이 크게 유행했다.

메이지 시대 이후, 학제 반포와 함께 음악 취조 걸(音楽取調掛)이 설립되는 등 국가 주도로 서양 음악 도입이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여전히 방악이 대중적이었으나 점차 서양 음악을 즐기는 인구가 늘어났다. 메이지 후기에는 다키 렌타로가 일본어 가사를 붙인 가곡과 피아노곡을 작곡하는 등 일본 작곡가에 의한 서양 음악 창작이 시작되었고, 일본의 대중음악인 유행가와 가요곡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

다이쇼 시대쇼와 시대에는 야마다 고사쿠, 노부토키 기요시 등이 일본의 민족적 정서와 근대 음악 어법을 결합한 본격적인 서양 음악 작품을 선보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마쓰다이라 요리노리, 시바타 미나오 등이 12음 기법을 비롯한 현대 음악 기법을 도입했으며, 서구 팝 음악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민요 음계 등을 활용한 엔카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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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서적 두길 서양음악사 2
[80] 서적
[81] 서적 서양음악사 - 19세기 음악세계
[82] 서적 서양음악사-19세기 음악세계
[83] 서적 두길 서양음악사 나남
[84] 서적 서양음악사-19세기 음악세계
[85] 서적 두길 서양음악사 나남
[86] 백과사전 서양음악의 역사 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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